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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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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2)
2015년 11월 04일 17시 19분  조회:2200  추천:0  작성자: 김장혁
                                                8. 고별
        낙엽이 우스스 지던 가을이 어제 같은데 벌써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엄동설한이 대지를 엄습해왔다.
병완은 노친과 함께 일가 자손들을 몽땅 데리고 조상들의 산소를 모신 운주동 뒤 성산에 있는 고성에 올라갔다. 병완의 노친과 며느리는 제사상을 이고 상훈은 괭이를 쥐고 상우는 막걸리단지를 들고 돌 토성 안으로 들어갔다. 산을 둥그렇게 에워싼 이 돌 토성은 고구려의 옛 토성이라고 한다. 돌 토성 안 양지바른 산비탈에 조상들의 산소와 병완의 부모 산소가 모셔져 있었다.
       병완은 노친과 며느리가 제사상을 다 차리자 무릎을 꿇고 김수종 할아버지와 아버지 김승중의 산소에 제주를 부어 올리고 정중히 말씀 드렸다.
       “할아버님, 아버님, 일본 놈들과 그 주구 한길수 놈의 핍박에 의해 자손들이 부득불 간도로 잠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였습니다. 조상들의 산소를 잘 모시지 못하고 먼 길을 떠나가는 이 불효 자손들을 널리 양해하옵소서. 이제 간도에 가서 농사를 지어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고향에 돌아와 조상님들의 산소를 잘 모시겠습니다. 구천에서 자손들이 가는 섭섭한 길에 도움을 주옵소서. 그간 편안히 계십소.”
        말을 마치자 병완은 처자들과 함께 조상님들에게 일일이 큰절 아홉 번 씩 올렸다.
       고별제사를 마친 병완과 자손들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글썽했다. 병완과 창준은 산을 내려오면서도 자꾸 조상들의 산소를 되돌아보았다. 쓸쓸한 조상들의 산소에서는 하얀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쳐 날려가며 윙윙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울려왔다.
이튿날 이른 아침 병완은 일찍이 마루에 나가 기둥에 매놓은 종자옥수수 다섯 이삭을 쥐고 들어와 배낭 속에 걷어 넣었다. 간도 황야에 가더라도 황무지를 개간하고 고향의 씨앗을 뿌려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싶었던 것이다.
아침 식사후 병완과 창준은 언 주먹밥꾸러미와 종자옥수수가 든 배낭 하나씩 둘러메고 낫 한 자루 씩 들고 바깥으로 나섰다.
남들이 얼핏 보면 산속으로 나무하러 떠나는 나그네들 같아 보였다. 남들의 눈이 싫어 집식구들과 집안에서 작별하고 바깥에 따라 나오지 못하게 했다.
눈보라치는 엄동설한에 대대로 탯줄을 묻고 살아온 고향을 떠나는 병완과 창준의 발자국마다 이별의 피눈물이 고였다.
기준과 상길이가 고향을 떠나 간도로 들어갈 때와는 달리 병완과 창준은 어린 애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기에 거침없이 회령을 바라고 걸음이 빨랐다.
        주위를 살펴보아도 다행히 한길수네 자위대나 끼무라네 일본 헌병들도 눈치를 채지 못하였는지 얼씬거리지도 않아 마음이 놓였다.
       한 이틀 걸어 경성군 주을면에 도착하니 병완은 의리가 강한 원삼이네 삼형제 생각이 났다.
      “여기까지 온바하고는 용천동에 들려 원삼이네 삼형제를 만나보자.”
       “예.”
       병완과 창준은 점심때가 지나서야 용천동 산골에까지 찾아갔다.
눈이 어찌나 펑펑 쏟아지는지 눈에 뒤덮인 산골마을은 어느 것이 눈에 덮인 집이고 어느 것이 둔덕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마을 어귀에 있는 한 집이 나졌다.
       병완은 두말없이 문을 잡아 두드렸다.
       문이 삐꺽 열리더니 나그네가 내다보며 웬 나그네들이냐는 듯이 눈이 떼꾼해졌다. 하기야 살기 어려운 세월에 지나가던 길손이 싫은 것은 당연했다.
“여기 원삼이네 집이 어느 것입둥?”
병완이 묻자 그 나그네는 시름이 놓이는지 표정을 느슨히 풀었다.
“이게 원래 원삼이네 집이오.”
“그럼 원삼이네 삼형제는 어데 있소?”
그러자 그 나그네는 “집도 다 팔아먹고 살 길을 찾아 간도로 떠나갔소. 그런데 원삼이네 사형제중 막내동생이 이 마을에 남아 있소.” 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니, 원삼이네는 삼형제가 아니오?”
마을 나그네는 병완이네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당신들은 원삼이네를 어떻게 아오?” 하고 되물었다.
병완은 “우시장 경찰국을 지을 때 가까운 친구들이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그네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렇구먼. 명함을 어떻게 쓰시오?” 하고 물었다.
“난 병완이라고 부르오.”
