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huiling 블로그홈 | 로그인
회령
<< 10월 2020 >>
    123
45678910
11121314151617
18192021222324
25262728293031

방문자

홈 > 작품

전체 [ 158 ]

158    형식주의에 대한 연구 댓글:  조회:78  추천:0  2020-10-13
     수필                                     형식주의에 대한 연구                                                                                                                  회령 래일은 중추절 ㅡ 한가위 ㅡ 농력(달력 월력 음력) 팔월 열닷새 ㅡ 추석명절이다. 옛날부터 이날을 우리 조선사람들은 큰 명절로 잘 쇠였다. 그것은, 이맘때쯤이면 그해 농사일이 기본상에서 끝나고 작황도 기본상에서 결정이 나고 이른봄부터 비지땀을 흘리며 일해 온 농부들이 시름놓고 한쉼을 푹 쉴수있는 고비(시간대)기 때문이다. 천하지대본인 농사에서 이제 앞에 남은것은 가을과 타작뿐인데, 그해세월이 순풍세우였고 이제 앞으로도 천재지변만 없으면 올해 농사는 순리로 끝나는거다. 가을일도 무척 힘든일이긴 하지만 수확의 기쁨은 농부들만이 즐기는 락이다. 하지만, 그건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다. 추석전후의 한고비를, 대개 농력8월을 어슬렁8월 혹은 건들8월이라고 한다. 가을까지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기에 농부들은 호미며 보습을 씻어 걸어놓은후 슬슬 땔나무를 하고 선기슴(기음. 밭의 큰풀뽑기)을 하기도 하고 약초며 버섯이며 머루 다래 사냥도 한다. 바를 들일 피겻(피나무껍질)을 장만하기도 하고 보치(봇나무ㅡ짜작나무껍질.시관을 매장할때 관위와 주변을 둘러싸는데 주로 쓴다.)를 벗겨오기도 한다. 사실은 어슬렁8월이요 건들8월이요 하지만 농부의 일손은 그냥 있다. 참으로 무한한 농부의 일생이다… 조상님들께옵서 달이 횅창 밝은 8월15일을 추석명절로 결정한것이 언제고 또 왜서인지, 황제페하의 독단이신지 아니면 정치국상무위원회 집체결정인지는 모르겠으나, 당나라때에 벌써 한집식구들이 단란히 모여앉아 월병을 먹으며 달구경을 했다고 하니 추석은 퍽 오래 된 민속절이다. 근년에 와서 우리중국에서는 나라적으로 추석을 법적공휴일로 정하고 중화민족(56개 민족으로 구성되였음.)들이 추석을 더욱 잘 쇠고있다. 그런데, 쇠는 형식에서는 구성원 민족들마다 특점이 있다. 성묘는 다 하는 중차대한 행사이지만 즐기는 형식은 부동한 점이 많다. 긴단히 살펴봐도 한족들은 지금도 월병을 민법통칙마냥 지키며 꼭 먹는데, 안 먹겠다고 떼질쓰는 개구쟁이 한테도 기어이 한쪼각이라도 주둥이에 먹이고야 만다. 그래야 둥굴둥굴 잘 굴러나가고 집식구들이 흩어지는 일이 없이 단란히 뭉쳐 잘 산다고 믿는다. 그리고 달구경을 한다. 우리조선족은 형식이 꽤 많다. 농촌마을을 들여다 보면 재밋게, 알뜰히 추석을 쇠는것이 보인다. 힘든 농사일로 땀에 절어 시큼하고 누린내 나는, 흙물 풀물이 잔뜩 든 헌옷을 벗어팽개치고 깨끗히 때밀이를 한후 입쌀풀을 먹여 다린 흰바지 흰저고리를 쉬원히 입는다. 명절음식으로는 식량사정이 되는 집들에서는 곰물밴새(송편)를 하고 대부분 집들에서는 떡같은건 별로 못하고 소고기국에 이팝을 어쩌다가 맛있게 먹었다. 그것은 추석이면 소를 잡아먹는 풍습에 따라 마을추렴으로 몇달간 풀살을 잘올린 소를 잡기에 소고기맛을 보게되는 것이다. 인구당 석량중이 돌아가게되면 한칼 잘먹는 셈이되였다. 아이식구가 많은 집들에서는 분배몫이 많아 흐믓해 하였지만 아이가 없거나 한, 둘뿐인 집들에서는 찌뿌둥 해 하였다. 하지만, 아이가 많은 집들에서 한편으로 미안해 하면 “좋은걸 만나면 아이들이 더 먹는다.”고 하며 대범히 넘어갔다. “4청”과 “문혁”기간에는 자본주의 꼬리를 잘라버리는 투쟁과 수정주의와 사심을 뽑아버리는 투쟁을 점점 더 심도있게 진행하다보니 쇠고기는 물론이고 추석바심으로 먹던 올벼농사도 걷어치웠다. 웬간한 명절은 타파해 버리고 “네가지 낡은것”(破4舊즉 낡은사상 문화 풍속 습관)은 짓부셔 버렸다. 푸짐하게 먹을 형편도 아니건먼 근검소박을 해야한다고 웨쳤다. 아침후에는 성묘를 간다. 성묘때문에 추석이 생겼다고 사람들은 믿다싶히 하였다. 멀리서 하루 혹은 이삼일 품을 들여서라도 성묘를 했다. 나의 큰외삼촌은 궁둥이에 낫자루를 차고 피겻노끈망태기에 고구마술 한병, 입쌀구비(구운기름떡) 석장, 삶은닭알 세알, 마른명테 한개를 넣어 메고는 온하루 성묘를 다니였다. 어느해 추석땐가 내가 한번 외삼촌에게 로(증조)할아버지, 로할머니 산소에는 이젠 다니지 않아도 되지않는가고 말을 했다가 눈알이 쑥 빠지게 줄욕을 먹은일이 있다. 그것은, 외삼촌의 로할아버지, 로할머니 산소는 알미대산골치기(막바지)에 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는 갈매골 중구품(중간쯤)에 있었는데 두곳은 남북으로 30여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외삼촌이 너무 힘들어 해서 생각느라 걱정한것이 싱거운 짓거리로 돼서 줄욕을 벌어 얻어먹은 것이다. 그날, 외삼촌은 “조상을 모르는 새끼는 개새끼다!”하고 힘있게 론단을 내리고는 잠이들었다. 50도고구마술을 한병이나 다 마여가면서 힘든일을 하고나니 술기운도 올라오고 무척 지치기도 했든것이다. 그때가 외삼촌의 년세가 예순몇이였는데, 그의 두 아들은 갈매골까지는 따라가고 알미대는 나와 외삼촌이 성묘를 갔다. 두 아들녀석들은 아직은 어리여서, 그리고 마을청년들의 놀음을 구경하라고 외삼촌은 너그러운 배려를 베풀었든 것이다. 그때는 우리마을이 공사(향)에서는 제일 큰 대 부락으로 3개 생산대였다. 추석이면 남청장년들은 개인장끼로 씨름을 하고 처녀와 각시, 아주머니들은 그네를 시합했다. 또 남녀 배구 시합도 했다. 축구도 하고는 싶었지만 마당이 없어서 하지못하고 해마다 아쉬워 했다. 그네는 마을 복판에 있는 한구루의 큰 느티나무가 신통히도 남쪽으로 한줄기 굵은가지를 반공중에 뻗친것이, 거기에 굵은 바줄을 걸면 해마다 천연그네터가 되였다. 그런데, 배구는 로소불문 남녀가 다 구경할수 있었지만 씨름은 남자들만, 그네는 녀자들만 구경했다. 남자들이 그네를 구경하면, 그리고 녀자들이 씨름을 구경하면 작풍이 단정치 못한 “음특한 놈”이라고 내 놓고 욕했다. 우리 남자애또래들이 입을 짝 벌이고 야! 야! 경탄을 하면서 그네뛰는걸 정신없이 구경을 하면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요놈새끼덜이 저리로 바라가! 가서 씨름구경이나 해라.” 하면서 쫓았다. 녀자애들은 씨름구경을 하나도 하지않았다. 혹시 씨름판에 와서 멍해 서 있으면 “저리 가 놀아라. 응? 너도 이담 커서 씽! 씽! 그네를 뛔야지?”하며 얼려 보냈다. 개혁개방전에는 “남녀칠세부동석” (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봉건례교가 엄하게 살아있었다. 지금은 모두가 보다싶히 성해방인지 개방인지한것이 무척 되였다. 이 현상에 대해서 학자들이 갑론을박, 콩팥칡팥 매일 싸움질을 한다지만… 달은 제멋대로 가고있다. “사회에는 처녀가 희귀하고 부과장이상은 다 정부가 있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는가하면 심지어는 “모임에 부부동반으로 가면 낯이 깍기고 정부끼리 가면 자랑스럽다고 한다.”는 말까지도 있다. 지금은 성이 동물세계로 되였다는 험담까지도 있다. 추석은 개혁개방전까지는 주로 농촌에서 쇠는 소박한 민속절이 였다. 지금은 사회가 도시화를 하면서 시가지에서 오히려 더욱 굉장히, 요란스레 추석을 쇤다. 추석에서 가장 중차대한 행사인 성묘를 보면 농촌과 완연 다르다. 나는 한식과 추석이면 부모님 산소 성묘로 해마다 고향마을을 다녀오는데, 명절을 쇠는 풍습에 변화가 없었다. 코로난지 그놈안지 때문에 금년에는 애들은 그만두고 우리량주만 출동을 했다. 자가용은 내가 굴릴줄을 모르다 보니 택시를 썼는데, 편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꽤 되는것 같은데, 살펴보면 도시에서 하는 성묘는 농촌과 완전히 다르다. 우리고장에서 화장을 법으로 결정한후, 농촌에서 사는 상주는 불편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도시사람들은 간편해서 좋은데, 그 성묘형식도 점점 더 깜찍하게 간편하게 변화발전해 간다. 우선, 부보님의 골회를 납골당에 맡기고 해마다 “려관비”를 내면 대사필이다. 가토며 벌초를 할것이 없고 산소가 상할가봐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의 아버지가 밭머리에 있는 형님분의 산소때문에 늘 시름놓지못하며 근심하던일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된다. 밭갈이거나 후치질을 하는 사람이 데퉁스러운 사람이면 다다소소 산소를 후벼파거나 긁어놓기도 하고 소가 짓밟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산소를 자주 돌보군 했는데, 어느해는 산소가 험하게 파손이 되여 후치질을 한 사람을 찿아가서 “야, 이 쌍눔의 새끼! 상세난 사람의 산소를 이렇게 괄시허는 법이 어데있니?! 망할눔이 새끼! 니눔새끼 이제 바로 뒈지나 봐라!”하며 말끝마다 눔새끼를 붙혀가며 된줄욕을 퍼부우며 싸우기까지 했다. 데퉁박이는 제가 지은죄가 있기에 찍소리 한마디도 못하고 부지런히 파손을 손질하는 것으로 립공속죄를 하며 사과를 표시했다. 아버지는 이듬해 한식을 기다려 면례(이장)를 했다 도시사람들의 성묘에서 제사인사법이 지금은 대체로 네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골회함을 가져다가 고인의 띠를 찿아 모시기도 하고 영정사진만 모시기도 하며 제사소물을 푸짐하게 진설하고 인사를 한후 음복을 하게 한다. 조금지난후 골회함을 들어다가 납골당에 모시면 성묘는 끝났다. 공동묘지에서 거액의 돈으로 집을(묘자리) 가진 고인의 성묘도 앞과 같다. 두번째 형식은 꽃 한송이를 살랑 들고가서 납골당 골회함 곁에 놓고 경례를 하고 성묘가 끝나는 것이다. 간단명료하고 수월해서 이 형식이 점점 더 선호를 받는다고 한다. 그다음 또 한가지형식으로는 골회를 어데다 가만히(들키면 큰코를 친다.)매장을 했거나 강물에 뿌린 경우인데, 그 장소로 가서 제례인사를 하는것이다. 이 형식은 점점 더 소실되여 간다고 한다. 네번째로는 저녘후 대거리 십자가든 소골목 십자가든 자기에게 편한곳으로 가서 종이돈을 마음내키는 대로 태우는 것이다. 이 성묘형식이 지금 대단한 인기를 받고 있다고 하는데, 소방, 위생, 등 부문에서 두통이 나 한다고 한다. 이상의 네가지형식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고인에게 구구절절, 간절한, 충심으로부터의 부탁이 둥덩산보다도 더 높고, 크고, 많다는것이다. 부탁에는 수백가지 조목들이 있는데, 귀납해 보면 딱 한가지다. 즉 “잘 되게 하여 주소서!”이다. 병이 떨어지게 하여 주소서, 아이가 대학에 가게 하여 주소서, 남편의 바람을 막아 주소서… 도둑놈이 쉬가 잘붙게 하여 주소서, 부정부패서기, 시장이 모가지가 무사하게 하여 주소서… 별 희한한게 다 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풍속과 습관은 변하며 그 내용물에 따라 적절한 형식이 있게 되는데 그것인즉 곧 풍속과 습관의 주류형식이 된다. 내용과 형식이 맞지않으면   “형식주의”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런것은 싫어하며 반대한다. 일반적으로 풍속 습관에서의 “형식주의”는 제창할건 아니지만 큰 위해를 끼치는건 아니다. 그러나 령도의 “형식주의”는 민생을 해치고 나라를 망친다. 대약진후기에 우리마을 어느생산대에서는 생산대 대장과 대대서기가 짜고들어 대장은 입당을 하기위하여, 서기는 선진인물이 되기위하여 알곡산량을 잔뜩 불어대고 수확고의 대부분을 여량으로 국가에 바치였다. 그래서 대장과 서기는 정말로 소원성취를 하였다. 하지만 그 생산대의 사원들은 밭갈이철부터 반소량(통강냉이, 강냉이가루, 수수쌀 등 잡곡을 량잠으로부터 꿔다 먹는것. 갚을때는 정곡으로 갚는다.)을 먹으며 생고생을 했다. 어느곳에서는 시장은 반대를 하는데 서기가 우겨대서 련거퍼 몇년을 몇가지 슬로건을 내걸고 그야말로 말그대로 열심히, 굉장히 축제를 하였다. 축제를 미끼로 “초상인자"(招商引資)를 한다고 서기씨는 우겨댔지만 번마다 공돈을 팔며 밑지는 짓거리로 되고 말았다. 백성들은 내놓고 수천만원의 돈이 아깝다는둥 먹는놈은 배가 터지게 잘 처먹었을 것이라는둥… 말이 많았다. 축제는 몇년후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쯤에서 이 엉뚱한 “형식주의”가 사라져서 민분은 가라앉아 다행이라 하겠으나 다음의 “형식주의”는 생각하면 답답한 일이다. 어느곳에서 “홍수방어전승리기념비”를 굉장히 크게 만들었는데, 홍수때 이곳 령도가 3ㅡ4일 달아다니며 고생한건 사실이다. 그러나 홍수는 다행히도 선인들이 이름한자 남기지 않고, 기념으로 돌 한개 새우지 않고 만들어 놓은 제방에 막혀 물러갔다. 그런 번연한 사실을 기념비는 이번에 각급령도들이 잘 해서 홍수를 끝내 물리쳤다고 기념문을 만들어 기념비에 새겨 넣었다. 각급령도를 내걸고 기실은 자기의 공덕비를 새운것이다. 이런 황당한 “형식주의”는 왜서 발생했는가… 어떻게 수습해야 할것인가…                                                                                                                           20.10
157    찌그러진 기와집 댓글:  조회:183  추천:0  2020-09-11
         중편실화소설                                                찌그러진 기와집 (신생)                                                                                                                      회령     나는 8월 중순께 초평향에 가 보기로 작심하였다.    그 곳은 나의 청춘이 죽은 곳이며 나의 인생이 바뀌게 한 곳이다. 그 고장에 가 보기로 결심하기까지는 심각한 고민이 여러번 있었다.      63년 여름 나는 대학 정치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초평공사(향) 공청단 서기로 현당위 조직부의 특별한 배치를 받았다. 그때, 국가에서는 우리를 중학교 선생으로 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런데 내가 공사공청단위 서기 벼슬자리에 배치를 받게 된 것은 대학시절에 벌써 입당을 하였고 학습을 잘 했고 품행이 단정했고 신체가 건장하고 재질이 총명했기에, 이를테면 덕, 지, 체가 전면적으로 발전한 청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당에서는 배양전도가 있다고 본 것 같다.    초평공사는 두만강변에 자리잡은 궁벽한 산골이였다. 손바닥만한 논밭뙈기 몇개는 두만강 버들방천 안쪽으로 있고 나머지는 모두 한전인데 골짜기 바닥과 산기슭에 널려 있었다. 다섯개의 산줄기는 두만강으로 내리 뻗치다가 멈췄는데 그 끝마다 마을이 앉아서 다섯개의 대대(촌)가 되였다. 매개 대대는 골짜기로 들어가면서 두세개씩 혹은 서너개씩 자연툰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마다 이름은 있었지만 그때는 아무대대 1대, 2대(생산대. 지금의 촌민소조.)하고 불렀다. 다섯갈래의 골짜기는 서로 비슷했는데 넓고 깊었다. 골짜기 마다 꽤 큰 냇물이 흘렀다 제일 크고 경치가 좋은 골짜기로는 초평대대가 차지하고 있는 소금강골짜기였다. 조선의 금강산처럼 아름답지만 작다고 해서 소금강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구불구불 내리 뻗은 량옆 산줄기에는 벼랑과 기암괴석이 송백과 함께 무척 많았다. 단풍나무, 머루, 다래, 알구배, 찔구배, 돌배, 도라지, 함박꽃, 개나리, 찔레꽃, 천지꽃과 개살구가 제철을 맞아 만개할 때는 그 풍경이 그야말로 그림처럼 화려했다.    초평공사는 한갈래의 신작로와 한갈래의 전화선으로 바깥세상과 통하였다. 량옆에 있는 린접 공사와는 7, 80리 사이고 현성과는 100여린데 날씨가 순탄하면 하루에 한번씩 뻐스가 왔다갔다. 전기가 없어서 두달에 한번 오는 농촌순회방영대는 저들이 가지고 온 찌프차 한쪽 뒤바퀴를 빼고 무슨 장치를 한후 전기를 내서는 영화를 보여주었다.    이곳에서는 제일 큰 마을인 초평대대는 공사소재지였다. 거기에는 공사위원회(향정부) 초중학교 소학교 공급판매합작사(공소사. 상점.) 위생원(병원) 량잠, 림산작업소, 파출소, 우정국 등 단위들이 있었는데 벼짚이나 조짚으로 이영을 한 흙집들이 였다.(향정부와 학교 공소사는 토피집이였다.) 전 공사의 모든 집들은 초가집들인데 쇠여빠지는 버들버섯 같이 방정한 집이란 한채도 없는것 같았다. 그런데 초평대대에서 사무실로 쓰고 있는 집만은 8간기와집으로 공사에서 유일한 기와집이 였다. 40년이 거이 되는 집이다보니 헐망하긴 했으나 그래도 기본상 온전한 편이였다. 이 집은 현성에서 살던 지주의 마름이 살던집인데 마름은 광복이 터지자 지주와 함께 남조선으로 도망을 갔다. 집은 마을의 공회당, 구공소(구정부), 촌공소, 초, 고급사 사무실, 집체식당 등을 거치며 력사적 공헌을 하다가 다시 대대사무실로 되였다.    산골사람들은 대체로 순박하고 말머리가 무겁고 듬직한 반면에 생기발랄함이 부족하다. 여기 사람들도 그랬다. 특히 10여년을 집체화 틀 속에 같히워 습관되고 살다보니, 그것도 점점 더 가난해만 가는 세월속에서 살다보니 사람들은 수심만 깊어가고 의욕은 없이 자기를 잊고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수동적이 되여버렸다 한마디로 초평공사는 편벽하고 가난하고 또 몹시 적막한 곳이였다. 마을은 20여개가 되였으나 인구는 겨우 3000여명 밖에 안되였다.      현당위 조직부장과 현공청단위 서기는 나와 담화할 때 간고한 곳일수록 단련과 성장에 아주 유리하다고 하면서 사업을 적극적으로 잘 하라고 고무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사업을 잘하면 광명한 앞길이 열린다고 하였다. 벼슬길에 오른 사람치고 승급을 꿈꾸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그때의 나의 머리 속에는 당과 모주석의 은덕에, 국가와 인민의 기대에 보답하여야 한다는 사상과 결심만 꽉 차 있었다. 그때의 나는 참으로 순결하고 단순하였다.    초평공사보다도 더 궁벽한 두메산골에서 자란 나는 확실히 당과 모주석의 은덕과 나라와 인민의 배려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초, 고중과 대학을 국가조학금을 받았기에  공부를 할 수 있었고 대학에서 병으로 몹시 앓을 때 국가의 보조를 크게 받았다. 그리고 부모님과 형님내외의 지극한 정성과 회생을 잊을 수 없다. 나도 물론 많이 분투를 했다. 초중때는 여름방학이면 약뿌리를 캐고 목이버섯(무얼)을 뜯어말리워 공소사에 팔았다. 겨울방학에는 햇싸리나무를 해서 공소사에 근을 떠서 팔았다. 나라에서는 싸리나무를 사다가 배광주리거나 공정판에서 쓰는 툴란재 (흙광주리)를 만든다고 했는데 싸리나무 수요가 많았다. 우리 또래들은 그런 부업을 해서는 학비에 보탰다. 고중과 대학시절에는 여름방학, 겨울방학을 시내에서 품팔이를 하였다.    나는 당의 교시대로 가장 간고한 곳으로,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가서 사업을 잘하는 것으로 하늘 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당과 국가와 인민, 그리고 부모형제의 이 모든 은덕에 보답하리라 마음속에 굳게 다지고 있었다.    그때도 극히 개별적이 였지만 비밀리에 뒤문거래를 하는 현상이 있었다. 만약 내가 조금만 “활동”을 하면 모교에 분배 받거나 큰도시에 분배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도와 주겠다고 자청하는 처녀도 몇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포부와 결심은 동요가 없었다. 나는 뒤문거래를 비렬한 행위로 보며 경멸하였다.      내가 초평공사당위 서기 남명덕의 사무실에 들어서니 남서기 외에 또 한명의 중년남자가 있었다. 남서기는 나를 한번 힐끔 쏘아보고는 머리를 돌리고 표표히 않아 담배를 피웠다. 그와는 반대로 중년남자는 일어나서 따뜻하게 악수를 하여주고 당위 부서기 겸 조직위원 김응수라고 자기소개까지 하였다. 그는 공사공청단위 서기가 없어서 자기가 대신 맡았댔는데 참 잘되였다며 무척 반가워 하였다.   “그럼 얘기를 하오.”    남서기는 성난 사람처럼 뱉아던지 듯 차겁게 한마디를 하고는 쥉쥉 나가버렸다. 감때 사납고 표독스럽다는 인상이 들었다. 김응수는 너그럽고 인자한 사람이라는 것이 첫눈에 환히 알리였다.    그는 나에게 가정형편이며 친척이며 나의 경력을 자세히 물었다. 그리고 우리 집이 있는 삼도구공사 정황에 대해서도 이것 저것 여러면으로 묻다가 나중에는 애인이 있는가고 묻기까지 하였다. 이어 김응수는 자기경력을 자세히 들려준후 공사간부들로부터 각 단위들과 대대, 생산대에 이르기 까지 전 공사의 일반정황을 손금보 듯 환하게 소개하여주었다.    그는 공사의 청년단사업을 어떻게 잘 할 것인가에 대하여 나와 진지하게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공사의 여러가지 사업들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아가며 조리 있게 설명해 주었다. 하여 나는 공사의 사업에 대하여 대체적인 륜곽과 체계를 잡을 수 있었다. 김응수의 담화는 나에게 선생님의 가르침 같았다.      베는 석자라도 틀은 틀대로라고 공사는 보잘것 없었지만 부서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공사에는 부련회라는 부서도 있었는데 주임은 리련옥이였다.    련옥이는 현성에서 나서 자란 시가지 사람으로 고중졸업생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현법원의 원장이고 어머니는 현당위판공실 주임이였다. 련옥이는 대학시험에서 미끌어진 후 집에서 놀다가 현병원 호리원(청소공)으로 취직을 했는데 얼마후에는 초평공사 부련회주임으로 왔다. 그는 이미 결혼을 하였으나 아직 아이는 없었다. 남편은 군인으로 패장이라고 했는데 대련에서 근무한다고 하였다. 련옥이는 이 곳으로 나보다 두달 남짓 먼저 왔었다. 그는 탄력있는 맞춤한 키꼴에 해사하게 생겼는데 잘 웃고 잘 떠들고 노래와 춤을 잘하고 멋을 부리기 좋아 했다. 말은 청산류수고 문장도 괜찮게 썼다. 술도 마시고 우스개로 담배도 두어모금 빨고는 캑캑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그럴 때면 김응수를 비롯하여 나이가 지긋한 공사간부들은 얼굴을 돌리며 찌프리였다. 