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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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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모택동의 이야기(11) 댓글:  조회:242  추천:0  2022-12-21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11)                                                                                                                        회령   일상 세절에서 본 모습   모택동은 세계적인 위인이여서 보통백성들의 안목에는 거룩하고 신비한 형상으로 보이며 우러르게 되여있다. 마치도 우리가 부처님, 보살님이나 하나님을 상상하듯 눈부시기만 하다. 그러나 재료를 보면 모택동의 인간모습이 더없이 친절하고 익숙하고 곁에 있는것 같다. 여기서 모택동의 일상모습 몇가지를 보자.   모택동은 집중력이 비상히 강하였다. 그이는 어떤일에 몰입하면, 골몰하면 다른것은 흔히 잊었다. 정강산 투쟁시 전쟁판 구석에서 골똘히 책을 본 일, 연안에서 재료를 쓰실때 발에 신은 솜신을 여러번 태운일, 중남해에서 사업하실때 련속 밤낮을 새우며 끼니를 잊어버리는 일은 다반사였다. 한번은 입에 구운토란을 문채 잠들어 경위원을 당황케 하였다. 또 한번은 신문을 보며 식사를 하였는데, 젓가락을 쥔 손은 기계적으로 빈접시에서 채를 집어 연속 입에 넣고 씹는 동작을 하는것이 였다. 정신은 온통 신문에 가 있고. 하여 경위원은 고소불득이였다고 한다.   모택동은 매우 근검소박하였다. 연안시절 그이가 기운옷을 항상 입은 사실은 그때의 상황에서 그럴수 밖에 없었겠다고 리해가 가지만 건국후에도 그이의 근검소박은 사람을 경탄치 않을수 없게 한다. 버릴수밖에 없다고 하는 신을 여러번 수리해서 신은일,  27곳이나 기운 잠옷과 와의샤쯔, 양말, 수건 가루치분, 치솔, 고뿌… 그이의 일상용품은 너무도 백성적이 였다. 그는 자기가 사용하는 집도 꼭 필요외에는 새롭게 수선하지 못하게 하였고 뜨락이거나 빈땅에 화초를 심지못하게 하고 채소를 심었다. 새와 관상용 물고기는 종자도 없었다. 모택동은 담배는 지독한 골초였지만 술은 혹간 특별히 아주 많이 마여야 홍포도주 한잔이였다. 그이는 연회를 싫어했다. 때론 손님초대도 자기의 명의로 다른사람이 하게 했다 모택동의 식사는 아주 백성적이 였다. 그는 홍조미, 좁쌀, 흑두로 지은 잡곡밥을 주식으로 했고 4채1탕은 바싹 말리운 매운고추 한접시, 썩두부 한접시 채소 한접시와 고기점 한접시였다. 탕은 채를 하고 쟁개비를 가신물이 였다 모택동은 훙쏘뤄를 그것도 비계쪽으로 특히 즐겨했다. 그리고 참대젓가락을 시용했다. 그는 식사시 상에 밥이나 채소를 흘리면 꼭 그걸 주어 잡수셧다. 그외에는 다른 특수함이 없었다.   훙쏘뤄에 련관이 되는 이야기가 한가지 있다. 항미원조전쟁이 끝나서 어느날이였다. 련거퍼 텿십시간 사업하고 있는 모택동께 경위원 리은교가 말했다. “주석님! 삼일이나 제대로 식사를 하지않았어요.” “그랬나? 응. 배가 고프구나. 좋아. 한끼를 제대로 먹자.” “서의사(보건의사 서도)가 식단을 이미 짜 놓았으나 잡술기회가 없었어요.” “나는 무슨식단같은건 필요없고, 훙쏘뤄만 한사발 하여다오.” 리은교가 주방으로 가는데 마침 손에 책을 든 강청이 자기침실에서 나왔다. 강청은 리은교를 보자 손을 흔들어 불렀다. 그는 낮은목소리로 물었다. “주석께서 식사를 하셧는가?” “잡수시겠답니다. 훙쏘뤄를 하래요.” “하지말아요. 훙쏘뤄보다 좋은것이 얼마든지 있는데… 닭고기나 물고기가 더 좋아요. 여러날 제대로 식사를 안했지요? 어제는 무얼 잡쉇나요?” “어제는 맥편죽을 두고뿌만 잡수셧어요.” “그제는?” “그제는 우동을 잡쉇어요…” “동무들은 정말로 일할줄 모르는구만! 내가 이제 어느때 동무들의 그 전기곤로와 고뿌를 내다가 버리지않나 봐요. 서도가 이미 식단을 짜지않았나요? 주방에 가서 의사의 식단대로 하라고 해요. 서의사가 말하기를 이미 일주일의 식단을 짜 놓았으나 동무들은 세번도 제대로 하지못했다며?” “주석께서 싫대요. 그이는 훙쏘뤄를 하랍니다.” “잔말말아! 내가하라는 대로 해! 훙쏘뤄를 하지말아. 무슨 좋은거라구. 시골뜨기야. 농사군버릇을 못고쳐…”   강청은 영양에 대하여 좀 연구를 해서 아는것이 있는데, 성시로 들어온 후에는 지식이 좀 더 늘었다. 그는 매일 7시면 깨여나서 호사가 우선 전신안마를 해주고 그담 일어났다. 하루세끼는 꼭 제시간을 지키고 식전과 식후에는 산보를 하며 일년 4계절 꼭 오침을 했다. 식사는 영양과 맛을 다 갖추어 했는데, 가히 “미식가”라고 할수 있었다. 그의 음식은 알뜰하고 보드럽고 청담담백이 위주였다. 모택동은 아니였다. 모택동은 맵고 쓰고 기름진것을 좋아했다. 장기적인 간고한 환경에서 사업하고 생활한 모택동은 강청의 생활습관을 곱게보지 않았다. 섬북에서 혁명할때도 강청은 모택동을 시골뜨기ㅡ촌놈이라고 모욕해서 모택동이 성질을 내기까지 했다   식사를 할때 리은교는 일체 책임은 강청이 감당하겠으니 하고 좀 마음을 놓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모택동이 신문을 보면서 참대젓가락을 쥐자 강청은 얼른 반찬접시에 물고기를 집어 놓았다. 모택동이 상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훙쏘뤄는?” 모택동이 련거퍼 두번이나 물었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긴장할대로 긴장해진 리은교는 강청이 설명하기를 조급히 기다렸으나 강청은 모르는체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할수없이 리은교가 대답하였다. “하지 않았습니다…” “왜서 하지않았니? 교대한 일을 왜서 하지않았니? 말해봐라. 내가 다만 한사발의 훙쏘뤄를 요구한것이 과분한 것인가?” 리은교는 머리를 수그리고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강청은 여전히 모르는척 하였다. 리은교가 울자 모택동은 그만하자고 하면서 일어섯다. 자기전, 모택동은 다시 리은교에게 왜서 교대한 일을 하지않았는가고 물었다. 리은교는 주석님께서 다 아시면서 왜 기어코 내가 말하게 하는가고… 네가 실사구시적으로 네입으로 말하라고… 리은교는 전후사연을 솔직히 말하였다. 모택동은 불쾌해 하면서 말했다. “강청은 양뜨기고 나는 시골산골촌놈이고 농민의 아들이다. 이제부터 모든것은 내식대로 내요구대로 하고 강청은 살관하지 못하게 하라!” 그때로부터 모택동과 강청은 생활에서 따로따로 였다. 모택동은 자기가 교대한 일은 꼭 실천되여야 한다는 고집이 강하였다. 훙쏘뤄 마찰후 모택동은 다시한번 리은교와 교대한 일은, 결정한 일은 꼭 실천해야 한다면서 하지않으면 꼭 추구해야한다고 말하였다. 이 관례를 어기면 않된다고 하였다. 그이는 매사에서 행동을 분명히 할것을 요구했다.   아래의 몇가지 이야기는 모택동의 또 다른 모습이다. 1959년 려산회의후 모택동은 긴장히 중요문건을 작성하고 즉시 발급하기위하여 기요비서까지 겸한 고지를 기다리게 하였다. 고지는 그때 지나친 피로로 기다리다가 저도모르게 잠들었다. 모택동이 여러번 불러서야 고지는 깨여나서 황급히 그에게로 뛰여갔다. 모택동은 한마디 짜증도 없이 고지를 얼마나 힘든가고 무척 가슴아파 하셧다.   어느해 모택동은 항주에서 갑자기 소흥으로 가겠다고 하면서 곧 준비하라고 하였다. 비서는 매우 당황했다. 그것은 주석신변의 공작인원들이 모두 항주 거리구경을 나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석께서 낮잠을 쉴시간이 되였기에 마음놓고 거리로 구경을 갔던것이다. 비서는 주석께 사실대로 회보했다. 모택동은 그럼 기다리자고 하였다. 주석의 신변을 마음대로 떠난것은 엄중한 규률위반이였으나 모택동은 한마디 나무람도 없이 그들이 돌아온후 유쾌히 소흥으로 갔다.   1958년 상해간부구락부작은례당에서 “백사전” 경극을 볼때다. 모택동은 배가 크기에 자리에 앉을때 허리띠를 풀어놓았다. 경극의 원통한 장면에서 모택동은 엉엉 울기까지 하면서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혁명을 하지않으면 되겠는가?! 반란을 하지 않으면 되는가?!” 그순간 바지는 훌렁 벗어져 발목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곁에 있던 비서가 급급히 춰 입히고 주변사람들은 모택동과 함께 한바탕 유쾌히 웃었다.   모택동은 조사연구와 실사구시를 극히 중시하였다. 그이는 다른사람들이 실제사실 대로 자기에게 말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는 경위원들이 휴가로 고향에 갈때마다 보고들은 실제사실을 서면으로 조사보고를 해야한다는 임무를 주었다. 1957년12월 한 경위전사는 고향에 갔다와서 조사보고와 함께 검고 땅땅한 겨떡을 모주석께 드리면서 고향사람들은 이런것도 하루 한개밖에 먹지못한다고 하였다. 모택동은 그걸 떼여 먹으면서 “우리농민들의 식량이다. 모두 먹어 보아라.”고 하면서 겨떡을 경위전사들에게 넘겼다. 그리고 눈물을 주루루 흘리셧다. 또 한전사는 보고에서 합작사의 어느간부가 중한 병으로 앓으면서도 군중을 이끌고 일하더라고 하였는데 이에 모택동은 그간부에게 자기의 문안을 꼭 전해달라고 하면서 후에 고향에 가면 꼭 그간부를 찿아보라고 당부 하였다.                                                                                                                       22. 8.
186    모택동의 이야기(10) 댓글:  조회:312  추천:3  2022-12-16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10 )                                                                                                                       회령 월하로인 모택동은 청년들을 비상히 사랑하였다. 신변의 청년들과 그이는 친절하고 허물이 없어서 한집식구 같았다. 그이의 사랑과 관심은 청년들로 하여금 고무격려와 교육을 받게하였고 공작과 학습에서 현저한 제고를 가져오게 하였다. 모택동은 청년들의 혼인대사도 부딪치면 등한히 하지않았다. 1953년12월 어느날, 다섯시가 좀 지나서 몇사람이 전용렬차에 오르자 렬차는 북경을 곧 떠났다. 이튿날 아침후 모택동의 위사장 리은교가 요숙현과 모주석께 인사드리    라고 하였다. 요숙현은 처음으로 모주석을 뵙고 인사를 드렸다. 모주석은 요숙현에게 어디사람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몇살인가고 친절히 물었다. 모택동의 이번외출은 3개월이나 되여 1954년2월말에 돌아오게 되였다. 전용렬차에서 이번에는 요숙현이 모주석의 바곤에 안배되지 않았다. 어느날 요숙현은 우연히 식당바곤으로 물뜨려 갔는데 식사중인 모주석을 만날줄이야?! 요숙현이 어쩔바를 모르고 긴장하는데 모주석께서 일어서시면서 말하였다. “쏘요, 요숙현동지! 왔는가. 잘있었나?” 모택동이 일어나서 다가오자 요숙현은 얼른 보온병을 놓고 마주가서 모주석께 인사를 드렸다. “잘 있습니다. 주석님! 안녕하십니까?” “잘있소. 잘있소. 함께 식사하기오.” 모택동의 친절과 기억력은 요숙현을 꿈만같게 하였다. 그후, 요숙현은 몇번 모주석을 따라 외출을 하였다. 모택동은 신변의 공작원들과 허물이 없었고 웃으개도 곧잘 하였다/. 한번은 렬차가 천진에 거이 도착하였을 때다. 모주석은 요숙현과 물었다. “너의집에 곧 도착하겠지?” “반시간쯤 지나면 도착합니다.” “천진에는 무슨특산이 있나?” “큰꽈배기와 꺼부리(狗不理)뽀즈가 있어요.” “왜서 꺼부리라고 하니?” “그건, 옛날에 뽀즈포를 한 주인이 뽀즈를 아주 맛있게 잘했지만 가게가 너무 작아서 돈있는 사람들은 거들떠도 보지않아 장사가 되지않았대요. 주인은 화김에 개들이구야 뽀즈를 모른다고, 먹지않는다고 욕했답니다. 호호호.” “그럼, 우리는 그의 욕을 먹지말자. 천진에 도착하면 그의 뽀즈를 먹자.” “좋아요. 내가 한턱 내겠어요.” “우리사람이 많은데…” “괜찮아요.” 천진에 이르자 일행은 식당차에서 유쾌히 꺼부리뽀즈를 먹었다. 모택동은 특별히 고추채까지 요구했다. “오늘은 쏘요가 한턱내는거고 돈은 내가 낸다. 많이들 먹으시요.” 1956년 여름이다. 모택동이 북대하로 가게되였는데, 렬차가 곧 떠나자 모택동이 여러사람들과 물었다. “오늘은 토요일인데 약속이 있는 사람이 없는가?” 누구도 말이 없는데 요숙현이 생각없이 “있어요. 내가있어요.”하고 대답했다. 말하고보니 후회되여 그는 얼굴을 붉히고 선자리에서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모주석은 웃으면서 물었다. “누구와 약속이 있니?” “남자친구와…” “아이쿠! 너들의 좋은일을 방해했구나. 어쩌지? 어쩌면 좋나? 어디서 만나자고 했니?” “중산공원 문어구에서. 그러나 괜찮아요.” “어떻게 괜찮니? 그와 말했니?” “아니요.” “니, 이쏘요를 봐라. 만나기로 하고, 계속 기다리면 어떡하니? 전화도 안했니?”” “우리는 임무를 받을뿐 누구와도 말하면 안됩니다. 일없어요. 우리는 같은처에서 공작합니다. 그는 식품화험공작을 합니다. 좀 있으면 채양하러 올겁니다. 그러면 내가 임무가 있다는걸 알게 될겁니다. 그는 리해할겁니다.” “오래되면 오해가 있을수도 있다.” 그날저녘, 모택동은 편지지에 쓴 글을 주면서 남자친구에게 주라고 하였다. 요숙현이 보니 그것은 모주석께서 친필로 쓴 옛애정시 였다. “주석님, 우리는 규률이 있습니다. 글자가 있는 물건은 반드시 바쳐야 합니다.” “너는 정말 로실하구나. 지금 누구도 보지않았으니 감추어라. 내가 고자질을 하지않을거다. 가지고 나가 전해라.” 요숙현은 위사장에게 보고하고 비준을 받은후 편지를 남자친구에게 전했다. 1964년 요숙현은 전용렬차를 떠났다. 그때로부터 그는 한번도 모주석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나 모주석의 신변에서 공작하던 때를 그들부부는 잊을수 없었다. 리은교와 한계향을 중매한 이야기, 봉요송과 정의수를 중매한 이야기, 심동과 쑈왕을 중매한 이야기도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모택동 자신의 세차례 혼인은 모두 불행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이가 중매한 세쌍의 혼인은 모두 행복으로 이어졌다.                                                                                                               22. 8.
