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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소설을 통한 민족정체성의 확인
―김용식의 장편력사소설 《설랑자》를 중심으로
장춘식
1. 들어가는 말
우리의 력사소설가 김용식이 타계한지도 어언 20년이 되여간다. 우리 문단에서 주로 력사소설을 쓰다가 간 작가는 아무래도 김용식이 유일한것 같다. 처녀작이라 할수 있는 《밤길》(1957)도 야사적인 성격이 짙거니와 장편소설 《산골녀성들》(1984) 등 몇작품을 제외하면 김용식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력사에서 취재하고있다. 중편소설 《규중비사》(1981), 장편소설 《설랑자》(1984년), 소설집 《무영탑》(1987)에 수록된 중편소설 《고리백정의 사위》, 《무영탑》, 《보은단》 등은 모두 력사소설이다. 그밖에도 김용식은 《경박호의 유래》, 《숯구이총각》 등 수십편의 구전설화를 수집,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현재까지 김용식의 소설에 대한 연구는 기본적으로 중편소설 《규중비사》에 편중되여있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얼마 안되는 김용식문학에 대한 평론이나 연구론문중 김동훈의 《김용식론》을 제외한 모든 글이 《규중비사》를 다루고있다. 문룡일, 《중편소설 <규중비사>의 언어사용에 대하여》, 《문학예술연구》, 1982년 4호; 김동훈, 《김용식의 중편소설 <규중비사>에 대하여》, 《문학평론집》, 민족출판사 1982; 김동훈, 《김용식과 그의 <규중비사>(한문)》, 《중남민족학원학보》, 1984년 6호; 김도권·박경식, 《중편소설 <규중비사>의 예술성과》, 《문학과 예술》, 1985년 6호; 김창대, 《김용식과 그의 <규중비사>》, 《료녕신문》, 1987.5.12 등.
그리고 조성일·권철 주편으로 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도 김용식의 소설은 《규중비사》 한편만을 비중있게 다루고있다. 《규중비사》는 작가가 1956년에 2만자미만의 단편소설로 썼다가 발표하지 못하고 1979년에 다시 중편소설로 확대시켜 1980년 문예월간지 《연변문예》(1-10호)에 련재하였으며 다음해인 1981년에 료녕인민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하면서 약간의 수정을 거쳤다고 한다. 김용식, 《<규중비사> 창작후기》, 《규중비사》, 료녕인민출판사, 1981 참조.
이 작품에 대한 론의는 김동훈의 《김용식의 중편소설 <규중비사>에 대하여》에서 시작되였다고 볼수 있다. 김동훈은 이 작품에 대해 《이미 붕괴기에 처한 조선봉건사회말기의 암담한 현실과 사람을 잡아먹는 썩어빠진 봉건례교의 죄악상을 적라라하게 폭로비판하고있다.》며 긍정적으로 보고있다. 그리고 인물형상창조에서, 소설적구성과 력사언어의 사용 등의 측면에서도 상당히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하고있다.
김도권·박경식의 《중편소설 <규중비사>의 예술성과》에서는 주요 작중인물들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인물형상부각의 여러가지 특징들을 밝혀내고있다. 《(리조말엽시기) 력사적생활상에 기초하여 생동하고도 풍만한 인물형상들을 창조함으로써 오늘 우리 독자들의 시대적미적요구에 만족을 주었을뿐더러 필요한 력사적지식도 주고있》다는것이 이 론문의 핵심론점이다. 주로 형식적측면에서의 평가가 되겠는데 론문에서는 작가가 소설의 소재가 된 구전설화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함으로써 일부 한계를 드러냄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로 볼수가 있다. 특히 다양한 인물성격의 창조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고있다.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는 이상 두 론문의 론점들을 종합하면서 좀더 진일보한 일면도 보인다. 《이 소설은 한 봉건사대부가문의 규방에서 일어난 애정비극을 통하여 리조말엽의 암담한 사회상과 사람을 잡아먹는 썩어빠진 봉건례교의 죄악상을 적라라하게 폭로규탄하고있다.》는 주제파악은 앞의 두 론문에서 지적된 견해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류원하와 백란당의 형상을 통하여 당시 인민대중의 개성해방의 지향을 예술적으로 일반화하였으며 봉건적인 례교도덕에 비판의 채찍을 안기였다.》는 서술에서는 좀더 진일보한 측면을 엿볼수 있다. 형식적측면에서는 《인물형상창조에서 작자는 당시의 력사상황에 대한 깊은 연구와 인간생활에 대한 다각적인 관찰에 근거하여 인물개성의 다양성을 멋지게 살렸다.》고 하여 상기 두 론문의 관점들을 수용하고있다. 구성에서의 장회체형식, 인물의 정서에 알맞는 시구의 적절한 삽입, 언어사용의 력사성과 생동성 등도 김동훈의 주장을 수용한것으로 볼수 있다. 단 《백란당을 살해한 극악한 흉수를 절당의 중으로 설정하고있기에 류원하와 백란당의 애정비극의 심각한 사회적근원을 날카롭게 폭로하는데 손색이 있》다는 결함의 지적은 어느 정도 새로운 견해로 볼수가 있다. 주제설정과 인물설정의 괴리에 의해 빚어진 한계를 지적하고있는셈인데 이는 이 작품의 가장 뚜렷한 약점이라 할수도 있다.
