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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선생님의 초상(3) 댓글:  조회:2219  추천:3  2012-12-07
선생님의 초상(3) 윤순임선생님 초중을 졸업하면서 우리들은 처음으로 인생행로 선택이라는 과제에 부딪쳤다. 우리들의 앞에는 두갈래의 길이 뻗어 있었다. 당과 국가와 인민의 수요에(배치에) 무조건 복종한다는 전제하에 고중으로 가겠는가? 아니면 중등전업학교로 가겠는가? 두갈래길중에서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주지하다싶히 고중으로 간다는건 계속 문화과를 학습하여 대학으로 가기위한것이고 중등전업으로 간다는건 직업기술을 학습하여 사회생활속으로 나간다는것이다. 고중은 자비기 때문에 그만한 경제력이 있어야 하고(학교는 현성이상 도시에만 있었다.) 중등전업은 국가부담 면비였다. 국가에서 기술인재 수요가 대량적으로 급박했기에 중등전업학교는 여러가지 전업이 많았다. 우리집은 어머니가 여러가지 만성질병으로 자주 앓고 아버지 한손으로 네식구가 살았는데 그때의 집체로동수입이란 워낙 보잘것 없는데다가 개인부업도 별로 할것이 없었고 한다해야 푼돈벌이도 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집체생산로동에는 빠지면 안되고 비가 오거나 혹 여가가 있어서 도라지나 황기(약초)를 캐여 공소사(상점)에 판다면 푼돈잎이 물론 생기지만 기를 쓰고 캐였대야 몇근안되고 수매가격이 또한 아주 헐값이였다. 닭알 한알을 크면 1전, 작은것은 두알에 1전5리, 그것도 마음씨가 후더분한 영업원이면 그렇게 계산해 주었지만 욕심많은 영업원은 작다면서 두알에 1전을 주었다. 그때는 시대도 시대였거니와 우리고장은 꽉막힌 궁핍한 산골이여서 사람들이 산다는게 사실상 말이 아니였다. 모두가 비슷한 처지였으나 우리집을 비롯하여 네댓집이 제일 가난했다. 학교에서는 지망결정은 심중히 토론 연구하여 일주일내에 등기표를 바치라고 하였다. 나는 토론이고 연구고 할것도 없이 지원서를 이듵날로 선생님에게 바치였다. 나의 지망은 성 교통학교 자동차운전 전업이였다. 담임선생님은 안된다고, 고중을 써야한다고 딱 잡아 떼였다. 고중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을, 나는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현성에 가서 하숙방 살이만 하자고 해도 한달에 입쌀 서말, 장작 한수레, 그리고 달마다 현금 5원이였다! 지금 말로하면 나에게는 그야말로 천문학적 수자였다. 네식구의 량식대도 빚을 지는 처지에 당키나 한 일인가. 선생님은 여러가지 도리를 말하면서 고중을 쓰라고 나를 설복하고 나는 나대로 도리를 저었다. 선생님은 고학을 하더라도 고중으로 가야한다고까지 말씀했지만 그때의 현성에는 고학 할데도 없었다. 일주일이 되는날 나는 눈물을 씻으며 원래대로 전업학교를 쓰고 선생님은 매우 태연한 기색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셨다. 선생님은 나에게 금후에 함수(통신)를 해서 꼭 대학에 다니라고 하였다. 나는 그러겠다고 선생님께 약속했다.(나는 약속대로 하였다.) 졸업한후 나는 부지런히 산으로 다니며 약초를 캐고 버섯을 뜯었다. 한푼이라도 학교로 갈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3년만 이를 악물고 버티면 월급쟁이가 되겠으니 어머니 아버지가 그때까지만 참아달라고 나는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심정은 나보다 퍽 많이 착잡했을것이다. 한달남짓 지나서 입학통지서가 왔는데 학교는 위생학교 서의전업이였다. 학교에서 나의 전업ㅡ 전도를 의학자의 길로 잡아 주었던것이다. 나의 가정형편과 사람됨됨이에 근거하여 의사가 가장 알맞다고 판단한 모양이였다. 할수없는 일이였다. 무조건 복종이라 하지 않았는가. 학교에 간후 나는 우리의 교재와 의학대학의 교재를 같은 진도로 학습하였다. 학습을 잘하여 전 교에 이름을 떨치게 되였으나 나의 전업사상에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의사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든것이다. 나는 전업이 싫으니 집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때는 2학년 하학기초였다. 되기나한 소린가! 국가계획에 든 기술인원수자였고 벌써 절반이나 배양했는데 무슨 잠꼬대같은 소린가! 허튼생각을 집어쳐! 절대로 안된다. 무조건 복종해. 너는 당의 공구일뿐이야. 되지못하게 자산 계급 자유주의, 개인주의 물을 먹어 가지구, 혼떨어 지고 싶어?!... 학교에서는 담화, 교육, 비판으로 강도를 높혀가고 나는 발악적으로 반항하였다. 그때는 “3년재해”에서 가장 간고한해 였다. 집체숙사 2층다락방은 석탄이 없어서 난로를 피우지도 않았고 숙사안이 바깥보다 더 얼음장이 였다. 화식은 더 말할여지도 없었다. 나는 홑옷에 내복도 없었고 맨발에 헌가죽구두를 신고 다녔다.(어머니가 친척집에서 주어온것) 이불이란 얇다란 포대기 하나뿐. 그해 나는 손발을 다 얼구었다. 기아, 추위, 그리고 피를 말리는 사상투쟁(비판)…련 10여일 한숨도 자지못하니 정신에 가끔가끔 착란이 생기는것 같았다. 사태가 이렇게 번져지니 학교에서는 휴학시킨다고 하면서 부모가 와서 데려가라고 하였다.(나는 몰랐다) 하지만 2, 3원차비를 마련할수 없어서 부모님은 안절부절 속을 태우다가 어머니가 무작정 200여리 먼길을 걸어서 떠났다. 학교에서는 2,3일 기다려도 나의 부모들이 오지 않으니 반주임인 윤순임선생님을 파견하여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게 하였다. 뻐스에서 선생님은 기진맥진한 나를 안다싶이하고 길을 떠났다. 뻐스가 령을 넘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향땅에 들어섰다. 