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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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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길의 유래
2022년 04월 16일 12시 30분  조회:269  추천:0  작성자: 회령
            수필
                                                비단길의 유래
                                                                                                     회령
 
비단의 길을 근래에 건설한줄로 아는 사람이 꽤 많다. 말그대로 고소불득ㅡ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비단의 길로 중국사람이 다니기 시작한것이 이젠 2200년세월이 거이된다. 비단의 길은 한갈래의 장사군 길로 한나라때부터 정식으로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안으로 부터 천산산맥을 넘어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지금은 많이 뻗어 나갔다. 그러나 비단의 길이라고 하면 대체로 처음의 그 길을 말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도 그 유래만 말하고저 한다.
 
비단의 길은 누가 개척했으며 어떻게 개척된 것인가?
 
한무제 초년, 흉노는 여러번 한나라를 침범했다. 한무제는 흉노의 내막을 잘 알기위하여 투항했거나 포로로 잡힌 흉노사람들을 자주 불러서 담화를 하였다. 이러는중 우연히, 흉노의 왕 모돈이 월씨국을 정복했을때 악독하게도 월씨국왕의 머리를 자르고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어 술을 부어 먹었다는 것을, 월씨국사람들은 그 원한을 잊지않고 항상 복수하려고 하는데, 그러나 힘이 약하다보니 서쪽으로 도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한무제는 너무 좋아서 입을 쩍 벌이고 하하하 연신 웃어댔다. “참! 잘됐구나! 이전에 흉노아새끼들이 때리면 달아나고 때리면 달아나서 멸종할수가 없었는데 월씨국과 련합하여  동, 서가 협공한다면 제놈들이 어디로 뛰겠는가…” 대신들과 상론하고 방침을 결정한후 한무제는 외교사절단을 파견키로 하였다. 그러나, 한없이 멀고 먼 길인데다가 망망무제한 사막을 건너야 하고 더욱히는 중간에 있는 흉노를 거쳐야 하니… 어느대신도 사절단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한무제는 대노하여 “당당한 대한제국에서 그래 서역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없겠는가!” 하고 고함을 질렀다. 한무제는 총명하고 능력있고 담량과 책임심과 의력이 비상히 강한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전국에 고시를 내였다.
 
고시는 나래가 돋친듯 전국 방방곳곳에 퍼졌다.
 
한나라 어느산골에 장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총명할뿐만 아니라 용감하고도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늘 칭찬하였다. 이 장건은 고시를 보고 생각하기를 “월씨국에 사자로 가는것은 련합하여 흉노를 때려부수자는 것이겠는데 이는 리국, 리민, 나라안전대사이다. 내가 고생을 하더라도 이 광영한 임무를 완수해야 겠다!” 장건은 지체없이 자원을 하였다. 그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원하였다. 한무제는 매우 기꺼워 하면서 친히 100여명을 선발하였다. 거기에는 두말할것도 없이 장건이 뽑혔는데 장건은 한중 성고(지금의 섬서 성고현) 사람이다. 그리고 흉노인 감부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감부는 원래는 흉노국에서 노예로 살던 사람이다. 그는 활을 특별히 잘 쏘았다.
 
기원전138년! 즉 한무제 건원3년 장건은 사자 중임을 맡고 100여명 대오를 인솔하여 월씨국으로 향발하였다.
 
얼마후 장건일행이 흉노들의 활동지대에 진입했는데 아니나 다르랴 그들은 흉노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훙노왕은 장건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장건이 월씨국으로 장사를 간다고 하니 흉노왕은 별 다른 생각은 없이 그들을 그저 인질로 잡아두었다. 그때는 흉노와 한나라가 표면상에서는 관계가 괜찮을 때다. 흉노왕은 장건에게 흉노인 안해까지 얻어주고 그들일행을 우현왕에게로 가서 방목을 하게 하였다.
 
어느날, 장건은 감부 등과 의논하고 말과 락타를 훔쳐가지고 서쪽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일망무제한 대사막에 이른 그들은 물과 식량이 다 떨어지고 기진맥진해서 쓰러졌다. 그들은 기다싶히 하며 끝내 물도있고 풀도 있는 곳에 닿았다. 거기서 감부는 새와 쥐, 토끼 등 짐승을 사냥하였다. 그들은 그것을 생것채로 먹으며 계속 완강히 전진하였다.
 
