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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남 촌
2013년 04월 10일 09시 32분  조회:2885  추천:2  작성자: 회령
          실화

                                               강남촌
                                                               
                                                                                                  회령


   연변 돈화시에서 201국도룰 따라 동북간으로 100여리를 가면 강남촌이 있다. 강남촌은 줄곧 연변에서도 드문 순 조선족농촌마을로서 금년들어 건촌 48주년을 맞는다. 강남촌의 48년력사에서도 우리는 중화민족의 일원인 중국조선족의 한 모습을 볼수있다.

     개척편
 
   1947년봄, 연변전원공서에서는 이주민사업을 진행하였다. 이주민사업공작대는 화룡, 연길, 훈춘 등 현들에서 조선족집들을 모집하여 돈화현,액목현에 이주시켰다.
   이른봄 2월초, 우리집은 연길,화룡,안도,훈춘에서 첫패로 떠난 이주민들과 함께 지금의 돈화시 관지진에 이르렀다. 거기서 몇개패로 갈라졌는데 우리들은 정부에서 배치한 마파리를 타고 동북쪽으로 50여리를 더 가서 깡거우재 동쪽골안에 있는 이주민부락에 도착했다.(2월12일) 
   일행은 모두 13집이였는데 50여명이였다. 책임자는 김홍묵 (나의아버지)이였다. 지금 기억되는 집들로는 아래의 몇집들이다. 류인산(수렬의 아버지), 윤계현(영덕의 아버지), 권일룡(옥자오빠), 강장구(깜장네오빠), 김덕찬(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개꼬리집(로인량주), 훈춘집, 조선집(조선서 들어온 중년부부) 등 이다.
   깡거우재 동쪽골안 이주민부락이란 어떤 곳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첩첩 무인산중인데 강파롭고 험준한 산줄기가 사방으로 꽉 막아선 깊은 골짜기였다. ㅅ자모양의 초막은 골짜기바닥 좀 둔덕진 산기슭에 20여채가 있었다. 골물은 어느만치 큰지 그때는 온통 복키로 부푼 얼음강판이였는데 꽤 큰 강 같았다. 산발과 골짜기에는 아름드리 진동나무가 하늘높히 꽉 들어차서 괴괴하고 무시무시했다. 산에가면 꾀꼴새, 뻐꾸기가 노래하고 노루,사슴이 춤추고 토기가 뛰논다고 했으나 그곳은 워낙 깊은산중이여서 적막강산에 정적뿐이였다.    골짜기를 따라 7ㅡ8리를 구비구비 빠져나가야 인가라고 깡거우재가 있었는데, 그 살풍경의 령쇠한 산골마을에는 한족들이 대여섯집 살고있었다. 마을앞에는 신작로가 있었다. 신작로는 돈화로부터 관지, 쓰탕촌, 해천팡, 깡거우재, 지다주, 경박호를 거쳐 목단강쪽으로 빠졌다.(지금의 201국도의 원형임.)
   우리가 실려온 소위 이주민부락은 동서남북 어데를 둘러보아도 우중충 험산준령뿐 화전 한뙈기 뚜져 볼만한 땅이 없었다. 이런데서 살라는것이 도무지 리해가 가지 않았다. 당지에서 지어 놓았다는 초막은 나무가지를 얽은 위에 뗏장을 대수 입힌것이 주먹만한 구멍이 숭숭 밖이 그대로 내다보였다. 불을 때게 한 구들바닥은 뗏장위에 새초를 덮어놓았다. 문이란 조짚으로 대수 엮은 거적대기였다. 그런대로 이주민들은 초막에 들었다.
   사흘째 되던날 밤중에 초막 네채가 불에 탔는데 훈춘집 할머니는 불에 타 죽고 말았다.(며칠후 선후로 아이 둘이 또 앓아 죽었다.) 우리집도 바닥에 깐 포대기가 두곳이나 불에 타서 쟁반만한 구멍이 났다. 아버지가 불을 때며 아궁이를 지켰기에 어머니와 나는 타 죽지 않고 요행 무사했다. 알고보니 부엌과 가마목 어방은 돌을 물려 만들었지만 나머지는 몽땅 통나무를 깔아 온돌이라고 만들었든것이다.    며칠후 어느날 밤중 갑자기 흐엉! 흐엉!하는 둔중하고 석쉼한 거센소리가 마을주변에서 요란하게 울리였다. 나의 아버지는 불붙는 나무토막을 밖에 던지고 양철물통을 뚜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베미 왔다! 모두 소리지르며 쇠붙이를 두드려라! 불을 질러라!” 그날밤 아침까지 마을사람들은 남녀로소가 있는 힘껏 소리지르며 물통이며 가마를 두드리고 대여섯 곳에 우등불을 질러놓았다. 해가 솟은후에 마을주변을 둘러보니 확실히 호랑이가 두마리나 왔다갔었다. 그날후부터 어른들은 아이들이 마을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신칙하며 밤이면 물통을 두드리고 우등불을 질렀다. 범은 피똥을 갈기며 멀리 달아났는지 그 후에는 다시 오지않았다. 대신, 어데서부터 온 소문인지 훙후재(토비)가 오리라는 소리때문에 사람들은 안절부절 못했다. 그놈들은 남자는 다 죽이고 아이들의 간을 빼서는 술안주를 하며 녀자는 붙잡아 간다고 하였다. 우리는 훙후재가 오면 사생결단을 하자고 집집마다 도끼며 낫을 시퍼렇게 갈아 두었다. 먹는것은 뜬 강냉이와 수수쌀, 언 감자와 무우, 배추, 소금따위였다.(관지구정부에서 준것.)
