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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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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모택동의 이야기(27) 댓글:  조회:794  추천:3  2024-05-24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28)                                                                                                                    회령   마지막 하루   중국력사에서 1976년은 기억에 새로운 한해다. 1976년 1월 8일 주은래 총리 사망. 1976년 4월 5일 천안문광장에서 수십만 군중들이 자발성적으로 주총리를 추모. 4인방을 성토. 당시, 이 사간을 “천안문반혁명사건”이라고 했음. 1976년 4월 7일 중공중앙은 두개문건을 결의 통과. 하나는 등소평의 당내외 일체직무 철소. 다른하나는 화국봉을 중공중앙 제1부주석으로 임명. 국무원 총리로 임명 한다는 문건임. 4인방의 발광적인 책동으로 등소평은 “천안문반혁명” 사건의 후태(막후지휘)로 무함되여 모택동에게 보고 되였다. 모택동은 격노하여 그렇게 높히 긍정하고 신임하며 중용하던 등소평을 단마디로 모든 직책에서 철직 시켰다. 그러나 당에 남겨두고 관찰한다는 여지를 남겨 놓았다. 4인방들은 여전히 아무런 실권도 얻지 못했다. 1976년 7월 6일 주덕 위원장 사망. 1976년 7월 28일 하북성 당산시 대지진 발생. 24.2만명이 사망. 16.4만명 중상. 1976년 9월 9일 모택동 사망. 1976년 10월 6일 밤 “4인방”을 진압. 1976년 10월 7일 화국봉을 중공중앙 주석, 군위 주석으로 임명.(결의문건 통과)   1976년 9월 8일은 모택동의 생애에서 마지막 하루 였다. 9일 령시10분에 그의 심장은 박동을 마치였다.   8일, 모택동의 하루는 다음과 같다.   그날도 모택동은 선후로 문건을 보고 책도 보았는데 자신은 맥이 없어서 곁에서 다른사람이 들어 주거나 읽어 주었다. 서도와 오욱군의 통계에 의하면 그날 모택동은 이런 사업에 두시간 50분을 사용 했다.   그날 모택동은 정신이 들자 주변의 의무인원과 뭐라고 입놀림은 하였으나 소리는 전혀 내지 못하였다. 그의 몸에는 정맥수액관이 꽃혀 있고 가슴에는 심전도감호선이 붙어 있고 코에는 비사관과 산소호흡관이 꽃혀 있었기에 소리를 낼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보다도 그이는 생명의 모든 기력을 이젠 다 썼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으니 연필을 그의 손에 쥐여주고 종이를 받쳐 들었다. 모택동은 있는 힘을 다하여 종이에 겨우 세 줄을 그었다. 그리고 또 있는 힘을 다하여 나무침대 모서리를 겨우 세번 다치였다. 사람들이 삼목을 묻는가고 물으니 모택동은 알릴락 말락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 였다. 그이는 일본의 자유민주당 총재이며 내각총리대신인 삼목무부의 총선 결과를 주시했던 것이다.   밤이 깃들자 모택동의 심장에서는 이상조짐이 나타나기 시작 했다. 사람들은 긴장해 지기 시작  했다. 병석을 지키고 있던 정치국 위원들은 줄을 서서 차례로 모택동과 결별을 하기 시작  했다.   당시 모택동의 의식상태는 명석하였다. 말은 할 수 없었으나 눈은 가늘게 뜨고 있었다. 엽검영이 곁에 오자 그이는 돌연히 명랑해 지었다. 모택동은 힘들게 팔을 움직여 응대를 하였으나 엽검영은 눈물로 시력이 흐려지다보니 모택동의 반응을 감촉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 갔다. 엽검영이 병방을 나가려는 때에 모택동은 극히 미약한 손짓으로 그를 오라고 하였다. 공작원은 인츰 휴식실로 달려가서 “수장님! 주석께서 부르십니다.” 하고 엽검영에게 알렸다. 엽검영은 즉시 달려 와서 “주석님! 내가 왔습니다. 무슨 분부가 있습니까?” 하고 물으며 머리를 숙여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였다. 모택동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며 입술은 움직였으나 말은 하지 못했다. 모택동은 있는 힘을 다 하여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한참후 모택동은 엽검영의 손을 놓으며 눈을 감았다. 엽검영은 천천히 돌아갔다. 그는 모택동의 마음을, 생각을 알수 있었던 것이다. 즉, 모택동은 자기에게 사업의 중임을 당부하였던 것이다.   몇시간 후, 9월 9일 령시 10분 모택동의 심장은 박동을 멈추었다.                                                                                                                     24. 3.17  
206    모택동의 이야기(27) 댓글:  조회:867  추천:0  2024-04-18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27)                                                                                                                     회령   모택동과 류소기의 최후의 만남   중공8기11중전회는 1966년8월1일부터 12일까지 북경에서 열리였다. 회의 마지막날 모택동의 제의에 의하여 중앙령도기구에 대한 개선이 있었는데 중앙위원들은 사전에 인쇄한 정치국상무위원 명단에 동그라미를 그리면 되였다. 명단의 서렬은 다음과 같았다. 모택동 림표 주은래 도주 진백달 등소평 강생 류소기 주덕 리부춘 진운. 류소기는 1945년 7기 당대회후 줄곧 인정되여 온 후계자 위치에서 8위로 내려 갔다. 8기11중전회후로부터 류소기에 대한 비판은 급격히 강도가 높아 지면서 10월부터는 “류소기를 타도”하는 새로운 계단에로 전입 하였다. 1967년에 들어 서면서 류소기의 처지는 더욱 험악해 지었다. 1월1일, 중남해 반란파들은 류소기가 거주하고 있는 복록거 담장에 “중국의 흐루쑈브 류소기를 타도하자!”는 표어를 붙이였다. 1월3일에는 척본우의 사촉하에 류소기와 부인 왕광미를 투쟁하였는데 이것은 첯번째로 시작이였다. 1월12일, 척본우는 조어대 16호층집에서 중앙판공청 일부 반란파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류소기 등소평 도주가 중남해에서 아주 편안히 있는데 당신들은 왜서 투쟁하지 않는가?”하고 선동 하였다. 그날 저녘 중남해 반란파 “홍색반란단”의 150여명 사람들은 복록거에 뛰여들어(중앙경위국에서 막지 말라고 지시했음) 뜨락에서 류소기와 왕광미를 투쟁 하였다. 이때로부터 복록거는 마치도 장마당처럼 되였는데 누구든지 마음대로 쏘다니며 대자보를 붙이고 류소기와 왕광미를 투쟁하였다. 류소기와 왕광미는 인신자유를 완전히 잃게 되였다. 1월13일 깊은밤, 모택동의 비서 서업부로부터 류소기 판공실에 전화가 왔는데 “주석께서 류소기와 인민대회당에서 담화를 하려고 하기에 내가 차를 가지고 가니 초병들이 막지말게 하라.”는 것이였다. 류소기의 비서 류진덕은 “지금 이곳은 장마당 같이 되여 누구나 마음대로 드나드는데 당신이야 더 말할것이 있는가.”하고 대답한후 인차 류소기에게 통지를 전하였다. 당시 모택동이 거주하고 있은 인민대회당과 중남해는 지척이다 보니 서업부는 인차 복록거로 왔다. 류소기는 담배갑과 성냥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그를따라 모택동에게로 갔다. 왕광미는 그의 옷깃을 바로 잡아주며 불안한 심정을 감추지 못해 하였다. 모택동을 마주하자 류소기는 주동적으로 자기의 착오를 검토한후 정중하게 자신은 문혁중 착오를 범했기에 더는 령도직무를 감당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표시한후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의견을 제출 하였다. “첯째. 이번 로선착오(문혁중)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광대한 간부들은 좋으며 특히 많은 로간부들은 당의 보귀한 재부이다. 주요한 책임은 내가 짊어지고 광대한 간부들은 될수록 빨리 해방하여 당의 손실을 적게 하기 바란다. 둘째, 국가주석, 중공중앙정치국상무위원, 모택동저작편찬위원회주임 직무를 사직하고 자녀들을 데리고 연안 혹은 고향에 가서 농사를 짛게 하여 주기 바란다. 이렇게 함으로서 될수록 빨리 문화대혁명을 결속지어 나라의 손실을 적게 하기 바란다.” 모택동은 한참 침묵후 류소기에게 “기계유물주의” “기계인” 그리고 “회남자” 등 몇권의 책을 참답게 읽을것을 건의하였다. 헤여질때 모택동은 문어구까지 바래주며 “돌아가서 학습을 잘 하며 몸을 돌보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택동이 류소기에게 한 최후의 두마디 말이였다. 그리고 이번의 만남은 그들이 1922년에 서로 알게된후 최후의 만남이였다. 그후 류소기는 갖은 박해를 받아 1969년11월12일 새벽에 한많은 한생을 마치였다. 그리고 1980년 2월 명예를 회복 받았다. 여기서 좀 보충해야 할것이 있다. 1966년12월18일 모택동의 비준하에 류소기 전안조가 비밀리에 성립 되였다. 이 결정을 당시 공안부장이며 중앙문혁 성원인 사부치가 선포할때 “이것은 중앙에서 결정한 것이며 전안조의 책임자는 강청이다.”라고 명확히 말했다. 같은날 중앙문혁 부조장 장춘교는 중남해 서문 전달실에서 비밀리에 청화대학 반란파 두목 괴대부를 불러다 공개적으로 류소기 등소평을 포격하라고 귀뜀해 주었다. 그는 “철저한 혁명정신을 발양하여 물에 빠진 개를 호되게 족치며 그들을 추악하게 만들며 절대로 중도에서 그만두지 말라.”고 하였다. 장춘교의 귀뜀을 받은 괴대부는 12월25일 천안문 광장에서 “류소기 등소평을 대표로 하는 자산계급반동로선을 철저히 타도하는 선서대회”를 거행 하였다. 12월27일에는 북경 고등학교 반란파들이 공인체육장에서 련합으로 “류, 등 자산계급반동로선을 철저히 투쟁하는 대회”를 가지였는데 참가인수가 무려 10만에 달하였다. 12월30일, 중앙문혁대리조장 강청은 왕력 관봉 요문원 등 성원들을 이끌고 청화대학에 가서 괴대부들의 행동을 “견결히 지지 한다!”고 표시 하였다. 이와 동시에 척본우는 북경광업학원에 가서 “류, 등은 당내의 자본주의길로 나가는 제일 큰 집권파다!”라고 선양 했다. 강생은 인민대회당에서 있은 한차례 회의에서 “류소기는 중국의 흐루쑈브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그번의 만남후 풍부한 투쟁경험을 갖고있는 정치가이며 모택동을 잘 아는 중공 령도자로서 류소기는 자기의 운명에 대하여  예감이 있었다. 인민대회당에서 집으로 돌아온후 류소기는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왕광미와 아이들에게 “주석께서 나의 착오를 비판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매우 사양적이 였고 참답게 학습하며 몸을 잘 돌보라고 부탁 하였다.”라고 의식적으로 말하였다. 세상사에 부족한 아이들은 단번에 가슴속의 돌멩이가 뚝! 떨어진듯, 정황이 좋아지리라 생각 했다. 그러나 류소기 비서가 본바에 의하면 이튿날 왕광미의 기색은 “돌멩이가 떨어진듯한” 그런 기뻐하는 모습이 전혀 아니였다. 아니나 다르랴! 이틀후 중남해 반란파들은 복록거 뜨락에서 류소기와 왕광미를 또 한바탕 투쟁 하였다. 그리고 사흘후에는 전화기마저 철거해 버렸다. 며칠후에는 자녀들과 신변의 모든 공작인원들을 쫓아버리고 복록거 앞채에는 류소기, 뒤채에는 왕광미를 감금 했다. 그리고 통로를 벽돌로 담벽을 만들어 막아 버렸다. 이때로부터 그들은 영영 만나보지 못했다.(1967년9월13일 왕광미는 정식으로 체포되여 진성감옥에 이송 됨.) 엄밀한 감시하에 그들은 모든 인신자유를 완전히 박탈 당하였다. 하루에도 몇차례씩 투쟁을 당하면서 뚜들겨맞는 등 비인간적인 잔혹한 유린을 당하였다. 1968년7월9일부터 류소기는 완전히 병상에 눕게 되였다. 그리고 병상에서 투쟁을 받았다. 10월11일부터는 비사법으로 음식물을 먹였는데 1969년 11월12일 사망할때까지 그렇게 했다. 1969년10월17일 밤 류소기는 림표의 중요한 심사대상들을 소산시키라는 소위 “전비소산”명령에 의하여 개봉시에 실려 갔다. 그는 개봉시 원 정부뜨락에 있는 창고에 같히였다.(원 국민당 금성은행 금고) 그리고 거기서 사망 했는데 이튿날 밤중 비밀리에 화장을 했다. 