이제 80여리 령길을 내려가면 집마을이 저 멀리에 보일것이다.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집으로 가게 되였다. 누가 휴학시켜 달라고 했는가. 휴학기가 끝나면 또 그곳으로 가야하는게 아닌가. 왜서 퇴학을 시켜 주지 않는가. 내가 반혁명을 하겠다는것도 아니고 나의 뜻대로 포부대로 인생을 살겠다는데 기어코 안된다고 하는가. 나 하나가 의사를 안한다고 해서 중국에 의사가 없어진단 말인가 …죽도록 비판을 받았으나 나의 머리속에는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외고집불통 자산계급개인주의, 자유주의 완고분자였든것이다. 지금의 인권사상환경을 50여년전에 바란것은 그야말로 망상이였다. 당시는 일체가 계획적이여서 거기에 복종하는것만이 옳은것이였다. 나는 그것을 리해못했을 뿐만아니라 반항하였든것이다. 훗날 회고해보니 결과적으로 퇴학처벌을 받지않은것이 다행이였다. 그때 만약 학교에서 나를 처벌로 퇴학해 버렸다면 나의 인생은 그때에 요절되고 마는것이다. 개혁개방전까지는 우파와 같은 취급을 당해야할것이니…새로운 인생행로를 잡는다는건 꿈도 꿀수없는 일이고 개혁개방시대가 열렸을 때에는 50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였겠으니 나의 인생은 볼장을 다 본것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고향산천을 바라보니 반갑고 슬펐다. 뻐스가 오랑캐령을 넘어 조금 내려가자 앞에 어떤 사람이 보이였다. 어머니 였다! 80여리 무인지경 산길을, 범이 나든다는 그길을 어머니는 허위허위 혼자서 걸어 왔던것이다… 나는 1년후에 머리를 수그리고 다시 학교로 갈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윤순임선생님이 다른곳으로 전근한 후였다. 내가 극도로 긴장해하며 가끔씩 혼란해 할때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한후 자기집으로 데려갔다. 선생님의 남편은 부대의 간부였고 어린 아들과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서울말씨를 쓰는 할머니는 단아하고 매우 인자했다. 집은 두칸짜리였는데 20여평 되였다. 나는 선생님의 집에서 사흘이나 살뜰한 보살핌을 받았다. 그때 세월에 남을 먹일것이 어데 있는가! 그러나 할머니는 나에게 입쌀죽을 쒀 주었다. 아이를 먹이는 비상미였을것이다. 없는 석탄불도 많이 때였다. 나는 선생님의 집에서 사흘이나 정신없이 잤다. 할머니는 기뜨지 못하는 나에게 입쌀죽을 떠 먹어였다. 사흘후 나는 정신이 번쩍 나는것 같았다. 그러나 몸은 후둘후둘 떨리였다. 하지만 너무도 송구해서 선생님댁에 더는 있을수 없었다. 이튿날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우리집으로 떠났다. 그날, 선생님은 돌아가는 뻐스를 타기위해 물한모금을 마신후 인차 돌아섰다. 우리집에는 선생님에게 드릴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산나물 말린것을 무척 미안해하며 보자기에 싸 드렸으나 선생님은 완곡히 사절하였다. 학교에 간후 알게된 바이지만 내가 퇴학처벌을 받지 않게 된것은 윤순임선생님이 한사코 보호해준 덕분이였다.(내가 다닐때 3명이 퇴학처벌을 받았다. 처벌로 퇴학을 맞으면 제2의 출로를 주지 않았다.) 나를 벼랑끝까지 몰고간것은 학교단위 였다. 그러니까 나와 단위가 결사적으로 싸웠든것이다. 쌍방이 다 열혈청년들이다보니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고 너그럽지 못했고 더구나 지려 하지 않았다. 황차 나는 절대로 용서할수없는 착오적 사상을 고치려 하지 않는 엄중한 완고분자였든것이다. 이런자 앞에서 단조직이 물러설수 있겠는가. 말도 되지않는 소리였다. 하여 그들의 공세는 걸음마다 강력해 지였다. 반 단지부에서 비판하다가 전 반에서 비판하고 학년급(다섯개 반)에서 비판 하였다. 다음은 단위에서 비판하였다.(전 교 전체단원) 다음은 마지막으로 학생회와 단위가 련합으로 비판할참이였다.(전 교 학생) 성세호대한 비판을 한후 퇴학처벌의견을 교무위원회에 건의하면 그들의 전역은 승리적으로 끝나는 것이다. 비록 한사람은 만구하지 못했지만 전 면을 교육한 성적 과 의의는 절대로 과소 평가할수 없는것이였다. 그들이 방안 토론중인 바로 그때 윤선생님은 리화림(항일 연안간부. 녀.)교장선생님과 의견 일치를 보았든것이다.   사업에 참가한후 나는 성급선진인물이 되면 윤순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을 꼭 찾아 뵙겠다고 맹세를 하였다. 그러나 그후의 주, 객관상황으로 하여 나는 맹세를 실현하지 못하였다. 맹세는 나의 일생에서 커다란 유감으로 남았다…                                                                                                                                                    09.5
5    선생님의 초상(2) 댓글:  조회:2121  추천:2  2012-12-05
