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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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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형식주의에 대한 연구 댓글:  조회:240  추천:1  2020-10-13
     수필                                     형식주의에 대한 연구                                                                                                                  회령 래일은 중추절 ㅡ 한가위 ㅡ 농력(달력 월력 음력) 팔월 열닷새 ㅡ 추석명절이다. 옛날부터 이날을 우리 조선사람들은 큰 명절로 잘 쇠였다. 그것은, 이맘때쯤이면 그해 농사일이 기본상에서 끝나고 작황도 기본상에서 결정이 나고 이른봄부터 비지땀을 흘리며 일해 온 농부들이 시름놓고 한쉼을 푹 쉴수있는 고비(시간대)기 때문이다. 천하지대본인 농사에서 이제 앞에 남은것은 가을과 타작뿐인데, 그해세월이 순풍세우였고 이제 앞으로도 천재지변만 없으면 올해 농사는 순리로 끝나는거다. 가을일도 무척 힘든일이긴 하지만 수확의 기쁨은 농부들만이 즐기는 락이다. 하지만, 그건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다. 추석전후의 한고비를, 대개 농력8월을 어슬렁8월 혹은 건들8월이라고 한다. 가을까지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기에 농부들은 호미며 보습을 씻어 걸어놓은후 슬슬 땔나무를 하고 선기슴(기음. 밭의 큰풀뽑기)을 하기도 하고 약초며 버섯이며 머루 다래 사냥도 한다. 바를 들일 피겻(피나무껍질)을 장만하기도 하고 보치(봇나무ㅡ짜작나무껍질.시관을 매장할때 관위와 주변을 둘러싸는데 주로 쓴다.)를 벗겨오기도 한다. 사실은 어슬렁8월이요 건들8월이요 하지만 농부의 일손은 그냥 있다. 참으로 무한한 농부의 일생이다… 조상님들께옵서 달이 횅창 밝은 8월15일을 추석명절로 결정한것이 언제고 또 왜서인지, 황제페하의 독단이신지 아니면 정치국상무위원회 집체결정인지는 모르겠으나, 당나라때에 벌써 한집식구들이 단란히 모여앉아 월병을 먹으며 달구경을 했다고 하니 추석은 퍽 오래 된 민속절이다. 근년에 와서 우리중국에서는 나라적으로 추석을 법적공휴일로 정하고 중화민족(56개 민족으로 구성되였음.)들이 추석을 더욱 잘 쇠고있다. 그런데, 쇠는 형식에서는 구성원 민족들마다 특점이 있다. 성묘는 다 하는 중차대한 행사이지만 즐기는 형식은 부동한 점이 많다. 긴단히 살펴봐도 한족들은 지금도 월병을 민법통칙마냥 지키며 꼭 먹는데, 안 먹겠다고 떼질쓰는 개구쟁이 한테도 기어이 한쪼각이라도 주둥이에 먹이고야 만다. 그래야 둥굴둥굴 잘 굴러나가고 집식구들이 흩어지는 일이 없이 단란히 뭉쳐 잘 산다고 믿는다. 그리고 달구경을 한다. 우리조선족은 형식이 꽤 많다. 농촌마을을 들여다 보면 재밋게, 알뜰히 추석을 쇠는것이 보인다. 힘든 농사일로 땀에 절어 시큼하고 누린내 나는, 흙물 풀물이 잔뜩 든 헌옷을 벗어팽개치고 깨끗히 때밀이를 한후 입쌀풀을 먹여 다린 흰바지 흰저고리를 쉬원히 입는다. 명절음식으로는 식량사정이 되는 집들에서는 곰물밴새(송편)를 하고 대부분 집들에서는 떡같은건 별로 못하고 소고기국에 이팝을 어쩌다가 맛있게 먹었다. 그것은 추석이면 소를 잡아먹는 풍습에 따라 마을추렴으로 몇달간 풀살을 잘올린 소를 잡기에 소고기맛을 보게되는 것이다. 인구당 석량중이 돌아가게되면 한칼 잘먹는 셈이되였다. 아이식구가 많은 집들에서는 분배몫이 많아 흐믓해 하였지만 아이가 없거나 한, 둘뿐인 집들에서는 찌뿌둥 해 하였다. 하지만, 아이가 많은 집들에서 한편으로 미안해 하면 “좋은걸 만나면 아이들이 더 먹는다.”고 하며 대범히 넘어갔다. “4청”과 “문혁”기간에는 자본주의 꼬리를 잘라버리는 투쟁과 수정주의와 사심을 뽑아버리는 투쟁을 점점 더 심도있게 진행하다보니 쇠고기는 물론이고 추석바심으로 먹던 올벼농사도 걷어치웠다. 웬간한 명절은 타파해 버리고 “네가지 낡은것”(破4舊즉 낡은사상 문화 풍속 습관)은 짓부셔 버렸다. 푸짐하게 먹을 형편도 아니건먼 근검소박을 해야한다고 웨쳤다. 아침후에는 성묘를 간다. 성묘때문에 추석이 생겼다고 사람들은 믿다싶히 하였다. 멀리서 하루 혹은 이삼일 품을 들여서라도 성묘를 했다. 나의 큰외삼촌은 궁둥이에 낫자루를 차고 피겻노끈망태기에 고구마술 한병, 입쌀구비(구운기름떡) 석장, 삶은닭알 세알, 마른명테 한개를 넣어 메고는 온하루 성묘를 다니였다. 어느해 추석땐가 내가 한번 외삼촌에게 로(증조)할아버지, 로할머니 산소에는 이젠 다니지 않아도 되지않는가고 말을 했다가 눈알이 쑥 빠지게 줄욕을 먹은일이 있다. 그것은, 외삼촌의 로할아버지, 로할머니 산소는 알미대산골치기(막바지)에 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는 갈매골 중구품(중간쯤)에 있었는데 두곳은 남북으로 30여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외삼촌이 너무 힘들어 해서 생각느라 걱정한것이 싱거운 짓거리로 돼서 줄욕을 벌어 얻어먹은 것이다. 그날, 외삼촌은 “조상을 모르는 새끼는 개새끼다!”하고 힘있게 론단을 내리고는 잠이들었다. 50도고구마술을 한병이나 다 마여가면서 힘든일을 하고나니 술기운도 올라오고 무척 지치기도 했든것이다. 그때가 외삼촌의 년세가 예순몇이였는데, 그의 두 아들은 갈매골까지는 따라가고 알미대는 나와 외삼촌이 성묘를 갔다. 두 아들녀석들은 아직은 어리여서, 그리고 마을청년들의 놀음을 구경하라고 외삼촌은 너그러운 배려를 베풀었든 것이다. 그때는 우리마을이 공사(향)에서는 제일 큰 대 부락으로 3개 생산대였다. 추석이면 남청장년들은 개인장끼로 씨름을 하고 처녀와 각시, 아주머니들은 그네를 시합했다. 또 남녀 배구 시합도 했다. 축구도 하고는 싶었지만 마당이 없어서 하지못하고 해마다 아쉬워 했다. 그네는 마을 복판에 있는 한구루의 큰 느티나무가 신통히도 남쪽으로 한줄기 굵은가지를 반공중에 뻗친것이, 거기에 굵은 바줄을 걸면 해마다 천연그네터가 되였다. 그런데, 배구는 로소불문 남녀가 다 구경할수 있었지만 씨름은 남자들만, 그네는 녀자들만 구경했다. 남자들이 그네를 구경하면, 그리고 녀자들이 씨름을 구경하면 작풍이 단정치 못한 “음특한 놈”이라고 내 놓고 욕했다. 우리 남자애또래들이 입을 짝 벌이고 야! 야! 경탄을 하면서 그네뛰는걸 정신없이 구경을 하면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요놈새끼덜이 저리로 바라가! 가서 씨름구경이나 해라.” 하면서 쫓았다. 녀자애들은 씨름구경을 하나도 하지않았다. 혹시 씨름판에 와서 멍해 서 있으면 “저리 가 놀아라. 응? 너도 이담 커서 씽! 씽! 그네를 뛔야지?”하며 얼려 보냈다. 개혁개방전에는 “남녀칠세부동석” (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봉건례교가 엄하게 살아있었다. 지금은 모두가 보다싶히 성해방인지 개방인지한것이 무척 되였다. 이 현상에 대해서 학자들이 갑론을박, 콩팥칡팥 매일 싸움질을 한다지만… 달은 제멋대로 가고있다. “사회에는 처녀가 희귀하고 부과장이상은 다 정부가 있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는가하면 심지어는 “모임에 부부동반으로 가면 낯이 깍기고 정부끼리 가면 자랑스럽다고 한다.”는 말까지도 있다. 지금은 성이 동물세계로 되였다는 험담까지도 있다. 추석은 개혁개방전까지는 주로 농촌에서 쇠는 소박한 민속절이 였다. 지금은 사회가 도시화를 하면서 시가지에서 오히려 더욱 굉장히, 요란스레 추석을 쇤다. 추석에서 가장 중차대한 행사인 성묘를 보면 농촌과 완연 다르다. 나는 한식과 추석이면 부모님 산소 성묘로 해마다 고향마을을 다녀오는데, 명절을 쇠는 풍습에 변화가 없었다. 코로난지 그놈안지 때문에 금년에는 애들은 그만두고 우리량주만 출동을 했다. 자가용은 내가 굴릴줄을 모르다 보니 택시를 썼는데, 편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꽤 되는것 같은데, 살펴보면 도시에서 하는 성묘는 농촌과 완전히 다르다. 우리고장에서 화장을 법으로 결정한후, 농촌에서 사는 상주는 불편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도시사람들은 간편해서 좋은데, 그 성묘형식도 점점 더 깜찍하게 간편하게 변화발전해 간다. 우선, 부보님의 골회를 납골당에 맡기고 해마다 “려관비”를 내면 대사필이다. 가토며 벌초를 할것이 없고 산소가 상할가봐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의 아버지가 밭머리에 있는 형님분의 산소때문에 늘 시름놓지못하며 근심하던일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된다. 밭갈이거나 후치질을 하는 사람이 데퉁스러운 사람이면 다다소소 산소를 후벼파거나 긁어놓기도 하고 소가 짓밟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산소를 자주 돌보군 했는데, 어느해는 산소가 험하게 파손이 되여 후치질을 한 사람을 찿아가서 “야, 이 쌍눔의 새끼! 상세난 사람의 산소를 이렇게 괄시허는 법이 어데있니?! 망할눔이 새끼! 니눔새끼 이제 바로 뒈지나 봐라!”하며 말끝마다 눔새끼를 붙혀가며 된줄욕을 퍼부우며 싸우기까지 했다. 데퉁박이는 제가 지은죄가 있기에 찍소리 한마디도 못하고 부지런히 파손을 손질하는 것으로 립공속죄를 하며 사과를 표시했다. 아버지는 이듬해 한식을 기다려 면례(이장)를 했다 도시사람들의 성묘에서 제사인사법이 지금은 대체로 네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골회함을 가져다가 고인의 띠를 찿아 모시기도 하고 영정사진만 모시기도 하며 제사소물을 푸짐하게 진설하고 인사를 한후 음복을 하게 한다. 조금지난후 골회함을 들어다가 납골당에 모시면 성묘는 끝났다. 공동묘지에서 거액의 돈으로 집을(묘자리) 가진 고인의 성묘도 앞과 같다. 두번째 형식은 꽃 한송이를 살랑 들고가서 납골당 골회함 곁에 놓고 경례를 하고 성묘가 끝나는 것이다. 간단명료하고 수월해서 이 형식이 점점 더 선호를 받는다고 한다. 그다음 또 한가지형식으로는 골회를 어데다 가만히(들키면 큰코를 친다.)매장을 했거나 강물에 뿌린 경우인데, 그 장소로 가서 제례인사를 하는것이다. 이 형식은 점점 더 소실되여 간다고 한다. 네번째로는 저녘후 대거리 십자가든 소골목 십자가든 자기에게 편한곳으로 가서 종이돈을 마음내키는 대로 태우는 것이다. 이 성묘형식이 지금 대단한 인기를 받고 있다고 하는데, 소방, 위생, 등 부문에서 두통이 나 한다고 한다. 이상의 네가지형식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고인에게 구구절절, 간절한, 충심으로부터의 부탁이 둥덩산보다도 더 높고, 크고, 많다는것이다. 부탁에는 수백가지 조목들이 있는데, 귀납해 보면 딱 한가지다. 즉 “잘 되게 하여 주소서!”이다. 병이 떨어지게 하여 주소서, 아이가 대학에 가게 하여 주소서, 남편의 바람을 막아 주소서… 도둑놈이 쉬가 잘붙게 하여 주소서, 부정부패서기, 시장이 모가지가 무사하게 하여 주소서… 별 희한한게 다 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풍속과 습관은 변하며 그 내용물에 따라 적절한 형식이 있게 되는데 그것인즉 곧 풍속과 습관의 주류형식이 된다. 내용과 형식이 맞지않으면   “형식주의”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런것은 싫어하며 반대한다. 