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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는 천성산
2013년 03월 27일 10시 55분  조회:2492  추천:1  작성자: 회령
수필

말없는 천성산

ㅡ만주국황제 부의의 동생 부걸의 큰딸 혜생의 죽음

혜생이가 19살나이에 죽은후 세월은 금년까지 55년이 지나갔다. 죽은지가 반세기도 넘었지만 혜생이를 아는 사람들은 지금도 애석함을 금치못해한다. 당년에 주은래총리께서는 《침통한 애도의 뜻을 표시한다.》고 하셨다. 나는 혜생이를 모른다. 그런데 며칠전 자료무지를 뒤적이다가 혜생에 관한 자료를 보게 되였다. 기억에 있던 자료였다. 지난 7-80년대의 자료지만 나에게 인상이 깊었던것이다. 나는 오늘 이 자료를 독자들과 함께 음미해 보고저한다.

혜생의 가정배경 및 간력

혜생의 가정신분은 황척으로서 지금말로하면 중앙일급간부의 가정이다. 혜생의 어머니 차아호는 1914년 일본 동경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차아실승은 후작인데 천황페하 다음의 등급이다. 하지만 그어떤 벼슬도 맡지 않았다. 차아호는 상층 가정들의 자녀들만 교육받는 학교를 다녔는데 녀자학습원고등과를 졸업했다. 차아호는 복스럽게 생기고 덕성이 있고 쾌활하며 총명한 녀자였다. 그의 꿈은 존귀한 주부로서의 품위에 맞게 의무와 책임을 참답게 완수하는 외에 유명한 화가로 되는것이였다. 우월한 가정과 환경 그리고 일류교육을 받은 차아호는 훌륭한 처녀로 성장하였다. 당시 일본의 상층사회에서는 차아호를 며느리감으로 견주어 보는 가문이 많았다.

혜생의 아버지 부걸은 만족이다. 그는 1907년 북경에서 순친왕의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순친왕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큰아들의 이름은 부의, 부걸보다 한살 이상이 였다. 1908년 부의는(3살) 소위 즉위를 하여 청나라의 선통황제로 되였다. 나라의 권력행사는 아버지 순친왕이 하였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부의의 선통황제 자리도 끝났다(6살). 1924년 풍옥상에 의하여 고궁에서 쫓겨나자 천진에 있는 일본령사관조계지에서 7년간 생활, 1934년 만주국황제로 되였다. 부의는 일제의 괴뢰황제다. 1945년 만주국이 멸망할때까지 황제의 동생인 부걸은 극히 우월한 조건하에서 생활했다. 1937년 일본륙군사관학교에서 학습중이던 부걸은 그해 1월 차아호와 맞선을 보고 2월에 주일만주국대사관에서 그들의 약혼을 선포한후 4월에 혼례식를 올렸다. 결혼후 부걸은 그냥 일본에 있으면서 학습을 계속 하였다. 그는 사관학교를 졸업한후 이어 천엽보병학교에서 학습하였다. 같은해 10월 차아호는 처음으로 만주에 와서 시집사람들과 만났다. 그해 말 부걸은 학습을 마치고 황제 부의 곁으로 돌아와 만주군 총참모부 기관에서 사업했다.

당시 일본은 중국을 빼앗자고 꿈꾸며 차근차근 실천했다. 드디여 조건이 성숙되자 1931년9월18일 심양에서 사단을 일으키고 단번에 동북을 먹어버렸다. 중국을 수탉이라고 할때 동북은 머리 정도이다. 하지만 대체적인 형세는 점령했다고 할수 있었지만 중국사람들의 항전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또 일본의 립장에서 볼때 동북을 먹은것은 장막극의 제1막에 불과한것이였다. 기름진 수탉의 몸통이 입앞에 있지 않는가! 멋있는 장면은 뒤에 있는데 그 료리법이 절묘하였다. 코앞의 기름진 수탉몸통을 혼자서 말끔히 먹기 위하여 일본은 정치적, 군사적, 행정적, 경제적, 문화적, 심리적, 관방적, 민간적… 하여튼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기세가 상당히 높았다.

