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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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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알쏭달쏭한 문제(3) 댓글:  조회:298  추천:0  2022-05-07
              잡문                                                알쏭달쏭한 문제(3)                                                                                                                       회령   (1과 2는 4페지에 있음.) 3.기준문제 옳고그름, 좋고나쁨, 길고짧고, 곱고밉고… 이런것들을 판단하는 데는 고금중외 모두 기준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기준이 애매모호해서 긴가민가 알쏭달쏭한 문제(현상)가 많다. 문단에도 기준문제가 있는것 같다. 개혁개방전에는 전쟁영화에서 우리편의 주요인물이 희생될때면 두세가지 만세를 부르거나 전진돌격을 웨쳤다. 혹은 당을 따라 혁명을 잘하라고 부탁하기도 했는데, 절대 다수의 관중들이 감동을 하고 고무추동 교육을 받았었다. 극소수가 가슴에 총을 맞은 사람이 어떻게 구호를 웨치거나 긴 유언을 할수있겠냐고 하며 의문을 품거나 내놓고 떠들기도 했는데 그런사람들은 두뇌가 꽤 까다로운 사람들이지만 성분은 좋았다. 그래서 엄중할 경우에는 단, 당지부대회에서 검사비판교육을 한두번 받았다. 성분이 나쁜 사람이면 큰일난다. 하지만 그때세월 성분이 나쁜사람들은 언행을 각별히 조심하며 살았기에 속으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겉으로는 좋은말만 하고 나쁜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시절의 모든 문학예술작품은 무산계급의 정치돌출, 사상돌출, 영웅인물돌출이 절대적 주선률이 였다. 사상성과 예술성의 유기적 결합을 강조하긴 했으나 정치사상이 우선이였다. 작품은 군중을 공산주의 사상과 작풍으로 교육하며 공산주의길로 이끄는 힘이 있었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진것 같다. “계급” “혁명” “만세” “투쟁” 지어는 공산당, 공산주의, 자본주의, 압박착취… 이런말들을 하기 매우 꺼리며 작품에 정치사상성언어가 한마디만 있어도 그 작품은 창비를 맞는다. 그리고 “정치냄새가 난다.” “문화혁명때냄새가 난다.”고 할뿐만 아니라 어용나팔수라느니 어용문인이라느니 앞잡이라느니 하며 지금이 어느때라구!... 원, 참! 한다. 지금이 어느땐가? 사회주의초급계단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는 공산당의 령도와 무산계급독재를 수호, 견지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작가 예술가들은 인민의 인재들이며 당의 인재들이다. 하다면 홍색주선률에 접근하거나 가담해서 자신을 이바지하는 것이 본분이 아닌가… 알쏭달쏭하다. 작품의 언어사용에도 아기뚱한 점들이 있다. 한국식으로 영어나 불어, 독일어를 사용해서는 아무 거침이 없이 통과가 되지만 한어를, 례하면 위에서 쓴 창비(총살)거나 피주, 쏘폴(구멍가게), 써푸, 땐디, 꽈호, 양뤄촬… 이런 우리가 익숙할뿐만 아니라 우리말로 변형된 상용어들을 쓰면 권위어른께서 면색이 퍼러딩딩해 나며 심기가 불편해 하시는데, 그것 참 까리까리 하다. 사투리 사용에서도 한국작가가 사용한것은 “하ㅡ 대단하다니! 귀중한 문화유산을 발굴 계승하고… 참, 대단해!”하고 무릎을 치고 엉덩이를 들썽거리지만 우리고장 작가들이 감히 그랬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진다. 왜서 이러는지 리치를 알수없다.                                                                                                                                                                                                                                                                                                     16.3.2  
164    발바리 댓글:  조회:280  추천:1  2022-04-25
          잡문                                                   발바리                                                                                                                회령   내가 귀여워하는 며늘애기와 또 더욱 귀여워하는 손녀딸애가 발바리를 한마리 키웠으면 해서 말을 꺼냈다가 나의 호듼 훈계를 받고 다시는 짹소리가 없다. 옛날 시골에서 살때 우리집에서는 멍멍이와 고양이를 키웠는데, 그것들은 공밥을 먹으면서 놀기만 한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도움이 컸다. 멍멍이는 엄동설한에도 밖에서 살면서 주인집을 충성스레 지켜주었고 고양이는 찌꺼기를 한술 얻어먹으면서도 공로가 컸다. 진짜 괘씸하기 그지없는 쥐새끼들이 우리집 근처에서는 얼씬도 못했다. 쥐가 들썽거리는 곁집들에서 우리고양이를 며칠씩 “초빙”해 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멍멍이는 고와했지만 고양이는 싫어했다. 시도 때도없이 흙발로 집안팍을 들락거리고 이불속에 기여들때면 영 질색이였다. 특히 쥐를 물고 집에 들어오면 아주 구역질이 나고 기절할 지경이였다. 그런데, 발바리는 뭐냐? 하는일은 개뿔도 없고 갖잖은것이 먹기는 상감마마 수라상이라고 한다. 하긴, 발바리가 먹자고 한건 아니고 주인이 자원해서 대접한거긴 하지만서두. 그뿐인가, 샤와하고 옷해입고 건강검진하고 삐초하고 투시하고 화험하고 예방주사 놓고 짝 맺기 선 보이고 철따라 신발 사 신기고 똥오줌건사를 하고… 메스겁고 수고하고 돈도 약차하게 든다고 한다. 병치료와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고 어느신문에서 말한적이 있긴하지만 나는 그따위소리는 우습게 안다. 우리 이곳 시가지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발바리를 키우기 시작한것이 아마 10년은 넘는것 같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발바리가 아이들과 함께 침실을 쓰는데 자식머리수보다 발바리마리수가 더 많다고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런 “선진문명” 수준이 못되며 그런 사치한 취미생활을 할 형편이 못된다. 발바리를 키울돈이 있으면 수천만 불우인간을 먼저 돕는것이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일해야할 우리에게 언제 발바리를 돌보며 놀아줄 시간이 있겟는가… 그뿐이 아니다. 발바리가 아무리 령물이라고 해도 필경은 짐승이다. 사람과 한방을 쓰고 산다는건 좋은일이 아닌것 같다. 언니 꿋모닝! 오빠 굿모닝! 이모 꿋모닝!... 해라 하며 발바리를 안고 다니며 입 맞추고 키우는 사람들은 거개가 부자들인데 그들의 심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사람들에게는 “나 이렇게 잘살며 고상한 취미생활을 한다. 나 잘났지? 부럽지?...” 이런 우월감, 자긍심, 허영심… 같은것이 있는것 같다. 일전에 가도판사처 쑹서기가 나에게 이런말을 하였다. 재해지구를 지원하기위하여 모금(물건도 됨.)을 했는데, 까다롭고 군소리가 많은 사람들인즉 거개가 잘사는 사람들이더라는 것이였다. 특히 고양이거나 발바리를 키우는 집들이 더욱 깎쟁이더라고 했다. 어느날, 대부자인 류씨네 집으로 모금을 갔는데 부부가 서로 앞다투어 말하기를 “요즘 쓰쑈제(발바리이름. 넷째아가씨.)가 똥물을 싸서 병원다니지, 닭곰 먹여야지… 돈이 없다.”고 하면서 문을 닫으려 하기에 “발바리를 키울돈은 있고 재해구 사람들을 좀 방조할 돈은 없단말인가?! 사람이 어쩜 이럴수 있는가…”하고 퉁을 주니 “내돈 내가 쓰는데 무슨걱정인가! 누가 그들더러 재해를 맞으라고 했는가. 그래, 인권자유를 간섭할텐가! 꾼!(썩 꺼져!)”하며 문을 쾅! 닫더라는 것이였다. 쑹서기는 새삼스레 격분하며 신문에 낼 일이라고 하였다. 듣고보니 아닌게 아니라 괘씸하였다. 지금 확실히 인정이 야박하고 애심이 결핍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사는 인간세상은 더불어 사는 세상이다.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며 있는자는 없는자를 부조하며… 사랑하며 화목하게 사는것이 진정한 인간세상이고 건전한 사회생활이다. 관건은 사랑이다. 사랑이란 일방적이 아니다. 가는떡이 있으면 오는떡이 있고 주는정이 있으면 오는정이 있다. 사람은 모두 아름답고 평화롭고 풍요롭고 화목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우리의 이런 바람은 오직 서로의 사랑에서만이 이루어 진다… “물질문명”건설과 “정신문명”건설을 한시도 등한시 할수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21. 2.
163    비단길의 유래 댓글:  조회:266  추천:0  2022-04-16
            수필                                                 비단길의 유래                                                                                                      회령   비단의 길을 근래에 건설한줄로 아는 사람이 꽤 많다. 말그대로 고소불득ㅡ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비단의 길로 중국사람이 다니기 시작한것이 이젠 2200년세월이 거이된다. 비단의 길은 한갈래의 장사군 길로 한나라때부터 정식으로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안으로 부터 천산산맥을 넘어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지금은 많이 뻗어 나갔다. 그러나 비단의 길이라고 하면 대체로 처음의 그 길을 말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도 그 유래만 말하고저 한다.   비단의 길은 누가 개척했으며 어떻게 개척된 것인가?   한무제 초년, 흉노는 여러번 한나라를 침범했다. 한무제는 흉노의 내막을 잘 알기위하여 투항했거나 포로로 잡힌 흉노사람들을 자주 불러서 담화를 하였다. 이러는중 우연히, 흉노의 왕 모돈이 월씨국을 정복했을때 악독하게도 월씨국왕의 머리를 자르고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어 술을 부어 먹었다는 것을, 월씨국사람들은 그 원한을 잊지않고 항상 복수하려고 하는데, 그러나 힘이 약하다보니 서쪽으로 도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한무제는 너무 좋아서 입을 쩍 벌이고 하하하 연신 웃어댔다. “참! 잘됐구나! 이전에 흉노아새끼들이 때리면 달아나고 때리면 달아나서 멸종할수가 없었는데 월씨국과 련합하여  동, 서가 협공한다면 제놈들이 어디로 뛰겠는가…” 대신들과 상론하고 방침을 결정한후 한무제는 외교사절단을 파견키로 하였다. 그러나, 한없이 멀고 먼 길인데다가 망망무제한 사막을 건너야 하고 더욱히는 중간에 있는 흉노를 거쳐야 하니… 어느대신도 사절단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한무제는 대노하여 “당당한 대한제국에서 그래 서역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없겠는가!” 하고 고함을 질렀다. 한무제는 총명하고 능력있고 담량과 책임심과 의력이 비상히 강한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전국에 고시를 내였다.   고시는 나래가 돋친듯 전국 방방곳곳에 퍼졌다.   한나라 어느산골에 장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총명할뿐만 아니라 용감하고도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늘 칭찬하였다. 이 장건은 고시를 보고 생각하기를 “월씨국에 사자로 가는것은 련합하여 흉노를 때려부수자는 것이겠는데 이는 리국, 리민, 나라안전대사이다. 내가 고생을 하더라도 이 광영한 임무를 완수해야 겠다!” 장건은 지체없이 자원을 하였다. 그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원하였다. 한무제는 매우 기꺼워 하면서 친히 100여명을 선발하였다. 거기에는 두말할것도 없이 장건이 뽑혔는데 장건은 한중 성고(지금의 섬서 성고현) 사람이다. 그리고 흉노인 감부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감부는 원래는 흉노국에서 노예로 살던 사람이다. 그는 활을 특별히 잘 쏘았다.   기원전138년! 즉 한무제 건원3년 장건은 사자 중임을 맡고 100여명 대오를 인솔하여 월씨국으로 향발하였다.   얼마후 장건일행이 흉노들의 활동지대에 진입했는데 아니나 다르랴 그들은 흉노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훙노왕은 장건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장건이 월씨국으로 장사를 간다고 하니 흉노왕은 별 다른 생각은 없이 그들을 그저 인질로 잡아두었다. 그때는 흉노와 한나라가 표면상에서는 관계가 괜찮을 때다. 흉노왕은 장건에게 흉노인 안해까지 얻어주고 그들일행을 우현왕에게로 가서 방목을 하게 하였다.   어느날, 장건은 감부 등과 의논하고 말과 락타를 훔쳐가지고 서쪽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일망무제한 대사막에 이른 그들은 물과 식량이 다 떨어지고 기진맥진해서 쓰러졌다. 그들은 기다싶히 하며 끝내 물도있고 풀도 있는 곳에 닿았다. 거기서 감부는 새와 쥐, 토끼 등 짐승을 사냥하였다. 그들은 그것을 생것채로 먹으며 계속 완강히 전진하였다.   장건일행은 총령을 넘어 대원국에 도착했다. 이곳은 풍경이 아름다웠고 사람들은 코가 크고 털보인데다가 눈알이 파랬다. 그리고 아주 열정적이 였다. 그 대원국 왕은 장건네가 한나라에서 왔다고 하니 무척 부러워 하면서 “듣건대 한나라는 아름답고도 대단히 크고 사람도 많다고 하더라. 그렇지?” 하고 열정적으로 물으며 연회를 차려 극진히 귀빈대접을 하여주었다. 연회에서 장건은 “우리가 한나라 황제의 명령을 받고 월씨국으로 가던도중 흉노에게 인질로 잡혀 시간이 많이 지체되였다. 대왕께서 우리를 월씨국으로 가게 도와준다면 한나라황제는 꼭 크게 감사를 드릴것이다.”하고 말했다. 이에 대원국왕은 “여기서 월씨국까지 가려면 중간에 강거국을 거쳐야 한다. 내가 기병과 통역을 파견하여 도와주겠으니 걱정말아라.”하고 통쾌히 대답하는 것이였다.   강거국에서도 아주 열정적으로 장건일행을 월씨국까지 호송해 주었다.   월씨국은 흉노에게 대패하여 총령을 넘어 서쪽으로 도망한후 대하국과 련합하여 대월씨국을 건립하였다. 그후 그들은 근심걱정이 없이 농업과 목축업을 하면서 대단히 유족한 생활을 하여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월씨국 사람들은 복수를 이미 망각하였다. 장건이 아무리 설득해도 왕은 이피탈 저구실 하면서 련합을 동의하지 않았다. 이렇게 1년여 시간을 끌었지만 련합작전은 성사되지 못했다. 장건은 더는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몹시 실망하고 귀국하기로 결정하였다.   귀국의 길에서 그들은 또 흉노에게 잡히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흉노가 내부반란으로 왕이 죽고하여 장건과 감부는 도망칠수 있었다. 그들 둘은 끝내 한나라 도읍인 장안(서안)으로 돌아왔다. 100여명에서 장건과 감부만 살아왔던것이다… 13년만에 살아서 돌아온 장건과 감부를 만난 한나라 황제 한무제의 기쁨과 감개는 한입으로 다 말할수 없었다. 장건이 비록 사명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한무제는 크게 중상을 내렸다.   장건은 이번 서행을 한무제에게 상세히 회보하였다. 한무제는 대뜸 안계를 크게 넓히게 되였다. 한무제는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서방의 그 여러나라들을 자기에게 복종토록 하고 싶었다. 한무제는 다시 장건을 파견하였다. 이번에는 사천으로부터 출발했는데 길이 통하지 않은데다가 소수민족과 언어가 통하지 못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흉노가 또 쳐들어 왔다. 한무제는 장건을 대장 곽거병을 도와 흉노를 대적하게 하였다. 그들은 흉노의 기병 3만여명을 소멸하고 대승리를 걷우었다. 그리고 서하지구(지금의 하서주랑)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번전쟁에서 장건은 자기마음대로 하여 작전시간을 어긴데서 철직되고 백성으로 되였다. 한나라는 부단히 흉노를 타격하여 서역으로 가는 길의 장애를  완전히 제거하였다. 한무제는 다시 장건을 기용하였다. 장건은 한무제에게 오손국(지금의 신강 이리하류역)과 련합하여 흉노를 소멸하자고 건의하였다. 한무제는 장건의 건의를 채납하여 장건이 300여명 외교사절단을 인솔하고 오손국에 가도록 하였다. 이번에는 흉노의 교란이 없어서 장건은 순리롭게 오손국에 도착했다. 거기서 장건은 또 부하들을 대원, 강거, 대하 등 국에 파견하여 련합을 권고케 하였다.   오손국왕은 한나라사절단이 많은 황금주보뢰물을 가져온데다가 공주까지 자기에게 주니 무척 기뻐하였다. 그러나 떡 벌어진 입은 입이고 마음은 심중했다. 하여 사람을 파견하여 직접 한나라의 실정을 알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오손국사신은 장건을 따라 한나라도읍인 장안으로 왔다.(서방에서 처음으로 온 외교사절이다.) 한무제는 열정적으로 사신을 초대하면서 한나라의 강대한 군사와 번영한 경제를 마음껏 보게 하였다. 사신의 회보를 들은 오손왕은 비로서 한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승인했다. 얼마되지않아서 서역의 기타나라들에서도 한나라와 우호관계를 건립하였다. 지나친 로고로 지금말로 하면 국가공훈장도 수여받을만한 장건은 1년후에 애석하게도 병으로 죽었다.   그러나 장건, 감부 등이 개척한 비단길은 한조와 서아, 구라파의 경제, 문화교류에 거대한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중국에 없던 포도, 당근, 호도,, 석류 등 맛좋은 물건들이 서역으로부터 들어왔고 중국의 비단, 철제품, 도자기, 생산경험 등이 서역으로 전파되였다. 또 이때로부터 서역의 여러민족들과 한족이 한집안처럼 서로 돕고 서로 교류하면서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였고 점차 중화민족으로 융합되게 되였다.                                                                                                22.4.
162    굴원의 절개 댓글:  조회:320  추천:0  2022-03-26
      수필                                           굴원의 절개                                                                                                             회령 단오절이 다가오면 새삼스레 굴원을 생각하게 된다. 굴원은 기원전 초나라사람이다.(기원전340ㅡ278.5.5) 그는 전국시대 중후기에 살았다. 굴원은 초나라 귀족가문의 출신으로 당시의 초나라 회왕과 한가문이였다. 굴원은 어려서부터 매우 높은 정치적재능을 보였는데 20여세에 벌써 좌도 벼슬에 올라 초회왕과 경상적으로 정사를 연구하고 법령을 제정했으며 각국의 사절을 접대하였다.   당시는 나라사이에 서로 겸병하기위한 싸움이 그칠새가 없었으며 점점 더 치렬해 갔다. 이런상황에서 굴원은 초나라가 발전, 강대해 지려면 적극적으로 정치개혁을 진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부패하고도 완고한 수구적인 귀족들의 강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들은 굴원의 재능을 질투하고 미워하면서 음으로 양으로 그를 반대하였다.   한번은 초회왕이 굴원에게 중요한 법령을 기초하라고 하였다. 굴원이 초고를 금방 다 쓰자 상관대부 근상이 와서 초고를 빼앗아 보려고 하였다. 굴원은 재빨리 초고를 거두면서 “이것은 초고로서 아직은 정식문건이 아니기에 누구도 볼수없다.”고 하였다.   근상은 창피하고도 불쾌해서 곧바로 회왕에게로 가서 굴원을 무함하기 시작했다.   “대왕이시여! 당신만 꿈속에 있나이다.” “뭐라구?!” “대왕께서 줄곧 굴원더러 법령을 기초하라고 하지않습니까. 그는 이것을 자기를 빛내기 위한 자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매번 법령이 공포되기만 하면 그는 도처에서 나발불기를 ‘흥! 나를 빼놓고 누가 해내겠는가!’합니다.” “아! 그가 또 무슨말을 하던가?” “그는 또 말하기를 대왕은 무지몽매 어리석고 잔폭하고 안광이 천박하고 대신들이 란건 모두가 탐욕스럽고 자사자리하고 미련하고 무능하다. 조정의 큰일들은 내가없으면 끝이다.”   근상은 금붕어눈알을 듸글듸글 굴려가며 입이가는대로 굴원을 기껏 무함했다. 회왕은 근상의 무함을 그대로 믿고 분통이 상투밑까지 터져올랐다. 그후로부터 그는 굴원을 멀리하였다.   그후,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련속두번이나 얻어맞아 터지며 모욕을 당했다. 진소호왕 즉위후 진나라는 초나라에 대하여 때리기도 하고 끌어당기기도 하는 정책을 사용했다. 어느날, 진소호왕은 매우 겸허한 태도로  초나라 회왕에게 서신을 보내여 왔는데 사연인즉 진나라 무관에서 화담을 하자는 것이였다. 초회왕은 가면 위험할것 같고 안가면 또 진나라에 죄를 짛는것 같고… 결정을 지을 수 없어서 대신들을 불러 의논을 하게 되였다.   토론에서 굴원은 “진나라는 호랑이와 같은 나라이고 침략이 성질로 된 신의가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진나라의 모욕을 어디 한두번만 당했습니까! 대왕께서는 절대로 가면 않되오니 가지마십시요. 가기만 하면 그들의 함정에 빠집니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초회왕의 아들이며 공자인 자란은 왕께서 꼭 가야한다고 극력 주장했다. 자란은 말하기를 “우리가 진나라와 맞서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땅을 잃었는가. 오늘 진나라가 우리와 화목하게 보내자고 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는가.”고 력설하였다. 이에 상관대부 근상은 적극 호응하였다.   초회왕은 아들 공자의 말을 믿고 진나라로 갔다.   초회왕이 진나라 무관에 도착하자 진나라에서는 즉시 군대로 그의퇴로를 끊고 초회왕을 진나라 도성인 함양으로 압송해 갔다. 진나라에서는 초나라가 땅을 내여놓으라고 핍박하였다. 이에 초회왕이 응하지 않자 진에서는 그를 연금해 버렸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서야 초회왕은 굴원의 말을 듣지않은 것을 후회하였으나 그것은 후회막급, 사후에 청심환이요 죽은아이 불알 만지기 였다. 1년여의 시달림 끝에 초회왕은 진나라에서 객사를 하였다.   초나라에서는 아비처럼 얼떨떨 한 태자 횡을 왕으로 즉위시키고 국권은 공자 자란과 대부 근상이 틀어쥐고 마음대로 주물렀다. 나라가 점점 더 망태기로 되여가자 굴원은 우국 우민 온갖 근심으로 속을 태웠다. 그는 여러번 왕에게 글을 올려 현인을 중용하며 내정을 혁신하며 군사를 훈련하고 원한을 설치할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그의 글은 오히려 자란과 근상의 미움을 받았다. 굴원은 철직되고 초나라 남쪽변강땅인 황량한 멱라강반에 추방되였다. 하지만 굴원은 왕이 다시 자기를 불러들여 나라를 구하게 하여 줄것을 애타게 고대하였다. 그러나 1년 또 1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의 비분은 뭐라고 형용할수 없었다…   류배지에서 굴원은 당지의 백성들과 친밀히 지내면서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몹시 동정하며 가슴아파하였다. 어느날, 굴원이 멱라강변을 산보하면서 자기가 지은 비분강개한시를 읇는데 어떤어부가 그를 알아보고 놀라와 하면서 물었다.   “어른께서는 3려대부 굴원이 아니신가요? 어찌하여 이런처지가 되셧나요?!” “천하가 모두 혼탁해 지고 오직 나만 깨끗하니, 모두가 취해빠지고 오직 나만 말쑥하니… 여기로 류배된거요.” “왜서 그들과 섭쓸리지 않았나요? 그러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텐데!” “깨끗한 옷을 누가 흙탕물에 더렵히려고 하리오. 강물에 뛰여들어 고기밥이 될지언정 간신들과 섭쓸려서 백성들과 초나라를 짋밟고는 싶지않소!”   기원전 278년, 진나라대장 백기가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를 진공하였다. 초나라는 풍전등화와 같이 위험하게 되였다. 이소식을 들은 굴원은 여러날 대성통곡을 하다가 5월5일(음력) 큰돌을 안고 멱라강에 투신자살을 하였다. 그는 초나라가 망하는것을 보고싶지 않았고 초나라 백성들이 무참히 유린당하는것을 보고싶지 않았든 것이다…   이 비통한 소식을 들은 당지의 백성들은 굴원의 시체를 건지려고 무진 노력을 다 했으나 끝내 그의시체를 건지지 못했다. 사람들은 강에 쌀을 뿌려서 굴원을 제사 지냈다.   이듬해 5월5일, 굴원의 1주기 제사날이 되자 사람들은 또 강에 쌀을 뿌려 제사를 지내였다. 그것이 후에 단오절로 되고 종자(주악, 각서라고도 함.)를 강에 던지는 풍습으로 되였다. 그리고 이날 룡주경기를 한다.   굴원은 이런 력사인물로서 우리나라 전국시기 가장 위대한 애국시인이였으며 정치가, 사상가 였다. 그는 애국자였다. 그의 애국의 핵심은 "애민"이였다.   굴원은 2300년전 사람이지만 그의 애국의 굳은절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많은 느낌을 주고 있다. 자고로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절세의 애국자들이 있었다. 오늘도 용솟음쳐 나오고 있다. 사람마다 애국자를 생각하는것도 물론 애국이지만 따라배우는것은 더욱 실제적인 애국이다.                                                                                                          22. 3. 
