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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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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원나라 황후가 된 고려녀인
2013년 10월 29일 19시 27분  조회:12365  추천:1  작성자: 넉두리
기황후 원나라 황후가 된 고려녀인

(번역, 퍼온글 종합)
 


 
하지원이 기황후역을 맡은 한국 MBC 새 월화드라마 《기황후》 가 지난 28일에 방영되였다. 방송전 “이 드라마는 고려말, 공녀로 끌려가 원나라의 황후가 된 기황후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했으며 일부 가상인물과 허구의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실제 력사와 다름을 밝혀드립니다”라는 자막이 먼저 고지됐다. 실제 력사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면 실제 력사상의 기황후는 어떤 인물이였을가? 아래에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며 북원의 첫번째 황제인 순제(順帝)의 황후인 기황후(奇皇后)는 고려의 녀인이였다. 기황후의 몽골이름은 올제이 후투그(完者忽都)이다.

파죽지세로 일어나 그 누구도 당할자 없었던 몽골제국의 7차례나 되는 침입에도 고려는 30여년간 꿋꿋이 항거하였지만 결국 몽골대제국앞에 무릎을 꿇고말았다. 고려는 장기간에 걸친 항거덕분에 몽골제국(원세조 구비라이가 수도를 대도(현재 북경)로 옮기고 국호를 원으로 한것이 1271년의 일이다. 이시기에는 몽골제국이였다)이 정복한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완전히 복속되지 않고 자체적인 국호와 정권을 인정받는 독립국가로 남을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강국이였던 원나라의 테두리안에 들어간 100여년동안 고려는 원나라의 조정으로부터 수많은 내정간섭에 시달려야만 했다.

고려의 왕자들은 인질로 원나라에 가야만 했다. 원나라조정에서 고려왕도 마음대로 갈아치웠으며 혼인통교를 앞세워 원나라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되여 들어와 고려정치에 간섭하는 일이 생겼다. 조선반도의 북쪽땅은 원나라의 직접 통치구역이 되였고 원나라의 정복전쟁을 돕는다는 명분하에 수많은 물자와 군사가 략탈에 가깝게 동원되여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원나라는 고려에 공녀라는 매우 야만적인 요구를 해왔다. 공녀란 말그대로 녀자를 공물로 바치는것이다. 원나라의 공녀요구는 80년간 정사에 남아있는것만 50여번에 이르고 왕실이나 귀족이 개인적으로 요구한 일도 허다하였다.

원나라의 공녀요구리유는 유목민족출신인 원나라왕실에 녀자가 부족했기때문이였다. 원나라에는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녀자외에도 원의 귀족, 고관이 요구하는 녀자도 공급해주어야 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군인집단 등의 혼인을 위해 많은 수의 녀자를 필요로 하기도 하였다.

공녀는 고려전체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어린 딸을 공녀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결혼을 시키는 일이 많아져 조혼의 풍습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공녀는 하층민에서만 차출하는것이 아니라 원나라왕실의 요구에 상응하는 정도의 신분을 가진 녀자도 필요했기때문에 귀족의 딸들도 례외는 아니였다. 고려에서 간 공녀들은 대개 원나라궁궐의 궁녀나 고관귀족의 처첩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거리의 기생으로 팔려가 이국땅에서 슬픈 생애를 살아야만 하기도 했다. 공녀는 그만큼 고려녀인들의 앞날을 가늠할수 없는 치욕이였기때문에 그중에는 공녀로 뽑히면 가지 않기 위해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황후도 이런 고려공녀중의 한명이였다. 기황후의 본관은 행주이고 아버지는 기자오(奇子敖)이다. 기자오는 문하시랑평장사를 한 기윤숙(奇允肅)의 증손으로서 음보로 관직을 할 정도였으니 그렇게 지체가 변변하지 못한 집안은 아니였다. 기황후는 이 기자오의 막내딸로 태여났다. 우로 오빠가 다섯에 언니가 둘 있었다. 기황후는 공녀로 뽑혀 1333년에 고려출신의 환관이던 고용보(高龙普)의 주선으로 원왕실의 궁녀로 되였다. 당시 원나라왕실에는 고려출신환관들이 많았다. 원나라는 소수의 몽골족이 다수의 한족을 다스리는 나라였기에 한족들이 중앙정부로 진출해 힘을 얻는것을 극도로 막고있었다. 하지만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식자층이 필요했다. 유목민출신으로 교양을 쌓을 틈이 없던 원나라지배층들은 이런 요구를 고려에서 바친 글을 아는 환관들을 통해서 해결했다. 고용보도 고려에서 원으로 간 환관이였다.



고용보는 조국인 고려에서 온 기황후를 차를 따르는 궁녀자리에 앉히고 황제인 순제의 눈에 띄게 했다. 당시 원나라 황제인 순제는 독특한 리력을 가지고있었다. 어린 시절에 그는 왕실정쟁의 틈바구니에서 고려의 대청도에 1년간 귀양을 간 경험이 있었다. 고려에서 살았던 경험탓이였을가? 순제는 곧 기황후를 총애했다.