《규중비사》에 대한 이상 세 론문의 평가는 기본적으로 수긍이 간다. 그러나 이 작품이 20세기 80년대에 나온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 봉건적질곡에서 벗어나려는 개성해방의 욕구 표현이라든지 봉건가부장제에 대한 반항의식 같은것이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한 주제는 20세기초기 신소설시대부터 줄곧 다루어져왔고 이 작품이 그러한 작품중에서 특별히 빼여난 작품도 아니기때문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다른곳에 있다.
아래에 《설랑자》에 대한 분석에 곁들여 그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확인해보고자 한다.
2. 장편력사소설 《설랑자》의 가치와 의미
1) 작품의 줄거리와 주제
이 작품은 신문이나 잡지에 련재되지는 않고 1984년에 료녕인민출판사에 의해 단행본으로 간행되였는데 발단, 전개, 위기, 대단원의 플롯구조를 이루고있다. 발단은 당연히 리정승의 셋째아들 리진성의 혼사를 위한 미녀구혼으로 시작되며 그것이 설부용이라는 천하절색 미녀가 나타남으로써 전개되다가 리정승의 두 박색 며느리와 무신 최유염의 음모에 의해 혼사가 깨여지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남녀 두 주인공이 천신만고끝에 우연히 상봉하고 또 최유염과 두 박색 며느리의 음모가 밝혀지면서 두 주인공이 백년가약을 맺는 대단원을 이루게 되는것이다. 이것이 이 작품의 갈등과 해결의 양상이고 기본적인 줄거리가 되기도 한다.
줄거리만 보고도 전기적인 성격이 짙은 소설임을 금방 알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일차적으로 관심을 끄는 부분은 주인공들의 유교적인 도덕과 학문의 수련과정이다. 리곡이라고 하는 고려시대 유명한 선비와 그 안해의 유교적인 수련과정을 전기적인 경력을 통해 보여준것이다. 특히 주인공 리진성이가 방랑중 보고 듣고 느낀 사건들, 가령 사냥군 내외의 죽음, 갓바치 로인의 비참한 삶, 그리고 청그릇쟁이 강령감의 비명횡사(자살), 이 모든것이 영양고을 원의 폭정과 관련되며 또 이 영양현감이 무신세력인 최유염일파의 심복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회비판적인 요소가 많이 드러난다 하겠다. 따라서 이러한 주제설정은 당연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수 있다. 작가 나름대로의 현실인식과 력사인식에 따라 력사의 진실을 파내고 해명하는것, 그것을 통하여 력사를 재해석하는것은 력사소설의 중요한 사명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정사가 아닌 야사의 시각에서 실재한 력사인물의 실상을 재현한것은 또다른 의미를 지닌다. 한 인간의 학문적, 도덕적 수련의 과정은 그것이 아무리 먼 력사속의것이였다고 해도 오늘의 우리에게 거울이 될수가 있기때문이다. 그것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말이다. 거기에 인간평등의 립장에서 량반의 학정과 수탈행위를 비판한것 또한 의미있는 주제해명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좀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부분은 이같은 기본플롯의 흐름에서 약간 빗나간다. 악한의 음모에 의해 헤여진 두 남녀가 방랑생활을 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들이 작품의 중요내용을 이루고있기때문이다. 물론 이런 에피소드들은 주인공의 학문적, 도덕적 수련의 경력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본플롯의 흐름에서 벗어난 에피소드들이 너무 많은 분량을 차지하기때문에 작품의 긴장감은 다소 저하된다. 따라서 이것만을 본다면 서사구조로서는 잘 짜여졌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이러한 서사전략을 선택했을가?
2) 기본주제밖의 정보들이 가지는 의미
작품의 긴장감저하를 대가로 치르면서까지 이러한 에피소드식 서사전략을 선택한 리유는 상기 기본주제밖의 정보에 중요한 의미를 두었다는 말이 될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에피소드에 담겨진 정보의 가치는 어디에 있으며 이 작품에서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가?