그 일환이 만주국 건립이다. 일본은 대체상에서 동북전역을 공제하자《5족협화》(일, 조, 만, 몽, 한족), 《왕도락토》 슬로건을 높히 웨치며1932년 3월 7일, 만주국의 탄생을 세계에 소리 높히 선포하였다. 장춘을《신경》이라고 이름을 고쳐 수도로 정하고 년호는《대동》, 부의를 집정령수로 내세웠다(당시26살). 그리고 1934년 3월《만주제국》이라는 멋드러진 개칭을 하고《집정》을《황제》로 말을 바꾸었다. 년호는《강덕》, 부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코풀기로 또 황제가 되였던것이다(28살). 이상의 1막은 일본의 시나리오이고 주역은 관동군에서 연기를 했는데《집정》이든《황제》든 두말없는 괴뢰기구고 부의는 허수아비, 꼭두각시였다. 그때 사람들은 무례하게도 부의황제페하를《머저리야바 (고쟁이)부시리》, 《멍텅구리 부의데기》, 《허재비》… 하여튼, 우습고 놀리기 좋은 말이란 말은 다 꺼리낌없이 하여댔는데(물론 마음맞는 사람들끼리 그런 짓거리를 했다.) 부의로 말하면 억울하고 창피한 노릇이였겠으나 할수없는 일이였다. 벙어리가 물만두 먹기로 그도 속이 뻔하니까… 부의는 사람들이 말하는것과같이 머저리는 아니였다. 그러나 처지가 그렇게 되여먹은데는 아무리 황제인들 무슨 용빼는 수가 있었으랴.

1945년 8월 18일 아침1시, 통화지구 대률자에 도망쳐간(만주제국을 좌지우지 하던 관동군은 만주제국정부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제코가 석잔데 부의따위가 다 누구 아들이냐?!) 부의네들은 소위 긴급참의부회의를 열고 만주제국의 해체와 황제 자리에서의 부의의 퇴위를 결정하였다. 하여튼 부의의 팔자소관도 어찌보면 불쌍하다. 부의, 부걸 등은 안해, 첩까지도 떼여놓고(비행기가 작아서) 첫패로 통화비행장에서 일본으로 도망치기로 했는데 웬걸! 그만 몽땅《마우재》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날부터 아낙네들은 중국땅에서 갖은 고생과 우여곡절을 겪게 되였다. 황후인 완용씨는 도문까지 굴러왔다가 죽고 말았다. 정작 죽일놈들인 사내녀석들은 공산당에 잡히운 덕에 후날 모두 멀쩡히 살았을 뿐만아니라 당국의 보호, 관심, 우대를 만끽하면서 만년을 행복하게 살았다.

이쯤하면 혜생의 가정배경을 충분히 짐작할수 있으리라 사료된다. 아래에 혜생의 간력을 소개한다.

일본의 대정방침을 실시하는 제1막 중책은 관동군이 맡았다. 관동군사령부에서는 동북발판을 더욱 확고히 다지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일본종 자(화족ㅡ일본인)를 하나 만들기로 결정했다. 황제인 부의한테서 황태자가 나오기는 코집이 글러먹었고… 하여 눈독을 부걸에게 돌렸다. 관동군사령부는 말그대로 중매쟁이로 뛰여 부걸과 차아호의 정약결혼을 만들어 냈다. 1937년 1월18일 저녘, 부걸과 차아호의 맞선 자리가 안배되였는데 그들이 서로 첫눈에 반해 버릴줄이야! 관동군으로 보나 당사자들로 보나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좌우간 모두가 입이 떡 벌어져서 좋아했는데 처음에는《절대로 안된다!》고 딱 잡아떼든 차아호의 외할머니도 덩실덩실 춤을 췄다. 대국의 황실과 사돈이 된다는게 그게 어디 보통 경사인가?! 4월3일, 결혼식을 올린후 이듬해 2월26일 혜생이를 낳았다.

혜생이는 일본에서 태여난후 줄곧 일본에서 자랐다. 혜생이가 다니던 학습원은 1947년부터 개혁을 했는데 이전에 황족자녀만 다니던 학교를 평민백성들의 자녀들도 다닐수 있는 학교로 만들어버렸다. 혜생이로 말할때 전후의 황족들의 생활은 매우 고생스러운것이였으나 혜생은 순박하면서도 활발한 소녀로 자랐다.

