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huiling 블로그홈 | 로그인
회령
<< 10월 2020 >>
    123
45678910
11121314151617
18192021222324
25262728293031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문학 -> 미발표작품 -> 수필

나의카테고리 : 작품

졸업사진
2018년 12월 10일 12시 34분  조회:732  추천:0  작성자: 회령
     수기
                                                  졸업사진
                                                                                                             회령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귀중하고 가장 행복한 시절이 어느 시절인가? 사람마다 경력이 다르다보니 그시절이 서로 다를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청소년시절이 가장 귀중하고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는 견해를 동의할 것이다.

예로부터 청소년시절을 인생의 황금시절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시절에 인생의 기초를 딱기 때문이다. 인생은 물론이고 모든 일에서 제일 관건적이고 중대한 일이 기초공정이다.

나는 청소년시절을 고스란히 학창에서 보냈다. 소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기 까지 선생님들은 나에게 인생의 도리를 가르쳐 주었고 지식의 힘을 키워주었다.

50년대와 60년대에 걸친 나의 학창시절은 나라적으로 수난의 년대였다. 하지만, 중국공산당과 모택동주석이 계셨기에 새중국이 성립되여 부모님들께는 살길이 열리고 나에게는 학교문이 열리였다. 이말은 누구에게 아첨하느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실지 사실이 그랬다.

나는 광복전에 아주 가난한 집에서 세상에 태여 났다. 내가 어릴때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내위로 녀자애가 둘이 태여났댔는데 모두 돐이 되기전에 죽고 세번째로 내가 태여 났는데 순전히 명이 길어서 살아났다는 것이였다. 때는 왜놈들이 최후발악을 하던때여서 식민지 조선사람들의 생활이란 더 말할수 없이 극도로 비참하였다고 한다. 우리집 형편이란 어른들도 그날그날을 겨우 연명하며 허덕이는 상태였다. 하다보니 피덩이인 내가 살수 있으리라고는 부모님들부터 믿지 않았다고 한다.

광복이 된 이듬해 우리집은 두만강을 건너 중국 연변땅 샘물깨로 왔다. 이곳은 어머니의 고향이고 시냇물 건너 뒷마을은 아버지의 고향마을이였다. 새중국은 우리집에 생의 광명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몸뿐인 우리는 다른집들 보다 훨씬 더 가난하였다. 게다가 어머니는 이미전부터 여러가지 신병으로 자주 앓기까지 했다. 다행인것은 아버지가 튼튼하고 내가 별탈없이 자라는 것이였다.

소학교졸업사진

나는 한쪽길이 6리나 되는 소학교를 부지런히 다니였다. 버들개지가 움틀때부터 서리가 하얗게 내릴때까지 나는 맨발바람으로 학교를 다니였다. 겨울에는 아버지가 틀어준 투세기(벼짚으로 버선처럼 만든 짚신)를 맨발에 신고 다녔다.

나는 공부를 잘 해서 소문이 났다. 작란은 심해도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말씀을 명심해 들었고 집에 와서는 부모님들의 말씀을 잘들었다. 나는 반에서 첯번째로 소년선봉대에 들었고 반장을 줄곧 하였다. 그때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은 우리들에게 공부를 잘해서 크면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늘 말하였다. 나는 공부를 잘하라는 말은 알수있었지만 훌륭한 사람이란 어떤사람인지 알수 없었다. 하지만 꼭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명심하였다.

어느덧 6년이 지나 우리는 소학교를 졸업하게 되였다. 졸업식은 전교적인 행사로 진행하였다. 하급생 대표가 축사를 한후 졸업생 대표가 답사를 했는데 답사는 반주임인 한창옥선생님이 쓴것이고 내가 읽었다. 답사는 금후 더욱 많은 지식을 배워 훌륭한 사람으로 되겠다는것, 후배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으며 학습에 노력하라는 등 내용이였다. 이어 우등생과 개근생(결석, 지각, 조퇴가 한번도 없는 학생.)에게 학교에서 등사기로 찍은 상장을 수여 하였다. 나는 어머니가 자주 앓아 결석이 많았기에 개근생은 못되고 최우등상장을 탔다. 마지막순은 교장선생님의 격려사가 있은후 “졸업가”노래를 불렀다. 1절은 “진리의 새학문을 터득하 고서…”이렇게 시작이 되는데 1절은 졸업생들이 부르고 2절은 “광활한 무대에서 잘싸워 주세요.”하고 재학생들이 불렀다.

