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어미없는설음
네댓 살에 어머니를 여읜 봉인과 명옥은 날개 부러진 제비 새끼 같았다. 그들 오누이는 어려서부터 눈치 밥을 먹으면서 자랐고 밥값이라도 하느라고 베실을 뽑고 나물을 캐오고 다른 일도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했다.
어느 날 애들이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숱한 애들이 손을 잡고 둥그렇게 서서 돌아가면서 소리를 먹인다.
여우야, 여우야!
나와 놀자
둥그런 원 안에서 두 손으로 눈을 막고 쪼그리고 앉은 오니(귀신)로 된 애가 화답한다.
밥 먹는 중이다
애들이 손을 잡고 오니애를 안에 넣고 둥그렇게 돌아가며 또 묻는다.
반찬은 무엇이냐?
원 안의 오니애가 화답한다.
산 뱀이다!
원 안에 앉아있던 오니(귀신)애가 손을 눈에서 떼면서 애들을 쫓아간다. 애들은 “으악!” 소리치면서 종 주먹을 쥐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러다가 오니(귀신)로 된 애가 그중의 어느 애를 잡으면 그 애가 대신 오니(귀신)로 되여 애들이 손잡고 돌아가는 원 안으로 들어가 두 손으로 눈을 막고 쪼그리고 앉는다.
봉인은 애들과 놀고 싶어 가만히 명옥을 데리고 애들 속에 가서 손을 잡았다. 그때 할아버지 최구장이 헐금씨금 와서 곰방대로 봉인과 명옥의 이마를 똑똑 때렸다.
“이 놈 새끼들아, 일 하지 않고 누가 밥을 주니? 어서 석마간으로 가서 좁쌀알을 주워 모으지 못해?!”
봉인과 명옥은 아파서 눈물을 찔끔찔끔 쏟으면서 석마간으로 갔다.
네댓 살 되는 오누이는 다른 집 애들처럼 놀지도 못하고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운주동 석마 칸에 가서 겨 속의 쌀알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눈이 시리게 먼지가 새뽀얗게 이는 석마간 겨 무지에서 좁쌀알을 한 알 한 알 주었지만 한바가지를 채운다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온종일 주어 한바가지를 채울라 할 때다.
주인이 나와서 힐끔 바가지를 들여다보더니 바가지를 쥐여 마구 흔들어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짜 얄밉게 놀기도 했다.
바가지 안에서 쌀알들이 훌렁 꺼져 내려가서 다시 채우자니 아름찼다.
애나게 주어 겨우 한바가지를 채워 바치자 주인은 먼저 성냥가치만한 나무꼬챙이를 한 개를 내주었다. 그렇게 다섯 바가지를 주어 나무꼬챙이 다섯 개를 채우면 구리돈 1전을 주었다.
온종일 둘이서 애나게 겨 무지 속에서 좁쌀알 다섯 바가지를 주어야 1전을 벌수 있었다. 3전이면 커다란 고마이 한 마리를 살 수 있었다.
봉인과 명옥이가 서너 날 겨 무지에서 좁쌀알을 한 알 한 알 주어 구리돈 2전이나 3전을 가져오면 할머니 성단은 오누이의 머리를 두 손으로 정겹게 쓰다듬어 주군 했다.
“에이유, 요 귀한 내 새끼들아, 얼마나 장하냐? 쯧쯧.”
경숙도 어미 잃은 자식들이 귀하고 불쌍해 얼굴을 매만지면서 뽀뽀까지 해주군 했다.
오누이는 어머니를 잃고도 뜻밖에 어른들의 말을 잘 듣고 일도 잘하면서 강하고도 건실하게 자랐다.
군일이 있을 때면 봉인과 명옥은 어머니를 잃은 섧음을 가슴 아프게 느끼곤 했다.
다른 애들은 다 어머니들이 불러내다가 떡이랑 고기국이랑 먹이는가 하면 엿사탕이랑 먹였다.
봉인과 명옥은 언제면 자기들을 부르겠는가고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위방에 누워서 머리를 들고 정지를 내려다보군 했다. 그러나 해가 지고 달이 떠도 어머니가 없다보니 부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봉문아, 여기 나오너라.”
봉문은 넷째 삼촌댁 성단이 벌써 두 번째 불러내다가 돼지고기 점을 입에 넣어줬다.
봉문이 입에 돼지고기 살점을 물고 와서 고의로 봉인과 명옥이가 부럽게 하느라고 손으로 살코기 실을 쪽쪽 찢어서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으면서 짹짹거렸다.
“양, 양, 맛있다. 오래오래 맛있다.”
봉인과 명옥은 어린 사촌동생이 먹는 살 고기가 너무나도 먹고 싶어 목구멍에서 군침을 꼴깍 삼켰다. 어찌나 배고팠는지 배에서 꼬르륵 소리까지 자꾸 났다.
이때 아래 방에서 위방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나자 명옥은 머리를 들고 아래방 쪽을 내려다보았다.
“봉순아, 여기 오너라.”
이번에는 둘째삼촌댁 김어금이 위방 미닫이를 쭈르륵 열고 들어섰다. 손에는 돼지갈비뼈가 쥐여져있었다. 그는 자기 아들 봉순에게 주려다가 주춤 멈췄다.
“아니, 너네 오누이도 여기 있구나. 아직 아무 것도 먹지 못하잖았냐?”
“예, 삼촌댁.”
봉인은 코마루가 시큼해 울먹울먹하면서 대답했다.
어금은 갈비뼈를 손으로 뚝 비탈아 끊더니 명옥과 봉인을 나눠 주었다.
그러자 봉순이 칭얼거렸다.
“아냐, 엄마, 날 달라. 응~응~”
봉인은 서너 살 지하인 동생이 불쌍하다고 자기에게 차려진 갈비를 주었다. 그래서 명옥은 자기에게 차려진 갈비를 오빠와 엇바꿔가면서 나눠 먹었다.
어금이 나가 할머니 성단에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한참 후 할머니 성단이가 떡과 국물을 들고 와서 봉인과 명옥도 저녁을 먹었다.
할머니는 어미 없는 그들 오누이가 불쌍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뒤이어 할머니는 며느리들을 시켜 애들에게 몽땅 저녁을 먹이게 했다.
그 후부터 할머니 성단은 연년생들인 자기 막내딸 계순과 똑같이 봉인, 명옥 오누이를 보살폈다.
물은 에우기에 가고 애들은 거둬 주는 데를 따라 간다고 어머니를 일찍이 여읜 봉인과 명옥은 자기들을 어머니처럼 아끼고 고와하고 보살펴주는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따르면서 할머니 말씀이라면 아주 잘 들었다.
가을이 오자 할머니는 애들을 데리고 산속에 가서 다 파간 감자밭을 돌아다니면서 파가지 못한 감자를 팠다.
삽자루만큼도 안 되는 봉인은 사내애노라고 삽을 둘러메고 달아 다니면서 감자가 있을 만한 데는 폭폭 팠다.
“할머니, 감자!”
“오, 그래, 에이고, 우리 봉인이 용하다. 제 얼굴만 한 감자를 다 파내고.”