차아호는 모진 고난을 헤치고 혜생이보다 두살어린 딸 호생이를 데리고1947년1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들 세 모녀는 어느날 남편, 아버지를 만나 함께 살 날을 학수고대하며 매일매일을 살아나갔다. 통화지구 대률자에서 헤여질때 부걸은 안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혜생이를 잘 데리고 있겠으니 부인은 호생이와 함께 될수록 빨리 따라 오시오. 우리 네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재미있게 살게 되겠으니 어떠한 고생이 있어도 극복하고 꼭 돌아오시오.” 그러던 남편은 종무소식이 되였다. 1949년까지 쏘련에 압송되였던 일본전쟁포로들은 기본상 귀국하였다. 차아호는 그들에게서 부의, 부걸이 쏘련 백력수용소에 무사히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다시 종무소식이 되였다.

그 당시 두 딸애는 활발히 성장하고있었다. 혜생은 학교에서 학습도 품행도 제일 우수한 학생이였고 음악에 흥취를 갖고있어 바이올린, 피아노, 성악, 작곡에서 소질과 재능을 뚜렷이 보이였다. 혜생이는 특별히 책 보기를 즐겼고 가끔씩 시도 썼다.

혜생은 자기가 청나라황제의 직계후대라는것에 매우 긍지를 가지고있었다. 그는 중국글과 말을 배우고 싶어했을뿐더러 중국의 력사, 풍속, 습관, 음식, 례절, 복장 등 중국문화를 알고싶어 했다. 차아호는 유명한 중국인 학자인 오숙선생이 과외지도로 하는 중문학습반에 혜생이를 다니게 하였다. 학습, 독서에 혜생은 지나치게 몰두했으며 중문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웬만한 중문서적도 읽을수 있었다. 그가 읽은 책들중에는 《청조3백년사》,《자금성의 려명》,《서태후시종기》, 《공산당 선언》, 《국민경제학비판대강》, 《경화연운》, 《실천론》, 《모순론》, 《방황》, 《중국발전사》, 《순리성비판》, 《존재주의》등 좌익사상서적들도 많았다. 혜생이가 이런 서적을 보는데 대하여 차아호는 “아직은 일찍하다.”고 하면서 견제하려 했다. 어머니의 견해에 대하여 혜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중국은 공산주의를 신앙하고있어요. 만약 자기 조국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조국의 버림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요. 어머니도 이런책을 좀 보세요.” 대학입시를 앞두고 혜생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중국에서는 일하지 않는자는 먹지말라고 합니다. 나는 마땅히 전업지식을 갖추어야 하겠어요.” 혜생은 대학을 지망할때 동경대학 철학과를 지망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전업 지망생중 녀자로는 혜생이 하나뿐이였다. 주변사람들은 남자들속에 녀자가 혼자 끼운다는건 어쨌든 좋지 않다고 하였다. 하여 혜생은 학습원의 중문전업에 붙었다. 하지만 학습원에는 철학과가 없었다. 혜생은 자기의 포부는 조국에 가서 교원사업을 하며 중일우호를 위하여 교량역할을 하는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로하여 우익들의 눈총을 받았다. 당시 그는 이미 표준적인 중국어를 류창하게 할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대학에 붙은후 혜생은 더욱 생기발랄 하였으며 행동이 광명정대했다. 학습과 문체, 려행, 다과회 등등 집체활동에 빠짐이 없었고 친구들에 대하여 너그럽고 열정적이고 도움을 청하면 꼭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하여 주변으로부터 평판이 좋았다. 어느한번 다과회에서 동학들은 “금후 누가 가장 훌륭한 안해로 될것인가?”하는 투표를 하였다. 그 많은 남녀동학들의 투표는 만장일치로 혜생이였다.