161    화선입당 댓글:  조회:342  추천:6  2021-12-20
        수필                                                   화선입당                                                                                                             회령 지금 건당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중국공산당을 찬송하는 노래가 전세계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다. 최근에 당중앙에서 내린 기념활동에 관한 지시를 보면 당사학습을 참답게, 열심히 함과 동시에 당의 정확성과 성적을 많이 말하라고 하였다. 이건 응당한 일이다 그도리는 나도 안다. 그러면서, 나는 이글에서 당의 조직건설에서 중시하지 않으면 아니될 문제ㅡ사상상의 입당문제를 말하고저 한다. 사상상의 입당은 한 당원의 정치적 생명을 좌우지 할 뿐만아니라 당의 생명을 결정하는, 극히 관건적인 중대한 사항이다. 이면에서 지난날 나는 적지않은 실례들을 보았다. 화선입당이라고 하면 아주 숭엄한 마음이 앞선다. 그것은 생명을 바치고 입당했기 때문이다. 생명의 대가를 요구하는 혁명임무앞에서 뒤로 물러설수도 있으나(그렇게 해도 나쁘다고 할수는 없는데도.) 선뜻히, 견정히, 나서서 임무를 맡았을때 본인이 입당을 신청했다면 죽었어도 살았어도 중국공산당조직은 그를 당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입당한 당원을 화선입당을 하였다고 한다. 화선입당은 전쟁년대에 많았다… 화선입당이란말은 아주 무게가 있는, 장엄하고 거창한 말로서 함부로 쓰는게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투사비수”(鬪私批修. 사심을 투쟁하며 수정주의를 비판 함.), “토구납신”(吐久納新.낡은것을 버리고 새것을 받음.)이 시작된 후부터는 입당이 많아졌는데 갑자기 입당한 사람은 거지반 화선입당을 하였다고 하였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사람이 갑자기 입당을 한다거나, 하였다면 사람들은 입을 삐쭉거리며 씰룩거리며 평론이 많았다. 그럴때면 유관령도에서는 “그동무는 화선입당을 한(할) 사람이요!”하고 꽥!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중구난방 풀머구리처럼 떠들어 대던 주둥이들이 쑥 들어가고 잠잠해 지었다. 여기서 내가 직접 본 그 “화선입당”을 몇개만 보기로 한다. 직원이 대여섯밖에 안되던 모 변강산골병원에 “6.26지시”를 관철하면서 의과학교졸업생, “6.26백의전사”가 배치되였는데 대뜸 20여명으로 불어났다. 그속에서 내과의 박선생부부는 현병원에서 내려왔는데, 박선생은 병원혁명위원회주임모자를 직방 쓰고 내려오고 안해인 조선생은 일반의사 신분 그대로 왔다. 그리고 내지의 모 현병원에서 사업하던 김선생부부도 “6.26백의전사”로 내려왔는데, 남편인 김선생은 보통외과의사고 그의 안해인 리선생은 소아과의사 였다. 김선생부부는 당조직의 배양을 받아오던 입당적극분자 였다. 그외에도 약국, 화험, 부유보건하며 의무인원이 여러명이 선후로 왔는데 그속에는 의학원졸업생(공농병학원, 2년학습.) 허선생과 두달간의 생산대(촌민소조)위생원(衛生員)훈련을 받은 서호사도 있었다. 이 산골병원에 원래는 중의사, 중약사, 서약사아줌마, 의학원졸업생 강선생과 위생학교호사반졸업생 장호사, 그리고 산파아줌마(부유보건)가 있었다. 원장은 회계가 겸하고 있었다. 강선생과 장호사는 제대로 의학을 배우고 국가의 통일분배에 의하여 이곳에 왔다. 그들은 여기서는 자기들의 업무수평이 제일높다고 자부하는데, 공사(향)의 간부들과 군중들도 그렇게 인정하였다. 강선생은 결혼한 몸으로 집은 시가지에 있고 이곳에서 독신생활을 하는데 사람이 수수하지만 꽤 미남형으로 생겼으며 겸손하고 온순하며 사업태도가 좋아서 군중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가정성분이 상중농이다. 하다보니, “나는 아이때부터 남의 눈치를 살피며 매사에서 조심을 하며 성장했고 그것이 성격으로 되기까지 했다.”고 그러니까, 나는 정직하게 온순하게 자란 사람입네다… 하는 암시적 말을 잘했지만 뒤통수에 손가락질을 받을 일을 몇가지 하였다. 그것은 하숙집의 말광대같은 두 딸과 안고 자는것을 본 동네 아낙네들이 소문을 퍼뜨린것이 한가지고(그래서 원장의 권고대로 병원의 방을 하나 가지고 이사를 했다.) 또 한가지는 입원한 환자(은행의 젊은 녀자. 남편은 외지에 있음.)의 병실에 불도 켜지않고 밤중에 들어가 퍼그나 있은일이다. 이일은 장호사와 서약사 아줌마가 직접 목격한 일이다(그날밤 그들은 직일이였다.) 그리고 인공류산, 부과질병을 진료 한다면서 내진실을 두었는데, 내진할때는 반드시 산파아줌마, 혹은 장호사거나 서약사 아줌마가 함께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단골로 다니는(불임증이요 무슨염증이요 하면서.) 반질반질한 녀자 서넛이 올때마다는 강선생이 혼자서 처치를 했다. 장호사는 남의 발등을 디디고(발등을 밟히운 처녀는 정신분렬증에 걸리고 말았다. 좋은 처녀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아깝다고 하였다.) 대대(촌)의 단서기를 하는 유망한 청년과 약혼을 하였는데, 단서기청년은 정말로 일을 잘해서 입당을 하고 다른 공사 단위서기로 발탁까지 되였다. 그런데 호사다마로 그가 바람을 무척 피워 당증과 공직을 떼우고 도로 쫓기워 올줄이야?! 하여 파혼을 하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로처녀가 되였다. 그와 강선생의 관계는 무척 애매하여 뒷말이 많았다. 강선생과 장호사는 입당적극분자로 명단에 오른지는 몇해가 되지만 이러루한 불미스러운 사적들 때문에 입당을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장호사는 복무태도가 대단히 나쁘고 자고자대와 교오자만등 성격적 결함까지(기실은 사상문제라고 하였다.) 가미가 되여 내외, 전공사적으로 곱다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보니 번마다 미끌어지군했다. 하지만, 강선생과 장호사는 몇해가 되여도 자기들이 입당을 못한 원인이 원장때문이라고 철천지원한을 품고 있었다. 뜻밖에 분풀이를 할 기회가 왔다. 공사적으로 강선생과 장호사는 제일먼저 반란을 이르켰다. 확실한 정보는 시가지에 집이 있는 강선생이 가져왔다. “…주자파를 잡아내는 운동이 산불처럼 급속히, 맹렬히, 전국적으로 타 오르기 시작했다… 크던 작던 령도자이기만하면 우선 때려부순다… 학생들이 주력인데 초중이상 학교들은 문을 닫고 애들이 전문 령도를 잡는 혁명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강선생의 귀속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들며 흥분한 장호사는 자기와 친한, 학교와 기관단위의 몇사람에게 극비중요소식(강선생이 자기한테서 들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말라고 백번 당부를 했다.)을 즉시 전달했다. 시가지에서 일어난 바람은 인차 이 산골구석에도 불어왔다. 강선생은 뒤에서 반란파 맹장들에게 궤책을 대주고(반란파고문아라고 했다.) 앞에서 날뛰며 지휘하는 일은 장호사가 하였다. 어느날 오후 장호사는 초중학교의 선생 두 사람과 함께 학생애들 30여명을 데리고 장부를 적고있는 원장에게 갑자기 덮쳐들었다. 그날부터 횡액을 당한 원장은 “주자파”요 “류망”이요 “탐오범”이요 “조선수정주의 특무”요 한 꼬깔모자를 번갈아 쓰고 얼굴에 광대를 그리우고 개패며 녀자들의 찢어진 낡은코신을 목에걸고 헌 양철통을 뚜드리며 개처럼 목에 바줄을 매여 절뚝거리며 아이들에게 끌리우며 거리를 조리돌림을 당하였다. 그리고 도시호구여서 다섯식구가 그의 몇푼의 월급에 매여 사는데 그 월급을 짤리우고 보조도 짤리웠다. 외다리 잔페군인인 원장(고아출신, 화선입당, 전업시 조선인민군대위, 중국해방전쟁, 조선전쟁 참가자.)은 1년거이 모진고생과 수모를 당하였다. 그런데, 강, 장이 난처하게 된것은 아무리 닥달을 해도 꼬깔모자에 쓴것같은 죄장은 털끝만치도 없은것이다. 강, 장의 행패에 기관단위간부들과  빈하중농군중들이 분노하였다. 어데서부터 나왔는지, “상중농이 혁명한 사람을 투쟁한다!”(장호사는 하중농이다.)느니, “상중농이 빈고농을 친다.”느니,  “계급보복”이라느니, “환향단이 왔다.”느니, “순전한 개인보복”이라느니… 하면서 여론이 물끓듯 하였다. 보아하니 이건 순전한 생트집 개인보복이였든 것이다. 사람들은 무리를 쳐 와서는 원장을 끌고 거리조리돌림을 하는 장호사들과 마구 걸고 들었다. 대경실색한 강과 장은 술책을 바꾸어 거리조리돌림은 그만두고 “조선특무”라는 죄목을 물고늘어졌다. 그혐의사실이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였으나 증실인을 댈수없는 상항에서 어쩔수가 없었다. 조선전쟁후퇴시기 원장은 어깨와 다리에 총상을 입고 대오에서 떨어지다보니 10여일 혼자서 적들을 피하며 북으로 들어오다가(호송하던 전우는 회생되였다.) 유격부대를 만나 구원을 받은것이다. 언젠가 이런 회고담을 한적이 있었는데 강과 장은 그것을 물고늘어졌든 것이다. 적후에서 10여일이나 지나서 북으로 왔다는것이, 전우가 희생되였다는것이 심히 의문스럽다는 것이였다. 이런 기막혀 죽을 노릇이 있는가?! 원장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짝지발지팽이로 땅바닥을 마구 뚜드리며 나를 거리에 끌고나가 때려 죽이라고 고함을 지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워낙 매몰차고 악착스러운 장호사는 눈알 한번 깜빡거리지 않고 증실인을 두 사람만 데려오면 되니까 어서 데려오라고 하면서 해죽거리기도 하고 표독스레 쇄된악청을 지르기도 하였다. 의뭉스러운 강선생은 사람들의 의심만 부추겼다. 대련합과 탈권호소에 따라 다른 단위들에서는 혁명위원회를 모두 내 왔으나 병원만은 원장의 문제를 결론하지 못하여 소위 업무령도소조(당원인중약사와 서약사, 장호사)가 행사를 하는데, 조장은 보황파 중약사였지만 실제로는 장호사가 주단을 했다. 그의 뒤에서는 강선생이 고문, 참모역활을 하였다. 병원은 사람은 대여섯밖에 안되지만 공사적으로, 현적으로 유명한 “로다난”(老多難) 단위로 널리 조명이 났다. 하여, 선후로 “빈선대”(빈하중농선전대), “군선대”(해방군좌파지지선전대)가 들어왔으나 문제를 조금도 해결못하고 가버렸다. 후에 “6.26지시”관철로 박주임 등이 오자 얼마후 원장은 현혁명위원회에서 현위생국에 올려갔다. 그는 현위생국에 가서 몇달 있다가 리휴를 하였다. 박주임이 온후 “로선분석”(자기와 련계함.) “비림비공”(批林批孔. 림표와 공자를 비판.) “투사비수” “토구납신” 등 정치할동은 줄기차게 진행되였다. 따라서 입당적극분자도 우후죽순마냥 용솟음쳐 나왔다. 그들로는 로 적극분자들인 강, 장, 김, 리이고 새로 뛰쳐나온 적극분자 조, 허, 서, 오회계 등 여덟사람이였다. 다른사람들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대체적으로 면목이 있지만 조선생과 오회계에 대해서는 생소하기에 조금 소개를 해야 할것같다. 조선생은 이미 알다싶히 박주임의 안해로서 내과의사 경력은 몇년이 된다. 하지만 업무실력보다 인물이 잘나서 지명도가 높았다. 특히 무도를 잘 추고 노래도 꽤 하는데, 현병원약국의 모모와는 퀴퀴한 일로 구설이 많았다. 그것은 려관방에 드나들며 사람들눈에 여러번 띄웠기 때문이다. 의사로서는 일반적 수평이였다. 오회계는 박주임이 와서 급히 물색해 데려온 회계다. 원장을 위생국으로 전근시키라는 현혁명위원회령도의 특별지시로 해서 오회계는 천만 뜻밖에 병원으로 들어오게 되였다. 그는 재무학교를 졸업하고 집이 있는 이 산골공사의 공소합작사(상점)에 분배를 받았다. 그런데, 소액이긴 하지만 탐오행위가 있어서 분사로 보냈는데 역시 개변이 없었다. 하여, 령도에서는 그를 상점후근잡공으로 두었는데 병원에서 달라고 하니 얼씨구 밀어보냈든 것이다. 병원에서 입당은 경쟁이 치렬했다. 공사에서는 한해 한번 입당을 비준하는데, 병원에 주는 명액은 하나뿐이 였다. 그러나 공사당위서기이시며 혁명위원회주임이신 왕동지가 병원은 여느단위들보다 입당적극분자가 많기에 명액을 더 줄수도 있다고 하였다. 특히 화선입당이 나올경우에는 무조건 입당을 시킬거라고 하였다. 왕동지는 공사혁명위원회가 성립될때 현혁명위원회로부터 직방 임명되여 온 령도였다. 공사의 원래간부들은 부서기 한사람과 선전위원을 내놓고는 몽땅 토개간부출신인 당위서기와 사장을 싸고도는 보황파들이여서 “쓸만한 간나덜이 한마리도 어부소…”였던 것이다.(왕동지가 미개한 산골 조선아덜이라면서 멸시하며 한 말.) 왕동지는 현량식창고 공인으로서 마대치기반의 공인이였는데, 반란을 억세게 잘해서(특히 패거리 싸움때.) 화선입당을 했고(소문에는 입당지원서의 신청인 이름을 혈서로 썼다고 했다.) 현혁명위원회 위원에 오르기까지 했으며 이 산골공사에 파견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한마디를 더 한다면, 왕서기가 와서 공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할때 구성원을 왕서기 “숴라 쏸”(말대로)으로 제꺽 결정했는데 반란파에 일변도를 한 원 부서기와 선전위원 외에는 몽땅 반란파맹장들에서 뽑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친히 “홍색변강보루”를 건설했다고 코가 우뚝해서 자랑하였다. 병원의 박주임은 포부가 큰 사람이였다. 그는 지구병원 혹은 지구위생국의 령도로 되는것을 분투목표로 한 사람이였다. 그는 광영한 “6.26백의전사”란 붉은꽃을 달고 혁명위원회주임이라는 령도발판에까지 올라서서 여기로 온 이상 한번 본때스레 3, 4년좌우 하면 지구급 나아가서는 성급의 벼슬도 가능하리라는 신심을 갖고 있었다. 박주임은 공사령도, 특히는 왕서기와 무척 친하고 상급령도와도 가급적 좋은관계를 맺기에 매우 예민한 신경을 쓰고 있었다. 사업에서 그는 “6.26지시”관철락실이라는 슬로건을 받들고 전방위적으로 억세게 공작을 전개하였다. 병원에는 강, 장 두사람을 직일처럼 집을 지키게 하고 그외의 직원들은 각 대대위생소에 내려보냈다. 그는 그들을 “6.26공작대”라고 높히 불렀다. 공작대의 임무는 대대합작의료건립, 위생방역, 계획생육, 애국위생, 맨발의사, 위생원 배양… 등등이였다. 동시에 그는 장사덕, 뻬쮼, 뢰봉을 따라배으며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 지식분자의 세계관, 인생관을 더욱  혁명화하며 빈하중농을 위하여 전심전의로 복무하며 다면수로 되기위한 활동 등 정치사상건설과 업무건설도 억세게 틀어쥐였다. 하향공작에서 조선생과 리선생은 며칠씩 상황에 따라 안배를 했다. 그들에게는 아이가 이미 셋씩 있었기때문이다. 강과 장은 처음에는 병원의 업무를 자기들한테만 송두리째 맡기는것 같아서 은근히 코가 우뚝했다. 그런데, 케를 보니 그게 아니였다. 다른입당적극분자들은 자기의 선진성을 이리저리 피뤄치며 활학활용 (活學活用) 할말이 많고도 끝없는데, 자기들은 말을 잘한다고 소문이 났지만 산사상을 가지고 남을 감동시키며 활학활용을 할 건데기가 없음을 감촉했든 것이다. 환자에게 어떠어떠하게 복무를 잘 했다는 소리는 묵은소리고, 다른사람들은 이 묵은소리도 농업에서 대채를 따라배우는 혁명운동이거나 전쟁준비사업에 붙혀서 생동활발하게, 멋드러지게, 감동적이게 장광설을 청산류수로, 웅변적으로, 발언시간을 초과하면서 내리풀었지만 자기네는 규정한 시간을 초과하기는 고사하고 다 쓰기도 힘겨웠다. 이러다가는 또 입당이 틀려지기는 명약관화였다. 강은 자기에게 “입당벼슬론”류독이 있었다고 산사상을 침통하게 참회를 했지만, 그래서 이순간부터는 진정한 당원으로 되기위한 입당을 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누구도 그의말을 믿지않았다.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그것은, 왕서기와 박주임이 너의 안해를 소학교의 부교장으로 안배해 주고 집까지 지어주겠으니… 네가 번번히 하는 맹세대로 이곳 변강에 뿌리를 박으라고 권고를 해도 그는 안해가 말을 듣지않는다고, 리혼을 생각하기도 했으나 아이가 둘이나 있고… 하며 구실을 대였고, 거기에 상중농성분과 원장을 혹독하게 박해한것, 남녀작풍문제 등 문제들로해서 가장 렬세였지만 벼슬하려는 욕망과 우선 시가지로 가려는 욕망을 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것을 전 공사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하향을 시켜달라고 신청을 했으나, 조선생이거나 리선생이 병원에 있을때에나 하향해서 며칠씩 고된농사일이나 하고왔다. 장도  “입당벼슬론” 류독으로 현적으로 첯 녀자원장이 되겠다는 산사상이 있었다고, 엄격하고도 첨예한 자기해부를 하였으나 령도로부터 군중에 이르기까지 그를 곱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에게는 “입으로만 혁명하는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어다녔다. 공사당위서기이시며 공사혁명위원회주임이신 왕동지만은 장호사를 고와하며 좋아하며 높히 긍정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장호사가 군중들의 미움을 산다는건 그가 반란정신, 투쟁정신이 높기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번은 왕동지가 병원 박주임에게 내부지시를 해서 장호사입당신청재료를 공사당위에 올려보내게 하였다. 그때는 기층지부에서 입당심사를 할때 군중대표(입당적극분자들이 위주임.)가 참가해서 신청자에 대한 견해를 즉 보는바를 말하게 하였다. 거수가결에는 참가하지 못하지만. 장호사의 입당문제는 토론하나마나 였다. 그것은 박주임자신부터가 전혀 동의는 고사하고 코방귀가 나왔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박주임은 완동지와의 우의를 중시해서 가만히 유관재료를 구전하게 갖추어 보고를 하였다. 토황제가 다 누구네 아들이냐고 하는 왕동지께서는 아주 위엄있게 틀거지를 차리며 기세꿋꿋해서 입당심사회의에서 장호사를 내놓았는데, 웬걸?! 99프로가 뽀이꼬트를 하는게아닌가?! 왕동지는 처음으로 코밥을 먹고 속이 쭝ㅡ 했다. 시시콜콜 너무길게 말했는데, 이제부터는 속도를 내자. 왕서기와 박주임이 이 공사에서 사업하는 기간내 병원서는 련속 4명이 화선입당을 했다. 순서별로 소개를 한다면 다음과 같다. 제일 처음으로 화선입당을 한 사람은 조선생이다. 조선생은 2ㅡ3일씩 3, 4리 되는 곳에있는 대대위생소에 집에서 다니며 몇차례 출근한것이 당원표준에 부합이 되는 선진사적으로 재료가 되고 마을의 개에게 물릴번 하였으나 막대기를 갔고다니며 출근을 견지한것이 화선입당재료에 들어가기까지하며 입당을 하였다. 그는 위생소를 지키며 대대의사를 자기대신 농촌로동에 나가게 하였다. 후에 왕서기가 지식청년 강간건으로 감옥에 잡혀가면서 자백한데 의하면 기실은 왕서기에게 궁둥이진상을 한것이 화선입당을 쟁취케 한 것이다. 다음, 서호사는 미녀이며 과부인 엄마와 "합작하여 활약을 잘한덕"이 크다. 그는 산골농촌인 이곳에 집체호 지식청년으로 왔는데, 엄마가 한상 잘차려서 생산대간부들을 두번인가 세번인가 대접하고 딸이 생산대맨발위생원 학습을 가게 했다. 두달의 말타고 꽃구경식 훈련이 끝난후 엄마는 왕서기를 공략하여 딸이 명정언순 병원의 서호사로 되게했고, 제방뚝공사장에 단위기관직원들이 로동을 나갔을때 휴식시간에 노래를 서너컬레를 불러 사람들의 혁명열의를 북돋아 주었다는 사적등이 화선입당의 생동한 재료로 되였다. 물론 활학활용 사상회보재료도 여러편 있다. 서호사는 입당후 변강에 영원히 박는다던 뿌리를 뽑아가지고 인차 시가지로 가서 튼튼히 박았다. 그런데 병원원장과 바람을 써서 총호사장에까지 승진을 잘하다가 남편에게 물매를 맞고 얼굴까지 훼손되고 리혼당하는 참극까지 당하고 말았다. 시병원으로는 남편의 줄시(인맥)를 타고 들어갔는데 배은망덕을 한것이다. 허선생은 입당신청서를 신문지 넉장에 일필휘지 붓글씨를 써서 병원복도와 공사청사복도에 붙인것이 아주 경천동지의 화선입당재료로 되였다. 그도 입당을 하자 인차 “영원히 변강에… 마지막 피한방울까지 다 바쳐…”를 유감스럽게도 조직의 "공작의 수요"때문에 실천못하고 현병원으로 전근을 했다. 미녀인 엄마가 문교위생 탈(부문)을 책임진 현혁명위원회부주임과 장기 간통관계여서 이 풍부한 천연록색자원이 효과를 냈든것이다. 허선생은 병원의 어느호사를 지분거리다가 그의 약혼자에게 귀통을 얻어맞은것이 그만 두 귀가 다 귀먹쟁이가 되고 말았다. 약혼전인데, 크게 랑패를 본것이다.   마지막으로 오회계의 화선입당을 요약 소개를 하고저 한다. 위에서 안바지만 박주임은 오회계의 재생부모나 다름이 없다. 의리가 있는 오회계는 온갖 탐오재간을 다 발굴활용하여 박주임을 재력으로 받들었다. 그는 병원의 직원들의 복리를 위하여 생산대의 묵밭을 다루어 콩농사를 하고 초약재배도 한답시고 하며 직윈들을 끌고 다니며 선두적으로 로동을 하였다. 여기에 풀어넣은 돈에서 오회계는 괜찮게 “소비돈”을 썼다. 가을후 매인에게 콩을 10여근씩 나눠주고 남어지는 박주임이 상급령도에게 농촌토산물을 “맛 보시라!”하는 인사에 충당하였다. 그리고 병원건물, 직원주택등을 건축,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난방용 석탄등 화목을 구입하거나 기타의 비품을 구입하는 등등의 지출에서, 그는 각종 기회를 만들어  거기서 뜯어낸 금액으로 소금고를 만들고 박주임의 “활동”에 재정지원을 하였다. 물론, 본인도 굶지는 않은거고. 오회계는 근검절약, 자력갱생, 근검치원(治院) 등 표양을 받으며, 술울 먹고  나무수레에서 떨어져 왼팔 손목을 삐끗한것이 재료로 가공되여 역시 화선입당을 하였다. 오회계의 입당은 박주임 임기의 마지막 화선입당이였다. 그것은 병원이 현, 지구, 성에서까지 농촌애국위생, 합작의료, 계획생육, 위생방역 등 사업에서 선진단위로 되면서 훌륭한 령도간부로 이름이 난 박주임이 정책에 의하여(“6.26백의전사”들을 원단위에 복귀시킴.) 원단위로 돌아(부원장으로 승진) 갔기때문이다. 얼마후 오회계는 박원장의 도움으로 중의원, 시병원 등 단위 재무실을 전전하다가 후에는 정부기관 모 국에 가서 재무과장을 하였다. 개혁개방초기 오회계는 원견성이 있게 절대로 없다던 한국친척과 인차 서신거래를 맺고 부부가 출국방문까지 하였다. 홍콩을 경유하여 한국에 한번 갔다온후 오회계는 거액의 국가돈을 탐오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는 무슨기계설비 를 들여온다면서 딸라를 외국에 부친후 인차 출국을 하고말았다. 계획적인 도망을 친 것이다. 안해는 궁궐같은 집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스리슬쩍 따라갔는데 오회계가 이미 새살림을 시작한후라고 했다.(집과 전부의 재산을 몰수했다.) 원 단위로 간후 박주임은 간암으로 사망하고 조선생은 의학원때의 자기선생에게 재가를 했다. 그리고 약국의 무도짝과 “우정”을 새롭게하였다. 김선생과 리선생 부부는 시종일관 꾸준하게 참답게 사업을 잘하다가 “입당적극 분자”라는 소게신을 가지고 정책대로 원 단위에 돌아갔다. 그들은 하향하면 대대위생소 의사가 위생소에 그냥 있게하고 자기가 고된 농업로동에 참가하였다. 하여, 군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간 입당심사에 들긴했어도 신통히도 둘이 다 언변이 없었다. 하여 산사상인식을 잘 표달하지 못하여, 그리고 박주임의 안배에 의하여 다음번에, 다음번에 하고 미루다가 돌아가라는 정책을 맞은것이다. “6.26백의전사”들과 화선입당을 한 “진짜배기 끌끌한, 신선한 혈액”들이 선후로 이 산골공사를 떠난후 청천벽력같이 “4인패”가 일망타진이 되고 말았다. 공사병원은 다시 한산해 지었다. 당지부도 없어지고 중의와 중약사 령감은 투슈를 하였다. 병원은 현병원에서 한사람이 대개 두달씩 내려와서 업무령도를 하였다. 정치후각이 예민한 강선생과 장호사는 된서리를 맞은 호박잎처럼 풀이 완전히 싹 죽어버렸다. 그들은 입당을 완전히 포기하고 타락하기 시작했다. 강선생은 어찌되였든 이 산골공사병원에서 제일 오래동안 사업한 사람이고 입당 적극분자경력도 자신의 말로는 14년이라고 하는데 하여간, 제일 긴 사람이였다. 그러나 작풍이 나쁘다는 락인때문에 령도는 말할것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꿈에도 그를 당원과는 근본 련계를 시켜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받겠다는 단위도 없어서 시가지로의 전근도 부지하세월이 였다. 소문에는 그의 안해도 바람이 세다고 하였다. 강선생은 변소에 개명치 못한 락서를 하는가 하면 녀자들에게 추잡한 육담을 내놓고 꺼리낌이 없이 해대였다. 사람들은 강선생이 음새(성정신병)를 쓰는것 같다고 수근거리기까지 하였다. 개혁개방초기 강선생은 술을 먹은탓인지 왜서인지 자기숙사에서 죽었다. 병원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다보니 언제 죽었는지도 몰랐다 발견은 장호사가 하였다. 장호사도 당조직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는 입당벼슬의 꿈을 포기하고 현실로 돌아와서 쫓겨온 단서기와 결혼을 하였다. 장호사는 공사혁위회 왕주임, 강선생 등과의 은밀한 관계와 류산까지 한 꼭지를 “단서기”씨에게 단단히 잡혀 있었고 또 그의 꼭 다시 일어설거라는 호언장담에 잡혀있었던 것이다. 개혁개방이 된후 그는 병원의 약품을 외상으로 가지고 다니며 조선장사를 하였는데 해관검사원과 변강통행증발급을 책임진 사람 등과 바람을 썼다. 그리고 인공류산, 접산, 부과처치 등을 하면서 돈을 받아서는 몽땅 자기가 꼴깍했다. 그는 탐오한 돈을 물어넣고 “캐출”(공직에서 제명)을 당하고 말았다. 이래저래 화와 울분만 남은 “단서기”씨는 고혈압, 심장병, 신경증 등 병으로 앓다가 젊은나이에 죽었다 장호사는 한국의 어떤령감에게 국적까지 떼여가지고 재가를 갔다. 그런데, 독사의 독액을 채취하는 일을 하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다고 한다. 병원에서 소위 “화선입당”을 한 그 몇사람들은 자신의 형상을 더렵혔을 뿐만아니라 사회적 영향도 몹시 나빴다. 원인은 사상상에서 입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가 입당동기가 우선 불순했다. "입당벼슬론"이 아니면 "입당우월론"이 입당하려고 무진애를 쓰는 동기였고 원동력이 였다. 그들은 입으로는 주문을 외우듯 "인민을 위하여... 당의 혁명사업을 위하여... 나의일체를 공헌하며..."였으나 속심은 철저히 "나의 리익을 위하여!"였다. 근본상 사상상의 입당을 운운할 여지가 없었다. 나무는 조용히 서 있고자 하지만 바람이 자지않는것처럼 언제나 당내에 불순물이 혼입된다. 물론, 그것은 아주 적은량이지만 해독이 크기에 반드시 즉시즉시 제거해야 한다. 당원은 사상상에서 입당해야 한다. 이것은 당의생명을 담보하는 근본이며 당의전투력을 보증하는 근본이다. 중국공산당은 이면에서도 풍부한 경험과 교훈을 갖고있다. 사상상에서 입당한 공산주의자들의 하나로 뭉친 힘이 있기에 중국공산당은  필승불패의 당이며 오늘까지 왔고 새중국이 있게 하였다. 당원은 시종 초심과 사명을 명기하고 당성으로 자률해야하며 조직은 시시각각 당의 순결을 눈동자처럼 지켜야 한다. 이것은 영원히 진행형이다…                                                                                                                       21.3
160    형제 댓글:  조회:1446  추천:1  2021-05-10
