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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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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엷어가는 인정
2020년 06월 23일 14시 38분  조회:1896  추천:0  작성자: 회령
       수필
                    엷어가는 인정
                                               ㅡ누구의 과냐?
 
                                                                                                                                    회령
 
 
사촌동생의 전화를 받고 니는 착잡한 심정을 어쩔 수 없었다. 벌써 네번째로 한국벌이를 나간 동생은 전화에서 울먹이며 이런 말을 하였다.
 
“… 형니메! 내 한가지 부탁을 하기오. 수고스럽지만 거, 우리 아덜께 형니미 둬마디 말씀을 좀 해주오.”
 
“무슨 말을?”
 
“이 애비께 드문드문 좀 전화를 하라고…”
 
동생에게는 아들 하나 그리고 그 아래로 딸 둘이 있다. 아들과 큰딸은 이미전에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고 젖먹이 막내딸은 북경에서 한국회사를 다니는데 서른살이 훌쩍 넘었지만 미혼이다.
 
동생은 평생 농민이지만 모진일은 별로 하지 않고 살았다. 집체화 시절에는 생산대회계에 대대(촌)신용사출납을 겸하여하다보니 가방에 장부책이며 수판(주판)을 넣어메고는 이마을 저마을을 돌아다니며 일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때는 아버지 어머니가 정정하다보니 동생은 자류지밭 한고랑 김을 매는 법도 없었고 땔나무 한단 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산골농촌치고는 손발에 흙을 뭍히지 않고도 상등공수(보수)를 받는 출세를 한 총각이여서 반반한 처녀에게 장가를 갔다. 그리고 줄줄히 삼남매를 낳아 키웠다.
 
동생이 고생을 하기는 개혁개방이 시작된 후 부터다. 아버지 어머니는 이젠 밭을 다루기가 힘들어서 수, 한전은 모두 세를 주고 터밭이나 다루면서도 여기저기가 늘 편치않아했다. 땔나무도 하기 힘들어 마을 주변에서 쑥이며 잡초를 긁어다 불소시개를 하며 비싼 석탄을 사다 때였다. 해마다 화목철이 되면 남들은 다 산에가서 십여수레씩(일년 치) 화목을 해다가 때였지만 동생은 나무를 바로 할줄도 모르거니와 할념도 없었고 하기도 싫어했다. 아래로 녀동생이 넷이였는데 다 외지 농촌으로 시집을 가서 일잘하는 매부가 넷이나 되였으나 그들을 불러다 화목을 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도 삼촌내외분은 아들에게 잔소리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삼촌내외는 성질이 특이했다. 아이때부터 애들에게 한마디도 무엇을 가르키거나 욕을 하거나 잔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고 심부름이거나 일같은걸 시키는 법이 없었다. 특히 동생에게는 더욱 각별했다. 늘 딴밥을 해 먹이고 닭알이며 말린 세치네(잔 물고기)로 반찬을 해 주며 온냐온냐 많이 묵어라 많이 묵어라 했다. 그것은 아이애비가 되여서도 그랬다.
 
농촌이 개체화로 되자 그는 출세한 벼슬들이 다 없어지고 백수건달이 되고 말았다. 동생은 녀편네를 한국에 가짜시집을 보낸 홀애비들과 함께 부커나 장기를 놀면서 개추렴도 하였다. 삼복철에는 산천당 당나무 밑에서 매미노래를 듣다가는 쉬원히 낮잠을 늘어지게 잤다.
 
그러나 상팔자는 얼마 가지 못했다. 삼남매가 무럭무럭 자라면서 아들애는 초중에 들어갔는데 공부는 수수했다. 하지만 고중까지는 글을 읽혀야 겠는데 고중은 시가지에 밖에 없으니 그 시발(뒷시중)이 간단한것이 아니였다. 아버지 어머니와 안해가 돼지를 기르고 닭마리나 치는 것을 가지고는 어방도 없는 일이였다. 동생네는 다른사람들을 본받아 안해가 한국벌이를 가기로 결정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가짜결혼방법은 쓰지 않고 신용사 대콴(대출)을 맡고 이곳 저곳에서 고 리자돈을 꾸어 순리롭게 한국으로 나갔다. 안해가 떠나던 전날 집에서는 닭을 한마리 잡아 송별연을 하였는데 그때 분위기는 그야말로 일희일비였다고 동생은 나에게 말하였다. 아버지가 나가서 몸조심하며 바쁘면 곧 돌아오라고 말하니 안해는 울면서 대답을 하였는데, 그말은 생각하면 지금도 불쾌하다고하였다. 그날 안해는 말하기를 “아부지 어마니는 해마다 기력이 못해가고 아이들 시발은 점점 더 커가는데, 죽던 살던 내가 총목을 메지 않으면 이 집에서 누기(누가) 할 사람이 있슴까?!” 하더라는 것이였다. 그때, 나는 틀리는 말이 아니구만! 하고 동생에게 한방 쏴주려다가 참았다.
 
안해는 한국에 나간후 음식점이며 려관집에서 일하며 두달에 한번씩 꼭꼭 돈을 보내왔다. 그러기를 한 이티를 해서 빚을 다 갚고 아이들의 고중시발까지 들어 주었다. 그런데 빚을 다 갚은후에는 아이들의 학비만 보내면서 벌이가 신통치 않고 몸이 불편하다고 하였다. 아들과 큰딸은 고중에 가서 련애에 빠져 공부를 망치고 말았다. 막내딸은 공부를 잘 해서 북경 어느 대학에 붙었다. 안해는 아프다면서도 계속 일을 하였는데 집에 보내오는 돈은 점점 줄어들더니 얼마후에는 아예 끊어버렸다. 막내딸애한테는 자기가 직접 돈을 보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한국에서 남편을 얻었으니 리혼수속은 동생이 언제 하고프면 언제하라고, 필요재료는 보내라고 할 때 즉각 보내주겠다는 것이였다.
 