졸업식이 끝나자 우리는 운동장에 나가 졸업사진을 찍었다. 사진사는 구정부 마을에서 왔는데 그는 세다리 사진기를 세워놓고 포대기 만한 검정보자기를 쓰고 사진기를 조절하느라 역사를 하였다. 사진기도 처음이고 찍는것도 처음인 나는 무척 긴장하고도 신기했다. 사진사는 움직이지 말라 눈을 깜빡거리지 말라 하며 찍는다 찍는다 하고 거듭 주의를 주었다. 우리는 잔뜩 긴장해서 나무막대처럼 꼿꼿히 서 있었다.

학교에서는 졸업사진을 가질 사람은 30전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때 우리집에는 말그대로 1전한푼도 없었기에 나는 졸업사진을 살수 없었다. 나처럼 졸업사진을 사지못하는 동무가 몇이 되였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소학교졸업사진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교장선생님과 도수높은 근시경을 걸었던 한창옥선생님의 모습은 나의 머리속에 지금도 빛나는 영상으로 새겨져 있다.

초중졸업사진

내가 다닌 초중학교는 구정부마을에 있었는데 우리집에서는 한쪽길이 25리였다, 나는 시험을 잘쳐서 중학교에 철썩 붙었다. 마을사람들이 “너, 중학교에 붙었다지! 이젠 중학생이 되였구나!”하고 칭찬을 하면 나는 입이 뻥긋해서 무척 좋아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못하는 동창들이 그때는 푸술했다. 그들은 열네댓에 호미자루를 쥐고 쇠궁둥이를 뚜드리는 팔자가 되였다.

학교길이 30리이상이 되는 동학들은 방법없이 구정부마을에서 하숙을 했지만 절대부분은 통학을 했다. 우리집은 여전히 가난하고 어머니는 약한첩 쓰지못하고 지병으로 고생하셧다. 초중 3년간 나는 정심밥을 싸는법이 없었고 여름철에는 맨발로 학교에 다녔다. 당시, 나와같은 맨발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겨울에는 감발을 하고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솜옷이며 털모자는 꿈도 꾸지못했다. 학교다닐때 제일 싫은 날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였다. 비옷이며 우산은 구경도 못하는 산골인지라 비만 오면 노배기로 비를 맞으며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러나 책은 한번도 비에 젖지 않았다. 그것은 책가방을 해바라기잎이거나 호박잎으로 감쌌기때문이다.

왕복 50리를 3년이나 걸어다니며 공부를 한 나도 고생을 했겠지만 어머니는 나보다 더 모진 고생을 하였다. 어머니는 병환으로 운신을 못해도 나의 아침은 거르지 않았다. 닭이 첯홰를 울면 어머니는 일어나서 아침을 끓였다. 닭이 두번째홰를 치면 정신없이 자고있는 나를 깨웠다.

어느덧 3년이 지나 초중을 졸업하게 되였다. 졸업시 우리는 지망을 선택하게 되였는데, 나는 아무데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것은 집형편이 더는 공부를 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집은 여전히 가난에서 춰서지 못했고 어머니 병환은 나날이 더 심해갔다. 나는 3년간 조학금을 받았기에 학교를 다닐수 있었다. 내가 지망선택을 하지 않으니 반주임인 윤영일선생님은 나와 세번이나 담화를 하며 나를 설복하였다. 선생님은 그어떤 곤난이 있어도 고중에 가고 대학에 가고 앞으로 박사까지 꼭 되여야 한다고 하였다. 선생님의 격려는 고맙고 감동적이 였지만 나는 접수할수 없었다. 내가 쿨쩍거리며 울자 선생님도 눈물을 씻었다.
며칠후, 아버지가 나에게 고중시험을 치라고 하였다. 그간 윤영일선생님이 향정부(당시는 인민공사 임.)와 대대(지금의 촌.) 생산대까지 령도를 찿아다니며 나의 전도를 토론했든 것이다. 토론결과 생산대에서는 나의 아버지를 겨울에는 삼도만목 재부업에 보내고 여름에는 두만강뗏목부업에 보내기로, 수입은 생산대에 량식대를 물고 남어지는 가정에서 쓰기로 했던것이다. 나는 어린가슴에도 파도같이 감격이 솟구치고 무한한 힘이 솟구치였다.