185    모택동의 이야기(9) 댓글:  조회:288  추천:0  2022-12-10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9 )                                                                                                                     회령   세가지를 무서워 함   탁월하고 천재적인 모택동은 세상만사에 대하여 환히 알뿐만아니라 무비의 담량을 갖고있다. 그이는 세상에서 두려운것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 모택동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었다.   어느때 모택동은 안해 하자진과 이런말을 하였다. “나는 평생 우는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세가지 경우에는 눈물을 흘리였다. 첫째로는 가난한 백성들이 우는것을 그저 볼수없어서 저도모르게 나도 눈물을 흘리였다. 다음은 피를 보면 눈물이 나고 마지막 세번째로는 살려달라는 소리를 들으면 참을수가 없었다.”   1948년 5월어느날 모택동은 성남장에서 서백파로 길을 떠났다. 산길은 상당히 나빴다. 일행이 평산현 큰길옆의 한마을에 이르렀을때 였다. 여러사람들은 길옆의 풀밭에 몇사람이 있는것을 보았다. 가까히 다가가자 8, 9세나이의 어린녀자애가 풀밭에 누워있고 곁에는 30여세로 보이는 농촌부녀자가 앉자있고 주위에는 조급해하는 사람들이 둘러있는것이 보이였다. 녀자애는 누데기같이 람루한 옷을 입었는데 누런얼굴에는 피기라곤 전혀없고 두눈은 꼭 감고있었다.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보아하니 곧 숨이 넘어갈것 같았다. 아이어머니는 애의 얼굴을 만지며 눈물을 흘리며 몹시 비통해서 자꾸 애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주위사람들은 그들모녀를 동정했으나 속수무책이였다.   모택동이 차를 세우라고 하자 운전수 주서림은 즉시 차를 세웠다. 모택동은 첫사람으로 차에서 내린후 아이곁으로 다가가서 손이며 이마를 짚어보며 물었다. “아이가 왜서 이러는가?” “병으로…” 아이어머니가 울면서 대답했다. “중한같은데, 며칠이 되였소?” “3, 4일 되였어요. 처음에는 그만했는데 이렇게 점점 더 중해졌어요.” “어째서 이렇게 마을밖으로 나왔소?” “의사를 보이려고… 그런데 애가 틀린같아요.” 아이어머니는 더욱 목메여 울었다. 이런심심산골에서 의사와 약이 없고 돈이 없다보니 가난한 사람들은 이렇게 죽었다.   모택동이 머리를 번쩍들고 차를 바라보자 사람들은 그이의 눈시울이 븕게 물든것을 보았다. “여기있습니다.” 주의사가 모택동의 바로 곁에서 대답했다. “애병을 봐주오.” 주의사는 자세히 병을보고 자세히 물었다. “구할수 있소?” “있습니다.” “좋소. 어서 치료하시오.” “그런데, 약이…” “약이 없소?” “있긴한데… 한대뿐이여서…” “무슨약이게…” “피니실린.” “어서.” “이약은 수입제로서 살수는 없습니다. 당신께서 앓을때도 아끼고 아끼면서 어쩔수 없는 경우에라야 썻는데…” “지금이 바로 어쩔수 없는 경우요. 목숨이 경각인데, 어서 주사하오.” 당시는 항생소가 특별히 귀중했고 효과가 매우 좋았다. 주의사가 처치를 한후 아이는 기적같이 눈을 뜨고 엄마를 부르기까지 하였다. 아이어머니는 땅에 엎드려 울면서 소리쳣다. “보살님이시여! 목숨을 구해준 보살님이시여!” 모택동은 눈물을 흘리면서 주의사에게 분부했다. “제일 뒤 차로 이들을 집까지 데려다 주고 관찰해서 문제가 없으면 오시요.”   매번 그때일을 말할때면 모택동은 눈시울을 붉히군 했다. “애가 지금은 어떤지… 데려다가 한동안 치료했더라면 좋았을걸… 농민들은 의사가 없고 약이 없어서 병이나면 몇십리를 가도 의사를 보이지 못한다. 방법을 대서 의사들이 농촌으로 가게해야 한다. 농민들이 지은 곡식을 먹는데 응당 그들을 위하여 병을 봐줘야 하는게 아닌가?!”   모택동은 수천번의 전쟁을 지휘하면서 죽음과 류혈을 겪었다. 그의 친인만 하여도 6명이나 희생되였다. 그러나 모택동은 견강하였다. 그는 말그대로 비통을 힘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어떤경우에는 피를 아주 싫어하고 두려워 하였다.   북평에 갓 들어와서 향산 쌍청별장에 있을때다. 어느날, 모택동이 회의를 마치고 숙사로 오는데 뜨락에서 경위전사들이 희희락락해 하면서 무엇을 들고 유쾌해 하면서 떠들썩하였다. 모택동은 그들에게 무슨일에 이리도 좋아하는가고 물었다. 경위전사들은 총쏘기를 하여 잡은 참새꿰미를 내들고 보이면서 경과지사를 신나서 말하는데 여러마리 참새들은 피범벅이 되여있고 피는 모택동의 발치에 떨어지기도 했다. 모택동은 급히 뒤로 물러서면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빨리 치우라고 소리치는게 아닌가?! 그리고 이제부터는 일률로 새나 짐승을 잡지못한다고 엄명을 하였다. 동시에 말하기를 “참새도 하나뿐인 귀중한 생명을 가지고 유쾌히 노래하고 자손을 번식하며 저들의 삶을 사는데, 그들이 너희들에게 피해를 주었는가? 왜서 그들을 죽이며 못살게 구는가?!” 하며 격분해 하였다. 전사들은 수장들이 먼저 새잡이를 하였다고 뿌르퉁해 고자질을 하였다. 이에 모택동은 그누구도 일률로 않되니까 즉시 금지통지를 하라고 엄령을 하였다. 향산은 다시 새들의 락원으로 되였다.   1958년, 모택동이 농촌을 시찰할 때다. 한 로농이 참새들이 곡식밭에 무리를 쳐서 날아들고 날아나며 숱한 낟알이 떨어지게 하고 먹어치워버린다고 말하였다. 또 한 전문가는 참새는 해조(害鳥)다. 곡식을 짋밟을 뿐만아니라 도둑질해 먹는놈이라고 중복해 말하였다. 일관적으로 “해인충을 쓸어버리자!”고 주장하는 모택동은 참새를 쥐와 한무리로 보고 “4해소멸”명단에 넣었다. 모택동의 한마디에 중국에서는 참새잡이 대약진이 전개되였다. 2년이 지난후 어떤전문가가 참새도 모모충 등 해충을 잡아먹는데 공과 착오가 반반이 되는게 아닌가?하고 조심히 듣기좋게 말하였다. (기실은 해충을 잡아먹는 공이 곡식을 훔쳐먹는 착오보다 훨씬 더 컸던것이다.) 그말을 들은 모택동은 천진에서 열린 위생공작회의에서 유모아적으로 말하였다. “이 량년간 참새들이 무서운 재앙을 입었다. 우리는 그들을 평판해주어야 한다. 나는 그들의 당적을 회복해 줄것을 건의한다. 다시는 참새를 때려잡으면 않된다. 대신 빈대를 4해에 넣자.”   1964년께다. 중남해 무도장에서 휴식시 모택동이 담배를 피우는데, 공군정치부 문공단의 한 연원이 그의곁으로 와서 말동무를 하였다. 얘기가 문공단의 학습과 훈련에 이르자 모택동은 친절히 물었다. “힘들겠구나.” “그럼요. 때론 사고도 나요. 천진의 어느극단에서는 훈련을 하다가 연원이 공중에서 꺼꾸러 떨어졌는데 목이 상하면서 숱한 피를 흘렸대요.” “아이쿠!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모택동은 그연원을 피하여 다른자리로 옮겨 앉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무도가 시작되였는데도 얼굴을 찌프리고 더는 춤을 추지않았다.   모택동은 또 “살려달라”는 말을 매우 두려워 했다. 섬북에 있을때다. 한 경위전사가 고생을 참지못하여 도망을 쳤는데 얼마않되여 잡혀왔다. 경위전사는 아는 비밀이 많기에 다른 전사들과 다르다. 경위부대애서는 몹시 증오하며 이 전사를 총살하려고 하였다. 사실을 들은 모택동은 도망쳤던 전사를 찿아보게 되였다. 전사는 애숭이 였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나는 놈들한테로 가려고 도망친건 아닙니다. 집생각이 너무나서, 제발 살려주세요!” 모택동은 반변을, 변절자를 아주 증오하였다. 그러나 이전사는 비록 도망을 치다가 잡혀왔지만 변절자는 아니였다. “놓아줘라. 놓아줘라. 빨리 놓아주라.” “이놈은 도주병입니다! 쬐꼬만 놈이 아주 나쁩니다!” “뭐가 나쁜가? 얘는 어린애가 아닌가? 빨리 놓아줘라. 애가  놀라겠다.” “이렇게 엄중한 문제를 판결도 않하고 가두지도 않고 그저 놓아준다면 어찌됩니까? 규률을 집행하지 않으면 대오를 이끌수 없습니다.” 모택동은 온화하게 설복하였다. “아이가 어린데다 방금 혁명에 참가했다. 고생을 해 못봤고 단련이 없으니…  집생각이 나선데, 가두기까지하면 집생각을 더 할게 아닌가? 얘는 반변투항한것도 아니고, 어린데 어서 놓아줘라. 그리고 맛있는걸로 잘 먹게해라. 들었는가?” 모택동은 격분해서 씩씩거리는 경위대간부들에게 엄격히 지시했다.   모택동은 신이 아니고 사람이다. 그는 투쟁성이 풍부한 위대한 혁명가이며 동시에 흉금이 넓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매사에서 시비가 명확했다.                                                                                                               22. 8.
184    모택동의 이야기(8) 댓글:  조회:312  추천:0  2022-12-06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8)                                                                                                                      회령   시험을 치자   1949년초 어느날이다. 이른아침 뜨락에서 거닐던 모택동은 경위원실로 갔다. 이리 저리 집안을 살펴보던 그는 경위원들과 물었다. “동무들이 북평으로 들어갈 준비를 다 했다고 하는데 어째서 이사하는 집 같지 않은가?” “우리는 이사짐을 크게 두 보따리 싸 놓았습니다. 떠날때 차에 싣기만하면 됩니다. 옷이며 이불 등은 이미 다씻었어요. 여기에는 마을사람들의 물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책상 걸상은 다 공가의 것이여서 떠날때 행정과에 갔다주면 됩니다.” 패장 염장림이 대답을 하였다. 모택동은 만족하여 머리를 끄덕인후 친절히 물었다. “북평으로 간후 무엇을 하겠는지 생각해 보았는지? 복을 누려보겠다는 사상이 없는가?” 염장림이 대답하였다. “토론할때 모두가 경각성을 높히며 보밀공작, 보위공작을 잘하며 나쁜놈들의 파괴와 교란을 방지해야 한다고 인정하였습니다. 큰도시의 화화세계에서(번화한) 빈천하다고 해서 마음이 흔들리거나 사탕포탄에 맞으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동무들의 준비공작이 잘되였소. 물질적 준비도 있고 정신적 준비도 되였소,” 모택동은 기뻐하며 말한후 한사람 한사람께 무슨생각이 더 있는가고 물었다. 분위기는 대뜸 열렬해 지고 너도나도 앞다투어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전사가 시가지로 간후 적게 외출하며 자동차사고를 방지해야겠다고 말하자 모택동은 틀린다. 응당 세상을 많이 보아야 지식이 는다고 시정해 주었다. 또 어떤전사는 말하기를 시가지에서는 해를보며 출퇴근을 할수없기에 시계를 사야겠다고 하였다. 또 다른전사는 시가지로 간후에는 아마 조밥을 먹지않을게다. 나는 조밥에 싫증이 나서 보기만해도 배가 부르다고 하였다. 이에 모택동은 자애롭게 웃으시며 말헸다. “봐라. 사상문제가 나왔지? 돈이 있으면 시계를 사는것은 된다. 조밥은 오래동안 먹어왔지만 우리가 조밥에 보총을 가지고 일제와 미, 장반동파를 때려부셨다는것을 잊어서는 않된다. 혁명이 승리하여 큰도시로 가면 량식공급에서 조절이 있을수는 있지만 중국은 지금은 매우 락후하기에 단시기내에 무엇을 먹고싶으면 무엇을 먹는 수준으로 될수는 없다. 우리는 시가지로 들어간후 새중국의 정부를 건립해야하고 많은사람들이 정부에서 일하게 될것이다. 벼슬이 얼마나 크고 무슨공작을 하던간에 다 인민을 위해복무하는것이며 혁명공작이기에 노력분투하여야 한다. 이젠 시가지에 들어갔고 벼슬을 했으니 진보하려고도 하지않고 간고한 생활을 하려고도 하지않으면 않된다. 그러면 곧 리자성으로 된다.”   모택동은 7기2중전회에서 전당에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승리앞에서 교오하는 정서, 공신으로 자처하는 정서, 멈춰서서 진보하려고 하지않는 정서, 향수를 탐내며 간고한 생활을 더는 하려고 하지않는 정서를 반대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동시에 축수를 하지않으며 례물을 보내지 않으며 적게 술을 올리며 적게 박수를 치며 개인의 이름으로 지명을 하지말며 중국의 동지들을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과 병렬하지 말것을 제출하였다.   염장림이 경위전사들의 명단을 가져오자 모택동은 14명 전사들 이름에 동그라미를 그었다. 그리고 설명하기를 이 14명의 동무들은 먼저 학교에 가서 문화과 학습을 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들이 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면 남어지 6명도 학교로 가게 하라고 하였다. 이어 “곧 시가지로 가는데, 이후의 공작중점은 건설이다. 문화가 없으면 않된다. 동무들은 매우 젊고 전투에서는 용감하지만 그러나 학습하지 않으면 락후하게 된다.”고  하였다. 며칠후 전사들이 학교로 가게되자 모택동은 몹시 기뻐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또 친필로 “지금은 학습에 노력하고 장래는 공작에 노력하자!”고 쓴 필기장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기관식당에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꼭 잘 학습하여 지식분자로 되라.”고 거듭 당부하였다.   1949년3월23일, 새벽네시에야 잠자리에 누운 모택동은 직일전사에게 9시에 꼭 깨워달라고 부탁하였다. 전사는 주은래의 지시대로 10시에 모택동을 깨워드렸다. 식사시 모택동은 300일을 생활한 서백파의 한 작은방을 정깊히 점두룩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주은래가 제대로 휴식했는가고 문안하니 모택동은 충분히 휴식해서 정신이 난다고 기꺼히 대답했다. 주은래는 잘 휴식을 해야한다. 차에 앉아간다고 해도 먼길은 매우 피로하다고 걱정하였다. “오늘은 북평으로 가는날인데 자지않아도 기쁜날이다. 오늘은 시험을 치러 가는데 정신이 나쁘고야 되겠는가!” 모택동의 말에 모두는 유쾌히 웃으며 기뻐했다. “우리는 모두 합격이 되여야 한다. 퇴자를 맞아 돌아오면 않된다.” 주은래가 웃으면서 말하자 모택동은 한발로는 차판을 딛고 손을 흔들며 힘있게 견정히 말했다 “절대로 돌아오면 않된다. 돌아오면 실패다. 우리는 절대로 리자성이 되지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시험을 잘 치기를 바란다. 우리공산당인들은 절대로 리자성이 되면 않된다. 시험을 치자!” 모택동 일행은 25일 새벽에 북평성에 순리롭게 도착하였다.   1949년 3월23일에 모택동이 말한 그 시험을 중국공산당 1세들은 모두가 훌륭히 쳣다.(류청산 장자선 고강 요수석은 락제를 했다.) 모택동이 처음으로 말한 그 “깐코”(간考)를 지금은 당, 정간부들이 상용어로 류행어로 사용하고 있다. 누가 합격이고 누가 불합격인지,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짠지, 합격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시험관인 인민군중들이 잘 알고있다…                                                                                                                          22. 7.
183    모택동의 이야기(7) 댓글:  조회:302  추천:0  2022-11-30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7)                                                                                                              회령   머리숙여 사과   1942년부터 1943까지 연안에서 진행한 정풍운동은 전당범위내에서 한차례의 보편적인 마레주의교육운동이였다. 정풍을 통하여 전당 상하는 전면적인 학습을 진행했고 검사와 총결을 통하여 리론수평을 제고했고 사상작풍 공작작풍에서 현저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정풍후기 간부심사계단에서 한시기 편차가 나타났다. 그주요표현으로는 착오적으로 형세를 보면서 적정을 확대하고 적구에서 온 동지들을 특무혐의가 있다면서 심사를 진행한 것이다. 특히 간부심사공작을 구체적으로 책임진 강생이 연안에서 진행한 소위 “실족자를 구급”한다는 운동은 “핍박하고 공술케하고 믿는”작법을 대대적으로 사용하여 많은 억울한 안건, 착오적인 안건을 만들어 냈다.   모택동은 인차 착오적인 경향을 발견하고 편차를 시정하라고 명확히 지시하였다. 초기에 중앙판공청의 기요공작을 하는 일부동지들이 의심을 받으며 심사를 받을때 모택동은 이상함을 느끼였다. 그는 즉시 이렇게 많은 특무가 있을수 없다고 말하였다. 모택동은 심입되고 전면적인 료해를 위하여 공술재료를 가져다가 자세히 심열하였다. 어느날 그는 안건심리를 책임진 리극농, 사철을 불러다 직접 물었다. “당신들이 보내온 재료를 아직 다 보지못했는데, 이런공술재료가 더 있는가?” “아직도 3,40부가 있다.” “당신들이 보기에는 공술재료의 진실성이 어떤가?” “기본상에서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개별적으로 편차가 있을수도 있다.” 모택동은 과거 강서의 숙반경험과 교훈은 침통하다고 하면서 강서의 “핍박하고 공술케 하며 믿은”교훈을 실례로 말하였다. 그러면서 당신들이 지금 그렇게 하지않는가고 물었다. 이어 “당신들이 보내온 여섯부의 공술재료에서 한부를 보았는데 두번째는 차마 더는 볼수없었다.”고 하면서 이따위재료를 이젠 보내지 말라고 하였다. 모택동은 그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을 보고 말하였다. “어째서 보지않겠다고 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이런재료들은 문장을 쓰듯한것이지 교대한 말이 아니다. 그리고 진실하지 못하다.” 사철이 “한두마디가 틀릴수는 있지만 대단한 일은 아니다.”고 말하자 모택동은 “만약 한마디가 거짓말이라고 할때 열마디 거짓말이 있을수는 없는가? 한단락, 한구절, 전부가 거짓일수는 없는가” …재료를 쓴 동지들에게 말하여 한마디의 거짓말도 없게 하라고 하라…” 모택동은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려내려는 것은 진짜반혁명이지 가짜반혁명이 아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진짜재료지 가짜재료가 아니다.”  사철등은 모택동의 담화정신에 따라 공술재료를 작성한 사람들과 일일히 료해를 하였는데 과연 가짜가 많았고 어떤것은 전부가 가짜였다. 모택동은 이런 실정을 안후 즉시 시정을 하였다.   1943년 8월15일 중공중앙에서는 “간부심사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거기에는 9가지 공작방침도 명시되여 있었는데 심사받은 간부에 대해서 한명도 죽이지 않으며 대부분을 붙잡지 않으며 박해받은 동지들을 철저히 평반하여야 한다는 조목도 들어 있었다. 뿐만아니라 모택동은 친히 착오적인 박해와 처리를 받은 동지들에게 정중한 사과를 하였다.   어느날, 모택동은 변구 행정학원에 가서 박해받은 동지들을 만나보았다. 그는 “실족자구급”운동중의 착오를 공개적으로 승인한후 “여러분께 사과합니다!”하며 모자를 벗고 정중히 경례를 하였다.   1945년 2월의 어느날 모택동은 연안중앙당교례당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날 모택동의 보고는 3시간이나 지속되였는데, “실족자구급”운동에 대하여 말할때는 공개적으로 착오를 승인하고 주동적으로 책임을 진다고 하였다. 억울함을 당한 적지않은 동지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마지막으로 모택동은 말하기를 “… 우리의 장점은 착오를 범하면 검토하고 즉시 개정하는데 있다. … 오늘 특별히 여러동지들을 찿아와 착오를 검토하며 사과한다.”고 말한후 정중히 경례를 하였다.                                                                                                                       22. 7.
