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목돈을 벌어놓고 늙어서 멋스레 로친을 끼고 공원놀이나 다니는 장령감을 보고 모두들 그 령감 팔자 상팔자라고 부러워하지만 기실 장령감에게도 시름거리가 따로 있었다.
남들은 처녀가 없어서 아들을 장가 못 보낸다고 아우성인데 장령감은 금은보석같은 딸을 두고도 서른살이 다 되도록 시집을 보내지 못하고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그것도 어디 팔다리가 부실한가, 얼굴이 못생겼는가? 제 어미를 닮아서 무용배우처럼 미끈한 몸매에 영화배우처럼 예쁘장한 미모! 그래서 중매군들이 문턱이 다슬도록 드나들고 《참 이 집 딸을 보면 막 피여나는 꽃을 보는 기분이구려. 이 집에선 꽃을 가꿀 필요가 없겠군. 이렇게 살아서 움직이는 싱싱한 〈생화〉가 있으니 말이요. 이 꽃을 꺾어 우리 집에 옮겼으면 좋겠구만.》하고 아들 가진 집들에서 침을 한발씩이나 흘리지만 꽃이 스스로 꺾이기를 원하지 않으니 장령감인들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처음엔 장령감이 《얘 장미야, 이번 총각은 학력도 있고 키크고 미남인데다가 마음씨마저 착하다하더구나. 어디 한번 만나보거라.》이렇게 권할라치면 《전 시집 안가요!》하고 단마디로 거절하던 딸이 이젠 혼사말만 나오면 《아이, 귀찮아요. 전 죽어도 시집 안가요! 영원히 시집 안가요!》하고 완강하게 나오니 장령감은 딸년이 비구니나 될 팔자라고 탄식하며 딸의 혼사를 단념하고 말았다.
그런데 과년한 딸이 점점 과묵해지더니 찬바람을 싫어하고 대낮에도 창문에 커튼을 치고 어두컴컴한 방안에 갇혀서 장령감이 어디 아픈가 한마디 근심되여 물어도 귀찮아 짜증을 내는것이였다. 때론 혼자서 웃었다 울었다하며 히스테리 증상까지 보여서 장령감은 딸년이 큰병에 걸린것이라고 생각하고 부리나케 의사를 찾기 시작했다. 장령감이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다니며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으나 효험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먼 친척의 소개로 의술이 고명하다는 한의사 김선생을 찾아보았다. 김선생은 환자의 기색을 살핀다 맥을 본다 하며 자세히 관찰하더니 조용히 입을 여는것이였다.
《환자가 몸이 피곤하고 추웠다 더웠다하며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답답하며 때로는 식은땀을 흘리지요?》
《예, 예, 그런 증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오전엔 정신이 산란하고 밝은것을 보기가 싫어하고 사람의 소리가 귀찮아지고 오후에는 머리가 혼미해지며 배가 아프고 놀라기를 잘하며 일을 하거나 생리 때는 심해지고 말입니다.》
딸이 머리를 끄덕이고 장령감도 《네, 맞습니다. 다른 의사들은 모두들 한열병이라고 합니다만 병이 나아야 말입지요. 김선생님께서 어떻게 하나 저애의 병을 치료해주십시오. 저애의 병만 고쳐주신다면 가산을 모두 탕진해서라도 그 은혜를 보답해드리겠습니다.》
《아바이, 근심하지 마십시오. 따님의 병은 침 한대만 맞히면 곧 나을겁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어서…》
《급해하지 마십시오. 저의 조카 일철이가 외국류학을 갔다온 박사인데 침구에 능하지요. 오늘 그애가 외출했으니 래일 이때에 다시 찾아오십시오.》
이렇게 되여 장령감은 다음날 다시 올것을 약속하고 딸을 데리고 돌아갔다. 한편 김의사는 그날 저녁, 조카 일철이를 찾아 낮에 장령감의 딸의 병을 본 정황을 얘기하고나서 동을 달았다.
《내 보기엔 장미가 아주 예쁘고 훌륭한 처녀인데 너 하고 짝이 맞겠더라. 래일 네가 그 장미처녀를 치료해주고 백년가약을 맺거라.》
《허허참, 삼촌두, 치료는 삼촌이 해줘야지 의사도 아닌 제가 어떻게 치료를 해준다고 그럽니까?》
《네가 침 한대를 놔주면 그 처녀 병은 즉시 나을거다.》
《삼촌은 무슨 롱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침통도 쥐여 못본 제가 혈위도 모르고 찌르다가 생사람을 죽이겠습니다.》
《그래도 넌 박사가 아니냐?》
《아무리 박사라 해도 그렇지요. 제 전공이 물리학이지 어디 의학입니까?》
《그러니까 너더러 물리치료를 해주라는거다. 내 말은 진짜 침이 아니라 네 몸에 달린 살침을 장미처녀의 몸에 놓아주라는 말이다.》
《뭐라구요? 아니, 삼촌두! 저더러 처음 만나는 처녀한테 무례하게 야만스런 짓을 하라구요? 전 죽어도 그런 짓은 못하겠습니다!》
《이눔아, 그게 장미처녀를 구하고 너희들 둘의 행복을 찾는 길인데 뭘 야만스런 짓이라고? 찍소리 하지 말고 이 삼촌이 시키는대로 해!》
김의사는 일철이를 설복시키느라 무척 애를 썼다.
이튿날, 장령감이 딸을 데리고 오자 김의사는 일철이더러 다른 방으로 장미처녀를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하게 했다. 김의사와 함께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던 장령감은 이윽해도 딸이 나오지 않으니 조바심이 났다.
