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한후 산골소학교에서 교원사업을 하였습니다. 그당시 나의 동창들 가운데서 일자리를 바로 찾지 못해 속상해 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나는 아버지가(촌장) 교장선생님과 각별한 사이여서 일자리를 쉽게 해결했습니다. 사업에 참가한 이듬해봄 나는 시중심소학교에서 사업하는 지금의 남편과 중매로 만나 약혼식을 올리고 그해 국경절에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제2 교도주임으로 앞날에 대한 야심이 무척 컸습니다. 결혼 당시에 남편은 동북사범대학 중문계 함수중이였고 아버지는 시병원외과주임이였으며 어머니는 초중교원이였는데 경제력도 좋은 집안이였습니다.
직업이며 약혼이며 결혼이며 순리롭게 슬슬 풀린데다가 또 결혼 두달후에는 남편이 “활동”을 잘한 덕분에 시내 모 소학교에 거뿐히 전근까지 했고 석달후에는 아들까지 순산을 했습니다.
산가를 마친후 나는 남편의 조종에 따라 먹을알이 많다고들 하는 실험소학교에 또 전근했습니다. 이같이 순풍에 돛단격인지라 동창들이 부러워하고 어떤 친구들은 우리에게 “방조”를 부탁하기도 했는데 우리는 통쾌히 대답하고 “태도표시”가 좋은 순서에 따라 해결해 주기도 했습니다. 회색수입이 월급의 몇배는 되였으니 사는 멋이 있었습니다.
2학년 새학기가 시작되자 나의 반에는 권성이라는 귀엽게 생긴 남자애가 외지에서 전학해 왔습니다. 처음 권성이는 엄마와 함께 학교로 왔는데 권성이 엄마는 미인이 였으며 아주 세련돼 보였습니다. 그들 부부가 장춘에서 자그마한 장사를 하는것으로내 내 나름대로 추측했습니다. 그날 그는 나에게 점심초대를 하면서 애의 학습성적이 몹시 차하며 그간 줄곧 산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응석둥이로 자라 셈이 너무도 들지 못했다며 걱정스런 기색 가득 거듭 수고해 달라며 부탁하는것이였습니다. 그리고 고운 봉투를 나의 손가방에 살짝 넣어주었습니다. 교무실에서 돌아와 가만히 꺼내보니 빳빳한 새지페 100원짜리가 열장이예요… 100원, 200원 봉투에는 습관이 되였으나 이렇게 엄청난 목돈은 참으로 처음였습니다. 아주 흐믓하더군요. 째째한 소학교선생이니 뭐니해도, 코흘리개 아이들 대장이니 뭐니해도 진짜 성수나고 살맛이 났습니다.. 밤에 남편의 목을 끌어안고 귀속말을 했더니 “눈치 조심하오… 백만원을 먹고도 잘만하면 무사태평이고 재수 없자면 만원에도 목아지가 덜컥하오. ”했습니다.
나는 권성이를 인차 파악할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유치원 대반 정도라고 할가? 아니, 그정도도 아닙니다. 어느 과목이나 꼭 붙잡고 물으면 처음 두세개는 신통히 알아맞추다가 그다음부터는 망탕 대답하는데 다잡아 몰아대거나 살살 얼려대거나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악에 받쳐 소리지르며 족치면 권성이는 제가 되려 씩씩거리며 도망쳤습니다. 숙제는 처음 두세개는 제대로 했는데 다음부터는 쥐마당이 아니면 아예 하지도 않았습니다. 산수와 조선어문 시험도 처음 두세개는 제대로 쓰고 다음은 아예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시간집중은 더 말할것도 없었습니다. 제일 길어 10분을 집중하고는 자기맘대로 걸어다니고 다른애를 짓거리고 지어는 복도에 뛰쳐나가 끝에 있는 학교상점으로 달려갑니다. 그애가 늘 사먹는건 50전짜리 매운 무침개였습니다. 실실거리며 교실로 달려와서는 물통에서 물을 받아먹으며 아이들 앞에서 해쭉해쭉, 냠냠합니다. 학교건물안의 학교상점도 문제였습니다.학교주위 200메터 안에서는 일체 영업성행위를 못한다고 정부 유관규정은 번연히 있지만 우리 교장선생님은(미인. 남편은 어느 파출소소장) 신통력이 있어서 상점이 평안히 돌아가고있었습니다. 상점은 교장선생님이 친히 물색한 한족사람이 경영하는데 학교의 각종 비품까지도 도맡아 용달하다보니 수익이 큰 모양입니다. 그쪽으로 받는 우리 장금도 상당하답니다. 하여 웬지 찝찝했지만 누구도 뒷소리는 별로 하지 않습니다.