성단은 봉인이가 파낸 큼직한 감자를 쥐여 흙을 싹싹 닦아 광주리에 담고 나서 봉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봉인은 할머니의 칭찬을 받고 좋아서 외까풀 눈이 실눈으로 되고 입이 귀밑까지 쭉 째질 지경이었다.
그 모양을 보고 봉인보다 한살 이상인 계순이 시샘이 나 도도거렸다.
“어머니는 그저 봉인 밖에 모르면서. 나와 명옥은 칭찬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 원, 분해 죽겠다.”
성단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수건으로 땀을 닦고 나서 초롱초롱한 쌍까풀눈을 흘기는 계순의 얼굴을 만져주었다.
“에이구나. 내 딸아, 우리 막내딸을 누가 미워하겠냐? 응? 난 우리 딸이 영 곱다.”
성단이가 쪼그리고 앉으면서 이마에 이마를 대고 “도글도글” 하면서 얼렸다. 그제야 계순은 배시시 웃었다.
계순과 명옥은 할머니를 따라다니다가 “여기 감자가 있는 것 같다.” 하고 말하면서 할머니가 호미로 파려고 하면 “할머니, 놔 둡소. 우리 파 보게.” 하고 바삐 소리치고는 손으로 파보군 했다.
닭 알만한 감자알이 흙속에서 드러나자 애들은 환성을 올렸다.
“할머니, 감자 나왔습니다.”
성단은 계순과 명옥이 고사리 손으로 파는 흙속에 드러난 감자알을 보고 대견해했다.
“오, 그래? 계집애들도 장하다.”
계순과 명옥이 손으로 파는데 저쪽에 갔던 봉인이가 뛰어왔다.
“물러나라. 삽으로 파자.”
“안 돼, 이건 우리 파낸 거야.”
그러나 봉인은 계순을 활 밀어내고 삽으로 푹 팠다. 그런데 바삐 삽질하다나니 감자가 한쪽이 쓱 잘리어나갔다.
“봐라, 감자알이 찍혔어. 어머니, 얘를 보시요.”
성단은 눈을 흘기는 계순을 말리였다.
“응, 알았다. 이미 그렇게 된 걸 어찌 하겠니? 싸우지 말라.”
그래도 계순은 도도도 거렸다.
“항상 자기 더 잘 하는 척 하긴.”
봉인도 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 어떻게 너네 계집애들과 비하겠니? 할아버지 말씀하던데. 난 이 집안의 14대 장손이란다. 넌 뭐냐?”
성단은 우쭐해서 삽자루를 왼손에 쥐고 허리에 오른손을 찌르고 선 봉인을 보면서 우스워 코를 싸쥐고 웃었다.
계순은 눈이 동그래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14대 장손이란 건 뭣입둥?”
“그래, 우리 봉인은 우리 개성 최씨네 집안 열네 번째로 대를 이은 기둥손자란 말이다. 집으로 말하면 기둥과 같지. 기둥이 없으면 집이 무너지고 말지.”
명옥은 두 손의 흙을 털면서 봉인을 쳐다보면서 “와~ 오빠 정말 대단하구나. 우리 집의 기둥이라고 하지 않니?” 하고 감탄했다.
그래도 계순은 앵두입술을 옥물더니 뾰로통해 했다.
“쟤가 우리 집 기둥이라고? 쟤가 없는 날엔 우리 집안이 무너지겠구나. 흥! 누가 그 말을 곧이듣는다더니? 픽!”
그래도 봉인은 옆구리에 손을 찌르고 턱을 바짝 쳐들고 외까풀 눈으로 계순과 명옥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반나절을 헤매 성단은 애들을 데리고 감자를 반 광주리나 파서 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덕대 위에서 감자갈이를 내려다가 감자를 갈기 시작했다.
계순이 “어머니, 내 갈아 보깁소.” 하고 응석을 부렸다.
“그래라.”
성단은 함지 안에 놓은 감자갈이를 훌 넘겨주면서 주의를 주었다.
“이 양철 판 뾰족뾰족한데 손이 맞히면 베져. 주의해.”
“양.”
성단은 밖에 나가 땔나무를 안아 들여다 놓고 저녁준비를 했다.
계순은 어머니가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끝내 감자갈이 판에 애고사리 손을 스치고 말았다.
“아, 아파라.”
“어디 보자.”
성단이가 부엌에서 솥을 부시다가 솔을 놓고 와서 손을 쥐고 보니 무명지등에 빨간 피가 돋아 나오고 있었다. 성단은 입으로 피를 뽁 빨고는 헝겊을 주어다가 싸매주었다. 대신 명옥이가 나머지 감자 몇 알을 싹싹 갈았다.
해가 질 무렵이 되자 솥에서 구수한 감자떡 냄새가 났다. 둘째, 셋째, 넷째까지 세간나고 다섯째마저 갑산으로 감자농사 하러 가다나니 집에는 최구장 내외에 경숙과 계순, 봉인이네 오누이만 남았다.
반나절 역사 질 해 발간 장물 콩을 딱딱 박아놓고 시루 가마에 얹어 쪄낸 감자떡은 여섯 식구가 먹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성단은 감자떡을 그릇에 담아 운주동 한마을에 있는 셋째아들과 넷째아들네 집으로 가져갔다.
서걱서걱 해도 감자떡은 별 맛이었다.
계순과 봉인은 감자떡을 먹으면서 너무 맛이 있어 “양, 양, 맛있다. 오래 오래 맛있다.” 하고 노래 부르듯 했다.
그런데 봉인은 쩍 하면 한살 이상인 작은 고모와 말다툼을 하다가도 손찌검 질을 하면서 싸우기도 했다.
오늘 저녁에는 떡을 먹으면서 봉인이가 먼저 말썽을 일으켰다.
“내 계순보다 감자를 더 많이 팠어!”
그러자 계순은 봉인을 손가락질하면서 피씩 웃었다.
“우스워라. 삽으로 푹 판 게 감자가 잘리어나가지 않았니?”
“너희들이 파지 못한 걸 내 삽으로 팠지?”
“아까운 감자를 네가 찍어 버렸기에 절반이나 잃어버렸다.”
“아니야!”
“옳아!”
“아니야!”
“옳다!”
봉인과 계순이 마주서서 입씨름을 하자 최구장은 저로 밥상을 탕 치면서 고함쳤다.
“그만하지 못해?!”
그래도 봉인은 입이 뾰족해 중얼거렸다.
“이 놈새끼들이! 어디 맞겠냐?”
최구장이 곰방대를 뽑아 치려고 하자 봉인은 달아났다. 그러나 명옥과 계순은 달아나지 않고 앉아 있다나니 최구장이 치는 곰방대에 머리를 딱딱 맞았다.
계순은 성단의 품에 안기면서 울고 명옥은 머리를 싸쥐고 울었다.
“엄마~ 엄마~”
성단은 명옥이 불쌍해 계순과 함께 품에 껴안고 영감을 흘겨보았다.
“어미 없는 애를 왜 쳐요?”
성단이가 애들을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최구장은 안 되였던지 쳐들었던 곰방대를 내리워 담배를 채워 부시를 쳐 물고 빨며 “에헴, 에헴.” 하고 마른기침을 하며 훌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도 어미 없는 오누이의 설음을 느꼈던 것이리라.