선생님의 초상(2) 초중시절의 김정식선생님 내가 초중2학년때 가을이다. 전 교 사생들은 근공검학으로 쌀밥골산골로 가서 두주일간 로동을 하게 되였다. 감자와 콩을 걷어 들이는 로동이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반년전에 소리없이 사라진 김정식선생님을 볼수 있었다. 중키에 몹시 수척해진 선생님은 더부룩한 머리에 수염까지 꺼칠해서 스물일곱살의 청년이 마치도 중늙은이 같아 보였다. 김정식선생님은 쌀밥골에서 소를 방목하며 움막살이를 하고있었다. 그때 학교에는 십여명의 선생님들이 있었는데 반우파투쟁이 시작되자 일본 동경대학 졸업생이라는 선생님 두 사람은 조선으로 나가고(합법적임. 한분은 교도주임.) 학생들은 “4대”(대명, 대방, 대변론, 대자보)를 조금 하다가 걷어 치웠다.(중앙의 지시임.) 입에서 젖내가 나는 조무래기들에게 공산당의 정풍을 도와 의견을 마음대로 말하라고 하는것이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 모양이다. 그리고 철부지 미성년 아이들이 정작 우파소리를 쥐여 친다고 해도 꽥! 소리질러 으름장을 놓으며 욕이나 퍼부을 일이지 무슨 모자를 씌워 처리한다는건 내남이 다 난증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였든것이다. 어쨌든 선생님들만 련일 오후와 밤을 비밀리에(아이들이 얼씬 거리면 쫓아버림.) 회의를 하여 대드니 비로서 우파를 잡았다는것이였다. 그 우파가 바로 감정식선생님이라고 하였다. 조선으로 나간 선생님들이 그냥 있었으면 우파로 잡는건데, 큰 성과를 올리는건데… 아쉽게 되였다고 교장선생님(당지부서기 겸임.)은 배를 앓았다고 하였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어데서 그소리를 얻어 듣고 교장선생님을 더욱 무서워 하고 미워 하였다. 하여 “빠꾸샤”(살찐 흰돼지. 서양돼지종자. 교장선생님은 그때 세월에도 무얼 잡숫는지 매우 비만했다.)라고 별명을 붙혔다. 우리는 김정식선생님과 조선으로 나간 선생님들을 매우 존경하며 좋아 했다. 학부모들도 그분 선생님들을 높히 보았다. 김정식선생님은 고중에 다니다가 항미원조를 갔다 왔는데 퇀부에서 번역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한어를 가르쳤는데 자기의 실천경력을 자주 례로 들면서 재미있게 배워 주었다. 선생님은 우리와 친구처럼 사귀기를 좋아했다. 우리가 전쟁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선생님이 먼저 성수나서 열정적이 였다. 그의 이야기는 생동하고도 흥미있어 마치도 영화를 보는것 같았다. 감동적이고 교육적이고 또 공부와도 련관이 많았다. 그가 우파로 된것은 말 한마디 때문이였다고 하였다. 그것은 “조선전쟁에서 놈들의 무기가 상당히 선진적인것을 보고 감촉이 컸는데, 우리도 빨리 많은 인재를 배양하며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놈들이 시가지같이 큰 군함에서 함포를 꽝!꽝! 냅다 갈기는데 쪽배를 타고 수류탄을 뿌려서야 당할재간이 있겠는가?! 우리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학습을 더욱 많이 틀어 쥐여야 한다. 로동시간보다 학습시간이 더 많게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말이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변론하고 변론해서 그를 우파로 만들었다. 교장선생님은 우파지표를 완성한것으로 해서 좋아했다고 하였다. 우리가 감자캐려 가던 어느날 아침, 역시 그곳에서 방목하던 생산대 송아지 한마리가 커다란 저수지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송아지는 숱한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몰려오자 기겁을 하며 반대쪽으로 도망쳤는데 그곳은 저수지 복판이였다. 저수지 기슭으로는 살얼음이 끼고 가운데는 수심이 깊었다. 이때! 달려온 김정식선생님은 그속도 그대로 저수지에 뛰여 들었다. 어깨까지 오는 뼈시린 물속에서 선생님은 안깐힘을 다하여 송아지를 구해냈다. 교장선생님은 언덕우에서 팔을 휘두르며 이쪽으로! 이쪽으로! 하고 소리만 질렀다. 로동이 끝나서 돌아올때 우리 세넷은 선생님의 움막에 가만히 작별인사를 갔다.(선생님들이 그와 접근하면 안된다고 주의를 주었었다) 그는 우리들에게 구운감자를 두개씩 쥐여주며 학습을 잘하여 훌륭한 인재로 되라고 하였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해 있었다. 겨울방학이 지나고 새학기가 시작 되였지만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후에도 보이지 않았다. 듣는 말에 의하면 천보산 어느 농촌마을에 있는 집으로 갔다고도 하고 무슨 학교로 갔다고도 했다. 그후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김정식선생님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물론 소식도 한마디 듣지 못했다. 무정한 세월은 어느덧 50여년이 지나갔다. 하지만 선생님이 저수지에서 박투하던 모습과 눈물이 글썽한 얼굴, 그리고 부탁하던 말씀이 하나의 동영상으로 되여 잊혀지지 않고있다.                                                                                                   09.5
4    선생님의 초상(1) 댓글:  조회:2308  추천:2  2012-12-04
 선생님의 초상 회령 나를 가르쳐준 선생님이 모두 몇분이 될가? 학교에서 나의 지, 덕, 체의 향상을 직접 가르쳐준 선생님만 꼽아보아도 얼핏 백명은 더 된다. 사람이란 누구나 저절로 사람이 되는것이 아니라 배워서 사람으로 되는것이다. 하여 훌륭한 사람은 “잘 배운사람”이라 하고 못된놈은 “잘못배웠군!”한다. 사람은 세곳에서 교육을 받는다. 그것은 가정, 학교, 사회다. 고로 한 사람의 선생님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일생을 두고 잊을수 없는 선생님은 몇분밖에 안된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가… 소학교시절의 한창옥선생님 내가 소학교를 다닐때 우리들속에서 인상이 제일 좋은 선생님은 한창옥선생님이 였다. 선생님은 5학년때부터 우리반을 맡아 산수, 조선어문, 중국력사, 자연을 가르치면서 반주임을 하였다. 그리고 보습반(초중시험을 다시 치려는 애들)의 머리큰 애들도 가르쳤는데 산골학교다보니 학생은 많지 않고 반은 각기 하나였지만 선생님은 오전 오후 바삐 보내시는것 같았다. 우리가 선생님을 좋아하게 된것은 “무섭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우리와 함께하는 동무였다. 