     수필                                               형제                                                                                                                회령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가만히 살펴보면 나쁜말일수록 더욱 그렇다.  고속철건설에 들어간 토지보상금 100여만원을 놓고 밭임자인 애비와 에미는 울기만하고 4남매는 동네를 부산히 굴며 한달여 밤낮 싸우다가 끝내는 법원놀음을 하고 뿔뿔히 헤여졌다는둥, 시장이요 서기요 하며 삐까뻔쩍 잘나가던 누구, 누구네 아들은 고랑을 차고 감옥으로 갔다는둥, 몇억, 몇십억을 꿀꺽해 가지고 내뺀 도둑놈이 2백놈은 넘는다는둥… 혀를 찰 나쁜소문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말은 바른대로, 지금 배금주의와 리기주의가 악렬한 상태인것만은 사실이다. 주변의 서민사회를 보더라도 배금주의, 리기주의가 갖은 악행을 다 피우고 있다. 변치말고 한번 잘살아 보자고 맹세를 다지며 돈벌이를 떠났든 남편(안해)이, 가짜리혼이요 가짜결혼이요 하며 부둥켜 안고 한없이 울다가 비장한 결심을 하고 돈벌이에 나섯던 가정이 “천연록색”대로 원생대로 온전한것이 몇프로가 될가… 욕심이 둥덩산만해서 산돼지 잡으려다가 집돼지 잃고, 게고 구럭이고 다 잃은 사람이 어디 한들뿐인가… 뢰물, 탐오, 사기, 협잡에 걸린사람, 일확천금몽으로 망한 사람, 몸팔고, 고리대, 도둑질, 도박질, 강도질하고… 패가망신한 사람이 적은가… 지금은 경제건설시대라 돈벌이는 열심히 해야하지만 심중히, 정직하게 해야한다. “불이지재”에 손을 대면 큰일이 난다. 경제활동에서는 꼭 “호혜호리”원칙을 지켜야 한다. 량심이 바르면 그림자가 곧고 발편잠을 잘 수 있다… 언귀정전, 나는 최근에 너무도 희한한 소문앞에서 경악을 금할수 없었다. 순덕이네와 우리는 작은 산골 향에서 17년을 한동네서 살았다. 순덕의 아버지는 그때 공사(향)간부로서 당위서기를 했고 나는 공사위생원의 젊은의사였다. 우리는  공사소재지와는 5리남짓 떨어진 부흥촌이라는 마을에서 살았다. 하다보니 걸어서 출, 퇴근을 하는 최서기와 나는 함께 다닐때가 종종 있었다. 나에게 부벌이 되는 최서기는 어떻게 좋은 의사로 될것인가에 대하여 자주 묻기도 하고 조언도  잘 하여주었다. 그는 나에게 령도간부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여러가지 도리를 알려주었다. 부모형제와 부부, 자식간에, 친척, 이웃간에 어떻게 처사를 해야하며 단위에서 동료지간에는 어떻게 해야하며 우리공사처럼 현병원과 200여리 떨어지고 교통이 불편한 상황에서는 위생원의 역활과 의사들의 능력이 매우 중요하기에 의덕과 의술을 부단히 제고하며 중, 서의를 결합하며 다면수가 되여야 한다는둥, 애국위생운동을 잘 전개하는것이 중요하다는둥, 자기의 정치사상각오를 부단히 제고하기에 노력해야 하며 인격수양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는둥… 대학선생급의 수준이였다. 나는 최서기를 정치사상적으로, 인간적으로 믿고 존경했으며 좋은분이라고 인정하였다. 그와 나는 땔나무철에는 함께 나무하려도 다녔고 채마전이며 집이영을 이을때면 최서기는 나를 배워주며 도와주었다. 우리는 망년지교로 가끔 술잔도 나누군 했다. 최서기네는 7남매를 두었는데 맏이가 순덕이다. 그리고 순덕의 아래로 줄줄이 딸이 다섯이고 막내가 순보다. 안해는 위염, 신염, 빈혈등으로 신체가 매우 허약한 장기환자고 농촌호구였다. 아이들도 모두 농촌호구고 시내호구로는 월급을 받는 최서기 혼자였다. 우리집은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고 녀동생 하나, 나와 안해는 신봉쟁이로 세살짜리 아들애가 있었다. 우리두집은 남남이다보니 형님 동생이라느니 삼촌이라느니 아재라느니 하지는 않았으나 허물없이 화목하게 지냈다. 그때세월, 마을사람들은 누구나 다 가난했지만 최서기네는 마을에서 제일 가난했다. 허구한 날 량식고생, 입을고생, 병고생으로 쪼들렸다. 최서기는 군중태도가 좋고 사업작풍이 좋아서 “토개간부”라느니, “연안간부”라느니 하며 호평을 받았는데 현에서 모범당위서기라고 하였다. 산골사람들은 최서기를 “사람이 좋다!”고 하였다. 그렇던 최서기가 비명횡사를 할줄이야?!...... 최서기가 죽은날의 그 참담하고 비참하던 정경은 일구난설, 잊을수 없다. 시신을 웃켠으로 놓고 아주머니는 기절해서 대대(촌)위생소 의사가 링겔을 달아놓고 애들은 이리저리 구들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그때 순덕이는 나이가 18살이고 순보는 7살, 형제는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순덕이는 덕, 지, 체가 훌륭해서 초중을 졸업할때 현성에 있는 한족고중에 추천생으로 뽑히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폭발했기에 그는 고중문앞에 가보지도 못하고 초중가방을 벗은 그날부터 생산대(촌민소조) 일에 나섯다. 아래 녀동생 다섯은 초중이며 소학교에 다니다가 모두 학교를 그만두었다. 순보는 아예 학교문앞에도 가보지 못했다. 아이들은 매일 빠짐없이 생산대일이며 집안일을 하고 엄마는 앓아누웠다. 무정한 세월은 흐르고 흘러서 딸들은 다 시집을 갔다. 순덕이가 녀동생들을 다 자기가 책임지고 시집을 보낸후에 자기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고집해서 어머니는 어쩔수 없었다. 하다보니 순덕이는 29살 로총각이 되였다. 그간, 순덕이는 순보를 초중과목까지 꾸준히 배워줬다. 순보의 글눈도 비상히 밝아서 형제는 고중과목까지 자습을 하였다. 유감이라면 순덕이가 그간 코병치료를 하지못한 것이다. 코안에 살이 살아나면서 코로는 숨을 쉬지못하고 입으로 숨을 쉬는데, 그 괴로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순덕은 수술비를 장만하려고 겨울마다 생산대 김대장을 따라 목재판 민공으로 부업을 갔다. 그러나 번마다 어머니와 딸들의 일이 더 급하게 닥치군해서 자기병치료는 명년으로 미루군 미루군 했다.  순덕이는 아버지문제가 정책락실이 되여 공사 중심공소합작사(상점) 보조회계로 취직을 하게되였다. 그후 인차 주관회계로 되였다. 그는 이미 다년간 생산대회계를 한 경력이 있었는데, 현공소합작총사에서 그의실력을 상당한 수준으로 보았든 것이다. 이듬해에는 코병도 치료했다. 순덕이는 너무도 기쁘고 좋아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것이 코로 숨쉬는것이라고 하며 자랑하였다. 그후 순덕이는 이웃공사 중심공소사에서 영업원을 하는 처녀에게 장가까지 갔다. 개혁개방이 시작된 몇해후 지구공소합작총사에서는 공소사간부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모집을 하였다. 모집에서는 공소사직공가족을 우선으로 했다. 순보는 일등성적으로 입학을 했다. 3년후 그는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웃향 중심공소사에 직방 주관회계로 배치를 받았다. 그리고 두해후에는 함박꽃 같은 산골처녀에게 장가를 갔다. 개혁개방정책과 시장경제환경은 시집간 딸들이 모두 활개를 치며 잘살게 하였다. 한결같이 워낙 똑똑하고 부지런한 그들은 때를 만났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시가지에 들어가 나름껏 자영업을 하였는데 사엄이 잘되고 있었다. 그간, 순덕이네는 오누이를 보았고 순보네도 아들하나를 낳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로망끼를 보이다가 아주 넋을 놓았다. 하여 순덕의 안해는 앞당겨 내부퇴직을 하고 가무로 들어앉았다. 순보네는 공소사의 불경기로 월급을 제때에 받을수 없는 상황이 점점 더 엄중해 갔다. 순덕의 내외는 순보네 두살짜리 애를 안아오고 순보내외를 한국로무로 보냈다. 순덕이네와 순보네가 그담부터는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같은 평범한 일상이여서 길게 말할것은 없다. 구태여 한마디를 보탠다면 그들형제는 “열심히 살았고 서로 극진히, 진심으로 관심하며 사랑했다.”는 것이다. 먼저 순덕이네를 보면, 순덕의 안해는 치매가 본격적으로 심해가는 시어머니를 보살피는 일이 가장 큰 일이고 다음은 순보네 아이까지 세아이들을 거두는 일이였다. 그러기를 6년후에는 시어머니가 풍을 맞아 아주 운신을 못하며 자리에 누웠다. 어페긴 하지만, 시어머니가 풍을 맞은후 순덕의 안해는 한시름을 놓게되였고 부담은 퍽 쉬워졌다. 시어머니에 대해서는 이젠 식사를 시키고 위생을 시키고 욕창을 예방하면 되였든 것이다. 천방지축 헤덤비기에 순간도 눈을 뗄수없던 어제와는 달리 시어머니는 갓난애기처럼 조용히 자는것이 주로였다. 순덕의 부부는 그런 어머니를 보살피며 얼마나 쓸쓸하였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욕창 한곳도 없이 8년을 조용히 누워 계시다가 역시 조용히 서산으로 가셨다. 복잡하고 할일이 많은것은 아이들이 였다. 옛날에는 아들 셋을 키우면 입이 삐뚤어 진다고 하였지만 지금은 아이 하나를 키워도 임이 영 삐뚤어 진다고 한다. 그것은 지금은 세상이 넓어지고 사람들의 생활환경이 옛날보다 백배는 더 복잡해 졌기 때문이다. 다행한것은 부모를 닮아선가, 가르킴이 좋아선가 아이셋이 모두 잘 자라 주었고 대학공부까지 하였다. 순보부부는 한국에 일하려 간후 형님네 부탁을 깊히 명심하며 실천하였다. 그것은 “부부가 꼭 함께 한집에서 살며, 힘에 맞는 일자리를 잡은후 참답게 열심히 일하며, 딴눈길을 팔지말라.”는 세가지 부탁이였다. 순덕부부는 돈벌이에 나선 많은 사람들의 성공과 실패에서 이런 경험과 교훈을 찿아 이같은 부탁을 동생부부에게 엄숙히, 극진히, 각별히, 거듭 당부했든 것이다. 둘이 안고자야하는 협착하고 루추한 셋집에서 순보부부는 24년을 살며 일했다. 무슨 유람이며 구경이며 한우불고기며 쇼핑이며… 그런걸 그들부부는 자기네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남들의 일로 보았다. 그들은 생일이며 구정, 대보름, 추석 등 명절날도 쉬지않고 부지런히 일했다. 명절이면 돈을 더 벌수있었다. 순보는 간날부터 오는날까지 줄곧 아빠트단지위생반에서 쓰레기청리일을 하는 한편 페물을 모아 팔았고 안해는 모텔청소부로 일했는데, 더럽고 힘들긴 했으나 수입이 좋았다. 하긴, 네번 일자리를 옮기긴 했다. 그것은 순보의 안해는 예쁘고 한창나이여서 돈을 내밀며 집요하게 치근덕거리는 “수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부부는 서로 이런말로 신칙하며 격려하였다. “우리부부는 한국에 돈벌러 왔지 생활하려 온게 아니다!” 세월은 쏜살깉이 지나고 순보내외는 24년만에 형님네 집으로 돌아왔다. 그간, 순덕의 아들부부는 대련에서 미국회사에 다니는데 손자애를 낳았고 딸부부는 일본에서 산다. 순보네 아들과 며늘애기는 대학졸업후 사업단위에서 일하다가 2년전에 공무원시험에 합격되여 지금은 시정부에 출근하고 있다. 지금 바로 그들의 결혼식을 하게되여 순보내외는 한국로무를 깨끗히 정리하고 영 돌아왔다. 그들은 개선장군처럼 성수나서 활짝웃으며 건강한 몸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형제들이 장알이 박히고 매듭진 손을 쓰다듬으며 연신 “고생했다! 고생했다!”고 말하니 순보는 “사람이 일을해서 죽는법은 없다.”고 하며 그간의 기나긴 “고난의 행군”을 한마디로 대범하게 일괄하는 것이였다. 그날저녘 식사자리에서 형제들은 몹시 서먹서먹해 하며 어색해 하는 순보네 부자를 놓고 한바탕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군 하였다… 그럼, 순보부부는 얼마를 벌었을가? 이것은 선생께서 백만단위로 짐작해 보시라. 순보아들의 잔치후에 들은, 지금세상에서는 전혀 상상도 못할 너무도 희한하고 놀라운 소문은 순덕이형제가 이제부터는 실내2 층짜리 호화로운 집에서 함께 살기로 했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그들은 고진감래를 맞았다. 퇴직금이 있고 보험이 있고 “용돈”도 근심걱정이 없고 사회는 날따라 좋아가고 그리고 한결같은 형제의 정!… 건강관리를 잘하며 취미생활을 하며… 유쾌하고 행복한 만년을 그들은 살게 되였다…                                                                                                             20.11
159    부모의 마음 댓글:  조회:1577  추천:2  2021-03-23
          수필                                                  부모의 마음                                                                                                                     회령 우리 경주김씨 장혁씨는 월간잡지 “로년세계”의 주필을 여러해 하면서 성과를 많이 올렸고 잡지는 사회호평을 받았다. 그러다가 이티전에 정년퇴직을 하였다. 이번에는 잡지사에서 영 물러났다. 그먼저 재직시 석달인가 반년인가 잡지사에서 물러난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장혁씨에게 “정배를 갔다가 돌아왔다. 고생했다.”고 우스개를 한 일이 있다. 그 사연을 간단히 말한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어느해 어느달 잡지에서 장혁씨는 “엄중한 정치적 착오”를 무의식중 범했던 것이다. 그것은 용맹무쌍하고 휘황한 “반란파맹장” 경력을 갖고있는 어떤사람이 장혁씨한테서 릉지처참을 해 죽일죄를 발견했든 것이다. 무슨문장에 “… 등 나라와 지구들에서 … ”라는 구절이 있는데, 장혁씨는 바로 고기서 깜빡 졸았는지 “지구들에서”를 까먹은 것이다. 하여, 그만 중국의 모 지구가 승격을 해서 나라 행렬에 들어간 것이다. 주필 장혁씨 꼭두에 최종검열관이 두눈을 화등잔같이 뚝 부릅뜨고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있었다면 그도 고 대목에서 깜빡 졸았는지… 하여간, 죄장은 통채로 장혁씨에게 씌워졌다. 반란파맹장은 “깡과 선”의 제일높은 고도에서 혁명적 의분을 더는 참을길이 없어서 층층의 유관령도와 당위에 적발과 성토를 보냈던 것이다. 하여 장혁씨는 석달인가 얼마를 직무정지처분을 받고 “심각한 개조”를 한후 제자리로 돌아왔던 것이다. 아무리 분석하고 조사하고 고찰을 해 봐도 때려죽일 극악한 반혁명반동분자는 아냐였든 것이다 둥글넙적 무던한 사람이 항상 남에게 너그럽고 겸허하고 근면하고 소박하고 정직했던 것이다. 극단주의거나 테로깡패거나 판국폭란을 지휘하거나 획책할 악한은 절대로 아니라고! 우수한 작가이며 령도간부라고 조직에서는 정중한 결론을 내린것이다… 나는 그때 너무도 우습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장혁씨를 보면 “정배살이를 잘 살고 왔는가, 귀체 무고하신가…”하고 우스게를 하였다. 장혁씨는 우리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유명한 중견작가다. 그는 청춘시절부터 문학을 자기의 평생직업으로 결정하고 소설창작 문학의 길에서 노력분투를 꾸준히 하여왔다. 결과, 지금에 와서 보면 장혁씨는 풍만한 성과를 쌓았다. 단편소설집과 중, 장편 대하소설 여러부를 국내외에서 출간하여 다산, 중견작가로 인정받고 사회의 존경과 애대를 받고 있다. 어느땐가 장혁씨는 나에게 “작가로 나선이상 많이 쓰겠다.”고 속심의 말을 한적이 있다. 작가로서 많이 쓰겠다는 마음은 나부터도 굴뚝같이 크다. 그것은 작가들의 공통한 초심이며 사명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생각과 같이 되는일은 아니다. 훌륭한 작품을 많이 창작하여 독자들에게 올리는 것은 두말할것없이 작가들의 책임이며 임무며 사명이다. 장혁씨는 소리없이 소임을 잘 완성하였다. 그는 자기를 수립하느라 소란을 떨며 문단에서 복잡을 떨지 않았다 소처럼 말없이 꾸준히 참답게 훌륭하게 문학농사를 하였다. 나는 장혁씨가 늘 미더웠다. 하지만 친밀한 사의는 아니였다. 마음속에는 종친이라는 일종의 혈연적 감정은 있지만 행동상에서는 서로 래왕을 하거나 작가협회활동으로 만날때면 따로 한잔을 나누거나 사담을 길게 하거나… 그런일들은 한번도 없었다. 장혁씨는 연길서 살고 나는 도문서 살다보니 거리관계도 있지만, 주지하는바이지만 작가들이란 밤낮 자기의 창작세계에서 살다보니 먹어라 써라 지화자 놀자 하면서 흐드득 거릴새가 없었고 그럴념도 전혀 없은것이다. 일전에 나는 협회의 유관일사로 장혁씨에게 전화를 했다. 말그대로 정말 오래간만에 통화를 하였다. 아마 5,6년도 더 되는것 같은데 장혁씨는 대뜸 내목소리를 알아보고 “종친형님 오래간만입니다!”하며 무등 반가워 하였다. 서로 우선 문안부터 오가는데, 그는 지금 소주 아들집에 가 있다고 하였다. 계획생육국책을 참답게 받들고 얻은 37살 독자아들은 한국 삼성회사 모 부서에서 과장으로 사업하고 길림대학시절의 아들동창인 며늘애기는 일본서 석사학위를 따고 소주서 일본회사에 다닌다고 하였다. 장혁씨부부는 이번에는 지금의 정책을 잘 받들고 두놈의 손자를 얻었는데 고것들을 학교로 데려가고 데려오는 소임을 맡았다고 하면서 “형님! 천륜지락이 따로 없다!”고 하였다. 하루후 장혁씨는 아들집 환경사진을 여러장 보내왔다. 벗꽃, 동백꽃, 옥란 등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하고 련꽃늪 종려수 등 열대식물로 록화가 잘된 정원은 공원 그대로 였다. 장혁씨는 아들의 성장과 발전에 대하여 무척 만족해 하며 흐믓해 하였다. 그는 문학농사도 잘했지만 자식농사를 무척 잘한것 같다. 그는 자식농사를 잘 지은것을 자기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성적으로, 가장 큰 보람으로, 가장 큰 행복으로 꼽는것 같았다. 아들이 길림대학이라는 명문대를 졸업했다는 것은(며늘애기도), 그리고 지금의 모습을 본다면 틀림없이 아이가 학생시절에는 선생님과 부모의 말씀을 명심히 잘 들었고 사회인으로 된후부터는 부모의 교시를 명심불망 하면서, 사회의 정확한 말과 행동, 가르침들을 새겨 듣고 보면서 참답게 사업하고 생활했음을 알수있다. 이런 자식의 부모라면 자긍심,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 주변을 두루 둘러보면 부모를 기막혀 죽게하는 애물단지 자식이 한둘뿐인가… 나는 종친 장혁씨가 흐믓해 하는 심정이 내마음속에 즉각 접수되며 느껴진다. 젊은시절에는 대수롭지 않았지만, 늙을수록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이 자식농사다. 천하의 모든 부모들은 자식들이 잘 성장하며 잘 발전하며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부모도 민족도 나라도 미래를 후대들에게 기탁하기 때문이다.                                                                                                                    21.3
158    3.8절 풍경 댓글:  조회:1448  추천:2  2021-03-06
         수필                                              3.8절 풍경                                                                                                                  회령 3.8절은 민속절도 풍습놀이도 아닌 정치적기념일이다. 3.8절이 생겨난것은 백십년이 거이다되지만 우리중국에서 기념활동을 진행하기는 90년이 좀 지났다. 중국공산당이 탄생한후 얼마안되여 들여온 이 정치적기념일은 그 취지가 아주 진보적이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취지는 전세계각국의 광범한 로동부녀들을 단결하여 평화와 민주, 부녀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침략전쟁을 반대하며 팽창주의, 극단주의, 테로 등 행위로 빚어지는 전쟁, 정변, 살륙과 파괴 등 만행을 반대하며 부녀를(지금은 어린이도 포함되였다.) 기시하며 억압하고 착취하는 등 일체의 인권불평등을 반대하여 투쟁하는것이다. 때에따라 기념경축행사주제가 다종다양하게 변하지만 근본취지에서 떠나지 않는다. 3.8절의 완정한 명칭은 “3.8국제로동부녀절이다. 이 엄숙하고도 성스러운 기념경축명절을 “3.8절” “부녀절” “로동부녀절” “국제부녀절”… 그리고 “안해절”이요 “각시 절”이요 하며 롱담으로도 여러가지로 부를수 있고 불러도 되는 부드럽고 너그럽고 친절한 명절이지만(다른 정치적기념일은 엄숙성만 허용한다.) 그 기념경축행사만은 정치성이 아주 명확하다. 취지를 다시한번 되새기며 강조하는 정치사상활동으로 되여야한다. 이런맥락에서 우리병원의 지나간 3.8절을 한번 돌아보았다.   1976년 3.8절   주지하는바지만, 1976년은 새중국력사에서 상당히 슬프고 비참한 해였다. 새해 년초에 만민이 경애하는 주은래총리가 서거하고(1월8일) 7월8일에는 자애로운 넓은품이신 주덕위원장이 서거하였다. 그리고 그달28일새벽에 세계의 400여년력사에서 가장 참혹한 당산대지진이 발생하였다.(당장에서 20여만이 죽고 80여만이 중, 경상을 당했다.) 이어 9월9일새벽 붉디붉은태양이시며 어버이신 모주석께서 우리를 영영 떠나가셨다. 주총리가 서거한후 두달만에 3.8절이 찿아왔다. 다른때 같으면 원단부터 시작된 명절기분이 설, 보름을 거쳐 3.8절이고야 끝나는데 올해는 거국산하가 무거운 슬픔속에 잠겼다. 도시사람들로부터 시골농민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묵묵히 생활하였다. 농촌에서 사원들은 밭머리쉼을 할때면 남정들은 머리를 수굿하고 담배를 피우거나  멀거니 남산을 바라보기가 일수였다. 녀자들은 아무말 도 없이 뜨개질만 하였다. 살펴보면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처연한빛이 어려있었다. 그런데, 2월초 어느날 상급혁명위원회의 틀별지시라고 하면서 “올해의 3.8절은 특히 혁명적으로, 생동활발하고 농후하고 열렬한 정치적분위기속에서, 문화대혁명의 전면적 거대한 승리를 쟁취한 가장 큰 기쁨속에서 성대히 기념경축행사를 진행하여야 한다.” 라는 문건이 내려왔다. 무엇이 전면적인 거대한 승리를 쟁취한 것이고 무엇이 가장 큰 기쁨인지 문건에는 밝히지않았기에 우리는 알수 없었다. 아마도 무척 기쁜사람들이 따로 있는 모양이였다. 어찌됐던, 혁명위원회의 지신것만큼 락실하고 집행해야 했다. 병원에서는 당지부서기, 혁명위원회주임(원장), 부주임(총호사장)의 주최하에 전 원 직공대회를 소집하고 3.8절기념경축행사를 어떻게 멋드러지게 진행할것인가를 토론하였다. 작년에는 3.8절기념경축활동총결평비에서 침직창에 졌는데 이번에는 1등을 하자고, 녀동지들이 제일 많은 우리단위가 또 지면 되느냐고… 서기와 주임은 거듭 강조하면서 용약 발언하라고 동원 독촉하였다. 작년에는 참으로 창피스럽고 너절하게 졌다. 활동은 잘했으나 전 시적으로 개골망신을 한것이다. 그것은 하필이면 3.8절날밤 오입쟁이가 세쌍이나 현장에서(병원에서) 잡힌것이다. 두쌍은 년놈이 모두 병원사람이였고 한쌍은 밖에서 사내가 기여든 것인데, 짓쳐들어온 남편과 그들 일행에 의하여 병원은 장밤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토론은 퍼그나 시간이 지났는데도 대부분 직원들이 잠잠해 있었다. 령도들이 또 거듭 독촉하자 몇사람이 발언하였다. 두엇이 뜨뜨미지근한 발언을 한후 우리병원의 장편연설가이며 “강용회”대표인 외과의 강호사와 내과의 성호사가 본격적인 발언을 시작했다. 성호사는 어머니가 활동을 잘해서 병원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청소원으로 있다가 두달간의 “맨발호사”훈련을 거쳐 호리원으로 되였고 또 뒷문을 뚫어서 얼마후에 정식호사로 안배되였다. 강호사와 성호사는 입당을 위한 경쟁적수인데 그들은 둘 다 말 잘하고 노래 잘하고 춤도 꽤 보기좋게 췄다. 그리고 머리가 팽글팽글 잘돌아갔다. 그런데 성호사가 인물이 더 환하고 까르르! 캐드득! 흐드득거리길 잘하고 몸을 배배꼬며 애교를 잘피워서 령도들에게 인기가 더 좋았다. 강호사와 성호사는 혁명적이고도 기발한 방안을 경쟁적으로 발언했는데 그것들을 종합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문예경색에서 이번에는 대형으로 출연해서 아예 다른단위들의 기를 꽉 눌러놓는다. 노래, 춤, 시랑송을 주절목으로 하되 남자들도 대량 등장할것.(이건 정말 놀라번져질 금시초문의 신생사물이였다!) 천장의 어록, 구호를 써서 주요거리를 붉게 물들인다. 오전, 오후 두차례 인분뇨를 소랭이에 담아 이고 시교 채소생산대에 지원함. 반드시 백의를 입어야 하고 녀자들이 앞에, 남자들은 뒤에 4렬종대로 행진함. 그저 행진하면 정치성이 돌출하지 못하기에 구호를 부르거나 양반극노래를 부르는데 노래부를때는 남자들이 노래부르고 녀자들은 춤추며 행진함. 시교로 갈때 전원이 어록판을 목에 건다.(합창과 시랑송을 할때도 목에건다.) 너무도 희한한 방안에 사람들은 수근덕거리거도 하고 쯔쯔 혀를 차기도하고 키드득 거리기도 하였다. 회장은 시글벅적하는데 병원혁명위원회위원인 지덕팔이가 “지(나)가 한마디 허것습니더!”하고 우렁차게 웨치며 벌떡 일어섰다. 덕팔이라하면 병원뿐만 아니라 현성에서 알아봐 주는 유명한 “히들쟁이"(익살쟁이)다. 사람들은 그를 보통 더팔이 떡팔이 더펄이 떡펄이 지어는 혹은 개팔이 똥팔이라고 불렀는데 덕팔이는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그는 다리병신인 엄마와 함께 이 현성에서 빌어먹으며 자랐다. 광복후 얼마안되여 엄마가 죽은후 덕팔이는 음식점들을 돌며 잡일을 하였다. 건국후 정부에서 소방대잡공으로 넣었는데 보이라일을 잘해서 병원보이라실에 정식으로 배치되고 반장까지 되였다. 덕팔이야말로 진짜 무산계급이고 가장 기본군중이였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덕팔이는 대수로와 하지않았고 그가 뭐라고 하든 사람들도 허물하지 않았다. 덕팔이는 스스로 공부를 해서 소학정도로 문맹을 벗었는데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특히는 “억고사감”(과거의 고생을 회억하며 오늘의 행복을 말함.)강연으로 초청받아 다니며 아는것이 더욱 많아졌다. 그는 자기의 성분, 출신이 아주 좋다는걸 알았고 나쁜일만 하지않으면 천하에 걸릴것도 무서울것도 없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하다보니 남들이(병원지식분자들이) 극히 조심하는 말을 그는 내키는 대로 탕탕 하였다. “잘됐군! 구경거리가 생겼군.” 사람들은 모두 기분이 나서 덕팔이를 쳐다보았다. “거, 말입니더. 스나덜(남자들)이 똥소래를 바루 니(이)것습니꺼? 됴개덜(조개절)에 스나덜이 너덜대구… 더(저) 강호사 성호사가 백이를 닙(입)고 똥소래니는것이 무슨 뎡티덕(정치적)으루 둏타(좋다)능디 나능 반대헙니더. 그라구 고거, 차라리 이렇게 허문 어떻습니꺼? 스나덜은 똥소래를 등때기에 디(지)구 몽땅 한발씩 되는 꼬깔모재를 씁시더. 모재에는 뻘건뼁끼루 "깡통동디(강청동지)께 경례를 헌다!"라구 쓰구. 양반쉬(본보기극)는 다 가티(같이) 부르며 시내복판에서 흐믈떡튬(춤)이거나 찌구덕벌커덕튬(충성무)을 튜문(추면) 더 멋이 나것구먼. 그라구 건의가 있능디 병원에 보툐(보초)를 여러개 더 세웁시더. 누망(류망)이 또 생기문 않되디…” 누가 뭐라든 할말을 다 하는 덕팔인데다 사람들이 나 죽는다 웃어대니 그는 더욱 신나서 떠들어 댔다. 하지만 덕팔이가 한 “됴개덜”(조개절)과 “깡통”(강청)이란 언론때문에 회장은 긴장해 지기도 했다. 그것은 강호사와 성호사가 혁명적격분을 참을수 없어서 모택동사상으로 혁명적반격을 하며 혁명적대비판의 무기를 높히 쳐들었기 때문이다. 처지가 우습게 되자 덕팔이도 왈칵 밸을썼다. “니덜이 공인계급을 공격허는 거디?! 공인계급이 일테(일체)를 령도헌다! 이 쌍노무 에미나덜이…” 사복개천같은 덕팔의 입이 터지면 당할자가 없다. 그의 말재간도 강호사나 성호사에 못지않았다. 사람들이 “우스개로 한 말 한마디를 가지고… 량택(리해)해 들으면 그만인걸 공연히…”하며 말려서 풍파는 한참지나 잦아졌다. 그러나 “깡통”(강청)이란 말은 10월6일 “4인패”를 소멸되기 직전까지 강호사와 성호사가 한사코 물고 늘어져서 무시무시하게 조사가 진행되였다. 병원의 대다수 직원들이 “깡텅동디”(강청동지)라고 말했다고 증명을 서며 덕팔이를 감싸주었기에 전안조가 결단을 못하고 있었는데 “4인패”가 꺼꾸러 진 것이다. 상황은 180도로 역전해서 이번에는 강호사와 성호사가 “4인패”의 졸개로 조사를 받게 되였다. 직원들의 비난과 격분도 맹렬하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덕팔이가 나서서 “갸덜이 뭘 안다구. 