쓸쓸한 팔간집 마당에는 벌거스름한 낙조가 삐겨들어 오누이의 설음을 더 짙게 만들었다.
6. 뿌리
최구장이 운주동에 차린 서당은 요즘 또 일본 헌병 놈들 때문에 위기를 겪게 됐다. 응삼과 영팔, 수길은 스승 최구장을 도울 대신 배은망덕하고 최구장의 가르치는 내용을 염탐해 나까노라 소대장에게 고발했다. 나까노라 소대장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면 인차 끼무라 국장에게 보고했다.
교활한 헌병대와 개다리 응삼의 감시 밑에 최구장은 운주동 서당을 진지로 민족주의 전통교양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오전, 최구장은 아침 숟가락을 놓은 후 바깥 날씨가 유난히 따뜻해 마루에 앉아 대통을 길게 뻑뻑 빨아 들이켰다가 담배 연기를 후 내뿜었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본 놈들은 우리를 점점 살기 어렵게 만든다. 목을 조이다 못 해 이젠 조선말을 하지 못하고 조선 글을 가르치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름도 일본 놈들의 이름처럼 창씨개명을 하라고? 개놈들, 우리가 어찌 네 놈들의 섬나라 오랑캐 같은 대화민족으로 된단 말이냐? 흥!)
최구장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갑갑해났다. 운주동 서당이 위기를 겪고 조선 사람들의 대화민족으로 동화될 것을 강요하는 일본 놈들의 성화에 견디기 어려웠다. 설상가사상으로 요즘 며느리를 잃은 아픈 마음의 상처에마저 소금을 맞은 듯 했다.
그는 담배대통으로 마루턱을 툭툭 치더니 담배연기를 푸~ 푸~ 내뿜었다.
“응삼과 영팔은 사람새끼 아니야. 자기들이 배운 서당 방을 지켜줄 대신 뭐야? 배은망덕하게도 섬나라 오랑캐들 밀정질을 하면서 고발까지 하다니? 에잇, 길러준 개 주인의 발뒤축을 문다고, 에잇, 참, 개만도 못한 놈 새끼들! 개라면 주인을 보면 꼬리나 치지. 퉤! 개새끼면 잡아먹지. 흥!”
그는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올라 벌떡 일어났다. 그는 대통을 옆구리에 찌르고 은빛구레나룻을 흩날리며 글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선후하여 봉인과 봉순, 봉문이 어시들과 함께 들어왔다.
최구장은 오늘 따라 손자들을 일일이 둘러보면서 어시들이 다 온지라 자못 엄숙하게 말했다.
“모두 바쁘더라도 거기 앉소. 긴히 할 말이 있소.”
경숙과 어금이 그리고 셋째며느리가 앉았다. 좌석을 다 정하고 앉자 최구장은 앞자리에 좌정하더니 아주 엄숙하고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 손자들에게 이름을 지어줘야 하겠소. 명심들 하오.”
그러자 경숙이가 최구장에게 물었다.
“이름이라니요? 우리 앤 봉인이 아닙니까?”
그 말에 어금도 의아해 했다.
“혹시 시아버님도 일본 사람들의 말대로 창씨개명을 하려는 게 아닙니까?”
셋째며느리는 묵묵히 시아버지의 눈치만 살펴보고 있었다.
최구장은 건 가래를 떼더니 한마디, 한마디 똑똑히 말했다.
“무슨 놈의 생벼락을 맞을 창씨개명이야. 일본 놈들이 창씨개명을 하라는 바람에 급급히 우리 조선 이름을 똑바로 지어주겠다는 말이요.”
그제야 아들며느리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최구장은 정중하게 말했다.
“이제껏 저 애들이 부른 이름은 모두 어린애 때 부르는 애명이었소. 그러니 정식이름을 지어주겠소. 봉인은 근형, 봉순은 근덕, 봉문은 근활이라고 지었소. ‘근’ 자는 뿌리라는 ’근’ 자요. 저 애들이 이담 커서 우리 개성 최 씨네 뿌리, 나아가서 우리 조선민족의 뿌리를 잊지 말라는 뜻에서 뿌리 ‘근’ 자 돌림으로 지은 게요. 이담 손자를 몇을 낳든지 모두 뿌리를, 근본을 잊지 말도록 ‘근’ 자 돌림으로 짓도록 하라.”
“예-”
모두들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어시들은 이젠 집으로 가도 된다. 근형과 근덕, 근활아,”
“예!”
“이제 마을 애들이 오면 함께 조선 글을 공부하자.”
“야~ 좋다.”
손자들은 어려운 천자문을 배우다가 천자문보다 조금 쉬운 조선 글을 배운다니 좋아서 환성을 질렀다.
최구장은 애들이 오기 전에 흑판에 석회덩이로 백두산과 천지를 그려놓고 백두산이라고 큼직하게 써놓았다.
드디어 애들이 삼삼오오 어른들의 손을 잡고 서당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럼 오늘 공부를 시작하겠다. 여기 흑판에 써놓은 글자를 어떻게 읽느냐?”
그때 아래 방에서 웬 애가 “백두산!” 하는 소리가 울렸다.
애들이 머리를 돌려 아래 방 쪽을 보니 문에 난 옹이구멍으로 들여다보던 명옥이 문까지 빠금히 열고 소리쳤던 것이다.
“거 계집애가 웬 소리냐? 얼른 문 닫지 못할까? 삼실이나 뽑을 게지.”
최구장이 고함치면서 옆구리에서 대통을 빼들자 질겁한 명옥은 입을 빼쭉 하더니 문을 닫고 아래 방으로 내려갔다.
상순은 허연 코 물을 풀쩍거리면서 히히 웃었다.
“가시나가 무슨 공부야. 삼실이나 뽑을 게지. 흥!”
우쭐하는 상순을 보고 최구장은 눈을 무섭게 흘기었다.
“상순아, 그럼 못 써. 계집애라고 깔보면 안 돼. 에헴.”
그러자 상순은 머리를 숙이었다.
“계속 배우자. 따라 읽어라. 백두산!”
“백두산!”
애들이 따라 읽는 낭랑한 소리가 서당에 차고 넘쳤다.
뒤이어 최구장은 “‘백두산’이란 글자를 읽으면서 모래판에 열 번씩 써라.”
“예~”
“뭐? 백두산?!”
이때 서당 밖에서 새된 소리가 울렸다.
모두들 바깥을 내다보니 나까노라 소대장이 응삼과 영팔을 앞세우고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응삼은 들어서자마자 삿대질하며 가물에 실 돌피 같은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최구장, 왜 또 조선 글을 가르쳐?”
그러자 최구장은 앉은 자리에서 응삼을 손가락질하면서 질책했다.
“너 정말 점점 말이 아니구나.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고. 누구 보고 삿대질하며 반말이냐?”
나까노라 소대장은 군도 자루를 잡으면서 거들먹거렸다.
“최군 목에 개패를 걸어!”
류강철이 따라 들어와 통역하자 응삼과 영팔이 줄이 달린 패쪽을 들고 들어와 주춤주춤 하다가 최구장의 목에 걸어놓았다.
“무슨 짓이냐?”
나까노라는 말해주라고 영팔에게 손짓했다.
영팔은 개다리질을 곧잘 했다. 차렷 자세까지 취하고 목에 핏줄을 세우면서 고아댔다.
