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huiling 블로그홈 | 로그인
회령
<< 4월 2024 >>
 123456
78910111213
14151617181920
21222324252627
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문학 -> 발표된 작품 -> 수필

나의카테고리 : 작품

아버지의 유산
2016년 10월 22일 16시 37분  조회:2127  추천:1  작성자: 회령
       수필
                                                                           아버지의 유산
                                                                                                                    회령
    제자랑을 하자는건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자녀들 교육, 신칙을 한시도 등한히 하지 않는다. 천하의 자식 가진 부모는 다 그럴것이다. 나는 거창하게 그 무슨 당과 인민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자녀들을 경각성 높히 교육, 신칙한것이 아니고 나를 위하여 교육, 신칙한다.

    부정부패를 호되게 족치면서 륙속 범죄자들을 잡아내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인민들은 통쾌해서 갈채를 보낸다. 나도 물론 그중의 하나다. 통쾌하기 그지 없다. 호랑이든 파리든 몽땅 잡아내라! 억세게 척결하라!... 인민들은 당을 응원한다.

    그러면서, 또 다른 한면으로는 그들의 친인들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럴때면 착잡한 마음을 금할수 없다. 무고한(관련이 없는)그들, 친인들의 심정이 어떨가?... 모르긴 해도 아마 감고신염산 오미가 다 괴여 오를 것이다… 잘나갈때는 가문의 영광이고 자랑이고 행복이였겠지만 계하수가 된 지금은 그야말로 개골망신이고 패가망신 랑패다. 총적으로 슬프고 유감스럽고 아쉽고 불쌍하고 쉬원섭섭하고… 대개 그럴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가긍스럽다. 아글타글 자식을 키워 나중에 저런 신세가  된다면… 얼마나 비참한 노릇인가?!...

    옳은말은 듣지않고 시키는 일은 바로하지 않고 량심을 버리고 못된 짓거리만 하여 죄진놈은 이제 법이 알아서 처리할거지만 그들 친인들에게 생각이 미치면 나의 마음은 저도 모르게 무거워 진다. 그것은 나의 자녀들도 부정부패 앞에 완전로출이 되여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아들과 며느리는 외지에서 꽤 큰 령도간부로 있고 큰딸과 사위는 당지에서 역시 시급령도강위에 있다. 막내딸은 시병원 신경내과주임이고 사위는 주둔부대 퇀급간부다. 나는 아들네와 큰딸네는 대체로 믿음을 갖고 있다. 아들과 큰딸은 아이적부터 정직하게 성장했고 지금까지 정직하게 사업하며 발전하여 왔다. 며느리와 사위도 원칙을 알며 견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온당하게 나가고 있다. 당이 간부를 엄하게 관리하며 여러가지 규정, 학습과 활동, 조사와 고찰이 수시로 있는데, 그들은 말썽을 듣은일이 없었고 모범당원, 선진령도간부로 번번히 당선되였다.

    내가 늘 조마조마하고 시름을 놓지 못하는 애물단지는 막내딸넴이다. 어릴때부터 온냐 온냐하며 응석받이로 키운것이 멋 따고 련애하고 공부안하고 줏대와 고집이 잔뜩 자라 어벌짝이 커졌다. 사위녀석도 어슷비슷하다. 고관의 품에서 귀염둥이 보배둥이로 자랐고 그 빛광덕으로  내가 보건대는 출세를 빨리 하였다. 이점이 나는 늘 탐탁치 못하다. 막내딸네는 뜨르르 잘 산다. 내앞에서 꺼리낌 없이 저들의 “부정수입물”을 자랑하고 가져오고 하여 “정치과”에 줄욕을 여러번 먹었으나, 입맛을 영 버리지 않았다. 나는 고민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렇다고 대의멸친하며 규률검사위를 찿아 갈 용기는 없고, 나는 아들과 큰딸에게 상황을 말해주고 협력을 지시하였다. 한시기 지내보니 막내딸 부부에게 개변이 있는것 같았다. 물품류는 사절하거나 값을 주고 “훙보”를 거절하고 받았던건 돌려주고 어쩔수 없는것은 규률위에 가져가고 “칭커연”도 여러번 사절했다는둥… 개변이 있는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태평가에 노들강변코노래를 부르며 공원을 흐느적거릴수는 없었다. 추울세라 더울세라… 넘어지랴 떨어지랴… 항상 자식들을 념려하게 된다. 당이 당원과 간부를 사랑하고 관심하고 념려하는 그 심정과 똑 같은 부모의 마음이다. 고민끝에 나는 한가지 조치를 연구해 내였다.