나서서 너덜대문 입당이나 되겠는가 해서 그런게디…”하고 감싸주어 후에 별일은 없었다. 그해 병원의 3.8절기념경축행사는 기본상 강호사와 성호사의 방안대로 진행되였다. 활동은 대체상 순리롭게 성공적으로 끝났다. 다만, 똥소래를 녀자들께 이워줄때 어떤 사내녀석들은 소래를 우정 눈과 코앞에 들이대고 얼쩡거리며 엄숙치 못하여 말썽이 생기고 몇사람은 발칵 성을 내기까지 하였다. 그해 전 현 3.8절기념경축활동평비에서 우리병원은 소원대로 1등을 하였다. 전원이 몽땅 백의를 입은 세절에 대하여 진심이 없는 지나친 형식주의라느니 뭐니하고 말썽이 있었으나 강호사와 성호사의 변설로 혁명적행동이라고 긍정되였다. 하지만 그들을 포함해서 적지않은 녀자들이 여러날 구역질을 하였다. 그후 강호사와 성호사는 더욱 다채롭고도 풍부하고 심도깊게 똥소래를 줄거리로 산사상을 폭로 분석 비판하며 “활학활용”(실제에 결부하여 학습하며 응용 함.)강용을 멋드러지게 하였다. 그러다가 두사람 모두 산골 향위생원으로 쫓겨갔다. 물론 예비당원자격도 취소당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덕팔이가 근심하던 누망(류망)착오에 걸렸기 때문이다.   2003년 3.8절   무엇이나 시대와 형세와 환경에 따라 변한다. 우리병원의 3.8절풍경도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3.8절기념경축에서 정치사상활동과 문체활동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층층이 모범인물 선진단위를 뽑았는데 현, 시급부터는 “3.8홍기수”( 개인, 집체. 지금은 3.8선진 혹은 모범이라 함.)라고 옝예의 칭호를 수여했다. 선발, 사적보고, 문체경연준비와 경색, 평비총결… 이러한 활동은 보통 한달이란 시간이 걸려 3.8절날이면 모두 끝났다.(혹은 2ㅡ3일전에 끝나기도 했다.) 3.8절날에는 단위별로 활동하는것이 위준데 반날은 정치사상적의의가 있는 로동을 하고 밤에는 간단한 다과와 장품을 준비하고 문예경색 혹은 오락회를 하였다. 후에는 이러한 풍경이 모두 사라졌는데, 사회적으로 병원에 대한 여론이 아름답지 못했다. 인상에 별로 남는것은 없으나 그중에서 2003년 3.8절이 인상에 남는것은 그날 병원에서 특대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해전부터 3.8절이면 진행하던 현, 시급활동은 취소되고 단위별로 자유로히 활동했다. 우리병원에서는 과, 실별로 마음대로 하게 했는데 보통 오후반날을 녀자들이 휴식하게 하였다. 그리고 녀직원수에 따라 “활동경비”를 주었다. 처음 몇해는 경비를 받으면 그래도 집체활동을 했는데 함께 먹고 마이고는 노래방으로 가는것이 기본이였다. 녀자들은 술을 마이면 쉽게 감정폭발을 한다. 노래방에서 승벽내기로 불러대는 노래란 거이모두가 사랑이요 리별이요 한숨이요 눈물이요 다줄게 나는네것 너는내것… 이러루한 노래인지 사설인지 한것을 부르다가는 울고 불고 달래고 싸우는가 하면 한켠에서는 계속 불러대고 더러는 달아나기가 일수였다. 핸드폰으로 누구와 무슨대화를 하는지, 어데가서 무얼하는지… 서로 알수도 없거니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은사”를 보호하고 “인권”을 존중한다고 하지않는가… 사실은 대개 알면서도 서로 관계치 않을뿐이다. 3.8절만 되면 그야말로 녀성천하였다. 점심때부터 밤중까지 음식점, 노래방, 거리와 골목길을 녀자들이 휩쓸었다. 남자들은 어데가 숨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거리가 깨여지게 노래하고 웃고 떠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욕사발을 퍼붓고 토하고 엄청 큰실수 하고 조명이 나고… 해가 넘으면서 집체적으로 활동하는것이 점점 더 시끄럽고 불편하고 조직하기도 장악하기도 힘들었다. 청가맡는사람 중간뺑소니 아예불참… 누가 그 치닥거리를 하기 좋아하겠는가. 하여선지 우리병원에서는 “활동경비”를 내여줄뿐 다른것은 일체 상관하지 않았다. 대부분 과, 실들에서도 경비를 받으면 개개인께 돈을 나눠줘 버렸다. 2003년 3.8절날 오전이다. 아홉시 남짓해서 경찰차 세대가 경보를 울리며 병원정문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대뜸 구급환자가 온걸로 느꼈다. 그런데, 이거 무슨벼락인가?! 원장, 회계, 출납을 잡아가지 않는가?! 진상은 인츰 밝혀졌다. 그들은 공모해서 수백만원의 돈을 탐오했던 것이다. 그들의 탐오행각은 악렬하고도 비루하기가 그지없었다. 탐오할수 있는 모든 구멍은 다 리용했다고 하는데, 지어는 사무실에서 마이는 광천수값에서도, 녀자들께 준 3.8절경비에서도 수거를 조작해서 뜯어 먹었다고 했다. 그날의 3.8절은 의외로 집체활동을 하는 과, 실이 많았는데 오전의 사건이 화제가 되고 관심을 끌었기 때문일거다.   최근년간의 우리병원의 3.8절활동은 또 새로운 풍경을 보이고 있다. 선진을 뽑고 양로원봉사활동을 조직하기도 하고 거리에서 질병상식보급 그리고 문체경색도 조직, 진행한다. 먹고 마이고 오락을 하는 절목도 매우 신사적이 된것 같다. 정치사상사업이 심입되고 물질문명, 정신문명수준이 제고됨에 따라 3.8절은 더욱 아름다운 명절로 되고있다…                                                                                                                   17.2
157    형식주의에 대한 연구 댓글:  조회:1580  추천:1  2020-10-13
     수필                                     형식주의에 대한 연구                                                                                                                  회령 래일은 중추절 ㅡ 한가위 ㅡ 농력(달력 월력 음력) 팔월 열닷새 ㅡ 추석명절이다. 옛날부터 이날을 우리 조선사람들은 큰 명절로 잘 쇠였다. 그것은, 이맘때쯤이면 그해 농사일이 기본상에서 끝나고 작황도 기본상에서 결정이 나고 이른봄부터 비지땀을 흘리며 일해 온 농부들이 시름놓고 한쉼을 푹 쉴수있는 고비(시간대)기 때문이다. 천하지대본인 농사에서 이제 앞에 남은것은 가을과 타작뿐인데, 그해세월이 순풍세우였고 이제 앞으로도 천재지변만 없으면 올해 농사는 순리로 끝나는거다. 가을일도 무척 힘든일이긴 하지만 수확의 기쁨은 농부들만이 즐기는 락이다. 하지만, 그건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다. 추석전후의 한고비를, 대개 농력8월을 어슬렁8월 혹은 건들8월이라고 한다. 가을까지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기에 농부들은 호미며 보습을 씻어 걸어놓은후 슬슬 땔나무를 하고 선기슴(기음. 밭의 큰풀뽑기)을 하기도 하고 약초며 버섯이며 머루 다래 사냥도 한다. 바를 들일 피겻(피나무껍질)을 장만하기도 하고 보치(봇나무ㅡ짜작나무껍질.시관을 매장할때 관위와 주변을 둘러싸는데 주로 쓴다.)를 벗겨오기도 한다. 사실은 어슬렁8월이요 건들8월이요 하지만 농부의 일손은 그냥 있다. 참으로 무한한 농부의 일생이다… 조상님들께옵서 달이 횅창 밝은 8월15일을 추석명절로 결정한것이 언제고 또 왜서인지, 황제페하의 독단이신지 아니면 정치국상무위원회 집체결정인지는 모르겠으나, 당나라때에 벌써 한집식구들이 단란히 모여앉아 월병을 먹으며 달구경을 했다고 하니 추석은 퍽 오래 된 민속절이다. 근년에 와서 우리중국에서는 나라적으로 추석을 법적공휴일로 정하고 중화민족(56개 민족으로 구성되였음.)들이 추석을 더욱 잘 쇠고있다. 그런데, 쇠는 형식에서는 구성원 민족들마다 특점이 있다. 성묘는 다 하는 중차대한 행사이지만 즐기는 형식은 부동한 점이 많다. 긴단히 살펴봐도 한족들은 지금도 월병을 민법통칙마냥 지키며 꼭 먹는데, 안 먹겠다고 떼질쓰는 개구쟁이 한테도 기어이 한쪼각이라도 주둥이에 먹이고야 만다. 그래야 둥굴둥굴 잘 굴러나가고 집식구들이 흩어지는 일이 없이 단란히 뭉쳐 잘 산다고 믿는다. 그리고 달구경을 한다. 우리조선족은 형식이 꽤 많다. 농촌마을을 들여다 보면 재밋게, 알뜰히 추석을 쇠는것이 보인다. 힘든 농사일로 땀에 절어 시큼하고 누린내 나는, 흙물 풀물이 잔뜩 든 헌옷을 벗어팽개치고 깨끗히 때밀이를 한후 입쌀풀을 먹여 다린 흰바지 흰저고리를 쉬원히 입는다. 명절음식으로는 식량사정이 되는 집들에서는 곰물밴새(송편)를 하고 대부분 집들에서는 떡같은건 별로 못하고 소고기국에 이팝을 어쩌다가 맛있게 먹었다. 그것은 추석이면 소를 잡아먹는 풍습에 따라 마을추렴으로 몇달간 풀살을 잘올린 소를 잡기에 소고기맛을 보게되는 것이다. 인구당 석량중이 돌아가게되면 한칼 잘먹는 셈이되였다. 아이식구가 많은 집들에서는 분배몫이 많아 흐믓해 하였지만 아이가 없거나 한, 둘뿐인 집들에서는 찌뿌둥 해 하였다. 하지만, 아이가 많은 집들에서 한편으로 미안해 하면 “좋은걸 만나면 아이들이 더 먹는다.”고 하며 대범히 넘어갔다. “4청”과 “문혁”기간에는 자본주의 꼬리를 잘라버리는 투쟁과 수정주의와 사심을 뽑아버리는 투쟁을 점점 더 심도있게 진행하다보니 쇠고기는 물론이고 추석바심으로 먹던 올벼농사도 걷어치웠다. 웬간한 명절은 타파해 버리고 “네가지 낡은것”(破4舊즉 낡은사상 문화 풍속 습관)은 짓부셔 버렸다. 푸짐하게 먹을 형편도 아니건먼 근검소박을 해야한다고 웨쳤다. 아침후에는 성묘를 간다. 성묘때문에 추석이 생겼다고 사람들은 믿다싶히 하였다. 멀리서 하루 혹은 이삼일 품을 들여서라도 성묘를 했다. 나의 큰외삼촌은 궁둥이에 낫자루를 차고 피겻노끈망태기에 고구마술 한병, 입쌀구비(구운기름떡) 석장, 삶은닭알 세알, 마른명테 한개를 넣어 메고는 온하루 성묘를 다니였다. 어느해 추석땐가 내가 한번 외삼촌에게 로(증조)할아버지, 로할머니 산소에는 이젠 다니지 않아도 되지않는가고 말을 했다가 눈알이 쑥 빠지게 줄욕을 먹은일이 있다. 그것은, 외삼촌의 로할아버지, 로할머니 산소는 알미대산골치기(막바지)에 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는 갈매골 중구품(중간쯤)에 있었는데 두곳은 남북으로 30여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외삼촌이 너무 힘들어 해서 생각느라 걱정한것이 싱거운 짓거리로 돼서 줄욕을 벌어 얻어먹은 것이다. 그날, 외삼촌은 “조상을 모르는 새끼는 개새끼다!”하고 힘있게 론단을 내리고는 잠이들었다. 50도고구마술을 한병이나 다 마여가면서 힘든일을 하고나니 술기운도 올라오고 무척 지치기도 했든것이다. 그때가 외삼촌의 년세가 예순몇이였는데, 그의 두 아들은 갈매골까지는 따라가고 알미대는 나와 외삼촌이 성묘를 갔다. 두 아들녀석들은 아직은 어리여서, 그리고 마을청년들의 놀음을 구경하라고 외삼촌은 너그러운 배려를 베풀었든 것이다. 그때는 우리마을이 공사(향)에서는 제일 큰 대 부락으로 3개 생산대였다. 추석이면 남청장년들은 개인장끼로 씨름을 하고 처녀와 각시, 아주머니들은 그네를 시합했다. 또 남녀 배구 시합도 했다. 축구도 하고는 싶었지만 마당이 없어서 하지못하고 해마다 아쉬워 했다. 그네는 마을 복판에 있는 한구루의 큰 느티나무가 신통히도 남쪽으로 한줄기 굵은가지를 반공중에 뻗친것이, 거기에 굵은 바줄을 걸면 해마다 천연그네터가 되였다. 그런데, 배구는 로소불문 남녀가 다 구경할수 있었지만 씨름은 남자들만, 그네는 녀자들만 구경했다. 남자들이 그네를 구경하면, 그리고 녀자들이 씨름을 구경하면 작풍이 단정치 못한 “음특한 놈”이라고 내 놓고 욕했다. 우리 남자애또래들이 입을 짝 벌이고 야! 야! 경탄을 하면서 그네뛰는걸 정신없이 구경을 하면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요놈새끼덜이 저리로 바라가! 가서 씨름구경이나 해라.” 하면서 쫓았다. 녀자애들은 씨름구경을 하나도 하지않았다. 혹시 씨름판에 와서 멍해 서 있으면 “저리 가 놀아라. 응? 너도 이담 커서 씽! 씽! 그네를 뛔야지?”하며 얼려 보냈다. 개혁개방전에는 “남녀칠세부동석” (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봉건례교가 엄하게 살아있었다. 지금은 모두가 보다싶히 성해방인지 개방인지한것이 무척 되였다. 이 현상에 대해서 학자들이 갑론을박, 콩팥칡팥 매일 싸움질을 한다지만… 달은 제멋대로 가고있다. “사회에는 처녀가 희귀하고 부과장이상은 다 정부가 있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는가하면 심지어는 “모임에 부부동반으로 가면 낯이 깍기고 정부끼리 가면 자랑스럽다고 한다.”는 말까지도 있다. 지금은 성이 동물세계로 되였다는 험담까지도 있다. 추석은 개혁개방전까지는 주로 농촌에서 쇠는 소박한 민속절이 였다. 지금은 사회가 도시화를 하면서 시가지에서 오히려 더욱 굉장히, 요란스레 추석을 쇤다. 추석에서 가장 중차대한 행사인 성묘를 보면 농촌과 완연 다르다. 나는 한식과 추석이면 부모님 산소 성묘로 해마다 고향마을을 다녀오는데, 명절을 쇠는 풍습에 변화가 없었다. 코로난지 그놈안지 때문에 금년에는 애들은 그만두고 우리량주만 출동을 했다. 자가용은 내가 굴릴줄을 모르다 보니 택시를 썼는데, 편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꽤 되는것 같은데, 살펴보면 도시에서 하는 성묘는 농촌과 완전히 다르다. 우리고장에서 화장을 법으로 결정한후, 농촌에서 사는 상주는 불편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도시사람들은 간편해서 좋은데, 그 성묘형식도 점점 더 깜찍하게 간편하게 변화발전해 간다. 우선, 부보님의 골회를 납골당에 맡기고 해마다 “려관비”를 내면 대사필이다. 가토며 벌초를 할것이 없고 산소가 상할가봐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의 아버지가 밭머리에 있는 형님분의 산소때문에 늘 시름놓지못하며 근심하던일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된다. 밭갈이거나 후치질을 하는 사람이 데퉁스러운 사람이면 다다소소 산소를 후벼파거나 긁어놓기도 하고 소가 짓밟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산소를 자주 돌보군 했는데, 어느해는 산소가 험하게 파손이 되여 후치질을 한 사람을 찿아가서 “야, 이 쌍눔의 새끼! 상세난 사람의 산소를 이렇게 괄시허는 법이 어데있니?! 망할눔이 새끼! 니눔새끼 이제 바로 뒈지나 봐라!”하며 말끝마다 눔새끼를 붙혀가며 된줄욕을 퍼부우며 싸우기까지 했다. 데퉁박이는 제가 지은죄가 있기에 찍소리 한마디도 못하고 부지런히 파손을 손질하는 것으로 립공속죄를 하며 사과를 표시했다. 아버지는 이듬해 한식을 기다려 면례(이장)를 했다 도시사람들의 성묘에서 제사인사법이 지금은 대체로 네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골회함을 가져다가 고인의 띠를 찿아 모시기도 하고 영정사진만 모시기도 하며 제사소물을 푸짐하게 진설하고 인사를 한후 음복을 하게 한다. 조금지난후 골회함을 들어다가 납골당에 모시면 성묘는 끝났다. 공동묘지에서 거액의 돈으로 집을(묘자리) 가진 고인의 성묘도 앞과 같다. 두번째 형식은 꽃 한송이를 살랑 들고가서 납골당 골회함 곁에 놓고 경례를 하고 성묘가 끝나는 것이다. 간단명료하고 수월해서 이 형식이 점점 더 선호를 받는다고 한다. 그다음 또 한가지형식으로는 골회를 어데다 가만히(들키면 큰코를 친다.)매장을 했거나 강물에 뿌린 경우인데, 그 장소로 가서 제례인사를 하는것이다. 이 형식은 점점 더 소실되여 간다고 한다. 네번째로는 저녘후 대거리 십자가든 소골목 십자가든 자기에게 편한곳으로 가서 종이돈을 마음내키는 대로 태우는 것이다. 이 성묘형식이 지금 대단한 인기를 받고 있다고 하는데, 소방, 위생, 등 부문에서 두통이 나 한다고 한다. 이상의 네가지형식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고인에게 구구절절, 간절한, 충심으로부터의 부탁이 둥덩산보다도 더 높고, 크고, 많다는것이다. 부탁에는 수백가지 조목들이 있는데, 귀납해 보면 딱 한가지다. 즉 “잘 되게 하여 주소서!”이다. 병이 떨어지게 하여 주소서, 아이가 대학에 가게 하여 주소서, 남편의 바람을 막아 주소서… 도둑놈이 쉬가 잘붙게 하여 주소서, 부정부패서기, 시장이 모가지가 무사하게 하여 주소서… 별 희한한게 다 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풍속과 습관은 변하며 그 내용물에 따라 적절한 형식이 있게 되는데 그것인즉 곧 풍속과 습관의 주류형식이 된다. 내용과 형식이 맞지않으면   “형식주의”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런것은 싫어하며 반대한다. 일반적으로 풍속 습관에서의 “형식주의”는 제창할건 아니지만 큰 위해를 끼치는건 아니다. 그러나 령도의 “형식주의”는 민생을 해치고 나라를 망친다. 대약진후기에 우리마을 어느생산대에서는 생산대 대장과 대대서기가 짜고들어 대장은 입당을 하기위하여, 서기는 선진인물이 되기위하여 알곡산량을 잔뜩 불어대고 수확고의 대부분을 여량으로 국가에 바치였다. 그래서 대장과 서기는 정말로 소원성취를 하였다. 하지만 그 생산대의 사원들은 밭갈이철부터 반소량(통강냉이, 강냉이가루, 수수쌀 등 잡곡을 량잠으로부터 꿔다 먹는것. 갚을때는 정곡으로 갚는다.)을 먹으며 생고생을 했다. 어느곳에서는 시장은 반대를 하는데 서기가 우겨대서 련거퍼 몇년을 몇가지 슬로건을 내걸고 그야말로 말그대로 열심히, 굉장히 축제를 하였다. 축제를 미끼로 “초상인자"(招商引資)를 한다고 서기씨는 우겨댔지만 번마다 공돈을 팔며 밑지는 짓거리로 되고 말았다. 백성들은 내놓고 수천만원의 돈이 아깝다는둥 먹는놈은 배가 터지게 잘 처먹었을 것이라는둥… 말이 많았다. 축제는 몇년후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쯤에서 이 엉뚱한 “형식주의”가 사라져서 민분은 가라앉아 다행이라 하겠으나 다음의 “형식주의”는 생각하면 답답한 일이다. 어느곳에서 “홍수방어전승리기념비”를 굉장히 크게 만들었는데, 홍수때 이곳 령도가 3ㅡ4일 달아다니며 고생한건 사실이다. 그러나 홍수는 다행히도 선인들이 이름한자 남기지 않고, 기념으로 돌 한개 새우지 않고 만들어 놓은 제방에 막혀 물러갔다. 그런 번연한 사실을 기념비는 이번에 각급령도들이 잘 해서 홍수를 끝내 물리쳤다고 기념문을 만들어 기념비에 새겨 넣었다. 각급령도를 내걸고 기실은 자기의 공덕비를 새운것이다. 이런 황당한 “형식주의”는 왜서 발생했는가… 어떻게 수습해야 할것인가…                                                                                                                           20.10
156    찌그러진 기와집 댓글:  조회:776  추천:0  2020-09-11
         중편실화소설                                                찌그러진 기와집 (신생)                                                                                                                      회령     나는 8월 중순께 초평향에 가 보기로 작심하였다.    그 곳은 나의 청춘이 죽은 곳이며 나의 인생이 바뀌게 한 곳이다. 그 고장에 가 보기로 결심하기까지는 심각한 고민이 여러번 있었다.      63년 여름 나는 대학 정치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초평공사(향) 공청단 서기로 현당위 조직부의 특별한 배치를 받았다. 그때, 국가에서는 우리를 중학교 선생으로 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런데 내가 공사공청단위 서기 벼슬자리에 배치를 받게 된 것은 대학시절에 벌써 입당을 하였고 학습을 잘 했고 품행이 단정했고 신체가 건장하고 재질이 총명했기에, 이를테면 덕, 지, 체가 전면적으로 발전한 청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당에서는 배양전도가 있다고 본 것 같다.    초평공사는 두만강변에 자리잡은 궁벽한 산골이였다. 손바닥만한 논밭뙈기 몇개는 두만강 버들방천 안쪽으로 있고 나머지는 모두 한전인데 골짜기 바닥과 산기슭에 널려 있었다. 다섯개의 산줄기는 두만강으로 내리 뻗치다가 멈췄는데 그 끝마다 마을이 앉아서 다섯개의 대대(촌)가 되였다. 매개 대대는 골짜기로 들어가면서 두세개씩 혹은 서너개씩 자연툰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마다 이름은 있었지만 그때는 아무대대 1대, 2대(생산대. 지금의 촌민소조.)하고 불렀다. 다섯갈래의 골짜기는 서로 비슷했는데 넓고 깊었다. 골짜기 마다 꽤 큰 냇물이 흘렀다 제일 크고 경치가 좋은 골짜기로는 초평대대가 차지하고 있는 소금강골짜기였다. 조선의 금강산처럼 아름답지만 작다고 해서 소금강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구불구불 내리 뻗은 량옆 산줄기에는 벼랑과 기암괴석이 송백과 함께 무척 많았다. 단풍나무, 머루, 다래, 알구배, 찔구배, 돌배, 도라지, 함박꽃, 개나리, 찔레꽃, 천지꽃과 개살구가 제철을 맞아 만개할 때는 그 풍경이 그야말로 그림처럼 화려했다.    초평공사는 한갈래의 신작로와 한갈래의 전화선으로 바깥세상과 통하였다. 량옆에 있는 린접 공사와는 7, 80리 사이고 현성과는 100여린데 날씨가 순탄하면 하루에 한번씩 뻐스가 왔다갔다. 전기가 없어서 두달에 한번 오는 농촌순회방영대는 저들이 가지고 온 찌프차 한쪽 뒤바퀴를 빼고 무슨 장치를 한후 전기를 내서는 영화를 보여주었다.    이곳에서는 제일 큰 마을인 초평대대는 공사소재지였다. 거기에는 공사위원회(향정부) 초중학교 소학교 공급판매합작사(공소사. 상점.) 위생원(병원) 량잠, 림산작업소, 파출소, 우정국 등 단위들이 있었는데 벼짚이나 조짚으로 이영을 한 흙집들이 였다.(향정부와 학교 공소사는 토피집이였다.) 전 공사의 모든 집들은 초가집들인데 쇠여빠지는 버들버섯 같이 방정한 집이란 한채도 없는것 같았다. 그런데 초평대대에서 사무실로 쓰고 있는 집만은 8간기와집으로 공사에서 유일한 기와집이 였다. 40년이 거이 되는 집이다보니 헐망하긴 했으나 그래도 기본상 온전한 편이였다. 이 집은 현성에서 살던 지주의 마름이 살던집인데 마름은 광복이 터지자 지주와 함께 남조선으로 도망을 갔다. 집은 마을의 공회당, 구공소(구정부), 촌공소, 초, 고급사 사무실, 집체식당 등을 거치며 력사적 공헌을 하다가 다시 대대사무실로 되였다.    산골사람들은 대체로 순박하고 말머리가 무겁고 듬직한 반면에 생기발랄함이 부족하다. 여기 사람들도 그랬다. 특히 10여년을 집체화 틀 속에 같히워 습관되고 살다보니, 그것도 점점 더 가난해만 가는 세월속에서 살다보니 사람들은 수심만 깊어가고 의욕은 없이 자기를 잊고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수동적이 되여버렸다 한마디로 초평공사는 편벽하고 가난하고 또 몹시 적막한 곳이였다. 마을은 20여개가 되였으나 인구는 겨우 3000여명 밖에 안되였다.      현당위 조직부장과 현공청단위 서기는 나와 담화할 때 간고한 곳일수록 단련과 성장에 아주 유리하다고 하면서 사업을 적극적으로 잘 하라고 고무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사업을 잘하면 광명한 앞길이 열린다고 하였다. 벼슬길에 오른 사람치고 승급을 꿈꾸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그때의 나의 머리 속에는 당과 모주석의 은덕에, 국가와 인민의 기대에 보답하여야 한다는 사상과 결심만 꽉 차 있었다. 그때의 나는 참으로 순결하고 단순하였다.    초평공사보다도 더 궁벽한 두메산골에서 자란 나는 확실히 당과 모주석의 은덕과 나라와 인민의 배려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초, 고중과 대학을 국가조학금을 받았기에  공부를 할 수 있었고 대학에서 병으로 몹시 앓을 때 국가의 보조를 크게 받았다. 그리고 부모님과 형님내외의 지극한 정성과 회생을 잊을 수 없다. 나도 물론 많이 분투를 했다. 초중때는 여름방학이면 약뿌리를 캐고 목이버섯(무얼)을 뜯어말리워 공소사에 팔았다. 겨울방학에는 햇싸리나무를 해서 공소사에 근을 떠서 팔았다. 나라에서는 싸리나무를 사다가 배광주리거나 공정판에서 쓰는 툴란재 (흙광주리)를 만든다고 했는데 싸리나무 수요가 많았다. 우리 또래들은 그런 부업을 해서는 학비에 보탰다. 고중과 대학시절에는 여름방학, 겨울방학을 시내에서 품팔이를 하였다.    나는 당의 교시대로 가장 간고한 곳으로,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가서 사업을 잘하는 것으로 하늘 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당과 국가와 인민, 그리고 부모형제의 이 모든 은덕에 보답하리라 마음속에 굳게 다지고 있었다.    그때도 극히 개별적이 였지만 비밀리에 뒤문거래를 하는 현상이 있었다. 만약 내가 조금만 “활동”을 하면 모교에 분배 받거나 큰도시에 분배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도와 주겠다고 자청하는 처녀도 몇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포부와 결심은 동요가 없었다. 나는 뒤문거래를 비렬한 행위로 보며 경멸하였다.      내가 초평공사당위 서기 남명덕의 사무실에 들어서니 남서기 외에 또 한명의 중년남자가 있었다. 남서기는 나를 한번 힐끔 쏘아보고는 머리를 돌리고 표표히 않아 담배를 피웠다. 그와는 반대로 중년남자는 일어나서 따뜻하게 악수를 하여주고 당위 부서기 겸 조직위원 김응수라고 자기소개까지 하였다. 그는 공사공청단위 서기가 없어서 자기가 대신 맡았댔는데 참 잘되였다며 무척 반가워 하였다.   “그럼 얘기를 하오.”    남서기는 성난 사람처럼 뱉아던지 듯 차겁게 한마디를 하고는 쥉쥉 나가버렸다. 감때 사납고 표독스럽다는 인상이 들었다. 김응수는 너그럽고 인자한 사람이라는 것이 첫눈에 환히 알리였다.    그는 나에게 가정형편이며 친척이며 나의 경력을 자세히 물었다. 그리고 우리 집이 있는 삼도구공사 정황에 대해서도 이것 저것 여러면으로 묻다가 나중에는 애인이 있는가고 묻기까지 하였다. 이어 김응수는 자기경력을 자세히 들려준후 공사간부들로부터 각 단위들과 대대, 생산대에 이르기 까지 전 공사의 일반정황을 손금보 듯 환하게 소개하여주었다.    그는 공사의 청년단사업을 어떻게 잘 할 것인가에 대하여 나와 진지하게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공사의 여러가지 사업들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아가며 조리 있게 설명해 주었다. 하여 나는 공사의 사업에 대하여 대체적인 륜곽과 체계를 잡을 수 있었다. 김응수의 담화는 나에게 선생님의 가르침 같았다.      베는 석자라도 틀은 틀대로라고 공사는 보잘것 없었지만 부서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공사에는 부련회라는 부서도 있었는데 주임은 리련옥이였다.    련옥이는 현성에서 나서 자란 시가지 사람으로 고중졸업생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현법원의 원장이고 어머니는 현당위판공실 주임이였다. 련옥이는 대학시험에서 미끌어진 후 집에서 놀다가 현병원 호리원(청소공)으로 취직을 했는데 얼마후에는 초평공사 부련회주임으로 왔다. 그는 이미 결혼을 하였으나 아직 아이는 없었다. 남편은 군인으로 패장이라고 했는데 대련에서 근무한다고 하였다. 련옥이는 이 곳으로 나보다 두달 남짓 먼저 왔었다. 그는 탄력있는 맞춤한 키꼴에 해사하게 생겼는데 잘 웃고 잘 떠들고 노래와 춤을 잘하고 멋을 부리기 좋아 했다. 말은 청산류수고 문장도 괜찮게 썼다. 술도 마시고 우스개로 담배도 두어모금 빨고는 캑캑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그럴 때면 김응수를 비롯하여 나이가 지긋한 공사간부들은 얼굴을 돌리며 찌프리였다. 련옥이가 과분하게 우스개를 피울 때면 같은 청년세대인 나는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공사간부들 중에서 무장부 문부장만은 련옥이와 희닥질을 하며 장난을 하였는데 그럴 때면 남명덕은 눈귀에 잔주름을 지으며 재미있어하였다. 