권성이를 맡아 한달도 안되여 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마구 두손을 내흔들고 말았습니다. 하여 키작은 권성이를 제일 뒷구석에 따로 앉히고 상학전 꼼짝 말라고 호되게 위협해 놓았을뿐만아니라 두번은 따끔하게 한매 때리며 매섭게 을러놓았는데 약간 효과가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애의 학습에 대해서는 영 밀어놓고 전혀 관계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에 소란만 피우지 않으면 다른애들에게 영향만 주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권성이 엄마한테는 애가 다동증이 있는것같은데 병원에 가볼것을 권고했을뿐더러 한학년 내리 앉히는것이 좋겠다고… 미리 발뺌을 하며 가슴에 못이 박힐 전화를 여러번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한어만은(나보다 많이 선배인 녀선생이 가르킴) 50점, 60점 때로는 80점 이상을 맞기도 하는겁니다. 어느날 한어선생님한테 애를 어떻게 다스렸냐고 물었더니 선배는 아이를 교탁앞에 따로 앉히고 거의 절반 정력을 기울렸다는것이 였습니다. 나도 몇번 써본 방법인데?... 나는 권성이가 한어에는 선천적으로 취미가 있는 모양이라고 단정해버렸습니다. 권성이는 생각만해도 머리속이 다 찡해나는 아이였습니다. 어느날 남편과 권성이 때문에 골치아프다는 말을 했더니 남편은 학부모에게는 무척이나 관심하는 태도를 보이고 아이는 그런대로 놔두라고 하였습니다. 나와 같은 생각이였습니다. 퍽 후일에 뉘우친 일이지만 한어선생님은 모성애에 못지 않은 애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던것이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학기를 맞았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명랑하고 상쾌한 기분에 들떠 있었으나 나는 도무지 기분이 나지 않았습니다. 권성이 때문에 먼저 학기 총결에서 나는 제일 꼴찌선생으로 찍혔고 장금도 물론 꼴찌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도 권성이가 등교하지 않아서 권성이 엄마한테 전화하니 시중심소학교에 전학했다는것이였습니다. 그말에 나의 흐렸든 하늘은 대뜸 찬란한 파란하늘로 바뀌였습니다. 정말로 속이 후련했습니다. 그러나 권성이의 전학은 나에 대한 학부모의 심심한 유감과 질책이라는것을, 격분과 항의라는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어요… .
개학한지 한달 거의 되는 어느날, 교장선생님이 사무실로 나를 불렀습니다. 교장선생님의 어두운 안색에 나는 가슴이 섬찍해났습니다.
“오선생이 아무래도 큰화근을 불러온것 같아요… 권성이 엄마가 개학 얼마전 나를 찾아왔는데 아이가 한어선생님은 좋고 오선생님은 나쁘다면서 싫다고, 다른반에 가겠다고 떼질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학시킬수밖에 없다는것이였어요. 그리고 한가지 건의를 하겠다면서 선생님들의 직업도덕을 비롯해서 교원의 소질제고에 좀 더 노력했으면 좋겠다는것이였습니다. 교장선생님의 함축적인 얘기가 잘 리해가 안되여 나는 좀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라고했더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는것이였습니다.