그는 종래로 큰소리를 치지 않았고 위풍을 부리지 않았다. 아이들을 교무실로 불러들여 훈계하는 법이 없었다. 그어떤 잘못도 개별적으로 조용한 곳에서 셈이든 친구가 귀띔해주듯 도리를 말해줄뿐 닦아세우거나 책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꼭 우점을 말해주면서 결심과 용기가 북돋게 했고 마음이 거뿐하게 해주었다. 아이 셋을 키우면 입이 삐뚤어 진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아이들에게는 타이를것이 너무도 많다는 뜻이다. 한창 개구쟁이인 우리는 하루에도 열번은 더 욕먹을 짓을 하였다. 휴식시간의 짖꿎은 장난은 말할것도 없고 수업시간에도 가만있지 못했다. 소위 반장이라는 나는 어느날 왕개구리를 잡아다 녀자애의 책상속에 집어넣어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게 하였다. 선생님은 우는 애를 달래고 우리를 진정시킨후 아무일 없었던듯 수업을 계속 하였다. 후에도 선생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뱀을 잡아다 가장 사무러운 녀자애를 혼내주려던 계획을 포기하였다. 나는 며칠 못가 량심의 가책때문에 선생님에게 자백하고야 말았다. 선생님은 “알고있었다. 그러다가 그애가 기절해서 병이라두 나면 어쩌니! 시간에는 학습에 집중해야지. 이후에는 그러지 말아라.”이런 한마디 말씀뿐이였다. 그것도 나와만 조용히 하시면서 누구누구가 시간집중이 부족하니까 귀띔해 주라는것이였다. 그후부터 우리 개구쟁이들은 한층 셈이들어 규률준수를 잘했고 학습성적이 올라갔다. 시간에 장난을 쓰면 우리는 량심이 나쁘다고 생각하였다. 이말은 그때 매우 호된 질책이였다. 우리반의 수업규률은 학교에서 모범으로 되였다. 선생님은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비판할때도 왜서 나쁘다는 도리만 말해줄뿐 누구를 지명하여 “욕”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점은 일일이 이름을 짚어가며 칭찬해 주었다. 졸업학년 하학기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장래에 어떤사람이 될가?”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쓰게 하였다. 숙제시간은 일주일을 주었다. 나는 그때 자동차운전사가 되겠다고 하였는데 어쩌다 한번보는 자동차가 너무도 신기하고 그 운전사가 몹시도 부러웠던것이다. 나는 자동차에 길가는 학생과 사람들을 공짜로 태워주며 무거운 짐을 이고지고 가는 사람을 보면 꼭 앉혀 주겠다고 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도 빵빵! 씽씽! 먼지를 덮씌우면서 지나가는 그런 인정머리 없는 운전사로는 절대로 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짐을 많이 실어 나르며 세상 모든곳을 가 보고싶다고 하였다. 그때는 도랑꾸ㅡ트럭밖에 없었다. 우리가 달려가는 자동차에 매여달려 좀 호강을 하려고 하면 운전사들은 기어코 차를 세우고 쫓아버리면서 줄욕을 퍼부었다. 고약한 운전사들은 가는척 하면서 조수가 뛰여내려 우리를 혼빵 먹이게 하였다. 비가 오거나 눈보라 세찬 날이면 달려가는 자동차가 너무도 야속했다. 우리 친구중 한 아이는 운전사 친척이 있었는데 두어번 자동차대가리(운전실)에 앉은적이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부러워 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애한테 반년은 잘되게 감상담을 물으며 진지해서 들었다. 혹 어떤 운전사들이 우리를 태워주면 그 감격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선생님은 나의 작문을 일등으로 높히 칭찬 하면서 전 반 학생들 앞에서 랑독하게 하였다. 그날 나는 온 하루 기쁨과 흥분속에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집으로 돌아 올때는 웨치고 노래하며 씩씩하게 걸었다. 졸업하던날 선생님은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학습을 잘 하여 훌륭한 사람으로 되라!”고 당부하여 주었다. 그리고 “북경”이라는 교과서 두배되는 두꺼운 책을 선물로 주었다. 책은 북경을 여러면으로 소개한것이였는데 보아도 알수없는것이 많아서 재미가 없었다. 선생님이 왜서 나에게 “북경”을 주었는지 그때는 물론, 지금도 똑똑히 알수없다. 하지만 지금 북경에서 살게 된것이 선생님의 축복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돌이켜 보면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선생님의 당부와 같은 말씀을 많이하여 주었다. 그것을 수시로 명심한것이 오늘이 있게 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학교를 졸업한후 나는 선생님을 한번도 뵙지 못했다. 한창옥선생님은 현성에 있는 중심소학교 교장직을 마다하고 산골학교에서 산골학교로만 전근하였는데 전근할수록 더욱 산골학교였다. 풍편에 의하면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가신곳은 부유과수마을 소학교라고 하는데 그곳은 내가 다니던 산골소학교에서 두개의 산골향을 지나 신작로가 끝나는 깊은 산골이다. 선생님께서 왜서 산골학교로만 전근하시는지… 그뜻을 다는 모르겠으나 한가지만은 똑똑히 알고있다. 그것은 선생님께서 조건이 렬악한 산골애들을 가슴깊이 사랑하기에, 그리고 오늘도 우리를 잊지 않으시며 훌륭한 사람으로 되기를 기원하고 계실것이다. 선생님의 모든 제자들도 갱핍한 몸매에 두꺼운 근시안경을 쓴 선생님의 모습을 그이의 따뜻한 사랑과 가르침과 함께 커다란 초상으로 가슴속에 담고 있을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 한다.                                                                                           09.5