그의 사망을 왕광미와 자녀들은 3년후에야 알았다. “류소기전안조”는 1966년12월18일에 비밀리에 조직된후 1968년4월하순까지 줄곧 “왕광미전안조” 라는 명의로 활동 하였다. 4월하순후부터 “류소기, 왕광미전안조” 라고 공개 했다. 전안조의 조사는 줄곧 비밀적으로 진행 하였다. 류소기 본인과는 한차례의 대화도 없었다. 하여 류소기는 자기를 조사하는데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1968년10월13일부터 31일까지 열린 중공8기12중전회에서는 전안조의 소위 “심사보고”를 통과하고 류소기를 당에서 영원히 축출한다고 결정 하였다. 이 결정을 대회 결속후 24일이 지나서 즉 11월24일을 선택해서 류소기에게 들려 주었다.(선포 했다.) 이날은 바로 류소기의 일흔돌 생일날이 였다. 청천벽력의 심판을 들은 류소기는 기절하여 쓰러졌다. 그때로부터 이듬해 11월12일 사망할때까지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1980년2월2일부터29일까지 열린 중공중앙11기5중전회는 류소기의 마음속의 모든 말을 충분히 하여 주었다. 전회는 류소기의 모든 명예를 회복 시켰다. 5월19일 오후1시 류소기 골회를 모신 군함은 황해 대공도 부근의 골회를 뿌릴 지정한 해역에 이르렀다. 북경에서 골회를 모신 전용비행기가 청도로 올때 기상예고는 청도의 날씨가 “맑고 바람도 없다.”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날씨는 음울하게 흐리더니 섬섬세우가 내리는게 아닌가?! 골회를 뿌린후 돌아오는 군함이 수평선에 나타나자 갑자기 구름사이로 찬란한 해빛이 뻗쳐나오며 푸른바다를 비추었다. 군함이 청도부두에 닿았을때는 하늘은 씼은듯 말끔히 개이고 붉은태양이 눈부시게 빛났다. 사람들은 류소기의 마음을 하늘이 알아 본다고 하였다. 유유창천에야 무슨 뜻이 있으랴! 우연한 천기가 사람의 마음을 심각히 할뿐이다...                                                                                                            09.12
205    모택동의 이야기(26) 댓글:  조회:368  추천:0  2024-03-25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26)                                                                                                                         회령   등소평을 중용   1974년 여름, 주은래는 병이 악화되여 입원치료를 하게 되였다. 국무원의 사업은 강유력한 령도자를 수요하였다.   1973년 2월 20일 모택동의 동의하에 등소평은 강서에서의 연금생활에서 풀려나 가정이 북경으로 이사를 했다. 이어 모택동의 안배로 3월10일 그의 부총리 직무를 회복하고 8월 중공 10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등소평을 중앙위원으로 선거하였다. 당년 12월12일, 모택동이 주최한 정치국회의에서는 등소평의 건의에 따라 “정치국이 정치를 론하지 않고 군위가 군무를 론하지 않는” 현상을 비판하고 대군구의 사령원을 서로 교체하고 등소평을 총참모장으로 임명  하였다.   사업에 복귀한후 등소평은 모택동의 지시와 지지하에 강청,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의 반대행위와 격렬한 투쟁을 진행 하였다.   1974년 10월 4일, “등소평을 국무원 제1부총리로 한다.”는 모택동의 지시를 왕홍문이 기록하고 비서 장옥봉이 전달하였다. 이에대하여 강청일당은 지대한 불만을 품고 10월 17일 정치국 회의에서 등소평을 공격하였다. 그날밤 강청일당은 밀모를 하고 왕홍문을 장사에서 치료휴양중인 모택동에게 보내여 등소평이 제1부총리가 되는걸 반대한다고 고자질을 하였다. 모택동은 강청들의 음모를 간파하고 당장에서 왕홍문을 업격히 비평하였다.   1974년 10월 20일, 모택동은 등소평을 당중앙 부주석, 제1부총리, 군위부주석 겸 총참모장으로 임명할것을 건의 하였다. 이에 강청일당은 지대한 불만을 품고 강청이 직접 모택동에게 견결히 반대한다는 편지를 썼다. 동년 11월12일 모택동은 강청의 편지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였다. “자꾸 나서지 말라. 문건을 비준하지 말며 내각을 만들지 말며 뒤에서 우두머리노릇을 하지말라.  너는 이미 원한을 많이 쌓았다. 다수와 단결하라. 부탁한다. 사람에게서 보귀한 것은 자기절로 자기를 아는 것이다. 보충.” 강청은 모택동의 지시에 몇마디 거짓말 검사를 하고 자기는 아무일도 할일이 없다는둥 아무런 직무도 없다는둥… 불평과 불만을 지껄여 댔다. 얼마후 그는 왕해용과 당문생을 시켜 왕홍문을 인대 부위원장으로 임명하자고 자기의 건의를 모택동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이에 모택동은 “강청은 야심이 있다. 그는 왕홍문을 위원장으로 만들고 자기는 당의 주석이 되려고 한다.”고 첨예하게 까밝혔다. 1974년 12월, 왕홍문은 그들 일당의 밀모대로 또 장사로 가서 인대 등 인사문제로 고자질을 하였다. 이에대하여 모택동은 또 한번 엄격하고도 첨예한 질책을 하였다. “너는 4인방을 만들지 마라. 종파를 만들지 마라. 종파는 넘어진다,”   강청일당ㅡ4인방은 몇달간 갖은 수단과 작간으로 소란을 피웠지만 모택동의 비평과 질책과 저지를 당했을 뿐이다. 모택동은 그들이 탈권하는데 유리한 말을 한마디도 해 주지 않았다.   1974년 12월 23일! 주은래는 중병을 무릅쓰고 전용기로 장사에 갔다. 당과 국가의 사업을 한몸에 지니고 있는 모택동과 진지한 상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주은래 뿐이였다. 그번 토론에서 모택동은 주은래에게 등소평에 대한 신임과 만족을 충분히 표달 하였다. “등소평은 아주 얻기 힘든 인재다. 정치사상이 매우 강하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그번 장사 상봉에서 등소평을 당과 국가의 령도자로 결정 하였다. 이는 극히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결정으로서 당과 국가의 권력을 진정한 맑스주의자의 수중에 장악되게 하였다는 것을 력사는 증명 하였다.   1975년1월 5일, 중공중앙 1호 문건은 등소평을 중앙군위 부주석 겸 총참모장으로 임명한다는 것을 정식으로 공포 하였다.   1975년 1월 8일부터 10일까지 열린 중국공산당 10기2중전회에서는 등소평을 중공중앙 부주석,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거 하였다.   1975년 1월 13일부터 17일까지 열린 전국 4기인대 제1차회의에서는 주덕을 위원장으로 주은래를 총리로 등소평을 제1 부총리로 선거 하였다.   모택동은 1973년 등소평을 다시 복귀하고 중용하였다. 4인방의 탈권음모는 끝내 달성되지 못했다.                                                                                                                24. 3. 16
204    모택동의 이야기(25) 댓글:  조회:355  추천:0  2024-03-03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25)                                                                                                              회령   강청을 호되게 질책   1974년 모택동은 이미 81세의 고령이였지만 여전히 당과 국가의 최고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힘이 따라가지 못하고 “문화대혁명”을 공제하고 결속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는 시종 권력을 림표와 강청에게 주지 않았다. 그는 비록 강청을 믿긴 했으나 중용하지는 않았다. 강청을 정치국위원으로 되게 한 후에는 더는 다른일을 하지못하게 하였다. “10차대회”후 강청일당은 자기네들이 득세를 했다고 여기며 여러면으로 주은래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날뛰면 날뛸수록 자기들의 진면모를 폭로하였다. 모택동은 그들의 탈권음모에 대하여 경각성을 높히였다.   1974년 7월17일 오후, 중남해 모택동의 숙소에서 그리 멀지않은 한 회의청에서는 북경에 있는 전체 정치국 위원들이  둘러않자 엄숙히 모택동의 강화를 듣고 있었다.   모택동은 시력이 좋지않아 모호하긴 했으나 강청을 자주 주시하면서 말하였다.   “강청동지, 주의하시요.1 다른사람들이 당신에게 의견이 있어요. 하지만 당면에서 말하기를 꺼려 말하지 않는데, 당신은 이를 모르고 있어요. 두가지 공장을 만들지 말아요. 하나는 강철공장이고 다른 하나는 모자공장인데 쩍하면 사람들에게 큰모자를 씌우지요…”   모택동이 손짓하며 말하자 강청은 급해나기 시작했다.   금년 년초에 “비림비공”운동을 발동한 이래 모택동이 처음으로 소집한 재경 정치국 위원들의 회의다. 회의에서 모택동이 강청을 이름을 찍어가며 비판할줄은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다. 여기에는 일련의 심각한 “배경”이 있다.   1973년 겨울이다. 강청일당은 여러번 정치국 회의를 빌어 주은래와 엽검영을 “우경”이라면서 그들이 외사활동에서 “나라의 권력을 손상주면서 나라를 치욕되게” 하고 “투항주의” 를 범하였다고 공격하였다. “4인방”의 두목인 강청은 이것은 “제11차로선투쟁”이라고 질책하면서 주은래를 “모주석을 대체하려고 급급해 한다”고 모욕중상 하였다.   이런 사건이 발생한후 모택동은 반박하기를 첮째, “제11차로선투쟁”이라고 말하지 말며 실제상 그렇지도 않다. 둘째, 주은래가 “급급해” 하는것이 아니라 강청이 “급급해” 한다. 고 말하였다.   대개 이시기에 모택동은 또 “한 보통 공산당원”이라고 서명한, 강청을 비평한 편지를 정치국 위원들에게 돌려보게 하였다. 그 후에도 모택동은 여러번 “전문 남을 비평”하고 “쩍하면 훈계하고 큰모자를 씌우는” 강청의 악렬한 작풍을 호되게 질책하였다.   1974년 초, 강청일당은 “비림비공” 기회를 타서 “뒷문치기”를 동시에 비판하게 하면서 중앙으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령도간부들을 타격하게 하였다. 강청일당의 이런 작법은 중앙정치국 위원들의 불만을 자아냈다. 1월말, 더는 참을수 없는 상황에서 엽검영은 모택동에게 편지를 써서 강청일당의 상술한 작법과 무리한 요구를 반영하였다. 2월초, 주은래도 모택동에게 편지를 써서 강청일당이 “비림비공”에 “뒷문치기”를 끼워넣어 운동을 일으키는 작법을 동의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하였다.   2월15일, 모택동은 회시를 써서 강청일당에게 엄격한 경고를 하였다. 그는 회시에서 “지금 형의상학과 편면성이 아주 창궐하다. 비림비공에 뒷문치기 비판을 끼워넣는 것은 비림비공을 약화시킨다.” 고 하였다.   3월하순, 모택동은 등소평을 련합국대회 제6기특별회의 중국대표단 단장을 맡게 하였다. 이문제를 정치국에서 토론할때 강청은 모택동의 의견이라고 설명해도 여전히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며 소란을 이르켰다.   27일, 모택동이 “등소평동지의 출국은 나의 의견인데, 반대하지 말라.”라고 편지를 써서야 강청은 수그러 들었다.-   이날(1974년7월17일 오후회의) 재경 정치국 위원들의 회의에서 모택동은 강청에게 “당신의 그 두가지 공장을 그만두라.” 고 말한후 또 “강청도 상해방이다. 당신들 주의하라. 4인이 소종파를 하지말라.”고 엄격히 말하였다. 강청은 “강철공장’을 턱으로 등소평을 가르키며 그에게 주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모택동은 “여러사람 앞에서 한 말이다. 말한대로 해야 한다. 강청은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를 대표할 뿐이다.” 모택동이 등소평을 칭찬하여 한 “강철공사”라는 말을 강청은 리해하지 못하였다.   이날회의에서 강청은 크게 망신을 하였다.   전에도 모택동은 강청에게 불만과 격분을 여러번 표시하였다. 어느한번 강청이 만나자고 청시한 보고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만날 필요가 없다... 내가 81세의 고령으로 중병을 앓고 있지만 너는 나를 보는체도 하지않는다... 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죽은후에는 네가 어쩔텐가?... 너는 큰일은 말하지 않고 매일 작은일만 말하는 사람이다...” 라고 질책 하였다.                                                                                                            24.2.28