① 조선의 아름다운 산천
이튿날 아침, 전주를 떠난 일행은 탄현, 은진, 공주, 천안, 미륵당, 과천을 지나고 한강을 건너 다시 한양, 신원, 고양, 파주까지 이르기에 옹근 닷새가 걸렸다.
파주에서 하루밤 자고 래일 새벽에 림진강만 건너면 송도까지 당날에 빠듯이 대여갈수 있었다. 김용식, 《설랑자》, 료녕인민출판사, 1984, 111쪽. 아래 례문에서 쪽수만 표시한것은 모두 같은 책에서 인용한것임.
인용은 신랑 리진성일행이 서남부지역의 남원에서 출발하여 전주를 거쳐 송도에 이르는동안 경과하게 될 지리적환경에 대한 설명이다. 소설에서는 진성이와 부용이의 방랑과정을 번갈아가면서 서술하는데 시점이 바뀌는 시작지점에서는 거의 번마다 이런식으로 경과한, 혹은 경과하게 될 지리적상황을 자상히 제시하고있다. 그러니까 작품에서는 주인공들의 방랑생활이 주요내용을 이루는셈인데, 상기 인용에서처럼 이들이 움직이는 경로에 따라서 조선땅 남부지역의 지리와 아름다운 산천경관들이 펼쳐진다. 심지어 《북관땅이란 함길도(함경도)를 이름인데 함흥으로부터 길주, 명천, 단천, 북청을 지나 썩 더 들어가서 삼수, 갑산까지이지요. 그리고 서관땅은 서경(평양)에서 대동강, 청천강을 건너 의주, 압록강까지 이르는 평안도 일대를 이름이지요.》 작품 300쪽.
라는 식으로 주인공의 행적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지역의 지리적상황마저 교묘히 삽입하고있다. 게다가 이런 서술이나 묘사들은 그냥 언급이 된 정도를 넘어 그러한 산천경개와 지리적인 상황들을 주인공의 심리적인 상태와 련관시켜 최대한 아름답게, 절실하게 그려낸다.
그중에서도 금강산에 대한 묘사는 자연절경 자체뿐만아니라 금강산에 관련된 력사와 주인공의 느낌, 감회들이 동시에 제시됨으로써 조선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감탄과 정서적인 도야의 묘미까지를 독자들에게 선물해준다.
진성이는 만폭동, 옥류동, 구룡연, 만물상을 두루 돌아보고 비로봉에 올랐다.
별유천지비인간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인듯하다. 내려다보니 천봉만학인데 혹은 뾰족하고 혹은 뭉툭하고 혹은 날카롭고 혹은 무디고 혹은 울퉁불퉁하고 혹은 얼기설기하고 혹은 기치창검을 벌려세운듯 기상이 엄엄하고 눈이 아찔했다. 실로 하늘의 신선, 지옥의 귀신들이 일시에 뛰쳐나와 발밑에 엎딘것과도 같아서 스스로 전률을 느끼기도 하였다. 작품 120쪽.
작가는 이런식으로 유서깊은 경상도 안동의 락동강류역에 있는 하회마을의 기름진논벌이며 대왕포, 락화암, 평제탑, 조룡대, 정사암, 삼충사… 등 백제의 옛땅 부여의 명승고적이며 해인사에서 떠나 북상하다가 송도 가는 길과 남원 가는 길이 갈라지는 충청도 괴산까지 사이에 있는 유명한 화양구곡의 절경 등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묘사하고있다. 그렇다면 조선의 아름다운 산천에 대한 작가의 이와 같은 애정어린 묘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것일가?
주지하는바와 같이 산수에 대한 애착은 인간공유의 감정이며 특히 동양인들은 더구나 산수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있어 고대 중세의 문학작품에는 산수에 대한 찬미의 시구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따라서 작가가 이런 감정을 서사속에 담아놓은것은 별로 이상한것이 아니라 하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아름다운 산수를 절찬한데는 또다른 의미가 있는것 같다. 상기 인용에서는 빠졌지만 금강산에 대한 중국 송나라때 시인 소동파의 《원컨대 고려국에 태여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았으면》라는 글귀를 인용한데서 이점은 분명해진다. 그러한 산수에 뿌리를 둔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표현한것이다. 주인공들의 방랑경로를 따라가며 지명을 렬거하고 특정지역의 풍부한 물산에 대해 넌지시 드러낸것 또한 같은 리치로 리해된다.
② 고려시대의 력사와 전설
조선의 아름다운 산수에 대한 애정어린 묘사에 우리 민족의 뿌리가 닿아있는 조선땅에 대한 자긍심이 표현되였다면 전설과 력사적사실에 대한 제시에는 우리 민족의 문화적인 뿌리에 대한 탐구의 의미가 담겨졌다 할수 있을것이다.
