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날이 되였다. 학교때 메던 가방에 입던옷 두어견지와 공책 연필따위를 넣으니 행장은 다 갗춘 셈이다. 커다란 가방은 훌쭉했지만 더 넣을것이 없었다. 나는 유일하게 한장뿐인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찍은 사진을 찿아 공책에 끼워 넣은후(팔로군에게 랍치되다보니 잃어버렸다.) 부모님께 하직의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 했다.
연필을 든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조선글을 쓸수 없었든 것이다. 나도 모르게 십년을 일본글만 읽고 일본글만 쓴것이 아닌가! 스스로도 억이 막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갔다. 부모님께 할 말은 많고도 많은데… 그렇다고 일본글로는 쓸수 없는거고(일본글 아는 사람이 집에는 없다.) 반나절이나 연필대를 굴리며 겨우 두어자를 썼다.
“자 거시소. 마주로 가니다. 10너후 오니다.”(잘 계시소. 만주로 갑니다. 10년후 옵니다.)
그때일이 지금도 똑똑히 기억 된다. 말은 제대로 할수 있으나 글은 생각나지 않았는데 받침은 도무지 깜깜했다.
나는 가방을 들고 일어섯다. 어머니는 가마목에 꼬부리고 누웠는데 잠이 드신것 같고 새삼스레 자세히 보니 폴삭 늙으셧다. 영애는 빨래를 가고 영호와 정호는 놀러 나가서 집에 없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신방으로 나가면 저녘 늦게야 오셧다.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온후 어머니를 향하여 경례를 하였다. 눈믈이 왈칵 쏟아졌다.
그날후로 동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번도 뵙지 못했다. 부모님들은 광복후에도 생존해 계셧으나 상봉의 기회는 인위적인 장애로 이루어 지지 못했다. 그의 평생 유감으로 된 이 곡절의 사연은 뒤에가서 알게 된다.
역전에 도착하니 기호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발차시간은 꽤 남아 있었다. 내가 혹 창순이가 오겠는가 해서 두리번 거리는데 과연 창순이가 달려 왔다. 우리는 문학으로 꼭 성공하자고 약속하면서 비장한 작별을 하였다. 창순이는 호떡 두봉지와 돈 3원을 주면서 객지에서 무사하기를 거듭 당부 하였다. 나는 그의 문학성취를 부탁 하였다.
기차는 구슬픈 기적소리를 길게 내면서 서서히 조선을 떠났다. 얼마후 우드등! 우드등! 하며 신의주철교를 건너 갔다. 넓고 푸른 압록강은 넘실넘실 흘러 가고 갈매기떼들은 가로세로 날았다.
변상적인 일본식민지 만주국은 조선과는 완전히 다른 이국 풍경이였다. 만주국 국경도시 안동(단동)에서 기차는 거이 반시간을 정차 했다. 우리는 홈에 내려 바람을 쏘이였다. 마치도 피난민 같은 남부녀대한 조선사람들, 저들 세상이라고 활기에 넘친 일본사람, 쑤왈쑤왈 떠들어 대는 중국사람, 중국경찰과 일본순사들이 공연히 호각을 까르륵! 까르륵! 불어대며 고함을 지르고 눈알을 부라리였다. 땅도, 지저분한 건물도, 사람도 검은색, 회색이 위주고 하늘까지도 희뿌옇게 흐리터분 하였다… 기호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구운통닭과 마화(타래떡)를 사들고 뛰여 왔다.
차칸에서 우리는 심양으로 연출을 가는 “랑랑극단”을 만났다. 나는 순간 기발한 생각이 떠 올랐다. 그 극단을 따라 다닌다면 방랑도 하면서 배울것도 많을것 같았다. 단장이라는 맑스머리 사내한테 극단을 따라 다니게 하여달라고 간절히 청을 하였는데 그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다는듯 눈이 휘둥그래서 입을 딱! 벌이였다. 나는 시키는 일은 다 할것이며 신봉도 필요없다고 했지만 단장은 아예 거절 하였다. 저녘이 되여 심양에 도착하자 우리는 무턱대고 극단의 꽁무니를 따랐다. 그들은 어떤 극장에 이르더니 그안으로 들어가 버리였다. 우리는 눅거리 강냉떡을 두어개 사 먹은후 다시 극장으로 갔다. 기호는 마음드는 학교를 찿자고 왔지만 나는 방랑이 목적이고 그것은 극단의 꽁무니에 붙어 다니는 것이 제일 좋을것 같은데, 또 떼질을 써 볼 작정이였다. 공연이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사정하면 맑스머리가 감동을 해서 들어 줄것만 같았다.
