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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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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특별감옥 댓글:  조회:1785  추천:3  2014-01-17
              잡문                                              특별감옥                                                                                                       회령     고왕금래, 인간세상에는 감옥이 부지수로 많고 그 형태도 다양하다.      그중에서 장학량의 감옥살이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일례가 된다. 장씨는 57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처음부터 “연금”이라는 징역을 살았다. 장학량은 범상죄를 지었으니 군사법정에서 죽임을 당하든지 수족을 잘리든지 아니면 정배살이를 하든지 벌을 받게 마련이지만 그보다 더 억울한건 옥졸들이 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제일 개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것은 특무대장을 한 류을광, 웅중청, 단육기의 인생이라 하겠다. 그들은 허무하기 짝이없는, 부질없는 삶을 살았든 것이다.     장개석의 충견인 대립(강생과 배짝이 된다)은 장학량의 연금을 세겹으로 포치해 놓았다. 제일밖에층은 순찰조로 한개련의 헌병이 장씨 거주지를 둘러싸고 24시간 순찰하며 “안전”을 확보하고 3보1강, 5보1초로 보초를 세웠는데 초병들은 서로 지껄이를 하며 바라볼수 있었다. 중간층은 집둘레를 둘러 싸고 지키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개바자 같은 것이다. 안층은 출입문, 창문을 지키며 방안까지 지키였다. 그리고 장학량의 신변에는 두셋이 붙어 있었다. 안층조는 장씨가 어데로 가면 어데로 따라 다니였다. 밤에 부부가 동품할때도 창문에 매달려 들여다 보고 방문을 열고 방안을 기웃거리며 제대로 붙어 자고 있나, 이상한 기미가 없나 동정을 살피였다. 화력은 50자루의 싸창, 돌격총2대, 자동보총2대, 기관총이 한문이였다. 이들을 통칭해서 특무대라고 하였다. 장학량이 활동범위는 낮에는 집을 중심으로 반경이 100미터고 밤에는 집안에 박혀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은 후일 조금씩 변동이 있었으나 장경국이 죽을때까지 대체로 비슷 했다.          류을광     서안사변 이듬해(1937년) 춘절직전 장학량은 절강 계구로 옮겨져 연금 되였다. 이때로부터 류는 특무대 대장이였는데 25년을 하루와 같히 장학량을 지키였다. 그먼저 두어달은 특무대 대장을 주위룡이라는 사람이 했다. 류을광은 호남사람으로 황포군교 4기생이다. 그는 북벌전쟁에 참가한후 군통에 전근되여 장개석의 경위대 대장, 특무대 대장 등 직무를 담당했다. 1962년에 안전국으로 돌아가면서 장학량을 떠나게 되였다.     류을광은 아주 얌전하고 연약해 보이는 사람이였지만 속대는 매우 악착하고 한치 에누리 없이 각박한 사람이였다. 그는 감독규정의 모든 세절을 엄격히 집행 하였다. 장학량을 밤낮 철통같히 둘러싸고(포위하고) 감독했을뿐만아니라 지어는 자기의 처자까지 데려다 숙식을 함께하면서 장학량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게 하였다. 1946년 장학량은 대만 신죽시 정상온천에 옮겨져 연금 되였다. 이듬해 대만인민들이 국민당을 반대하여 무장봉기를 일으켰는데(2.28사건) 류는 “일단 장학량에게서 이상기미가 있으면 그들 부처를 즉시 죽이라.”는 특별예방조치를 특무대에 지시하기까지 하였다.     같은해 10월 장치중이 장학량을 보려 왔는데 그때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두가지 요구를 전해달라고 하였다. 하나는 평민으로 살게 자유를 달라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류을광을 내집에서 나가게 하여 달라고, 나의 생활을 내가 관리할수 있게 하여 달라는 것이였다. 장치중은 남경에 돌아가는 즉시 이 부탁을 장개석에게 전달 하였다. 류을광도 물론 이런 정보를 제때에 대립에게 보고했다. 장개석은 장학량의 요구에 대한 답복으로 한술 더 떠서 “이제부터는 그누구도 비준없이는 장학량을 만나지 못한다.”는 밀령을 대만성 경비사령 팽맹집에게 내렸다. 장학량과 장치중은 이렇게 할줄을 생각도 못했다. 그야말로 혹을 떼려다가 덧붙이고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었든 것이다.     1949년 장개석은 대만에 쫓겨간후 고웅에 안둔한지 얼마안되여 즉시 류을광을 불러다 장학량의 정황을 물었다. 그는 류을광의 공작을 십분 만족해 하면서 장금으로 황금 300량을 주었다.     류을광이 안전국으로 돌아갈때 장학량은 연회를 열었는데 장경국과 팽맹집도 참석했다. 연회에서 장학량은 “류을광은 나의 원쑤이기도 하고 은인이기도 하다. 원쑤라고 하는것은 그가 나를 너무도 각박하게 감시했기에 하는 말이고 은인이라고 함은 내가 급성맹장염에 걸렸을때 청시하고 비준받을 겨를이 없는 상황에서 그가 스스로 결정을 내려 나를 병원에 보내여 수술받게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떠나는 마당에 나는 한몫 돈을 주려고 한다.” 하였다. 하여 좌석이 매우 난처하게 되였는데 장경국이 완곡히 말려서 겨우 체면을 수습 했다.      25년을 하루같히 장학량 하나를 눈박아 지켜온 류을광! 그때는 좋은세월이 다 지난 늙은이가 되여 북망산을 바라보는 신세가 되였다. 일생동안 그가 해놓은일이 무엇이든가?!... 류을광은 그후 여생을 적막속에서 조용히 살다가 죽었다.           웅중청     웅중청은 호북 사람으로 항주특경반 1기생이다. 그는 생기기는 말수가 적고 어리무던하게 생겼지만 무엇이나 속으로 살피는 능청스럽고 음흉한 사람이였다.     장학량을 연금하는 첯날부터 대립은 그를 장학량의 신변에 박아 놓았다. 밤낮으로 장학량을 감시하는 이 고역을 그는 30년이나 하였다. 첯 14년은 조장이란 직급으로 공작하고 후에는 부대장으로 또 꼬박 12년을 일하다가 류을광이 떠나자 겨우 대장 벼슬에 올랐다.     웅중청은 류을광과는 달리 장학량과 지나치게 긴장하지 않았다. 그는 장학량을 아주 유모적이고 박람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평론하기도 했다. “그는 애국자다. 그의 출발점은 좋았다. 서안사변에서 범상죄를 지었으나 란장판을 치지 않았다. 애국충심 한가지만으로도 그는 중국에서 천고에 이름을 전할것이다.” 장학량에 대한 그의 이런 동정비슷한 호감은 훗날 진급에 치명적인 장애로 되였다.     웅중청을 대장으로 제발시킨후 장경국은 매년 한두번씩 그를 불러 장학량의 상황을 자세히 물었다. 어느 한번 장경국의 물음에 그는 “장학량이 기독교 세례를 받은후부터 태도가 비교적 겸손해 지었다.”라고 대답 하였다. 그말을 듣자 장경국은 “아ㅡ”하고 더 말하지 않았는데, 마치도 “네가 어찌 그를 두둔 하는가?” 하는것만 같았다. 눈치빠른 웅중청은 제꺽 말머리를 돌려 “그러나 여전히 잘난척하는 우월감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장으로 진급하는 일은 헛탕을 치고 말았다. 결국 웅중청은 상교군함으로 퇴역당하고 말았다. 장씨 부자에게 말그대로 한생을 다하여 충성을 했으나 그의 만년은 헌신짝만도 못했다.          단육기     단육기는 장학량 신변에서 23년을 하루와 같이 감시를 하였다. 그는 장경국의 지시를 한점 오차도 없이 충실히 집행했다. 그러나 수하인원의 고발로 앞당겨 퇴역 당하고 말았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어느 한번 단육기 큰딸이 장학량부부를 집에 초대하였는데 그날 단육기가 며느리 진약의(작가)를 장학량부부와 만나게 안배 했다는 것이였다. 단육기 본인은 절대로 그런일이 없었다고 했지만 안전국에서는 그를 밤중에 불러다 4시간이나 심문 하였다. 그리고 사건을 해명하지 못했지만 즉시 퇴역으로 처리해버리고 말았다. 단육기는 23년을 부조장, 조장질을 조금 하다가 나무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리진원     1988년 장경국이 죽은후 특무대는 제1특근대로 이름을 고치고 조장으로는 상교군관 리진원이였다. 감시인원은 18명으로 줄었다. 그리고 무장도 휴대하지 않고 가스총을 사용했다. 보고도 한달에 두번으로하고 이전에 “절밀”로 취급하던것을 “기밀”로 처리하였다. 후에는 특근대를 취소하느니 어쩌느니 했는데, 그것을 반세기가 넘도록 공포와 감시속에서 살아온 장학량 본인이 극력 회망하지 않았다. 그는 특근대가 계속 자기를 감시해 달라고 하였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안전했기 때문이였다.     1993년 장학량부부는 비로서 국민당 손아귀에서 벗어나 미국 하와이로 가서 정착하게 되였다. 이로서 리진원의 조장소임도, 특근대의 사명도 끝나게 되였다. 장학량을 지킨 몇사람가운데서 리진원이 제일 운수가 좋았다. 그는 4년남짓 장학량을 지키다가 재수좋게 "해방"을 받았든 것이다.     그전해 장학량부부는 대륙으로 돌아오려고 만단의 준비를 다하였다. 그들은 먼저 홍콩에 있는 벗 하세례의 손자 혼례식에 참가한후 대륙으로 돌아오려고 하였다. 려권수속도 이미 다 하였는데 아쉽게도 하씨네 혼례식이 지연되여 계휙은 그만 무산되고 말았다. 하여 장학량부부는 영영 이국타향의 망명객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장학량의 평생 유감으로 남았다.     반세기에 걸친 국민당의 특별감옥ㅡ장학량의 감옥에서 그들부부를 비롯해서 류을광, 웅중청, 단욱기 세사람은 하나뿐인 일생을 부질없이 허송했다. 장학량이 무슨 호랑인가, 마귄가 … 감시해서 생긴것이 무엇인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허무한 인생비극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지독한 감옥은 세상에 지금도 많다. 개인독재정권은 나라를(사회를) 그대로 감옥화 하고 있다.                                                                                                              10.4
49    송죽의 절개 댓글:  조회:2241  추천:5  2014-01-15
                실화                                                  송죽의 절개                                                                                                                    회령     지금 절개니 지조니 정조니… 하는 말을 하면 시대에 떨어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가? 그런 우려심에서 좀 망설일 때가 간혹 있다. 정조니 절개니 하면 렬녀문을 세워주던 춘향이 시절을 대뜸 생각하게 되고 케케묵은 봉건통 냄새가 물씬 난다. 말 자체가 봉건시대의 오래된 말이여서, 그리고 “삼강오륜” “삼종사덕” “칠거지악” 따위에서 강조한 주제사상 말하자면 핵심골자여서 봉건사상이라는 선입견이 즉각 튀여 나온다. 공맹지도를 죽어라고 비판투쟁한 여파라고도 할수 있겠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유가학설을 다시 학습하며 유교례의범절을 부활 강조하는 당전 시각에서 볼때 많이 응용해야할 말이라고 인정 된다. 이를테면 모주석의 어록을 학습하던 때처럼 활학활용 해야할 말이다. “신결혼 시대”요 “리혼 행진곡”이요 또 무슨 “자유의 인생 랄랄라”… 같은 주책없는 드라마의 망발을 배격하기 위해서, 청소년과 중장년… 인간들의 건강한 심령을 위해서 활학활용 해야할 말이다.             림표의 첯번째 안해     림표(원명 림육용)가 8살일때 그의 부모들은 그보다 3살 위인 왕(汪)씨네 둘째딸을 민며느리로 삼았다. 왕씨네도 림표네 집처럼 회룡진에서는 부자였다. 왕씨네 둘째딸은 수려하고 단정하고 령리하며 얌전하여 린근에서 모두 귀여워 했다. 전통관념에서 볼때 이 혼인은 매우 미만한 것으로 그야말로 문벌이 맞고 천생배필이 였다. 그러나 림표는 아이다 보니 남녀의 정애를 알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와 응석을 부리며 각시는 싫고 공부를 하겠다고 떼질을 썼다. 어머니는 아들을 어루만지며 이 혼사를 대답하면 장래에 꼭 큰 인물이 될거라며 달래 였다. 림표는 알둥말둥 하면서 응낙 하였다.     림표는 외지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차츰 혁명의 길에 들어섯는데 황포군관학교를 거쳐1926년에는 실습패장으로 북벌전쟁에 참가 하였다. 당시 그는 이미 공산당원이 였다. 13살에 집을 떠난 림표는 그간 림가만에 있는 집으로 한번도 가지 않았다. 왕씨는 독수공방 하면서 23살이 되는 처녀로 되였다. 적막과 처량한 나날이 였다. 림, 왕의 이 혼인은 처음부터 비극적이 였다. 이것은 두말할것 없이 림표를 나무릴바가 아니다. 림표는 처음부터 처녀에게 아무런 정도 없었고 그의 일생을 책임질것도 없었다. 비극의 괴수는 오직 봉건례교일 뿐이다.     1927년 음력설 전야에 무한에 있는 북벌군의 정식패장인 림표에게로 집에서 편지가 왔다. 편지는 부친이 쓴 것이였는데 늙고 또 병이 고망에 들어 기동도 못하니... 죽기전에 한번 얼굴이라도 보고싶다는… 그런 슬프고 절절한 사연이였다. 효자인 림표는 즉시 청가를 맡고 밤낮을 달려 집으로 갔다. 그런데 부친은 정정하고 집에서는 웃음꽃이 넘쳐 났다. 림표를 결혼 시키기 위하여 부친은 거짓말 편지를 보냈든 것이다.     림표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씩씩거리며 나는 결혼할 생각도 없거니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일때 당신들이 해 놓은 일이니 당신들이 없던 일로 만들라. 고 딱 잡아 떼였다. 되기나 한 소린가! 자고로 혼인은 부모의 명에 따르는 법이고 중매의 말을 듣는것인데, 십여년 림표를 기다려온 왕씨 처녀는 그래 그저 헛되이 청춘을 랑비해야 한단 말인가. 이웃들에서는 림가네는 말에 신용이 없다고 하지 않겠는가. 늙은 부모들이 애걸하다싶이 사정사정하고 로안에 눈물까지 줄줄 흘리는데야 림표도 어쩔수가 없었다. 설날, 굉장하게 혼례를 거행하고 동방화촉의 신혼방에 떠밀려 들어간 림표는 울적하기만 했다. 그는 왕씨 처녀에게 아무런 인상도 호감도 없었고 애정이란건 더 말할 여지도 없었다. 왕씨 처녀는 달콤한 미소를 머금고 꿈나라로 들어 갔지만 림표는 도무지 잘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림표는 밖으로 나와 부모들이 계시는 방에 절을 한후 그길로 떠나 버렸다. 부대에 돌아온후 림표는 즉시 부모와 왕씨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자기는 이미 혁명에 몸을 바쳤으니 언제 죽을지 알수 없는 일이고… 왕씨 처녀께서는 아까운 청춘을 헛되이 하지말고 좋은 사람을 찿아 가기를, 인의가 없는 나를 량해 하여 달라고… 부모님들이 불효한 나를 용서해 주기를… 이런것이 였다. 편지를 받은후 부모들은 대노하여 줄욕을 퍼 부었으나 그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왕씨 처녀는 며칠 대성통곡을 한후 이생에서 다시는 시집을 가지 않는다고 선포 하였다. 그는 말과 같이 그 누구의 권고도 듣지 않고 종신 재혼을 하지 않았다. 시종 림씨 집에서 온집 로소 식구들을 받들어 모셨다.     해방후 림씨네 일가는 림표를 따라가서 복을 누리였으나 왕씨 녀인은 불청객으로는 되기 싫다며 본가로 돌아가서 독수공방을 하며 헝겁신을 만들어 팔며 적막한 여생을 보냈다. 류수와 같은 세월은 30여년이 지나 갔다. 림표는 시종 집으로 오지 않았고 무정한 세월은 아름다운 왕씨의 얼굴에 한오리 또 한오리의 깊은 주름살을 새겨 놓았다. 그는 피지 못한 꽃처럼 일찍 늙어 버렸다.     1959년 초가을 무한에서 중앙공작회의에 참가한 림표는 회의가 끝나자 갑자기 고향에 가 보겠다고 하였다. 누가 감히 등한할수 있는가. 경찰차 한대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여러대의 승용차가 림표의 까만 홍기패 하이야를 옹위하며 호호탕탕 림가만으로 달리였다. 고향집의 경물은 의구 했으나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치심의 왕씨는 어데로 갔을가. 반나절 두루 돌아 보던 림표는 공사(향)서기에게 왕씨가 어데로 갔는가, 생활은 할만 한가… 하고 물었다. 서기는 마을 로인들에게서 림표가 혼인을 피해 도망간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고 또 왕씨를 몇번 본적도 있는지라 림표가 누구를 묻는지 대뜸 알수가 있었다. 그는 인차 왕씨할머니는 금년에 56살이지만 신체는 단단하고 집에는 아무도 없는데 신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며 생활은 일반적이라고 대답 하였다. 그러면서 만나 보겠는가고 조심히 물었다. 림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머리를 흔들며 필요없다고 말한후 비서더러 3000원을 내여 서기에게 주게 하였다. 그는 서기에게 이 돈을 왕씨에게 전해 줄것과 그가 돈의 래력을 물으면 그저 당에서 주는거라고 말하라고 하였다. 림표가 돌아간후 서기는 왕씨를 사무실에 불러다 돈을 건네 주면서 정부에서 주는 생활보조비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씨가 그말을 곧이 들을리 만무했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였다. 서기는 왕씨가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자 그의 귀에 대고 사실을 말해 주었다. 왕씨의 눈에서는 대뜸 뜨거운 눈물이 주루루 흘러 내렸다. 왕씨는 그 후에도 여전히 신발을 만들어 생계를 하였는데 다른점이라면 공소사(상점)에서 열훌에 한번씩 사람이 와서 시장값보다 한배 더 주면서 얼마가 있으면 얼마를 가져간 것이다. 그리고 얼마후에는 정부에서 “혁명로인광영카”를 주어 달마다 생활보조비를 탈수 있었다.     1967년 왕씨는 적막하고도 처량한 한생을 마치였다. 그때는 “림부주석께서 영원히 건강하시라!”는 구호가 신주대지에 울려 퍼질때 였다. 왕씨가 사망 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군구 후근부부장(림표와 절친한 사이)은 림표에게 전보를 쳐서 무슨 지시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림표는 그런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부장은 상등관재를 마련하고 차 한대에 10여명 전사들을 데리고 가서 후사를 처리해 주었다. 유물을 정리할때 궤짝 제일 밑에서 붉은천에 꽁꽁 싼 3000원 돈뭉치가 나왔다. 부장은 그것을 들고 흐르는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도 고지식한 녀인도 있단 말인가!” 부장은 깊이 한탄하며 머리를 숙이였다.            허광달대장의 애정     허광달(원명 허덕화)대장은 풍채가 름름하고 미남이면서도 위엄있게 생긴 인물 체격을 가진 사람이였다. 그와 부인 추정화의 애정은 절개와 정조를 지킨 미담으로 전기적 색채가 농후하다.     허광달의 혼인도 림표의 첯번째 혼인처럼 부모가 도맡아 결정한 것이다.(림표보다 한살 어림) 그러나 허광달 부부는 그 혼인을 한평생 순결히 지키였다. 말하자면 “부모의 명”에 따른것이라고 할수 있다. 이런 사례는 공화국고급간부들의 혼인사에서 매우 드문일이다.     허광달은 호남성 장사 동상향 라복충의 극히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 났다. 그의 아버지 허자귀는 순박하고 로실한 농민이였다. 허광달은 7살때부터 지주집의 소몰이를 하였다. 천성이 매우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허광달은 마을에 있는 학교 창문 밖에서 학생들이 글읽는 소리를 틈만 있으면 였듣군 하였다. 어느해 엄동설한의 어느날 그는 글읽는 소리를 였듣다가 까무러치기까지 했다. 학교의 선생은 추희로였는데 그는 밖에서 글읽는 소리를 자주 훔쳐 듣는 아이에 대하여 언녕부터 주의를 돌리고 있었다. 아이의 학습정신에 감동한 추희로선생은 학비를 받지않고 허광달을 학교에 다니게 하였다.     반년후 추희로는 동창이며 친한 벗인 서특립이 창립한 장사사범학교에 초빙되여 교원을 하게 되였다.(모택동의 모교) 장사로 갈때 추희로는 허광달을 데리고 가려 했으나 가난 때문에 허자귀는 동의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추희로와 허광달의 두 백부가 적극 권고하고 설복한 결과 허광달은 장사사범에 다닐수 있게 되였다. 학교에서 허광달은 학습이며 품덕이 가장 우수한 학생이였다.     허광달이 14살 되던해 추희로는 허자귀와 토론하고 자기의 9살난 둘째딸 추정화와 혼인을 결정하였다. 당자들은 아이들이다보니 혼인이 무엇인지 물론 알지 못했다. 혼약을 한후 추정화는 장사에 가서 녀자직업학교를 다니였다.     925년17살에 허광달은 이미 공산당원이였다. 이듬해 그는 조직의 안배하에 황포군관학교에 가서 제5기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허씨네와 추씨네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년 13살이 된 추정화는 조숙한 셈이였는지 허광달에 대하여 몽롱한 애정이 있기 시작했다. 허광달은 황포군교에 간후 인차 추정화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군복을 입고 칼까지 찬 멋드러진 사진까지 한장을 보내였다. 추정화는 그사진을 보배처럼 한평생 귀중히 갖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그때 황포군교는 손중산이 세운거고 손중산을 따라서는 틀림이 없을거라고 믿었다.     1927년 허광달은 황포군교를 필업한후 국민혁명군에 배치 되였는데 그해9월 부상을 당하였다. 하여 손씨 농민집에서 치료를 하게 되였다. 18살 되는 그집 딸 손취화는 적위대원으로 허광달을 극진히 보살폈고 사랑하기에까지 이르렀다. 허광달은 자기의 혼인사를 그에게 말해주면서 그의 사랑을 거절 하였다. 취화는 십분 괴로웠으나 여전히 허광달을 세심히 보살펴 주었다. 얼마후 취화의 아버지가 허광달을 반동파들에게 밀고하였다. 취화는 생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심산밀림속에 전이 시키고 계속 보살펴 주었다. 취화는 허광달의 구명은인이였고 혁명전우였으며 또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처녀였다. 인물체격도 추정화보다는 훨씬 나은 처녀였다. 그러나 애정면에서 허광달은 추호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상처가 회복되자 그는 즉시 부대로 돌아 갔다.     1928년 허광달은 당의 지시로 국민당군대에 들어가서 병운공작을 하였는데 신분이 폭로되여 도망치게 되였다. 도중에서 동지들이 서로 흩어지다보니 그는 우선 집에 돌아가서 다시 조직을 찿기로 결심하였다. 오래만에 만난 허광달과 추정화의 기쁨은 이를데 없었다. 때는 이미 허광달은 21살, 추정화는 16살이여서 애정을 아는 청춘들이 였다. 허광달이 집으로 오자 두집 부모들은 8월20일(음) 그들을 제꺽 결혼 시켰다. 그들은 결혼으로 허광달을 집에 붙잡아 두자는 속셈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허광달은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자기는 혁명을 하는 공산당원이기에 수시로 희생을 각오하는 사람이고 정화에게 련루되는 피해를 방지하자는데서 였다. 결코 정화가 싫어서가 아니였다. 하지만 부모들의 결정에 따랐다. 결혼후에도 그는 매일 장사에 가서 조직과 련계를 가지였다. 아니나 다르랴! 결혼후 열흘째 반역자의 밀고로 허광달의 신분은 폭로 되였는데 마침 장사경비사령부에 근무하는 친척이 급보를 전해와서 그는 피신할수 있었다. 급보는 부모들과 정화에게 청천벽력이였다. 정화는 아연실색해서 “당신이 정말 공산당인가요?! 빨리 도망 하세요. 멀리 도망할수록 좋아요.” 여기까지 말한 추정화는 목이 메여 더 말하지 못하다가 좀 진정한후 말을 이었다. “당신이 걷는 길은 옳아요. 나쁜무리를 타도하지 않고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살길이 없어요.” 이렇게 급급히 갈라진 그들은 기적같이 꼭 10년후에 만나게 된다. 아니,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리저리 피신하며 도망친 허광달은 당조직과 련계가 끊어졌을뿐만아니라 북경의 어느려관에서 병들어 눕고 말았다. 아울러 병세는 날따라 엄중해만 갔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경지였는데, 이때에 한 처녀가 구원의 손길을 뻗쳐 올줄이야! 그는 려관집 주인의 딸 수씨처녀 였다. 수씨처녀는 북경녀자사범에서 학습중이 였는데 정직하고 열정적이고 아름답고 쾌활한 현대적 처녀 였다. 다다소소 허광달의 경력을 료해하고 있은 처녀는 그를 몹시 존중하였으며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허광달은 병이 차츰 회복되여 갔을뿐만 아니라 그의 방조로 지하당조직까지 찿게 되였다. 수씨처녀는 허광달을 존경하던데로부터 절절히 애모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허광달은 참으로 이 복지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안해를 생각할때 남편으로서의 책임감과 의무를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허광달은 이번에도 리지적으로 수씨처녀를 떠났다.     1929년7월 허광달은 상해에서 주은래가 령도하는 중공중앙군사간부훈련반을 거쳐 하룡이 지휘하는 홍2군단의 참모 등 직을 력임하면서 혁명투쟁을 하였다.     추정화는 결혼 열흘만에 남편이 도망한후 장사에 있는 본가로 돌아와서 명헌녀자중학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러다가 집이 더욱 가난해 지여 학업을 접고 한 방직공장에 들어가서 로동을 하였다. 남편이 공산당원이며 혁명을 하는 사람임을 아는 추정화는 항상 남편의 안위를 근심 하였고 또 몹시 그리며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수많은 나날을 보내였다.     1931년 부상을 당한 허광달은 상해에서 치료하면서 가명으로 집에 편지를 보내였다. 남편이 살아있었다! 추정화는 일희일비의 격정을 참을길 없어 아이처럼 엉엉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후 다시 여러달 감감 무소식이였다. 추정화의 초조한 심정은 무어라 말할수 없었다. 어느날 문득 쏘련에서 편지가 왔는데 그것은 남편이 보낸것이 였다.(상해에서 수술을 곧 하려는 때에 반역자의 밀고로 갑자기 쏘련으로 전이함,) 편지에는10장의 종이오리에 로문으로 쓴 남편의 주소까지 있었다. 회답시 이것을 봉투에 붙이라는 것이였다. 그리고 은전 백원을 보내여 왔는데 사범학교에 다니라는 부탁이였다. 추정화는 곧 그대로 하였다. 하지만 10장의 종이오리로 한 편지는 다시 종무소식이 였다. 추정화의 가슴속에서는 자꾸 불길한 생각이 솟아 올랐다.     1937년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서특립은 추정화를 연안항일군정대학에 보내는것이 좋겠다고 추희로에게 건의 하였다. 아버지와 딸은 대뜸 찬동 하였다. 하여 추정화는 허광달의 녀동생 허계량과 함께 연안으로 달리였다. 여러날이 걸려 연안에 이른 그들은 몹시 피로 했다. 그들이 한바탕 푹 자려고 하는때에 꺽두룩한 군인이 불쑥 집으로 들어 왔다. 삼씨기름 등잔불에 비쳐진 그는 허광달! 6년이나 소식이 없던 남편이였다!     그간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 젊고 름름하고 고급군사간부인 허광달이 연안에 나타나자 사람들의 주의력이 집중 되였다. 특히 처녀들이 그를 눈박아 보았다. 많은 녀작가 녀연원 녀기자 녀군관 등 녀자들이 그에게 경모의 감정을 품었으며 어떤 녀자들은 사랑을 고백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두말할것없이 모두 거절을 당하였다. 하여 어떤 녀자들은 그를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까지 하였다. 하지만 보다싶히 허광달이야말로 가장 감정을 알며 가장 감정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였다. 그는 시종 자기의 결발지처를 잊지 않았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은근히 권념조로 “당신이 안해와 헤여진지 10년이나 되고 또 이 란세에 만약 안해가 이미 없어졌다면 기다리는것이 헛짓이 아닌가.”라고 말하니 허광달은 견정불의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였다. “나는 기다리겠다. 만일 그가 죽지 않았는데 내가 다른 사람을 얻는다면 그의 마음을 너무도 상하게 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이 여러해동안 그는 나를 위하여 그렇게 많은 희생을 하며 나를 기다렸는데… 만약 그가 정말로 죽었다해도 그의 묘를 꼭 보고야 승인할것이며 한줌의 흙을 덮어줄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 다시 얻는 일이 없을 것이다.” 추정화가 연안으로 오려할때, 하광달과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은 림백거는 서안에서 허광달에게 전보를 쳐서 오는것을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세심한 림백거는 적지않은 사람들이(특히 고급간부들이) 혁명에 참가한후 부모들이 결정한 혼인을 추호의 미련도 없이 뒤엎는것을 보았기에, 혹시 허광달의 생각은 어떻겠는지?... 그래서 전보를 쳤든 것이다. 전보를 받은 허광달은 너무도 놀랍고 기뻐서 마구 날뛰며 춤을 추었다. 정화가 무사히 살아 있었을 뿐만아니라 혁명에 참가 하겠다고 까지 하니 희사가 하늘에서 떨어진것만 같았다. 허광달은 즉시 회답전보를 날렸다. 그러나 추정화는 그런저런것을 알기전에 이미 연안길에 올랐다. 허광달 부부가 만난후 항대의 동사들과 학원들은 교육부장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린 녀자가 이토록 평범한 녀자임에(인물체격도 언변도) 모두 놀랐다… 그리고 허광달에게 심심히 탄복 했다.     그때로부터 그들 부부는 줄곧 함께 있었다. 이듬해, 결혼 10주년을 맞으며(그해 추정화는 입당) 허광달은 금할수 없는 격동을 시로 써서 안해에게 주었는데 추정화는 그것을 진귀한 보물로 보관하며 한평생 감미로움을 만끽 하였다. 1949년 허광달 부부는 란주해방전쟁에 참가한후 그곳에서 개국성전을 맞게 되였다. 그날 그들 부부는 무량한 감개로 밤을 새우며 지나온 나날들을 회고 하였다. 그날밤 추정화는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당년에 내가 어찌 오늘과 같은 날을 생각 하였겠어요. 당신과 만날날만 바라면서 만나기만 하면 더 바랄것이 없다고 생각 했죠.” 얼마나 진지한 순정이며 진솔한 고백인가!...     1950년 허광달은 중국인민해방군 장갑병사령부가 성립 되면서 사령원으로 임명 되였다. 그리고 추정화는 사령부기관당총지서기가 되였다. 국가의 고급 장령이면서 령도인인 허광달은 부인을 대동하여 중대한 례의장소에 나가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추정화는 그런 활동에 참가하는것을 싫어 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젊고 아름답고 눈부신 부인들 앞에서 자신은 너무도 늙고 평범하여 볼품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남편의 형상에 손상을 준다는데서 였다. 그러나 허광달은 전혀 다른 관점이였다. 그는 중대한 활동마다 꼭꼭 부인을 대동하여 참가 했다. 그는 매번 부인을 이런말로 설복 하였다. “국가의 위엄있는 례의는 겉치례에서만 표현되는것이 아니다. 주요하게는 국가의 령혼, 사기, 민풍과 인민의 정신면모에서 보게 된다. 이면에서 당신은 외국의 무관부인들과 당당하게 비교할수 있다. 조강지처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못한다는 말과 같이 이것은 최저의 사람도덕이다. 황차 당신과 나는 수 년의 환난부부가 아닌가!”              태산의 송죽같은 진소민     동악의 태산은 오악에서도 제일 이름 높은 태악이다. 태산의 상상봉에 조용히 서 있는 몇그루의 낮으막한 송죽은 음미하며 보면 볼수록 감회가 깊다. 소나무는 변함없는 그 푸름으로 절개를 상징하고 대나무는 꺾길지언정 굽으러 들지 않는 특성으로 정조를 표현한다. 진소민이 바로 그 송죽과 같은 녀인이다. 그의 32주기제를 보내며 고인을 간단히 회고해 본다.     진소민은 산동 수광 사람으로 1902년에 태여났다. 그는 13살에 일본 면사공장에서 아동공으로 일했으며 192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 하였다. 1930년 스물아홉의 로처녀 진소민은 임국정과 결혼 하였다. 당시 임국정은 산동성위서기였는데 청도에서 세집을 맡자고 하니 부부가 아니면 세집을 주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하여 조직에서는 진소민을 그의 안해로 가장시켜 세집을 맡게 했다. 후에 그들은 애정이 생기면서 가짜부부가 진짜부부로 되였다. 1931년10월 반역자의 밀고로 임국정은 체포 되고 그해 11월에 사형당했다. 1년 남짓 부부생활을 한 진소민은 서른살에 과부로 되였다. 그후 한평생 재혼을 하지 않았는데 그를 마지막까지 지켜준 반려는 임국정의 사진과 작으마한 도자기 조각상이 였다.(강서에서 남편을 기념하여 특별히 만들었음) 그야말로 “일부종신”(한 남편을 지킴)을 지킨 렬녀라 하겠다.     지난세기 20년대부터 직업 혁명자로 나선 진소민은 우수한 공산주의전사였고 인민의 좋은간부였고 좋은누나였다. 그는 당의 중요한 위치에서 여러가지 령도직무를 력임하면서 혁명사업에 충성을 다 하였다. 군에서도 사업했고 정부에서도 사업 했으며 7기 중앙후보위원, 8기중앙위원이였고 인대와 정협의 상무위원 전국총공회부주석을 지내였다.     1968년10월13일부터 31일까지 중공중앙8기12차 전체회의가 북경에서 진행 되였다. 중앙위원인 진소민은 당연히 회의에 참가해야할 사람이였으나 총공회반란파들이 회의통지서를 깔아두고 계속 그를 투쟁하였다. 진소민은 문화대혁명에 대하여 처음에는 소수의 자산계급사상이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교육을 진행하는 것인줄로 알았다. 하여 적극적으로 군중을 발동하며 운동에 뛰여 들었다. 그는 기층에 내려가서 운동의 진행정황을 료해하는 한편 총공회당조 령도들에게 군중속에 들어가서 운동에 대한 령도를 가강할것을 요구 하였다. 동시에 군중들에게 자신의 착오와 결함, 부족점들을 대자보로 지적 비판하며 총공회 사업에 대해서도 비판의견을 대자보를 붙이라고 호소 하였다. 그런데 운동은 류소기를 타도하는 방향으로 치달으며 건국후 그때까지 17년의 모든것을 부정 하였다. 자산계급반동로선, 수정주의, 검은선이 통치했다고 하면서 모든 로간부와 각급령도를 비켜 세우고 비판투쟁을 진행 하였다. 당신들은 검은사령부에 속하는 사람들이고 당신들의 검은사령은 류소기라는 것이였다. 해방전과 해방후 장기간 류소기 신변에서 그의 령도를 받으며 사업해온 진소민은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으로 그런 견해를 절대로 동의할수 없었다. 그는 이것은 딴심보를 품은 일부 사람들의 작간이며 로간부들을 밀어내고 권력을 빼앗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을 간파 하였다. 진소민은 자기의 정치적 관점을 조금도 숨김이 없이 공개적으로 반란파들과 맞서고 문화대혁명과 대항 하였다 그는 두말할것 없이 극히 완고한 “보황파”, “검은맹장”, “반동분자”로 찍혀 호된 투쟁과 참혹한 학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회의직전 주은래는 직접 사람을 보내여 진소민을 데려오게 하였다. 반란파들은 “진소민은 검은패거리며 반역자다. 중앙수장(강청)이 지시했는데 그는 참가자격이 없다.”하며 맞섯다. 파견을 받고 간 사람들은 “주총리의 지시를 누구도 막지 못한다.”하고 엄정히 선포하였다. 이렇게 진소민은 8기12차 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회의는 소조로 나뉘여 소위 “2월역류”의 “검은맹장”들인 진의 엽검영 담진림 리부춘 리선념 등 로일대 혁명가들을 포위공격 하였다. 다음은 류소기전안조에서 만든 “심사보고”를 토론 하였다. 그리고 위원마다 태도표시를 해야 했는데 진소민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고하였다. 하여 그는 여러날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듣는체도 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심사보고”는 사실과 맞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모순이 많았다.     10월31일! 전체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에서는 류소기에 대한 “심사보고”와 “당에서 영원히 제명”하는 결정을 통과하는 절차를 거행하게 되였다. 대회가 시작되자 집행자 림표는 “심사보고”를 공중에 내여 흔들며 “이것을 한개 재료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 이것으로 류소기가 영원히 번신하지 못하게 한다. 지금부터 표결을 하겠는데 동의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 132명이 손을 들었다. 림표는 또 공식적인 어조로 “반대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말하였다. 진소민 한사람이 손을 들었다.     페회후 강생은 진소민과 따지고 들었다. “무엇때문에 심사보고를 동의하지 않소?” “나는 심사보고의 그런 사실들을 믿지 않소. 적발한 사람의 재료도 믿지 않소.” “왜서 류소기의 출당을 동의하지 않는거요?” “이건 나의 권리요.” “그럼, 당중앙을 믿지않는 거요?” “강생동지! 나는 당원이요.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무슨표를 내든지 이건 나의 권리요. 나의 그 한표에 그렇게 많은 내용이 포함되여 있지 않소. 무한히 고도에 끌어 올리지 말기를 바라오.”     그날, 진소민은 회의실에서 쓰러졌는데 마음 좋은 운전수가 집까지 모셔 갔다. 그후 진소민은 줄곧 병석에서 신음하며 비인간적인 투쟁을 당하였다.     이듬해 10월 진소민은 림표의 “전비소산” 명령으로 해서 악예변구의 로 혁명근거지였던 라산으로 갔다.(병이 중하여 사람들이 기차에 들어 올렸다) 이곳은 당년에 그가 군중을 령도하여 항일을 하였던 곳이다. 당지의 군중들은 진소민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감독인원들을 아랑곳 하지않고 진소민을 보살폈다. 하지만 매우 차한 환경에서 그의 건강은 몹시 악화 되였다. 림표가 죽으후 그는 비로서 북경으로 돌아와서 치료를 받게 되였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회복되지 못했다.     4인패가 망한후 그는 몹시 기뻐하면서 “이젠 당과 국가가 희망이 있게 되였다. 나도 눈을 감을수 있게 되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신변의 사람들에게 그 어떠한 정황에서도 진리를 견지해야 한다고 당부 하였다. 림종에 그는 두 조카에게 “나는 가야겠다. 너희들은 나처럼 당당정정한 사람이 되여라. 제손으로 살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줄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내가 죽으면 돈을 쓰지말고 내가 한평생 제일 즐겨 입던 그 곤색낡은옷을 입혀 다오. 로동하기 편리하게.”     1977년12월14일 밤, 진소민은 76세의 빛나는 한생을 마치였다. 그는 인민들에게 사심도 두려움도 없는 혁명정신을 청사에 길이 빛날 한표에 담아 남겨 주었다.                                                                                                          10.1