《설랑자》에는 수많은 력사사실들이 군데군데 삽입되여있지만 그중에서도 몽고병의 침입과 원나라와의 강화, 그에 의한 부마국 사실과 무신란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자세히 소개하고있다. 얼핏 생각하면 이 두 력사사건은 민족적인 자긍심 고양과는 무관한듯 하다. 두 사건 모두 치욕적인 력사거나 적어도 자랑스런 력사로 보기는 어렵기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두 사건이 고려시대 가장 중대한 사건중의 두 사건임을 부인할수가 없다. 게다가 무신란에 관련된 사건은 소설에서는 현재진행형으로서 여전히 그 영향이 존재하고있으며 소설의 기본서사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있다. 또한 두 사건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은 이 작품에서 작가가 설정한 주제, 즉 량반사회의 부패에 대한 비판에 리용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해 경상도 합천 해인사의 력사적연혁에 대한 소개는 좀더 민족의 긍지를 표현한 흔적이 보인다. 특히 8만대장경에 대한 감탄은 그러한 작가의 지향성을 잘 드러낸다.
(전략) 고종은 선왕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장경판 파는 일을 다시 시작하여 거국적인 역사로 옹근 16년만에야 각성을 보았던것이다. 그 수량은 실로 엄청나게도 방대하여 8만1천2백5십8판(1판은 량면임)으로서 1천5백12부, 6천7백9십1권에 달한다. 이는 세계불교사상 그 류례가 드문 거창한 업적으로서 조선민족이 력사상에서 쌓아올린 자랑스런 문화유물의 하나이다. 이 방대한 장경판은 각성된 그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해인사에 보존되여있다. 작품 276쪽.
전설과 야사의 리용은 두 부분에서 주목된다. 하나는 사냥군부부의 불우한 죽음, 갓바치의 처참한 삶, 청그릇쟁이의 자살 등으로 대표되는 관료의 학정과 수탈에 대한것이고 다른 하나는 망부석전설, 서낭당전설과 빚을 갚기 위해 위장결혼을 했다가 도망친 동서방의 새댁에 대한 이야기로서 이는 고려조 봉건사회에서 녀성들이 겪는 각이한 운명에 대한것이다.
무신세력의 학정과 수탈에 대한 비판이 작품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있음은 전술한바와 같다. 세 녀인의 전설(그중 동서방의 새댁의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으로 되여있음)은 당연히 주인공 설부용의 운명과 관련된다. 봉건사회 녀성들의 기구한 운명이 이들 녀인들 각자의 개인적인 원인보다는 남존녀비라는 불평등한 사회제도에 의해 기인된것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였음은 쉽게 간파할수 있다. 작품에는 이외에도 설총의 꽃임금에 대한 이야기, 자룽이와 아룽이의 전설, 마의태자의 고행전설, 《꽃흘레》전설 등 수많은 전설, 야화, 민화들이 삽입되여있다. 그리고 그러한 전설, 야화, 민화들은 작품의 주제의식에 직간접적으로 련관이 된다. 그러나 사실 이들 전설이 독자에게 남겨준 보다 궁극적인 영향은 주제의식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보다는 문화현상의 하나로서 전설 자체의 매력이 아닐가 한다. 이들 전설들은 민족적동질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고있기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앞의 몽고병 침입이나 부마국 사실, 무신란 등 어쩌면 별로 자랑스럽지 않은 력사사실들을 서술한것이라든지, 세 녀인의 전설을 비롯하여 수많은 전설, 야화, 민화들을 삽입한것은 결국 그러한 력사사실이나 전설, 야화, 민화에서 조선족독자들이 느끼는 민족적동질성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할수 있다. 대장경 목판제조의 력사적사실이나 고려시대 대외무역에 사용된 귀한 약재나 청자기에 대해 애정있게 표현한점에서도 이점은 확인된다.
③ 고려시대의 풍속과 문화
이 작품에는 고려시대의 풍속과 문화현상들이 대량 삽입되여있다. 세시풍속, 혼인풍속, 지역풍속, 서민생활풍속 등 고려시대 풍속의 총집합이라 하여도 대과는 없을것이다.