기호와 나는 극장앞에서 작별 하였다. 여기까지 동무해서 함께 오긴 했으나 길이 다르기에 일찌감치 갈라서는 것이 옳았던 것이다. 극장앞은 공연을 보려온 조선사람들로 분비였다. 나는 연극을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한푼이라도 돈을 아껴야 했다. 내가 서성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이름을 부르며 왈칵 안겨 왔다. 의주에서 온 소학교때 친구들이 였다. 그들셋은 여기서 자동차운전학교에 다닌다고 하였다. 내가 한사코 사양하는데도 그들이 표를 끊어 와서 함께 공연을 보게 되였다. 공연을 보며 다시 생각해 보니 맑스머리가 받아줄것 같지 않았다. 그럴수 밖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왜서 공밥을 먹이며 달고 다니겠는가. 나는 친구들이 끄는대로 그들의 하숙방에 가서 끼이게 되였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일자리를 찿아 나섯다. 그때 나의 생각은 이랬다. 중국의 큰 도시들을 돌면서 여러가지 생활을 체험하며 이도시에서 저도시로 갈 경비를 마련하며, 시간을 짜내여 책을 보며 습작을 한다는 것이 였다. 먼저 이 심양에서 일자리를 얻어 천진까지 갈 경비를 마련하는 한편 사회를 관찰 하기로 하였다. 그때 호주머니에는 10여원 밖에 없었다.
일자리를 찿는것이 힘들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후 거리를 돌다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책방으로 들어 갔는데 점원으로 받겠다는 것이였다. 숙식을 주고 한달에 5원을 주겠다고하였다. 나는 거기서 겨우 3일을 일하고 나와 버렸다. 일은 쉽고 마음대로 책을 볼수 있어 좋았으나 주인녀편네 꼬락서니가 역겹기 그지 없었든 것이다. 우선 밥을 따로 먹게 했고(그들 내외와 한상에 앉지 못함) 먹기전에 “이다다끼마스”(고맙게 잘 먹겠습니다)하며 꼬박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그리고 주인녀편네가 귀엽다는 뜻인지 불상타는 뜻인지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며 어깨며 만지는 것이 징그럽고 불쾌했다. 내가 이집 종인가! 거진가!… 그리고 떳떳한 한개 청년을 아이 취급하는건가? 놀이개로 희롱 하는건가?… 나는 주인녀편네가 변태같아 순간도 싫었다.
그후 려객운수회사에서 한달을 일하였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일은 몹시 고되였다. 자존심이 구겨질 일은 없었으나 단일하고 책 볼 시간이 없는것이 안타까웠다. 그런데 마침 일자리가 나졌다. 그것은 자동차운전학교 친구의 형이 “인테리가 이런일을 해서야 되느냐”고 하면서 책방일을 소개하였든 것이다. 창씨개명을 한 조선사람 후지이씨가 경영하는 “신풍호서점”이였다. 숙식 외에도 한달에 30원의 월급을 주었다. 중년의 후지이씨는 내가 책을 즐겨 보는것을 기특하게 보면서 이런 이런 책들을 보라면서 추천해 주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진보적 서적들이였다.
이듬해 1월 나의 편지를 받고 창순이가 왔다. 그는 나와 함께 방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리는 천진을 거쳐 창순이 삼촌이 있는 북경에 들렸다가 무한쪽으로 갈 작정이였다. 그곳이 전쟁터라고 하니 실황을 본다는 데서 였다. 우리가 포부와 계획을 말하니 후지이씨는 매우 놀라며 장하다고 거듭 칭찬을 하여 주었다. 그는 우리의 성공을 축원한다면서 떠날때 돈을 20원이나 더 주었다.
1월중순경 우리는 산해관까지 기차로 가고 산해관을 돌아본후 천진까지는 걸어서 가기로 했다. 산해관은 소위 만주국과 중화민국의 국경도시로 소문난 곳이였지만 너무도 보잘것없는 촌락에 불과했다. 만주국 군대가 국경이랍시고 성문에 보초를 서고 있긴 했으나 아무것도 거들떠 보지 않으며 관계치 않았다. 그때는 관외 관내가 이미 일본 점령구여서 국경이란 사실은 유명무실이였다. 우리는 진황도까지 걸어간후 다시 기차로 천진까지 갔다. 천진에서 며칠 도시구경을 한후 우리는 북경으로 들어갔다. 창순의 삼촌은 천교에서 살고 있었다. 북경에는 구경거리가 많았다. 우리는 거이 20여일 북경구경을 한후 곧추 무한으로 가려고 어느날 역전으로 나갔다. 우리가 차표를 사려고 하는데 창순이 삼촌이 땀을 뻘뻘 흘리며 쫓아 왔다. 그러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였다. 며칠전에 우리의 계획을 말하니 창순의 삼촌은 한심한 소리를 한다며 야단을 했다. 그날 우리는 가만히 빠져 나왔는데 그가 눈치를 챈 것이다. 북경역에서 창순이와 나는 갈라졌다. 창순이는 삼촌에게 잡혀가고 나는 계획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해서 역전에 남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무한으로 간다는건 확실히 모험이였다. 혼자서 전쟁판이라는 그곳까지 가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생각끝에 나는 다시 천진으로 나가기로 작정 했다. 그곳에서 로비를 얼마간 마련하면 청도, 상해, 광주, 홍콩방면으로 방랑할 타산이였다.
