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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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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래의 첫 사랑 장약명의 비극인생
2013년 12월 21일 15시 48분  조회:6550  추천:0  작성자: 넉두리
 

주은래의 첫 사랑 장약명의 비극인생

                                                                                                                                                                                    (번역)






 

주은래와 장약명의 우정은 천진의 남개학교에서 시작되였다.

1902년에 하북성 청원현에서 출생한 장약명은 가정환경이 좋았고 특별히 총명했으며 성격이 강직했을뿐만아니라 다혈질이고 학생시절에 학습성적이 줄곧 1등이였으며 용모도 아름다왔다.

1919년 “5.4”운동때 장약명은 곽륭진, 등영초 등과 함께 천진녀성애국동지회를 조직했다. 그해 9월에 그녀는 주은래, 곽륭진, 류청양 등과 함께 혁명단체 “각오사”를 창건했다. 1920년초에 일본제품을 배척하는 활동을 벌렸는데 장약명은 주은래, 곽륭진, 우방주와 함께 수천명의 민중을 동원하여 직예성공서에 가서 청원하다가 당장에서 붙잡혔다. 당시 4명이 모두 붙잡혔는데 장약명은 주은래와 함께 감옥살이를 했다.

주은래와 장약명은 서로 상대방의 총명과 재능을 흠모하고 아껴주었다. 재질과 용모가 뛰여난 두 사람은 그야말로 룡과 봉황이였다.

주은래는 이 안개속에 가리운 연분에 대해 조금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1955년에 주은래는 장약명과 어떤 사이였느냐고 하는 후배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등영초앞에서 솔직하게 “처음에 우리는 사귀였어”라고 대답했다. 등영초는 당당한 공화국의 총리가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것을 보고 그저 웃기만 했다.

출옥한후 “각오사” 사원들의 안전을 위해 네 사람은 프랑스류학을 떠나기로 약속했다.

1920년 11월 7일에 네 사람은 상해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로 갔다. 그 이듬해 봄에 주은래는 장신부, 류청양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공산당프랑스소조(후에 유럽지부로 반전)”에 참가했다. 1921년에 주은래는 프랑스어를 배웠는데 꽃같이 아름다운 얼굴에 늘 웃음을 담고있는 장약명과 열렬한 사랑에 빠져있었다.

갓 프랑스에 갔을 때 곽륭진과 장약명은 빠리의 한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했다. 곽륭진은 장약명보다 8살 년상이였는데 큰언니처럼 장약명을 돌봐주었다.

1922년에 장약명은 곽륭진과 함께 조세염, 주은래, 리부춘이 조직한 “중국소년공산당”에 가입했다. 장약명은 맑스주의의 프랑스원작을 거침없이 량독하고 번역하였는데 공산주의연구회의에서 늘 그녀가 강의했다. 그녀는 학습심득을 써서 프랑스의 《적광》잡지에 발표하는 동시에 늘 프랑스의 통신을 써서 중국국내의 간행물에 발표했다.

장약명은 프랑스어에 능했고 또 녀자여서 신분을 숨기기 편리했기때문에 조직내에서 특별임무도 담당하여 프랑스공산당과의 비밀련락을 유지했다.

첫사랑은 특별히 아름다운것이다. 1922년은 주은래와 장약명의 사랑이 가장 열렬했던 한해였다. 하지만 주은래한테는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주은래의 선배이며 좋은 친구인 채화삼이였다.

호남사람인 채화삼은 모택동과 함께 장사에서 신민학회를 성립했고 최초로 폭력혁명의 주장을 내세웠는데 사상과 행위가 극히 진보적이고 급진적이였다.

채화삼은 괴재였다. 그는 프랑스에 온후 공장에 들어가지도 않고 학원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회의에 참가하는외에는 프랑스자전을 안고 조용한 구석에 찾아가 혼자서 자전을 뒤지는것이 업이였다. 그는 흐트러지고 지저분한 얼굴로 맑스주의를 담론했고 입만 열면 무산계급독재를 웨쳐댔다. 그는 주은래가 련애를 하면서 사업과 학습을 좀 늦추는것을 보기만 하면 화를 내면서 “당신은 미색에 빠져선 안되오. 진정한 혁명자는 눈을 녀자한테 팔지 말고 압박받고 착취받는 로동자들에게 돌려야 하오”라고 경고했다. 가슴에 큰 뜻을 품은 주은래는 채화삼의 말을 듣고 갑자기 꿈에서 깨여난듯 사색에 잠겼다. 그는 세상을 놀래울 사업을 하려는 자신의 목표를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약명을 일생의 반려로 선택하는것이 합당할가”고 자문하면서 고민했다. 장약명은 적극적이였지만 그녀의 가정출신은 줄곧 다른 사람의 의심을 받았다. 장약명은 사랑스러웠지만 승벽심이 강하고 다혈질이여서 무슨 일에서나 이기려고 했기때문에 가끔씩 주은래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가 있었다. 주은래는 고통스러웠지만 장약명과 헤여지기로 마음먹었다.

1923년에 주은래와 헤여진 장약명은 매우 고통스러운 심정을 안고 곽륭진과 함께 빠리를 떠나 리옹으로 갔다. 1923년에 빠리에서 리옹으로 온 곽륭진은 뜻밖에도 한고향사람인 양곤을 만났다. 곽륭진은 양곤을 자기의 친구 장약명에게 소개해주었다. 당시 양곤은 리과석사학위를 따내기 위해 공부에만 전념하는 서생이였다.