일반적으로 풍속 습관에서의 “형식주의”는 제창할건 아니지만 큰 위해를 끼치는건 아니다. 그러나 령도의 “형식주의”는 민생을 해치고 나라를 망친다. 대약진후기에 우리마을 어느생산대에서는 생산대 대장과 대대서기가 짜고들어 대장은 입당을 하기위하여, 서기는 선진인물이 되기위하여 알곡산량을 잔뜩 불어대고 수확고의 대부분을 여량으로 국가에 바치였다. 그래서 대장과 서기는 정말로 소원성취를 하였다. 하지만 그 생산대의 사원들은 밭갈이철부터 반소량(통강냉이, 강냉이가루, 수수쌀 등 잡곡을 량잠으로부터 꿔다 먹는것. 갚을때는 정곡으로 갚는다.)을 먹으며 생고생을 했다. 어느곳에서는 시장은 반대를 하는데 서기가 우겨대서 련거퍼 몇년을 몇가지 슬로건을 내걸고 그야말로 말그대로 열심히, 굉장히 축제를 하였다. 축제를 미끼로 “초상인자"(招商引資)를 한다고 서기씨는 우겨댔지만 번마다 공돈을 팔며 밑지는 짓거리로 되고 말았다. 백성들은 내놓고 수천만원의 돈이 아깝다는둥 먹는놈은 배가 터지게 잘 처먹었을 것이라는둥… 말이 많았다. 축제는 몇년후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쯤에서 이 엉뚱한 “형식주의”가 사라져서 민분은 가라앉아 다행이라 하겠으나 다음의 “형식주의”는 생각하면 답답한 일이다. 어느곳에서 “홍수방어전승리기념비”를 굉장히 크게 만들었는데, 홍수때 이곳 령도가 3ㅡ4일 달아다니며 고생한건 사실이다. 그러나 홍수는 다행히도 선인들이 이름한자 남기지 않고, 기념으로 돌 한개 새우지 않고 만들어 놓은 제방에 막혀 물러갔다. 그런 번연한 사실을 기념비는 이번에 각급령도들이 잘 해서 홍수를 끝내 물리쳤다고 기념문을 만들어 기념비에 새겨 넣었다. 각급령도를 내걸고 기실은 자기의 공덕비를 새운것이다. 이런 황당한 “형식주의”는 왜서 발생했는가… 어떻게 수습해야 할것인가…                                                                                                                           20.10
158    찌그러진 기와집 댓글:  조회:294  추천:0  2020-09-11
         중편실화소설                                                찌그러진 기와집 (신생)                                                                                                                      회령     나는 8월 중순께 초평향에 가 보기로 작심하였다.    그 곳은 나의 청춘이 죽은 곳이며 나의 인생이 바뀌게 한 곳이다. 그 고장에 가 보기로 결심하기까지는 심각한 고민이 여러번 있었다.      63년 여름 나는 대학 정치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초평공사(향) 공청단 서기로 현당위 조직부의 특별한 배치를 받았다. 그때, 국가에서는 우리를 중학교 선생으로 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런데 내가 공사공청단위 서기 벼슬자리에 배치를 받게 된 것은 대학시절에 벌써 입당을 하였고 학습을 잘 했고 품행이 단정했고 신체가 건장하고 재질이 총명했기에, 이를테면 덕, 지, 체가 전면적으로 발전한 청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당에서는 배양전도가 있다고 본 것 같다.    초평공사는 두만강변에 자리잡은 궁벽한 산골이였다. 손바닥만한 논밭뙈기 몇개는 두만강 버들방천 안쪽으로 있고 나머지는 모두 한전인데 골짜기 바닥과 산기슭에 널려 있었다. 다섯개의 산줄기는 두만강으로 내리 뻗치다가 멈췄는데 그 끝마다 마을이 앉아서 다섯개의 대대(촌)가 되였다. 매개 대대는 골짜기로 들어가면서 두세개씩 혹은 서너개씩 자연툰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마다 이름은 있었지만 그때는 아무대대 1대, 2대(생산대. 지금의 촌민소조.)하고 불렀다. 다섯갈래의 골짜기는 서로 비슷했는데 넓고 깊었다. 골짜기 마다 꽤 큰 냇물이 흘렀다 제일 크고 경치가 좋은 골짜기로는 초평대대가 차지하고 있는 소금강골짜기였다. 조선의 금강산처럼 아름답지만 작다고 해서 소금강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구불구불 내리 뻗은 량옆 산줄기에는 벼랑과 기암괴석이 송백과 함께 무척 많았다. 단풍나무, 머루, 다래, 알구배, 찔구배, 돌배, 도라지, 함박꽃, 개나리, 찔레꽃, 천지꽃과 개살구가 제철을 맞아 만개할 때는 그 풍경이 그야말로 그림처럼 화려했다.    초평공사는 한갈래의 신작로와 한갈래의 전화선으로 바깥세상과 통하였다. 량옆에 있는 린접 공사와는 7, 80리 사이고 현성과는 100여린데 날씨가 순탄하면 하루에 한번씩 뻐스가 왔다갔다. 전기가 없어서 두달에 한번 오는 농촌순회방영대는 저들이 가지고 온 찌프차 한쪽 뒤바퀴를 빼고 무슨 장치를 한후 전기를 내서는 영화를 보여주었다.    이곳에서는 제일 큰 마을인 초평대대는 공사소재지였다. 거기에는 공사위원회(향정부) 초중학교 소학교 공급판매합작사(공소사. 상점.) 위생원(병원) 량잠, 림산작업소, 파출소, 우정국 등 단위들이 있었는데 벼짚이나 조짚으로 이영을 한 흙집들이 였다.(향정부와 학교 공소사는 토피집이였다.) 전 공사의 모든 집들은 초가집들인데 쇠여빠지는 버들버섯 같이 방정한 집이란 한채도 없는것 같았다. 그런데 초평대대에서 사무실로 쓰고 있는 집만은 8간기와집으로 공사에서 유일한 기와집이 였다. 40년이 거이 되는 집이다보니 헐망하긴 했으나 그래도 기본상 온전한 편이였다. 이 집은 현성에서 살던 지주의 마름이 살던집인데 마름은 광복이 터지자 지주와 함께 남조선으로 도망을 갔다. 집은 마을의 공회당, 구공소(구정부), 촌공소, 초, 고급사 사무실, 집체식당 등을 거치며 력사적 공헌을 하다가 다시 대대사무실로 되였다.    산골사람들은 대체로 순박하고 말머리가 무겁고 듬직한 반면에 생기발랄함이 부족하다. 여기 사람들도 그랬다. 특히 10여년을 집체화 틀 속에 같히워 습관되고 살다보니, 그것도 점점 더 가난해만 가는 세월속에서 살다보니 사람들은 수심만 깊어가고 의욕은 없이 자기를 잊고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수동적이 되여버렸다 한마디로 초평공사는 편벽하고 가난하고 또 몹시 적막한 곳이였다. 마을은 20여개가 되였으나 인구는 겨우 3000여명 밖에 안되였다.      현당위 조직부장과 현공청단위 서기는 나와 담화할 때 간고한 곳일수록 단련과 성장에 아주 유리하다고 하면서 사업을 적극적으로 잘 하라고 고무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사업을 잘하면 광명한 앞길이 열린다고 하였다. 벼슬길에 오른 사람치고 승급을 꿈꾸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그때의 나의 머리 속에는 당과 모주석의 은덕에, 국가와 인민의 기대에 보답하여야 한다는 사상과 결심만 꽉 차 있었다. 그때의 나는 참으로 순결하고 단순하였다.    초평공사보다도 더 궁벽한 두메산골에서 자란 나는 확실히 당과 모주석의 은덕과 나라와 인민의 배려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초, 고중과 대학을 국가조학금을 받았기에  공부를 할 수 있었고 대학에서 병으로 몹시 앓을 때 국가의 보조를 크게 받았다. 그리고 부모님과 형님내외의 지극한 정성과 회생을 잊을 수 없다. 나도 물론 많이 분투를 했다. 초중때는 여름방학이면 약뿌리를 캐고 목이버섯(무얼)을 뜯어말리워 공소사에 팔았다. 겨울방학에는 햇싸리나무를 해서 공소사에 근을 떠서 팔았다. 나라에서는 싸리나무를 사다가 배광주리거나 공정판에서 쓰는 툴란재 (흙광주리)를 만든다고 했는데 싸리나무 수요가 많았다. 우리 또래들은 그런 부업을 해서는 학비에 보탰다. 고중과 대학시절에는 여름방학, 겨울방학을 시내에서 품팔이를 하였다.    나는 당의 교시대로 가장 간고한 곳으로,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가서 사업을 잘하는 것으로 하늘 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당과 국가와 인민, 그리고 부모형제의 이 모든 은덕에 보답하리라 마음속에 굳게 다지고 있었다.    그때도 극히 개별적이 였지만 비밀리에 뒤문거래를 하는 현상이 있었다. 만약 내가 조금만 “활동”을 하면 모교에 분배 받거나 큰도시에 분배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도와 주겠다고 자청하는 처녀도 몇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포부와 결심은 동요가 없었다. 나는 뒤문거래를 비렬한 행위로 보며 경멸하였다.      내가 초평공사당위 서기 남명덕의 사무실에 들어서니 남서기 외에 또 한명의 중년남자가 있었다. 남서기는 나를 한번 힐끔 쏘아보고는 머리를 돌리고 표표히 않아 담배를 피웠다. 그와는 반대로 중년남자는 일어나서 따뜻하게 악수를 하여주고 당위 부서기 겸 조직위원 김응수라고 자기소개까지 하였다. 그는 공사공청단위 서기가 없어서 자기가 대신 맡았댔는데 참 잘되였다며 무척 반가워 하였다.   “그럼 얘기를 하오.”    남서기는 성난 사람처럼 뱉아던지 듯 차겁게 한마디를 하고는 쥉쥉 나가버렸다. 감때 사납고 표독스럽다는 인상이 들었다. 김응수는 너그럽고 인자한 사람이라는 것이 첫눈에 환히 알리였다.    그는 나에게 가정형편이며 친척이며 나의 경력을 자세히 물었다. 그리고 우리 집이 있는 삼도구공사 정황에 대해서도 이것 저것 여러면으로 묻다가 나중에는 애인이 있는가고 묻기까지 하였다. 이어 김응수는 자기경력을 자세히 들려준후 공사간부들로부터 각 단위들과 대대, 생산대에 이르기 까지 전 공사의 일반정황을 손금보 듯 환하게 소개하여주었다.    그는 공사의 청년단사업을 어떻게 잘 할 것인가에 대하여 나와 진지하게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공사의 여러가지 사업들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아가며 조리 있게 설명해 주었다. 하여 나는 공사의 사업에 대하여 대체적인 륜곽과 체계를 잡을 수 있었다. 김응수의 담화는 나에게 선생님의 가르침 같았다.      베는 석자라도 틀은 틀대로라고 공사는 보잘것 없었지만 부서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공사에는 부련회라는 부서도 있었는데 주임은 리련옥이였다.    련옥이는 현성에서 나서 자란 시가지 사람으로 고중졸업생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현법원의 원장이고 어머니는 현당위판공실 주임이였다. 련옥이는 대학시험에서 미끌어진 후 집에서 놀다가 현병원 호리원(청소공)으로 취직을 했는데 얼마후에는 초평공사 부련회주임으로 왔다. 그는 이미 결혼을 하였으나 아직 아이는 없었다. 남편은 군인으로 패장이라고 했는데 대련에서 근무한다고 하였다. 련옥이는 이 곳으로 나보다 두달 남짓 먼저 왔었다. 그는 탄력있는 맞춤한 키꼴에 해사하게 생겼는데 잘 웃고 잘 떠들고 노래와 춤을 잘하고 멋을 부리기 좋아 했다. 말은 청산류수고 문장도 괜찮게 썼다. 술도 마시고 우스개로 담배도 두어모금 빨고는 캑캑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그럴 때면 김응수를 비롯하여 나이가 지긋한 공사간부들은 얼굴을 돌리며 찌프리였다. 