    내가 보건대, 사람이 좋게 나쁘게 변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량심에 있다.

    세상은 광천수통같이 말쑥하지만 않다. 같은세상, 같은 벼슬길에서 누구는 락마하고 누구는 활개치며 발전한다. 왜서일가?! 열가지 백가지 원인이 있지만 결국에는 그 량심하나에 달린것이다. 나는 자식들이 똑바른 량심, 명석한 량심을 소유하면 만사대길일거라고 생각을 했다. 자식들이 우수한 량심을 수립하는데는 여러면의 인소가 역활을 발휘할것이다. 그중에서 “부모의 부탁”도 큰 작용이 있을것 같았다. 락마한 관원들의 “참회록”을 보면 모두가 “당에 미안하고 부모에게 미안하다.”고 하였는데, 그들이 가장 후회하는것인즉 당과 부모의 말을 듣지않은 것이였다. 나는 “부모의 부탁”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금년설을 우리는 북경에 있는 아들집에서 쇠기로 결정했다. 세집 큰사돈님들도 동참하기로 했다. 나는 그 기회에 육필로 된 “부모의 부탁”을 자식들에게 선물로 줄 작정이다.

    나의 “부모의 부탁”은 다음과 같이 되여 있다.

    ...나의 아버지는 일자무식의 농사군이였지만 원근에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다. 너들도 기억에 있겠지만 지난세기 80년대초반까지 우리집은 힘겹게 살았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때까지 우리집은 “먹는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 그것은 아버지 어머니의 수입이(월급) 낮은데다 너들 삼남매가 한창 자라며 소비만 할 때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밥보다 약을 더 잡숴야 할 상황이고… 살림이 참으로 힘들었다. 나는 17살에 중전학교로 갈때까지(경제난으로 고중은 갈수 없었다.) 팬티란걸 몰랐고 운동화를 한컬레도 만져보지 못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맨발이고 겨울에는 짚신감발이였다. 우리집이 가난하게 산 원인은 집체분배수입이 낮고 어머니가 지병으로 앓았기 때문이다. (여북하면 생산대보조까지 받았겠는가?! 아이에게 광목바지 하나 해 입히라고.) 중전에 다닐때 나는 털모자, 장갑이며 버선, 양말 같은걸 몰랐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맨발이여도 나는 별문제였으나 체면때문에 좀 큰 운동화(발이 크겠기에.)를 제일 눅은거로 사서 아껴신고 기워신고 한컬레로 3년을, 졸업까지 하였다. 겨울에는 찌께다비(제일 눅은 로동화.), 양말이 없기에 왕바신(솜신)이 좋지만 너무 비쌌다. 손, 발, 귀까지 얼구었는데, 그때는 겨울이 악착스레 추웠다. 1학년 초겨울 반주임 윤순임선생과 동학들의 관심으로 나는 반따이(솜외투.)를 입게 되였는데 그것이 밤이면 포대기에 겹덮혀 나를 행복하게 하였다… 학교에서는 3년을 계속 한해에 한번씩 나에게 1등 조학금(보조금) 5원을 주었다!! 나는 방학, 개학때면 집과 학교사이160여리의 산길을 걸어 다녔다.(그중에서130여리는 무서운 무인산중. 어뜩새벽에 떠나서 밤중이면 목적지에 도착 함.) 1학년 첯 방학(겨울방학)때 역전에 가서 석탄부리우는 일을 하자고 하니 너무 어리고 약하다며 일을 시켜주지 않았다. 나는 여름방학이면 산에 가서 버섯, 약초부업을 하고 겨울방학이면 싸리, 든장대부업을 해서 어머니 병치료에 씼다. 나의 필기장은 몽땅 마분지고 쓰는것은 줄곧 연필이였다. 몽당연필이 되면 38보총탄알깍지에 꽂아 썼는데(탄알깍지 구멍이 신통히도 연필굵기와 꼭 맞았다.) 연필이 콩알만 해서 더 어쩔수 없을때까지 썼다. 맨물세수 빈치솔질을 했다. 이렇게 아끼고 아낀 조학금을 어머니 병치료로 드렸다. 나는 당과 인민의 신세로, 선생님과 동창들의 관심으로 150여명 졸업생에서 특등모범생으로 중전을(국가공비임) 원만히 졸업하였다. 그리고 졸업하는해 성 모범공청단원의 영예를 받아 안았다.