182    모택동의 이야기(6) 댓글:  조회:326  추천:0  2022-11-25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 6 )                                                                                                                    회령   조원의 보통주민   1943년 가을  모택동은 양가령에서 연안서북면에 있는 조원으로 이사를 했다. 조원에 온후 해마다 설이 되면 그는 마을시람들을 돌아보고 로인들에게 축수를 하며 설인사를 하였다. 그는 자신을 조원주민이라고 하였다.   1945년 설날 모택동은 아침 일찍 일어나 주은래에게 “ 금년에는 일찌기 우리가 마을사람들에게 세배를 하자.”고 말하였다. 주은래는 찬동하면서 “일찍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또 그들이 먼저 손을 쓴다.”고 대답하였다. 해마다 설이되면 조원과 부근의 여러향들에서 양걸대와 군중대표들이 와서는 당중앙과 모주석께 세배를 했던것이다.   모택동은 1943년 설 조원사람들이 세배를 왔던일이 생각났다. 그날, 조원의 백성들은 기름떡과 설떡, 감주를 들고 (어떤사람들은 특별히 밀가루로 큰 복숭아만투를 빚어왔댔다. 壽桃) 세배를 왔는데 그들은 “위민모리”(爲民謨利)라고 크게 쓴 붉은기를 들고 희기양양 왔었다. 모택동과 중앙서기처 동지들은 만면춘풍으로 작은례당문앞에서 마을사람들을 맞아주었다. 례당안에는 상을 두줄로 놓고 연안에서 생산한 토스레 상보를 펴 놓고 락화생, 사탕, 대추, 사과, 담배 등을 갖추어 놓았다. 모택동은 마을사람들을 실내로 안내한후 몇몇로인들과 함께 가운데자리에 앉아 유쾌히 담소를 하였다. 이때 조원구의 구장이 마을사람들을 한사람 한사람씩 소개를 하였다. 그가 조원향 향장 양성복을 소개할때 모택동은 양성복의 손을 굳게 잡고 친절히 말하였다. “너는 조원향의 향장이고 나는 조원의 주민이니 회의를 할때면 나를 꼭 불러야 한다.”고 말하여 모두가 유쾌히 웃었다. 모택동은 이어 “ 우리는 이웃으로 오늘 함께 식사를 하오니 사양말고 많이 잡숫고 많이 마여야 한다…”고 허물없이 말하였다. 채소가 오르자 모택동은 이상저상으로 돌면서 술을 붓고 음식을 권하였다. 마을사람들도 련속 모택동께 술잔을 권하였다. 연회는 비록 매우 소박했지만 친절하고 흥성했다.   어느덧 언뜰 이년이나 지나갔다. 아침후 모택동과 주은래, 임필시 등은 설선물을 가지고 희희락락 조원향정부로 갔다. 향장 양성복은 모택동일행을 보자 희색이 만면해서 그들일행을 맞이했다. 모택동은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가서 손을 잡으며 친절히 물었다. “양향장! 일년내내 수고를 했는데, 잘 보내시는가?” 양성복은 유쾌히 대답하며 인사를 하였다. 그는 모택동일행을 사무실로 안내한후 입을 다물지 못하며 차물을 붓고 담배를 권하며 분주히 돌아쳤다. 이때, 주은래가 웃으며 말했다. “로양, 그만하고. 오늘 주석께서 마을사람들께 세배를 하려고 하니 당신이 우리를 안내하여 집집을 돌자.” 이에 양성복은 딱하게 되였다. 그것은, 조원촌에는 20여호가 사는데 산아래 산위에 널려있고 길도 가파롭고 미끌었다. 양성복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않돼요. 않돼요. 주석께서 얼마나 바쁘신데, 언제 마을사람들을 다 생각할 겨를이 있어요? 주석께서 집집을 도느라 하시지 말고 내가 군중대회를 열고 대신 설인사를 전하면 됩니다.” 모택동은 웃으면서 말했다. “세배를 사람을 찿아 대신하다니? 양향장, 이방법은 가당치 않다. 우리를 데리고 한바퀴 돌자.” 양성복은 “그럼, 집집마다 가장들이 향정부로 오게 하자. 그러면 주석께서 그들을 만나보실수도 있고 장면도 흥성하다.”고 말하였다. 모택동은 주은래에게 이방법이 어떤가고 물었다. 주은래는 이렇게 하는것도 좋겠다고 하였다. 모택동은 공작인원이 양성복과 함께 다니며 가장들을 초청하게 하였다. 그리고 친히 여러사람들과 함께 연회준비를 하였다. 기별을 받은 마을사람들은 남녀로소 모두 기뻐날뛰며 모여왔다.   모택동은 왕년과 마찬가지로 마을사람들과 이것저것 생활을 친절히 물으며 즐거워 하였다. 모택동이 올 설에는 돼지를 몇마리 잡았냐고 물으니 사람들은 24호에서 18집이 돼지를 잡았다고 자랑스레 말하였다. 모택동은 웃으면서 많지않다. 명년에는 집집마다 잡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모택동은 사람들께 생산을 더욱 잘하며 호조조를 더욱 발전시키며 집체화는 농민들이 철저히 해방되는 도로이며 가난에서 부유에로 나가는 길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기관간부들의 태도와 작풍에 대해서도 자세히 물었다. 군중들이 좋다고만 말하니 그는 착오와 결점이 있으면 제때에 비평하고 지적해야 한다고, 그래야 혁명을 돕는것이 되며 혁명이 하루빨리 승리할수 있다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이해 대보름이였다. 그날 모택동은 조원앞의 밭에서 산보를 하다가 마침 마을의 늙은이들을 만났다. 그는 수고들 한다고 인사를 하였다. 로인들은 수고하는 사람은 당신이 첯번째라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로인들은 모두 60세 이상되는 분들이였는데 그들은 말하기를 조원에 60세 이상로인이 모두 24명이 있다고하였다. 그중에서 후로인과 호로인은 대보름날인즉 생일날이라고 하였다. 모택동은 회갑연을 했는가고 물었는데, 조원에서 회갑을 쇤 로인은 한명도 없다고 하였다.   모택동은 공작원들을 파견하여 로인들을 몽땅 청해오고 집체로 회갑연을 베풀었다. 그리고 수건 한컬레와 비누 한개를 선물하였다. 밤에는 “레닌의 10월”이라는 영화를 관람하였다.   1945년 설과 대보름은 조원사람들이 평생 잊지못하는 즐거운 날이였다…                                                                                                                 22. 7.
181    모택동의 이야기(5) 댓글:  조회:296  추천:1  2022-11-20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5)                                                                                                                     회령   황극공 안건   1937년 9월5일, 섬감녕변구정부가 성립되여 한달만이다. 이날 변구는 말할것도 없고 중국을 들썽한 “황극공 안건”이 발생하였다.   황극공은 정강산시기에 벌써 홍군전사였다. 비록 26살의 어린나이였지만 그는 2만5천리 장정까지 겪은 “ 로혁명전사”였다. 백전로전사인 황극공은 모택동을 따라 연안에 진주한후1937년 항일군정대학 제6대 대장을 하였다.   황극공은 당시 류천과 련애중이 였다. 류천은 16살로서 그때 섬북공학의 학생이였다. 류천은 예쁘고 노래와 춤을 잘했다. 그는 7.7사변후 집에서(산서) 뛰쳐나와 연안으로 갔다. 그리고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여 제 15대에 편입되였는데 당시 황극공은 15대의 대장이였다. 류천은 장정홍군전사인 황극공을 매우 숭배하며 호감이 생겼다. 얼마후 그들은 열렬한 련애관계가 되였다. 한동안 사귀는 가운데서 초련의 랑만정서와 격정이 식기시작한 류천은 자기와 황극공이 리상적이 못된다는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생활정취, 습관과 애호에서 차이가 뚜렸했다. 황극공은 군인출신이다보니 강직하면서도 통쾌했고 규정대로 하는 공농간부의 작풍이였다. 반대로 류천은 성시에서 생활한 학생으로 감정이 많고 랑만적이였다. 그는 풍부한 정감생활을 항상 갈망하였다. 끝내 류천은 황극공을 싫어하고 다른 대상을 찿았다. 황극공은 몹시 격분하고 고통스러웠다.   초가을의 어느날 밤이다. 황극공은 섬북공학으로 가서 류천을 찿았다. 그들은 연하강변으로 나가 산보하며 “담판”을 하였다. “류천! 너는 정말 충정이 없구나. 우리가 명백히 관계를 확립했는데 어찌 또 다른대상을 얻는가?!” “우리사이는 벌어졌고 감정이 맞지 않는다. 갈라지는것이 좋다. 그리고 정식으로 결혼한것도 아니니까 나에게는 다른대상을 구할 권리가 있다.” “그래, 나의 감정을 모른단 말인가?! 네가 어찌 이렇게 무정할수 있는가?!” “나에게는 얼마든지 이렇게 할 자유가 있다! 격노한 황극공은 권총으로 류천을 쏘아 죽였다. 황극공은 인차 체포되였다.   황극공의 이 안건에 대하여 사회여론은 각가지로 분분하였다…   모택동은 이 사건에 대하여 매우 격분하였다. 변구정부가 방금 성립되고 밤낮으로 할일이 많은 이때 즉시 처리하지 않으면 아니될 이런 엄중한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변구정부가 성립되면서 모택동은 변구정부를 항일과 정치민주의 모범구역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여러차례 지시를 하였다. 그리고 특히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종지(초심)를 시종 명기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우리간부들은 사심을 버리고 힘껏 공작하며 렴결근검하는 작풍을 발휘하며 인민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였다. 변구정부는 성립된 즉시 “부패분자를 견결히 축출할데 관한 통지”, “탐오를 엄격히 처리할데 관한 조례”등 문건을 발부하였다. 렴정건설을 가강하며 “집법을 엄격히 하며 법을 위반하면 반드시 추구하며 법률앞에서 사람마다 평등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고 “형률 법규를 위반한 자, 확실히 부패한 자에대해서는 당령, 직위, 공로, 직무를 면죄구실로 하여서는 않된다.”고 명확히 규정하고 강조하였다.   모택동은 친히 항대로 가서 이안건을 처리하였다. 그는 반드시 처결해야 한다고 하면서 법규를 엄숙히 지켜야 한다고 강조 하였다. 변구고등법원에서는 안건을 조사심사한후 황극공을 사형으로 판결하고 즉시 집행하였다.   이안건 처리후 로백성들은 당과 모택동을 더욱 칭송하였다. 따라서 변구정부의 위망도 더욱 높아졌다.                                                                                                                   22.7.
180    모택동의 이야기(4) 댓글:  조회:341  추천:0  2022-11-16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 4 )                                                                                                               회령   장국도의 반변   장국도는 중국공산당 창건인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당내에서 주요령도직위에서 공작하였다. 1935년 1월 홍군이 장정을 시작하면서부터 장국도는 당중앙의 결정과 맞서기 시작했다. 당중앙의 파견으로 홍4방면군으로 간 장국도는 북상을(北上) 반대하고 남하를(南下) 고집하면서 당중앙과 홍군을 분렬하는 엄중한 착오를 범하였다. 그의 착오는 혁명사업이 업중한 손실을 당하게 하였다.   1936년 10월 홍군의 3대주력은 끝끝내 승리적으로 회사를 하였다. 이것은 인간기적을 창조한 장정의 승리적인 결속을 말할뿐만 아니라 장국도의 분렬주의를 전승한 표지이기도 하였다.   장국도가 엄중한 분렬주의 착오를 범하여 혁명에 막대한 손실을 주었지만 중앙은 오래동안 기다리며 그가 착오를 심각히 인식하기를 바랐다. 모택동은 그의착오를 엄격히 비평하는 한편 내심히 교육하며 함께 혁명사업을 하기 바랐다.   1937년 3월 27일부터 30일까지 연안에서 열린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는 장국도의 착오를 비평하고 그의 착오에 대한 결정을 하였다. 회의에서 장국도는 걷둥치기로 자아비평을 하여 회의참가자들의 불만을 자아냈다. 하지만, 당중앙에서는 장국도에게 착오를 개진할 기회를 충분히 주며 섬감녕변구정부의 부주석직무를 안배하여 주기까지 했다. 1937년 11월 연안에서 당의 활동분자대회가 있었는데 회의에서는 서로군의 실패교훈을 연구하고 장국도의 착오에 대한 비평도 하였다. 하지만 장국도 본인은 떼를 쓰며 참가하지 않다가 정 할수없게 되자 억지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발언하기를 자기를 적발하고 비평하는것은 착오적이라고 오히려 궤변을 하였다. 이에, 모택동은 그가 심각히 느끼기를 내심히 기다렸다.   1938년4월3일 오후, 장국도는 엉큼한 속심을 감추고 모택동을 만나자고 요청하였다. 장국도를 미워하는 경위원들은 그의 요청을 전달하고 싶지않아 모르는체 하였다. 그러나 장국도가 찿아온걸 안 모택동은 평시와 마찬가지로 그를 열정적으로 접견하였다. 장국도는 모택동의 사무상 맞은켠에 앉아 풀썩풀썩 담배를 피우다가 거짓정을 나타내며 가면으로 말하였다. “모주석, 내가 잘못했습니다. 동지들의 비평과 당의 교육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지난날의 착오를 꼭 개조하겠습니다. 나는…”그는 중얼거리며 끝이 없었다. 모택동은 내심히 끝까지 들어주고 말하였다. “사람은 착오를 범하지 않을수 없다. 당신의 착오는 당과 인민, 홍4방면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일이다. 당신이 착오를 인식하고 개진하면 좋은것이다. 당신이 금후 당을 위하여 많이 공작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면 당과 인민은 여전히 당신을 환영할 것이다.”   속줄이 달아있는 장국도는 건성으로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깊히 새겨 듣는체 하였다. 그는 자기의 계획을 어떻게 하면 순리롭게 실현하겠는가에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모택동의 말이 끝나자 장국도는 곧 말을 꺼냈다. 그것은, 자기가  중부현에 가서 황제릉에 제를 지내게 비준하여 달라는 것이였다. 청명이 곧 되는데, 여러방면의 인사들이 중부현에 가서 민족의 조상 황제에게 제를 올리는데… 우리당도 이렇게 한 전례가 있고하니 자기가 가서 당을 대표하여 제를 올리겠다는 것이였다. 이어 부언하기를 국민당도 정부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릉에 제를 올리는데 우리도 대표가 가서 변구의 150만 인민의 마음을 표시함이 지당하다는 것이였다. 그의 말은 십분 은근하면서도 감동적이고 간절하였다. 모택동은 그럼, 당신이 갔다오라고 비준하면서 특별히 행사가 끝나면 즉시 연안으로 돌아오라고 당부하였다.   청명절 이른아침에 장국도는 조바심을 치면서 급급히 출발했다. 중부현에서 황제릉 제사행사가 끝난후 장국도는 운전수와 경위반 인원들께 “당신들은 먼저 돌아가라. 나는 서안에 가서 림조함동지와 토론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경위원 장해는 상서롭지 못함을 느끼고 따라나섯다. 장국도는 급급히 길옆에 서있는 국민당의 자동차에 올라탔다. 그는 국민당의 품속에 안긴것이다. (경위원 장해는 온갖 장애를 물리치고 당의 신변으로 돌아왔다.)   장국도가 국민당켠으로 반변하자 당시 항일군정대학에서 학습중이던 장국도의 처 양자렬은 눈물코물 범벅이 되여가지고 모택동을 찿아왔다. “주석님!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에게 가르켜 주세요. 이 량심없는것이 우리모자를 버리고 도망쳤으니… 우리는 전혀 몰랐어요! 잉잉잉…” 모택동은 양자렬을 안위하며 말했다. “장국도는 우리와 함께 20년을 혁명했다. 그가 도망하며 혁명을 하지 않으려고 하니 무슨방법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가 돌아와서 우리와  함께 혁명하기를 희망한다.” 모택동은 두손을 옆구리에 올리고 거닐다가 이어 말하였다. “이렇게 하자. 지금 너도 무한으로 가라. 가서 설복해 봐라. 당신들이 함께 돌아오기를 희망한다. 돌아오면 우리는 여전히 환영할것이다. 과거의 착오는 고치면 된다.” 양자렬은 아이를 데리고 무한으로 간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모택동은 이를 예견하고 있었다.)   1938년 4월17일, 장국도는 무한에서 서면으로 공산당을 리탈하며 국민당에 의탁한다는 공개성명을 발표하였다. 이튿날 4월18일 중공중앙에서는 장국도를 출당한다고 결정하였다. 1948년11월 장국도는 대만 대북으로 도망쳐 갔으나 온갖랭대를 받다가 후에 향항으로 갔다. 그는 거기서 소위 “민주전투동맹”의 두목을 하며 “중국의 소리”잡지사 사장을 겸직하였다. 훗날, 그는 고정적인 직업이 없게되자 중공의 정보를 팔아먹는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56년 장국도는 중국에 돌아오기를 신청하였다. 그러나 중공에서 제출한 공개적으로 착오를 승인해야한다는 선결조건을 승인하지않아서 이뤄지지 못했다. 60년대초 그는 미국의 어느대학의 요청으로 4년의 시간을 들여 “나의회억”을 썼다. 1968년 장국도는 카나다의 더룬더시에 이주했다. 만년에 그는 중풍으로 생활을 자립할수 없어서 면비로인병원에 입원하여 처참한 나날을 보내다가 1979년12월초에 죽었다. (1897ㅡ1979)   장국도는 누가 보아도 괘씸한 사람이였다. 그러나 모택동은 그에게 인의(仁義)를 다 했다.                                                                                                            22.7.