먼저 작품 발단부분에 나오는 삼월삼짇날의 풍속에 대해 작가는 《시골에서는 행세깨나 한다는 량가집 딸네와 며느리네도 이날 하루만은 숨막히는 규방을 벗어나 산좋고 물좋은 곳으로 삼삼오오 작반하여 화전놀이를 떠나가고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화전놀이에 나선 설생원과 그의 마누라 윤씨부인의 옷차림에 대한 묘사가 특히 인상적이다. 고려시대 옷차림의 특징들을 생생하게 그려낸것이다. 이는 고려시대 민속에 어두운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작가의 해박한 력사지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설부용의 결혼준비과정과 결혼식장면의 묘사는 더구나 종합적인 력사지식과 민속학지식을 필요로 한다. 작품에서는 먼저 신부쪽 결혼준비물에 대해 일일이 제시하고나서 초례청의 여러가지 민속들을 빈틈없이 그려낸다.
초례청은 안마당에 마련되였다. 멍석을 편 우에 돗자리를 깔고 초례상을 덩그렇게 차려놓았다. 한아름이나 되는 청자꽃병에다 싱싱한 청송, 록죽을 호함지게 꽂아놓았고 그 가지마다에 청실홍실을 아롱다롱 늘여놓았다. 그리고 나무로 깎아만든 기러기 한쌍이 청실홍실을 의지하여 거연히 앉아있다.
《서동부서》 하고 외는 홀기소리가 높이 울리자 관복 입고 사모 쓰고 흉배 띠고 목화 신은 신랑은 동쪽에 서고, 머리에 칠보족두리 쓰고 백수라삼으로 손을 가린 신부는 둘러리서는 녀인들의 부축을 받아 서쪽에 마주섰다.
그리고 계속 홀기소리에 따라 절차가 진행되는데 《신랑 일배, 신부 사배》로 맞절을 하고 교배잔을 나누는것으로 대례는 끝났다. 작품 53쪽.
얼마 안되는 묘사로 고려시대 혼인문화를 이처럼 생생하게 재생해놓은 작품은 그리 흔치 않다. 이어서 작품에서는 《문벌이 가당찮게 기운 혼인》때문에 딸의 장래를 걱정하는 윤씨부인의 심리에 련관시켜 고려시대의 무속신앙에 대해서도 잘 드러내고있다. 비록 다분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표현하고있지만 윤씨부인의 신앙심과 《유학만을 지고무상의 거룩한 존재로 숭상》하는 남편 설생원의 서로 다른 신앙의식을 대조적으로 제시함으로써 편견을 최소화한 점은 긍정해야 할것이다. 특히 아직도 무속신앙이 절대적인 미신행위로 비난받고있던 1980년대에 씌여진 작품이라고 할 때 이점은 더욱 높이 사야 할 부분이다. 나중에 해인사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운명과 련관시키면서 불교의 허위성을 유교의 현세적삶의 추구에 대조시켜 비판한것도 같은 시각에서 리해된다.
이와 같이 상층문화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최하층 백성의 생활문화에 대해서도 작가는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대표적인것이 설부용과 하녀 금단이가 남장을 하고 과객으로 공방울이네집에 들어섰을 때 방울이네집의 가난한 생활상에 대한 묘사가 되겠는데, 작가는 그러한 가난상을 드러낼 때에도 생활도구들, 오늘의 립장에서는 민속품이라 할수 있는것들을 일일이 제시하면서 생생한 화면으로 그려보이고있다.
고려청자의 제조기술에 대한 문화적인 제시 또한 마찬가지이다. 《… 그저 보기에는 찐득찐득한 흙을 주물러서 말랑말랑한 흙그릇을 맹글고 그 흙그릇을 또 음지에서 말려갖고 거기다가 여러가지 그림과 무늬를 그려넣어 약물에 푼 물감을 바른 다음 가마에 넣어서 불을 때면 불기운에 저절로 옥돌보다 더 곱은 빛이 나는 청그릇이 되니깐 누기나 그대로 하문 될것 같지만두 비방을 알아내지 못한 사람은 암만 그대로 하재도 안된다는기야. 그러므로 거기에 귀신이 붙었닥꼬 말하지 않갔나.》 라는식으로 갓바치로인의 입을 빌어 드러내고있는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과거제도에 대해 3-4년 한번 보는 정기과거제도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임금께서 친히 보는 과거, 즉 알성과로 나누어 자상히 설명하고있는것도 그러한 고려의 문화에 대한 작가의 지극한 관심을 보여준것이 분명하다.