《의서선생님, 침 한대 놓는 시간이 왜 이리 오래 걸립니까?》
《아바이두, 아무데나 침을 놓으면 되는 줄 압니까? 딱 맞는 자리를 찾자면 시간이 좀 걸릴겁니다. 내심하게 기다립소.》
그때 장미처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장령감이 《그 침이 몹시 아픈 모양입니다. 저 앤 여태껏 침이란걸 맞아 못봤는데요.》하고 몹시 가슴 아파하니까 김의사는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처음 맞는 침이라면 좀 아플겁니다.》하고 위로해주는 척했다.
얼마후 일철이가 먼저 나오고 그 뒤로 부끄러운듯 고개를 숙인 장미처녀가 따라 나왔다. 장령감은 딸의 얼굴이 여느때없이 밝고 혈색이 도는것을 보고 일철의 손을 잡고 백배사례했다.
장령감이 딸을 데리고 돌아가자 김의사는 일철이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어때? 치료해주니 처녀가 좋아했지?》
《장미처녀를 보니 마음에 딱 들었습니다. 그래서 렴치불구하고 달려들었더니 막 손톱으로 제 얼굴이며 몸을 마구 꼬집어 놓지 않겠습니까? 만약 처녀가 고스란히 맡기고만 있었더라면 키스쯤하고 더 깊이 들어가지 못했을겁니다. 그런데 얼굴이 뜯기고 피가 나고 보니 화가 나서 견딜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녀자란 도무지 정체를 알수 없는 마물입니다. 완강히 반항할 때 같아선 잡아먹을것 같더니 막상 정복당하고 나자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한번 더…〉하는게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그 처녀의 병이라는게 그 무슨 한열병이 아니라 남자를 원하면서도 얻지 못하는데서 생긴 병이네라. 이런 병은 흔히 로처녀나 과부, 비구니들한테서 발생하군 하지.》
그 이튿날, 장령감이 또 김의사를 찾아와서 사례했다.
《의사선생님, 우리 딸년의 병을 뚝 떼 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글쎄 그애가 병이 낫더니 결혼이야기를 꺼내지 않겠습니까? 죽어도 시집을 가지 않겠다던 애가 말입니다.》
장령감은 딸이 일철이를 마음에 두고있다는 말을 했고 김의사도 잘 됐다면서 둘의 혼사를 정하자고 했다. 이리하여 장미처녀와 일철이는 아름다운 연분을 맺고 결혼까지 하게 되였다.
결혼후 둘의 신혼생활은 아기자기 재미가 깨알이 쏟아지는듯 했다. 그러다가 까닭없이 다투게 되였는데 싸움은 꼭꼭 장미 쪽에서 걸어왔다. 장미는 일철이가 퇴근하여 돌아와 곁에 앉기만 하면 《꼴보기 싫으니까 어서 나가요!》하고 꽥 소리지른다. 마음씨 고운 일철이가 그녀의 여린 심경에 아픔이라도 있나해서 조용히 있게 해주려고 신발을 신으면 《절 혼자두고 가면 어떻게 할 작정이예요?》하고 야단법석이다. 그래서 이번엔 어쩔 줄을 몰라 그대로 서있으면 《아이구, 내 팔자야!》하며 울어댄다. 이런 히스테리컬한 짜증도 한두번이면 모르겠는데 몇달이 지나도록 자꾸만 되풀이되니 일철이는 더는 견딜수 없어 삼촌을 찾아 하소연했다.
《장미는 정말로 변덕 많은 녀자입니다. 곁에 있기가 무서워요. 이거 리혼하든지 끝장을 봐야지 못살겠어요.》
《가만, 장미가 달마다 꼭꼭 한시기만 짜증을 부리지 않더냐? 주기적으로.》
《네, 꼭 그래요. 정말 이상해요.》
《허허, 이 녀석아, 그게 생리일이 돼서 그런거야.》
김의사는 일철이의 어깨를 치며 설명해주었다.
《생리일이면 녀성들이 흔히 신경질적으로 짜증을 부리군하는데 일부 녀성들이 그 정도가 더 심하지. 생리일이 되면 마음이 이상해지기 시작하여 그것이 끝나는 날이면 반드시 낯선 남자를 만나야만 되는 녀성도 있고 남의 물건을 슬쩍하다가 파출소신세를 지는 경우도 있지. 어떤 녀성은 그때만 되면 우울증이 생겨 못견디다가 누구라도 걸리기만 하면 심하게 다투기도 하고…그러니까 그럴 땐 남자들이 리해해줘야지. 장미가 짜증 부릴 때면 실컷 짜증을 부리도록 내버려둬. 그리고 시간을 짜내여 장미랑 함께 볼링도 치고 수영장도 다니고 노래방도 드나들도록 해봐.》
그후 일철이는 삼촌이 시켜준대로 했더니 장미의 짜증부리는 증세가 많이 나아졌다. 어느날 밤, 일철이는 장미를 꼭 껴안고 속삭였다.
《여보, 난 장미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데 당신은 내가 그렇게도 보기 싫소?》
《호호호, 저로서도 어쩔수 없는 현상이예요. 그럴 땐 당신이 보고 싶어 미치겠다가도 막상 만나면 미워지는거예요. 녀자의 한일까요?》
《허허, 우리 마누라 장미는 변덕 많은 녀자!》
《아이참, 이젠 짜증을 안 부리는데 그냥 변덕 많은 녀자라고 할텐가요? 그럼 전 또 짜증을 부리겠어요.》
《허허, 짜증을 부리겠으면 실컷 부려보구려. 난 변덕 많은 녀자가 좋아!》
《호호호!》
《하하하!》
그들 부부는 즐겁게 웃었다. 그것은 건강과 행복을 찾은 유쾌한 웃음이였다.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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