48    인민의 총리 댓글:  조회:1877  추천:2  2014-01-13
                    실화                                       인민의 총리                                                    주은래총리 서거 33주년에 즈음하여                                                                                                                                   회령     금년 1월8일은 새중국 제1임총리 주은래 서거 33주기가 되는 기념일이다.      주은래총리는 26년을 총리직위에 있으면서 자신의 전부의 심혈과 정력을 남김없이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였다. 그이는 사업에서 시종 최선을 다 하였다. 그러나 생활면에서는 항상 최저표준, 엄격한 요구를 했으며 추호의 특수화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이께서는 우리나라 인민들의 근검절약, 간고소박한 전통미덕을 충분히 발휘 하였다.     건국후 주총리는 줄곧 중남해 서화청에서 살면서 사업하였다. 이 집은 청나라 선통년간에 지은 구식 단층주택이다. 집안광선은 어둑스레하고 방바닥은 조습하고 문은 쯤이 많아 세찬바람이 불면 책상에 먼지가 한벌씩앉았다. 수년간 이런 집에서 살며 사업하다보니 주총리는 늘 무릎이 아파하였다. 하지만 그이는 여러차례나 집 수리를 거절하였다. 1959년 겨울 비서는 주총리와 부인 등영초가 북경에 계시지않는 틈을타서 집을 보호성 수리를 했다. 그리고 몇가지 낡은기물을 새것으로 바꾸었다. 결과 비서는 주총리의 엄한 비판을 받았다. 주총리께서는 낡은기물을 제대로 들여 올때까지 밖에서 살다가 비로서 서화청으로 돌아왔다. 그후 그이께서는 총리판공실주임 동소붕과 행정비서 하겸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였다. “내가 총리로서 좋은 본을 보이면 넓은범위에서 좋은 영향을 주게 되고 나쁜 본을 보이면 역시 넓은범위에서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때문에 나는 반드시 자신에 대해 엄격히 요구해야한다. 동무들이 이렇게 많은돈을 들여 나의집을 잘 꾸며 놓으면 군중들이 어떻게 볼것같은가? 일단 모두가 나를따라 배워 집을 수선한다면 군중들 속에서 어떤영향이 조성 될것같은가? 이점을 왜서 생각하지 않았는가?!” 서화청을 수리한 일로해서 주총리는 국무원회의에서 여러번 자아검토를 했다. 그러면서 “동무들은 절대로 나의 착오를 중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주총리는 음식면에서도 간단하고 청담했다. 1/3은 잡곡이고 고기가 조금 들어간 채 한접시 나물채소 한접시 뿐이였다. 남는 밥과 반찬은 절대로 버리지 않고 다음끼에 잡수셨다. 사람들이 리해되지 않아할때마다 그이는 명랑한 어조로 “이것은 인민군중들이 먹는것보다 훨씬 낫다. 과거와는 비할수도 없다. 우리는 근본을 잊으면 안된다.”고 말하였다. 국민경제 곤난시기(지난세기 60년대 초) 그이와 모택동은 함께 앞장에서 고기, 물고기, 닭알을 먹지않는 규정을 세웠고 또 주총리는 자기와 등영초의 매달 량식표준을 각기 15근, 13근으로 낮추었다. 그이는 “모주석은 당중앙에서 앞장서고 나는 국무원에서 앞장선다. 군중들이 곤난할때 령도가 특수화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주총리는 자신의 식생활이 간단할뿐만 아니라 자기의 국내손님들 대접도 간단하게 했고 종래로 공가의 돈을 쓰지않았다.      매번 시찰을 나갈때면 그이께서는 항상 간단하게 행차를 하였다. 앞에서 마중하고 뒤에서 옹위하며 기세가 어마어마하고 틀거지를 내며 위풍을 떨치지 않았다. 그리고 화식에 대하여 꼭꼭 문의하며 신변의 공작인원들로 하여금 자신의 식비를 제대로 결산하게 하였다. 한번은 항주 루외루에서 그이가 몇사람을 초대한바가 있었는데 성의 배동한 간부가 식사비를 지방에서 물겠다고 하였다. 하여 서로 싱갱이 끝에 총리가 20원을 기어이 냈는데 그러고도 그이는 비행기에 오를때 아무래도 식사비를 적게낸것 같아서 10원을 더 내고 떠났다. 그날 식사비는 모두 19원이였다. 루외루 복무원은 결산명세와 정황을 상세히 설명한 편지와 함께 승천(거스름돈)을 총리에게 부쳐 보냈다.     주총리가 소집한 각종회의는 흔히 시간이 길어서 공작식사를 준비해야할때가 많았다. 식사를 하면서 회의를 계속 하였는데 총리께서는 공작찬은 꼭 가정의 일반끼니처럼 해야 한다고 명확히 규정해 놓았다. 하여 보통 죽과 짠지, 혹은 우동 이였다. 그이께서는 “이런 식사는 매우 경제적이며 실속이 있다.”고 하시면서 만족해 하였다. 어느 한번 늦게 회의에 온 하룡원수가 “와아! 국가의 경제는 호전 되였는데 총리네 밥상에서는 왜서 좋은형세가 체현되지 않는가?”하고 우스개를 하였다. 총리는 웃으면서 “장래에 나라가 부강해 지어도 간고소박한 전통은 잃으면 안되지 않겠는가. 그래서…”하고 말하여 한바탕 유쾌한 웃음통이 터졌다.     주총리는 옷과 생활용품에서도 일관적으로 간고소박하였고 근검절약하였다. 그이 속옷은 깁고 또 기운 것이였으며 신은 수리하고 또 수리한 것이였다. 양말도 그랬다. 그이 손목시계는 줄곧 “상해”패 국산품이였다. 세수수건도 기운것이였고 욕조는 여러군데가 사기칠이 벗겨진 것이였다. 침대는 널판자 침대였고 쏘파는 구식의 낡은 것이였다. 그이의 잠옷은 1950년 1월에 쏘련 방문시 맟춘것인데 깁고기워서 원래의 모습이 다 없어졌다. 하지만 26년 그이를 동무해 주었다. 그러니까 총리로 되여서부터 사망할때까지 그이를 감싸준 것이다! 공작인원들이 새것을 갖추자고 하면 그이는 항상 “낡은것도 능히 입을수 있지 않는가. 간고소박은 우리 공산당인들의 본색이다.”하고 엄숙히 말씀 하셨다.     주은래총리의 가정경제조건으로부터 볼때 생활은 본래 잘 살수 있으며 지어는 매우 잘 살수 있었다. 그러나 나라와 인민들이 가난한것을 생각할때 그이의 심정은 항상 괴롭고 불안 하였다. 그이는 늘 버릇처럼 자신과 타인에게 이런말을 자주 했다. “우리 령도간부들은 만족을 알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물질대우가 이미 충분하다고 느껴야 한다. 나아가서는 과분하다고, 좀 적었으면 좋겠다고 느껴야 한다. 인민들이 우리에게 많이주면 불안감을 느낄줄 알아야 한다. 간고소박이 우리의 미덕으로 되게 하여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쉬원해지게 되며 절약할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러사람의 복리를 해결할수 있으며 나라에도 저축이 있게 할수있다. 이래야만이 우리나라를 더욱빨리 사회주의 강국으로 건설할수 있다.” 혹시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는데, “주은래와 등영초의 공자수입이 당시로는 매우 높았으니, 두분께서 일관적으로 그렇게 아껴먹고 아껴썼다니까 저축이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기실은 그렇지않다. 주은래의 매달 공자는 404원80전이고 등영초는 342원70전인데, 1955년7월 국가에서 공자제를 실시해서부터 1976년1월8일 주은래가 사망할때까지 두분은 생활비외에 쓰는곳이 많았다. 주요하게는 다섯가지에 썼다. 친척에게 부조, 생활이 곤난한 신변 공작인원들과 경위전사들께 부조, 렬사후대 양육비, 개인적손님 초대비, 당비를 더 낸것 등이다. 초보적 통계를 보면, 친척부조에 36645원50전, 신변공작인원, 경위전사부조 10218원60전, 자원으로 당비를 더 낸것이 3차인데 14000원이다. 이 세가지에서만 나간돈이 60864원10전이다. 이것은 12년5개월의 공자다. 저축해둔 돈이 얼마나 있을것 같은가?!...     주은래총리는 돈도 물건도 개인것으로, 말하자면 유산같은것으로 남긴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이는 자신의 골회마저도 조국의 산하에 비료로 뿌려달라고 여러번 유언하였다.(등영초와 당중앙에서는 그대로했다.) 20여년후 부인 등영초가 사망하면서 그의 “개인재산”은 더욱 철저히 정리되였다. 국가의 물건은 국가에 돌리고 사인용품은 혁명전통교육용으로 전람관에 바치였다. 거기에는 내의와 잠옷 끌신은 물론, “상해”패 손목시계와 치솔, 절반남짓 쓴 “백옥”표 치약까지 있다.(국산임) 등영초가 가지고 있던 사인편지와 사진들도 연구자료로 당안관에 들어 갔다. 주은래는 그야말로 말그대로 빈 손으로 인간세상에 왔다가 빈 손으로 사라졌다. 아니다! 주은래는 령도간부들, 당원들, 인민들, 후대들…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만고천추에 길이 빛날 형상을 지구에 남겼다.(련합국에서 반기를 내리여 애도했다.) 그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며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     주은래총리는 종래로 례물을 받지 않았다. 되돌릴수 있는것은 돌리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가배로 값을 지불한후 유관부문에 보내여 처리했다. 절대로 안면을 보지 않았다. 1961년 그의 고향 회안현에서 토특산 련꽃씨, 국수 등 례물을 보내온 일이 있었는데 주은래는 비서를 시켜 사랑하고 관심하는 마음은 알지만 당의지시와 규률을 위반하는 이런 행동은 나쁘기에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편지와 함께 돈 100원을 보냈다. 그리고도 강소성위, 회음지위, 회음현위 책임자에게 중앙의 통지(칭커쑹리를 엄금할데 관한 통지)를 다시 한번 참답게 학습하며 철저히 락실 집행할데 대한 회시를 친필로 하였다. 외빈들이 증송한 례물에 대해서도 그이는 그것을 종래로 자기의 것으로 하지 않았고 우의의 상징으로 국가에 바치였다. 어느 한번, 한 렬사의 딸이 서화청 객실, 판공실, 침실에 아무런 장식품도 없는것을 보고 너무도 이상해서 총리에게 영문을 물은바가 있었다. 그때 총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해 주었다. “내가 총리기 때문에 그들이 준 것이다. 만약 내가 총리가 아니라면 그들이 주겠느냐? 그들이 준 것은 우리나라에 준 것이지 이 주은래에게 준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그것들을 모두 가진다면 그것은 무슨 행위겟니?” 이 한마디 말은 렬사의 딸로 하여금 어떤것이 렴결봉공인가하는것을 심각히 알게 하였다.     주은래와 등영초의 애정은 오늘의 젊은이들까지도, 세인들이 모두 잘 알다싶이 각별히 심후 했다. 그들은 초혼으로 그야말로 흑발이 백두옹이 될때까지 백년해로를 하였다. 두분은 같은 시각에 혁명의 길에 나섯고 평생을 중요한 위치에서 자신을 공헌 하였다. 등영초는 재능, 경력, 위망, 그어느모로나 당과 국가의 주요간부로 될수 있는 당당한 자격자 였다. 주총리는 안해와 높은 정치적 표준을 견지 했으며 엄격 했다. 그는 부부관계에 정치관계까지 맺어지는것을 절대로 금지했다. 새중국이 탄생할때 적지않은 부녀계 지명인사들이 당과 국가의 령도직위에 등용 되였다. 송경령, 채창, 하향응, 리덕전, 사량… 등 녀성혁명가들이 부장급 이상의 중요직무를 담임 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주총리가 직접 각계인사들과 협상하고 선발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등영초만은 주은래가 절대로 동의하지 않아 아무런 “벼슬”도 하지 못했다. 이에대하여 도무지 리해가 되지않아 강선운녀사(황포군교 1기생이며 남창기의위수사령 팽간신렬사의 부인)가 주총리에게 직접 물은바가 있다. 그때 주총리는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해주었다. “이 문제를 당신이 처음으로 제출하는것이 아니다. 과거에 이미 말한 사람들이 있었고 건국초기에도 당내외 인사들이 여러번 제출한바가 있다. 지어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극진히 권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나는 총리고 등영초는 무슨부장이라 할때 나 이 총리와 그를 분별하기 힘들어 진다. 사람들은 그의ㅡ 부장의 말을, 또 그가 한 일을 내가 지지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렇게 가정관계, 부부관계, 정치관계가 한데 엉키면 당의 사업에 불리하며 총리사업에 불리하다. 내가 하루라도 총리로 있는한 등영초는 령도벼슬을 절대로 못한다.” 주총리의 결정을 등영초는 충분히 리해했을뿐만 아니라 견결히 지지했다. 림표, 엽군, 강청들과 너무도 대조적이 아닌가!... 정치적 대우에서뿐만 아니라 생활향수에서도 주총리는 등영초에 대하여 종래로 엄격하였다. 1955년7월 공자급별을 확정할때 중공중앙에서는 채창은 3급, 등영초는 5급으로 비준 했는데 주총리가 친히 6급으로 깎아 내리었다. 1974년 모택동은 등영초를 인대부위원장으로 비준 하였다. 그러나 주총리가 그것을 깔아놓고 공개하지 않았다.(감추었다.) 1982년4월 등영초는 후대들과 이런말을 하였다. “지금 나는 인대부위원장이고 정치국상무위원이며 중앙기률검사위원회서긴데 이러한 공작들은 모두 당에서 나에게 분배해 준것이다. 그러나 너희들 큰아버지가 생전이라면 절대로 못하게 했을것이다. 물론 나도 하지 않았을 거고.”     주은래총리는 인정이 매우 풍부한 사람이다. 그는 타인의 사정을 헤아려 주며 될수록이면 도와주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친척에 대해서는 관심하고 방조함에 원칙이 있었다. 그는 인민이 준 권력으로 사리를 도모하지 않았고 친척들이 추호의 특수화도 못하게 하였다 위법란기 되지못한 짓은 두말할것이 없다. 그이가 몹시 증오한 것은 “손을 내밀기 좋아하며 뒤문거래를 하며 한사람이 벼슬을 하면 온 가정이 복을 누리며 한사람이 출세를 하면 개 닭도 승천하는” 부정부패의 추악한 사회현상이였다. 주총리는 친척들의 착오적 사상을 어떻게 대할것인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친속에 대하여 도대체 당신이 영향을 받을것인가 영향을 줄것인가? 이것은 한개 령도간부로서 우선적으로 대답해야 하며 해결해야할 문제다. 만약 잘 처리하지 못하면 당신이 그들을 영향줄수 없을 뿐만아니라 그가 오히려 당신을 영향줄수 있다.” 주은래의 친동생 주동우는 지난세기 20년대에 혁명에 참가한 사람이다. 건국후 그는 공업부에서 보통인원으로 사업 하였다. 후에 병으로 내무부참사로 안배 되였는데 이로해서 주은래는 내무부부장 증산에게 여러번 의견을 제출했다. 후에 또 한차례의 회의에서 이 일을 말했는데 “주모의 동생이 내무부참사로 있는데 그어떤 리유에서였든 영향이 나쁘다. 공업부에서는 능히 일할수 있었기에 나는 간섭하지 않았다. 지금은 참사가 되여 공짜로 월급을 타는데 이것은 고려해볼 문제다.” 회의후 주은래는 내무부에서 자기동생을 병퇴직 시키라고 엄숙히 요구했다. 연후 동생에게 자기돈으로 달마다 보조를 해 주었다.     주은래와 등영초에게는 자녀가 없다. 그들은 친속의 자녀들을 매우 귀여워 했다. 주은래는 그들에게 줄곧 타이르기를 “너희들은 자기에게 엄격한 요구를 해야한다. 대두적으로 당과 국가의 각종 정책규정을 지켜야 하며 절대로 친척의 직권을 리용하여 특수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두분은 그들에게 엄격한 “가법”을 규정해 주었는데, 전문적으로 우리를 보기위해서는 북경으로 오지 못함. 북경에 오면 일률로 초대소에 들며 식당에서는 줄을 서며 자기돈으로 밥을 사 먹어야 하며 돈이 없으면 우리가 화식비를 물어 준다. 공가의 자동차를 쓰지 못한다. 주은래의 친척이라는 것을 말하지 못함. 생활은 간고소박해야 하며 특수화를 못한다. 이런 조항이였다. 그는 친속자녀들에게 지망을 선택할때 당과 국가의 수요를 제1지망으로 하며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고 항상 교육 하였다. 1961년 중앙에서 성시인구를 축감할데 대한 호소를 한후 주총리는 친조카부부가 솔선적으로 향응할것을 요구하였다. 하여 그들부부는 북경을 떠나 고향 회안으로 갔다. 중학을 졸업한 친조카 주병화와 주병건(녀)은 각기 연안과 내몽골 농촌에 자리 잡았는데 1970년말 둘이 모두 당지에서 참군하게 되였다. 병건이는 기쁜소식을 큰아버지에게 알리였다. 그런데 큰아버지가 “군복을 벗고 농촌으로 돌아가라.”고 하실줄이야?! 남매는 깜짝놀라 아연실색 하였다. 그러나 차근 차근 하시는 큰아버지 말씀을 들어보니 도리가 있었다. “얘들아, 너희들의 참군은 비록 수속에는 부합되지만 생각해 보아라. 그곳에 그렇게 많은 청년들이 있는데 왜서 너희들을 골랐겠니? 우리들의 얼굴을 본게 아니겠니? 우리는 이런 특수화를 절대로 할수 없다. 조금치도 할수 없단다. 참군하는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농촌이 간고해서 일부 령도간부들은 자녀를 참군으로 빼 돌리는데 인민군중들 속에서 영향이 아주 나쁘단다.” 남매는 기꺼히 제고장으로 돌아갔다.     주은래는 일부 고급간부 자녀들의 성장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에 비추어 중공중앙과 국무원 직속기관 책임자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대성질호 하였다. “우리의 령도간부, 우선 나를 포함한 407명의 사람들은 마땅히 본보기가 되여야 한다. 작은나으리를 만들어 내지 말아야 한다. 늙은나으리도 반대해야 하며 작은나으리도 반대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후대들에게 할말이 없게된다. 우리는 사회주의 국가다. 봉건사회와 자본주의사회처럼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력사를 거울로 할수있다. 진시황은 능히 중국을 통일할수 있었지만 진2세를 너무도 어루만졌다. 결과 진왕조는 그의 손에서 망하고 말았다. 우리는 절대로 자기의 자녀를 나라와 사회의 골치꺼리가 되게해서는 안되며 우리사업의 전진을 방해하게 해서는 안된다. 자녀들에 대해서 요구를 높히고 엄하게 책망하는것은 응당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 좋은점이 있고 그들의 진보를 독촉할수 있다.” 주총리의 이 말씀은 오늘도 경종으로 되며 지도적 의의가 있다.     무엇 때문에 주총리는 일생을 시종여일 솔선수범하며 엄격히 자률하고 간고소박 렴결봉공 할수 있었는가? 그 근본적인 원인은 맑스주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굳게 수립했기 때문이다. 즉 사상이다. 사람의 행위는 사상의 지배를 받는다. 정확한 행위는 정확한 사상이 지배한 것이다. 중국공산당인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의 핵심은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이다. 주은래는 일찍부터 절대다수의 사람들의 리익을 도모하는것을 숭고한, 유일한 인생목표로 추구해 왔다. 하여 그는 자신을 시종 인민의 근무원(공복ㅡ공무원)으로 인정했고 충실히 복무 하였다. 민주혁명시기 그는 “성근하게, 로실하게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겠다. 소처럼 노력분투하며 동지들과 일치단결하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길에서 죽겠다.”고 말했다. 사회주의건설시기 그는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은 곧 우리의 국가, 민족, 아름다운 미래를 위한 것이며 전인류의 광명한 전도를 위하여 복무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우리들에게 “공산당원은 누구를 막론하고 만강의열정으로 부지런히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고귀한 품질이 타락하여 자산계급의 비렬한 개인주의로 되는것을 반대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신변의 공작인원들에게 경상적으로 “1분의 시간을 쟁취하여 1분의 공작을 더 하자. 나는 늙었기에 인민을 위하여 복무할 시간이 많지 않다. 시간을 앞당겨 공작해야 옳다.”하고 밀하였다.     그는 언행이 일치했고 표리가 일치 했다. 인민들의 우환을 근심했고 인민들의 행복을 기뻐했다. 그이는 군중들이 급해하는것을 급해했고 군중들이 생각하는것을 생각 했다. 인민들이 질고에 시달릴때면 항상 침식을 잃었고 동분서주 하였다. 주은래총리는 인민군중들이 한재 수재 풍설 지진 등 엄중한 재해에 부딫히면 곧 그곳으로 친히 달려갔다. 나라의 전반 대소사를 그는 관활하면서 많은 일들은 친히 틀어쥐고 처리 하였다. 1956년 광서 부분적 지구에서 아사현상이 발생 했을때도, 1958년7월 황하특대홍수, 1961년5월 하북에서 공공식당과 대약진 편차로 문제가 발생 했을때도, 1966년3월 형태대지진, 문혁시기 좌경로선이 고도로 득세하여 횡포를 마구 휘두르는 그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등소평 등 100여명의 간부를 보호한것…그가 직접 지휘하고 처리한 중대한 허다한 사업들을 여기서 일일히 다 꼽을수는 없다!... 그는 생명의 마지막 경각에도 수술대에서 중국의학과학원 리빙교수를 불러 운남 석광공인들이 폐암에 많이 걸리는데 즉시 내려가서 조사를 하고 대책을 연구하라고 십분 견결한 어조로 분부 하였다. 서거하기 바로전에는 오계평의사가 병상 곁에 서 있는것을 보고 “오선생, 나는 별일 없으니 다른 사람들을 가서 돌보시오.”하고 부탁 하였다. 이 말씀은 그이가 생전에 한 마지막 말씀이다. 주은래총리는 만년에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자”라고 새긴 기념장을 가슴에 항상 달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오직 헌신만 하며 종래로 사욕을 챙기지 않으며 한이 있는 생명을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데 몽땅 바치리라는 위대한 사상과 인격, 고상한 정조의 진실한 표현이다.     각개력사시기 특히 사회주의현대화건설시기에 인민을 위하여 일정한 기여가 있었던 일부 령도간부들이 왜서 좋게 끝나지 못하고 시대의 락오자 지어는 부화타락 퇴화변질하고 말았는가? 우리는 주은래가 참답게 당성수양을 견지하고 부단히 사상개조에 힘쓴 감동적인 사적들에서 그 정확한 답안을 쉽게 찿을수 있다. 당원들의 사상개조를 중시하는 것은 중국공산당이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할수 있는 근본이며 전투력을 제고할수 있는 근본이다. 주은래는 공산당인들의 사상개조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비상히 강조 하였다. 그는 “무산계급은 기타 로동자들을 단결, 교육, 개조시켜야 할 사명을 짊어 지고있다. 하지만 우선 자아개조를 해야한다. 자아개조를 능히 하는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을 개조 시킬수 있다…각종 낡은 정치영향과 습관세력은 우리에게 여전히 영향을 준다. 하여 사상 작풍상의 문제가 더욱 많게 되였다… 사상개조는 공기처럼 없어서는 안된다.”라고 엄숙히 지적 했다. 그이는 자신의 좌우명은 “늙을때까지 일하며 늙을때까지 배우며 늙을때까지 개조한다.”는 것이라고 여러번 말씀 하였다. 그는 전당의 사상개조를 중시하였을 뿐만아니라 자신의 모범대두작용, 이신작칙, 자각적이고도 엄격한 사상개조를 더욱 중시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바가 있다. “나는 금년에65살이다. 당성수양을 잘 했기에 이젠 더 개조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하겠다… 각종관계와 각종사물들이 개인의 사상에 영향 준다는것을 승인해야 한다. 경상적으로 반성하며 동지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경상적으로 해야 한다… 나는 지금도 개조중에 있다. 나는 달갑게 선두가 되겠다… 간부의 정치소질의 좋고 나쁨은 당풍의 좋고 나쁨에 직접 영향주며 당의로선, 방침, 정책제정과 집행에 직접 관계가 된다.” 1961년 그는 일부 령도간부들이 자아사상개조를 홀시하는 경향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호되게 질책 하였다. “자아개조는 진보를 위한것으로 광영한 것이다. 전문 남만 개조시키는 사람은 없다. 남을 개조시키려면 자신부터 먼저 개조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대성질호를 해야 한다. 너부터 먼저 개조 하라!” 령도면 우선 령도다워야하며 연후에 백성을 령도하라는 것이였다. 제코가 석자나 되는 주제에 누굴 훈계하며 군중들 앞에 “령도”노라고 나설 면목이 있는가!... 주은래총리의 마디마디 말씀은 오늘도 경종으로 되며 우리들의 인생지침으로 된다. 주은래총리는 시종 참답게 당성수양을 견지하며 사상개조를 진행했기 때문에 공산당인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항상 튼튼히 보지할수 있었으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길에서 죽겠다!”고 한 맹세를 유감없이 충실히 리행할수 있었다. 인민의 훌륭한총리로 길이 빛날수 있게 되였다.     주은래총리의 위대한 형상은 청사에 영생불멸 할것이다!                                                                                                        09.12              
47    반포지은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1485  추천:2  2014-01-10
              수필                                                     반포지은에 대한 생각                                                                                                                       회령     일본사람들은 까마귀를 길조라고 한다지만 우리는 흉조라고 대단히 밉게 본다. 흰자위가 없이 눈알까지 새까만 것이 꼬락서니도 흉하지만 그 울음소리는 청승맞기가 짝이 없다. 마을에 와서 어디에 앉기만 하면 어른들이고 아이들이고 역증을 벌컥 내며 “저놈의 까마귀새끼, 후여! 후씨!” 소리치며 쫓아 버린다. 그리고는 재수가 없다고 아주 불쾌해서 투덜대며 액막이로 공중에 대고 침을 퉤! 퉤! 퉤! 세번 뱉는다. 그러고야 마음이 개운해 한다. 만약시 그놈이 젊잖을 빼고 앉아서 혹은 마을상공을 지나면서 까욱! 까욱! 중음을 구성지게 한곡조 뽑으면 “저 쌍노무 까마귀새끼! 누굴 데려가자고 저 지랄이야?! 제기랄! 엑, 퉤!... 혹, 아무개 할아버지가…” 하고 마음이 꿈틀해 한다. 그것은 까마귀를 저승차사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까마귀를 멸시하며 미워하다 못해 이름까지도 제일 더럽고 천한것으로 “까마귀새끼!”라고 지었지만 말못하는 까마귀로서는 사실상 아주 억울한 일이다. 까마귀는 생활습성상 생존을 위해 할수없이(선천적으로 그렇게 생겨먹은것을 어찌하랴.) 악습이 한두가지가 있긴있다. 그러나 까치와 함께 오작교를 놓는외에 “반포지은”이라는 거룩한 미덕이 있어서 지성들은 “자오”(자애로운 검은색의 새)라는 존함을 지어 주었다. 자오의 악습에 대해서는 지엽적이고 부차적이고 불가피적인 것으로, 그리고 인간에게 피해가 그리 크지않은 점을 감안해서 너그럽게 봐주고 반포지은의 미덕을 주류적인, 원칙적인, 성스러운 것으로 높히 긍정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오라고 부르는 놈팽이는 한놈도 없으니 분통한 일이 아닌가. 자오에게 울뚝밸이 있다면 그는 사람들과 대판드리 싸움을 할것이다. “쳇! 지놈들은 산야가 몽땅 저희들 것이기나 한드키 불을 질러 밭을 만들고 배불리 먹으면서 어른이 강냉이 두어이삭, 어쩌다가 병아리 한두마리를 집어 먹으면 뭐가 어쩌구 어째? 말끝마다 까마귀새끼, 까마귀새끼 하면서. 돼먹지 못한 것들이! 그뿐인가! 제 배때기를 위해서는 사기치고 협잡하고 탐오하고, 대포를 쏘고 도탄을 갈기면서 개보다도 더 니전투구를 하지 않는가! 거짓말에, 계집질에… 온갖 나쁜 짓거리는 다 하면서, 뭐?! 까마귀새끼?! 드러봐서. 개방구나 먹어라. 간나새끼들…” 그러나 자오는 조만해서는 인가로 오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며 미워하는 일을 부등부등 할거야 있는가. 아마 그래서 사람과 거리를 두는 모양인데, 이런점을 보면 시비가 밝고 정직하고 선량하다. 자오가 맞긴 맞다.     이런 황당한 소리는 그만하고, “반포지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자오는 어미 품속에서 20여일이 되면 알에서 나오고 30여일 지나면 둥지에서 떠난다. 그러니까 대개 50여일이면 성인이 되는 셈이다. 성인이 되기 까지는 두말할것 없이 부모가 먹이를 물어다가 입에 넣어 준다. 그리고 똥오줌을 치워 준다. 그런데 둥우리를 떠나서부터는 우리 인간들도 따르지 못할 갸륵한 일을 한다. 그것은 처음 잡은 먹이를(며칠 굶으면서 어쩌다가 힘들게 잡은 먹이를) 꼭 어미에게 먹이며 어미를 배불린 다음에 자기가 먹는다는 것이다. 자기배가 고파도 절대로 먼저 어미배를 불린다. 이러기를 60여일! 낳아준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다. 만물의 령장이라는 우리 인간들도 시행이 어려운, 마땅히 배워야 할 자오의 이 효성에 감동한 나머지 성현들은 “반포지은”이라는 절세의 사자성구를 만들어 냈다. 기대한 것은 천지만물, 그것이 보잘것 없는 미물일지라도 우수한 점이 있으면 허심히 따라배우며, 명심하며, 실천하며… 후손들이 훌륭한 인간으로 되기를 바란 것이리라.     그런데, 현실을 보라! 지금사람들은 문화수양이 높아서 세상리치를 다 알며 효도란 말은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부모에게는 “만수무강”, “무병장수”, “만년행복”, “만복을 받으시라”, “길이길이 모시리”, “부여남산 장명백세”… 온갖 미사려구를 참깨기름을 반지르르 발라 입에 올리며 나아가서는 효도정신을 더욱 확장 피력하여 “당과 인민에게 이 한몸 다 바쳐 충성하리!”, “당과 국가와 인민의 은덕을 잊지않고”, “전심전의 위 인민 복무를”… 두눈을 부릅뜨고 두주먹을 불끈 쥐고 맹세를 한다.     미사려구대로, 맹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많다고 하면 좀 생각이 복잡해 진다. 왜냐하면 호로자식(옛날에는 도리깨아들 쥐며느리라고 했다.), 부정부패망나니를 신변에서 비일비재로 볼수있기 때문이다. 리론은 미끈하고, 절묘한 어구로 언변은 청산류수지만 언행불일치는 식은죽 먹기다.     지금, 기본적인 인간성인 효성과 도덕이 최저선 이하로 떨어진 현상을 흔하게 볼수 있다. 하여 온가보총리께서는 “지금 중국사람들의 도덕이 최악의 상태로 추락 했다.”고 대성질호 하기까지 했다.     시장경제의 치렬한 생존경쟁으로 눈코 뜰새없는 밤낮을 뛰지만 부모에대한 반포지은, 인민에대한 반포지은을 잊지 않는다면 나쁜사람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손가락질은 받지 않을것이며 뒷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일은 자기 할 탓에 달렸다. 사람구실을 제대로 하며 사람답게 살려면 어른들의 교시를 어찌 등한시 하겠는가… 공자님께서도 하루 세번 자신을 돌아 보셨다지 않는가… 빈소리를 하지말라! 거짓말을 하지말라! 어른들의 말씀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찰과 자률은 립신양명의 보증이라 하였다. 부모를 공경하며 당과 국가와 인민을 공경하면 매일 만복을 받는다.     온갖 화액은 그러지 않는데서 온다.                                                                                                       12.1
46    잊지못할 생활회의 댓글:  조회:1608  추천:1  2014-01-06