이밖에도 작품에는 고려시대 풍속과 문화에 대한 묘사가 수없이 많이 나온다. 주인공 리진성이가 동해안을 따라 관동팔경을 두루 구경하고 명주땅에 이르러 정월대보름 명절날 달구경과 다리밟기 즉 답교 놀이에 참여하면서 그의 체험을 통해 이 두 민속놀이의 의미를 해석한것, 그리고 여기에 인용된 달노래며, 진성이가 신라의 옛땅인 령남에 들어서기전 령남에 대한 소개와 태백산을 넘으면서 유명한 가사 《청산별곡》을 인용한것, 또 《꽃흘가(헌화가)》와 수로부인 전설을 인용한것, 고려가요 《동동》, 《정읍사》와 그에 관련된 전설을 인용한것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이런 풍속도를 펼치면서도 주인공의 심리와 운명에 련관킴으로써 서사적인 합리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령산읍에 있는 령산장에서 경험한 소경의 피리소리, 각설이들의 타령(인용) 등도 이 지역의 지방풍속에 대한 묘사에 속한다.
한편 주인공 리진성이가 방랑길에 어느 부자집 머슴방에 류숙하다가 머슴 천서방이 들려준 남원 설랑자의 억울한 사연 이야기에 충격을 받고 밖에 나와 바람을 쏘이다가 소복입은 젊은 과부의 다듬이소리를 들으며 전날 결혼준비를 위해 어머니가 하던 다듬이소리를 련상, 다시 설부용이도 그렇게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다듬이질했을것이라 생각했다고 한것, 이 모든것은 여전히 하층사회의 민속문화와 안방 녀인네들의 민속문화의 드러내기로 판단되며 이는 민족적인 정서를 고양시키기 위한 서사적인 장치로 볼수 있다.
요컨대 작품에서는 이와 같이 고려시대 남도지역의 풍속과 문화의 제시가 대단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애정이 넘치고있다. 물론 이런 풍속과 문화의 표현은 방랑중에 있는 주인공의 환경과 운명에 다다소소 련관되여있지만 그렇다고 주인공의 운명을 결정할 필수의 에피소드로 볼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런 서사를 시도한것은 그 지향이 뚜렷하다 하겠다. 즉 이런 에피소드들에는 민족문화의 뿌리에 대한 확인과 고양의 의미가 충분히 담겨있는것이다.
④ 아름다운 민족어의 재현
문학이 언어의 예술이라는 명제는 영원히 유효하다. 이 명제는 《설랑자》에도 당연히 적용된다. 김용식 력사소설의 언어적인 우수성에 대해서는 다수의 평자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아직 더 류추해야 할 가치들이 존재한다.
가령 다음의 례문에서 개화기 이전까지 사용되다가 이제는 거의 사멸된 《하소서》체 존칭의 사용은 어떤 의미를 지닐가?
《귀신도 모르는 일을 소녀 어찌 알겠나이까. 불초녀식이 팔자가 기박하여 하늘이 미워하고 조물이 시기하와 이런 횡액을 덮어쓴가보옵니다. 이것이 아마도 소녀의 운수땜인가 하오니 아버님께서는 노여움을 참으시고 소녀의 한가지 소원만 풀도록 허락해주시옵소서.》(설부용의 말―인용자) 작품 67쪽.
이런 《하소서》체 존칭은 작품에서 흔히 볼수 있다. 이런 존칭의 사용은 적어도 다음 두가지 의미를 지닌것으로 보여진다. 그 하나는 고대 중세사회 인간들의 언어생활을 현실그대로 재생하고자 한 작가의 시도가 반영되여있다. 즉 언어사용의 력사성 확보를 위해서 작가는 이런 존칭을 사용한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해요》체나 《합니다》체의 존칭은 사용되였을것이다. 그러나 작품속에 이러한 《하소서》체를 사용함으로써 오늘의 언어생활과는 다른 고대 중세인들의 언어생활상을 보다 리얼하게 재현할수 있었다 하겠다. 다음으로 주인공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해준다. 주인공 설부용이 부모님과의 대화에서 전부 이와 같은 《하소서》체를 사용한것은 아니다. 인용문에서와 같이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전달할 때 주로 사용된것이다. 어쨌건간에 이런 존칭을 사용함으로써 력사소설로서 작품의 사실성이 확보된 점은 누구도 부인할수 없을것이다.
남도사투리의 적절한 사용은 또다른 특징으로 주목된다.
A 《우쩬사람인데 누길 찾아왔노?》
《다리 아파 좀 쉬여가자꼬 들렀당께요.》
《쉬여가자꼬?》
《예.》
《방이 누추해서 남을 들어오라기도 남새스럽당께.》
《별말씀 다 하시누먼요.》
《그럼 들어오랑께.》 작품 91-92쪽.
B 《천서방, 또 이얘기주머니나 좀 풀어보라꾸.》
《이얘기주머니가 이젠 밑창이 다 나뿌랬다 막.》
《아따 이얘기를 애꼈다가 죽을 때 가져갈라노.》
《아이구 심심해라, 얼른 한커리 하이소.》 작품 140쪽.