련옥이가 과분하게 우스개를 피울 때면 같은 청년세대인 나는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공사간부들 중에서 무장부 문부장만은 련옥이와 희닥질을 하며 장난을 하였는데 그럴 때면 남명덕은 눈귀에 잔주름을 지으며 재미있어하였다. 그때는 부드럽고 정이 가득한 눈길로 련옥이를 바라보며 “천생 부녀주임감이야!”하고 칭찬을 하였다. 련옥이는 입당적극분자 였다. 맨 남자들 뿐인 공사간부들 속에서 련옥이는 말그대로 생기가 넘치는 일점홍이였다.      나는 사업을 패기 있게 본때스레 밀고 나갔다. 나에게는 전승못할 난관이 없었다. 정확한 사상과 왕성한 혈기, 포만한 정열과 지혜, 굳센 의지는 사업효률과 성과를 높여주었다.    당위 서기 남명덕은 나에게 완성불가능의 하향사업임무를 줄 때가 많았다. 례하면 어느대대의 모내기를 5월 중순 전으로(5월 하순에 시작 함) 끝내라 하거나 세벌김을 반달 혹은 지어는 한달 앞당겨 끝내라고 명령하였다. 더욱 한심한 것은 사원들의 민식이 겉곡으로 200근도 않되는데 여량을 몇톤 바치게 하라는 것이였다. 식량이 떨어지면 반소량(량잠에서 꿔다 먹는것)을 먹게 할 것이니 여량임무를 견결히 완성하라고 하였다. 남명덕이 나에게 일을 시키는 본때는 팥쥐에미 배씨가 콩쥐에게 일을 시키는 것과 꼭 같았다.    남명덕은 너무도 감때 사납고 표독해서 공사내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현내외에서도 널리 “왜놈십장”, “일본감독”, “토비”, “남패천”(해남도에서 유명했던 악패토호) 이라고 조명이 났다. 산골사람들이 보기에는 높은 어른인 공사당위 서기에게 이런 심각한 별호가 붙은 데는 유래가 있었다. 내가 들은 몇가지만 보더라도 별명이 과분하지 않았다. 남명덕은 농망기면 일하러 나가지 않은 사원이 있나 해서 마을을 검사하는 작법을 잘 썼는데 한번은 벼모철에 앓아 누운 사람을 강박적으로 살얼음이 낀 논밭으로 내 몰아 그날 오후 병이 도져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멱살을 쥐여흔들거나 줄욕을 퍼 붓는 건 보통일사라고 했다. 지어는 사람을 때리기까지도 했는데. 한 농민은 귀통을 맞은 것이 그쪽 고막이 터져 귀머거리가 되였다고 한다. 그 뿐이 아니다. 현에서 령도가 오니 생산대의 소를 잡아 불고기를 해 먹인 일, (역축도살을 절대 금지할 때임.) 공소사에서 일을 잘하고 있는 녀직원을 쫓아내고 아들 남철이를 대신 넣은 일, 그외에 남녀간의 시시껄렁한 말도 있었다. 남명덕에게는 민분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현의 령도에서는 그를 “혁명적극성이 높고 사업열정이 높고 손탁이 드세다.”고 하였다. 남명덕의 조폭한 공작방법과 실제를 탈리하는 지시를 제때에 두루 무마해 주거나 조절해 주는 사람은 김응수였다. 남명덕은 김응수가 곁에 있음으로 해서 좋은 소리를 들으며 서기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지만 김응수를 “우경”이라면서 늘 아니꼽게 보았다. 남명덕의 횡포에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은 젊은 패기가 끓어넘치는 나였다. 나는 남명덕에게 빌붙어 굽실거릴 필요도 없었거니와 공사의 사업을 놓고 누구와 흥정할 필요도 없었다. 당의 사업, 인민의 사업을 잘하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바였다. 남명덕과의 몇차례 충돌에서 내가 그의 체면을 전혀 고려치 않은데서 그는 나를 아주 괘씸해 하였다. 김응수의 조률도 별로 작용이 없었다. 나는 물론 대수롭지 않았다.      64년 5월, 내가 모범단서기가 되여 성에서 열린 표창대회에 갔다 와서 며칠후다. 그날 우리 공사간부 10여명은 남명덕의 아들 남철의 잔치술을 먹고 밤 늦게야 헤여졌다.(파혼이니 뭐니하다가 약혼녀가 배가 불러와서 급급히 결혼등기를 하고 잔치를 했다.)    칠흑 같이 캄캄한 밖으로 나오니 시원하고 신선한 대기에 기분은 무척 상쾌했다. 나는 봉선이가 몹시 보고싶었지만 밤도 깊었고  술까지 마셧기에 단념하고 하숙집으로 향하였다.    봉선이도 작년여름에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 초중에 배치를 받았다. 그도 집은 나처럼 외지에 있었는데 궁벽한 산골의 가난한 집에서 큰딸로 태여났다. 봉선이는 인물, 체격, 총명, 품성… 말하자면 덕, 지, 체, 그 어느 것 한가지도 나무랄 데가 없는 훌륭한 처녀였다. 하지만 가정성분이 부농이여서(실제는 자작을 하는 중농이였다.) 여기 두메산골 초중으로로 배치를 받은 것이다.    작년 늦가을에 나와 봉선이는 김응수내외의 “전술”에 걸려 첯만남을 한후 자연스레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우리는 사랑한다느니, 좋아한다느니 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만나면 포옹과 키스는 사양치 않았다. 그러나 성의 계선은 엄격히 지켰다. 그것은 결혼식을 올린 다음의 절차로서, 그 순서를 위반하는 것은 저렬하고 수치스러운 도덕적, 법적으로 착오적 행위라고 인정하였다. 나와 봉선이는 금년 국경절에 간단히 결혼식을 하자고 약속하였다.    내가 기분좋게 스적스적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등뒤로부터 나의 가슴을 꽉 끌어안았다. 나는 기절초풍 놀라면서도 잔등에 뭉클하는 젖가슴을 느껴였다.    “조서기, 우리 집으로 가자 응!”    련옥의 뜨거운 입술이 나의 볼에서 화끈거렸다.    “아니, 이러지 마오!”    나는 다급히 그의 손을 풀면서 주위를 살펴 보았다. 다행이 아무도 없었다.    “쥐도 새도 모름다.”    련옥이는 속삭이며 나의 아래를 움켜 쥐였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힘이 뻗쳐 있었다. 나는 련옥이를 꼭 끌어안았다.    련옥의 하숙집은 정말 비여있었다. 우리는 불덩이가 되여버렸다. 련옥이는 련속 신음을 토하다가도 나의 가슴팍이며 등허리를 꼬집으며 쥐도 새도 모르게 이러자고 하였다. 봉선이와 결혼한 후에도 자기를 잊으면 안된다며 거듭 꼬집었다. 우리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살자고 굳게 약속을 하였다.    귀신이 곡할 일이 였다. 사상, 감정, 품행이 건강하던 내가 련옥의 사탕폭탄 한방에 순간에 무너질 줄이야?! 성의 유혹을 이기는 힘은 따로 있는 건가?... 나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얼마후 나와 봉선의 38선도 허물어지고 말았다.      나는 뻔뻔스러운 이중인격자가 되고 말았다. 능청스러운 위군자로 타락한 나는 은근히 지금의 성생활에 대하여 만족감과 행복감까지 느끼였다. 지금은 오히려 내가 주동적이 였다. 나는 봉선의 앞에서는 인간이였으나 련옥의 앞에서는 짐승이였다.      8월의 어느날 점심때다. 련옥이가 자기사무실로 오라고 나에게 눈치를 하였다. 우리는 이미 여러번 거기서 만났었다.    공사간부들은 사업시간이란 게 따로 없었다. 임무가 있으면 낮이건 밤이건 몰두하여 사업하고 일이 없을 때는 자유자재였다. 대부분 사업은 기층에 내려가서 해야 하는 것이기에 늘 하향을 했고 공사건물은 항상 비여있었다. 늙은 문서가 집을 지키고 있긴 했으나 그는 점심시간이면 기껏 늑장을 부리며 자기 집에 있었다. 공사건물은 초평마을에서 퍼그나 떨어져 산기슭에 우두커니 있었다.    11시가 좀 지나서 나는 련옥의 사무실로 갔다. 문은 열려져 있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 련옥이가 왔는데 왜서인지 다른 때와는 달리 긴장해 하고 불안해 하는 것 같았다. 련옥이는 서랍에서 사무용지도 꺼내고 또 만년필도 찿으며 서성거렸다. 나는 더 참을 수 없어서 문을 잠그고 련옥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런데, 련옥이가 놓으라고 소리소리 악을 쓰며 나를 밀치는 게 아닌가?! 내가 마구 우격다짐을 쓰는데 “탕! 탕! 탕!”하고 누가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나는 선자리에서 굳어지고 련옥이는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가버렸다.    활짝 열린 문앞에는 쇠꼬챙이 처럼 깡마르고 표독스러운 남명덕이 뱀눈알 같이 독살스럽고 차거운 눈길로 나를 쏘아보고 그 옆에는 덜썽 키가 큰 문부장이 기세 등등해서 서 있었다.   “너! 여기 꼼짝말구 서 있어라. 가서 응수를 오라구 해!”    남명덕은 문부장께 소리를 치고는 쥉쥉 자기사무실로 가서 파출소의 한소장을 당장 오라고 전화를 하였다.    련옥의 사무실로 김응수와 한소장이 선후로 들어선 후 잇따라 련옥이도 문부장과 함께 들어왔다.    “야! 사실대로 말해라. 한소장! 제대로 쓰오.”    남명덕은 노기등등해서 소리쳤다. 부들부들 떨고 선 나의 눈앞에는 남명덕의 날카로운 눈길이 보이는 듯 했고 전신에 소름이 끼치였다. 동시에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사태에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요?!”    김응수가 걸상을 주며 나의 어깨를 두드리였다.    “무슨 일인지, 사실대로 솔직히 말하오.”    김응수가 다시 한번 재촉하자 떨리던 가슴이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고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렇다! 이지경에서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사실대로 솔직히 말하자. 다 말하자. 나는 일체를 단념하고 전후사를 말하기 시작했다. 련옥이와 바람난 그날밤으로부터 오늘 련옥의 신호, 그리고 우격다짐, 탕! 탕! 탕!에 이르기까지를 그대로 다 말하였다.    “련옥이! 말해보오.”    남명덕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아닙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내가 재료를 쓰려고 하는데 제가 마구 덮쳐들고서는! 응응응…”    련옥이는 집이 깨지게 악청으로 웨치고는 울음보를 터뜨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처음으로 머리를 쳐들고 련옥이를 멍해서 바라 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나쁜 놈새끼! 한소장! 저새끼를 공안국에 잡아가오!!    남명덕은 나를 손가락질 하며 새된목소리로 소리를 꽥 질렀다.    “이렇게 하기오. 사실을 자세히 서면상으로 쓰오. 래일 오전까지 철저하게 몽땅 쓰오. 11시에 남서기한테로 가져오오. 그리고 오늘 이 일을 지금은 절대비밀로 합시다.”    김응수가 말하자 한소장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오!”    남명덕은 벌컥 일어서며 외마디 소리를 꽥 지르고는 나가버렸다.    내가 사무실에서 멍하니 앉아서 방금 있은 일을 두서 없이 생각하고 있는데 김응수가 들어왔다.    “창락이! 거, 무슨 그런짓을 사람이 하오?! 정말 천만 뜻밖이오… 원! 창락이가 그럴줄은… 정말 꿈에두 생각 못했소! 원, 사람이… 검사실 그대로 자세히 쓰오. 두부를 써서 한부는 남서기를 주구 한부는 나를 주오. 아마두 일이 복잡할 것 같소.”    그는 부시럭 부시럭 담배를 말더니 나를 주고 다시 자기 것을 말았다. 나는 비로서 더없는 수치를 느끼며 죽고싶도록 뼈저리게 후회가 되였다 이거, 무슨 꼬락서닌가?! 내가 이렇게 끝장을 보다니… 나는 책상에 엎드렸다. 더는 머리를 들 용기가 없었다.    “후ㅡ 창락이! 내말을 잘 듣소. 사람은 누구나 다 착오를 범할 수 있소. 하지만 이건 참으로 수치스러운 착오요. 봉선에게는 뭐라고 하겠소!... 창락이! 지금 창락이가 해야 할 일은 착오를 철저히 검사하고 조직의 처리를 성근히 접수하고 고치는 것이요. 그리고 맡겨주는 사업을 잘하면 되오. 고치면 여전히 좋은 동지지. 저녘은 우리 집에 와서 먹소..”      이튿날 오전 검사서를 남명덕에게 가져가니 그는 “거기 앉아라.”하고는 검사서를 보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누가 보던지 이걸 보면 련옥이가 나쁜 사람이지. 이걸 알면 그의 남편이 가만 있겠는가! 견결히 리혼하자구 할텐데, 군혼파괴죄가 얼마나 큰지 아니? 총살이다 총살! 다른 것은 싹 없애고 어제 일만 써라. 련옥이가 보자했다구 하지말고 네가 뛰여들었다구 하구… 어제 일만 련옥의 말대로 써라. 군혼파괴죄에 걸리지 말고… 련옥이가 무사해야 너도 사는 거다. 그리고 검사서라 하지 말고 탄백교대서라고  해라. 아니, 탄백서라 해라. 가!”    그날 오후에 나는 탄백서를 남명덕의 앞에 바치였다. 생각해보니 남명덕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서로 좋아서 바람을 쓴 작풍문제든 강간미수든 나는 이젠 볼장을 다 본 끝장이 난 사람이지만 련옥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나의 말 한마디에 청백한 련옥이로 될수도 있고 난질이 버릇으로 된 더러운 화냥년 련옥이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남명덕의 말대로 련옥이를 보호해 주리라 마음을 결정하였다.    남명덕은 탄백서를 본후 “됐다.”하고는 나와 봉선의 관계를 자세히 따지였다. 나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다. 나의 말을 듣고 난후 그는 말하기를 결혼등기도 하지 않고 동품부터 한것은 순전한 류망행위라고 하였다. 나는 승인한다고 대답하였다.      9월초 나는 강간미수죄와 류망죄로 현공안국에 잡혀 갔고 두달후에는 군혼파괴, 강간미수, 류망죄로 16년 도형을 받고 감옥으로 갔다.    내가 미결수로 두달이나 있게 된 것은 김응수가 강간미수죄를 부인하는 재료를 법원에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명덕과 한소장이 나의 류망죄를 더 찿느라고 심입된 조사를 하다보니 시간이 걸렸다. 법원에서 나를 반복적으로 심문할 때 나는 이런 것들을 알게 되였다. 김응수가 제공한 재료에 대해서 나는 그건 내가 처음에 한 거짓말이라고 “탄백”하였다. 심문과정에서 나는 초평공사의 적지 않은 각시들과 처녀들이 나로 인해서 모욕적인 질문과 조사를 받았다는 것을 눈치챘고 알게 되였다. 어떤 처녀들은 부인과검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한 처녀는 처녀막이 파손되여 끝내 동반자를 실토하기까지 하였다고 했다. 나는 더없이 미안했고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아무일도 없이 무사할 줄 알았던 련옥이가 그간 어째서 리혼을 당했는지… 이상했다. 감옥으로 가면서 나는 봉선에게 천만번 사죄하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우리의 약혼을 없던 일로 하자고 편지를 보냈다. 김응수에게도 미안하다고 간단히 편지를 했다. 편지는 고마운 간수가 꼭 전해주겠다고 하였다.      감옥에 간 이듬해 늦은 봄, 그러니까 65년도 6월이다. 나는 뜻밖에도 봉선이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사연은 간단했다.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과 기다릴 거라는 내용인데 편지지는 여러군데가 잉크가 피고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력력하였다. 봉선이는 편지를 쓰면서 피눈물을 흘린 것이다!... 나는 편지를 쥐고 반나절을 흐느꼈다… 나는 감방의 손바닥만한 뙤창문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개조에 힘껏 노력하리라 결심하였다.    67년도 가을 봉선이 한테서 두번째로 편지가 왔다. 사연은 간단했다. 아들애가 죽었다는 소식과 멀리 시집을 간다는 것이 전부였다. 편지지는 여러군데가 잉크가 피고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력력하였다. 봉선이는 편지를 쓰면서 피눈물을 흘린 것이다!... 나는 편지를 쥐고 반나절을 흐느꼈다… 나는 감방의 손바닥만한 뙤창문으로 푸른하늘을 바라보며 인생의 허무함에 실망하였다.      80년9월, 나는 만기석방으로 원적지인 삼도구향 립봉촌 갈매골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이 꼬락서니를 해 가지고 고향으로 간다는 건 죽기보다도 싫었다. 그러나 무슨 방법이 있는가?! 갈 곳도 없었거니와 반드시 원적지로 가야 한다고 하니. 그리고 계급투쟁을 잘해야 한다고 하였다. 출옥할 때 감옥의 령도들은 신생을 축하한다고 하였지만 나는 기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립봉에서 뻐스를 내린 나는 괴나리봇짐을 메고 골짜기 수레길을 따라 허정허정 걸었다. 길 옆 쑥밭에서는 풀벌레가 시들해서 가끔 울고 산새가 두어마디 호젓한 울음을 울었다. 산굽이를 돌아 작으마한 언덕에 오르니 저 멀리로 갈매골 고향마을이 보이였다. 나는 길 옆 바위에 걸터앉아 고향마을을 바라 보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이대로 어디론가 가 버리고 싶었다. 아니, 이대로 여기서 죽고싶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10여호 밖에 안되는 마을은 폴싹 퇴락하여 페허같이 괴괴하였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형님네 집을 향해 주섬주섬 다가갔다. 마당에서 무얼하고 있던 형님이 자취소리를 들었는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달려나왔다.  우리는 부등켜 안고 엉엉 울었다. 20년세월! 우리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감옥에 가서 얼마후 형님께 편지를 써서 그간의 사실을 알린 후 또 다른 감옥으로 가게 되니 회답을 하지 말며 구태여 찿느라고도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주소를 안대도 그 먼 곳을 면회 올 경비도 없겠거니와 이 꼬라지를 봐선 또 뭘하겠는가?... 소식이 없으면 무사한 줄로 서로 알자고 형님께 약속을 했다. 우리가 흐느끼며 컥컥거리는 소리를 듣고 형수님이 달려나왔다.    집은 초가삼간 옛집 그대로나 이젠 거이 허물어지는 낡은 집이 되였다. 그간 나 때문에 소경이 되였든 아버지는 몇년 전에 서산으로 가고 어머니는 풍을 맞아 운신을 못하고 누워 있었다. 형님내외도 많이 늙었다. 초중을 졸업한 큰 조카는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래로 남자애와 녀자애 두 조카는 학교로 다니며 말며 한다고 하였다.    쇠똥을 섞어바른 흙냄새와 된장찌개냄새, 퀴퀴하고 지린 어머니 냄새까지 진하게 풍기는 집안에서 여섯 식솔이 비좁게 사는데 지금 구지지 한 나까지 끼여들었다. 집에 온 후 나는 웃방에서 두 조카애와 함께 어머니 곁에서 새우잠을 잤다. 우리는 모두 주접이 든 몰골에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 사실은 할말도 별로 없었다. 감옥에서 갓 나온 나는 집식구들에게 무거운 정치보따리로 되였다. 며칠후 나는 삼도구 파출소에 가서 등록하고 립봉대대 치보주임한테도 가서 보고를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형님네도 다르지 않았다. 감자에 강냉이, 보리쌀을 밑불개로 하고 좁쌀을 좀 넣은 밥은 괜찮은 끼니였다. 이런 밥을 하루 두끼 혹은 세끼를 이어댈 수 있으면 그것은 아주 다행이였다. 해마다 그렇지 못하다 보니 반소량을 먹는데 그건 정말로 입에 풀칠하기 였다. 반소량을 미처 이어대지 못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그야말로 말 그대로 돼지도 먹기 싫어하는 푸대죽을 사람이니 먹었다는 것이 였다. 집체는 해마다 내리막 재주만 하다보니 소위 1년총결 결산분배라는걸 하긴 하였으나 그건 빚문서 장부총결이였다. 아무개네는 빚이 얼마고 아무개네는 얼만데 묵은 빚이 얼마고 금년 빚이 얼마고 합계 얼마다. 이런 총결이였다. 사람들은 닭마리를 팔고 약뿌리나 나무짐을 해서 소금이며 등잔불 석유를 삿다. 아무리 “자본주의 꼬리를 끊어 버리고 싹을 없앤다!”고 하였지만 마을사람들은 슬금슬금 서로 덮어주며 이런 부업을 하였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였지만 갈매골의 생활에는 변한 것이 없었다. 아니, 점점 더 빈궁에로 변해갔다. 살길이 막막한 이세상, 숨막히고 암담하기만 했다.      두루 10여일이 지났다. 나는 생산대장과 의논하고 방목장 일을 맡았다. 방목장은 마을에서 골안으로 10여리 더 들어가 있었다. 이름은 듣기 좋게 목장이지만 거기에는 움막 하나, 송아지 네마리, 페우가 두마리 있었을 뿐이다. 페우는 풀살이나 올려서 잡아먹거나 이웃 생산대와 벼를 바꾸었다.    앞뒤로 가파로운 높은 산이 둘러 있고 동서로는 갈매골이 길게 뚫렸으나 골짜기가 이리저리 구불구불하다보니 결국은 역시 높은 산이 막아섰다. 움막 앞으로는 벽계수가 솰솰 쉼없이 흘렀다. 이따금 산새가 외롭게 한두마디 울고는 사라졌다. 풀벌레도 울며 말며 시들한데 목장은 고즈넉 잠잠하였다. 이런 것을 적막강산이라 할것이다. 밤이면 가까이에서 혹은 먼 곳에서 부엉이가 몇마디 울었다. 다만 소쩍새만은 무슨 사연이 그리도 슬픈지 장밤 쉬지않고 울었다. 정말로 목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우는 건가. 소쩍새의 울음은 참으로 구슬펐다. 한달 거이 지나니 차츰 목장에 습관이 되였다.    “생”이란 무엇인가? 감옥 령도들은 “신생”이 어쩌구 “전도”가 어쩌구 “노력분투”니 “발전”, “성공”이 어쩌구 저쩌구 하며 수다를 떨었지만 나는 언녕 회망이며 욕망을 포기한지 오랜 사람이 였다. 나와 소는 모양이 다를 뿐 같은 신세였다. 소는 나의 유일한 동무였다. 소들과 함께 여기 저기를 방목 다닐 때면 지금 내가 소를 방목하는 건지 소가 나를 방목하는 건지 얼떨떨하기도 했다. 비트적 비트적 겨우 걸으며 느릿느릿 풀을 뜯는 페우를 볼 때면 나의 남은 세상도 방불히 보이였다. 나도 이제 저렇게 살다가 어느날 죽을 것이고 그러면 나의 “생”은 “숭고한”  사명을 완성한 것으로 될 것이다…    혹, 어떤 날은 16년 감옥생활이 회고 되기도 하며 감옥이 그립기도 했다. 그럴 때면 “차라리 무기도형에 떨어질 게지…”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나는 지금이 감옥보다 못하였다 감옥에는 그래도 사람세상이 있었지만 여기는 적막강산 뿐이 였다..      82년 봄이다. 어느날 내가 소우리 말뚝을 박고 있는데 큰 조카가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집체를 걷어치우고 개체를 하는데 오늘 땅이며 집체재산을 분배하니 급히 내려오라고, 제비를 쥐니까 빨리 오란다고 하였다. 