               수필                                                         잊지못할 생활회의                                                                                                             회령     사람에게는 자각성과 자률성이 있어야 할뿐만아니라 약속력, 압력, 감독이 있어야한다. 지난날이나 현실을 살펴볼때마다 조직의작용을 새삼스레 느끼게된다. 한 사람이 선진적인 신앙을 가지고 선진적인 조직에 가입하여 조직생활을 하는것은 한생을 결정하는 중대사라고 말할수있다. 다른조직체들도 그러하겠지만 우리 공산당조직에서는 생활회의를 조직생명의 건강을 보장하는 중요한,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있다. 수백차의 생활회의에서 잊을수 없는 두번의 생활회의는 추억속에 있지만 오늘도 현실적 의의를 가진다.     남녀작풍문제를 취급한 생활회의     1956년10월의 어느날이였다. 구(향)당위서기 왕광보동지가 저녁7시부터 생활회의를 하니 모두 참가하라고 통지를 했는데 이 회의는 림시로 소집되는 것이였다. 당지부의 생활회의는 토요일 밤마다 하는것인데 이날은 월요일이였다. 이것은 지금까지는 없던일이였다. 다음은, 정부의 간부들이 모두 참가하는 회의였다. 그때, 우리 구정부에는 간부가 모두해서 8명이였는데 생산조리원과 부녀주임, 단서기인 나는 아직 당원이 아니였다. 그런데 모두가 참가하라고 하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당시의 생활회의는 사상과 작풍을 바로잡고 제고하는데 모를 박았는데, 하다보니 단결ㅡ비평ㅡ단결의공식을 주로 사용했다. 생활회의는 사상회보, 학습심득발표, 표양, 자아검사, 호상비평방조, 어떤알륵(갈등 혹은 모순)해결, 처벌, 누구에게 혹은 가정에 어떤곤난이 있는데 어떻게 방조하겠는가 하는 조치도 결의하는 등… 다채롭고 활기로웠다. 생활회의에서는 서로간에 간격이 없었고 못할말이 없었고 허물을 잡지 않았다. 말하는 사람은 죄가 없었고 듣는사람이 삼가하였다. 생활회의를 하고나면 말그대로 통일된인식, 의지도있고 개인의 심정도 유쾌하였다. 생동활발한 조직생활로서 우리는 생활회의를 기다리고 좋아했다. 모두가 친형제보다 더욱 친밀한 혁명동지로서 조직의 귀중함과 따사로움, 고마움을 느끼게 되였고 더욱 관심하고 방조하고 단결하였다.     그날, 저녘밥을 먹은후 제시간에 모두 숙직실에 모여 앉았다. 다들 유달리 긴장해 하는 눈치였다. 조직위원이 회의를 사회하고 왕서기가 발언을 하였다. 왕서기는 항일간부로서 우리 이 일대에서도 토기그릇장사를 하며 정찰임무를 한적이 있다고 했는데 문화수준은 거이 없었으나 사업능력은 비상하였다. 그는 혁명사업만 골몰하는 사람 같았다. 집은 흑룡강 어느 산골에 있는데 안해도 있고 아이도 둘인가 셋인가 하다고 하였는데 안해는 자주 앓는다는것 같았다. 왕서기는 단통 첯마디로 오늘저녘에는 당원과 간부들의 남녀작풍문제에 대하여 생활회의를 한다고 선포하였다. “에키! 누가 지치부레한 짓을 했는 모양이군. 왕서기에게 걸렸군…” 나는 속이 꿈틀했다. “남들은 전방에서 피땀을 흘리고 지어는 생명까지 바치며 싸우는데 후방에서 뜨신밥을 먹구 뜨신구들에서 자면서 그것두 모자라서 바람을 써?! 아예 그걸 뜯어 개를 주라구. 바람쓰는 자는 몽땅 철당철직캐출이라구. 괘씸한새끼는 콩밥이야!...” 왕서기는 당원이요, 간부요하며 내리 풀고는 인민을 위하여 사업한다는 사람들이 이래서야 말이 되는가? 우리들은 항상 어떻게 해야하는가? 다들 명심하라. 주의하라… 한바탕 “줄욕”을 퍼 붓고는 손가락만큼 크게 담배를 말아 피워댔다.     조직위원이 다들 인식을 말하라고 서너번 재촉하니 선전위원을 비롯해서 서너사람이 작풍문제는 꼭 주의해야 한다고 남녀간문제뿐만아니라 사업작풍, 주풍, 언어까지도 당원과 간부는 꼭 주의해야 한다고, 참으로 명심할바라고 범위와 심도가 깊은 발언을 했다. 다른사람들은 “옳습니다. 동의합니다.”하고 자기발언을 대체했다. 회의는 룡두사미처럼 인차 끝나버렸다. 간단했다. 그때의 회의는 보통 그랬으나 효과는 상당히 길고 좋았다.      건넌산 꾸짖기로 변죽만 울린 그날 생활회의는 우리들에게 의의가 깊었다. 딱 그번 회의역활이라고는 말할수 없겠지만 우리들에게서 훗날 두고두고 남녀생활작풍문제는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구정부에 한명뿐이던 부녀주임은 생활회의 이튿날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진상은 이렇다.     부녀주임은 농촌아낙네로 촌에서 부녀주임공작을 했다. 문맹퇴치를 하여 글도 알고 말을 잘하고 노래, 춤도 잘하고 일도 잘하고 사업적극성도 좋았다. 그의 남편은 항미원조에 나가서 대공1차, 소공2차를 세우고 잘싸웠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구정부에서는 그를 중용해서 구부련회주임으로 임용하였다. 일요일 밤, 부녀주임은 자기사무실에서 무엇을 보기도 하고 쓰기도 하면서 밤늦게 사업하였다. 숙직실이자 숙소로 하고 있는 왕서기는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며 자고 있었다. 그는 련일 하향했다가 오늘 오전에 구정부로 돌아 왔던것이다. 그때의 구정부간부들은 모이면 회의를하고 흩어지면 하향하였다. 구정부간부들의 사업임무는 아래에, 농민들속에 있었기에 사무실에서 볼일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밤은 어느때가 되였을가, 왕서기는 무엇이 뭉클하며 자기몸에 덮치자 와뜰놀라며 정신이 곤두섯다. 부녀주임이 자기목을 끌어안고 마구 몸부림치지 않는가!... 우리는 부녀주임이 어덴가 속병이 재발하고 집사정도 있고해서 사퇴했다고 조직위원이 그렇게 말하니 그런가 했을뿐이다. 얼마후 촌에서 새로 처녀부녀주임을 물색해 올려왔다. 그가 바로 나의 안해다.     집으로 돌아간 부녀주임은 남편이 돌아올때까지 그리고 인생의 긴 훗날에도 다른 구설수는 없었다. 그들부부는 자식도 여럿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때의 생활회의가 그를 정신차리게 했다고 생각된다. 그의 “실수”를 아는 사람은 아마 두셋뿐일 것이다.     주풍을 다룬 생활회의     1961년봄, 두만강물을 끌어들이는 수리공정을 하게 되여 조선측에서 유관대표단이 우리현으로 왔다. 협상은 우호적인 분위기속에서 원만히 끝나고 조선손님들은 돌아가게 되였는데 점심에 우리공사(향)에서 연회를 마련하게 되였다. 그날 연회에서 워낙 주량이 큰 왕서기는 기쁜김에 고급병술을 만나자 종지들이로 마이며 손님들과 주량을 겨루기까지 하였다. 누구나 술이 과하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왕서기는 조선대표단 단장에게 “어이, 동생! 야! 술도 못마이는게 단장은 무슨 개코같은 단장이니. 이잔만 내면 내가 최고사령관을 시켜줄게…흐흐흐.”하고 아주 유쾌해서 떠들어 댔다. 우리는 그를 겨우 려관방에 데려다 눕혔다. 왕서기는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졌다.     우리는 어제일을 우스개로 한바탕 왕서기를 놀려줬다. 그런데 이틀이 자나서 현위 조직부장이 찌프를 타고 드달겨 올줄이야! 부장은 공사조직위원과 반나절 밀담을 한후 공사간부 전체 생활회의를 소집 하였다. 회의는 물론 공사조직위원이 사회를 했다. 그는 “오늘 긴급생활회의를 하게 된것은 왕서기가 주정을 한데 대하여, 조선서 대단히 유감스러워 하기에, 그러지 않는대도 왕서기는 크게 실수를 하고 우리를 망신시켰으니 좀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 회의를 하는데 모두 방조를 서슴없이 하라.”고 개회사를 했다. 현조직부장이 잇따라 장광설을 휘둘러 댔다. 그는 주풍도 주풍이지만 이건 엄중한 외사활동파괴라며 사상상에서 근원을 찿아야할, 영향이 극히 나쁜 엄중한 착오라고 을러멨다. 모두는 대뜸 긴장해 하고 왕서기는 술을 마이였을때보다 더 얼굴이 불콰해서 머리를 떨구고 담배를 말았다. 누구도 발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해서 왕서기가 말을했다. “미안합니다. 평시처럼 생각하구… 술이 들어가니 세상이 녹두알만한게… 뭐, 파괴하자구 그런건 아닌데 에참! 내가 다시는 술을 먹지않겠으니까 한번 용서해 주시우. 처벌은 아무거나 다 좋습니다. 클수룩 좋아유. 그래야 정신을 바짝 차릴게니까… 그것참, 무슨술을 그리 많이 먹었는지… 출출하던참에 도투괴기를 보니 정신이 나가서 게걸스레 먹구는… 에참, 망신을 했수. 부끄럽수다. 두번 다시야 그런일이 또 있겠수? 꼭 고칠테니까 널리 봐주오.” 왕서기의 심각한 자아검사란게 이러했는데, 사람들은 그만 와하하! 웃음통을 터쳤다. 현의 조직부장은 얼굴이 벌개서 웃지말라고 소리치고는 왕서기를 노려보다가 자기도 으하하! 웃어댔다. 모두가 진정이 되자 현의 조직부장은 차근차근 아이를 교육하듯 왕서기를 그리고 우리모두를 교육하였다. 우리는 마디마다 옳은 말이라고, 명심하겠다고 태도표시를 했다. 우리는 왕서기를 잘 알기에 그의 말이 정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날, 왕서기에게 다음과같은 처벌이 결정 되였다. 현위의 결정은 “왕광보동지는 금후 일체의 외사활동에 참가하지 못한다.”이고 지부의 결정은 “언제든지 술을 두냥이상 먹지못한다. 이에 경고처분을 준다.” 였다. 본인은 두말할것 없고 우리전체도 아주 지당하다고 인정하였다. 그후, 왕서기는 인차 농업주관부현장으로 전근해 갔다.      나는 그와 함께 사업할때도, 리직한후에도 술좌석에 종종 함께 앉았는데 왕서기가 두냥이상 마이는걸 한번도 보지 못했다. 어느한번, 내가 이젠 그 반가워하는 술을 량껏 마이라고 하니 그는 “난 술 경고처분을 받은 당원이야.”하며 유쾌히 웃었다. 왕서기는 우리현에서 초유록식간부라고 찬양을 받으며 사업을 잘하였다. 술로인한 착오는 말할것도 없고 다른착오도 한번없이 그는 우리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모두가 건강했다.                                                                                                                      12.5
45    흥진비래 댓글:  조회:1713  추천:2  2014-01-02
                    실화                                                  흥진비래                                                             ㅡ백성들의 부정부패 점경                                                                                                                회령       세상의 만물, 만사란 흔하면 첯째로 돈값이 없고 둘째로는 희끔하지 않다. 소위 열점화제라는 부정부패를 놓고 봐도 그럼을 즉각 알수 있다. 어느 현장나부랭이가 백만원을 횡령해 먹었다 해도, 몇억대를 꿀꺽 했다해도 막밀어 열넉량 금새로 “그느마새끼 잘 먹었군.”하며 지금 사람들은 시큰둥해한다. 똥돌이네 돼지새끼가 똥물을 싼다는 소리보다도 회끔해 하지 않는다. 여개방차로 어느 성장이 첩을 열개를 했다해도 “흐흐흐 그새끼, 신기가 좋군.” 어느 서기가 매관매직으로 돈도 벌고 집도 벌고 별장도 네댓개 있고 자가용도 대여섯대 굴리고 첩도 너덧개 얻었다 해도 “그럴내긴데… 뭘!” 하며 사람들은 띠끔해 하지 않는다. 치매류행병이 돈것도 아니고 한국 드라마처럼 기억력상실증, 불감증에 모두가 걸린것도 아니고 도대체가 왜서 이모양 이꼴이냐?! 전기진들에 궁둥이가 찔린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껑충 뛸줄 알았는데… 코방귀도 뀌지않으니… 제길, 싱겁지 않은가. 부정부패 화제는 이젠 인기가 한물 건너간지가 한참이다. 원인은 간단하다. 즉슨인즉 “흔하기 때문이다!”     당정간부들 속에서 부정부패분자가 륙속 꾀여나서 당정간부들의 형상을 흐리워 놓는것은 사실이다. 하여 사람들은 흐린면을 보고 간부대오를 마치도 까마귀 무리처럼{검은것들} 인정하며 시들해 하는데 그건 착각이다. 사실대로 말해서 개차반 같은 망나니 부정부패간부는 필경 한줌이다.     그건 그렇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부정부패 하면 그건 간부들 일이거니 하던것이 지금은 백성들 속에도 부정부패분자가 있다고 하니… 이거 대방향이 틀리는거 아닌가?... 자고로 백성은 사회의 가장 최하층 인생들로서 제한몸 추스리기도 바뿐데 어느여가에, 무슨힘으로 부정부패를 해 먹는단 말인가. 단돈 몇원을 도둑질 하거나 사기를 쳐도 “에끼, 이눔! 불상놈 같으니라구. 백주에 남의 피땀을 횡령해?! 몽둥이 맛을 좀 봐야것다.”하며 벙거지사령{경찰}들이 입을 씰룩이며 눈알을 히번득 거리였다. 백성은 엄히 다스린 것이다. 하여 백성들은 도덕과 법을 범보다 더 무서워 했다. 량심에 꺼리끼는 일은 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극한에 몰려 악이나면 벌떼같이 일떠서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온순하고 정직하고 순결 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 졌다. 그들속에도 가증스럽길 짝이 없는 부정부패분자가 있는것이 엄연한 현실이고 사실이다. 어데서 배워먹은 못된 버릇이냐?!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고 들보가 구불면 연목가지가 삐뚤기 마련이다. 백성부정부패분자의 쓰푸(선생)는 간부부정부패분자다.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일단 배우기만하면 사생관계가 대뜸 “거멀”(형제), 정부(첩)관계로 급변한다는 것이다. 말그대로 일심동체가 된다. 텔레비에서 나오는 말과 같이 도적배에 올랐으니 죽으나 사나 함께하는 수밖에. 수밖에가 아니라 달갑게 그전날의 령도와 피령도(군중)가 한전호속의 친밀한 전우가 되여 생사고락을 함께 하게 된다.     50대의 허영숙은 농촌처녀로부터 소위 성공했다는 아낙네다.     문화대혁명 때문에 초중공부도 바로 못했지만 그에게는 당돌한 면이 있었다. 어린계집애가 홍위병완장을 끼고 사내애들과 섭쓸려 다니더니 얼마후에는 시가지에 가서 무슨 반란패 맹장이 되였는데 4인패가 거꾸러지기 전해 국경절날 배가 볼록해 가지고 반란패전투대 대장인 시병원 보이라공 청년한테 시집을 갔다. 잔치후에도 그는 계속 혁명을 하고 싶었지만 소위 친밀한 전우라든 남편이 주먹질 발길질을 들이대면서 억눌렀고 배속의 약진패가 또한 발버둥질을 했다. 그리고 항상 소태씹은 벙어리 상통을 하고 찡그리며 부정한 물건짝을 보듯하던 시부모들은 너들끼리 살라면서 내쫓았다. 주객관상황이 이렇다보니 그는 열중하던 혁명을 아쉽게도 할수 없었다. 하여 공산주의를 위한 혁명전선에서 부득불 생계를위한 생활전선으로 “전업”을 했다.     그때로부터 그의 “창업”은 시작 되였다.     영숙은 몇년간 혁명을 한답시고 생산대(마을) 집체로동을 안 한 것은 말할것도 없고 집에도 바로 오지 않았지만 년말 민식(량식)분배에서는 한톨 적을세라 이악스레 제몫을 따지였다. 지어는 돼지고기 추렴에서 두번이나 제몫을(두냥) 주지 않았다고 애비벌 되는 정치대장과 한바탕 행패질까지 하였다. 그것은 림표가 죽은해 추석과 설에 마을에서는 몇년만에 어쩌다가 돼지를 잡았는데 영숙이가 외지에 있다고 추렴에서 빼놓았다. 그때 비위장판인 그의 어머니가 영숙이 몫을 달라고 하였다가 마을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든 것이다. 이리붙이고 저리붙이는 영숙이 궤변을 당해낼 재간이 없어서 혁명세월에는 미운대로 그의 민식을 주는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혁명이 아니, 4인패가 거꾸러 지자마자 인심이 쓱싹 변해 버렸다. 사람들은 반란패를 특히 맹장으로 날뛰던 사람들을 똥묻은개 보듯 꼴사납게 보기 시작했고 지어는 증오까지 했다. 마을에서는 영숙이 민식을 줘야 하느니 말아야 하느니 여론이 짜ㅡ 했다. “일하지 않는자는 먹지 말라.”고 레닌께서 교시 했다고하며 영숙이를 즉각 마을로 돌아와서 대채건설의 위대한 혁명에 참가케 해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민식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치들은 이죽거리며 “그래서야 쓰나… 하기사 모주석이 ‘본단위에 돌아가서 혁명과 생산을 틀어 쥐라.’고 언녕 최고지시를 내렸지만 그간 영숙이야 강청을 따라 외지에서 혁명하며 수고 했는데… 어디 그뿐인가! 반란파 후대까지 만드느라 고생도 했겠는데 민식을 전부 입쌀로 줘야 한다니. 영양보충을 하게스리…”하고 킬킬거리며 빈정대기까지 하였다.     이듬해 1월, 총결분배 직전 생산대에서는 올해부터는 량식대를 현금으로 갔고 와서 비로동력 표준으로 민식을 타 가라고 통첩을 하였다. 원래는 농망기(파종 모내기 기음 가을 탈곡)에는 생산대에 와서 꼭 로동에 참가해야 한다는 조건까지 붙었는데 정치대장이 반대를 해서 그조목은 취소했다. 가히 말해서 생산대의 결정은 너그럽고도 인성적이 였다. 그때세월에 생산대 사원으로서 외지에 가서 놀면서 민식을 타 먹는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일이였다. 현장, 성장의 녀편네래도 농민이라면 적어도 농망기에는 생산대 일에 참가해야했다.(당의 정책규정임.) 돈만내면 량식을 주는것이 아니였다.     그때의 군중(백성)들은 령도요 권력이요 보복타격이요 하는걸 두려워 하지않았다. 아니, 몰랐다고 말하는것이 더 적절할것같다. 지금군중들처럼 눈치를살피며 겁나하며 참으며 당하기만하며 지어는 무감각하며 이러지 않았다. 그때의 군중들은 우둔해서(정의감이 들끓어) 범 무서운줄을 몰랐다. 령도가아니라 하내비래도 틀렸다고 인정되거나(탐오 등 위법행위 즉 부정행위) 괘씸하다고 보면(오입질 등 부도덕행위 즉 부패행위) 마구 줄욕을 퍼붓고 두드려박죽을 했다. 즉살통을 먹인것이다. 지금군중들은 그렇지 않다. 겁쟁이라 할가 서울놈보다 더 약아빠졌다고 할가 하여튼 먼저 자기의 리,해,득,실부터 계산한다.     곁가달로 말이 나간바에 한두마디를 좀 더 한다면 모택동시대의 음특한간부들은 상하가 서로 눈치를 살피고 무서워 하고 감추며 개별행동을 했다. 그리고 군중의 눈, 입, 귀를 제일 무서워 했다. 그들의 눈에 나고 말밥에 오르면 큰코 다치기에 말하자면 군중의 감독을 항상 느끼며 조심했다. 이를테면 “자률성”이 높았다. 지금의 부정부패간부들은 꼬장(검거적발 밀고)과 매체를 무서워하고 “쌍규”를 제일 겁나한다. 여럿이 함께 해 먹거나 서로가 쪼간을 알기에 말하자면 심지배명(마음이 알고 배안이 밝다.)하기에 서로 꺼리지 않는다. 군중이고 상급이고 나발이고 든든한뒤심(인맥)만 있으면 조선에서 만든 원자탄을 두어개 차고나 있는듯 “나 세상에서 두려운것 없어!”하고 코를 힝! 힝! 거세게 분다. 하지만 든든한뒤심이 어디 그리 흔한가?! 하여 재수없는 놈은 끝내 사달을 치고야 만다.     객적은 잡소리는 그만하고 영숙이 민식을 계속 말해보자. 전투대대장으로 죽을둥 살둥 모르고 날뛰던 남편은 4인패처럼 하마트면 감옥으로 갈번했다. 검사교대서를 몇번 써서 바치고 공안국에도 몇번 갔다 오더니(총문제때문에) 기가 아주 죽어서 담이 콩알만해 졌다. 그간 두어달은 영숙이를 안지도 못했다. 후에 반란패두목 둘이 잡혀가고 남편은 무사 했으나 사람들을 꺼리고 겁나 하였다. 자기가 때린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 온다며 전쟁히스테리처럼 악몽을 꾸기도 했다. 혼자서 매일 똥빼주를 마이고(생피주를 제일 좋아하지만 돈이 없어 못먹었다. 혁명시절에는 잘먹었다.) 영숙이를 닥달질하기가 일수였다. 그는 무슨벼슬을 한자리 할줄로 알았는데 그것이 갑자기, 철저히 개판이 되고 오쟁이를 뒤집어 쓴것이 마음속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내려간다기보다 점점 더 살아나서 수시로 속이 부글거리였든 것이다. 영숙이가 펄네(바람쟁이)인줄 알면서 건드린 것이 그만 아이를 배고 결국은 녕악한 영숙이를 떼쳐 버리지 못했다. 산다는것이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였다. 시교 농촌마을에서 코구멍만한 헛간을 그저빌려 사는것이 다행이긴 했으나 10여리를 자전거를 삐거덕거리며 출근하는것이, 그리고 쥐꼬리만한 월급은 눅거리 재탄(석탄가루)도 절약해야 했다. 생산대의 통첩을 아버지 편지로 전달받은날 영숙이는 정신이 아뜩해 났다. 저녘에 시래기장물을 놓고 강술을 마이는 남편에게 편지를 보였드니 네량식대는 네힘으로 해결하라는 통첩을 하는 것이였다. 시집도 본가도 도와줄 처지가 못되고 세상천지에 구걸할 곳도 없었다. 모주석의 기정방침대로 한다고는 했지만 문화대혁명은 끝나버렸다. 입살이 아무리 드세도 쓸모없었다. 영숙이는 아이를 안고 얼음장같은 구들에 모로누워 쿨쩍쿨쩍 울었다. 그해 민식은 사정과 악다구니를 겸용하여 걷곡으로 겨우 300근을 탔다.(조 벼 강냉이. 쌀로는 200여근 됨.) 영숙이는 “대부분이 량식대빚을 지는판에 나라고 왜서 빚을 지지 못하겠는가?!”하고 생산대 간부들과 행악질한것이 그래도 은을 냈다고 생각 했지만 그것이 아니였다. 간부들과 마을사람들은 아이를 업고 다니며 울고불고 사정하는 영숙이를 불쌍히 여긴 것이다. 정치대장은 “사람을 굶어 죽으라 할수 있는가!”하며 마을사람들을 설복 했다.     량식대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해 봄부터 영숙이는 장마당에 매달렸다 자산계급간상배를 낳는 자본주의꼬리라고 죽게 욕은 했지만 시가지 사람들은 장마당이 없으면 하루도 살수없다. “파4구”(낡은사상 문화재 풍속 습관을 때려부쉬는것)후에 때려부수다가 그만둔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 일인지 영숙이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 영숙이는 아이를 업고 남편이 얻어다 준 낡은밀차를 끌고 채소장사를 시작 하였다. 공부골은 없어도 장사골은 터서 영숙이는 남편보다 얼마씩 더 벌게 되였다.(남편의 월급은 30원) 그는 채소장사에다 김치, 물고기까지 품목을 늘였다. 장마당에는 장세 받는 간부와 위생비 받는 간부가 하루를 거를세라 나와서 돈을 받아 갔는데 집법이 어찌도 철저한지 세투리 두어근, 닭알 여나무개 갖고 온 촌 할머니에게도 사정이 없었다. 영숙이가 보건대 어떤 촌 로친네들은 장세값도 버는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가 우연히 볼라니까 간부어른들이 어떤장꾼들앞은 슬쩍 지나가는게 아닌가! 영숙이는 대뜸 깨도가 되였다. 그는 김치포기나 고구마 몇개로 간부를 친했다. 그후부터 장마당은 그의 집마당이 되였다.     영숙이는 이 간단한 동작에서 커다란 “학문”을 터득하였는데 그때는 “뒤문치기”라며 너절하고 비렬한 짓거리로 치사스럽고 더러운 것으로 보았으나 그것이 사실은 지금 널리 보급되고 활용되는 “관계학”이라는 대단한 학과의 분과였다. “관계학”에는 “정관계학”과 “부관계학”이 있는데 영숙이는 처음부터 “부관계학”을 배웠다. 학자들은 1장 1절하며 왕바신 신바닥 두께만큼 두터운 저작을 써 내지만 영숙이는 수영중에서 수영을 배우듯 실천속에서 배우며 연찬하고 제고 하였다. 하다보니 그는 “부관계학”인지 뭔지한 그런건 듣도 보도 못했으나 그것의 기본내용인 부정부패 수단은 상당히 알고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것은 작으마한 개장집을 세맡아 경영하면서 부터다. 개방정책이 방금 내려온 초기여서 개장집은 두세개 뿐이고 영업은 불이나듯 대호황이였다. 그는 손에 밑천이 있게 되자 담이 대뜸 커지였다. 은행돈을 꿔서 개장집을 늘이고 술집 노래방 카페 사우나까지 경영항목을 확대해 나갔는데 어느것이나 경기가 호황을 이루었다. 첫볼기를 맞으라는 말과같이 초기에, 희귀할때 시작한데다가 그의 부정부패수단이 대담하고 다양해서 장사가 잘 되였다. 장사에 수요되는 사람이기만 하면 초면이고 구면이고 화끈히 들어 붙었다. 거기에는 각부문권력자는 두말도 할것이 없고 공가의 승용차운전수, 수도, 전기세 받는 사람까지도 있었다. 영숙이 관계망은 그야말로 사통팔달이였다. 장사를 잘하는 그의 능력 수단을 사람들은 창업가니 기업가니 녀성강자느니 하고 감탄을 했다. 하지만 기실 그의 비결ㅡ법보는 간단한 것이였는데 그것은 “먹은쇠가 똥을 싼다!”는 것이였다. 그것은 공짜로 먹이고 주는(궁둥이도 포함해서) 그것뿐이 였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할가, 개혁개방이 심화되면서 뛰여 나온것이 법제강화와 뚱딴지 같은 규률검사위원횐지 뭔지하는 밉살스럽기 짝이 없는 물건짝이 였다. 시에서 제일 처음으로 교통국장이 꺼꾸러 지드니 상업국 세무국 은행 공안국 전업국 수도국 소방대 환보국 위생방역소에서까지 크고작은 부정부패분자가 잡혀 나왔다. 수두룩한 문제들은 모두 영숙이와 관련이 있었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하지만 다 그런건 아니고 나쁜말만 그렇다. 누구네 처녀가 음전하다고 하면 그건 주변에서나 알지만 밤중에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새벽에 벌써 시가지 절반이 훤ㅡ 하게 안다. 영숙이는 시가지가 짜ㅡ하게 뉴스인물 인기인물 명인이 되였다. 그의 사적에서 제일 불거져 방송되는 것은 바람피운 장면이였다. 사태가 이렇게 급변하자 말그대로 사처에서 아낙네들이 입을 앙다물고 찿아 왔다. 그들은 남편이 잡혀 갔거나 나떨어진것이 마치도 영숙이 때문이기나 한것처럼 모든 분풀이를 그한테 해 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네댓이 작당을 해 가지고 집으로 드달겨 처들어 오는데 아주 영숙이를 잡아먹을 기세였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언니 아재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였다. 이리저리 피하고 숨어도 용케 정찰하고 달려드는데 집은 전쟁터가 되고 매일같이 수라장이여서 도무지 살수 없었다. 영숙이는 궁여지책으로 기업을 대충 처리하고 북경으로 도망을 쳤다. 말하자면 진짜로 쌰해를 했다. 아래배 팬티속에 공상은행 목단카드를 꽂고 왔기에 배짱은 기장밥 먹은것보다 더 든든 하였다. 간경화로 앓는 나그네와 딸애는 시집이 있기에 별문제 였다. 그야말로 뒤근심이 없고 싸개통에서 빠져나온것이 영숙이는 거뿐하고도 새힘이 솟아 났다.     그는 스스로 두번째 창업을 시작한다고 뼈무르며 조양구 어느 시장에서 매대를 내 왔다. 배운재간이 투전놀이라고 그는 채소장사에 김치 짠지 무침개 물고기까지 벌려놓고 아가씨 둘을 고용 하기까지 했다. 언물고기는 일률로 어제 한국과 조선서 들여온 생선이라며 소리쳤다. 그래서 퉁을 맞으며 망신도 했지만 지금와서 그따위는 그에게 있어서는 개구리 낯짝에 물치기 였다 장사는 그런대로 되긴 했지만 이미하던 기업과는 비교할 여지도 안됐다.     그러던중 영숙이는 외국려행객을 상대로 약장사를 하면 뭉치돈을 곽지로 끈다는 소리를 얻어듣게 되였다. 그는 려행사를 통하여 몇개 약방을 견학한후 어느 약방에서 일하는 중년의 한족사내와 화끈하게 손을 잡게 되였다. 한족사내는 북경토배기로 관계망이 꽤나 있는치였다. 그들은 꽤 유명한 병원에 들어붙어 소위 “의료보건자문쎈터”라는 위 과실을 꾸리였다. 그들은 한국려행객들을 전문상대로 사기칠 작정을 했든것이다. 한국려행객들이 특히 약을 잘 산다고 했다. 그들은 어중이 떠중이 퇴직의사들을 주어오고 굴러먹는 조선족아가씨들을 모집했는데 의사들은 번대머리에 돋보기를 건 늙은일수록 상품이였다. 그것은 박사도사 교수 전문가로 둔갑 시키기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아가씨들은 일률로 약제사라고 포장했다. 그리고 소위 강사라는것을 두었는데 강사는 잘 불어대기만하면 된다. 려행팀이 들어오면 학생들처럼 실내에 앉게하고 대머리강사가 교수라면서 쭉ㅡ빼입고 나서서 중의학을 한바탕 광고한다. 잇따라 의사들이 진맥을 하면서 숭매뜨기를 하는데 그때 곁에붙어 앉은 약제사가 번역을 한답시며 정보를 제공해 준다. 무슨병이 있는가 술을 좋아 하는가… 이것 저것 한담하듯 하며 물어서는 의사에게 선색을 귀뜀해 준다. 의사는 상대를 보아가며 비위가 약하다느니 간열이 세다느니 신기가 허 하다느니 하며 병바가지를 씌우고 처방을 써 준다. 다음은 아가씨가 약에따라 값을 매기는데 가짜약 저질눅거리약을 10원도 안되는것을 4ㅡ5천원 7ㅡ8천원씩, 한 처방이 몇천원 몇만원 지어는 몇십만원씩 되였다. 약은 만들어다 주는 지하제약창이 따로 있는데 상표는 모두가 동인당제약으로 되여있다. 수금대는 버젓히 따로있었다. 영숙이는 이렇게 사기치기를 해서 대뜸 벼락같이 억만대장자가 되였다. 돈벌이가 이렇게도 쉬운줄을! 금광을 하고 있겠는가!...그는 너무도 꿈 같아서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때도 있었다. 이거야말로 화가 복이 되였다고 그는 어깨춤 엉덩춤을 췄다. 성수가 났다. 병원에 먹이고 원장에게 따로 먹이고 침대놀이도 해주고 무슨 허가증이며 세금이며 검사며 하는건 영숙이와 전혀 관계가 없었다. 대도시가 좋긴 좋았다. 살인을 해도 알것 같지 않았다. 그는 200평짜리 집을 네채나 사고 3층짜리 음식점까지 남편한테 맡겨 경영 했다. 남편의 병을 치료한건 두말할것도 없고 딸애는 영국에 류학까지 보냈다.     그런데 또 호사다마라고 할가, 이번에는 더욱 큰 사달이 생기였다. 원장이 “쌍규”룰 맞을줄이야?! 그런줄 저런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자기를 시교의 초대소에 가두고 원장의 부정부패를 조사하는게 아닌가! 한족사내도 그날 잡혔는데 그는 다른곳으로 데려갔다. 보아하니 단단히 파고들 잡도리였다. 케가 자기도 걸릴 판국이였다. 그먼저 한국에서 엄청난 사기집단이라 하며 몇차례 사회여론이 왁자끓었다. 한국대사관에서 중국정부에 항의 한다느니 어쩌느니 하여 조마조마하긴 했지만 영업액이 떨어질뿐 별일은 없었다. 여차직하면 도망칠 준비는 해 두었으나 너무도 급작스레 달려드는 바람에 미처 몸을 빼지 못했다. 규귤검사위며 반탐국을 자기와는 상관없는 부문으로 본것이 너무도 큰 실수였다. 거기에도 관계망을 둬야 하는건데. 그날밤 새벽에 영숙이는 초대소에서 도망쳤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까지 간후 그는 도적고양이처럼 살그머니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 갔다. 남편은 어떤 계집년과 함께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영숙이는 와락 이불을 벗기였다. 조사하는 사람들이 며칠간 외출한다고 그렇게만 집에 전화하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남편은 그대로 믿었는 모양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강짜를 부릴겨를이 없었다. 집주소를 교대했으니 당장 경찰이 덮칠것이다. 그는 남편에게 대충 상황을 말하면서 가방을 부랴부랴 챙기였다. 목단카드를 팬티에 넣은후 그는 곧장 집을 나섯다. 영숙이는 그길로 천진에 있는 군사내(강사질 하든자)를 찿아 갔다. 그러나 오래 눌러있을수는 없었다. 군사내가 귀찮아 하는건 둘째로 치고 안전하지 못했다. 본댁의 눈길이 곱지않았든 것이다.     그때로부터 영숙이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쥐새끼처럼 숨어 다닌다.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한국에는 갈수없고 일본은 죽으라는 말도 모르니 거기도 밀항은 안된다. 미국에 갈수만 있으면 좋으련만 그밀항은 너무도 모험이 크다. 자칯하면 태평양 귀신이 된다. 공안국문앞에도 못갈 처지다보니 합법적인 길은 한발작도 없었다. 당돌한 영숙이였지만 가슴이 화들화들 떨리고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증세를 어찌할수 없었다. 국가의 려행업에 먹칠하고 수십억대를 사기쳤으니 한옥희가 다 무어냐! 열번 총살맞아도 부족할 죄를 저질렀다… 공포로 긴장한 나날은 그야말로 죽을맛이 따로 없었다… 개장집이나 착실히 경영하면서 발편잠을 자기보다 나은것이 무엇인가?!... 후회막급이였다. 세상천지에는 자기를 구해줄 그 누구도 없었다. 마음편히 살수있는 곳은 그래도 훅시 감옥이 아니겠는지...     그는 법지법대로 사는것이야말로 가장 자유롭고 행복하다는것을 절실히 느끼였다. 지금 영숙이는 숨어다니는것과 자수하는 두갈래길을 놓고 선택을 망설이고 있다.ㅡ                                                                                                                                 09.9
44    아기뚱한 현상(문제) 댓글:  조회:1885  추천:2  2014-01-01
