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란 계절은 모순투성이다. 적어도 수필가들의 눈에 비춰진 가을은 그렇다. 우선 가을은《풍요로운 계절》,《열매의 계절》,《수확의 계절》이고 《희열이 넘치는 보람찬 계절》이다. 그리고 가을은 《그 많은 나무의 잎들에 황금빛의 도금(渡金)을》 시킨 《생애의 황금기인양 잘 성숙된 숲》(마숙현)의 계절이기도 하다. 뿐만아니라 가을은 《외적인 찬란함과 그보다 더 값진 내적인 성숙을》(이지엽) 선물하는 계절이다. 그래서 가을례찬론자들은 《사시절 중에서 가을을 가장 사랑》(정비석)한다고 선언한다. 심지어 가을의 《숲속에서는 고즈넉함이 있을뿐이고 외로움은 없다》(한흑구)고 한다.
그런데 가을 혐오론자들에게 느껴지는 가을은 《텅빈 들판》의 《한없이 쓸쓸한 계절》이고 《락엽이 굴러다니는》 《리별의 계절》이자 《외로운 계절》이고 《고독한 계절》이다. 그리고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고 《우울한 계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사철중에서 가을을 제일 싫어한다》(노천명)고 그 심정을 토로한다.
차분히 음미해보면 례찬론자들은 수확전의 황금들판과 단풍이 곱게 물든 락엽 지기전의 숲을 이야기하고 있고 혐오 자들은 수확후의 텅빈 들판과 잎들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을 련상시키고 있다. 어떻게 보면 풍성한 결실을 위한 합일의 계절인 봄이나 여름과는 달리 가을은 성숙과 분리라는 서로 다른 성격을 함께 하는 계절이다.
가을이 되면 어머니대지는 눈부시게 찬란한 색채와 내실을 이룬 성숙으로 황금기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대지는 그 영광에 집착하지 않고 당신의 소산인 풍성한 열매들을 인간과 동물들에 미련없이 나누어주고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겨울이 가져올 흰색의 이불을 초조하게 기다리게 된다. 이불을 덮지 못한 어머니대지의 라신을 가리여주기 위해 아름다움을 뽐내던 단풍잎들은 나무에서 분리되여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그러나 그들의 분리는 사라짐이 아니다. 어머니 대지의 품으로 돌아온 락엽들이나 추수가 끝난 논밭에 남아있는 곡식의 그루터기들도 봄이 오면 거름으로 되여 새로운 잎이나 열매로 태여나게 된다.
그런데 가을을 쓸쓸한 계절로 묘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늦가을의 산과 들에서 무엇인가를 간과해버린것이 분명하다.
기운이 쇠잔해진 가을햇살이 게으름을 피우면서 찬 서리를 걷어낼 때 누렇게 말라버린 잡초들과 락엽들 사이에 청초하게 피여 있는 들국화의 매력을 잠깐만이라도 느껴본 사람이라면 가을을 《쓸쓸한 계절》이나 《서글픈 계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대여섯살 때 처음으로 들국화를 알게 되였다. 나의 고향인 영길현 쌍하진에서는 보통 10월초에 벼가을을 하게 된다. 가을걷이 때가 되면 나는 할머님을 따라 논밭으로 나가 추수를 마친 논바닥에 흘리어진 벼이삭을 줍거나 빈병을 갖고 다니면서 메뚜기를 잡아 모으기도 했다. 바람이 좀 쌀쌀해질 때 할머니는 금방 베어낸 벼단을 세워 바람막이《집 》을 만들어주었고 나는 그 속에 들어앉아 햇볕을 쪼이곤 했다. 뛰여다니는 메뚜기를 쫓다보면 논밭이 끝나는 논둑까지 가게 되는데 바닥까지 말라버린 작은 도랑을 건너면 자갈들이 뒤섞인 들판이 펼쳐지게 된다. 들판에는 내 키 정도로 자라나 시들어버린 쑥대들과 잡초들이 무성한데 그 사이사이에 이름모를 꽃들이 무더기로 피여있었다. 노란 꽃술을 중앙에 두고 연한 보랏빛 꽃잎들이 동그랗게 둘러있는 야생화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꽃들이 숨막힐 정도로 예쁘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꽃을 한줌 꺾어서 열심히 낫질을 하시는 할머니곁으로 뛰여가 《할매요, 꽃》했더니 《응, 들국화꽃이구나》 하면서 계속 일손을 놀리시였다.
점심때가 되여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시던 할머니는 내가 가지고 놀다가 버린 들국화꽃묶음을 발견하시고 《아무리 임자없이 들판에 피여있는 꽃이라도 일단 꺾었으면 함부로 버릴것이 아니라 집에 가져가 병에 꽂아 두든지 아니면 어떤 용도로 사용해야 한다》고 타이르셨다. 나는 그 꽃다발을 다시 주워 들고 집에 돌아와 몇 개의 병에 나누어 꽂아 창턱에 놓아두었다. 언젠가 할머니는 꽃받침대에서 말라버린 꽃을 따서 내 베개속에 넣어주셨다. 그날부터 한 겨우내 나는 들국화의 특이한 꽃향기에 취해 잠들게 되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들국화를 할머니의 사랑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릴 때부터 꽃중에서 들국화를 제일 사랑하게 되였다. 고향을 떠난후 타향에서 들국화를 볼 때마다 할머님의 사랑으로 커온 어린시절과 고향의 들녘을 회상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천진시 당고구에 주둔하던 해방군부대에서 《단련》할 때, 나는 어느날 홀로 들국화가 활짝 피여있는 바다가 들판에 누워 인생을 반추해 보다가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리워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그날 저녁에 쓴 한시 한수를 인용해본다.
七絶 ---野菊有感
渤海碧濤連天涌, 幽州素雲接地隱. 叢菊兩開兒時願, 孤魂一系南湖心. (1967年10月20日)
그날 나를 울게 한 들국화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속에서 방황하던 나에게는 분명히 망향초(望鄕草)였다. 지난해 10월 중순, 태항산 항일 반소탕 전투승리 60주년을 기념하여 태항산 오지에 위치한 산서성 좌권현에서 개최될 국제학술회의를 주최하기 위하여 태항산을 간적이 있다. 회의가 끝난후 나는 회의참석자들과 함께 태항산에 묻힌 조선의용군렬사들의 전적지와 묘소들을 찾아 참배하게 되였다. 산서성 좌권현과 하북성 섭현, 찬황현의 태항산기슭에 고이 잠들어있는 조선의용군렬사들의 묘소를 찾았을 때, 가는 곳마다 묘소주변에는 한결같이 들국화들이 만개해 있었다.
처음 나는 들국화로 꽃다발을 만들어 렬사들의 령전에 헌화하려고 마음먹었다가 가을바람에 설레이는 들국화꽃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바꿀수밖에 없었다. 태항산은 이미 오상고절(傲霜孤節)의 들국화를 무더기로 선렬들에게 봉헌해 놓았는데 내가 왜 그 꽃들을 꺾어가면서 꽃다발을 만들어야 하는가?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들국화의 숲속에 엎드려 렬사들의 묘소에 재배(再拜)의 큰절을 드렸다. 참배가 끝나고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무엇에 홀린듯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였다. 찬 서리속에서도 고고하게 피여있는 태항산기슭의 들국화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 조선의용군선렬들의 넋으로 내 눈에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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