그때는 부드럽고 정이 가득한 눈길로 련옥이를 바라보며 “천생 부녀주임감이야!”하고 칭찬을 하였다. 련옥이는 입당적극분자 였다. 맨 남자들 뿐인 공사간부들 속에서 련옥이는 말그대로 생기가 넘치는 일점홍이였다.      나는 사업을 패기 있게 본때스레 밀고 나갔다. 나에게는 전승못할 난관이 없었다. 정확한 사상과 왕성한 혈기, 포만한 정열과 지혜, 굳센 의지는 사업효률과 성과를 높여주었다.    당위 서기 남명덕은 나에게 완성불가능의 하향사업임무를 줄 때가 많았다. 례하면 어느대대의 모내기를 5월 중순 전으로(5월 하순에 시작 함) 끝내라 하거나 세벌김을 반달 혹은 지어는 한달 앞당겨 끝내라고 명령하였다. 더욱 한심한 것은 사원들의 민식이 겉곡으로 200근도 않되는데 여량을 몇톤 바치게 하라는 것이였다. 식량이 떨어지면 반소량(량잠에서 꿔다 먹는것)을 먹게 할 것이니 여량임무를 견결히 완성하라고 하였다. 남명덕이 나에게 일을 시키는 본때는 팥쥐에미 배씨가 콩쥐에게 일을 시키는 것과 꼭 같았다.    남명덕은 너무도 감때 사납고 표독해서 공사내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현내외에서도 널리 “왜놈십장”, “일본감독”, “토비”, “남패천”(해남도에서 유명했던 악패토호) 이라고 조명이 났다. 산골사람들이 보기에는 높은 어른인 공사당위 서기에게 이런 심각한 별호가 붙은 데는 유래가 있었다. 내가 들은 몇가지만 보더라도 별명이 과분하지 않았다. 남명덕은 농망기면 일하러 나가지 않은 사원이 있나 해서 마을을 검사하는 작법을 잘 썼는데 한번은 벼모철에 앓아 누운 사람을 강박적으로 살얼음이 낀 논밭으로 내 몰아 그날 오후 병이 도져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멱살을 쥐여흔들거나 줄욕을 퍼 붓는 건 보통일사라고 했다. 지어는 사람을 때리기까지도 했는데. 한 농민은 귀통을 맞은 것이 그쪽 고막이 터져 귀머거리가 되였다고 한다. 그 뿐이 아니다. 현에서 령도가 오니 생산대의 소를 잡아 불고기를 해 먹인 일, (역축도살을 절대 금지할 때임.) 공소사에서 일을 잘하고 있는 녀직원을 쫓아내고 아들 남철이를 대신 넣은 일, 그외에 남녀간의 시시껄렁한 말도 있었다. 남명덕에게는 민분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현의 령도에서는 그를 “혁명적극성이 높고 사업열정이 높고 손탁이 드세다.”고 하였다. 남명덕의 조폭한 공작방법과 실제를 탈리하는 지시를 제때에 두루 무마해 주거나 조절해 주는 사람은 김응수였다. 남명덕은 김응수가 곁에 있음으로 해서 좋은 소리를 들으며 서기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지만 김응수를 “우경”이라면서 늘 아니꼽게 보았다. 남명덕의 횡포에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은 젊은 패기가 끓어넘치는 나였다. 나는 남명덕에게 빌붙어 굽실거릴 필요도 없었거니와 공사의 사업을 놓고 누구와 흥정할 필요도 없었다. 당의 사업, 인민의 사업을 잘하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바였다. 남명덕과의 몇차례 충돌에서 내가 그의 체면을 전혀 고려치 않은데서 그는 나를 아주 괘씸해 하였다. 김응수의 조률도 별로 작용이 없었다. 나는 물론 대수롭지 않았다.      64년 5월, 내가 모범단서기가 되여 성에서 열린 표창대회에 갔다 와서 며칠후다. 그날 우리 공사간부 10여명은 남명덕의 아들 남철의 잔치술을 먹고 밤 늦게야 헤여졌다.(파혼이니 뭐니하다가 약혼녀가 배가 불러와서 급급히 결혼등기를 하고 잔치를 했다.)    칠흑 같이 캄캄한 밖으로 나오니 시원하고 신선한 대기에 기분은 무척 상쾌했다. 나는 봉선이가 몹시 보고싶었지만 밤도 깊었고  술까지 마셧기에 단념하고 하숙집으로 향하였다.    봉선이도 작년여름에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 초중에 배치를 받았다. 그도 집은 나처럼 외지에 있었는데 궁벽한 산골의 가난한 집에서 큰딸로 태여났다. 봉선이는 인물, 체격, 총명, 품성… 말하자면 덕, 지, 체, 그 어느 것 한가지도 나무랄 데가 없는 훌륭한 처녀였다. 하지만 가정성분이 부농이여서(실제는 자작을 하는 중농이였다.) 여기 두메산골 초중으로로 배치를 받은 것이다.    작년 늦가을에 나와 봉선이는 김응수내외의 “전술”에 걸려 첯만남을 한후 자연스레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우리는 사랑한다느니, 좋아한다느니 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만나면 포옹과 키스는 사양치 않았다. 그러나 성의 계선은 엄격히 지켰다. 그것은 결혼식을 올린 다음의 절차로서, 그 순서를 위반하는 것은 저렬하고 수치스러운 도덕적, 법적으로 착오적 행위라고 인정하였다. 나와 봉선이는 금년 국경절에 간단히 결혼식을 하자고 약속하였다.    내가 기분좋게 스적스적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등뒤로부터 나의 가슴을 꽉 끌어안았다. 나는 기절초풍 놀라면서도 잔등에 뭉클하는 젖가슴을 느껴였다.    “조서기, 우리 집으로 가자 응!”    련옥의 뜨거운 입술이 나의 볼에서 화끈거렸다.    “아니, 이러지 마오!”    나는 다급히 그의 손을 풀면서 주위를 살펴 보았다. 다행이 아무도 없었다.    “쥐도 새도 모름다.”    련옥이는 속삭이며 나의 아래를 움켜 쥐였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힘이 뻗쳐 있었다. 나는 련옥이를 꼭 끌어안았다.    련옥의 하숙집은 정말 비여있었다. 우리는 불덩이가 되여버렸다. 련옥이는 련속 신음을 토하다가도 나의 가슴팍이며 등허리를 꼬집으며 쥐도 새도 모르게 이러자고 하였다. 봉선이와 결혼한 후에도 자기를 잊으면 안된다며 거듭 꼬집었다. 우리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살자고 굳게 약속을 하였다.    귀신이 곡할 일이 였다. 사상, 감정, 품행이 건강하던 내가 련옥의 사탕폭탄 한방에 순간에 무너질 줄이야?! 성의 유혹을 이기는 힘은 따로 있는 건가?... 나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얼마후 나와 봉선의 38선도 허물어지고 말았다.      나는 뻔뻔스러운 이중인격자가 되고 말았다. 능청스러운 위군자로 타락한 나는 은근히 지금의 성생활에 대하여 만족감과 행복감까지 느끼였다. 지금은 오히려 내가 주동적이 였다. 나는 봉선의 앞에서는 인간이였으나 련옥의 앞에서는 짐승이였다.      8월의 어느날 점심때다. 련옥이가 자기사무실로 오라고 나에게 눈치를 하였다. 우리는 이미 여러번 거기서 만났었다.    공사간부들은 사업시간이란 게 따로 없었다. 임무가 있으면 낮이건 밤이건 몰두하여 사업하고 일이 없을 때는 자유자재였다. 대부분 사업은 기층에 내려가서 해야 하는 것이기에 늘 하향을 했고 공사건물은 항상 비여있었다. 늙은 문서가 집을 지키고 있긴 했으나 그는 점심시간이면 기껏 늑장을 부리며 자기 집에 있었다. 공사건물은 초평마을에서 퍼그나 떨어져 산기슭에 우두커니 있었다.    11시가 좀 지나서 나는 련옥의 사무실로 갔다. 문은 열려져 있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 련옥이가 왔는데 왜서인지 다른 때와는 달리 긴장해 하고 불안해 하는 것 같았다. 련옥이는 서랍에서 사무용지도 꺼내고 또 만년필도 찿으며 서성거렸다. 나는 더 참을 수 없어서 문을 잠그고 련옥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런데, 련옥이가 놓으라고 소리소리 악을 쓰며 나를 밀치는 게 아닌가?! 내가 마구 우격다짐을 쓰는데 “탕! 탕! 탕!”하고 누가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나는 선자리에서 굳어지고 련옥이는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가버렸다.    활짝 열린 문앞에는 쇠꼬챙이 처럼 깡마르고 표독스러운 남명덕이 뱀눈알 같이 독살스럽고 차거운 눈길로 나를 쏘아보고 그 옆에는 덜썽 키가 큰 문부장이 기세 등등해서 서 있었다.   “너! 여기 꼼짝말구 서 있어라. 가서 응수를 오라구 해!”    남명덕은 문부장께 소리를 치고는 쥉쥉 자기사무실로 가서 파출소의 한소장을 당장 오라고 전화를 하였다.    련옥의 사무실로 김응수와 한소장이 선후로 들어선 후 잇따라 련옥이도 문부장과 함께 들어왔다.    “야! 사실대로 말해라. 한소장! 제대로 쓰오.”    남명덕은 노기등등해서 소리쳤다. 부들부들 떨고 선 나의 눈앞에는 남명덕의 날카로운 눈길이 보이는 듯 했고 전신에 소름이 끼치였다. 동시에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사태에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요?!”    김응수가 걸상을 주며 나의 어깨를 두드리였다.    “무슨 일인지, 사실대로 솔직히 말하오.”    김응수가 다시 한번 재촉하자 떨리던 가슴이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고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렇다! 이지경에서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사실대로 솔직히 말하자. 다 말하자. 나는 일체를 단념하고 전후사를 말하기 시작했다. 련옥이와 바람난 그날밤으로부터 오늘 련옥의 신호, 그리고 우격다짐, 탕! 탕! 탕!에 이르기까지를 그대로 다 말하였다.    “련옥이! 말해보오.”    남명덕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아닙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내가 재료를 쓰려고 하는데 제가 마구 덮쳐들고서는! 응응응…”    련옥이는 집이 깨지게 악청으로 웨치고는 울음보를 터뜨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처음으로 머리를 쳐들고 련옥이를 멍해서 바라 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나쁜 놈새끼! 한소장! 저새끼를 공안국에 잡아가오!!    남명덕은 나를 손가락질 하며 새된목소리로 소리를 꽥 질렀다.    “이렇게 하기오. 사실을 자세히 서면상으로 쓰오. 래일 오전까지 철저하게 몽땅 쓰오. 11시에 남서기한테로 가져오오. 그리고 오늘 이 일을 지금은 절대비밀로 합시다.”    김응수가 말하자 한소장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오!”    남명덕은 벌컥 일어서며 외마디 소리를 꽥 지르고는 나가버렸다.    내가 사무실에서 멍하니 앉아서 방금 있은 일을 두서 없이 생각하고 있는데 김응수가 들어왔다.    “창락이! 거, 무슨 그런짓을 사람이 하오?! 정말 천만 뜻밖이오… 원! 창락이가 그럴줄은… 정말 꿈에두 생각 못했소! 원, 사람이… 검사실 그대로 자세히 쓰오. 두부를 써서 한부는 남서기를 주구 한부는 나를 주오. 아마두 일이 복잡할 것 같소.”    그는 부시럭 부시럭 담배를 말더니 나를 주고 다시 자기 것을 말았다. 나는 비로서 더없는 수치를 느끼며 죽고싶도록 뼈저리게 후회가 되였다 이거, 무슨 꼬락서닌가?! 내가 이렇게 끝장을 보다니… 나는 책상에 엎드렸다. 더는 머리를 들 용기가 없었다.    “후ㅡ 창락이! 내말을 잘 듣소. 사람은 누구나 다 착오를 범할 수 있소. 하지만 이건 참으로 수치스러운 착오요. 봉선에게는 뭐라고 하겠소!... 창락이! 지금 창락이가 해야 할 일은 착오를 철저히 검사하고 조직의 처리를 성근히 접수하고 고치는 것이요. 그리고 맡겨주는 사업을 잘하면 되오. 고치면 여전히 좋은 동지지. 저녘은 우리 집에 와서 먹소..”      이튿날 오전 검사서를 남명덕에게 가져가니 그는 “거기 앉아라.”하고는 검사서를 보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누가 보던지 이걸 보면 련옥이가 나쁜 사람이지. 이걸 알면 그의 남편이 가만 있겠는가! 견결히 리혼하자구 할텐데, 군혼파괴죄가 얼마나 큰지 아니? 총살이다 총살! 다른 것은 싹 없애고 어제 일만 써라. 련옥이가 보자했다구 하지말고 네가 뛰여들었다구 하구… 어제 일만 련옥의 말대로 써라. 군혼파괴죄에 걸리지 말고… 련옥이가 무사해야 너도 사는 거다. 그리고 검사서라 하지 말고 탄백교대서라고  해라. 아니, 탄백서라 해라. 가!”    그날 오후에 나는 탄백서를 남명덕의 앞에 바치였다. 생각해보니 남명덕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서로 좋아서 바람을 쓴 작풍문제든 강간미수든 나는 이젠 볼장을 다 본 끝장이 난 사람이지만 련옥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나의 말 한마디에 청백한 련옥이로 될수도 있고 난질이 버릇으로 된 더러운 화냥년 련옥이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남명덕의 말대로 련옥이를 보호해 주리라 마음을 결정하였다.    남명덕은 탄백서를 본후 “됐다.”하고는 나와 봉선의 관계를 자세히 따지였다. 나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다. 나의 말을 듣고 난후 그는 말하기를 결혼등기도 하지 않고 동품부터 한것은 순전한 류망행위라고 하였다. 나는 승인한다고 대답하였다.      9월초 나는 강간미수죄와 류망죄로 현공안국에 잡혀 갔고 두달후에는 군혼파괴, 강간미수, 류망죄로 16년 도형을 받고 감옥으로 갔다.    내가 미결수로 두달이나 있게 된 것은 김응수가 강간미수죄를 부인하는 재료를 법원에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명덕과 한소장이 나의 류망죄를 더 찿느라고 심입된 조사를 하다보니 시간이 걸렸다. 법원에서 나를 반복적으로 심문할 때 나는 이런 것들을 알게 되였다. 김응수가 제공한 재료에 대해서 나는 그건 내가 처음에 한 거짓말이라고 “탄백”하였다. 심문과정에서 나는 초평공사의 적지 않은 각시들과 처녀들이 나로 인해서 모욕적인 질문과 조사를 받았다는 것을 눈치챘고 알게 되였다. 어떤 처녀들은 부인과검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한 처녀는 처녀막이 파손되여 끝내 동반자를 실토하기까지 하였다고 했다. 나는 더없이 미안했고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아무일도 없이 무사할 줄 알았던 련옥이가 그간 어째서 리혼을 당했는지… 이상했다. 감옥으로 가면서 나는 봉선에게 천만번 사죄하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우리의 약혼을 없던 일로 하자고 편지를 보냈다. 김응수에게도 미안하다고 간단히 편지를 했다. 편지는 고마운 간수가 꼭 전해주겠다고 하였다.      감옥에 간 이듬해 늦은 봄, 그러니까 65년도 6월이다. 나는 뜻밖에도 봉선이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사연은 간단했다.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과 기다릴 거라는 내용인데 편지지는 여러군데가 잉크가 피고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력력하였다. 봉선이는 편지를 쓰면서 피눈물을 흘린 것이다!... 나는 편지를 쥐고 반나절을 흐느꼈다… 나는 감방의 손바닥만한 뙤창문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개조에 힘껏 노력하리라 결심하였다.    67년도 가을 봉선이 한테서 두번째로 편지가 왔다. 사연은 간단했다. 아들애가 죽었다는 소식과 멀리 시집을 간다는 것이 전부였다. 편지지는 여러군데가 잉크가 피고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력력하였다. 봉선이는 편지를 쓰면서 피눈물을 흘린 것이다!... 나는 편지를 쥐고 반나절을 흐느꼈다… 나는 감방의 손바닥만한 뙤창문으로 푸른하늘을 바라보며 인생의 허무함에 실망하였다.      80년9월, 나는 만기석방으로 원적지인 삼도구향 립봉촌 갈매골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이 꼬락서니를 해 가지고 고향으로 간다는 건 죽기보다도 싫었다. 그러나 무슨 방법이 있는가?! 갈 곳도 없었거니와 반드시 원적지로 가야 한다고 하니. 그리고 계급투쟁을 잘해야 한다고 하였다. 출옥할 때 감옥의 령도들은 신생을 축하한다고 하였지만 나는 기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립봉에서 뻐스를 내린 나는 괴나리봇짐을 메고 골짜기 수레길을 따라 허정허정 걸었다. 길 옆 쑥밭에서는 풀벌레가 시들해서 가끔 울고 산새가 두어마디 호젓한 울음을 울었다. 산굽이를 돌아 작으마한 언덕에 오르니 저 멀리로 갈매골 고향마을이 보이였다. 나는 길 옆 바위에 걸터앉아 고향마을을 바라 보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이대로 어디론가 가 버리고 싶었다. 아니, 이대로 여기서 죽고싶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10여호 밖에 안되는 마을은 폴싹 퇴락하여 페허같이 괴괴하였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형님네 집을 향해 주섬주섬 다가갔다. 마당에서 무얼하고 있던 형님이 자취소리를 들었는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달려나왔다.  우리는 부등켜 안고 엉엉 울었다. 20년세월! 우리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감옥에 가서 얼마후 형님께 편지를 써서 그간의 사실을 알린 후 또 다른 감옥으로 가게 되니 회답을 하지 말며 구태여 찿느라고도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주소를 안대도 그 먼 곳을 면회 올 경비도 없겠거니와 이 꼬라지를 봐선 또 뭘하겠는가?... 소식이 없으면 무사한 줄로 서로 알자고 형님께 약속을 했다. 우리가 흐느끼며 컥컥거리는 소리를 듣고 형수님이 달려나왔다.    집은 초가삼간 옛집 그대로나 이젠 거이 허물어지는 낡은 집이 되였다. 그간 나 때문에 소경이 되였든 아버지는 몇년 전에 서산으로 가고 어머니는 풍을 맞아 운신을 못하고 누워 있었다. 형님내외도 많이 늙었다. 초중을 졸업한 큰 조카는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래로 남자애와 녀자애 두 조카는 학교로 다니며 말며 한다고 하였다.    쇠똥을 섞어바른 흙냄새와 된장찌개냄새, 퀴퀴하고 지린 어머니 냄새까지 진하게 풍기는 집안에서 여섯 식솔이 비좁게 사는데 지금 구지지 한 나까지 끼여들었다. 집에 온 후 나는 웃방에서 두 조카애와 함께 어머니 곁에서 새우잠을 잤다. 우리는 모두 주접이 든 몰골에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 사실은 할말도 별로 없었다. 감옥에서 갓 나온 나는 집식구들에게 무거운 정치보따리로 되였다. 며칠후 나는 삼도구 파출소에 가서 등록하고 립봉대대 치보주임한테도 가서 보고를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형님네도 다르지 않았다. 감자에 강냉이, 보리쌀을 밑불개로 하고 좁쌀을 좀 넣은 밥은 괜찮은 끼니였다. 이런 밥을 하루 두끼 혹은 세끼를 이어댈 수 있으면 그것은 아주 다행이였다. 해마다 그렇지 못하다 보니 반소량을 먹는데 그건 정말로 입에 풀칠하기 였다. 반소량을 미처 이어대지 못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그야말로 말 그대로 돼지도 먹기 싫어하는 푸대죽을 사람이니 먹었다는 것이 였다. 집체는 해마다 내리막 재주만 하다보니 소위 1년총결 결산분배라는걸 하긴 하였으나 그건 빚문서 장부총결이였다. 아무개네는 빚이 얼마고 아무개네는 얼만데 묵은 빚이 얼마고 금년 빚이 얼마고 합계 얼마다. 이런 총결이였다. 사람들은 닭마리를 팔고 약뿌리나 나무짐을 해서 소금이며 등잔불 석유를 삿다. 아무리 “자본주의 꼬리를 끊어 버리고 싹을 없앤다!”고 하였지만 마을사람들은 슬금슬금 서로 덮어주며 이런 부업을 하였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였지만 갈매골의 생활에는 변한 것이 없었다. 아니, 점점 더 빈궁에로 변해갔다. 살길이 막막한 이세상, 숨막히고 암담하기만 했다.      두루 10여일이 지났다. 나는 생산대장과 의논하고 방목장 일을 맡았다. 방목장은 마을에서 골안으로 10여리 더 들어가 있었다. 이름은 듣기 좋게 목장이지만 거기에는 움막 하나, 송아지 네마리, 페우가 두마리 있었을 뿐이다. 페우는 풀살이나 올려서 잡아먹거나 이웃 생산대와 벼를 바꾸었다.    앞뒤로 가파로운 높은 산이 둘러 있고 동서로는 갈매골이 길게 뚫렸으나 골짜기가 이리저리 구불구불하다보니 결국은 역시 높은 산이 막아섰다. 움막 앞으로는 벽계수가 솰솰 쉼없이 흘렀다. 이따금 산새가 외롭게 한두마디 울고는 사라졌다. 풀벌레도 울며 말며 시들한데 목장은 고즈넉 잠잠하였다. 이런 것을 적막강산이라 할것이다. 밤이면 가까이에서 혹은 먼 곳에서 부엉이가 몇마디 울었다. 다만 소쩍새만은 무슨 사연이 그리도 슬픈지 장밤 쉬지않고 울었다. 정말로 목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우는 건가. 소쩍새의 울음은 참으로 구슬펐다. 한달 거이 지나니 차츰 목장에 습관이 되였다.    “생”이란 무엇인가? 감옥 령도들은 “신생”이 어쩌구 “전도”가 어쩌구 “노력분투”니 “발전”, “성공”이 어쩌구 저쩌구 하며 수다를 떨었지만 나는 언녕 회망이며 욕망을 포기한지 오랜 사람이 였다. 나와 소는 모양이 다를 뿐 같은 신세였다. 소는 나의 유일한 동무였다. 소들과 함께 여기 저기를 방목 다닐 때면 지금 내가 소를 방목하는 건지 소가 나를 방목하는 건지 얼떨떨하기도 했다. 비트적 비트적 겨우 걸으며 느릿느릿 풀을 뜯는 페우를 볼 때면 나의 남은 세상도 방불히 보이였다. 나도 이제 저렇게 살다가 어느날 죽을 것이고 그러면 나의 “생”은 “숭고한”  사명을 완성한 것으로 될 것이다…    혹, 어떤 날은 16년 감옥생활이 회고 되기도 하며 감옥이 그립기도 했다. 그럴 때면 “차라리 무기도형에 떨어질 게지…”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나는 지금이 감옥보다 못하였다 감옥에는 그래도 사람세상이 있었지만 여기는 적막강산 뿐이 였다..      82년 봄이다. 어느날 내가 소우리 말뚝을 박고 있는데 큰 조카가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집체를 걷어치우고 개체를 하는데 오늘 땅이며 집체재산을 분배하니 급히 내려오라고, 제비를 쥐니까 빨리 오란다고 하였다. 세상이 무너지는지 깨지는지 일체 관심이 없던 나는 멍 해서 조카만 멀뚱멀뚱 바라 보았다. 한집이 빠져도 제비놀음을 못하니까 빨리 오라더라며 조카가 거듭 재촉해서야 나는 정신이 들었다.    탈곡장마당에는 마을사람들이 3, 40여명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모두가 긴장되고 흥분된 얼굴로 활기에 넘쳐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였다. 나도 갑자기 삶의 의욕이 솟구쳤다. 그러니까 이젠 목숨도 제것이고 밭도 재산도 다 제것이란 말이 아난가?! 자기의 생은 자기 손으로 산단 말이지?!... 허! 그것 참, 세상이 변했네!!    사람들은 번갈아 가며 제비를 쥐고는 엉덩이를 치며 하하 웃기도 하고 “엥이! 무깍지야!”하고 랑패상을 짓기도 했다. 집체재산이라는 것이 열두어가지 밖에 안되다 보니 무깍지가 여러개 있게 되였든 것이다.    나는 제비를 제일 마지막으로 쥐였는데 커다란 돌군재였다.(석마돌. 탈곡할 때 씀.) 나는 돌군재를 마을 공동용으로 기부하고 목장터와 지금 거기에 있는 다리병신 어미소와 갓난 새끼송아지를 달라고 하였다. 대장이 군중토론에 부치니 모두 그러라고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했다.      85년 8월! 나는 초평향에 가 보기로 용단을 내렸다. 그간 오래동안 나는 초평향의 소금강골을 유원지로 만들면 어떨가? 하고 반복되는 사색을 하였다. 그러나 나의 “휘황찬란”한 과거지사가 자꾸 걸리였다. 초평에 가서 번들거리면 나는 새롭게 신문인물이 될 것이다. 아이고 어른이고 남녀로소가 모두 다시 나를 쳐다보며 나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그러나 소금강골을 한번 잘 개발하고픈 생각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나는 실사구시적으로 진지한 사색을 거듭하였다. 강간미수니 류망이니 하는 죄목은 승인이 않되는 억울한 죄다. 군혼파괴죄는 따져보면 련옥이가 자초한, 말하자면 자업자득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조직위원 김응수가 나에게 한 말이 힘이 되였다. 그는 20년전에(내가 강간미수범으로 잡힌 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치면 여전히 좋은 동지지.” 나는 초평향에 가서 사업을 본때스레 펼치며 꼭 성공하리라 결단을 내렸다. 오직 이 길만이 나의 생과 존엄을 찿으며 나를 빛내이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사업을 잘하여 초평향 인민들에게 꾸준히 좋은 일을 하면 나의 명예도 많이 좋아질 것이다. 나는 나의 이런 관점이 청년시절의 나의 초심과 일맥상통함을 새삼스레 느끼며 감개가 무량하기 그지없었다…    개체로 된 후 그간 4년간 나는 억척스레 일했다. 목장의 아래 우를 더 도급맡고 통이 크게 대대적으로 사업을 벌이였다. 나는 소, 양, 돼지, 닭, 벌을 치고 하마(기름개구리)를 기르고 인삼장과 버섯장도 시작하였다. 그리고 약초와 산나물 재배도 시작했으며 황무지를 일구고 량식과 사료를 자급하기에 힘썼다. 형님네 식구들은 나와 함께 말 그대로 억세게 분투하였다. 정부에서는 나를 다종경영호로 인정하고 자금 지원을 하여 주며 수의소의 지도를 배치하는 등 세심한 보살핌을 지속적으로 주었다. 나는 금년 봄에 갈매골 고향마을 사람들을 흡수하여 “갈매골농민합작사”를 만들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70여만원의 자산이 있다. 만원호를 “장원”이라며 장려하는 지금 우리는 특등장원으로 되였다. 83년도 국경절에 나는 남매를 데리고 사는 젊은과부에게 장가를 갔다. 그의 남편은 79년도에 목재판에 갔다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금년봄에 안해는 떡돌같은 아들을 낳았다.      내가 자가용을 몰고 초평향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가 거이 되여서다. 향정부에 들어가서 서기와 향장을 찿으니 면바로 그들은 모두 사무실에 있었다. 내가 자기소개를 하자 그들은 무척 반가워 하며 왕림을 열렬히 환영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나의 사적을 여러번 들었다고 하였다.    그날 일은 참으로 재빨리 순리롭게 되였다. 나는 향정부와 소금강골 도급계약을 맺고 예약금 10만원을 주기까지 했다. 향정부에서는 풍성한 점심식사로 나를 초대하여주었다. 좌석에서 나는 혹시 김응수라고 아는가 물었는데, 웬걸?! 김응수로인이 마을에 계신다는 게 아닌가?!    내가 젓가락을 놓고 곧바로 김응수를 찿아 가겠다고 하니 서기와 향장이 따라나섯다.    나와 김응수가 부등켜안고 일희일비로 감격한 이야기를 여기서 어찌 다 말하랴!! 그는 늙긴했으나 깨끗하고 정정했다. 그가 연신 “창락이! 창락이! 이렇게 오다니?!” 하고 웨치자 집안에서 “뭐요?! 누구? 창락이?”하고 웨치며 그의 안해가 뛰쳐 나왔다. “아이고! 이게 누구냐! 창락아!” 그는 나를 끌어안고 왕왕 울었다. 나도 걷잡을수 없이 뜨거운 눈물이 마구 쏟아 졌다.    우리는 초평촌 뒤산기슭 소나무밭에 가서 둘러 앉았다. 향장의 분부로 향간부 몇사람이 음식을 날라와서 그야말로 푸짐한 산놀이 잔치가 벌어졌다. 산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초평촌은 옛모습이 대체로 그대로인 것 같았으나 그래도 산간마을의 아담함과 포근함이 깃들어있었다. 저 아래로 소학교와 초급중학교는 새로 지은 것이고 향정부도 마을 가까이로 새로 지었다. 내가 공안국으로 잡혀간 공사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을 변두리에 대대사무실이던 기와집은 지금도 있었는데 절반은 허물어지고 거이 쓰러지는 절반이 벋팀목에 의지해 위태롭게 서 있었다.    김응수가 천천히 지난 일을 말하였다.    “창락이가 간 후 나는 재료를 현에 보냈는데 창락이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더구만. 련옥이는 문부장 때문에 모든 것이 들통나서 리혼을 맞았소. 문부장은 련옥이를 데리고 살자고 그의 남편에게 일러주며 엉큼한 수작을 했는데 련옥이가 죽다보니… 남서기는 문화혁명에서 죽을 고생을 했소. 창락이 문제도 나와서 민분이 컸지. 원래 민분이 많은데다가… ㅉㅉㅉ. 작으만치 죄장이 104가지나 됐는데 다 사실이란 말이오. 건달이나 다름없는 아들을 공사공청단위 서기에 앉히자고 창락이를 잡아먹지 못해 눈에 달이 올랐지. 련옥이를 입당시켜 현으로 보내고 남철이를 공사공청단위에 안배하자고 련옥의 에미와 약조를 했다고 투쟁을 들이대니 련옥이가 실토를 해서 우리도 알았소. 그리고 낫살이나 먹은 게 그게 또 뭐요. 련옥이와 글쎄… 개명치 못하게… ㅉㅉㅉ”    “그런데, 련옥이는 어째서 죽었습니까?”    “련옥이가 그런 사람일 줄이야. 67년도 여름에 남서기랑 문부장, 한소장, 봉선이두 끌려나와 투쟁을 받았는데, 그날 련옥이는 남철이가 몽둥이로 머리를 친 것이 기절했다가 다시 깨여나긴 했는데, 그때부터 지누비(자리에 누워 앓음.)를 하다가 얼마 후에 죽었소. 그날 군중들이 니 애비도 치라고 소리를 치니 남철이는 정말 애비도 쳤소. 련옥이는 한소장과 문부장의 안해가 달려들어 머리까지 깍아버리고 전안조에 잡아가면서부터 계속 투쟁판에 끌려다니다가 결국은 그렇게 되였소… 78년도 틀린 것을 바로잡을때 창락의 문제를 제출하니 문화혁명 전의 일이여서 심사를 안 한다구 하더구만. 그간 창락이가 참 고생했소…”    나는 남명덕의 소식도 물었다. 김응수의 말에 의하면 남명덕은 지금도 결론을 내리지 못해서 “걸려” 있다고 했다. 그는 이웃 향으로 이사를 갔는데 풍을 맞아 겨우 운신을 한다고 하였다. 남철은 련옥의 건으로  4년 옥살이를 갔다 왔다. 남서기 시중은 그래도 그토록 천대를 받던 안해가 해준다고… 김응수는 처연한 기색으로 말하며 담배를 피웠다.    “창락이! 놀라지 마오. 저기 저 기와집이 보이지? 저 집에서 봉선이가 아들을 데리고 살고 있소.”    “아니?!”    “봉선이는 아이를 낳고 온갖 멸시를 무릅쓰고 살았소. 그러다가 문화혁명이 터지니 투쟁대상으로 잡혔지. 67년도에 마지막으로 투쟁을 받고 잡귀신에서 빠지긴 했지만 창락이를 더는 애 아버지라 할 용기가 없다고 우리와 말했소. 우리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소.”    “아이가 얼매나 좋은지. 창락이를 똑 빼 닮았소. 올해 대학에 붙었소.”    지금까지 눈굽만 자꾸 딱고 있던 김응수의 안해가 한마디를 하였다. 나는 망연자실 멍해 있었다. 초평향에서 이런 일을 만날 줄이야?!…      이튿날 아침후 나는 봉선이며 김응수내외, 향간부들의 여늬(배웅)를 받으며 귀로에 올랐다. 할 일이 숨 가쁘게 많았다. 차창으로 송진내 짙은 싱그러운 대기가 풍겨 들었다.                                                                                                              00.6