《내가 맡은 학생이 다른 선생님을 찾는건 광채로운 일이 못되죠. 아닙니까? 오선생! 순간이라도 학생과 신경질을 부리며 구박하는건 절대 금물이죠. 나도 최근에야 알았는데 권성이 아빠는 성교육청 부청장이고 엄마는 성정부 판공실간부였는데 지구당위 기률검사위 부서기로 왔대요. 나는 오선생이 근심 되네요… 모범껨에 들면 여럿이 다치는 법인데… 큰일은 생기지 말아야겠는데…》
나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정신이 아찔해 났습니다.
개학첫날 총화에서 교장선생님은 직업도덕, 소질제고, 부정부패방지에 대하여 추상같이 엄한 훈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차 학교상점을 철거해 버렸습니다.
교장선생님에게 불리워 갔던 그날부터 나는 자신을 깊히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은근히 좋아하고 성수나하고 기뻐했던 일들, 지어는 자랑스럽게 느꼈던 일들이 하나하나 너무 수치스럽게 생각되였습니다. 뒤문거래로 좋은 자리를 찾아 전근하고 친구들과 학부모들에게서 밥을 얻어 먹고 물건, 상품권, 돈봉투를 받고 장금 몇푼때문에 아이들을 겁주고 혼내고 학습못하는 애는 미워하고 호되게 닥달하고…계몽스승은 고사하고 인격상 저렬했음을 느끼며 부끄럽고 많이 후회 되였습니다. 낮이면 무슨 벼락이 떨어지나 불안하고 낯선 사람이 학교로 오면 잔뜩 긴장해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게 되였습니다. 죄진놈이 발등져려한다는 말을 정말 실감하고있었으며 밤이면 악몽으로 잠을 설쳤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남편도 무슨 일로 학교 서기한테서 충고 받은봐가 있다고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모범껨에 들가봐 근심이 태산 같았습니다. 까닥 잘못했다가는 선생직업을 떼울수도 있었습니다. 요행을 바라며 몇달 내내 맘이 자못 불편하게 지냈습니다.
그간 우리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심각한 반성을 하였습니다. 《다시는 그 어떤 착오도 범하지 않으리라! 》어금니를 깨물며 굳게굳게 맹세했으며 학생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선생의 직책을 다 하기에 무척 노력했습니다.
어느날 남편은 나에게 권성이는 성특급교사인 홍순옥선생님이 자진해서 맡았는데 학년8개반에서 10등안에 든다고 말해주면서 홍선생님에 대한 찬탄을 금치못했습니다. 나는 가슴이 꿈틀해남을 느꼈으며 저도 모르게 입이 딱 벌러졌습니다. 정말 충격이 컸습니다. 내가 교원으로서 사명감, 직업도덕, 교육방법 등 소질이 너무도 부족함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끼며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비참한 현실이였습니다.
며칠후 나는 권성이 엄마를 찾아 모든 고충을 몽땅 털어놓고 심심한 사과와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는《참, 좋은 출발을 했군요. 훌륭한 성과를 기대합니다.》하며 너그럽게 용서해주었습니다. 권성이 엄마는 참으로 수양이 있었을뿐만아니라 원칙이 있는 분이였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가슴깊히 새기고 꼭 훌륭한 선생이 되리라 다짐했습니다.
2년후 나는 지구 우수교원으로 당선되고 남편은 부교장 겸 교도주임으로 승진 했습니다.
권성의 일로, 권성의 엄마로부터 우리 부부는 많은것을 깨닫게 되였으며 다시 옳바른 길로 들어서게 되였습니다. 지금도 권성이와 그의 엄마를 잊지 않고있습니다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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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성자 : 독자
날자:2015-03-24 21:02:44
잘읽긴했으나 생각되는바가 많습니다. 소위 성교육청 부청장이, 그리고 지위 당 기률검사위횐외의 부서기란 간부가 일개 교원에게 자기자녀를 잘 배워주라고 돈을 1000원을 넣어주었다니 선생은 이 수필을 쓰면 고급관리들의 진상을 측면으로 잘 밝혀주었군요. 아직도 그사람들이 문제없이 깨끗한듯이 백성들의 앞에서 우쭐렁 거리겠지요? 한심한 세상입니다. 그삶들도 아마 돈으로 권력을 샀겠지요. 어떻게 하나 선생님은 측면으로라도 폭로를 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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