203    어제 일 댓글:  조회:365  추천:0  2024-01-11
       수필                                               어제 일                                                                                                          회령   어제 오후의 일이다. 아주 작은일이지만 나의 감사한 마음은 이 글을 쓰게 하였다.   내가 작가협회 산문분과에 참가하여 젊은 문우들과 함께 활동하여 온지가 이젠20년 세월이 거이 된다. 그간, 주임 부주임들이 두 세번 바뀐것 같다. 내가 갓 참가했을 때는 우리분과의 부주임에 안수복씨 였다. 그는 이미 수필집을 두권이나 출판한,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중견작가 였다. 안수복씨는 세심히고 따뜻하고 근로하고 열정적인 문우였다. 매번 분과활동에서 그는 잔치집 호세미(주인 아낙네) 같았다. 분과에서 활동이 있을때마다 안수복씨는 특히 우리 로인들을 각별히 보살펴 주었다. 내가 참가해서부터 오늘까지 웬일인지 우리분과에서는 닭무리에 까마귀가 끼여든것처럼 활동에 참가하는 늙은이란 남녀 통털어서 줄곧 둘뿐이 였다. 항상 보면 화룡의 김태욱씨와 난데 김태욱씨가 최로이고 그 다음이 나였다. 우리 둘은 신로심불로로 분과에서 활동이 있가만 하면 얼씨구 지화자 참가 했다. 그리고 하루건너 활동을 하라고 건의를 했다. 분과에서 활동이 있기만 하면 안수복씨는 이미 통지를 냈건만 꼭 나에게 따로 전화를 걸어 참가할 수 있겠는가고 여러면으로 자세히 문의하고 알려 주었다. 내가 가면 그는 항상 문앞에서 기다리다가 맞아 주었다.   한번은 연길시 공원가에 있는 작가협회 회의실에서 연변작가협회 주석단 선거를 진행 하였다. 그때 나는 투표를 한후 청가를 맏고 저녘행사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집으로 가게 되였다. 내가 회의실을 나와 곁에 있는 공공뻐스 정류소에서 역전으로 가는 뻐스를 기다리는데 안수복씨가 급급히 나를 부르며 쫓아 나왔다. 나에게 기어코 왕복 차비라면서 돈을 주는게 아닌가?! 몇푼의 돈이지만 나는 민망하면서도 감사 했다. 내가 완곡히 사절하니 안수복씨는 이건 많든 적든 활동에 적극 참가하는 로 선생님 두분에 대한 협회의 존경과 관심으로 한 결정이여서 받지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자기는 심부름군일 뿐이라면서, 어쩔 수 없게 하였다. 나는 우리분과의 인정과 따사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번은 분과에서 화룡 선경대 유람을 갔을 때다. 유람객 접대실을 나와 뒤등 산령마루를 타고 절승경개로 올라가는데 산 등성 령마루는 오솔길이 좁고도 강파로운 올리막이 였다. 량옆은 말그대로 깍아 지른 벼랑과 급경사 산발이 였다. 젊은이들은 앞에서 웃으며 떠들며 신나서 올라 갔다. 옆을 보지말자고 해도 다리가 떨리고 가슴이 후들거리며 땀이 솟았다. 태욱씨와 나는 손을 들었다. 그때, 안수복씨는 우리를 찿아 도로 내려와서 함께 접대실에서 일행을 기다렸다. 우리는 미안하기 짝이 없었고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우리가 이 좋은 풍경구에 와서 남들이 다 보며 즐기고 사진찍고 록상하는데… 어서 올라가라고 하니 그는 아니라며 우리와 함께 이야기 하는것이 더 좋다고 하였다. 나는 그에게 본가, 시가 량부모 다 계신가고 물었다. 그에게서 너그럽고 무던하고 열정적이고 처사를 잘하는 큰집 맏며느리같은 인상을 받았기에 그런 물음을 은근히 했던 것이다. 수복씨는 량가부모님들은 다 계시고 자기는 두집 항렬에서 지차로 가난속에서 자랐다고 하였다. 글쎄, 그럼 그렇겠지… 태욱씨는 수복이는 내 친딸과 한가지라고 하면서 원고를 쓰면 다음의 작업은 수복이가 다 알아서 해 준다며 자랑 겸 칭찬 겸 입에 침이 마를새 없이 끝없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안수복씨에게 고마운 일이라고 거듭 말한후 김태욱선생이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발표하고 썻는데, 끝까지 수고하여 작품집을 한권 만들 수 없겠는가고 말하니 수복씨는 자기도 생각한봐고 노력하겠다고 대답 하였다. 나는 가슴이 찡 했다.   무정한 세월은 몇해가 흘러가고 그간 코로나는 나의 출행을 크게 제한 하였다. 사람이 늙으니 부탁이란게 온통 집밖에 한발작도 나가면 안 된다는 엄포 뿐이 였다. 두말할것 없이 김태욱씨도 안수복씨도 그리고 한개 련의 병력은 거이 되는 우리 산문분과의 문우들과도 이젠 면목이 가물 가물 하다.   어제 점심후 오후다. 어떻게 되여선지 산문분과 문우들의 위쳇사진에 나의 사진은 모두 석장이나 올라 있어 나는 오래전부터 찌뿌둥 했다. 그러나 나는 두말할것도 없고, 자녀들과 손군들과 알듯한 젊은이들과 두장은 삭제할 수 없는가고 물어보니 이구동성으로 대합창을 하듯히 그거 잘 모르겠다는 것이 였다. 나는 할수없이 참아버렸다. 그러며 지금까지 별일 없이 지내왔는데, 어제 오후 부인님께옵서 갑자기 심기가 불편해 하시며 그 더 오른 사진들을 그냥 놔 둘 작정인가고 심문조로 따지고 들었다.(웬일인지 한장은 안해의 사진이 였다.) 늦게 걸린 치관얜(妻管嚴)이 점점 더 엄중해 가는 나는 덴겁해서 분과 위쳇 문우들에게 구조신호를 발출 했다.   얼마 안 되여 채선애씨가 두가지 방안을 알려 왔다. 한가지는 어떠 어떠하게 자체로 조작하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안 되면 위쳇주인을 찾아 말하면 된다는 것이 였다. 주인씨가 누구이냐고 물으니 안수복씨라고 하였다. 나는 숨이 활ㅡ 나왔다. 채선애씨와는 실제로는 면무식이다. 나는 상당히 고마웠다.   나는 굼뱅이 같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며 채선애씨가 가르켜 주던대로 조작을 긴장해서 떨며 하였다. 그런데, 이게 뭐냐?! 아뿔사!! 나의 위쳇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다. 무얼 잘못 짚은 거다. 이런 랑패가 있는가?! 나는 정신이 아뜩해 났다. 혈압이 대뜸 오르는것 같았다….   나는 안해에게 오도방정을 떨어서 대사를 그르쳤다고 오래간만에 꽥! 소리를 질렀다. 여러해 나를 쥐고 흔들며 점점 더 독재통치를 가강하던 안해는 찍 소리를 못했다. 이 난리판 와중에서도 나는 속이 쉬원함을 느꼈다. 두어번 소리를 더 지르며 일면 생각해 보니 안해와 성풀이 할 일이 아니였다. 온하루 콩팔 칠팔 왜장독장을 쳐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 아닌가.  눈을 흘기며 안해의 기색을 훔쳐 살펴보니 안해도 여간만 랑패상이 아니였다. 나는 안해가 슬그머니 가엽게 보였다. 초중학교에 다니는 손녀한테서 위쳇을 배운후 별일같아 하며 좋아하던 내가 아닌가. 안해는 나만 못지않게 상심을 하며 몸둘바를 몰라 하였다.   나는 채선애씨가 일러준 두번째 방안을 쓰기로 했다. 불난집에서 소방대를 불러대듯 나는 제생각만 하며 화급히 안수복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수복씨와는 오랜 구면이여서 나는 제잡담 내 사정을 개쇠발괄을 하였다.   수복씨는 나를 원격지휘를 하면서 나의 위쳇건립에 달라붙었다. 그런데, 내가 점점 더 긴장해 하고 얼빤해 하여 도무지 건립할 수 없었다. 시간이 퍼그나 지났는데도 해결을 못봤다. 나는 너무도 미안하여 래일 가까이에 있는 딸을 불러와서 하도록 하자고 몇번 말해도 수복씨는 괜찮다며 한번 또 한번 다시 시작하군 하였다. 로선생의 일이 지금은 제일 큰일이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였다. 그러는중, 순간! 와! 위쳇이 떴다!! 나와 수복씨는 동시에 환성을 올렸다…   내가 오늘 수복씨에게 너무도 크게 페를 끼치고 큰 신세를 졌다고 진심에서 거듭 말하니 수복씨는 아니라고, 시름놓고 장보려 가게 되였다면서 오히려 너무도 기뻐하는게 아닌가! 아이쿠! 어느덧 반날해가 거이 갔네… 그러면서 나의 건강과 건필을 축원하는 것이였다. 내가 오늘 보아하니 일이 많은것 같았는데 참으로 미안하다고, 내생각만  하였다고 사과를 거듭 하니 수복씨는 역시 괜찮다면서 요즘 하게되는 창작학습반에 대한 문의, 신청, 그리고 오늘따라 다른 용건도 두루 있어서 선생께 부담을 주었다고 오히려 미안하다고 하는것이 였다.   나는 채선애씨와 안수복씨에게 너무도 고마웠다. 또한 동시에 우리 산문분과ㅡ 조직의 따사로움과 자랑을 심심히 새삼스레 느끼였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군중의 일은 모두 중대한 대사”라고 한 총서기의 말이 떠 올랐다.                                                                                                                    23. 6
202    악독한 독수리 댓글:  조회:270  추천:0  2024-01-11
         수필                                               악독한 독수리                                                                                                              회령 일전에 어느선생의 짤막한 수필을 신문에서 재미있게 보았다. 그수필의 내용은 요약 다음과 같다.   …독수리는 조류중에서 수명이 제일 길다. 환갑을 쇠고 70살까지 산다. 그런데, 40살때 생사의 고험을 격는다. 40살이 되면 매부리코부리가 가슴팍까지 내려오고 발톱은 한자씩 되고 깃털은 무거워져 이젠 전혀 사냥을 할수가 없게된다. 이런 국면에 처허게 되면 둥우리에 가만히 엎드려 서거할 날을 기다리는 어른도 있고 생존을 위하여 노력분투하는 용사도 있다. 이런용사들은 부리를 바윗돌에 힘껏 처박아 끝내는 빠지게 하고 발톱도 물어뜯고 허비고 긁고 하여 몽땅 빠져나가게 한다. 깃털도 뽑아버린다. 새로운 주둥이와 새로운 발톺, 깃털은 인차 자라나기 시작한다. 환골탈태하다싶히 하는 이런과정은 대게 석달이 걸린다. 독수리는 또다시 맹금의 위력을 떨치며 매일 고기반찬에 약주를 마이며 흥타령을 부르고 춤을 춘다. 독수리는 또 30여년을 더 산다.   어느선생은 수필에서 독수리의 이 경천동지의 생활사 한단락을 지금의 중국 개혁개방시책과 비견하면서 고도의 높은 찬양을 하였다. 옛날의 전통적인 낡은사상, 정책, 방법… 등등을 견결히 철저히 완강히(독수리가 주둥이와 발톱, 깃털을 뽑아버리듯.) 청산하고 참신한 새시대를 펼쳐야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수있다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선생의 수필을 감상하면서 나는 다른각도에서 이런 느낌이 있었다.   독수리는 전문 약자를 찾아다니며 잡아먹는 흉악한 맹금이다. 아이때, 독수리가 우리집 닭을 물어가니(채가니) 분통이 터져 고함을 지르며 쫓아가던일이 지금도 어제일 같다. 나는 닭이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날아가는 독수리가 보이지 않을때까지 그곳 하늘을 쏘아보며 두주먹을 틀어쥐고 씩씩거리였다. 나에게 대포가 있었으면 독수리가 육장벙거지가 되여도 대구 더 갈겨대였을 것이다. 나는 분하기 짝이 없었다.   독수리는 발톱과 주둥이, 깃털을 갈아달고 여전히 지나간 40년세월처럼 약자를 잡아먹으며 30여년을 더 기름지게 산다. 마치도 그 어느 제국주의분자, 패권주의분자처럼 전문 약자를 리간 도발하고 집탈 침략하고 깔보고 기만하고 유린하고 공갈 협박하고 압박 착취하고 협잡 사기치고 정변 테로하며 략탈하며… 온갖 악행이란 악행은 한가지도 빼놓지 않고 꺼리낌 없이 다 하며…  그본성은 완강히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독수리의 존재는 약자의 재난이다…                                                                                                      23. 3.