   깡거우재 동쪽골안에서 우리는 추위에 떨며 공포와 굶주림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막막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였다. 이곳은 정말로 사람이 살곳이 아니였다. 공작대는 이주민을 모집할때 선전하기를 기름진 땅이 무진장 넗은데 검은부식토는 발목까지 푹푹 빠지며 감자는 목침만큼 크며 무우는 베개통같고 노루와 꿩이 가마에 뛰여드는 살기좋은 고장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아니였다. 사람들은 말을 번지는 아이들까지도 연변으로 도로 나가자고 아우성질을 했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가 제입으로 자원을 했고 공산당과 정부에서 우리를 이주민으로 보낸이상 이곳에서 살길을 찾아보자.”고 하면서 사람들을 설복하고 진정시켰다.
   나의 아버지는 마을사람들과 의논한후 류인산, 윤계현, 권일룡, 강장구를 데리고 마을터전을 찾으려 떠났다. 그간의 마을일은 윤영덕, 김덕찬, 나 등 10대청년들에게 맡겼다.
   그들 일행은 깡거우재에 나간후 그곳 사람들한테서 이곳 지리를 자세히 료해하였다. 신작로를 따라 관지쪽으로 올라가면서는 벌판이고 경박호 목단강 쪽으로 내려가면 수백리 무인지경 깊은산중인데, 토비들이 우글거린다고 하였다.
   일행은 관지쪽으로 방향을 잡고 마을터전을 찾기 시작했다. 깡거우재에서 30여리를 올라가면 해천팡촌이란 꽤 큰 한족마을이 있고 거기서 또 7~8리를 더 올라가면 쓰탕촌이란 한족마을이 있었는데 이 일대는 모두가 얕은 구릉지와 무연한 벌판이였다. 멀리로는 높낮은 산줄기가 보이였다. 일행은 해천팡과 쓰탕촌 중간즈음에서 알맞춤한 마을터를 찾았다. 그곳은 신작로에서 남쪽으로 경사진 언덕을 조금 내려가면 동쪽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있고 그 건너편에는 넓은 벌이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었다. 벌을 지나 남쪽으로 한참 나가면 이번에는 소잔등같이 부드러운 낮으막한 구릉이 역시 동서로 길게 누워있었다. 그 다음은 높고 낮은 뭇산봉우리가 멀리로 아련히 바라 보이였다. 말그대로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자리였다. 로력만 들인다면 수전, 한전을 마음껏 일굴수 있는 고장이였다. 기름진 땅이 이렇게 많은데 왜서 깡거우재골안에 이주민을 처 넣었는가…(후에 정부내에 혼입해 있던 국민당반동들이 잡혀 나왔다.) 일행은 분노를 참으며 하늘이 무너진대도 여기에 마을을 앉히리라 결심하였다.
   일행은 마을터를 정해놓고 돌아섰다. 그들은 해천팡에 들러 중년의 털보촌장 (류인귀. 한족. 당지부서기 겸임.)과 주밀하고 진지한 토론을 하였다. 무던하면서도 과단성있는 털보촌장은 나의 아버지의 구상을 전적으로 찬성하였다. 그는 일행을 돼지대가리에 감분국수를 말아 술까지 대접 하면서 자기 집에서 자게 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마차 여섯대를 띄워 우리 이주민들을 몽땅 해천팡으로 실어왔다.
   농민은 농사를 지어야 산다. 농사는 절기를 다툰다. 어느덧 우수가 지나가고 경칩이 눈앞에 왔다. 아무리 명당자리 기름진 땅이래도 밭을 만들어야 하며 그 보다는 먼저 우선은 사람이 은둔할 곳이 있어야 한다. 털보촌장의 안치대로 우리는 해천팡 한족형제들의 집에 기숙 하면서(우리집은 털보촌장네 집에 들었다.) 이튿날부터 남녀로소가 일떠나서 ㅅ자 땅굴막 짓기에 떨쳐 나섰다. 드디여 춘분날 몽땅 새집(땅굴막)들이를 하게 되였다.(1947년3월21일) 털보촌장이 한족형제들을 이끌고 와서 도와준 덕이 컸다...
   입촌(입주)하든날 마을에서는 해천팡에서 돼지와 감분국수를 사고 술을 떠다가 동네추렴으로 굉장한 잔치를 하였다. 해천팡 한족형제들도 청해 왔는데 그들은 하객으로 소 한쌍에 가대기 한틀을 가져왔다. 털보촌장은 양걸대까지 데리고 와서 새납을 불고 북과 징을 울리며 마을이 흥성발달할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들은 제일처럼 기뻐하며 싱글벙글 입을 다물지 못해 하였다. 거리상 더 가까운 쓰탕촌과는 아직 거래가 없었으나 곽촌장을 초청했는데 그도 열정적인 축하를 해주었다. 그날 마을사람들의 요청으로 나의 아버지가 한 말씀을 하였는데 아버지의 그 말씀 그 모습은 지금도 생생히 들리는듯 보는듯 하다.