                 잡문                                             아기뚱한 현상(문제)                                                                                                          회령     진보라면 좋겠는지, 퇴보라면 옳겠는지…하여튼 그러루한 현상에 부딫히면 마음이 번거롭길 짝이 없다. 자지못하고 자꾸 뒤척이거나 “엥이! 제기랄!” 하고 신경질을 부리면 안해는 웬 소란이냐고, 수면을 파괴 한다고 엉덩이에 발길질을 한다. 나의 지력으로는 알뚱말뚱한 문제를 보면 번뇌가 물론 더욱 심해지기 마련이다. 안해가 왜서 자꾸 끙끙거리냐고 거듭 묻기에 두어번 토론삼아 화제를 꺼내놓으니, 자칭 세상물정에 밝노라고… 늘 나를 은근히 우습게 보던 그도 신통한 답변은 하지못하고 “별 싱거운 똥궁리를 다 하고 있네. 그따위 잡생각이나 하고 있으니까 잠이 않오지? 돈 벌 생각은 않고… 돈벌기가 싫으면 잠이나 자든지. 어서 자요.”하고 면박을 하는것이였다. 승리자의 긍지감과 회열을 가득 뻐기면서. 쳇! 나도 그저 해본 소리지 무슨 기대를 했는가구? 그가 면박을 한다고해서 새삼스레 고까울것도 없었다. 말주둥이에 소대가리 격으로 관심과 흥취분야가 워낙 전혀 다르다보니, 소귀에 경읽긴 것을…엿가락이나 잡수시우. 속으로 소리치고 나니 기분이 훨씬 좋았다. 나의 고충을 몇가지만 대충 적어 본다.                   작가의 사명     사회와 인간에 대하여 연박한 지식을 갖고있는 작가선생들은 인간세계를 번영과 진보에로 이끌며 그 전진을 추동하고 있다. 이점은 작가들의 기타의 언행과 활동들에서도 나타나지만 주요하게는 그들의 작품에서 볼수있다. 밤낮으로 인류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수고하는 작가들을 사람들은 높히 우러러 본다.     작가의 사명ㅡ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분투, 헌신 한다.”는(해야 한다는) 것은 인민들의 요구이기도 하겠지만 작가자신들이 스스로 품은 맹세다. 이것은 본인으로 말하면 희망이요 리상이요 가치관이요 인생관이요 포부요 뭐요 하겠지만 사회적으로는 직업도덕이요 임무요 역활이요 또 책임이요 뭐요 하고 말한다. 주관과 객관이 무슨말로 표현을 하든 작가의 숭고한 사명에는 이의가 없다.     작가로 나선 사람치고 인간이나 사회를 망치겠다고, 얼마쯤 하다가 걷어치우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것이다. 객관에서도 시대의 선각자, 대오의 기수, 진리의 화신, 사회의 지성인, 전진의 나팔수… 작가를 수요한다. 그러니까 주,객관의 동기는 참으로 훌륭하고 신성하고 숭고하다.     그런데, 작가층에 문제가 생긴것 같다. 작가의 사명을 확고히 수행하고 있는 작가들이 있는 반면에 기로에서 방황하고 있는 작가들도 보인다. 어떤 작품들을 보면 인간의 사상과 감정, 리상, 신념, 인간성, 도덕성을 퇴화변질에로 부식시키는 것인지 적발폭로 비판하는 것인지 아기뚱 하다.     한가지 실례를 든다면, 약국에 감초처럼 성생활을 흥미진진해서 세심한 필치로 다루어 집어넣은 작품이 비온뒤 똥버섯 돋듯 가득한데, 그건 도대체 성지식보급 통속독물인가 문학예술인가…     어떤작가는 독자를 끌기위한, 구미를 돋구는 양념이라고 하고 또 어떤작가는 성해방을 위한 선구자 용맹한 투사라고 자기를 아주 떳떳히 변호했다. 그는 미국의 “동물화급진파” 작가의 어록까지 인용하면서 인간의 진정한 사상해방과 자유, 인권최대보장, 정신문명… 즉 사회진보의 유일한 표징은 성개방 성자유라고 했다. 그에게는 유력한 근거도 있었다. 그것은, 독일의 “라체협회”가 번화거리에서 협회활동을 했는데 분노한 국민들이 온갖 잔인한 수단과 비문명적, 비도덕적, 상상을 초월하는 과격한 테로행위로 그들을 포위공격 했고 정부는 오히려 수수방관 했을뿐만아니라 괘씸하게도 그것을 은근히 고소해 했다는것, 하여 정부를 상대로 결사적인 시위와 담판을 치열히 벌린 결과 만난을 물리치고 휘황한 승리를 쟁취 했는데 즉, 협회활동 구역을 떼여 가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진보 초보표징의 세계적 일례라고 그는 자랑높히 말했다. 그런데 그는 뒷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라체협회에서는 초보적인 승리에 만족되지는 않았으나 사기가 올라서 구역내에서 협회활동을 진행했다. 그런데 또 국민들은 즉시 대거 몰려와 그들을 무차별 잔혹하게 포위공격하며 도무지 정상적으로 활동할수 없게 엄중히 타격 훼방 하였을 뿐만아니라 정부에 드센 항의까지 하였다. 라체협회에서도 화급히 대표를 파견하여 정부에 항의를 했는데, 정부에서는 국민들의 인권자유도 무시할수 없다고, 연구해 보겠노라고 애매한 코소리를 하며 이붓애비 제사날 미루듯 질질 끌기만 했다. 정부의 고약한 심보를 파악한 라체협회에서는 법원에 정부를 고소했다. 그런데 법원에서는 생뚱같이 환경오염, 환경보호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활동금지판결을 했을뿐만아니라 벌금까지 내리 먹이였다. 재수없이 공연히 밑지는 송사를 한후 무능한 협회간부들에게 지대한 불만을 품은 대다수의 회원들은 탈퇴하여 버렸다. 신성한 성혁명조직 라체협회는 유명무실이 되였는데 절개를 버리지 않은 투사 몇이 지하비밀활동을 할뿐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미치광이라고 하면서 더는 상관치 않았는데 주요하게는 “환경오염”은 더는 하지않았기 때문이다. 그 작가는 반나절이나 횡설수설 궤변을 열광적으로 발휘했는데 거기에는 또 희한한 론리와 론거가 있었다. 그것은 인류사회의 발전방향 밎 목표는 “고급적동물세계”라고 했다. 미국을 비롯해 서방 발달국들에서 지금 왜서 짐승과사람, 이상한짐승(괴물)과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영화제작에 열광하는가?! 사람들이 왜서 그런 영상물을 좋아 하는가… 발달국의 거동을 보면 알쪼가 있지않는가!… 이런것을 진리를 대표한 문학적신조류 신사조라고 한다. 중국에서도 바싹 따르느라고 애를 쓰지만 아직은 멀었다. 너무 락후해서 안된다. 그러나 멀지않아 될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기개가 있으니까! 그는 자기의 관점은 많은 주류파 중견작가들과 동일한 것이라고 했다.     사태가 정말로 그렇다면 등한시 할일이 아닌것같다. 웅변을 토하던 그 작가 혼자라면 정신이 잘못 됐나보다 하겠지만 주류파, 중견, 그것도 많은 작가들이 그와 동일견해라면 그건 보통일이 아니다. 그러나 실지상황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 작가가 허황한 당나발황통을 불며 허풍치기를 했다는 것이다.     또 어떤작가는 상업목적에서 얼굴이 뜨겁지만 무릅쓰고 전문 성을다룬3류작품을 쓰는데, 잘 팔리니까… 남들도 그렇게 하는데… 이젠 대수롭지 않다고 하였다. 문학 뿐인가? 가짜가 없는것이 어데 있는가. 몇년전까지는 비행기와 엄마는 가짜가 없다구 했지만 지금은 헛소리다. 3류가짜문학을 하니 체면상 량심상 좀 안된건 있지만 잘벌고 잘먹으니 좋기만 하다. 그리고 성기갈이 든 사람들을 위로하니(미국 어느작가의 말) 자선사업면에서 사회적으로 공헌도 한 셈이다. 누이좋고 매부좋 은일이 아닌가! 그에게도 리론근거가 있었다. 지식성, 취미성, 오락성작품을 쓰라고 하는데… 일부분 작가들이 먼저 부유해 지는걸 질투하면 착오가 아니겠는가… 감시가 느슨한 이때에 바짝 해먹는게 상수다… 그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같다고 했는데 기장밥 먹은 배짱이였다. 사람이나 잰내비나 무리를 치면 배짱이 두둑해 진다. 그는 사상성, 예술성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세가지성에는 모두 “건전한것”이라는 전제가 붙어있다. 례하면 지식성에도 누구처럼 30여년전 점쟁이 로파가 쳐준 점이 지금 현실로 되였다고, 점이 맞는다고… 그런 지식을 선양해서는 안될것이다. 취미성도 오락성도 독자들을 “오도, 오입”(틀리게 이끄는것, 잘못 들어가는것)하게 하는건 나쁘지 않겠는가. 어찌 되였든, 나의 소견에는 배워 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다 아는 성생활을 문학창작에서 지나치게 심혈을 기울일 필요성은 조금치도 없을것 같다. 결혼자에게 건강검사의가 두어시간 강의를하고 상식소책자를 하나 내여주면 될것을. 하필이면 숭고한 사명을 지닌 작가가 청소년으로부터 팔구십에 이르는 로인까지도 접촉하는, 광범위한 독자층을 대상으로하는 문학작폼에서 성계발, 성자극, 성기교(소위 성예술) 성지식 보급을 하느라 씩씩거리며 수고할 필요성, 박절성, 중요성은 전혀 없을것 같다.     인류의 성개방 성자유를 위하여 헌신한다는 선구자ㅡ용맹한투사작가들, 사기꾼, 장사꾼작가들에게 이젠 심각한 자아성찰이 초미의 과제로 된것 같다.     여기서 말한 “어떤작가”들도 자기의 아버지 어머니, 안해, 딸과 사위, 녀형제와 매부들의 성개방 성자유만은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고상한 인간성 인격의 불씨가 영 없어지지는 않았다고 볼수 있겠다. 아직은 완전한 “동물화 급진파”로 퇴화되지 않은 것이다. 자아성찰로 사명과 도덕을 찿은 작가로 능히 될것이다.     성찰에 참고로 한마디만 더 부언한다면 당신들의 작품에서 영향 받아(피해를 받아) 범법, 탈궤한 청소년들이 상당하다는 것을 감안하기 바란다. 지어는 나먹은축들도 있다.     문학예술은 인간의 령혼ㅡ정신세계 (사상과감정 ㅡ의식 형태)에 선택적 특수작용을 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사람을 강하게도 약하게도 진보케도 퇴보케도 한다. 그것은 사회의 번영 진보와 직결 된다. 때문에 중대한 학문으로서 극히 중시하며 가장 위력한 무기라고 한다. 그러니까 핵무기보다도 더 무섭고 드세다는 말이아닌가! 이런 무기를 어찌 정중히 다루지 않으랴!...     작가들은 자기의 혈육을 아끼고 사랑하듯, 존중하고 보호하고 교양하고 방조하고 이끌어 주듯 그렇게 독자들도 대해야 할것이다. …     (이 글에서 말한 “어떤작가”는 북경 천진 상해 서안에서 만났던 중견작가다.)                    백가쟁명은 어데로 갔는가     반중건중한(알뚱말뚱한) 사람들은 문인들의 백가쟁명을 “서로 깔본다. 니전투구 다.(흙탕속에서 개무리가 서로 싸운다.)”하고 비웃고 풍자하고 질책 하고 폄하 하는데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다. 본질은 그런것이 아니다. 그들은 정치투쟁의 치렬하고 참혹한 정경을 보고 흙탕속에서 개무리가 싸우는것을 련상했던 것이다.    백가쟁명이란 말은 중국력사에서 전국시대에 생겨났다. 거기에 대 문인인 모택동 께서 “백화만발” “추진출신”을 보태여 우리나라의 과학, 문화, 예술의 발전을 촉진하기위한 방침으로 당시의 최고국무회의에 건의 하였다. 국무위원들은 모택동의 건의가 아주 정확하고 진리이기에 장기적인, 기본적인 방침으로 채택 결정하였다.    백가쟁명이란 말 그대로 여러 문인들이 그 어떤 구속, 우려, 공포, 위험이 없이, 자유롭게, 기탄없이, 마음껏, 밸대로 학술에 대하여 작품에 대하여 자기의 관점을 발표하고 쟁명을(토론) 통해 정확하고 선진적이고 좋은것을 선발해서 내 세우는 것이다. 이 방침은 그 누구의 관점이든 옳던 긇던, 좋던 나쁘던, 누구를 몰아주거나 비판하거나 더욱히는 모자를 씌우거나 때려(타도) 부수지 못하기로 되여 있다. 그런데 시행착오로해서 문예발전방침이 그만 정치투쟁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정치투쟁의 최고경지는 네가 죽느냐 내가죽느냐 하는 사생결단의 판가리 싸움인데, 그것은 낡은장부(력사문제) 새장부(현실문제) 의식형태를 통털어 마지막으로 사람 대 사람이 죽일 내기를 하는 것이다.(19세기 결투 그대로 생각해도 된다.) 최종적 총 결산인 것이다. 하여 당내외 관직에서 “캐출”(쫓아 버리는것) 하거나 감옥에 집어 넣거나 “땅!” 갈겨 버린다. 이렇게 하면 한차례의 정치투쟁은 끝나고 또 다음 정치투쟁이 이어 진다.    먼데일은 실감이 약해서 그만두고 우리 문단에서 살펴 보면 김학철선생의 억울한 수난이 정치투쟁의 생동한 실례로 될것 같다. 선생의 작품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백가쟁명”에서 얼마든지 웃으며 너끈히 잘, 좋게, 해결 볼수 있는 것인데 그만 정치투쟁으로 하다보니 하마트면 총살을 맞을번 하다가 “요행” 십년 옥살이로 총결을 한 것이다. 그먼저 투쟁계단에는 육체적 모욕과 구타를 수없이 당했다. 억울한 죄장에 대하여 진상을 해명코자 하니 입에 걸레를 쑤셔 넣었다. 연길시 하남가 어떤 아낙네는 고무신짝으로 선생의 귀통을 사정없이 련속 갈겼다. 김학철선생을 누가 정치투쟁의 살인 현장에 밀어 넣었는가?!... 그것은 바로 심보가 음험하고 고약한 사람들이 획책지휘하고 멋대가리는 모르지만 영웅심만은 똥대같은 망나니 졸개들이 하수인질을 열광적으로 했던 것이다. 이것은 진실한 력사 사실이다.    시행착오로 과거의 모든 백가쟁명은 정치투쟁화 하였지만 지금부터는 그런 비극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더욱 훌륭한 작품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문예발전방침을 참답게 실행해야 할 것이다.    지금 상황을 보면 백화는 만발하고 있는데 쟁명이 결핍한것 같지 않은가? 쟁명할 건더기가 없어서인가… 아닌것 같은데?... 문제점(수개가 필요한)이 있는 작품이 없는게 아니다. 한곳만 손질하면 아주 미끈해질것을 그만 아쉽게도 타작이 되고 만 것도 있다.    일전에 중앙티비2에서 우리민족을 자랑하는 드라마 “진달래”를 방영 했는데 거기에 랭면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랭면이 뜨뎃국 모양인것에 너무도 실망하고 놀랐다. 그리고 국수먹는 시늉을 맡은 배우가 젓가락으로 뚜지며 께작거리는것이, 그는 그때 속이 트직 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그만 입맛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모두가 분통을 터뜨렸다. 일껀 시청을 시키려고 청해온 북경의 이웃 한족 친구들은 “죠즈를 먹는다. 훈둔을먹는다.” 하며 떠들어 대다가 “뿌쓰!”(아니다)하며 우리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는 것이였다. 두눈들이 한결같이 올롱해 가지고… 룡을 그리고 눈알을 까먹은 것처럼 아쉽기 그지 없었다. 조금만 쟁명을 했더라면 이런 실수는 아주 쉽사리 수개 했을 것이다. 안해가 주방으로 씽ㅡ 들어가드니 얼마 안되여 랭면을 내여왔다. 내가 시범동작을 하며 배워주니 친구들은 대뜸 익숙히 따라했다. “어때? 맛있지?...” “응! 호츠.. 띵호! 띵호!”(맛있다. 제일이야) 나는 개선장군마냥 입이 떡 벌어져서 좋아했다.    쟁명은 공식적 비공식적, 대회 소회에서, 실내외 불문 언제 어디서나 얼마든지 할수 있는 것이다. 4인방, 5인방도 좋고 무슨회, 무슨회도 좋은데… “4인방” 같은 소동작을 하지않고 광명정대하게 백가쟁명을 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고상하고 청신한 문인체취가 향기처럼 가득 풍길것이다.            “바람”에대한 약간의 고찰    거짓말 바람 :    이름은 뜨르르 시라고 하지만 기실은 무엇에 끼운 보리알만한 작은 시가지다. 원래는 십여만 인구의 명실이 부합되는 작은 진이였는데 벼슬이 한벌씩 오르기 위해 올리뛰고 내리뛰고 운동을 한 결과 그리고 직계상급에서 힘을 쓴 것이 은을내서(그에게도 리익이 있다.) 시가지로 되였다.    시가지 성립 경축대회를 요란히 했는데, 가무단을 불러오고 명가수를 사오고(노래 두곡을 부르는데 만원을 줬다.) 가도의 아낙네들과 퇴직령감들을 정치적임무로 동원해서 양걸을 추게 했는데 시민들의 평가는 그들이 제일 멋있게 했다고 하였다. 그들은 그렇치않아도 심심하던차에 국수도 한그릇씩 먹인다고하니 흥에 성수까지 겹쳐 있는 장끼를 최대한 발휘한것이 좋은 평판을 받게 되였던 것이다. 경축대회는 시인민체육장에서 진행했다. 시위서기와 부서기(4명), 시장과 부시장 (8명. 국무원 부총리보다 더 많은 튼튼한 령도집체, 강철의 보루)들이 서렬에 따라 주석대에 근엄하게 정렬한후 대회개막을 선포하자 서기가 운동장복판 가설무대에 달아매놓은 북(옛날 쇠물독만큼 크다)을 둥! 둥! 둥! 힘차게 쳤다. 잇따라 례포와 함께 대,소폭죽이 대회장을 들썽 들었다놓고 비둘기와 고무풍선이 하늘을 뒤덮었다. 수천명 학생아이들은 관람석에서 목이빠지게 환호성을 질렀다. 다음순은 시장의 시정연설이였다. 거두절미 요지만 말한다면 “에ㅡ흠! 본기정부는 청렴근정으로 시민들을 잘 령도하며… 모범도시를 건설하겠다!” 이어 수장과 형제도시의 격려와 축사가 베틀에 북나들듯 진행되는데 소나기가 내릴 징조여서 속도를 다그쳤다. (주석대 긴급결정으로 검렬행진 취소) 콩알같은 비꼬치가 떨어지기 시작할때 대회는 원만히 결속 되였다. 그먼저 역어빠진 시민들은 대회장에서 무조직, 무규률적으로 도망쳤다.(일부가)    점심때부터 진행된 경축연, 귀빈들께 증정한 약소한 선물, 례포와 폭죽이며 노래며… 밤에는 또 꽃불놀이를 했는데, 그리고 밤참을 먹고 개별적 특수복무도 안배하고… 이튿날부터는 관광유람을 시키고… 경비가 6,7십만이 들었다고도하고 300만이 들었다고도 하는데, 그건 시민들이 제멋대로 떠벌이는 무책임한 여론이다. 그리고 어떤자들은 아주 선견지명이나 있는드키 이것은 서막이고 볼만한 극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했다.    그런데 웬일이냐?! 재수없게 방정을 떨어댄자들의 예언을 증실해 주기라도 하듯 시장들한테서 사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작은진이 도시로 영예의 승진을 한후 길을 뜯어 고치고 현대건축물을 들이앉히고 상,하수도, 가스관, 전기선, 텔레비선을 개축하고 가로수를 뽑았다 심었다하고 록지조성을하고(도시미화, 록화 이항목은 시장이 바뀔때마다 의례적으로 진행하는것으로 규장제도화처럼 되였음) 지어는 공동변소를 여기다지었다 저기다지었다하는등 각항공정이 여기저기서 활발히 진행되였는데, 그야말로 현대화도시로 약진하는 생기발랄한 경상이였다. 그런데 부실공정으로 판단이 났는지 자꾸 번복을하니까 시민들이 그 케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하여 “배불리 먹었다.”느니 “터지게 먹었다.”느니하고 여론이 생기기 시작하기만하면 아닌게아니라 사건이 터지였다. 어떤시장은 경고처벌을 받고 어떤시장은 강직전근을하고 다음기에가서 나떨어졌거나 잡아간다던것이 병고하는바람에 두루뭉실 무고평안해진 자도 있다.(말이 사개가 맞지않아 우습지만 대의는 알수있으리라 인정된다. 어페긴 하다.) 감옥에 가서 앉아있는 시장님도 탄생했다. 이시가지는 시장이 안되는 도시라고 더럽게 소문이 났다. 그리고 술좌석마다에서는 “렴정근정을 위하여! 깜빠이(감방)!”하는 우스개소리가 보급 애용되고있다.    리혼바람:    “신결혼시대”라는 아기뚱한 술어가 델레비에 련일 나오더니 얼마전부터 는 “리혼시대”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리혼시대라는 것이다. 알고보니 “신결혼시대”는 “리혼시대”란 말을 하기위한 전주곡 혹은 머리말 같은 것이였다. 번져치나 엎어치나 요진통은 리혼이였다. 어떤 사상가, 정치가, 철학자들은 리혼이야말로 사상해방 인권해방 자유의 상징이라고 정신문명건설의 성과라고 감탄하며 찬양하는데, 지어는 우리도 이젠 리혼시대에 진입했다고 기뻐해마지않으면서 환호하는데, 리혼이라는 이 테마에서는 나의안해도 일가견의 고견을 갖고있었다.    그의 론리의 론점은 “미친 지랄이다.”라는 것이다. 그의 론리에서 론점을 론증하는 가장 유력한 론거에는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정면적인것이고 다른하나는 반면적인것이였는데 두가지 모두가 진실하고 생동한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여서 생명력이 있었다. 그는 세계적 자료는 생략하고(자료의 풍부성을 은근히 시위하며) 본국 국정에서 고찰 정리한 자료중 두개만 인용한다면서 론설을 내리 풀었다. 결혼 42년, 예순살이 넘은 부부의 리혼건이 반면자료였다. 손군까지 둔 할머니 그 녀자는 열몇살 사춘기때부터 “멋따개바람쟁이”라고(미녀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지만) 널리 조명이났다. 그는 무도선수였는데 문화대혁명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기차게 열심히 무도판을 쫓아다녔다. 이로해서 부부의 크고작은 마찰은 말그대로 끊임이없었다. 그의 남편도 무도를 잘추는 사람인데 무슨 곡절이 있었는지 “무도쟁이는 모두 바람쟁이다!”하고 맞아죽을소리를 공개적으로 줴치면서 무도장에서 결연히 퇴출하였다. 부부의 마찰이 백열화되였던 몇번은 별거까지 하였는데 녀자본가사람들이 나서서 조화를 시켰다. 매번 방귀뀐놈이 성내듯 녀자가 아이들을 주루루달고 나가서 셋방살이를 했던것이다. 그는 남편을 “옹졸하다.”고 밀어부치며 제멋대로하였다. 퇴직한후에는 로쇠와 치매를 예방한다느니 이젠 나의인생을 향수하며 살겠다느니 여생을 즐기겠다느니… 하면서 초원에 풀어놓은 발정난 일본군대암말처럼 날뛰였다. 무반이라며 년상년하 사내들을 번갈아 달고 다니드니 갑자기 리혼을 공포했다. 이번에는 그누구의 조화도 쓸모가없었다. 체면이 구겨질대로 구겨진 딸들과(넷임) 안팍 일가친척들은 그녀 남편에게 쉬윈히 리혼하고 마음편한 녀인을 맞아들이라고 권고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어느날 녀자는 동거중인 사내와 다툰후 춤판으로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한쪽다리는 무릎아래를 잘라버리였다. 병원에 넉달남아 누워 있었으나 딸들을 비롯해서 친척 친구 누구하나 들여다보는 사람이 단 1명도없었다. 안해는 미친지랄은 리혼으로 치닫게 마련이고 리혼은 그어떤경우를 막론하고 제한된한생에서 일대불행, 좌절 혹은 인생실패라고했다. 성공한결혼 행복한결혼이라는 말은있어도 성공한 리혼 행복한 리혼이라는 말은 없지 않으냐고…    그리고 두개 성과 몇개시에서 제정한 “불효, 리혼, 가정성원 학대행위가 있을경우 령도간부로 임용 못한다.”는 규정을 론증의 론거로 보충하였다. 단숨에 열변을 토하고나니 속이 후련한지 그이 기색이 좋아보이였다.    안해는 리혼반대파 였는데 그이 론리는 대체상 정확한것 같았다. 그러나 극좌적인 일면도 있다고 보여졌다.    녀자가 부모를 학대하고 사기협잡 도둑질 화냥질…잡짓이란 잡짓은 돌아가며 다 하는 도무지 구제불능의 칠거지악의 악처라할때, 남자가 불상놈 개차반 망나니 악바리 역시 구제불능일때, 그리고 성완전불구일 경우, 집을나가 십년이 지나도 음신이 전혀 없는경우… 감정이 철저히 파괴된경우(멀쩡한감정이 왜 파괴가되여? 미친지랄을 하지않고서ㅡ안해의 반박) 등등… 특수한 상황에서도 결혼이라는 끈으로 돌멩이를 얼궈매듯 결혼유지를 하는것이 합당하겠는지… 탐토가 수요될것같다.    중국의 리혼률은 0,01%도 안된다고 한다. 왜서 이렇게 적은가? 그것은 중국사람들의 관후한 성품과 관계되는것같다. 큰면에서 같은것을 찿고 작은것은 놔두며(원칙에서 어긋나지 않으면 된다. 자질구레한것은 차츰 해결되면 물론 더욱 좋고) 화평공처하는것이 나라와 나라,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처리에서 이 큰 대국이 처세하는 기본적인도리, 인정과 환영을 받는, 효과가 가장 좋은, 가장 정확하고, 가장 리상적인 방법인데 쬐꼬만 한개가정에서, 좋아죽겠노라던 두 사람이 이 처세술로는 도무지 안되겠다고 한다면 그건 이상한일이다. 거기에는 무슨 쪼간이 꼭 있다.…    중국은 안정과 단결이 절대적으로 수요된다고 한다. 그래야 번영 부강 행복해 진다고 하는데 가정도 마찬가지일것이다. 가화만사흥이라고 하지 않는가?!     물드는 바람:    거리에나가보면 울긋불긋 요지경같은데 첯재로 머리단장이 과연 볼만하다. 녀자는 꽃이기에 머리는물론 옷이며 신, 핸드빽 지어는 걸음걸이까지도 마음대로 멋을피울 특권을 갖고있다. 머리단장에서만 보드라도 칠면조머리를하든 수탉머리를하든 아니면 공작새꼬리를하든 자기맘대로인것이다. 젊은여자들은 말할것도없고 로친들도 단장을 잘하고 나서면(과분하면 초기치매로 오해받을 위험이 있다) 도시미화에 보충이되고 공헌이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젊은녀자가 배꼽위로부터 엉덩이절반을 내놓고 오리보법으로 다니는것은 좀 고려할바가 있는것같다. 거리는 필경 모델무대는 아니니까. 환경오염방지, 치안유지 등 사업에 신경을 써줄것이 요청되는 거동이다.    그런데, 문제점은 사내녀석들한테 더있다. 언제부터 중국에서는 국토가 사막화가 된다고 소리쳤는데 그에못지않게 남녀가 “음성양쇠”화로 매진한다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새중국이 성립된후 남녀평등슬로건을 꾸준히 추켜들었지만 “음성”에는 아직도 발전, 제고, 공고, 충실히 해야할여지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계에서는 “양쇠”니 뭐니하며 근심에 가득 싸여있다. 일부지성인들은 남녀국가축구팀의 형상을보고 더욱 불안해서 “이거 남자들의 양기가 다 죽어버리는거 아냐?! 사변났어!! 사변나. 이걸어쩌지?!… 쯧쯧쯧.”하며 단가마에 든 개미처럼 뱅글뱅글 맴을돈다.    그러나 상황은 그다지 악성적이아니다. 그것은 “양쇠”를 짓부실결심을하고 뛰쳐나온 투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보라! 아가씨들을 단방에 골탕먹이기위해 칠색머리를 부랑기쑤시개발형(2차대전시 일본군 비행기에서 가스배기통을 청소할때 사용하던 걸레)으로 창조해가지고 거리 대로를 활개치는 저 남사. 얼마나 멋지고 고상하고 또 기품이 있지않은가! 또 저기를 보라! 선글라스를 박통같은 까까머리뒤통수에 걸고 웃통은 아예 벗어던졌는데 앞뒤몸퉁이에는 룡과 호랑이 문신을 새겼다.(얼마나 아팠으랴! 하지만 용사는…) 엉덩짝에 낑긴 팬티, 일본샹프씨름꾼이 울고가겠다.    북경올림픽을 맞으며 거리와 골목에 “감독순라대” 령감과 로친들이 쫙 덮혔는데 그들의 임무는 대여섯가지가된다. 그중에서 중점은 도시미화를 보호하며 치안사업을 협조하는것이다. ”양쇠”돌파돌격대투사들이 순라대와 맞닥뜨리면 때로는 시비가 좀 생기는데 대부분은 별일없이 인차 끝나버린다. 순라대는 점잖게 순라돌이를 가고 투사들도 엉덩이디스코를 추며 제갈길을 간다. 예전에는 나팔바지와 사자머리(일명 개대가리)가 바람세를 탔지만 지금은 마구찢은청바지, 까까머리(중대가리)와 과대로출이 위세를 떨치고있다.    그리고 귀구멍에다 마우재열콩같은 단추를 틀어박고 음악을 감상하거나 전화통화를 하는것이 행세바람으로 되였다. 이런 “새기상족”을 마뜩지않아 나무리면 자칫 되려 괄시당할수있다. 새기상족을 대중교통에서 만나면 아무리 늙은이고 임신부라해도 그들 곁에 서지 말아야한다. 차장이 자리양보를 하라고 거듭말해도 그들은 코방귀도 안뀐다. 길에서 만나면 아예 일찌감치 길을 비켜주는것이 안전하다. 왜냐하면 그들의시야에는 앞의물체가 전혀 보이는법이 없기때문이다. 눈치없이 굴다가는 직격충돌을 하게된다. 그리고”쩐뻔! 타마디.”(정말 미련해! 제길할) 된욕과 함께 호된눈총을 받게된다. 뭐라고 좀 대꾸를하면 “찡썬삥”(미친놈)하고 내뱉으며 달아난다. 그러나 이런것은 아무것도아니다. 별로 큰 재해는 아니니까. 그리고 수펑이대가리를하든 몸퉁이에 돼지를 새겼든 수캐 암캐를 새겼든 그것은 그의 인권자유가 아니겠는가. 바지 벗고 춤추든, 삿갓쓰고 똥싸든, 오뉴월에 외를 거꾸러먹든 바로먹든 너한테 무슨 상관인가. 징그럽고 눈꼴쏴면 보지말고 위험성을 느끼면 거느즉이 피하면 될게아닌가.    그러나 부정부패 바람이 불어치는건 그저 일이 아니다. 부정부패란 말그대로 바르지못하여 썩는다는것인데 썩으면 죽는수밖에없다. 죽기전에는 주변을 시궁창으로 만든다. 부정부패는 어데서 흘러나오는가? 그것은 두말할것도 없이 관방의 되지못한 벼슬아치들로부터 배설된다. 즉, 탐관오리가 장본인이다!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 수단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하지만 백성들의 눈과 귀 앞에서 연출하는것이여서 즉각 다 들어난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 종이로 불을 쌀수없고 바람새지않는 벽이없다. 백성들의 눈과 귀는 도처에 많고 모두가 밝고 정상이다. 탐관오리들은 부정부패를 누구도 모르게 해먹는 술법은 아직 연구해내지 뭇했다. 부정부패를 하고도 들통나지 않았다면 그건 백성들이 아직은 보고만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엄중한 현상은 부정부패가 만연된다는 것이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물들고 있는데 거기에는 심지어 백성도 있다. 물드는바람이 불고있다. 병치료비도 엄청 부족한데 금일봉을 준비하고 빈손으로 학교나 관청문을 열기 주저한다. 문제를 해결봐야 할때는 뒷문으로 무엇을 들이 밀고서야 안심을 하고 신심을 가진다. 온실에서 자래운 취잎을 방금 산에서 뜯어온거라고하며 아들놈이 싸움질해 파출소에 잡혀가면 돈봉투를들고 공안국과 법원에 바삐달려가서 뒷문을 찿는다.    백성들이 배운 부정부패수단에는 주요하게 세가지가있다. 하나는 거짓말하는것이고 다른하나는 뒷문찿기고 또하나는 회뢰하는것이다. 무명백성들까지도 왜서 이러는가… 선량하고 정직한 백성의마음을 누가 좀들게 했는가… 백성이 병들면 사회가 썩는다. 그러면 나라는 어찌되는가… 국토사막화보다 더 무서운일 아닌가…                                                                                                     08.6
43    와덜 이러시나 댓글:  조회:1313  추천:0  2013-12-27
            잡문                                               와덜이러시나                                                                                                                  회령     일전에지방티비뉴스를보았는데,이런소식보도를하였다.화면에는잽싸게찰떡을파는젊은녀자둘과소대가리만한떡메를힘차게휘둘러치는사내가동시에나오다가렌즈는길게장사진을친떡사려나온사람들에게로옮겨졌다.그리고렌즈는우사칸대문짝보다도더큰널판에랑자하게든든히들어붙은대소부동의찰떡덩이에로옮겨갔다.어떤것은사발통만큼크고어떤것은반발이나되게길게늘어붙었는데그좋은찰떡이징그럽게느껴졌다.이찰떡화면과함께아나운서는이런말을하였다.”오늘부터대학입학시험이시작되였습니다.학부모들은이른새벽부터자녀들의성공을위하여정성을다하고있습니다.”그리고다른뉴스로넘어갔다.      뉴스를본후감상은두가지였다.하나는학부모들의심정에리해동정지지가갔다.그리고다른하나는그표달형식에무척반감이생기는걸어쩔수없었다.몇해전에”귀신이돌아왔다”라는잡문을발표한바있는데그때의심정이되살아났다.        지금우리는신변에서귀신놀음을흔하게볼수있다.나의관찰에는귀신놀음이이렇게공공연히성행하는것이근년간의표현으로날로우심해가고있다.그원인은사람들의신앙위기에있다고하는데내가보기에도그런것같다.그외에유관부문의교육타격력도와도관계된다고사료된다.     귀신놀음을살펴보면순미신적인것과민속탈을쓴것이있다. 이를테면점을치고방토를하고절간이나교회당을찿아가서잘되게하여달라고비는것은순전한귀신놀음에속하는것이다.불교나서양교의종지는사람마다정직하게선량하게 살라는것이다.잘못을부처님이나하느님앞에사죄하고꼭회개하며정직한사람이되겠다고맹세하라고했지잘되게하여달라고비는법은원래허용치도않거니와없던수작이다.그런데지금은어떠한가?죄는하늘보다더크게짛고무사하게하여달라고,그것도더잘되게하여달라고하니이런괘씸한놈이있는가.부처님이나하느님은말도말고나부터도그런녀석의엎드려비는궁둥이에는불붙는부지깽이를콱쑤시겠다.”에끼,이렴치없는놈썩물렀거라!”그런놈들이시주나성금을아무리듬뿍내도부처와하느님은쓰거워서보는체도않을것이다.점쟁이는복채가두둑할수록열을내서기교를다발휘하며방토를하겠지만.     민속과접목시킨귀신놀음도가히말해서그야말로가관이다. 과거를보려갈때조건이되면찰떡을먹고여의치못하면기장밥이래도한끼먹고가는것이어찌보면귀신놀음같기도하지만그것이차츰민속으로되였다.찰진것을든든히먹고가서힘을내라는것이다. 하지만찰떡을시험장출입문에다붙여놓는다는건어떤익살군이근년에만들어낸작란이다.그런데사태발전을보면어느소품극처럼기차표나비행기표를찰떡과함께붙일것같다.     근년의찰떡바람에톡톡히제미를본사람은찰떡장사군이다.값을이원이나껑충올리붙인건더말할것도없고밤열두시전에장마당으로나와서찰떡을힘차게처대여도힘든줄모른다고,칠수록힘이난다고했다.공불응구,하루건너대학시험이있었으면아주좋겠다는것이그들의간절한소망이였다.학교에서는궁여지책으로경비를팔아대문짝을만들어귀중한설비로보관해두고유사시에응용한다고하소연을했다.그런데이상한것은누구보다더정성을넣어서더빠르게더많이더좋은좌향에찰떡을붙혀놓았으나또복채를퍼그나내고방토도잘했건만자식놈이두세번대학시험에서미끌어진건무슨놈의조환가…     또한가지더사례를든다면밤이나낮이나시도때도없이터쳐대는치통이다.경사가있으면치통을터치는것이한족친구들의민속이다.그런데지금은불상사에서도치통을터쳐대니그것은찰떡붙이기와같은맥락이라하겠다.얼마전거리로몇번나갔다가기절하게놀란적이있다.길에다(인행도)오토바이를아주제집마당인듯가득진렬해놓은구간을간신히지나가는데”꽝!”하고천지를뒤흔드는굉음이터지지않겠는가.가로수로심은잔나무숲속에지뢰처럼숨겨놓은대짜배기치통이터졌든것이다.그날도이미겪은바가있기에미친개를조심하듯오토바진렬장을흘끔흘끔곁눈질하며지나가는데또”꽝!”하는것이였다.놀람과동시에부아통이치민나는피둥피둥살찐점주녀편네에게이거도대체무슨지랄이냐고왜가리청으로걸고들었다.(사람들이 그의 작간이라고 말하며 격분해 하였다.)경풍을일구는로인네나애를떨구는각시가발생하면네가책임질거냐고.그런데,어허이것봐라!장문신처럼생긴녀편네는물고있던담배대를홱뿌려던지고대뜸돼지간이되여고래고래소리치는게아닌가?!”네놈이무슨상관이냐!재수없게.꾼!”(뒹굴어썩꺼졋)그따위에겁낼내가아니다보니싸움은요란하게되였다.어느면으로나진리와정의가내쪽에있다보니시비를할수록내가우세였다.시비에꿀린녀편네는휭하니점방안으로달아나버렸다.삼십륙계에서줄행랑이제일이라하지않는가.내가승승장구로추격하여물에빠진똥개를호되게족치려고하는데수리공사내가나를막아나섯다.이집에서는인행도를작업장으로오토바수리업도벌이고있다.사내는나를붙잡고소근소근귀속말을하였다. “이러지 마세요. 저 인간들 복잡한것들입니다. 아래위에 낀것들도 많고 깡패새끼들도 있어요. 저 남포질지랄은 저년이 점을 치고 방토를 하는거랍니다. 어느 미친년의 수작인지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천번 놀라게 하면 천금이 들어오고 만번 놀래우면 만금이 들어온다구 해서 언제부터 저 지랄이랍니다. 공연히 우리까지 쌍욕을 먹게하며… 괄시를 당하기 전에 그만 두세요.” “그런가. 법이 이기나 저 따위가 이기나 두고 보지.”나는 침을 퉤! 뱉고 돌아섯다. 집에온후 인대주임을 찿아 상황을 반영했는데 남포질은 말할것도 없고 오토바진렬이며 수리작업장까지도 씻은듯 사라졌다.     위에서 유관부문의 교육 타격력도가 어쩌구 저쩌구 한마디 언급했는데, 그건 이런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도시의 기차역광장에는 백년도 더 되는 거목의 수양버드나무가 한그루 있다. 문화재등록은 않했지만 아주 명물인데 언제부턴가 고목은 귀신놀음에 모욕당하고 있다. 그것은 나무믿둥이로부터 여러갈래의 굵은 가지에 이르기까지 붉은천띠가 여기저기에 친친 감겨있고 너들너들한것이 어떤것은 퇴색하고 어떤것은 새로 감아놓은 것이였다. 그뿐이 아니다. 그루주변에는 누런지전을 태운 검은재무지와 지전쪼박이 랑자하다. 그리고 나무줄기가 불에 타고 그을리기도 했다. 역겨운건 두말할것도 없고 도시의 망신이 아닌가! 나는 역전과 역파출소령도에게 저것들을 말끔히 청리할것을 건의했다. 그들의 답복은 이구동성으로 아주 명료했다. “뿌싱! 풍속에 누가 맷으면 누가 풀어야지 다른사람이 다치면 않돼요.” “왜서?” “누가 다치면 누가 좋지 않아요.(화를 입는다.) 모르는척 하세요.” 이런 한심한 사람 있나. 이것도 인대주임과 말해야 알겠는가…     “과학을 숭상 하는것은 영예로운 것이고 우매무지는 수치스러운 것이다.”(8영8치) 달나라로 가는것은 이젠 엣말이 되고 화성으로 가는때에, 물질생활은 현대화가 되고 정신생활은 무지몽매 까막나라가 되다니… “문맹퇴치운동”을 다시해야하는거 아닌가…                                                                                                                              13.6
42    보아보가위국 댓글:  조회:1482  추천:3  2013-12-25
                               잡문                                                                   보아 보가 위국                                                                                                                             회령     사회, 경제발전도상에서 사기 협잡 강도 강탈 탐오 절도 기생 첩 깡패 가짜 거짓말 대포광고 형식주의 관료주의 사치 랑비… 온갖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리는것은 피면할수 없는 악덕현상이다. 어떤사람들은 이런것이 증국에만 있는것처럼 생각하거나 중국이 제일 엄중한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오해다. 나라가 크고 사람이 많으니까 안건수가 많은것은 사실인데 인구당 비례로 보면 제일은 아니다. 세상을 두루 살펴보라. 어느나라에 부정부패가 없었던가?! 없는가?! 돌격총을 들고 은행을 들이치거나 산소통을 메고와서 은행문 창고문을 뜯거나 학교에서 총을 갈기고 대합실에 폭탄을 던지고 대형화물선을 아주 통채로 빼앗거나 외국인을 붙잡아서는 인질로 대사관과 속금담판을 뻔뻔스레 하고… 이런 부정부패 악덕행패는 중국에 없다. 대통령이 탐오해 먹고 외국으로 달아나고 아예 정권을 빼앗자고 미사일을 갈기고 화학무기를 쓰고 수천명을 죽이고 남의나라 대통령을 붙잡아다 판결하고 목을 매달아 죽이고… 어떤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미국이 이런 보암직한 명작을 만들어내는데는 일등이다. 중국에서 이런 일을 한적이 그래 있는가?! 아직은 미국을 따를수 없다. 제따위가 어디라구 감히 견줘! 되지못하게스리… 아니, 중국은 영원히 그따위 더러운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공자님의 학설(인, 의, 례, 지)을 활학활용하기에, 공산당이 있기에 중국은 점차 온갖 부정부패를 극복 소멸해 가며 문명 발달국으로 나갈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태평가를 부르며 흥타령을 할수는 없다. 하급권력층, 기구에서만 중앙과 일치할것이 아니라 우리 민중도 중앙과 일치해야 한다. 우리 인민이, 중국이 선택한 당이 아닌가?! 우리는 당중앙을 바싹 따라 부정부패 척결에 일떠서야 한다. 어떻게 바싹 따르겠는가? 방법은 간단하다. 첯째는 과감히 반대하고 둘째는 지혜롭게 “쌍당”당하지 않으면 된다. 부정부패는 보는족족 호랑이든 파리든 때려잡고 아무리 화려해도 식별하고 걸리지 않으면 된다. “지구전”, “인민전쟁”을 해야한다. 이것을 “보아(자기를 지킴)보가(제집을 지킴)위국(나라를 지킴)”이라고 멋있게 말할수 있다. 우리는 “보아보가위국전”에 총돌격 하자!     우리민중의 보아보가위국전에서 전과는 거대하다. 거물급 부정부패분자를 륙속 잡아내였고(통쾌하지?) 살인우유, 하수도기름, 격소고기, 채소, 매음부로커집단, 국내외가 결탁해서 발악한 가짜화페, 독품밀매, 현금사기… 줄줄히 잡아내서 대가리를 까놓지 않았는가! 그야말로 쉬원하다.     우리 이 고장에서도 전과가 크다. “우수한 령도, 업적이 크다”고 하면서 환송회까지 해 주었든 전학인의 가면구를 벗기고 북경시중급인민법원심판대에 내세웠다. 온난방 자금을 뜯어먹은놈, 축제를 벌이고 뜯어먹은놈, 촌의 땅을 팔면서 뜯어먹은놈, 길딲기를 하면서 뜯어먹은놈, 장애자들의 보조금을 뜯어먹은놈, 나라돈을 가지고 도박놀이를한놈, 녀자궁둥이에 처넣은놈… 꽤 큰놈으로부터 작은놈에 이르기까지 수두룩히 잡아냈다. 잡기까지는 하지 않았으나 파산하여 망하게 만들어 놓은 파리새끼도 여러마리다. 어느시의 가전제품상점의 로반은 일찍 손을 써서 백만장자로 되였는데 차츰 역어져서 중고품, 저질차품, 가짜 등을 명표로 둔갑시킨것을 들여다 시민들을 우롱하였다. 그러나 차츰 원형이 드러나기 시작해서 소비자들이 등을 돌리게 되고 다섯개나 되던 그의 상점은 결국은 몽땅 파산하고 말았다. 그가 다른업을 벌려 놓았는데, 점쟁이가 시키는대로 굉장히 개업식을 하고 방토를 하고 칭커를 하고… 했건만 파리만 날리며 앉자있다가 역시 파산을 했다. 멋드러진 벤츠와 오디도 팔아먹고 집도 팔아먹고 안해는 치매에 걸리고 자기는 매일 강변에 나가 멍해 앉아 있다. 지금은 그를 말동무도 해 주고 등산도 함께 해 주고… 그래야 하겠건만 한사람도 그렇게 선량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친하다던 거멀들이 오히려 더 멀리로 달아 났다. 민심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잘나가던 떡장사가 망하고 만것, 삼성인가 어딘가 가전제품소매후의 보수를 도맡아하던 좋은직업에서 쫓긴것, 명표입쌀로 소문이 좋다가 망한것, 묵은입쌀을 햇입쌀이라고 소래기를 지르며 팔려 다니다가 개골망신을 당하고 쫓겨간후 다시는 그곳에 가지 못하는것… 이러루한 사례는 일일히 이루 다 말할수 없다. 부정을 하다가 사람들의 미움을 샀으니 누구를 탓할것인가!...     사람마다 보아보가를 하면 위국이 된다. 부정부패의 온상을 짓부시고 큰놈은 잡아내고 작은놈은 때려주고 나와 내집의 리익을 지키고 그러면 부정부패가 어디가서 발을 붙이고 살겠는가… 그래 위국이 아닌가.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리며 살판치는것은 우선은 그자들의 문제고 다음은 법에, 제도에, 규률에, 구멍이 있는 문제고 그리고 인민전쟁의 력도가 아직 약한 때문이다. 대개 이런것 같다…                                                                                                                                     13.10
41    우리는 누군가 댓글:  조회:1615  추천:2  2013-12-23