차아호의 당시 생활은 퍼그나 간고했다. 차아호가 아이들에게 글자쓰기를 가르치며 조금 버는 돈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그들 일가는 중국인으로 획분 되다보니 전쟁후에 군인들에게 내여주는 정부보조비도 그들에게는 몫이 없었다. 생활은 유족하지 못했지만 딸애의 건전한 성장이 둘도 없는 힘이였고 남편을 기다리는것이 희망의 등대였다. 남편과 헤어진지 어느덧 10년세월이 되였으나 한번도 그와 직접적인 음신이 없었다. 그간 차아호는 시아버지를 비롯하여 10여명 사람들에게 편지를 수십통 썼다. 중국홍십자회, 스위스홍십자회총부에도 편지를 두세번 보냈으나 모두가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1954년 어느날, 일본홍십자회에서 편지 한통이 날아왔는데 우표에는 중국 무순시우정국 도장이 찍혀 있었다!! 남편에게서 온 편지였다. 편지 내용은 대개 이러했다. “무순전쟁범감옥에 건겅히 있다. 혜생이가 주은래총리각하께 보낸 편지를 각하께서 즉시 나에게 보내주어… 각하께서는 편지를 잘 썼다고 글자를 곱게 썼다고 칭찬하시기까지 했는데, 정말 혜생이가 직접 쓴거 옳은가? 혜생의 사진도 받았다…” 차아호는 혜생이를 와락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며 일희일비, 여광여취해 하였다. 10년세월! 어머니 아버지가 못해낸 일을 16살 혜생이가 해낸것이다.


혜생의 죽음


1957년12월4일아침, 혜생이는 종전과 다름없이 등교를 하면서 “어머니! 학교 갔다 오겠습니다.”하고 명랑한 소리로 인사말을 남기고 집문을 나섰다. 그로부터 혜생은 실종 되였다.

저녘때가 되였다. 혜생이는 오지 않았다. 이런일은 종래로 없었다. 좀 늦어지게 되여도 혜생이는 집에 꼭 련락을 하는 아이였다. 어머나와 외할머니가 조급해 하며 불안해 하니 작은딸이 말했다. “8시에 학교문을 잠그니 그때면 꼭 올거얘요. 그때까지 기다리세요.” 8시30분, 9시, 9시30분, 10시… 혜생은 감감 무소식이였다. 이런 상황이면 누구나 다 그렇듯 차아호와 그의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 모두가 경악과 불안으로 당황망조하게 되였다. 그날따라 차아호는 된감기로 고열이 나고 오한, 두통, 전신이 쑤셨으나 그런것보다 경황실색으로 기절하기 직전이였다.

이튿날 9시 경시청에 제보, 동시에 혜생의 동학들을 찾아다니며 탐문, 그리고《매일신문》과 라디오, 텔레비죤에 혜생의 사진과 함께 사람찾는 광고를 냈다. 5일 밤 늦게까지 장악한 단서로는 혜생의 동학 대구보군도 4일 점심후 실종 되였다는것밖에 없었다. 대구보는 북도 어느 시골에서 온 학습성적이 낮고 정서가 불온정하며 거칠고 괴벽한 성미의 청년이였다. 그는 혜생이를 자주 직접거리던데로부터 아주 정식으로 련애를 걸고 무척 집착하였다. 이 일로 하여 혜생이는 골치아파 했었다. 혜생은 그에게 전혀 련애감정이 없다고 했다. 혜생의 내심한 담화와 엄숙한 태도앞에서 대구보는 단념하는듯 했다. 혜생은 그가 학습에서 방조를 청하면 여전히 전과같이 대해주며 대범하게 지냈다. 실종전날 저녘 대구보는 동학 A와 함께 다방에 가서 술을 마시며 퇴학하겠다느니, 죽고싶다느니, 혜생이는 자기신분을 고집한다느니…하며 횡설수설 하였다. A는 여러면으로 설복하고 위안해 주면서 네가 진정으로 혜생이를 좋아한다면 그를 존중하고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를 하였다고 한다. 6일, 결정적인 단서가 들어왔다. 택시회사의 한 운전기사로부터 혜생이와(예쁜처녀여서 인상이 깊었다.) 어떤청년을 천성산유람지로 실어갔다는것이였다. 차에서 혜생은 청년에게 말하기를 “이곳에 오니 이젠 마음이 편안해 졌지? 우리 될수록 빨리 돌아가자.”라고 말하더라고 했다. 그리고 혜생이가 돌아가는 발차시간을 재삼 묻더라고 하였다. 그날부터 즉각 천성산 수색이 진행 되였다. 가족, 경찰, 수색대, 학생, 선생 도합 400여명이 천성산 수색에 나섰다. 12월10일오후 혜생이와 대구보의 사체를 찾았다. 저녘 5시, 쓰러진 차아호를 보살피던 그의 녀동생이 전화로 알려오는 소식을 받았다.