   “동네여러분! 우리 합심을 해서 화목하게 잘 살아 봅시다. 우리끼리도, 한족들과도 화목하게 지냅시다. 내몸이 성하기만 하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소! 우리 두손으로 좋은 세상을 만듭시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우리마을 이름을 강남촌이라구 하면 어떻소?”
   아이고 어른들이고 모두 좋다고, 동의한다고 박수를 치며 환성을 올렸다. 강남촌! 참으로 감칠맛 나는 이름이였다. 그때, 개척1세들이 한결같이 다진 “화목”과 “근로” 정신은 오늘까지도 강남촌의 동훈으로 되고있다. 지금 강남촌 사람들은 타향에 나가서도 서로 방조하며 열심히 일하고있다…
   마을사람들은 그날 하루를 마음껏 즐기고도 밤에 또 우등불을 피우고 흥겹게 오락을 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새납과 대퉁소를 잘 불었는데(상모춤, 북과 새장구도 잘 쳤다.) 그날 아버지가 분 “라질가”는 가락이 흥겹고도 성수가 났다. 저절로 춤판이 벌어 졌는데 “옹헤야”, "쾌지나 칭칭"에 가서는 온 마을사람들이 춤을 췄다.
   그후, 며칠이 지나서 뜻밖의 일이 발생하였다.
   관지구정부에서 어떤 간부가 내려와 “누가 마음대로 마을터를 잡았는가? 주모자가 누군가? 깡거우재골안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디 보자!”하며 을러멨다. 그는 주동분자로 김홍묵, 류인산, 윤계현의 이름을 적어 가지고 기세등등해서 퍼렇게 색을 쓰며 돌아갔다. 주동분자들은 “아차!”하고 무릎을 치며 크게 실수했음을 직감하였다. 그들은 감옥밥을 먹으면 다 같이 먹자고,(나의 아버지가 책임을 안는다고 했으나) 그러나 이곳에서 한발작도 물러서지 않는다고, 정 안된다고 하면 몽땅 연변으로 나가겠다고 떠들기로 마을사람들을 단합시키는 한편 구정부, 현정부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들은 떠나기에 앞서 해천팡 털보촌장을 찾아 진일보의 상론을 하였다. 털보촌장은 “아야 마야!” 깜짝 놀라면서 정부의 허가를 먼저 받아야 하는것을… 자기도 그점을 그만 생각지 못했다고 하면서 안달아하였다. 주동분자들은 털보촌장과 쓰탕촌촌장에게 방조를 청들었는데 그들은 발벗고 나섰다. 일행은 즉각 구정부로 달려갔다. 구장은 “연구해 보마.”하며 돌아들 가라고 하였다. 사흘후 구장은 간부 몇사람을 데리고 친히 와서 마을을 돌아본후 촌민대회를 열고 수고 했다고, 마을을 잘건설하며 농사를 잘지어 하루빨리 유족한 생활을 하라고 격려를 하였다. 그러면서 명년에는 땅굴막들을 몽땅 없애고 좋은 조선집들을 지으라고 거듭 당부 하였다. 행정상 강남촌은 쓰탕촌과 가깝기에 쓰탕촌에 귀속시킨다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3년간 공량임무를 면제한다고 하였다. 강남촌은 정부에 정식 등록되고 중국지도에 표기되였다.
   긴장하고 분망한 농사일이 시작 되였다. 쓰탕촌과 해천팡에서 지원을 해서 화전을 개간하는 일은 부쩍 속도를 냈다. 땅은 무진장 많고 밭은 기름졌다. 밭은 농민의 명줄이다. 집집마다 배껏 밭을 장만했다. 나의 아버지는 실험에 동의하는 몇집과 함께 또 신답풀이(논밭)를 했다. 마을에는 룡드레우물 두개, 발방아 두틀을 놓았고 야장간을 지었으며 질그릇과 목탄도 구워 냈다. 이런일들에서 나의 아버지는 상당한 기술자였다. 그이는 살길을 찾아 못해본 일이 없었다… 소 네마리(두마리는 정부에서 준것)도 무척 고역을 했지만 사람들은 소보다 더 몇십배 억척스레 일을 했다. 젖먹이 외에는 모두 일했다.
   그해 농사는 어거리 대풍을 했다. 벼농사도 할수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한족형제들은 “소출이 그렇게 날수 없는데. 당신들은 참 대단하다!”하며 찬탄을 금치못해 하였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강남촌이 살기좋은 고장이라는 소문을 듣고 이곳저곳에서 이사호들이 모여 들었다.(주로는 다른곳에 갔던 이주민들.) 이듬해에는 20여호로 늘어 났다. 아이들은 해천팡에 있는 조선족소학교에 다니였다.(1949년 건교. 지금은 돈화시에 조선족 소학교, 중학교가 있다.) 강남촌은 일취월장 발전의 길로 달리였다.