155    줄욕에 대한 변명 댓글:  조회:1865  추천:3  2020-08-09
      수필                                             줄욕에 대한 변명                                                                                                                 회령          당의 작가 작가로 된후 나는 더욱 열심히 창작을 하였다. 18세 청춘시절에 품은 나의 초심(리상)과 사명(포부)은 당의 작가, 인민의 작가로 되여 혁명사업에 잘 복무하는 것이였다. 지금도 나절로 생각해 보아도 나의 리상과 포부에는 흠집이 별로 없는것 같다. 그러나 어떤시람들은 “무슨 뚱딴지 같은 당의 작가, 인민의 작가 어쩌구 저쩌구… 혁명사업이요 뭐요 하는가?! 케케묵은 사람이 케케묵은 얼빠진 소리나 하구 자빠졌네!”하며 어처구니가 없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ㅉㅉㅉ… 하는것이 구제불능이라는 표시였다. 곁에서 모이 쪼아먹는 암탉을 반주하는 수탉처럼 어떤사람들은 머리를 거세게 주억거리며 “시대에 떨어져도 반세기 이상은 떨어진 사람이다.”고 하였다. 글쟁이 절개를 운운한 어느 글에는 “글쓰기 전에 소학교부터 다시 다니라”는둥 “케케묵은 몇십년전의 글을 글이랍시고 발표하는 그 용감성에 탄복한다.”느니 하면서 댓글을 달았는데, 신랄하게 비꼬며 질책한것이 그야말로 천하일품이였다. 욕사발을 얻어먹은후 나는 허심히, 여러면으로 깊히 사고해 보았다. 그리고 여러사람께 자문하기도 하였다. 이젠 여러해가 지나갔지만, 나의 관점에는 변화가 없다. 개혁개방후, 나가는것과 들어오는것이 점점 더 확대되고 편리해지고 많아졌다. 의식형태와 직결되는 문학만 보더라도 20여가지 류파(류형)가 활개를 치며 내노라 하고 있다. “순수문학”이요 “자연주의 문학”, “사실주의 문학”, “주류문학”이요 하는 전통파는 더 말할것도 없고 “애정문학”, “감상문학”, “고백문학”, “커피문학”, “종교문학”, “상흔문학”, “비교문학”, “분단문학”, “친일문학”, “성문학”, “기생문학”…듣고도 모를 문학이 란무하는것이 똑 마치 식전로천장마당 같고 만화통 같다. 주지하다싶히 옛것이든 새것이든 모든 문학은 작가에 의하여 산생되고 존재하고 발전하고 멸망한다. 어떤것은 그 생명이 길고 어떤것은 짧을뿐이다. 문학은 작가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에 따른다. 나는 여전히 당의 작가, 인민의 작가로 혁명사업에 이바지 하고저 한다. 짐작컨대 누구도 감히 현실적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당이라든가 인민이라는 개념과 실체는 감히 부정하지 못할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혁명이라는 말을 쓰지않는다느니, 그런말이 이젠 없다느니, 케케묵은 옛말이라느니, 혁명이란게 언녕 없어졌다느니… 하고 말하는 사람은 있다. 나는 인정컨대 지금의 중국의 모든일은 여전히 선배들이 시작한 혁명사업의 계속이며 혁명사업과 관련이 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산골할머니가 장마당에 와서 닭알을 팔거나 미나리나물을 파는것도 다 혁명과 관계된다고 본다. 나는 “혁명문학”을 열애한다.            우리 땅 역시 수년전의 일이다. 그때, 수필을 한편 발표했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여 한바탕 욕사발을 먹었다. 그 수필은 중국에서 사는 우리조선족들이 마치도 남의집에 와서 얹혀 사는것처럼 송구해 할것이 하나도 없다는, 우리조상들이 이땅을 ㅡ 중화대지를 형제민족들과 함께 개척하고 건설하고 보위하며 살아온것이 수천년이 된다고 소리높히 웨친것이 사달(사단)이 되였든 것이다. 나의 수필에 격분한 어떤 사람들은 “이따위 세상물정두 모르는 자가 무슨 작가라구?! 쇠웃다 밑궁기가 찢어지겠다. 별 미친놈 다 보겠네.”, “우리할아버지가 조선서 들어온지가 80년밖에 안된다는데 무슨헛소리를 하는가?! 수천년이라니? ㅉㅉㅉ.”… 그야말로 무슨역적이나 나타난듯이 격분해서 대성질호를 하는사람이 여럿이였다. 그때도 나는 나름껏 사료를 찿아보고 사색하고 사람들께 자문도 하였다. 결과, 나는 나의 관점이 틀리는게 아니라는 확신을 더욱 가지게 되였다. 내가 본 재료에 의하면, 중국고대사에서 상나라가 주나라에게 먹혔을때 상나라의 수천명 상층인물들이 백성들을 거느리고 전전하다가 지금의 조선땅에 정착을 해서 당지 토착인들과 융합을 했다는 것이였다. 당시 그들은 죽으면 죽었지 주나라의 종으로는 살지않겠다는 절개로 집단 이주를 단행했다고 한다. 주나라의 왕은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정치가였는지… 상나라 사람들이 이주하는것을 막지않았다고 한다. 그는 아마 대신들에게 이렇게 지시한것 같다. “그눔 종간나새끼덜이 어데가서 살던지 뒈지던지… 나에게 대가리를 숙이기 싫으문 우리 주나라 지경밖으루 나가라고 해라.” 조선고대사에서는 우리조상들이 세운 여러나라가 지금의 중국 동북땅에서 주인으로 살았다고 하였다. 수천년 력사에서 우리조상들은 중국땅과 조선땅 사이에서 래왕이 빈번했고 아예 중화대지에 정착해서 산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루한 력사의 편린들에 대하여 나는 생물학적 각도에서 분석하고 추리해 보았다. 우리조상들이 중화대지에서 주인으로 예로부터 살았다는 것을 부인할수 없었다… 나는 중국조선족은 “월강족”이요 “이민족”이요 하며 우리민족이 중화대지에 정착한것이 백년이요, 백60년이요, 백80년이요 기껏해서 이백년이요 하는 말을 정치적각도에서는 리유가 있지만 생물학적각도에서는 좀 다르다고 인정한다.        실화소설과 수필 나는 줄곧 문학학습을 자습으로 했다. 무슨 강습반이거나 훈련반, 지어는 연토회, 세미나 같은데도 한번 가본적이  없다. 그리고 어느대가한테서 개별보도를 받은적도 없다. 나에게 문학을 가르켜 준 선생은 책이였다. 나를 가장 많이 가르킨 책은 조선문학과 한족문학(주류문학)서적이였다. 거기서 실화소설이란것을 알게되였고 수필을 배우게 되였다. 어느땐가, 나는 실화소설을 한편 발표하고 무안을 당한적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한다하는 문학선생이 “소설이면 소설이고 실화면 실화지 실화소설이라는 이런 물건짝이 어데 있는가. 엉뚱한 작자가 다 있네.”고 하며 노발대발, 개몰듯 했다는 것이였다. 수필도 비슷한 대접을 받은바가 있다. 역시 “문학에 한해서는 내가 모르는게 없지!” 하는 문학선생이 나의 어느수필을 보고 “이따위가 다 무슨수필이야?! 근본상 수필규격에 맞지않아. 사람 웃긴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상 두 선생과 나는 무면식이다. 그러니까 무슨 선입견 같은건 전혀 있을수 없는거고 순 학술적 관점의 차의인것 같다. 그러나 감정색채가 다분하고 인격모욕을 당한것 같아서 기분이 좀 어정쩡했다. 하지만, 정확여부는 뒤로하고 우선 쟁명성, 비판성을 인정하며 반갑고 고마웠다. 문예평론같은 평론이 보이지 않은지 오랜 우리문단에서 희귀한 일이였던 것이다. 지난날 중국문단, 조선문단에서 주지하다싶히 생사판가리싸움(투쟁)이 한두번만 있은것이 아니다! 쩍하면 학술쟁론이 사상투쟁, 정치투쟁으로 변하여 필화로 죽고 병신이 된 아까운 사람이 얼마일까… 개새끼니 돼지새끼니 하다가 불충이요 모반이요 역적이요 우파요 반동이요 반당, 반사회주의요 반시황제, 반모주석, 반수령님… 문단에는 살기가 등등했고 피비린내가 끊칠줄 몰랐다. 개혁개방후에는 비판투쟁이 사라지고 세상의 모든것이 마음대로 넘나들고 쫄딱 벗고다녀도 내멋이고 내인권자유라… 지금 우리의 문단을 보면 마치도 자유시장, 무법천지 같은데, 우리문단에서는 정리정돈이 좀 있었으면 싶다. “실화소설”이란것이 있는지 없는지… 어떤규정(틀)을 세워야 할것인지… 수필에는 어떤규격(틀)을 짜 놓아야 하는건지… 내가 말하는 정리정돈이란 등소평령감께서 하시던 그 “정돈”같은것이다. 서로 공격하며 물어뜯고 반대하고 모자씌우고 몽둥이로 때려패고, 잡고 로동개조를 시키고 혹형을 가하고 감옥에 처넣고 총살, 교살을 하고… 절대로 이런행패질, 깡패만행을 하지말고 편안히, 느슨히, 웃으며, 함께 탐토하는 그런 “정돈” ㅡ 즉 “백화만발, 백가쟁명, 추진출신”의 당의 문예사업방침이다. 적대모순은 총칼로 해결해야 하지만 인민내부모순은 단결, 비평, 단결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세상에는 완정무결(完整無缺)한 사람이 한명도 없다. 인민내부의 사람들끼리 인격을 모욕하며 인신공격을 하며… 단결못할리는 없다… 단결해서 함께 공동의 사업을 잘 해야할것이 아닌가?!                                                                                                         20.8
154    김정권씨에게 약간의 건의 댓글:  조회:1710  추천:1  2020-07-31
       수필                                            김정권씨에게 쬐꼼 건의                                                                                                                 회령 우리 문단에서 중견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정권씨가 몇달전에 명작 “불조심”을 발표했다. 단편소설은 “연변일보” 해란강 문예부간에 발표되였는데, 편집 박진화씨가 그날 신문에서 우수작품으로 추천을 하기까지 했다. 이런 일은 극히 드물었다. 소설의 내용은 간단했다. 어느 곳에서 중년쯤은 되는것 같은 부부가 살았는데, 안해가 무슨병으로(신경병?) 입원을 했다. 어느날, 안해는 소리 없이 퇴원을 하고 집에 와서 두루 집안거두매를 하다가 이미 10여개를 써버린 콘돔(避孕套) 봉투를 발견했다. 남편의 부정부패를 발견한 안해는 아주 태연자약하게 교육을 진행했다. 그는 남편의 사루마다(속곳 팬티 빤쯔따위)앞에 “불조심”이라고 큼직하게, 곱게, 수놓이를 했다. 소설은 대개 이런 것 같다. 지금은 많이 잊어먹었는데, 그때 어찌도 우스운지 혼자서 키득거린 기억이 난다. 이런 경우, 십중팔구는 안해가 발광하며 칼을 들고 거시기를 베여버린다느니 리혼을 한다느니… 죽어번져지며 란리판을 벌이겠지만 소설 속의 안해는 아주 고상하게, 문명하게, 우아하게, 인민내부의 모순을 평화롭게 처리했다. 그래서 남편씨가 얼마나 뼈저리게 착오를 검사하고, 후회하고, 개조를 결심했는지… 후과가 어떻게 효력이 있었는지… 이런것들은 소설에서 한마디도 언급을 안 하고 독자들에게 맡겨서 여운이 길게, 감칠맛이 나게하였다. 안해의 이러한 생활의 지혜, 인생철학 그리고 재치있는 예술적 처리 등으로 해서 특별추천을 했을것 같다. 소설을 본 후 그때는 웃고 말았지만, 후에 자꾸만 조금 더 다듬었으면 하는 욕심이 생겨났다. 남편씨의 팬티에 수놓이를 한 것만으로는 어쩐지 력도가 부족한것 같았다. 콘돔으로 목걸이를 해서 남편의 목에 걸어주는 엄청난 강타를 한방 먹이긴 했지만, 그건 둘 밖에 모르는 장면이여서 있는둥 마는둥이다. 안해가 입원한 기간 열번도 더 되게 바람을 쓴 남편씨가 고따위 자극에 꿈쩍이나 하겠는가 말이다. 히쭉 웃으며 코방귀를 뀔 것이다. 개구리 낯짝에 물치기다. 하긴, 남편과 자기의 체면, 그리고 병을 치료해서 사람을 구하며 출로를 주는 "간부정책", "조직원칙"을 잘 실행하는 안해의 현명성을 도두라지게 하려고 정권씨가 고심한 것 같기도 하다만… 그래서 오늘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다 보니 정권씨에게 약간의 건의를 하고자 한다. 재판이 있으면 참고하기 바란다. 첫째로는 고 “불조심”을 “불”과 “조심”을 붙혀 쓰지 말고 띄여쓰면 좋겠다. 둘째로는 그것을 조끼, 작업복, 운동복, 그리고 모자 등에도 적당한 위치에 회사이름을 새기듯 선명하게, 멋있게 써 놓거나 수를 놓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면 심원한 정치적, 사상적, 현실적 의의가 있을 것 같은데, 이런 복장이 연길에서 대 인기를 얻는다고, 그것이 어느 틈에 한국에도 전파되여 대 인기를 얻고 있다고… 소설에 조금 불어넣었으면 좋을 것 같다.   어느 땐가 한국텔레비죤에서 여럿이 모여들어 무슨 좌담을 하는데, 한국남자들이 왜서 바람을 많이 쓰는가? 하는 화제가 열변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신사풍의 한 중년사내가 아주 심중한 어조로 발언하기를 남자들의 거시기가 겉에 달려있기에 원체 거들렁거리기를 좋아하며 그리고 한국에는 해풍이 많아서 거시기가 방법없이 마구 흔들리며 결국에는 바람으로 이어진다고 "과학적"으로 "학술발언"을 하는 것이였다. 이것은 거시기 즉 “불”의 상황이고 다른 한가지는 주지하다싶히 한국에서는 확실히 화재 즉 “불”이 많다. 때문에 “불 조심”을 써서 입고 쓰고다니며 시시각각 “불 조심”을 하는것은 여러면에서 좋을 것 같다. 바람에 대한 경고도 되고 화재에 대한 경고도 되겠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그런 옷이나 모자를 사용하는 치들은 속으로 다 알고 있으며 무슨 생각이 있을 게다. 내가 왜서 하필이면 이것을 사용하는가… 물론, 활량끼가 많은 부랑자들은 우정 애용할 수도 있다. 그놈들은 정부(情妇)를 끼고 바람피우는 것을 행세꺼리로 아는 놈들이니까. 어떤 곳에서는 아주 류행으로 되고 있기도 하다. 모임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하는 것은 케케묵은 구식이고 정부를 끼고 참가하는것이야말로 신식이고 현대 멋이라고 공공연히  인정하기까지 하는 한심한 상황이다. 이상의 첨삭은 음란물이라거나 치안문란이라거나 할 수는 없기에 검사에 걸릴 리는 없을 것 같다. 정권씨! 더 많은 명작을 기대해요. 20.6.
153    (수필) 엷어가는 인정 댓글:  조회:1825  추천:0  2020-06-23
       수필                     엷어가는 인정                                                ㅡ누구의 과냐?                                                                                                                                       회령     사촌동생의 전화를 받고 니는 착잡한 심정을 어쩔 수 없었다. 벌써 네번째로 한국벌이를 나간 동생은 전화에서 울먹이며 이런 말을 하였다.   “… 형니메! 내 한가지 부탁을 하기오. 수고스럽지만 거, 우리 아덜께 형니미 둬마디 말씀을 좀 해주오.”   “무슨 말을?”   “이 애비께 드문드문 좀 전화를 하라고…”   동생에게는 아들 하나 그리고 그 아래로 딸 둘이 있다. 아들과 큰딸은 이미전에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고 젖먹이 막내딸은 북경에서 한국회사를 다니는데 서른살이 훌쩍 넘었지만 미혼이다.   동생은 평생 농민이지만 모진일은 별로 하지 않고 살았다. 집체화 시절에는 생산대회계에 대대(촌)신용사출납을 겸하여하다보니 가방에 장부책이며 수판(주판)을 넣어메고는 이마을 저마을을 돌아다니며 일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때는 아버지 어머니가 정정하다보니 동생은 자류지밭 한고랑 김을 매는 법도 없었고 땔나무 한단 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산골농촌치고는 손발에 흙을 뭍히지 않고도 상등공수(보수)를 받는 출세를 한 총각이여서 반반한 처녀에게 장가를 갔다. 그리고 줄줄히 삼남매를 낳아 키웠다.   동생이 고생을 하기는 개혁개방이 시작된 후 부터다. 아버지 어머니는 이젠 밭을 다루기가 힘들어서 수, 한전은 모두 세를 주고 터밭이나 다루면서도 여기저기가 늘 편치않아했다. 땔나무도 하기 힘들어 마을 주변에서 쑥이며 잡초를 긁어다 불소시개를 하며 비싼 석탄을 사다 때였다. 해마다 화목철이 되면 남들은 다 산에가서 십여수레씩(일년 치) 화목을 해다가 때였지만 동생은 나무를 바로 할줄도 모르거니와 할념도 없었고 하기도 싫어했다. 아래로 녀동생이 넷이였는데 다 외지 농촌으로 시집을 가서 일잘하는 매부가 넷이나 되였으나 그들을 불러다 화목을 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도 삼촌내외분은 아들에게 잔소리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삼촌내외는 성질이 특이했다. 아이때부터 애들에게 한마디도 무엇을 가르키거나 욕을 하거나 잔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고 심부름이거나 일같은걸 시키는 법이 없었다. 특히 동생에게는 더욱 각별했다. 늘 딴밥을 해 먹이고 닭알이며 말린 세치네(잔 물고기)로 반찬을 해 주며 온냐온냐 많이 묵어라 많이 묵어라 했다. 그것은 아이애비가 되여서도 그랬다.   농촌이 개체화로 되자 그는 출세한 벼슬들이 다 없어지고 백수건달이 되고 말았다. 동생은 녀편네를 한국에 가짜시집을 보낸 홀애비들과 함께 부커나 장기를 놀면서 개추렴도 하였다. 삼복철에는 산천당 당나무 밑에서 매미노래를 듣다가는 쉬원히 낮잠을 늘어지게 잤다.   그러나 상팔자는 얼마 가지 못했다. 삼남매가 무럭무럭 자라면서 아들애는 초중에 들어갔는데 공부는 수수했다. 하지만 고중까지는 글을 읽혀야 겠는데 고중은 시가지에 밖에 없으니 그 시발(뒷시중)이 간단한것이 아니였다. 아버지 어머니와 안해가 돼지를 기르고 닭마리나 치는 것을 가지고는 어방도 없는 일이였다. 동생네는 다른사람들을 본받아 안해가 한국벌이를 가기로 결정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가짜결혼방법은 쓰지 않고 신용사 대콴(대출)을 맡고 이곳 저곳에서 고 리자돈을 꾸어 순리롭게 한국으로 나갔다. 안해가 떠나던 전날 집에서는 닭을 한마리 잡아 송별연을 하였는데 그때 분위기는 그야말로 일희일비였다고 동생은 나에게 말하였다. 아버지가 나가서 몸조심하며 바쁘면 곧 돌아오라고 말하니 안해는 울면서 대답을 하였는데, 그말은 생각하면 지금도 불쾌하다고하였다. 그날 안해는 말하기를 “아부지 어마니는 해마다 기력이 못해가고 아이들 시발은 점점 더 커가는데, 죽던 살던 내가 총목을 메지 않으면 이 집에서 누기(누가) 할 사람이 있슴까?!” 하더라는 것이였다. 그때, 나는 틀리는 말이 아니구만! 하고 동생에게 한방 쏴주려다가 참았다.   안해는 한국에 나간후 음식점이며 려관집에서 일하며 두달에 한번씩 꼭꼭 돈을 보내왔다. 그러기를 한 이티를 해서 빚을 다 갚고 아이들의 고중시발까지 들어 주었다. 그런데 빚을 다 갚은후에는 아이들의 학비만 보내면서 벌이가 신통치 않고 몸이 불편하다고 하였다. 아들과 큰딸은 고중에 가서 련애에 빠져 공부를 망치고 말았다. 막내딸은 공부를 잘 해서 북경 어느 대학에 붙었다. 안해는 아프다면서도 계속 일을 하였는데 집에 보내오는 돈은 점점 줄어들더니 얼마후에는 아예 끊어버렸다. 막내딸애한테는 자기가 직접 돈을 보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한국에서 남편을 얻었으니 리혼수속은 동생이 언제 하고프면 언제하라고, 필요재료는 보내라고 할 때 즉각 보내주겠다는 것이였다.   호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동생은 사태가 이렇게 되니 황연대각 깨도가 되였다. 생각해 보니 겨우 초중까지 다닌 농촌농민이 50여 평생을 아이때부터 노라리를 치며 오늘까지 살아 왔으니, 행복한건가 한심한건가… 부모까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시집, 장가까지는 책임을 져야겠는데… 그는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때로부터 동생은 한국벌이에 나섰다. 동생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집에서는 닭을 잡고 환송식을 하였으나 그것은 눈물의 리별식이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찌 고생을 하겠냐며 근심이 태산이였고 바쁘면 인차 돌아오라고 거듭거듭 당부를 하였다.   동생은 한국에 나가서 결사적으로 돈벌이를 하였다. 그는 층집건축회사에서 실내전기배설일을 하였는데 한국기술자(반장) 밑에서 온갖 천대와 욕사발을 먹어가며 말그대로 어지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며 억울한 월급을 받았다. 아파트는 층층이 되는족족 전기가설이 따라가는데 반장은 도급을 맡았기에 새벽부터 밤중까지 줄기차게 일을 들이댔다. 동생은 현기증이 나서 사다리에서 떨어지기도 여러번을 했고(다행이 뼉따구가 끊어진적은 없었다.) 코피가 터지는 것은 편지에 문안이였다. 이렇게 반년남짓 구불고(뒹굴고)나니 동생도 일에 완전히 자신이 있었다. 말그대로 수영은 수영중에서 배우는 거지만 동생은 전쟁중에서 전쟁을 배운셈이다. 이제부터는 동생도 도급을 맡았는데 흑룡강서 간 동포를 조수로 썼다. 이러기를 2년7개월을 하니 돈을 꽤 벌었다. 그간 세놈의 악덕업주들 한테 4만여원의 협잡을 당했지만 수중에는 30여만원이 있었다. 아들의 잔치때문에 동생은 돌아왔는데, 잔치를 멋드러지게 잘 하여 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내며 치새(호평)를 받았다. 리혼을 한 안해는 어데가서 붙었는지 아들잔치 기별을 할 수 없었다.(아들은 엄마가 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안대도 제무안에 오지 않았을 거지만.)   그해 설과 보름을 다 쇤후 4월초에 동생은 또 한국벌이를 나갔다. 2년남짓 지나서 이번에는 큰딸애가 잔치를 하게 되여 동생은 집으로 왔는데, 딸의 잔치도 잘 하였다. 그리고는 인차 한국으로 떠났다. 세번째다. 이번에는 련 6년을 일하고 심장이 좋지 않아 돌아 왔는데, 그간 아버지 어머니는 아들을 그리다가 선후로 하늘로 갔다. 부모일에 대해서는 아들과 큰딸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한국에 갔기에 동생은 아버지, 어머니가 사망해도 오지 않았다. 대신 동생은 아들과 딸에게 각각 그간  15만원을 보내줬다. 삼촌과 삼촌댁의 후사처리는 내가 주도해서 했는데, 동생과 조카들이 골회함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대로 날려 보냈다. 삼년제도 한꺼번에 에때버리고(대체하다) 유상은 불살라 버렸다. 고인들의 딸들도 련락을 할 수없다보니 두번 다 오지 않았다.   장례후 나는 식당으로 가지않고 안해와 애들을 다 데리고 곧장 돌아오고 말았다. 그날, 나의 심정은 참으로 비감하고 격분했다…   그후, 그러니까 삼촌댁이 삼촌을 따라간후 얼마 안되여 동생은 심장병으로 돌아왔는데 거이 일년을 휴식하며 치료를 하였다. 병이 완쾌하자 동생은 또 한국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기일을 할 수가 없었다. 70을 바라보는 사람이다보니 어데서도 위법이라며 고용하려고 하지 않았든 것이다. 어쩌다가 이번에 온 전화에서 동생은 수원근처의 작은 양로원에서 호리일을 한다고 하였다. 일당으로 인당 한화만원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임무는 24시간 자립못하는 늙은이 여섯분을 돌보며 병실의 청소까지 말끔하게 해야 하며 구석에서 잔다고 하였다. 일을 참답게 하건만, 조금만 자리를 비워도, 수간호사는 따지며 훈계를 한다고 하였다…   동생은 매일 죄로운(가련한) 로인네들을 돌보며 자기의 앞날에 대하여 생각이 많으며 서글프다고 하였다. 웬일인지 자식들의 전화가 자꾸 기다려 지고 그립기도 하지만 모색한(매정한) 아이들은 돈을 달라는 전화외에는, 보낼만한 돈이 별로 없다고 한 후에는  한마디 문안전화도 없다고, 없은지 이젠 오래다고 하였다. 동생은 아이들을 쉽게 키웠다. 그것은 아버지 어머니가 아이들을 어루만지며 끔찍히도 안아키웠기 때문이다. 동생내외는 낳기만 하고 키우는 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동생은 울먹이며 나에게 아이들의(이젠 아이가 아니지…) 전화호를 말해 주었다. 하지만, 조카들과 내가 뭐라고 하면 좋겠는지… 나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20.4.