때는 2월초 음력세밑인데 날씨가 무척 추웠다. 천진에서 나는 매일 일자리를 찿아 헤매였다. 처음에는 목욕탕에서 자다가 돈이 얼마 남지 않아 역전으로 가서 한둔을 하였다. 밤 12시까지는 2등 대합실에 머물수 있었으나 그후에는 쿠리들이 몰려와 저들의 자리라고 빼앗는 바람에 3등 대합실로 쫓기였다. 3등 대합실은 한지나 다름이 없었다. 음력설 전후에는 일터도 적었거니와 그때는 한족들 습관이 일군을 쓰지 않았다. 그러구려 며칠이 지나자 주머니에는 1전 한푼이 없었다. 나는 일자리를 찿아 헤매다 역전으로 돌아와 쓰러지고 말았다. 그날은 더운물 한모금도 얻어 먹지 못했다. 지치고 허기진 몸은 정신이 가물가물하고 와들와들 떨려서 죽을것만 같았다. 어떻게 할것인가? 그때 번쩍 생각나는 곳이 있었다. 역전앞 길옆에 중국 파출소가 있었는데 그곳으로 찿아가면 무슨수가 있을것만 같았든 것이다. 나는 비틀거리며 파출소로 갔다. 불이 환한 숙직실에는 중국인 경찰이 신문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내가 문을 두드리니 경찰은 무슨일이냐며 들어 오라고 하였다. 방안은 후끈후끈 하고 부뚜막에 놓인 시꺼먼 주전자에서는 김이 씩씩 뿜겨 나오며 물이 끓고 있었다. 나는 물 한고뿌를 달라하여 얻어 마신후 사연을 말하였다. 그 중국경찰은 마음이 좋은 사람이였다. 그는 나에게 밤참으로 싸온 강낭떡까지 먹으라고 주면서 내심하게 나의말을 들어 주었다. 이튿날 그가 가르켜 준대로 나는 천진 일본군 륙군병원에 가서 청소부로 춰직을 했다. 병원에서 먹고 자며 월급을 25원 주었다. 그리고 일요일은 륜번으로 휴식할수 있었다. 나는 두번이나 휴식일을 리용하여 그 중국 경찰을 찿아 갔으나 만나보지 못했다. 그것이 지금도 미안하고 또 감사한 마음을 잊지 못한다.
륙군병원 청소부로 서너달 지난 어느 휴식일 나는 거리에 나갔다가 우연하게도 신의주상업학교때 선배며 친구인 장을선이를 만났다. 그는 창순이와 친한 사이였다. 이국 타향에서 친구를 만나니 반가움은 더 말할데 없었다. 을선이는 나를 끌고 음식점으로 들어가서 여러가지 요리를 주문 했다.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지금형편도 말이 나오게 되였는데 내가 청소부로 일한다고 하니 을선이는 펄쩍 뛰며 래일 당장 자기에게로 오라고 하였다. 그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압하양행” 사무실에서 일했는데 군부대에 말안장이며 장화 기타 비품을 납품하는 일을 한다고 하였다. 나는 이튿날로 압하양행으로 갔다. 내가 할 일은 물품출납장을 명세하는 일이였다. 사무실에는 모두 다섯이 있었는데 셋은 일본 사람들이 였다. 그들은 군대 장교들을 끼고 술집을 드나들며 군비를 슬쩍슬쩍 뜯어 먹었다. 나는 그들이 가져다 주는 전표를 장부에 올리고 품목을 기입하면 되였다.
두어달 편안히 일하고 있는데 어느날 일본에서 사장이 검열을 왔다. 그는 사업상황을 이것저것 검사하고는 회의를 소집 했는데 다른 직원들의 불찰을 가지고 전문 나를 딱아세우며 훈계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롱간을 부리고 탐오한것을 나에게 덮씌우며 품행이 나쁜 조선놈이라고 을러메며 호통을치는 것이였다. 나는 너무도 부아통이 터져 장부며 전표묶음을 그앞에 둘러 메치고 사무상을 뒤엎어 놓은후 문을 박차며 뛰쳐 나왔다. 을선이가 뒤따라 나오며 저건 일본직원들을 훈계하느라고 하는 허장성세이니 참으라고 달래였다. 그러면 죄는 도깨비가 짛고 벼락은 고목이 맞는다는 것처럼 내가 무슨 리용물이란 말인가! 다시는 거기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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