그러자 그 나그네는 반색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내가 바로 원삼 형님의 막내 동생 무삼입구마. 그때 나를 내놓고 세 형님이 경찰국 공지에 갔댔소. 어서 들어가깁소.” 하고 인사했다.
병완은 무삼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글쎄 어딘가 원삼을 닮은 사람도 다 있다 하였더니. 참, 원삼의 막내 동생이구먼.” 하고 중얼거렸다.
무삼은 처자들을 불러 병완과 창준에게 인사시켰다. 그는 반가와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도 원삼 형님에게서 어른네 부자  말을 많이 들었습구마. 병완 어른은 대단한 힘장사라던데. 자위 대장 놈과 싸워 눈깔도 빼놓지 않았소. 이렇게 만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구마. 춘삼 형님은 기준 형님이랑 창준 형님이랑 대단히 인심 좋고 사내대장부다운 분들이라고 합더구마.”
무삼의 아내가 부엌에 내려가 불을 피웠다.
이윽고 무삼의 아내가 따뜻한 죽사발 세 개를 위방에 들여왔다. 집이 어찌나 헌지 부엌에 불을 땠는데도 추워 덜덜 떨 지경이었다.
“이런 집에서 우리 큰집식구들까지 스물이나 살았소. 집이 추워도 불을 땔 나무를 하게 해야 때지. 일본 놈새끼들이 마른 풀만 때라오. 추워서 어디 살겠소?”
병완은 혼자 남은 무삼이 이상했다.
“형님네는 다 간도에 갔는데 어째 혼자 여기 남았소?”
무삼은 형들과는 달리 말을 꽤나 잘했다.
“난 항상 세 형님들과는 달리 사오. 전번에 경찰국 공지나 길닦이도 형님네를 따라 가지 았았소. 일본 놈들을 믿고 어떻게 돈을 버오? 그 놈들이 어떤 놈들이라고 삯전을 주겠소? 이번에 글쎄 간도에 가면 이밥이나 조밥이 하늘에서 막 떨어지오? 고향을 떠나 무슨 개고생을 하자고 가겠소?  죽어도 고향에서 살다가 죽겠습구마. 애나게 살다나면 일본 놈들도 망하는 날이 있겠지. 그때면 우리도 잘 살 날이 있겠소.”
병완과 창준은 따뜻한 죽까지 얻어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 길이 바빠서 떠나가야겠소. 미안하네. 폐를 끼쳐서.”
무삼도 따라 일어났다.
       “천만에 말씀을 다 하오. 빨리 따라가면 우리 형님네를 따라 잡을 수 있을게요. 이른 새벽에 가만히 간도로 떠나갔소.”
그가 정지에 나가더니 뭐라고 하더니 아내가 주먹밥 한보자기를 싸 주었다.
“적은 대로 길에서 요기나 하오. 형님네를 주고 나머지가 요것 밖에 없소.”
병완은 받기 미안한대로 받고 무삼과 아내에게 인사했다.
병완은 무삼과 작별한 후 창준을 돌아보면서 “원삼이 멀리 가지 못했을 게다. 빨리 쫓아가자.” 하고 말했다.
병완과 창준은 마을 북쪽 령길로 올라갔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눈 우에 어지럽게 북쪽으로 뻗어나간 발자국들이 보였다.
“발자국이 파묻히지 않은 걸 보면 멀리 가지 못한 것 같다.”
그들 부자는 발자국을 따라 불이 나게 뒤쫓아 갔다.
그들이 해가 거의 질 무렵에 수림속의 산길을 따라 한 눈 덮인 산정에까지 올라가니 저 앞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기슭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얼른거리며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원삼이-”
“원삼이!”
검은 그림자들이 멈춰서더니 이쪽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병완이 네가 달리다 시피 가자 원삼은 마주 달려오면서 고함쳤다.
“삼촌!”
병완과 창준은 원삼이네 삼형제 집식구들과 눈보라치는 산기슭에서 반갑게 만났다.
“몇 년 만에 만났소?”
원삼의 말에 병완은 “그래, 이태 만에 만나니 반갑구먼.”라고 하면서 원삼이네 삼형제의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원삼은 안식구들을 불러 인사시키면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소?” 하고 물었다.
병완은 “간도로 들어가는 길일세. 오늘 오전에 무삼을 만났네.” 하고 말머리를 떼고 간도로 들어가게 된 연유와 무삼을 만난 이야기까지 죽 말했다.
“잘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일본 놈들의 성화에 배기지 못해 간도로 들어갑니다. 글쎄 밭에다 나무를 심으라는 바람에 뭘 먹고 사오? 이 추운 겨울에 땔나무도 못하게 하니 얼어 죽으라는 게지.”
모두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병완은 원삼이네 삼형제와 함께 걸으면서 무삼을 걱정했다.
“막내 동생은 왜 따라오지 않았소?”
병완의 묻는 말에 원삼은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에이, 무삼은 고향을 떠나기 싫어 그러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토끼꼬리만한 겨울해가 꼴깍 넘어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둘러보니 눈보라 치는 수림이여서 마을이라고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생각하다 못해 눈구덩이를 파고 누더기와 마른 나무 잎을 깔고 새우잠을 잤다.