“이젠 조선말을 하지 못해. 대일본 제국의 법을 어긴 죄인놈에겐 이런 패쪽을 걸어준다.”
그 말에 최구장은 천천히 일어나더니 나까노라와 영팔을 쏘아보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갔다.
“왜 이래?”
영팔은 기가 눌리어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찰나 최구장은 목의 패쪽을 벗겨 제꺽 영팔의 목에 걸어놓았다.
영팔은 개패를 벗어 쥐고 최구장에게 달려들었다.
“이건 영감에게 건 거야.”
그러자 최구장은 무섭게 영팔과 응삼을 손가락질하며 욕했다.
“이 일본 놈들 발바리놈들아, 너희들은 조선 사람이 아니냐? 너희들이야 말로 조선 사람들을 팔아먹는 죄범들이야. 일본 놈의 개놈들게게 개패를 걸어야 해! 개놈새끼들!”
영팔은 개패를 들고 최구장과 나까노라 소대장을 번갈아보면서 머리를 숙였다.
나까노라 소장이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코밑 가재수염을 쓰다듬더니 “허허허.” 하고 허무한 웃음을 웃었다.
“이 영감이 미쳤나? 허허, 단단히 경을 치러야 하겠구먼.”
그래도 최구장은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슨 개 뼈다귀 같은 새 소리야! 우리 조선 사람들이 조선말을 하지 않고 그래 섬나라 오랑캐들의 개소리를 치라는 거야? 너희들 죄꼬만 섬나라 오랑캐들 개소리를 우린 모른다.”
최구장이 고함치자 나까노라는 군도 자루를 거머쥐어 군도를 뽑으려다가 도로 뒤로 밀어재끼었다.
“최구장, 당신은 이 부근에서 제일 유식한 양반이 아니고 뭐요? 당신은 앞장서 대일본 제국의 말을 배우고 일어를 애들에게 가르치란 말이요. 우린 당신이 우리 대일본 제국에 공로를 세우면 서당을 계속 꾸리게 하겠네. 잘하면 서당 방이 아니라 이 마을에 커다란 벽돌학교를 지어주겠소이다. 알겠소까?”
나까노라는 이쯤 말하고 나서 옆에 선 류강철을 보고 통역해주라고 눈치 했다.
통역을 듣고 난 최구장은 피씩 쓴 웃음을 지었다.
“안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런 일은 없다. 안 된다, 안 돼, 절대 안 되지.”
류강철이 그 말을 통역해주자 나까노라는 군도를 쑥 뽑아들더니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 영감두상을 붙잡아가!”
“하이!”
영팔과 응삼은 최구장의 양팔을 붙잡고 류강철은 뒤에서 마구 밖으로 떠밀었다. 뒤에서 나까노라는 빼들었던 군도로 통나무흑판을 탁 내리찍었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발길로 흑판과 석회 덩이 통을 탁 차 넘기고 밖으로 나왔다.
뒤늦게 소문을 듣고 달려온 경숙과 경민 등이 영팔의 손을 붙잡고 사정했다. 그러나 사정을 봐주기는커녕 나까노라 소대장의 안전에서 최구장의 두 팔을 바 줄로 꽁꽁 묶어 문 밖으로 마구 떠밀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근형과 근덕, 근활 그리고 명옥까지 달려와 끌려가는 할아버지 다리를 붙잡고 꿇어앉아 엉엉 울었다.
나까노라는 사정없이 애들을 마구 뜯어 내쳤다.
최구장은 애들을 내려다보면서 힘주어 말했다.
“할아버지가 없어도 너희들은 우리 조선 사람의 뿌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꼭 조선어를 배우고 조선말을 해야 한다. 알겠느냐?”
애들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주먹 밑으로 할아버지를 붙잡아가는 일본 놈과 영팔 등을 쏘아보았다.
최구장은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머리를 들어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는 가슴을 쭉 뻗치고 은발을 흩날리면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저 멀리 먹장구름 밑에서 불뱀이 기운봉 산허리를 내리치더니 먹장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뒤이어 대지에는 새뽀얗게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7. 사내자존심
거무칙칙한 밤하늘에서 고기비늘구름떼가 총망히 흘러가고 간혹 하현달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얼굴을 내밀어 대지의 쓸쓸한 산과 들에 여기저기 널린 오두막들을 비추며 뭐라고 중얼거리다가도 뭣이 그렇게 두려운지 구름 속으로 사라지군 했다.
일본 놈들은 기운봉 기슭 뭇 산들에 꽉 들어선 수림을 눈독들였다. 목재를 실어내가기 위해 우시장으로부터 영월동과 운주동을 거쳐 명천과 경성에까지 통하는 길을 닦기 시작한지도 이젠 몇 해 잘됐다.
일본 놈들은 자기 야욕을 채우려고 농사꾼들을 강제로 인부로 끌어다가 운주동 북산과 영월동 서산 부근의 아름드리 원목을 난벌해 길옆에 실어내려 저목장에 쌓아두었다. 그 놈들은 저목장의 아름드리 원목을 마차와 자동차에 실어 우시장 역에 실어갔다. 거기서 기차에 원목을 꽉 박아 싣고 남으로, 남으로 달려 서울에 가고 부산에 갔다. 또 일부 원목은 부산에서 기선에 실어 일본 본토에까지 실어다가 목조건축물을 짓는데 썼다.
일본 놈들의 야만적인 난벌로 해 영월동 서산과 운주동 북산은 오래지 않아 벌거숭이로 돼갔다. 총을 멘 일본 헌병들은 야마모도 소장의 지시대로 밤낮 저목장에 우등 불을 피워놓고 지켰다. 거무칙칙한 산등성이에까지도 우등불빛이 어려 붉게 물들어있었다. 영월동 병완의 집 굴뚝에도 게딱지 같은 고약딱지기발이 꽂혀 펄럭이고 있었다.
며칠 전에 야마모도와 한길수가 헌병들과 영팔 등 졸개들을 끌고 영월동 병완의 집에 뛰어들었다.
야마모도는 거만스럽게 군도자루를 잡고 병완의 집구들에 올라서서 대들보를 기웃기웃 올려다 살피더니 마른기침을 했다.
“에헴, 오늘 내로 이 집을 내란 말이야. 여기에 우리 림산파출소를 앉히겠어.”
류강철의 통역을 들은 병완은 기막혀 야마모도를 부릅뜬 눈으로 쏘아보았다.
“아니, 정신 나갔는가? 제 집에서 내쫓으면 어데서 살란 말인가?”
한길수는 옆에서 깨 고소해 말 이발을 드러내고 헤벌쭉거렸다.
야마모도는 군도로 구들바닥을 쿡 찔러 짚고 서서 호령했다.
“어데서 살든 관계없어. 조선이 통 채로 우리 대일본 제국 거로 됐네. 우리 황군이 어데 군사시설을 앉히려면 자네 집이 아니라 군청이나 서울이라도 내놔야 해. 알만 해?!”
병완은 아무리 말해도 쓸데없다는 것을 알았다. 헌병들은 농짝이랑 파출소에 쓸데없는 가정기물을 마구 내던졌다.