세상이 무너지는지 깨지는지 일체 관심이 없던 나는 멍 해서 조카만 멀뚱멀뚱 바라 보았다. 한집이 빠져도 제비놀음을 못하니까 빨리 오라더라며 조카가 거듭 재촉해서야 나는 정신이 들었다.    탈곡장마당에는 마을사람들이 3, 40여명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모두가 긴장되고 흥분된 얼굴로 활기에 넘쳐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였다. 나도 갑자기 삶의 의욕이 솟구쳤다. 그러니까 이젠 목숨도 제것이고 밭도 재산도 다 제것이란 말이 아난가?! 자기의 생은 자기 손으로 산단 말이지?!... 허! 그것 참, 세상이 변했네!!    사람들은 번갈아 가며 제비를 쥐고는 엉덩이를 치며 하하 웃기도 하고 “엥이! 무깍지야!”하고 랑패상을 짓기도 했다. 집체재산이라는 것이 열두어가지 밖에 안되다 보니 무깍지가 여러개 있게 되였든 것이다.    나는 제비를 제일 마지막으로 쥐였는데 커다란 돌군재였다.(석마돌. 탈곡할 때 씀.) 나는 돌군재를 마을 공동용으로 기부하고 목장터와 지금 거기에 있는 다리병신 어미소와 갓난 새끼송아지를 달라고 하였다. 대장이 군중토론에 부치니 모두 그러라고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했다.      85년 8월! 나는 초평향에 가 보기로 용단을 내렸다. 그간 오래동안 나는 초평향의 소금강골을 유원지로 만들면 어떨가? 하고 반복되는 사색을 하였다. 그러나 나의 “휘황찬란”한 과거지사가 자꾸 걸리였다. 초평에 가서 번들거리면 나는 새롭게 신문인물이 될 것이다. 아이고 어른이고 남녀로소가 모두 다시 나를 쳐다보며 나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그러나 소금강골을 한번 잘 개발하고픈 생각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나는 실사구시적으로 진지한 사색을 거듭하였다. 강간미수니 류망이니 하는 죄목은 승인이 않되는 억울한 죄다. 군혼파괴죄는 따져보면 련옥이가 자초한, 말하자면 자업자득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조직위원 김응수가 나에게 한 말이 힘이 되였다. 그는 20년전에(내가 강간미수범으로 잡힌 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치면 여전히 좋은 동지지.” 나는 초평향에 가서 사업을 본때스레 펼치며 꼭 성공하리라 결단을 내렸다. 오직 이 길만이 나의 생과 존엄을 찿으며 나를 빛내이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사업을 잘하여 초평향 인민들에게 꾸준히 좋은 일을 하면 나의 명예도 많이 좋아질 것이다. 나는 나의 이런 관점이 청년시절의 나의 초심과 일맥상통함을 새삼스레 느끼며 감개가 무량하기 그지없었다…    개체로 된 후 그간 4년간 나는 억척스레 일했다. 목장의 아래 우를 더 도급맡고 통이 크게 대대적으로 사업을 벌이였다. 나는 소, 양, 돼지, 닭, 벌을 치고 하마(기름개구리)를 기르고 인삼장과 버섯장도 시작하였다. 그리고 약초와 산나물 재배도 시작했으며 황무지를 일구고 량식과 사료를 자급하기에 힘썼다. 형님네 식구들은 나와 함께 말 그대로 억세게 분투하였다. 정부에서는 나를 다종경영호로 인정하고 자금 지원을 하여 주며 수의소의 지도를 배치하는 등 세심한 보살핌을 지속적으로 주었다. 나는 금년 봄에 갈매골 고향마을 사람들을 흡수하여 “갈매골농민합작사”를 만들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70여만원의 자산이 있다. 만원호를 “장원”이라며 장려하는 지금 우리는 특등장원으로 되였다. 83년도 국경절에 나는 남매를 데리고 사는 젊은과부에게 장가를 갔다. 그의 남편은 79년도에 목재판에 갔다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금년봄에 안해는 떡돌같은 아들을 낳았다.      내가 자가용을 몰고 초평향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가 거이 되여서다. 향정부에 들어가서 서기와 향장을 찿으니 면바로 그들은 모두 사무실에 있었다. 내가 자기소개를 하자 그들은 무척 반가워 하며 왕림을 열렬히 환영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나의 사적을 여러번 들었다고 하였다.    그날 일은 참으로 재빨리 순리롭게 되였다. 나는 향정부와 소금강골 도급계약을 맺고 예약금 10만원을 주기까지 했다. 향정부에서는 풍성한 점심식사로 나를 초대하여주었다. 좌석에서 나는 혹시 김응수라고 아는가 물었는데, 웬걸?! 김응수로인이 마을에 계신다는 게 아닌가?!    내가 젓가락을 놓고 곧바로 김응수를 찿아 가겠다고 하니 서기와 향장이 따라나섯다.    나와 김응수가 부등켜안고 일희일비로 감격한 이야기를 여기서 어찌 다 말하랴!! 그는 늙긴했으나 깨끗하고 정정했다. 그가 연신 “창락이! 창락이! 이렇게 오다니?!” 하고 웨치자 집안에서 “뭐요?! 누구? 창락이?”하고 웨치며 그의 안해가 뛰쳐 나왔다. “아이고! 이게 누구냐! 창락아!” 그는 나를 끌어안고 왕왕 울었다. 나도 걷잡을수 없이 뜨거운 눈물이 마구 쏟아 졌다.    우리는 초평촌 뒤산기슭 소나무밭에 가서 둘러 앉았다. 향장의 분부로 향간부 몇사람이 음식을 날라와서 그야말로 푸짐한 산놀이 잔치가 벌어졌다. 산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초평촌은 옛모습이 대체로 그대로인 것 같았으나 그래도 산간마을의 아담함과 포근함이 깃들어있었다. 저 아래로 소학교와 초급중학교는 새로 지은 것이고 향정부도 마을 가까이로 새로 지었다. 내가 공안국으로 잡혀간 공사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을 변두리에 대대사무실이던 기와집은 지금도 있었는데 절반은 허물어지고 거이 쓰러지는 절반이 벋팀목에 의지해 위태롭게 서 있었다.    김응수가 천천히 지난 일을 말하였다.    “창락이가 간 후 나는 재료를 현에 보냈는데 창락이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더구만. 련옥이는 문부장 때문에 모든 것이 들통나서 리혼을 맞았소. 문부장은 련옥이를 데리고 살자고 그의 남편에게 일러주며 엉큼한 수작을 했는데 련옥이가 죽다보니… 남서기는 문화혁명에서 죽을 고생을 했소. 창락이 문제도 나와서 민분이 컸지. 원래 민분이 많은데다가… ㅉㅉㅉ. 작으만치 죄장이 104가지나 됐는데 다 사실이란 말이오. 건달이나 다름없는 아들을 공사공청단위 서기에 앉히자고 창락이를 잡아먹지 못해 눈에 달이 올랐지. 련옥이를 입당시켜 현으로 보내고 남철이를 공사공청단위에 안배하자고 련옥의 에미와 약조를 했다고 투쟁을 들이대니 련옥이가 실토를 해서 우리도 알았소. 그리고 낫살이나 먹은 게 그게 또 뭐요. 련옥이와 글쎄… 개명치 못하게… ㅉㅉㅉ”    “그런데, 련옥이는 어째서 죽었습니까?”    “련옥이가 그런 사람일 줄이야. 67년도 여름에 남서기랑 문부장, 한소장, 봉선이두 끌려나와 투쟁을 받았는데, 그날 련옥이는 남철이가 몽둥이로 머리를 친 것이 기절했다가 다시 깨여나긴 했는데, 그때부터 지누비(자리에 누워 앓음.)를 하다가 얼마 후에 죽었소. 그날 군중들이 니 애비도 치라고 소리를 치니 남철이는 정말 애비도 쳤소. 련옥이는 한소장과 문부장의 안해가 달려들어 머리까지 깍아버리고 전안조에 잡아가면서부터 계속 투쟁판에 끌려다니다가 결국은 그렇게 되였소… 78년도 틀린 것을 바로잡을때 창락의 문제를 제출하니 문화혁명 전의 일이여서 심사를 안 한다구 하더구만. 그간 창락이가 참 고생했소…”    나는 남명덕의 소식도 물었다. 김응수의 말에 의하면 남명덕은 지금도 결론을 내리지 못해서 “걸려” 있다고 했다. 그는 이웃 향으로 이사를 갔는데 풍을 맞아 겨우 운신을 한다고 하였다. 남철은 련옥의 건으로  4년 옥살이를 갔다 왔다. 남서기 시중은 그래도 그토록 천대를 받던 안해가 해준다고… 김응수는 처연한 기색으로 말하며 담배를 피웠다.    “창락이! 놀라지 마오. 저기 저 기와집이 보이지? 저 집에서 봉선이가 아들을 데리고 살고 있소.”    “아니?!”    “봉선이는 아이를 낳고 온갖 멸시를 무릅쓰고 살았소. 그러다가 문화혁명이 터지니 투쟁대상으로 잡혔지. 67년도에 마지막으로 투쟁을 받고 잡귀신에서 빠지긴 했지만 창락이를 더는 애 아버지라 할 용기가 없다고 우리와 말했소. 우리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소.”    “아이가 얼매나 좋은지. 창락이를 똑 빼 닮았소. 올해 대학에 붙었소.”    지금까지 눈굽만 자꾸 딱고 있던 김응수의 안해가 한마디를 하였다. 나는 망연자실 멍해 있었다. 초평향에서 이런 일을 만날 줄이야?!…      이튿날 아침후 나는 봉선이며 김응수내외, 향간부들의 여늬(배웅)를 받으며 귀로에 올랐다. 할 일이 숨 가쁘게 많았다. 차창으로 송진내 짙은 싱그러운 대기가 풍겨 들었다.                                                                                                              00.6
156    줄욕에 대한 변명 댓글:  조회:148  추천:0  2020-08-09
      수필                                             줄욕에 대한 변명                                                                                                                 회령          당의 작가 작가로 된후 나는 더욱 열심히 창작을 하였다. 18세 청춘시절에 품은 나의 초심(리상)과 사명(포부)은 당의 작가, 인민의 작가로 되여 혁명사업에 잘 복무하는 것이였다. 지금도 나절로 생각해 보아도 나의 리상과 포부에는 흠집이 별로 없는것 같다. 그러나 어떤시람들은 “무슨 뚱딴지 같은 당의 작가, 인민의 작가 어쩌구 저쩌구… 혁명사업이요 뭐요 하는가?! 케케묵은 사람이 케케묵은 얼빠진 소리나 하구 자빠졌네!”하며 어처구니가 없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ㅉㅉㅉ… 하는것이 구제불능이라는 표시였다. 곁에서 모이 쪼아먹는 암탉을 반주하는 수탉처럼 어떤사람들은 머리를 거세게 주억거리며 “시대에 떨어져도 반세기 이상은 떨어진 사람이다.”고 하였다. 글쟁이 절개를 운운한 어느 글에는 “글쓰기 전에 소학교부터 다시 다니라”는둥 “케케묵은 몇십년전의 글을 글이랍시고 발표하는 그 용감성에 탄복한다.”느니 하면서 댓글을 달았는데, 신랄하게 비꼬며 질책한것이 그야말로 천하일품이였다. 욕사발을 얻어먹은후 나는 허심히, 여러면으로 깊히 사고해 보았다. 그리고 여러사람께 자문하기도 하였다. 이젠 여러해가 지나갔지만, 나의 관점에는 변화가 없다. 개혁개방후, 나가는것과 들어오는것이 점점 더 확대되고 편리해지고 많아졌다. 의식형태와 직결되는 문학만 보더라도 20여가지 류파(류형)가 활개를 치며 내노라 하고 있다. “순수문학”이요 “자연주의 문학”, “사실주의 문학”, “주류문학”이요 하는 전통파는 더 말할것도 없고 “애정문학”, “감상문학”, “고백문학”, “커피문학”, “종교문학”, “상흔문학”, “비교문학”, “분단문학”, “친일문학”, “성문학”, “기생문학”…듣고도 모를 문학이 란무하는것이 똑 마치 식전로천장마당 같고 만화통 같다. 주지하다싶히 옛것이든 새것이든 모든 문학은 작가에 의하여 산생되고 존재하고 발전하고 멸망한다. 어떤것은 그 생명이 길고 어떤것은 짧을뿐이다. 문학은 작가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에 따른다. 나는 여전히 당의 작가, 인민의 작가로 혁명사업에 이바지 하고저 한다. 짐작컨대 누구도 감히 현실적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당이라든가 인민이라는 개념과 실체는 감히 부정하지 못할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혁명이라는 말을 쓰지않는다느니, 그런말이 이젠 없다느니, 케케묵은 옛말이라느니, 혁명이란게 언녕 없어졌다느니… 하고 말하는 사람은 있다. 나는 인정컨대 지금의 중국의 모든일은 여전히 선배들이 시작한 혁명사업의 계속이며 혁명사업과 관련이 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산골할머니가 장마당에 와서 닭알을 팔거나 미나리나물을 파는것도 다 혁명과 관계된다고 본다. 나는 “혁명문학”을 열애한다.            우리 땅 역시 수년전의 일이다. 그때, 수필을 한편 발표했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여 한바탕 욕사발을 먹었다. 그 수필은 중국에서 사는 우리조선족들이 마치도 남의집에 와서 얹혀 사는것처럼 송구해 할것이 하나도 없다는, 우리조상들이 이땅을 ㅡ 중화대지를 형제민족들과 함께 개척하고 건설하고 보위하며 살아온것이 수천년이 된다고 소리높히 웨친것이 사달(사단)이 되였든 것이다. 나의 수필에 격분한 어떤 사람들은 “이따위 세상물정두 모르는 자가 무슨 작가라구?! 쇠웃다 밑궁기가 찢어지겠다. 별 미친놈 다 보겠네.”, “우리할아버지가 조선서 들어온지가 80년밖에 안된다는데 무슨헛소리를 하는가?! 수천년이라니? ㅉㅉㅉ.”… 그야말로 무슨역적이나 나타난듯이 격분해서 대성질호를 하는사람이 여럿이였다. 그때도 나는 나름껏 사료를 찿아보고 사색하고 사람들께 자문도 하였다. 결과, 나는 나의 관점이 틀리는게 아니라는 확신을 더욱 가지게 되였다. 내가 본 재료에 의하면, 중국고대사에서 상나라가 주나라에게 먹혔을때 상나라의 수천명 상층인물들이 백성들을 거느리고 전전하다가 지금의 조선땅에 정착을 해서 당지 토착인들과 융합을 했다는 것이였다. 당시 그들은 죽으면 죽었지 주나라의 종으로는 살지않겠다는 절개로 집단 이주를 단행했다고 한다. 주나라의 왕은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정치가였는지… 상나라 사람들이 이주하는것을 막지않았다고 한다. 그는 아마 대신들에게 이렇게 지시한것 같다. “그눔 종간나새끼덜이 어데가서 살던지 뒈지던지… 나에게 대가리를 숙이기 싫으문 우리 주나라 지경밖으루 나가라고 해라.” 조선고대사에서는 우리조상들이 세운 여러나라가 지금의 중국 동북땅에서 주인으로 살았다고 하였다. 수천년 력사에서 우리조상들은 중국땅과 조선땅 사이에서 래왕이 빈번했고 아예 중화대지에 정착해서 산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루한 력사의 편린들에 대하여 나는 생물학적 각도에서 분석하고 추리해 보았다. 우리조상들이 중화대지에서 주인으로 예로부터 살았다는 것을 부인할수 없었다… 나는 중국조선족은 “월강족”이요 “이민족”이요 하며 우리민족이 중화대지에 정착한것이 백년이요, 백60년이요, 백80년이요 기껏해서 이백년이요 하는 말을 정치적각도에서는 리유가 있지만 생물학적각도에서는 좀 다르다고 인정한다.        실화소설과 수필 나는 줄곧 문학학습을 자습으로 했다. 무슨 강습반이거나 훈련반, 지어는 연토회, 세미나 같은데도 한번 가본적이  없다. 그리고 어느대가한테서 개별보도를 받은적도 없다. 나에게 문학을 가르켜 준 선생은 책이였다. 나를 가장 많이 가르킨 책은 조선문학과 한족문학(주류문학)서적이였다. 거기서 실화소설이란것을 알게되였고 수필을 배우게 되였다. 어느땐가, 나는 실화소설을 한편 발표하고 무안을 당한적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한다하는 문학선생이 “소설이면 소설이고 실화면 실화지 실화소설이라는 이런 물건짝이 어데 있는가. 엉뚱한 작자가 다 있네.”고 하며 노발대발, 개몰듯 했다는 것이였다. 수필도 비슷한 대접을 받은바가 있다. 역시 “문학에 한해서는 내가 모르는게 없지!” 하는 문학선생이 나의 어느수필을 보고 “이따위가 다 무슨수필이야?! 근본상 수필규격에 맞지않아. 사람 웃긴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상 두 선생과 나는 무면식이다. 그러니까 무슨 선입견 같은건 전혀 있을수 없는거고 순 학술적 관점의 차의인것 같다. 그러나 감정색채가 다분하고 인격모욕을 당한것 같아서 기분이 좀 어정쩡했다. 하지만, 정확여부는 뒤로하고 우선 쟁명성, 비판성을 인정하며 반갑고 고마웠다. 문예평론같은 평론이 보이지 않은지 오랜 우리문단에서 희귀한 일이였던 것이다. 지난날 중국문단, 조선문단에서 주지하다싶히 생사판가리싸움(투쟁)이 한두번만 있은것이 아니다! 쩍하면 학술쟁론이 사상투쟁, 정치투쟁으로 변하여 필화로 죽고 병신이 된 아까운 사람이 얼마일까… 개새끼니 돼지새끼니 하다가 불충이요 모반이요 역적이요 우파요 반동이요 반당, 반사회주의요 반시황제, 반모주석, 반수령님… 문단에는 살기가 등등했고 피비린내가 끊칠줄 몰랐다. 개혁개방후에는 비판투쟁이 사라지고 세상의 모든것이 마음대로 넘나들고 쫄딱 벗고다녀도 내멋이고 내인권자유라… 지금 우리의 문단을 보면 마치도 자유시장, 무법천지 같은데, 우리문단에서는 정리정돈이 좀 있었으면 싶다. “실화소설”이란것이 있는지 없는지… 어떤규정(틀)을 세워야 할것인지… 수필에는 어떤규격(틀)을 짜 놓아야 하는건지… 내가 말하는 정리정돈이란 등소평령감께서 하시던 그 “정돈”같은것이다. 서로 공격하며 물어뜯고 반대하고 모자씌우고 몽둥이로 때려패고, 잡고 로동개조를 시키고 혹형을 가하고 감옥에 처넣고 총살, 교살을 하고… 절대로 이런행패질, 깡패만행을 하지말고 편안히, 느슨히, 웃으며, 함께 탐토하는 그런 “정돈” ㅡ 즉 “백화만발, 백가쟁명, 추진출신”의 당의 문예사업방침이다. 적대모순은 총칼로 해결해야 하지만 인민내부모순은 단결, 비평, 단결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세상에는 완정무결(完整無缺)한 사람이 한명도 없다. 인민내부의 사람들끼리 인격을 모욕하며 인신공격을 하며… 단결못할리는 없다… 단결해서 함께 공동의 사업을 잘 해야할것이 아닌가?!                                                                                                         20.8
155    김정권씨에게 약간의 건의 댓글:  조회:217  추천:0  2020-07-31
       수필                                            김정권씨에게 쬐꼼 건의                                                                                                                 회령 우리 문단에서 중견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정권씨가 몇달전에 명작 “불조심”을 발표했다. 단편소설은 “연변일보” 해란강 문예부간에 발표되였는데, 편집 박진화씨가 그날 신문에서 우수작품으로 추천을 하기까지 했다. 이런 일은 극히 드물었다. 소설의 내용은 간단했다. 어느 곳에서 중년쯤은 되는것 같은 부부가 살았는데, 안해가 무슨병으로(신경병?) 입원을 했다. 어느날, 안해는 소리 없이 퇴원을 하고 집에 와서 두루 집안거두매를 하다가 이미 10여개를 써버린 콘돔(避孕套) 봉투를 발견했다. 남편의 부정부패를 발견한 안해는 아주 태연자약하게 교육을 진행했다. 그는 남편의 사루마다(속곳 팬티 빤쯔따위)앞에 “불조심”이라고 큼직하게, 곱게, 수놓이를 했다. 소설은 대개 이런 것 같다. 지금은 많이 잊어먹었는데, 그때 어찌도 우스운지 혼자서 키득거린 기억이 난다. 이런 경우, 십중팔구는 안해가 발광하며 칼을 들고 거시기를 베여버린다느니 리혼을 한다느니… 죽어번져지며 란리판을 벌이겠지만 소설 속의 안해는 아주 고상하게, 문명하게, 우아하게, 인민내부의 모순을 평화롭게 처리했다. 그래서 남편씨가 얼마나 뼈저리게 착오를 검사하고, 후회하고, 개조를 결심했는지… 후과가 어떻게 효력이 있었는지… 이런것들은 소설에서 한마디도 언급을 안 하고 독자들에게 맡겨서 여운이 길게, 감칠맛이 나게하였다. 안해의 이러한 생활의 지혜, 인생철학 그리고 재치있는 예술적 처리 등으로 해서 특별추천을 했을것 같다. 소설을 본 후 그때는 웃고 말았지만, 후에 자꾸만 조금 더 다듬었으면 하는 욕심이 생겨났다. 남편씨의 팬티에 수놓이를 한 것만으로는 어쩐지 력도가 부족한것 같았다. 콘돔으로 목걸이를 해서 남편의 목에 걸어주는 엄청난 강타를 한방 먹이긴 했지만, 그건 둘 밖에 모르는 장면이여서 있는둥 마는둥이다. 안해가 입원한 기간 열번도 더 되게 바람을 쓴 남편씨가 고따위 자극에 꿈쩍이나 하겠는가 말이다. 히쭉 웃으며 코방귀를 뀔 것이다. 개구리 낯짝에 물치기다. 하긴, 남편과 자기의 체면, 그리고 병을 치료해서 사람을 구하며 출로를 주는 "간부정책", "조직원칙"을 잘 실행하는 안해의 현명성을 도두라지게 하려고 정권씨가 고심한 것 같기도 하다만… 그래서 오늘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다 보니 정권씨에게 약간의 건의를 하고자 한다. 재판이 있으면 참고하기 바란다. 첫째로는 고 “불조심”을 “불”과 “조심”을 붙혀 쓰지 말고 띄여쓰면 좋겠다. 둘째로는 그것을 조끼, 작업복, 운동복, 그리고 모자 등에도 적당한 위치에 회사이름을 새기듯 선명하게, 멋있게 써 놓거나 수를 놓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면 심원한 정치적, 사상적, 현실적 의의가 있을 것 같은데, 이런 복장이 연길에서 대 인기를 얻는다고, 그것이 어느 틈에 한국에도 전파되여 대 인기를 얻고 있다고… 소설에 조금 불어넣었으면 좋을 것 같다.   어느 땐가 한국텔레비죤에서 여럿이 모여들어 무슨 좌담을 하는데, 한국남자들이 왜서 바람을 많이 쓰는가? 하는 화제가 열변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신사풍의 한 중년사내가 아주 심중한 어조로 발언하기를 남자들의 거시기가 겉에 달려있기에 원체 거들렁거리기를 좋아하며 그리고 한국에는 해풍이 많아서 거시기가 방법없이 마구 흔들리며 결국에는 바람으로 이어진다고 "과학적"으로 "학술발언"을 하는 것이였다. 이것은 거시기 즉 “불”의 상황이고 다른 한가지는 주지하다싶히 한국에서는 확실히 화재 즉 “불”이 많다. 때문에 “불 조심”을 써서 입고 쓰고다니며 시시각각 “불 조심”을 하는것은 여러면에서 좋을 것 같다. 바람에 대한 경고도 되고 화재에 대한 경고도 되겠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그런 옷이나 모자를 사용하는 치들은 속으로 다 알고 있으며 무슨 생각이 있을 게다. 내가 왜서 하필이면 이것을 사용하는가… 물론, 활량끼가 많은 부랑자들은 우정 애용할 수도 있다. 그놈들은 정부(情妇)를 끼고 바람피우는 것을 행세꺼리로 아는 놈들이니까. 어떤 곳에서는 아주 류행으로 되고 있기도 하다. 모임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하는 것은 케케묵은 구식이고 정부를 끼고 참가하는것이야말로 신식이고 현대 멋이라고 공공연히  인정하기까지 하는 한심한 상황이다. 이상의 첨삭은 음란물이라거나 치안문란이라거나 할 수는 없기에 검사에 걸릴 리는 없을 것 같다. 정권씨! 더 많은 명작을 기대해요. 20.6.