련옥이가 과분하게 우스개를 피울 때면 같은 청년세대인 나는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공사간부들 중에서 무장부 문부장만은 련옥이와 희닥질을 하며 장난을 하였는데 그럴 때면 남명덕은 눈귀에 잔주름을 지으며 재미있어하였다. 그때는 부드럽고 정이 가득한 눈길로 련옥이를 바라보며 “천생 부녀주임감이야!”하고 칭찬을 하였다. 련옥이는 입당적극분자 였다. 맨 남자들 뿐인 공사간부들 속에서 련옥이는 말그대로 생기가 넘치는 일점홍이였다.      나는 사업을 패기 있게 본때스레 밀고 나갔다. 나에게는 전승못할 난관이 없었다. 정확한 사상과 왕성한 혈기, 포만한 정열과 지혜, 굳센 의지는 사업효률과 성과를 높여주었다.    당위 서기 남명덕은 나에게 완성불가능의 하향사업임무를 줄 때가 많았다. 례하면 어느대대의 모내기를 5월 중순 전으로(5월 하순에 시작 함) 끝내라 하거나 세벌김을 반달 혹은 지어는 한달 앞당겨 끝내라고 명령하였다. 더욱 한심한 것은 사원들의 민식이 겉곡으로 200근도 않되는데 여량을 몇톤 바치게 하라는 것이였다. 식량이 떨어지면 반소량(량잠에서 꿔다 먹는것)을 먹게 할 것이니 여량임무를 견결히 완성하라고 하였다. 남명덕이 나에게 일을 시키는 본때는 팥쥐에미 배씨가 콩쥐에게 일을 시키는 것과 꼭 같았다.    남명덕은 너무도 감때 사납고 표독해서 공사내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현내외에서도 널리 “왜놈십장”, “일본감독”, “토비”, “남패천”(해남도에서 유명했던 악패토호) 이라고 조명이 났다. 산골사람들이 보기에는 높은 어른인 공사당위 서기에게 이런 심각한 별호가 붙은 데는 유래가 있었다. 내가 들은 몇가지만 보더라도 별명이 과분하지 않았다. 남명덕은 농망기면 일하러 나가지 않은 사원이 있나 해서 마을을 검사하는 작법을 잘 썼는데 한번은 벼모철에 앓아 누운 사람을 강박적으로 살얼음이 낀 논밭으로 내 몰아 그날 오후 병이 도져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멱살을 쥐여흔들거나 줄욕을 퍼 붓는 건 보통일사라고 했다. 지어는 사람을 때리기까지도 했는데. 한 농민은 귀통을 맞은 것이 그쪽 고막이 터져 귀머거리가 되였다고 한다. 그 뿐이 아니다. 현에서 령도가 오니 생산대의 소를 잡아 불고기를 해 먹인 일, (역축도살을 절대 금지할 때임.) 공소사에서 일을 잘하고 있는 녀직원을 쫓아내고 아들 남철이를 대신 넣은 일, 그외에 남녀간의 시시껄렁한 말도 있었다. 남명덕에게는 민분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현의 령도에서는 그를 “혁명적극성이 높고 사업열정이 높고 손탁이 드세다.”고 하였다. 남명덕의 조폭한 공작방법과 실제를 탈리하는 지시를 제때에 두루 무마해 주거나 조절해 주는 사람은 김응수였다. 남명덕은 김응수가 곁에 있음으로 해서 좋은 소리를 들으며 서기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지만 김응수를 “우경”이라면서 늘 아니꼽게 보았다. 남명덕의 횡포에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은 젊은 패기가 끓어넘치는 나였다. 나는 남명덕에게 빌붙어 굽실거릴 필요도 없었거니와 공사의 사업을 놓고 누구와 흥정할 필요도 없었다. 당의 사업, 인민의 사업을 잘하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바였다. 남명덕과의 몇차례 충돌에서 내가 그의 체면을 전혀 고려치 않은데서 그는 나를 아주 괘씸해 하였다. 김응수의 조률도 별로 작용이 없었다. 나는 물론 대수롭지 않았다.      64년 5월, 내가 모범단서기가 되여 성에서 열린 표창대회에 갔다 와서 며칠후다. 그날 우리 공사간부 10여명은 남명덕의 아들 남철의 잔치술을 먹고 밤 늦게야 헤여졌다.(파혼이니 뭐니하다가 약혼녀가 배가 불러와서 급급히 결혼등기를 하고 잔치를 했다.)    칠흑 같이 캄캄한 밖으로 나오니 시원하고 신선한 대기에 기분은 무척 상쾌했다. 나는 봉선이가 몹시 보고싶었지만 밤도 깊었고  술까지 마셧기에 단념하고 하숙집으로 향하였다.    봉선이도 작년여름에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 초중에 배치를 받았다. 그도 집은 나처럼 외지에 있었는데 궁벽한 산골의 가난한 집에서 큰딸로 태여났다. 봉선이는 인물, 체격, 총명, 품성… 말하자면 덕, 지, 체, 그 어느 것 한가지도 나무랄 데가 없는 훌륭한 처녀였다. 하지만 가정성분이 부농이여서(실제는 자작을 하는 중농이였다.) 여기 두메산골 초중으로로 배치를 받은 것이다.    작년 늦가을에 나와 봉선이는 김응수내외의 “전술”에 걸려 첯만남을 한후 자연스레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우리는 사랑한다느니, 좋아한다느니 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만나면 포옹과 키스는 사양치 않았다. 그러나 성의 계선은 엄격히 지켰다. 그것은 결혼식을 올린 다음의 절차로서, 그 순서를 위반하는 것은 저렬하고 수치스러운 도덕적, 법적으로 착오적 행위라고 인정하였다. 나와 봉선이는 금년 국경절에 간단히 결혼식을 하자고 약속하였다.    내가 기분좋게 스적스적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등뒤로부터 나의 가슴을 꽉 끌어안았다. 나는 기절초풍 놀라면서도 잔등에 뭉클하는 젖가슴을 느껴였다.    “조서기, 우리 집으로 가자 응!”    련옥의 뜨거운 입술이 나의 볼에서 화끈거렸다.    “아니, 이러지 마오!”    나는 다급히 그의 손을 풀면서 주위를 살펴 보았다. 다행이 아무도 없었다.    “쥐도 새도 모름다.”    련옥이는 속삭이며 나의 아래를 움켜 쥐였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힘이 뻗쳐 있었다. 나는 련옥이를 꼭 끌어안았다.    련옥의 하숙집은 정말 비여있었다. 우리는 불덩이가 되여버렸다. 련옥이는 련속 신음을 토하다가도 나의 가슴팍이며 등허리를 꼬집으며 쥐도 새도 모르게 이러자고 하였다. 봉선이와 결혼한 후에도 자기를 잊으면 안된다며 거듭 꼬집었다. 우리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살자고 굳게 약속을 하였다.    귀신이 곡할 일이 였다. 사상, 감정, 품행이 건강하던 내가 련옥의 사탕폭탄 한방에 순간에 무너질 줄이야?! 성의 유혹을 이기는 힘은 따로 있는 건가?... 나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얼마후 나와 봉선의 38선도 허물어지고 말았다.      나는 뻔뻔스러운 이중인격자가 되고 말았다. 능청스러운 위군자로 타락한 나는 은근히 지금의 성생활에 대하여 만족감과 행복감까지 느끼였다. 지금은 오히려 내가 주동적이 였다. 나는 봉선의 앞에서는 인간이였으나 련옥의 앞에서는 짐승이였다.      8월의 어느날 점심때다. 련옥이가 자기사무실로 오라고 나에게 눈치를 하였다. 우리는 이미 여러번 거기서 만났었다.    공사간부들은 사업시간이란 게 따로 없었다. 임무가 있으면 낮이건 밤이건 몰두하여 사업하고 일이 없을 때는 자유자재였다. 대부분 사업은 기층에 내려가서 해야 하는 것이기에 늘 하향을 했고 공사건물은 항상 비여있었다. 늙은 문서가 집을 지키고 있긴 했으나 그는 점심시간이면 기껏 늑장을 부리며 자기 집에 있었다. 공사건물은 초평마을에서 퍼그나 떨어져 산기슭에 우두커니 있었다.    11시가 좀 지나서 나는 련옥의 사무실로 갔다. 문은 열려져 있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 련옥이가 왔는데 왜서인지 다른 때와는 달리 긴장해 하고 불안해 하는 것 같았다. 련옥이는 서랍에서 사무용지도 꺼내고 또 만년필도 찿으며 서성거렸다. 나는 더 참을 수 없어서 문을 잠그고 련옥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런데, 련옥이가 놓으라고 소리소리 악을 쓰며 나를 밀치는 게 아닌가?! 내가 마구 우격다짐을 쓰는데 “탕! 탕! 탕!”하고 누가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나는 선자리에서 굳어지고 련옥이는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가버렸다.    활짝 열린 문앞에는 쇠꼬챙이 처럼 깡마르고 표독스러운 남명덕이 뱀눈알 같이 독살스럽고 차거운 눈길로 나를 쏘아보고 그 옆에는 덜썽 키가 큰 문부장이 기세 등등해서 서 있었다.   “너! 여기 꼼짝말구 서 있어라. 가서 응수를 오라구 해!”    남명덕은 문부장께 소리를 치고는 쥉쥉 자기사무실로 가서 파출소의 한소장을 당장 오라고 전화를 하였다.    련옥의 사무실로 김응수와 한소장이 선후로 들어선 후 잇따라 련옥이도 문부장과 함께 들어왔다.    “야! 사실대로 말해라. 한소장! 제대로 쓰오.”    남명덕은 노기등등해서 소리쳤다. 부들부들 떨고 선 나의 눈앞에는 남명덕의 날카로운 눈길이 보이는 듯 했고 전신에 소름이 끼치였다. 동시에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사태에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요?!”    김응수가 걸상을 주며 나의 어깨를 두드리였다.    “무슨 일인지, 사실대로 솔직히 말하오.”    김응수가 다시 한번 재촉하자 떨리던 가슴이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고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렇다! 이지경에서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사실대로 솔직히 말하자. 다 말하자. 나는 일체를 단념하고 전후사를 말하기 시작했다. 련옥이와 바람난 그날밤으로부터 오늘 련옥의 신호, 그리고 우격다짐, 탕! 탕! 탕!에 이르기까지를 그대로 다 말하였다.    “련옥이! 말해보오.”    남명덕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아닙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내가 재료를 쓰려고 하는데 제가 마구 덮쳐들고서는! 응응응…”    련옥이는 집이 깨지게 악청으로 웨치고는 울음보를 터뜨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처음으로 머리를 쳐들고 련옥이를 멍해서 바라 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나쁜 놈새끼! 한소장! 저새끼를 공안국에 잡아가오!!    남명덕은 나를 손가락질 하며 새된목소리로 소리를 꽥 질렀다.    “이렇게 하기오. 사실을 자세히 서면상으로 쓰오. 래일 오전까지 철저하게 몽땅 쓰오. 11시에 남서기한테로 가져오오. 그리고 오늘 이 일을 지금은 절대비밀로 합시다.”    김응수가 말하자 한소장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오!”    남명덕은 벌컥 일어서며 외마디 소리를 꽥 지르고는 나가버렸다.    내가 사무실에서 멍하니 앉아서 방금 있은 일을 두서 없이 생각하고 있는데 김응수가 들어왔다.    “창락이! 거, 무슨 그런짓을 사람이 하오?! 정말 천만 뜻밖이오… 원! 창락이가 그럴줄은… 정말 꿈에두 생각 못했소! 원, 사람이… 검사실 그대로 자세히 쓰오. 두부를 써서 한부는 남서기를 주구 한부는 나를 주오. 아마두 일이 복잡할 것 같소.”    그는 부시럭 부시럭 담배를 말더니 나를 주고 다시 자기 것을 말았다. 