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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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전 "나의 장정"
2007년 02월 21일 12시 33분  조회:3470  추천:100  작성자: 강룡운
금년은 중국공농홍군 장정 승리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새중국의 서광을 비껴준 이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여 CCTV에서는 여러가지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지난 5월초부터 "나의 장정(我的长征)"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유명한 TV프로그램 사회자인 최영원(崔永元)이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고있는 이 프로그램이 첫방송을 시작하기 전후하여 CCTV 뉴스채널에서는 1남1녀,  1로1소가 출연하는 "나의 장정" 홍보물을 련일 방송했다.

손녀애가 묻는 말 : "할아버지, 최아저씨들이랑 장정을 간다는데 그들은 어째서 장정을 가는가요?"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씀 :  "신앙을 위해서란다."

이제 겨우 대여섯살밖에 안돼보이는 나어린 녀자애가  "신앙을 위해서"라는 할아버지 그 말씀의 참뜻을 다 리해할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 신앙이 무엇인가를 알것만 같다. 왜냐하면 지금으로부터40년전, 대학 5학년에 재학중이던 나도 신앙을 위하여 "나의 장정"을 해보았기때문이다.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어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어느 고급간부의 집에서 흘러나온듯한 "내부간행"으로된 미국의 저명한 기자 에드거 스노가 쓴 《중국의 붉은 별》(한어문 책명은 《西行漫记》)이란 책과 그의 부인이였던 헬렌 포스더 스노가 쓴 《서행만기속편(续西行漫记)》이란 책을 읽게 되였다. 20세기 30년대 중반  미국의 나젊은 기자 부부가 선후로 생사를 무릅쓰고 첩첩 난관을 꿰뚫고 혁명의 성지 연안에 들어가 모택동, 주덕, 주은래, 장문천, 팽덕회등 중국공농홍군 2만 5천리 장정의 통솔자들을 직접 인터뷰하여 써낸 이 책들은 그 당시에 홍군 장정 승리의 소식을 서방세계에 널리 알리면서 온 세상을 들썽하게 만들었던 책들이다. 이 두권의 책은 20세기 60년대 중반 "문화대혁명"의 풍랑속에 몸을 담근 20대 열혈청년의 가슴을 더없이 뜨겁게 달구었다. 나는 한 친구한테서 이 책들을  빌려다가 가만히 밤을 새워가며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홍군의 발자취를 더듬어 2만5천리 장정의 길을 다시 한번 걸어보고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였다. 나로말하면 이것이 아마 그해 11월 하순에 이루어진 "나의 장정"의 최초의 발단이 되였던것 같다.

그때는 "문화대혁명"의 충격으로 학업이 완전히 중단된 상태였으므로 우리는 학교에 머물러 있어도 할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북경에서 남하하여 강서성 서금으로 내려가 홍군의 장정로정을 따라 연안을 향해 대장정을 해보려고 시도했었다. 그런데 그 동란의 년대에 우리는 몇달 앞으로 다가온  졸업을 앞두고 딱히 어느때 졸업할수있는지 그 누구에게서도 확답을 받을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우리가 그때 그 로선을 따라 장정을 시도했다면 연안으로 채 가기도 전에 중도에서 일단 귀교하여 복학하라는 지시가 내려올수도 있기때문에 그 장정은 중도이페될수밖에 없을것이 불보듯 뻔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보다 실시가능한 방안을 모색하던중,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고 장정의 간난신고도 체험하고 혁명의 성지 연안에도 가 볼수 있는 방안으로 북경에서 연안까지의 "장정"을 단행하기로 작심했던것이다.
1966년 11월 하순, 그해 마가을도 다 가고 락엽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하는 초겨울에 나는 한학급 동창생들인 림장춘, 장철수, 주청일과 함께 넷이서 "장정대"를 무어 이불짐을 둘러메고 무작정 북경을 출발하여 연안을 향해 "나의 장정"을 시작했다.