201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24) 댓글:  조회:429  추천:0  2023-10-14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24)                                                                                                                     회령   모택동의 첫 안해   1936년 섬북에서 모택동은 에드가와 스노(미국 기자)의 채방을 접수할때 다음과 같은 한단락의 말을 하였다.   “내가 14살때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20세의 처녀를 안해로 정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종래로 그와 함께 부부생활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안해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생각지도 않았다.”   모택동이 말하는 이 녀자가 곧 그의 첫번째 안해로서 이름은 라일고라고 한다. 모택동과 라일고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907년 모택동은 14살이 였는데 당시 농촌에서는 성인으로 인정 했다. 당시 그는 학교를 접고 집에서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아버지(모순생)를 도와 회계 장부를 하였다. 그때 그의 어머니(문칠매)는 신체가 줄곧 허약했는데, 집에는 녀자가 없고… 하여, 가무일을 잘 할 수 있는 녀자가 급히 수요되는 형편이였다. 약삭빠른 모순생은 이에 큰아들 모택동을 장가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가 선택한 며느린즉 바로 라일고다.   라일고의 부친은 라합루라 하는데 향촌에서는 지식분자인 셈이였다. 하지만 그는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라일고의 어머니 모씨는 소산충 모씨가문의 사람이였다. 당시 농촌에서는 친척에 더 친척이 되는것을 제창하였다. 그때 라일고는 20살의 처녀로서 예쁘게 생긴 실팍한 처녀였다. 그리고 집일을 잘 하는 처녀였다.   라일고는 모순생의 마음에 너무도 딱 들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이 혼인을 아주 싫어 했다. 하지만 그는 부모님과 친척들의 면목을 존중해서 이듬해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기까지 했다.   라일고는 시집온후 인차 시어머니의 훌륭한 일손이 되였다. 동시에 그는 남편인 모택동을 끔찍히 섬겼다. 그는 또 모택동의 제수인 왕숙란(모택민의 처)과도 매우 사이가 좋았다. 하여, 시부모들은 라일고를 무척 귀여워 하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몹시 고민을 하였다. 비록 혼례까지 치뤘지만 모택동은 부부동침을 한번도 하지 않았고 농사일과 회계장부만 골몰하였다. 그리고 그는 기갈이 든 사람같이 소산충의 책이란 책은 다 빌어다 보고 학습을 하였다. 이러는 과정에서 모택동은 많은 사회문제를 사고하기 시작했고 나라의 전도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가지기 시작했다.   라일고는 시집온후 신체가 줄곧 좋지않았다. 하여 본가에 가서 조금씩 휴식하기도 했다. 1910년 정월 초이튿날 라일고는 세균성리질로 불행한 혼인에서 영영 떠났다. 겨우 23살이였다.   1910년 가을, 라일고가 죽은지 반년 남짓해서 모택동은 친척들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끝내 설복하여 상향동산고등소학당에 입학하여 학습하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그의 인생은 새로운 페지를 시작한다…   모택동은 기실 라일고를 매우 동정하였다. 라일고의 죽음은 그로하여금 봉건혼인을 몹시 증오하게 하였다. 다음의 사실에서 우리는 모택동의 심정과 사상을 충분히 보아낼 수 있다. 1919년 11월 14일, 장사 남양가 안경방에서 일하던 21살 조오정은 부모의 독판치기 봉건혼인에 불복하여 여러번 반항했으나 아무 쓸모도 없는 상황에서 시집 가던날 가마안에서 목을 베여 자살하였다. 이 사건은 사회의 강렬한 반향을 이르켰다. 극도로 격분한 모택동은 호남의 여러 큰 신문에 10여편의 평론문장을 발표하여 여러면에서 봉건혼인제도의 불합리성을 질타 하였다.   모택동은 비록 라일고와의 혼인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모씨가문에서는 가족으로 인정하였다. 족보에 라일고를 모택동의 첫배우자로 기록했고 양개혜와 낳은 셋째아들 모안룡을 라일고의 이름 아래에 기록하기까지 했다. 모택동은 라일고가 죽었지만 그의 본가와의 정을 부인하거나 끊어버리지는 않았다. 반대로, 긴세월동안 정은 더욱 풍부해 지고 승화되기까지 했다.   1925년 2월부터 8월사이 모택동은 소산에서 농민운동을 할때 여러번 라합루의 집을 방문했다. 어느 한번 모택동은 라합루, 라립방(라합루의 동생.), 라석천(라합루의 조카.) 등에게 반제, 반봉건 혁명사상을 선전하면서 제국주의와 지주계급은 서로 결탁하여 가난한 농민들을 압박착취하기에 우리는 일떠나서 반항하여야 하며 그래야 살길이 있다고 거듭 말하였다. 이에 라립방은 “윤지선생! 당신이 우리를 일떠나서 반항하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패가망신을 하게 되는게 아닌가요?” 하고 물었다. 모택동은 젓가락 한개를 들고 젓가락 한개는 꺽기 쉽지만 한묶음은 꺽을 수 없다고 생동하게 혁명도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모두 깨도가 되여 머리를 끄덕였다.   모택동의 지도하에 라립방, 라석천은 얼마후 농민협회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그해 겨울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7년, 마일사변후 소산충은 백색공포에 휩싸였다. 국민당반동파들은 라합루의 집을 수색하고 라석천을 체포하여 갖은 학대를 하였다. 하여 50여세의 라합루는 가정을 이끌고 동정호 부근으로 도망하고 라석천은 많은 벌금을 하고 겨우 감옥에서 풀려 났다…   1940년, 라석천은 모택동에게 편지를 보내여 연안으로 가서 혁명을 하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 모택동은 당지에서 비밀조직을 세우고 지하투쟁을 하라고 답복해여 주었다. 그러면서 얼마의 돈과 쌀 200근을 지원해 주기까지 했다…   새중국이 성립된후 모택동은 라합루에게 편지를 보내여 북경에 한번 유람을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감하게도 라합루는 1943년 12월에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하여, 라석천이 라씨가문을 대표하여 북경으로 왔다. 당시, 모택동의 많은 친척들이 북경에 오고파 했으나 모택동은 다 사절하고 라석천만 초청하였다. 이는 모택동이 라일고에 대한 미안의 사과라고 볼수도 있겠다.   1950년 5월 모택동은 장자 모안영을 고향에 보내여 친척들을 만나보게 하였다. 그때 모택동은 라석천을 꼭 만나보라고 특별히 당부 하였다. 모안영은 고향에 간후 라석천을 만나 아저씨라고 친절히 부르며 차엽과 돈 20만원을(구 화페) 드렸다. 당시 라석천은 이미 61세로 여러가지 병으로 고생했고 식솔이 많아 생활은 십분 어려웠다. 이런 정황을 안 모안영은 그의 아들 하나를 데리고 가자고 하였다. 이에 라석천은 농사도 해야하거니와 지방에도 공작이 있다면서 나라에 시끄러움을 끼칠 수 없다면서 극구 사절 하였다. 라석천의 자세한 소식을 들은 모택동은 즉시 300만원의 돈(구 화페)을 보내여 급한대목을 넘기게 하였다. 훗날 왕숙란이 북경에서 고향으로 가서 초대소 사업을 할때 모택동은 그에게 특별히 라씨네 집을 자주 찾아 보라고 당부 하였다. 왕숙란은 모택동의 당부를 명심하며 라씨네 집을 자주 찾아뵙고 쌀이며 콩 등 량식을 보탬하여 주었다.   모택동은 일세의 걸출한 위인이시다. 그러나 그이에게도 일반 백성들과 같은 접품과 인정이 있었다. 그는 력사를 존중하며 친척의 정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이점은 측면에서 그이의 위대함과 넓은 흉금을 돋보이게 하였다.                                                                                                                23. 10.
200    모택동의 이야기(23) 댓글:  조회:311  추천:0  2023-09-05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23)                                                                                                         회령 1949년3월 모주석은 북경교외 향산 쌍청별장에서 민주당파책임자, 각계대표, 사회저명인사들을 련일 접견하게 되였다. 첯번째 귀빈으로 장란선생을 만나게 되였는데, 모주석은 위사장 리은교에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장란선생은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에 적지않은 공헌을 하신분으로, 민주인사중에서 매우 높은 위망을 갖고 있다. 우리는 로선생을 존중해야 한다. 나를 도와 좀 좋은 옷을 입게 골라 다오.” 리은교는 모주석의 밑천을 전부 뒤지며 반반한 옷을 찿았으나 도무지 찿을수가 없었다. 깁지않은 옷이 한견지도 없었다. 은교는 방법이 없어서 “주석님! 우리는 정말로 가난뱅이수재가 서울로 시험치려 들어온 격입니다. 괜찮은 옷이 한견지도 없군요. 지금 새로 짓자니 시간이 없구요… 한벌 빌어 올가요?” 하고 문의하였다. 모주석은 대답하기를 “기운것도 괞찮다. 반듯하고 깨끗하면 된다. 장로선생은 현달하신 분으로 우리를 나무라지 않을거다,” 모주석은 기운옷을 입고 장란선생을 접견하셨다 그리고 심균유, 리제심, 곽말약, 진숙통 등 저명인사들을 련일 접견하셨다. 그이는 한평생 근검소박을 좋아 하셨다. 모주석은 만년에 병석에 눕기전까지 줄곧 잡곡밥에 간단한 채소를 잡수셨다. 혁명전쟁년대에는 그럴수도 있었겠다고 인정되지만, 새중국이 성립된 후에도, 조건이 충분히 있는데도, 그이는 계속 잡곡밥에 4채1탕 음식습관이였다. 4채란 채소, 무슨고기채,(그이는 돼지고기를 즐겨했다. 다른고기들은 별로였다.) 매운고추, 썩두부. 1탕이란 사실은 채를 한후 쟁개비를 가신 소금물. 그외 일주일에 한, 두번 돼지고기훙쏘뤄를 아주 맛있게 잡수셨다. 은교, 보건의 등 주변사람들이 식사를 다양하게, 영양가 있게 조절하자고 하면 그이는 절대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이는 가끔 혼자말로 “언제면 농민들이 나처럼 먹을수 있을가.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가… 대단한 일이지!”하고 개탄하였다. 그이는 주변사람들과 “우리가 세계에서 사는 목적은 세계를 먹기 위한것이 아니고 세계를 개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다. 동물과의 구별점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여러번 말씀하셨다. 조금 더 보탠다면, 모주석은 한평생 세수비누, 무슨크림, 향수, 무슨연고… 따위를 쓰시지 않았다. 그리고 치약을 쓰지 않고 렴가의 치분을 썼다. 은교가 좀 괞찮은 치약을 쓰자고 하니 그이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나는 다른사람들이 좋은치약을 쓰는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생산한 목적은 쓰자는데 있다. 모두 쓰지 않으면 생산이 발전할수도 없고 필요할수도 없다. 그렇긴 하지만 이 치분도 쓸수있다. 인민들의 생활수평이 제고되여 모두 치약을 쓴다면 나도 쓸것이다.” 그이는 평생 산해진미, 연회를 싫어했다. 꼭 참대저가락을 쓰고 상아저가락 금속저가락 등은 쓰지 않았다. 누가 만약 왜서 좋은 저가락을 쓰지 않는가고 물으면 그이는 “너무 비싸서 나는 쓸수없다.”고 대답하였다. 모주석은 똑바른 량심, 명석한 량심으로 추호의 사심도 없이 인민을 위하여 초지일관,  한평생을 다 바쳐 복무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이처럼 위인은 될수 없지만 그이를 따라 배울수는 있는 것이다.                                                                                                                           23. 9
199    모택동의 이야기(22) 댓글:  조회:293  추천:0  2023-08-04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22)                                                                                                                   회령   “모립자(毛粒子)”   세상이 주지하다싶히 모택동은 위대한 사상가이며 정치가이다. 그런데, 1977년 그가 서거하여 1주년이 되기전에 세계제7기립자물리학토론회의에서 모택동의 이름으로 명명한 “모립자”라는 진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미국의 저명한 미립자물리학가이며 노벨물리학수상자인 그라소는 이런 발언을 하였다.   “물리결구에서 더욱 깊은 층차가 있지않는가? 물질구성에서 더욱 깊은 층차를 조성하는 부분을 “모립자”라고 명명할것을 나는 건의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일관적으로 자연계에는 더욱 깊은 통일이 있다고 주장하는 모주석을 기념하기를 건의한다.” 그러면서 그는 “파크의 출현을 물리학의 결속”이라고 인정한 자기의 관점이 정확치못하다고 성명하였다.   모택동에게 어찌하여 세계첨단과학령역에서 이렇게 높은 영예를 주게되였는가?   그것은 우리나라의 많은 물리학가들이 자각적으로 “물질은 무한히 나눌수ㅡ쪼갤수 있다.”는 모택동의 철학사상을 응용하여 고물리령역에서 창조성적인 많은 성과를 취득했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물질은 무한히 나눌수 있는것으로서 원자, 중자, 전자도 나눌수 있다. 하나가 둘로 나뉘여지며 대립통일을 한다. 당신들이 믿지않아도 나는 믿는다.”고 하였다.   과학령역에서 맑스주의자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일은 맑스주의 발전사에서 처음으로 있는일이다. “모립자” 이명사는 모택동의 “물질은 무한히 나눌수 있다.”는 사상이 인류인식에서 일으키는 거대한 공헌을 영원히 명기할 것이다.                                                                                                                       22. 9.
198    모택동의 이야기(21) 댓글:  조회:339  추천:0  2023-07-21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21)                                                                                                                      회령   최후의 날들   1959년 모택동은 외빈과 이런말을 하였다. “… 물론 나는 죽기를 희망하지는 않는다. 나는 직접 제국주의의 말일을 보기를 희망한다. 만약 부득불 죽는다면 나는 죽는것을 겁나하지 않는다.” 1976년 생리적으로 늙고 병이 가득한 모택동은 사신과 직접 맞서게 되였다.   1975년 그믐날밤, 중남해 수영장 모택동의 숙소는 조용하고 산산하며 꽃등도 웃음소리도 없었다. 명절기분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몇몇 공작인원들이 중병으로 앓고있는 모택동을 동무하여 밤을 새우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모택동은 침대에 누워서 사무를 보고 책을 보고하여 근육이 위축되고 두다리의 무릎은 펼수가 없었다. 그는 일어설수도 없었고 걸을수도 없었다. 말하기도 매우 힘들어 하였는데 후두에서 약간의 소리를 낼 뿐이였다. 밥이 와도 손을 내밀힘이 없었고 겨우 입을 벌려도 넘구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믐날 년세밥으로 모택동이 제일 즐겨하는 무창어찜과 이밥을 가져다가 공작원들은 한숟가락씩 떠 대접하였으나 모택동은 몇입 먹지못했다.   년세밥후 모택동은 공작원들의 부축으로 객실의 쏘파에 앉아 조용히 휴식하였다. 멀리서 폭죽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그는 밤낮 자기를 지키고 있는 공작원들과 조용히 말하였다. “폭즉을 좀 터쳐라. 너희들 젊은이들은 명절을 쇠여야지.” 젊은이들이 폭죽을 터치자 그의 늙고 초졸한 얼굴에는 가는 미소가 떠 올랐다.   모택동은 놀라운 의력으로 병마와 투쟁하면서 완강한 정신으로 자기가 개척한 사업을 위하여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분투하였다.   5월27일 그는 파키스탄총리 푸토를 접견하였고 7월 28일 당산지진후에는 화국봉을 단장으로 중앙위문단을 파견하여 자신과 당중앙의 위문을 재해지구에 전달하게 하였다. 지진으로 수영장을 떠나 “202”주택으로 옮긴후 모택동은 다시 수영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모택동의 병세는 나날히 엄중해 지었다. 더는 입으로 식사를 할수없어서 비사를 하기 시작했고 호흡곤난과 산소결핍으로 코에 산소관을 꽂았다. 엉덩이에 발생한 욕창은 극심한 동통으로 땀이 물흐르듯 하였지만 그는 한마디 신음소리도 내지않았다. 동통이 아무리 극심해도 그는 의무인원들과 신변의 공작원들에게  찌프린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미약하지만 유모적인 말로 오히려 그들을 안위하였다. “나는 감각이 없어서 괜찮으니까 천천히 처치를 해도 된다.”고 늘 말하였다. 의사 강사장은 이렇게 통탄을 하였다. “나는 40여년을 의사업무를 하면서 수천수만명 환자를 보았지만 종래로 모택동처럼 견강한 의력과 락관적인 정신으로 질병과 투쟁하는 사람은 보지못했다.”   질병의 고통을 전이하기 위하여 모택동은 쉼없이 문건을 보거나 책을 읽었다. 너무도 허약하여 문건이거나 책을 들 맥이 없고 손이 떨릴때면 주변의 공작인원들이 대신 들어주고 보이지 않을때는 대신 읽어 주었다. 의료전문가 구급소조는 24시간 지키면서 사업했고 왕동흥 등 중앙령도소조는 24시간 직일을 섯다. 모택동은 림종이 다가왔지만 자기가 개척한 사업을 계속 생각하며 후계자들께 후사를 거듭 당부하였다.   1976년 9월 8일 서거전날, 모택동의 정신은 매우 맑았다. 그는 일본의 자유민주당 총재이며 내각총리대신인 삼목의 경선에 대하여 관심을 표시한후 다시 혼미에 빠지였다. 정치국 위원들은 줄을 지어 고별을 하였다.   1976년 9월9일 령시 10분, 모택동은 서거하셧다.                                                                                                                    22. 9.