혜생이와 대구보는 백일홍나무 밑에 쓰러져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오른쪽 태양혈에 총을 맞았고 일본제 구14년식권총이 대구보의 오른손에 쥐여져 있었다. 조사에 의하면 이 권총은 대구보의 아버지가 만주국에서 헌병을 할때 사용하던 것인데 일본으로 도주해 올때 감추어 가지고 온것이였다. 대구보의 집은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고 어머니에게 폭행을 하는 등 아주 스산한 상황이였다. 대구보는 우익계 청년이였다.

혜생이가 실종된 후 매체는 벌떼처럼 떠들썩 했다. 《천국의 련》, 《천성산에서의 련인》, 《천성산의 비가》, 《대학생의 비련》, 《련인의 동반사》… 대서특필 요란하였다.

후에 차아호는 이런말을 하였다. “혜생은 대구보를 근본상 사랑하지 않았고 련애란 운운할 여지도 없다. 혜생은 자살한것이 아니다.” “우리가 중국과 서신거래를 하는데 대하여 어떤사람들은 달갑게 보지 않았다. 그리고 혜생이가 금후 중일우호교량역활을 할것이라고 말하는데 대하여 그러지 말라는 협박성 익명전화가 여러번 있었다. 혜생이는 듣는체도 하지 않았다.”

혜생의 죽음은 단순히 어떤자의 악행인가? 아니면, 어떤 심층의 내역이 있는걸가… 차아호는 생의 마감날까지 혜생이를 가슴에 묻었다…

1961년5월, 차아호는 주은래총리의 따뜻한 배려로 중국방문을 하게 되였다. 그의 일행으로는 막내딸, 어머니, 막내녀동생, 그리고 만주시절 남편의 부하였던 궁하명호 다섯이였다. 차아호는 혜생의 골회를 안고 16년만에 남편의 품에 안겼다.

5월 어느날, 주은래총리께서는 연회를 베풀어 차아호네를 초대하였는데 참가한 사람들로는 일본에서 온 사람들과 부의, 부걸, 그리고 친척들, 로사(저명작가)부부, 료승지 등 여러명이였다. 총리께서는 그렇게 다망하심에도 그들을 연회 3시간전에 오게 하고는 친절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석상에서 총리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였다.

“… 만주국이 붕괴될때 우리는 애신줴러일가가 지금 동북에 있는데 그들을 찾아내여 타당하게 보호하라고 지시를 했다. 그런데 지시가 기층에 전달되지 못하여 당신들이 고생하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감과 미안을 다시한번 표시한다… 한시기 우리가 당신들을 무순에 숨겨 놓았는데 당신들 모두는 여러면으로 생각이 많고 근심이 컸을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한것은 당신들을 보호하기 위한것이다. 툭 털어놓고 말할때 백성들이 당신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우리는 다 알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이 모든것이 끝났다. 우리 모두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의 피해자다. 이제부터 우리는 좋은벗이 되자!... 비록 늦었지만 나는 혜생의 죽음에 대하여 몹시 침통한 애도를 표시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너무도 애석하게 하는, 좋은 처녀를 잃은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는 나에게 직접 편지를 보낸적이 있는데 나는 그와 같은 애를 아주 좋아한다… 너는(작은딸) 중국사람이지만, 너의 부모들은 중국에서 살기로 결정했지만, 너의 미래는 너 자신이 결정하거라. 네가 좋아하는 생활방식을 선택하여라. 혼인같은것도 그렇다. 일본사람을 좋아하면 일본사람과 결혼하고 억지로 꼭 중국사람을 찾을 필요는 없다…”

연회석상에서 총리께서는 “왕보천”의 옛말을 하면서 (그들 부부는 18년을 리별해 살면서 온갖 간난신고를 껶었다. 18년후에 만났을 때에는 황제와 황후였다.) “당신들은 그들과 비교할때 2년이 작지만 그러나 당신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영광스러운 공민이 되였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1972년 중일수교가 이루어 지고 1978년에는 “중일우호조약”이 체결되였다. 만약 혜생이가 살아있다면 그는 즐겁게 피아노를 치고 바이올린을 켜고 또 목청껏 노래를 했을것이다. 생전에 그는 기쁜일이 있으면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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