3    댓글:  조회:2170  추천:2  2012-11-29
돈   회령 사람나고 돈 났지 돈나고 사람 났더냐. 까짓것, 개도 더럽다고 안 먹는 돈. 돈 많은 집에선 울음소리가 그칠새 없어도 돈 없는 집에서는 웃음소리 높더라. 퉤! 더러워서, 돈이 다 뭐냐?! 흥!... 하고 돈있는 사람을 똥물에 튀겨 잡아먹을듯 줄욕은 퍼부어도 세상에 돈을 싫다고 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여북하면 “돈이야!” 하면 배속의 아이도 손을 내 민다고 했겠는가. 나는 손을 내 미는걸 직접 목격한바는 없지만 어릴적 돈의 위력을 실지로 크게 느끼고 감탄한적은 있다. 때는 보리마당질을 얼마 앞둔 어느날이였다. 큰외숙모가 몸을 풀게 되였는데, 외할머니는 우리를 밖으로 쫓아내면서 멀리는 가지 말고 마당에서 놀라고 하였다. 심부름이 있을수 있다는 것이였다. 집안에서는 외숙모가 모지름을 쓰며 비명을 간단없이 질렀는데 무섭기 그지 없었다. 외숙모의 모지름을 쓰는 비명소리는 아츠랗게 높아지다가도 맥없이 끊어지군 했다. 얼마후 외할머니가 우리를 부르며 소리쳤다. 샘물깨집이며 돌배나무집이며 달려가서 동전을 얻어 오고 뒷마을 의원아바이를 모셔오라는 것이였다. 우선은 동전을 제꺾 얻어오고… 우리는 불이나케 즉시 달려나갔다. 우리가 옛날 동전을 몇잎 얻어오자 외할머니는 그것을 외할아버지의 놋 밥식기에 담아 찰그랑찰그랑 힘차게 흔들어대며 “아가야! 아가야! 돈을 봐라. 돈을 줄게. 돈을 줄게.”하고 연신 어르듯 달래듯 다급히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옳지! 그래 그래, 머리가 보인다. 돈을 줄게. 조금만 더!” 외할머니의 어르는 말과 함께 집안에서는 “응아!”하고 갓난애기의 맑고 높은 울음소리가 울려 나왔다. 우리는 훗날 두고두고 돈소리에 바라나온놈이라고 동생을 놀려 주었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돈이란 참 묘한것이야!” 하고 감탄을 하였다. 돈이란 무엇이냐? 지금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돈이란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물건이다. 돈은 사람의 생존을 보장하고 행복을 보장하고 인격을 좌우지하기도 한다. 웬간하면 돈이 날개라고 하겠는가. 자고로 돈은 앞뒤가 다르듯 량면성을 갖고 있다. 돈에는 좋은 돈이 있고 나쁜 돈이 있다. 돈은 사람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한다.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고 빛나게도 하고 추악하게도 한다. 복도 되고 화근도 된다. 돈은 수천만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집을 주며 밥을 주며 옷을 주며 약을 주며 교육을 주며 웃음과 삶을 준다. 돈은 남의 나라 섬을 사들이게 하며 지어는 남의 나라를 빼앗고 대통령을 잡아다 목을 매달아 죽인다. 수십 수백만 사람을 악착하게 참혹하게 살륙한다. 돈은 평화롭게 평온히 살아가는 마을과 도시를 페허로 만들기도 하고 페허를 보란듯히 일떠세우기도 한다. 돈은 건설도 하고 파괴도 한다. 그것은 첩들이 엉켜붙어 물고 뜯고 싸우며 패가망신을 하게 하는가 하면 머리를 얹어준 결발부부(结发夫妻)가 화기애애 백년해로를 하게 한다. 돈은 사랑도 팔고 사게 하며 벼슬도 팔고 사게 한다. 돈은 다리를 놓고 학교를 세우고 불우한 이웃, 가난한 학생, 재해구에 수천수만금을 성큼 송금을 하고도 이름 한자 남기지 않게 하는가 하면 부모자식간, 형제자매간, 친척친우간에 니전투구(泥田斗狗)를 하게 하며 돈으로 생긴 법놀음은 오늘날 기본적인 상식으로 희한한 일로 못되고 있다. 하느님은 못하는 일이 있어도 돈은 못하는 일이 없다. 세상의 온갖 흥화조화는 돈이 다 부린다. 돈은 천사며 악마다… 같은 돈이건만 같지 않은 결과를 낳는건 무슨 까닭인가? 돈의 신통력인가? 돈의 잘잘못인가? 오랜 세월 돈의 희롱을 받고 보니 비로소 조금 알것 같다. 그것은 순전히 사람 마음의 탓인것을. 사람의 마음에 따라 돈은 좋은것으로도 되고 나쁜것으로도 된다. 금전욕은 누구나 다 있다. 그러나 이 욕망은 두가지 부동한 마음에서 생겨나고 두가지 부동한 행위를 취하게 하며 결국은 두가지 부동한 결과를 낳는다. 여러 사람을 위하여 돈을 벌겠다는 마음은 정정당당한 수단과 방법을 취하게 하며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온다. 미친듯이 자기의 부귀영화만을 위하여 돈을 벌려는 마음은 온갖 비루하고 부정적인 수단과 방법을 꺼리낌 없이 사용하게 하며 비참한 파탄과 끝장을 가져온다. 전자가 번 돈은 두말할것 없이 향기롭고 아름답고 빛나는 좋은 돈이고 후자의 돈은 돈잎마다 구린내 풍기고 피로 얼룩지고 악으로 물들어있다…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오늘도 기를쓰고 뛰고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미안한 일이며 또한 잘못이다. 돈! 돈은 벌어야 한다. 열심히 벌어야 한다. 많이 벌어야 한다. 그러나 좋은 돈을 벌어야 한다. 부민강국을 위하여 우리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오늘도 돈을 벌려고 16시간, 20시간 땀 흘리는 아들 며느리, 딸과 사위 그리고 해내외에서 분투하는 수많은 근로대중에게 응원을 보낸다… 사람은 돈의 노예가 아니다. 돈을 창출하고 수확하고 지배하는 주인이다. 돈은 인간사회를 더욱 풍요롭게, 더욱 화애롭게 만들기 위한 공동의 재부로 되여야 한다.                                                                                                            12.9  