그들은 눈보라 속에서 눈구덩이에서 자네와 해가 뜨면 언 주먹밥을 눈에 녹여 먹으면서 고난의 행군을 하여 해가 질 무렵에야 두만강 변에까지 왔다.
사람들과 물어보니 산 아래 마을이 바로 회령이라고 했다. 산 아래를 바라보니 얼어붙은 두만강 얼음 위에 흰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고 있었다.
호리호리하게 생긴 창준은 여우 엉덩이도 얼어터질 맵짠 추위에 온몸이 오싹해내 몸을 옹송그리었다.
“저기 두만강 맞은 켠이 간도겠지?”
병완의 말에 원삼은 넓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렇소. 간도가 땅이 넓어 살기 좋다는데 어떻겠는지?” 하고 중얼거렸다.
병완은 눈 덮인 두만강 맞은 켠의 낯선 간도 땅을 바라보았다. 간도의 황야는 어디에도 정이 붙을 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두만강 저쪽 어디에선가 막내아들 기준이가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그래도 조금 위안이 됐다.
“해지기 전에 일찍이 두만강을 건너가기요.”
원삼의 말에 병완은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해 진후 건너기오. 저쪽 만주국경찰에게 잡히면 변방 노역을 시킨다오. 저쪽에 기준이가 마중 나왔을 거요. 저쪽에서 기준이가 모닥불을 피우면 건너기요.”
병완은 원삼이네 삼형제에게 기준이가 석철 영감에게 인편으로 보내온 모닥불을 신호로 건너가기로 한 것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기준 형님이 여기 우리 온 걸 어떻게 알겠소?”
춘삼의 말에 병완은 “아마 저쪽에 경찰이 없으면 날마다 모닥불을 피우겠지.” 하고 추축해 말했다.
그제야 춘삼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은 산정 소나무속에 숨어서 두만강 맞은 켠만 내려다보았다.
차디찬 겨울해가 꼴깍 넘어가고 두만강 변 산과 들에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무시무시한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숨을 죽이고 두만강대안을 살필 때였다.
“저길 보오. 모닥불이 피어오르오.”
원삼의 환성을 질렀다.
모두들 그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두만강 반 저쪽에 자그마한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가자!”
병완이 일어났다.
그들은 병안의 말대로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곳에서 두만강을 따라 아래쪽 한 일리 남짓한 곳으로 갔다. 원삼에게 업힌 네 살짜리 넷째아들 종호는 윙윙 휘몰아치는 두만강 반 눈보라 바람소리에 무서워 아버지 잔등에 언 얼굴을 꼭 댔다.
병완은 조국 땅에서 마지막 발을 떼며 두만강 얼음 우에 들어서면서 되돌아보았다. 순간 조선의 산과 들이 어둠속 눈보라 속에서 희미하게 바라보였다.
(어떻게 하면 조상들의 뼈가 묻힌 내 조선이 우리를 먹여 살리지 못해 떠나 저 낯선 간도로 들어가야만 하는가?)
두만강 변까지 병완과 창준의 걸음은 아주 빨랐다. 그러나 두만강을 건널 때에는 병완의 걸음이 어찌나 느린지 원삼이네가 자꾸 재촉했다.
“삼촌, 빨리 건너기요. 강 건너 쪽에 만주국 경찰이 나타나면 어쩌자고?”
“음, 그래. 빨리 건너지.”
병완은 그제야 걸음을 다그쳤다. 그러나 몇 발자국 걷지 않고 또 모로 걸으면서 조선쪽을 돌아보군 했다.
쇠기둥 같던 병완도 정작 고향을 떠나 살 길을 찾아 핍박에 의해 간도로 들어갈 때에는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일본 섬나라 오랑캐와 개다리 한길수에게 지고 만 느낌이 들었다. 잇따라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로서 자존심이 여지없이 짓밟힌 능욕 감을 참을 수 없었다.
병완은 주먹을 불끈 쥐고 두만강 얼음우로 눈보라를 무릅쓰고 비틀거리면서 건넜다.
그는 낯선 간도 땅을 밟으면서 두만강 변 버드나무숲을 두리번거리면서 살폈다. 그러나 기준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병완은 몸을 돌려 두만강 저쪽에 두고 온 조선의 산과 들을 돌아보았다.
(꼭 조상의 뼈가 묻힌 조선으로 되돌아가야 해. 정든 고향에 돌아가 조상들의 산소를 잘 모시고 죽을 때까지 살 테야.)
“삼촌, 뭘 자꾸 돌아봅니까? 빨리 해지기전에 오랑캐령을 넘어야 합꾸마.”
앞에서 걷던 춘삼이가 되돌아보며 재촉했다.
“그래, 그런데 기준이가 여기서 우릴 마중하겠다고 했는데 보이지 않네. 자네들이 먼저 가게나.”
그 말에 원삼이네 삼형제는 걸음을 멈추고 어둠속의 두만 강변 여기저기를 살피였다. 그래도 기준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애타게 기준이가 나타나기를 바랐다.