병완은 한마디 말도 해보지 못하고 일본 헌병 놈들의 총창에 떠밀리어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기 집에서 쫓기어났다. 끼무라 국장과 야 마모도 소장은 병완이 길닦이공지 총 도감도 그만둔 데다 종무소식인 성칠을 잡는 미끼로도 써먹을 수 없다고 인정하고 집을 빼앗은 것이었다.
병완은 자존심을 꺾고 솔가해 영월동을 떠나 운주동에 가서 맏아들 창준의 집에 한데 들 수밖에 없었다.
기준은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개놈 새끼들, 남의 집을 마구 빼앗다니? 내 아무 때든 그 놈들을 도끼로 대갈통을 찍어놓고 말지 않는가 봐라.”
창준은 도리머리 질 하면서 울뚝밸이 센 동생을 말렸다.
“그러지 말라. 무리승냥이 같은 일본 놈 새끼들을 다쳤다가 어떻게 산다고 그러니? 온 집안이 몰살을 당하자고 그러니? 아버지 말씀대로 만주에 가면 다야. 똥이 무서워 피하니? 더러워서 피하지.”
병완은 두 아들의 말을 묵묵히 들으면서 앉아 있다가 한숨을 구들바닥이 꺼지게 내쉬었다. 뒤이어 그는 기준을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병완은 기준을 불러 세웠다.
“얘야, 울뚝밸을 쓰지 말고 꾹 참아라. 항상 네 울뚝밸이 근심된다. 내라고 밸이 없어 그 놈들에게 집을 빼앗기고 쫓기어 난 거 같니? 임시 자존심을 꺾고 원수를 갚을 기회를 기다리자.”
기준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황소숨을 푸푸 몰아쉬었다.
병완은 기준의 어깨를 다독였다.
기준은 머리를 숙이고 툴툴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병완은 두 아들 집 자손들을 데리고 올해 새로 개간한 바위돌밭으로 메밀을 거두러 운주동 뒷산으로 갔다.
“아버지, 영월동 서산에는 가보지 않겠습니까?”
기준의 물음에 병완은 바위돌 틈 새로 해 산으로 올라가면서 “며칠 후에 가보자. 한영감이 불에 탄 집을 손질한다더라. 그놈새끼 보기 싫다.” 하고 말했다.
“쉬파리 무서워서 장을 담그지 못하겠습니까?”
그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으면서 소잔등 같은 너럭바위가 소 무리처럼 누워있는 바위돌밭에 갔다. 바위 돌 틈새에 재를 펴놓고 심은 메밀은 끝 초리가 꼿꼿이 쳐들고 있었다.
“좋은 밭을 두고 이게 뭐냐? 우린 뭘 먹고 살아야 하느냐?”
병완이 답답해하자 기준은 “이젠 여기서 일본 놈들의 수하에서 못 삽니다. 만주로 들어갑시다.” 하고 말했다.
병완은 말라버린 메밀을 베면서 말했다.
“정작 고향을 떠나자니까 고향 모든 게 아깝구나. 김려생 할아버지께서 명천에 입북한 후 4백여 년이나 대대로 살아온 우리 고향이 아니냐? 어쩌면 우리 고향이 이렇게 됐느냐? 참 안타깝다.”
기준과 창준은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들은 4헥타르나 되는 바위 틈새의 메밀을 베였지만 몇 십 단이 되지 않았다.
며칠간 온 집 식구들이 메밀을 거둬들여 마당에서 도리깨로 두드려 낟알을 마대에 담고 보니 대여섯 마대 밖에 안 됐다.
아낙네들이 메밀을 껍데기채로 절구통에 넣고 찧어 죽물이라고 끓였다.
모두들 밥상에 둘러앉아 천정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메밀죽물도 아주 맛있게 후룩후룩 마시였다. 그런데 목에 꺼슬꺼슬한 까만 메밀 겨가 걸려 자꾸 물을 마셔야만 했다. 그래도 쌀알이 들어간 죽물이라도 마실 수 있어 모두들 다행으로 생각했다.
한편 영월동에서 병완을 몰아낸 한길수는 삼년 앓던 이빨을 뺀 것 같았다.
그는 개 잡은 포수처럼 어깨 으쓱해 쏘다니면서 곁을 쳐서 복판을 울리는 수를 써서 병완을 따르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못살게 굴었다.
(독불장군이라고 제 아무리 천하장사 병완과 성칠이라고 해도 용빼는 수가 있겠는가?)
그는 권총까지 차고 거들먹거리면서 희미한 등잔불이 창문으로 내비치는 엄창렬의 집으로 다가갔다.
늑대를 만난 개울가의 버드나무 초리들이 초겨울 바람을 얻어맞아 아츠러운 비명소리를 질렀다.
징검다리를 건너가다가 한길수는 졸지에 매끄러운 돌을 빗디뎌 핸들 넘어가 엉덩방아를 쿵 찧었다.
“아이쿠!”
개울물에 물앉은 한길수는 어찌나 아팠던지 어슴푸레 뜬 달빛아래 오만상을 다 찡그리며 말 이발이 다 드러났다.
“아니, 주인님, 어떻게 하면 이리 좁은 개울물에 다 빠졌습니까?”
한길수는 너무 아파 왜가리 목을 배배 틀며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엉덩이를 만졌다.
“이놈아, 남은 아파 죽을 지경인데 무슨 개소리냐?! 얼른 부착하지 않고!”
수길은 길수를 부축해 일으켰다.
“주인님, 내 등에 업히시오.”
“에끼 이 놈아, 토끼가 어찌 호랑이를 업느냐?”
길수는 이젠 덜 아픈지 입씨름 질을 하면서도 수길의 등에 업혀 타다 남은 토성안집으로 되돌아갔다.
이윽고 옷을 갈아입은 한길수는 다시 수길의 부축을 받으면서 창렬의 집으로 발걸음을 쩔룩쩔룩 옮겼다.
저쪽 오두막 같은 집 쪽에서는 반딧불만한 등잔불빛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수길은 옆에서 한길수를 부축하며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주인님, 우시장에 기와집을 여러 채나 두고 어째 이런 두메산골 다 탄 집을 수리하자고 합니까?”
“이 놈아, 이 두메산골을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만 보지 말라. 여긴 병완과 내가 사내대장부의 자존심을 내걸고 싸운 산골짜기야. 그 놈을 고향에서 몰아내고 그 놈들이 보란 듯이 번듯하게 살아야 해.”
“오, 참 고명합구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이라구야. 토끼도 굴이 여러 개느니라. 시내와 산골에 집을 두고 사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참 좋지요.”
“종년들을 가득 두고 사는 재미 또 얼마나 꿀맛인지 아는가?. 하하하, 네편네도 보지 못하는 골 안에서 말이야. 하하하. 알만해?”
“오, 건 몰랐구먼요.”
그제야 수길은 주인이 이 두메산골에 특별히 신경을 쓰는 까닭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
이젠 귀못이 박힐 지경인 그 말에는 수길도 속으로 웃음이 피씩 났다.
(건 끼무라 국장이 당신에게 늘 하는 말이 아닌가요? 배운 게 고작인가요? 우리에게 그 말을 고대로 써먹으면서. 쳇.)
창렬의 집 삽작문을 열고 들어선 길수는 건 가래를 떼면서 틀스레 고래고래 소리쳤다.