2    노벨문학상 댓글:  조회:2386  추천:1  2012-11-19
노벨문학상 회령 강변에 나갔다가 들어오니 컴을 보고있던 안해가 놀라운 소식을 말해 주었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타 왔어요. 막언이라구. 아십니까?” 알구말구. 나는 꿈틀 놀라고 잇따라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막언씨, 대단한데!... 전화로는 간단하게 축하를 하였지만 마음속으로는 무한한 축하를 하여 주었다. 막언씨는 나보다 12살 어리지만 문학에서는 내가 해란강 기슭이랄때 그는 모아산 꼭대기였다. 막언은 문학 최고상인 모순문학상 수상자로 당대 중국에서 굴지의 작가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적으로 다정 하였다. 우리는 서로 매우 좋아했고 허물없는 사이였다. 노벨상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어우러 물리, 화학, 의학, 생물, 문학, 경제, 평화 등 학과와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특출한 사람에게 해마다 주는, 가장 크고 가장 권위적이고 가장 영광스러운 상이다. 그런데, 여기에 심각한 이야기가 두개 있다. 하나는 자연과든 사회과든 가장 기초적인 학과인 수학에 상이 없는 문제다. 들은바에 의하면, 노벨씨가 수학가들에게는 상을 주지 말라고 유언을 했다는것이다. 그것은 노벨과 친근한 모 수학자가 그의 안해와 간통을 했고 나중에는 년놈이 도망까지 했는데 이에 노벨은 지대한 치욕과 분노를 품었던것이다. 노벨은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애정에 너무도 진지했던것인가. 아니면 이 면에서 극히 협애한 소인이였을가… 노벨의 대단한 자존심은 알수있다. 애정, 성은 극히 배타적인 미묘한 감정이다. 세상의 모든 남녀는 애정과 성에서 배타적이다. 소박, 서방질을 당하고도 대수롭지 않아하거나, 시윈해 하거나, 좋아서 옹헤야 얼씨구 엉덩춤을 출 멍텅구리는 하나도 없다. 그것은 고자나 돌녀도 마찬가지다. 미물의 벌레로부터 개, 호랑이, 사자, 참새, 비둘기, 독수리… 금수도 마찬가진데 기러기와 원앙의 애정은 만물의 령장이라는 사람도 감동케 한다. 보다싶히 애정, 성은 가장 최저의 상식적인 거의 본능적인 기본도덕이다. 이런 상식과 기본도덕을 우습게 여기다가는 개인문제, 사회문제를 이르켜 패가망신(집은 망하고 죽는다.)을 하지 않으면 감옥으로 가거나 화학거세를 당한다. 일부일처라는 선진적이고 문명하고 가장 좋은 법은 그래서 생긴것이다. 어찌 조용히 사색하고 마음을 정리하지 않으랴. 항상 명심하지 않겠는가… 말이 우습게 되였는데 각설, 노벨은 모든 수학가들에게 앙심을 품었을가. 아니면 우정 이런 부당한 화제를 남기여 “정조”의 귀중함과 고상함, 순결을 두고두고 경고하며 강조하려 했을가… 하여튼, 죄는 도깨비가 짓고 벼락은 고목이 맞듯, 애매한 두꺼비가 떡돌에 치이듯 수학가들은 휘황한 노벨상에서 몫이 없게 되였다. 유감이 아닐수 없다. 두번째 이야기는 우리 나라에서 노벨상을 대하는 태도다. 노벨상이 설립된지가 어느덧 100하고도 12년이 되였다. 그간 우리 나라에는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는데,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는 적격자가 없었는가. 세계사에서 4대 문명발원지의 하나라는 중국에, 세계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사람들속에 노벨상을 탈만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단 말인가… 역시 듣는말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 나라에서 “우리는 싫다.”하고 엄정성명을 했기때문이라고 한다. 왜 싫다고 했을가? 선발에 나설 자신이 없었나 아니면 서푼어치도 않되는 시시한것이라고 깔보았나. 그것도 아니라면 중국의 지성들이 맑스켠을 떠나 저쪽으로 넘어갈가봐서 일가… 짐작컨대 자존심이 지나치게 높아서 그랜것 같은데(세계혁명을 지도하고 지원한다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무슨 사정은 있었을것이다만… 지나친 자존심, 지나친 과격이 않았나 사료 된다. 노벨상을 받는데 뭐가 나쁘고 뭐가 잘못되겠는가… 미묘한 수수께끼다. 우리 나라는 문명례의지국이고 처세에서 선례후병, 정수불범하수, 니불범아아불범니, 중용과 조화를 아주 중시하며 원칙으로 하는 대국이다. 그 구체적인 하나의 증거로 평화공처“5항원칙”을 들수 있다. 얼마나 좋은 외교원칙인가! 또 우리의 민족정책도 꼽을수 있겠다. 우리 나라처럼 많은 민족이 형제처럼 화목하게 사는 나라는 세상에 없다. 그런데 노벨상에서는 실수를 한것 같다. 상을 받을만한 많은 중국사람들이 아깝게 기회를 잃었던것이다. 역시 유감이 아닐수 없다. 세상은 돌고돌아 우리 나라도 세계무대에 당당히 올랐다. 늘 봐도 공정하게 처사를 하기 때문에 인심을 얻고있다. 노벨상 심사에도 신심가득 나섰다. 그리고 문학상을 안아 왔다. 어찌 막언씨 혼자만의 기쁨이고 영광이랴! 고무적이다... 막언은 상을 받은 소감을 이렇게 말하였다.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놀랐고 이어서 기뻤어요. 더 좋은글을 쓰기위해 노력분투 하겠어요.” 막언씨 다운 말이였고 진심의 말이였다. 콩알만한것이긴 하지만 국내외에서 상을 몇개 받아 보았기에 대뜸 수긍이 가는 말이였다. 상이란 고무격려이며 편달인것이다. 글을 쓰는 지성인들은 막언씨 소감과 같이 모두가 “좋은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인류사회의 진보와 번영을 위하여, 인간을 교육하는, 사회와 인간에게 유익한 글을 우리의 작가들은 부지런히 써낼것이다.                                                                                                               12.10