    나의 아버지는 말그대로 뼈빠지게, 앓지도 못하고, 소보다 더 부지런히 일하였다. 농한기인 겨울목재부업 벌목공모집이 생산대에 떨어지면 명액이 2,3명씩 내려왔으나 위험하고 힘들고 고생스럽고 벌이는(보수) 않되고… 가려는 사람이 없어서 아버지는 해마다 혼자서 그 험한곳으로 갔다. 겨울철, 일년농사로 지친 농민들이 뜨끈뜨끈한 구들에서 가마니깨나 치며 편안히 휴식할때 아버지는 설한풍이 울부짓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속산판에서, 소도 힘겨워 헐떡이는 아름들이 목재채벌을(도끼와 톱으로.) 4,5개월씩 하였다. 눈이 녹으면 집재를 (채벌한 원목을 자동차길까지 끌어내리는 일.) 할수없어 정부에서는 동기채벌을 총결하고 민부들을 하산 시켰다. 그때면 또한 일년농사가 시작된 때다. 아버지는 닭곪한마리 잡숫지도 못하고 또 농사일에 달라붙는다. 여름철농한기에는 버섯, 약초를 캐기도 하고 슬슬 일년화목도 하는데, 아버지는 다그쳐 화목을 하고는 떼목타러 갔다. 그것도 정부에서 민부를 모집해 하는 생산대의 부업이다. 몇달 떼목타기를 하고 오면 또 부지깽이도 뛰는 가을철이다. 

    생산대수입분배는 한공(10점)에 2, 30전, 어거리대풍이 들면 7,80전이 될때도 있었는데, 그런때가 30년 집체화시절에 우리생산대에서는 서너번인가? 있은것 같다. 어느때 내가 손꼽아 헤여보니 나의 아버지가 8급기술자수평으로 할줄 아는 일이 무려 28가지나 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출세”하지 못하고 심심산골벽촌에서 농사일을 한뉘 하였다. 이주자유가 없는것도 있지만 아버지는 고향과 공산당이 준 땅을 너무도 소중히 고마워 했고 집체화에 충실했고 사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밥은 주는대로 먹고 일은 굽석굽석 충성스레 하였다. 개인부업을 할 재간은 가득했으나 집체에서 반대하는 행위기에, 그리고 우리 그 고장은 장마당이란 말도 모르는 산골인데다가 사실은 장을 볼 사람도 우리집에는 없었다. 이렇다 보니 우리집은 참으로 구차했다. 동네사람들은 아버지를 보고 “저 량반은 재간이 없어서 못사는게 아니라 운수가 나빠서 못사는거야.”라고 말했다. 그들도 밥술이나 겨우 먹는 처지로서 그때사람들은 모든것을 팔자소관으로 알았다…

    첯머리에 말했지만 나의 아버지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였다. 남들이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직접 아는 근거는 여러가지가 있다. 거기서 서너가지만 말하겠다.