나는 비로서 더없는 수치를 느끼며 죽고싶도록 뼈저리게 후회가 되였다 이거, 무슨 꼬락서닌가?! 내가 이렇게 끝장을 보다니… 나는 책상에 엎드렸다. 더는 머리를 들 용기가 없었다.    “후ㅡ 창락이! 내말을 잘 듣소. 사람은 누구나 다 착오를 범할 수 있소. 하지만 이건 참으로 수치스러운 착오요. 봉선에게는 뭐라고 하겠소!... 창락이! 지금 창락이가 해야 할 일은 착오를 철저히 검사하고 조직의 처리를 성근히 접수하고 고치는 것이요. 그리고 맡겨주는 사업을 잘하면 되오. 고치면 여전히 좋은 동지지. 저녘은 우리 집에 와서 먹소..”      이튿날 오전 검사서를 남명덕에게 가져가니 그는 “거기 앉아라.”하고는 검사서를 보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누가 보던지 이걸 보면 련옥이가 나쁜 사람이지. 이걸 알면 그의 남편이 가만 있겠는가! 견결히 리혼하자구 할텐데, 군혼파괴죄가 얼마나 큰지 아니? 총살이다 총살! 다른 것은 싹 없애고 어제 일만 써라. 련옥이가 보자했다구 하지말고 네가 뛰여들었다구 하구… 어제 일만 련옥의 말대로 써라. 군혼파괴죄에 걸리지 말고… 련옥이가 무사해야 너도 사는 거다. 그리고 검사서라 하지 말고 탄백교대서라고  해라. 아니, 탄백서라 해라. 가!”    그날 오후에 나는 탄백서를 남명덕의 앞에 바치였다. 생각해보니 남명덕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서로 좋아서 바람을 쓴 작풍문제든 강간미수든 나는 이젠 볼장을 다 본 끝장이 난 사람이지만 련옥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나의 말 한마디에 청백한 련옥이로 될수도 있고 난질이 버릇으로 된 더러운 화냥년 련옥이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남명덕의 말대로 련옥이를 보호해 주리라 마음을 결정하였다.    남명덕은 탄백서를 본후 “됐다.”하고는 나와 봉선의 관계를 자세히 따지였다. 나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다. 나의 말을 듣고 난후 그는 말하기를 결혼등기도 하지 않고 동품부터 한것은 순전한 류망행위라고 하였다. 나는 승인한다고 대답하였다.      9월초 나는 강간미수죄와 류망죄로 현공안국에 잡혀 갔고 두달후에는 군혼파괴, 강간미수, 류망죄로 16년 도형을 받고 감옥으로 갔다.    내가 미결수로 두달이나 있게 된 것은 김응수가 강간미수죄를 부인하는 재료를 법원에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명덕과 한소장이 나의 류망죄를 더 찿느라고 심입된 조사를 하다보니 시간이 걸렸다. 법원에서 나를 반복적으로 심문할 때 나는 이런 것들을 알게 되였다. 김응수가 제공한 재료에 대해서 나는 그건 내가 처음에 한 거짓말이라고 “탄백”하였다. 심문과정에서 나는 초평공사의 적지 않은 각시들과 처녀들이 나로 인해서 모욕적인 질문과 조사를 받았다는 것을 눈치챘고 알게 되였다. 어떤 처녀들은 부인과검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한 처녀는 처녀막이 파손되여 끝내 동반자를 실토하기까지 하였다고 했다. 나는 더없이 미안했고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아무일도 없이 무사할 줄 알았던 련옥이가 그간 어째서 리혼을 당했는지… 이상했다. 감옥으로 가면서 나는 봉선에게 천만번 사죄하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우리의 약혼을 없던 일로 하자고 편지를 보냈다. 김응수에게도 미안하다고 간단히 편지를 했다. 편지는 고마운 간수가 꼭 전해주겠다고 하였다.      감옥에 간 이듬해 늦은 봄, 그러니까 65년도 6월이다. 나는 뜻밖에도 봉선이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사연은 간단했다.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과 기다릴 거라는 내용인데 편지지는 여러군데가 잉크가 피고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력력하였다. 봉선이는 편지를 쓰면서 피눈물을 흘린 것이다!... 나는 편지를 쥐고 반나절을 흐느꼈다… 나는 감방의 손바닥만한 뙤창문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개조에 힘껏 노력하리라 결심하였다.    67년도 가을 봉선이 한테서 두번째로 편지가 왔다. 사연은 간단했다. 아들애가 죽었다는 소식과 멀리 시집을 간다는 것이 전부였다. 편지지는 여러군데가 잉크가 피고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력력하였다. 봉선이는 편지를 쓰면서 피눈물을 흘린 것이다!... 나는 편지를 쥐고 반나절을 흐느꼈다… 나는 감방의 손바닥만한 뙤창문으로 푸른하늘을 바라보며 인생의 허무함에 실망하였다.      80년9월, 나는 만기석방으로 원적지인 삼도구향 립봉촌 갈매골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이 꼬락서니를 해 가지고 고향으로 간다는 건 죽기보다도 싫었다. 그러나 무슨 방법이 있는가?! 갈 곳도 없었거니와 반드시 원적지로 가야 한다고 하니. 그리고 계급투쟁을 잘해야 한다고 하였다. 출옥할 때 감옥의 령도들은 신생을 축하한다고 하였지만 나는 기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립봉에서 뻐스를 내린 나는 괴나리봇짐을 메고 골짜기 수레길을 따라 허정허정 걸었다. 길 옆 쑥밭에서는 풀벌레가 시들해서 가끔 울고 산새가 두어마디 호젓한 울음을 울었다. 산굽이를 돌아 작으마한 언덕에 오르니 저 멀리로 갈매골 고향마을이 보이였다. 나는 길 옆 바위에 걸터앉아 고향마을을 바라 보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이대로 어디론가 가 버리고 싶었다. 아니, 이대로 여기서 죽고싶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10여호 밖에 안되는 마을은 폴싹 퇴락하여 페허같이 괴괴하였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형님네 집을 향해 주섬주섬 다가갔다. 마당에서 무얼하고 있던 형님이 자취소리를 들었는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달려나왔다.  우리는 부등켜 안고 엉엉 울었다. 20년세월! 우리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감옥에 가서 얼마후 형님께 편지를 써서 그간의 사실을 알린 후 또 다른 감옥으로 가게 되니 회답을 하지 말며 구태여 찿느라고도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주소를 안대도 그 먼 곳을 면회 올 경비도 없겠거니와 이 꼬라지를 봐선 또 뭘하겠는가?... 소식이 없으면 무사한 줄로 서로 알자고 형님께 약속을 했다. 우리가 흐느끼며 컥컥거리는 소리를 듣고 형수님이 달려나왔다.    집은 초가삼간 옛집 그대로나 이젠 거이 허물어지는 낡은 집이 되였다. 그간 나 때문에 소경이 되였든 아버지는 몇년 전에 서산으로 가고 어머니는 풍을 맞아 운신을 못하고 누워 있었다. 형님내외도 많이 늙었다. 초중을 졸업한 큰 조카는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래로 남자애와 녀자애 두 조카는 학교로 다니며 말며 한다고 하였다.    쇠똥을 섞어바른 흙냄새와 된장찌개냄새, 퀴퀴하고 지린 어머니 냄새까지 진하게 풍기는 집안에서 여섯 식솔이 비좁게 사는데 지금 구지지 한 나까지 끼여들었다. 집에 온 후 나는 웃방에서 두 조카애와 함께 어머니 곁에서 새우잠을 잤다. 우리는 모두 주접이 든 몰골에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 사실은 할말도 별로 없었다. 감옥에서 갓 나온 나는 집식구들에게 무거운 정치보따리로 되였다. 며칠후 나는 삼도구 파출소에 가서 등록하고 립봉대대 치보주임한테도 가서 보고를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형님네도 다르지 않았다. 감자에 강냉이, 보리쌀을 밑불개로 하고 좁쌀을 좀 넣은 밥은 괜찮은 끼니였다. 이런 밥을 하루 두끼 혹은 세끼를 이어댈 수 있으면 그것은 아주 다행이였다. 해마다 그렇지 못하다 보니 반소량을 먹는데 그건 정말로 입에 풀칠하기 였다. 반소량을 미처 이어대지 못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그야말로 말 그대로 돼지도 먹기 싫어하는 푸대죽을 사람이니 먹었다는 것이 였다. 집체는 해마다 내리막 재주만 하다보니 소위 1년총결 결산분배라는걸 하긴 하였으나 그건 빚문서 장부총결이였다. 아무개네는 빚이 얼마고 아무개네는 얼만데 묵은 빚이 얼마고 금년 빚이 얼마고 합계 얼마다. 이런 총결이였다. 사람들은 닭마리를 팔고 약뿌리나 나무짐을 해서 소금이며 등잔불 석유를 삿다. 아무리 “자본주의 꼬리를 끊어 버리고 싹을 없앤다!”고 하였지만 마을사람들은 슬금슬금 서로 덮어주며 이런 부업을 하였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였지만 갈매골의 생활에는 변한 것이 없었다. 아니, 점점 더 빈궁에로 변해갔다. 살길이 막막한 이세상, 숨막히고 암담하기만 했다.      두루 10여일이 지났다. 나는 생산대장과 의논하고 방목장 일을 맡았다. 방목장은 마을에서 골안으로 10여리 더 들어가 있었다. 이름은 듣기 좋게 목장이지만 거기에는 움막 하나, 송아지 네마리, 페우가 두마리 있었을 뿐이다. 페우는 풀살이나 올려서 잡아먹거나 이웃 생산대와 벼를 바꾸었다.    앞뒤로 가파로운 높은 산이 둘러 있고 동서로는 갈매골이 길게 뚫렸으나 골짜기가 이리저리 구불구불하다보니 결국은 역시 높은 산이 막아섰다. 움막 앞으로는 벽계수가 솰솰 쉼없이 흘렀다. 이따금 산새가 외롭게 한두마디 울고는 사라졌다. 풀벌레도 울며 말며 시들한데 목장은 고즈넉 잠잠하였다. 이런 것을 적막강산이라 할것이다. 밤이면 가까이에서 혹은 먼 곳에서 부엉이가 몇마디 울었다. 다만 소쩍새만은 무슨 사연이 그리도 슬픈지 장밤 쉬지않고 울었다. 정말로 목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우는 건가. 소쩍새의 울음은 참으로 구슬펐다. 한달 거이 지나니 차츰 목장에 습관이 되였다.    “생”이란 무엇인가? 감옥 령도들은 “신생”이 어쩌구 “전도”가 어쩌구 “노력분투”니 “발전”, “성공”이 어쩌구 저쩌구 하며 수다를 떨었지만 나는 언녕 회망이며 욕망을 포기한지 오랜 사람이 였다. 나와 소는 모양이 다를 뿐 같은 신세였다. 소는 나의 유일한 동무였다. 소들과 함께 여기 저기를 방목 다닐 때면 지금 내가 소를 방목하는 건지 소가 나를 방목하는 건지 얼떨떨하기도 했다. 비트적 비트적 겨우 걸으며 느릿느릿 풀을 뜯는 페우를 볼 때면 나의 남은 세상도 방불히 보이였다. 나도 이제 저렇게 살다가 어느날 죽을 것이고 그러면 나의 “생”은 “숭고한”  사명을 완성한 것으로 될 것이다…    혹, 어떤 날은 16년 감옥생활이 회고 되기도 하며 감옥이 그립기도 했다. 그럴 때면 “차라리 무기도형에 떨어질 게지…”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나는 지금이 감옥보다 못하였다 감옥에는 그래도 사람세상이 있었지만 여기는 적막강산 뿐이 였다..      82년 봄이다. 어느날 내가 소우리 말뚝을 박고 있는데 큰 조카가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집체를 걷어치우고 개체를 하는데 오늘 땅이며 집체재산을 분배하니 급히 내려오라고, 제비를 쥐니까 빨리 오란다고 하였다. 