“아버지!”
그때 어둠속 아름드리버드나무숲속에서 구척이나 되는 기준이가 나타나더니 무릎까지 눈에 푹푹 빠지면서 허우적허우적 달려왔다.
기준은 아버지를 만나자마자 넙적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아버님, 그간 무사했습니까? 내 여기서 연 며칠 모닥불을 피우면서 기다렸습니다.”
기준은 일어나 손바닥에 묻은 눈가를 툭툭 털면서 창준을 보고 “형님, 어째 집식구들을 몽땅 데리고 오지 않았소?” 하고 애탄 목소리로 물었다.
병완은 “간도가 어떤 데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데려오니?” 하고 대답했다.
원삼이네 삼형제네 식구들도 다가와 인사했다.
“기준 형님, 간도에서 만나니 더 기쁘오.”
기준과 원삼이네 삼형제는 친형제처럼 서로 포옹했다.
“잘 됐소. 내 움막을 친 소서구에 가서 함께 황무지를 일구면서 살기요.”
“그러면 오죽 좋겠소.”
병완의 삼부자와 원삼의 삼형제 식구들은 두만강 변에서 만나 한 집안 식구들처럼 돼 살 길을 찾아 간도의 황야에 묻힌 소서구를 바라고 발걸음을 다그쳤다. 뒤에서는 눈보라가 기승스레 불어치며 아우성치고 무시무시한 어둠이 도적고양이처럼 뒤따랐다.
9. 선바위
병완 일행은 두만강 변을 떠난 후 조선에서 가지고 온 언 주먹밥이 다 떨어졌다. 그래도 기준이가 가져온 옥수수떡이 있어 나눠 먹으면서 두만강 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높다란 령을 넘어섰다.
“여긴 어디냐?”
병완의 물음에 기준은 령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오랑캐령이라는 곳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래?”
병완은 맵짠 엄동설한의 강추위 바람에 숨이 헉헉 막히는 감이 들었다. 게다가 모래알 같은 눈보라가 휘몰아쳐 눈도 뜨기 어려워 걷기 힘들었다.
“우리 고향보다는 혹독하게 춥구나.”
병완의 말에 기준은 옆에서 걸으면서 “무섭게 춥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자기가 썼던 개털 모자를 아버지에게 씌워주었다.
“날 벗어주고 넌 어찌겠니?”
아버지 말에 기준은 목도리를 벗어 귀를 싸매고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이제도 머냐?”
병완은 서쪽으로 기울어져가는 해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기준은 속구구를 해보더니 “예, 소서구까지 여기서 한 200리 좌우 될 겁니다.” 하고 대답했다.
해가 뉘엿뉘엿 져갈 무렵에 그들 일행은 령길아래 골짜기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마을에 이르렀다.
기준은 병완과 춘삼을 돌아보며 말했다.
“명동이란 마을입꾸마. 며칠 전에 두만강 변에 마중나갈 때도 이 마을에서 하루 밤 자고 나갔댔습꾸마. 이 마을을 지나면 한 십여 리 내려가야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하루 밤 자고 가자.”
병완의 말에 모두들 그렇게 하자고 했다.
기준은 마을이 들어앉은 둔덕 뒤쪽에 우뚝 앉아있는 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집에 가깁소. 인품이 좋습더꾸마.”
그 말에 원삼은 “저 집이 교회당이 아니오?” 하고 말하면서 집 꼭대기에 꽂혀있는 십자를 가리켰다.
“십자가 있는 거 보면 교회당인 것 같소.”
기준은 “옳소. 저 교회당의 김하규란 분은 인품이 좋습디다. 교회당이 널찍해서 우리 열 몇이 하루 밤 잘 수 있습니다.” 하고 덧붙였다.
그들이 교회당 앞에 간 후 기준이 먼저 노크했다.
그러자 하얀 한복차림의 머리가 허연 분이 나와 반갑게 인사했다.
“에이고, 아버지랑 모시고 왔소?”
“예. 저분이 저의 아버집니다.”
기준은 김하규에게 일일이 인사시켰다.
“전날 기준한테서 형장 일가의 일을 잘 들었소. 추운데 어서 집안으로 들어가기요.”
병완은 마을 주위를 습관적으로 둘러보더니 “저 동쪽에 큰 집은 무슨 집이오?” 하고 손으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김하규는 병완이가 손가락질하는 동쪽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건 명동학교요. 일본 놈들이 심술이 나서 불을 질러 다 타버린 걸 우리 교회당에서 조선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복구해 놓았소.”
병완은 명동학교도 고향 최구장의 서당처럼 일본 놈들의 피해를 입은 것을 보고 온몸이 식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교회당은 꽤나 널찍한 온돌집이였기에 병완과 리춘삼 삼형제 십여 명이 들어갔는데도 비좁은 감이 들지 않았다.
이윽고 저녁밥상이 들어왔다. 큰 잔치나 벌어진 것 같았다.
“이거 지나가는 길에 들려서 폐를 끼쳐 미안하오.” 하고 병완이 말하자 김하규는 아주 통이 넓은 말로 인사를 받았다.