1924년에 장약명은 활동을 조직했다가 프랑스비밀경찰의 조사를 받았는데 하마트면 강제추방을 당할번 했다. 그해 주은래는 더는 소년공산당 서기를 담당하지 않았다. 새로온 소년공산당 서기는 방자하게 제멋대로 하는 사람이여서 성격이 강직한 장약명은 그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또 새로온 서기는 장약명의 출신을 문제로 삼고 그녀에  대해 조사했다. 게다가 여러번이나 정치활동을 하다가 프랑스경찰에 조사를 받게 되자 장약명은 억울하기도 하고 불만스럽기도 하여 당조직에서 퇴출하고 프랑스에 남아 공부에만 전념하기로 결정했다.

장약명과 헤여진 주은래는 자신과 같은 신앙을 품은 등영초와 사귀기 시작했다.

장약명은 리옹대학과 가까운 곳에 있는 천주교녀자중학교아빠트로 이사했다. 거기에서는 집세가 싸고 식사도 책임져주었다. 그녀는 수녀처럼 그 아빠트에서 한명의 중국사람도 만나지 않고 한마디의 중국말도 하지 않으면서 근 3년동안이나 살았다. 때문에 프랑스비밀경찰의 추적에서도 벗어날수 있었다.

1927년 10월에 장약명은 우수한 성적으로 저명한 중불대학에 들어가 박사공부를 시작했다. 그 시기 그녀는 양곤과 함께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감정이 깊어졌다.

1930년 봄의 어느날 밤에 장약명이 기숙사에서 책을 읽고있는데 갑자기 아래층에서 “약명이, 약명이”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여왔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흰양복에 흰색 프랑스모자를 쓴 청년이 서있었다. 그 청년이 색안경을 벗자 장약명은 깜짝 놀랐다. 바로 주은래가 아닌가? 주은래는 낮은 소리로 자신의 행동은 매우 비밀적이라고 말했다. 남들이 모르게 살그머니 중불대학에서 나온 두 사람은 부근의 마을을 지나 한 자그마한 커피점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면서 주은래는 “난 모스크바로 회의하러 가는 길에 당신을 만나보려고 들렸소. 난 1925년에 광주에서 등영초와 결혼했소. 영초는 약명이가 잘 있는가 알아보라고 했소. 이제 헤여지면 우린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소. 난 앞으로 혁명을 하다가 희생되여 승리하는것을 보지 못하더라도 원이 없소.”

그 말을 들은 장약명은 자신이 유일하게 탄복하고 사랑하던 옛 련인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25년후 주은래는 질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해석했다.

“남자와 녀자의 사이에는 애정이 끝나도 우정이란것이 존재한다. 평생의 반려가 되지 못하지만 친구로는 계속 지낼수 있지 않겠니? 장약명을 놓고볼때 우리는 천진에서 반년동안이나 함께 감옥에 있었고 프랑스에서도 함께 활동을 했기때문에 나는 그녀의 인품에 대해 잘 알고있다. 그녀가 혁명에 대한 추구를 포기했지만 적의 편으로 넘어가서 우리를 배반한것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친구로 될수 있는것이다.”

1930년봄에 양곤은 안해와 리혼하고 장약명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양곤의 진심에 마음이 움직인 장약명은 마침내 그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신혼려행을 마치고 리옹으로 돌아온 장약명은 박사론문을 쓰는데 전념했다. 장약명은 우수한 성적으로 문과박사학위를 따냈다. 당시 프랑스류학을 온 녀학생은 40여명이였지만 박사학위를 따낸 녀학생은 그녀밖에 없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중국의 첫 녀박사였다.

1931년 양력설이 갓 지나자 장약명은 남편 양곤과 함께 북경으로 돌아왔다. 1948년 봄에 장약명과 양곤은 운남대학 교장 웅경래선생의 요청을 받고 운남으로 이주하여 운남대학에서 조건이 가장 좋은 교수아빠트로 들어갔다. 그들 부부는 중문학부 교수를 담임하면서 문예리론과 세계문학사를 가르쳤다.

곤명이 해방된후 장약명은 중국민주동맹에 가입했고 1950년에 다시 중국공산당에 가입할것을 신청했다.

1955년 봄은 장약명부부에게 있어서 특별히 따뜻한 봄이였다. 그들은 30여년전에 함께 프랑스로 류학갔던 전우이며 그 당시의 공화국총리인 주은래와 즐거운 상봉을 했다. 그들은 5시간이나 담화를 나누다가 함께 식사를 했다. 이는 주은래와 장약명의 마지막 만남이였다.

1958년 6월 18일 오전에 학부에서 반우파대회를 열고 장약명더러 죄를 승인하라고 핍박했다. 성격이 강직한 장약명은 없는 죄를 승인하라고 하자 모욕을 느꼈다. 오후에 계속 비판대회를 열고 더욱 압력을 가하겠다는 말을 들은 장약명은 강물에 뛰여들어 자살했다.

당시 북경에서 한 학술토론회의에 참가했던 양곤은 회의중에 운남대학에서 보내온 전보 한통을 받았다. 장약명의 병세가 위중하니 속히 오라는 전보였다. 양곤은 부랴부랴 운남대학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를 맞아준것은 장약명의 골회암이였다. 28년동안 환난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던 한쌍의 부부는 이렇게 영원한 리별을 하였다.

나중에 장약명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된 주은래는 분노했다.

주은래와 등영초가 따져물어서야 중공운남대학당위에서는 장약명에 대한 착오적인 비판에 대해 시정하고 가족에게 사과했다.

1966년에 시작된 10년대동란때 양곤은 비판받고 매맞으면서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번 했다. 1978년에 호요방총서기가 친히 비준해서야 양곤은 북경중국사회과학원 민족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임명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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