졸업하던 날 어머니는 나에게 1원20전을 주면서 졸업사진을 사고 남어지가 있으면 국밥 한그릇을(12전) 사 먹으라고 하였다. 나는 그돈으로 동생에게 줄 그림책을 세개 사고 남어지 38전은 어머니에게 도로 드렸다. 나는 졸업사진을 사지 못했지만 훗날 미봉하리라 생각하며 별로 섭섭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까지 초중때 졸업사진을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고중에 수석으로 입학이 되자 통지서를 친히 가지고 우리집에까지 와서 나를 와락 끌어안고 격동하시던 윤영일선생님의 모습은 오늘도 생생하다.

고중졸업사진

고중에 간후 나는 일년 사계절 매일 신을 신고 다닐수 있게 되엿다. 나는 조학금을 받으며 학교숙사에서 하숙을 했다. 식당과 숙사조건은 매우 렬악했지만 나에게는 너무도 호강이였다.

나는 방학이면 집에가서 닷새 이상을 놀지 않았다. 집으로 오갈때면 100여리 먼길을 꼭 걸어서 다니였다. 방학이면 역전이거나 공사장에 가서 품팔이를 하였고 3년동안 수건 한장 치솔 한대를 사용 하였다. 3년내 나는 음식점에 한번도 간적이 없었을뿐만 아니라 삥궐이거나 사이다 한병을 사 먹은적이 없다.

학교에서는 우리들에게 정치사상교육을 심도있게 하였는데 나는 그때 공산주의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기본상 수립하게 되였다. 하여 공청단에도 가입했고 학생회 간부로 되기도 했으나 내가 명심하는건 첯째도 학습 둘째도 학습이였다. 나는 학습을 잘하여 좋은 대학에 가며 금후 박사가 되여 당과 국가와 인민의 은덕에 보답하며 고마운 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하며 훌륭한 사람이 되여야 한다는 일념뿐이였다.

고중 3년은 그야말로 번개같이 지나갔다. 나는 한푼이라도 아끼는 버릇때문에 1원50전을 팔면 되는 졸업사진을 사지 않았다. 그러면서 역시 훗날에 미봉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졸업사진을 미봉하지 못했다. 학교가 커서 선생님들도 많고 동창들도 많아선지 지금 기억되는 선생님과 동창이 얼마되지 않는다. 지어는 나에게 련애를 걸었던 녀동창이 누구던지 생각나지 않는다. 나의 청춘시절은 학습 한가지로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후회됨은 하나도 없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참으로 보람이 있었고 나의 인생에서 가장 귀중하고 고마운 순간이 였다.

대학졸업사진

나는 청화대학에 합격이 되였다. 그때의 심정을 지금도 무슨말로 형용했으면 좋겠는지 모르겠다. 기쁨으로 흥분되고 천사만사로 엉킨 무량한 감개는 일희일비의 눈물이 솟게 하였다.