152    강청 일화 댓글:  조회:931  추천:0  2020-05-09
     수필                                                     강청 일화                                                                                                                   회령 중화민족의 6천년 력사에서 아마도 모르긴해도 강청과 같은 녀자는 처음일 것이다.(강청. 원명 리운학. 1914.3.5ㅡ1991.5.14. 자살.) 강청은 중국은 말할것도 없고 지금세상에서는 다 아는 인물이다. 그야말로 말그 대로 인류력사에서 길이 전해져 갈 인물이다. 다른나라 다른민족의 유명인물에 대한 재료는 아는게 없다보니 뭐라고 말할게 없지만, 중국의 중화민족에서 생겨난 강청에 대해서는 많은 재료가 이미 세상에 공개되다보니 기본상에서 알며 할말이 있다. 아래에 최근에 내가 본 가장 신빙성이 있는 재료에서 두가지 사실을 발췌한다. 1974년 1월 25일, 강청 일파는 중앙정치국과 모택동주석, 주은래총리 몰래 국가급대회를 북경 수도체육장에서 소집하였다. 대회는 “비림비공(批林批孔)동원대 회”라고 했다. 동원되여 동원대회에 참가한 중앙정치국과 국무원직속기관 각급 간부가 2만여명이 되였다. 오후 3시, 이 “동원대회”에 참가하여 주최하라는 긴급통지를 갑자기 받은 주은래총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앓는몸으로 급히 대회장으로 갔다. 주은래총리가 도착하자 대회는 즉시 시작되였다. 대회를 주최하게 된 주총리는 먼저 자기검토를 하였다. “부대동지들이 비림문제에서 한발 앞섯습니다. 어제 춘교(장춘교. 해방군총정치부 주임)동지가 경서빈관에서 이미 대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우리 중앙과 국가기관에서는 한발 늦었습니다…” 주총리의 말이 방금 시작되였는데, 강청과 장춘교 그리고 그들 추종자들이 즉시 고함을 질러댔다. “우리는 투쟁철학을 요구한다! 우리는 투쟁할 것이다! 우리는 투쟁할 것이다! 우리는 투쟁할 것이다!” 마이크에 입을 바짝들이대고 지르는 강청과 장춘교의 갈린 목소리는 확성기로 울려 퍼지면서 귀가 터지는듯 했고 따라부르는 구호소리는 체육장에 울려 퍼졌다. 따라서 강청은 수시로 일어나서 “비림비공”에 대한 “우리의 붉디붉은 태양이시며 위대한… 모주석의 지시를 모주석을 대표하여 전달” 한다면서 주총리의 말을 거듭 가로채고 거기에 요문원도 끼여들었다. 대회장에 온 반란패두목들은 “위대한 기수(강청)”의 뒷심이 있으니 더욱 안하무인으로 기세가 등등해서 날뛰였다. 그들은 중앙의 정식비준도 없는데 대회에서 공개적으로 곽말약 등 국가지도자들을 질책 공격하였다. 여기에다 강청은 모주석의 ”10개 비판은 잘 된 문장이 못된다.”는 시어구를 인용하며 붙는불에 키질했다. 하여, 곽말약에 대한 한차례의 성세호대한 비판이 벌어졌다. 이날의 소위 “비림비공동원대회”는 매우 긴장한 분위기속에서 사람들을 위협하며 화약내가 가득 풍기게 하였는데, 그 주제는 주총리를 비판하는 것이였다. 그들은 한바탕 떠들며 련속 소란을 피워댔는데, 모두가 주총리를 빗대고 공격하는 것들이 였다. (그날의 이 상황을 보고 받은 모주석은 몹시 격분하였다. 그는 즉시 명령을 내려 강청일파가 전국에 발표하려고 준비한 “1.25대회” 실황록음테프와 “대회성과”선전재료를 몽땅 봉쇄하게 하였다. 그날 대회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은 한바탕 놀림을 당한데 대하여 몹시 불쾌해 하였다. 그들은 강청일파들이 정치문제에서 되는대로 행패질을 하며 엄숙하지 못한 짓거리에 대하여 십분 격분과 반감을 가지였다.) 이틀후 즉 1974년 1월 27일 밤, 중앙정치국에서는 인민대회당 동대청에서 해방군총정치부와 “해방군보”등 부대 선전계통 책임자들을 불러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는 주은래, 엽검영, 강생, 장춘교, 강청, 요문원, 왕동흥 등 령도자들이 참석하였다. 대청 동쪽에 림시로 만든 주석대는 대청 지면보다 약 10공푼가량 높았다. 령도들은 회장을 향하여 착석하였다. 회의장에 앉은 대다수 사람들은           이틀전의 “1,25대회”에 참가한바가 있기에 오늘밤에는 또 무슨 새로운 구경거리가 있겠나… 서로 귀속말로 수군거리며 주석대를 바라보았다. 회의는 주은래가 주최하였다. 그는 엄숙한 기색으로 개회사를 몇마디 하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겨우 참으며 기다렸다는듯 강청이 새된 목소리로 소리높히 제일먼저 발언을 하였다. “우리정치국 동지들이 의논하였는데, 지금 비림비공운동이 전국각지에서 진행함이 평형치 못하며 적극적이 못되며 주동적이 못된다. 하여, 중앙에서는 전국의 각성, 시, 자치구, 각 대군구에 기자를 주둔케 하고 그들이 련락원을 감당하기로 하였다. 이에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한다. 련락원은 지방의 당, 정, 군의 상무회의에 참가할 수 있으며 지방의 보밀전화로 중앙과 직접 련계를할 수 있으며 지방의 당, 정, 군 령도기관들에서는 마땅히 편리와 협조를 해야 한다. 간섭하거나 막으면 않된다. 우리가 직접 각지의 정황을 장악해야 한다.” 강청이 발언할때 장춘교는 여러번 께끼였고 강생과 요문원은 보충하거나 해석을 하였다. 회장의 청중들은 “중앙”에서 지방의 각급령도층에 대하여 신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즉시 느끼게 되였다. 끝으로 강청은 회의 참석자들에게 무슨 의견이 없는가고 한마디 물었는데,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기침소리 한마디도 없이 잠잠 했다. 상황이 이렇고 보니 강청은 자존심이 여지없이 상하게 되였다. 사람들의 랭대에 난처해진 강청은 격분을 돋구며 사방을 둘러보다가 발딱 일어서더니 크게 소리질렀다. “총정치부 전유신이 왔는가?” “왔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전유신은 해방군총정치부 부주임으로 키가 크고 표준적인 군인이다. 그는 사람들속에서 벌떡 일어나 차렸자세로 강청에게 군례를 하며 높은 소리로 힘차게 대답하였다. “전유신! 내가 묻겠는데, ‘공산당선언’이 어느해 발표되였는가?” 갑작스런 물음에 전유신은 인차 대답을 못하였다. “전유신! 내가 묻지않는가?! 왜 대답을 않하는가?!” “가능하게 184… 어느해 같은데…” “당신, 총정치부 부주임이라는게, 부대의 고급간부라는게, ‘공산당선언’이 발표된 시간도 모르는가!” “내가 준비가 없다보니… 학습이 부족하여…” “무슨 학습부족인가?! 나와 입씨름 할텐가?!” 전유신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리왔! 저자의 령장과 모휘를 당장 뜯어라!” 강청은 자기의 신분(그는 부대에 아무런 직무도 없었다.)과 때와 장소를 헤아리지 않고 밖에 대고 소리질렀다. 즉시 몇명의 군인이 들어와서 강청의 “명령”대로 집행하였다. 전유신은 꿋꿋히 서서 머리를 번쩍들고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군인기개를 보이였다. 이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망태기횡포, 허튼짓이 였다! 강청은 아무짓이나 내키는 대로, 마음대로 해도 되는건가?! 너무도 격을 벗어난, 상상할수도 없는 행위였다… 사람들은 경악과 분노를 금할수 없었다. 강청은 전유신을 릉욕하고도 위엄을 부리기에 성이 차지않았는지 또 소리를 질렀다. “ ‘해방군보’ 화남이 왔는가?” “왔습니다!” 화남은 힘차게 대답하며 강청에게 군례를 하였다. 그는 “해방군보”의 주필이다. “너, 대답하라. 파리공사가 어느해 성립되였는가?” “1871년…” 화남은 주저하다가 대답한후 학고한 신심이 없어서 더 말하지 않았다. 전유신과 화남을 닦아세운후 강청은, 얼마나 한심한가 모두 보라… 학습을 해야 한다... 모주석을 따라배워야 한다… 하며 모두를 한바탕 훈계하다가 오른켠에 앉아 있는 엽검영을 보면서 갑자기 생각이 난것처럼 큰소리로 말했다. “검영! 듣건대 당신의 어느아들이 공군부대에 있다던데 어떻게 참군했는가? 뒤문치기를 하지않았는가?” 엽검영은 강청을 한번 흘겨본후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고 불쾌한 기색으로 머리를 돌려 다른곳을 바라보았다. 그날밤의 소위 “중앙”에서 소집했다는 정치국회의는 강청이 주역이 되여 표연을 하고 일파들이 한바탕 맞장구를 치며 소란을 떨고 끝났다. 그들의 야심은 “비림비공” 운동에 “비 주공”(批周公ㅡ주은래를 비판, 타도), “비 주후문”(批走后門 ㅡ뒷문치기) 을 접목시켜 성세호대한 전국성적 대란을 일으켜 많은 당,정,군 령도간부들을 타도하거나 철직시키고 “비켜세우고” 탈권하려는데 있었다.(주총리와 뒷문치기에 련계하여 파고, 걸고들면 대다수의 간부들을 타도하게 될것이다.) 회의에서 그들은 “세발의 화살을 동시에 맹렬히 쏴야한다!”고 기세사납게 부르짖었다. 속심과 중점은  “비 주공”과 “비 후문’에 있었다. 많은 정치국위원들은 이미전부터 강청일파의 야심을 환히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어처구니가 없는 온갖 행패와 짓거리에 대하여 불만과 분노가 가득하였다. 하지만, 강청이 모주석의 안해기에 공개적인 대항을 자제하였다. (사람들은 강청의 “이불속 속삭임”의 위력과 작용을 몹시 중요시 했다. “이불속 속삭임”에 대한 중시는 수천년 내려오는 중화의 한가지 문화로서 큰 허물이다.) “1.27희의”후 엽검영은 1월29일, 주은래는 2월3일 각각 모주석께 강청일파의 활동을 편지로 반영하였다. (페심병발작과 페염, 고열, 시력이 모호한 상태였으나 조금 나아지자 2월 15일 모주석은 주은래와 엽검영에게 긴 회답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모주석은 “비림비공” 은 동의하지만 “비 주공”, “비 후문”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명학히 언급하였다. 그리고 강청일파를 비평하였다.) 부옇게 좌절을 당한 강청은 주은래가 병석에 눕자 기회가 왔다고 인정하고 3월 14일 모주석을 만나자고 하였다. 그는 모주석께서 “비 주공”, “비 후문”에 유익한 언질을 한두마디라도 울궈낼가고 하여 집요하게 만남을 청시했다. 그러나 모주석은 단호히 거절하고 3월 20일 강청에게 랭혹한 편지를 보냈다. “만날필요가 없다. 너는 내가 여러해 너에게 한 말을 많이 집행하지 않았다. 만나서 뭘 하겠는가? … 내가 죽은후 네가 어찌되는가 봐라. …” 중화의 력사에서 사치부화하고 횡포무도하고 황음무치하고 살인을 오락으로, 재미로, 심심풀이로 일삼은 왕으로는 하나라의 걸왕과 상나라의 주왕이 으뜸으로 력사에 “명성”을 떨치고 있다. 퍽 후에 와서는 “분서갱유”, “아방궁”, 3천궁녀, 장생불로초, 만리장성 등으로 진시황(영정)이 꽤 력사에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에게는 할거의 6국을 통일하고 처음으로 중화의 기틀을 잡았고 돈과 도량형을 통일한 공적이 있다. 또 수천년이 흘러 20세기 중화대지에서 “명성”이 하나가 나타났는데, 주지하다싶히 그가 바로 강청씨다. 강청은 걸, 주, 영정, 무후, 서태후는 궁둥이에도 미칠수 없는 온갖 행패를 마음껏 한, 중화의 오늘까지의 력사에서 제일 특출한 악녀다. 그는 모주석의 안해라는 밑천 한가지로 호가호위 하면서 세상사람 모두가 기절할 지독하고 횡포무도한 “업적”을 수두룩히 만들어 냈던것이다! 좌우간, 어찌되였든간에 강청은 력사에 이름이 올랐으니 그의 악귀혼이 만족해 할것이다…                                                                                                                  20.5
151    설 기분 댓글:  조회:1804  추천:2  2020-05-01
      수필                                                      설 기분                                                                                                                    회령 소한 이튿날 금년들어 두번째 대설이 내렸다. 올 동삼 첯번째 대설은 그러니까 작년 12월 초순이겠다. 그때, 밤새도록 큰눈이 내리었다. 이번의 대설도 그때처럼 밤에 내렸는데, 발목을 넘어섯다. 금년 겨울은 이상하게도 왕년보다 눈이 아주 적게 내리고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가 위주였다. 온난한 날씨가 산보하기에는 좋았으나 이렇게 강설이 적어서야 농사에 지장이 없겠나… 근심이 되였는데, 대설이 내리여 기분이 무척 좋았다. 도적눈이 내리면 대풍이 든다고 한다. 소한이 금방 시작되자 이렇게 큰눈이 내리니 대, 소한간에 올 동삼추위를 한꺼번에 단단히 할 작정인가보다 했는데, 웬걸?! 날씨는 련일 바람 한점없이 화창하기만 했다. 큰눈은 내린 고대로 삼라만상을 포근히 덮고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설경이고 겨울맛이 기분좋다. 어떤사람들은 동삼은 그래도 하루건너 함박눈이 팡! 팡! 쏟아지고 설한풍이 윙! 윙! 휘몰아 치며 코와 귀와 거시기가 얼어 떨어지는 것만 같고 와들와들 떨며 집으로 달려와 뜨끈뜨끈한 정지구들(온돌)에서 구수한 동태국을 먹는것이 제일 동삼맛이며 진풍경이라고 한다. 겪어보아 알지만 옛날 겨울은 정말 혹독했다. 일년 사시절에서 제일 무섭고 싫은것이 겨울추위였다. 바로 입지못하고 바로 먹지못하는 생산대백성들은 동삼이 없었으면 했다. 그때 겨울은 기본상 령하30도 이상의 날씨들이 였다. 지금은 령하20도를 넘는 날씨가 거이 없다. 사람들이 북극의 얼음산이 다 녹는다고, 지구온난화를 들먹이며 우려를 하지만 나는 한치보기다 보니 시큰둥 하다. 정책이 있으면 대책이 있다는 궤변같이 아니, 창이 있으면 방패가 있듯히 인류는 온난화에 꼭 대책이 있을것이다. 나는 변함없이 기분이 좋다. 요즘 겨울날씨는 옛날같으면 사냥하기 딱 좋은 날씨다. 지금은 동물보호법인가 동물사랑법인가 한것이 나와서 파출소가 렵총을 다 걷어가는 바람에 아무리 손이 근질거려도 사냥을 할수가 없다. 그러나 멧돼지고기, 꿩, 토끼, 노루고기를 구워먹고 삶아먹고 탕 쳐 먹고 회 쳐 먹는 비계덩이 배불뚝 “귀족”들은 있다. 산해진미요 무공해천연록색이요 원생태요하면서 영원건강, 만수무강을 장담하며 기름진 얼굴을 번들거리는 그들을 보면 기분이 대단히 불쾌하다… 공연한 소리로, 설 기분을 말한다는 것이 갑축을묘가 되였다. 언귀정전, 설 기분을 간단히 말해보자. 설이 눈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니 안해의 공작이 매일같이 분주하다. 어제는 큰딸과 같이 죠즈(밀가루밴새)를 열다섯근이나 했는데, 하루품이 들었다. 나는 죠즈피를 사오는 심부름만 하고 한시루를 먼저 쪄서  술잔을 먹고 티비를 보며 잘 놀았지만, 안해가 죠즈 싸는걸 볼때마다 아름이차서 저도 모르게 혀를 끌끌찼다. 오늘은 코꿴 송아지처럼 꼼짝못하고 짐군으로 잡혀 안해를 따라 연길초쓰(슈퍼 상점)로 가서 설음식감을 작으만침 1800원어치 사왔다. 큰딸이 함께 장을 보고 자가용으로 창고문앞까지 실어 왔기에 나는 또 옹헤야를 부를수 있었다. 돼지발족만해도 30개를(22근. 더 사겠다는걸 딸과 내가 말렸다.) 삿는데, 안해는 발족을 삶느라고 또 하루품을 팔았다. 나는 저녘에 발족으로 또 한잔을 잘 먹었다. 오늘, 나는 새삼스레 무량한 감개를 금할수 없었다. 자꾸만 옛날에 설을 쇠던것이 회상되였다. 해방전 옛말은 외울것도 없고, 개혁개방전까지 우리마을 생산대사원들은 사실그대로 일년에 돼지고기를 인구당 2냥씩 세번 먹었다. 단오, 추석, 설이다. 한식 즉 청명에는 돼지를 잡지않았는데 그것은 단오에 벼모내기총결을 크게 하기때문에 그때 한 밥을 잘 먹자고 그랬다.. 그때, 단오는 정말 명절맛이 났다. 일년에 한번도 먹어 못보는 해도 여러번 있었다. 돼지고기가 다 뭔가?! 콩깍대전분이라는 쓰고 떫고 멀건 푸대죽도 하루에 반사발을 먹으면 잘 먹었다는 세월이 아니든가… 개혁개방후, 특히는 새세기에 진입한후 우리부부의 획득감, 행복감, 안전감은 현실로 되였다. 우리부부는 국영중형기업에서 고급공정사로 평생을 적극 사업했다. 개혁개방초기의 혼란하고 어수선한 기회를 리용하여 우리공장에서는 한무리 부패분자들이 미친듯히 날뛰였다. 공장은 특대화재로 원기를 크게 상하고 생산사고, 안전사고가 련발하는가 하면 원목구입명의로 썩박무티(나무)를 들여오고 석회석 대신에 돌멩이를 구입해 들여다가는 서로 짜고 끼고는 상등원재료 값으로 결산을 해 먹었다. 그런가 하면 받아먹고 받아가지고는 공장산품을 눅거리로 외상놓이를 해서 삼각재가 하늘에 치솟았다. 인위적 파괴와 경영관리부실은 급기야 공장이 파산을 선고하지 않을수 없었다. 긍지높고 자랑차던 공인계급은 일조에 무직업쟁이가 되고 말았다. 우리부부는 많은 간부와 기술인재들과 함께 퇴직처리를 당했는데, 수만의 공인들보다는 운수가 좋은 셈이였다. 퇴직월공자는 사업단위에 분배받은 동기동창들보다 5ㅡ6천원이 적었지만 수천만의 혁명선렬들을 생각하면 마음의 평형을 찿을수 있었다… 새세기에 들어선후 나라에서는 국영기업퇴직원공들의 대우를 해마다 높혀주었다. 하여, 지금은 나도 돈에 쪼들리는 고생은 별로 없는 일상을 살고 있다. 고기국보다 조밥에 시래기된장국을 더 좋아하고 세투리, 무슨둘레, 미나리, 취와 고사리 도라지를 별미로 먹는 미식가가 되였다. 앞에서 말했지만, 지금 안해의 설비슴 장만을 곁에서 보는 나의 심정은 감개가 무량하기 그지없다. 안해가 마음껏 설비슴을 하게 나는 협조를 한다. 이번설에는 어쩌다가 자식들이 다 오기로 했고 혼자 있는 가까운 친척들과 이웃친구들을 모두 초청하여 유쾌히 설을 쇠기로 했다. 설이 이젠 일주일 남짓 눈앞에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언녕 설기분으로 가슴이 설레인다. 특히 경자년올해설이 더욱 사람을 흥분에 들뜨게 한다. 주변을 살펴보면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기분들인것 같다. 나는 금년설을 맞으며 왜서 모두가 이러실가… 그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새시대를 맞아 사람들의 획득감, 행복감, 안전감이 확실히 제고 되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중화민족은 깨여난 사자며 일떠선 사자며 용맹을 떨치는 사자다! 당의 백돐을 눈앞에 보며 탈빈과 초요사회건설을 마무리 짓고 더는 남의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며 세계무대에서 떳떳한 일원이 되며 인류운명공동체 구축에서 우리가 주력이라는 자호감, 긍지감, 더욱히는 사명감으로 노력분투를 다시 한번 다짐하는데서, 설을 잘 쇠고 억척스레 해 제끼리라는 결의에서, 사람들의 기분은 흥분으로 타 오르는것 같다.   부기: 코로난지 트럼픈지 한 미친놈의 지랄 때문에 설과 대보름은 다 깨여져 버렸다. 중국에 갱길이(불덩이) 떨어졌다. 그러나 겁을 먹거나 위축을 당함은 없다. 중화민족은 각종 난관과 시련을 이겨 왔다. 지혜롭고 조직된 중화민족은 중국공산당의 주위에 굳게 뭉치여 코로나 사태를 물리치고 억세게 분발할 것이다…                                                                                                                    20.1
150    간신들에 대한 연구 댓글:  조회:928  추천:0  2020-03-11
      수필                                             간신들에 대한 연구                                                                                                                   회령 말은 젊잖고 묵중하게 연구라고 하지만 기실은 무슨 연구가 아니다. 그저 간신들에 대한 잡생각을 두루 써 본 것이다. 외국정부안에도 간신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 외국정부에도 간신이 있는것 같다. 잡아내서 총살했다는걸 봐서는. 모택동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이 있는곳에는 그 어데든 모두 다 상, 중, 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럼 어데든 다 간신이 있을것이다. 왜냐하면 간신도 사람에 속하는거니까. 내가 알아본데 의하면 간신은 하에 속하는 사람이다. 나의 수준을 가지고 남의나라간신들까지 들먹인다는건 그건 너무도 지나친 소행이고, 나는 여기서 우리나라, 그것도 요즘의 간신을 조금 말해볼까 한다. 먼저, 총론부분에 해당되는 것들을 간단히 대충 짚어보자. 중국에서는 간신이 언제부터 생겼는가? 그것은 권력이 생기면서부터 간신이 생겨났다. 간신이란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생김새에 한해서는 특별히 연구한것이 없기에 말할것이 없다. 관상쟁이들은 반골이 있으면 역적이 될 놈이라 하고 눈까풀이 앏고 할기죽거리기를 잘하며 눈치를 살펴가며 살살 눈웃음을 잘 치면 간신이나 아첨쟁이가 될거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보기에는 이런건 다 과학성이 결핍하다. 엄청난, 수준급 간신들속에도 허여멀끔하고 준수하게 생긴 놈팽이와 현숙하고 덕성스레 생긴 간녀(奸女)가 많다. 간신은 어디서 사는가? 어디에서나 다 산다. 산골에서도 살고 버덕에서도 살고 도시에서도 살고 농촌에서도 살고… 무릇 사람이 사는곳에서는 다 살고있다. 간신이 제일 많이 사는곳은 어딘가? 권력기구에 제일 많다. 권력이 큰 기구일수록 큰간신이 많다. 국제적으로 내린 홍색통집령 명단을(간신ㅡ부정부패분자) 보면 대번에 알수있다. 촌정부에서도 엄청난 간신을 볼수 있지만 고건 필경 소수다. 간신은 어떻게 사는가? 권력에 딱들어 붙어서 기생하는데, 그 목숨이 길고 짧음은 권력자의 마음에 달려있다. 간신이 되는가 충신이 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정신ㅡ 령혼ㅡ마음ㅡ심보ㅡ량심 즉 의식, 사상에 달렸다. 간신은 롱통하게 말해서 마음이 고약하고 요사하고 악착하다. 두어마디 좀 더 한다면 야심을 품고 교활하고 간특하게 아첨을 잘 하며 량면술을 잘 쓰는것이 간신이다. 그들은 속에는 칼을 품고 얼굴에는 웃음을 바르고 산다. 2천여년, 중국의 력대의 봉건왕조들에서는 간신을 잡아내고 방비하느라고 무진 애를 쓰고 안깐힘을 다 했으나 간신은 여전히 있었고 결국은 멸종을 해본적이 없었다. 신해혁명후, 민국시절에도 그랬고 사회주의사회가 된 지금의 공화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제도장치, 규률장치, 감독장치… 온갖수단과 방법을 다 사용한대도 간신은 계속 생길것이고 그것은 공산주의가 되여 권력이라는 것이 사라진 다음에야 종적이 없어질 것이다. 이건 먼 훗날의 얘기다. 때문에 간신과의 투쟁은 상당히 긴 력사시기 진행형일 수 밖에 없다. 총론부분은 이쯤하고 각론으로 가 보자. 설이 단박 다 된 대밑에 코로난지 트럼픈지 한 횡액이 터졌다! 무한은 역원지로 락인이 찍히고 사람들이 허둥거리는 사이에 전 중국대지에 전염되고 동시에 세계로 퍼져나갔다. 중국만 수라장이 된것이 아니라 세계가 불안에 떨게 되였다. 온갖 뉴스가 코로나 못지않게 기승을 부리는 와중에 나는 한가지 믿음직한 뉴스를 듣게 되였다. 그뉴스는 나를 극도로 격분케 했고 이런 잡글을 쓰게 하였다. 뉴스의 요지는 간단히 다음과 같다. “… 홍콩의 전문가들이 무한으로 급급히 달려와서 이번사태의 원인을 밝히려고 했는데… 그들은 격분하여 말하기를 자기들은 여기서 할일이 없다고, 홍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가치가 있는 인증, 물증을 몽땅 말끔히 인멸해 버렸기에 연구를 진행할수 없다는 것이였다… 처음 발병한 환자들은 어디로 전의해 갔고 온갖 동물을 먹거리로 호황을 누리던 음식점들도 텅텅 비고 문을 닫아버렸든 것이다… 무한의 역정은 이미전에 발생한 것으로 인정된다….” 뉴스에서 나는 몇가지를 추측하게 되였다. 하나는 유관 책임자가 사태의 엄중성을 알아채고 첯시작의 사실을 음만하기 위하여 선손을 썼다는 것과 그에 합심한 자가 한둘이 아니겠다는 것이다. 다음은 야생보호동물을 잡아먹는 영업은 절대로 위법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흥성흥성, 굉장하게, 상당히 긴시간 음식점을 경영하게 되였는가… 여기에도 유관부문의 관리들이 적지않게 련관이 있을것 같다. 그리고 야생동물음식점이 말끔히 청소를 하고 깜쪽같이 사라진데도 상당한 쪼간이 있다고 여겨졌다. 또 생각되는 것은 귀하게 달려 온 전문가들을 실망케 한데는 또 다른 색갈이 없는가… 나는 무한코로나사태가 3푼은 자연재앙이고 7푼은 인재리라고 생각한다. 후에가서 총결이 있겠으니까 그때보면 알수있을 것이다. 무한 코로나사태에 간신들이 아주 악랄하게 작간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몽땅 잡아내서 단두대에 올려야 한다. 당과 정부와 인민은 그렇게 할것이다.                                                                                                                       20.2
149    글을 쓰는 자세 댓글:  조회:1128  추천:0  2020-02-14