                      잡문                                                          우리는 누구인가                                                                         ㅡ자존심과 민족성                                                                                                                 회령     우리는 누군가?... 기괴한 물음이다. 그러나 묻게 된다. 특히 청소년들을 비롯해서 중국조선족 많은 이들에게 묻게된다. “당신은 중국조선족인가?(남조선사람들은 우리를 그렇게 부른다.) 아니면 조선사람인가?(북조선사람들은 우리를 그렇게 부른다.) 조선족인가?(한족을 비롯해서 55개 중화족들은 우리를 그렇게 부른다.)” 안쪽은 (만리장성 안) 더 말할것이 없고 우리 조선족의 둥지인 연변에서도 이런 물음을 우리끼리도 해야할, 하지않고 등한시하다가는 큰 결례를 할수가 있는 현실상황이다. 그것은 우리 이 고장에는 조선, 한국, 외국에서 온 동포들도 많거니와 더욱히는 한국인 행세를 하는 “가짜우리”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맵시와 말씨를 한국식으로 포장 했다.     우리 중국조선족도 개혁개방후 많이 변했다. 우리 중국에서 개혁개방정책을 채택 실시한 이래 누구나, 중화민족중의 어느 민족이나, 변하지 않은자가 없다. 나라 전체가 변모를 많이 했다. 이건 엄연한 객관사실로서 누구도 부인할수 없다. 그런데, 변한것이 변하기 전보다 좋은가 나쁜가? 개혁개방 한것이 하지않은 것보다 좋은가 나쁜가? 이런 물음을 한다면 모르긴 해도 그 누구나 다 전자가 좋다고, 옳다고 할것이다. 그건 실천이, 사실이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이건 총체적으로, 주류적에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볼때에는 변했다고 하여 모든것이 다 좋은것은 아니다. 어떤 변화는 우리각자가 좀 심사숙고 할바가 있다. 이를테면 “가짜우리” 같은 변화다. 그들은 자기가 중국조선족인것울 창피해 하며 누가 한국에 갔다거나 한국국적에 넘었다고 하면 침을 한발이나 흘린다.(외국국적에 넘은 사람들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코가 우뚝해서 턱을 쳐드는 꼴이 우습고 볼만하다.)     개혁개방의 중점은 경제건설로서 계획경제체제를 시장경제체제로 전환시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다, 시장경제체제라고 하면 이건 자본주의 물건짝인데 우리가 건립하려는 것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체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합리하고 선진적인 가지를 따다가 사회주의 나무에 접목시키고 있다. 그것은 미츄린이 실험하고 성공한것처럼 한뿌리 한줄기 나무에서 여러가지 과일꽃이 피고 결과 여러가지 과일이 주렁지게 달리듯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란 대체로 그런것이라 하겠다. 어느꽃, 어느과일이나 모두 사회주의 뿌리, 줄기에서 양분을 먹고 자란것으로 우리의 체질에 맞아 먹기 좋고 배부르고 탈이 없다.     경제는 사회기초다. 상층건축은 그 토대에서 건립되는것이지만 선진적인(정확한) 것은 경제발전을 촉진하고 락후한(착오적)것은 경제발전을 저애 한다. 이것은 집체화(계획경제) 시절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체험해서 알고있는 도리다. 때문에 의식형태의 모든 산물은 중시해야 하며 그것을 선진적인 방향으로 인도해야 한다.     개혁개방을 하고 시장경제체제를 인입 접목하는 과정에서 불가피적으로(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이지만) 자본주의 의식형태의 물건짝들도 따라 들어 왔다. 이를테면 극단적리기주의, 개인주의, 배금주의, 향락주의, 부정부패, 사기, 협잡, 도박, 마약, 매음, 자산계급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하느님, 예수그리스도아저씨, 성탄절이요 또 무슨 련인절이요 바보절이요… 이런것은 공산당이, 무산계급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들어 왔다. 어떤것은 피동적으로 들어 왔는데 례하면 선진설비를 들여 올때 상대국 정부에서 음란테프를 곁들여 가져가지 않으면 나가지 못한다고 조건부를 다는것, 기술고문을 초빙할때 아가씨를 요구하는것… 같은 경우다. 이런것에 대한 대책은 식은죽 먹기여서 피해가 별로 없었다. 다른 한가지는 주동적인 흡수로서 골치거리는 바로 이것이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특히 우리의 후대들인 청소년들이 이면에서 중대한 문제로 되고 있다.     56개 중화족에서 우리는 남의 말은 그만두고 우리 중국조선족의 현황을 우선 한번 살펴 보자. 누구나 다 제코부터 씻는것이 급선무고 또 도리니까. 물론, 절대적으로 그래야 한다는것은 아니다. 만약 한족들의 누런코가 한발이나 나와서 당금 발등을 깰 상황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가서 씻는것을 거들어 주는것이 형제적이고 량심적인 행위라고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각자가 제코부터 단속하는것이 도리다.     중앙의 “8영8치”보도재료에 이런말이 있다. “개혁개방과 함께 서방세계의 락후하고 타락한 문화가 물밀듯 쏟아져 들어 왔다. 적지않은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은 극단자아적인(개인주의, 자사자리) 물건짝들을 아무런 사색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모방한다. 그들은 극히 자사자리적이고 자아적인것만 흡수하고 서방문화에서 주류로 되여 있는 성실, 신용은 모르고 있다.”     살펴보면 사실이 그렇다. 역전, 시내공공뻐스정류소, 가뜩이나 비좁은 렬차의 통로, 사람이 안고도는 시장에서, 거리에서… 무릇 공공장소에서 우리는 과대애정표시와 과대신체로출을 흔히 보게 된다. 부등켜안고 한창 열심히 줄기차게 키스하는 청년들을 못본듯 피해 걸으면 되긴 하지만 그러나 뻑뻑쩍쩍앙앙음음하는 소음은 귀를 막지 얺고서는 피할 방법이 없다. 가슴이 푹패인 옷인가 젖싸개인가… 허벅지, 엉덩짝 절반을 내놓고 아래종아리에는 장화를 신고… 한국드라마 장면을 원상복구하는 모양이다. 그런가 하면 서울말씨 또한 가관가청이라 하겠다. 연변말씨에 “요”가 붙어 듣는 사람이 난처하고 “와싸, 자기야!” “아자아자!” “화이팅!” “쨩” “꼴통” “왕따” “짝퉁”…한국단어가 인입 되였다.(이런 말은 사전을 한두번 보면 기억할수 있어 괜찮다.) 여러 오빠가 동석했는데 애인을 “오빠!”하고 불러서 친오빠들이 “응. 왜그래?”하는 희극이 연출되고(애인을 “누나” “아저씨” “아줌마”하고 불러서 같은 장면이 상영되기도 함.) 사랑을 표시하는 동작으로 두팔을 옆으로 추켜올려 가운데 손가락끝은 정수리 숱구멍에 꽂는데 애비에미 생일에도 그렇게 하라고 시범을 보이며 강요 한다. 더욱 난증스러운것은 입을 맞추라는 협박이라 하겠다. 생생한 바지를 벽돌로 문질러 입고 찢어 입는다. 중대가리에 말눈깔색안경은 뒤통수에 걸고 웃통은 아예 벗어 버렸거나 엉덩짝에 감아놓고 활개를 친다.(이런 멋은 한족애들이 주로 많이 피운다. 하여 북경에서는 08올림픽대회때 늙은이들 지원자들이 거리에 쫙 흩어져서 순찰을 하며 무료로 샤쯔를 공급하며 달래느라 공력을 들였다. 우리애들에게는 아직은 그리 보급되지는 않았다. 불행중다행이라 하겠다. 하느님 아버지시여 감사감사 하옵네다. 아멘!) 연회는 2차 3차 지어는 5차로 고주망태가 되고 쓰러진다. 동거를 오락같이 여기며 리혼을 우스개로 안다. 범죄를 서슴치 않고 청춘을 망친다. 서방문화 찌꺼기에서(우리애들은 주로 한국에서) 극단적인자사자리, 자아적인것만 배워서, “한국식”을 모방하며 “한국사람”으로 되느라고 꼬락서니가 이렇게 되고 말았다.     사실은, 서방이나 그 영향을 제일많이 흡수한 한국에서도 청년들이 꼴불견으로 망탕 나가는 것을 좋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들도 호되게 나무리며 단속을 하고 이끌어 주기에 노력하고 있다. 화장터에서 벌거벗고 무도를 추고 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독창을 하면 국민들은 흘겨보며 질책을 하고 경찰은 득달같이 달려와서 눈알을 디글거리며 정신병원으로 잡아간다.. 우리 여기서도 매우 중시 한다.     물론, 우리네 젊은이들이 다 “서방화” “한국화”한것은 아니고 2.8 혹은 3.7 정도다. 하지만 미꾸라지 한마리가 피우는 영향을 등한시 할수는 없는 것이다. 2내지 3할의 젊은이들은 우리의 력사를 잘 모르며 하여 자존심, 민족성이 결핍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력사와 전통, 훌륭한 풍속과 습관, 도덕을 알려줘야 한다. “8영8치” 교육을 참답게 틀어쥐여야 한다. 우리에게는(중국조선족) 60년에 걸쳐 완미하게 형성된 공산주의적 도덕품격이 있고 빛나는 전통이 있다. 중화민족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미덕과 또 우수한 법제가 있다. 우리의 행위규범이 있고 인류에서 가장 선진적인 의식형태가 있다.     떳떳히 말할수 있는것은 우리는 한국도 아니고 조선도 아닌 중국조선족 즉 제3의부류라는 것이다. 부류라는것은 세계적으로 민족을 운운할때 우리는 조선민족(한겨례 백의민족)이긴하지만 한국인, 조선인, 중국조선족… 이렇게 몇개부류로 조선민족이 나뉘여져 있기에 하는 말이다. 각자에게는 공성이 있는외에 뚜렷한 개성이 있다. 그 개성은 특성이며 유전인자이다. 가장 개성적인것이 민족성이며 가장 민족적이다.     중국대지에서 우리의 유구한 력사를 다 들출것없이 근,현대의 200여년만 보더라도 중국조선족을 잘 알수있다. 이민세대들은 맨주먹으로 중화대지에 들어와 무인산천을 개척하여 인간세상으로 만들었고 특히는 생명을 바쳐가며 이 강산을(국가를) 이룩 하였다. 그리고 지금대의 우리부모들은 피땀을 철철 흘려가며 오늘을 건설하였다. 우리는 자고로 중국땅의 주인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존심이며 자부심이다. 우리는 이 자존심, 자부심을 세세대대 자자손손 굳건히 고히 간직하며 지키며 계승발 양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근간으로 한국문화, 조선문화, 형제중화족들의문화, 세계의 다른민족, 다른나라의 선진적인 문화를 흡수하여 우리것으로 만들며 더욱 우리다운 우리가 되여야 한다. 우리는 중화족에서 중국조선족이다! 세계적조선민족에서 우리는 제3의 부류ㅡ중국조선족이다.     중국조선족은 우수한 민족이다. 중국의 혁명력사에서 선인들은 항상 많은면에서 “제일”이였다. 이것은 우리의 기질이며 민족성이기도 하다. 그 후손들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이렇게 하는것은 또 가장 큰 효성이기도 하다.                                                                                                                      10.12
40    집법은 로보트가 해야한다 댓글:  조회:1469  추천:1  2013-12-20
                  잡문                                                          집법은 로보트가 해야 한다                                                                                                                       회령     상업거리 특히 시장문앞에 가면 누구나 쉽게 볼수있는 장면이 있다. 이십여명 사람 들이(다수가 로인들임.) 줄느런히 늘어서서 행인들에게 전단지를 주는데 받아보면 80%이상은 약품, 보건품, 음약광고고 남어지는 출국을 시켜준다는둥 무슨회사성립몇주년특대회소식, 개업특대회소식, 북경, 미국에서 온 전문가가 특별보건강좌를 한다는둥(참가자에게는 닭알 등 진귀한 선물을 준다고 한다.) 그러루한 전단지들이다. 그런데, 전단지를 뿌리는 이들이 때로는 갑자기 수리개를 만난 닭무리가 풍기듯 사방으로 도망을 치는데 그야말로 제정신없이 달아나서는 숨어버린다. 달래며 세투리, 새끼호박따위를 놓고 난전을 보던 촌노친 아낙네들도 함께 도망을 치는데 말그대로 난시에 앉은뱅이가 없다. 워쩐일이누?! 살펴보니, 아하! “어베주지” 뚜리모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느날, 전단지를 주는 꼬부랑늙은이와 왜서 때로는 달아나느냐고 물어보니 “저사람들께(뚜리모자) 잡히면 삼십원을 벌금하고(수거는 없다.) 전단지를 전부 몰수당하는데 시킨 상점에서는 엄청나게 처벌을 받는다.”고 했다. 고구마, 삶은강냉이, 닭알, 개암 등속을 팔던 촌아낙네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길거리에서 전단지, 난전 이런일은 하지못한다는 규정이 있는 모양인데, 백성들에게는 법이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다. 그럼, 법에서 하지말라는 일을 왜서 하는가고 물으니 이,삼십원 푼돈수입으로 아이 학비에 보탠다는둥 관절약을 사자고 탈탈거리며 왔다는둥… 나름대로 딱한사정들이 있었다. 가긍한 처지에 동정은 갔으나 법에는 사정이 없는것이다. 법지법대로 해야 한다. 그것은 두말할것없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집법은 일시동인이여야 한다.     거리를 돌아보면 분통이 터지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전국적환경오염으로 되고있는 엄청난 위법행위인 “증건을 만들어 준다.”(돈 외의 세상모든증건은 다 만들어 준다고 한다. 경찰증, 현역군인증, 결혼, 리혼증, 외교관증, 려권, 신분증, 의사증, 박사증… 다 만든다고 한다.)는 광고락서는 왜서 점점 더 창궐해만 가는지… 그건 속수무책이라 하는데, 이상하다!... 그럼, 그건 할수없는일이라 치고 아래의 일들은 왜서 상관하지 않는가?! 인행도를 아주 점령하고 제집마당인듯 신발을 널어놓고, 자전거, 오토바이를 진렬해 놓고, 과일이며 채소매대를 버젓히 벌려놓고, 누린내를 풍기며 버젓히 오리구이가공을 하고 곳곳에서는 고기꼬챙이를 구워 판다. 마음껏 소래기를 지르고, 고음으로 스피커를 하루종일 띄워대고, 지어는 광고선전차가 거리를 누비며 악청을 질러 댄다. 자전거, 오토바이, 삼륜차 수리포는 문앞 인행도가 바루 저희 작업장이다. 용접불꽃이 찍찍 튕겨서 시민들은 기겁을 해서 피해 다녀야 하고 길바닥은 온갖 기름칠로 덕지덕지 더께가 앉았다… 이런 장사아치들은 거개가 뒤에 뒷심이 있고 보호자가 있다.(어떤자는 허락을 받았고 돈도 냈다고 하는데 장소의 크기는 내마음대로다.) 두아름드리 도람통을 네거리 길바닥에(교통경찰이 서는 바로 그자리를 점령하고) 세워놓고 석탄내굴을 피우며 고구마를 구워대고, 옥수수를 구워대고, 참외, 수박을 실은 밀차, 자동차를 세워놓고 소리소리 지르며 호객하는 자들도 뒷심이 든든해서 겁나는게 없다. 뒷심이 누구냐? 깡패냐 디피류망이냐 건달잡놈이냐… 이런 망나니가 뒤를 보아주는 경우도 있는데 또 그런 쓰레기들도 뒷심을 가지고 있다. 그 뒷심이란 결국은 직, 간접의 불량집법 권력자다. 탁구판만한 테블뒤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자도 있고 현장에서 눈알을 부라리며 땅땅 을러대는 자도 있는데, 많다고는 할수없지만 있는것만은 엄연한 객관 사실이다. 신성하고 존엄한 법률이 이런자들의 손에서 꼬이고 비틀리우고 회롱 당한다. 분통이 터지지 않을수 있는가?! 이런자들인즉 바로 부정부패분자들이다. 이런 놈들은 깨끗히 척결하고 집법을 성실하고 철저한 “로보트”로 바꿔야 한다. 법률집행에서는 집법관이 “로보트화” 해야 한다. 하나면 하나고 둘이면 둘이고 누구에게나 법지법대로 해야한다.     믿지못할것도 사람이고 믿을것도 사람이다. 세상만사는 사람이 하는 것이니 관건은 착실히 할수있는 사람이 하게 하는것이다. 그러니 착실한 사람으로 되는일이,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한 일인가!...     미꾸라지 한마리가 개천을 흐린다. 백성들의 원성이 점점 더 높아간다! 어찌 중시하지 않으랴!...                                                                                                                                 11.7
39    자화자찬보다 자아검토를 댓글:  조회:1744  추천:1  2013-12-18
                 잡문                                                 자화자찬보다 자아검토를                                                                                                                  회령     보리알만한 시가지라고 해도 한해총결대회는 굉장하다. 총결대회에서 시장각하가 정부사업보고를 하는데 “만언서”장문은 휘황한 성과자랑으로 80%, 새해임무 및 그 완성의 금낭묘계가 20%였다. 부족점, 존재한 문제, 착오같은건 한마디도 없었다.     장편연설 뒤에는 수두룩한 선진단위, 집체, 개인, 모범인물… 백여건의 표창과 상금 수여가 있었다. 회의 참석자 대부분의 주의력은 상패보다 상금쪽으로 집중되는것 같았다. 술잘먹고 류행가 잘하는 성수군 집행주석이 추호의 소홀함도 없이 상금액수를 일일이 변학도비서가 기생점고를 하듯 우렁찬 소리를 길게 냅다 지르며 대회장에 아뢰였지만 대표들은 상금액수를 대문자로 쓴 패쪽을 친히 육안으로 목격 확인하고는 각이한 반응을 하였다.(개인에게 주는것은 봉투지에 넣었다.) 어떤 수상자는 익살스레 껑충껑충 뛰면서 상금패쪽을 붉은기처럼 하늘높히 휘둘러 대고 그에 못지않은 활량기 가득한 몇몇대표는 희열의 춤을 덩실덩실 췄다.(한잔을 걸친 가능성 다분.) 주석대 아래에서도 춤을추는 치들이 있었다. 한편 대회장에서는 경쾌한 무도곡이 울리고 사진기, 록화기를 멘 촬영사들이 올리뛰고 내리뛰며 심원한 력사적 의의의 장면을 렌즈에 담느라 분주히 돌아쳤다. 흥성흥성한 단결의대회 전진의대회 생기발랄한 대회였다.       대회는 연회청으로 이어졌는데 옥반가요와 금준미주는 짙은향기를 풍기고 무도곡 선률과 훤화는 역전대합실 같이 들끓었다. 어떤 좌석에서는 술에는 한다하는 대표들이 술품평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모태주사촌이라느니 오촌조카쯤은 된다느니 좌우간 유해서 붙이기 좋다느니… 으하하 와하하 큭큭큭…     개혁개방시초에는 장려를 이불이나 밥가마 초채쟁개비를 상품으로 줬지만 지금은 경제시대가 발전해서 돈으로 한다. 이렇게 창신하니 모든면에서 여간만 편리한게 아니였다. 우선은 휴대상 간편하고 한턱 낸다든지 몇이서 나눈다든지 아주 편리해서 좋았다. 쬐꼬만 지방이다보니 당국에서 팬티속방귀를 꿰도 상놈시민들이 즉시로 알고는 시비질을 무성히 하였다. 골치거리가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담이 작고 모험 창신정신이 없어서야 무슨일을 하겠는가. 제길할! 이번에도 굉장히 대회를 했다.    집안에서 대표들의 술놀이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밖에서는 시민들이 악다구니질을 하여 댔다. 저마끔 제가 마치도 대회주석단 비서장이나 한드키 대회 경비가 200만이 들었소. 300만이 들었소. 무슨소리?! 적어도 500만 이상이야! 하고 주둥이를 까고 있었다. 전체 대회참석자들에게 핸드폰 한개, 금필 한개, 엠피4를 한개 사준것까지(고까짓걸 가지고) 어느틈에 다 알았는지, 누가 제집 닭마리나 개를 빼앗아 잡아 먹은것처럼 기가 올라서 떠들었다. 그돈이면 극빈호에 설소비를 더 줄수 있겠다는둥 위문호를 더 늘구겠다는둥 빈곤부축에 쓰겠다는둥… 그뿐이 아니다. 지엄무쌍한 당국의 정치적대회를 거짓말대회라느니 부패대회라느니 하고 떠벌려 댔다. 괘씸한 놈들!    개혁개방이 한세대, 30년이 지나 갔다. 우리 성, 우리 지구에서는 어떤 휘황찬란한 성과를 걷우었는가? 전국적으로 몇등을 하였는가? …!    여러해전에 “연룡도”방략이 나와서 층층의 당국이 기세를 올리고 매체가 한바탕 끓어 번졌다. 지금은 “장길도”대략이 나와서 상하급정부가 매일 회의를 하느라 분주히 돌아치고 따라서 매체도 목이 쉴 지경이다. 그먼저 개혁개방초기에는 “룡대가리”학설이 나와서 선풍을 일으켰다. 금삼각이요, 큰각, 작은각, 큰원, 작은원이요 하며 세미나를 열고 심포지음을 하였다. 당금 국제적인 대공정판이 벌어질듯 했다. 하여 훈춘이란 곳에서는 부동산붐이 폭발하기까지 했었다. “연룡도”나 “장길도”나 “룡대가리”도 다 아름다운 설계도임은 승인해야 한다. 적어도 훌륭한 동기라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단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천하 지사는 과정이 있는거고 시간이 수요 된다.    먼저번의 두번에서는 당국에서 소리치고 매체가 들끓어 번지니 천지개벽이 당장 일어나는줄로 알던 사람들이 몇십년, 몇년이 지나도 보이는게 없으니 아니, 자기에게 득이 되는건 별로 보이지 않으나 크고작은 부정부패는 신물이 나게 보이니까 이젠 아무리 소나기가 울어도 시들해 한다. 심술통이 바르지 못한 놈팽이들은 “또 큼직한 부정부패가 수두룩히 나오겠군.”하고 코방귀를 뀌기까지 했다.     “장길도”씨는 방금 왔으니까 선견을 가지는건 옳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하는 항목이니까 아이들 작란이 아니다. 명의나 보건품 같은 광고대포는 아니다. 이 대계는 설계도대로 실현 될것이다. 신심을 갖고 적극 호응함이 마땅하다. 이번에는 직,간접으로 리득을 볼것이다. 지켜보면 알겠지만.    코흘리개까지도 다 아는바이지만 부정부패는 망당, 망군, 망국, 망명, 패가의 화근이다. 당국에 대한 백성의 신임에 상당한 악영향을 준다. 그런데 시장의 “만언서”정부사업보고에는 1년간의 부정부패상황이 한건도 언급되지 않았다. 백성들은 매일 보고 듣고 떠들어대는데 시장어른은 맹인인가 롱인인가 아인인가…    누가 우리를 고의적으로 비방중상하고 폄하한다면 정치적 수요에서 자화자찬이 필요하겠다. 혹 스스로 비관실망 한다면 정신분발을 위하여 자화자찬이 강장제로도 될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부족점, 존재문제, 결점, 착오를 찿아 시정하는것이 급선무다. 그중에서도 당정간부(특히는 령도간부)들의 부정부패 방지가 깡이다. 그리고 머리를 틀어박고 공부를 하듯이 우리일을, 우리노릇을 빨리, 잘하는것이 급선무다. 칭찬하든 폄하하든 상관있는가! 꿩 잡는게 매다.    성적은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결함은 말하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다. 자화자찬은 작으만침하고(왜서 열중하는지… 대약진때 위성을 쏘듯이...) 자아검토에 력점을 둬야한다. 허심하면 진보한다. 성적앞에서는 그래도 겸손한것이 좋다. 사실말이지 성과자랑거리도 몇개 없다. 반성할것은 많지만. 엄청난 부정부패로부터 검토거리는 많다. 자화자찬보다 자아검토가 더 수요된다. 부정부패방지를 억세게 틀이지지 않다가는 “장길도”가 애를 먹을게다. 모르긴 해도.                                                                                                       10.2
38    우리문단에도 잡문이 많기를 댓글:  조회:1324  추천:1  2013-12-16
               잡문                                                                                                          우리 문단에도 잡문이 많기를                                                                                                                   회령     내가 로신 대 문호를 알게 된것은 초중학교 학생 시절이다. 아니, 안다는것보다. 위인의 성함을 교과서에서 처음으로 보았던것이다 그런데 선생의 글은 하나도 재미가 없어서 지레 싫증이 났다. 그리고 조건반사로 해서 잡문이라고 이름 띈 것은 모조리 거부 했는데 엄중한 편식증과 같았다 그렇게 아이때 생긴 버릇이 이십여년이나 갔다.     개혁개방 국책이 실시된후 나라 전체가 활기를 띄게 되였는데 문단에서 불쑥 뛰여 나온것이 잡문이였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문단에서는 김학철(홍성걸) 선생이 팔을 걷어부치고 제일 먼저 나섯다. 개혁개방은 “금지”` “차봉”을 많이 풀어 주었는데 잡문도 우사칸에서 나오게 되였다. 문화대혁명10년기간 거이 태양같이 빛나든 “문예혁명의기수” 강청은 여덟개의 본보기극만 마당에서 춤추게하고 다른 것들은 눈만 빠꼼이 떠도 정수리를 땅! 갈겨서는 찔끔 움츠러들게 했다. 여덟개 외의 모든 문예작품들은 그야말로 달걀에서 뼉다구 추리기로 흠집을 잡아서는 저승에 처 넣었던것이다. 진시황은 분서갱유 폭정으로461명의 유생과 몇수레의 책을 (그때는 장작개비같은 죽간임. 지금책으로 환산하면 두어마대 정도.) 태워 버렸지만 강청은 수십만의 문예인재와 수천만부의 작품을 (서적,영화,그림,서예 등등 ) 분서갱유 해 버렸다. 그는 중국의 고금의 것만으로는 성차지않아서 외국의것도 분서갱유를 해치 웠다. 그런 살풍경속에서 잡문은 기겁을해서 저절로 우사칸으로 들어갔다 .자기진영에 대해서는 찬양만하고 적발, 풍자, 비판은 주제로 못 하는 상황에서 칼처럼 예리한 잡문은 쓸모가 없었던것이다. 제대로 말한다면 누구도 감히 쓰려고 못했다. 모르긴해도 담대키로 유명하다는 김학철선생도 그런때는 잡문을 추켜들지 못했을 것이다.     개혁개방 덕분에 다시 붓을 들게된 김학철 선생은 잡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두어편을 읽어보니 재미가 깨소금 맛이였다. 그래서 김학철선생의 잡문은 두말할것 없고 다른 사람이 쓴 잡문도 만나기만하면 하던일을 제쳐놓고 무릎을 치며 읽었다. 하여 안해가 이상해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잡문이 너무도 적었다. 가물에 콩씨나기였다. 궁여지책으로 한문으로 된 “잡문월간” “잡문순간” “잡문보” “잡문특간”같은것을 사서 보기도 했는데, 기막히게 재미있고 느낌이 많았고 여운이 깊고 길었다. 잡문감질이 날때면 로신선생의 잡문을 다시 꺼내여 읽기도 했는데 역시 재미가 민숭맹숭했다. 나는 그 원인을 사색해 보았는데 하나는 나의 력사지식 등 감상수평의 부족이였고 다른 하나는 선생의 글이 지금의 현실과 너무도 멀었기 때문이였다.     잡문은 반드시 어떻게 써야한다는 중공중앙선전부거나 아래다리인 문련, 작가협회의 규정 혹은 지시는 없는줄로안다. 그런데 잡문의 가장 큰 특점, 작용, 힘, 가치는 적발, 풍자, 비판에서 발휘된다. 현실비판에 있다. 이것은 그어느 문예쟝르도 비길수 없는 우세다. 그러니까 비판을 써야 한다는 말과 같은데, 꼭 그래야 한다고 하지는 못하지만, 대체로 그렇다. 이런 시비는 평론가 선생들께 맡기고, 김학철 선생은 어느글에서 “잡문을 써야 한다”고 말한바가 있다. 뜻인즉 “인간정신기사”요 “지성인”이요 하고 사회적으로 존경하는 작가선생들이 현실의 자산계급적사상, 생활방식, 썩어빠진 그 모든것들을, 온갖 비정의, 온갖 부정부패ㅡ 백성들이 가장 증오하는 이런현상을 묵과 하지말라는 것인것 같다. 예리한 비수ㅡ잡문을 들이대라는 것이다. 목적은 진리와 정이를 수호하며 사회진보를 위한것이리라.     개혁개방후 우리문단에는 시 소설이 우후죽순마냥 솟아 나왔는데 독자층을 살펴보면 텔레비 보는사람이 제일 많은데 소품을(단막극) 좋아하는 관중이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지면에서는 실화와 잡문애독자가 제일 많다. 이것은 독자(인민)들의 수요와 구미를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현상이다.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실화와 잡문이 너무도 적은것이다.     몇몇 중견작가씨들과 얘기를 해보니 하나는 수평이 없는 사람들이나 쓰는 그따위 잡글을 어떻게 쓰냐고 즉 얼굴이 깍인다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끄럽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필화를 당한다는것이였다. 유력한 증거로 김학철선생을 대뜸 내대면서 잡문때문에 법원에서까지 왔다갔다한 사건을 실례로 들었다. “하두 김학철선생이시니 무사했지! 우리따위라면… 으흐흐 끔찍해라! 상상만해두 소름이끼쳐서…”하며 두억신을 만난 봉길이처럼 두눈을 흡뜨고 혀를 빼물며 손발을 벌벌 떠는것이였다.     김학철선생은 생전에 이런 명언을 한바가있다. “편안히 살겠으면 불의를 보고도 못본척 하고 사람답게 살겠으면 그것과 싸우라.” 세상사람은 누구나 다 사람답게 산다고, 살겠다고 말하지 개나 돼지같이 살겠다는 사람은 하나도없다. 사람은 불의를 보면 마땅히 싸워야한다. 그러나 그렇지못한것이 적지않은 현실이 아닌가?!... 정의용사 상금을 왜서 세웠는가? 거기에는 정의용사가 많기를 희망하는 일면도 있는것이다.      인간정신기사(령혼기사) 사회지성인이라고 하는 작가들이 숭고한 사명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정신적 량식을 제공하는것이 아니겠는가!.     김학철선생이 생전에 또 이런말도 한적이 있는것 같다. “지금은 잡문을 써야할 때다…” 물론 이말은 다른것을 쓰면 안된다는 말은 아니다. 작가들이 잡문도 쓰기를 회망하는 말이다. 왜서? 당과 인민과 독자와 사회가 박절히 수요하기에. … 우리 문단에 잡문도 많아서 독자들이 즐거워 하였으면 좋겠다.     김학철선생 작고후 잡문이 사라지지 말고 더 만발하면 고인도 독자들과 함께 기뻐할것이다.     사람들은 잡문작가를 수평이 없다고 얕잡아 보지 않을뿐만아니라 오히려 무척 존경할것이다. 작가는 정의의 용사다! 정의의 용사는 사람들이 존경하고 애대한다.     일전에 문화부장선생이 “문예작품은 무가지보다.”(값을 정할수없는 보배)라고 말하는걸 듣고 “그 량반이 제대로 말하는군! 말은 바른대루.”하고 크게 동감한바가 있다. 잡문도 문예의 일분과로서 무가지보다. 그도 정신문명건설과 화해사회건설에 크게 한몫을 한다.                                                                                                                                                                                                08.3
37    부질없는 축제 댓글:  조회:1649  추천:2  2013-12-12
            잡문                                                        부질없는축제                                                                                                         회령      어데서배워온법보인지이산골도시에서는근년에동삼과여름에똥힘을다해서소위축제라는잔치를해마다어길세라하고있다. 축제를 국경절경축행사보다도 더 명심해 서 성대히 진행하는데,(련속 7ㅡ8일씩이나)거기에는 약간한 내막이 있다.     그러니까 4년전이겠다. 그때의 시위서기와 시장은 부전조개 이 맞듯 궁합이 척척 잘 맞아 돌아갔는데 그들이 바로 축제를 창출해 냈다. 서기덕분에 시장으로 승진한 젊은이는 군대식으로 직계상급의 지시와 뜻에 그야말로 무조건 호응하였다. 서기는 자신의 임기내에 돌출한 표현을(업적) 해야겠는데, 초상인자를 위해서라며 궁리해낸것이 동기빙설축제와 여름철관광축제 였다. 당시로는 이런 잔치가 없었는데, 기발한 착상으로 상급에서도 희한해 하며 비준했을뿐만아니라 경비도 보태주며 적극 부추겨 주었다. 그것이 “초상인자”에서 효력을 본다면, 상급어른의 예리하고도 원견성 있는 안광에서 볼때 말그대로 뉘좋고 매부좋은 일이였든 것이다. 이 산골도시에서 갑작스레 경제를 춰세을 놀라운 프로젝트는 없고 젊은혈기에 업적은 불끈불끈 쌓고싶고… 시장은 두손두발 들고 달아다녔다. 나중에 성과는 어찌되든… 참신한 발상이 아닌가. 이 자체만으로도 성적을 쌓는것이 아닌가. 서기와 시장이 흥분해서 열을 내니 감히 토를다는 사람이 없었다. 두엇이 처음에는 머리를 기우뚱거렸으나 케가 결정하는데로 쏠리니 그들도 적극옹호로 태도를 급전환 하였다.     하여, 먼저 여름철관광축제를 하였는데 절목이 이채로웠다. 퇴임한 중앙과 성의 수장을 모셔오고 한국에서 3류가수를 두엇 데려왔다. 높은어른과 외국가수(대단한 높은 어른들과 유명가수가 오신다고 미리 해보를 했다.)를 실물로 구경하지못한 산골사람들은 목을 빼들고 무대를 주시하는데 드디여 축제는 시작되였다. 시장이 직접 사회를 하고 서기가 열정에 끓어넘치는 연설을 했는데 중점이 알아듣기쉽게 간단하고도 명료했다. 중앙과 성의 어른들이 백망중임에도 왕림하신데 대하여 충심으로 되는 감사와 환영을 표시한다는것, 외국에서 피곤을 무릅쓰고 달려온 유명가수선생께도 충심의 감사와 환영, 시민을 대표해서라면서 굽석굽석 최경례까지 한후 그들에게 비단인지 양털인지 한발이나 되는 수건을 목에 걸어 주었다. 다음, 축제의 목적을 말했다. 이 축제를 해서 이 도시를 세계에 알려 초상인자를 한다. 그래서 경제가 비약발전을 하고 시민들이 잘살게 한다.     서기가 사명을 원만히 수행한후 중앙어른이 무대로 올라가 세동이들이솥뚜껑만한 징을 드엉!드엉! 세번 힘차게 쳤다. 그러자 잔뜩 벼르고 있던 하늘에서 기다렸다는듯 세찬 소낙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사람들은 감탄인지 비명인지 좌우간 와아! 소리를 질렀다. 좌석마다에 일회용 비닐비옷을 마련해 두었기에, 우산도 스스로 지참했기에 달아난 시민은 별로 없었다.(장마기에 요행을 믿고 날짜를 정한것이 랑패였다.서기는 8자가 길하다고 그렇게 8월장마철로 파이반을 했다.) 시민들은 서기와 시장을 줄욕하면서도 희한한 구경을 하겠다고 자리에 궁둥이를 붙이고 뻗치였다. 얼마후 비줄기는 가늘어 졌다. 그러나 한절반 벗은 연원들은 비샤와를 하며 수고를 했다. 한국 유명가수라는 중년의 녀자는 련애간지 사랑간지 한 노래를 코 맹맹이 소리를 내며 불렀는데 재청도 없고 박수도 없었다. 이어 역시 한국에서 숨가삐 달려왔다는 청년남자가 미친듯이 날뛰며 초고속박자로 고함을 지르며 쟈즈곡을 불러댔다. 시민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런 반응도 없고 처녀애들 몇이 새된소리를 질러댔다. 그 가수가 “반갑습니다! 사랑해요!”하고 소리지르며 정수리에 두손가락끝을 대고 복숭아모형을 보인후 손키스를 날리며 무대를 내려서자 십여명 경찰들이 그를 에워싸고 인벽을 이루며 보호하는것이 공연한 짓거리였다. 왜냐하면 시민들이 언녕 귀찮아하며 거들떠도 보지않는데 보호는 무슨 개뿔짝같은 보호냐 말이다. 경찰전사들은 그렇게 포치를 하니 어쩔수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화포를 쏘고 꽃불을 한바탕 터치였는데 그것이 제일 볼만했다.     차츰 효과가 나타나겠는지... 겨울이 될때까지 “초상인자”는 별로 기별이 없었다.     겨울이 되자 결정대로 이번에는 겨울철빙설축제를 거행하였다. 빙설축제는 외지에서 얼음조각을 잘한다는 공정대를 데려왔다. 얼음과 눈을 리용해 정자도 만들고 사람, 짐승도 새기고 애들이 좋아하는 미끄럼대도 만들었는데 대부분 광장공간은 스케트장으로 꿈때 버렸다. 공예기술을 썼다고 해서 그러는지 품삯은 2백만이라는 소리도 있고 3백만이라는 소리도 있었다. 공정대는 다음 일감이 또 있어서 일손을 다그쳐 얼음조각을 끝내버리고 달아났다.     빙설축제는 늦은아침때나 되여서 시작했다. 웬일이냐? 이번에도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광풍이 몰아치고 기온은 땅땅 급하강을 해서 별일 없이는 누구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학생들과 기관단위 직원들을 대회에 동원했다. 이번에는 직계상급에서 부국장인지 한 사람이 하나 오고 다른 귀빈은 없었다. 시장이 사회하고 서기가 두어마디 연설한후 십여명 아이들이 줄지어 스케트를 타며 한바퀴 돌았다. 그리고 대낮이지만 화포를 한바탕 터치였다. 문예연출은 략해 버렸다. 아무리 심원한 의이가 있는 정치적대사라고 해도 얼어죽자고 벌거벗고 연출을 하겠는가. 지금 연출은 거지반 벌거벗고 해야하니까.     이곳에서 축제를 진행한후 다른곳에서도 무슨무슨 명분을 달아 축제를 하였다. 진달래축제, 배축제, 버섯축제, 모내기축제, 돼지축제, 황소축제, 상모축제, 김치, 찰떡축제, 개장국축제…그런데 효력이 그닥잖아서 대부분이 룡두사미가 되다가 아예 걷어치웠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는 해마다 어김없이 년중 특대정치적대행사로 축제를 견지, 진행하고 있다. 축제파이반서기는 임기만료후 상급으로 승진하고 시장은 서기로 급을 췄다. 하여 다른시의 간부가 시장으로 왔는데, 그는 조사연구후 형식주의, 관료주의, 쓸데없는랑비라고 하면서 대담히 축제를 페지하자고 의견을 제기했다.(사업단위직원들 월급을 70%밖에 못주는 상황임) 그러나 서기의 강력한 주장으로 그리고 다수가 서기를 따르는데서 축제는 계속되고 있다. 금년이 5년철이 되였다.     호사다마라고 할가 여름축제에는 번마다 비가오고 겨울축제는 꼭 날씨가 사나웠다. 랑패였다. 하여 축제기간은 말할것도 없고 그 전후 상당기간 서기와 시장은 눈먼욕살을 뒤통수에 달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겨울축제는 얼음조각이 해마다 볼멋이 적어졌는데 지난해에는 얼음강판을 위주로 가운데는 눈무지를 크게 만들고는 “조어도는 중국령토다!”라고 쓴것이 중심경물이였다. 시민들은 “그느마들이 골을쓰네. 나그네 말죽먹이기로 얼렁뚱땅.”하고 비난하였다.     이 도시에서는 거금을 먹여(매차 5,6백만.) 축제를 하여 왔지만 “초상인자”와는 사실상 전혀 관계가 없었다. 투자하는 사람이 축제를 보고 투자하겠는가… 소웃다 꾸레미 터질일이 였다.     그러나 축제가 아무 쓸모도 없다는건 틀린다. 겨울에는 애들이 얼음지치기를 신나서 하고(한번에 20원. 노는애가 몇이 되지는 않지만.) 여름에는 식후산보객들이 소일거리로 즐기기도 한다.(광장이다보니 공짜다.) 서기는 “축제는 기정방침으로 동요해서는 안된다!”고 력설하면서 시민들의 문화생활에 기여가 크다고, 시민들을 위하여 실제적인 일을 하는것이라고 유력하게 론설을 하고 초상인자리론을 슬쩍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민들은 “돈이 아깝다! 먹을알이 있는 아 들은 좋겠다. 먹을게 없구서야 기를 쓰고 필요없는 일을 할턱이 있겠는가…”하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어떻게 먹을알이 있는가? 그것은 세살짜리도 다 안다…                                                                                                                 12. 7       부기:  18기 3차전회후 축제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36    목단강 푸른물결 댓글:  조회:1835  추천:0  2013-12-09