154    (수필) 엷어가는 인정 댓글:  조회:335  추천:0  2020-06-23
       수필                     엷어가는 인정                                                ㅡ누구의 과냐?                                                                                                                                       회령     사촌동생의 전화를 받고 니는 착잡한 심정을 어쩔 수 없었다. 벌써 네번째로 한국벌이를 나간 동생은 전화에서 울먹이며 이런 말을 하였다.   “… 형니메! 내 한가지 부탁을 하기오. 수고스럽지만 거, 우리 아덜께 형니미 둬마디 말씀을 좀 해주오.”   “무슨 말을?”   “이 애비께 드문드문 좀 전화를 하라고…”   동생에게는 아들 하나 그리고 그 아래로 딸 둘이 있다. 아들과 큰딸은 이미전에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고 젖먹이 막내딸은 북경에서 한국회사를 다니는데 서른살이 훌쩍 넘었지만 미혼이다.   동생은 평생 농민이지만 모진일은 별로 하지 않고 살았다. 집체화 시절에는 생산대회계에 대대(촌)신용사출납을 겸하여하다보니 가방에 장부책이며 수판(주판)을 넣어메고는 이마을 저마을을 돌아다니며 일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때는 아버지 어머니가 정정하다보니 동생은 자류지밭 한고랑 김을 매는 법도 없었고 땔나무 한단 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산골농촌치고는 손발에 흙을 뭍히지 않고도 상등공수(보수)를 받는 출세를 한 총각이여서 반반한 처녀에게 장가를 갔다. 그리고 줄줄히 삼남매를 낳아 키웠다.   동생이 고생을 하기는 개혁개방이 시작된 후 부터다. 아버지 어머니는 이젠 밭을 다루기가 힘들어서 수, 한전은 모두 세를 주고 터밭이나 다루면서도 여기저기가 늘 편치않아했다. 땔나무도 하기 힘들어 마을 주변에서 쑥이며 잡초를 긁어다 불소시개를 하며 비싼 석탄을 사다 때였다. 해마다 화목철이 되면 남들은 다 산에가서 십여수레씩(일년 치) 화목을 해다가 때였지만 동생은 나무를 바로 할줄도 모르거니와 할념도 없었고 하기도 싫어했다. 아래로 녀동생이 넷이였는데 다 외지 농촌으로 시집을 가서 일잘하는 매부가 넷이나 되였으나 그들을 불러다 화목을 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도 삼촌내외분은 아들에게 잔소리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삼촌내외는 성질이 특이했다. 아이때부터 애들에게 한마디도 무엇을 가르키거나 욕을 하거나 잔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고 심부름이거나 일같은걸 시키는 법이 없었다. 특히 동생에게는 더욱 각별했다. 늘 딴밥을 해 먹이고 닭알이며 말린 세치네(잔 물고기)로 반찬을 해 주며 온냐온냐 많이 묵어라 많이 묵어라 했다. 그것은 아이애비가 되여서도 그랬다.   농촌이 개체화로 되자 그는 출세한 벼슬들이 다 없어지고 백수건달이 되고 말았다. 동생은 녀편네를 한국에 가짜시집을 보낸 홀애비들과 함께 부커나 장기를 놀면서 개추렴도 하였다. 삼복철에는 산천당 당나무 밑에서 매미노래를 듣다가는 쉬원히 낮잠을 늘어지게 잤다.   그러나 상팔자는 얼마 가지 못했다. 삼남매가 무럭무럭 자라면서 아들애는 초중에 들어갔는데 공부는 수수했다. 하지만 고중까지는 글을 읽혀야 겠는데 고중은 시가지에 밖에 없으니 그 시발(뒷시중)이 간단한것이 아니였다. 아버지 어머니와 안해가 돼지를 기르고 닭마리나 치는 것을 가지고는 어방도 없는 일이였다. 동생네는 다른사람들을 본받아 안해가 한국벌이를 가기로 결정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가짜결혼방법은 쓰지 않고 신용사 대콴(대출)을 맡고 이곳 저곳에서 고 리자돈을 꾸어 순리롭게 한국으로 나갔다. 안해가 떠나던 전날 집에서는 닭을 한마리 잡아 송별연을 하였는데 그때 분위기는 그야말로 일희일비였다고 동생은 나에게 말하였다. 아버지가 나가서 몸조심하며 바쁘면 곧 돌아오라고 말하니 안해는 울면서 대답을 하였는데, 그말은 생각하면 지금도 불쾌하다고하였다. 그날 안해는 말하기를 “아부지 어마니는 해마다 기력이 못해가고 아이들 시발은 점점 더 커가는데, 죽던 살던 내가 총목을 메지 않으면 이 집에서 누기(누가) 할 사람이 있슴까?!” 하더라는 것이였다. 그때, 나는 틀리는 말이 아니구만! 하고 동생에게 한방 쏴주려다가 참았다.   안해는 한국에 나간후 음식점이며 려관집에서 일하며 두달에 한번씩 꼭꼭 돈을 보내왔다. 그러기를 한 이티를 해서 빚을 다 갚고 아이들의 고중시발까지 들어 주었다. 그런데 빚을 다 갚은후에는 아이들의 학비만 보내면서 벌이가 신통치 않고 몸이 불편하다고 하였다. 아들과 큰딸은 고중에 가서 련애에 빠져 공부를 망치고 말았다. 막내딸은 공부를 잘 해서 북경 어느 대학에 붙었다. 안해는 아프다면서도 계속 일을 하였는데 집에 보내오는 돈은 점점 줄어들더니 얼마후에는 아예 끊어버렸다. 막내딸애한테는 자기가 직접 돈을 보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한국에서 남편을 얻었으니 리혼수속은 동생이 언제 하고프면 언제하라고, 필요재료는 보내라고 할 때 즉각 보내주겠다는 것이였다.   호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동생은 사태가 이렇게 되니 황연대각 깨도가 되였다. 생각해 보니 겨우 초중까지 다닌 농촌농민이 50여 평생을 아이때부터 노라리를 치며 오늘까지 살아 왔으니, 행복한건가 한심한건가… 부모까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시집, 장가까지는 책임을 져야겠는데… 그는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때로부터 동생은 한국벌이에 나섰다. 동생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집에서는 닭을 잡고 환송식을 하였으나 그것은 눈물의 리별식이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찌 고생을 하겠냐며 근심이 태산이였고 바쁘면 인차 돌아오라고 거듭거듭 당부를 하였다.   동생은 한국에 나가서 결사적으로 돈벌이를 하였다. 그는 층집건축회사에서 실내전기배설일을 하였는데 한국기술자(반장) 밑에서 온갖 천대와 욕사발을 먹어가며 말그대로 어지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며 억울한 월급을 받았다. 아파트는 층층이 되는족족 전기가설이 따라가는데 반장은 도급을 맡았기에 새벽부터 밤중까지 줄기차게 일을 들이댔다. 동생은 현기증이 나서 사다리에서 떨어지기도 여러번을 했고(다행이 뼉따구가 끊어진적은 없었다.) 코피가 터지는 것은 편지에 문안이였다. 이렇게 반년남짓 구불고(뒹굴고)나니 동생도 일에 완전히 자신이 있었다. 말그대로 수영은 수영중에서 배우는 거지만 동생은 전쟁중에서 전쟁을 배운셈이다. 이제부터는 동생도 도급을 맡았는데 흑룡강서 간 동포를 조수로 썼다. 이러기를 2년7개월을 하니 돈을 꽤 벌었다. 그간 세놈의 악덕업주들 한테 4만여원의 협잡을 당했지만 수중에는 30여만원이 있었다. 아들의 잔치때문에 동생은 돌아왔는데, 잔치를 멋드러지게 잘 하여 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내며 치새(호평)를 받았다. 리혼을 한 안해는 어데가서 붙었는지 아들잔치 기별을 할 수 없었다.(아들은 엄마가 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안대도 제무안에 오지 않았을 거지만.)   그해 설과 보름을 다 쇤후 4월초에 동생은 또 한국벌이를 나갔다. 2년남짓 지나서 이번에는 큰딸애가 잔치를 하게 되여 동생은 집으로 왔는데, 딸의 잔치도 잘 하였다. 그리고는 인차 한국으로 떠났다. 세번째다. 이번에는 련 6년을 일하고 심장이 좋지 않아 돌아 왔는데, 그간 아버지 어머니는 아들을 그리다가 선후로 하늘로 갔다. 부모일에 대해서는 아들과 큰딸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한국에 갔기에 동생은 아버지, 어머니가 사망해도 오지 않았다. 대신 동생은 아들과 딸에게 각각 그간  15만원을 보내줬다. 삼촌과 삼촌댁의 후사처리는 내가 주도해서 했는데, 동생과 조카들이 골회함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대로 날려 보냈다. 삼년제도 한꺼번에 에때버리고(대체하다) 유상은 불살라 버렸다. 고인들의 딸들도 련락을 할 수없다보니 두번 다 오지 않았다.   장례후 나는 식당으로 가지않고 안해와 애들을 다 데리고 곧장 돌아오고 말았다. 그날, 나의 심정은 참으로 비감하고 격분했다…   그후, 그러니까 삼촌댁이 삼촌을 따라간후 얼마 안되여 동생은 심장병으로 돌아왔는데 거이 일년을 휴식하며 치료를 하였다. 병이 완쾌하자 동생은 또 한국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기일을 할 수가 없었다. 70을 바라보는 사람이다보니 어데서도 위법이라며 고용하려고 하지 않았든 것이다. 어쩌다가 이번에 온 전화에서 동생은 수원근처의 작은 양로원에서 호리일을 한다고 하였다. 일당으로 인당 한화만원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임무는 24시간 자립못하는 늙은이 여섯분을 돌보며 병실의 청소까지 말끔하게 해야 하며 구석에서 잔다고 하였다. 일을 참답게 하건만, 조금만 자리를 비워도, 수간호사는 따지며 훈계를 한다고 하였다…   동생은 매일 죄로운(가련한) 로인네들을 돌보며 자기의 앞날에 대하여 생각이 많으며 서글프다고 하였다. 웬일인지 자식들의 전화가 자꾸 기다려 지고 그립기도 하지만 모색한(매정한) 아이들은 돈을 달라는 전화외에는, 보낼만한 돈이 별로 없다고 한 후에는  한마디 문안전화도 없다고, 없은지 이젠 오래다고 하였다. 동생은 아이들을 쉽게 키웠다. 그것은 아버지 어머니가 아이들을 어루만지며 끔찍히도 안아키웠기 때문이다. 동생내외는 낳기만 하고 키우는 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동생은 울먹이며 나에게 아이들의(이젠 아이가 아니지…) 전화호를 말해 주었다. 하지만, 조카들과 내가 뭐라고 하면 좋겠는지… 나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20.4.
153    강청 일화 댓글:  조회:317  추천:0  2020-05-09
     수필                                                     강청 일화                                                                                                                   회령 중화민족의 6천년 력사에서 아마도 모르긴해도 강청과 같은 녀자는 처음일 것이다.(강청. 원명 리운학. 1914.3.5ㅡ1991.5.14. 자살.) 강청은 중국은 말할것도 없고 지금세상에서는 다 아는 인물이다. 그야말로 말그 대로 인류력사에서 길이 전해져 갈 인물이다. 다른나라 다른민족의 유명인물에 대한 재료는 아는게 없다보니 뭐라고 말할게 없지만, 중국의 중화민족에서 생겨난 강청에 대해서는 많은 재료가 이미 세상에 공개되다보니 기본상에서 알며 할말이 있다. 아래에 최근에 내가 본 가장 신빙성이 있는 재료에서 두가지 사실을 발췌한다. 1974년 1월 25일, 강청 일파는 중앙정치국과 모택동주석, 주은래총리 몰래 국가급대회를 북경 수도체육장에서 소집하였다. 대회는 “비림비공(批林批孔)동원대 회”라고 했다. 동원되여 동원대회에 참가한 중앙정치국과 국무원직속기관 각급 간부가 2만여명이 되였다. 오후 3시, 이 “동원대회”에 참가하여 주최하라는 긴급통지를 갑자기 받은 주은래총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앓는몸으로 급히 대회장으로 갔다. 주은래총리가 도착하자 대회는 즉시 시작되였다. 대회를 주최하게 된 주총리는 먼저 자기검토를 하였다. “부대동지들이 비림문제에서 한발 앞섯습니다. 어제 춘교(장춘교. 해방군총정치부 주임)동지가 경서빈관에서 이미 대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우리 중앙과 국가기관에서는 한발 늦었습니다…” 주총리의 말이 방금 시작되였는데, 강청과 장춘교 그리고 그들 추종자들이 즉시 고함을 질러댔다. “우리는 투쟁철학을 요구한다! 우리는 투쟁할 것이다! 우리는 투쟁할 것이다! 우리는 투쟁할 것이다!” 마이크에 입을 바짝들이대고 지르는 강청과 장춘교의 갈린 목소리는 확성기로 울려 퍼지면서 귀가 터지는듯 했고 따라부르는 구호소리는 체육장에 울려 퍼졌다. 따라서 강청은 수시로 일어나서 “비림비공”에 대한 “우리의 붉디붉은 태양이시며 위대한… 모주석의 지시를 모주석을 대표하여 전달” 한다면서 주총리의 말을 거듭 가로채고 거기에 요문원도 끼여들었다. 대회장에 온 반란패두목들은 “위대한 기수(강청)”의 뒷심이 있으니 더욱 안하무인으로 기세가 등등해서 날뛰였다. 그들은 중앙의 정식비준도 없는데 대회에서 공개적으로 곽말약 등 국가지도자들을 질책 공격하였다. 여기에다 강청은 모주석의 ”10개 비판은 잘 된 문장이 못된다.”는 시어구를 인용하며 붙는불에 키질했다. 하여, 곽말약에 대한 한차례의 성세호대한 비판이 벌어졌다. 이날의 소위 “비림비공동원대회”는 매우 긴장한 분위기속에서 사람들을 위협하며 화약내가 가득 풍기게 하였는데, 그 주제는 주총리를 비판하는 것이였다. 그들은 한바탕 떠들며 련속 소란을 피워댔는데, 모두가 주총리를 빗대고 공격하는 것들이 였다. (그날의 이 상황을 보고 받은 모주석은 몹시 격분하였다. 그는 즉시 명령을 내려 강청일파가 전국에 발표하려고 준비한 “1.25대회” 실황록음테프와 “대회성과”선전재료를 몽땅 봉쇄하게 하였다. 그날 대회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은 한바탕 놀림을 당한데 대하여 몹시 불쾌해 하였다. 그들은 강청일파들이 정치문제에서 되는대로 행패질을 하며 엄숙하지 못한 짓거리에 대하여 십분 격분과 반감을 가지였다.) 이틀후 즉 1974년 1월 27일 밤, 중앙정치국에서는 인민대회당 동대청에서 해방군총정치부와 “해방군보”등 부대 선전계통 책임자들을 불러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는 주은래, 엽검영, 강생, 장춘교, 강청, 요문원, 왕동흥 등 령도자들이 참석하였다. 대청 동쪽에 림시로 만든 주석대는 대청 지면보다 약 10공푼가량 높았다. 령도들은 회장을 향하여 착석하였다. 회의장에 앉은 대다수 사람들은           이틀전의 “1,25대회”에 참가한바가 있기에 오늘밤에는 또 무슨 새로운 구경거리가 있겠나… 서로 귀속말로 수군거리며 주석대를 바라보았다. 회의는 주은래가 주최하였다. 그는 엄숙한 기색으로 개회사를 몇마디 하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겨우 참으며 기다렸다는듯 강청이 새된 목소리로 소리높히 제일먼저 발언을 하였다. “우리정치국 동지들이 의논하였는데, 지금 비림비공운동이 전국각지에서 진행함이 평형치 못하며 적극적이 못되며 주동적이 못된다. 하여, 중앙에서는 전국의 각성, 시, 자치구, 각 대군구에 기자를 주둔케 하고 그들이 련락원을 감당하기로 하였다. 이에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한다. 련락원은 지방의 당, 정, 군의 상무회의에 참가할 수 있으며 지방의 보밀전화로 중앙과 직접 련계를할 수 있으며 지방의 당, 정, 군 령도기관들에서는 마땅히 편리와 협조를 해야 한다. 간섭하거나 막으면 않된다. 우리가 직접 각지의 정황을 장악해야 한다.” 강청이 발언할때 장춘교는 여러번 께끼였고 강생과 요문원은 보충하거나 해석을 하였다. 회장의 청중들은 “중앙”에서 지방의 각급령도층에 대하여 신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즉시 느끼게 되였다. 끝으로 강청은 회의 참석자들에게 무슨 의견이 없는가고 한마디 물었는데,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기침소리 한마디도 없이 잠잠 했다. 상황이 이렇고 보니 강청은 자존심이 여지없이 상하게 되였다. 사람들의 랭대에 난처해진 강청은 격분을 돋구며 사방을 둘러보다가 발딱 일어서더니 크게 소리질렀다. “총정치부 전유신이 왔는가?” “왔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전유신은 해방군총정치부 부주임으로 키가 크고 표준적인 군인이다. 그는 사람들속에서 벌떡 일어나 차렸자세로 강청에게 군례를 하며 높은 소리로 힘차게 대답하였다. “전유신! 내가 묻겠는데, ‘공산당선언’이 어느해 발표되였는가?” 갑작스런 물음에 전유신은 인차 대답을 못하였다. “전유신! 내가 묻지않는가?! 왜 대답을 않하는가?!” “가능하게 184… 어느해 같은데…” “당신, 총정치부 부주임이라는게, 부대의 고급간부라는게, ‘공산당선언’이 발표된 시간도 모르는가!” “내가 준비가 없다보니… 학습이 부족하여…” “무슨 학습부족인가?! 나와 입씨름 할텐가?!” 전유신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리왔! 저자의 령장과 모휘를 당장 뜯어라!” 강청은 자기의 신분(그는 부대에 아무런 직무도 없었다.)과 때와 장소를 헤아리지 않고 밖에 대고 소리질렀다. 즉시 몇명의 군인이 들어와서 강청의 “명령”대로 집행하였다. 전유신은 꿋꿋히 서서 머리를 번쩍들고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군인기개를 보이였다. 이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망태기횡포, 허튼짓이 였다! 강청은 아무짓이나 내키는 대로, 마음대로 해도 되는건가?! 너무도 격을 벗어난, 상상할수도 없는 행위였다… 사람들은 경악과 분노를 금할수 없었다. 강청은 전유신을 릉욕하고도 위엄을 부리기에 성이 차지않았는지 또 소리를 질렀다. “ ‘해방군보’ 화남이 왔는가?” “왔습니다!” 화남은 힘차게 대답하며 강청에게 군례를 하였다. 그는 “해방군보”의 주필이다. “너, 대답하라. 파리공사가 어느해 성립되였는가?” “1871년…” 화남은 주저하다가 대답한후 학고한 신심이 없어서 더 말하지 않았다. 전유신과 화남을 닦아세운후 강청은, 얼마나 한심한가 모두 보라… 학습을 해야 한다... 모주석을 따라배워야 한다… 하며 모두를 한바탕 훈계하다가 오른켠에 앉아 있는 엽검영을 보면서 갑자기 생각이 난것처럼 큰소리로 말했다. “검영! 듣건대 당신의 어느아들이 공군부대에 있다던데 어떻게 참군했는가? 뒤문치기를 하지않았는가?” 엽검영은 강청을 한번 흘겨본후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고 불쾌한 기색으로 머리를 돌려 다른곳을 바라보았다. 그날밤의 소위 “중앙”에서 소집했다는 정치국회의는 강청이 주역이 되여 표연을 하고 일파들이 한바탕 맞장구를 치며 소란을 떨고 끝났다. 그들의 야심은 “비림비공” 운동에 “비 주공”(批周公ㅡ주은래를 비판, 타도), “비 주후문”(批走后門 ㅡ뒷문치기) 을 접목시켜 성세호대한 전국성적 대란을 일으켜 많은 당,정,군 령도간부들을 타도하거나 철직시키고 “비켜세우고” 탈권하려는데 있었다.(주총리와 뒷문치기에 련계하여 파고, 걸고들면 대다수의 간부들을 타도하게 될것이다.) 회의에서 그들은 “세발의 화살을 동시에 맹렬히 쏴야한다!”고 기세사납게 부르짖었다. 속심과 중점은  “비 주공”과 “비 후문’에 있었다. 많은 정치국위원들은 이미전부터 강청일파의 야심을 환히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어처구니가 없는 온갖 행패와 짓거리에 대하여 불만과 분노가 가득하였다. 하지만, 강청이 모주석의 안해기에 공개적인 대항을 자제하였다. (사람들은 강청의 “이불속 속삭임”의 위력과 작용을 몹시 중요시 했다. “이불속 속삭임”에 대한 중시는 수천년 내려오는 중화의 한가지 문화로서 큰 허물이다.) “1.27희의”후 엽검영은 1월29일, 주은래는 2월3일 각각 모주석께 강청일파의 활동을 편지로 반영하였다. (페심병발작과 페염, 고열, 시력이 모호한 상태였으나 조금 나아지자 2월 15일 모주석은 주은래와 엽검영에게 긴 회답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모주석은 “비림비공” 은 동의하지만 “비 주공”, “비 후문”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명학히 언급하였다. 그리고 강청일파를 비평하였다.) 부옇게 좌절을 당한 강청은 주은래가 병석에 눕자 기회가 왔다고 인정하고 3월 14일 모주석을 만나자고 하였다. 그는 모주석께서 “비 주공”, “비 후문”에 유익한 언질을 한두마디라도 울궈낼가고 하여 집요하게 만남을 청시했다. 그러나 모주석은 단호히 거절하고 3월 20일 강청에게 랭혹한 편지를 보냈다. “만날필요가 없다. 너는 내가 여러해 너에게 한 말을 많이 집행하지 않았다. 만나서 뭘 하겠는가? … 내가 죽은후 네가 어찌되는가 봐라. …” 중화의 력사에서 사치부화하고 횡포무도하고 황음무치하고 살인을 오락으로, 재미로, 심심풀이로 일삼은 왕으로는 하나라의 걸왕과 상나라의 주왕이 으뜸으로 력사에 “명성”을 떨치고 있다. 퍽 후에 와서는 “분서갱유”, “아방궁”, 3천궁녀, 장생불로초, 만리장성 등으로 진시황(영정)이 꽤 력사에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에게는 할거의 6국을 통일하고 처음으로 중화의 기틀을 잡았고 돈과 도량형을 통일한 공적이 있다. 또 수천년이 흘러 20세기 중화대지에서 “명성”이 하나가 나타났는데, 주지하다싶히 그가 바로 강청씨다. 강청은 걸, 주, 영정, 무후, 서태후는 궁둥이에도 미칠수 없는 온갖 행패를 마음껏 한, 중화의 오늘까지의 력사에서 제일 특출한 악녀다. 그는 모주석의 안해라는 밑천 한가지로 호가호위 하면서 세상사람 모두가 기절할 지독하고 횡포무도한 “업적”을 수두룩히 만들어 냈던것이다! 좌우간, 어찌되였든간에 강청은 력사에 이름이 올랐으니 그의 악귀혼이 만족해 할것이다…                                                                                                                  20.5
152    설 기분 댓글:  조회:268  추천:2  2020-05-01