장건일행은 총령을 넘어 대원국에 도착했다. 이곳은 풍경이 아름다웠고 사람들은 코가 크고 털보인데다가 눈알이 파랬다. 그리고 아주 열정적이 였다. 그 대원국 왕은 장건네가 한나라에서 왔다고 하니 무척 부러워 하면서 “듣건대 한나라는 아름답고도 대단히 크고 사람도 많다고 하더라. 그렇지?” 하고 열정적으로 물으며 연회를 차려 극진히 귀빈대접을 하여주었다. 연회에서 장건은 “우리가 한나라 황제의 명령을 받고 월씨국으로 가던도중 흉노에게 인질로 잡혀 시간이 많이 지체되였다. 대왕께서 우리를 월씨국으로 가게 도와준다면 한나라황제는 꼭 크게 감사를 드릴것이다.”하고 말했다. 이에 대원국왕은 “여기서 월씨국까지 가려면 중간에 강거국을 거쳐야 한다. 내가 기병과 통역을 파견하여 도와주겠으니 걱정말아라.”하고 통쾌히 대답하는 것이였다.
 
강거국에서도 아주 열정적으로 장건일행을 월씨국까지 호송해 주었다.
 
월씨국은 흉노에게 대패하여 총령을 넘어 서쪽으로 도망한후 대하국과 련합하여 대월씨국을 건립하였다. 그후 그들은 근심걱정이 없이 농업과 목축업을 하면서 대단히 유족한 생활을 하여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월씨국 사람들은 복수를 이미 망각하였다. 장건이 아무리 설득해도 왕은 이피탈 저구실 하면서 련합을 동의하지 않았다. 이렇게 1년여 시간을 끌었지만 련합작전은 성사되지 못했다. 장건은 더는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몹시 실망하고 귀국하기로 결정하였다.
 
귀국의 길에서 그들은 또 흉노에게 잡히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흉노가 내부반란으로 왕이 죽고하여 장건과 감부는 도망칠수 있었다. 그들 둘은 끝내 한나라 도읍인 장안(서안)으로 돌아왔다. 100여명에서 장건과 감부만 살아왔던것이다… 13년만에 살아서 돌아온 장건과 감부를 만난 한나라 황제 한무제의 기쁨과 감개는 한입으로 다 말할수 없었다. 장건이 비록 사명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한무제는 크게 중상을 내렸다.
 
장건은 이번 서행을 한무제에게 상세히 회보하였다. 한무제는 대뜸 안계를 크게 넓히게 되였다. 한무제는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서방의 그 여러나라들을 자기에게 복종토록 하고 싶었다. 한무제는 다시 장건을 파견하였다. 이번에는 사천으로부터 출발했는데 길이 통하지 않은데다가 소수민족과 언어가 통하지 못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흉노가 또 쳐들어 왔다. 한무제는 장건을 대장 곽거병을 도와 흉노를 대적하게 하였다. 그들은 흉노의 기병 3만여명을 소멸하고 대승리를 걷우었다. 그리고 서하지구(지금의 하서주랑)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번전쟁에서 장건은 자기마음대로 하여 작전시간을 어긴데서 철직되고 백성으로 되였다. 한나라는 부단히 흉노를 타격하여 서역으로 가는 길의 장애를  완전히 제거하였다. 한무제는 다시 장건을 기용하였다. 장건은 한무제에게 오손국(지금의 신강 이리하류역)과 련합하여 흉노를 소멸하자고 건의하였다. 한무제는 장건의 건의를 채납하여 장건이 300여명 외교사절단을 인솔하고 오손국에 가도록 하였다. 이번에는 흉노의 교란이 없어서 장건은 순리롭게 오손국에 도착했다. 거기서 장건은 또 부하들을 대원, 강거, 대하 등 국에 파견하여 련합을 권고케 하였다.
 
오손국왕은 한나라사절단이 많은 황금주보뢰물을 가져온데다가 공주까지 자기에게 주니 무척 기뻐하였다. 그러나 떡 벌어진 입은 입이고 마음은 심중했다. 하여 사람을 파견하여 직접 한나라의 실정을 알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오손국사신은 장건을 따라 한나라도읍인 장안으로 왔다.(서방에서 처음으로 온 외교사절이다.) 한무제는 열정적으로 사신을 초대하면서 한나라의 강대한 군사와 번영한 경제를 마음껏 보게 하였다. 사신의 회보를 들은 오손왕은 비로서 한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승인했다. 얼마되지않아서 서역의 기타나라들에서도 한나라와 우호관계를 건립하였다. 지나친 로고로 지금말로 하면 국가공훈장도 수여받을만한 장건은 1년후에 애석하게도 병으로 죽었다.
 
그러나 장건, 감부 등이 개척한 비단길은 한조와 서아, 구라파의 경제, 문화교류에 거대한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중국에 없던 포도, 당근, 호도,, 석류 등 맛좋은 물건들이 서역으로부터 들어왔고 중국의 비단, 철제품, 도자기, 생산경험 등이 서역으로 전파되였다. 또 이때로부터 서역의 여러민족들과 한족이 한집안처럼 서로 돕고 서로 교류하면서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였고 점차 중화민족으로 융합되게 되였다.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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