              실화                                                       목단강 푸른물결                                                                                                                   회령    왕장수아버지는 목단강시 량식창고 회계였다. 어머니는 량식배급소에서 일했는데 그때 세월로는 무척 포실하게 잘사는 집이였다. 계획경제시대 시장도 수수밥에 강낭떡을 혁명정신을 아로새기며 먹어야 했지만 장수네는 이밥에 밀가루를 먹었는데 장수는 그외에도 매일 염소젖을 한병씩 먹었고 고기반찬과 사탕과자와 과일을 별로 떨구는 때가 없었다. 비결은 간단했다. 량식창고 가공창에서 나오는 내뱃겨 (보드라운겨)를 몇마대씩 빼내서는 시교 농민들에게 돼지사료로 주고 세량을 받아 먹었는데, 령도층들이 “적절한방식”으로 했기에 아무 말썽도 없었다. 그리고 통장에 남는 잡량도 보리고개에 농민들한테 뀌여주고 세량을 받았다. 집에는 콩기름도 남아 돌았다.(한달 일인분1량 공급이였음) 왕회계는 까근하고 또 조심성이 많아서 장부에서 차실이 없었고 항상 선진공작자에 뽑혔다.    같은또래들이 “왕장수 개장수”(조선애들이 붙인것)하고 놀리기도 했지만 장수의 이름에는 깊은 사연이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왕회계부부는 선후로 아이를 셋이나 잃고 네번째로 장수를 보았는데, 복술에 유명하다는 늙은이가 사주와 용모 손금을 자세히 본후 장수(오래 삶)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 아래로는 더 생기지 않고 장수만 잘자랐다. 장수는 하야말쑥한 얼굴에 귀였게 생긴애였는데 얌전하고 총명했다. 그는 두말할것도 없이 왕회계부부의 무녀독남 장중지보옥이고 자랑이였다.    장수는 고중때부터 감실감실 코밑수염이 나기 시작하드니 어느새 준수한 미청년으로 성장했다. 처녀동창들이 은근히 추파를 보냈으나 그는 한점 흐트러짐이 없이 학습에 열심했고 교규를 참답게 지켰다. 선생님들도 장수를 퍽 좋아하며 사랑했다. 반주임선생님은 로동만 있으면 장수를 쉬운일에 배치하거나 휴식을 주었다. 장수는 생산대(지금의 촌민소조)농업지원에 한번도 나간적이없다. 그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로동이란건 한번 해본적없이 특수보호, 과잉보호속에서 애지중지 자랐다. 부모들이 선생님들과의 관계처리를 원활히 잘한데서 입단도 순조롭게 하였다.    1962년 졸업을 한달가량 앞두고 시인민무장부에서는 모 공군부대와 배합하여 항공비행학원생 모집을 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중국청년들의 참군열정은 항상 기세 높은데 공군이라면 누구나 바라마지않는 신비의 세계였고 부러운 곳이였다. 얼마나 그럴듯하고 멋진가!... 장수는 3백여명 지원자들속에서 단연 일등으로 순조롭게 합격되였다. 명액은 2명인데 장수만 합격 되였든 것이다. 학교와 사회는 특대회사로 흥분하고 감탄하고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했다. 장수가 부대로 떠나가던날은 목단강역전이 법석 끓어 번졌다. 그야말로 고향땅에 다녀가는 개선장군을 환송하듯 했다.    장수는 산서성에 있는 부대학교에 도착하는 즉시 군복을 갈아입고 긴장한 입대 교육을 받게 되였다. 오줌눌새도 없이 몇시몇분으로 딱딱 짜인 작식제도, 틀에 맞춘 모든격식, 지어는 이불개이는것 모자 쓰는것까지도 규정이 엄격했다. 일요일에만 외출을 허락하는데 외출은 한개 중대에서 3명을 초과 못하며 사전에 서면으로 청시보고를하고 비준이 내려져야 외출을 하며 3명이 함께 나갔다가 함께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귀교 보고를 또 서면으로 즉시 해야했다. 3명이 차지 않으면 외출을 못하며 외출구역이 또한 제한되여 있었다. 교육은 크게 두개방면이였는데 8시간은 대렬정돈과 보법 등 행동규범 훈련이고 밤 두시간은 각종규정, 규칙과 사상정치 학습이였다. 입대교육은 이찌도 호되고 엄격한지, 눈알 한번 잘못 굴리거나 입술을 피뜩 움직여도 대뜸 불호령이 벼락같이 떨어졌다. 두번까지는 불호령이고 세번째는 벌이였다. 벌은 자기위치에서 나와 파고박은 막대처럼 차렷! 꼿꼿이 서 있는것인데 보통 30분 내지 한시간, 교관의 기분에 달린것이다. 식사는 당시로 말하면 나라님급이였다. 입쌀과 밀가루 우동이 주식이고 닭알은 이틀에 한번, 고기소만두 돼지고기 물고기는 일주일에 한번이였다. 그런가하면 신선한 각종 과일도 자주 먹었다. 목욕과 영화관람은 일주일에 한번이고 리발은 한달에 두번이였다. 훗날 “3년재해”라고 일컷은 그시기에 이런세상은 참으로 별천지였다. 사람들이 공군을 부러워한데는 전투기를 타고 하늘을 씽씽날며 적들을 깔아뭉개고 조국을 지킨다는 높은차원의 각오도 있었지만 이밥에 고기랑 잘먹고 대우가 좋다는 생각에서기도했다. 신병들은 성수가 나서 교관의 명령에 번개같이 움직였다. 생기발랄하고 씩씩한 기상들이였다. 일매지게 끌글한 군인들이였다! 말그대로 “엄숙, 활발, 단결, 긴장”한 특수대오였다.    그러나 장수는 죽을맛이였다. 처녀들까지도 부러워 죽겠다는 항공비행학원이 이렇게도 고되고 무미건조할줄은 몰랐다! 부대에 간날부터 장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의 일기에는 이런 단락이 있다.      막심한 후회가 된다. 다른대학에 갔드라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했겠는가!... 조롱속에 같혔다. 고기먹고 좋아하는 저 농촌애들,   촌   빠위투보재(산골두더지) 우물안의 개구리…나는 넓은 세상에서 멋지게 살고싶다. 북경대학 정치계로 가는건데… 졸업하면 뜨르르한 령도가 되고.. 인생은 자기것이다. 누구의 명령에, 지휘에 복종해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노예가 아니다. 자기의 앞날은 자기가 개척해야한다. 소리치고 걸을줄밖에 모르는 왕반장!(교관) 나만 훈계해?! 아는것이 너, 몇개나있니? “앉잣! 섯! 차렷! 우로! 좌로! 보고!” 그외에 무엇이 또 있니? 게사니처럼 꽥꽥 소리나지르고. 너나 부지런히 보고해라. 꼴같잖은 주제에. 오줌누는것도 보고하고 똥싸는것도 보고하고… 잘한다. 멋있다. 오늘도 열번은 더 호통을 받았다. 왕바당! 아! 어떻게 할것인가…    자유로운 세상이 너무도 그립다… 마음껏 나래칠수있는 자유로운 세상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겠다. 아! 자유여…    그의 일기는 후회와 비애 절망, 불평과 불만 분노, 앞날에 대한 고민과 사색 이러한것들의 반복이고 련속이였다. 일기장은 그가 대화하는 유일한 벗이였고 위안이였다.    한달조금지난 어느일요일, 장수는 깜쪽같이 사라졌다. 신병을 잃어버린 학원은 벌컥 뒤집혔다. 부대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시내를 샅샅이 뒤지는한편 목단강시 인민무장부에 즉각 전화련락을 하였다. 장수는 집에 있었다. 학원에서는 간부 두사람을 파견하여 장수를 데려갔다. 그들은 선처를 거듭 부탁하는 장수부모들을 좋은말로 안심 시켰다. 장수부모들은 한턱 잘 먹였으니, 그리고 학원령도들께도 한방 잘 쏘았으니 별일없을거라고 시름을 놓으면서도 개운치는 못했다.    장수의 도피행각은 부대와 목단강시를 들썽해 놓았다. 사람들은 장수를 한심해 하기도하고 애석해 하기도했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의 간절한 바람대로 정말 별일이 없었다. 장수는 부대에 잡혀간후 반에서 한번 비판을 받고 지도원한테서 한차례 교육을 받았을뿐이다. 그의 자아검토도 꽤 좋았다. 아무런 처벌도 없었다. 부대의 처리는 너무도 따뜻하고 너그럽고 고마웠다. 학원령도에서는 장수네반이 년도선진반 평의에 참가하는 자격을 취소한다는 결정만 내렸을 뿐이다. 령도들은 사건을 상급에 보고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그들로서의 리유가 있었을것이다.    그후, 입대교육이 석달째 되던 어느일요일 장수는 입대교육 석달기간을 끝내 견디지 못하여 또 도망쳤다. 그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자사자리사상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던것이다. 그리고 적으마한 고생에도 그는 저항력이 너무도 없었다. 그런가하면 자기위주의 고집은 또한 너무도 심했다. 그리고 믿는 구석도 있었는데 그것은 부모들의 신통력이였다. 그의 생각은 단순하고 유치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장수는 셈이 들지 못했던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것은 후천적으로 형성된것이라는 점에 사람들은 깊은 사색을 하지않을수 없다. 이번에는 학교도, 장수도 어물쩍 넘어갈수 없었다. 장수는 전 교 사생대회에서 호된 비판을 받고 군적, 단적캐출(제명 자격박탈)을 맞은후 본지로 압송 되였는데 며칠후에는 로개소로 끌려 갔다. 학원은 군단내 년도선진단위 평의 참가자격을 취소당했다. 그러나 다행한것은 이상하게도 상하어느령도도 처벌을 받지않은 것이다. 장수는 또 한번 목단강시를 들썽해 놓았다. 이번에는 장수는 두말할것도 없고 그의 부모 지어는 시고중까지도 사회여론에 올라 타매의 대상으로 되였다. 장수가 로개소로 끌려간지 넉달이 지나 그야말로 엎친데덮친격으로 왕회계는 “4청” 시점에서 경제문제로 단위에서(공직에서) 캐출당했는데 그들은 시교에 농촌하방호로 아예 쫓겨갔다.    장수는 로개소에 끌려간후 개조표현이 좋아서 자주 표양을 받았다. 하여 3년기한을 반년 앞당겨 집으로 돌아왔다. 20여호의 편벽한 농촌마을은 사람들이 생활은 궁핍해도 인심만은 무던했다. 그들은 장수네를 차별시 하지 않았다.    장수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되였다. 정확한 세계관, 인생관이란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였고 셈이 들었던 것이다. 사람이란 시대를 따라야한다. 당시의 시대적요구는 사람마다 대공무사 (공적이고사심이없음)하며 일체를 당에 바치며 당의 지휘에 절대복종하는것이였다. 그러나 자기는 명령에 죽고사는 군인으로서 너무도 엄청난 착오를 범했던것이다. 그는 조직의 처리가 참으로 관대하다는것을 뼈저리게 깊이 알았다. 장수는 생산대일에 적극 참가하는 한편 부지런히 고중학과를 복습하였다. 일밭으로 나갈때도 책을 갖고 다니였다. 그의 책은 어느것이나 첯장에 “북경대학으로!!!”라는 구호가 씌여져 있었다. 그것은 그의 새로운 출발의 목표였고 오매불망 잊지못하는 간절한 념원이였다. 역경속에서도 피고있은 청춘의 황홀한 꿈이였다. 그는 명년 (1966년)에 대학시험을 치리라 작심했다. 그러나 장수는 자기의 뒤통수(당안)에 “육체로동 외의 다른 출로는 주지못함.”이라는 뻘건도장이 찍혀 있음을 몰랐다. 마을사람들은 장수를 훌륭한 젊은이라고 칭찬하고 부러워 했다.    1966년 중국에서는 세상이 다 아는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발동 되였다. 시고중홍위병들은 “파4구”(낡은사상 문화 풍속 습관을 때려부쉬는것)에 재미들어 날뛰다가 잇따라 선생님들에게 대자보 불질을 하기 시작했다. 한달가량 지났을가 그 다음은 “요물잡귀”(문제인물)를 잡아내는데 혈안이 되여 총력을 집중했다. 이 고비에서 장수는 재수없게 멱살을 잡히웠다. 그의 천추에 용서못할 만악의 죄장으로는 “목단강 혁명청년 나아가서는 중국의 모든 혁명청년들의 얼굴에, 신성한 공산주의청년단 조직에, 위대한 중국인민해방군 대오에 먹칠을 한 가장 수치스럽고 비렬한 도주병, 변절자, 반혁명, 자산계급, 수정주의 후계자 전형”이라는 것이였다. 그는 학교에 끌려가서 갇혀 있으면서 고깔에 개패까지 걸고 단독으로 혹은 다른사람들과 함께 무자비한 비판두쟁을 받았다. 그리고 온갖 “요물잡귀”들과 함께 거리로 끌려 다니기도 했다. 계급투쟁 열정이 하늘끝까지 치솟은 홍위병들은 마침내 그의 부모들까지도 잡아왔다. 반혁명분자새끼를 낳은 년놈이니 그들도 뛸데없는 반혁명분자라는 론리였다. 그야말로 계급의적들을 씨도 남기지 않고 깡그리 철저히 소멸하는 혁명기세였다. 훗날의 평론이지만 목단강시에서 이런 봉변을 당한 가정은 유일무이 장수네집 뿐이였다.    그해 년말부터 투쟁의 예봉은 집권파에게로 돌려지기 시작했다. 이듬해 봄 장수네 세식구는 철저히 때려잡은, 이젠 완전히죽은, 멸망된 “요물잡귀”라고 판정 받아 공사(향)군중독재지휘부에 넘겨졌다. 그들은 공사내를 한바퀴 끌려다니며 또 혹독한 비판투쟁을 당한후 다시 대대(촌)군중독제지휘부에 넘겨졌다. 대대에서는 그들이 압송되여오자 “부르면 즉시 와야한다!”는 엄포를 놓은후 저녘켠에 집으로 돌려 보냈다. 여러차례 수색당하고 반년이나 비여있은 집은 저승굴 같았다. 마을사람 서넛이 와서 불도 때여주며 두루 위안의 말을하면서 저녘밥을 끓이자고 했으나 오래동안 비워둔 구들골에는 랭기가 차서 도무지 불길이 당기지 않았다. 그들은 집에가서 밥과 반찬을 이것저것 가져오고 어서 먹으라고 극진히 권했다. 그런데 이날밤 한끼밥은 그들의 저승밥으로 되였다. 굶은귀신은 면한 셈이다.    이튿날 아침, 여러사람들이 장수네집에 보러 왔을때 그들을 맞아준 주인은 한장의 종이장이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씻지 못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목단강 고기밥으로도 아깝지만 거기로 갑니다. 마을여러분들께 고맙고 미안합니다. 모두 잘 계십시요..” 밑에는 왕회계와 안해, 장수 이름이 차례로 씌여 있었다. 역시 훗날의 평론이지만 일가가 이렇게 죽은일은 목단강시에서 처음이였다.    마을에서는 대대에 달려가서 독재지휘부에 보고 했는데 회의중이던 반란파와 독재지휘부 령도들은 “계급의 적들은 완고하고 악독하다!”면서 내버려 두라는 것이였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수야 있는가!... 마을사람들은 목단강 량안을 련 닷새나 샅샅히 뒤지였다. 그들은 10여리 내려가서 장수의 시체를 찿았을뿐 그의 부모들 시체는 찿지 못했다. 마을에서는 장수를 매장한후 그날로 장수네 집을 흉가라 해서 파가해 버렸다.    왕장수는 이름처럼 오래 살지 못했다. 24살 청춘의 새출발, 간절한 념원, 아름다운 꿈은 목단강 푸른물결에 멀리로 흘러갔다.    장수의 죽음은 누구의 탓이든가… 그것은 어찌 되였든, 그의 죽음은 계급투쟁을 억세게 틀어쥔 시대의 비극인것만은 틀림이 없다.    목단강 푸른물결은 인간세상희비의 온갖사연을 아는듯 모르는듯… 오늘도 출렁출렁 한대중 흘러간다.ㅡ                                                                                                               08.12
35    모택동과 류소기의 최후의 만남 댓글:  조회:2562  추천:2  2013-12-06
                   실화                                                                                              모택동과 류소기의 최후의 만남                                                                                                                   회령    중공8기11중전회는 1966년8월1일부터 12일까지 북경에서 열리였다. 회의 마지막날 모택동의 제의에 의하여 중앙령도기구에 대한 개선이 있었는데 중앙위원들은 사전에 인쇄한 정치국상무위원 명단에 동그라미를 그리면 되였다.    명단의 서렬은 다음과 같았다.    모택동 림표 주은래 도주 진백달 등소평 강생 류소기 주덕 리부춘 진운.    류소기는 1945년 7기 당대회후 줄곧 인정되여 온 후계자 위치에서 8위로 내려 갔다.    8기11중전회후로부터 류소기에 대한 비판은 급격히 강도가 높아 지면서 10월부터는 “류소기를 타도”하는 새로운 계단에로 전입 하였다.    1967년에 들어 서면서 류소기의 처지는 더욱 험악해 지었다. 1월1일, 중남해 반란파들은 류소기가 거주하고 있는 복록거 담장에 “중국의 흐루쑈브 류소기를 타도하자!”는 표어를 붙이였다. 1월3일에는 척본우의 사촉하에 류소기와 부인 왕광미를 투쟁하였는데 이것은 첯번째로 시작이였다. 1월12일, 척본우는 조어대 16호층집에서 중앙판공청 일부 반란파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류소기 등소평 도주가 중남해에서 아주 편안히 있는데 당신들은 왜서 투쟁하지 않는가?”하고 선동 하였다. 그날 저녘 중남해 반란파 “홍색반란단”의 150여명 사람들은 복록거에 뛰여들어(중앙경위국에서 막지 말라고 지시했음) 뜨락에서 류소기와 왕광미를 투쟁 하였다. 이때로부터 복록거는 마치도 장마당처럼 되였는데 누구든지 마음대로 쏘다니며 대자보를 붙이고 류소기와 왕광미를 투쟁하였다. 류소기와 왕광미는 인신자유를 완전히 잃게 되였다.    1월13일 깊은밤, 모택동의 비서 서업부로부터 류소기 판공실에 전화가 왔는데 “주석께서 류소기와 인민대회당에서 담화를 하려고 하기에 내가 차를 가지고 가니 초병들이 막지말게 하라.”는 것이였다. 류소기의 비서 류진덕은 “지금 이곳은 장마당 같이 되여 누구나 마음대로 드나드는데 당신이야 더 말할것이 있는가.”하고 대답한후 인차 류소기에게 통지를 전하였다. 당시 모택동이 거주하고 있은 인민대회당과 중남해는 지척이다 보니 서업부는 인차 복록거로 왔다. 류소기는 담배갑과 성냥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그를따라 모택동에게로 갔다. 왕광미는 그의 옷깃을 바로 잡아주며 불안한 심정을 감추지 못해 하였다.    모택동을 마주하자 류소기는 주동적으로 자기의 착오를 검토한후 정중하게 자신은 문혁중 착오를 범했기에 더는 령도직무를 감당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표시한후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의견을 제출 하였다. “첯째. 이번 로선착오(문혁중)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광대한 간부들은 좋으며 특히 많은 로간부들은 당의 보귀한 재부이다. 주요한 책임은 내가 짊어지고 광대한 간부들은 될수록 빨리 해방하여 당의 손실을 적게 하기 바란다. 둘째, 국가주석, 중공중앙정치국상무위원, 모택동저작편찬위원회주임 직무를 사직하고 자녀들을 데리고 연안 혹은 고향에 가서 농사를 짛게 하여 주기 바란다. 이렇게 함으로서 될수록 빨리 문화대혁명을 결속지어 나라의 손실을 적게 하기 바란다.” 모택동은 한참 침묵후 류소기에게 “기계유물주의” “기계인” 그리고 “회남자” 등 몇권의 책을 참답게 읽을것을 건의하였다. 헤여질때 모택동은 문어구까지 바래주며 “돌아가서 학습을 잘 하며 몸을 돌보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택동이 류소기에게 한 최후의 두마디 말이였다. 그리고 이번의 만남은 그들이 1922년에 서로 알게된후 최후의 만남이였다. 그후 류소기는 갖은 박해를 받아 1969년11월12일 새벽에 한많은 한생을 마치였다. 그리고 1980년 2월 명예를 회복 받았다.    여기서 좀 보충해야 할것이 있다.    1966년12월18일 모택동의 비준하에 류소기 전안조가 비밀리에 성립 되였다. 이 결정을 당시 공안부장이며 중앙문혁 성원인 사부치가 선포할때 “이것은 중앙에서 결정한 것이며 전안조의 책임자는 강청이다.”라고 명확히 말했다.     같은날 중앙문혁 부조장 장춘교는 중남해 서문 전달실에서 비밀리에 청화대학 반란파 두목 괴대부를 불러다 공개적으로 류소기 등소평을 포격하라고 귀뜀해 주었다. 그는 “철저한 혁명정신을 발양하여 물에 빠진 개를 호되게 족치며 그들을 추악하게 만들며 절대로 중도에서 그만두지 말라.”고 하였다. 장춘교의 귀뜀을 받은 괴대부는 12월25일 천안문 광장에서 “류소기 등소평을 대표로 하는 자산계급반동로선을 철저히 타도하는 선서대회”를 거행 하였다. 12월27일에는 북경 고등학교 반란파들이 공인체육장에서 련합으로 “류, 등 자산계급반동로선을 철저히 투쟁하는 대회”를 가지였는데 참가인수가 무려 10만에 달하였다. 12월30일, 중앙문혁대리조장 강청은 왕력 관봉 요문원 등 성원들을 이끌고 청화대학에 가서 괴대부들의 행동을 “견결히 지지 한다!”고 표시 하였다. 이와 동시에 척본우는 북경광업학원에 가서 “류, 등은 당내의 자본주의길로 나가는 제일 큰 집권파다!”라고 선양 했다. 강생은 인민대회당에서 있은 한차례 회의에서 “류소기는 중국의 흐루쑈브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그번의 만남후 풍부한 투쟁경험을 갖고있는 정치가이며 모택동을 잘 아는 중공 령도자로서 류소기는 자기의 운명에 대하여 예감이 있었다. 인민대회당에서 집으로 돌아온후 류소기는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왕광미와 아이들에게 “주석께서 나의 착오를 비판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매우 사양적이 였고 참답게 학습하며 몸을 잘 돌보라고 부탁 하였다.”라고 의식적으로 말하였다. 세상사에 부족한 아이들은 단번에 가슴속의 돌멩이가 뚝! 떨어진듯, 정황이 좋아지리라 생각 했다. 그러나 류소기 비서가 본바에 의하면 이튿날 왕광미의 기색은 “돌멩이가 떨어진듯한” 그런 기뻐하는 모습이 전혀 아니였다. 아니나 다르랴! 이틀후 중남해 반란파들은 복록거 뜨락에서 류소기와 왕광미를 또 한바탕 투쟁 하였다. 그리고 사흘후에는 전화기마저 철거해 버렸다. 며칠후에는 자녀들과 신변의 모든 공작인원들을 쫓아버리고 복록거 앞채에는 류소기, 뒤채에는 왕광미를 감금 했다. 그리고 통로를 벽돌로 담벽을 만들어 막아 버렸다. 이때로부터 그들은 영영 만나보지 못했다.(1967년9월13일 왕광미는 정식으로 체포되여 진성감옥에 이송 됨.) 엄밀한 감시하에 그들은 모든 인신자유를 완전히 박탈 당하였다. 하루에도 몇차례씩 투쟁을 당하면서 뚜들겨맞는 등 비인간적인 잔혹한 유린을 당하였다.    1968년7월9일부터 류소기는 완전히 병상에 눕게 되였다. 그리고 병상에서 투쟁을 받았다. 10월11일부터는 비사법으로 음식물을 먹였는데 1969년 11월12일 사망할때까지 그렇게 했다.    1969년10월17일 밤 류소기는 림표의 중요한 심사대상들을 소산시키라는 소위 “전비소산”명령에 의하여 개봉시에 실려 갔다. 그는 개봉시 원 정부뜨락에 있는 창고에 같히였다.(원 국민당 금성은행 금고) 그리고 거기서 사망 했는데 이튿날 밤중 비밀리에 화장을 했다. 그의 사망을 왕광미와 자녀들은 3년후에야 알았다.    “류소기전안조”는 1966년12월18일에 비밀리에 조직된후 1968년4월하순까지 줄곧 “왕광미전안조” 라는 명의로 활동 하였다. 4월하순후부터 “류소기, 왕광미전안조” 라고 공개 했다. 전안조의 조사는 줄곧 비밀적으로 진행 하였다. 류소기 본인과는 한차례의 대화도 없었다. 하여 류소기는 자기를 조사하는데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1968년10월13일부터 31일까지 열린 중공8기12중전회에서는 전안조의 소위 “심사보고”를 통과하고 류소기를 당에서 영원히 축출한다고 결정 하였다. 이 결정을 대회 결속후 24일이 지나서 즉 11월24일을 선택해서 류소기에게 들려 주었다.(선포 했다.) 이날은 바로 류소기의 일흔돌 생일날이 였다. 청천벽력의 심판을 들은 류소기는 기절하여 쓰러졌다. 그때로부터 이듬해 11월12일 사망할때까지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1980년2월2일부터29일까지 열린 중공중앙11기5중전회는 류소기의 마음속의 모든 말을 충분히 하여 주었다. 전회는 류소기의 모든 명예를 회복 시켰다. 5월19일 오후1시 류소기 골회를 모신 군함은 황해 대공도 부근의 골회를 뿌릴 지정한 해역에 이르렀다. 북경에서 골회를 모신 전용비행기가 청도로 올때 기상예고는 청도의 날씨가 “맑고 바람도 없다.”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날씨는 음울하게 흐리더니 섬섬세우가 내리는게 아닌가?! 골회를 뿌린후 돌아오는 군함이 수평선에 나타나자 갑자기 구름사이로 찬란한 해빛이 뻗쳐나오며 푸른바다를 비추었다. 군함이 청도부두에 닿았을때는 하늘은 씼은듯 말끔히 개이고 붉은태양이 눈부시게 빛났다. 사람들은 류소기의 마음을 하늘이 알아 본다고 하였다.    유유창천에야 무슨 뜻이 있으랴! 우연한 천기가 사람의 마음을 심각하게 할뿐이다...                                                                                                        09.12
34    명작이 다르긴 달라 댓글:  조회:2279  추천:0  2013-12-02
              잡문                                                                                                                  명작이 다르긴 달라                                                                                                               회령     반세기전 50년대의 일이다. “지금 그들은 미국의 달이 중국의 달보다 더 둥실하고 밝다! 서양사람들의 방귀가 향기롭다! 하는데…” 하고 말머리를 뗀후 모택동주석은 몹시 격분해서 그들의 언론을 신랄하게 반박 했다. “밝다느니, 향기롭다느니…” 그런말을 몇사람이 무슨 생각에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택동주석은 그들을 우파분자들이라고 하면서 호되게 족쳐 놓았다. 그이가 격노하게된 원인은 그들이 공산당과 새중국을 비방 모욕하며 부정한다고, 뒤엎으려 한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족자존심을 너무도 깎았기 때문이다. “중화민족이 일떠 섯다!”하고 세상에 대고 호매롭게 웨쳤는데 무슨 망발이냐 말이다. 더욱히는 세치혀바닥과 주둥아리를 놀려 우리를 뒤엎자구?! 어떻게 세운 정권인데, 언감생심 네놈들이 감히… 하여 반우파투쟁운동이 전국적으로 맹렬히 전개 되였고 몇달어간에 55만명의 당내외 지식분자가 육장벙거지가 되고 말았다. 해방전쟁보다 더 무자비하고 가렬처절한 정치사상투쟁운동이였다. 해방전쟁에서 국민당장교 몇이 당국에 대단히 잘 보이느라고 자살한바가 있지만 반우파투쟁운동시 자살한 사람은 그 몇백배가 된다. 그들은 누구에게 잘 보이느라고 자살한것이 아니라 너무 바빠서 혹은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해서 자살 했다.     그때 류소기주석은 중국사회의 계급의적을 다섯가지로 규정해 놓았는데 그것들로는 지주 부농 반혁명 나쁜분자 우파분자이다. 이것을 문화대혁명운동 때에는 5류분자, 5종인 등 으로 간칭해서 불렀다. 그러다가 인차 주자파 수정주의 력사반혁명 보수파 등 분자를 더 만들어 넣어서9종인으로 확대 하였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우파언론을 “숭양숭미사상”, “숭양미외”(떠받들며 아첨하며 추파를 보냄) “양노철학”이라고 명제를 달아서 다시한번 철저히 족쳐 놓았다. 이렇게 하는것을 그때는 “물에 빠진개를 끝까지 쫓아가서 족쳐 놓는다. 투쟁해서 무너뜨리고 투쟁해서 더럽게 만들고 투쟁해서 악취가 만년을 풍기게 하고 여지없이 짓밟아서 뭉개 놓으며 납작하게 만들어가지고 18층 지옥에 처 넣으며 불에 태워 버리며 영원히 번신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였다. 지금보면 말에 모순이 많아서 사개가 잘 맞지 않는것 같지만 그때는 계급적 각오와 증오심 적개심이 대단히 높아서 아주 잘 말하는 것으로 인정 하였다. 하다보니 우파분자들은 또 한번 죽을 곡경을 치뤘다.    반우파투쟁운동시 중앙반우파투쟁운동판공실 주임을 했던 등소평은 훗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반우파투쟁운동은 필요했다. 착오는 확대화한것이다.” 이 론단은 공평하고 정확하다. 그이는 집권한후 진짜우파 몇사람을 남겨 놓고 남어지는 몽땅 분자모자를 벗겨줬다. 그이는 당의 실사구시작풍을 훌륭하게 계승 발휘했든 것이다. 소품에서 명배우 조본산이 “착오를 지고 고치고 다시 지고 다시 고치고…” 마치도 우정 착오를 지라는 말처럼 오해를 하게해서 한바탕 웃기는데 기실 뜻인즉 “착오를 범하면 꼭 고쳐야하고 만약 또 범했다면 반드시 또 고쳐야 한다.”는 것으로 절대로 정확한 말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착오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더욱히 해보지못한 일을할때 틀리는일이 없을수 없다. 그런데, 착오를 승인하고 반성하고 고치는 작풍은 공산당에게만 있다!     미국의 달이 크다느니 어떻느니 서양사람 방귀가 메스겁게도 향기가 어쩌구 저쩌구 한 말은 지금에 와서 봐도 틀린말이다. 말 자체도 맞지않거니와 정치사상분야에서 사용했다면 확실히 엄중한 착오다. 모택동주석의 관점과 같이 누굴 뒤엎기 위해 한 말이라면 뚜드려 맞을수밖에. 뚜드리는것이 천만지당하고 옳다. 그런데 지금 적지않은 사람들에게 “숭양숭미사상” “숭양미외” “양노철학”이 있는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문단을 보면 발달국의 시 소설 수필 영화를 본 받아 만든 직품들이 자주 보인다. 그런데 문제점은 “발달국식”이 돼서 그런지 감상은 아직 둘째로 제쳐놓고 도무지 리해할수도 없는것이 기막힌 일이다. 발달국의 적지않은 경험들은 따라배울 가치가 있다. 특히 경제건설 사회관리방법 등등 면에 선진적인 것이 확실히 있다. 그러나 의식형태에서는 다르다. 우리의 의식형태는 그들보다 절대적으로 진보적이다. 혈맹관계로서 아니, 종주국관계다싶히 한 가장 발달국이라는 미국을 하내비처럼 모시는 한국에서 여북하면 지성인들이 “물질은 가장 발달했지만 도덕은 가장 더럽다.”라고 하겠는가. 그들의 세계관 인생관 그리고 지금 행세말로 된 소위 가치관 같은데서는 우리와 그들이 많이 다르다. 하다보니 의식형태의 산물인 문학예술작품이 질적으로 다를수밖에. 그들에게는 “초상상문학”이나 “초현실문학”이나 “순수문학” “자유주의” “자연주의” “무한시공간” “성문학” “광문학” “동물지상주의문학”… 문예작품이 맛이 있겠으나 우리의 구미에는 맞지 않는다. 서양사람들은 우유에 뻐터와 쨤을 잔뜩바른 빵을 먹어야(돼지비계를 겯들어) 속이 거뿐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먹으면 속이 느글느글해서 토할것만 같다. 썩장(청국장)에 김치를 먹어야 속이 쉬원하다. 일전에 한국티비에서 서양인을 상대로 김치에 대한 반응을 조사하는걸 보았는데 모두가 가지같은 코를 찡그려 붙이며 죽는 상통을 하는 것이였다. 그중에서 대범하고 솔직한 두 작자는 한놈은 “화장실 냄새가 난다.”하고 다른 한놈은 ”그보다 더 독하다!”하고 소리치며 달아났다. “그잘난 개코를 가지고 사람 웃기네.” 누가 비꼬는 바람에 한바탕 웃었다. 보다싶히 생활상의 차이도 차이겠지만 의식형태면의 차이는 매우 심각하다. 지어는 대립적이다. 미국사람들은 자기를 세계경찰국장 세계법원원장 세계대통령이라고 생각(의식형태)하지만, 그래서 남의나라 대통령의 모가지도 잘라 버리지만 우리는 그러면 안된다고 한다. 패권주의와 단극화를 우리는 견결히 반대한다. 보다싶이 너의체질에 맞는것이 있고 나의 비위에 맞는것이 있다. 의식형태도 마찬가지다. 그곳사람들은 자본주의가 가장 리상적인 사회제도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것은 불공평한 착취제도여서 공산주의로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면에는 화해사회를 중히여기며 건설할것을 호소한다. 사람이 싸우고 남을 해치는건 도리가 아니다.     “세기교체기문학총서” 총편인 진준도선생의 말과같이 “당대 중국문학의 주류는 의연히 현실주의며 사실주의 창작방법이다.” 왜서? 그런 작품이 우리의 구미에 맞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은 사람의 의식형태에 작용하는, 영향주는 특수성을 갖고 있다. 사상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자극한다. 사람들을 건전한 길로 추동한다. 사실주의적 작품이 그렇다. 사람들은 그런 작품을 좋아하며 수요한다.     얼마전에 모 발달국의 현대문학명작집을(시 수필 단편소설) 들여다 본적이 있다. 무척 재미있을거라고 잔뜩 기대를 가졌는데 그만 실망하고 두손을 들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무슨 뜻인지 어리뻥벙해서 알수가 없었다. 상업으로 찍어낸 가짜책이 아닌가?! 자세히 검사해 보고 다른 책과 대조해 보고… 가짜는 아니였다. 정품이 확실했다. 다행으로 심사평이 있고 평론문이 있어 그것을 입문 안내서(해설문)로 삼아 정독을 했는데, 아이쿠! 무슨 주의적 무슨 기법적… “적”이 가득한 그 글들은 더욱 알아 들을수 없었다. “문학사전”에서도 찿아볼수 없는 고급적 술어들이 가득 했다. 어느 의학자의 말이 문득 생각 났다. “외국에 가서 학술론문 발표를 할때 먼저 선정을 하는데 한자를 그것도 완체자를 가득 넣어 쓰면 알아도 못보고 발표에 넣어 준다. 잘 썼다고 하면서.” 발달국의 명작을 절반도 리해 아니, 알아못보니 떨어지긴 너무도 아득히 떨어 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비참한 상황이였다. “명작이 다르긴 다르군.” 책을 휴지통에 처박아 버렸다. 리상각선생(저명한 시인.)이 언젠가 이런말을 한적이 있다. “쓰레기 통에도 못버릴 것을 그래도 시랍시고 한보따리를 안고와서 유명교수라는 사람이 어떠어떠하게 명시라고… 발달한 우리나라의 현대명시니까… 어쩌구 저쩌구 하는것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리상각선생의 말을 되새기니 비관실망정서가 사라지고 기분이 훨씬 개운해 났다.     현실주의 사실주의 단일주류외에 다종다양한 예술적 탐구와 실험은 좋은일이다. 그것은 작가들의 창조력과 문학정체의 생산력 해방과 발전에 리롭기 때문이다. 외국의 것을, 특히 발달국의 것을 배우며, 모방 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데까지나 “우리화”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쓸모 없거나 되려 해로운 것이 된다.     쓴 사람이 반복적으로 설명해 주지 않으면 대부분 사람이 알수없는 그런 명작은(특히 시 소설 수필) 우리작가들이 본받지 말았으면 좋겠다. 독자들을 위하여 쓴 글을 독자들이 알아 못보면(전문가들만 알아 보고) 실패작이다. 랑패가 아닌가.                                                                                                        09.9
33    말은 제대로 했다 댓글:  조회:2584  추천:2  2013-11-29