      수필                                                 글을 쓰는 자세                                                                                                                         회령 청춘시절부터 문학의 푸른꿈을 안고 유명작가가 되겠다는 거창한 포부까지 품고 일기쓰기와 습작, 소재기록, 독서필기를 하기 시작하여 오늘까지 왔으니 글을 무던히도 썼다. 그간에 쓴 이런글들을 다 모아 쌓는다면, “청년생활”이나 “연변녀성”잡지만한 크기의 공책으로 높히가 두메터는 더 될것이다. 글을 씀에 있어서 나는 처음부터 내가 쓴 이런 모든글들을 다 남에게(독자) 보이기 위한 각도에서 썼다. 하지만 정작 세상에 발표가 되여서 독자님들에게 뵈인 글은 높히가 반메터쯤이나 되겠는지… 나는 유명작가는커녕 신문사통신원 수준도 못된다. 작가라는 명함자는 가졌지만 명작이란건 단 한줄도 못써봤고 우수작은 겨우 스무손가락 안에 든다. 그럼, 두루해서 발표된 작품수는 많은가? 그것도 초라하기가 그지없다. 내가 문학을 한답시고 열심히 글을 썼으나 풍작은 말도 말고 평작도 아닌 흉작을 한데는 두가지 원인이 있다. 한가지는 외인 즉 객관적원인이다. 당에서 나에게 맡겨준 사업은 의료사업이였는데 밤낮 환자를 끌어안고 명절이고 휴식일이고 따로없이 헤매다보니 문학을 쥐고 춤출새가 정말 없었다. 때로는 대채학습공작대로 병원을 떠나 하향을 했는데 여가가 좀 있으려니 했다. 그런데 웬걸?! 그건 더 고달픈 일이였다. 낮에는(어떤때는 달밤에도) 사원들의(농민들) 앞장에 서서 전간로동을 해야하고 밤에는 기본상 매일 사원대회가 아니면 대대(촌)회의, 공사(향)회의에 참가해야 하는데 회의가 일찌기 끝나면 밤 11시, 12시고 혁명열의가 냅다 올리솟아서 회의를 할때면 새벽두세시 혹은 아주 아침때까지 하였다. 문학이 다 뭔가… 하지만 문학에 대한 지향을 버릴수 없어서 “조선문학”이거나 소설책을 조금씩 들여다 보면 전업사상이 틀렸다느니, 개인명리주의라느니 하면서 말썽이 생기기도 하였다. 하다보니, 나는 정년퇴직을 할때까지 별로 문학을 하지 못했다. 다음은 내인 즉 주관적원인이다. 나는 글을 쓸때 꼭 사회적효과를 념두에 두며 글을 쓰는 버릇이 있다. 내가 말하는 사회적효과란 이 글을 보는 독자님에게 다문 한가지라도 리익되는것이, 도움이 되는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사회적효과를 항상 만족되게 완성하지 못했다. 문학작품은 사상성, 예술성, 지식성, 취미성, 오락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기본은 사상성과 예술성일것이다. 사상성과 예술성이 유기적으로 잘 배합이 되여야 좋은작품이 될것이며 따라서 사회적효과가 높을것이다. 그런데, 나는 편면적으로 사상성을 중시하다보니 애매모호하거나 엉뚱한 궤변을 하거나 너접절한 글이거나 무슨말을 하려고 이런글을 썼는가? 무슨목적인가?... 이러루한 질책을 받을수 있는 글은 종래로 쓴적이 없다. 말하자면 사상이 명확하고 주제가 선명했다. 하지만, 예술성은 따라가지 못해서 화려한 옷을 입힐대신 벌거벗은 알몸뚱이가 그대로 드러날때가 많았다. 하다보니 편집선생의 충고를 받기도 했지만 발표된 작품은 얼마되지 못했다. 나는 사상성, 예술성이 미끈한 사회적효과성이 높은 글을 쓰기위하여 많이 노력하려고 한다.                                                                                                                           20.2
148    생진소감 댓글:  조회:955  추천:2  2020-02-04
      수필                                                  생진날에 느낀 소감                                                                                                                      회령 나는 조상님들께옵서 규정하신대로 회갑, 진갑을 쇤후부터는 해마다 생진을 쇠였다. 여러해를 그러다보니 그게 무슨불문률처럼 되여 생진밑이 되여오면 원근에서 친척과 친우들이 전화로 이번생진은 어디서(장소) 몇시에 쇠는가고 물어온다. 물론 덕담을 먼저하고. 나는 재직시에는 생진을 한번도 쇠지 않았다. 모택동주석처럼 하느라고 그런건 아니고 당의 생활규률에 떠벌려 랑비하며 관혼상제를 번지르르하게 차리며 소란을 떨지말라는 신칙이 있었든것이다. 나는 생진도 그속에 속한다고 인정하고 쇠지않았다. 그리고 젊디젊은 녀석들이 생진이요 뭐요하며 부산떠는걸 나는 부모님들 앞에서 버르장머리가 없는 소행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누가 생진을 쇤다며 청하면 가급적 제때에 가서 축하한다고 너스레를 떨며 술잔을 얻어 먹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리 거뿐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이상하다. 옛날에는 로인님들의 생신을 정중하게 크게 온동네가 다 모여 경하를 하였지만 지금은 반대로 로인님들은 집에서 조용히 생신일을 보내고 젊은이들은 2차, 3차. 최고로는 6차까지 거리를 누비며 연회청, 노래방이 깨여져라 부셔져라 질탕 뚜드려 번진다고 한다. 총결은 사우나에 가서 엎어진다고 하는데, 오뉴월에 외를 꺼꾸러 쥐고 먹든 바로쥐고 먹든, 갓쓰고 두루마기 입고 뒤를 보든 앞을 보든 그게 다 인권자유며 내돈갖고 내맘대로 하는데, 누가 감놔라 배놔라 하랴마는, 인간세상에는 고금중외 규례라는 것이 있다. 나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규례를 좀 알았으면 싶다. 언귀정전, 금년에 나는 생진을 쇠지 않았다. 그것은 90대 고령의 장모님께서 소환으로 위중하신데, 내가 생진을 쇤다는 것이 전혀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진날 나는 구역쉼터 걸상에 혼자 앉자서 조용히 명상에 잠기였다. 처음에는 래일모레면 100세인 장모님의 한생을 돌아보았다. 나의 안해가 7남매에서 맏이다보니 나는 이래저래 가시집일에 참녜가 많았고 장인과 장모는 나를 기둥으로 여겼다. 나의 가시집은 향에서 제일 가난한 집이였다. 두분은 광복이 나기 얼마전에 결혼을 해서 개혁개방전까지 엄청 고생을 하며 향에서는 제일 가난한 집으로, 말그대로 거지나 다름없는 살림을 하여왔다. 여북하면 나에게 하여주는 밥쌀을 이웃집에서 꿔다가 하였겠는가?!...... 장인님은 한평생을 고생하시다가 상세날때도 가장 고통스럽다는 이선암으로 세상을 하직하셧지만 장모님은 장인께서 세상을 뜨신후 30여년을 만복을 누리며 오늘까지 오셧다. 그것은 7남매가 하나같이 모두 개혁개방덕에 잘 출세를 해서 옛말을 하게 되였기 때문이다. 기억력이 좋고 말씀을 잘하시는 장모님은 나를 붙들고 지나간 일들을 자주 많이 이야기해 주었다. 오늘 장모님의 이야기를 두루 되새기며 나는 무량한 감개를 금할수 없었다. 명상은 저도 모르게 나에게로 옮겨졌다. 생진날이다보니 자연스레 어머니가 회상되였다. 오늘은 어머니의 고생일이지… 어머니를 생각할때마다 나는 두가지 큰 유감으로 마음이 무척 쓸쓸하고 괴롭다. 어머니는 나를 키우시며 늘 이런 말씀을 하시였다. “너는 후에 큰사람이 되여라.” 나는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실때마다 말뜻은 모르지만 “예!”하고 힘차게 대답하였다. 그것이 재미있었는지 어머니는 자주 그런말씀을 하시였다. 소학교 시절에는 선생님들께서도 그런말씀을 우리들에게 곧잘 하였다. 소학교때 어느날 나는 어머니에게 “큰사람”이란 어떤사람인가고 진지하게 물었다. 어머니는 대답하시기를 큰사람이란 좋은일을 많이 해서 사람들께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선생님들은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내가 선생님들의 말씀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리니 어머니는 그런 큰사람은 싫다면서 하지말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본 벼슬하는 사람이란 해방전에는 백성들과 눈알을 부릅뜨고 호통질하는 사람들이 였고 지금은 마을에 펀뜩 나타나서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향에서 온 하향간부 였다. 두메산골에서 태여나고 자라고 시집을 가고 농사일만 한 어머니의 견문이란 이정도 뿐이였다. 어머니는 벼슬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뒤통수에 욕사발이나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고 그렇게 사는것은 죽기보다 못한것이 라고 하시였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깊히 명심하며 앞으로 꼭 어머니가 당부한, 바라는 그런 큰사람이 되리라 다짐하였다. 그러나 나는 다짐을 실현하지 못했다. 상급으로부터는 항상 우경보수사상이 엄중하다고 비판을 받았고, 때로는 마음에는 달통이 되지않지만 군중들을 강박해서는 뒤통수에 욕사발을 달기도 했다. 돌아보면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만한 좋은일을 한것은 별로없고 아쉬움만 남기며 평생이 지나갔다. 왜서 당년에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일하지 못했든가… 이것이 하나의 큰 유감으로 어머니에게 죄송하며 나로서는 영원한 한이다. 두번째 유감은 나는 이후 크면 어머니 아버지에게 끔찍히 효성하겠다고 어릴때부터 늘 생각하였다. 그때는 아이들에게 례모교육, 도덕교육, 효도교육과 계발이 생활화가 되여있었다. 밥먹을 때도, 어른들 앞을 지나갈때도 왜서 어찌어찌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에게 효도할 기회를 전혀 갖지못했다. “자욕양이 친부대”(자식이 모시려 하니 부모님이 기다려 주지 못하누나.)라는 말이 어쩌면 나에게 딱 맞띄우는가?! 내가 공작에 금방 참가하고 금방 결혼하고 첯애기를 보게된 일주일전에 어머니는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셧던 것이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얼마나 한탄하였는지 모른다… 내가 어머니에게 드린 효도는 겨우 한가지 뿐이다. 그것은 까마귀의 반포지은을 본받아 첯월급을 받은날 단위에서 호조금을 꿔 백원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부쳐보낸 것이다. 무심한 세월은 많이도 흘러갔다. 지나간 인생을 돌아보니 보람보다 아쉬움과 후회가 더 많다. 제일 큰 아쉬움과 후회는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일하며 생활하지 못한것이다.                                                                                                                                                                             19.11.
147    애국주의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1738  추천:0  2020-01-03
        수필                                          애국주의에 대한 생각                                                           ㅡ건국 70주년에 즈음하여                                                                                                                        회령 애국주의는 세계 어느나라 국민들에게나 다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량심적이고 가장 도덕적이고 가장 의무적인 정신적, 사상적, 정치적, 감정적, 행위적, 리론적, 실천적 주의의 하나다. 복잡한 가장 가장, 무슨적, 무슨적 하는 식을 피우는 말들을 걷어치우고 단마디 명창으로 간단히 말한다면 애국주의란 조국과 인민에 대한 충성과 사랑, 헌신과 복무를 말한다. 그것은 위대한 정신이며 심후한 감정이며 빛나는 사상이며 고상하고 보귀한 행동이다. 국가는 매개 국민들의 삶의 보금자리다. 너무도 상식적인 말이긴 하지만 보금자리가 없으면 사람은 살수없다. 보금자리는 생명과 같다. 아니,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 하여 “한줌의 흙이 목숨보다 더 귀중한줄 나는 알았네!”라는 노래말까지 있게 되였다. 사람들은 자기의 귀중한 보금자리인 집ㅡ마을ㅡ고향ㅡ조국과 가족 ㅡ이웃 ㅡ민족 ㅡ인민을 사랑하며 가꾸며 지킨다. 나라의 흥망성쇠, 생사존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을 수행하는 원동력은 곧 애국주의다. 나라를 번영창성하게 만드는 관건적인 요소에는 물론 여러가지가 있지만 핵심은  애국주의라고 할수 있다. 애국주의는 강력한 힘이다. 국민의 애국주의 정도가 나라의 전도를 결정한다. 우리는 그 생동한 실증을 수없이 많이 알고 있다. 기세충천하던 “항미원조 보가위국” 조선전쟁 당시 1952년 10월 더 없이 가렬처절하던 상감령전투에서 특급전투영웅 화계광은 두번이나 중상을 당한 몸이였지만 자기의 피끓는 가슴으로 호랑이처럼 덮쳐들어 적의 또치까 화구를 막고 돌진의 길을 열었는데, 그때 22살짜리 농촌청년 황계광의 머리속에는 무슨 생각이 있었겠는가? 그는 특급전투영웅이 한번 되여보겠다는 생각이거나 모범당원이 되여 붉은꽃을 가슴에 달고 큼직한 상장을 받아보겠다는 생각같은건 털끝만치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이 전혀 그런 한가한 궁리를 해볼 계제가 없었든 것이다. 그럼 무슨 생각이 황계광으로 하여금 가슴으로 적의 또치카 화구를 막게 했는가?! 두말할것 없이 그것은 애국주의 정신과 사상의 자연적, 본능적 폭발이였든 것이다!... 한가지 실례를 더 보자. 역시 조선전쟁때다. 미군을 위수로 한 련합군이 인천상륙을 거쳐 압록강변까지 쳐 들어 왔을 때다. 놈들을 섬멸하기 위하여 지원군은 대포위작전을 진행하였다. 지원군의 정면타격을 받은 미군륙전사와 보병7사단은 전선이 붕괴되자 대량의 탕크와 대포의 엄호하에 포위를 뚫자고 발악하였다. 놈들이 도망치려면 반드시 한갈래뿐인 사응령 밑에 있는 신작로를 통과해야 하였다. 지원군 모 부 3련은 명령을 받고 사응령으로 달려 갔는데, 도착해 보니 그곳에는 이미 지원군 한개 련이 지키고 있었다. 3련이 전투임무를 교대받자고 보니 이런 기막힌 일이 있을수 있는가?! 그들은 몽땅 얼어 죽었든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전투태세였는데, 구식보총의 총구는 일제히 령아래 신작로를 겨누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3련의 전사들은 모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들옆에 엎드려 전투준비를 하였다. 세계전쟁사에서 극히 드문 비장한 이 정경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 또 하나의 실증을 더 본다면, 흑룡강 대경들판에서 지난세기 1960년 4월 석유대회전을 할때다. 때는 령하30여도의 혹한겨울이였다. 그날, 1205시추대 대장인 왕진희는 몹시 상한 다리임에도 불구하고 시추장에서 얼음물탕속에 뛰여들어 세멘물을 교반기처럼 휘저었다. 당시는 황계광때처럼 분초를 다투는 화급한 상황이였다. 그것은 두번째 시추가 700메터까지 들어갔을때 강력한 분출이 발생했든 것이다. 시추작업을 제때에 완성하기 위하여 왕진희와 그의 대원들은 혹한을 헤아리지 않고 악전고투를 하여 분출을 막았다. 후에 어느좌담회에서 왕진희는 요지 이런발언을 한바가 있다. “후에 로동모범이 되여 철인 왕진희라고 들썽 소문을 내며 모주석을 만나뵙겠다는 그런생각을 하지못했다. 그저 빨리 구멍을 막고 나라의 석유대회전이 승리해야 한다는 다급한 생각뿐이였다… 20년을 적게 살더라도 나라가 허리를 펴게 하여야 한다는 생각뿐이 였다…” 석유대회전은 쑈련수정주의의 압력을 맞받아 치는 애국적전쟁이였다. 왕진희의 말을 들어보면 그때 그의 머리속의 산사상은 확실히 애국주의 하나뿐이 였다. 하나 더 본다면, 세계급 1류 과학가들인 리사광, 화라경, 전학삼 등이 훌륭한 사업환경과 매우 우월한 생활조건을 단호이 버리고, 지어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한것은 역시 애국주의 그 자체였다. 공화국 창건이래 우리당에서는 애국주의 교육을 국민들에게 줄곧 꾸준히 하여왔다. 공화국과 함께 자라 온 우리70대세대들만 보아도 잘 알수 있는데, 코흘리개들이 소학교문에 들어서서부터 피끓는 청춘으로 대학문을 나설때까지 당에서는 우리들에게 “3호학생”(지덕체), “사회주의 건설사업의 후계자로, 인재로 성장되여야 한다.”고 가르켜 주었다. 당의 교시대로 노력분투하는것이 그때는 우리들의 유일의 임무였고 목표였고 그것이 곧바로 애국주의 였다. 당의 부름에 따라 사업에 종사하여서부터는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마지막 한방울의 피까지 다 바쳐 노력분투하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자!”는 당의 교시가 우리들의 종지였다. 그것은 우리들의 초심이였고 사명이 였다. 그것은 또한 바로 우리들의 애국주의 였다. 이렇게 우리들은 당의 교양하에 애국주의자로 성장하였다!... 공화국의 70년 세월에 수천수만의 애국적 영웅인물들이 방방곳곳, 각행각업에서 용솟음쳐 나왔고 지혜롭고 근로한 수억만 인민들은 보금자리 건설에 줄기차게 열심히 피땀을 아낌없이 이바지 하였다. 이렇게 우리들은 당을 따라 초심을 잃지않고 사명을 명기하며 애국주의 기치를 높히 들고 오늘 여기까지 왔다… 세인들이 찬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지만, 주지하다싶히 70년세월에 중화대지는 천지개벽의 발전을 가져왔다! 일떠선데로부터 부유함을 이루었고 지금은 강성대국으로 달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만족하지 않는다. 중화의 꿈, 민족부흥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애국주의 기치를 더욱 높히 들고 노력분투하며 힘차게 전진할 것이다… 70대의 우리들은 이젠 석양의 붉은노을로 서쪽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우리들이 붉은노을로 찬란한 빛을 뿌리며 불타는 것은 가슴에 초심을 품고 사명을 명기하고 있기 때문이며 있는 힘껏 여력을 나라와 사회의 유익한 일에 공헌하기 때문이다. 70고래희라는 옛말이 있긴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습근평새시대는 60이 청춘이고 100세 시대다. 70대부터 어떤사람들은 “성 쌓고 남은돌이요… 이제 무슨일을 하겠소…” 하며 저절로 맥을 버리는데, 이러면 나라에 미안하고 사회에 미안하며 자신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70대의 우리들은 로익장의 우세를 발휘할 수 있으며 발휘 하여야 한다!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 우리들은 등산도 하고 문구도 치고 광장무도 추고 낚시도 하며 독서도 하고 로년대학에도 다니고 기타 다양한 취미생활을 하며 주민구 위생, 안전, 치안순라도 하며 불우이웃을 돕기도 하고 자녀들의 뒷바라지도 해주고… 가정과 나라와 사회에 부담을 적게 줄뿐만 아니라 나름껏 여러가지 공익사업에 공헌도 할수 있다… 하지만, 우리모두가 꼭 해야 할 일이 한가지가 있다. 그것은 후대들에게 애국주의정신, 사상을 전수하는 실제적 행동이다. 가정에서, 주변에서, 사회에서 력사와 전통을 말하며 애국주의 정신과 사상을 선전하며 제창하며 고양해야 한다. 후대는 나라와 인민들의 희망이며 미래다. 현실을 실사구시적으로 관찰할때 우리는 일부 사람들의 애국주의정신, 사상이 모호하거나 희박하거나 없어졌다는 것을 승인하지 않을수 없다. 개인리기주의와 배금주의사상이 극도로 팽창된 결과 국가의 돈, 인민의 돈을 훔쳐가지고 외국으로 도망친 반역자, 도둑놈, 망나니들인 부정부패분자들은 말할것도 없지만, 어디가 나에게 좋으면 어디가 곧 나의 보금자리라고, 누가 젖을 주면 누가 곧 엄마라고 생각하며 지어는 우겨대는 배은망덕한, 얼떨떨한 사람들이 일정하게 있다. 이런 현상을 중시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들은 애국주의정신과 사상을 선전 교양하는 당의사업에 능히 일조할수 있는 일정한 능력이 있기에 적극 행동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들의 보람찬 일이며, 의무이며, 여생의 가장 자랑스러운 공헌이다. 이면에서 우리들에게는 좋은 본보기가 많다. 연변 왕청에 있는 “시대의 본보기”, “전국차세대선진공작자”, “길림성제5기도덕모범”, “길림성좋은사람2015년도인물”등 영예의 칭호를 받은 김춘섭이 바로 그중의 하나다. 김춘섭은 2005년 정년퇴직한후 왕청현차세대관심위원회 주임을 하면서 신근하게, 참답게 사업을 잘 하였다. 그는 10여년내에 1300여만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77좌의 혁명선렬기념비를 세웠고 “왕청항일전쟁기념관”, “소왕청유격근거지”등 여러곳의 홍색교육기지건립에도 적극적인 협조를 하였다. 김춘섭은 말하기를 “후대들이 력사를 더 많이 알게 하기 위하여 일하는 것은 피로하긴해도 기쁘다… 지금 내나이는 적지않다. 긴박감이 든다. 살아 있을때 더 많은 일을 하고저 한다.”고 하였다. 평범하고도 간단한 그의 말은 우리들에게 주는 계발이 크다. 그가 하려는 더 많은 일이란 두말할것 없이 곧 애국주의를 전수하는 것이다.  김춘섭은 우리들의 모범이며 자랑이다. 우리는 그를 힘껏 따라배워야 한다. 우리들이 항상 초심을 되새기며 수시로 사명을 명기하며 애국주의 고양사업에 능력껏 꾸준한 실천을 한다면 석양은 더욱 아름답게 길이 길이, 붉게 붉게 타 오를 것이다!...                                                                                                                             19.3
146    로년의 자세(6) 댓글:  조회:1700  추천:0  2019-12-30
                                           로년의 자세 (6 )                                                                                                                 회령  건강관리 지금 가장 많이 류행되고 또 실제로 중시를 받으며 실천되고 있는 말인즉 바로 건강관리라는 것이다. 개혁개방전에는 건강관리라는 말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야말로 말그대로 남녀로소가 다 건강관리라는 말을 보통말로 쓰고 있다. “엄마! 아빠!” 하며 두어마디 말을 외우는 아기도 “할무니 건강관리 잘 해!” 하며 세배를 한다. 물론 애기는 제 엄마 아빠가 시키는 대로 앵무새를 했겠지만, 보다싶히 건강관리라는 말은 널리 보급이 되였다. 그리고 점점 더 크게 실천되고 있다. 그원인은 생활이 제고된데 있다. 건강관리 모습을 가장 감동적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은 두곳에 있다. 하나는 광장무판이고 다른 하나는 등산길에서이다. 건강관리에 나선 사람이 굉장히 많다. 가히 인산인해라고 할수도 있다. 그런데 이 두곳의 특점을 본다면 절대 다수가 로년층이라는 것이다. 북적거리는 수영장도 건강관리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거기에는 아이들이 많다. 지금 로인들이 건강관리에 열중하는데는 데체로 두가지 리유가 있는것 같다.. 첯번째 리유는 건강장수하려는 것이다. 로인들은 지나간 세월은 고생하며 헛살았다고 한탄하며 지금의 좋은 세상에서 오래 살고싶어 한다. 이것이 가장 많은 직접적인 리유겠다. 다음 두번째 리유는 곁에사람과 자녀들에게 시끄러움과 부담을 될수록이면 적게 줘야겠다는 데서이다. 보건양생 즉 건강관리에는 동서고금 수천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가 쉽게 보는 먹는 방법을 보면 생것을 먹는것 푹 익혀서 먹는것 말려서 먹는것 물, 식초, 술, 지어는 뜨물, 오줌에 한동안 불궈서 그 물이며 건더기를 먹는다는둥 건더기도 그저 쫍쫍 우등우등 먹는게 아니라 노랗게 구워 먹는다는둥 까맣게 태워 가루내여 꿀에 반죽하여 먹는다는둥 밥가마에 넣어 쪄서 먹는다는둥 까마귀고기와 함께 어떠어떠하게 료리를 해서 먹는다는둥… 수십가지다. 운동류도 살펴보면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죽어라 배를 뚜드리는가 하면 엉덩짝을 쇠궁둥이보다도 더 호되게 뚜드려 대고 전신을 사정없이 족치는데 그건 12경락을 열어주는 운동이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그런가 하면 잰내비처럼 반나절을 철봉대에 거꾸러 매달려 있고 말승냥이처럼 선자리에서 푸들쩍 푸들쩍 뛰며 왱ㅡ 왱ㅡ 있는힘껏 소리를 지른다. 땅바닥에서 뒹구는 사람, 자갈돌밭에서 깡충깡충 뛰다가는 힌들 나자빠 지는 사람… 벼라별 신기한 동작들이 다 있다. 어느것이 과학적이고 어느것이 비과학적인지, 어느것이 어떤사람에게 좋고 어떤사람에게는 불리한지 아직까지는 권위적인 참고서가 나오지 않았다. 관건은 실천해 보면서 자기몸에 적절하고 느낌이 좋으면 그것이 곧 나에게는 알맞는 것이며 좋은것이다. 방법을 선택한 후에는 견지하는것이 건강관리에서는 결정적 작용을 한다. 건강관리는 방법에서는 수천가지지만 실천상에서는 일찌기 그리고 습관화가 된 견지다 로년기에 와서야 비로서 건강관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한다는 것은 일찌기 하기보다는 아쉬운건 사실이지만 좋은 일이다.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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