세상이 무너지는지 깨지는지 일체 관심이 없던 나는 멍 해서 조카만 멀뚱멀뚱 바라 보았다. 한집이 빠져도 제비놀음을 못하니까 빨리 오라더라며 조카가 거듭 재촉해서야 나는 정신이 들었다.    탈곡장마당에는 마을사람들이 3, 40여명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모두가 긴장되고 흥분된 얼굴로 활기에 넘쳐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였다. 나도 갑자기 삶의 의욕이 솟구쳤다. 그러니까 이젠 목숨도 제것이고 밭도 재산도 다 제것이란 말이 아난가?! 자기의 생은 자기 손으로 산단 말이지?!... 허! 그것 참, 세상이 변했네!!    사람들은 번갈아 가며 제비를 쥐고는 엉덩이를 치며 하하 웃기도 하고 “엥이! 무깍지야!”하고 랑패상을 짓기도 했다. 집체재산이라는 것이 열두어가지 밖에 안되다 보니 무깍지가 여러개 있게 되였든 것이다.    나는 제비를 제일 마지막으로 쥐였는데 커다란 돌군재였다.(석마돌. 탈곡할 때 씀.) 나는 돌군재를 마을 공동용으로 기부하고 목장터와 지금 거기에 있는 다리병신 어미소와 갓난 새끼송아지를 달라고 하였다. 대장이 군중토론에 부치니 모두 그러라고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했다.      85년 8월! 나는 초평향에 가 보기로 용단을 내렸다. 그간 오래동안 나는 초평향의 소금강골을 유원지로 만들면 어떨가? 하고 반복되는 사색을 하였다. 그러나 나의 “휘황찬란”한 과거지사가 자꾸 걸리였다. 초평에 가서 번들거리면 나는 새롭게 신문인물이 될 것이다. 아이고 어른이고 남녀로소가 모두 다시 나를 쳐다보며 나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그러나 소금강골을 한번 잘 개발하고픈 생각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나는 실사구시적으로 진지한 사색을 거듭하였다. 강간미수니 류망이니 하는 죄목은 승인이 않되는 억울한 죄다. 군혼파괴죄는 따져보면 련옥이가 자초한, 말하자면 자업자득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조직위원 김응수가 나에게 한 말이 힘이 되였다. 그는 20년전에(내가 강간미수범으로 잡힌 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치면 여전히 좋은 동지지.” 나는 초평향에 가서 사업을 본때스레 펼치며 꼭 성공하리라 결단을 내렸다. 오직 이 길만이 나의 생과 존엄을 찿으며 나를 빛내이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사업을 잘하여 초평향 인민들에게 꾸준히 좋은 일을 하면 나의 명예도 많이 좋아질 것이다. 나는 나의 이런 관점이 청년시절의 나의 초심과 일맥상통함을 새삼스레 느끼며 감개가 무량하기 그지없었다…    개체로 된 후 그간 4년간 나는 억척스레 일했다. 목장의 아래 우를 더 도급맡고 통이 크게 대대적으로 사업을 벌이였다. 나는 소, 양, 돼지, 닭, 벌을 치고 하마(기름개구리)를 기르고 인삼장과 버섯장도 시작하였다. 그리고 약초와 산나물 재배도 시작했으며 황무지를 일구고 량식과 사료를 자급하기에 힘썼다. 형님네 식구들은 나와 함께 말 그대로 억세게 분투하였다. 정부에서는 나를 다종경영호로 인정하고 자금 지원을 하여 주며 수의소의 지도를 배치하는 등 세심한 보살핌을 지속적으로 주었다. 나는 금년 봄에 갈매골 고향마을 사람들을 흡수하여 “갈매골농민합작사”를 만들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70여만원의 자산이 있다. 만원호를 “장원”이라며 장려하는 지금 우리는 특등장원으로 되였다. 83년도 국경절에 나는 남매를 데리고 사는 젊은과부에게 장가를 갔다. 그의 남편은 79년도에 목재판에 갔다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금년봄에 안해는 떡돌같은 아들을 낳았다.      내가 자가용을 몰고 초평향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가 거이 되여서다. 향정부에 들어가서 서기와 향장을 찿으니 면바로 그들은 모두 사무실에 있었다. 내가 자기소개를 하자 그들은 무척 반가워 하며 왕림을 열렬히 환영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나의 사적을 여러번 들었다고 하였다.    그날 일은 참으로 재빨리 순리롭게 되였다. 나는 향정부와 소금강골 도급계약을 맺고 예약금 10만원을 주기까지 했다. 향정부에서는 풍성한 점심식사로 나를 초대하여주었다. 좌석에서 나는 혹시 김응수라고 아는가 물었는데, 웬걸?! 김응수로인이 마을에 계신다는 게 아닌가?!    내가 젓가락을 놓고 곧바로 김응수를 찿아 가겠다고 하니 서기와 향장이 따라나섯다.    나와 김응수가 부등켜안고 일희일비로 감격한 이야기를 여기서 어찌 다 말하랴!! 그는 늙긴했으나 깨끗하고 정정했다. 그가 연신 “창락이! 창락이! 이렇게 오다니?!” 하고 웨치자 집안에서 “뭐요?! 누구? 창락이?”하고 웨치며 그의 안해가 뛰쳐 나왔다. “아이고! 이게 누구냐! 창락아!” 그는 나를 끌어안고 왕왕 울었다. 나도 걷잡을수 없이 뜨거운 눈물이 마구 쏟아 졌다.    우리는 초평촌 뒤산기슭 소나무밭에 가서 둘러 앉았다. 향장의 분부로 향간부 몇사람이 음식을 날라와서 그야말로 푸짐한 산놀이 잔치가 벌어졌다. 산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초평촌은 옛모습이 대체로 그대로인 것 같았으나 그래도 산간마을의 아담함과 포근함이 깃들어있었다. 저 아래로 소학교와 초급중학교는 새로 지은 것이고 향정부도 마을 가까이로 새로 지었다. 내가 공안국으로 잡혀간 공사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을 변두리에 대대사무실이던 기와집은 지금도 있었는데 절반은 허물어지고 거이 쓰러지는 절반이 벋팀목에 의지해 위태롭게 서 있었다.    김응수가 천천히 지난 일을 말하였다.    “창락이가 간 후 나는 재료를 현에 보냈는데 창락이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더구만. 련옥이는 문부장 때문에 모든 것이 들통나서 리혼을 맞았소. 문부장은 련옥이를 데리고 살자고 그의 남편에게 일러주며 엉큼한 수작을 했는데 련옥이가 죽다보니… 남서기는 문화혁명에서 죽을 고생을 했소. 창락이 문제도 나와서 민분이 컸지. 원래 민분이 많은데다가… ㅉㅉㅉ. 작으만치 죄장이 104가지나 됐는데 다 사실이란 말이오. 건달이나 다름없는 아들을 공사공청단위 서기에 앉히자고 창락이를 잡아먹지 못해 눈에 달이 올랐지. 련옥이를 입당시켜 현으로 보내고 남철이를 공사공청단위에 안배하자고 련옥의 에미와 약조를 했다고 투쟁을 들이대니 련옥이가 실토를 해서 우리도 알았소. 그리고 낫살이나 먹은 게 그게 또 뭐요. 련옥이와 글쎄… 개명치 못하게… ㅉㅉㅉ”    “그런데, 련옥이는 어째서 죽었습니까?”    “련옥이가 그런 사람일 줄이야. 67년도 여름에 남서기랑 문부장, 한소장, 봉선이두 끌려나와 투쟁을 받았는데, 그날 련옥이는 남철이가 몽둥이로 머리를 친 것이 기절했다가 다시 깨여나긴 했는데, 그때부터 지누비(자리에 누워 앓음.)를 하다가 얼마 후에 죽었소. 그날 군중들이 니 애비도 치라고 소리를 치니 남철이는 정말 애비도 쳤소. 련옥이는 한소장과 문부장의 안해가 달려들어 머리까지 깍아버리고 전안조에 잡아가면서부터 계속 투쟁판에 끌려다니다가 결국은 그렇게 되였소… 78년도 틀린 것을 바로잡을때 창락의 문제를 제출하니 문화혁명 전의 일이여서 심사를 안 한다구 하더구만. 그간 창락이가 참 고생했소…”    나는 남명덕의 소식도 물었다. 김응수의 말에 의하면 남명덕은 지금도 결론을 내리지 못해서 “걸려” 있다고 했다. 그는 이웃 향으로 이사를 갔는데 풍을 맞아 겨우 운신을 한다고 하였다. 남철은 련옥의 건으로  4년 옥살이를 갔다 왔다. 남서기 시중은 그래도 그토록 천대를 받던 안해가 해준다고… 김응수는 처연한 기색으로 말하며 담배를 피웠다.    “창락이! 놀라지 마오. 저기 저 기와집이 보이지? 저 집에서 봉선이가 아들을 데리고 살고 있소.”    “아니?!”    “봉선이는 아이를 낳고 온갖 멸시를 무릅쓰고 살았소. 그러다가 문화혁명이 터지니 투쟁대상으로 잡혔지. 67년도에 마지막으로 투쟁을 받고 잡귀신에서 빠지긴 했지만 창락이를 더는 애 아버지라 할 용기가 없다고 우리와 말했소. 우리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소.”    “아이가 얼매나 좋은지. 창락이를 똑 빼 닮았소. 올해 대학에 붙었소.”    지금까지 눈굽만 자꾸 딱고 있던 김응수의 안해가 한마디를 하였다. 나는 망연자실 멍해 있었다. 초평향에서 이런 일을 만날 줄이야?!…      이튿날 아침후 나는 봉선이며 김응수내외, 향간부들의 여늬(배웅)를 받으며 귀로에 올랐다. 할 일이 숨 가쁘게 많았다. 차창으로 송진내 짙은 싱그러운 대기가 풍겨 들었다.                                                                                                              00.6
157    줄욕에 대한 변명 댓글:  조회:246  추천:2  2020-08-09
      수필                                             줄욕에 대한 변명                                                                                                                 회령          당의 작가 작가로 된후 나는 더욱 열심히 창작을 하였다. 18세 청춘시절에 품은 나의 초심(리상)과 사명(포부)은 당의 작가, 인민의 작가로 되여 혁명사업에 잘 복무하는 것이였다. 지금도 나절로 생각해 보아도 나의 리상과 포부에는 흠집이 별로 없는것 같다. 그러나 어떤시람들은 “무슨 뚱딴지 같은 당의 작가, 인민의 작가 어쩌구 저쩌구… 혁명사업이요 뭐요 하는가?! 케케묵은 사람이 케케묵은 얼빠진 소리나 하구 자빠졌네!”하며 어처구니가 없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ㅉㅉㅉ… 하는것이 구제불능이라는 표시였다. 곁에서 모이 쪼아먹는 암탉을 반주하는 수탉처럼 어떤사람들은 머리를 거세게 주억거리며 “시대에 떨어져도 반세기 이상은 떨어진 사람이다.”고 하였다. 글쟁이 절개를 운운한 어느 글에는 “글쓰기 전에 소학교부터 다시 다니라”는둥 “케케묵은 몇십년전의 글을 글이랍시고 발표하는 그 용감성에 탄복한다.”느니 하면서 댓글을 달았는데, 신랄하게 비꼬며 질책한것이 그야말로 천하일품이였다. 욕사발을 얻어먹은후 나는 허심히, 여러면으로 깊히 사고해 보았다. 그리고 여러사람께 자문하기도 하였다. 이젠 여러해가 지나갔지만, 나의 관점에는 변화가 없다. 개혁개방후, 나가는것과 들어오는것이 점점 더 확대되고 편리해지고 많아졌다. 의식형태와 직결되는 문학만 보더라도 20여가지 류파(류형)가 활개를 치며 내노라 하고 있다. “순수문학”이요 “자연주의 문학”, “사실주의 문학”, “주류문학”이요 하는 전통파는 더 말할것도 없고 “애정문학”, “감상문학”, “고백문학”, “커피문학”, “종교문학”, “상흔문학”, “비교문학”, “분단문학”, “친일문학”, “성문학”, “기생문학”…듣고도 모를 문학이 란무하는것이 똑 마치 식전로천장마당 같고 만화통 같다. 주지하다싶히 옛것이든 새것이든 모든 문학은 작가에 의하여 산생되고 존재하고 발전하고 멸망한다. 