1    혼떨어 졌어요 댓글:  조회:2408  추천:0  2012-11-19
혼떨어 졌어요 회령 나는 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한후 산골소학교에서 교원사업을 하였습니다. 그당시 나의 동창들 가운데서 일자리를 바로 찾지 못해 속상해 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나는 아버지가(촌장) 교장선생님과 각별한 사이여서 일자리를 쉽게 해결했습니다. 사업에 참가한 이듬해봄 나는 시중심소학교에서 사업하는 지금의 남편과 중매로 만나 약혼식을 올리고 그해 국경절에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제2 교도주임으로 앞날에 대한 야심이 무척 컸습니다. 결혼 당시에 남편은 동북사범대학 중문계 함수중이였고 아버지는 시병원외과주임이였으며 어머니는 초중교원이였는데 경제력도 좋은 집안이였습니다. 직업이며 약혼이며 결혼이며 순리롭게 슬슬 풀린데다가 또 결혼 두달후에는 남편이 “활동”을 잘한 덕분에 시내 모 소학교에 거뿐히 전근까지 했고 석달후에는 아들까지 순산을 했습니다. 산가를 마친후 나는 남편의 조종에 따라 먹을알이 많다고들 하는 실험소학교에 또 전근했습니다. 이같이 순풍에 돛단격인지라 동창들이 부러워하고 어떤 친구들은 우리에게 “방조”를 부탁하기도 했는데 우리는 통쾌히 대답하고 “태도표시”가 좋은 순서에 따라 해결해 주기도 했습니다. 회색수입이 월급의 몇배는 되였으니 사는 멋이 있었습니다. 2학년 새학기가 시작되자 나의 반에는 권성이라는 귀엽게 생긴 남자애가 외지에서 전학해 왔습니다. 처음 권성이는 엄마와 함께 학교로 왔는데 권성이 엄마는 미인이 였으며 아주 세련돼 보였습니다. 그들 부부가 장춘에서 자그마한 장사를 하는것으로내 내 나름대로 추측했습니다. 그날 그는 나에게 점심초대를 하면서 애의 학습성적이 몹시 차하며 그간 줄곧 산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응석둥이로 자라 셈이 너무도 들지 못했다며 걱정스런 기색 가득 거듭 수고해 달라며 부탁하는것이였습니다. 그리고 고운 봉투를 나의 손가방에 살짝 넣어주었습니다. 교무실에서 돌아와 가만히 꺼내보니 빳빳한 새지페 100원짜리가 열장이예요… 100원, 200원 봉투에는 습관이 되였으나 이렇게 엄청난 목돈은 참으로 처음였습니다. 아주 흐믓하더군요. 째째한 소학교선생이니 뭐니해도, 코흘리개 아이들 대장이니 뭐니해도 진짜 성수나고 살맛이 났습니다.. 밤에 남편의 목을 끌어안고 귀속말을 했더니 “눈치 조심하오… 백만원을 먹고도 잘만하면 무사태평이고 재수 없자면 만원에도 목아지가 덜컥하오. ”했습니다. 나는 권성이를 인차 파악할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유치원 대반 정도라고 할가? 아니, 그정도도 아닙니다. 어느 과목이나 꼭 붙잡고 물으면 처음 두세개는 신통히 알아맞추다가 그다음부터는 망탕 대답하는데 다잡아 몰아대거나 살살 얼려대거나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악에 받쳐 소리지르며 족치면 권성이는 제가 되려 씩씩거리며 도망쳤습니다. 숙제는 처음 두세개는 제대로 했는데 다음부터는 쥐마당이 아니면 아예 하지도 않았습니다. 산수와 조선어문 시험도 처음 두세개는 제대로 쓰고 다음은 아예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시간집중은 더 말할것도 없었습니다. 제일 길어 10분을 집중하고는 자기맘대로 걸어다니고 다른애를 짓거리고 지어는 복도에 뛰쳐나가 끝에 있는 학교상점으로 달려갑니다. 그애가 늘 사먹는건 50전짜리 매운 무침개였습니다. 실실거리며 교실로 달려와서는 물통에서 물을 받아먹으며 아이들 앞에서 해쭉해쭉, 냠냠합니다. 학교건물안의 학교상점도 문제였습니다.학교주위 200메터 안에서는 일체 영업성행위를 못한다고 정부 유관규정은 번연히 있지만 우리 교장선생님은(미인. 남편은 어느 파출소소장) 신통력이 있어서 상점이 평안히 돌아가고있었습니다. 상점은 교장선생님이 친히 물색한 한족사람이 경영하는데 학교의 각종 비품까지도 도맡아 용달하다보니 수익이 큰 모양입니다. 그쪽으로 받는 우리 장금도 상당하답니다. 하여 웬지 찝찝했지만 누구도 뒷소리는 별로 하지 않습니다. 권성이를 맡아 한달도 안되여 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마구 두손을 내흔들고 말았습니다. 하여 키작은 권성이를 제일 뒷구석에 따로 앉히고 상학전 꼼짝 말라고 호되게 위협해 놓았을뿐만아니라 두번은 따끔하게 한매 때리며 매섭게 을러놓았는데 약간 효과가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애의 학습에 대해서는 영 밀어놓고 전혀 관계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에 소란만 피우지 않으면 다른애들에게 영향만 주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권성이 엄마한테는 애가 다동증이 있는것같은데 병원에 가볼것을 권고했을뿐더러 한학년 내리 앉히는것이 좋겠다고… 미리 발뺌을 하며 가슴에 못이 박힐 전화를 여러번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한어만은(나보다 많이 선배인 녀선생이 가르킴) 50점, 60점 때로는 80점 이상을 맞기도 하는겁니다. 어느날 한어선생님한테 애를 어떻게 다스렸냐고 물었더니 선배는 아이를 교탁앞에 따로 앉히고 거의 절반 정력을 기울렸다는것이 였습니다. 나도 몇번 써본 방법인데?... 나는 권성이가 한어에는 선천적으로 취미가 있는 모양이라고 단정해버렸습니다. 권성이는 생각만해도 머리속이 다 찡해나는 아이였습니다. 어느날 남편과 권성이 때문에 골치아프다는 말을 했더니 남편은 학부모에게는 무척이나 관심하는 태도를 보이고 아이는 그런대로 놔두라고 하였습니다. 