            잡문                                                                      말은 제대로 했다                                                                                                               회령    중정 장개석씨는 한평생을 “공비”와 싸우는 혁명에 헌신을 하였다. 가히 말해서 그는 세계급 반공용사로서 국민당의 기치이며 코기러기다. 그런데, 그의말에 의하면 질서정연히 바싹 따라와야 할 뒤에 놈들이 말을 제대로 듣지않아서 혁명이 온통 뒤죽박죽 망태기가 되고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개석은 기치가 선명하게 관료매판자산계급ㅡ 네집의 독재조건하에서 끝까지 계속혁명을 견지 하였다.    국내전쟁때도 승패가 이미 다 판가리가 났는데도 그는 마지막까지 버티였다. 그는 1949년 초봄에야 비로서 대만으로 철퇴를 했다. 하지만 그는 1%의 희망도 버리지 않고 100%의 노력을 했다. 1949년12월 그는 다시 대륙으로 날아와 사천성 성도시에 하숙집을 잡고 최후일전을 독려 했는데 역시 아래것들이 말을 듣지 않아서 랑패가 되고 말았다. 하여 그는 12월10일날 오후 1%의 회망을 철저히 포기하고 대만으로 돌아갔다. 아니, 철저히 포기한것이 아니라 전략전술상에서 일보의 후퇴를 했다. 그후부터는 작고할때까지 만 25년을 반공대륙해방을 하루도 건느지 않고 웨쳤으나 자신은 한번도 다시는 대륙에 오지 않았다. “괘씸한것들! 너들쪽에 대고는 오줌도 싸지 않는다. 량씨피!” 이런 앙심을 먹은것 같다. 그러나 특견조, 행동조는 뻔질나게 파견했는데 이찌된 셈판인지 보내는 족족 착고에 끼운 생쥐나 까투리처럼 되여 모가지가 똑똑 끊어져 버렸다. 미인처녀 미령에게 장가들때 전제조건으로 가톨릭에 입적한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장개석은 세례후 반공대륙해방위업이 성사되게 하여 달라고 예수그리스도씨와 하느님아버지, 성모마리야어머니에게 진심으로, 열심히 기원 했다. 그런데 아무런 기별도 령험도 없은것은 또 무슨 판국인가! 장개석은 미령이 모르게 하느님의 궁둥이에 삿대질 발길질을 하였다.    그는 대만으로 간 이듬해 1950년3월19일 국민당중앙위원회전원대회를 열고 중요한 연설을 하였다. 그번의 연설에서 장개석씨는 비록 입은 비뚤었으나(울화증으로 면풍이 살짝와서 입이 때로는 공능상 약간씩 말을 듣지 않았다. 격동하면 왼쪽입귀가 귀밑으로 올라가는것이 선명히 알리였다.) 말은 참 바르게 잘했다. 이 연설은 그의 수만차례의 연설과 많은 저작중에서 가장 명연설, 명문장으로 평론이 되였다. 장개석씨는 원래 즉흥적으로 원고 없이 연설을 잘하는 특장이 있는데 그날 연설은 특히 멋있게 잘 되였다. 훗날 많은 력사학자, 언어학자, 정치가, 문학가들이 찬탄을 금치못해하며 천재라느니, 영명하다느니, 웅변, 달변가라느니, 사유가 민첩하고 명석하고 반응이 빠르다느니, 실사구시적인 정확한 연설이라느니… 있는 찬사를 다 했지만 요진통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그날연설에서 장개석은 우선 제목과 주제와 중심사상 선택을 정확히 한것이다. “왜서 거렁뱅이 공비들한테 참패를 당했는가?”ㅡ 보다싶히 제목과 주제를 정확히 선택했고 아주 좋았다. 그리고 원인을 다방면 다층차 다양한 각도에서 해명했는데 골자는 자체의 “부정부패”가 패배의 가장 근본적 원인이라고 천명하였다. 중심사상도 명확히 잘 포착한 것이다. 코빨갱이 애놈새끼들마저 “장개석의 밑궁기는 나팔밑궁기…”하며 짝짝꿍을 했지만(헛소릴 좀 한걸 같고) 그번의 연설은 뭇사람을 감동 시켰다. 백성들은 무엇이나 있는 그대로, 들은대로, 본대로, 즉 말하자면 실사구시적으로밖에 말할줄 모르는데 그것은 무식해서 그렇지만 그날 장씨는 밸이나는김에 백성들식이고 대통령식이고 개뿔짝같은 식따위는 가릴것 없이 구렝이고 뱀이고 입에서 나오는대로 한바탕 마구 내뿜었다. 사실대로, 있는 그대로. “량씨피! 이마당에 안면이구 체면이구 가릴게 있는가. 량씨피! 쌍놈으간나새끼들! 오늘 좀 똥욕을 먹어봐라!” 이런 배짱을 수립하고 연설에 림했는데 연설이 좔좔 잘 내려갔다. 일사천리로 내리 풀고보니 기본상 모든것을 사실대로 말해버렸다. 하다보니 명연설이 되였다. 즉 무식한 백성들처럼 실사구시적으로 말하다보니 자연히 말이 사개가 맞고 아래위가 척척 잘 맞물려 언변이 순통하게 나갔다. 좀 어페긴 하지만 이를테면 명정언순이라 하겠다.    그날연설을 두루 살펴보면 요점이 다음과 같다. 그는 “혁명제3기임무와 설명”, “군대개혁기본정신과 요점”이라는 부분에서 “…북양군벌은 자신의 부패로 해서 패배를 했는데… 북벌후 우리군대도 그 물이 들대로 들어 부화타락정도가 북양군벌과 한판에 찍어낸것 같았다… 량씨피! 그래 저절로 망하지 않겠는가?! 적에게 소멸되지 않겠는가?!... 망하지 않고 소멸되지 않았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비정상적이다. 량씨피!...” 그는 또 내친김에 “량씨피!” 장단을 부지런히 넣어가며 단숨에 고급간부들의 착오를 여덟가지나 렬거 했다. 거기에는 청가수속도 없이 마음대로 강위를 떠나 빈들거리며 오입질을 하고 자유주의를 부린것, 탐오하고 자기리익만 챙기며 타인은 지원도 살필념도 하지 않은것, 하지도 못하면서 권력만 걷어 안고 또 서로 빼앗기를 한것, 부화타락하고 음새를 쓰며 “츠허표두”못하는 짓이 없는것… 대가리가 큰 고급간부들을 눈깔이 빠지게 질책했다. “…작전에 림박해서는 륙로, 수로, 공중으로 내뺄준비부터 해놓고, 긴요위험관두에는 수하관병들이야 죽든지말든지 저부터 먼저 달아나고… 량씨피! 무슨 개방귀같은 동고동락, 생사환난일치가 있는가. 이런 간부를 하급이 어떻게 신임 하겠는가. 어느곳에 주둔하게 되면 좋은집, 좋은물건, 좋은것부터 다 차지하고, 파손하고도 배상하는 법을 모르고, 흥! 배상은 무슨 말라빠진 배상, 마구다지로 빼앗는 판에… 그래, 인민들이 어떻게 우리를 따르고 방조 하겠는가! 당연히 반감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래가지고 그래, 기률이 극히 엄한 공비를 이길 재간이 있는가! 량씨피!...” 그는 말할수록 흥분하며 열이 올랐다. 밸이 난 김에 그는 군대는 여섯가지가 없는 군대고,(주의, 기률, 조직, 훈련, 령혼, 뿌리) 사병은 여섯가지가 없는 사병이라고(신앙, 렴치, 책임, 지식, 생명, 기개) 군관과 사병들을 마구다지로 타매하며 똥묻은개 투기듯 부옇게 몰아 부쳤다. 장개석은 반나절을 삿대질, 발길질, 룡트림까지 하며 분통을 터트리고 내 쏜후(연설한후) 각혈, 토혈까지 한바탕 하였다. 얼마나 분했으면!...    장개석은 비로서 쉬원한지 좀 진정을 했다. 그는 발광적으로 장광설을 휘둘러 댄후 결론을 내렸는데, 그것이 가장 멋지고 정채로운 명언중의 명언이고 알맹인데 장명음, 장명등 같은것으로 오늘도 듣는자의 심금을 울려주며 현실적 의의가 있다. 그는 이렇게 대성질호를 했다. “우리는 공비에게 타도된것이 아니다! 실제적으루 사실대루 말해서 우리자신이 자신을 타도한 것이다! 부정부패로 망군, 망당, 망국을 했다! 량씨피!” 그는 연탁을 냅다 마구 뚜드렸는데 손가락뼈가 부서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말인즉슨 하기는 아주 정확하게, 바르게, 웅변적으로, 잘했는데, 자기는 쏙 빼고 미국대사 등 “3인소조”, 고급간부, 하급간부, 사병 및 다른사람들만 질타한것이 룡을 그리고 눈알을 빠뜨린듯, 옥에 티라고 할가? 그점이 무척 맹랑하게 되였다.    장개석의 말을 들어보면, 장개석의 국민당을 보면 “부정부패”란 것이 그게 보통물건이 아니다! 그놈 때문에 큰코 다치지 않았는가?!...                                                                                                                                                                                         10.4
32    대해항행은 키잡이에 의거한다 댓글:  조회:2302  추천:1  2013-11-27
             중편실화                                                               대해 항행은 키잡이에 의거한다                                                                                                                         회령    로씨아 보따리장사 바람은 사람들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했다. 군필이네 부부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토론을 했는데 요즘 며칠은 팽팽히 맞선 쟁론을 계속 했다. 군필이는 량식창고 마대치기 공인이다보니 로씨아 돈벌이를 갈수없지만 안해는 그까짓 농사를 집어치고 마음대로 할수있는데 멍텅구리 같이 말을 듣지않았다. 오늘도 자리에 눕자 군필이는 안해를 끌어안고 또 구술리기 시작했다.    “그것참, 마우재들이 오라는것처럼 매일 로씨아로 가는게 먹을알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지? 오늘 우리단위 아덜 안깐덜이 또 대여섯이나 갔다더라니…”    “밭은 당신말과 같이 누구한테 세를 준다치구 하루밤두 못 참는 당신이 되겠습니까? 산돼지 잡을라 갔다가 집돼지를 잃자구?...”    “집돼지구 당나귀구 간에, 술집간나들이 쌔구 버렸는데 별 걱정을 다하네. 흐흐… 아구구… 나는 막일을하는 마대치기지만 그런 치치부레한 일은 돈을주며 하래두 안하우. 사내 대장부가 시시하게 그게 뭐야! 어떤때는 좋다하구 어떤때는 싫다하구… 애들 작란이야?! 빌어먹을… 쓸데없는 궁상은 그만두구 당신두 한번 구경삼아 고생삼아 대담히 해 보우. 한 일년쯤 고생하면 몇십만씩 번다는데, 몇십만은 그만두구 몇만원이래두 그게어디우! 우리로서는.”    “다른 안깐들두 하는데 나라구 왜 못 하겠습니까! 정작 나가자니 집때문에… 학교 다니는 아이들을 셋이나 데리구 집살림을 하자면, 출근까지하면서…”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니우? 낳기만하문 뭐하우? 책임져야지. 아이들은 우쭉우쭉 커가지, 자덜을 출세 시키자면 우리부부가 드세야하우. 이제 한 이년 지나면 내가 내부퇴직인가 뭔가 그런걸 신청할수 있다고하니까 그때는 두말할것없이 내가 나가는거고…안까니 힘을 바라는건 팔부긴 하지만…나가 고생하는 당신을 생각하면 힘이 곱으루 날게우. 원래사 그렇지, 안까니를 내놓는게 일이아니지. 녀자와 질그릇은 내 돌리면 깨지는 법이라는데.”    “흥! 그런 펄네가 따로 있지 다 그런가해요? 음트그레한것들이나 그런 우추한 짓을 골라하지.”    “나야 당신을 나보다 더 믿지만. 외국 바람에 아래 바람까지 나덜가지구 통 개지랄 하는걸 보문. 그럴게문 처음부터 만나지 말게지. 불쌍한 애들은 만들어 싸놓구. 사회문제꺼정 만들면서… 빌어먹을! 행복하게 잘 살겠다구 벌린일이 개판이 돼 가지구. 그게 무슨 꼬락서니야… 엥! 쯧쯧쯧.”    “누구 걱정 마시고 이거나 잘 건사해요.. 내가 나간후.”    “정말야?!”    “예! 잡시다.”    “아이구! 요걸 그저…” 군필이는 안해를 힘껏 끌어 않았다.    군필이네 가정 상황은 대체로 이러하다. 칠십객 늙은 부모들은 진에서 그리 멀지는 않으나 여전히 산골에서 살고 자기네는 시내에서20여평 작은 집에서 비좁게 산다. 하여 합가를 못하고있다. 맏이가 딸이고 아래로는 아들이 둘인데 딸애와 큰앤 초중생이고 작은것도 곧 소학교 졸업을 한다. 딸애는 명년이면 고중에 들어가는데, 지금까지 봐서는 애들이 모두 공부 실력이 괜찮은것 같으니 대학공부까지는 시켜야한다. 이것은 그들 부부의 최대의 인생 목표였다. 군필이네 부부는 말그대로 상봉하솔 립장이다. 군필이는 출근하면서 농사일을 억척스레했다. 말은 안해가 농사 짛는다고 하지만 기실은 군필이가 했다. 그러나 살림은 점점 더 힘들었다. 단위의 신세가 크다. 집을 살때도 단위에서 목돈을 선대해 줬지만 작은애가 앓을때도 단위의 돈을 적지않게 썼다. 수년간 단위의 보조금도 여러번 받았다. 군필이는 항상 감사하고 또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일을잘해서 단위와 동료들의 신세에 보답하려 했지만 동료들은 그를 해마다 모범으로 뽑아 주었다. 월급이 나올때마다 빚을 얼마간 까느라 했지만 또 꾸고 하다보니 지금도 빚은 3000여원이나 된다. 옛말에 가난구제는 나라에서도 못한다고 했는데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다고해도 그래도 자력갱생 해야하고 제힘으로 살아야한다. 나라와 단위와 동료들의 부담으로 돼서야 되는가! 팔 다리가 울뚝불뚝한 사내대장부가…풍랑이 아무리 세차도 가정을 행복한 앞날로 운전해 가야한다… 군필이는 늘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군필이가 보건대 개혁개방은 살길을 활! 열어줬지만 월급과 농사만으로는 번신할수 없었다. 돈쓸일은 점점 더 늘어나는 급박한 상황에서 목전의 출로는 외국 나들이뿐이였다. 한국돈 벌이가 좋다고는 하지만 자기에게는 조건이 없었다. 믿천이 적게 들고 수속이 수월하다는 그리고 장사가 잘 된다는 로씨아 장사부터 시작하자. 먼저 안해가 나가서 얼마간 번후 내부퇴직을 하면 안해가 집을 보게하고 자기가 달려들 작정이였다.    한달 남짓 지나서 군필이안해 복자는 친구 세사람과 함께 로씨아로 갔다. 양털실과 아이들옷 그리고 목수건 손수건 장갑 양말 등속을 지고 들고 이고 네 보따리나 하여 가지고 수분하에서 로씨아로 건너간후 그들 넷은 큼직한 방 한칸을 세맡고 들었다. 듣던바와 같이 장사가 잘 되였다. 한달도 안되여 물건이 거이 팔려 나가자 그들은 안달이 났다. 그런데 어느틈에 눈치를 챘는지 도매군들이 달려들었다. 남자들도 있고 녀자들도 있었는데, 흥정과 거래는 남자들과 하는것이 퍽 수월하고도 리익이였다. 어떤 사내들은 젖가슴이나 궁둥이를 은근슬쩍 만져만 보고서도 장갑깨나 양말짝을 거저 주기도 했다…    그들넷은 증명 기한이 다가오자 불법체류를 결심하고 흩어졌다. 함께 있다가는 한사람이 잡히면 다 걸리기 때문이였다.    복자는 늙은 부부(로파는조선족)가 사는 집에 방 한칸을 세내고 들었는데, 그집 아들이라는 주정뱅이 중년 사내가 몹시 께름하고도 무서웠다. 게슴츠레한 우묵눈으로 흘끔흘끔 뜯어보던것이 얼마후부터는 자는데도 노크하며 문을 덜컥덜컥 쥐여 당기군했다. 불법체류다보니 복자는 밤이고 낮이고 가슴이 두근두근 신경이 조마조마했다. 어떤때는 이쯤에서 그만 돌아 갈가고도 생각했지만 돈벌이 재미를 떼칠수가 없었다.    어느덧 새봄이 왔다.    어느날 오후 그간 단골로 익숙해진 도매상 연길시 리씨가 저녁에 한잔 하자며 술과 고기며 떡을 한꾸러미 사들고 복자를 찿아왔다. 리씨는 1백화에 다니다가 하해를 했다고 하였는데, 중키에 보통인물의 사근사근하고 매우 약삭빠른 사내였다. 나이는 자기와 비슷했다. 그날저녁 복자는 저녁상을 준비하면서 종래로 느껴 보지 못한 이상야릇한 심정에 젖어있었다. 몸은 근질거리고 얼굴이 화끈화끈해났다… 리씨는 복자에게 포도주를 권하면서 속이 오싹오싹해나는 육담을 련속 지껄여댔다. 그리고 본론으로 긴히 정색해서 말하기를 로씨아 장사를 잘 하려면 마음 맞는 남녀가 동거하는것이 가장 좋은 수단이라는 것이였다. 누이 좋고 매부좋고 가정은 가정대로 지키고 돈벌이가 잘되고 여북 좋은가…관건은 남의 눈에 들키지않고 말썽만없으면 만사대길이라는 것이였다. 조심만 잘하면 누가 안다구…로씨아나 한국에 나간 사람들치고 똑똑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한다는 것이였다. 불법체류로 이렇게 험한 고생을 하면서 온 가정을 먹여 살리느라고, 번신 시키느라 공헌을 하는데 고만한 향수와 자유를 못하겟는가. 혹여 가정에서 안다면 그들이 리해를 해야 한다는 고견이였다. 자기 안해는 언녕부터 리해하는 녀자라고 자랑까지했다.    그날 밤부터 복자와 리씨는 동거를 시작했다. 제대로 말한다면 그간 보고 듣는 가운데서 복자의 내심에서는 미묘한 충동이 여러번 있었다. 공개적으로 부딫친 유혹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참고 억제해 왔는데 오늘밤의 유혹은 너무도 달콤하고 집요 했으며 거기에 술의 작용까지 겹쳐 복자의 정조는 너무도 쉽게 허물어 졌다.    복자는 이렇게 난생 처음 외도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량심상 얼마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장사가 더욱 순리롭게 잘 되면서 복자는 기쁘고 성수나고 지어는 행복하기까지했다. 마치도 신혼생활 같았다. 그의 량심부담이란 남들의 눈을 꺼리는것 뿐이였다. 그러나 복자는 자기가 지금 고통의 무거운 멍에를 메였다는것을 몰랐다.    어느덧 3년철이 되었다. 그간 남편에게 3만원씩 리씨편으로 두번 보냈는데 모두 제대로 갔다. 신심이 생긴 복자는 석달전에 또 물건 구입차 중국으로 건너가는 리씨에게 이번에는 10만원을 맡기였다. 그런데 리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분명 꿀꺽하고 잠적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복자는 또 여러가지로 추측하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요행을 바랐다.    어느날 함께 왔던 친구 두사람이 놀러왔다. 오래만에 상봉한 그들은 너무도 반갑고 기뻐서 서로 부둥켜 안고 엉켜 돌았다. 복자는 두말할것 없이 한상 잘 차리였다. 술잔이 오가며 익을대로 무르익은 중년 아낙네들은 걸직한 롱담을 마구 하면서 유쾌히 웃고 떠들어댔다. 친구들은 자기네는 둘이 그냥 붙어 다니다보니 그 흔한 마우재바람 한번 못 써 보고 이제 집에가면 나그네를 죽여살린다면서 짝짜그르 웃어댔다. 복자는 속이 꿈틀 켕기고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 울랐지만 그들을 따라 웃지 않을수 없었다. 친구들이 그렇게도 떴떴해 보일수가 없었고 진정 부러웠다. 그들은 진짜 강자였다. 오래지않아 개선가를 높히 부르며 귀국할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의 넓고 뜨거운 품에 뛰여들 것이다. 가족을 얼싸 끌어 안을 것이다…그런데 자기는 지금 이게 무슨 꼴인가. 여우같은 리씨의 감언리설에 몸을 버렸고 돈을 떼웠다. 아니, 내가 환장했지!... 복자는 자기 일신을 마구 뜯고 싶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집으로 돌아 가나?!... 그야말로 후회막급이였다. 복자는 저도 모르게 쿨쩍쿨쩍 울다가 엉엉 소리를 내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친구들도 제설음에 겨웠는지 따라 울었다. 그들이 한바탕 울고 있는데 주인집 로파가 편지를 흔들며 방문 앞에 왔다. 편지는 주인집으로 통하는데, 복자는 리씨의 편지기를 바라며 냉큼 일어나 편지를 받았다. 편지는 남편한테서 온 것이였다. 사맥이 탁 풀리였다. 복자의 락심한 얼굴을 근심스레 저으기 바라보던 로파는 무등 관심조로. “남편이 오지않아 그러냐?... 아마 서너달 되지?...” 하고 물었다. 친구들은 입을 딱 벌이고 두눈이 휘둥그래서 복자를 쳐다 보았다. 이게 뭔 소리여?!... 로파의 말 한마디에 일격석파수중월( ) 이된 복자는 창피고 뭐고 다 벗어 던지고 그간의 고충을 털어 놓았다. 친구들은 아연실색해서 듣고만 있다가 혀를 끌끌차며 위안겸 책망겸 몇마디 말을 하고 무엇을 피하듯 급급히 가버렸다.    남편의 편지는 내부퇴직 수속을 다 마쳤으니 만사불고 즉시 돌아 오라는것, 한국 수속 중인데 증명이 나오면 떠나라는 날에 무조건 떠나야 하니 빨리`급히 오라는 것이였다. 복자는 물건을 다른 사람들께 넘기고 부랴부랴 집으로 떠났다. 손에는 겨우 만여원 밖에 없었다. 그는 리씨를 저주 하며 이빨을 갈다가는 영원히 망가지고 더렵혀진 자기몸을 후회하고 증오했다. 바보가 따로 없었다.    복자가 돌아 오자 군필이는 휴식을 시킨다 몸 보신을 시킨다 하며 야단법석이였다. 그는 복자가 가마목 일도 못 하게 하면서 밤낮 안아주지 못해 안달이였다 어느날 밤 어떻게 참아 왔느냐고 귀속말로 복자가 물으니 군필이는 씩 웃고나서 “내 안해가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해선 뭘해! 당신이 떠난 날부터 아예 잊기로 작심 했지. 빨리 오라고 한후 부터는 달랐지만.”하고 거침없이 말하는 것이였다. 복자는 남편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인줄을 잘 안다. 흑선풍 리규같이 생긴 호걸풍의 남편은 억센 사내다. 남편이 대수롭지 않게하는 말이 복자에게는 오히려 벽력같이 들리였고 몽둥이로 뒤통수를 후려치는것만 같았다.    복자가 돌아온후 한달 조금 지나서 군필이는 순조롭게 한국으로 나갔다. 그는 떠나면서 복자에게 자기가 남의 두곱으로 돈을 벌겠으니 아무일도 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복자는 쿨쩍쿨쩍 울면서 아무말도 못했다.    군필이는 한국에 나간후 억척스레 일했다. 아무리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일이라도 그에게는 공기돌 놀리기였다. 육신과 힘으로 하는것은 무엇이든 다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돈이 많이 걸리는 일일수록 군필이 적성에 딱 들어맞았다. 군필이 돈벌이는 잘 되였다. 그는 두달만에 개인빚과 단위빚을 말끔히 청산했다.    군필이가 한국에 나온지도 어느덧 두해가 지나갔다.    어느날 군필이는 하루쉬면서 코구멍만한 사글세 방에서 한잠 늘어지게 잔후 저녁에 생활개선을 하려고 장마당으로 나갔다. 그런데 아니, 이게 누구냐 ?! 안해와 함께 로씨아 장사를 갔던 녀자가 아닌가! 그는 한국에 온지 반년 푼히 된다고했다. 수인사를 나눈후 군필이가 돌아서는데 녀자는 따라 붙으며 자취방 구경을 하자는 것이였다. 아주 허물없이 생홀애비가 어떻게 사나 보자며 호호호 웃기까지 하는데는 떼쳐 버릴수가 없었다. 그들은 장을 봐 가지고 군필이 셋집으로 갔다.    늦은점심겸 저녁을 먹으면서 녀자는 묻지도 않은 자신이 일을 마치도 남의 말을 하듯 식은죽 먹기로 말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원래 바람쟁이긴하지만, 자기가 로씨아에 가 있은 4년철을 연길에서 뻔뻔스레 노래방 아가씨와 살림을 했는데 돌아온후 한바탕 들었다놓으니 되려 자기쪽에서 싫으면 나가라고 시가지가 깨여지게 고래고래 호통질 하더라는 것이였다. 네년의 그따위 돈이 없어도 꿀맛이 나게 산다면서. 누구 좋으라구. 흥! 안나간다! 어쩔테냐? 하니 언녕 그렇게 얌전할것이지 예쁘게. 그러면 둘 다 데리고 살겠다고… 너무도 억이 막혀 화김에 한국으로 나왔다는 것이였다.    “하긴 분한김에 지나친 말도 했어요. 하늘같은 남편인데… 돈은 사정에 따라 누가 더벌고 못벌수있지만 그건 부부 관계엔 상관 없는것 아닙니까? 그때 악이 나니까 내가 번 돈으로 처 먹으며 개지랄을 했다고…노루도 악이나면 문다는데 내가 막말을 해도, 남자야 녀자보다 속이 넓지 않습니까. 나를 얼리고 말려야죠. 그런데 퍼러딩딩해서 코방귀도 안 뀌더란 말임다. 그래도 떠날때는 잘해줍데다. 처녀 총각이 만난 첫사랑이 제일이라구… 량해하라구 하면서. 내가 떠나니 좋아서 그랬겠죠.. 누구 모를줄 알구. 빼빼마른 여우년에게 홀려서. 흥! 우리부부가 갈라서지 않는한 그년 팔자야 똥묻은 미친개 신세지 별수있나요. 아무리 잘난척 해도 말임다. 리혼할 마음은 사실 우리 둘 다 없어요. 다른사람 만나 봤자 그게그거죠.”    군필이는 너무도 한심한 소리에 뭐라고 말하기도 어떠하고 듣기만했다. 뭐, 저만하면 좋은 녀자구만. 아무리 그것이 꾿들거린대도 눌러버리면 되는거지. 원! 사내대장부라는것이 그따위두 못참아? 쓸데없이 가정풍파나 일구면서…군필이는 녀자의 남편이 리해되지 않았다.    술탓인가, 아니면 분김에 서방질 할셈인가. 녀자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거침없이 하였다.    “저ㅡ군필씨 우리 동거를 합시다. 가정은 다치지 말고요.. 동거를하면 좋은 점이 많대요…” 녀자는 새빨개진 얼굴을 반짝 쳐들고 음탕한 눈길로 군필이를 쏘아 보았다.    군필이는 허허허 웃고나서 달래듯 부드럽게 말하였다.    “아주머니 좀 고생스럽더라도 돈을 잘 벌어가지고 집으로 돌아 가세요.. 우리모두가 가정을 위해 이러는거 아닙니까. 서로 안고 자는건 부부간에 하는일이지… 아주머니도 그래서야 됩니까? 다큰 아이들 얼굴이 뭐가 되겠어요? 원, 세상에 그런법이 어디있어요. 부부란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더 구수해 진대요.. 이제 주인량반이 아주머니를 끔찍해 할겁니다. 두고 보세요. 내말이 틀리나…”    녀자는 무안해선지 눈길을 떨구고 시무룩해 있다가 그래도 체면을 세워보려고 그러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동의되면 전화를 하라면서 번호를 적어주고 일어섯다. 군필이가 오히려 민망했다.    며칠후 주인집으로 안해의 편지가 왔다 편지를 본 군필이는 오후 일도 나가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겨 담배질만 하였다.    안해의 편지 사연은 이러했다. 로씨아에서 리씨라는 사람과 동거를 한것과 10만원을 사기당한 문제, 그리고 리씨를 찿자고 1백에 가니 근본 1백사람이 아니더란것, 크고작은 다른 상점들을 백개도 넘게 찿아 다녔는데 어디서도 그런사람은 없다고 하더라는 것이였다. 안해는 편지에 자기의 씼을수없는 죄를 천만번 침통히 느끼며 천만번 뼈저리게 후회 한다고했다. 죽을죄를 지고보니 후회는 끝이 없지만 원통해도 꼭 죽는것으로 갚겠다는 것이였다. 당신은 물론이고 애들과 부모형제 일가친척 세상모든사람 하늘과땅… 그 어디에도 낯을 들지 못하겠다고 마땅히 죽어야 하며 죽어야 옳다고…죽기로 결정하니 마음이 가벼운것 같다고 하였다. 자기는 용서를 바랄 렴치도 없거니와 바라지도 않는다며 사람축에 못드는 더러운년을 깨끗히 잊어 달라는 것이였다. 하지만 당신을 한번만 더 보고 죽을것이니, 그간 죄를 참회하며 기다리겠다고했다. (쌍,빌어먹을! 백년 천년 철저할것처럼 하던것이…엥! 퉤! 소갈머리 없는년 수캐들께 얼리워!..고 생쥐같은 쌍노무새끼 녀자등을 쳐 먹어? 내눈에 띄우는 날이 네 제사날인줄 알아라 개새끼!) 군필이 화등잔같은 눈에서는 불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이발을 뿌득뿌득 갈았다. 복자가 뼈저린 후회를 하고는 있지만, 그리고 진심인것은 알지만 이거야 말로 행차뒤 나발이란것이다. 하지만 죽기로 뉘우치는 사람을 죽겠으면 죽으라고 내 팽개칠수야 있는가. 그리고 아이들을 봐서 아니,가정을 봐서라도 복자를 용서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자기의 팔자가 더럽게 되였다는것을 승인하며 침을 퉤퉤 뱉았다. 요강뚜껑으로 물 떠먹은 기분은 군필이 마음속 상처와 함께 아무리 대범한 그라해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것이다. 그것은 복자도 그러리라…세월이 약이라고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쓸모가없다. 그들 부부의 감정은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며칠지난후 군필이 마음은 정리 되였다. 그는 복자와 함께 가정이라는 이 돛배를 그냥 운전하리라 맹세했다. 그 어떤 원인에서였든 가정을 난파선으로 만들면 그것은 가장의 책임이고 인생의 가장큰 불행이고 비극이고 실패라고 그는 인정했다! 가정을 마슨다는건 상상도 할수없는 끔찍한 일이고 한번 맺은 부부 사별은 있겠지만 생별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던것이다. 황차 복자는 뼈저리게 참회하지않는가…    군필이는 소발통 같은 투박한 손으로 안해에게 편지를 썼다. 서툰글이 오히려 더 힘있어 보였다. “허튼생각 집어쳐. 왜? 나죽는꼴 볼테야?! 봄이되면 연길에 맞춤한 집을사고 부모님들 모시오. 150만을 돌파하면 가겠소.. 아이들이 잘 크고있지… 우리도 잘 살수있소. 수고하오.. 이상.” 편지라는게 전문이 이것뿐이였다.    세상에는 신기한 일이 많다. 이듬해 초봄 어느날 밤 군필이는 동료 몇사람과 함께 불고기집으로 갔다. 그런데 주방에서 왔다갔다하는 사람이 바로 리씨가아닌가!!... 리씨는 서울에서 “밀산아가씨불고기집”을 경영 하고 있었다.(그는 흑룡강 밀산 사람이였다) 군필이는 리규같이 생겼지만 리규처럼 마구 쌍도끼를 휘둘러 대는 사람은 아니였다. 물론 리규도 망탕 도끼춤을 춘건 아니지만. 군필이는 리씨에게로 다가갔다. 험악하게 일그러진 군필이를 본 리씨는 당금 기절할 지경이였다. 군필이는 그를 데리고 뒤울안으로 나간후 다자고짜로 멱살을 쥐여 반공중에 추켜 들었다가 팽개쳤다. 한참후 개복해난 리씨는 땅바닥에 꿇어앉아 손발을 싹싹 비비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며 사기친 돈은 5푼리자로 래일낮에 몽땅 갚겠다고 엉너리를 쳤다. 그러나 그따위 수작에 쉽게 넘어갈 군필이가 아니였다. 생쥐같은 이런놈은 잔꾀를 부릴 틈이 없이 즉석처리를 해야한다 “야, 이 개새꺄! 니같은놈은 쥑일 가치도 없는 놈이니까 쥑이지는 않겠다. 종신병신이 되지 않겠으문 지금 당장 돈을 내놔! 쌍노무새끼!” 군필이는 리씨의 정수리를 콱 밟아 놓은후 건 가래침을 한입가득 낯짝에 뱉아 놓았다. 그날 밤으로 군필이는 안해가 떼운돈 10만원을 5푼리자로 몽땅 받아냈다. 모두 23만이였다.    군필이는 불법체류 7년철이 되던해 가을 오른쪽 신다리뼈가 부셔져 집으로 돌아왔다. 안해와 약속한대로 150만은 돌파하지 못했지만 100만원은 넘어 벌었다. 그간 아버지 대신 고중졸업을 하고 량식창고에 취직한 딸은 이미 시집을 가서 재미있게 살고있다. 두 아들은 끌끌한 대학생 청년이 되였다. 부모님들은 여전히 정정 하신데 매일 공원 구경을 한다. 군필이 부부는 별탈없이 살고있다.                                                                                                 08.2
31    대채전 댓글:  조회:2475  추천:1  2013-11-25
        중편실화                                                   대채전                                                        ㅡ한 부정부패간부의 고백과 참회                                                                                                                            회령     고향땅에서 한뉘 편안히 살다가 죽을줄로 알았는데 인생이 무상하여 북경에서 숨어살줄 이야!... 하나뿐인 녀동생의(우리는 부모 형제가 모두 죽고 남매만 남았다.) 무녀독남 귀한아들이(동생은 자식 여럿을 잃었다.)잔치를 한다고 하여 우리부부는 21년만에 고향에 다녀오게 되였다.    자동차가 구비구비 령길을 내리며 100여리 긴산골을 빠져나가니 활ㅡ열린 고향땅이다. 두만강 건너 조선산발이 정겹게 안겨오고 저 멀리 남쪽 오성산밑에 내가 태여났다는 조선의 시가지가 아스라니 바라보이였다. 다섯살나든해 아버지목마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 왔으니, 조선의 저 시가지도 나의 고향인 셈이다. 그후 40여년을 이곳에서 자라고 사업했으니 중국의 이 산골도 틀림없는 나의 고향이다. 나는 이곳도 저곳도 이 일경을 통털어 나의 고향땅이라고 생각한다. 타원형의 새강벌은 두만강때문에 두쪽이 되였을뿐이다. 오래간만에 고향땅을 보니 눈물이 쑥 나왔다.    긴 산골을 빠지면 새강벌 초입이된다. 여기서부터 사방 10여리는 민흥촌구역이다. 우리조상들이 민흥에 터를 잡을때 붙힌 원래의 마을이름은 “솔은테미”였는데 왜놈들이 주제에 문자를 쓰느라고 “복흥”이라고 부르게했다. 그것을 광복후 새중국이 되면서 정치성이 좋고 선명한 “민흥”으로 이름을 고쳤다.    1급 포장도로는 민흥마을 서쪽변두리로 빠졌는데 남쪽으로 30여리를 곧게 달리면 진소재지에 이른다. 도로 동쪽켠은 몽땅 두만강 연안까지 쫙ㅡ 펼쳐진 수전벌이고 서쪽켠은 비스듬히 산기슭에까지 닿은 한전벌이다. 산기슭에서 신작로까지 한전벌의 경사도는 심한 필지래도 10도를 넘지 않았고 거이 모두가 평전이여서 고향사람들은 새강벌을 신작로를 계선으로 수전벌, 한전벌이라고 불렀다. 이런지형은 진소재지까지 쭉ㅡ펼쳐지었다. 민흥촌앞에(남쪽)있는 두개의 촌도 민흥촌과 비슷한 지형이다.    민흥촌 한전벌을 지나가면서 지금도 기본상 그대로 있는 대채전을 보니 저도 모르게 지난날을 회고하며 참괴함을 금할수 없었다. 상해에서 산다고 하기에(동생에게도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할수 있겠지만 래력을 따진다면 량심상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리고 사는것이 고통 그 이상이다. 동생네며 일가친척, 친구들을 비롯해서 고향사람들과 만날일이 즈레 민망해 났다. 그러나 무슨수가 있는가… 그저 옛날일은 없은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괜찮게 사는듯이 젊잖게 우선우선한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과 상면할수밖에.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광복후 우리집이 이고장에 이사를 온후 나는 여기서 자랐다. 소학교는 민흥마을에 있는 민흥소학교에 다니고 초중은 구정부(지금은 진정부)마을에 있는 13중에 다니였다. 초중을 졸업하자 나는 초급사 사원으로 되여 호미강댕이를 쥐게 되였다. 공부는 잘했으나 그럴수밖에 없은것은 너무도 가난한 집형편이 현성에 있는 고중으로는 도무지 갈수없는 상황이여서 나는 농사일을 하게 되였다. 30여명이 졸업하면 두셋이 고중으로 갔다. 그때 사회에서는 영광스럽게도 우리를“귀향지식청년”이라고 했다.    일손을 쥔후 얼마안되여 민흥촌 다섯개 초급사는 하나로 통합되여 고급사로 되였다. 고급사성립 며칠후 사(촌)에서는 귀향지식청년회의를 하였는데 당지부서기겸사주임, 부사주임, 단지부서기, 치보주임, 민병련장, 부녀주임, 회계 등등 모모한 높은간부들이 회의에서 격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그들의 정치사상리론은 수평이 비슷해서였는지 아니면 들은소리가 모두해서 그것뿐이여선지 중점이 똑 같은 말을 하였는데 “사회주의새농촌 건 설에서 청춘을 남김없이바쳐 억세게싸우라! 앞장에서라! 당을따르라!”라는 세마디뿐이였다. 하지만 그들의 연설은 나의 앞길을 환히 밝혀주며 힘이 솟구치게 하였다. 그때로부터 나는 령도의 지시라면 무조건 받들어 모시였다. 부모의 말은 듣지 않을때도 있었지만 령도의 말은, 지어는 개인적 심부름도 달갑게 선뜻 들었다.    고급사로 된후 우리마을은 제3생산대로 되였다. 마을이름은 상강이지만 그때로부터 3대, 3대 하였는데 지금도 민흥촌3대(촌민소조)라고 부른다. 민흥촌 상강마을이 어딘가고 물으면 당지 젊은이들은 대부분이 머리를 기우뚱거린다. 상강이라는 마을이름은 아마도 력사에서 사라질것같다. 그러나 당년의 일들은 나의 기억에 생생히 살아있다. 돌이켜 보면 영욕이 점철된 나의전반생이다.ㅡ    나는 “사회주의새농촌건설을 위하여 청춘을 남김없이바쳐 억세게싸우며, 앞장에서며, 당을따른다!”는 인생좌우명을 세우고 항상 자기를 편달하였다.    처음시작하는 농사일은 무척 고되였다. 일밭으로 나가라는 종소리만 울리면 세상모르고 고꾸라져서 자다가도 뛰쳐 일어나 일터로 갔다. 학교때 종소리만 들으면 교실로 달려가든 그모습 그대로였다. 아침밥을 먹지 못해도, 코피가 터지고 온몸이 시큰거리며 쏴나도, 목낭지(편도선염)로 아프고 열이나도, 감기나 속탈, 웬간한 병은 계속 벋세우며 고된일을 줄기차게 해내였다. 몸이 풀리고 일이 몸에 배면, 이 고비만 넘기면 그 다음부터는 수월하다고 해서,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죽기보다 싫어도 나는 이악스레 일을 하였다. 온돌수리를 하거나 지붕이영을 이느라고 아버지가 일손을 거들라고 호통을 하여도 나는 대꾸질을 하면서 기어코 생산대일을 나갔다. 하여 “출근도 잘하고 일도 잘하는 귀향지식청년”이라고 차츰 평판을 듣게 되였다. 나는 다른사람들이 뜨직해 하는 어렵고 힘든일에도 몸을 사리지 않고 곧잘 자원해 나섯고 생산대일에 결석하는법이 없었다. 하여 해마다 모범사원이 되군하였다. 농민이 되여 이티후에는 청년단에 들었고 얼마후부터는 단지부서기라는 중책까지 걸머지게 되였다.    향이 인민공사(전 향이 하나의 집체로 되는것)로 되면서 민흥고급농업사는 민흥대대라고 부르고 우리 상강마을은 그냥 3생산대라고 했다. 대대판공실(촌정부), 위생소, 공소사(상점), 정미소, 야장간, 소학교는 민흥마을에 있었는데 상강은 민흥과 8리나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지금도 대체로 그렇지만 모택동시대에는 농촌간부들이 보수도 없이 대단히 수고를 했다. 궂은일과 간고한 일에서는 앞장에 서야하고 좋은일과 향수에서는 뒤에 물러서며 회의는 여유시간에 즉 일을 못하는날, 쉬는날과 주로는 밤에 했다. 인민공사후 농민들을 사회주의건설에로 이끌며 공산주의로 달리는 속도를 다그치다보니 정치사상교육을 심입진행하고 계급투쟁을 고리로 계획경제를 바싹 틀어쥐게 되였다. 하다보니 정치사상학습, 문건전달학습, 생산포치, 수리공정, 치안, 삼림방화 등등 각종사업에 대한 층층의 령도간부회의는 두말할것도 없고 사원대회도 뻔질나게 자주 하였다. 일은 일대로 잘 해야하고 회의는 또 회의대로 어느것하나 계급투쟁성, 정치사상성을 띠지않은것이 없다보니 중대한 정치적임무로, 혁명적임무로 중시해야 할뿐만이니라 잘하여야했다. 그때의 간부들에게는 일보다 회의가 오히려 더 고된일이였다. 대대판공실에만 전화기 한대가 있던 세월이고보니 (민흥 촌은 지난80년대중반까지 줄곧 그랬다.) 대대의 크고작은 각종회의통지는 거지반 내가 뛰여다니며 해야했다. 