어떤것은 그 생명이 길고 어떤것은 짧을뿐이다. 문학은 작가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에 따른다. 나는 여전히 당의 작가, 인민의 작가로 혁명사업에 이바지 하고저 한다. 짐작컨대 누구도 감히 현실적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당이라든가 인민이라는 개념과 실체는 감히 부정하지 못할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혁명이라는 말을 쓰지않는다느니, 그런말이 이젠 없다느니, 케케묵은 옛말이라느니, 혁명이란게 언녕 없어졌다느니… 하고 말하는 사람은 있다. 나는 인정컨대 지금의 중국의 모든일은 여전히 선배들이 시작한 혁명사업의 계속이며 혁명사업과 관련이 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산골할머니가 장마당에 와서 닭알을 팔거나 미나리나물을 파는것도 다 혁명과 관계된다고 본다. 나는 “혁명문학”을 열애한다.            우리 땅 역시 수년전의 일이다. 그때, 수필을 한편 발표했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여 한바탕 욕사발을 먹었다. 그 수필은 중국에서 사는 우리조선족들이 마치도 남의집에 와서 얹혀 사는것처럼 송구해 할것이 하나도 없다는, 우리조상들이 이땅을 ㅡ 중화대지를 형제민족들과 함께 개척하고 건설하고 보위하며 살아온것이 수천년이 된다고 소리높히 웨친것이 사달(사단)이 되였든 것이다. 나의 수필에 격분한 어떤 사람들은 “이따위 세상물정두 모르는 자가 무슨 작가라구?! 쇠웃다 밑궁기가 찢어지겠다. 별 미친놈 다 보겠네.”, “우리할아버지가 조선서 들어온지가 80년밖에 안된다는데 무슨헛소리를 하는가?! 수천년이라니? ㅉㅉㅉ.”… 그야말로 무슨역적이나 나타난듯이 격분해서 대성질호를 하는사람이 여럿이였다. 그때도 나는 나름껏 사료를 찿아보고 사색하고 사람들께 자문도 하였다. 결과, 나는 나의 관점이 틀리는게 아니라는 확신을 더욱 가지게 되였다. 내가 본 재료에 의하면, 중국고대사에서 상나라가 주나라에게 먹혔을때 상나라의 수천명 상층인물들이 백성들을 거느리고 전전하다가 지금의 조선땅에 정착을 해서 당지 토착인들과 융합을 했다는 것이였다. 당시 그들은 죽으면 죽었지 주나라의 종으로는 살지않겠다는 절개로 집단 이주를 단행했다고 한다. 주나라의 왕은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정치가였는지… 상나라 사람들이 이주하는것을 막지않았다고 한다. 그는 아마 대신들에게 이렇게 지시한것 같다. “그눔 종간나새끼덜이 어데가서 살던지 뒈지던지… 나에게 대가리를 숙이기 싫으문 우리 주나라 지경밖으루 나가라고 해라.” 조선고대사에서는 우리조상들이 세운 여러나라가 지금의 중국 동북땅에서 주인으로 살았다고 하였다. 수천년 력사에서 우리조상들은 중국땅과 조선땅 사이에서 래왕이 빈번했고 아예 중화대지에 정착해서 산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루한 력사의 편린들에 대하여 나는 생물학적 각도에서 분석하고 추리해 보았다. 우리조상들이 중화대지에서 주인으로 예로부터 살았다는 것을 부인할수 없었다… 나는 중국조선족은 “월강족”이요 “이민족”이요 하며 우리민족이 중화대지에 정착한것이 백년이요, 백60년이요, 백80년이요 기껏해서 이백년이요 하는 말을 정치적각도에서는 리유가 있지만 생물학적각도에서는 좀 다르다고 인정한다.        실화소설과 수필 나는 줄곧 문학학습을 자습으로 했다. 무슨 강습반이거나 훈련반, 지어는 연토회, 세미나 같은데도 한번 가본적이  없다. 그리고 어느대가한테서 개별보도를 받은적도 없다. 나에게 문학을 가르켜 준 선생은 책이였다. 나를 가장 많이 가르킨 책은 조선문학과 한족문학(주류문학)서적이였다. 거기서 실화소설이란것을 알게되였고 수필을 배우게 되였다. 어느땐가, 나는 실화소설을 한편 발표하고 무안을 당한적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한다하는 문학선생이 “소설이면 소설이고 실화면 실화지 실화소설이라는 이런 물건짝이 어데 있는가. 엉뚱한 작자가 다 있네.”고 하며 노발대발, 개몰듯 했다는 것이였다. 수필도 비슷한 대접을 받은바가 있다. 역시 “문학에 한해서는 내가 모르는게 없지!” 하는 문학선생이 나의 어느수필을 보고 “이따위가 다 무슨수필이야?! 근본상 수필규격에 맞지않아. 사람 웃긴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상 두 선생과 나는 무면식이다. 그러니까 무슨 선입견 같은건 전혀 있을수 없는거고 순 학술적 관점의 차의인것 같다. 그러나 감정색채가 다분하고 인격모욕을 당한것 같아서 기분이 좀 어정쩡했다. 하지만, 정확여부는 뒤로하고 우선 쟁명성, 비판성을 인정하며 반갑고 고마웠다. 문예평론같은 평론이 보이지 않은지 오랜 우리문단에서 희귀한 일이였던 것이다. 지난날 중국문단, 조선문단에서 주지하다싶히 생사판가리싸움(투쟁)이 한두번만 있은것이 아니다! 쩍하면 학술쟁론이 사상투쟁, 정치투쟁으로 변하여 필화로 죽고 병신이 된 아까운 사람이 얼마일까… 개새끼니 돼지새끼니 하다가 불충이요 모반이요 역적이요 우파요 반동이요 반당, 반사회주의요 반시황제, 반모주석, 반수령님… 문단에는 살기가 등등했고 피비린내가 끊칠줄 몰랐다. 개혁개방후에는 비판투쟁이 사라지고 세상의 모든것이 마음대로 넘나들고 쫄딱 벗고다녀도 내멋이고 내인권자유라… 지금 우리의 문단을 보면 마치도 자유시장, 무법천지 같은데, 우리문단에서는 정리정돈이 좀 있었으면 싶다. “실화소설”이란것이 있는지 없는지… 어떤규정(틀)을 세워야 할것인지… 수필에는 어떤규격(틀)을 짜 놓아야 하는건지… 내가 말하는 정리정돈이란 등소평령감께서 하시던 그 “정돈”같은것이다. 서로 공격하며 물어뜯고 반대하고 모자씌우고 몽둥이로 때려패고, 잡고 로동개조를 시키고 혹형을 가하고 감옥에 처넣고 총살, 교살을 하고… 절대로 이런행패질, 깡패만행을 하지말고 편안히, 느슨히, 웃으며, 함께 탐토하는 그런 “정돈” ㅡ 즉 “백화만발, 백가쟁명, 추진출신”의 당의 문예사업방침이다. 적대모순은 총칼로 해결해야 하지만 인민내부모순은 단결, 비평, 단결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세상에는 완정무결(完整無缺)한 사람이 한명도 없다. 인민내부의 사람들끼리 인격을 모욕하며 인신공격을 하며… 단결못할리는 없다… 단결해서 함께 공동의 사업을 잘 해야할것이 아닌가?!                                                                                                         20.8
156    김정권씨에게 약간의 건의 댓글:  조회:298  추천:0  2020-07-31
       수필                                            김정권씨에게 쬐꼼 건의                                                                                                                 회령 우리 문단에서 중견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정권씨가 몇달전에 명작 “불조심”을 발표했다. 단편소설은 “연변일보” 해란강 문예부간에 발표되였는데, 편집 박진화씨가 그날 신문에서 우수작품으로 추천을 하기까지 했다. 이런 일은 극히 드물었다. 소설의 내용은 간단했다. 어느 곳에서 중년쯤은 되는것 같은 부부가 살았는데, 안해가 무슨병으로(신경병?) 입원을 했다. 어느날, 안해는 소리 없이 퇴원을 하고 집에 와서 두루 집안거두매를 하다가 이미 10여개를 써버린 콘돔(避孕套) 봉투를 발견했다. 남편의 부정부패를 발견한 안해는 아주 태연자약하게 교육을 진행했다. 그는 남편의 사루마다(속곳 팬티 빤쯔따위)앞에 “불조심”이라고 큼직하게, 곱게, 수놓이를 했다. 소설은 대개 이런 것 같다. 지금은 많이 잊어먹었는데, 그때 어찌도 우스운지 혼자서 키득거린 기억이 난다. 이런 경우, 십중팔구는 안해가 발광하며 칼을 들고 거시기를 베여버린다느니 리혼을 한다느니… 죽어번져지며 란리판을 벌이겠지만 소설 속의 안해는 아주 고상하게, 문명하게, 우아하게, 인민내부의 모순을 평화롭게 처리했다. 그래서 남편씨가 얼마나 뼈저리게 착오를 검사하고, 후회하고, 개조를 결심했는지… 후과가 어떻게 효력이 있었는지… 이런것들은 소설에서 한마디도 언급을 안 하고 독자들에게 맡겨서 여운이 길게, 감칠맛이 나게하였다. 안해의 이러한 생활의 지혜, 인생철학 그리고 재치있는 예술적 처리 등으로 해서 특별추천을 했을것 같다. 소설을 본 후 그때는 웃고 말았지만, 후에 자꾸만 조금 더 다듬었으면 하는 욕심이 생겨났다. 남편씨의 팬티에 수놓이를 한 것만으로는 어쩐지 력도가 부족한것 같았다. 콘돔으로 목걸이를 해서 남편의 목에 걸어주는 엄청난 강타를 한방 먹이긴 했지만, 그건 둘 밖에 모르는 장면이여서 있는둥 마는둥이다. 안해가 입원한 기간 열번도 더 되게 바람을 쓴 남편씨가 고따위 자극에 꿈쩍이나 하겠는가 말이다. 히쭉 웃으며 코방귀를 뀔 것이다. 개구리 낯짝에 물치기다. 하긴, 남편과 자기의 체면, 그리고 병을 치료해서 사람을 구하며 출로를 주는 "간부정책", "조직원칙"을 잘 실행하는 안해의 현명성을 도두라지게 하려고 정권씨가 고심한 것 같기도 하다만… 그래서 오늘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다 보니 정권씨에게 약간의 건의를 하고자 한다. 재판이 있으면 참고하기 바란다. 첫째로는 고 “불조심”을 “불”과 “조심”을 붙혀 쓰지 말고 띄여쓰면 좋겠다. 둘째로는 그것을 조끼, 작업복, 운동복, 그리고 모자 등에도 적당한 위치에 회사이름을 새기듯 선명하게, 멋있게 써 놓거나 수를 놓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면 심원한 정치적, 사상적, 현실적 의의가 있을 것 같은데, 이런 복장이 연길에서 대 인기를 얻는다고, 그것이 어느 틈에 한국에도 전파되여 대 인기를 얻고 있다고… 소설에 조금 불어넣었으면 좋을 것 같다.   어느 땐가 한국텔레비죤에서 여럿이 모여들어 무슨 좌담을 하는데, 한국남자들이 왜서 바람을 많이 쓰는가? 하는 화제가 열변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신사풍의 한 중년사내가 아주 심중한 어조로 발언하기를 남자들의 거시기가 겉에 달려있기에 원체 거들렁거리기를 좋아하며 그리고 한국에는 해풍이 많아서 거시기가 방법없이 마구 흔들리며 결국에는 바람으로 이어진다고 "과학적"으로 "학술발언"을 하는 것이였다. 이것은 거시기 즉 “불”의 상황이고 다른 한가지는 주지하다싶히 한국에서는 확실히 화재 즉 “불”이 많다. 때문에 “불 조심”을 써서 입고 쓰고다니며 시시각각 “불 조심”을 하는것은 여러면에서 좋을 것 같다. 바람에 대한 경고도 되고 화재에 대한 경고도 되겠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그런 옷이나 모자를 사용하는 치들은 속으로 다 알고 있으며 무슨 생각이 있을 게다. 내가 왜서 하필이면 이것을 사용하는가… 물론, 활량끼가 많은 부랑자들은 우정 애용할 수도 있다. 그놈들은 정부(情妇)를 끼고 바람피우는 것을 행세꺼리로 아는 놈들이니까. 어떤 곳에서는 아주 류행으로 되고 있기도 하다. 모임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하는 것은 케케묵은 구식이고 정부를 끼고 참가하는것이야말로 신식이고 현대 멋이라고 공공연히  인정하기까지 하는 한심한 상황이다. 이상의 첨삭은 음란물이라거나 치안문란이라거나 할 수는 없기에 검사에 걸릴 리는 없을 것 같다. 정권씨! 더 많은 명작을 기대해요. 20.6.