      수필                                                      설 기분                                                                                                                    회령 소한 이튿날 금년들어 두번째 대설이 내렸다. 올 동삼 첯번째 대설은 그러니까 작년 12월 초순이겠다. 그때, 밤새도록 큰눈이 내리었다. 이번의 대설도 그때처럼 밤에 내렸는데, 발목을 넘어섯다. 금년 겨울은 이상하게도 왕년보다 눈이 아주 적게 내리고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가 위주였다. 온난한 날씨가 산보하기에는 좋았으나 이렇게 강설이 적어서야 농사에 지장이 없겠나… 근심이 되였는데, 대설이 내리여 기분이 무척 좋았다. 도적눈이 내리면 대풍이 든다고 한다. 소한이 금방 시작되자 이렇게 큰눈이 내리니 대, 소한간에 올 동삼추위를 한꺼번에 단단히 할 작정인가보다 했는데, 웬걸?! 날씨는 련일 바람 한점없이 화창하기만 했다. 큰눈은 내린 고대로 삼라만상을 포근히 덮고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설경이고 겨울맛이 기분좋다. 어떤사람들은 동삼은 그래도 하루건너 함박눈이 팡! 팡! 쏟아지고 설한풍이 윙! 윙! 휘몰아 치며 코와 귀와 거시기가 얼어 떨어지는 것만 같고 와들와들 떨며 집으로 달려와 뜨끈뜨끈한 정지구들(온돌)에서 구수한 동태국을 먹는것이 제일 동삼맛이며 진풍경이라고 한다. 겪어보아 알지만 옛날 겨울은 정말 혹독했다. 일년 사시절에서 제일 무섭고 싫은것이 겨울추위였다. 바로 입지못하고 바로 먹지못하는 생산대백성들은 동삼이 없었으면 했다. 그때 겨울은 기본상 령하30도 이상의 날씨들이 였다. 지금은 령하20도를 넘는 날씨가 거이 없다. 사람들이 북극의 얼음산이 다 녹는다고, 지구온난화를 들먹이며 우려를 하지만 나는 한치보기다 보니 시큰둥 하다. 정책이 있으면 대책이 있다는 궤변같이 아니, 창이 있으면 방패가 있듯히 인류는 온난화에 꼭 대책이 있을것이다. 나는 변함없이 기분이 좋다. 요즘 겨울날씨는 옛날같으면 사냥하기 딱 좋은 날씨다. 지금은 동물보호법인가 동물사랑법인가 한것이 나와서 파출소가 렵총을 다 걷어가는 바람에 아무리 손이 근질거려도 사냥을 할수가 없다. 그러나 멧돼지고기, 꿩, 토끼, 노루고기를 구워먹고 삶아먹고 탕 쳐 먹고 회 쳐 먹는 비계덩이 배불뚝 “귀족”들은 있다. 산해진미요 무공해천연록색이요 원생태요하면서 영원건강, 만수무강을 장담하며 기름진 얼굴을 번들거리는 그들을 보면 기분이 대단히 불쾌하다… 공연한 소리로, 설 기분을 말한다는 것이 갑축을묘가 되였다. 언귀정전, 설 기분을 간단히 말해보자. 설이 눈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니 안해의 공작이 매일같이 분주하다. 어제는 큰딸과 같이 죠즈(밀가루밴새)를 열다섯근이나 했는데, 하루품이 들었다. 나는 죠즈피를 사오는 심부름만 하고 한시루를 먼저 쪄서  술잔을 먹고 티비를 보며 잘 놀았지만, 안해가 죠즈 싸는걸 볼때마다 아름이차서 저도 모르게 혀를 끌끌찼다. 오늘은 코꿴 송아지처럼 꼼짝못하고 짐군으로 잡혀 안해를 따라 연길초쓰(슈퍼 상점)로 가서 설음식감을 작으만침 1800원어치 사왔다. 큰딸이 함께 장을 보고 자가용으로 창고문앞까지 실어 왔기에 나는 또 옹헤야를 부를수 있었다. 돼지발족만해도 30개를(22근. 더 사겠다는걸 딸과 내가 말렸다.) 삿는데, 안해는 발족을 삶느라고 또 하루품을 팔았다. 나는 저녘에 발족으로 또 한잔을 잘 먹었다. 오늘, 나는 새삼스레 무량한 감개를 금할수 없었다. 자꾸만 옛날에 설을 쇠던것이 회상되였다. 해방전 옛말은 외울것도 없고, 개혁개방전까지 우리마을 생산대사원들은 사실그대로 일년에 돼지고기를 인구당 2냥씩 세번 먹었다. 단오, 추석, 설이다. 한식 즉 청명에는 돼지를 잡지않았는데 그것은 단오에 벼모내기총결을 크게 하기때문에 그때 한 밥을 잘 먹자고 그랬다.. 그때, 단오는 정말 명절맛이 났다. 일년에 한번도 먹어 못보는 해도 여러번 있었다. 돼지고기가 다 뭔가?! 콩깍대전분이라는 쓰고 떫고 멀건 푸대죽도 하루에 반사발을 먹으면 잘 먹었다는 세월이 아니든가… 개혁개방후, 특히는 새세기에 진입한후 우리부부의 획득감, 행복감, 안전감은 현실로 되였다. 우리부부는 국영중형기업에서 고급공정사로 평생을 적극 사업했다. 개혁개방초기의 혼란하고 어수선한 기회를 리용하여 우리공장에서는 한무리 부패분자들이 미친듯히 날뛰였다. 공장은 특대화재로 원기를 크게 상하고 생산사고, 안전사고가 련발하는가 하면 원목구입명의로 썩박무티(나무)를 들여오고 석회석 대신에 돌멩이를 구입해 들여다가는 서로 짜고 끼고는 상등원재료 값으로 결산을 해 먹었다. 그런가 하면 받아먹고 받아가지고는 공장산품을 눅거리로 외상놓이를 해서 삼각재가 하늘에 치솟았다. 인위적 파괴와 경영관리부실은 급기야 공장이 파산을 선고하지 않을수 없었다. 긍지높고 자랑차던 공인계급은 일조에 무직업쟁이가 되고 말았다. 우리부부는 많은 간부와 기술인재들과 함께 퇴직처리를 당했는데, 수만의 공인들보다는 운수가 좋은 셈이였다. 퇴직월공자는 사업단위에 분배받은 동기동창들보다 5ㅡ6천원이 적었지만 수천만의 혁명선렬들을 생각하면 마음의 평형을 찿을수 있었다… 새세기에 들어선후 나라에서는 국영기업퇴직원공들의 대우를 해마다 높혀주었다. 하여, 지금은 나도 돈에 쪼들리는 고생은 별로 없는 일상을 살고 있다. 고기국보다 조밥에 시래기된장국을 더 좋아하고 세투리, 무슨둘레, 미나리, 취와 고사리 도라지를 별미로 먹는 미식가가 되였다. 앞에서 말했지만, 지금 안해의 설비슴 장만을 곁에서 보는 나의 심정은 감개가 무량하기 그지없다. 안해가 마음껏 설비슴을 하게 나는 협조를 한다. 이번설에는 어쩌다가 자식들이 다 오기로 했고 혼자 있는 가까운 친척들과 이웃친구들을 모두 초청하여 유쾌히 설을 쇠기로 했다. 설이 이젠 일주일 남짓 눈앞에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언녕 설기분으로 가슴이 설레인다. 특히 경자년올해설이 더욱 사람을 흥분에 들뜨게 한다. 주변을 살펴보면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기분들인것 같다. 나는 금년설을 맞으며 왜서 모두가 이러실가… 그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새시대를 맞아 사람들의 획득감, 행복감, 안전감이 확실히 제고 되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중화민족은 깨여난 사자며 일떠선 사자며 용맹을 떨치는 사자다! 당의 백돐을 눈앞에 보며 탈빈과 초요사회건설을 마무리 짓고 더는 남의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며 세계무대에서 떳떳한 일원이 되며 인류운명공동체 구축에서 우리가 주력이라는 자호감, 긍지감, 더욱히는 사명감으로 노력분투를 다시 한번 다짐하는데서, 설을 잘 쇠고 억척스레 해 제끼리라는 결의에서, 사람들의 기분은 흥분으로 타 오르는것 같다.   부기: 코로난지 트럼픈지 한 미친놈의 지랄 때문에 설과 대보름은 다 깨여져 버렸다. 중국에 갱길이(불덩이) 떨어졌다. 그러나 겁을 먹거나 위축을 당함은 없다. 중화민족은 각종 난관과 시련을 이겨 왔다. 지혜롭고 조직된 중화민족은 중국공산당의 주위에 굳게 뭉치여 코로나 사태를 물리치고 억세게 분발할 것이다…                                                                                                                    20.1
151    간신들에 대한 연구 댓글:  조회:355  추천:0  2020-03-11
      수필                                             간신들에 대한 연구                                                                                                                   회령 말은 젊잖고 묵중하게 연구라고 하지만 기실은 무슨 연구가 아니다. 그저 간신들에 대한 잡생각을 두루 써 본 것이다. 외국정부안에도 간신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 외국정부에도 간신이 있는것 같다. 잡아내서 총살했다는걸 봐서는. 모택동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이 있는곳에는 그 어데든 모두 다 상, 중, 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럼 어데든 다 간신이 있을것이다. 왜냐하면 간신도 사람에 속하는거니까. 내가 알아본데 의하면 간신은 하에 속하는 사람이다. 나의 수준을 가지고 남의나라간신들까지 들먹인다는건 그건 너무도 지나친 소행이고, 나는 여기서 우리나라, 그것도 요즘의 간신을 조금 말해볼까 한다. 먼저, 총론부분에 해당되는 것들을 간단히 대충 짚어보자. 중국에서는 간신이 언제부터 생겼는가? 그것은 권력이 생기면서부터 간신이 생겨났다. 간신이란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생김새에 한해서는 특별히 연구한것이 없기에 말할것이 없다. 관상쟁이들은 반골이 있으면 역적이 될 놈이라 하고 눈까풀이 앏고 할기죽거리기를 잘하며 눈치를 살펴가며 살살 눈웃음을 잘 치면 간신이나 아첨쟁이가 될거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보기에는 이런건 다 과학성이 결핍하다. 엄청난, 수준급 간신들속에도 허여멀끔하고 준수하게 생긴 놈팽이와 현숙하고 덕성스레 생긴 간녀(奸女)가 많다. 간신은 어디서 사는가? 어디에서나 다 산다. 산골에서도 살고 버덕에서도 살고 도시에서도 살고 농촌에서도 살고… 무릇 사람이 사는곳에서는 다 살고있다. 간신이 제일 많이 사는곳은 어딘가? 권력기구에 제일 많다. 권력이 큰 기구일수록 큰간신이 많다. 국제적으로 내린 홍색통집령 명단을(간신ㅡ부정부패분자) 보면 대번에 알수있다. 촌정부에서도 엄청난 간신을 볼수 있지만 고건 필경 소수다. 간신은 어떻게 사는가? 권력에 딱들어 붙어서 기생하는데, 그 목숨이 길고 짧음은 권력자의 마음에 달려있다. 간신이 되는가 충신이 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정신ㅡ 령혼ㅡ마음ㅡ심보ㅡ량심 즉 의식, 사상에 달렸다. 간신은 롱통하게 말해서 마음이 고약하고 요사하고 악착하다. 두어마디 좀 더 한다면 야심을 품고 교활하고 간특하게 아첨을 잘 하며 량면술을 잘 쓰는것이 간신이다. 그들은 속에는 칼을 품고 얼굴에는 웃음을 바르고 산다. 2천여년, 중국의 력대의 봉건왕조들에서는 간신을 잡아내고 방비하느라고 무진 애를 쓰고 안깐힘을 다 했으나 간신은 여전히 있었고 결국은 멸종을 해본적이 없었다. 신해혁명후, 민국시절에도 그랬고 사회주의사회가 된 지금의 공화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제도장치, 규률장치, 감독장치… 온갖수단과 방법을 다 사용한대도 간신은 계속 생길것이고 그것은 공산주의가 되여 권력이라는 것이 사라진 다음에야 종적이 없어질 것이다. 이건 먼 훗날의 얘기다. 때문에 간신과의 투쟁은 상당히 긴 력사시기 진행형일 수 밖에 없다. 총론부분은 이쯤하고 각론으로 가 보자. 설이 단박 다 된 대밑에 코로난지 트럼픈지 한 횡액이 터졌다! 무한은 역원지로 락인이 찍히고 사람들이 허둥거리는 사이에 전 중국대지에 전염되고 동시에 세계로 퍼져나갔다. 중국만 수라장이 된것이 아니라 세계가 불안에 떨게 되였다. 온갖 뉴스가 코로나 못지않게 기승을 부리는 와중에 나는 한가지 믿음직한 뉴스를 듣게 되였다. 그뉴스는 나를 극도로 격분케 했고 이런 잡글을 쓰게 하였다. 뉴스의 요지는 간단히 다음과 같다. “… 홍콩의 전문가들이 무한으로 급급히 달려와서 이번사태의 원인을 밝히려고 했는데… 그들은 격분하여 말하기를 자기들은 여기서 할일이 없다고, 홍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가치가 있는 인증, 물증을 몽땅 말끔히 인멸해 버렸기에 연구를 진행할수 없다는 것이였다… 처음 발병한 환자들은 어디로 전의해 갔고 온갖 동물을 먹거리로 호황을 누리던 음식점들도 텅텅 비고 문을 닫아버렸든 것이다… 무한의 역정은 이미전에 발생한 것으로 인정된다….” 뉴스에서 나는 몇가지를 추측하게 되였다. 하나는 유관 책임자가 사태의 엄중성을 알아채고 첯시작의 사실을 음만하기 위하여 선손을 썼다는 것과 그에 합심한 자가 한둘이 아니겠다는 것이다. 다음은 야생보호동물을 잡아먹는 영업은 절대로 위법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흥성흥성, 굉장하게, 상당히 긴시간 음식점을 경영하게 되였는가… 여기에도 유관부문의 관리들이 적지않게 련관이 있을것 같다. 그리고 야생동물음식점이 말끔히 청소를 하고 깜쪽같이 사라진데도 상당한 쪼간이 있다고 여겨졌다. 또 생각되는 것은 귀하게 달려 온 전문가들을 실망케 한데는 또 다른 색갈이 없는가… 나는 무한코로나사태가 3푼은 자연재앙이고 7푼은 인재리라고 생각한다. 후에가서 총결이 있겠으니까 그때보면 알수있을 것이다. 무한 코로나사태에 간신들이 아주 악랄하게 작간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몽땅 잡아내서 단두대에 올려야 한다. 당과 정부와 인민은 그렇게 할것이다.                                                                                                                       20.2
150    글을 쓰는 자세 댓글:  조회:376  추천:0  2020-02-14
      수필                                                 글을 쓰는 자세                                                                                                                         회령 청춘시절부터 문학의 푸른꿈을 안고 유명작가가 되겠다는 거창한 포부까지 품고 일기쓰기와 습작, 소재기록, 독서필기를 하기 시작하여 오늘까지 왔으니 글을 무던히도 썼다. 그간에 쓴 이런글들을 다 모아 쌓는다면, “청년생활”이나 “연변녀성”잡지만한 크기의 공책으로 높히가 두메터는 더 될것이다. 글을 씀에 있어서 나는 처음부터 내가 쓴 이런 모든글들을 다 남에게(독자) 보이기 위한 각도에서 썼다. 하지만 정작 세상에 발표가 되여서 독자님들에게 뵈인 글은 높히가 반메터쯤이나 되겠는지… 나는 유명작가는커녕 신문사통신원 수준도 못된다. 작가라는 명함자는 가졌지만 명작이란건 단 한줄도 못써봤고 우수작은 겨우 스무손가락 안에 든다. 그럼, 두루해서 발표된 작품수는 많은가? 그것도 초라하기가 그지없다. 내가 문학을 한답시고 열심히 글을 썼으나 풍작은 말도 말고 평작도 아닌 흉작을 한데는 두가지 원인이 있다. 한가지는 외인 즉 객관적원인이다. 당에서 나에게 맡겨준 사업은 의료사업이였는데 밤낮 환자를 끌어안고 명절이고 휴식일이고 따로없이 헤매다보니 문학을 쥐고 춤출새가 정말 없었다. 때로는 대채학습공작대로 병원을 떠나 하향을 했는데 여가가 좀 있으려니 했다. 그런데 웬걸?! 그건 더 고달픈 일이였다. 낮에는(어떤때는 달밤에도) 사원들의(농민들) 앞장에 서서 전간로동을 해야하고 밤에는 기본상 매일 사원대회가 아니면 대대(촌)회의, 공사(향)회의에 참가해야 하는데 회의가 일찌기 끝나면 밤 11시, 12시고 혁명열의가 냅다 올리솟아서 회의를 할때면 새벽두세시 혹은 아주 아침때까지 하였다. 문학이 다 뭔가… 하지만 문학에 대한 지향을 버릴수 없어서 “조선문학”이거나 소설책을 조금씩 들여다 보면 전업사상이 틀렸다느니, 개인명리주의라느니 하면서 말썽이 생기기도 하였다. 하다보니, 나는 정년퇴직을 할때까지 별로 문학을 하지 못했다. 다음은 내인 즉 주관적원인이다. 나는 글을 쓸때 꼭 사회적효과를 념두에 두며 글을 쓰는 버릇이 있다. 내가 말하는 사회적효과란 이 글을 보는 독자님에게 다문 한가지라도 리익되는것이, 도움이 되는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사회적효과를 항상 만족되게 완성하지 못했다. 문학작품은 사상성, 예술성, 지식성, 취미성, 오락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기본은 사상성과 예술성일것이다. 사상성과 예술성이 유기적으로 잘 배합이 되여야 좋은작품이 될것이며 따라서 사회적효과가 높을것이다. 그런데, 나는 편면적으로 사상성을 중시하다보니 애매모호하거나 엉뚱한 궤변을 하거나 너접절한 글이거나 무슨말을 하려고 이런글을 썼는가? 무슨목적인가?... 이러루한 질책을 받을수 있는 글은 종래로 쓴적이 없다. 말하자면 사상이 명확하고 주제가 선명했다. 하지만, 예술성은 따라가지 못해서 화려한 옷을 입힐대신 벌거벗은 알몸뚱이가 그대로 드러날때가 많았다. 하다보니 편집선생의 충고를 받기도 했지만 발표된 작품은 얼마되지 못했다. 나는 사상성, 예술성이 미끈한 사회적효과성이 높은 글을 쓰기위하여 많이 노력하려고 한다.                                                                                                                           20.2
149    생진소감 댓글:  조회:401  추천:2  2020-02-04
      수필                                                  생진날에 느낀 소감                                                                                                                      회령 나는 조상님들께옵서 규정하신대로 회갑, 진갑을 쇤후부터는 해마다 생진을 쇠였다. 여러해를 그러다보니 그게 무슨불문률처럼 되여 생진밑이 되여오면 원근에서 친척과 친우들이 전화로 이번생진은 어디서(장소) 몇시에 쇠는가고 물어온다. 물론 덕담을 먼저하고. 나는 재직시에는 생진을 한번도 쇠지 않았다. 모택동주석처럼 하느라고 그런건 아니고 당의 생활규률에 떠벌려 랑비하며 관혼상제를 번지르르하게 차리며 소란을 떨지말라는 신칙이 있었든것이다. 나는 생진도 그속에 속한다고 인정하고 쇠지않았다. 그리고 젊디젊은 녀석들이 생진이요 뭐요하며 부산떠는걸 나는 부모님들 앞에서 버르장머리가 없는 소행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누가 생진을 쇤다며 청하면 가급적 제때에 가서 축하한다고 너스레를 떨며 술잔을 얻어 먹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리 거뿐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이상하다. 옛날에는 로인님들의 생신을 정중하게 크게 온동네가 다 모여 경하를 하였지만 지금은 반대로 로인님들은 집에서 조용히 생신일을 보내고 젊은이들은 2차, 3차. 최고로는 6차까지 거리를 누비며 연회청, 노래방이 깨여져라 부셔져라 질탕 뚜드려 번진다고 한다. 총결은 사우나에 가서 엎어진다고 하는데, 오뉴월에 외를 꺼꾸러 쥐고 먹든 바로쥐고 먹든, 갓쓰고 두루마기 입고 뒤를 보든 앞을 보든 그게 다 인권자유며 내돈갖고 내맘대로 하는데, 누가 감놔라 배놔라 하랴마는, 인간세상에는 고금중외 규례라는 것이 있다. 나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규례를 좀 알았으면 싶다. 언귀정전, 금년에 나는 생진을 쇠지 않았다. 그것은 90대 고령의 장모님께서 소환으로 위중하신데, 내가 생진을 쇤다는 것이 전혀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진날 나는 구역쉼터 걸상에 혼자 앉자서 조용히 명상에 잠기였다. 처음에는 래일모레면 100세인 장모님의 한생을 돌아보았다. 나의 안해가 7남매에서 맏이다보니 나는 이래저래 가시집일에 참녜가 많았고 장인과 장모는 나를 기둥으로 여겼다. 나의 가시집은 향에서 제일 가난한 집이였다. 두분은 광복이 나기 얼마전에 결혼을 해서 개혁개방전까지 엄청 고생을 하며 향에서는 제일 가난한 집으로, 말그대로 거지나 다름없는 살림을 하여왔다. 여북하면 나에게 하여주는 밥쌀을 이웃집에서 꿔다가 하였겠는가?!...... 장인님은 한평생을 고생하시다가 상세날때도 가장 고통스럽다는 이선암으로 세상을 하직하셧지만 장모님은 장인께서 세상을 뜨신후 30여년을 만복을 누리며 오늘까지 오셧다. 그것은 7남매가 하나같이 모두 개혁개방덕에 잘 출세를 해서 옛말을 하게 되였기 때문이다. 기억력이 좋고 말씀을 잘하시는 장모님은 나를 붙들고 지나간 일들을 자주 많이 이야기해 주었다. 오늘 장모님의 이야기를 두루 되새기며 나는 무량한 감개를 금할수 없었다. 명상은 저도 모르게 나에게로 옮겨졌다. 생진날이다보니 자연스레 어머니가 회상되였다. 오늘은 어머니의 고생일이지… 어머니를 생각할때마다 나는 두가지 큰 유감으로 마음이 무척 쓸쓸하고 괴롭다. 어머니는 나를 키우시며 늘 이런 말씀을 하시였다. “너는 후에 큰사람이 되여라.” 나는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실때마다 말뜻은 모르지만 “예!”하고 힘차게 대답하였다. 그것이 재미있었는지 어머니는 자주 그런말씀을 하시였다. 소학교 시절에는 선생님들께서도 그런말씀을 우리들에게 곧잘 하였다. 소학교때 어느날 나는 어머니에게 “큰사람”이란 어떤사람인가고 진지하게 물었다. 어머니는 대답하시기를 큰사람이란 좋은일을 많이 해서 사람들께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선생님들은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내가 선생님들의 말씀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리니 어머니는 그런 큰사람은 싫다면서 하지말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본 벼슬하는 사람이란 해방전에는 백성들과 눈알을 부릅뜨고 호통질하는 사람들이 였고 지금은 마을에 펀뜩 나타나서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향에서 온 하향간부 였다. 두메산골에서 태여나고 자라고 시집을 가고 농사일만 한 어머니의 견문이란 이정도 뿐이였다. 어머니는 벼슬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뒤통수에 욕사발이나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고 그렇게 사는것은 죽기보다 못한것이 라고 하시였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깊히 명심하며 앞으로 꼭 어머니가 당부한, 바라는 그런 큰사람이 되리라 다짐하였다. 그러나 나는 다짐을 실현하지 못했다. 상급으로부터는 항상 우경보수사상이 엄중하다고 비판을 받았고, 때로는 마음에는 달통이 되지않지만 군중들을 강박해서는 뒤통수에 욕사발을 달기도 했다. 돌아보면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만한 좋은일을 한것은 별로없고 아쉬움만 남기며 평생이 지나갔다. 왜서 당년에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일하지 못했든가… 이것이 하나의 큰 유감으로 어머니에게 죄송하며 나로서는 영원한 한이다. 두번째 유감은 나는 이후 크면 어머니 아버지에게 끔찍히 효성하겠다고 어릴때부터 늘 생각하였다. 그때는 아이들에게 례모교육, 도덕교육, 효도교육과 계발이 생활화가 되여있었다. 밥먹을 때도, 어른들 앞을 지나갈때도 왜서 어찌어찌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에게 효도할 기회를 전혀 갖지못했다. “자욕양이 친부대”(자식이 모시려 하니 부모님이 기다려 주지 못하누나.)라는 말이 어쩌면 나에게 딱 맞띄우는가?! 내가 공작에 금방 참가하고 금방 결혼하고 첯애기를 보게된 일주일전에 어머니는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셧던 것이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얼마나 한탄하였는지 모른다… 내가 어머니에게 드린 효도는 겨우 한가지 뿐이다. 그것은 까마귀의 반포지은을 본받아 첯월급을 받은날 단위에서 호조금을 꿔 백원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부쳐보낸 것이다. 무심한 세월은 많이도 흘러갔다. 지나간 인생을 돌아보니 보람보다 아쉬움과 후회가 더 많다. 제일 큰 아쉬움과 후회는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일하며 생활하지 못한것이다.                                                                                                                                                                             19.11.