    어느날, 뒷집 앎닭이 우리집 뒤울안 벼짚단무지에서 알을 낳았는데 아버지가 마침 띄여보고 얼른 가 보니 닭알이 여섯개나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닭알을 바가지에 닮아 나에게 주면서 뒷집에 가져가게 하였다.

    어느해, 우리도 어쩌다가 돼지를 중돼지 남짓하게 키웠는데(어머니가 늘 앓다보니 도깨짐승치기가 잘 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또 몹시 앓아서 더 키워야 할것을 팔자고 했다. 아침후 아버지는 공소사에 가서 중돼지 남짓해도 수매하겠냐고, 병치료 때문에 팔자고… 공소사주임은 크게 마음을 써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사이 나는 근량이 더 나가라고 남들처럼 돼지죽을 있는대로 다 퍼 주었는데, 돼지는 실컷 먹고 구유에 남기기까지 하였다. 아버지는 이 상황을 보고 나를 호되게 책망하셨다. 량심없이 이게 무슨짓이냐고, 생각해서 받겠다는데… 돼지죽을 팔겠는가고… 아버지는 몹시 화를 내셨다. 그날 아버지는 나에게 “량심을 속이며 나쁜짓을 하면 어느때고 꼭 그 벌을 받게 된다고, 사람이란 량심을 지킬줄 알아야 한다.”고하였다. 아버지는 구유의 돼지죽을 말끔히 퍼 던지고 오후 보리저녘때가 다 되여서야 배가 홀쭉해진 돼지를 싣고 공소사로 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고지식하다고 욕하면서 돼지를 팔지 말라고 하였으나 아버지는 듣는체도 하지 않았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분해하는 어머니곁에 우두커니 않아서 아무말도 못했다. 속으로 생각해 보니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목재판부업, 떼목타기부업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는 눈보라 혹은 몸살로 일하지 못한 날들을 적어서 생산대대장에게 주었다. 그날의 공수는 받을수 없다는 량심이 였다. 대장은 너무도 기가 막혀 사람들과 여러번 외우며 감탄했다.

    로년에, 마을사람들은 아들 며느리가 모시자고 할때 어서 가라고 권고를 했으나 아버지는 그저 놀면서 어떻게 생산대민식을 타 먹겠냐고 하면서 한해 두해 합가를 미루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후 생산대에서는 대담하게 부업으로 참외와 수박농사를 하였다. 나의 아버지 재배기술을 믿고 벌린 항목이였다. 아버지기술에 천시 지리가 맞아서 그해 원두는 잘 되였다. 아버지와 다른 한 로인이 원두막을 보았는데, 또 이런 기막힌 일이 생길줄이야?! 그것은 아버지가 그간 두분이 잡순 원두명세서를 생산대에 바친것이다. 대장과 회계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급기야 한바탕 웃어제끼며 그럼, 아바이가 그간 모아서 마련한 원두종자값을 생산대가 지불해야 한다고… 바투 들이대니 나의 아버지가 대답하기를 “아니요. 그건 원두밭을 다루는 사람이 응당 해야 할 일이요. 원, 그런법이 어디 있소?!”라고 하더라고, 대장과 회계는 두고두고 말하였다.

    83년도이른봄 개체화가 되면서 아버지는 드디여 우리와 합가를 하였다. 그때 토지와 집체재산을 처리할때 아버지는 정책에 따라 밭한이랑, 소고삐한개도 가지지 못했다.(로동력에서 빠지는 인원이라고. 아버지는 불평한마디 없었다.) 대신, 집과 가장집물을 두루 처리하여 생산대 빚을 갚았는데 그러고도 233원의 빚을 안고 왔다. 그때는 우리도 빚을 달고 사는 형편이였으나 아버지가 생산대에 너무도 미안해 하기에 나는 돈을 꾸어 생산대 빚을 갚았다.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물질유산은 한푼도 남긴것이 없다. 그러나 보귀한 정신유산을 남겨 주었다. 그것은, “사람이란 꼭 자기의 량심을 지킬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유산을 항상 명기하며 똑바른 량심, 명석한 량심으로 오늘까지 살아 왔다. 긴세월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직, 간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여러번 감격하며 더욱 더 가슴속에 아로 새기게 되였다. 그중에서 한가지만 말하겠다.