저녘때까지 사원들과 함께 일은 일대로 하고 다섯개 마을에서 세개마을은 내가 뛰여가서 회의통지를 내야했다. 그 다리품은 적어도 20여리를 팔아야 한다. 비가 쏟아지거나 눈보라치는 날에는 꽤나 고생스러운 소임이였다. 누가 회의에 결석하면 다시가서 데려오는 일도 자주 있었다. 꾀병을 하며 회의에 오지않는 사람은 정말로 괘씸했다. 회의를 될수록이면 밤중전에 끝내기위하여(이튿날 일을 해야 하니까) 저녁에 통지를 빨리내야 한다. 그래야 빨리들 와서 회의를 하겠으니, 나는 저녁을 먹지않고 일밭에서 곧장 회의통지를 떠나기가 일수였다. 그리고 단지부서기다보니 거의 모든회의에 참가해야 했다. 하여 밤중이라야 집으로 와서 둥세(밤참)를 먹거나 때로는 그대로 꼬꾸라져서 잤다.    인민공사화에 이어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자 그해가을 탈곡후(초겨울) 심경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하지만 대대들에서는 꾸물거리며 호응해 나서지 않았다. 그것은, 수전을 반미터이상 파고 북데기며 토비를 깔고 다시 덮으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토지비옥도를 높히고 세작을 하여 무당 만근을 낸다는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무당 천근도 안뒬때임.) 하지만 지구, 현, 공사령도들은 심경세작을 하여“황하 장강을 뛰여넘고 만근관을 돌파하라”고 내리 먹였다. 당초에 성에서는 “그랬으면 좋겠으나…” 하였다는데, 성3급간부회의에서 지구와 현의 령도들이 버쩍 열이나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기어이 한다고 우기며 창의서를 내고 붉은마음을 표달하였든 것이다. 각 공사령도들은 만근관돌파위성을 먼저 쏘아 올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며 군령장을 놓기까지 했다. 여기까지는 월급을 타먹는 국가간부들의 대약진신생사물ㅡ 심경에대한 태도고 관건적인, 정작 춤을춰야할 대대간 부들이 “우경보수사상”이 엄중했다. 하여 현의 령도는 찌프를 타고 달려와 긴급히 공사3급간부확대회의(생산대, 대대, 공사)를 밤도와 소집하고 정치사상기압을 먹였다. 만약 심경에 대하여 뜨뜨미지근한 태도를 보이거나 꾸물거리면 대대에는 “백기”(락후단위)를 꽂고 대대서기와 주임은 모가지가 날아날(철직, 출당) 각오를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공사급까지의 간부들은 주먹을 굳게 틀어쥐고 땅땅치며 이발을 으드등으드등 갈며 맹세를 내렸으나 대대이하 간부들은 울상을하고 근심이 태산같아 하였다. 그들은 간부긴 하지만 우선은 농사군으로서 농사가 잘 되여야 먹고살겠는데… 이건 아무리 신생사물이요 혁명적산물이요 해도, 계급이니 로선이니 정치사상이니 하며 을러메도 농사를 망칠것이 번연한데, 이를 어쩌는가 말이다. 심경후 봄에 물을실으면 논판은 수렁판으로 될것이고 사람도 소도 들어설수 없을게 아닌가?! 그리고 벼뿌리가 반미터 밑에 있는 비료를 먹는가?! 하지만 당의 지시고 령도의 지시라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군중들은 령도의 말을 잘 듣는다. 농민들은 생산대대장의 말도 법처럼 어려워하며 복종했다. 나는 더구나 그런 사원이였다. 대대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우거지상을 하고 속은 여하간에 심경을 하라고 소리를 지르며 뛰여 다녔다. 이렇게 심경대회전이 시작되였다.    어느날, 대대서기(대대주임 겸직)는 나에게 극히 중요하고도 영광스러운 혁명임무를 주었다. 심경대회전(전투처럼 막 밀어부치며 해제끼는것)을 하겠는데 민병련(대대는 민병련임)을 투입하기로 결정했고 “전쟁터”는 5대의 찬물배기 논배미라고 하였다. 민병련장이 대장을 맡고 나는 지도원을 맡으라고 하였다. 이 찬물배기는 샘이 많아 버리다싶이 취급하는 논배미다. 공사에서 내려온 하향간부가 왜서 모든 생산대가 일시에 왁! 일떠나서 전쟁을 하지않고 이런식으로 하느냐고 아기뚱해하니 서기는 “유생력량을 집중해서 한뙈기 한뙈기씩 섬멸전을 한다.”고 둘러댔다. 공사하향간부는 신통한 전술이라고 칭찬하면서 어서 위성을 쏘라고 격려하며 좋아했다.    까풀치기심경은 속도를 냈다. 우리는 대대령도의 “비밀작전”지시대로 북데기며 우사두엄을 논배미 이곳저곳에 무져놓고 논바닥은 반삽깊이로 파는둥 마는둥 하고는 흙을 고루 덮어 놓았다. 논판으로 들어와 파보지 않고는 까풀치기 한것을 전혀 알수 없었다. 찬물배미를 거이 “심경”하는 어느날, 공사령도간부들이 현장을 시찰하려 내려왔다. 그들은 붉은기가 날리고 400여미터 늘어서서 심경을 하는 장면을 보고 흡족해하며 돌아갔다. 그리고 이튿날 공사심경대회전현장회의가 열리였는데 200여명의 회의군들은 논배미옆으로 난 수레길을 따라 유체고별식이라도 하듯 논판과 우리를 바라보며 지나갔다. 그리고 소학교에 가서 반나절 회의를 하고는 뿔뿔히 돌아가 버렸다. 후에 생각해보니 비록 대대령도들의 까풀치기심경리유가 정당한것 같기는 했으나 그따위로 심경을 한것이 너무도 위험한 모험이였다. “총로선파괴”, “대약진파괴”, “생산파괴”… 등등 정치모자를 씌우 는 날에는 감옥으로 가는길밖에 없었든 것이다. 다행이 아무말썽도 없었고 땅이 얼면서 부터는 심경대회전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현과 공사에서는 논판에 우등불을 피워 땅을 녹이면서, 남포질을 해서라도 동삼내 계속 심경을 하라고 우뢰처럼 소리를 질렀으나 비꼬치는 아예 끊어져 버렸다.    얼마후 심경나팔소리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농민도 강철을 생산할수 있다!”는 괴상한 나팔이 또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랜강”(강철제련)을 해서 영국을 따라잡고 릉가한다고 하였다.    어느날 대대서기는 나를 불렀다. 랜강대회전을 해야겠는데 농사는 이미 시작되였지… 이번에는 유생력량을 진짜로 농업에 돌려야하는데… 10명 단원들로 묶은 전투대를 줄테니 랜강을 하라는 것이였다. 농촌일이라면 인분뇨로 영양단지 만드는 일까지, 이젠 막힘이 없는 한다하는 감농이 되였지만 랜강이란 전혀 감이서지 않는 임무였다. 지금까지 령도의 지시라면 팥으로 메주를 쑤라해도 “예. 그럽지요.”하든 내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난처해하니 서기는 “농사군이 랜강은 무슨 뚱딴지같은 랜강!... 궁냥껐 해 보아라. 뒷근심은 하지말고.”하는것이였다.    나는 우선 초중학생들이 한다는 “투꼬루”(토용광로)를 견학하고 물리선생, 화학 선생에게 물은후(리론은 말하면서도 자신이 없다면서 후과책임은 지지못하겠다고 하였다.) 대대철공소 야장쟁이를 스승으로 투꼬루 두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보습깨진것, 무드러진 호미, 낫, 곡괭이, 쟁개비, 밥가마(집체식당이여서 쓰지않는 가마는 많았지만 한참씩 선전해야 뽑아 주었다.), 주전자, 양철물동이, 바게쯔며… 하여튼 쇠붙이라고 인정되는건 다 주어들였다. 랜강장에는 두어 자동차는 되게 페철무지가 생기였다. 우리는 망치와 메를 휘둘러 될수록이면 페철을 쪼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투꼬루가마에 집어넣고 풍구질로 석탄불을 땠다. 3ㅡ4일 밤낮 불을때며 역사를 하였더니 가마안의 쇠쪼각은 녹는것 같았다. 야장쟁이가 된것같다고하기에 달려들이 투꼬루를 마스고 랜강덩이를 뽑아 냈는데 어떤쪼각은 녹고 어떤쪼각은 바로 녹지 않아서 랜강한 쇠덩어리는 우죽뿌죽 붉지무레 검스레 한것이 마치도 집체식당에서 무우 시래기며 감자, 열콩을 그득놓고 지은 타번진 꼬량밥누룽지덩이 같았다. 신기해서 랜강을 자주 들여다보던 농민들은 “그것참! 언 돼지똥덩어리 같은게… 되게 무겁군. 랜강이 다르긴 다르다니.” 하며 감탄을 했다. 공사에서는 “인민공사 붉은사원 강철위성 쏘았네!”라는 절목으로 련며칠 유선방송을 하였다. 우리가 또 투꼬루를 만드는데(투꼬루가마는 일회용이다.) 공사에서는 이곳에서 랜강대회전현장회의를 한다고 하였다. 그러던것이 갑자기 전화통지가 오기를 농민들이 랜강하는것을 잠시 중지하고 전면적으로 춘경생산대회전을 하라고 하였다. 그후 페철과 랜강덩이 두개는 현 강철창에서 실어가고 다시는 랜강하라는 말이 없었다.    얼마후 집체식당을 취소하고“공산풍”을 시정할때 나는 쟁개비며 돼지뜨물가마, 밥가마, 숱가락… 령수증을 써주며 아낙네들과 할머니들 한테서 빈정거리는 욕사발을 실컷 먹었다. 그들은 나를 “랜강아주바이”, “랜강대장”하고 부르며 “랜강으로 비행기도 만들고 기차대가리도 만든다더니… 우리두 한번 앉아보기우.”“대포알을 만들어 영국을 깔아뭉개고 미국아덜 대가리를 부순다더니 다 죽였수?”하며 시까스르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하는짓인즉 전탕 개지랄만 맡아 한다느니, 고지식하고 우둔해서 서기 꾀임에만 든다느니, 약진인지 개방귄지, 식당인가 돼지굴인가… 만근관은 무슨놈의 죽어자빠질 만근관이야! 제길, 심경?! 개소리라구 해라. 위성은 또 무슨 개코같은 위성이! 흥! 랜강인지 개불알인지(가마를 뽑아다 두드려 마슨데 대하여 특히 격분하면서), 랜강이 어쩌구 저쩌구 밑궁기 벌개서 황연석탄을 다 퍼다가 때며 개지랄을 하더니… 인민공산지 인민고생인지 개지랄이 났어… 하고 때를 만났다는듯 말끝마다 “개”자를 넣어 침을 퉤!퉤! 뱉으며 모든 불만과 역증을 나와 해내였다. 사람들이 하하하 웃거나 맞장구를 쳐주면 더욱 기고만장해서 삿대질을 해가며 열을 올렸다. 그후 내가 입당을 하고 대대당지부부서기, 대대부주임벼슬을 하게되여서야 별명이 사라지고 아버지 “반동언론”도 즘즉해 지었다.    나는 3년재해 두번째해에 입당하고 “4청”이 끝난후 대대당지부부서기 대대부주임으로 되였다. 서기, 주임은 원래의 토개당원아바이가 그냥 하였다. 그는 나를 민흥대대의 믿음직한 후계자로 배양하려고 세심하게 왼심을 기울였다. 그의 일편단심은 민흥의 빈하중농들을 하루빨리 잘살게 하려는것 뿐이였다. 나는 로서기의 일거일동을 본보기로 따라 배우며 사업을 잘하여 공사와 현의 모범당원, 모범간부로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그때의 나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대공무사”하고 군중을 관심하는 당원다운 당원이였고 기층간부(인민의 공복)였다. 나는 간부들에게 주는 생산탈리보조공수도 사절하며 억척스레 로동을 하고 적극적으로 사업을 하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직전에 나는 민흥소학교 처녀선생과 결혼을 하고 꿀같은 신혼의 행복을 누리였다. 그러나 밀월은 얼마가지 못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반란파들은 서기에게 불질을 했는데, 처음에는 가정성분문제를 걸고들었다. 해방전에 소수레가 있고 자작지도 몇뙈기 있은것이 부농 혹은 적어도 틀림없는 상중농일텐데 하중농으로 성분이 획분된것은 틀렸다는 것이였다. 당시 토개공작대에 붙어 다니며 교활한 작간을 피운거라고, 이실직고 탄백을 하라고 구호를 부르며 족치였다. 공사내 반란파들은 함께뭉쳐와(그들은 시종 극소수였다.) 반란에는 도리가 있다느니, 진리는 소수인에게 있다느니… 웨치면서 기세를 올리였다. 그들은 세상물정을 알지도 못하는 홍위병애들까지 끌고와서는 어록을 웨치고 구호를 부르며 서기를 투쟁하였다. 밤이면 골간분자들이 단지곰을 들이대며 박해를 하였다. 반란파들이 며칠동안 기세등등해서 날뛰며 서기를 못살게 굴자 무던한 농민군중들이 격분했다. 그들은 투쟁대회장에 몰려와 반란파들과 시비를 걸었다. 즉 그때말로하면 변론을 하였는데 이때로부터 보황파라고하는 군중조직이 생겨났다. 보황파라는 이름은 반란파들이 몰아주며 붙힌것이다. 관점이 같은 대다수 군중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혁명파라고 주장했다. 언귀정전, 많은 빈하중농들은 서기의 성분은 하중농이 옳다고 증명하고 나섯다.(서기네는 줄곧 민흥에서 살아왔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도대체 무얼하는 사람들인가? 왜서 생사람을, 좋은사람을 잡자고 들며 공산당의 간부를 잡자고 드는가? 너희들의 심보를, 목적을 말하라!” 하고 들이댔다. 반란파들은 입이막혀 부옇게 몰리우다가 부시시 물러갔다.    며칠후 반란파들은 기세등등해서 다시 서기를 투쟁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심경문제를 들고 나왔다. 반란파인 민병련장과 부주임(경제문제와 작풍문제로 해서 4청에서 떨어졌다.)이 그때의 “비밀 작전”지시를 적발했던것이다. 그리고 3년재해후 극빈호에서 부업으로 송아지를 키워 생산대에 들여놓고 빚을물게한것도(당의 정책임) “류소기를 키웠다!”면서 죄장으로 덮어 씌웠다. 서기가 아무리 정당성을 변호하여도 반란파들의 궤변을 당할수 없었다. 그들은 “경하게 말한다면 까풀치기심경은 당과 상급령도를 기만한것이고 사실대로 말한다면 총로선, 대약진, 생산을 파괴한것이다!”라고 했다. 송아지부업에 대해서는 “류소기를 키운것은 경하게 말하면 물질자극이고 사실대로 말하면 소자산계급인 농민을 자본주의복벽의 길로 유인해가는 악랄한 수작이며(때문에 주자파다.) 류소기수정주의로선을 적극 추종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런식으로 궤변을 고도의 높히에 끌어올리며 분석하고 정치모자를 만들어 씌우다보니 죽이지 않으면 아니될 죄가 몇십가지는 되는것 같았다. 반당, 반사회주의, 반혁명, 주자파(자본주의로 가는), 반모택동사상, 3반(총로선, 대약진, 인민공사)분자, 팽덕회의 앞잡이(항미원조에 갔다왔음)… 아무리 엄중하고 큰 정치모자라도 다 들어 맞았다. 그야말로 귀에걸면 귀걸이요 코에걸면 코걸이가 되는 판국이였다.    서기는 공사에 틀고앉은 반란파들의 무산계급독재지휘부로 끌려가고 며칠후 나도 반혁명졸개라느니 수정주의 효자현손이라느니 하면서 잡아갔다.(나는 “보황파”를 이끌고 서기를 보호한 두목이였다.) 몇년전에 웨친 아버지의 “반동언론”에도 련루되여 말하자면 “련좌죄”로 졸경을 치루었다. 아버지도 무사치는 못했다. 대비판을 할때마다 거명되여 나왔는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나에게 련루 되였다. 나를 철저히 잡자는 수작임을 간파한 아버지는 적비상장으로 반란파들과 대항 하였다. “그때세월 욕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어?! 저 부농령감네 말고는.(상강에서 한집뿐인 부농령감네는 아이고 어른이고 언행을 매우 조심했다.) 이동네 빈하중농치고 불평불만이 없은 사람이 누구야? 흥! 우리가 떠들었기 때문에 후에 많이 고쳐진거야. 니들이 뭘 개뿔이나 알구 아가리질이냐?! 다시 한번 나를 거들면 그때는 도끼쏸장일줄 알어!”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나의아버지 말을 긍정한데서 아버지는 투쟁까지는 맞지 않았다. 되려, 무식하고 성질이 과격해서 그렇지 사실은 아주 좋은 령감이라고 칭찬까지 하였다. 그중 한가지 근거로는 아버지가 소를 구한것이 회고되기도 했다. 그것은, 3년재해 이듬해 갑자기 쏟아지는 골물에 뛰여들어 강변에 매여놓은 소 두마리를 끌어낸 사적이였다. 사람들은 소는 소고 사람은 사람이라며 큰일 난다고 아우성을 질렀지만 아버지는 바위돌이 우둥퉁 우둥퉁 굴러 내리는 골물에 뛰여들었든 것이다. 능청스러운 어떤사람들은 한술 더 떠서 “소를 살릴때두 그랬지만 저 령감은 말하면 말한대루 한다니. 조심해야 하우.” “늙은이들은 살만큼 살았다구 그러는지 무서분게 없다니. 저 령감이사 늙은이래두 기력이 여북하우.”하고 맞장구를 치며 은근히 반란파들을 위협 하였다. 반란파들은 그럴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그후부터는 나의아버지를 더는 건드리지 않았다. 말로는 목이 터지게 붉은정권을 목숨으로 사수한다느니, 목숨으로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진행한다느니… 숱한 혁명적인 구호를 웨쳤지만 사실은 야심달성이 목적인데 그것보다 우선은 목숨이 더 중했든 모양이다.    서기와 나는 “공사9 종인학습반”(일명 잡귀신학습반)에 갇혀 여섯달을 투쟁받았다. 그때 고깔모자, 개패, 비행기, 걸,책상위에올려세우기, 유둬(끌고다니며 투쟁), 물매까지… 온갖 모욕과 유린, 행패를 기껐 당했다. 나중에 서기와 나는 약속하고 모든 죄장을(정치모자) 몽땅 승인하고 모주석께 수백번을 청죄(비는것)한후 풀려 났는데 “비켜선간부”(결론을 내리지 않은 간부)로 되여 제방공정에 가서 로동개조를 했다. 넉달후 겨울이 되여 제방공정을 못하게 되자 공사반란파들의 무산계급독재지휘부에서는 우리를 집으로 돌아가 처리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니 홀쭉해진 안해가 눈물로 반겨 주었다. 10달동안 그는 무척 마음고생을 했든것이다. 그것은 주로 나에대한 근심과 자기의 앞날에 대한 고민이였다. 학교에는 공사적으로 제일처음 반란의 기치를 들고나선, 공사반란파맹장(골간)인 녀선생이 있었는데 그는 나의 안해를 리혼하라고 여러차례 담화하며 구슬렸다. 군관(부패장)으로 있는 아주 리상적인 좋은 대상자가 있다면서 사진까지 보여 주었다. 그때는 군인들의 위신이 대단하였다. 여북하면 처녀들이 모택동사상, 주덕성격, 주은래인물, 해방군총각을 대상으로 한다고 하였겠는가. (그 먼저는 해방군총각이 아니고 류소기리론이였다.) 녀선생이 이렇게 까지 나오자 가타부타 말이없든 나의안해는 처음으로 태도표시를 했다고 한다. 그는 격분한 목소리로 “나는 선생과 다른사람이니(부부가 모두 바람을 피우다 리혼했다.) 이런 너절한 짓거리를 더는 하지말고 선생의 앞건사나 잘하오.”하고 쏘아 주었다. 그러나 이악스럽고 창피를 모르는 녀선생은 집요했다.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한번 끝까지 해 보자는 심보였다. 후에 그 군관은 일부러 휴가를 맡고와서(공사마을에 집이 있었다.) 나의안해를 보기까지 했다. 그날, 녀선생은 공사독재지휘부에서 보잔다고 하며(이런일이 여러번 있었다. 나의문제를 적발하며 계선을 가르라고 하였다.) 나의안해를 꾀여 군관네 집으로 데리고 갔다. 말하자면 선보기를 시키는 판인데 그런줄은 꿈에도 모르고 따라간 나의안해는 더없는 모욕감에 격분하며 선자리에서 침을 뱉고 나왔다고 한다.    10달만에 만난 그날밤 내가 만약 반혁명으로 처리를 받는다면, 감옥으로 간다면 어쩌겠느냐고 물으니 안해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게 아닌가! 그에게는 이미 확고한 주대가 있었든 것이다. “무기도형이면 생활의 핍박을 접수해야겠지요. 하지만 상처는 한평생 나를 괴롭힐 겁니다. 그외의 경우는 모든것을 감내할겁니다.”나는 안해가 너무도 고마웠다. 그를 꼭 행복하게 하겠다고 새삼스레 다짐하였다.    그날밤, 나는 획기적인 기적적인 발견을 하였다. 그것은 나도 꼭 국가간부로(월급쟁이) 되여야하며 령도자로(적어도 그군관을 초과하는) 되여야한다는 깨도였다. 반란파골간들을 아래로부터 위까지 아는데까지 하나하나 짚어보니 모두가 자기들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하여 혈안이되여 날뛰였고 한자리 씩(벼슬)하였고 득세하였든 것이다. 깃발은 보기좋게 당과 혁명을 내 들었다. 나라고 왜서 그렇게 못하겠는가!... 나는 갑자기 눈앞이 환히 밝아지는것 같았다. 내가 나가야할 앞길이 환히 보이였다. 그야말로 순간의 발견이였고 순간의 전변이였고 비약이였다.    이때로부터 나의 좌우명은 “사회주의새농촌건설을 위하여”가 일약 “일체는 나를 위하여”로 바뀌였다. 이제부터는 “나를 위하여 분투하는” 내가 되였다.    나는 자진해서 대장과 토론하고 똥수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끌고다니며 마을과 학교의변소를 치고 인분뇨로 토비를 만들었다. 생산대에 두사람을 붙혀달라고하여 “상년적비조”를 만들었는데 토비료무지가 집체우사 두엄무지보다 더 컸다. 이것이 신생사물로 인정되여 대대, 공사의 현장회의까지 하게되였다! 비켜서 처리를 기다리던 문제인물은 대뜸 령도의 긍정과 사람들의 칭찬을 받게되였다. 첯작전이 멋드러지게 성공 하였다. 그후, 군중파벌은 모주석의 교시대로 대련합을 하고 “혁명과 생산을 틀어쥐는 지휘부”(일명 생산지휘부)를 건립하게 되였는데 나를 주임으로 추천하였다.(전쟁판에 갔다온 서기는 부상당한것과 풍습, 위병이 도지여 병석에 누웠다.) 추천할때 반란파였던(녀선생도) 사람들은 나의정치사상각오를 촉동해 주었다고. 혁명적간부를 배양한 저들의 공로가 크다고하고 보황파였든 사람들은 원래부터 좋은간부였다고 시비아닌 시비를 하였다고 한다. 나는 나에게 좋게 보이자고 하는 그들이 모두 우스웠고 한편으로는 량심상 미안하였다. 그러나 할수 없는일, 나는 엉큼한 량면파로 되여 야심을 꾹 품고 달려들었다. 이제부터는 전형적인 야심가로, 량면파로 될것이다. 나는 군중의 비위도 맟추고 상급의 환심도 사기위하여 의식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꺼리지 않고 반란파 이상으로 날뛰며 노력분투하기 시작했다. 일체의 비무산계급적인것들을 철저히 박멸한다는 전례없는, “위대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대풍대랑속에서 림표, 강청같은 야심가들의 출현은 더 말할것도 없고 나와같은 일개 농촌청년도 되려 능히 야심가로 비약될수 있었다는것은, 그 시대적배경과 무대가 문화대혁명이였다는것은 그야말로 어찌보면 응당한것으로 문화대 혁명에 대한 풍자이고 력사적희극이였다.    이듬해, 대대혁명위원회가 성립되면서 나는 주임, 서기로 당선 되였다. 그리고 잇따라 공사혁명위원회부주임, 공사당위부서기를 겸하여 맡게되였다. 정식국가간부로 넘는것은 시간문제였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표현기교에 달린문제였다. 나는 예리하게 기회를 포착하며 “업적”을 쌓기에 더욱 혈안이 되여 맹활약을 하였다. 크고작은 기회를 만나기만 하면(만들기도 하면서) 번쩍번쩍 빛나는 도금칠을 하기에 기를 썼다.    혁명위원회는 “농업에서 대채를 따라 배우라”는 모주석의 지시를 억세게 틀어 쥐였다. 상급에서는 대채를 따라 배우는 아주 중요한 일환과 표징으로 제전건설(다락밭.보통 대채전이라고 함.)을 강력히 추진할것을 요구 하였다. 기회가 왔다! 나는 신작로 서쪽켠에 10여리 펼쳐진 민흥대대 한전벌을 몽땅 대채전으로 만들것을 결심하였다. 상급의 요구는 매개 생산대에 대채전이 꼭 있어야하고 만들밭이 없으면 우정 인위적으로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이것은 “위대한 모택동사상…”(20여가지 위대가 있었다.)에 대한 립장, 태도, 각오문제로서 정치적, 혁명적 임무라고 하였다. 또 “공산주의혁명의 수요…” 등 무슨 무슨(역시 20여가지가 됨) 수요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나에게있어서 그것은 동풍이였고 급시우였다. 나는 평전이나 다름없는 민흥대대 한전벌을 몽땅 대채전으로 만드느라고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하였다. 제전과 제전의 층차를 한미터 이상으로 만들었으면 더욱 그럴듯 하겠으나 그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일이고, 하여 반미터 층차로 내리 먹였다. 남포로 바위를 까서 돌을 실어 들이고(한사람이 사고로 죽기까지 했다.) 소학생과 부녀들을 내몰아 강변에 가서 돌을 주어오게 했다. 자판이 그렇게 좋은 민흥의 한전벌에는 끝내 구렝이같은 돌둑이 50미터 간격으로 10여줄 뻗고야 말았다. 간부와 군중들의 비난과 의견은 정치방망이를 휘둘러 압제하였다. 서기는 나를 불러 “이렇게 하면 앞으로 기계화에 불리하고, 수전으로 풀수도 있겠는데… 이건 민흥의 빈하중농과 후대들에게 큰 죄를 짓는것이다.”고 하면서 상급에 잘 청시해서 그만두라고 하였다. 나도 그렇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였다. 그러나 이때의 나는 서기와 다른 당원이였고 간부였다.    대채전대회전을 절반쯤 한후 전 공사의 3급간부들을 불러다 현장확대회의를 요란하게 하고 총동원을 호령했다.(그러나 대채전건설은 극히 미미했다. 린접 대대들에서는 대항하며 끝내 하지 않았다.) 현에서도 잇따라 이곳에 와서 현장회의를 했다.    민흥의 대채전이 다 된후 군복을 입은 지구와 성 혁명위원회 주임께서 친히 시찰을 왔었는데 높은분들이 다르긴 달랐다. 찌프차를 신작로에 줄느런히 세워놓고 새하얀 위생수갑을 낀 손에 망원경을 들고 시찰을 하는데, 그렇게 풍채름름하고 멋있을 줄이야! 나는 침을 한발이나 흘리며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그리고 좌우명을 더욱 되새기며 윽별렀다. 령도들은 풍채뿐만 아니라 정치안광도 높고 예리했다. 그들은 “대채전도 잘 만들었지만 기층당원과 간부들, 빈하중농들의 혁명적정신, 대채정신이 민흥에 뿌리박은것은 더욱큰 성과다.”라고 높히 찬양했다. 내가 “원래는 평전이나 다름이 없는것을, 손실은 일정하게 보면서도 사상상 인식상의 저애를 물리치고 모주석의 혁명로선을 견지하여 대채전을 일떠 세웠다!”고 하니 수장들은 “옳다! 우리는 사회주의풀을 요구할지언정 자본주의곡식은 요구하지 않는다. 모택동사상과 무산계급혁명로선을 드팀없이 따르면 승리한다.”고 말하며 나를 격려해 주었다. 숱한 사람들이 강박에 끌려나와 엄동의 호된추위에 떨며 지어는 생명까지 바치면서 모진고생을 하여 만들어 놓은 민흥의 대채전은 나의 빛나는 “정치업적”이 되였다. 하지만 민흥의 대채전은 두고두고 비난의 화제에 오르고 타매의 대상은 두말할것 없이 나였다. 민흥 앞마을 대대주임인 로궈는 나만보면 “어이! 티탠대장, 티탠대장”(제전. 밭을 차 버린다는, 못쓰게 만들었다는 뜻으로 악용.)하며 이죽거렸다. 그것이 나의 별명으로 되여 널리 “애용”되며 오래동안 붙어 다녔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코웃음을 치며 야심을 하루속히 달성하기 위하여 더욱 박차를 가했다.    두달후 나는 현혁명위원회 농업주관 부주임으로 벼슬이 올라가고 국가간부로 넘었다. 현의 령도에서는 집까지 현성으로 이사를 하게 하였다. 안해는 산골소학교의 보통교원 으로부터 일약 현성 중심소학교의 교도주임으로 되였다. 아버지는 현병원 온수방일을 하게 되였는데 국가공인으로 되였다. 나는 어머니도 도시호구로 상품량을 타게 하였다. 돌이켜 볼때 이쯤에서 나는 응당 자률해야 했다. 그런데 단맛을 본 나는 오히려 “일체는 나를 위하여!”라는 좌우명을 더욱 가슴속에 새기게 되였다. “나를 위하여 억세게싸우고, 앞장에 서고, 당을따르게” 되였다. 사람들은 나의 표면현상에 미혹되여 초유록식간부라느니 하기까지 하였다.    부정부패의 길에서 처음에는 피동적으로 콩자루며 닭마리 술병을 받아 먹고 하루에 두끼는 연회를 얻어 먹었는데 얼마후부터는 주동적으로 뢰물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무엇을 요구하면 무엇이 곱절로 생기고 무슨일을 부탁하면 무슨일이 해결되였다. 탐욕은 재빨리 팽창하며 하루가 다르게 담이 커졌다. “집이 협착해서…”하고 혼자말처럼 넌짓히 말하니 250평의 새집이 고급장식까지 겯들여 헐값으로 생기였다. 삼성액정텔레비가 좋더라고하니 그날로 객실에 우사대문짝 같은 텔레비가 놓이였다…. 부정부패가 좋긴 좋았다. 부정부패의 단맛에 은이 박힌 나는 그것에 습관화가 되였고 더욱 탐욕이 팽창하게 되였다. “담이 작은 놈은 굶어죽고 담이 큰 놈은 배가 터진다.”는 말을 나는 좋게만 풀이하며 웃음집이 흔들흔들해 하였다.    사람이란 무슨일에 골몰하면 “도”가 트는 법이다. 말은 잘해도 글이 짧은 나는 게다가 나이도 먹었기에 벼슬길에서는 크게 쳐다볼것이 없다는 판단이 섯다.    개혁개방이 금방 시작 되면서 현정부에서는 돈벌이 구멍수로 무역공사라는 기구를 신설하고 거기에 은근슬쩍 3산업도 경영케했다. 살펴보니 먹을알이 상당한 기름진 노다지였다. 나는 상, 하급과 인맥관계 건립에 신경을 써 왔기에 쉽게 노다지를 손에 넣을수 있었다.        무역공사 총경리로 된후 나의 탐욕의 주의력은 돈에 쏠리였다. 정부이름을 건데다가 나의 수완 또한 좋아서 세상천지에 거침이 없었다. 공사의 경제효익은 나의 생각보다 놀랍게도 훨씬 높았다. 사무청사, 다공능호텔을 짓고, 3산업을 확대하고, 직원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장금을 풀고, 승용차, 화물차를 사 들이고, 지방무역을 벌이고, 유관부문과 관련인사들에게 금일봉을 넣어주고… 이러는 행각에서 나는 기껏 사복을 채울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녀자들도 은밀히 가까이 하였다. 5년여, 나는 온갖 기교를 다 발휘하여 백만장자로 되였다. 그러나 항상 뒤가 켕기는 불안을 떼여 버릴수 없었다. 일단 걸리는 날에는 그 어느”형제”도 나를 도와줄수 없는거고 일락천장, 패가망신, 감옥행을 할뿐이다. 부정부패는 무서운 고통이였다. 도둑놈 죄진놈이 발편잠을 잘수 있는가. 작작먹고 가는똥을 누라는 말이 그토록 심각히 느껴질줄을 몰랐다. 이럴줄 알았더라면 당초에 그러지 말것을!...후회막급이였다. 그러나 멈추지 못했다. 탐욕과 요행심리는 나를 번마다 꼬드기였다. 지금까지 별일이 없지 않았는가... “배경”과 “울타리”가 든든하지 않는가… 기로에서 나는 너무도 멀리 나갔다. 때론 생각해보기도했다. 내가 왜서 이렇게 타락하였는가? 그것은 사회풍기도 아니였고 그누구의 탓도 아니였다. 도리를 몰라서도 아니고 법과 규률을 몰라서도 아니고 당의 교육이 적어서도 아니였다. 경종은 우렁차도 나는 듣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하나 나의 악렬한좌우명ㅡ “일체는 나를 위한다.”는 “사심”과 “탐욕”의 작간이였다. 나는 더는 당의간부, 정부의 령도간부가 아니였다. 인민의 공복이란 더욱 운운할 여지조차 없었다. 나는 후안무치하고 철면피한 철두철미한 량면파로서 교활하고 능청스러운 위군자였고 가증한 부정부패분자였고 엄중한 탐오분자, 범죄자였다. 나는 완전히 타락하였고 변질하였다.    재미나는 골에서 범이 나온다. 죄가 차면 벌을 받기 마련이다. 끝내 일은 터지고 말았다. 뒤를 캐자는 눈치가 보인다는 귀뜀이 들어왔다. “형제”들은 나를 빨리 사라지라고 독촉했다. 쉬ㅡ쉬ㅡ할때 얼른 손을 쓰라는 것이였다. 나는 주동적인교대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죄가 너무도 컸고 “물어넣어야 할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다른사람은 다치지 말라는 “은근한 충고”도 자주 있었다. 배반에는 징벌이 따른다는 “섬뜩한경고”도 있었다…. 법이 무섭고 죽기도 감옥도 싫었다. 용기가 나지 않아 주동적인교대를 단념하였다. 나는 “사라지기로” 출로를 잡았다. 부랴부랴 달아다니며 퇴직수속을 하였다. 퇴직은 순조롭게 비준되였다. 안해도 퇴직을 하였다. 그리고 북경으로 “잠적” 했다.    여기서 한마디를 더 보태자면 세태염량에 대한 군소리다. 나에게는 “요물”(화냥년), 어중이 떠중이 “개동무”, 진짜배기 부정부패분자 “형제”가 한둘이 아니였다. 내가 비밀리에 퇴직수속을 서두를때 그들은 모두 똥묻은개를 꺼리둣 나를 피하며 꺼려했다. 벌거벗고 먼저 달려들던 “요물”들은 나만보면 낯짝을 반짝 쳐들고 쌩! 지나가지 않으면 싸이나 먹은 까투리새끼처럼 외목을 탈고 피해 버렸다. “개동무”들은 머리를 한번 끄떡하거나 눈을 한번 찔끔하면 그것이 전부였다. “형제”들은 아예 생면부지로 싹 변해버렸다. 부정부패의 시궁창에서는 구데기처럼 상호간의 리용만 있을뿐 추호의 인간성도 없다. 그들은 서로 믿지 않는다. 일단, 자기에게 불리하면 외면하고, 함정을 파고, 죽여버린다. 이것이 부정부패시궁창의 구데기생리다.    먹지말아야할 술은 먹지말며, 가지말아야할 곳은 가지말며, 가지지말아야할 돈은 가지지말며, 친하지말아야할 사람은 친하지말며… 당에서 거듭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사람은 누구나 다 해야할일과 하지말아야할일, 원칙과 비원칙, 시비곡직을 모르는바가 아니다. 이것은 후천적 본능이다. 사람은 자률력이 있으며 정의를 주장하고 따른다. 인간세상은 바로 그래서 발전한다. 그러나 일부사람들은 리기와 탐욕의 유혹, 요행심리를 물리치지 못한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나는 번연히 알면서도 요행을 믿으며 칼물고 뜀질을 했든것이다.    나는 탐오한 거액의 돈을 밑천으로 북경에서 “은둔”하고있었다. 그러면서 면목있는 사람들을 만날가봐 항상 쥐처럼 조심하며 살았다. 마음은 늘 사냥군에게 쫓기는 노루였다. 영 불안해서 견딜수 없었다. 우리부부는 외계와의 련락을 일체 두절하고 출입을 극력 삼가하며 숨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불안은 여전했다. 산해진민들 살로가며 시몽스침댄들 잠이오랴. 나갈데도 없고 말동무도 없었다. 감옥이 따로 없었다. 신경성고혈압, 완고한 두통, 당뇨도 나타나고 심장은 쇠꼬챙이로 쑤시는듯 아팠다. 악몽과 실면, 심한변비, 오장륙부 성한곳이 없었다. 고급명약이며 비싼 보건품이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안해도 같은 상황.) 전문가 교수들도 방법이 없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우리의 병은 근원이 마음속에 있었든 것이다… 제구실하는 자식 한놈 없고… 가끔 안해가 가엽고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못된놈 곁에 앉은것으로 해서 벼락을 맞은거 아닌가! 그는 나를 만류하며 근심하며 애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속이였다. 그는 나를 사랑했다. 모든것을 알았을 때에는 너무도 늦었든 것이다. 하여 나와 함께 도망을 치고 이런 처지가 되였다. 정직하고 내성적인 안해를 생각하면 마음이 쓰려났다. 내가 그를 해쳤다. 우리는 두집 부모님들이 사망해도 얼굴 한번 내밀지 못했다. 지금 우리부부는 누가 누구를 돌볼 경황도 못되였다. 머리를 끈으로 동이고 온하루 서로 말한마디 없이 누워있는것이 업이다. 우리에게는 때론 치매현상도 나타났다… 생각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어느때 어디서 덥석 덜미를 잡히우겠는지, 그 한가지 공포 뿐이였다. 누가 알랴!... 후회하고 참회한들 이제와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나 후회와 참회를 금할수 없다. 부질없는 짓이지만 끝없이 후회하고 참회한다. 나를 이끌어 주던 로서기에게 미안하다. 연약한 안해에게 미안하다. 당과 인민에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비참한 말로였다. 응당한 것이다. 제손으로 자기의 일생을 망치였다. 누구를 탓하랴!...    고향사람들은 나의 내막을 알고도 남음이 있을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총명하다. 군중의 귀와 눈은 밝다. 비밀이란 없다. 잠시 말하지 않을뿐, 밝히지(고발) 않을뿐이다. 지금세월에(정보화시대에) 누가 다른사람의 내막을 넘겨짚지 못하고 짐작하지 못하랴… 고향사람들은 반갑다고 하겠지만 나는 그들과 만나는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동생네 잔치때문에 할수없이 뻔뻔스레 얼굴을 쳐들고 요행을 바라며 모험을 하였다. 그리고 죽던지 살던지, 죽기전에 고향산천을 한번 보고 싶었다. 모자를 눌러 쓰고 수건을 감고 굵은테안경과 마스크를 걸고(안해도) 길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며 조심했다… 잔치가 끝나면 인츰 도망치리라. 사람들은 나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 할것이다.ㅡ    참! 이거, 도대체 무슨 꼬락서닌가?!... 이렇게 사는것도 사는 것인가?!... 지금 나는 법과 규률과 도덕이 얼마나 고맙고 귀중한가를 그리고 또 얼마나 무서운가를 수시로 느끼고 있다. 떳떳하게, 광명정대하게, 깨끗하게, 자유롭게, 마음껏 활개를 치며 사는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절절히 느끼고있다. 그것은 당의 말대로 살면 어렵지않게 이루어지는것이것만!!... 법률과 규률 아니, 최저의 도덕선만 지켜도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을것을!!… 내마음(사상)하나 먹기에 달린것을!!... 량심만 지키면 되는것을!!... 오호애재.(아아슬프도다.) 나는 늦었다! 나의 한생은 이렇게, 수치스럽게, 공포속에서, 고통속에서, 고독과 적막속에서, 소리없이 끝날것이다. 요행 잡히지만 않는다면… 소잃고 외양간을 고친다고도 하지만 나에게는 고칠 외양간도 없다. 부처님, 하느님께 용서 빌 체면도, 용기도 없다. 이제 와서 그들인들 무슨수가 있겠는가. 선에는 선보가 있고 악에는 악보가 있는것이다. 누가 비렬한 짓거리를 하라고 했든가!... 탐오한 돈도 바닥이 난다. 어서 죽기를 고대한다…    지금하는 모든소리가 행차뒤 나발인것은 알지만 그래도 횡설수설 중얼거리며 혼자서 넋두리를 자꾸한다. 정신이 나드는건가…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나의 전철을 절대로 밟지 마시소. 진심으로 권고 합니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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