148    애국주의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303  추천:0  2020-01-03
        수필                                          애국주의에 대한 생각                                                           ㅡ건국 70주년에 즈음하여                                                                                                                        회령 애국주의는 세계 어느나라 국민들에게나 다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량심적이고 가장 도덕적이고 가장 의무적인 정신적, 사상적, 정치적, 감정적, 행위적, 리론적, 실천적 주의의 하나다. 복잡한 가장 가장, 무슨적, 무슨적 하는 식을 피우는 말들을 걷어치우고 단마디 명창으로 간단히 말한다면 애국주의란 조국과 인민에 대한 충성과 사랑, 헌신과 복무를 말한다. 그것은 위대한 정신이며 심후한 감정이며 빛나는 사상이며 고상하고 보귀한 행동이다. 국가는 매개 국민들의 삶의 보금자리다. 너무도 상식적인 말이긴 하지만 보금자리가 없으면 사람은 살수없다. 보금자리는 생명과 같다. 아니,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 하여 “한줌의 흙이 목숨보다 더 귀중한줄 나는 알았네!”라는 노래말까지 있게 되였다. 사람들은 자기의 귀중한 보금자리인 집ㅡ마을ㅡ고향ㅡ조국과 가족 ㅡ이웃 ㅡ민족 ㅡ인민을 사랑하며 가꾸며 지킨다. 나라의 흥망성쇠, 생사존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을 수행하는 원동력은 곧 애국주의다. 나라를 번영창성하게 만드는 관건적인 요소에는 물론 여러가지가 있지만 핵심은  애국주의라고 할수 있다. 애국주의는 강력한 힘이다. 국민의 애국주의 정도가 나라의 전도를 결정한다. 우리는 그 생동한 실증을 수없이 많이 알고 있다. 기세충천하던 “항미원조 보가위국” 조선전쟁 당시 1952년 10월 더 없이 가렬처절하던 상감령전투에서 특급전투영웅 화계광은 두번이나 중상을 당한 몸이였지만 자기의 피끓는 가슴으로 호랑이처럼 덮쳐들어 적의 또치까 화구를 막고 돌진의 길을 열었는데, 그때 22살짜리 농촌청년 황계광의 머리속에는 무슨 생각이 있었겠는가? 그는 특급전투영웅이 한번 되여보겠다는 생각이거나 모범당원이 되여 붉은꽃을 가슴에 달고 큼직한 상장을 받아보겠다는 생각같은건 털끝만치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이 전혀 그런 한가한 궁리를 해볼 계제가 없었든 것이다. 그럼 무슨 생각이 황계광으로 하여금 가슴으로 적의 또치카 화구를 막게 했는가?! 두말할것 없이 그것은 애국주의 정신과 사상의 자연적, 본능적 폭발이였든 것이다!... 한가지 실례를 더 보자. 역시 조선전쟁때다. 미군을 위수로 한 련합군이 인천상륙을 거쳐 압록강변까지 쳐 들어 왔을 때다. 놈들을 섬멸하기 위하여 지원군은 대포위작전을 진행하였다. 지원군의 정면타격을 받은 미군륙전사와 보병7사단은 전선이 붕괴되자 대량의 탕크와 대포의 엄호하에 포위를 뚫자고 발악하였다. 놈들이 도망치려면 반드시 한갈래뿐인 사응령 밑에 있는 신작로를 통과해야 하였다. 지원군 모 부 3련은 명령을 받고 사응령으로 달려 갔는데, 도착해 보니 그곳에는 이미 지원군 한개 련이 지키고 있었다. 3련이 전투임무를 교대받자고 보니 이런 기막힌 일이 있을수 있는가?! 그들은 몽땅 얼어 죽었든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전투태세였는데, 구식보총의 총구는 일제히 령아래 신작로를 겨누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3련의 전사들은 모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들옆에 엎드려 전투준비를 하였다. 세계전쟁사에서 극히 드문 비장한 이 정경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 또 하나의 실증을 더 본다면, 흑룡강 대경들판에서 지난세기 1960년 4월 석유대회전을 할때다. 때는 령하30여도의 혹한겨울이였다. 그날, 1205시추대 대장인 왕진희는 몹시 상한 다리임에도 불구하고 시추장에서 얼음물탕속에 뛰여들어 세멘물을 교반기처럼 휘저었다. 당시는 황계광때처럼 분초를 다투는 화급한 상황이였다. 그것은 두번째 시추가 700메터까지 들어갔을때 강력한 분출이 발생했든 것이다. 시추작업을 제때에 완성하기 위하여 왕진희와 그의 대원들은 혹한을 헤아리지 않고 악전고투를 하여 분출을 막았다. 후에 어느좌담회에서 왕진희는 요지 이런발언을 한바가 있다. “후에 로동모범이 되여 철인 왕진희라고 들썽 소문을 내며 모주석을 만나뵙겠다는 그런생각을 하지못했다. 그저 빨리 구멍을 막고 나라의 석유대회전이 승리해야 한다는 다급한 생각뿐이였다… 20년을 적게 살더라도 나라가 허리를 펴게 하여야 한다는 생각뿐이 였다…” 석유대회전은 쑈련수정주의의 압력을 맞받아 치는 애국적전쟁이였다. 왕진희의 말을 들어보면 그때 그의 머리속의 산사상은 확실히 애국주의 하나뿐이 였다. 하나 더 본다면, 세계급 1류 과학가들인 리사광, 화라경, 전학삼 등이 훌륭한 사업환경과 매우 우월한 생활조건을 단호이 버리고, 지어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한것은 역시 애국주의 그 자체였다. 공화국 창건이래 우리당에서는 애국주의 교육을 국민들에게 줄곧 꾸준히 하여왔다. 공화국과 함께 자라 온 우리70대세대들만 보아도 잘 알수 있는데, 코흘리개들이 소학교문에 들어서서부터 피끓는 청춘으로 대학문을 나설때까지 당에서는 우리들에게 “3호학생”(지덕체), “사회주의 건설사업의 후계자로, 인재로 성장되여야 한다.”고 가르켜 주었다. 당의 교시대로 노력분투하는것이 그때는 우리들의 유일의 임무였고 목표였고 그것이 곧바로 애국주의 였다. 당의 부름에 따라 사업에 종사하여서부터는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마지막 한방울의 피까지 다 바쳐 노력분투하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자!”는 당의 교시가 우리들의 종지였다. 그것은 우리들의 초심이였고 사명이 였다. 그것은 또한 바로 우리들의 애국주의 였다. 이렇게 우리들은 당의 교양하에 애국주의자로 성장하였다!... 공화국의 70년 세월에 수천수만의 애국적 영웅인물들이 방방곳곳, 각행각업에서 용솟음쳐 나왔고 지혜롭고 근로한 수억만 인민들은 보금자리 건설에 줄기차게 열심히 피땀을 아낌없이 이바지 하였다. 이렇게 우리들은 당을 따라 초심을 잃지않고 사명을 명기하며 애국주의 기치를 높히 들고 오늘 여기까지 왔다… 세인들이 찬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지만, 주지하다싶히 70년세월에 중화대지는 천지개벽의 발전을 가져왔다! 일떠선데로부터 부유함을 이루었고 지금은 강성대국으로 달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만족하지 않는다. 중화의 꿈, 민족부흥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애국주의 기치를 더욱 높히 들고 노력분투하며 힘차게 전진할 것이다… 70대의 우리들은 이젠 석양의 붉은노을로 서쪽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우리들이 붉은노을로 찬란한 빛을 뿌리며 불타는 것은 가슴에 초심을 품고 사명을 명기하고 있기 때문이며 있는 힘껏 여력을 나라와 사회의 유익한 일에 공헌하기 때문이다. 70고래희라는 옛말이 있긴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습근평새시대는 60이 청춘이고 100세 시대다. 70대부터 어떤사람들은 “성 쌓고 남은돌이요… 이제 무슨일을 하겠소…” 하며 저절로 맥을 버리는데, 이러면 나라에 미안하고 사회에 미안하며 자신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70대의 우리들은 로익장의 우세를 발휘할 수 있으며 발휘 하여야 한다!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 우리들은 등산도 하고 문구도 치고 광장무도 추고 낚시도 하며 독서도 하고 로년대학에도 다니고 기타 다양한 취미생활을 하며 주민구 위생, 안전, 치안순라도 하며 불우이웃을 돕기도 하고 자녀들의 뒷바라지도 해주고… 가정과 나라와 사회에 부담을 적게 줄뿐만 아니라 나름껏 여러가지 공익사업에 공헌도 할수 있다… 하지만, 우리모두가 꼭 해야 할 일이 한가지가 있다. 그것은 후대들에게 애국주의정신, 사상을 전수하는 실제적 행동이다. 가정에서, 주변에서, 사회에서 력사와 전통을 말하며 애국주의 정신과 사상을 선전하며 제창하며 고양해야 한다. 후대는 나라와 인민들의 희망이며 미래다. 현실을 실사구시적으로 관찰할때 우리는 일부 사람들의 애국주의정신, 사상이 모호하거나 희박하거나 없어졌다는 것을 승인하지 않을수 없다. 개인리기주의와 배금주의사상이 극도로 팽창된 결과 국가의 돈, 인민의 돈을 훔쳐가지고 외국으로 도망친 반역자, 도둑놈, 망나니들인 부정부패분자들은 말할것도 없지만, 어디가 나에게 좋으면 어디가 곧 나의 보금자리라고, 누가 젖을 주면 누가 곧 엄마라고 생각하며 지어는 우겨대는 배은망덕한, 얼떨떨한 사람들이 일정하게 있다. 이런 현상을 중시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들은 애국주의정신과 사상을 선전 교양하는 당의사업에 능히 일조할수 있는 일정한 능력이 있기에 적극 행동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들의 보람찬 일이며, 의무이며, 여생의 가장 자랑스러운 공헌이다. 이면에서 우리들에게는 좋은 본보기가 많다. 연변 왕청에 있는 “시대의 본보기”, “전국차세대선진공작자”, “길림성제5기도덕모범”, “길림성좋은사람2015년도인물”등 영예의 칭호를 받은 김춘섭이 바로 그중의 하나다. 김춘섭은 2005년 정년퇴직한후 왕청현차세대관심위원회 주임을 하면서 신근하게, 참답게 사업을 잘 하였다. 그는 10여년내에 1300여만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77좌의 혁명선렬기념비를 세웠고 “왕청항일전쟁기념관”, “소왕청유격근거지”등 여러곳의 홍색교육기지건립에도 적극적인 협조를 하였다. 김춘섭은 말하기를 “후대들이 력사를 더 많이 알게 하기 위하여 일하는 것은 피로하긴해도 기쁘다… 지금 내나이는 적지않다. 긴박감이 든다. 살아 있을때 더 많은 일을 하고저 한다.”고 하였다. 평범하고도 간단한 그의 말은 우리들에게 주는 계발이 크다. 그가 하려는 더 많은 일이란 두말할것 없이 곧 애국주의를 전수하는 것이다.  김춘섭은 우리들의 모범이며 자랑이다. 우리는 그를 힘껏 따라배워야 한다. 우리들이 항상 초심을 되새기며 수시로 사명을 명기하며 애국주의 고양사업에 능력껏 꾸준한 실천을 한다면 석양은 더욱 아름답게 길이 길이, 붉게 붉게 타 오를 것이다!...                                                                                                                             19.3
147    로년의 자세(6) 댓글:  조회:228  추천:0  2019-12-30
                                           로년의 자세 (6 )                                                                                                                 회령  건강관리 지금 가장 많이 류행되고 또 실제로 중시를 받으며 실천되고 있는 말인즉 바로 건강관리라는 것이다. 개혁개방전에는 건강관리라는 말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야말로 말그대로 남녀로소가 다 건강관리라는 말을 보통말로 쓰고 있다. “엄마! 아빠!” 하며 두어마디 말을 외우는 아기도 “할무니 건강관리 잘 해!” 하며 세배를 한다. 물론 애기는 제 엄마 아빠가 시키는 대로 앵무새를 했겠지만, 보다싶히 건강관리라는 말은 널리 보급이 되였다. 그리고 점점 더 크게 실천되고 있다. 그원인은 생활이 제고된데 있다. 건강관리 모습을 가장 감동적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은 두곳에 있다. 하나는 광장무판이고 다른 하나는 등산길에서이다. 건강관리에 나선 사람이 굉장히 많다. 가히 인산인해라고 할수도 있다. 그런데 이 두곳의 특점을 본다면 절대 다수가 로년층이라는 것이다. 북적거리는 수영장도 건강관리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거기에는 아이들이 많다. 지금 로인들이 건강관리에 열중하는데는 데체로 두가지 리유가 있는것 같다.. 첯번째 리유는 건강장수하려는 것이다. 로인들은 지나간 세월은 고생하며 헛살았다고 한탄하며 지금의 좋은 세상에서 오래 살고싶어 한다. 이것이 가장 많은 직접적인 리유겠다. 다음 두번째 리유는 곁에사람과 자녀들에게 시끄러움과 부담을 될수록이면 적게 줘야겠다는 데서이다. 보건양생 즉 건강관리에는 동서고금 수천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가 쉽게 보는 먹는 방법을 보면 생것을 먹는것 푹 익혀서 먹는것 말려서 먹는것 물, 식초, 술, 지어는 뜨물, 오줌에 한동안 불궈서 그 물이며 건더기를 먹는다는둥 건더기도 그저 쫍쫍 우등우등 먹는게 아니라 노랗게 구워 먹는다는둥 까맣게 태워 가루내여 꿀에 반죽하여 먹는다는둥 밥가마에 넣어 쪄서 먹는다는둥 까마귀고기와 함께 어떠어떠하게 료리를 해서 먹는다는둥… 수십가지다. 운동류도 살펴보면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죽어라 배를 뚜드리는가 하면 엉덩짝을 쇠궁둥이보다도 더 호되게 뚜드려 대고 전신을 사정없이 족치는데 그건 12경락을 열어주는 운동이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그런가 하면 잰내비처럼 반나절을 철봉대에 거꾸러 매달려 있고 말승냥이처럼 선자리에서 푸들쩍 푸들쩍 뛰며 왱ㅡ 왱ㅡ 있는힘껏 소리를 지른다. 땅바닥에서 뒹구는 사람, 자갈돌밭에서 깡충깡충 뛰다가는 힌들 나자빠 지는 사람… 벼라별 신기한 동작들이 다 있다. 어느것이 과학적이고 어느것이 비과학적인지, 어느것이 어떤사람에게 좋고 어떤사람에게는 불리한지 아직까지는 권위적인 참고서가 나오지 않았다. 관건은 실천해 보면서 자기몸에 적절하고 느낌이 좋으면 그것이 곧 나에게는 알맞는 것이며 좋은것이다. 방법을 선택한 후에는 견지하는것이 건강관리에서는 결정적 작용을 한다. 건강관리는 방법에서는 수천가지지만 실천상에서는 일찌기 그리고 습관화가 된 견지다 로년기에 와서야 비로서 건강관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한다는 것은 일찌기 하기보다는 아쉬운건 사실이지만 좋은 일이다.                                                                                                                   19.9
146    로년의 자세(5) 댓글:  조회:248  추천:0  2019-12-27
                                                로년의 자세 (5 )                                                                                                                        회령  내리사랑 사랑에서 제일 보편적으로 존재하는것이 내리사랑이다. 즉 로인들의 후대에 대한 사랑이다. 로인들과 물어보면 후대는 다 귀엽지만 손군들이 더욱 귀엽다고 하는데 그건 나도 그렇다. 혹 자식보다는 좀 못하다는 로인들이 있기도 하다. 자식들을 더 고와하든 손군들을 더 고와하든 후대들을 고와하며 중히 여기는 면에서는 로인들이 다 같다. 이것은 로인들이 갖고 있는 애정이다. 그것은 선천적 본능에다가 후천적 의식이 결합되여 형성된 본성이다. 로인들에게 내리사랑은 다 있지만 그 깊히는 부동하다. 어떤로인들의 사랑은 혈육의 정에서 머무는데 나무릴것은 없지만 좀 더 제고된 사랑이였으면 싶다. 후대는 나의 후대이며 가족의 후대이며 나아가서는 나라의 후대이며 민족의 후대다. 이건 정치적인 큰소리를 치는것이 아니다. 실제적 상황이다. 때문에 로인들의 내리사랑은 일정하게 사상정치성이 있어야 한다. 로인들은 후대들에게 사람으로서의 기본소질인 례모, 도덕, 품행을 가르켜 줄뿐만아니라 력사와 전통을 가르켜 주며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심어줘야 한다. 이렇게 하는것이야말로 표준적인 내리사랑이라 할수있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오고 가고 주고 받고 하는것이다. 일방적인 사랑은 극히 적다. 로인들의 내리사랑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랑의 선후를 볼때 로인들의 내리사랑이 먼저다. 지금 사회에서 말썽이 많은 “올리사랑”(효도)도 내리사랑이 있은 다음에 있는 사랑이다. 일전에 이런 기막힌 뉴스를 들었는데, 참으로 울지도 웃지도 몰할 일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상해에서 직장을 찿은 처녀애가 부모에게 한 최후통첩이란것이 다음과 같았다. 처녀애는 갓 입사를 했기에 월급이 7000원인데 남자애와 동거를 하겠는데 월 5000원의 집세를 보내라는 것이였다. 그러지 않을때는 법적으로 부모자식관계를 끊는다는 것이였다. 딸애는 전화로 지금까지 나에게 해준것이 무엇이며 내가 낳아달라고 했는가고 들이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의 부모들은 통첩을 받고 아뜩해서 기절할 지경이였다. 하지만, 처녀애의 부모들은 입이 광주리구멍만해도 한마디도 할말이 없었다. 그들은 쉰살이 돼서부터 외국로무를 들락거렸는데 남편은 외국에서 번 돈을 현지처와의 새살림 재미에 다 탕진하고 안해는 시가지에 들어가 몸을 들이대며 마작으로 “쑈싸”(향락, 멋)를 했다. 결국은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산골 농촌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병만 남은 거지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생활밑천이란 밭뙈기를 세를 준 몇푼뿐인데 월 5000이라니! 대학에 붙은 딸애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래도 살펴주고 대부금으로 공부를 용케 마친것이다. 속이 다 타버린 할아버지 할머니는 동네사람들의 신세로 선후해서 서산기슭으로 갔다. 이 집의 상황은 내리사랑이요 올리사랑이요 하고 운운할 여지도 없는 형국이긴 하지만 사람들에게 많은 느낌과 사색을 불러준다. 로인들의 내리사랑은 보귀한 것으로 명심할바이다.                                                                                                          19. 8  
145    로년의 자세(4) 댓글:  조회:212  추천:0  2019-12-23
                                               로년의 자세 (4 )                                                                                                                     회령 경험과 교훈 나이 많은 령도간부들이 사망하면 추도문에서 꼭 나오는 한마디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당과 국가의 엄중한 손실”이라는 구절이다. 령도벼슬에 있으면서 존경을 받던 로인이든 산골화전민으로 땅을 뚜져먹던 로인이든 사망하면 일정하게  엄중한 손실, 혹은 손실이 있다. 그것은 보귀한 경험과 교훈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세상시람이 다 아는바이지만 로인들에게는 풍부한 사회적 가정적 인생경험과 교훈이 있다. 허다한 격언과 성구, 명언들은 로인들의 경험과 교훈, 지혜를 보여준다. 지내보면 조상님들의 가르킴이 하나도 틀리는 것이없다. 현실적으로도 로인들의 말씀을 명심하는가 안하는가에 따라서 잘되고 못되는 현상을 흔히 보게된다. 로인들의 좌석에서 나온 말이다. 리령감의 아들은 어느진에서 지금 당위서기로 사업하는데 나이는 방금 쉰살이다. 그의 아들은 청년시절에는 모 국영기업에서 공청단 단위서기를 했는데 사업을 참답게 잘해서 지구와 성의 모범단서기 표창을 여러번 받았으며 중앙단교를 졸업한 후에는  전국소수민족청년간부후계자 배양에 뽑혀(성내에서 단 한명) 절강성에 가서 2년의 단련실습을 하기까지 했다. 단련이 끝나 기업에 돌아온후 2년이 지나도 웬일인지 직무는 여전히 단위서기였다. 그러다가 멸달후에는 창장판공실주임으로 안배되였다. 새로운 강위에 가서 반년  남짓 지난후 기업은 파산을 했다. 파산이 되니 어제까지도 일체를 령도하던 공인계급이 일조에 말그대로 무직업, 무자산, 무산계급이 되고 말았다. 정부에서 당위서기, 창장 등 몇사람은 직업을 안배 해 주었는데 다행이도 리령감아들도 거기에 끼이게 되였다. 원래는 헴에 없었는데, 성과 지방의 단위에서 유관 령도와 부서에 입김을 넣었다는 뒷말이 있긴했으나 하여튼간에 리령감아들은 지방당위에 안배를 받았고 한달 남짓해서는 당위판공실 부주임이라는 벼슬자리에 앉게 되였다. 리령감아들은 1년남짓 지나서 지금의 산골농촌진으로 진장이라는 벼슬로 조동을 했다. 그후로부터 만 10년세월을 리령감의 아들은 진장을 두기, 당위서기를 두기채 하고있다. 그간 그는 각항사업을 잘해서 성과 지구의 표양을 수차 받았고 어떤표양은 중앙의 령도가 직접 한것도 있다.  “선진공작자”, “모범당원”등 영예의 칭호도 받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리령감아들은 10여년의 벼슬길에서 겨우 반급의 승진밖에 하지못한 것이다. 그리고 산골에서 10년세월을 살고있다. 내남이 다 아는바이지만, 사실은 이상할것도 없었다. 리령감아들에게는 “뒷심”이 없었고 “배경”이 없었던것이다. 그는 당장규정대로, 당원간부수칙대로 하기에 명심했고 열심히 “위인민복무”를 했을뿐이 였다. 친구들이, 가까운 친척들이 “적당히 좀 먹이라!”고 내놓고 권고를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누구에게 먹이지도 않았고 받아먹지도 않았다. 그에게 들어온 “미끼”도 대충 꼽아봐도 100여만원은 쉽게 되였다. 그는 누구못지않게 부정부패의 생리를 환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몸을 깨끗히 지켜왔다. 그가 이렇게 “독야청청”한데는 리령감의 역활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리령감은 한뉘 농사군으로 산골에서 살았지만 오랜 당원으로 지부에서 조직위원벼슬, 대대(촌)치보주임벼슬을 몇해 한적도 있다. 그는 습관적으로 자식들이 기여다닐때부터 례모, 도덕, 품행에 대한 “잔소리”를 매일 혹은 짧게 혹은 길게 하여왔다. 셋째아들이 기업에서 단위서기를 할때부터는 기회만 생기면 “사상정치과”를 즐겨 하였는데, 신기한 것은 다른자식들은 듣는둥 마는둥이 였지만 세째만은 흥미진진해서 듣는것이 였다. 하다보니 리령감의 강의는 셋째를 만나기만 하면 더욱 다채롭게 진행되군 하였다. 그의 강의는 문건적인 것이거나 리론적인것은 별로 없고 절대부분이 생동한 실제사실들이 였는데 거기에는 그야말로 아주 보귀한 경험과 교훈이 꼭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부분이 조상님들의 교시말씀으로 표달이 되여 인상이 깊고 오래 기억이 되였다. 례하면 “열형리를 친하느라 말고 제한몸을 지켜라.”, “죄는 지은대로 가고 덕은 닦은대로 간다.”,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다.”등등. 리령감아들친구들이 시에서 서기요 국장이요 벼슬한 사람들이 10여명이 되는데 선후로11명이 락마를 하였다. 그중에서 둘은 감옥으로 가기까지 했다. 리령감의 아들 등 3명은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로인들의 말에 의하면 재미있는 현상이 있었다. 그것은 락마한 11명은 모두 조실부모했고 곁에 이상분이 없다는 것이였다. “문제가 없다.”의 3명에게는 부모가 있는데 신통한것은 그 부모들인즉 모두가 리령감과 비슷한 로인들이 라는것이다. 한사람이 착오를 범하는가 안 범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자신의 저항력에 달린문제다. 저항력은 자동면역과 피동면역으로 형성되는데 로인들의 풍부한 경험과 교훈은 피동면역력제고에서 매우 보귀한 역활을 한다.                                                                                                                   19. 8