197    모택동의 이야기(20) 댓글:  조회:308  추천:1  2023-07-01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20)                                                                                                                       회령   회인당 사건   1967년 2월16일 오후다. 중남해 회인당회의실에서 한차례의 격전이 시작되였는데, 이것이 바로 훗날 널리 류전이 된 “회인당을 크게 소란했다”는 회인당 사건이다.   그날 회인당에서는 주은래의 장악하에 회의가 열렸다. 중간에 놓인 책상앞에는 주은래가 앉고 오른켠에는 진의, 엽검영, 서향전, 리부춘, 리선념, 담진림, 여추리, 곡목이 앉았는데 마치도 “우파”를 상징하는것 같았다. 왼쪽켠으로는 강생, 진백달, 장춘교, 요문원, 사부치, 왕력이 앉았는데 그들은 틀림없는 “좌파”들이였다. 강청은 사유로 참가하지 않고 왕력을 렬석으로 참가시킨 것이다.   두개파는 마주앉아 서로 노려보며 대방의 요해를 격중하려고 벼르는 것이 전쟁분위기를 잔뜩 풍기였다.   성격이 대바르고 사심이 없는 담진림이 첯포를 쏘았다. 그는 장춘교를 쏘아보며 큰소리로 질문하였다. “진비현동지는(상해시장, 시위서기) 어려서 부터 혁명에 참가한 “붉은꼬맹”이다. 그에게 도대체 무슨문제가 있어서 당신들이 틀어쥐고 놓지않는가? 몇개의 대국서기(大局書記)와 많은 성위서기들께는 또 도대체 무슨문제가 있는가? 왜서 그들을 북경으로 오지 못하게 하는가?” 담진림이 말하는 이문제의 내역은 이렇다. 일부 성, 시의 서기들이 조리돌림을 당하며 투쟁을 받자 모택동은 부동한 장소에서 련속 세번이나 각성의 서기와 시위서기들을 북경으로 데려다가 보호하라고 지시하였다. 주은래는 갖은 저애를 물리치고 일부분의 사람들은 북경으로 데려왔지만 적지않은 사람들은 데려오지 못했는데, 진비현도 그중의 하나였다. 반란파들은 억지로 잡아가두고 놓지않았든 것이다.   담진림은 오늘 회의실 밖 문어구에서 장춘교를 보자 “진비현동지도 왔는가?”고 물었다. 상해 “1월탈권”흑풍의 획책자, 조종자인 장춘교는 교활하게 대답하기를 “군중들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장춘교는 담진림이 더욱 격동되여 착오를 범하게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빈정대며 보태였다. “이런문제는 모두 군중과 상론하여야 하는거 아닌가. 우리는 군중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그는  삼각눈으로 담진림의 눈치를 살피였다.   “무슨군중?!” 회의에서 담진림은 노기등등해서 장춘교의 궤변을 신랄하게 몰아부쳤다. “당신들이 쩍하면 군중 군중 하는데, 그래 당의령도는 필요없는가?” 담진림은 맞음켠의 중앙문혁 몇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계속 기염을 토하였다. “당신들의 목적은 로간부들을 다 타도하고 40여년의 로혁명가들을 패가망신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말할수록 더욱 격분하여 책상을 뚜드리며 대성질호를 하였다. “궤대분지(청화대학 화학계 2학년 학생. 반란파 두목)뭔지 한 아이는 무슨물건짝인가! 당신들의 깡패 개다리가 아닌가? 그놈은 순전한 반혁명이다! 백가지 추악한 짓을 하였다. 이번은 력사상에서 가장 잔혹한 첯번이다. 력사의 그어느때도 다 초과한다. 당신들의 목적은 로간부들을 다 때려잡고, 나라의 동량을 다 꺼꾸러치우고 권력을 몽땅 빼앗아 아예 조대를(정권) 바꾸자는 것이지!” 그는 분통이 솟구치는대로 있는 밸을 다 쏟아냈다. “이 상통대로 당신들은 계속하라. 나는 그만두겠다. 머리가 떨어지던 감옥에 가던 당적을 캐출맞던 나는 끝까지 당신들과 투쟁할 것이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내일생에서 세가지를 잘못했다. 첯째는 오늘까지 살지말아야 하는거고 둘째는 모택동을 따라 혁명을 하지말아야 했고 셋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지 말아야 했다.” 말을 마치고 그는 옷과 가방을 들고 나가려고 했다.   이때, “가지말라. 여기서 저사람들과 투쟁해야지.”하고 진의가 소리질렀다. 가다니?! 여기서 저사람들과 끝까지 투쟁해야지… 담진림은 정신이 번쩍들어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진의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림표패거리가 모택동이란 간판을 내들고 반혁명량면파 활동을 하는데 대하여 첨예하게 질책하였다. 이어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연안정풍시 로간부들을 호되게 족쳤지. 연안에서 소위 구급운동이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쳤는가! 지금도 어떤사람들은 보따리(루명)를 벗지못하고 있다. 주총리까지도 당했지. “ 진의는 건너편에 앉아있는 강생을 호되게 쏘아본후 말을 계속하였다. “사람을 족치는것 외에는 무얼 할줄 아는가? 사람을 족치는 것으로 급을 췄지…”   이때, 강생은 아주 침착한듯이 앉자서 대방을 새삼스레 살펴 보았다. 그는 자기가 진의의 적수로도 못되거니와 원수와 부총리들을 볼때 감히 뭐라고 말하기가 두려웠다. 뭐라고 한마디를 했다가는 그들의 집중공격에 배겨낼수 없을것이다. 강생은 참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진의의 한마디 말에 정통을 찔리운 강생은 한마디를 빈정대듯 하였다. “나는 바로 사람을 잡아 족친다.” 강생의 말에 진의는 강생을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력사적교훈을 잊으면 않된다. 력사가 이미 증명하지 않았는가. 누가 모주석을 반대했던가. 금후에도 볼것이며 증명할 것이다. 쓰딸린이 살아있을때 후루쑈브는 그누구보다도 쓰딸린을 제일 춰올렸다. 쓰딸린이 죽으니 그는 온갖 죄명을 씌우고 불에 태우고 재까지 바람에 날려 버렸다. 흥!”   “로간부는 당과 국가의 재부이다.” 엽검영이 말하기 시작했다. “착오를 범한 간부를 왜서 단매에 때려 죽이려고 하는가? 병을 치료하여 사람을 구하는게 옳지않은가! 쩍하면 타도부터 하는데, 이렇게 해서야 인신안전을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어떻게 공작을 할수 있겠는가?”   이어 여추리가 탁상을 뚜드리며 격분하여 말하였다. 그는 이미 “타도”의 맛을 흠뻑 본 사람이다. “많은간부들을 잡아서 타도하는데 잔혹하기 그지없다. 계속 이렇게 한다면 다음부터는 나는 응하지 않겠다. 당신들이 하고픈대로 하라.”   리선념도 말하기 시작했다. “ ‘홍기’13기 사론에서 자산계급반동로선에 맹렬히 불질하자 고 호소를 하자 전국이 란장판으로 되였다.”   주은래가 강생에게 물었다. “당신은 그 사론을 보았는가?” 얼굴도 붉히지 않고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강생은 천연덕스레 대답하였다. “보지못했습니다.” 주은래는 격분하여 말했다. “이렇게 큰일을 왜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았는가?”   섭영진도 말하였다. “간부들의 자녀를 가두는 방법은 교육이 아니라 련좌다. 모주석께서 군위8조에서 특별히 명령한 것이 있다. ‘각급간부 특히 고급간부들은 자녀를 엄격히 관리하며 교육해야 한다. 부모가 교육하지 않았을 때에는 책임이 부모에게 있는것이다. 로간부를 타도하기 위하여 자녀들을 잡아내면 않된다. 가족을 련좌해도 않된다.’ 지금  이렇게 로간부를 박해하는것은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격이다. 좋은 심보가 아니다!”   담진림이 또 말하였다. “나는 종래로 울지않았는데 지금에 와서 세번이나 울었다. 하지만 울데가 없었다. 곁에 비서가 있고 아이들이 있어서 뒤에서 가만 가만 눈물을 흘렸다.” 이때 이미 림표, 4인방켠에 선, 공안, 검찰, 법원을 책임진 사부치가 한마디를 빈정거리며 말했다. “개인감정으로 출발하면 않되는게 아닌가. 대국을 고려해야지.” “나는 개인을 위하여 운것이 아니다. 우리당을 위하여 울었다.” 담진림은 떳떳히 사부치를 박아쳤다.   이날 회의는 모두가 불쾌한 심정으로 끝났다. “우파”들은 다투어 속심의 진실한 말을 하였지만 “좌파”들은 강생이 외마디 명창으로 두마디를 하고 사부치가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그날, 조어대15호 층집에서 장춘교, 요문원, 왕력의 화보를 들은 강청은 “회인당의 엄중한 정치사건”이라고 결론을 한후 즉각 모주석께 긴급한 문제가 있어서 만나서 회보하겠다고 청시하였다. 강청의 말을 대체로 들은 모택동은 그럼, 모두가 와서 자세히 회보하라고 지시하였다.   장춘교, 요문원 등은 될수록이면 모택동이 격분하게 회보의 뉴앙쓰(색갈, 모습)에 신경을 썼다. 강청, 강생, 진백달 등은 옆에서 부쩍 붙는불에 부채질을 했다. 모택동은 감정이 격동 하였다. 처음에는 로동지들이 문혁에 대하여 리해가 부족한 표현이라고 평범하게 인정하였는데, 진의의 연안정풍에 대한 발언과 담진림이 얼마전에 보내온 편지에서 강청을 무측천에 빗대고 욕한 구절을 상기하자 감정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연안정풍이 틀렸는가?! 뒤엎고 왕명을 불러오자는건가?! 강청이 무측천과 같이 잔혹하며 나쁜년이기에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것은 나를 직접 겨눈것이 아닌가?!” 그는 그날 회의에 모인 로동지들이 문혁을 반대하며 직접 자기를 겨누고 진공한다고 느끼게 되였다. 강청 등은 로간부들을 일망타진할 때는 왔다고 기뻐하였다.   2월18일, 모택동은 정치국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는 랭담한 태도로 로동지들을 거들떠도 보지않았다. 회의는 주은래가 주최하였다.   모택동은 격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들이 회인당에서 련합하여 돌연습격을 하며 중앙문혁과 걸고들고 중앙과 나를 걸고들었다는데 대체 어쩌자는 건가? 이건 궁정정변을 일으켜 나를 나떨구고 류소기를 다시 올려세우자는것이 아닌가?! 매번의 중요결정을 당신들은 다 동의하지 않았는가. 정작 문화대혁명이 기세높히 전개되니 반대를 하는가?!” 모택동의 말에 담진림과 진의가 중앙문혁령도소조의 작법에 의견이 있으며 반대를 했을 뿐이라고 말했으나 모택동은 전혀 수긍하지 않았다. “중앙문혁은 당중앙의 결정을 실행하고 있다. 결점이 두세가지 있을수는 있다. 지금 당신들은 착오를 근본 승인하지 않는데, 은래동지! 이사건을 참답게 토론하시요. 한번에 않되면 두번, 한달에 않되면 두달, 정치국에서 해결못하면 전체당원들을 발동하여 해결합시다.” 말을 마치고 모택동은 쥉쥉 퇴장하였다.   득세한 “좌파”들은 기세 충천하여 “우파”들을 맹공격 하였다. 론쟁은 첨예하게 치렬했으나 전혀 승부가 나지않았다.   주은래는 “우파”들을 내심히 설복하며 정면적인 돌격만 하지말고 우회전술도 써야한다고 하였다. 그는 모택동의 권위를 돌보며 인식착오문제로 자아검사를 하라고 권고하기까지 하였다.   어느덧 5.1절 전날이 되였다. 그간 모택동은 당전의 정치력량을 분석하여 보았다. 날로 커가는 림표와 강청의 세력을 그는 신임하지 않았다. 오직 주은래를 위수로 한 “우파”(3부총리, 4원수)세력과 자기가 한갈래의 세력임을 인정하게 되였다. 모택동은 주은래에게 지시하여 오늘 “우파”들을 만나겠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강청을 위수로 한 중앙문혁 일파들은 기절초풍을 할 지경이였다. 로간부들을 다 때려잡을 기회가 왔는데… 이게 웬 영문인가?!   “우파”들이 오자 모택동은 만면춘풍이 되여 열정적으로 맞이하며 예전과 같이 일일히 악수하고 문안을 하였다. 담진림, 진의 등이 새삼스레 사과의 말을 하자 모택동은 그건 더 말할것이 없다면서 사상보따리를 가지지 말라고, 당신들이 없으면 내가 독불사령질을 하겠는가? 고 말하면서 유쾌히 웃었다. 모택동은 이미 오해를 풀고 정확한 견해를 새삼스레 확립하였든 것이다. 이때, 주은래가 래일 5.1절 련환만회를 하는데 누구누구를 참가시키면 좋겠는가고 물었다. 모택동이 명단을 작성하라고 하자 주은래는 이미 작성한 명단을 내여 보였다. 모택동은 쭉ㅡ 본후 “동의”라고 힘있게 썼다.   (1971년과 1976년 력사는 림표집단과 강청집단이 반당, 반모택동집단이라는 것을 보여줬고 증명하였다.)                                                                                                                22. 12
196    모택동의 이야기(19) 댓글:  조회:304  추천:0  2023-06-02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19 )                                                                                                                      회령   이루지 못한 숙원   1961년8월 어느날 모택동은 경위원 장선명과 이런말을 하였다.   “나에게는 3대숙원이 있다. 하나는 하방(기층에 내려감)하여 일년간 공업을 하고 또 일년을 농업을 하고 또 반년을 상업을  해 보는것이다. 이렇게 많이 조사연구를 하여 정황을 료해하고 관료주의를 범하지 않으며 전국의 간부들을 추동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말을 타고 황하와 장강의 량안을 실제고찰을 하는 것이다. 나는 지질방면의 지식이 부족하기에 지질학가를 청하고 력사학가와 문학가도 청하여 함께 실제고찰을 하는 것이다. 세번째로는 나의 일생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이다.  나의 결점과 착오도 다 써서 전세계인민들이 내가 좋은사람인가 나쁜사람인가를 평론하게 하는 것이다.”   이 3대숙원은 모택동이 실현못한 것이다. 그는 군중속에 들어가며 실천속에 들어가며 사회와 실제적인 련계를 맺고 싶어했다. 그러나 건국전에는 할수 있었지만 건국후에는 할수 없었다. 그는 붉은담장안에서 인민들의 목소리를 기본상 들을수 없었고 회보와 문건에 의거했다.   1965년 모택동은 비서 고지와 “말을 타고 황하를 한바퀴 돌고 싶지만 몸을 뺄수 없구나…”하고 말하며 한탄을 하였다.                                                                                                                    22. 9.
