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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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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옥상장군의 사망비밀
2013년 12월 01일 13시 41분  조회:8802  추천:3  작성자: 넉두리

풍옥상장군의 사망비밀
 
(번역)




 
 
국민혁명군 륙군1급상장(4성상장)이며 장개석의 결의형제인 풍옥상(冯玉祥)장군은 본명이 풍기선(冯基善)이고 자가 환장(焕章)이다. 1882년 11월 6일에 출생한 풍옥상은 본적이 안휘성 소현(巢县—지금의 안휘성 소호시 하각진 죽가촌)이고 기적(寄籍)이 하북성 보정시이다.

1927년 4월에 풍옥상은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 총사령을 맡았고 1935년 4월에 륙군1급상장계급을 수여받았다. 1947년부터 애국민주운동을 지지하면서 “내가 알고있는 장개석”이란 책을 써서 장개석의 전재독재통치를 폭로하였다.

풍옥상은 1905년에 류덕정(刘德贞)과 결혼하여 큰아들 풍홍국(冯洪国), 둘째아들 풍홍지(冯洪志), 큰딸 풍불능(冯弗能), 둘째딸 풍불벌(冯弗伐), 셋째딸 풍불긍(冯弗矜)을 보았다. 아주 소박하고 현모량처였던 류덕정은 1923년에 병으로 북경협화병원에서 사망되였다.

중년에 상처한 풍옥상은 신변에 다섯 미성년자녀를 돌봐줘야 할 녀인이 수요되였다. 그 시기에 적지 않은 처녀들이 모두 천군만마를 거느린 풍옥상장군에게 시집을 오려고 했다. 그중에는 륙군원수 조곤(曹锟)의 딸도 있었는데 풍옥상은 모두 거절하고 가난한 목민가정에서 출생하여 경사녀자협화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중학교에서 교원사업을 하는 리덕전(李德全)녀사와 결혼하였다. 1924년에 풍옥상과 결혼한 리덕전녀사는 첫날밤에 풍옥상을 보고 “왜서 절 좋아했나요?”하고 물었다. 풍옥상은 즉시 “난 당신이 천진하고 솔직한것이 마음에 들었소”하고 대답한후 웃으면서 “당신은 왜서 나한테 시집을 왔소?”하고 물었다. 리덕전도 웃으면서 “하느님께서 당신이 백성을 위해 일하지 않을가봐 감독하라고 저를 당신곁에 파견해보낸거예요”하고 대답했다.

결혼후 리덕전녀사는 풍옥상을 위해 전처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선후로 셋째아들 풍홍달(冯洪达), 넷째딸 풍리달(冯理达), 다섯째딸 풍영달(冯颖达), 여섯째딸 풍효달(冯晓达)을 낳았다. 전국이 해방된후 리덕전녀사는 위생부 부장, 전국부녀련합회 부주석, 전국정치협상회 부주석, 국가체육위원회 부주임, 중국적십자회 회장 등 직을 력임했다.
반세기동안 부대를 거느리고 전쟁터를 누비였던 풍옥상장군은 1948년 9월 1일에 선박화재사고로 여섯째딸 풍효달(冯晓达)과 함께 사망되였는데 그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되고있다.

1948년 9월 5일에 구쏘련의 《홍성보》는 눈에 잘 띄우지 않은 곳에 《려객선 “승리”호가 조난당하다》는 제목으로 따스통신사의 속보뉴스를 실었다. 뉴스의 내용 이러했다.
“8월초에 ‘승리’호는 뉴욕에서 출발하여 오데사로 가는 도중에 화재가 발생하여 수십명의 승객이 사망되였는데 사망자중에는 풍옥상장군과 그의 딸도 있었다. 현재 이 사건은 조사중에 있다.”

1948년 가을에 풍옥상을 사망되게 한 “승리”호화재사건은 한시기 서방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구쏘련신문은 이 사건을 감추고 루설하지 않았다. 게다가 풍옥상이 1948년 가을에 구쏘련으로 가게 된것은 절대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1948년 7월에 중공중앙의 초청을 받은 풍옥상은 귀국하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기획사업에 참가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만약 귀국도중에 불행한 사고가 발생되지 않았다면 풍옥상은 새 중국정부에서 중요한 직무를 맡았을것이다. 그의 뜻밖의 사망은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여서 사람들은 여러가지 추측을 하고있다.

1948년 7월 31일에 구쏘련의 려객선 “승리”호는 뉴욕에서 출발하여 오데사로 되돌아오고있었다. 풍옥상과 그의 가족도 구쏘련을 통해 중국으로 오려고 그 배에 올랐다. 배가 바다에서 며칠동안 달렸을 때 선장은 “가는 길에 애급의 알렉산드리아항에 들러서 애급으로부터 귀국하는 2000여명의 아르메니야인을 그루지야의 바투미(巴统)에 실어다주라”는 흑해항운국의 전보를 받았다. 8월말에 “승리”호는 바투미항에 입항했다.