179    모택동의 이야기(3) 댓글:  조회:620  추천:9  2022-11-06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3)                                                                                                                 회령   벼락사건   1941년 6월3일 오후다. 섬감녕변구정부에서는 작은례당에서 변구현장들의 회의를 하였다. 하늘에서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면서 련속 우뢰가 진동하였다. 이때 한줄기 벼락이 회의장을 들이쳤는데, 연천현대리현장 리채영이 불행히도 벼락에 맞아 즉사를 하였다.   그날은 장날이였다. 남관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이며 들끓었다. 안색에서 온 한 50대의 사람도(老鄕) 나귀를 끌고 장보러 왔는데 말뚝에 매여놓은 그의 나귀도 그날 벼락에 맞아 죽었다. 로향은 너무도 분하고 원통해서 발을 구르며 잉!잉!울면서 소리쳤다. “하늘놈이 눈깔이 멀었는가. 왜서 모택동은 벼락치지않고 리현장과 내나귀만 벼락을 치는가…”그의 발괄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일부사람들은 급급히 울고불고하는 로향을 말렸다.   이날 이사건과 로향의 망발은 특대희소식이 되여 전 연안성에 쫘악 소문이 났다. 반박하며 욕하는 사람, 로향을 동정하는 사람, 말을 더 보태여 만들어 내는 사람, “하느님이 인간을 징벌하는것이다… 보응이다… 더 큰 재난이 덮칠 징조다… 간대루야 공산당과 모주석이 백성을 모르는체 하겠는가…” 연안성은 각종여론으로 시글벅적하였다. 소식과 여론은 변구보안처에 보고되고 모택동에게도 보고되였다. 모택동은 즉시 보안처의 오동무를(小吳) 불렀다.   쑈우가 오자 모택동은 매우 친절히 물었다. “듣건대 쑈우가 로향을 구류하자고 한다는데 어째서 그러는가?” “그는 숱한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모욕했습니다.” “그런가? 그가 어떻게 나를 모욕했는지 들어보자.” “리현장이 벼락으로 사망한것이 주석과 무슨관계가 있는가. 그의 나귀가 죽은게 주석의 탓인가. 그가 연안에서, 그것도 제일 번화한 장마당에서 당신의 명함을 찍어부르면서 욕하고 모욕한것은 엄중한 사건입니다. 즉시 구류하고 심사해야 합니다.” 모택동은 경쾌히 웃으면서 말했다. “그가 이모택동을 욕한것이 법을 위반한건 아니잖은가?” “아닙니다. 당신은 인민의 령수이십니다. 당신을 욕했다는건 그가 한간특무가 아니면 토호렬신이라는걸 말해 주는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구류심사하는것은 응당한 것입니다.” “생각해 봐라. 그가 정말로 한간특무라고 한다면 백주대낮에 나를 내놓고 욕하겠는가?” 쑈우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모택동은 그의곁에 다가가서 온화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나직히 물었다. “쑈우, 인민군중들이 왜서 우리를 옹호하며 열애하는지를 아는가?” “우리가 로백성을 위하여 천하를 다투고 행복을 도모하기에…” “옳다. 인민들이 우리를 옹호하고 열애하는것은 우리의 이대오는 혁명대오로서 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에게 만약 공작중에 결점과 착오가 있으면 누구든, 어떤방식으로든 비평과 의견을 제기할수 있다. 우리는 응당 접수해야 한다. 아닌가?” “그는 의견을 제기한것이 아니라 사람을 욕했습니다.” “욕도 일종의 의견제출방식이지.” 모택동은 쑈우의 어깨를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쑈우, 내가 한가지 건의를 하자. 로향을 구류하느라 하지마라. 대신 나를 도와 구체정황을 잘 알아봐 달라. 그가 도대체 나에게 무슨의견이 있는지? 될수있겠지?” 쑈우는 경쾌히 대답했다.   원래, 문제의 근원은 변구정부의 내부에 있었던것이다. 당시, 근거지는 가장곤난한 시기였다. 왜놈들은 “3광”정책(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태우고 모조리 략탈)을 실시하면서 발악적으로 근거지를 소탕하고 국민당반동파들은 근거지를 첩첩 봉쇄하였다. 동시에 1939년부터 1941년간 근거지에는 수재, 한재, 충재 등 자연재해가 매우 엄중하였다. 그리고 몇년사이에 변구의 군정인원이 대량 증가되였다. 비생산인원이 10만여명으로 증가되였다. 군대와 정부기관의 수요를 보장하기 위하여 변구정부에서는 군중들의 부담을 해마다 증가하였다. 과중한 부담은 군중들의 생산적극성을 손상했을뿐만아니라 당과 군중의 관계를 손상했고 불평불만과 원성이 나타나게 하였던 것이다.   며칠후 쑈우의 회보는 다음과 같았다. 항전초기의 변구의 공량은 1만석이였는데 1939년에는 5만석,  40년에는 9만석, 금년에는 20만석으로 급증했던것이다. 로향은 이에 의견이 컸던것이다. 모택동은 길게 탄식하며 “오, 그런일이구나! 그로향은 확실히 우리에게 아주 좋은 의견을 제기했다. 비평을 아주 잘했다!”   모택동은 즉시 이문제를 세심히 대량 조사하고 처리하였다. 공량을 최후 4만석으로 결정하고 대규모의 정병간정을 실시하였다. 이거조는 모택동의 위신을 더 오르게 하였다. 로향은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자기머리를 쥐여박으며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천부당 만부당 모주석을 욕하는게 아닌데!” 하며 후회를 했다.   그러나 문제가 다 없어진건 아니였다. 일부지방에서는 공량임무가 여전히 과중하였고 어떤간부들은 공작방법이 간단하고 조폭하였다. 하여 농민들의 생산적극성과 당과 군중의 관계에 손상을 주었다.   변구 청간현의 한 농촌아낙네가 당과 모주석을 대대적으로 욕하여 연안으로 압송되여 왔는데 보안처에서는 심사후 엄하게 처리할 작정이였다. 이 농촌아낙네는 남편이 죽고 아이가 셋인데 큰애가 겨우 10살이고 작은애는 3살반이였다. 그리고 집에는 풍을 맞아 운신을 못하는 시어머니가 있었다. 요동(땅굴집)은 골물곁이여서 비만 좀 크게 내리면 물에 잠기였다. 하지만 로력이 없고 돈이 없다보니 어쩔수 없었다. 이집은 마을에서 몹시 가난한 집이였다.   최근년간 공량징수때문에 현과 향, 촌에서 간부들이 적지않게 내려 왔는데, 어떤간부들은 실제형편이야 어떻든 강박적으로 징수하며 욕사발을 퍼 붓기까지 하였다. 하여, 살길이 막막하였던 아낙네는 악이받쳐 공산당을 욕하고 모주석을 욕했던 것이다. 이러이러한 문제로 사람이 잡혀왔다는 소식을 들은 모택동은 즉시 그 사람을 직접 만나보겠다고 하였다.   농촌아낙네는 모택동께서 만나자고 한다니 대뜸 자기가 큰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모택동 앞에 꿇어 엎디며 큰죄를 범했으니 죽여달라고 빌었다. 이에 모택동은 아낙네를 진정시키며 자초지종을 자세히 물었다. 전후지사를 자세히 료해한 모택동은 격분을 참을수 없었다. 아낙네가 “주석님! 집에 시어머니와 아이가 셋이 있는데 그들을 생각해서 나를 집에 가게 해 주십사.”하고 애원하니 모택동은 “된다!”고 대답한후 책임간부에게 즉시 직접 집까지 호송하며 청간현에서 각항사업을 전면 엄격히 검사하며 문제를 즉시 시정하며 착오있는간부는 엄숙히 처리하라는 공문까지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리고 이 아낙네의 요동을 새로 잘 만들어 주라고 부탁하였다. 아낙네는 진실의 말을 하며 우리공산당과 혁명정부에 량호한 원망과 의견을 제출한 좋은 사람이라고 부언하였다.                                                                                                               22. 7.
178    모택동의 이야기(2) 댓글:  조회:450  추천:0  2022-10-31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2 )                                                                                                                회령   전사들과 함께   기나긴 장정의 길에서 모택동은 전사들과 함께 동고동락을 하였다. 장정초기 큰병을 앓고난 모택동의 신체는 매우 허약했다. 하여 담가를 안배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은 늘 담가를 쓰지않고 상병원전사들에게 돌리였다.   한번은 황혼무렵 세번째로 적수하를 건널때였다. 그때 경위원 황택구는 심한 복통으로 걷기가 몹시 힘들었다. 하여 반장 호창보에게 대오의 뒤에서 걷겠다고 청시하였다. 호창보는 비준하였다. 대오가 모태하강변에서 배를 기다릴때 모택동은 신변의 공작인원들을 점검해보고 황택구가 없는것을 발견하였다. 황택구가 복통으로 뒤에 떨어진것을 알게된 모택동은 담가를 강변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호창보는 모택동에게 담가는 당신께서 계속 쓰고 황택구는 말을 타게 하자고 하였다. 모택동은 머리를 흔들면서 배가 아픈 사람이 어떻게 말을 타느냐고, 꼭 담가에 앉게하라고 하였다.   1935년 6월, 부대가 대설산을 넘을때다. 가파롭고 미끈눈길은 한발작을 나가면 두발작을 미끄러지는 형편이였다. 경위원들이 부축하려고 하면 그는 견결히 사양하면서 힘들게 걸어나갔다. 경워원들이 그럼, 말꼬리를 붙잡고 걸으라고 해도 그는 사양하면서 체약자와 녀성동무들에게 돌리였다. 전사들이 헐떡이며 지쳐하거나 눈구덩이에 빠지면 그는 꼭 손잡아 이끌어 주었다. 그러면서 한명이라도 설산을 넘으면 그만큼 힘이 더 커진다면서 전사들을 고무하고 격려하고 손잡아 이끌어 주었다. 설산의 기후는 너무도 악렬하고 변화무쌍했다 모택동은 산꼭대기를 보지말며 산아래도 보지말고 머리를 수그리고 발앞만 보며 걸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며 절대로 잡은손을 놓지말라고 수시로 웨치였다. 설산은 오를수록 공기가 희박하였다. 경위원 대천복이 호흡곤난으로 주저앉자 모택동은 즉시 업으려고 하였다. 이때 오길청이 먼저 업게되여 모택동은 곁에서 부축하며 함께 걸었다. 이렇게 모택동은 전사들과 함께 설산을 끝끝내 정복하고 넘었다.   부대가 장족지구에 들어선후 부대는 소금과 량식이 다 떨어졌으나 어데서 구할길이 없었다. 장족동포들은 반동파들의 악선전으로 피해버렸던 것이다. 몇백리 험난한 길을 홍군은 말그대로 풀을 뜯어 먹으며 전진하였다. 부대가 초지를 건널때다. 어느날 세찬폭우가 쏟아졌는데 비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모택동은 담가의 유포를 뜯어서 전사들과 함께 쓰고 비를 피했다. 이때 진창봉은 자기가 리질에 걸렸기에 모택동과 함께 유포를 쓰면 않된다고 하였다. 모택동은 진창봉을 자기곁에 끌어다가 함께 유포를 썼다. 초지에서 량식이 떨어진지 여러날이다보니 상병원들이 더욱 늘어나고 전사들이 기진맥진하였다. 모택동은 말 몇필을 잡게하고 고기를 상병원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이때 전사들은 손바닥만한 말고기를 모택동 몰래 풀과 함께 끓인후 모택동이 먹게 하려고 꾀를 썼다. 이를 알게된 모택동은 말고기를 기어이 담가에 누워가는 대천복에게 가져다 주게 하였다. 며칠후 담가원들이 빈 담가를 들고 모주석께로 왔다. 대천복은 끝내 회생되였던 것이다. 경위원은 종이에 싼 말고기를 모택동에게 드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대천복은 림종시에 이 말고기를 꼭 모주석께 드리라고 하면서 혁명이 하루빨리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주석께서 꼭 보중하시며 경위반 전우들이 모주석을 잘 보위하라고 당부 하였습니다,” 모택동은 비통을 억제하며 아무말도 못하였다. 그는 말고기를 다시 잘 싸면서 다음과 같이 목멘소리로 말하였다. “수천만의 렬사들이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하여 희생되였다. 이정신은 중국인민을 감동케 할것이며 세계인민들을 감동케 할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정의의 사업을 지지할 것이다. 우리의 정의의 사업은 반드시 승리할것이다.”   무정한 설산과 초지와 기아, 추위와 폭우, 부상, 질병은 많은 생명을 삼켜버렸다. 그러나 홍군은 완강한 의지로 설산, 초지를 전승하였고 자아를 전승하였다. 홍군은 국민당의 포위, 추격, 저지, 차단을 물리치며 380여차의 전투를 하며 11개 성을 경유하였다. 8만명이 떠난 장정대오는 1만1천명으로 1935년10월 섬감혁명근거지 오기진에 도착하였다. 이로서 중앙홍군의2만5천리 장정은 모택동의 인솔하에 승리적으로 끝났다. 모택동은 시작부터 끝까지 전사들과 함께 행군하였다.                                                                                                            22. 7.
177    모택동의 이야기 (1) 댓글:  조회:585  추천:0  2022-10-20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1)                                                                                                                회령   모택동은 중국 나아가서는 세계에 많은 이야기를 남긴 사람이다. 허다한 이야기는 이미 책으로 영화로… 우리가 보았다. 그중에서 가장 백성과 가까운, 가장 백성적인 이야기를 다시 감상 해 본다.   어린시절   1893년 12월 26일(음력 계사년 11월 19일) 바로 해가 솟는때 모택동은 호남성 상담현 소산충 상옥장의 한 토벽돌로 지은 집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생존인 할아버지의 명함은 모은보, 아버지는 모이창(자ㅡ순생, 호ㅡ량필), 어머니는 문칠매 였다. 아이가 태여나서 3일이 되는날 모씨네는 당지의 풍습대로 풍성한 술상을 차리고 “하3조”(賀3朝)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날만은 부처님, 보살님을 믿지않는 모순생도 향을 피우고 폭죽을 터치고 분주히 돌아치며 기분을 돋구었다. 연회에 참석한 매우 학식이 있는 한 사람이 아이에게 십분 쟁쟁한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 이름이 바로 모택동이다. 그선생은 호도 지어주었는데 윤지라고 하였다. 그먼저 두아들을 강보에서 잃은 모씨네는 셋째로 또 아들을 보자 무척 기뻐했든 것이다. 모순생부부는 모두 5남2녀를 보았는데 2남 2녀는 모두 강보에서 잃고 모택동, 모택민, 모택담 3형제를 성인으로 키웠다. 하지만, 모택민, 모택담은 해방전 혁명투쟁중에서 희생되였다.   모택동의 아버지 모순생은 세심하면서도 깍쟁이였는데 그는 이악스레 집살림을 경영하였다. 모순생은 각박스레 돈을 모아 차츰 괜찮게 살게되였고 자식들에게 엄혹하였다. 대신, 어머니 문칠매는 인자하고도 너그럽고 동정심이 많았다. 용모거나 성품에서 모택동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어느해 가을이다. 갑자기 먹장구름이 뭉켜오더니 광풍이 불어치며 폭우가 당금 쏟아질 기세였다. 집집마다 말리느라 널어놓은 벼를 급급히 거둬 들였다. 어린 모택동도 아버지와 함께 급급히 탈곡마당에 널어놓은 벼를 거두기 시작했다. 일하다 문득 바라보니 이웃집 할머니가 혼자서 힘겹게 벼를 거두고 있었다. 모택동은 다짜고짜로 즉시 달려가서 이웃집을 도왔다. 그사이 폭우가 쏟아지며 모택동네 벼는 적지않게 비물에 흘러가고 푹 젖어버렸다. 이에 대노한 아버지는 멍청이 같은 놈이라며 때리려고 하였다. 모택동은 선자리에서 웃으면서 말했다. 이웃집은 소작농이여서 벼가 많지도 않거니와 소작료를 또 내야하지만 우리는 많기도 하고 자기것이니까 좀 손실을 봐도 괜찮은게 아닌가고. 더욱 분통이 터진 모순생은 기가 막혀 네놈은 그래 밥을 먹지않는가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줄욕을 퍼 부었다. 모택동은 그럼, 때마다 내가 적게 먹으면 될게 아닌가고 대 들었다. 결국은 어머니가 나와서 말렸다.   모택동이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사숙에 다니며 공부할 때다. 그는 점심밥을 갖고 다닐 필요가 없어서 밥을 가지지 않았다. 어느날, 모택동은 집이 먼 동학이 점심밥을 사지않는것을 발견하였다. 그동학의 집은 너무 가난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점심시간에도 공부를 더 하겠다는 리유로 어머니하고 점심밥을 사 달라고 하였다. 이에, 옆에서 듣고 있던 아버지는 흡족해 하며 그럼 점심밥을 사 주라고 하였다. 하지만 짠지쪼각에 밥을 조금 싸 주라고 엄명을 하였다. 어머니는 그러겠다고 대답을 하고는 될수록 좋은 반찬에 밥을 많이 싸 주었다. 모택동은 가난한 동학과 함께 점심밥을 먹었다. 저녁때면 모택동은 굶은사람처럼 밥을 먹었는데 어머니는 점심밥이 적어서 아이가 이러는게 아닌가고 의심이 들었다. 어느날 어머니는 모택동과 자세히 물어 내막을 알게 되였다. 어머니는 네가 잘했다고 하면서 점심밥을 두몫으로 싸 주었다.   어느해의 일이다. 모택동의 아버지는 린근의 한 농민집에서 큰돼지 한마리를 사기로 하고 예약금까지 물었다. 며칠이 지나서 돼지값이 올라가자 모순생은 아들에게 돼지값을 주면서 가서 돼지를 끌어오라고 하였다. 모택동이 돼지 가지려 가니 임자는 매우 랑패해 하며 돼지를 잘못 팔았다고 아쉬워 하였다. 돈있는 집에서는 별일아니지만 자기네 같은 사람은 큰 손실이라며 돼지를 내여 주었다. 모택동은 예약금을 돌려받고 돼지를 물려주었다. 그러고 돌아오는중 동무를 만났는데, 동무는 땀벌창이 되여 반달음으로 현성에 가는길이였다. 어머니가 급히 앓는데 현성에 있는 친척집으로 돈꾸려 간다는 것이였다. 모택동은 두말없이 주머니의 돈을 동무에게 주었다. 이로하여 모택동은 아버지에게서 줄욕을 먹으며 대판싸움을 하였다, 결국은 또 어머니가 나서서 말려냈다.   모택동이 11살때다. 모순생의 사촌동생 모국생은 병으로 7무의 밭을 팔려고 하였다. 이밭은 모국생네 명줄이였다. 모순생은 때를 만났다고 좋아라 밭을 사들였다. 이로하여 모택동과 어머니는 극구 반대하며 국생네 난관을 함께 이겨내야 한다고 입이 닳게 말했으나 아무 쓸모도 없었다. 이일은 모택동의 가슴에 잊을수 없는 상처로 되였다. 새중국이 성립된후 모국생의 아들 모택련이 북경으로 왔을때 모택동은 이옛말을 여러번 하면서 “구사회의 그사유제는 형제간의 정도 무시하였다,”고 말하였다.   모택동이 16살 되던해다. 모순생은 모택동에게 이젠 공부를 그만큼 했으면 되였으니 현성(상담)에 가서 돈벌이를 하라고, 현성에 있는 친구 미곡상과 약속이 되였는데 그집에 가서 쌀장사를 배우며 일하라고 하였다. 모택동은 할수없이 현성으로 갔다. 가서 보니 미곡상은 근량을 속이고 지어는 쌀에 모래를 섞기까지 하였다. 모택동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나는 농사일을  하면 하였지 그런 량심없는 장사술은 배우지도 하지도 않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어머니는 옳다고 하면서 외가집에 가서 더 공부를 하면서 두외삼촌들과 의논하여 출로를 찿으라고 하였다.   이렇게 바른길로 바르게 성장한 모택동은 청년시절부터 평생을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였다.                                                                                                               22. 7.