“창렬이 있어?!”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길수는 수길에게 들어가자고 머리 짓을 하더니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도 하기 전에 건 가래를 떼면서 다짜고짜로 문을 뚝 떼고 들어섰다.
그는 말 이발을 드러내놓고 헤헤 웃으면서 등불을 빌어 은희를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은희는 등 곬에 소름이 쪽 끼쳐 누더기로 얼굴을 반쯤 가리면서 돌아앉았다. 창렬은 누더기를 덮고 누어 있다가 몸을 겨우 반쯤 일으켰다. 그는 길수가 또 무슨 수작을 피울지 몰라 뒤숭숭하고 겁이 났다.
“밤중에 웬 일이오?”
창렬이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일어났다.
“에헴, 놀랄게 없네.”
한길수는 거만하게 신을 신은 채 구들에 올라섰다. 그런데 무슨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길수는 호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코를 싸쥐었다.
“음, 웬 썩은 냄새야, 딱 개굴 같군.”
한길수는 단도직입했다.
“이 집에서 내게 진 빚을 물자면 이제도 삼대가 대대로 물어도 다 갚지 못하네.”
창렬과 명순은 몸 둘 바를 몰랐다.
“밭에다 곡식도 심지 못하게 해서 죽물도 먹지 못하는데 뭘 어찌 하라는 말이요?”
길수는 옆구리에 찬 권총집을 앞으로 당겨다 끌어안고 앉으면서 은희를 힐끔 건너다보며 호통쳤다.
“내일부터 우리 집에 가서 탄 집을 손질하는 일이나 하게나.”
명순이 말렸다.
“어이구, 우리 나그네 폐병에 오늘일가 내일일가 하는데 어떻게 일한다고 그럽둥?”
수길이 끼어들었다.
“허허, 병완이 밖에 모르는 놈들, 참 잘 됐소. 보오. 우리 마을에서 쫓겨난 병완을 믿고 살 수 있소? 우리 주인은 이젠 일본 자위대 대장이 됐단 말이오. 우리 주인 말을 잘 들으란 말이오.”
한길수는 득의양양해 이번엔 수길을 번쩍 춰 올렸다.
“수길은 이젠 영월동 구장으로 됐어. 이후부터 병완의 말을 듣지 말고 이구장 말을 꼽싹꼽싹 들으라구.”
창렬이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사정했다.
“구장인지 돼지 구신지, 제발 사람 좀 들볶지 마오."
"뭐라고? 감히 구장님을 놀려? 엉?"
"은녀가 이젠 일곱 해나 부엌더기로 살았는데 다 죽게 된 나까지 이럴게 있소?”
한길수는 이때라고 은희를 힐끔 건너다보면서 본심을 드러냈다.
“그럼 저 은희를 우리 집에 부엌데기로 들여보내오.”
“양?”
창렬 내외는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은희는 질겁해 누더기를 쓰고 온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안 되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은희를 데려가지 못하오.”
“허허허, 정신이 있는가?”
한길수가 너털웃음을 하더니 위협하기 시작했다.
“똑똑히 들어. 상호가 성칠의 포수대를 따라 독립군에 들어갔어. 이 집식구들을 몽땅 죽여도 속이 시원치 않아. 알만 해!?”
옆에서 수길도 맞장구를 치며 으르렁거렸다.
“이게 어디 장마당인가 해? 누구와 흥정을 하는 건가?”
창렬은 입을 딱 벌린 채 멍하니 집 한쪽 구석을 쏘아 볼뿐이었다.
“장마당처럼 흥정할 셈인가? 하도 내가 고향 사람들이라고 끼무라 경찰국장에게 숱한 돈을 팔면서 잘 말했기에 오늘까지 살아 있는 줄 알게나. 독립군 가족은 몽땅 죽일 수도 있어. 노비로 되려가는 건 생각해준 거야.”
수길이 주인을 도와 짜개진 나무에 쐐기를 깊숙이 박았다.
“이젠 우리 한대장의 말을 잘 듣게나. 너희 일가를 살려 준 우리 주인님이 은희를 첩으로 삼은들 무방하지 않는가. 안 그래? 흥!”
온 집안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한길수는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권총집을 뒤로 홱 젖히면서 을러멨다.
“밤이 깊었어. 은희를 데리고 가자.”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던 은희는 그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리면서 어머니 잔등 뒤에 숨으려고 했다.
“가자, 이년. 어시를 살리겠니? 어찔래?”
수길은 달려들어 은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이고, 엄마, 아버지~”
그러나 수길이 잡아끌고 뒤에서 한길수가 잔등을 떠미는데 나약한 은희가 어찌는 수가 있겠는가?
뒤에서는 울음소리를 반주하여 쿨룩쿨룩 기침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저걸 보소, 은희와 그녀 부모의 가긍한 처지를. 자기 자녀마저 한밤중에 도살장 같은 한길수네 집에 부엌데기로 끌려가도 구할 수 없는 어시의 마음인들 오죽 아프겠는가?
집 밖에서는 을씨년스러운 초겨울 바람이 휴, 휴 무서운 비명을 지르면서 스쳐 지나갔다.
8. 암범과늑대
싸늘한 달밤에 처량한 달빛이 한길수의 차디찬 사랑채 안을 비추었다.
은희는 다 타버린 폐허 같은 길수네 토성 안 사랑채에 들어가 누더기이불을 쓰고 자리에 들었다.
온 여름 불도 때지 않아 습기 찬 구들에 누더기이불마저 축축해 누어있을 수 없었다. 한길수가 마을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연 십여 일 동안 대충 손질한 몸채에 한길수와 월선이 들어있고 줄느런히 들어선 곁채에 영팔과 응삼, 수길이 들어있었다.
은희는 야밤에 짐승보다도 못한 그자들이 더 무서워 종시 잠들 수 없었다.
(아버지 엄마만 아니면 이 놈의 승냥이 굴에서 도망치고 말건데.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은희는 스르르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희읍스름한 달빛이 가을바람이 이영 초리를 스치는 와스스 소리 속에 쓸쓸히 집안을 비추었다.
삐꺼덕 대문의 작은 문짝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길수가 응삼을 데리고 대문 안에 들어서더니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면서 어깨 으쓱해 우멍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성큼성큼 몸채에로 걸어갔다.
희읍스름한 달빛이 깔린 마당에 허연 무명저고리에 까만 몽당치마를 입은 은희가 물동이를 팔에 끼고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은희를 보는 순간 한길수는 길쭉한 말상에 말 이발을 드러내며 웃었다.
“응삼이, 오늘 일은 끝났네. 자넨 집으로 들어가게나. 에헴.”
“예.”
응삼은 좋아라고 사랑채 곁방에 들어가 버렸다. 춘실이 맛있는 명태 국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길수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다가오는 은희의 왼팔을 붙잡았다.
“얘, 주인을 보고 인사할 줄도 몰라?”
“주인님, 무사합둥?”
“오, 그래, 밤중에 동이를 이고 물 길으러 가냐?”
은희는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가는 소리로 “예.” 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길수의 팔을 살짝 뿌리쳤다.
한길수는 고양이 쥐나 생각하듯 말리었다.