세상 만사가 다 시작이 어렵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나의 장정"도 첫번째  한 주일이 제일 힘들었던것 같다. 매일 아침 날이 희붐히 밝아오면 우리는 아무리 일어나기 싫어도 피곤이 채 가시지 않은 몸을 가까스로 추스리고 일어나 서둘러 이불짐을 동여매야했고 그것을 짐바로 등에 짊어지고는 아침식사를 하기도 전에 하루의 강행군을 시작해야했으며 한두시간 걸어가다가 길가에서 "접대소"를 만나면 아침밥을 얻어먹는것이 다반사였다. 첫날은 북경에서 석가장방향으로 빠지는 출구를 찾지 못해 몇시간 헤매다나니 저녁녘에야 겨우 장신점(长辛店)에 도착하였으므로 얼마를 걷지 못하였고 이튿날은 한 70리를 걸었지만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다리 근육 통증이 오기 시작하고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생겨나면서 진종일 부지런히 걸어도 겨우 40리를 넘기지 못하는 날도 하루 이틀이 아니였다. 북경에서 출발하여 1주일만에 보정(保定)에 도착하여 하루동안 휴식을 취했더니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점차 적응이 돼 가면서 처음처럼 그렇게 힘겹지 않았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은 여전했다. 날마다 걸음을 재우치며 걸고 또 걷다가 허기진 배를 붙안고 "접대소"에 찾아가면 먹으라고 내놓는것은 가는곳마다  거의 다 옥수수가루로 만든 음식이였고 저녁에 자고 가라고 안내하는 잠자리는 짚을 깔아놓은 학교 교실이거나 곡식창고의 차가운 콩크리트바닥이였다. 우리는 날마다 거의 하루 세끼를 옥수수로 만든 음식을 먹으며 강행군을 해야했고 추운 겨울밤에도 아무런 난방시설도 없는 콩크리트바닥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하루하루의 장정을 이어갔다. 이렇게 우리는 한달동안 드넓은 하북평야를 주름잡으며 석가장을 거쳐 태항산으로 톺아올랐고 광활한 진중평원에 위치한 태원을 지나 산서성의 허리를 가로 지르면서 황하기슭에 이르렀고 나루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 섬서성 북부지역에 도착하였으며 1966년 12월 하순에는 드디어 오매에도 그리던 혁명의 성지 연안의 땅을 밟을수있게되였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나의 장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냥 학교 기숙사에서 발편잠을 자고 날마다 입쌀이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한가로이 보냈을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저절로 고생을 찾아나섰다. 물론 처음 겪어보는 고생들이라 힘들기는 하였지만  이 한달동안의 "나의 장정"은 평생을 두고 잊을수 없는 과감한 도전이였으며 심신에 유익한 실천이였다. 말이 고생이지 우리가 겪은 고생은 홍군이 장정길에서 부딪쳤던 간난신고에 비교하면 그것은 고생도 아니였다. 우리들이 가는 길에는 당년 홍군이 직면해야했던 그런 험난한 상황, 즉 지궂게 뒤를 쫓는 추병도, 앞길을 가로막는 적군도 없었으며 노도가 사품치는 금사강과 대도하도 없었으며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설산 초지도 없었다. 때문에 우리가 겪은 고생은 홍군이 이겨낸 간난신고의 천분의 1, 만분의 1, 아니 억만분의 1도 안되는 고생이였으며 고생이라는 말조차 어울리지않는 그런 어려움이였다고나 할가. 40년전 20대 열혈청년이였던 우리는 그때만해도 이 나라의 해방을 위해 피흘리고 목숨을 바친 혁명선렬들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받아 조국의 미래를  떠메고 나갈 주력군이 되고자 자신을 보다 억세게 련마하기 위해 "나의 장정"에 자진해 나섰던것이다 

나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이 력사적재난때문에 졸업론문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대학을 졸업하게 되였지만 "나의 장정"을 통해 책에서나 교실에서 배울수 없었던 많은것들을 터득할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추운 엄동설한에 차가운 콩크리트바닥에서 쪽잠을 자고 옥수수떡을 먹으면서 하북, 산서, 섬서 세개성을 경유하면서 태향산지역의 척박함과 황토고원의 황량함을 피부로 느꼈고 그런 고장에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감행했던 저주로운 "삼광정책"이 빚어낸 참상이 그 얼마나 참혹했을가를 다소 상상할수 있었으며 이땅에서 혈전을 벌였던 그 고장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우러러 볼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질수 있었다. 