195    모택동의 이야기(18) 댓글:  조회:312  추천:2  2023-05-05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18 )                                                                                                                 회령   모택동의 원고비   모택동은 평생에 많은 글을 썻고 발표하였다. 50년대에 그의 원고비는 이미 100여만원이 되였다.   모택동은 이원고비로 생활을 개선하거나 집살림에는 한푼도 쓰지않고 몽땅 중앙판공청 특별회계실에 보관하였다. 그는 이돈을 다음과 같은 일들에 썻다.   신변의 생활이 곤난한 동지들에게 썻다 리은교, 장동무, 등 신변의 동지들에게 여러번 부조를 했다.   호남에서 오는 친척, 친우, 선생들에게, 혁명에 공로가 있는사람, 렬사유가족들에게 썻다. 자기를 찿아 온 사람들이 북경에서 쓴 일체비용과 왕복차비, 려관비 등을 전부 부담하였다. 그리고 돌아갈때마다 옷을 해 입히고 특산물과 선물을 사 주었다.   양개혜와 함께 환난을 겪은 진옥영에게 수차례 생활비와 아이들의 학잡비등을 부담해 주었다.   중공초기당원 라철이 1928년에 희생된후 천방백계로 그의 유족을 찿아 생활비를 부조했다.   집에서 초대하거나 식당에서 한 연회비는 자신의 손님일때에는 일률로 경비를 부담하였다.   자신을 위하여 수영장을 수건한 사실을 안후 모택동은 유관인원들을 호되게 비평한후 그비용을 전부 부담하였다. 그리고 신변의 공작원들이 지방에서 례물을 받았거나 초대를 받은 전부의 금액을 몽땅 조사하여 갚았는데 그번 한번의 금액은 2만여원이 되였다.   강청은 경상적으로 특수화를 부리였는데 50년대 그는 매년 광주에 가서 몇달씩 향수를 누리였다. 그는 3000여원짜리 수입제 카메라를 사고도 1전한푼 내지않았다. 그리고 사진을 만드는 일체 비용도 한푼 물지않았다. 서양복과 기타옷을 만들어 입고도 돈은 한푼도 갚지않았다. 거액의 일체 비용은 광동성 성위에서 대신 갚았는데 이사실을 알게된 모택동은 강청을 호되게 비평한후 원고비로 몽땅 결산을 하였다.   하자진은 쑈련에서 귀국한후 계속 신병으로 고생하였다. 모택동은 좋다는 약을 수소문하여 구입한후 하자진에게 자주 보내주었다.   청나라 말대황제 부의의 숙부 재도가 집이 허물어 져서 대수리를 해야하지만 경비가 없어서 속을 태울때 모택동은 거액의 부조를 하여주었다. 재도는 눈물울 흘리며 여생에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며 모주석의 은혜를 꼭 갚겠다고 거듭 말하였다.   모택동은 독서를 매우 즐기며 책을 몹시 사랑하였다. 그는 수많은 책을 원고비로 구입하고 또 좋은 책은 자기돈으로 인쇄하거나 구입하여 정치국위원들과 동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후에 이런사실을 알고 정치국에서는 다시는 모택동의 원고비를 쓰지못하게 하였다.)   모택동의 만년에 강청은 돈을 달라고 하였다. 모택동은 원고비에서 3만원을 지출하게 하였다. 그후 모택동이 서거후에는 누구도  그의 유산에 대하여 거론하지 않았다. 그의 원고비는 계속 중공중앙판공청 특별회계실에 보존되여 있었다.   1981년 중공중앙판공청에서는 리민(하자진과의 딸)의 생활과 요구를 료해한후 모택동의 생전의 유언에 따라 현금 8000원, 텔레비죤 한대, 랭장고 한대를 주었다. 리나(강청과의 딸)도 똑같게 돈과 물건을 받았다.(돈은 1975년에 이미 주었다.) 모안청(양개혜와의 둘째아들)도 똑같게 돈과 물건을 받았다.   이상 지출외에 남은 모든 원고비를 모택동은 국가에 바쳤다. 그이는 안청, 리민, 리나에게 돈과 재산은 물려주지 않았지만 고상한 정조와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정신을 물려주었다.                                                                                                                        22. 9.  
194    모택동의 이야기(17) 댓글:  조회:335  추천:3  2023-04-09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17 )                                                                                                                          회령   민족자존심   모택동의 애국주의와 민족자존심은 하나의 유기체다. 물론, 핵심은 민족자존심이다. 1958년부터 중쏘관계는 파렬되기 시작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쏘련의 위협공갈과 협박앞에서 모택동은 추호의 동요도 없이 엄정히 맞섯다.   산고기만 먹는다.   1949년 1월 쓰딸린의 파견을 받고 정치국위원인 미꼬양이 중국으로 왔었다. 하북성 평산현 서백파촌에서 모택동 등 중공령도들은 그들일행을 열정적으로 맞이했다. 초대연에서 쏘련의 번역이 상에 오른 훙쏘잉어를 가리키며 갓잡아온 산 잉어인가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미꼬양일행은 비로서 먹기시작했다. 이 오만한 거동은 모택동의 민족자존심을 심심히 건드렸다.   1년후 모택동은 쏘련을 방문하게 되였다. 그때, 모택동은 수행료리사에게 엄숙히 지시하였다. 우리에게 물고기료리를 할때면 반드시 산물고기로 하라. 죽은물고기를 가져오면 그들앞에서 던져버리고 모택동은 죽은물고기로 한 료리는 먹지않는다고 설명하라.   며칠후 과연 죽은물고기를 가져오자 료리사는 당장에서 던져버렸다. 쏘련인원은 너무도 당황하여 번역에게 물어서 연유를 알게되였다. 쏘련인원은 산물고기를 즉시 가져오겠다고 정중히 보증하였다. 이일은 클레물리궁에서 인차 널리 소문이 퍼졌다. 모택동은 산물고기료리고야 먹지 죽은물고기로 한 료리는 먹지않는다고. 매우 따진다고. 1957년 모택동의 방문시에는 쏘련에서 미리 산물고기를 준비했었다.   부드러우면서 강하다   중쏘관계처리에서 모택동은 시종 민족리익과 국가리익을 중히여겼다. 중쏘관계가 “밀월”일때도 그는 쏘공이 “형님”이라고 우쭐렁거리지 못하게 하였다. 하여 쓰딸린은 모택동에게 불만이 있었다.   어느날 쓰딸린은 갑자기 파이내플통조림이 생각나서 비서 말렌꼬브에게 지시하기를 “즉시 중국에 전보를 쳐서 내가 중국땅에 파이내플통조림공장을 세우려 한다고 알리라.”고 하였다. 이때 곁에 있던 흐루쑈브가 “쓰딸린동지! 그렇게 하면 모택동이 불쾌해 할것입니다.”하고 귀띔을 하였다. 쓰딸린은 그따위소리는 듣는체도 안하고 전보를 보내게 하였다.   이틀후 쓰딸린은 모택동의 답장을 받았다. “우리는 당신들의 제의를 접수한다. 당신들이 파이내플통조림에 흥취가 있다면 우리에게 대출을 달라. 우리가 공장을 세우고 생산한 통조림으로 대출한 돈을 갚기로 하자.” 이대답은 기실은  타국의 존엄을 무시하는 쏘공의 태도에 대한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거절의 대답이였다.   거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는다.   1958년 쏘공총서기 흐루쑈브가 중국으로 왔었다. 그는 쏘중이 련합함대를 만들자고 하였는데 당연히 모택동의 거절을 당했다. 이에 그는 달갑지 않아 계속 모택동에게 압력을 가했다. 모택동은 랭정하게 “가장좋기는 당신이 중국의 해양을 몽땅 가져가는것이다.”고 대답하였다. 흐루쑈브는 무슨말인지 몰라서 정말로 그런다면 어쩔건가고 물었다. 이에 모택동은 내색을 하지않고 “다시 산에올라 유격전을 할것이다.”고 대답하였다. 뻔뻔스러운 흐루쑈브는 “유격전은 현대세계에서 시장이 없다.”고 말했다. 모택동은 대수롭지 않아하면서 “당신들이 기어코 중국사람들의 코를 꿰여끌자고 하면 그외에 무슨방법이 있겠는가?”하고 말하였다. 흐루쑈브는 그제야 말귀를 알아듣고 시무룩해 하었다.   1960년 흐루쑈브는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와의 회담이 끝나자 중국으로 왔었다. 그는 중국에서 붙잡은 조선전쟁시 포로와 특무 8명을 석방하라고 하였다. 이에 모택동은 “중국의 법률에 않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흐루쑈브는 얼굴을 붉히며 아이젠하워와 회담에서 결정한 문제라느니 뭐니하면서 계속 졸라댔으나 모택동은 응대도 하지않았다.   흐루쑈브는 철면피하게도 또 인도 네루총리의 설객으로 나섯다. 그것은 변경에 있는 무인 불모지인 중국땅을 인도에 조금 떼여주라는 것이였다. 이에 모택동은 그들이 그곳에 들어와서는 무장집탈을 하는데 한치도 않되며 견결히 반격해 물리친다고 대답하였다.   중국은 쑈련의 방조를 많이 받았고 형제적 우호관계였다. 그러나 모택동은 쑈련의 패권주의 정서에 경각성을 시종 잃지 않았고 털끝만치의 양보도 하지않았다. 그는 위대한 국제주의자 였고 애국자 였고 민족존엄수호자 였다.                                                                                                                       22. 8.
193    모택동의 이야기(16) 댓글:  조회:329  추천:0  2023-03-10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16 )                                                                                                               회령   특대난관에서   1959년! 대약진, 인민공사운동과 자연재해가 겹쳐서 조성된 재난은 매우 엄중하였다. 량식이 대량 부족하고 물자가 몹시 결핍하고 지어는 사람이 굶어 죽고… 인민들의 생활은 매우 곤난했다 새중국은 전대미문의 경제곤난에 직면하였다. 바로 이런때에 설상가상으로 변덕이 많은 후루쑈브는(쏘공당중앙총비서) 중국과 비우호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그는 근만명의 쏘련전문가들을 철회하고 343개항목의 전문가합동을 취소하고 257개 과학기술합작항목을 페지하였다. 동시에 대량의 설비들에서 관건적인 부속품들을 뜯어가버렸다. 하여 중국의 경제건설이 정상적으로 운행되지 못하게 하였다. 더욱 악렬한 것은 항미원조전쟁시기 사용한 무기, 물자의 금액과 대출을 3년내에 몽땅 갚으라는 빚 재촉이였다. 후루쑈브는 중국을 굴복케 하려고 발광하였다.   사실그대로 극히 엄중한 자연재해와 인재가 겹친 특대난관에 직면하여 모택동은 친히 기층에 내려가 조사연구를 하며 대책을 강구하였다.   1959년 국경절후 모택동은 북경을 떠나 산동성과 안휘성을 거쳐 10월 31일 항주에 이르렀다. 모택동은 항주의 류장에서 한시기 머물면서 사업하기로 하였다. 그의 사무상에는 문건, 전보, 재료가 가득 놓였다. 산동성에서 온 전보에서는 전성의 재해가 엄중하여 어떤지구에서는 한알의 곡식도 걷우지 못했다고 하였다. 안휘성에서 보고한 재료는 작년에 산량을 거짓과대로 보고하였는데, 지금 저비가 매우적어서 백성들은 잡초를 섞어 먹는다고 하였다. 하남성의 보고는 일부지구에서는 나무껍질과 나무잎을 몽땅 먹어버렸고 사람들이 부종으로 고생하며 굶어죽기까지 한다고 하였다……. 모택동은 떨면서 눈물을 흘리였다. 그는 “말그대로 천재와 인화로구나!” 하면서 개탄한후 신변의 공작원들과 물었다. “인민들이 지금 굶주리고 있다. 고기를 먹지않고 차를 마이지 않으면 않될가?” 공작원들은 서로 바라보면서 대답을 올리지 못했다. 그것은, 모주석은 무슨 보양품이란걸 잡숫지 않는데, 있다면 일주일에 두번 훙먼뤄를 잡숫는것 뿐이고 즐겨하는 룡정차는 차잎까지 다 잡쉇다. 모주석의 공작량은 그렇게도 막대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못하고 휴식도 매우 적은데 즐겨하는 이 두가지를 잡숫지않는다면 어찌되는가… 공작원들이 말하지 않고 난처해 하자 모택동은 말하였다. “우리중국인민은 기개가 있다. 그어떤 난관앞에서도 머리를 수그리거나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빚재촉을 하는데 고기를 적게 먹더라도 3년내에 빚을 물어야지…” 모택동은 신변의 공작원들과 토론하고 “세가지를 먹지않기로” 결정하였다.(어, 육류, 알류, 식량표준불초과)   얼마후 모택동은 확연히 수척해졌다. 그는 부종병으로 다리와 발이 붓고 탄력이 없어졌다. 어느한번 공작원들은 자체로 키운 돼지를 잡아 모주석께 훙먼뤄를 한사발 하여 드렸다. 그러나 모주석은 한점도 먹지않았다. 모택동은 큰일이든 작은일이든 일단 결정한 것이기만 하면 추호의 동요도 없이 그대로 집행하는 성미였든것이다. 막내딸 리나는 학교식당에서 늘 배를 곯았다. 공작원들이 리나를 한시기 집에서 밥을 먹게하자고 하니 모택동은 견결히 않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모택동은 7개월을 결정을 준수하였다.   3년이나 련속된 특대난관을 모택동은 인민군중들과 함께 싸워 끝내 전승하였다.                                                                                                               22. 8.