“밤중에 무슨 물을 긷는다고 이러니? 내일 길어라.”
“예, 알았습꾸마.”
은희는 길수가 팔을 놓기를 기다려 부엌에 동이를 들여다 내려놓고 나와 사랑채에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한길수가 음충한 눈길로 물을 길으러 가는 은희의 엉덩이를 우멍 눈으로 힐끔힐끔 곁눈질해보더니 다른 궁리를 했다. 그는 몸채에 월선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은희의 뒤를 슬금슬금 밟았다.
은희는 어제 저녁에 자기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푼 주인이 징글스러웠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물을 길으러 가는 자기 뒤를 따라 오는 것이 여간 상서롭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아침 밥을 지으려고 물을 당장 길어오라고 월선이 소리쳤는지라 물을 길으러 가지 않을수 없었다.
(아무리 하면 시퍼런 대낮에야 어찌 하겠느냐?)
은희가 우물가에 가서 동이를 내려놓고 바가지로 물을 퍼 담는데 길수가 사위를 둘러보더니 마른기침을 하며 다가왔다. 은희는 온몸에 소름이 끼쳐 동이에 물을 빨리 퍼 담았다.
“은희, 헤헤. 너도 눈이 있고 귀 가졌으니 알겠지? 널 얼마나 귀여워하고 아끼는가를.”
은희는 다리에 거머리 매달린 것 같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방망이질하듯이 높뛰는 가슴을 눅잦히면서 물동이를 이쪽으로 돌려놓고 물만 퍼담았다.
한길수는 제꺽 물동이를 빼앗아 내려놓으면서 지껄여댔다.
“은희야, 한뉘 종년이나 하고 살겠니? 이팔청춘이 너무 아깝다, 아까와.”
은희는 고양이 쥐 생각을 하는 것이 메스꺼웠다.
(며칠 전 밤중에 집에 뛰어 들어와 뭐라 했는가? 상호와 성칠 오빠가 독립군에 들어가 의병이 됐다고 호통 치면서 우리 일가를 몽땅 죽일 수도 있다고 위협하지 않았던가?)
음충스레 힐끔거리는 눈길, 살기어린 우멍 눈, 헤헤 웃으면서 드러낸 말 이발…
은희는 온 몸에 소름이 끼쳐 한길수를 외면하면서 살금살금 우물 쪽으로 돌아앉아 물을 한바가지, 한바가지 퍼 담았다.
은희 속내는 모르고 한길수는 계속 지껄여댔다.
“나만 믿어라. 그럼 상호 죄도 눈감아주고 네 일가를 몽땅 잘 살게 해주겠어. 알았지?”
은희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물을 퍼 담다가 무슨 생각에 잠긴 듯이 잠간 멈추자 한길수가 이제 수가 드나 해 속심을 드러냈다.
한길수가 은희의 어깨를 껴안으면서 열변을 토해냈다.
“널 첩으로 들여앉힐게. 그러면 저 토성안 집도 주고 너희들 온 집 식구들도 우리 토성안집에 들어와 평생 먹고 입을 근심 없이 복 방에 앉혀놓을게.”
은희가 몸부림치며 “이걸 놓으세요. 놓아!” 하고 고함칠 때였다.
뒤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골짜기를 꽉 메우며 울려왔다.
“년 놈들! 잘 놀긴 놀아!”
뒤를 돌아보니 암범 같은 월선이가 옆구리에 두 손을 지르고 표독스런 눈길로 쏘아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년, 물은 긷지 않고 웬 서방질이냐?”
월선은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차듯이 영감과는 어쩌지 못하고 덮쳐들어 은희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마구 끌고 당겼다.
은희는 억울하게 머리를 당기우면서도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너무 아파 신음소리를 냈다. 한길수는 그저 머리를 홰홰 내저으면서 어슬렁어슬렁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아침 숟가락을 놓자 한길수가 앵돌아진 월선을 슬슬 구슬리였다.
“여보, 아무렴. 내가 당신을 저버릴까? 당신이야 말로 조강지처나 다름없소.”
“또, 또, 누굴 얼려요? 뭐 세살 짜리 앤가 해요?”
월선은 입귀를 비쭉거리면서 훌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한길수가 일어나 따라 나가면서 월선의 손을 잡아 집안으로 끌어 당겨 물앉혀 놓았다.
“여보, 은희가 이 집에서 부엌데기를 못하겠다고 도망칠 까봐 슬쩍 얼려 발목을 잡은 것뿐이오.”
월선은 피씩 쓴 웃었다.
“당신이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곧이들을 거 같아요? 우물가에서 분명 ‘소실로 들여앉히겠다’는 걸 똑똑히 들었어요. 뭐, 이 토성 안 집을 주겠으니 들어와 살라고?”
“건 그저 얼리느라구 한 거짓말이요.”
“이전에도 나를 그렇게 얼렸지. 본댁을 서울에 두고 얼려 내캉 여기서 살았죠. 이젠 내 나이 드니까 새파랗고 야들야들한 계집애들에게 눈독 들여?”
한길수는 딱 잡아뗐다.
두터운 어둠의 장막이 높은 토성 안에 서서히 두텁게 드리웠다. 허연 달이 뜨면서 달빛이 추녀 끝을 핥으면서 희롱하며 창문턱에까지 내리비치자 길수는 아래배로부터 가슴까지 찡 해나면서 끓어오르는 정욕을 참을 길이 없어 이발을 지그시 깨물었다. 낯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고 입에서는 단김이 푸푸 터져나갔다.
그때 사랑방에서 문을 닫는 덜커덕 소리가 났다.
(그래, 은녀가 설거지를 마치고 들어가는 모양이야. 마침 월선이가 가시아버지를 모시러 우시장에 가고 없지. 이때야. 히히히.)
한길수는 잠옷 바람에 하이칼라 번들 이마를 떡 쳐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몸채를 한 바퀴 빙 돌아가면서 살펴도 인기척이 없자 닭을 훔쳐 먹으러 가는 쪽 제비처럼 슬금슬금 사랑 방 쪽으로 다가갔다.
빠드득빠드득 눈을 밟는 소리보다도 한길수의 거친 숨소리가 더 높았다.
은희가 이튿날 아침밥을 지을 물을 길어놓고 금방 사랑방에 들어갔을 때다.
번들이마가 슬금슬금 다가가 문고리를 당겨보니 집안에서 노끈으로 매놓은 것이었다.
그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몸채 쪽을 흘끔흘끔 살피더니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밀었다 했다. 이윽고 노끈이 풀리면서 사랑방문이 훌러덩 열리였다.
한길수는 도적놈처럼 집안에 들어간 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까만 방안 벽을 더듬질하면서 구들 쪽으로 올라갔다.
“야밤에 누군가요? 소리치겠습꾸마.”
은희 화닥닥 일어나면서 불을 켜자고 바스락거렸다.
“쉿- 주인이야.”
한길수가 바삐 나직이 말했다.
“불을 켜야지.”
은녀 말에 한길수는 너스레를 떨었다.
“헤헤헤. 두려워 말라. 난 너를 위해서라면 간이라도 빼주겠다. 요 귀여운 것아.”
별스레 키득키득 웃는 소리와 누더기를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었다.