례문 A는 전라도사투리로 된 대화이고 B는 경상도사투리로 된 대화이다. 김용식이 경상도출신이고 15세에 중국에 들어왔다니까 경상도사투리는 그나마 많이 기억하고있을수 있다고 믿지만 전라도사투리마저 이 정도로 생생하게 재현해냈다는것은 그만큼 언어에 대한 작가의 탐구가 깊다는 말이 될것이다.
사투리의 리용이 문학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는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줄 안다. 몇마디 대화를 통해 인물의 개성과 신분, 지역적특성을 곧바로 표출할수 있는것이 사투리가 되기때문이다. 사투리의 사용은 이러한 문학작품에서의 일반적인 기능외에도 이 작품의 경우 민족문화의 사실적재현이라는 또다른 가치와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즉 사투리를 통하여 문화적측면에서 언어의 사실성을 획득한것이다. 이는 이민민족으로서 우리 조선족의 정체성확인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때문이다.
언어유희의 사용 또한 비슷한 리유에서 작품의 가치를 한층 높여준다 하겠다.
C 《옛날옛적에 갓날갓적에 까막까치 말할적에 호랭이 갓쓰고 무당춤 출적에…(후략)…》 작품 141쪽.
D 《저건너 영감 나무하러 가세, 등굽어 몬갈세, 등굽으면 기르마, …(중략)…대추는 다느이, 달면 엿, 엿은 붙느이, 붙으면 첩!》 작품 141쪽.
례문 C는 경상도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옛말을 하면서 자주 리용하는 말재주 부리기의 한 례이고 례문 D는 옛날 시골에서 흔히 들을수 있었던 말꼬리잇기 말재주로 흔히 아이들의 말배우기에 많이 리용되였었다. 모두가 서민예술의 범주에 속하는데 이러한 언어유희의 적절한 리용은 작품의 토속성을 살려주는 동시에 사투리사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화적사실성도 한결 강화시켜준다.
요컨대 대화에서의 《하소서》체 사용, 전라도사투리와 경상도사투리의 활용 그리고 서민예술로서 말재주의 적절한 리용 등은 우리말의 력사성과 문화적사실성을 강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민족정체성확인을 위한 문화적인 재료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하겠다. 언어는 문화를 탑재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요 미디어이기때문이다. 언어의 기능을 최대한 리용하였을 때 우리는 거기에서 가장 전형적인 민족적인 정서를 느끼게 되는것이다.
3) 《설랑자》와 《규중비사》의 비교
주제적측면에서 《설랑자》와 《규중비사》는 비록 전자가 고려시대 부패한 무신세력에 대한 비판, 민중지향형의 유교 도덕과 학문 수련을 핵심으로 하고있는 반면 후자는 봉건적인 례교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하고있어 얼마간의 차이를 보이고있으나 궁극적으로는 봉건제도에 대한 부정을 기본주제로 담고있어 큰 차이는 없어보인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의 중심의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게 사실이다.
《설랑자》에서는 기본주제외의 정보에 보다 많은 의미가 내포되여있기때문이다.
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앞에서 언급했던 《규중비사》의 가치문제에 되돌아가 보자. 주제적측면외에 봉건사회의 사회적인 모순과 인간관계, 상층계급의 생활풍습들을 리얼하게 재현한 점, 특히 대화언어에서의 《하소서》체의 사용과 기타 묘사에서의 력사감 등에 대해서는 론자들이 공동으로 인정하고있다. 또한 미스테리사건의 수사 및 단안(斷案)을 통하여 긴박감과 취미성이 강한 이야기를 정교하고 재미있게 꾸몄다는 점도 덤으로 지적할만하다. 이는 어쩌면 이 소설이 발표될 당시에 문화대혁명과 관련된 억울한 사건, 가짜 사건, 잘못된 사건을 바로잡는 운동이 한창 진행중에 있어서 소설의 스토리가 모종의 현실적투영이 됨으로써 공명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는 형식적측면에서의 긍정이 대세를 이루는셈인데 그중에서도 언어의 력사감이 많은 론자들의 주목을 받고있는것 같다. 동감이다. 그런데 이러한 당대사회 생활풍습의 재현, 언어의 력사감 등은 결국 력사소설을 통한 민족정체성 확인에 다름아니다. 그러니까 《규중비사》에서 시작된 작가의 민족정체성 확인의 지향이 《설랑자》에 이르러 보다 더 본격적으로 이루어진셈이다.