당시의 정세는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감하고 붉은기가 숲을 이뤘지만 우리집은 더욱 쇠락했다. 어머니는 아주 병석에 눕고 아버지도 폴삭했다. 살림은 녀동생이 그나마 지탱하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학교로 갔다. 경비는 마을사람들의 방조와 신용사 대출로 그래도 마련이 되였다. 나의 손에는 80여원의 돈이 있었다. 이른새벽 나는 어머니의 눈물을 딱아드리고 괴나리 보짐을 메고 길을 떠났다. 150여리의 먼길을 단숨에 걸어 저녘켠에 연길에 대여 북경행 기차를 타게 되였다. 기차를 처음 타 본다. 차창으로 각일각 황혼이 짙어가는 마을들과 산천을 바라보는 나의 눈앞에는 아버지 어머니 어린 녀동생의 모습이 멈춰 서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주루루 눈물을 흘렸다. 나는 새삼스레 포부를 다지며 뜨거운 눈물을 딱았다. 그리고 보따리를 풀고 새벽에 어머니가 싸 준 보자기를 꺼냈다. 그것은 호박잎으로 싸 넣은 조개떡이 였다. 나는 그때에야 온하루 물 한모금도 먹지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경에서의 나의 대학시절은 더욱 오직 학습뿐이 였다. 내가 목숨을 다하여 해야 할 일은 이 학습뿐이라고 나는 인정했던 것이다. 나는 북경에서 4년을 청화원 밖을 몇번 나가지 않았다. 천안문광장에 두엇친구들과 함께 가서 사진을 한번 찍고 그 외에는 학교의 단체행사로 몇번 외출을 했다. 4년간 나는 한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대신 편지를 자주 하고 사진을 몇장 보냈다.
청화대학에서 나는 입당을 했고 정말로 마음껏 공부를 했다. 졸업할 림박에 나는 공비생으로 일본류학을 가게 되였다. 그때 4년만에 피끗 집에 다녀오게 되였는데, 내가 집에 도착 한 그날의 정경을 나는 여기서 더 써내려갈수 없다. 어머니는 14일 전에 49세를 일기로 사망했던 것이다…

학교에 돌아온후 나는 참으로 슬픔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다. 모든일에 관심도 흥취도 없었고 허탈했다. 졸업으로 분주하던 나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고 나는 수속을 마치고 일본으로 떠나갔다. 졸업사진은 어떻게 되였는지 나는 지금도 생각나지 않는다. 하여튼, 내손에 없는것만은 사실이다.

16년 세월을 일심정력으로 학습에 몰두하며 학교를 다녔으나 졸업사진이 한장도 없다는 것은 지금와서 볼때 섭섭한 일이고 유감이다. 그러나 나의 학창시절은 자랑스럽다.

                                                                                                               96.9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전체 [ 1 ]

1   작성자 : jch
날자:2020-05-09 14:19:36
잘 읽었습니다.항상 건강하시고 좋은글을 더 많이
쓰시기를 기원합니다!
Total : 158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58 형식주의에 대한 연구 2020-10-13 0 140
157 찌그러진 기와집 2020-09-11 0 186
156 줄욕에 대한 변명 2020-08-09 0 149
155 김정권씨에게 약간의 건의 2020-07-31 0 217
154 (수필) 엷어가는 인정 2020-06-23 0 337
153 강청 일화 2020-05-09 0 320
152 설 기분 2020-05-01 2 270
151 간신들에 대한 연구 2020-03-11 0 356
150 글을 쓰는 자세 2020-02-14 0 377
149 생진소감 2020-02-04 2 403
148 애국주의에 대한 생각 2020-01-03 0 305
147 로년의 자세(6) 2019-12-30 0 228
146 로년의 자세(5) 2019-12-27 0 250
145 로년의 자세(4) 2019-12-23 0 215
144 로년의 자세(3) 2019-12-20 0 236
143 로년의 자세(2) 2019-12-16 0 274
142 로년의 자세(1) 2019-12-12 0 357
141 구명은인 2019-11-24 0 464
140 과불급의 모범 2019-09-21 0 373
139 쌀독에서 인심 난다 2019-08-02 0 468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칼럼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潮歌网) • 연변두만강국제정보항(延边图们江地区国际信息港) •아리랑주간(阿里郎周刊)
地址:吉林省延吉市光明街89号A座9001室 电子邮件: postmaster@zoglo.net 电话号码: 0433) 251-7898 251-8178
吉林省互联网出版备案登记证 [吉新出网备字61号] | 增值电信业务经营许可证 [吉B-2-4-20080054] [吉ICP备20003111号]
Copyright C 2005-2016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