     집체편

   강남촌은 개척 당시로부터 자연발생적인 호조조였다. 그들은 소 네마리를 집체경제밑천으로 아니, 하나같이 뭉친 마을사람들의 힘을 동력으로 당에서 가르키는 사회주의길을 따라 힘차게 전진하였다. 당과 정부에서는 강남촌을 모범적인 조선족마을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깊은 배려를 줄곧 기울렸다.
   30년의 집체경제시절을 거쳐 강남촌은 상당한 발전을 하였다. 수확고가 온당한 상등전으로 한전 80여쌍, 수전 70여쌍을 확보했고 역축은 60여두, 28형뜨락또르 3대, 경운기 6대, 탈곡기, 정미기 등 집체경제기초를 기본상 굳건하게 갖추었다. 1961년에는 대대판공실에 전화를 놓았고 (인민공사화가 되며 행정촌으로 승격함.) 1971년에는 전기를 끌어왔다. 비록 흙벽초가이지만 반듯한 조선집이 규모있게 건설되였다. 강남촌은 80여호에 360여명 인구를 가진 큰마을로 흥성해 졌다. 그러나 집체경영의 페단과 대개평공, 큰가마밥 분배방식은 농민들의 생산열정을 시종 분발시키지 못했다. 해마다 한공에 60~70전, 상등로력이래야 일년수입이 140여원이 되였다. 여기서 민식대(걷곡 450근 좌우)를 제하고 나면 몇원이 남지 않는데 다른식구의 량식대는 물지 않겠는가… 밥을 먹는것이 물론 첫째로가는 중대사지만 다른 돈쓸일이 어디 한두가지 뿐인가!... 집체화시절 강남촌 사람들도 중국의 다른 농촌마을들과 다름이 없이 대부분농호들이 빚을 지고 민식이 늘 부족했다. 뜨락또르가 퉁퉁거리고 전기불은 환했지만 사람들은 30년전의 품앗이, 소결이 때를 오히려 그리워 했다. 그러나 강남촌사람들은 사회를 불평해 하지는 않았다. 당과 국가에서 행복한 생활로 이끌어 주리라고 확신하였다. 주지하다싶히 집체화시절 중국에서는 계급투쟁을 깡으로 사회를 다스렸다. 합작화는 인민공사에 이르러 대약진, 3년재해를 거친후 잇따라 4청,(사회주의교육) 문화대혁명 등 정치운동이 숨가쁘게 련속 들이 닥쳤다. 그러나 강남촌에서는 “한사람도 잡지 않고” 줄곧 정면교육으로 운동을 경과했다. 강남촌은 위생모범, 치안모범, 민족단결모범 (이웃마을 한족형제들에게 벼농사를 보급하는 등), 경로애유, 단결우애, 화목한마을로 널리 소문이 났다. 강남촌에서는 모범당원, 모범서기, 모범며느리가 여러명 태여났다. 그리고 공사서기, 현의간부, 학교교장으로 출세한 인재들도 여러명 나왔다. 정부에서는 강남촌을 “조선족모범촌”으로 명명하고 줄곧 살뜰한 보살핌을 하고있다.