당시 원순제의 제1황후이던 타나시리는 기황후를 몹시 질투했다. 타나시리는 기황후에게 수시로 채찍질을 하고 인두로 살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기황후가 순제의 총애를 받은지 2년이 되던 1335년에 제1황후 타나시리의 형제들이 순제를 반대하는 모반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제1황후 타나시리도 반란에 가담하였다는 벌을 받고 죽었다.

순제는 기황후를 황후자리에 올려놓으려고 했지만 실권자이던 메르키트 바얀이 몽골족이 아니면 황후가 될수 없다고 반대하여 결국 이 일은 무산되고말았다. 결국 황후자리는 몽골 옹기라트부족출신의 바얀 후투그(伯颜忽都)에게 돌아갔다. 바얀 후투그는 성격이 매우 어져서 황후가 되였지만 거의 앞에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 황후의 꿈이 좌절되였던 기황후는 그후 1338년에 아들 아이유시리다라(爱猷识理答腊)를 낳고 이듬해에 메르키트 바얀이 실각하자 마침내 제2황후로 책봉되였다.

기황후는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제1황후는 허수아비황후와 다름없었다. 기황후는 황후직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개편하여 고용보를 자정원사(资政院使)에 앉히고 왕실재정을 장악하였다. 막대한 왕실재정을 틀어쥐게 된 기황후는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1353년에는 황제를 압박하여 자신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를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고 같은 고향출신인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군사책임자인 동지추밀원사(同知枢密院事)로 삼아 군사권도 장악하였다.

기황후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풍속이 크게 류행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고려양(高丽样)이라고 한다. 고려의 복식과 음식들이 원나라의 고위층들을 중심으로 류행되기 시작했고 명문가에 속하려면 고려녀자를 안해로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 퍼졌다.

한편 기황후가 원나라 정치를 쥐락펴락하게 되자 고려에 남은 그녀의 가족들도 덩달아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원나라에서는 그녀의 아버지 기자오를 영안왕(荣安王)으로, 부인을 왕대부인으로 봉하였으며 선조 3대를 왕의 호로 추존하였다. 또한 기황후의 오빠 기철(奇辙)을 원나라의 참지정사, 기원(奇辕)을 한림학사로 삼자 고려에서도 이들을 덕성부원군, 덕양군에 봉할수밖에 없었다. 기씨집안이 고려를 넘어서 원나라로부터 힘을 얻게 되자 고려조정은 기씨집안의 눈치를 보지 않을수가 없는 형편이 되였다. 문제는 이 기씨집안의 아들들이 원나라의 힘을 고려에 유익하게 쓰기보다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리용했다는데 있었다. 기황후도 가족들을 위해 고려에 대한 내정간섭을 지나치게 했다. 기씨집안의 악행은 결국 고려의 공민왕이 즉위한후 원나라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이들을 비밀리에 제거하는것으로 끝이 났다. 이때도 기황후는 공민왕을 제거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세우려고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이때 이미 원나라의 국세가 기울고 고려가 원나라의 군대를 잘 막아내서 실패로 그쳤다.

물론 고려녀인인 기황후가 원나라의 황후가 되여서 좋은 점도 있었다. 충렬왕때 시작되여 80년간 지속된 공녀징발이 금해진것도 이 시기였고 고려가 원나라의 테두리안에 들어간후 계속 제기되였던 립성론(立省论) 즉 고려의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고 원나라의 한개 성으로 만들자는 론의가 사라진것도 이때였다.

원나라는 순제때 문치주의 정치를 펼치면서 문화적으로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순제가 즉위하기전에 있었던 왕위다툼의 여파가 여전히 남은 상태에서 기황후가 정권을 잡은후 시작된 황위를 둔 정쟁이 원나라의 힘을 점차 약화시켰다.

기황후는 남편 순제에게 황제자리에서 물러나 장성한 자신의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줄것을 요구했다. 순제는 이를 거부했다. 그런 가운데 황태자의 반대파와 지지파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황태자반대파의 지도자 볼루드 테무르가 1364년에 수도를 점령했을 때 기황후는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이 내전은 결국 황태자지지자인 코케 테무르(扩廓帖木儿)가 1365년에 대도를 회복하면서 수습되였다.

1365년에 제1황후이던 바얀 후투그가 죽자 기황후는 제2황후라는 딱지를 떼고 원나라의 제1황후로 올라섰다. 그러나 그녀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원나라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홍건봉기가 일어나면서 원나라는 수습할수 없는 혼란으로 치닫게 되였다.

1368년에 마침내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대군이 원나라 수도 대로를 점령하자 원나라왕실은 피난길에 올랐다. 기황후도 이때 남편 순제와 아들 아이유시리다라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을 떠나면서 기황후는 구원병을 보내주지 않는 고려를 원망했다고 한다. 원나라왕실은 응창부로 수도를 옮겼다가 카라코룸까지 피난했다. 피난도중에 순제는 죽고 그 자리를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가 이어 북원의 두번째 황제로 되였다. 대도를 떠나 응창부까지 가는 동안의 기황후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기황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것이 없다.

한때 동아시아와 유럽을 호령했던 대제국 원나라의 황후였던 고려녀인 기황후는 14세기말에 고려와 원나라의 력사에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상당한 역할을 한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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