9월 1일 점심에 오데사에 자리잡고있는 흑해항운국에서는 “승리”호가 9월 2일 새벽 2시에 오데사항에 도착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후 “승리”호의 무선전통신이 중단되였지만 누구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9월 2일 아침이 되여서야 흑해항운국에서는 무선전이 중단된 원인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흑해항운국에서는 바다에 나가 있는 선박들과 연도의 항구들에서 “승리”호의 행적에 대해 알아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누구도 “승리”호와 련계하지 못했고 구조신호도 받지 못했다. 불길한 예감이 든 흑해항운국에서는 급히 흑해함대에 구원을 청했다. 그날 저녁 9시에 한 비행사가 공중에서 “얄따(雅尔塔) 동남 70해리되는 곳에서 이미 불에 탄 ‘승리’호를 발견했는데 선박주위에는 사람을 가득 태운 5척의 작은 삼판선(三板船)이 있다”고 보고했다.

“승리”호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구쏘련정부에서 나중에 밝힌데 의하면 9월 1일 13시에 “승리”호의 영화방영원대리이며 무선전기술자인 꼬바렌꼬는 배가 종점에 거의 도착한것을 보고 영화필림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미리 거두어야 부두에 도착한후 영화필림을 문화기지에 돌려주기 편리했기때문이다. 그리하여 꼬바렌꼬는 한명의 일군을 불러 영화를 다 돌린후 필림을 감는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손으로 필림을 감는 도중에 기계부속품의 마찰로 불꽃이 일어나 필림에 불이 붙었다. 불꽃은 또 옆에 놓았던 필림에 옮겨붙으면서 화염은 몇초사이에 방안을 활활 태우면서 불길은 사방으로 확산되였다. 이 화재로 배에 탔던 40명의 승객이 사망되였다.

9월 3일에 구조일군들이 배우에 올랐을 때 불은 이미 기본상 꺼져있었다. 9월 5일에 “승리”호가 오데사항에 들어서서 구급된 승객들을 다른 배에 전이시켰다.
인위적인 사고인가?

조사일군들은 화재사고를 조사하면서 방화범이 고의적으로 불을 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출했다. 조사일군들은 알렉산드리아항구에서 대량의 승객들이 배에 올랐는데 그속에 일부 파괴분자들이 혼입하여 있다가 방화를 했을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러한 가설을 내놓은데는 이번에 귀국인원들이 배에 오른후 배의 여러곳에서 일종의 광석으로 보이는 덩어리형태의 물체를 발견했기때문이다. 이런 물체는 연소할 때 파란불꽃을 내보내면서 매우 높은 온도에 도달된다. 

구쏘련의 국가안전국의 프리아신도 그 배에 탔는데 그는 직업적인 습관으로 그 물체를 들고 상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자신이 화재로 사망되였기에 조사기관에서는 인위적인 파괴라는 방향으로 계속 조사하지 않았던것이다.

사법부문에서는 반복적인 연구를 거쳐 최종적으로 화재의 주요원인은 영화필림으로 인한것이라고 인정했다. 당시 세계영화업계에서는 보편적으로 니트로셀룰로오스(硝化纤维)필림을 사용했는데 이 필림은 쉽게 연소하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이런 필림을 40도까지 가열하면 화약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게 된다.

그번 화재로 구쏘련정부는 피동에 처했다. 법정에서는 화재의 직접적인 책임자에게 중한 판결을 내렸다.

무슨 원인때문인지 법원에서는 조사과정에 한가지 사실을 홀시했다. “승리”호가 뉴욕에서 출발하기전에 일련의 기괴한 일이 발생되였다. “승리”호가 곧 항구를 떠나기전에 뉴욕정부에서는 “승리”호를 전부 소독하라는 이상한 결정을 내렸다. 비록 선장이 강렬하게 항의했지만 전부의 선원들이 핍박에 의해 려관에서 이틀동안 주숙했다. 미국인들은 “승리”호에 무리하게 허락없이 올랐는데 그들의 행위를 아무도 감독하지 않았다.

그외 미국을 떠나려고 준비하고있던 한 구쏘련외교관부부가 다투었는데 부인이 귀국하지 않겠다고 고함치면서 집요하게 창밖으로 도망치려고 란리법석을 떨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미국인들이 즉시 부인을 구원하여 엄밀하게 보호했다. 그런데 그 부인의 짐은 이미 배에 실렸는데 이상하게도 그 위치가 바로 화재가 발생한 배의 가운데에 놓여있었던것이다. 그보다 더 이상한것은 “승리”호에서 실제로 화재가 발생되기전에 미국의 라지오방송국에서 사전에 화재소식을 방송한것이다.

쓰딸린은 흑해에서 휴가를 보내고있을 때 풍옥상이 조난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구쏘련 부장회의 부주석 말렌꼬브는 쓰딸린에게 보낸 전보에서 “사실이 확실한바 주석님의 예측이 옳았습니다. 아르메니야난민중에 미국의 정보원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불을 지른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945년 12월에 구쏘련 최고쏘베트주석단에서는 해외에 나간 아르메니야난민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해외에서 쏘련으로 돌려보낸 아르메니야인들은 10만명이 넘었다. 그러나 “승리”호화재사건이 발생된후 쏘련부장회의에서 1948년 9월 14일에 출항금지령을 내린후 아르메니야인들의 귀향조류는 철저히 끊기고말았다.

화재사고가 났던 “승리”호는 수리하여 복구된후 해내외의 배길로 계속 달렸다. 그러다가 1977년에 “승리”호라는 이름은 선대(船队)의 명부에서 삭제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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