“기쁠 테지. 온 우시장이 내 말이라면 다야. 난 너 같은 종년도 천당 같은데서 살게 할 수도 있고 18층 지옥에 처넣어 뼈다귀도 추리지 못하게 할 수도 있어.”
한길수가 을러메면서 기신기신 구들에 올라왔다.
“찍소리 치지 말고 고분고분 내 말 들어. 이렇게 누추한 방에서 한뉘 물이나 긷고 변소 똥이나 치면서 살게 있니? 내일부터 응삼과 수길을 보고 우리 작은댁 방에 불을 때라고 할 테야.”
한길수가 입에 엿이나 발라 문 것처럼 달달한 말로 구슬리면서 슬슬 기어 올라왔다. 뒤이어 이불안에 손을 쓱 들이밀어 더듬었다.
“요 귀여운 것아, 널 소실로 맞아들이면 몸채를 다 손질하는 날로 들여앉히마.”
“키득키득”
이불 안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한길수는 황망히 손 더듬질 했다.
“요것아, 좋지? 그래, 널 평생 복을 누리게 할 수 있어. 본댁은 이젠 쉰이 다 돼서 날 싫어해. 이젠 여자로 써먹기는 다 틀렸어. 통 정이 떨어져서 못살겠단 말이다. 진작 소실을 들일 때가 된지 오래다. 에구, 넌 참 탄탄하고 몽글몽글 하구나. 너와 백년을 살았으면 오죽 좋겠느냐.”
한길수가 웃통을 와락와락 벗으면서도 스리슬쩍 계속 늘여놓았다.
“네가 소실로 들어오면 네 애비 폐병도 뚝 떼게 돈을 대줄게. 너도 애비에게 효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애비를 생각해서라도 내 말 고분고분 들어라.”
한길수는 옷을 다 벗자 이불 안에 스리슬쩍 들어가 이불안 여자의 탄력 있고 매끌매끌한 몸을 가로탔다.
그가 막 달려들 때였다. 밑에 깔린 여자가 불시에 두 발로 한길수를 마구 탁탁 차버렸다. 한길수가 채워 여체 위에서 누더기 우에 나뒹굴었다.
“이년이, 감히 누굴 차? 이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한길수가 벌거숭이 몸뚱이를 일으키면서 마귀의 손을 뻗쳐 은희를 붙잡으려고 손 더듬질 했다.
“하하하, 이 놈 두상이, 하긴 잘한다, 잘해!”
이게 웬 일인가?
집 안에 광솔불이 환하게 켜졌다.
실 한오리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 월선이가 누더기이불 위에서 허리에 한쪽 손을 지른 채 장승처럼 떡 뻗치고 서서 암범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뭐? 이젠 나와 통 정이 떨어져서 못 살겠다고? 소실을 들일 때라? 아이유, 분해라.”
월선은 구석에 머리를 숙이고 서있는 은희를 활 밀치었다.
“이 년과 백년을 살았으면 좋겠다던 게 콱 살아봐라!”
월선은 한길수를 표독스레 쏘아보았다. 어두운 집 안에서도 눈에서 불찌가 툭툭 떨어지는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더러운 영감, 아이유, 분해라. 누구 덕에 이 골 안에 발붙이고 이 토성안집을 지었기에? 응? 이 토성안집을 저년에게 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돼!”
“에이유, 에이유. 저년을 얼리느라구 한 농담을 가지고 왜 그래?”
“로망이지 로망, 미쳤어? 저년의 엉덩이가 그렇게 꿀맛일 것 같아? 며칠 전에 내 우물가에서 치근덕거리는걸 보고 싹 다 눈치 챘어. 주책머리 없는 영감태기. 에이유, 아버지~ 저런 못난 놈을 사위라고 서울에서 올라올 때마다 황금덩이를 줬어요? 아버지, 불쌍한 아버지~ 내 처지 얼마나 불쌍하오. 에이유, 에이유~ 아버지, 어머니~”
“이보, 왜 이래? 동네에 소문나겠소. 이런 패가망신이라구야, 원, 토성 안에 보초를 서는 숱한 자위대원들이 있소. 그만하지 못할까! 쯧쯧.”
월선은 누더기를 와락 안아 벌거숭이 한길수에게 마구 들씌워 놓았다.
한길수가 주섬주섬 잠옷을 주어 입으면서 은희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중얼거렸다.
“에이, 막돼먹은 쌍년처럼 계속 떼를 써?! 에헴, 참. 재수 없어.”
한길수는 길쭉한 말상을 절레절레 흔들면서 월선을 죽도록 미워했다. 밸 같았으면 허리춤의 권총을 뽑아 한방에 쏴죽이고 젊고 예쁜 은희를 데리고 살았으면 좋을 것만 같았다.
암범 같은 여편네 앞에서 방귀도 하나 못 뀌고 실컷 개꼴망신당한 늑대 같은 한길수는 괜히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를 차듯 했다.
그는 괜히 은희를 보고 “후에 두고 보자.” 하고 한마디 내뱉고 나서 능구렁이처럼 슬금슬금 바깥으로 빠져나가버렸다.
한길수가 꼬리를 빼자 월선은 시에미 역정에 개 배깨끼 차듯했다. 그년은 바들바들 떠는 은희의 머리채를 잡아 마구 벽에 쿵쿵 짓 쪼아놓으면서 암범처럼 펄펄 날뛰었다.
아이고, 불쌍해라. 저 맞아대는 은희를 보라. 두 손으로 머리를 틀어쥔 월선의 우악스러운 손을 붙잡고 애원하였다.
“제발 살려주세요.”
허나 월선은 사정없이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은희는 머리채를 끗기면서 매만 맞는데 눈물, 코피 흐르고 애원소리 갑갑한 사랑방에 울려 퍼졌다.
월선은 나중에 맥이 모자라 더 때리지 못하고 구들바닥에 물앉아 헐떡거리다가 돼지 멱 따는 소리를 질렀다.
“다시 우리 영감을 넘보았다간 가다리를 찢어 죽여치우겠다. 알겠니?”
그는 표독스러운 눈길로 은희를 쏘아보더니 광솔 불을 훌 불어 끄고 훌쩍 일어나 횡 하니 바깥으로 나갔다.
사실 월선은 우물가에서 한길수가 은희와 치근덕거리는 것을 본 후 며칠 전 한길수가 한 거짓말을 한마디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월선은 본가 집 아버지를 모시러 우시장으로 가는 척 하면서 이날 가만히 은희의 방에 숨어들었던 것이다. 그는 은희를 보고 한쪽구석에 서 있다가 한길수가 들어오면 시키는 대로 이리이리 하라고 했다. 뒤이어 월선은 은희 대신 누더기이불속에 누워 한길수가 하는 짓거리를 다 듣고 키득키득 웃었던 것이다.
은희는 월선의 행악질에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먹칠한 듯이 캄캄한 방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쓸쓸히 어깨를 들먹였다.
(성칠 오빠랑 없으니까 한길수 승냥이처럼 살판 치잖아. 저승 같은 여기에서 어떻게 산단 말인가?)
은희는 생각할수록 살아갈 앞길이 막막했다. 사랑방에서는 그녀가 흑흑 흐느껴 우는 소리가 쓸쓸하게 납덩이같은 밤 정적을 톱질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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