3. 김용식 력사소설의 문학사적인 의미
이상에서 김용식의 장편력사소설 《설랑자》에 대해 살펴보았다. 결국 이 작품의 가치나 의미 또한 앞의 《규중비사》 평가에서 언급된 내용과 별로 차이가 없다 하겠다. 단지 그 범위나 규모면에서 좀더 확장된 형태를 취하고있고 특히 봉건사회 륜리도덕의 페단이나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이라는 기본적인 주제보다는 조선의 아름다운 산수, 고려시대의 력사문화와 풍속, 우리 아름다운 민족어의 재현에 보다 많이 주목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면 있을것이다.
필자는 김학철과 리근전, 김용식을 우리 조선족 현대소설의 세 원로작가로 보고 그중에서도 김용식의 문학사에 대한 기여는 우리 력사소설의 전통 확립에 있다고 지적한바 있다. 장춘식, 《삼원로와 조선족당대소설의 전통》, 《조선학연구론문집》,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6.
그렇다면 김용식의 력사소설은 우리 문학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것일가?
김동훈은 여러측면에 걸쳐 김용식 력사소설의 현실적의미를 추출하고자 노력한다. 《김용식의 력사제재의 소설들은 설화의 력사화에서 성공적시도를 보여주었을뿐만아니라 또한 설화의 주제를 우리 시대에 제기되는 절실한 문제의 해결에로 이끌어가는데서도 진지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즉 그의 력사소설들은 력사의 거울에 비춰 본 현실생활에 대한 긍정의식과 더불어 력사의 반복성, 류사성에서 암시되는 명석한 현실고발의식을 토로함으로써 심각한 인식, 교양적의의를 띠고있다.》 김동훈, 《김용식론》, 임범송·권철 주필, 《조선족문학연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89, 414쪽.
그 례로서 김동훈은 력사에 대한 비판을 통한 사회주의현실의 우월성 긍정, 력사속의것과 류사한 현실의 암흑에 대한 고발, 그러한 고발을 통한 사회개조 혹은 혁신의 지향성 등을 들고있다.
물론 이런 내용들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력사속의것과 류사한 현실의 암흑이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이나 고발은 력사소설이 흔히 추구하는 측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상 김용식의 소설에서 이러한 력사적사실을 통한 현실비판은 독창적이라 보기 어려우며 따라서 이러한 주제의식적인 측면에서의 기여는 한계가 있을수밖에 없다. 이는 김용식의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당대 우리 사회 문화환경의 한계에서 비롯된것이라 보여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용식의 력사소설들이 발표될 당시 분명히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고 독자나 학계의 반향도 상당히 열렬했었다. 이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가?
필자는 우리 력사소설의 전범 수립에서 그 리유를 찾고자 한다. 즉 김용식의 력사소설은 력사소재를 소설화할 때 우리가 반드시 습득해야 할 원리원칙들, 혹은 미학적인 원리들을 작품을 통하여 제시해준것이다. 그것이 독자들에게 무난히 수용되면서 인정되였다는 점이 중요한것이다. 이점은 다른 론자들도 지적하고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론자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고있는 부분이 있다. 문화적인 뿌리 찾기를 통한 정체성확인이 이에 속한다. 필자가 가장 주목했던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문화적인 뿌리 찾기 혹은 동질성 확인은 이민자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에 접근했다고 보기때문이다. 이중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살면서 점차 민족정체성에 대한 상실감을 느끼고있는 우리 민족의 현상황에서 우리 문화의 뿌리가 되는 력사를 재현해냄으로써 민족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신의 민족정체성을 형성한 모태를 체험하도록 하며 이를 통해 새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도록 하는것, 어쩌면 이것이 작가 김용식이 력사소설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목적의식》 혹은 지향이였는지도 모른다. 이는 김학철의 《격정시대》나 리근전의 《고난의 년대》가 우리 문학의 봉우리를 형성한것이나 마찬가지 리치라 하겠다. 이점은 또한 김용식의 다른 력사소설 《보은단》 《아리랑》9집, 1982.
을 통하여 중세시대 조선조와 명나라의 선린관계 혹은 뉴대관계를 표현한데서도 확인할수 있다. 력사적으로 두 나라, 두 민족이 맺어온 관계를 제시함으로써 이중적정체성을 가진 우리 민족의 현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낸것으로 볼수 있기때문이다.
4. 나오면서
김용식의 소설에 대해서는 작품이 가지는 중요성에 비해, 혹은 작가가 문학사적으로 차지하는 위치에 비해 론의가 별로 많이 이루어지지 않고있는것 같다. 본고에서도 《규중비사》에 대한 학계의 평가를 귀납한후 주로 장편력사소설 《설랑자》를 중심으로 김용식 력사소설의 가치와 의미를 조금은 새로운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이밖에도 이 작가의 작품은 많이 있다. 작가의 20주기를 계기로 김용식의 작품에 대해 보다 폭넓은 조명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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