176    왕소군 댓글:  조회:333  추천:0  2022-09-30
        수필                                               왕소군                                                                                                                 회령   한나라 한선제 원년 즉 기원전57년때다. 북방에 거주하고 있는 흉노내부에서는 단꺼번에 5명의 왕이 일떠서며 대 분렬이 일어났다. 다섯왕은 서로 싸웠는데 그중에서 호한사라는 왕이 다른왕들을 모두 정복하였다. 그러나 그의 형은 동생에게 불복하여 기회를 타서 자기를 질지왕이라고 하며 독립하였다. 하다보니 동생과 형이 사생결단 싸우게 되였다. 결과 호한사왕은 패전하고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한나라 한선제는 두말할것 없이 매우 기뻐 입이 함박만해 하였다. 기원전 51년 호한사왕은 장안(지금의 서안)으로 와서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겠다고 하였다. 한선제는 좋은 옷과 금으로 만든 도장, 멋진 특등마차와 금은주보, 릉라주단을 많이 보내주었다. 호한사왕은 한선제가 보내준 옷을입고 멋진 마차에 앉아 사신을 따라 한나라 장안으로 왔다. 한무제는 친히 성밖으로 중앙과 지방의 대신, 존장, 제후와 백성들을 이끌고 나가서 륭중하게 호한사를 영접하였다. 수만 환영군중들은 만세를 열창했다. 난생처음으로 이런 성대한 환영을 받아보는 호한사는 너무도 놀라서 어리둥절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연회의 그 열렬하고도 친절하고 화기애애한 정경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한달후, 호한사가 돌아갈때 한선제는 1만6000기병으로 호송하며 많은 량식을 보내주었다.   질지왕은 한선제가 이렇게 성대하게 호한사를 대해주는것이 매우 심술이 나고 질투가 났지만 별수가 없었다. 질지왕은 동생 호한사를 한나라때문에 때려부실수도 없고 실력도 않됨을 알고 한나라에 화애를 표시했다. 그리고는 주동적으로 서쪽으로 멀리 이사를 갔다.   기원전 33년, 호한사왕은 또 장안으로 오겠다고 하였다. 당시 황제인 한원제는 아주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서 또 오자는건가? 리유를 알아보니 호한사는 엉뚱하게도 한나라와 혼인을 맺자는것이였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 두나라관계를 더욱 우호적이 되게 한다는것이였다. 한원제는 생각해 보니 이건 좋은일이였다. 한원제는 호한사왕의 청구를 응낙하고 수종들에게 분부하였다. “너들이 궁중에서 능력있고 예쁜궁녀 하나를 선택하여라. 만약 그가 흉노왕에게 시집을 가겠다면 그를 공주처럼 대하여 주겠다.”   궁중에는 물론 미녀들이 가득했다. 그들 대부분은 강제로 선발되여 왔고 황제와 동품을 해 보지못한 궁녀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하여, 궁에서 나가기를 몹시 갈망했으나 정작 멀고도 춥고 사람도 생활습관도 모두 낯선고장ㅡ 흉노로 시집가겠다는 궁녀는 없었다. 이런때에 왕소군이 자원해 나섯다. 왕소군은 호북 자귀(지금의호북서부)사람으로 노래와 춤을 잘하고 총명해서 궁녀로 뽑혀왔으나 아직 황제와는 만나지 못한 처녀였다. 왕소군은 생각하기를 흉노왕에게 시집가는것은 자기 개인의 일이기보다 한나라와 흉노의 우호와 관계되는 대사였던 것이다. 왕소군은 선발된후 흉노의 언어와 풍속습관, 비파 등 악기를 학습, 훈련받기 시작했다. 그는 열심히 학습하여 재빨리 익숙해 지었는데, 비파는 너무도 잘 타서 새들도 날아가기 싫어했다고 하였다.   드디여 결혼일이 되였다. 호한사왕은 한족신랑차림으로 신부를 맞으려 왔다.  머리수건을 벗기고 신부를 본 호한사왕은 멍해서 보기만 하였다. 그런데 입은 저절로 귀밑까지 히죽히 벌어졌다. 초원의 그 무슨꽃도 비길수 없이 아름다운 신부였다. 혼수는 한마디로 다 말할수 없었다. 금은주보는 얼마인지 헤아릴수가 없고 비단만해도 1만8000필이였다. 호한사왕은 정신이 아뜩해 날 지경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으나 한원제로는 이런것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오직, 흉노가 시끄럽게 굴지않으면 되였다.   신혼행차가 출발하자 한원제와 문무백관, 백성들이 왕소군에게 “잘 가시라!” 환호성을 높히 웨치며 환송해주었다. 왕소군은 감격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그는 이렇게 오늘 떠나가면 다시는 한나라로 올수없고 친인들도 다시는 볼수 없다는것을 잘 알고 있었다.(흉노의 법) 그러나 국가의 안정과 백성의 행복을 위하여 한몫을 하였다는 자호감을 뿌듯히 느끼였다. 그는 두 나라와 두 민족의 우호를 위하여 더욱 노력하리라 맹세하였다.   왕소군은 흉노로 온후 한나라의 선진적인 지식과 기술을 힘껏 보급하고 흉노의 유목생활, 떠돌이생활을 개변케 하였다. 이때로부터 흉노에서는 농업생산을 하게 되였고 중원의 농기구를 사용하게 되였다. 하여, 량식이 보장되고 생활이 온정되게 되였다. 그리고 흉노의 락후한 풍속습관을 고치고 한족의 문화를 배우게 하였다. 호한사왕은 흉노족이 번영하여 인구가 증가되게 했고 소와 양떼가 가득하게 하였다.   왕소군과 호한사왕의 금슬은 아주 좋았다. 그들은 평생 한마디 다툼도 없었다. 결혼이듬해 왕소군은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훗날 우일축왕으로 되였다. 호한사왕이 죽은후 왕소군은 법에따라 새로 등극한 왕에게로 시집을 가서 딸 둘을 낳았다. 왕소군은 애국자로서 고국과 경상적으로 서신래왕을 했고 귀중한 선물을 자주 보냈다. 물론 한나라황제도 친절한 태도였다.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간후 60여년 두나라 사이에는 단 한번의 전쟁도 없었다.   왕소군은 로년에 아들과 딸들에게 한나라와 꼭 우호적으로 지내라고 거듭 당부했다. 그리고 자기가 죽으면 묘를 남쪽을 향하여 건조하라고 유언하였다. 그가 죽은후 묘를 귀화(지금의 내몽고 후호호터시 시교) 청명산에 건조하였다. 그곳은 사막과 가까운데 풀이 생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왕소군의 묘에는 언제나 청초가 푸르싱싱 가득 자랐다. 하여 사람들은 “청총”이라고도 부른다. 애국 애민의 왕소군을 하늘과 땅도 특별히 보는건가!...  (왕소군은 중국력사에서 4대미인중의 하나다.)                                                                                                                                                                                      22. 4.                                                                                                            
175    포증씨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289  추천:0  2022-09-15
           수필                                          포증씨에 대한 생각                                                                                                              회령   포증은 중국력사에서 명성이 혁혁한 국가간부다. 많은 사람들은 예나지금이나 포증이라고 하면 아리숭해 하지만 “포청천”(包淸天)이라고 하면 “아! 그분을 말하는가.”하면서 대뜸 숭경해 마지않는다. 지금도 “철저한 포청천! 충신 간신 밝히네.”라는 노래말이 전해지고 있다.   포증이 재세당시 북송정권은 황제로부터 중앙급, 지방급정권과 각급간부들의 부정부패가 로골적이고 창궐하기가 짝이없었다. 거기에 황친국척, 부랑배(깡패, 흑사회), 망나니들까지 내놓고 횡행하다보니 도대체 나란지 란장판인지 분간할수 없었다.   포증이 갓 벼슬길에 들어서서 천장(지금의 안휘성 천장시)현령(현정부수장)으로 있을때의 일이다. 그는 숱한 가렴잡세를 일시에 취소하고 안건은 법과 원칙에따라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어느날, 한 농민이 안건을 보고해 왔다. 아침일찍 밭갈이를 가려고 외양간에 갔는데 소는 쓰러져 있고 입에서는 피가 흘렀다. 소의 입을 벌리고 보니 이럴수가 있는가?! 소의 혀가 뭉텅 끊기여 없어졌던 것이다.   포증은 농민에게 이사실을 또 누가 아는가고 물었다. 농민은 아무도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당신과 원쑤 진 사람이 없느냐고 포증이 또 물으니 농민은 그런사람은 없지만, 주변마을의 부랑배 몇이 얼마전에 소를 잡아먹자고 하며 자기를 시까슬며 지분거린적이 있다고 하였다. 포증은 농민에게 집에가서 누구도 모르게 소를 잡으라고 하였다.   얼마후, 불량끼가 잔뜩보이는 청년 두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아무개가 가만히 소를 잡아먹는다고 보고하였다. 당시 북송법에는 역축을 현령의 비준없이 잡으면 감옥에 잡혀갔다. 포증은 당장에서 이 청년 둘을 심문했다. 안건은 인차 파안되였다. 포증은 이 안건을 고리로 부랑배세력을 일거에 섬멸해 버렸다. 백성들이 쉬원해 하며 포증을 칭송한 일은 여기서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가는곳마다에서 백성들의 리익을 보호하고 억울한 일들을 시정하였다.   포증이 광동 단주에서 지방수장으로 있을때다. 그곳에서는 특산물로 벼루돌이 아주 유명했다. 하여 특별히 정밀가공 정선을 하여 조정에 얼마의 수량을 상납하여야 했다. 그런데 부자와 토호, 세력가들이 이것을 명의로 백성들에게서 몇십배의 수량을 수탈해서는 저들의 리속을 챙기는것이 아니겠는가?! 포증은 이런 강도행위를 철저히 단속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단주를 떠날때 포증은 그유명한 벼루를 한개도 가지지 않았다.   포증이 개봉부 지부로 사업할때다. 그때 소위 나라의 수도라는 개봉부의 사회질서는 문란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포증은 사회의 질서와 치안을 바로 잡으리라 마음먹었다.   당시, 나라규정에는 백성들이 정부에 무엇을 고소하려면 먼저 신소국에 가서 고소장을 써야하며 그런후 그것을 일반간부가 지부나으리께 친히 가져다 올려야 했다. 이 한단락의 간단한 순서에서도 유관간부들은 백성들을 괴롭히며 뢰물을 뜯어 먹었다. 포증은 이런규정을 단번에 취소하고 정부앞에 큰 북을 세워놓게 하였다. 그누구든지 신소할 일이 있으면 북을 울리게 하였다. 북이 울리면 유관관리는 즉각 신고자를 접대하여야 했다.   어느해 여름, 개봉부에는 특대폭우가 쏟아졌다. 그런데 도시는 배수가 제대로 되지않아서 시민들이 많은 불편을 겪게 되였다. 조사해 보니 도시의 배수역활을 하는 혜민하가 제대로 통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권세가들이 화원이며 정자며 루각, 술집 등등을 하도(河道)에 마음대로 만들었기 때문이였다. 이에, 포증은 통고를 내려 기한내에 본인이 자기것을 몽땅 철거하라고 하였다. 지부 포증이란 어떤사람인가를 잘 아는, 비록 권세가들이지만 그들은 찍소리 한마디도 못하고 당장 철거를 하였다. 그러나 물은 여전히 잘 통하지 못했다. 그것은 황제의 가시애비ㅡ장인어른이 하도를 굉장히 길게 점령하고 이건 조상때부터 내려오는 자기네 소유지 땅이라는 것이였다. 그는 땅문서까지 가지고 있었다. 포증은 문서가 가짜임을 밝히고 정절에 따라 그를 엄중히 처리하였다.   포증은 가족, 친척, 친우, 권세가… 그누구에게도 사심을 쓰지않았다. 하여 지금도 이런 노래말이 전해지고 있다. “ 뒷문거래가 쓸모없는 곳은 염라대왕과 포어른 두곳뿐이다.”   포증은 대관(大官. 고급간부)이였지만 시종일관 백성들과 친밀했고 근검소박했다. 얼마전에 계위한, 정사에 밝은 북송황제 인종은 그를 몹시 귀중히 여기며 중용하였다. 그러나 로고에 지친 포증은 많은 사람들의 애통을 자아내며 5년후에 세상과 하직하였다. 포증은 사망할때 다음과 같은 유언을 하였다.   “후대에 벼슬하는 자들중에서 탐오죄를 범한 자는 고향(老家)에 들어오지 못한다! 죽은후에는 포가 선산에 묻히지 못한다!”   포증씨의 후손들이 그의 유언을 얼마나 받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22. 4.