    87년도 봄, 우리병원에서는 서기와 회계, 출납이 주동이 되여서 3산업을 대대적으로 벌렸는데 그때 나는 견결히 반대를 하였다. 나는 병원의 업무수평, 복무질량 제고를 억세게 틀어쥐고 거기에 경제적 수단을 침투시켜야 하며 경영관리를 빈틈없이 잘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독불장군, 중구난방으로 지고 말았다. 얼마후의 원장선거에서 나는 나떨어지고 부원장이 올랐는데, 그는 서기네 편이였다. 음식점, 다방, 사우나, 안마원, 노래방, 려관, 약방을 병원구역내외에 여러개를 개업했는데, 엉뚱하게도 병원전체직원들에게 고객을 끌어오면 수입의 얼마를 장려한다고까지 호소 하였다. 서기, 원장, 회계, 출납은 더 말할것도 없고 의사, 호사… 말그대로 병원의 전체직원이 총 궐기한 형국이였다. 지어는 직일서는 사람까지도 강위에서 빠져나가 고객안배를 하고는 느물적 돌아오는 현상도 있었다. 얼마 안 되여 병원은  군중들의 말밥에 오르기 시작했고 사회여론의 질타를 받기 시작했다. 나는 한명의 고객안배도 하지 않았고 착실히 치료사업에만 몰두하였다. 그리고 3산업수입으로 주는 장금을 일률로 받지 않았다. 의료사업쪽으로는 수입지표를 완성한후 초과수익에서 장금이 있었는데, 나는 환자의 기름을 한방울도 짜지 않았고 항상 환자의 주머니를 근심해 주었다. 하여 수입지표를 완성하지 못했고 따라서 장금이 있을수 없었고 바라지도 않았다. 
2년9개월이 지나 병원에서는 집체부정부패와 탐오집단이 적발사출 되면서 대 지진을 겪었다. 나의 똑바른 량심과 명석한 량심은 시와 성의 모범당원, 로동모범의 영예를 안아 왔고 서기 겸 원장이라는 직책을 담당하게 했다. 내가 일정한 발전을 하게 된것은 당의 교시를 명심하고 정, 반면 학습을 중시하고 아버지가 준 유산을 명기하였기 때문이다.

    나와 할아버지는 평범한 백성이다. 앞에서 한 이야기는 평범한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할수있는 간단하고 쉬운소행일 뿐이다.

    아래에 세계적 위인이신 모주석의 이야기를 두가지만 보충하며… 그것은 너희들에게 깊은 사색과 계발과 교육과 감동을 주겠기 에… 그러면서 “아버지의 부탁”을 마칠가 한다.

    1949년3월 모주석은 북경교외 향산 쌍청별장에서 민주당파책임자, 각계대표, 사회저명인사들을 련일 접견하게 되였다. 첯번째 귀빈으로 장란선생을 만나게 되였는데, 모주석은 위사장 리은교에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장란선생은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에 적지않은 공헌을 하신분으로, 민주인사중에서 매우 높은 위망을 갖고 있다. 우리는 로선생을 존중해야 한다. 나를 도와 좀 좋은 옷을 입게 골라 다오.” 리은교는 모주석의 밑천을 전부 뒤지며 반반한 옷을 찿았으나 도무지 찿을수가 없었다. 깁지않은 옷이 한견지도 없었다. 은교는 방법이 없어서 “주석님! 우리는 정말로 가난뱅이수재가 서울로 시험치려 들어온 격입니다. 괜찮은 옷이 한견지도 없군요. 지금 새로 짓자니 시간이 없구요… 한벌 빌어 올가요?” 하고 문의하였다. 모주석은 대답하기를 “기운것도 괞찮다. 반듯하고 깨끗하면 된다. 장로선생은 현달하신 분으로 우리를 나무라지 않을거다,” 모주석은 기운옷을 입고 장란선생을 접견하셨다 그리고 심균유, 리제심, 곽말약, 진숙통 등 저명인사들을 련일 접견하셨다. 그이는 한평생 근검소박을 좋아 하셨다.