나와 같은 생각이였습니다. 퍽 후일에 뉘우친 일이지만 한어선생님은 모성애에 못지 않은 애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던것이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학기를 맞았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명랑하고 상쾌한 기분에 들떠 있었으나 나는 도무지 기분이 나지 않았습니다. 권성이 때문에 먼저 학기 총결에서 나는 제일 꼴찌선생으로 찍혔고 장금도 물론 꼴찌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도 권성이가 등교하지 않아서 권성이 엄마한테 전화하니 시중심소학교에 전학했다는것이였습니다. 그말에 나의 흐렸든 하늘은 대뜸 찬란한 파란하늘로 바뀌였습니다. 정말로 속이 후련했습니다. 그러나 권성이의 전학은 나에 대한 학부모의 심심한 유감과 질책이라는것을, 격분과 항의라는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어요… . 개학한지 한달 거의 되는 어느날, 교장선생님이 사무실로 나를 불렀습니다. 교장선생님의 어두운 안색에 나는 가슴이 섬찍해났습니다. “오선생이 아무래도 큰화근을 불러온것 같아요… 권성이 엄마가 개학 얼마전 나를 찾아왔는데 아이가 한어선생님은 좋고 오선생님은 나쁘다면서 싫다고, 다른반에 가겠다고 떼질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학시킬수밖에 없다는것이였어요. 그리고 한가지 건의를 하겠다면서 선생님들의 직업도덕을 비롯해서 교원의 소질제고에 좀 더 노력했으면 좋겠다는것이였습니다. 교장선생님의 함축적인 얘기가 잘 리해가 안되여 나는 좀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라고했더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는것이였습니다. 《내가 맡은 학생이 다른 선생님을 찾는건 광채로운 일이 못되죠. 아닙니까? 오선생! 순간이라도 학생과 신경질을 부리며 구박하는건 절대 금물이죠. 나도 최근에야 알았는데 권성이 아빠는 성교육청 부청장이고 엄마는 성정부 판공실간부였는데 지구당위 기률검사위 부서기로 왔대요. 나는 오선생이 근심 되네요… 모범껨에 들면 여럿이 다치는 법인데… 큰일은 생기지 말아야겠는데…》 나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정신이 아찔해 났습니다. 개학첫날 총화에서 교장선생님은 직업도덕, 소질제고, 부정부패방지에 대하여 추상같이 엄한 훈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차 학교상점을 철거해 버렸습니다. 교장선생님에게 불리워 갔던 그날부터 나는 자신을 깊히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은근히 좋아하고 성수나하고 기뻐했던 일들, 지어는 자랑스럽게 느꼈던 일들이 하나하나 너무 수치스럽게 생각되였습니다. 뒤문거래로 좋은 자리를 찾아 전근하고 친구들과 학부모들에게서 밥을 얻어 먹고 물건, 상품권, 돈봉투를 받고 장금 몇푼때문에 아이들을 겁주고 혼내고 학습못하는 애는 미워하고 호되게 닥달하고…계몽스승은 고사하고 인격상 저렬했음을 느끼며 부끄럽고 많이 후회 되였습니다. 낮이면 무슨 벼락이 떨어지나 불안하고 낯선 사람이 학교로 오면 잔뜩 긴장해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게 되였습니다. 죄진놈이 발등져려한다는 말을 정말 실감하고있었으며 밤이면 악몽으로 잠을 설쳤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남편도 무슨 일로 학교 서기한테서 충고 받은봐가 있다고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모범껨에 들가봐 근심이 태산 같았습니다. 까닥 잘못했다가는 선생직업을 떼울수도 있었습니다. 요행을 바라며 몇달 내내 맘이 자못 불편하게 지냈습니다. 그간 우리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심각한 반성을 하였습니다. 《다시는 그 어떤 착오도 범하지 않으리라! 》어금니를 깨물며 굳게굳게 맹세했으며 학생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선생의 직책을 다 하기에 무척 노력했습니다. 어느날 남편은 나에게 권성이는 성특급교사인 홍순옥선생님이 자진해서 맡았는데 학년8개반에서 10등안에 든다고 말해주면서 홍선생님에 대한 찬탄을 금치못했습니다. 나는 가슴이 꿈틀해남을 느꼈으며 저도 모르게 입이 딱 벌러졌습니다. 정말 충격이 컸습니다. 내가 교원으로서 사명감, 직업도덕, 교육방법 등 소질이 너무도 부족함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끼며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비참한 현실이였습니다. 며칠후 나는 권성이 엄마를 찾아 모든 고충을 몽땅 털어놓고 심심한 사과와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는《참, 좋은 출발을 했군요. 훌륭한 성과를 기대합니다.》하며 너그럽게 용서해주었습니다. 권성이 엄마는 참으로 수양이 있었을뿐만아니라 원칙이 있는 분이였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가슴깊히 새기고 꼭 훌륭한 선생이 되리라 다짐했습니다. 2년후 나는 지구 우수교원으로 당선되고 남편은 부교장 겸 교도주임으로 승진 했습니다. 권성의 일로, 권성의 엄마로부터 우리 부부는 많은것을 깨닫게 되였으며 다시 옳바른 길로 들어서게 되였습니다. 지금도 권성이와 그의 엄마를 잊지 않고있습니다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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