174    사마천 댓글:  조회:285  추천:0  2022-09-10
                     수필                                                               사마천                                                                                                                 회령   기원전 145년 즉 한나라 경제 5년, 태사령 사마담은 중년에 득자하여 입이 함박만해 졌다. 이아이가 바로 훗날 위대한 사학가, 문학가로 된 사마천이다.   사마천이 20살이 되던해 아버지 사마담은 그를 불러놓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너는 뜻이 크고 포부가 원대한 사람인데 이렇게 집에만 있지말고 세상으로 나가서 명산대천을 돌아보며 각곳의 풍토인정을 고찰하며 잘알아야 한다. 이래야만이 너의 생각이 넓어지고 열람이 풍부하게 된다.” 아버지 말씀을 심중히 들은후 사마천은 이렇게 말을 여쭈었다. “하오만, 내가 집을 떠나면 누가 아버지를 모시오리까?” 사마천은 아버지의 앙상한 두손을 꼬옥잡았다. 사마담은 말했다. “나는 이젠 늙어서 모든희망을 너에게만 기탁한다. 나를 관계치말아라. 네가 돌아올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아버지의 지지하에 사마천은 홀몸으로 장안(지금의 서안)을 떠나 고찰의 길에 올랐다. 사마천은 유명한 풍경구와 명산대천을 돌아보았을 뿐만아니라 력사유적지와 력사인물들의 유적지를 될수록이면 빼놓지 않고 자세히 다 고찰하였다. 이렇게 여러해 고달픈 로고는 했지만 그는 풍부한 재료를 장악하게 되였다.   사마천이 장안으로 돌아온후 조정에서는 그를 랑중으로 선발하여 황제의 수종을 하게했다. 하여 사마천은 아버지와 함께 경상적으로 한무제의 순찰길에 따라다니게 되였다.   기원전110년, 한무제는 성대한 봉선대전을 거행하였다. 그때 황제를 수종해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주남이라는 곳까지 갔는데 그만 그곳에서 중병으로 앓아눕게 되였다. 하여 봉선대전을 거행하는 태산까지는 가지 못했다. 사마천은 당시 한무제의 지시를 받고 서남소수민족지구에 가서 시찰, 위문 등 사업을 하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아버지가 주남에서 앓아누웠다는 것을 알게된 사마천은 급히 주남으로 달려갔다. 사마천이 달려갔을때는 사마담이 이미 림종으로 숨이 간들간들 하였다. 사마담은 눈물을 흘리며 아들에게 이런 유언을 하였다. “ 나의 운명은 황제를 따라 태산에 가서 봉선대전에 참가못하게 되여 있구나! 지금 오직한가지ㅡ 이대전을 기록못하는 것이 가슴에 걸린다. 내가 죽으면 황상께서 너를 태사령으로 임용하겠는데, 때가되면 너는 이 대전은 물론이고 지나간 력사를 꼭 잘 쓰거라.” 사마천은 눈물범벅아  되여 힘껏 머리를 끄덕였다. 부친의 초상을 치른후 사마천은 즉각 태산으로 달려가서 봉선대전에 참가하였다.   기원전 108년 사마천은 정식으로 태사령이 되였다. 그는 사관이란 거짓미명을 만들어내지 말아야 하며 사악을 음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깊히 알고 있었다. 자기의 책임이 중대하다는것을 잘알고 있는 사마천은 모든정력을 바쳐 일하리라 맹세를 하였다. 그가 모든재료를 정리, 열독하면서 “사기”를 찬술하려고 하는때에 “리릉지화”가 그의머리에 떨어질줄이야?!   한무제 대한 2년 즉 기원전 99년가을이다. 한무제는 애첩 리부인의 오빠 리광리장군더러 흉노를 치게 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공을 세우게 하여 후작으로 봉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리릉에게 명령하여 리광리를 도와 군수품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런데, 원래부터 녀동생의 신세로 득세를 하는 리광리를 우습게 보는 리릉인지라 그는 합작하기 싫어서 한무제에게 자기도 한개 부대를 이끌고 나가 흉노를 치겠다고, 그렇게하면 리광리의 압력이 감소될것이고… 하며 구실을 렬거했다. 한무제는 리릉의 속셈을 알기에 지금은 기병을 안배할수 없다고,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리릉은 보병도 좋다고 하며 견결히 나가 싸우겠다고 거듭 말하였다. 한무제는 리릉을 긍정적으로 좋게 보면서 동의를 하였다. 한무제는 로장 로박덕으로 리릉을 협조하게 하였다. 그런데, 또 호사다마로 일이 우습게 꼬이게 되였다. 그것은 로장 로박덕이 리릉을 협조하기 싫어서 한무제에게 상서하기를 지금은 천고마비계절이라 흉노의 력량이 좀 강해졌겠는데 명년봄에 나가서 치면 더욱 파악이 있을거니… 하며 구실을 대였다. 이에 한무제는 대노하게 되였는데, 그것은 리릉이 도전서를 낸후 지금은 또 두려워서 로박덕을 시켜 이따위 상서를 했다고 오판을 했기때문이다. 한무제는 즉시 명령을 내려 리릉더러 곧 출병하라고 하였다. 리릉은 5000보병을 이끌고 나가서 번번히 승리를 하였다. 하여 전국상하가 모두 환호하였다. 그런데, 또 호사다마로 호경불장(好景不長)이 되고 말았다. 흉노는 기병을 집중하여 리릉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리릉은 량식이 떨어지고 구원병이 없어서 결국은 포로되여 투항하고 말았던 것이다.   소식이 전해지자 한무제는 크게 놀라면서 분노를 억제할수 없었다. 전국상하에서는 리릉을 질책하며 그의 변절투항을 호되게 욕을 하였다. 한무제는 대신들을 소집하여 리릉을 어떻게 처리할것인가를 토론하였다. 토론은 하나마나, 이구동성으로 리릉을 부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사마천은 속으로 이건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전까지만 해도 대신들은 리릉의 공적을 매우 찬양했는데 지금은 황제의 눈치를 보면서 아무쓸모도 없는 인물로 평가하면서 한갈래의 출로도 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자기의 견해를 말하였다. “리릉은 보병이지만 그들을 이끌고 맹호같이 싸웠다. 비록 실패는 하였으나 공로가 없는건 아니다. 혹시 그가 투항한것은 기회를 보아 나라에 보답하자는 것일수도 있다.” 한무제는 사마천의 말이 매우 거슬렸다. 하여 면박하기를 “그래, 너는 리릉을 변호하는가! 이말은 리광리장군과 나를 책망하는 것이다!” 그는 즉석에서 사마천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게 하였다.   때는 늦가을, 추위와 옥졸들의 박해에 시달린 사마천은 몰골이 말이 아니였다. 그는 몇번이나 자살하려고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사마천은 그래도 한갈래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날 황상께서 자기를 혹 용서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였다. 얼마후, 한무제는 리릉의 일가를 전부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이소식을 들은 리릉은 흉노에게 철저히 투항하였다. 흉노왕이 리릉을 특히 귀중히 여긴다는 소식을 들은 한무제는 더욱 분노하여 사마천을 엄중히 처리하였다. 사마천은 “무상”(윗사람을 무고했다.)죄목으로 사형을 받았다. 그때의 한나라 형법에는 돈으로 혹은 “부형”(고환을 빼버리는 형벌)으로 사형을 면할수 있었다. 하지만, 사마천에게는 돈이 없었고 뀌워주려는 사람도 없었다. 사마천은 죽는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언을 생각하니 죽을수는 없었다. “사기”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마천은 “부형”을 선택할수밖에 없었다.   사마천은 48살에 “부형”을 받고 필생의 정력을 다하여 전심전의로 “임소경에게 보내는 글”과 “사기”를 창작, 찬술하였다.(“사기”찬술에 10년이 걸렸다.) 그는 이것으로 자기의 수치를 씻으며 후세에 불후의 이름을 남기려고 하였다. 이 두작품은 그의 념원대로, 맹세대로 오늘도 문학과 사학에서 불후의 거작으로 되고있다. 우리는 사마천에게서 많은 인간성을 따라 배울수 있다.                                                                                                                        22.4.
173    사면초가 댓글:  조회:296  추천:0  2022-09-06
              수필                                                               사면초가                                                                      ㅡ항우의 자결                                                                                                                       회령   서초패왕 항우와 한나라왕 류방이 천하를 쟁탈하기 위한 혈전은 홍문연후로부터 벌써 5년이란 세월이 되였다. 그간 항우는 교오자만과 자고자대, 독단으로 렬세가 되고 류방은 워낙 잔꾀를 잘 쓰는데다가 한신 등 인재를 많이 중용하여 절대적 강세가 되였다.   기원전 202년의 어느날 밤이다. 야색은 짙어가는데 만월은 반공중에 걸리고 교교한 달빛은 처량하기만 하였다. 군사가 얼마안되고 량식마저 떨어진 항우는 류방과 여러제후들의 군사에 의하여 해하에서 겹겹 포위되여 있었다. 초나라 군영은 조용하고 오직 항우와 그의 애첩 우희가 있는 장막에서만 희미한 불빛이 비쳐나왔다.   돌연 한나라 군영에서 초나라 사람들이 아이때부터 제일 익숙히 아는 노래소리가 울려 왔다. 이초가는 은은하면서도 애절하고 처량했다. 노래는 고향을 생각하게 하며 리별과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비애를 자아내는 노래였다. 노래소리는 사면에서 점점 더 크게 울려왔다. 항우는 대경실색하여 급히 장막밖으로 나가 영문을 살펴보았다. 군영의 군사들도 밖으로 나와 우두커니 서서 노래를 듣고 있었다. 한나라 군사들이 불러대는 노래는 초나라 패잔병들의 사기를 여지없이 저락시키고 있었다. 항우는 대세가 이젠 완전히 틀렸음을 느끼였다. 이때, 갑자기 말울음소리가 터졌다. 항우의 애마 오추마의 울음이였다. 마치도 초가노래소리에 자극을 받은것 같았다. 항우가 다가가서 목덜미를 쓰다듬어주자 말은 울음을 그치고 머리를 항우의 몸에 비비며 진정하였다. 항우는 천천히 다시 장막안으로 들어갔다.   사연은 이렇다. 류방의 수하장령인 장량이 초나라 포로들더러 한군에게 초가를 배워주게 한후 오늘밤 그 노래를 불러서 초군의 사기를 떨구려고 한 것이다.   항우가 장막으로 들어서자 우희는 술 한잔을 부어주면서 마이라고 권고하였다. 항우는 술잔을 들고 다른한손으로는 보검자루를 만지면서 “나도 너에게 노래 하나를 불러주마.” 하면서 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힘은 산뿌리도 뽑을듯 했고 기세는 세상을 덮었으나 시운이 다하니 전마도 달리지 못하누나! 전마가 달리지 못한들 무슨방법이 있겠는냐. 우희야 우희야 너를 어떻게 안치할가?” 항우가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리며 목멘소리로 노래를 부르자 우희도 눈물을 흘리며 화답하여 노래를 불렀다. “한 군은 이미 우리고향을 점령하고 사면에서 초가를 부르네. 대왕께서 갈길이 없는데 천첩이 살아서 무엇하랴!” 이 비장한 장면을 보고섯는 시종들은 누구라 없이 흐느꼈다.   항우는 포위를 뚫기로 결심하고 오추마에 올랐다. 남은 800명 장사들이 항우를 따랐다. 우희는 검을 빼여 자살하였다. 항우는 800철기를 이끌고 선풍같이 남쪽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길을 막는 한군병사들은 몽땅 피못속에 쓰러졌다. 날이 밝아서야 항우가 포위를 뚫고 이미 도망쳤음을 안 류방은 관영에게 5000기를 이끌고 즉시 추격하라고 명령하였다.   항우가 회하를 건넛을 때는 수하에 100여명밖에 남지않았다. 그들이 음릉에 이르렀을때에는 한나라 추격병이 멀리뒤떨어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만 길을 잃었다. 마침, 부근의 밭에서 일하는 농부가 보이였다. 피범벅이가 되고 초라한 몰골의 군사가 길을 묻자 농부는 대뜸 밤낮 싸움질만 하며 백성을 못살게 들볶는 달관귀인들임을 알고 괘씸하기 그지없어 우정 “왼쪽으로 돌아라.” 하고 틀리게 말해줬다. 그사이 추격병들이 가까이로 쫓아왔다. 원래 데면데면한 항우는 급한남어지 즉시 왼쪽 오솔길로 달리였다. 그런데, 누가알았으랴! 얼마 달리지 않아 오솔길은 없어지고 앞은 무연한 소택지였다. 앞에서 달리던 몇몇기병들은 소택지에 뛰여들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항우네가 다시 돌아서 나오자 한나라 병사들은 그들을 겹겹히 포위하였다. 항우가 싸우면서 동성까지 왔을때에는 겨우 28명의 군사뿐이였다.   항우는 작은 산에 오른후 더는 갈길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평온한 심정으로 부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군사를 이르키고 진나라를 치기 시작해서부터 지금까지 8년이 되였다. 그간 70여차의 전투를 하였으나 패전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여 천하의 패왕으로 되였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 죽게되였다. 이건 하늘이 나를 죽이는것이지 내가 싸움에서 잘못했거나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기실은 죽음이라는게 무서운것이 아니다. 죽기전에 우리 한번 통쾌히 싸워보자! 내가 얼마나 대단한가 한번 보아라!” 항우는 28명을 4개조로 나누고 양무리에 뛰여든 호랑이마냥 짓부셔 나갔다. 그들의 뒤에서는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항우네는 두사람만 죽고 한나라군사는 몇백명이 죽었다.   이렇게 악전을 하면서 그들은 오강기슭에까지 당도했다. 오강은 여전히 굼실굼실 동으로 흐르고 있었다. 음침한 흐린하늘은 강물을 부옇게 하였다. 항우는 말에서 내리였다. 그는 죽을 시각이 닥쳐 왔음을 예감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대왕! 빨리 배를 타시요!”하는 웨침소리가 들려왔다. 항우가 자세히 바라보니 원래는 오강정장ㅡ 잘 아는 사람이였다. 정장은 배를 기슭에 대이면서 다급히 말했다. “대왕! 강동의 부로향친들은 줄곧 당신을 그리워 하고 있어요. 강동이 작긴해도 방원 천리고 인구는 10만이지요. 대왕이 설곳으로는 넉넉하지요. 나는 특별히 여기서 대왕을 기다렸습니다. 어서 타십시요.”   항우는 십분 감동되여 웃으면서 말했다. “당년에 8000의 자제병을 이끌고 강을 건너 서행하여 그들은 모두 타향에 묻히고 오늘은 나만 살아서 내가 무슨낯으로 강동의 부로향친을 뵈오리까?! 지금 하늘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내가 강을 건너서 무얼하겠습니까.” 늙은정장은 눈물만 줄줄 흘리였다. 항우는 또 말하기를 “강동의  부로향친들의 마음은 고맙게 받겠습니다. 로인님! 이 오추마는 나를 따라 백전을 하였는데 차마 오늘 죽일수는 없고 당신께 드립니다.” 항우는 오추마를 배에 오르게 하고 힘껏 밀어서 배가 기슭을 떠나게 하였다. 오추마는 배에서 연신 울면서 점점 멀어져 갔다.   한나라군사들이 몰려오자 항우와 28명장사들은 단검을 들고 혈투를 하였다. 결국 28명장사들은 다 죽고 항우도 10여곳을 부상당하였다. 그의앞에는 몇백명의 한나라군사들의 시체가 어지러히 쓰러져 있었다. 항우는 피가 덮힌 눈을 씻고 적장 왕의와 려마동에게 소리쳤다. “류방이 천금과 만호후봉작으로 나의 머리를 사려한다는것을 안다. 오늘 너들의 소원을 풀어주마.” 항우의 손이 목에서 번뜩하자 선혈이 분수처럼 솟았다.   항우가 죽자 그의 머리는 장수 왕의가 가지고 사마관 려마동 등 4명의 버금가는 장수들은 사지를 하나씩 뜯어 가졌다. 후에 이들은 모두 후작에 올랐다.   항우는 죽을때까지도 용맹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교오자만하고 자고자대 하였다. 어찌보면 우직하기 짝이 없는 장수였다.                                                                                                                   22. 4.                                                                                                                                                                                                                  
172    홍문연 댓글:  조회:260  추천:0  2022-08-31
        수필                                                  홍문연                                                                                                             회령   하북에서 항우는 아홉차례나 악전고투를 하여 진나라의 주력을 소멸하였다. 거록에서 진나라 주력울 이끈 장한이 투항하자 항우는 40만 대군을 휘몰아 함양으로 전진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류방이 함양을 점령하고 진황제2세 자영의 항복까지 받은후 였다. 그럼, 류방이 관중의 왕으로 된다는 말인가?! 항우는 대노하여 함곡관으로 달렸다. 거기에는 류방이 파견한 소량의 수비군이 지키고 있었는데 항우의 대부대가 당도하자 아예 비켜서서 멍하니 보기만 하고 있었다. 항우는 계속 전진하여 신풍 홍문에까지 이르렀는데 류방이 주둔해 있는 패상과는 40리거리밖에 않되였다.   당시 항우의 군대는 40만이고 류방의 부대는 10만뿐이 였다. 군사 범증은 항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류방이 고향에 있을때는 재물을 탐하고 미녀들을 좋아했는데 진관후에는 다 멀리한다고 한다. 내가 보건대는 야심이 크다. 대왕과 천하를 다투려는것 같다. 일찌감치 없애치우는게 좋겠다.”   항우가 고려중인데 류방 부하인 조무상이라는 자가 가만히 사람을 시켜 소식을 전해왔다. “류방은 지금 관중왕이 되려고 한다. 그는 진왕 자영으로 상국을 삼고 진조궁전에 있는 모든 보물을 자기가 독차지하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항우는 분이 서발이나 치솟아서 이튿날 패상을 치고 류방을 소멸하기로 결정했다.   항우의 결정은 숙부 항백을 대경실색하게 하였다. 항백과 류방의 부하인 장량은 극진한 친구인데, 항백은 밤으로 류방군영으로 달려가서 장량더러 빨리 도망치라고 하였다. 사연을 알고 난 장량은 “내가 패공을 진관하게 하고 오늘 위험하다고 하여 말한마디 없이 도망쳐서야 되겠는가?! 이건 너무도 의리가 없다. 지금 가서 그와 다 말하고 고별해야겠다.” 장량의 말을 다 듣고난 류방은 당황망조 어쩔바를 몰라하면서 연신 “이걸 어쩌나!” “이걸 어쩌나!” 하고 중얼거렸다. 장량이 대왕의 생각에는 우리군대가 항왕의 진공을 막아낼수 있을것 같은가고 묻자 류방은 울상이 되여 않된다.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말하였다. 이에 장량은 우리는 항백의 방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제야 정신이 든 류방은 술상을 차리고 항백을 열정적으로 초대하였다. 좌석에서 류방은 항백에게 공손히 말하였다. “나는 패상에 이른후 아무런 물건도 감히 다치지 않았고 오직 관민의 호적을 등기하고 진조의 창고를 차봉하고 밤낮 항왕이 오기를 기다렸다. 군대를 조금 보내여 관문을 지킨것은 도둑이 드는것을 방비하기 위해서였지 절대로 항왕을 막자는 생각은 없었다. 당신께서 항왕에게 잘 말해주기를 간절히 부탁한다. 항왕께서 절대로 요언을 믿지말기를 바란다.”   류방은 또 당장에서 딸을 항백의 아들과 혼인하기로 하고 사간간을 맺었다. 항백은 류방의 청탁을 쾌히 맡아가지고 밤도와 홍문으로 되돌아 서면서 류방더러 래일아침 일찍 항우본영으로 와서 사죄를 하라고 재삼 당부하였다.   이튿날 이른아침, 류방은 백여명의 사람만 데리고 항우를 찿아가서 사죄를 하였다. 그는 십분 성근하고도 가련한 상을 지으며 “당초에 장군과 함께 진조를 진공할때 당신께서는 하북에서 싸우고 나는 하남에서 싸웠지요. 그런데 생각밖으로 내가 먼저 관중으로 들어가 함양을 점령하고 오늘 장군을 뵙게 되였습니다. 듣기로는 소인들이 장군의 면전에서 요언으로 중상모욕하며 장군과 나의 관계를 리간도발한다고 합니다. 장군께서 이런요언을 믿지마시기를 바랍니다.”하고 절절히 말하였다.   항우는 워낙 곧은배기성미인지라 류방이 이리도 겸허하니 대뜸 노기가 사라졌다. 그는 즉시 어조를 바꾸며  아무생각도 없이 “이 모든게 당신의 그 조무상이란 자가 사람을 보내여 와서 한 말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어찌 당신에게 성을 내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연회를 배설하고 류방을 초대하면서 화해를 표시하였다.   군사 범증은 항우에게 연신 눈치를 보내면서 빨리 류방을 죽이라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못본체 하면서 류방과 더욱 다정해 하였다. 다급해 난 범증은 밖으로 나가 항우의 동생 항장을 불러 분부하였다. “항왕이 마음이 모질지 못하여 류방을 죽이려고 결심을 못한다. 네가 술을 권하는척 하면서 칼춤으로 흥을 돋구다가 기회를 봐서 류방을 죽여라. 그러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그의 손에 죽는다.”   항장은 범증의 분부대로 류방에게 술을 권한후 주흥을 돋군다며 시퍼런 칼을 빼들고 춤을 추었다. 항장이 춤을추며 접근해 오자 류방은 사색이 되여 식은땀을 흘렸다. 이때, 사태가 신상치 않음을 즉각 알아챈 항백은 칼춤은 둘이 춰야 멋있다고 하면서 보검을 빼들고 나섯다. 그는 자기의 몸으로 류방을 엄호하며 항장에게 손쓸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렇게 사태가 매우 위급해 가자 장량은 밖으로 나가 번쾌를 불렀다. “지금 연회장의 분위기가 신통치 않다. 항장이 패공에게 손을 쓰려고 한다.” 장량의 말을 듣자마자 번쾌는 벌떡 일어나 칼과 방패를 들고 위병들이 막는것을 밀어 던지며 연회청으로 뛰여들었다. 번쾌가 뛰여들자 항우는 무척 긴장해 하며 칼을 잡고 뭘하는 사람인가고  물었다. 이에 장량이 패공의 차부인데 배가 고픈모양이라고 대답하였다.   항우는 그런가고 하면서 번쾌에게 술 한되와 돼지다리를 주라고 하였다. 번쾌는 단숨에 술 한되를 다 마이고 생돼지다리를 방패에 놓고 썰어 먹어댔다. 항우가 재미 있어하며 술을 더 먹겠는가고 물으니 번쾌는 나는 죽는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데 술먹는것을 두려워 하겠는가고 대답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년에 진왕은 호랑이처럼 혹독하여 사람을 하나라도 더 죽이려 하고 형벌을 하나라도 더 호되게 하려고 발광을 했다. 하여 천하의 사람들이 그를 뒤엎었다. 초회왕이 제후들과 약속하기를 누가 먼저 진군을 격파하고 함양을 점령하면 누가 곧 왕이 된다고 하였다. 지금 패공은 먼저 함양을 점령하였으나 아무런 물건도 가지지 않고 궁실의 창고를 차봉하고 패상에 나와 주둔하면서 대왕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이렇게 로고와 공이 큰 사람을 대왕은 상을 봉해줄대신에 소인들의 리간도발을 믿고 오히려 죽이려고 하니 이게 그래 진왕을 따라배우는게 아닌가?! 나는 대왕께서 이러지 말아야 한다고 인정한다.” 고 통책하니 항우는 대답을 못하고 연신 그저 “앉으라. 앉으라.”고 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완화되자 장량과 번쾌는 류방곁에 앉고 항백도 제자리로 갔다. 항장은 보검을 걷우고 항우곁에 가서 섯다.   비로서 진정한 류방은 변소로 가는척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눈치를 채고 장량과 번쾌도 따라나갔다. 그들은 즉시 패상으로 도망쳤다. 류방은 항우가 추격할가봐 수레를 버리고 지름오솔길로 말을 타고 달렸다. 번쾌, 하후영, 근강, 기신 등 4명만 따랐다. 장량은 퍽 지난후 연회청으로 가서 류방의 부탁대로 항우에게는 백벽 한쌍, 범증에게는 옥술잔 한쌍을 헌증하였다. 그리고 류방은 원래 술을 잘못하는데, 취하여 실례하고 돌아갔다고 변명을 늘여놓았다. 항우는 백벽을 물끄럼히 바라보면서 별 말이 없었다. 범증은 옥술잔을 땅바닥에 팽개치고 보검으로 부셔버린후 길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하아! 항왕은 너무도 유약하다. 금후 항왕과 천하를 쟁탈할 사람은 류방뿐이다. 우리는 그에게 잡힐날을 기다리자.” 범증의 이 예언은 훗날 력사사실로 되였다.   중국력사에서 홍문연과 같은 연회는 많지않다. 그러나 지금 그 변종은 그야말로 기수부지다. 연회는 가장 낮은차원의 일상사고 회뢰방식에는 각종물건, 지어는  고급 하이야, 별장, 그리고 류학부조, 돈봉투, 은행저금카드… 자기의 리익을 위하여서는 못하는 짓이 없다. 회뢰, 수뢰죄로 꺼꾸러 지는 일이 비일비재다. 지금 이짓거리가 죽움을 재촉하는 것임을! 어찌하여 소름이 돋는 홍문연을 잊었는가! 홍문연은 천만다행으로 참극을 피했지만, 지금의 부정부패짓거리는 패가망신을 피할수 없다.                                                                                                                   22.3.