우리 말에는 젊어서의 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 산다는 속담이 있다. 중국 고대의 성현인 맹자님께서도 "하늘이 누구에게 큰 일을 맡기려면 반드시 먼저 그의 심지(心志)를 괴롭히고 그의 근골을 지치게 하고 그더러 굶주림에 허덕이게  하고 그가 길을 떠날 때 로비도 없게 하여 제멋대로 할수 없게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마음을 련마하게하여 그가 할수 없었던 일도 할수 있도록 하게 하느니라."라는 금쪽같은 명언을 남기였다. 이런 관념에 깊이 물젖은 나로서는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오늘과 같이 평화롭고 풍요로운 여건속에서 복된 삶을 누리며 순탄하게만 자라난 젊은이들이, 이 세상에 태여나 아직까지 큰 고생이라곤 전혀 겪어보지못한 젊은이들이 래일 나라의 중임을 떠메고 혁명선렬들이 피로 바꿔온 이 강산을 대를 이어 굳건히 지켜나갈수 있을가?… 나의 이와같은 생각들이 그저 나의 부질없는 기우였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력사는 오늘과 래일을 창조하는 밑거름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현대사에 막대한 재난을 가져왔던 "문화대혁명"이 갈무리되고 본격적인 현대화건설이 바야흐로 서서히 그 막을 올리던 시절에 우리는 현대화건설을 "신장정"이라고 일컫었다. 그 시기에 창간된 당의 한 리론간행물의 명칭도 바로 이 《신장정》이 아니였던가.
"신장정"은 비록 설산 초지를 넘나드는 그런 고난의 행군이 아니지만 일년사시절 만년설이 녹지 않는 청장고원의 동토층우에 청장철도를 부설하고 인적조차 보기드믄 망망한 타클라마칸 대사막에서 유전을 개발하는 그 간난신고 역시 홍군이 설산 초지를 넘나들던 2만5천리 장정에 못지않는 고난의 행군이다. 그리고 지금 한창 진행중인 장강의 물을 황하이북지역으로 끌어올리는 "남수북조(南水北调)"공정이나 서부의 천연가스를 동남연해지역으로 수송하는 "서기동수(西气东输)"공정, 그리고 서부에서 다 쓸수 없는 전력을 동부지역에 수송하는 "서전동수(西电东输)"공정과 같은 대역사(大役事)도 설산 초지를 넘나드는 간난신고에 비견할수 있을것이다.
지금 CCTV에서는 "나의 장정"이 계속 방송되고있다. 층층의 여러 관문을 거쳐 선발된 21명 정식대원과 5명의 후보대원들로 구성된 "나의 장정"대원들은 날마다 70년전 홍군이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고있다. 그들중에는 군인출신도 있고 운동선수출신도 있으며 기자, 교사, 상인, 간호사, 대학생, 장군부인, 자유직업인, 사회과학원연구원등 여러분야의 인원들이 망라되여있다. 상해의 한 큰 회사의 총경리인 동봉(董峰)은 "나의 장정"에 참가하면서 장정을 하는 1년동안 자기가 살아온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앞으로의 후반생을 어떻게 살아갈것인가를 곰곰히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동봉총경리와 같은 백만장자가 "나의 장정"에 참가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세인을 놀라게할만한 인생드라마가 아닐수 없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홍군의 장정정신을 계승함에 있어서 누구나 꼭 "나의 장정"을 해야한다는것은 아니다. 아직 고생을 크게 못해본 젊은이들로 말하면 한번쯤 고생을 찾아 해보는것도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수업의 필수과목이기는 하지만 굳이 "나의 장정"과 같은 고난의 행군이 아니더라도 좋다. 도전과 실천이 중요하다. 례를 들면 방학이나 여가를 리용해 아직도 어렵게 살고있는 농민들속에 내려가 논밭에 발을 담그고 모내기도 같이 해보고 기음도 같이 매면서 그네들의 로고를 체험해보는것이 무엇보다 바람직하다. 진정 이렇게 도전과 실천으로 자신의 심신을 꾸준히 련마해 나간다면 조국의 미래를 떠메고 나갈 미더운 주력군으로 성장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될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06년 10월 28일 길림신문(A3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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