155    (수필) 엷어가는 인정 댓글:  조회:449  추천:0  2020-06-23
       수필                     엷어가는 인정                                                ㅡ누구의 과냐?                                                                                                                                       회령     사촌동생의 전화를 받고 니는 착잡한 심정을 어쩔 수 없었다. 벌써 네번째로 한국벌이를 나간 동생은 전화에서 울먹이며 이런 말을 하였다.   “… 형니메! 내 한가지 부탁을 하기오. 수고스럽지만 거, 우리 아덜께 형니미 둬마디 말씀을 좀 해주오.”   “무슨 말을?”   “이 애비께 드문드문 좀 전화를 하라고…”   동생에게는 아들 하나 그리고 그 아래로 딸 둘이 있다. 아들과 큰딸은 이미전에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고 젖먹이 막내딸은 북경에서 한국회사를 다니는데 서른살이 훌쩍 넘었지만 미혼이다.   동생은 평생 농민이지만 모진일은 별로 하지 않고 살았다. 집체화 시절에는 생산대회계에 대대(촌)신용사출납을 겸하여하다보니 가방에 장부책이며 수판(주판)을 넣어메고는 이마을 저마을을 돌아다니며 일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때는 아버지 어머니가 정정하다보니 동생은 자류지밭 한고랑 김을 매는 법도 없었고 땔나무 한단 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산골농촌치고는 손발에 흙을 뭍히지 않고도 상등공수(보수)를 받는 출세를 한 총각이여서 반반한 처녀에게 장가를 갔다. 그리고 줄줄히 삼남매를 낳아 키웠다.   동생이 고생을 하기는 개혁개방이 시작된 후 부터다. 아버지 어머니는 이젠 밭을 다루기가 힘들어서 수, 한전은 모두 세를 주고 터밭이나 다루면서도 여기저기가 늘 편치않아했다. 땔나무도 하기 힘들어 마을 주변에서 쑥이며 잡초를 긁어다 불소시개를 하며 비싼 석탄을 사다 때였다. 해마다 화목철이 되면 남들은 다 산에가서 십여수레씩(일년 치) 화목을 해다가 때였지만 동생은 나무를 바로 할줄도 모르거니와 할념도 없었고 하기도 싫어했다. 아래로 녀동생이 넷이였는데 다 외지 농촌으로 시집을 가서 일잘하는 매부가 넷이나 되였으나 그들을 불러다 화목을 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도 삼촌내외분은 아들에게 잔소리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삼촌내외는 성질이 특이했다. 아이때부터 애들에게 한마디도 무엇을 가르키거나 욕을 하거나 잔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고 심부름이거나 일같은걸 시키는 법이 없었다. 특히 동생에게는 더욱 각별했다. 늘 딴밥을 해 먹이고 닭알이며 말린 세치네(잔 물고기)로 반찬을 해 주며 온냐온냐 많이 묵어라 많이 묵어라 했다. 그것은 아이애비가 되여서도 그랬다.   농촌이 개체화로 되자 그는 출세한 벼슬들이 다 없어지고 백수건달이 되고 말았다. 동생은 녀편네를 한국에 가짜시집을 보낸 홀애비들과 함께 부커나 장기를 놀면서 개추렴도 하였다. 삼복철에는 산천당 당나무 밑에서 매미노래를 듣다가는 쉬원히 낮잠을 늘어지게 잤다.   그러나 상팔자는 얼마 가지 못했다. 삼남매가 무럭무럭 자라면서 아들애는 초중에 들어갔는데 공부는 수수했다. 하지만 고중까지는 글을 읽혀야 겠는데 고중은 시가지에 밖에 없으니 그 시발(뒷시중)이 간단한것이 아니였다. 아버지 어머니와 안해가 돼지를 기르고 닭마리나 치는 것을 가지고는 어방도 없는 일이였다. 동생네는 다른사람들을 본받아 안해가 한국벌이를 가기로 결정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가짜결혼방법은 쓰지 않고 신용사 대콴(대출)을 맡고 이곳 저곳에서 고 리자돈을 꾸어 순리롭게 한국으로 나갔다. 안해가 떠나던 전날 집에서는 닭을 한마리 잡아 송별연을 하였는데 그때 분위기는 그야말로 일희일비였다고 동생은 나에게 말하였다. 아버지가 나가서 몸조심하며 바쁘면 곧 돌아오라고 말하니 안해는 울면서 대답을 하였는데, 그말은 생각하면 지금도 불쾌하다고하였다. 그날 안해는 말하기를 “아부지 어마니는 해마다 기력이 못해가고 아이들 시발은 점점 더 커가는데, 죽던 살던 내가 총목을 메지 않으면 이 집에서 누기(누가) 할 사람이 있슴까?!” 하더라는 것이였다. 그때, 나는 틀리는 말이 아니구만! 하고 동생에게 한방 쏴주려다가 참았다.   안해는 한국에 나간후 음식점이며 려관집에서 일하며 두달에 한번씩 꼭꼭 돈을 보내왔다. 그러기를 한 이티를 해서 빚을 다 갚고 아이들의 고중시발까지 들어 주었다. 그런데 빚을 다 갚은후에는 아이들의 학비만 보내면서 벌이가 신통치 않고 몸이 불편하다고 하였다. 아들과 큰딸은 고중에 가서 련애에 빠져 공부를 망치고 말았다. 막내딸은 공부를 잘 해서 북경 어느 대학에 붙었다. 안해는 아프다면서도 계속 일을 하였는데 집에 보내오는 돈은 점점 줄어들더니 얼마후에는 아예 끊어버렸다. 막내딸애한테는 자기가 직접 돈을 보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한국에서 남편을 얻었으니 리혼수속은 동생이 언제 하고프면 언제하라고, 필요재료는 보내라고 할 때 즉각 보내주겠다는 것이였다.   호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동생은 사태가 이렇게 되니 황연대각 깨도가 되였다. 생각해 보니 겨우 초중까지 다닌 농촌농민이 50여 평생을 아이때부터 노라리를 치며 오늘까지 살아 왔으니, 행복한건가 한심한건가… 부모까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시집, 장가까지는 책임을 져야겠는데… 그는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때로부터 동생은 한국벌이에 나섰다. 동생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집에서는 닭을 잡고 환송식을 하였으나 그것은 눈물의 리별식이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찌 고생을 하겠냐며 근심이 태산이였고 바쁘면 인차 돌아오라고 거듭거듭 당부를 하였다.   동생은 한국에 나가서 결사적으로 돈벌이를 하였다. 그는 층집건축회사에서 실내전기배설일을 하였는데 한국기술자(반장) 밑에서 온갖 천대와 욕사발을 먹어가며 말그대로 어지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며 억울한 월급을 받았다. 아파트는 층층이 되는족족 전기가설이 따라가는데 반장은 도급을 맡았기에 새벽부터 밤중까지 줄기차게 일을 들이댔다. 동생은 현기증이 나서 사다리에서 떨어지기도 여러번을 했고(다행이 뼉따구가 끊어진적은 없었다.) 코피가 터지는 것은 편지에 문안이였다. 이렇게 반년남짓 구불고(뒹굴고)나니 동생도 일에 완전히 자신이 있었다. 말그대로 수영은 수영중에서 배우는 거지만 동생은 전쟁중에서 전쟁을 배운셈이다. 이제부터는 동생도 도급을 맡았는데 흑룡강서 간 동포를 조수로 썼다. 이러기를 2년7개월을 하니 돈을 꽤 벌었다. 그간 세놈의 악덕업주들 한테 4만여원의 협잡을 당했지만 수중에는 30여만원이 있었다. 아들의 잔치때문에 동생은 돌아왔는데, 잔치를 멋드러지게 잘 하여 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내며 치새(호평)를 받았다. 리혼을 한 안해는 어데가서 붙었는지 아들잔치 기별을 할 수 없었다.(아들은 엄마가 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안대도 제무안에 오지 않았을 거지만.)   그해 설과 보름을 다 쇤후 4월초에 동생은 또 한국벌이를 나갔다. 2년남짓 지나서 이번에는 큰딸애가 잔치를 하게 되여 동생은 집으로 왔는데, 딸의 잔치도 잘 하였다. 그리고는 인차 한국으로 떠났다. 세번째다. 이번에는 련 6년을 일하고 심장이 좋지 않아 돌아 왔는데, 그간 아버지 어머니는 아들을 그리다가 선후로 하늘로 갔다. 부모일에 대해서는 아들과 큰딸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한국에 갔기에 동생은 아버지, 어머니가 사망해도 오지 않았다. 대신 동생은 아들과 딸에게 각각 그간  15만원을 보내줬다. 삼촌과 삼촌댁의 후사처리는 내가 주도해서 했는데, 동생과 조카들이 골회함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대로 날려 보냈다. 삼년제도 한꺼번에 에때버리고(대체하다) 유상은 불살라 버렸다. 고인들의 딸들도 련락을 할 수없다보니 두번 다 오지 않았다.   장례후 나는 식당으로 가지않고 안해와 애들을 다 데리고 곧장 돌아오고 말았다. 그날, 나의 심정은 참으로 비감하고 격분했다…   그후, 그러니까 삼촌댁이 삼촌을 따라간후 얼마 안되여 동생은 심장병으로 돌아왔는데 거이 일년을 휴식하며 치료를 하였다. 병이 완쾌하자 동생은 또 한국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기일을 할 수가 없었다. 70을 바라보는 사람이다보니 어데서도 위법이라며 고용하려고 하지 않았든 것이다. 어쩌다가 이번에 온 전화에서 동생은 수원근처의 작은 양로원에서 호리일을 한다고 하였다. 일당으로 인당 한화만원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임무는 24시간 자립못하는 늙은이 여섯분을 돌보며 병실의 청소까지 말끔하게 해야 하며 구석에서 잔다고 하였다. 일을 참답게 하건만, 조금만 자리를 비워도, 수간호사는 따지며 훈계를 한다고 하였다…   동생은 매일 죄로운(가련한) 로인네들을 돌보며 자기의 앞날에 대하여 생각이 많으며 서글프다고 하였다. 웬일인지 자식들의 전화가 자꾸 기다려 지고 그립기도 하지만 모색한(매정한) 아이들은 돈을 달라는 전화외에는, 보낼만한 돈이 별로 없다고 한 후에는  한마디 문안전화도 없다고, 없은지 이젠 오래다고 하였다. 동생은 아이들을 쉽게 키웠다. 그것은 아버지 어머니가 아이들을 어루만지며 끔찍히도 안아키웠기 때문이다. 동생내외는 낳기만 하고 키우는 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동생은 울먹이며 나에게 아이들의(이젠 아이가 아니지…) 전화호를 말해 주었다. 하지만, 조카들과 내가 뭐라고 하면 좋겠는지… 나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20.4.