144    로년의 자세(3) 댓글:  조회:233  추천:0  2019-12-20
                                                  로년의 자세 (3 )                                                                                                                    회령 자사자리 강령감내외는 이젠 80고개를 넘어선 로인네다. 그들에게는 아들 며느리, 딸과 사위가 있는데 모두 가까이에 있다. 강령감은 고급공정사 직함을 갖고있고 로친네는 건국 한두달전에 우전국에 림시로 들어가서 심부름을 하며 밥벌이를 하였는데 그것을 언턱으로 등 대고 리휴공 대우를 받는다. 하다보니 두 늙은이의 가정 월수입이 근 만원이 된다.그들은 해마다 7ㅡ8만원의 저축을 하며 유족한 생활을 하였다. 근년에 두 늙은이가 이러저러한 병으로 고급병방에 입원해서 몇번 치료를 받은바는 있지만 자기호주마니 돈은 1전도 쓰지 않았다. 아들 며느리가 일체 주선을 다 했고 비용을 전부 결산했기에. 의료보험으로 결산하다보니 너무 많은 돈은 들지 않았다. 강령감내외는 친자식은 하나도 없고 강보에 싼 남자애와 녀자애를 키웠는데 친자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었다. 그런데 자식들이 커 가면서 특히는 시집 장가를 가면서 부모 자식간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최근에 와서는 상당히 험악해 지기까지 하였다. 몇달전, 정부에 공무원으로 출근하던 손녀가 뜻밖의 교통사고로 엄중한 외상, 내상을 당했는데 구급수술을 한후 10여일 구급을 거쳐 겨우 목숨을 구했다. 환자가 보통렬차로 움직일수 있게되자 성병원에서는 북경 중앙병원으로 이송하였다. 그후 1년이 거이 되는 기간에 갔다 왔다 하면서 모두 3차의 대수술과 치료를 거쳐 손녀는 기본상 치료가 되고 지금은 휴양을 하는 중이다. 아는 사람들은 사람마다 천명이고 기적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의사들이 더욱 혀를 내 두르며 놀라고 감탄하였다. 이렇게 뜻밖의 재난을 당하다보니 아들내외와 친인들의 마음고통은 그야말로 일구난설이였다. 2년이 거이 되는 그간 외가집을 비롯하여 모든 친척들은 있는 힘껏 경제부조를 사심없이 하였고 친우들과 단위들에서도 원조의 사심없는 손길을 뻗쳐 주었다. 부조로 들어 온 금액은 20여만이 되였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처음의 구급치료비나 겨우 되고, 아들네는 모든 밑천을 다 들이 밀며 치료하는 한편, 은행과 벗들에게서 돈을 빌리기에 동분서주 하였다… 그런데, 친할아버지 할머니인 강령감내외는 어떠했는가? 그들은 손녀가 상해서 구급실을 거쳐 북경병원으로 갈때 처음으로 성병원에 보려 가면서 만원돈을 가지고 갔는데, 그것은 자기네와 딸의 성의라고 했다. 그런후로 부터는 성병원으로 다니든 북경병원으로 다니든, 가던, 집에 왔던… 전혀 보려 다니는 법이 없었고 1전 한푼 쥐여주는 법이 없었다. 2년이 거이 되는 지금까지 손녀가 어떠냐고 건 전화는 모두해서 다섯번도 되지 않는다. 반면에 령감은 다리가 아프다고, 로친은 눈이 어떻다고 하면서 지금 경황없이 헤매는 아들더러 성병원에, 좋기는 북경병원에 가서 병을 보이게 하여달라고 전화를 하였다. 그때는 아들내외가 딸을 데리고 두번째로 북경병원에 갔을때다. 아들은 친구에게 부탁하여 성병원에 가서 우선 보이게 안배를 하였는데 진찰결과 별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강령감 내외는 흡족해서 발편잠을 잤다. 싱거운 사람들이 강령감내외와도 물어보고 아들네와도 물어보며 열성을 발휘했는데 그들의 조사연구보고를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남의 가정일에 삐치는건 실례이기에 대충 얼버무려 전달코저한다. 강령감부부의 인정머리 없는 처사ㅡ 도무지 리해할수 없는 처사의 근본원인은 선천적인 부모정의 결핍이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형제고 자식이고 다 쓸데가 없다고 하였다. 령감은 형제가4남매고 로친은 3남매가 되지만 서로 래왕하지 않는다. 자식과도 자기에게 필요하면 자식이라고 찿고 조금이라도 부담스러우면 짜증을 낸다. 소학교로부터 고중까지 손녀애는 줄곧 외가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는데, 고중을 다니던 어느날이다. 그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이삼일 외출을 하게 되여 손녀애는 자기 할머니집으로 점심먹으려 갔다. 할머니는 아주 못마땅해하며 “너네에미는 점심밥을 할줄 모른다니!”하고 짜증을 냈다. 손녀애는 그걸음으로 나와서 곧장 학교로 갔다. 얼마전에는 손녀애가 출근하며 들고다니던 꽃양산을 너무도 부러워 하여 손녀애는 그것을 가지라고 하였는데, 할머니는 얼씨구 지화자 냉큼 집어갔다. 그들은 항상 떳떳히 말하기를 “내몸이 제일이고 내손에 돈만 있으면 다 다.”고 하였다. 아들은 싱거운 사람들의 물음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자식정이란걸 모른다. 우리를 키운건 그러면 애가 생긴다고 해서(임신) 키웠는데 애는 생기지 않고 고생은 실컸했다고, 남들과 여러번 말했고 우리가 셈이들자 우리와도 몇번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무엇을 어떻게 하든 나는 그분들의 처사에 간섭을 하지 않으며 양육지은을 최선을 다하여 보답하겠다…”                                                                                                                19.6
143    로년의 자세(2) 댓글:  조회:272  추천:0  2019-12-16
                                           로년의 자세 (2.)                                                                                                                      회령 주책머리 늙은이가 개장국에 삐치듯, 혹은 덤벼들듯 한다는 말이 있는데 뜻인즉슨 주책 (주착)머리가 없다고 나무리는 것이다. 이 말은 해가 동산위에 둥실 떠올랐다느니 서산넘어로 꼴깍 넘어갔다느니 하는 말과같이 정확하지 못한 말이지만 모두가 합당한 말로 인정하고 써 먹다보니 옳은 말로 되고 말았다. 과학적으로 그리고 사실(실사구시)대로 말한다면 개장국은 늙은이들에게 제일 합당하고 좋은 음식이고 늙은이들이 즐겨하는 음식이다. 하오니 개장국을 반가워 한다고 해서 주책머리가 없다고 할수 있는가… 늙은이와 개장국 문제는 이쯤해 두고 늙은이들의 주책머리에 대하여 맗해 보자. 며칠전에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서 우리는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장소에서 반갑게 만났다. 수인사 후 친구는 심각한 화제를 시작하였다. 닷새전이라며 친구가 시작한 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날, 친구는 시장 한구석에 자리한 식품매대로 닭알이며 식초따위를 두루 사러 갔는데 예쁘게 생긴 매대주 아낙은 걸상에 앉아서 끄덕 끄덕 졸고 있었다. 쉰 남짓한 이 한족아낙과 친구네는 여러해 아는 사이로 친구네는 그 매대의 단골이라고 했다. 끄덕 끄덕 졸고 있는 아낙을 보고 친구는 우습기도 하고 순간에 저도모르게 작란기가 떠올라서 아차, 실수! 손가락으로 아낙의 볼을 살짝 다쳤다. 한족아낙네는 번뜩 정신을 차리며 까만눈이 올롱해서 친구를 쳐다 보는데 그 표정에는 분노가 력력 하였다. 순간, 친구는 가슴이 섬뜩해 나며 공연한 짓거리에 후회막급이였다. 한족아낙네는 아주 불쾌한 기색이고 친구는 멍 해서 아무런 응변도 못하고 있는데 아낙이 뭘 사겠냐고 한마디 물어왔다. 친구는 경황없이 닭알 두근을 사가지고 머슥해서 자리를 떴다. 그는 몇발작 걷다가 본능적으로 뒤돌아 보았는데 한족아낙은 옆의 매대여자와 틀림없이 자기말을 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친구는 심리고통을 겪게되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후회되고 창피하기 그지없고 후과가 어떻게 되겠는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떠 오르지 안았다. 아무리 친한 사이고 허물이 없다고 해도(그정도로 친한사이는 아니다.) 누가 봐도 이건 개명치 못한 행위고 부녀를 희롱한 행위가 아닌가?! 녀자와 그남편이 색을 먹고 달려들면, 공안국, 법원에 류망죄로 보안하고 고소하면 뭐라고 변명할것인가… 친구는 생각할수록 막막하고 겁이나고 개골망신을 할 일이 아득하기만 하였다. 안해와 자식들, 친척친우들 앞에서 어떻게 머리를 쳐들겠는가… 사태의 변화에 따라 친구는 죽어버릴 생각까지 하였다며 이일을 어쩌면 좋겠냐고 나의 의견을 물었다. 듣고보니 친구의 처지가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어망간에 아무런 심보도 없이 그만 저도 모르게 실수를 했다고 하지만 새상인심이 믿어 주겠는가?! 이런걸 버선목이니 뒤집어 보이겠는가고 하는데 그야말로 황하에 뛰여들어도 씼을수 없다. 괄시를 당해도 모두가 싸다고 할것이고 무슨 정신손해비요 위자료요 하며 몇천원 협잡을 당해도 할말이 있는가… 돈이라면 1전을 톱는 직업장사군 ㅡ 그것도 한뉘 장마당판에서 굴러먹은 아낙네다. 듣고보니 나도 몸서리가 쳐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문제의 해결고리는 장사군 아낙네의 분노를 삭히고 량해를 구하는 길 밖에 없었다. 친구는 나의 말대로 아낙네를 죽을쇠 걸음으로 찿아갔다. 친구가 너무 조르기에 나도 함께 가서 저쯤에 서서 사태를 지켜 보았다. 만약시 분위기가 험악하면 좌우간 우선은 친구를 보호해야겠기에. 그런데, 사태는 아주 평온하게 마무리가 되였다. 아낙네는 친구에게 주책머리 없는 그런짓을 늙은이가 어찌 하느냐고… 그날 기분이 상당히 나빳다고… 친구는 죽을죄를 용서받는 기분과 감격에서 녀인에게 거듭 공수례를 하고 사과를 하였다. 녀인은 웃으며 됐다고, 지나간 일은 지나가고 더 말하지 말라며 가보라고 인사까지 하였다. 친구는 기어이 나를 끌고 음식점으로 갔다. 나에 대한 초대보다 그의 기분이 한잔 하지않고는 견딜수 없은것 같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는 무서운 심리고통에서 해탈되고 보니 마치도 천근짐을 벗은듯 거뿐했을 것이다. 친구는 그날 사람이란 늙을수록 주책머리를 지켜야 한다고, 그간 10년감수를 한것갇다고 여러번 말했다. 지금 주변을 살펴보면 로인들의 오망이 적지 않다. 제일 꼴불견인곳은 무도장이다. 거기서는 무반(춤짝) 때문에 말썽이 많고 지어는 싸움이 생기기도 하고 어떤것은 동거로 가고 어떤것은 별거로 가고 어떤것은 황혼리혼으로 치닿는다. 가정문제, 사회문제를 야기하여 영향이 자못 아름답지 못하다. 로년의 자세에서 주책머리를 지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19.6
142    로년의 자세(1) 댓글:  조회:355  추천:0  2019-12-12
        수필                                                    로년의 자세 (1)                                                                                                                  회령 객관법칙 여러해전에 늙은이의 자세에 대하여 생각을 다듬어 쓴 바가 있다. 그때, 아마 늙어도 학습을 게을리 하지말아야 한다는 것과 가급적 좋은 일을 많이하며 건강관리를 중시하여야 한다는것 등을 피력한것 같다. 이젠, 련합국 보건기구에 가서든, 일본, 한국에 가서든, 세상천지 그어디에 가서 물어봐도 “어 ㅡ 확실히 늙은이가 옳구만.”할 나이가 되였다. 70도 하순이 되였으니 진짜배기 노인네다. 사람들이 “정정하다.”느니 “아직도 청춘이다.”느니 “100세시대” 어쩌구 저쩌구 하며 내남이 다 늙었음을 승인하지 않는것은 “아큐정신”이다. 아큐란 작자는 모두가 아는바와 같이 로신의 명작소설에서 나오는 정신이 얼떨떨한, 그러나 자고자대, 자부심, 자긍심, 자존심이 대단한 장년쯤 되는 한족사내다. 서양에도 아큐와 쌍둥이가 되는 인사가 하나 있는데 그자의 이름은 아마 아돌프짜리. 돈키호데라고 한것같다. 그것도 소설로서는 명작이라고해서 아이때 본일이 있다. 나는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아큐보다는 재미가 없었다. 그건 어쨌든간에… 그렇더라 해두고. 내육체가 솔직하게 늙은임을 시시각각 뚱겨준다. 시니브로 로쇠해 가는 표현은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티비에서 늙은이들의 신체를 조절해 준다는 특효약을 하루에 열번도 더 되게 열심히, 힘차게 광고를 하는데, 먼저순으로 늙은이들께서 나타나는 상견증세 10가지를 내리엮는다. 그 10가지 상견증세에서 대여섯가지는 나에게도 있다. 나는 유물론자이기에 과학을 믿는다. 나는 내가 로인이라는 객관사실을 승인할 뿐만아니라 10대증상에 대해서도 응당한, 자연스러운, 정상적인 표현이라고 인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늙은이가 아니지 않겠는가… 광고는 다음순으로 10대증상을 없애준다는 약을 소개하는데 말하기를 신체를 “조절”해서 10대증상이 말끔히 없어지게 해 준다고 한다. 얼마를 먹으면 “조절”이 된다는 말은 없다. 광고에서는 약값을 말하지 않는데 약방에 가서 물어보니 한병에 작으만치 1428원이라고 했다. 로인들의 양로금을 한푼이라도 더 뜯어먹지 못해 찰거머리처럼 달라 붙는다. 광고대로 하면 늙음의 표현이 다 없어지는데 그러면 뭐냐? 젊은이가 된다는 말이 아닌가?! 보다싶히 이건 사기다. 적어도 엉터리 광고다. 과학적 론리에 맞지않는다. 10대증세는 늙은이의 모습이긴 하지만 너무 심하면 적당한 대증치료를 하는것이 옳다. 실면이 너무 엄중하다든지 변비가 힘들다던지… 하면 적절한 림시 조치를 해야한다. 10대증상을 아주 근원적으로 “조절”을 해서 없애버리겠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늙은이들은 로년에 자기의 신체에 대하여 정확한 관점이 있어야 함과 동시에 정확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이 명확히 있어야 한다. 동시에 나름껏 학습, 공헌, 건강관리를 중심과업으로 힘껏 실천해야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학습이란 시대에 대한 학습, 사회에 대한 학습, 생활에 대한 학습등이다. 공헌이란 사회에, 가정에, 사람들에게 나름껏 좋은일을 하는것이다. 건강관리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면 되는것이다. 로쇠에 대한 로년의 자세에 대하여 나의생각은 겨우 이정도다. 형장들의 고견을 듣고 싶다.                                                                                                                                                                  19.3
141    구명은인 댓글:  조회:464  추천:0  2019-11-24
        실화                                                     구명은인                                                                                                                회령   얼마전에 나는 친구의 회갑연에 갔다가 전혀 듯밖의 상황을 만났었다. 그것은 우리가 앉은 연회상으로 친구가 막내처남이라며 60푼한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그는 다짜고짜로 왈칵 나의 두손을 움켜 잡고 구명은인을 만났다고 연신 말하며 여간만 반가워 하며 흥분해 하는것이 아니였다. 나는 우두망찰 손을 잡힌대로 친구와 그의 막내처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네가 살려 준 사람이요. 경식이, 리경식!” “경식이? 누구더라…” “생각 안 나우? 총을 맞아 죽다가 산…”  “아! 그렇구만. 이거 참, 오래간만이요! 반갑소, 반갑소.!” 우리는 서로 건강이며 집안형편이며를 문안하며 무척 기뻐하였다. 경식이도 이젠 60이 넘은 사람이였는데 면목은 다 잊혀졌지만, 그도 이 시가지에서 산다고 하였다. 그날 우리는 훗날을 기약하며 헤여졌다.   이젠 40년도 넘은 일이다. 그때는 문화대혁명의 마지막 해인 1976년 초여름이였다. 밤중이 지났는데 직일의사가 황급히 우리집 창문을 뚜드리며 나를 불렀다. 외상환자가 왔는데 매우 위중하다는 것이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급히 병원으로 나갔다. 환자는 60여리 먼곳에서 38구구식총에 맞았는데 업혀 오다가 마중간 손잡이를 타고 왔다고 하는데 실혈성쑈크 상태였다. 이름은 리경식, 19살, 학서마을 농촌청년 이였다. 그날 밤 10시경에 학서마을 민병패에서는 명령을 받고 임무 집행에 나섯다. 그들의 전투임무는 오랑캐령에서 내려오는 신작로와 알미대골안이 합치는 길목을 지키며 행인을 붙잡는 것이였다. 행인이란 바로 특무인데 그는 연길에서 비행장 비밀재료를 훔쳐가지고 지금 두만강쪽으로 도망을 쳤다는 것이였다. 학서마을은 공사(향)에서 30여리 떨어진 산골마을인데 오랑캐령에서 내려오다 첯마을이다. 학서마을 민병 10여명은 목적지까지 10여리를 목에서 겨불내가 나게 달려간후 패장이 나눠주는 총알을 받아 저마다 장탄을 하였다. 인당 세발씩이였는데 장탄을 하다가 한 민병이 오발을 하였다. 굉장한 총성과 함께 경식이가 악! 소리를 지르며 풀썩 꺼꾸러 지었다. 상처는 끔직했다. 무릎 조금 아래에서 정면으로 총알을 맞았는데 총알은 곧추 국와(무릎 뒤)로 빠져나갔다. 들어간 자리는 손가락 굵기로 경골을 뜯으며 나갔지만 국와는 오리알 크기로 뭉청 빠져버렸다. 왼쪽다리의 제일 큰 동맥, 정맥, 신경이 모두 끊어졌고 엄중히 결손되였다. 출혈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혈관을 찿아 지혈시키는 한편 강심, 혈용량 보충, 산소호흡 등 구급조치를 몽땅 사용하는 한편 공사령도에 수혈대를 빨리 조직해 달라고 하였다. 동시에 현병원의 왕진을 요청하였다.   우리가 수혈을 하며 환자의 혈압을 유지하고 있는데 현병원 외과에서 왕진을 왔다. 긴장한 수술은 오전 10시경에 원만히 끝났다. 1600여씨씨의 수혈을 받은덕에 환자의 상태는 온정되였다. 생명은 구했지만 치료는 방금 시작이였다. 어느덧 정심때가 거이되였는데, 공사무장부에서 식사를 안배하여 우리는 아침겸 정심 식사를 하고 다시 환자상태를 꼼꼼히 확인한후 직일실에서 금후의 치료문제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다. 토론회에는 현병원외과에서 온 허주임 등 3명과 우리공사위생원의 의료일군 10여명이 참가했다. 물론, 행정이지만 서기 겸 원장인 리원장도 참가하였다. 회의에서 허주임은 환자의 총상수술은 빈틈이 없이 원만하게 처리되였다는 것을 돌출히 강조한후 우리병원 초년생의사 김선생을 흠뻑 춰 올리였다. 