     개혁편

   중국대지에 “두번째해방!”이라는 환호성이 터졌다! 개혁개방의 시대가 활짝 열리였다! 집체의 틀속에서 농민들을 풀어 주었다. 1982년 1월, 강남촌에서는 기쁨과 흥분속에서 개혁을 단행 하였다. 강남촌의 2세, 3세들은 기운이 뻗쳐 팔뚝을 휘둘렀고 60, 70대가 된 1세들은 급변한 형세를 흐믓한 심정으로 바라 보았다. 3,40대 당년에 보던 세상같기도 하고 아닌것같기도 했다. 그러나 인차 깨달았다. 세상이, 생활이 비로서 제길로, 옳은길로 돌아왔다는것을!... 지난 나날들이 꿈만 같았다…
   강남촌사람들은 개혁의 당해에 량식관을 철저히 넘었다. 집집마다 쌀뒤주가 넘쳐났다. 이듬해에는 모든 빚을 청산했다. 다음해 부터는 생활이 눈에 띄이게 윤택해 지었다. 라지오, 록음기 소리가 꽝꽝 울리고 밥상에는 물고기, 닭알지짐, 반주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낙네들은 일밭으로 가면서도 분세수를 하고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달리였다. 강남촌은 건촌 그때에 구장이 부탁하던대로 온보의 유족한 생활을 하게 되였다. 1998년에는 집집마다 전화를 놓았고 2003년에는 집집의 수도화를 실현했다. 벽돌기와새집들이 다투어 건설되고 문화실, 건신운동장, 문구장을 만들었다. 냇물에 다리를 새로 놓고 마을길을 전부 포장도로로 재정리를 하고 화단과 가로수를 심었다. 지금은 자전거 대신 오토바이가 달리고 몇집에서는 자가용을 갖추었다. 라지오, 록음기는 언녕 텔레비죤과 음향기, 록상기로 바뀌였다.
   강남촌이 급속히 발전하고 생활이 재빨리 유족해 진데는 두가지 원인이 있다. 개혁개방의 큰틀속에서 하나는 국가의 “3농” 등 부민정책의 덕택이고 다른 하나는 2세, 3세들이 용감히 뛰쳐나가 억척스레 돈을 벌어 왔기 때문이다. 지금 강남촌에는 60여호에 250여명의 인구가 호적을 두고있다. 마을에는 16집에 60여명이 상주하고 있는데 주로는 로인들과 아이들이다. 그들은 빈집과 마을을 맡아 보살피고있다. 돈벌러 나간 사람들을 보면 한국에 80여명, 일본 10여명, 로씨야 20여명, 국내80여명이다. 이들중 4명은 이미 백만장자 행렬에 들어섯고 1명은 로씨야에서 채소농장주가 되였다. 그리고 2명은 광주에서 기업을 하고 1명은 일본에서 상점을 경영하고 있다. 남어지는 아직 10만대들이다. 먼저는 온보를 위해 뛰였지만 지금은 창업자금을 위해 열심히 뛰고있다. 타향에서 그들은 서로 관심하고 방조하는데 이면에서 한국에 나간 류길천씨가 특히 돌출하다고 소문이 났다. 지구촌이니까 어데서든지 잘살면 된다. 그런데 기특한것은 뛰쳐나간 이들 대부분이 강남촌을 자기의 보금자리로, 꼭 틀어쥐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강남촌에서 발전할 구상을 하고있다. 밑천을 장만한 몇사람은 이미 돌아와서 사업을 시작했다.
   총명하고 근로하고 정직하고 따뜻하며 대담한 강남촌사람들! 근본을 잃지 않고 당의 말을 잘듣는 강남촌사람들! 이제 그들의 노력분투로 강남촌은 또 비약할것이다.

                                                                                                                                                                                                                                 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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