“천만에 말씀을, 듣자니 귀댁 큰아들과 우리 사위나 다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고 일본 놈들과 싸운다는 게 아니겠소? 우린 한 집안이나 다름없소. 내의를 하지 마오.”
그 말에 병완은 숟가락을 들다가 말고 기준과 김하규를 번갈아보았다. 김하규는 호리호리하게 생겼지만 안경을 건 눈은 예지로 번쩍이고 있었다.
기준이 옆에서 아버지에게 저 아래 선바위부근에서 항일투사들이 일본 놈들의 돈 15만원이나 지혜롭게 탈취해 총을 사려 울라지보스또크에 도망친 일도 있었다고 했다.
병완이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단하구먼.” 하고 감탄했다.
그는 혹시 성칠이 이끄는 독립군이 한 장거가 아닐까 알아보고 싶었다.
“거 15만원 탈취사건을 알면 얘기해줍소.”
김하규는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는 원삼이네 삼형제 눈치를 보면서 “어서 식사나 하오.” 하고 기준에게 눈치 했다.
눈치를 차린 기준은 김하규에게 “이 원삼 삼형제는 내 친형제나 다름없는 친구들이오.” 하고 말했다.
“그러지 않고.”
병완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이 원삼 삼형제는 우시장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지을 때나 길을 닦을 때나 우리와 한마음 한뜻이 돼서 일본 놈들과 맞섰소.”
그러자 김하규는 막걸리를 부어 병완 삼부자와 원삼 삼형제에게 일일이 붓고 나서 잔을 들었다.
“자, 막걸리나 한 잔 마시고 얘기하기요.”
모두들 막걸리 잔을 굽냈다.
“그게 그러니까 1919년 섣달 그믐날에 철혈광복단의 윤준희를 비롯한 항일 투사들은 조선은행 회령지행에서 일하는 지하항일투사 전홍섭에게서 일제가 용정 주재 일본 영사관으로 항일 투사를 진압할 경비를 보낸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지요. 그 돈을 탈취하려고 윤준희 단장을 비롯한 림국정, 최봉설, 박웅세, 김준 같은 반일 투사 다섯은 1920년 1월 3일 이른 새벽에 선바위부근 동량일대에로 달려갔소. 윤준희 등 셋은 흰옷을 입고 눈 덮인 동량 버들방천에 숨어 기다리고 최봉설 등 두 반일투사들은 선바위 골로 올라가 선바위 밑에 매복해있었지요.”
김하규는 그때 정경을 눈으로 방불히 본 듯이 말했다.
그날 밤 여덟시쯤에 일제 경비호송대 다섯 놈이 동량 선바위 골에 들어섰다. 그들 일행 앞으로 총을 멘 경찰관이 말을 타고 터벅터벅 선바위 골 눈길을 더듬어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두 무장경찰이 마바리의 양옆에 서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마바리 뒤에는 신사복차림을 한 일본관리가 말을 끌고 오는 경마잡이와 함께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선바위 밑에서 최봉설 등은 경비호송대 뒤에 후위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자 슬그머니 그 놈들을 미행했다.
일제 호송대 놈들이 동량 버들방천에 들어섰을 때였다.
땅! 땅! 땅!
야무진 총소리가 겨울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동량버들방천에 매복해있던 윤준희 등은 길 양옆에서 권총으로 사격하고 그곳까지 미행해온 최봉설 등은 뒤에서 권총으로 사격하면서 협공했다. 일제의 경비호송대 다섯 놈을 순식간에 몽땅 눈 바닥에 쓸어 눕혔다.
“참 멋지구먼.”
원삼이가 쾌자를 불렀다.
김하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지요. 참 멋진 속결전이였지요. 그들은 시체를 처치해버리고 돈 15만원을 세 마대에 나눠 넣어 지고 재빨리 용정 동흥 마을에 있는 비밀연락지점으로 달아났소. 다른 두 투사는 놈들을 왕청 같은 데로 유인해 가려고 말 세필을 반대쪽 산속에 가져다 매놓고 동흥 비밀연락지점으로 찾아갔지요. 그들은 거기서 돈 짐을 나눠 메고 와룡동에 있는 최봉설의 집으로 달아났지. 거기서 최봉설의 동생 최명옥을 보고 돈을 실은 소달구지를 몰게 하고 그들 다섯은 호송하면서 왕청 군관학교에까지 갔소.”
“정말 대단하구만.”
병완이가 감탄했다.
김하규는 막걸리 잔을 들어 권했다.
“자, 또 한잔 마시면서 얘기하기요.”
그리하여 모두들 흥이 나서 통쾌하게 막걸리를 마시면서 항일투사들을 찬탄했다.
“그래 그 돈을 어쨌을까?”
그러자 김하규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뒷말을 이었다.
“무기를 사자고 윤준희와 최봉설은 돈 짐을 메고 쏘련 울라지보스또크시로 가서 총을 사려고 하였지. 그런데 엄인섭이란 일제 조선특무의 밀고로 해서 최봉설만 도망치고 몽땅 일제 군경들에게 체포됐지요. 후에 그들은 몽땅 서울 서대문감옥에 압송돼 교살당했다고 하더군.”