호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동생은 사태가 이렇게 되니 황연대각 깨도가 되였다. 생각해 보니 겨우 초중까지 다닌 농촌농민이 50여 평생을 아이때부터 노라리를 치며 오늘까지 살아 왔으니, 행복한건가 한심한건가… 부모까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시집, 장가까지는 책임을 져야겠는데… 그는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때로부터 동생은 한국벌이에 나섰다. 동생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집에서는 닭을 잡고 환송식을 하였으나 그것은 눈물의 리별식이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찌 고생을 하겠냐며 근심이 태산이였고 바쁘면 인차 돌아오라고 거듭거듭 당부를 하였다.
 
동생은 한국에 나가서 결사적으로 돈벌이를 하였다. 그는 층집건축회사에서 실내전기배설일을 하였는데 한국기술자(반장) 밑에서 온갖 천대와 욕사발을 먹어가며 말그대로 어지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며 억울한 월급을 받았다. 아파트는 층층이 되는족족 전기가설이 따라가는데 반장은 도급을 맡았기에 새벽부터 밤중까지 줄기차게 일을 들이댔다. 동생은 현기증이 나서 사다리에서 떨어지기도 여러번을 했고(다행이 뼉따구가 끊어진적은 없었다.) 코피가 터지는 것은 편지에 문안이였다. 이렇게 반년남짓 구불고(뒹굴고)나니 동생도 일에 완전히 자신이 있었다. 말그대로 수영은 수영중에서 배우는 거지만 동생은 전쟁중에서 전쟁을 배운셈이다. 이제부터는 동생도 도급을 맡았는데 흑룡강서 간 동포를 조수로 썼다. 이러기를 2년7개월을 하니 돈을 꽤 벌었다. 그간 세놈의 악덕업주들 한테 4만여원의 협잡을 당했지만 수중에는 30여만원이 있었다. 아들의 잔치때문에 동생은 돌아왔는데, 잔치를 멋드러지게 잘 하여 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내며 치새(호평)를 받았다. 리혼을 한 안해는 어데가서 붙었는지 아들잔치 기별을 할 수 없었다.(아들은 엄마가 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안대도 제무안에 오지 않았을 거지만.)
 
그해 설과 보름을 다 쇤후 4월초에 동생은 또 한국벌이를 나갔다. 2년남짓 지나서 이번에는 큰딸애가 잔치를 하게 되여 동생은 집으로 왔는데, 딸의 잔치도 잘 하였다. 그리고는 인차 한국으로 떠났다. 세번째다. 이번에는 련 6년을 일하고 심장이 좋지 않아 돌아 왔는데, 그간 아버지 어머니는 아들을 그리다가 선후로 하늘로 갔다. 부모일에 대해서는 아들과 큰딸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한국에 갔기에 동생은 아버지, 어머니가 사망해도 오지 않았다. 대신 동생은 아들과 딸에게 각각 그간  15만원을 보내줬다. 삼촌과 삼촌댁의 후사처리는 내가 주도해서 했는데, 동생과 조카들이 골회함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대로 날려 보냈다. 삼년제도 한꺼번에 에때버리고(대체하다) 유상은 불살라 버렸다. 고인들의 딸들도 련락을 할 수없다보니 두번 다 오지 않았다.
 
장례후 나는 식당으로 가지않고 안해와 애들을 다 데리고 곧장 돌아오고 말았다. 그날, 나의 심정은 참으로 비감하고 격분했다…
 
그후, 그러니까 삼촌댁이 삼촌을 따라간후 얼마 안되여 동생은 심장병으로 돌아왔는데 거이 일년을 휴식하며 치료를 하였다. 병이 완쾌하자 동생은 또 한국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기일을 할 수가 없었다. 70을 바라보는 사람이다보니 어데서도 위법이라며 고용하려고 하지 않았든 것이다. 어쩌다가 이번에 온 전화에서 동생은 수원근처의 작은 양로원에서 호리일을 한다고 하였다. 일당으로 인당 한화만원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임무는 24시간 자립못하는 늙은이 여섯분을 돌보며 병실의 청소까지 말끔하게 해야 하며 구석에서 잔다고 하였다. 일을 참답게 하건만, 조금만 자리를 비워도, 수간호사는 따지며 훈계를 한다고 하였다…
 
동생은 매일 죄로운(가련한) 로인네들을 돌보며 자기의 앞날에 대하여 생각이 많으며 서글프다고 하였다. 웬일인지 자식들의 전화가 자꾸 기다려 지고 그립기도 하지만 모색한(매정한) 아이들은 돈을 달라는 전화외에는, 보낼만한 돈이 별로 없다고 한 후에는  한마디 문안전화도 없다고, 없은지 이젠 오래다고 하였다. 동생은 아이들을 쉽게 키웠다. 그것은 아버지 어머니가 아이들을 어루만지며 끔찍히도 안아키웠기 때문이다. 동생내외는 낳기만 하고 키우는 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동생은 울먹이며 나에게 아이들의(이젠 아이가 아니지…) 전화호를 말해 주었다. 하지만, 조카들과 내가 뭐라고 하면 좋겠는지… 나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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