    모주석은 만년에 병석에 눕기전까지 줄곧 잡곡밥에 간단한 채소를 잡수셨다. 혁명전쟁년대에는 그럴수도 있었겠다고 인정되지만, 새중국이 성립된 후에도, 조건이 충분히 있는데도, 그이는 계속 잡곡밥에 4채1탕 음식습관이였다. 4채란 채소, 무슨고기채,(그이는 돼지고기를 즐겨했다. 다른고기들은 별로였다.) 매운고추, 썩두부. 1탕이란 사실은 소금물. 그외 일주일에 한, 두번 돼지고기훙쏘뤄를 아주 맛있게 잡수셨다. 은교, 보건의 등 주변사람들이 식사를 다양하게, 영양가 있게 조절하자고 하면 그이는 절대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이는 가끔 혼자말로 “언제면 농민들이 나처럼 먹을수 있을가.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가… 대단한 일이지!”하고 개탄하였다. 그이는 주변사람들과 “우리가 세계에서 사는 목적은 세계를 먹기 위한것이 아니고 세계를 개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다. 동물과의 구별점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여러번 말씀하셨다.

    조금 더 보탠다면, 모주석은 한평생 세수비누, 무슨크림, 향수, 무슨고 따위를 쓰시지 않았다. 그리고 치약을 쓰지 않고 렴가의 치분을 썼다. 은교가 좀 괞찮은 치약을 쓰자고 하니 그이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나는 다른사람들이 좋은치약을 쓰는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생산한 목적은 쓰자는데 있다. 모두 쓰지 않으면 생산이 발전할수도 없고 필요할수도 없다. 그렇긴 하지만 이 치분도 쓸수있다. 인민들의 생활수평이 제고되여 모두 치약을 쓴다면 나도 쓸것이다.” 그이는 평생 산해진미, 연회를 싫어했다. 꼭 참대저가락을 쓰고 상아저가락 금속저가락 등은 쓰지 않았다. 누가 만약 왜서 좋은 저가락을 쓰지 않는가고 물으면 그이는 “너무 비싸서 나는 쓸수없다.”고 대답하였다.

    모주석은 똑바른 량심, 명석한 량심으로 추호의 사심도 없이 인민을 위하여 초지일관,  한평생을 다 바쳐 복무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이처럼 위인은 될수 없지만 그이를 따라 배울수는 있는 것이다.
                                                                                                       16.7.19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전체 [ 1 ]

1   작성자 : 참으로
날자:2016-10-23 08:45:30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안녕히!
Total : 206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06 일본헌병대 통역(2) 2017-05-10 0 1332
105 일본헌병대 통역 2017-05-08 0 1397
104 나의 독서생활 2017-04-21 0 1008
103 봄노래 2017-03-15 0 1204
102 송구영신지감 2017-03-15 0 1024
101 문단의 차일시 피일시 2017-03-03 0 1479
100 새벽쥐새끼 2017-02-28 0 1638
99 괴벽한 글쟁이의 절개 2017-01-18 0 2098
98 도문제방둑 2016-11-28 1 1901
97 아버지의 유산 2016-10-22 1 2127
96 독서에 대한 생각 2016-07-15 1 1630
95 가치관의 기준 2016-03-05 0 1879
94 기준문제 2016-03-02 0 1654
93 알쏭달쏭한 문제(2) 2016-02-26 2 2207
92 알쏭달쏭한 문제(1) 2016-02-24 2 1815
91 개관정론 2015-10-12 0 1842
90 세 녀인의 한 2015-09-16 2 2791
89 지금도 죄송한 마음 2015-07-02 0 1953
88 5전짜리 효자 2015-04-03 2 2349
87 고모의 치매증 2015-02-14 2 2282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9 10 1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