모두들 길게 탄식하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병완은 궁금했다.
“최봉설은 후에 어떻게 되였소?”
김하규는 막걸리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조용히 말했다.
“최봉설은 신한촌 려관에서 죽기내기로 도망칠 때 일본 놈들이 쏜 탄알에 어깨와 왼쪽발뒤축을 부상당하였지요. 그래도 탈주에 성공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최봉설은 후에 쏘련 홍군에 가입해 흑하 북쪽에서 벌어진 이만전투에도 뛰어들어 로씨야 백파군을 족쳤지요. 그 후에 그는 레닌까지 만났고 적기단 단장도 했소.”
“오. 어떻게 그 일을 그렇게 잘 아오?”
기준의 물음에 김하규는 사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말했다.
“믿고 하는 말이지만. 그때 일본 놈들이 경비를 호송해 선바위 골을 지난다는 정보를 회령지행의 전홍섭이 보낸 걸 내 최봉설에게 알려주었소.”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최봉설이랑 항일투사라는 걸 어떻게 알고 알려주었소?”
그러자 김하규는 조용히 “최봉설은 내 사위요.” 하고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질끔 해보였다.
“아, 원래 그런 일이구만. 영감은 정말 사위만 못하지 않은 반일투사요.”
병완은 김하규를 믿고 말했다.
“내 맏아들 성칠도 어데서 일본 놈들과 싸우겠는데 몇 해 되도록 종무소식이요.”
김하규는 병완을 바라보면서 정색해 말했다.
“근심맙소. 기준한테서 성칠의 말을 들었는데 참 장한 사내대장부더구먼. 그런 할 일이 많은 사람은 명도 긴 법이오.” 하고 말했다.
“글쎄 말이오. 그래도 어시 된 사람은 늘 장년이 된 아들놈도 근심하게 되오.”
김하규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후에 내 사위에게서 성칠의 기별이 있으면 알려주리다. 어데 가 살더라도 주소는 알려주오.” 하고 말했다.
그러자 기준이가 시원히 대답했다.
“양. 지금 우리 사는 데는 저 진수해에서 한 이십 리 떨어진 소서구란 곳이오.”
김하규는 한숨을 쉬면서 “여기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러오.” 하고 말했다.
병완은 “고맙소. 우린 아마 기준이 개간해 놓은 소서구로 가야 될 거 같소.” 하고 완곡하게 사양하더니 원삼이네 삼형제의 의향을 묻는 듯이 건너다보았다.
그러나 원삼이도 사양했다.
“아니오. 난 여기서 살기 싫소. 일본 놈들의 성화에 배기지 못해 간도에 왔는데. 일본 놈들이 명동 서당에 불을 지르고 야단쳤다는데. 이 마을에서 어떻게 산다고 그러오? 우린 일본 놈들이 보이지 않는 심심산골에 가서 살겠소.”
“정 그렇다면 별수 없지.”
김하규는 아주 서운해 하는 눈치였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모래알처럼 교회당의 넓은 창문의 창호지를 두드리며 윙윙 무섭게 아우성쳤다.
        
          10.
꼬리 없는


       교회당에서 하루 밤 묵고 병완 등은 김하규와 작별하고 길을 떠나게 됐다.
김하규는 례배당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여서 목사처럼 작별인사를 했다.
“하느님이 당신들을 잘 살게 하고 일본 놈들을 조국 땅과 간도 땅에서 몰아내게 도울게요.”
기준은 동전 두 닢을 하규에게 쥐어주면서 인사했다.
“숱한 사람들이 와서 폐를 끼쳤소.”
그러나 김하규는 사양하면서 받지 않았다.
“뒀다가 요긴할 때 쓰오. 교회당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을 낙으로 여기요. 다 하느님이 베푼 은총이라고 생각하면 되오.”
뒤이어 그는 서쪽으로 쭉 뻗어나간 산골짜기를 가리키면서 당부했다.
“이 육도하를 따라 산골짜기를 서쪽으로 한참 내려가면 물레방아골이 있소. 점심 때쯤이면 용드레촌이라는 시내가 나질게요. 용정이라고도 부르는데 거기에는 일본 영사관까지 있소. 좋기는 일본놈들이 욱실거리는 시내에 들어가지 말구 에돌아가오."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눈길을 떠나가는 병완이네 일행을 바래면서 하규는 가슴에 십자가를 그리며 기도를 드리었다.
“하느님께서 저 불쌍한 착한 분들을 도와주옵소서. 가는 길이 잘 사는 길로 열리게 도와주옵소서.”
병완 등은 애들을 데리고 골 안을 따라 걸어 내려가니 눈 덮인 버들 방천 속에 묻힌 얼음 강판 길옆에 깎아 세운 듯이 선바위가 우뚝 솟아있었다. 마치 그날의 항일투사들의 업적을 기리여 땅을 차고 우뚝 솟아 있는 상 싶었다.