171    진왕조의 멸망 댓글:  조회:292  추천:0  2022-08-15
               수필                                                   진왕조의 멸망                                                                                                                   회령   중국을 통일한후 진시황은 북으로는 장성을 축조하고 남으로는 백월을 정벌하고 국내로는 아방궁과 려산묘, 지하궁전을 건축하며… 백성들을 혹독하게 압박착취 하였다. 진왕조에 대한 원성은 하늘땅을 진동하였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다섯번째로 전국시찰을 나섯다. 수행으로는 제일 귀여워 하는 막내아들 호해와 승상 리사, 차대관리 조고 등으로 호호당당 순찰을 떠났다. 이것은 진시황의 마지막 길이였다. 길에서 그는 더위를 먹고 50세에 사구평대에서 객사를 하고 말았다. 그는 자기가 살수없음을 알고 조고더러 큰아들이며 공자인 부소에게 편지를 써서 즉시 달려와 왕위를 계승하며 후사처리를 하라고 당부하였다.   조고는 편지를 보내지 않고 호해와 짜고들어 리사를 핌박하여 가짜유서를 작성하여 부소에게 보냈다. 가짜유서에는 공자 부소와 대장 몽첩을 자살하라고 하고 호해가 왕위를 계승한다고 하였다. 부소는 충후하고 로실한 사람이라 유서의 진가도 살피지 않고 비통을 참으며 자살하였다. 몽첩은 감옥에 넣었다가 죽였다.   부소가 죽자 호해는 조고와 리사의 수단으로 진2세로 황제가 되긴 되였으나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호해는 어리석기도 하지만 지식이 없고 악독하기 짝이없었다. 호해는 주로 조고에게 의지하며 신변에서 자기에게 궤책을 대 주도록 하였다. 호해는 형제자매를 몽땅 죽이고 자기를 조금이라도 반대하거나 불공스러운 신하들은 다 죽이거나 감옥이 가두고 파직을 시켰다. 지어는 리사에게도 농민기의군과 연통하며 왕위를 찬탈하려고 한다는 죄명을 씌워 전가족을 멸살하였다. 연후, 조고의 공로가 크다면서 승상으로 승임시켰다.   호해는 진시황의 좋은점은 한가지도 따라배우지 않고 나쁜것만은 몽땅 계승하고 더욱 발휘했다. 그는 대신들과 말하기를 “내가 황제로 된것은 나라 전체가 나의 향락을 위하게 하기 위한것이다. 내가 귀로 들은것, 눈으로 본것, 마음속에 생각한것들은 다 내것이 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진시황릉묘와 지하궁전을 대대적으로 확건하고 많은사람을 순장했다. 또 아방궁을 더욱 화려하게 확대수건하였다. 호해의 폭압으로 백성들은 더는 살아나갈수 없었다. 백성들은 오직 반항할수밖에 없었다.   소위 황제라는 호해는 밤낮 황음무치한 생활에 빠져서 정사는 근본 관계치 않았다. 나라의 모든권력은 조고의 한손에 장악되였다. 조고는 자기에게 아첨하고 순종하는 대신들만 남기고 조금이라도 틀리는 대신들은 죽이고 가두고 쫓아버렸다. 하여 그가 매화사슴을 끌고다니며 말이라고 하니 모든 대신들이 따라서 말이라고 하는 국면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이것이 력사적으로 유명한 사슴을 말이라고 한 이야기가 생기게 하였다.   황위를 찬탈할 조건이 다 성숙되였음을 인정한 조고는 사위 염락과 동생 조성에게 군사 1000명을 주어 호해와 그측근들을 몽땅 죽이게 하였다. 그때 호해의 나이는 겨우 23살이였다. 조고는 진2세 호해황제를 죽이긴 했지만 감히 황제로는 즉위를 하지못하고 호해의 조카 자영을 끌어다가 괴뢰황제로 등극시켰다. 그러나 자영은 조고의 괴뢰로는 되고싶지 않아 조고를 궁전에 꾀여다가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의 3족을 멸살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전국각지에서 농민봉기가 료원의 불길처럼 타 올랐다. “제왕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이 구호는 그때 가장 우렁찬 혁명적 구호였다.   기원전 209년 7월, 즉 호해가 황위네 오른 그해에 중국력사에서 처음으로 대규모의 농민기의가 폭발했다. 령도자는 진승과 오광이다. 이 농민기의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다 알기에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그해, 함양의 지방관청에서는 군관 2명을 파견하여 900명의 민부를 어양수비에 데려가게 하였다. 때는 7월, 혹독한 무더위에 우기였다. 민부대오는 밤낮 행진했다. 규정한 시간을 어기면 몽땅 죽이기 때문에 그들은 악전고투를 하며 전진했다. 대오가 근현의 대택향에 이르자 마침 대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억지로 전진했는데 앞의 도로는 몽땅 물속에 잠겨 더는 한발작도 나갈수 없었다. 이젠 죽는길밖에 없는 민부들은 군관을 죽이고 진승을 왕으로 기의를 단행했다. 그들은 “진승왕”이라는 큰깃발을 만들어 걸고 군관의 머리를 베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진왕조를 소멸하려고 맹세하였다. 제사에서 진승은 자기를 장군으로 오광을 도위로 한다고 선포했다. 기이군은 진나라 수도인 함양으로 진발했다. 기의군이 이르는 곳마다에서 참군열조가 일어나고 진나라 지방정부는 무너졌다. 한편 각지에서도 기의군이 일어나고 멸망당했던 제후국들이 다시 독립을 선포하며 나라기치를 내 들기 시작했다. 진나라는 풍전등화로 뒤죽박죽, 혼란상태로 되여버렸다.   함양에 이르자 진승은 대장 주문을 시켜 함양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주문은 용맹하고 군사도 좀 알았지만 관군의 적수로는 되지못하고 장한에게 패하여 결국은 핍박에 의해 자살하였다. 오광이 거느린 대오도 형양에서 실패하였는데 오광은 부하 전장이 가짜로 진승의 명령이라며 살해하였다. 진승은 군사가 얼마남지않아 동남방향으로 철퇴를 하였다. 그러나 너무도 뜻밖에 차부 장가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이렇게 이 기의군은 실패하였다.   독립을 웨치며 일떠선 제후국들로는 초, 제, 위, 조, 연 등 나라들이 였는데 초나라만은 진나라를 소멸하려고 함양으로 전진하고 다른나라들은 자기의 옛 고장을 찿아 지키며 만족해 하였다. 진나라 수도인 함양으로 전진한 초나라군사는 항우와 류방이 령솔하였다. 당시 초나라군사는 일부 제후국들과 농민기의군들이 의탁해 왔기에 세력이 강대하였다. 제후국기치를 든 한나라 류방도 초나라 항우에게로 얼마전에 의탁해 왔다. 진나라 함양으로 전진할때 항우는 하북을 거쳐 나가며 진나라 군사들과 혈전을 하며 나가고 류방은 하남을 거쳐 전진하면서 별로 크게 싸우지 않고 함양을 점령하고 진나라를 소멸하였다. 진나라2세인 자영은 투항하고 크게 불편없이 살았다.   뒤늦게 항우의 40만 대부대가 함양에 이르자 약세인 류방은 뒷날을 도모하여 함양에서 물러나고 항우가 입성하였다. 항우는 입성하자 진나라황제 자영과 귀족 800여명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아방궁을 소각해 버렸는데 불길은 3개월이나 지속되였다. 관중사람들은 항우를 류방보다 인의가 없고 도량이 크지못하다고 하였다. 민심은 류방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항우는 분봉제를 본따서 18개제후국을 만들고 자기를 서초패왕이라고 하며 제후들을 호령하였다. 그는 류방에게 파촉과 한중의 산골을 조금 떼여주며 한왕이라고 봉해주었다. 이때로부터 초, 한 대결의 력사가 시작되였다. 무고한 백성들은 또 도탄속에서 헤매게 되였다.   진왕조는 진왕 영정이 기원전 221년에 무력으로 관동의 6국을 통일하고 건립한후 기원전 206년 류방이 함양을 점령하면서 진왕조2세 자영이 투항으로 막을내리고 멸망되였다. (2세, 15년.) 부정부패는 결국 진나라를 망국으로 끌어갔든 것이다…                                                                                                                  22. 3.
170    진시황과 분서갱유 댓글:  조회:262  추천:0  2022-08-05
      수필                                            진시황과 분서갱유                                                                                                                   회령   기원전 213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후 9년철이 되는해다. 어느날 진시황은 함양궁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전해에 흉노 등 소수민족을 정복한 승리를 경축하였다. 연회에는 조정의 문무백관과 학술사상상 이름있고 지위가 있는 박사 (학자) 70명이 참석하였다.   연회에서 박사들의 령수격인 주청신이 진시황의 공덕을 하늘높히 찬양하며 말하였다. 옛날의 진나라 령토는 천리도 못되였는데 페하의 영명으로 6국을 소멸하고 중원을 통일했고 부족들을 정복하여 무릇 해가 비추는 곳은 다 페하의 통치에 복종한다. 페하는 분봉제를 페지하고 군현제를 설립하였는데 이로부터 전쟁의 피해를 없애고 천하만민이 안락한 나날을 보내게 되였다 이런 태평성세는 대대로 내려가며 천추만세가 될것이다. 페하의 위망과 공덕은 상고시절의 3황5제도 미치지 못한다….   진시황은 주청신의 찬송에 마음이 무척 흐믓하여 연신 말을 잘했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주청신의 이 찬송은 구사상이 가득한 일부 박사들의 격분을 자아냈다.  순우월이라는 박사는 급히 진시황에게로 다가가 내가 듣기로는 은 주 두대의 왕권은 천년을 전했다고 한다. 그들은 분봉제로 공신들을 제후로 하고 뭇별들이 달을 받들듯 조정을 받들게 하였다. 분봉제는 원래 이렇게 좋은제도다. 만약시 왕위를 찬탈하려는 란신적자가 나타나면 누가 나서서 왕위를 지킬것인가? 선인들의 말씀에 의하면 옛규례대로 하지않으면 오래갈수 없다고 한다. 지금 저 주청신이 페하를 잔뜩 춰 올리는데 이것은 페하더러 더 착오를 범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저사람이 충신이 아니다. 페하께서는 분봉제를 다시 고려하는것이 좋겠다. 고 말하였다.   순우월이 또다시 분봉제를 들먹이자 진시황은 시끄럽고 귀찮아서 그럼, 분봉제가 좋은지 군현제가 좋은지 한번 의론해 보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승상 리사가 결연히 나서서 순우월의 류론을 반박했다. 그는 진시황에게 말하기를 지금은 옛날과 시대가 다르다. 상황은 시대에 따라 변했다. 우리는 절대로 옛날의 제도를 가져다 오늘에 실시할수없다. 오늘 이미 천하가 안정되고 법령이 통일되고 백성들이 생산에 열중하고 있는데, 독서인들은 응당 현행 법령과 제도를 노력하여 학습하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일부의 독서인들은 낡아빠진 옛것들을 죽기로 끌어안고 고서의 기재에 근거해서 당전의 정치제도를 공격하고 있다. 이는 페하의 통치에 매우 불리하므로 엄격히 금지해야 한다. 건의하건대 사관에 수장한 도서들에서 “시경”,  “상서”, 백가언론 등 서적들을 일률로 태워버려 혼란한 사상근원을 두절해야 한다.   진시황의 생각에도 상황은 확실히 이러했다. 만약 낡은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구제도를 선양하게 내버려 둔다면 통치에 크게 방해가 될것이다. 그는 리사의 건의대로 분서(焚書)를 명령하였다.   분서의 구체적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의약, 점복(占卜), 농경, 식수, 진력사서 외에는 관가든 민간이든 “시경”, “상서”, 제자백가의 서적은 30일 이내로 지방관청에 바쳐  일률로 소각한다. 금후 고서의 내용을 담론하면 사형한다. 옛것으로 당전의 정치를 공격하면 전가족을 사형한다. 알면서 고발하지 않으면 사형한다. 명령을 받은후 30일내에 분서를 하지않았을 때에는 얼굴에 자자를 새기고 장성건축공정에 가서 4년을 일한다.   진시황의 이 명령으로 하여 허다한 력사적 기록과 학술사상이 없어졌다. 이는 중국의 다원화문화에 대한 한차례의 훼멸이며 겁탈이였다. 진시황의 이 잔폭한 행의에 대하여 구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말할것도 없고 고관후록을 먹는 일부 관리들도 지나치다고 후론을 했다.   분서 이듬해, 즉 기원전 212년 진시황의 불사약을 구하는 책임을 맡은 후생과 로생은 진시황을 저주하며 자금을 가지고 도망쳤다. 그들은 진시황과 같은 이런 폭군을 위하여 불사약을 구하느라 로고를 바칠 필요가 없다고 인정했든 것이다. 진시황은 후생과 로생이 도망친데 대하여, 그리고 독서인들의 배후여론에 대하여 극도로 분개하며 그들을 호되게 다스리기로 결정했다.   진시황은 어사대부에게 명령하여 배후에서 비방하며 여론을 이르키는 독서인들을 사출하게 하였다. 잡혀온 사람들은 심문과 잔혹한 형벌을 못이겨 다른사람을 물어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련루되여 잡힌 사람이 무려 460명이 되였다. 이들에 대하여 진시황은 세심한 조사를 하지도 않고 대노하여 함양성밖에 큰구덩이를 파고 몽땅 생매장을 해 버렸다. 사실은 진시황을 반대한 사람은 얼마되지 않고 대다수는 억울한 죽음을 당했든 것이다. 이것이 력사에 기록되여 지금도 말하는 “갱유”라는 참혹한 사건이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대단한 황제다. 그러나 동시에 인민들에게 잔폭한 통치를 실시한 황제다. 그의 “분서갱유”는 사상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제를 수호하려는 목적에서 진행된 정책이였지만 너무도 과분했고 잔폭했다. “분서”는 진 이전의 쌓아온 문화를 일거에 훼멸했고 “갱유”는 허다한 정신재부의 창조자들을 소멸했다. “분서갱유”후로부터 진조정에는 진정으로 학문이 있는 사람이 대대적으로 없어지고 조고와 같은 전문 아첨과 기만을 일삼는 간신들이 진시황신변에서 중요인물로 되였다.   진시황은 백성들을 혹독하게 통치하면서 부족을 정벌하고 아방궁, 릉원, 장성축조에 열을 내고 3000궁녀를 두고 불로초, 불사약 찿기등 허튼짓을 하면서 부화사치와 향락을 추구하였다. 진나라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22. 3.