154    강청 일화 댓글:  조회:443  추천:0  2020-05-09
     수필                                                     강청 일화                                                                                                                   회령 중화민족의 6천년 력사에서 아마도 모르긴해도 강청과 같은 녀자는 처음일 것이다.(강청. 원명 리운학. 1914.3.5ㅡ1991.5.14. 자살.) 강청은 중국은 말할것도 없고 지금세상에서는 다 아는 인물이다. 그야말로 말그 대로 인류력사에서 길이 전해져 갈 인물이다. 다른나라 다른민족의 유명인물에 대한 재료는 아는게 없다보니 뭐라고 말할게 없지만, 중국의 중화민족에서 생겨난 강청에 대해서는 많은 재료가 이미 세상에 공개되다보니 기본상에서 알며 할말이 있다. 아래에 최근에 내가 본 가장 신빙성이 있는 재료에서 두가지 사실을 발췌한다. 1974년 1월 25일, 강청 일파는 중앙정치국과 모택동주석, 주은래총리 몰래 국가급대회를 북경 수도체육장에서 소집하였다. 대회는 “비림비공(批林批孔)동원대 회”라고 했다. 동원되여 동원대회에 참가한 중앙정치국과 국무원직속기관 각급 간부가 2만여명이 되였다. 오후 3시, 이 “동원대회”에 참가하여 주최하라는 긴급통지를 갑자기 받은 주은래총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앓는몸으로 급히 대회장으로 갔다. 주은래총리가 도착하자 대회는 즉시 시작되였다. 대회를 주최하게 된 주총리는 먼저 자기검토를 하였다. “부대동지들이 비림문제에서 한발 앞섯습니다. 어제 춘교(장춘교. 해방군총정치부 주임)동지가 경서빈관에서 이미 대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우리 중앙과 국가기관에서는 한발 늦었습니다…” 주총리의 말이 방금 시작되였는데, 강청과 장춘교 그리고 그들 추종자들이 즉시 고함을 질러댔다. “우리는 투쟁철학을 요구한다! 우리는 투쟁할 것이다! 우리는 투쟁할 것이다! 우리는 투쟁할 것이다!” 마이크에 입을 바짝들이대고 지르는 강청과 장춘교의 갈린 목소리는 확성기로 울려 퍼지면서 귀가 터지는듯 했고 따라부르는 구호소리는 체육장에 울려 퍼졌다. 따라서 강청은 수시로 일어나서 “비림비공”에 대한 “우리의 붉디붉은 태양이시며 위대한… 모주석의 지시를 모주석을 대표하여 전달” 한다면서 주총리의 말을 거듭 가로채고 거기에 요문원도 끼여들었다. 대회장에 온 반란패두목들은 “위대한 기수(강청)”의 뒷심이 있으니 더욱 안하무인으로 기세가 등등해서 날뛰였다. 그들은 중앙의 정식비준도 없는데 대회에서 공개적으로 곽말약 등 국가지도자들을 질책 공격하였다. 여기에다 강청은 모주석의 ”10개 비판은 잘 된 문장이 못된다.”는 시어구를 인용하며 붙는불에 키질했다. 하여, 곽말약에 대한 한차례의 성세호대한 비판이 벌어졌다. 이날의 소위 “비림비공동원대회”는 매우 긴장한 분위기속에서 사람들을 위협하며 화약내가 가득 풍기게 하였는데, 그 주제는 주총리를 비판하는 것이였다. 그들은 한바탕 떠들며 련속 소란을 피워댔는데, 모두가 주총리를 빗대고 공격하는 것들이 였다. (그날의 이 상황을 보고 받은 모주석은 몹시 격분하였다. 그는 즉시 명령을 내려 강청일파가 전국에 발표하려고 준비한 “1.25대회” 실황록음테프와 “대회성과”선전재료를 몽땅 봉쇄하게 하였다. 그날 대회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은 한바탕 놀림을 당한데 대하여 몹시 불쾌해 하였다. 그들은 강청일파들이 정치문제에서 되는대로 행패질을 하며 엄숙하지 못한 짓거리에 대하여 십분 격분과 반감을 가지였다.) 이틀후 즉 1974년 1월 27일 밤, 중앙정치국에서는 인민대회당 동대청에서 해방군총정치부와 “해방군보”등 부대 선전계통 책임자들을 불러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는 주은래, 엽검영, 강생, 장춘교, 강청, 요문원, 왕동흥 등 령도자들이 참석하였다. 대청 동쪽에 림시로 만든 주석대는 대청 지면보다 약 10공푼가량 높았다. 령도들은 회장을 향하여 착석하였다. 회의장에 앉은 대다수 사람들은           이틀전의 “1,25대회”에 참가한바가 있기에 오늘밤에는 또 무슨 새로운 구경거리가 있겠나… 서로 귀속말로 수군거리며 주석대를 바라보았다. 회의는 주은래가 주최하였다. 그는 엄숙한 기색으로 개회사를 몇마디 하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겨우 참으며 기다렸다는듯 강청이 새된 목소리로 소리높히 제일먼저 발언을 하였다. “우리정치국 동지들이 의논하였는데, 지금 비림비공운동이 전국각지에서 진행함이 평형치 못하며 적극적이 못되며 주동적이 못된다. 하여, 중앙에서는 전국의 각성, 시, 자치구, 각 대군구에 기자를 주둔케 하고 그들이 련락원을 감당하기로 하였다. 이에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한다. 련락원은 지방의 당, 정, 군의 상무회의에 참가할 수 있으며 지방의 보밀전화로 중앙과 직접 련계를할 수 있으며 지방의 당, 정, 군 령도기관들에서는 마땅히 편리와 협조를 해야 한다. 간섭하거나 막으면 않된다. 우리가 직접 각지의 정황을 장악해야 한다.” 강청이 발언할때 장춘교는 여러번 께끼였고 강생과 요문원은 보충하거나 해석을 하였다. 회장의 청중들은 “중앙”에서 지방의 각급령도층에 대하여 신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즉시 느끼게 되였다. 끝으로 강청은 회의 참석자들에게 무슨 의견이 없는가고 한마디 물었는데,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기침소리 한마디도 없이 잠잠 했다. 상황이 이렇고 보니 강청은 자존심이 여지없이 상하게 되였다. 사람들의 랭대에 난처해진 강청은 격분을 돋구며 사방을 둘러보다가 발딱 일어서더니 크게 소리질렀다. “총정치부 전유신이 왔는가?” “왔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전유신은 해방군총정치부 부주임으로 키가 크고 표준적인 군인이다. 그는 사람들속에서 벌떡 일어나 차렸자세로 강청에게 군례를 하며 높은 소리로 힘차게 대답하였다. “전유신! 내가 묻겠는데, ‘공산당선언’이 어느해 발표되였는가?” 갑작스런 물음에 전유신은 인차 대답을 못하였다. “전유신! 내가 묻지않는가?! 왜 대답을 않하는가?!” “가능하게 184… 어느해 같은데…” “당신, 총정치부 부주임이라는게, 부대의 고급간부라는게, ‘공산당선언’이 발표된 시간도 모르는가!” “내가 준비가 없다보니… 학습이 부족하여…” “무슨 학습부족인가?! 나와 입씨름 할텐가?!” 전유신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리왔! 저자의 령장과 모휘를 당장 뜯어라!” 강청은 자기의 신분(그는 부대에 아무런 직무도 없었다.)과 때와 장소를 헤아리지 않고 밖에 대고 소리질렀다. 즉시 몇명의 군인이 들어와서 강청의 “명령”대로 집행하였다. 전유신은 꿋꿋히 서서 머리를 번쩍들고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군인기개를 보이였다. 이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망태기횡포, 허튼짓이 였다! 강청은 아무짓이나 내키는 대로, 마음대로 해도 되는건가?! 너무도 격을 벗어난, 상상할수도 없는 행위였다… 사람들은 경악과 분노를 금할수 없었다. 강청은 전유신을 릉욕하고도 위엄을 부리기에 성이 차지않았는지 또 소리를 질렀다. “ ‘해방군보’ 화남이 왔는가?” “왔습니다!” 화남은 힘차게 대답하며 강청에게 군례를 하였다. 그는 “해방군보”의 주필이다. “너, 대답하라. 파리공사가 어느해 성립되였는가?” “1871년…” 화남은 주저하다가 대답한후 학고한 신심이 없어서 더 말하지 않았다. 전유신과 화남을 닦아세운후 강청은, 얼마나 한심한가 모두 보라… 학습을 해야 한다... 모주석을 따라배워야 한다… 하며 모두를 한바탕 훈계하다가 오른켠에 앉아 있는 엽검영을 보면서 갑자기 생각이 난것처럼 큰소리로 말했다. “검영! 듣건대 당신의 어느아들이 공군부대에 있다던데 어떻게 참군했는가? 뒤문치기를 하지않았는가?” 엽검영은 강청을 한번 흘겨본후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고 불쾌한 기색으로 머리를 돌려 다른곳을 바라보았다. 그날밤의 소위 “중앙”에서 소집했다는 정치국회의는 강청이 주역이 되여 표연을 하고 일파들이 한바탕 맞장구를 치며 소란을 떨고 끝났다. 그들의 야심은 “비림비공” 운동에 “비 주공”(批周公ㅡ주은래를 비판, 타도), “비 주후문”(批走后門 ㅡ뒷문치기) 을 접목시켜 성세호대한 전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