“이게 선바위겠소. 실로 칼로 깎아 세운 거 같구먼.”
그들이 선바위 밑으로 뻗은 길을 걸어지나가자 선바위부근에 자그마한 마을이 나타났다.
병완이 마을 사람과 “이 마을은 뭐라고 부르는 마을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내는 “물레방아 골이요.” 하고 말하고 나서 황급히 어디로 달려갔다.
기준이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이 마을이 김하규 어른이 말하던 물레방아 골이구먼. 이 마을에 물레방아가 있는 모양이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때 두리번거리던 인삼이가 개울가에 떡 서버린 커다란 물레방아를 가리켰다.
“저기 물레방아가 있소.”
모두들 개울가를 바라보았다. 병완 삼부자는 강가에 굳어버린 물레방아를 보자 저도 몰래 고향 영월동에 두고 온 고향집 물레방아 생각이 났다.
(고향집 물레방아를 내 손으로 얼마나 고생스레 만든 건데. 다 두고 왔다. 아니, 일본 놈들 림산파출소에 다 빼앗기고 말았구나.)
병완은 속으로 이렇게 통탄하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눈보라 속에 서리서리 풍겨나갔다.
그러나 춘삼의 아내랑 삼동서는 물레방아를 보자 아주 희귀해했다.
“이 마을 아낙네들은 손바닥에 털이 나겠다. 절구공이질을 하지 않고 물레방아에 쌀을 찧으면 얼마나 편안하겠소?”
“글쎄 말이오.”
물레방아소리에 종호가 아버지 잔등에서 “물레방아를 가지고 노자.” 하고 응석을 부렸다.
원삼은 넉가래 같은 손바닥으로 종호의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지금은 겨울이 돼서 물이 얼어 물레방아를 돌리지 못해”라고 했다.
“예. 내 일이 바빠 길손들과 길게 말할 새 없소.”
그 사람은 주먹을 쥐고 마을 복판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지?”
병완의 말에 기준이가 “가 보기요.” 하고 말했다.
마을 복판으로 하여 괜찮게 사는 부자 집 마당에서 숱한 사람들이 커다란 매돌을 매돌 판에 올려놓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넷이 육중한 매돌을 들어 올리지 못해 낑낑 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낑낑 거려도 매돌을 들어 올리어 놓지 못했다.
그러자 뚱뚱한 부자는 “에이고, 밥값도 못하겠다. 야, 야. 넷이서 매돌 하나 들어 올리지 못하다니?” 하고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그런 장면을 보던 원삼이가 사람들 앞에 썩 나섰다.
“물러나오.”
그러자 뚱뚱보부자는 마루 위에서 원삼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길손은 덩치는 크다만 어찌 네 사람이 들어 올리지 못한 걸 들어 올린다고 그러오?”라고 하며 못 미더워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모두 물러나오. 매돌 하나 드는데 무슨 숱한 사람이 필요하오?”
말을 마치자 원삼은 보자기로 허리를 질끈 동여매더니 매돌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는 허리를 굽혀 한 아름이나 되는 매돌을 덥석 안더니 버쩍 들어 매돌판 위에 올려놓았다.
“아따! 천하장사구나!”
뚱뚱보 부자가 감탄하면서 마루에서 내려왔다.
마을 사람들도 입을 딱 벌리더니 여기저기서 감탄소리가 술렁거렸다.
“어이구, 꼬리 없는 황소로구먼!”
“꼬리 없는 범이구나!”
뚱뚱보부자는 원삼의 손을 잡으면서 “고맙소. 어데서 오는 길손인지 알고지내기오. 난 물레 골의 리영룡이오.” 하고 인사했다.
원삼도 푸접 좋게 “난 조선 경성 주을면에서 온 리원삼이요.” 하고 인사를 받았다.
“저 사람들은 누구요?”
그러자 원삼은 돌아서 일일이 인사시켰다.
뚱뚱보부자는 성격이 시원한 사람인 것 같았다.
“난 조선 길주에서 들어온 리영룡이라고 부르오. 아마 살 길을 찾아 간도로 들어온 것 같은데 우리 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지 않겠소? 우리 집엔 저 산 바위 뒤에 밭도 많고 밭을 일굴 황무지도 많소.”
그러자 원삼은 두 형님과 병완 등을 돌아보았다.
“그러오. 여기서 살면 좋을 것 같소.”
병완의 말에 원삼은 기분이 좋아했다.
“그럼 리 주인을 믿고 여기서 살겠습꾸마.”
리영룡은 원삼이네 형제를 돌아보면서 사람 좋게 웃으며 물었다.
“난 리씨 왕조의 후대 전주 리씨요. 자넨 무슨 리씨오?"
원삼은 제꺽 “우린 공주 리 씨요.” 하고 대답하고 나서 뒤이어 “우리 형님네도 여기서 살게 해주오.” 하고 청을 들었다.
그러자 리영룡은 원삼의 두형을 훑어보는 것이었다. 어깨가 쩍 벌어진 원삼과는 달리 하나는 보통 키이고 하나는 키가 작아 힘을 쓸 것 같지 못했다.