169    조식선생의 칠보시 댓글:  조회:304  추천:0  2022-07-22
         수필                                                조식선생의 칠보시                                                                                                                     회령   자두연두기(煮豆燃豆其 콩짚을 때며 콩을 삶으니) 두재부중읍(豆在釜中泣 콩은 가마안에서 우는구나) 본시동근생(本是同根生 본래는 한뿌리에서 살았건만) 상전하태급?(相煎何太急 서로 지지기가 이리도 급한가?)   만고의 절창이라고 할 이 시는(오언절귀. 한시) 삼국시기 조조의 둘째아들인 조식이 죽음을 앞에 놓고 지은것이다. 일곱 발자국을 걸으면서 지은시라고 해서 “칠보시”라고도 한다. 그 사연은 사뭇 심각한데 현실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칠보시”사연은 중국의 삼국시기 대 정치가이며 군사가이며 문학가인 조조가 락양에서 66세를 일기로 타계한 후에 생긴 일이다.   삼국시기 초, 중기 정통(正統)이 필요하기에 위나라왕 조조는 한나라 황제 헌제를 “받들어 모시고”있었다. 그러나 조정의 대권은 두말할것없이 모두 조조가 쥐고 헌제는 허수아비였다.   조조는 위나라 왕태자로 둘째아들 조식을 생각하며 그를 몹시 귀여워 했다. 조조와 큰아들 조비, 둘째아들 조식은 문학에서 재능이 뛰여나서 “3조”라고 하지만 그중에서 조식이 더욱 우수했다. 조식의 총명과 재능을 감탄하는 조조는 조식을 왕태자로 결정하고 싶었으나 일부 대신들의 반대로 결단을 하지못하고 더 관찰과 고려를 하기로 하였다. 소절에는 예민하고 눈치를 잘 보는 조비는 왕태자의 지위를 빼앗길가봐 늘 조식을 경계하며 질투하였다.   어느한번 조조가 전선으로 나가는데 두 아들은 그를 전송하게 되였다. 헤여질때 조식은 아버지의 공덕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읊었다. 조조는 물론 십분 즐거워 하였다. 이때, 어떤 대신이 조비의 귀에대고 가만히 말하기를 “너는 몹시 상심하듯 눈물을 씻는 시늉만 하여라.”고 하였다. 조비는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신통히도 고대로 하였다. 이에 크게 감동한 조조는 자기도 눈물을 떨궜다. 조조는 조비가 비록 문재에서는 조식보다 못하지만 로실하고 자기에게 감정이 깊다고 느끼였다. 이때로부터 조조의 조식에 대한 총애는 식어지기 시작했다.   조식은 소절에 대범한 사람이였다. 한번은 왕궁에서 마차를 타고 밖으로 나갔는데 이것은 규례에 위반되는 행동이였다. 대노한 조조는 문지기를 죽여버렸다. 얼마후 조조는 조식에게 군사를 주어 출병하게 하였다. 출병전 조조는 조식을 불러 몇가지 당부를 하려고 하였다. 이소식을 들은 조비는 축하를 한다면서 먼저 술을 보내고 잇따라 달려가서 조식과 함께 술을 마이였다. 조조가 사람을 보내여 조식을 부를때는 조식이 만취하여 일어나지도 못했다. 조조는 출병을 취소하고 조식에 대한 미련을 철저히 포기하게 되였다.   조비는 소원대로 왕태자가 되고 조식은 산동 림치후로 되였다. 조조가 죽은후 위왕에 등극한 조비는 여전히 조식을 미워하고 질투하였다.   어느날, 어떤 대신이 조비에게 조식이 경상적으로 술만 마이면 왕을 욕하고 지어는 왕이 보낸 사자를 가두기까지 한다고 밀고를 하였다. 이에 대노한 위나라왕 조비는 즉시 군사를 림치에 보내여 림치후인 동생 조식을 붙잡아 오고 사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 변태후는 조비에게 친형제인데 관대히 처리하라고 권고하였다. 조비는 어머니 말씀을 무시할수도 없거니와 사소한 일로 동생을 죽인다면 자기체면이 떨어지기에 조식의 림치후 작위를 취소하고 낮은급의 작위를 주었다. 그먼저, 조비는 조식에게 호령하기를 “네가 시를 잘 짛는다고 거들렁 거리는데, 오늘 일곱 발자국 안에 시 한수를 지어라. 그러지 못하면 모가지를 쳐 버릴거다!” 하고 거짓으름장을 놓았다. 이리하여 절창 “칠보시”가 탄생했다.   훗날, 조비는 허수아비 한헌제를 호령하여 자기에게 자원적으로 황제위를 선양하는 연극을 꾸며냈다. 그는 위조를 건립하고 황제등극식을 굉장히 하였다. 이 조비가 곧 위문제다. 하지만, 후세에 조비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어도 “칠보시”와 함께 조식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늘도 있다. 권세는 잠간이고 예술은 영원하다…                                                                                                                     22.4.
168    해서의 초심 댓글:  조회:274  추천:1  2022-07-19
      잡문                                                    해서의 초심                                                                                                             회령   온갖 부정부패가 란무하는 때에 정부에 “죽는것을 두려워하지않으며 돈을 탐내지 않는 간부”가 있었다. 누군가? 바로 중국에서 제일 유명한 간부 해서다. 해서는 근정애민(勤政愛民)한 간부로서 인민들을 위하여 말을하고 주장을 세웠으며 누구를 떠받들며 아첨하지 않았고 과감히 사악한 기풍과 맞섯다. 그는 령도든 동사든 친척 친우 그누구와도 정직하게 바른말을 하였다.   해서는 회족으로서 해남도 량산 사람이다. 네살때 아버지가 죽고 집은 몹시 가난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사씨는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해서를 공부시켰다.   해서는 꼭 쓸모있는 사람으로 되겠다고 맹세를 다지며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그는 앞으로 국가의 간부가 되면 꼭 “언행이 일치하며, 자사자리하지 않으며, 큰소리 빈소리를 하지 않으며, 상급에 아첨하지 않으며, 다른사람을 질투하지 않으며, 자기의 결함을 감추지 않으며, 탐오절도를 하지 않으며, 인민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것이다.”고 맹세를 하였다. 이것은 해서의 초심이였다. 사실이 증명하는봐 해서는 이 초심을 일생동안 실천하였다.   해서가 현급공무원 시험에 합격되여 복건성 남평현에 가서 어느학교의 교장을 할때다. 당시 상급에서는 자주 시찰을 내려왔다. 시찰간부가 오면 다른교장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하였지만 해서는 공수로 읍만 하였다. 그어떤급의 시찰간부가 오던 해서는 읍만 하였다. 하여 어떤상급들은 해서의 표현에 대하여 불만이 컸지만 어쩔수는 없었다. 해서는 여긴 글을 가르치는 학교지 정부청사가 아니기에 절을 올리는 례절은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정부기관에 가서는 상급에게 절인사를 올려야 했다.)   4년후 해서는 순안현장으로 승진하였다. 순안현은 산골로서 몹시 가난한 현이였다. 하지만 국가의 세금과 부역은 매우 과중하고 거기에 지방 탐관오리들의 갈취마저 극심하여 인민들은 그야말로 도탄속에서 기진맥진 하였다. 해서는 이런상황에 몹시 가슴아파하면서 세심하고도 엄격한 조사를 거쳐 일체 비원칙적인 것들을 일률로 철저히 취소하였다. 그리고 간부들이 신봉외에 일전이라도 비법수입이 있으면 엄격히 처리하였다. 동시에 상급의 지시라도 원칙에 어긋나는것이기만 하면 견결히 거부하였다.   순안에서 그는 두가지의 크게 민심을 얻는 통쾌한 일을 하였다.   한가지일은 호씨 대 공자를 질책한 일이다. 호공자는 절강성총독 호종헌의 아들이다. 호종헌은 대 권상 엄숭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다. 엄숭이 뒷심이기에 호종헌은 못하는 일이 없었다. 호공자는 이런 배경이 있기에 무엇이나 자기마음대로 하였다. 한번은 그가 순안현을 지나가게 되였는데 초대소의 관리원이 자기한테 접대를 잘하지 않았다고, 졸개들을 시켜 그를 거꾸로 달아매고 호된매질을 하였다. 소식을 들은 해서는 즉시 달려가서 조사를 하였다. 그는 호공자를 호되게 질책하는 한편 졸개들을 잡아갇우고 호공자의 수천량의 은전을 몰수하였다. 연후, 호종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어르신님께서 지방시찰시 지시하시옵기를 주, 현들에서는 꼭 근검절약을 해야하며 환영 환송을 하거나 떠벌려 랑비해서는 않된다. 고 말씀 하셧습니다. 지금 순안에 호가라는 사람이 왔는데, 어르신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면서 초대소 공작인원을 모진 매질을 하며 초대를 바로하지 않았다고 질책하기에 조사를 해보니 이자의 소행은 완전히 어르신님의 지시에 어긋나는봐 틀림없는 가짜라고 판정됩니다. 이에 엄하게 징벌하였사오니 어르신님께옵서 마음놓으십시요.” 해서는 호종헌의 큰소리, 빈소리를 빌미로 그에게 호되게 한방 먹인것이다. 호종헌은 속은 뒤집혀 부글거렸으나 뭐라고 떠들수는 없고 벙어리 랭가슴만 앓았다.   또 한가지 일은 다음과 같다. 중앙도찰원 수장인 언무경의 행차때다. 언무경은 조정대신일 뿐만아니라 권상 엄숭의 양아들이다. 언무경은 탐오수뢰는 말할것도 없고 극도로 사치하고 횡포오만 하였다. 어느한번, 명 세종황제가 그를 흠차대신 신분으로 파견하여 염정(소금 상황)을 총 시찰하게 하였다. 언무경은 처첩과 많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시찰을 떠났다. 그의 처는 꽃가마를 탔는데 12명의 녀자가 가마를 메였다. 행차는 호호탕탕, 굉장하고 위세가 등등하였다. 행차가 지나가는 곳 마다에서는 주, 현관원들이 흠차대신 나으리께 죄를짛지않고 잘 보이기 위하여 있는힘껏 초대를 하였고 떠나갈때에는 대량의 금전과 재물을 례물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인민들에게 풍기였다.   언무경이 순찰을 마치고 북경으로 돌아갈때다. 마침 엄주부를 지나게 되였는데 순안현은 엄주부에 속하였다. 엄주부 지부는 각현에 통지를 내여 흠차대신을 각별히 륭중하게 잘 영, 송(迎送)하라고 하였다. 조금이라도 소홀했거나 태만했을 경우 엄중히 처리한다고 하였다. 해서는 민페를 주지않기 위하여 아무런 준비도 하지않았다. 그는 언무경에게 다음과 같은 청시보고를 보냈다. “비천한 직무인 제가 어르신님의 포고를 보았는데, 어르신님께옵서는 영,송을 간단히 하라고 하셧고 어르신님께옵서 지나가는 곳마다에서는 극히 호화롭게, 륭중하게 영송을 했다는데, 우리순안현은 십분 가난한 고장이여서 어떻게 해야하겠는지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르신님께옵서 가르켜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언무경은 대단히 불쾌했지만 자기가 낸 포고를 위반할수는 없고, 이제 해서의 처사를 보면서 흠집을 잡으면 호되게 결산하리라 마음 먹었다.   포고대로 하라는 언무경의 회시를 받은 해서는 하루먼저 선발대로 온 간부들이 흠차대신을 등대고 날치는 것을 엄격히 제지하고 곤장을 때리였다. 흠차대신이 배로 순안에 이르자 해서는 현의 간부 몇을 데리고 마중을 했다. 흠차대신의 일행은 큰배가 20여척이였지만, 영접하는 일행은 너무도 초라했다. 숙식도 극히 간단하고 초라했다. 이런대접을 언무경은 처음으로 당했다. 분통은 상투밑까지 터져올랐으나 트집꺼리가 없으니 발작할수는 없었다. 떠나는 날에는 숱한 인민이 동원되여 배를 끌어줘야 했지만 농망계절이여서 해서는 한명도 동원하지 않았다. 그는 현의 간부 몇을 데리고 나가서 직접 배를 끌어줬다. 하여 언무경이 아주 난처하게 하였다.   언무경은 앙앙불락해서 엄주부에 들르지도 않고 다른길로 북경으로 돌아갔다. 전후사연을 다 알게된 엄주부 지사는 안절부절 못했다. 그는 해서는 말할것도 없고 자기도 이젠 벼락을 맞게 되였다고 락심천만이였다. 지사는 해서를 불러다 줄욕을 퍼부었지만 해서는 듣는체도 하지않았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로 해서를 닥달해봤자 아무 쓸모도 없고, 지사는 어떻게 하든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궁여지책으로 심복을 파견하여 례물과 돈을 가지고 북경에 가서 먹이는 한편 사태를 렴탐하였다. 썩 후에야 알게 되였지만, 언무경은 해서가 괘씸하기는 짝이 없었으나 흠집을 잡을데가 없고 또 자기가 이번행차에서 뢰물을 너무도 지나치게 받았는데 그것을 해서가 적발할가봐 우려되여 그를 건드리지 않았고 세종황제에게 고자질도 하지않았던 것이다.   후에 해서는 더욱 승진하여 북경에 가서 호부주사(중앙의 한개 기관.) 사업을 하게 되였다. 그는 여기서 황제 세종이 미신짓거리에 빠져 정사는 뒷전이고 대신들은 황제의 비위에 맞춰 돌면서 나라와 인민의 질고는 전혀 관계치 않는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황제에게 반영 비평한 어사 양작을 8년이나 감옥에 갇우고 목숨까지 잃을번 했다는 사실, 그로부터 20여년 황제에게 바른말을 간하는 신하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해서는 한심하고 통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나라의 실정을 황제에게 실사구시적으로 반영하는 보고재료를 작성하였다. 해서는 진심으로, 간절히 세종황제가 회과자신하며 나라를 잘 다스릴것을 바랐다. 이에 많은 벗들이 그러지 말라고, 이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라며 그를 극구 만류하였으나 해서는 듣지않았다. 그는 벗들에게 말하기를 “국가간부로서 황제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다면 나라와 인민이 어떻게 되겠는가?!”고 하였다.   해서는 정부에서 일하는 동향 간부인 왕씨에게 20량의 은전을 주면서 “내가 죽으면 이돈으로 나를 고향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집에서 일하는 복무원에게 “관을 사온후 너는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나의 어머니를 잘 위안해 달라.”고 당부했다. 말을 마친후 해서는 곧바로 통정사(재료를 황제에게 전달하는 기관)에 가서 재료를 넘겨주고 조방(심문실)에 가서 처벌을 기다렸다.   명 황제 세종은 해서가 올린 재료를 보고 격분을 참을수 없었다. 재료에는 “목전 조정에는 황제의 정사가 바르지 못하고 신하가 직책을 똑똑히 알지못한다. 황제께서 20여년 조정을 관계치 않아 법규가 물러지고 관리들이 나빠지고 재정이 붕괴되고 나라가 빈곤해지고 인민들이 가난해 지었다. 가난하기가 아무것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황제는 태자의 성장을 관계치 않아서 부자의 정이 결핍하다. 그리고 다른사람의 비방과 자신의 의심, 추측으로 신하들을 죽이거나 욕 보이는데, 이것은 군신의 정이 결핍한 탓이다. 또 장기간 서원에 거주하면서 신을 믿고 미신놀이를 하고 약을 먹으며 장생불사를 추구하면서 궁에는 들지않고, 이것은 부부의 정이 없기 때문이다. 이모든것은 신선과 귀신만 믿기 때문이다… 황상의 착오는 참으로 많다. 페하께서 완연히 심각하게 느끼고 철저히 개정하기를 진심으로 간청한다.”라고 하였다. 명 세종은 재료를 땅바닥에 힘껏 팽개치고 책상을 뚜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빨리가서 해서를 잡아오라! 이놈이  도망치지 못하게!” “만세님께 아룁니다. 해서는 근본 도망치려고 안합니다. 그는 재료를 올리기 전에 이미 관을 삿고 시종들을 다 가버리게 했답니다. 지금 심문실에서 처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명 세종은 한식경이나 멍해서 아무말도 없었다. 생각해 보니 해서의 말이 틀린건 아니였다. 그는 자기의 품위를 지키기 위하여 해서를 죽이지도 않았고 감옥에 잡아넣지도 않았고 곤장을 때리지도 않았다. 오직 언사가 불경하다고 트집을 잡고 파직시켜 버렸다. 해서는 곧바로 고향에 가 버렸다.   중국력사에서 해서와 같은 관원은 극히 매우 적다. (고대 하나라 국왕 하걸시절에 하걸의 숙부인 비간이 조카 하걸에게 여러번 간하여 심장을 도려내는 죽임을 당했다. 현대에 와서 팽덕회원수(공화국 국방부장)를 해서와 비겨 론한적이 있다.)                                                                                                              2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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