김선생은 의사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병원으로 온지 반년남짓해서 현병원외과에 가서 1년진수를 하고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았다. 허주임은 말하기를 김선생은 진수도 잘 했거니와 오늘 수술에서 상당한 실력을 발휘 했다고, 앞으로 본인이 더욱 연찬하고 곁에서 지지하면 이 공사의 외과환자는 든든한 의사가 있게 될거라고 엉뚱한 말까지 하였다. 어느면에서나 상급의사인 나는 허주임의 말을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허주임은 계속하여 이제부터 합병감염을 10여일만 잘 공제하면 봉합실을 뽑고 약간씩 활동을 하게 해야한다고 하였다. 그는 수술에 대하여, 환자의 예후에 대하여 아주 긍정적이면서도 락관적이 였다. 그러나 나는 고려가 중중하였다. 그것은 환자의 상처에서 짙은 화약냄새가 심했는 데, 이건 화약불길에 상처주변의 모든 조직이 익고 그을렸다는 것을 말 해 주는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상처는 특수성이 있을것이다. 금후 순풍에 돛단듯만 하지는 않을것이다. 이전에 가스괴저란(총상, 파편상 등에서 오는 상처가 썩는 현상) 말을 들은것이 자꾸 가슴에 걸리였다. 머리를 수굿하고 있는 나에게 허주임은 의견을 물었다. “오늘 허주임이 큰 수고를 했습니다. 내생각에는 이 환자를 허주임이 데리고 가서 치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다싶히 우리의 수평으로는 이런 환자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현병원 외과에는 허주임의 상급의사가 3명이 있다.) “이젠 다른 처리가 필요없고 소염제주사나 놓고 유합을 기다리면 되는 환잔데 그게 무슨말이요? 혈관이며 신경을 겨우 이어놓았는데 움직이는건 안되오.” “다 치료 된 환잔데 왜 전원을 하겠습니까?” 김선생이 발끈해서 말하였다. “외과에 한해서는 김선생을 대담히 믿고 그에게 맡기는것이 좋겠습니다. 김선생이 능히 감당할겁니다…” 허주임이 말하자 우리병원의 반란파맹장인 윤호사가 대뜸 흥분해서 말하였다. ‘우리 함께 모주석어록을 학습합시다!” 그는 “혁명은 칭커츠판이 아니며…”와 “계급투쟁을 해마다 말하며 달마다 말하며…”등 네댓 조목의 어록을 격동된 목소리로 높히 읽은후 말을 이었다. “이환자는 전투일선에서 영광스럽게 부상을 당한 민병영웅입니다! 우리는 그를 따라 배우며 ‘만난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해야 합니다’ 이건 붉디붉은 태양이시며 위대한 령수이시며 도사이시며 키잡이이신 모주석께서 우리들에게 한 교시입니다. 우리는 이 환자를 원만히 치료할 신심이 있으며 용기가 있으며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꼭 달성되여야 하며 꼭 달성됩니다!” 윤호사가 계급투쟁, 정치투쟁의 화약냄새를 확!학! 풍기였으나 사람들은 코와 입을 찡그리기도 하고 히죽 웃기도 하며 한사람도 거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여기서 김선생과 윤호사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에서 말했지만 김선생은 중전을 졸업하고 우리병원으로 분배받아 왔는데 그들은 동기동창이 셋이 한꺼번에 우리병원으로 왔다. 리원장과 나는 이들을 잘 배양하자고 하며 김선생은 현병원 외과에, 얼마후 다른 두 선생도 내과와 부산과에 진수를 보냈다. 김선생은 진수를 마치고 돌아온후 자기는 외과의사라고 광고하며 외과환자외의 다른환자는 전혀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외과환자는 며칠에 간혹 한둘이 있을뿐이 였다. 당시의 농촌위생원의사는 무릇 환자면 다 치료할수 있어야 했다. 금후 과를 나누어 의사를 두려는 타산은 있었지만 아직은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고 농촌의사는 다면수여야 했다. 김선생은 외과에서 아직은 나의 조수로 더 커야 했고 다면수의 길을 걸으며 전문화를 더 제고해야 했다. 근래에 보니 김선생은 나를 부담스레 여기며 불편해 하는것 같았다. 하여, 나는 외과에 한해서는 그가 주동성을 발휘하게 은근히 배려를 하였다. 그러면서 무슨환자나 많이 접촉하라고 자주 말해주었다. 그래야 군중들의 환영을 받는다고 말해 주었으나 김선생은 별로 희끔해 하는 눈치가 아니였다. 윤호사는 우리공사에서 유명한 반란파 맹장으로 병원의 리원장을 거리로 끌고 다니며 투쟁한 사람이다. 전공사적으로 령도를 투쟁하는 첯 포를 쏘았다. 전업잔페군 인인 리원장은 얼굴에는 광대화상을 그리고 신문지로 만든 한발이나 되는 꼬깔모자를 쓰고 개패와 쓰레기 왕바신을 목에 걸고 페품수구로 공소사에 들어 온 깨여진 쟁개비를 두드리며 왼쪽겨드랑이에는 짝지발을 끼고 절룩거리며 모진 모욕을 여러날 당하였다. 거기에 상처까지 도져서 무척 고생하였다. 윤호사가 초중학교애들을 데리고 이런 행패를 하자 병원군중들과 중학교선생들이 분연히 일떠나 제지하였다. 그는 이미 조직적으로 처리한지도 오랜 리원장의 작풍문제를 다시 꺼내들고 여지없는 공격을 다 하였는데, 그의 목적은 리원장을 꺼꾸러 치우고 자기가 원장이 되려는 것이였다. 그는 리원장이 자기를 입당시켜 주지 않았다고 치를 떨었다. 문화대혁명 내내 그는 병원의 일은 될수록 하지않고 “혁명”만 하였는데, 별명이 “커톨거밍파”(입으로, 말로만 혁명한다)였다. 윤호사의 야망은 원내군중들의 반격으로 어느것도 실현되지 못했다.(원장꿈, 입당꿈) 그는 병원사람들을 다 밉살스레 보았다. 그와동시에 전공사에서 윤호사를 곱다는 사람은 원내, 원외에서 그야말로 한사람도 없었다. 지금 병원으로 나오는 것은 출근하지 않으면 월급을 깍고 인사처리를 하겠다고 한것도 있지만 단위별로 자기의 혁명과 생산을(사업)하기에 그가 더는 삐쳐들곳이 없기 때문이였다. 그는 김선생을 “신생사물, 신생력량, 신선한 혈액”이라며 버쩍 춰올리며 김선생과 친하게 보냈다. 토론회는 김선생과 윤호사가 전문 환자치료를 책임지기로 결정하고 끝났다.   하루후, 나는 대대(촌)합작의료 순회검사로 하향을 나갔다. 닷새째 되는 날에는 학서대대로 갔는데, 그날 오전 나는 대대서기, 주임, 대대의사와 함께 약재배기지로 검사를 갔다. 우리가 밭을 살펴보고 있는데, 대대위생소 호사가 숨차하며 달려왔다. 리원장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지금 즉시 나를 오라고 한다는 것이였다. 사연은 말하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원장이 아주 급해 하는것 같더라고 하였다. 나는 즉각 30여리 먼길을 자전거로 땀을 철철 흘리며 달리였다. 병원에 당도해 보니 사연은 리경식 때문이였다! 오늘이 엿새가 되는 날인데, 환자는 수술후 미열로부터 3일째부터는 고열이 나기 시작했는데 여러가지방법을 다 썼으나 열은 내리지 않고 점점 더 심해지는데 지금은 혼미상태라고, 김선생이 병정을 소개하며 병지를 내여 놓았다. 나는 먼저 환자의 심장상태를 검사하고 수술부위를 검사하였는데, 수술부위는 팽팽하게 붓고 검붉은 피부는 불덩이 같았다. 나는 상처의 괴사라고 즉시 판단하고 봉합실을 뽑았는데, 첯코를 뽑자 간장물 같은 액체가 물총처럼 내 쏘며 지독한 악취를 풍기였다. 나는 다섯코를 뽑아 상처를 개방하였다. 괴사물이 두사발은 되게 나오고 악취는 숨쉴수 없게 하였다. 김선생과 윤호사는 밖으로 달려나가 연속 구토를 하여댔다. 나도 구역질을 하며 환자처치를 마저 하였다. 처치가 끝나자 리원장은 우리셋을 불러놓고 치료방안을 물었는데, 김의사는 대뜸 자기는 손을 들었다고 성근히 태도표시를 하였다. 매일 두세번씩 환자에게 어록을 읽어주고 어록노래를 함께 부르자고 닥달을 했다는 윤호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나도 신심이 없다고 솔직히 말했다. 이환자는 패혈증이 왔을 가능성이 아주 큰데, 우선은 생명위험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고 다음은 동시에 상처처리를 해야겠는데 하지를 절단하지 않으면 않될 가능성이 너무도 크다. 이런치료를 나는 파악이 없고 우리위생원에서는 할수없다. 때문에 즉시 상급병원에 전원을 해야한다. 빠를수록 좋다고 시간을 쟁취해야 한다고 견해를 그대로 말하였다. 리원장은 현병원에 전화를 하여 구급차를 부르고 공사로 급히 갔다. 긴말을 간단히 한다면, 환자는 현병원에서 지구병원으로 다음은 성병원으로, 이틀만에 상해로 가서(비행기로) 하지를 절단하고 패혈증치료 등으로 넉달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또 한가지 소개할것이 있다. 상해의 어느 입빠른 의사가 환자측 사람들에게(회갑을 쇤 나의친구, 현무장부 부부장과 간사 1명) 처음 치료방법이 잘못되였는데(인류관을 꽂지 않은것 등) 엄중한 의료사고라며 하마트면 생명을 잃을번 했는데, 살아난 이런기적은 우리도 처음이라며, 사고원인을 밝히고 받아야 할 보상은 제대로 받아야 한다고 말한것이다. 이한마디 말로해서 현무장부와 공사무장부에서 나한테 조사를 왔는데, 그들의 눈치는 허주임, 김선생 등이 책임상 어떤 문제가 있기를 바라는것 같았다. 당시는 의료사고에 두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책임사고로 법원놀음을 해야하고 다른하나는 기술사고로 의료행정적 처리를 받아야 했다. 나는 실사구시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말한후 치료를 맡은 의사, 호사들이 있는 능력과 정성을 다 했다고 특히 강조했고(김선생과 윤호사는 그때 병원에서 자며 환자를 지키였다.) 증실재료도 그렇게 써주고 지장을 찍어 주었다. 후일담이지만, 현병원 외과 허주임이 우리위생원의 했내기의사인 김선생을 극력 춰 올리며 이제부터는 외과에 한해서는 김선생이 책임지도록, 그의 립지를 결정하는데 영향력이 있는 발언을 한데는 내막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병원에서 김선생이 외과의사로 업무를 분공 맡고 책임과 권리를 가지면 허주임의 왕진을 많이 부르는데 퍽 편리하고 그러면 회색수입이 증가되는데… 금후 그렇게 합작하자고 허주임은 김선생과 약조를 이미전에 하였든 것이다.(허주임과 김선생이 조사시 교대한 것이다.) 기술사고에 돈문제, 녀자문제까지 병원내부에서 적발되여 허주임은 주임직에서 철직되고 월급 두급을 깎기고 5년간 전근도, 월급조절도 못하며 외과문진의사를 하여야 한다는 처리를 받았다. 현무장부에서도 부장이 출당, 캐출을(제명) 당하는 벼락이 떨어졌다. 그것은 그번 특무잡이 명령이 하나의 가상훈련이였는데, 여기까지는 부장의 권력행사라고 할수 있었지만 실탄을 발급한것은 군분구의 비준을 받아야 하는것인데 부장은 그날 얼근히 한잔해서인지 군분구에는 신청도 하지않고 공사무장부에 엄명을(호령) 내렸든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후 현무장부에서는 있는 힘껏 경식의 치료에 최대의 노력을 다 하였다. 하지만, 민병들의 잘못으로, 공사무장부의 책임으로, 병원의사들의 책임으로 밀려고 광채롭지 못한 동작들을 많이하여 조직의 격분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다음은 경식이가 나에게 들려 준 이야기다. 경식이는 잔페로 된후 현실을 대범하게 승인하고 생산대일을 능력껏 하였다. 그때는 집체화 시절이다보니 수입분배에서 경식이를 도와주는것은 문제가 아니였다. 대대의 결정으로 6개 생산대들에서 공익금 쪽에서 보조금을 지출해 주었다. 공사무장부 라부장은 현으로 불이나게 뛰여다나며 의족을 맞추게 하였고 현농구공장에 경식이를 취직까지 하게 했다. 라부장이 애쓴덕에 경식이는 국가공인명액에 들었고 월급살이를 하며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 왔다고 하였다. 자기의 문제로 가족과 본인이 상급기관을 여러번 찿아 다녔으나 도무지 되지않는 대사를 라부장이 애를 쓰고 해결해 주었다며 경식이는 매우 감격해 하였다. 라부장이 뛰여다니며 해결한것을 경식이네는 왜서 해결하지 못했을가… 경식이는 그간 수년동안 23명의 수혈자들을 다 찿아 보았지만(변방부대 전사 두사람은 다른 성 사람인데 찿지 못했다.) 매부가 잊지말라고, 구명은인이라고 여러번 말한 나만은 만나보지 못했다고… 마음에 그냥 걸려 있었는데… 이렇게 만날줄이야?! 그는 재삼  기뻐하며 반가와 하였다.(경식이가 상한 후 한달푼해서 나는 사업상 수요로 다른도시에 전근을 했었다.)   그날, 공원에서 경식이는 나를 구명은인이라고 자꾸 말하며 손을 잡고 놓지않았 으나 나는 량심에 걸리던 일을 말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토론회때 내가 견결히 환자를 현병원에서 맡으라고 주장하지 못한것과 우려되는 점들을 충분히 말하지 못한것이 줄곧 후회되였다고… 내가 그러지 못한것은 나의 체면을 고려하다보니… 더 뭐라고 말하면 호박 쓰고 돼지굴에 들어가기로 중구난방 몰리우며 난처해 지겠기에… 지금 이렇게 경식이에게 직접 말하니 40여년 가슴에 걸려있은 무거운 짐을 오늘   벗었다고… 우리는 통쾌히 웃었다.                                                                                                                            19.3
140    과불급의 모범 댓글:  조회:371  추천:0  2019-09-21
     수필                                               과불급의 모범                                                                                                             회령 대만의 유명작가 리오씨는 내가 보기에는 과불급의 모범인물이다. 과불급의 전형적 인물이라고 해도 맞춤할것 같다. 리오씨를 구체적으로 정치가, 사상가, 평론가, 수필가, 잡문가, 칼럼니스트, 지어는 리상주의자라고 착호지명을 하는 사람도 있다 리오 자신은 자기를 “기재”이며 “단 하나뿐인 칼끝(예봉)”이며 “누구도 나와 비길 수 없고” “세계에서 한 모(면)를 막고 우뚝 선 위인이다.”고 하였다. 명함자 오(敖, 거만하다.)의 냄새가 그대로 물씬 풍기는 말이다. 나는 리오씨와 거래가 없다보니 잘 알지 못한다. 여기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소리는 두루 얻어듣고 얻어보고 한 것이여서 정확성을 담보할수가 없다. 이점을 먼저 말해두고 계속해서 떠드벅거릴가 한다. 리오씨는 흑룡강 할빈에서 태여난 사람인데 지금나이는 지난세기 35년생이니까 여든네살이겠다. 지금 건재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건강장수하며 다손다복하며 건필하기를 축원하는 심정이다. 리오는 천여편의 작품을 발표했는데 대부분이 비판성평론들이다. 또 그 글들의 대부분은 국민당과 장개석 일당을 즉살나게 욕한것이다. 물론 공산당을 꼬집어  뜯은것도 좀 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욕사발을 들씨운것도 퍼그나 있다. 하여 어떤사람들은 말하기를 “리오는 자기를 내놓고는 세상사람들을 다 욕한다.”고 하였다. 리오는 그 유명한 “욕설”때문에 상당한 대가를 지불했지만, 그의 욕설은 끝이 없었다. 그는 대만당국에 의하여 14번(?)을 감옥에 가서 콩밥을 먹었고 두번인가는 어느법원에서 사형이 어쩌구 저쩌구 한일도 있었다고 한다.(누가 시켜서 으름장을 놓아보느라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상 “업적”이 다 그 욕설로 해서 얻은 수확인데 리오는 그에대하여 전혀, 추호의 “만족”함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그야말로 시종여일하게 왕성한 혈기와 억센 정력으로 줄기차게 욕설을 퍼 부었다. 그의 초심과 사명은 “나의 눈에 거슬리는 것은 한푼의 용서도 없다.”인데, 그는 잘한것, 좋은것, 옳은것은 응당 그래야 하는 것으로서 말하지 않아도 될뿐만 아니라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못한것, 나쁜것, 틀린것은 말하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을뿐만 아니라 않된다는 것이다. 세상사람이 다 듣기 좋은말만 하고 듣기에 나쁜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기는 확고부동하게 견결히 그 반대로 나간다는 것이다. 천하유일의 “반란파맹장”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리오다. 그리고 리오는 대담무쌍한 실천가다. 그는 극히 실제적인 작가로서 무엇을 보았으면 무엇을 보았다고, 무엇을 들었으면 무엇을 들었다고, 하나면 하나라고, 반개면 반개라고… 고지곧대로 말하는 사람이다. 지어는 자기의 은사도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꺼리낌 없이 말한다. 그는 자기의 정부 반수앵을 21일만에 만나서 이틀하고도 반날을 라체로 함께 지냈다는둥, 자기는 녀인의 배 위에서 죽고 싶다는둥… 다 솔직히 말했다. 오늘 객관적으로, 실사구시적으로 말한다면 리오의 욕설은 사회적으로 별로 거둔 성과가 없다. 그의 욕설이 나쁘거나 틀려서가 아니고 대만당국의 “영명한 안광”에서 볼때 극“좌”가 아니면 극”우”로 “채납불가”였기 때문이다. 어떤욕설은 아주 적절했지만 마의동풍이 되기도 했다. 례하면 국민당간부들의 부정부패를 대성질호한 글들이 모두 쇠귀에 경 읽기보다도 못했다. 리오같이 박학다식한 작가가 “중용지도”를 모를리가 없고 현실가능성을 모를리는 없다. 아마도 리오의 혈기와 정력이 너무도 과인한데 원인이 있는 같기도 하다만… 리오씨가 사회적으로 어느만큼한 공헌을 하였는지는 아직은 말할때가 아니지만 한가지만은 명학하다. 그것은 그의 초심과 사명감이다. 그리고 대담무쌍한 실천행동이다. 이것은 사회의 지성인으로서 작가들은 더 말할것도 없고 모든 사회의 구성인들이 따라 배울바다. 그것은 사람들은 모두가 가, 악, 추가 없고 진, 선, 미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기가 소원인데 그런세상은 모두가 함께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19. 8. 19
139    쌀독에서 인심 난다 댓글:  조회:466  추천:0  2019-08-02
      수필                                          쌀독에서 인심 난다                                                                                                                        회령 아침에 깨여나서 창문을 바라보니 유리창문에 물방울이 가득 맻혔다. “아하! 밤새 비가 왔구나! 감사해라!” 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감탄했다. 그리고 옷도 입지 않고 창문에 다가가서 비가 얼마나 왔나 밖을 내다 보았다. 아스팔트길 바닥에는 군데군데 물이 꽤 고여 있었다. “괜찮게 왔구나. 오늘 온 하루 와도 좋아…” 나는 중얼거리며 하늘을 쳐다 보았다. 푹 흐린 하늘은 음울하고 밖을 나가보지 않아도 날씨는 몹시 을씨년스러울것 같았다. 찬찬히 바라보니 지금은 가는 진눈깨비가 보일듯 말듯 내리고 있었다. “가늘어도 좋으니… 종일 내려다오.” 나는 하늘을 새삼스레 쳐다보며 기원하였다. 금년동삼은 동삼인지 이른봄인지… 모르게 지나갔다. “지구온난화”요 “이상기후”요 하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지는 이미 여러해가 되지만 내가 그것을 직접 피부로 느껴 보기는 올해 동삼이다. 우리고장은 동삼내내 맑은하늘에서 해가 재글재글 불타고 푸른하늘에는 구름 한송이도 없는날이 많았다. 바람도 없고 혹 바람이 분대도 미풍 정도였다. 강물은 끝내 얼어붙지 못했다. 사람들은 “겨울이란게 봄날 같다.”하고 좋아선지 서운해선지 곧잘 말했다. 동삼내내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눈보라가 세차게 휘몰아 치던 옛날의 겨울날씨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강수가 적어서는 봄파종을 잘 할 수 없겠는데…”하고 근심하기도 했다. 나도 그런 근심을 자주 하였다. “농사는 천하지 대본”이라고 옛날어른들이 교시한것이 이젠 몇백년이 지나갔지만 그말은 지금도 틀림이 없다. 농사가 잘되여 농부네 씰독이 넘쳐나야 나라의 쌀독이 차게 된다. 농민이 배 부르고 등이 뜻뜻해야 나라가 태평성세가 되고 국민이 편안히 살수있다. 중국백성의 대부분은 농민이다. 백성은 “이식위천”이다. 그들은 “온보”에 만족한다. 지금 그들은 첩도 필요없고 자가용이며 호화주택, 별장도 바라지 않으며 멋진옷이며 고급향수, 금시계, 금가락지를 부러워 하지 않는다. 가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를 갈망하며 땀 흘리고 있다. 가난하고 락후하다고 하여 백성을 우습게 알지마라. 천하는 백성의 천하다. 백성을 하늘로 여겨야 한다. 백성은 배를 띄울수도 있고 뒤엎을수도 있다. 노도와 격랑은 산악도 삼키고 쓸어버릴수 있다. 관리들은 이점을 항상 명기해야 한다. “위민복무”를 나의 직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밖을 내다보니 진눈깨비가 힘차게 쏟아지고 있다. 봄누기를 충분히 잘 해 다오. 올해도 어거리 대풍이 들어라. “3농지시”와 “부핀행동”을 하늘도 알아보네…                                                                                                                    19.3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칼럼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潮歌网) • 연변두만강국제정보항(延边图们江地区国际信息港) •아리랑주간(阿里郎周刊)
地址:吉林省延吉市光明街89号A座9001室 电子邮件: postmaster@zoglo.net 电话号码: 0433) 251-7898 251-8178
吉林省互联网出版备案登记证 [吉新出网备字61号] | 增值电信业务经营许可证 [吉B-2-4-20080054] [吉ICP备20003111号]
Copyright C 2005-2016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