192    모택동의 이야기(15) 댓글:  조회:352  추천:3  2023-02-06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15)                                                                                                                      회령   군중의 목소리   1960년 음력 11월이다. 모택동의 외사촌형 하효추의 아들 하봉생이 호남 고향에서 중남해로 모택동을 찿아왔다. 하봉생은 생산대 대장이였다.   “주석님! 나는 당신을 모셔다가 우리가 먹는 찐밥을 몇끼 잡숴보게 하고싶습니다. 집체식당은 사람이 굶어죽게 합니다. 식당을 해산하지 않으면 나는 돌아가지 않겠어요!” “대단한 첯 포다. 말해봐라. 자세히 말해봐라. 어떤의견이나 다 말하라고 내가 여러번 말했지? 엄마를(당) 욕해도 된다. 나에게 말해다오.” “대약진이 벌어진후 또 인민공사화가 되였죠. 겨우 만들어 진 집집은 하루밤새에 다 허물어 버리고 몽땅 집체숙사로 들어갔어요. 집을 허문 파벽토는 부셔서 비료로 하고 개, 닭 도깨짐승은 우리가 없어서 아무데고 흩어지고 사람들은 할애비를 부르며 울고 에미를 욕합니다. 백호고 량백호고 한데다 몰아넣고 클수록 집체화여서 좋다고 하는데, 만약시 하느님이 불이나 달아놓으면 동쪽에서 서쪽까지 몇백칸의 집체숙사고 사람이고 다 재더미로 되고 말겁니다. 가마고 쟁개비고 다 뚜드려 마사서는 강철을 만든다고 하며 부뚜막은 짓부셔서 토비로 하고 사발이고 공기고 젓가락까지 다 공가에 바치게 하고 한개생산대에 한개식당만 허락합니다. 큰가마밥, 찜통밥, 두벌찐밥… 그런것도 배가 차게 먹지못하죠. 끼니마다 소금물에 무우와 고구마줄긴데 기름방울이란 하나도 없어요. 남자들은 복수가 와서 걷지도 못하고 녀자들은 애도 못낳고 겨릅대처럼 말라서 바람이 불면 날려가버릴 형편입니다…”   모택동은 굳어진 얼굴로 심중히 듣고 있었다 하봉생은 격분해서 계속 말하였다. “지금 간부들은 위성을 쏜다며 열을 올리고 있는데 기실은 헛나발위성입니다. 전혀 실사구시가 아니죠. 거짓말, 거짓장면을 만들어 낼수록 영웅이라 합니다. 그리고 벼슬이 올라갑니다. 고구마는 썩어서 밭을갈아 뭉개버리고 벼가을은 싫어서, 맥이없어서 하지못하면 불질러 버리고 추수를 앞당겨 끝냈다고 불어댑니다. 창고에는 낟알이 한바가지도 없는데, 무당산량이 몇천근이라고 보고합니다. 대약진을 해서 대풍작을 거뒀다는 겁니다. 귀신이 다 웃다가 잇빨이 빠질지경이지요. 가짜장면, 가짜일, 가짜말을 하는 사람도 그들 간부들이고 벼슬하고 표창받는 사람도 그들 간부들입니다. 잘먹고 잘불어대는 사람은 그들입니다. 간부들은 나으리질을 하며 군중을 엄중히 리탈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굶어 죽어가면서 뒤에서 하늘을 우러러 에미를 욕할수밖에 없답니다.”   두번째로 하봉생과 담화할때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네가 한 말을 류소기와 주은래에게도 전달하고 의견을 교환하였다. 당중앙과 국무원에서는 식당을 해산하고 생산을 회복하며 떠벌리며 불어대는 현상을 두절하기로 결정하였다. 네가 중앙에 매우 가치가 있는 정황을 제공한데 대하여 감사를 표시한다. 이정황은 류소기도 주은래도 나도 얻을수 없는 진실한 정황이다.”                                                                                                                          22. 8.
191    모택동의 이야기(14) 댓글:  조회:310  추천:3  2023-02-01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14)                                                                                                                      회령   군중의 말을 중시   대약진때 모택동은 군중들의 충천하는 열의를 기꺼히 보면서도 군중들의 목소리를 매우 중시하였다. 그이는 령도들이 머리가 뜨겁기만 하지말고 랭정하기도 해야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1958년 가을 어느날 오후였다. 모택동은 렬차를 호북의 효감역 밖에 세우고 당지의 간부와 농민대표들을 불러 좌담을 하게되였다. 농민대표 안도향은 어린처녀였는데 그때 마침 심한감기로 기침과 재채기를 쉼없이 하였다. 공작원들은 안도향을 차바곤에 들여놓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모택동은 즉시 제지하고 “뭘 두려워 하는가. 류소기는 여러해 간염을 앓지만 나에게 전염시키지 않았다. 들어오너라. 꼬맹이처녀, 어서 앉아라.”하고 친히 말하였다.   안도향은 모주석의 곁에서 기침과 재채기를 하여 사람들을 긴장하게 하였다. 안도향 자신도 매우 황송해 하면서 난처해 하였다. 모주석은 오히려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띄우며 “일없다. 나는 60여세의 늙은이로 죽는것을 겁나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백전을 겪고도 죽지않는다고 말하는데 나도 백전을 겪고도 죽지않았다. 너의 재채기 한번이 나를 죽일 수 있겠니? 네가 미국놈이나 일본놈이나 장위원장보다 더 쎄니?” 모택동의 말은 분위기를 대뜸 유쾌하고도 활발하게 하였다. “꼬맹아! 그래 어째서 감기에 걸렸냐?” “보고! 주석님…” “보고는 그만두고. 함께 앉아 마음대로 말하자.” “엊저녘에 밤을 새며 면화줄기를 뽑았어요. 날이 다 밝아서야 나에게 좌담회에 가라고 했어요. 자꾸 재채기가 나와서 약을 먹고 왔어요.” “네가 밤에 기계를 쓸때 밭에 불을 켜니?” ‘켜요. 300촉 전등과 20개의 가스불을 켭니다.” “밤에 일하는걸 찬동하니?” “솔직히 말한다면 동의하지 않아요. 그러나 령도에서 밤에 일하라 하죠. 나는 부녀주임이다보니 밤에 기계를 돌리지 않을 수 없죠. 내가 보기에는 밤에 일하는것은 수지가 맞지않아요. 돈을 엄청 많이 쓰고 엄청 힘이들고 낮에는 맥이없고 정신이 나지않아요. 사실은 모두 싫어해요.” “네가보기에는 너의 생산대의 량식산량이 지표에 도달할수 있겠니?” “차가 십만팔천리얘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니?” “령도에서 실사구시였으면 좋겠어요.”   안도향의 말은 좌담회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의 동감을 자아냈다. 어떤사람들은 박수까지 쳤다. 몇사람은 보충하여 말하기를 기실 로백성들속에는 이미 끼니를 굶는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모택동은 눈물이 흘렀으나 딲지않았다. 그는 군중들의 말을 깊히 귀담아 들었다.                                                                                                                       22. 8.
190    모택동의 이야기(13) 댓글:  조회:295  추천:0  2023-01-15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13 )                                                                                                                      회령   일밭에서   1958년 3월 21일 오전 모택동은 유명한 민강의 도강언을 고찰하고 매우 유쾌해 하였다. 2천여년의 력사를 가진 이 도강언은  전국 진소왕시기 촉 군수 리빙이 백성들을 이끌고 완성한 거대한 수리공정이다 도강언이 완성된후 흉용팽배 기세사납던 민강은 천서평원을 천수백년 천부지국으로 되게하였다.   오후 성도로 돌아오는 길에서 관현을 지날때다. 공로 량켠의 전간에는 갓 이삭이 나온 가없이 푸른 밀밭과 금황색 유채밭이 사람의 마음을 쉬원하고도 거뿐하게 하였다. 전야에서 일하는 사원들을 보자 모택동은 차를 세우라고 하였다. 그이는 길옆의 돌다리를 건너 사원들 한테로 갔다. 이밭은 관현 신성향 련화 1사의 것이였다. 제일처음으로 모주석을 본 사람은 사원 란귀전이 였다. 그는 눈을 두세번 부비며 보고 또 보아도 다가오는 사람은 틀림없이 모주석이 였다.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란귀전이 멍해 서 있는데 모주석이 말하였다. “기음을 깨끗히 매야지…” 밀밭에는 확실히 풀이 많았다. 모택동은 풀을 뽑으며 란귀전에게 물었다. “무당 소출이 얼마요? 400근이 되오?” “비슷합니다. 4백2, 30근이 됩니다.” “밀을 베여낸후에는 무얼 심소?” “벼를 심습니다.” “벼는 무당 소출이 얼마요?” “6백여근이 됩니다.” “일년에 무당 천여근이구만! 대단해요. 량식이 많으면 어떻게 하오?” “나라에 팝니다.” “나라에 파는걸 사원들이 찬성하오?” “당연히 찬성하지요.” 모주석은 웃으시며 “내가 보건대 당신은 그리 찬성할것 같지않은데…”하고 우스개를 하여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그러나 란귀전은 속이 꿈틀하며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산량이 적어서 농사짓는 사람이 배를 곯는데 어디서 나라에 팔 량식이 그리도 많겠는가?! 모주석께서는 모든것을 환히 알고 계시는것 같았다. 아니, 무당산량도 다 아시는걸보면 모주석은 틀림없이 형편을 다 알고 있다고 란귀전은 생각되여 헐떡거리며 아무말도 못하였다.   이때, 농민 고발연이 마주왔다. 모택동은 그에게로 마주가며 물었다. “당신은 올해 몇살인가?” “58살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는가?” “예. 두아이가 다 학교에 다닙니다.” “좋소!” 모주석은 고발연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얼마쯤 가니 원두밭이 였다. 녀사원 몇이 원두를 뜯고 있었다. 모택동은 그들과 허물없이 이야기를 하면서 원두를 뜯어 주었다.   얼마후 모주석은 물도랑가에 이르렀다. 거기서는 아이들이 놀고있었다. 모택동은 도랑에서 사발깨기꽃을 몇포기 뽑아 들고 아이들께 물었다. “너희들이 사발깨기꽃을 아니?” “예. 압니다.” “누가 감히 이꽃을 가지겠니?” (이꽃을 쥐면 그릇을 깬다고 해서 모두 꺼린다.) “내가 가지겠어요!” 임국민이라는 애가 용감히 높은소리로 선뜻히 대답하였다. 모택동은 아이의 용감성을 흡족해 하셧다.   모택동 일행이 떠나려 하자 십여명 사원들은 모두 길옆에 와서 경애하는 주석님을 배웅하였다. 모주석은 그들과 일일히 악수를 하며 매우 기뻐하였다. 그이는 순박한 이런 농민들과 함께 있기를 몹시 즐겨 하였던 것이다. 한 사원은 모주석의 손을 잡고 “평생에 이런일이 있을 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하였다.                                                                                                                              22. 8.
189    모택동의 이야기(12) 댓글:  조회:388  추천:0  2023-01-01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12)                                                                                                                회령   군중을 허물없이   1958년 9월10일, 시찰길에서 모택동은 무호시 철산빈관에서 하루밤을 묵게되였다. 오후 6시 모택동 일행은 빈관에 도착하였다. 그이는 차에서 내리자 빈관일군들에게 손을 흔들며 수고한다고 친절히 인사를 하였다. 모택동은 2층 객실에 이르자 모자와 겉옷을 벗었다. 복무원 쑈적이 얼른 다가가서 받으려고 하는데 모택동은 “나절로 하마.”하면서 문곁에 있는 옷걸이에 모자와 옷을 걸었다. 그러고는 주변에 서 있는 복무원들에게 연신 “수고하는구나!” 하며 칭찬을 하였다.   모택동이 “무호일보”를 보는데 저녘식사시간이 되였다. 복무원 쑈왕이 특별히 마련한 작은식당으로 모택동을 안내하였다. 실내를 둘러보던 모택동은 쑈왕에게 물었다. “다른동지들은 어데서 식사를 하냐?” “아래층 식당에서 합니다.” “그럼, 나도 거기가서 먹겠다.”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내리막 길은 미끄러웠다. 쑈왕은 모택동 뒤에서 얼른 우산을 펴 들었지만 키가 작다보니 발끝으로 걸으며 조심스럽고 힘들어 하였다. 모택동은 “내가들자.”고 하면서 우산을 받쳐들고 쑈왕과 함께 걸었다.   식당에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모주석을 본 사람의 말을 듣느라고 모두 밥을 먹지않고 있었다. 모택동은 “당신들이 나를 보고퍼하고 나도 당신들을 보고퍼서 이렇게 왔다.”고 하면서 우스개를 하였다. 식당안은 대뜸 활기가 차넘쳤다. 그이는 “자, 밥을 먹자.”고 하면서 사발을 들고 밥을 푸려했다. 복무원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밥을 담으려 하는데, 이번에는 밥주걱이 없는게 아닌가?! 복무원들이 당황해 하는데 모택동은 국자를 들고 이걸로 퍼도 되지? 하면서 나절로 하자고 하였다.   저녘후 모택동은 또 두차례의 모임을 하고 11시가 지나서야 침실로 갔다. 복무원들은 이젠 물러가려고 하는데 모택동이 책상을 하나 가져오라고 하였다. 복무원이 복도구석에서 작은책상을 가져오자 모택동은 그와 함께 책상을 들어 침대옆에 놓았다. 복무원은 모주석이 일을 보시리라 짐작하고 걸상을 가져오려고 하였다. 모택동은 필여없다며 침대에 걸터앉아 일을 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탁상등이 낮아서 불편하자 그이는 차엽통으로 받치고 갓에는 수건을 둘러 불빛이 문건에 집중되게 하고 사무를 시작하였다.   새벽한시가 되여 모택동은 복무원에게 비서를 불러오라고 하였다. 그는 비서더러 주총리에게 전화련계를 하라 하였다 이때 빈관주방에서는 밤참을 하려고 하는데 비서가 필요없다고 모주석께서는 밤참을 드시지 않는다고 하였다. 복무원들은 모주석께서 이렇게 많은 년세에 밤중까지 일하고 밤참을 드시지 않는다니 모두 매우 놀라워 하였다. 복무원들이 이젠 쉬시라면서 무슨 부탁이 없는가고 물으니 그이께서는 아무런 요구도 없다면서 오늘 동무들이 너무도 수고가 많았다고 미안해 하며 거듭 칭찬하는게 아닌가?! 복무원들은 무척 감격하였다.   모택동의 침실에서는 새벽 세시까지 불빛이 환하였다. 그때 또 비가 내리며 락수물소리가 요란했다. 쑈적은 모택동의 수면에 방해가 될가봐 탄자를 가져다 락수물이 떨어지게 하였다. 날이 밝아오는데 가까이에서 기차가 길게 기적을 울리였다. 복무원은 모주석이 깨지않았나 근심되여 살펴보려고 복도에 나서니 웬걸?! 모주석은 복도에서 산보를 하고 있었다.   아침식사시간이 되여 복무원들이 안내를 가니 모주석은 골똘히 책을 보고 있었다. 모주석은 계속 책을 보시다가 9시가 되니 떠나가셨다. 그이는 빈관일군들과 친절히 작별인사를 하고도 차에 오른후 또 연신 손을 흔들며 떠나가셧다.   철산빈관에서 모택동은 “내가 하자. 나절로 하자.”는 인상을 제일 깊히 남겼다.                                                                                                                    22. 8.
188    나의 고국 댓글:  조회:497  추천:0  2022-12-25
         수필                                                나의고국                                                                                                                 회령   이젠 30여년전의 일이다. 그해 국경절밑이다. 서안시에서 사업하는 애골친구 만덕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국경절에 아들의(외독자) 결혼식을 하는데,  비행기표를 보내니 부부동반으로 꼭 참석해 달라. 한복을 갖고오며 자기부부의 한복과 아들 며느리의 결혼식한복도 부탁한다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복장비로 만원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임마! 돈자랑을 하는거냐?! 이 큰형님이 알아하겠으니 거추장스레 돈이니 뭐니 하지말아. 자식!” 우리는 유쾌한 마음으로 한시간 거이 통화를 하였다.   여기서 말이 좀 길어지지만 하고 넘어가자.   나와 만덕이는 연변의 큰갈매골 샘물깨라는 두메산골에서 자랐다. 나는 부모의 품에서 자랐지만 만덕이는 광복이 난 이듬해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자식이 없는 이웃집 아저씨댁에서 양자로 자랐다. 10여리 먼곳에 있는 소학교와 거이 30리가 되는 초중학교를 우리둘은 꾸준히 다니며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샘물깨마을에는 학생이래야 우리둘뿐이였다. 만덕이는 공부를 잘해서 줄곧 1등이였지만 나는 그에게서 늘 배우면서도 중간정도쯤이 되였다.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 등에서 누린내가 나게 고생을 시키면서 대학공부까지 하였다. 만덕이는 서안교통대학을 졸업한후 직방 학교의 선생으로 떨어지고 나는 뻬쮼의대를 졸업하고 성1병원에 분배를 받았다. 만덕이네는 부모를 모시고 계속 서안시에서 살고 우리는 정년퇴직을 하자 장춘시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는 연변 도문시로 나왔다. 나도 아버지 어머니를 장춘시에 모셔가려고 몇번 의논을 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맨 한족들만 사는데서 어떻게 살아?!” 하시며 도고리를 떨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타민족을 늘 업신여겼다. 방법없이 나는 아버지 어머니를 녀동생가까이로 도문시에 모셧던 것이다.   우리는 국경 사흘전 오후에 만덕이네 집에 도착했다. 이튿날 오전, 신랑 신부를 불러다 한복을 입혀보니 원! 저렇게도 신통할줄이야?! 의포단장이라더니 신랑 신부는 말그대로 선남 선녀였다. 만덕이부부의 옷도 흠잡을데가 없었다. 우리는 큰시름을 놓았다. 그런데, 입는법을 잘 몰라서 우리는 한바탕 웃으며 부산을 떨었었다.   만덕이는 우리의 여러가지 궁금증을 쉬원히 풀어주었다.   아들은 시정부판공실에서 사업하고 며늘애기는 시부련회에서 사업한다고 하였다. 애들은 대학에서 사귀기 시작했는데 며늘애기집은 상해에 있고 무남독녀, 아버지와 어머니는 상해복단대학의 교수인데, 신기한건 그들이 연변 훈춘의 어느 조선족마을 집체호에서 함께 생활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한족인 딸애가 조선족 총각과 련애를 한다고 하니 특대경사라고 기뻐하며 “련애경비”로 6천원짜리 카드를 딸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신혼집도 기어코 함께 마련하고 자가용도 함께 마련했다는 것이였다. 약혼식은 사돈네가 먼저 서안으로 날아와서 허혼(허락)을 해달라고 간청을 해서 말을 떼고 불이 번쩍나게 거행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한바탕 유쾌히 웃었다. 나는 한편 그사돈네 거동이 우습기도 했다. 그리고 규수가 한족이라고 하니 마음이 좀 아쉬웠다.   사돈네는 묻지도 않는 말을 신나서 하더라고, 그대로 외운다면서 만덕이도 신나서 말하였다.   우리는 조선족을 한족보다 더 잘 안다. 우선, 깨끗하고 선량하고 무던하고 너그럽다. 례모가 아주 바르고 경우시비, 도리가 명백하다. 인정이 많고 교육을 매우 중시한다… 총명하고 근로하고 용감하다… 그러면서 집체호의 땔나무, 온돌수리, 회칠을 때를 맞춰 해주고 명절이면 집집이 불러가고, 김치를 해주고, 토장국, 두부찌개를 가르켜 주고 옷이며 신을 기워주고 누가 앓으면 서로 자기집에 데려다 보살펴 주고… 침이 마르게 찬양이 끝이 없더라는 것이였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만덕이네 아들잔치가 서안시를 들썽하게 인기를 끌었다. 신혼행차가 시내 여러곳을 돌며 촬영을 했는데 말그대로 구경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였다. 서안사람들은 문명하고도 열정적이였다. 이르는 곳마다에서 사람들은 “당신들의 행복을 축하한다!”(한어로.)고 하며 박수갈채와 함께 이구동성으로 열창을 하여 주었다. 잔치는 상해에 가서도 굉장히 하였다. 우리도 동참하였다.   우리는 만덕이네가 자꾸 붙잡아서 보름거이 유람하며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오기전 어느날, 나는 만덕이에게 넌짓히 물었다. “손군을 낳으면 호적에 무슨민족이라고 하겠는가?” 만덕이는 한족으로 올린다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왜서냐고 더 물으니 주체민족이 아니냐고 하였다.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하는 잔치구경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다가 아버지가 가장 관심사인듯 물었다. “그래, 신부는 어디 뉘집 딸이던가? 거기두 조선사람이 많은가?” 이대목은 사실은 나도 말하기가 달갑지 않아서 아직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될수록이면 범상하게 좋도록 이실직고를 하니 아버지는 대뜸 “엥이! 한족새기 더냐?!”하며 더 들을맛이 없다는듯 돌아앉으며 담배대를 쥐는것이였다. 어머니도 시무룩해 하였다.   나의아버지는 젊은시절에는 조선팔도를(해삼위, 일본, 중국도) 꽤 돌며 노가다판을 찿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광복세해전 일터에서 크게상하고 샘물깨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무식하고 비천한 백성이였지만 민족자존심만은 본능적으로 굴뚝같이 높았다고 한다. 하여 “민족전쟁”(민족간의 패거리 싸움)도 여러번하며 우두머리였다고 한다. 나는 음으로 양으로 아버지 영향을 받았는지, 유전인지, 본능인지… 민족자존심이 퍼렇게 살아있었다. 물론 아버지처럼 막무가내는 아니였다. 어느나라 어느민족이나 무릇 사람이 있는곳이면 상, 중,  하가 있는법이다. 무턱대고 타민족을 깔보면 안된다. 어느민족이나 다 우점 장점이 있다. 서로 따라배우며 화목하게 살아야 한다…. 나는 이런관점이면서도 감정상에서는 세상에서 우리배달민족이 제일 훌륭하다고 주장하고 싶고 그렇게 인정했다.   그간 함께 지내보니 만덕이네는 한족과 다름이 없었다. 한족물감독에 빠진 그들이 한족이 되지않고 따로 뭐가 되겠는가! 장춘에서 오래동안 생활한 우리부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 리해할수 있었고 접수할수 있었고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살아왔다. 사람은 누구나 다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적응하는 법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민족자존심이 살아있어 며느리, 사위를 다 우리민족으로 맞았다.(아버지 어머니의 엄명을 받들며, 힘으로 하며) 순우리혈통인 친손군 외손군을 일곱이나 보았는데 손자가 셋이고 손녀가 넷이다.   우리가 연변으로 와서 도문시에 자리잡은후 세월은 어느덧20여년이 흘러갔다. 만덕의 부모는 손자 잔치전에 이미 작고 했고 나의 부모는 손자 손녀의 잔치도 다 보고 그들이 첯애기(증손)를 낳아 키우는 것도 다 보고 작고를 했다.   지금 나의손군들은 모두 결혼적령기다. 그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이미 취직을 했거나 연구생공부를 하고 있다. 나는 아들 딸들과 때를 놓치지 말고 애들의 혼인대사를 잘 행사하라고 자주 당부를 하며 손군들과도 우리민족 대상을 찿으라고 자주 말한다. 그러나 나 자신이 신심이 없다. 보아하니 한족친구를 더 좋아하는것 같다.   중국대지에서 연변은 세상이 다 알다싶히 우리 중국조선족의 고향이다. 그러나 연변의 조선족은 인구의 40프로정도라고 한다. 지금은 연변에서도 조선족간부 들은(촌장, 촌민소조조장까지도) 한어가 상용어로 되고 조선문 신문, 잡지의 발행부수는 대폭 줄어들었다. 조선말방송, 텔레비는 조, 한 언어와 문자를 아주 자연스레 사용하고 있다. 어느 조선족소학교에서는 한문교재로, 한어로 교학을 한다고 한다. 많은 군중들이 한어를 알아듣고 한어를 애용하며 의사표달을 능숙하게 한다. 한복은 년중 특별행사에서나 한두번 혹 입는 이들이 있고 찰떡과 김치는 대부분 집들의 설잔치상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죠즈(만두)가 중심으로 되였다. 우리집에서는 일년에 세번 대잔치가 벌어지는데(설, 우리부부의 생일) 가급적 식구들이 다 참가하고 가까운 친척친우들도 끼우다 보니 보통30여명이 되는데 그때는 한족말세상이 된다.(한족은 한명도 없다.) 요구에는 공무원들이 조, 한 두가지 언어로 군중을 접대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지금은 군중이 조선말을 하면 “한어로 말하시요.” 한다. 인구가 감소하고 마을이 줄어들고 조선족유치원, 학교가 없어진다… 연변의 많은 중국조선족들은 관내로, 세계각지로 과감히 뛰쳐나갔다.   위축되는 조선족사회를 놓고 학자와 언론인들이 밤낮 부흥방략이요 방침이요 설계요 대계요 대책이요… 하면서 고견을 목이 아프게 력설하지만 나의귀에는 미안하지만 한마디도 들어오는게 없다. 나는 중국조선족사회의 현황을 서글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히려 긍정하며 광명하게 본다.   중국대지에서 소수민족은 한족과의 동화를 피면할수 없다. 시간문제일 뿐이다. 서로 따라배우며 함께 생활하는중 저도모르게 이미 많이 동화가 되였다. 절대로 나쁜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나의 민족자존심은 불가항력적인 현실앞에서 때론 슬프고 울적함을 어쩔수 없다. 그럴때마다 나는 두만강변으로 자주 나간다. 두만강변으로 나가면 마음이 쉬원히 열린다. 머리를 들고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저기는 조선이고  멀리 저 남쪽은 한국이다. 삼천리금수강산, 삼천만백의동포라고 하던 나의 고국이다! 지금은 분단으로 부끄럽고 슬프고 불행한 나의 고국이다. 어느때고 통일은 올것이다! 해외의 모든 백의동포들은 이구동성 일심동체로 고국의 평화통일을 성원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본다.   이세상의 2000여개민족이 서로 동화되고 동화되여 두세개 민족으로 된다해도 그중의 하나는 꼭 우리배달민족, 단군의 자손들일 것이다! 그것은 고국이 있기때문이며 거기에는 총명하고 지혜롭고 례절바르고 사리밝고 원칙성과 정의감이 강하고 근로용감한 우리배달민족이 살고있기 때문이다…   중국대지에서 우리는 사라지고 연변은 사라져도 나의 고국에서 우리 배달민족은 길이길이 번영창성할 것이다… 나는 이런마음으로 여생을 편안히 살고있다.                                                                                                                             2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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