그 눈치를 차린 원삼이가 리영룡에게 “형님들은 나보다 힘이 더 세오. 받아 줍소.” 하고 말했다.
“정말?”
그러자 춘삼이가 둥글 넙쩍한 매돌 판 위에 뛰어올라가 원삼이 들어 올려 놓은 매돌을 안더니 버쩍 들어 매돌 판 아래에 내던졌다.
리영룡은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아이구! 내 매돌을 깨겠소.”
그러자 인삼이가 그 매돌을 안아 꽁기돌을 다루듯이 버쩍 들어 매돌 판 우에 슬쩍 올려놓았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놀라 눈알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어쩜 형제들이 다 소 같은 힘장사들인가!”
리영룡은 입이 함박만 해졌다.
“알았소. 자네들만 있으면 내 평생 농사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먼. 추운데 집안으로 들어가기요.”
원삼이네 삼형제와 병완이네 부자 일행 수무나문이 모두 들어갔다. 원삼이네 삼형제네 아내들은 좋아 입이 함박만 해졌다. 제일간 물레방아 골의 물레방아 있어 좋았고 정처 없이 떠돌지 않아도 됐다.
병완은 원삼이네가 물레방아 골에 자리를 잡자 한시름 놓았다.
점심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린 손자가 기다려서 우린 빨리 떠나야 하겠소.”
원삼이네 삼형제는 마을 동구 밖에까지 따라나와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병완은 갈라지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알리오.” 하고 말했다.
원삼은 “이렇게 갈라지면 언제 또 만나겠소?” 하고 갈라지기 아쉬워했다.
“산 사람이 만날 날은 있겠지. 우리 소서구에 놀러 오오. 혹시 성칠을 만나면 우리가 소서구에 있다고 알려주오.”
머리를 끄덕이는 원삼이네 삼형제의 철색얼굴에는 석별의 정이 헤염치고 있었다.
그들은 눈보라치는 선바위 밑에서 아쉬운 대로 갈라져야 했다.
11. 유서 깊은 용드레촌
병완 삼부자는 풍설이 이는 산골 안을 따라 한 둬 시간 걸었다. 도중에 오두막이 흩어져있는 마을 몇개를 지나니 저 앞에 자그마한 시내가 나타났다.
“저긴 어디야?”
병완의 물음에 기준은 “용드레촌이라는 곳입꾸마.” 하고 대답했다.
“오, 저게 고향에서도 항상 들어오던 용드레 촌이구나. 김하규 어른의 말이 용드레촌을 지금 용정이라고 부른다지?”
“예. 용정에 용드레 우물이 있는데 물이 영 시원합디다. 그 우물 이름을 달아서 시내 이름도 용드레촌이라구 불렀다고 합꾸마. 후에 한어이름으로 고쳐서 용정이라고 부른답니다.”
기준의 말에 병완은 “목도 축일 겸 그 우물로 가볼까?” 하고 말했다.
그러자 창준은 겁기가 꽉 찬 얼굴로 병완을 바라보면서 “용정 시내에 들어갔다가 일본 놈들이라도 만나면 어쩌자고 그럽둥?” 하고 근심했다.
“그럼 아쉬운 대로 용정에 들리지 말고 돌아가자.”
그 말에 창준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병완은 산길을 용정 동쪽 산 둔덕에 올라가 시내를 내려다보더니 기준을 돌아보면서 “얘, 저 번화한 용드레 촌 궁금하구나.” 하고 말했다.
“저 용드레 촌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답꾸마.”
기준은 그간 들은 얘기를 했다.
“1883년 봄에 회령에서 들어온 장인석이하구 박윤언이라고 하는 사람이 처음으로 륙도구에 들어왔다가 세전이벌의 비옥한 땅을 보고 황무지를 일구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답니다. 그 후 저기 보이는 저 일본 영사관 서쪽에서 옛 우물자리를 발견하고 우물을 가셔내고 우물 벽을 수리하였답니다. 그들이 우물가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는데 후에 조선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하나둘 와서 물을 마시고 쉬기도 하고 그 옆에 집을 짓고 살았답니다. 그래서 한 집 두 집 늘어나서 큰 마을이 되였답니다. 후에 그 우물에 한족농민 충서방이 길손들의 편리를 생각해 용드레박을 만들어 세워놓았답니다. 그래서 그 우물을 용드레우물이라고 불렀고 그 마을도 용드레촌이라고 했답니다.”
기준의 말에 병완은 “오, 그런 일이였구나.” 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용정 우물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용정이라고 불렀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모두 그건 후에 사람들이 용드레우물이 맛있다는 걸 멋있게 말하느라고 전해 말한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어디 용이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기준의 말에 창준은 “그 말이 옳다.” 하고 끼어들었다.
용정 말을 하다나니 어느새 용정을 에돌아 해란강을 건너고 서북쪽산기슭에 이르렀다. 서쪽에 높은 산이 막아서서 눈보라가 덜 휘몰아쳤다. 그들은 산에 오르다가 숨을 돌리면서 휘몰아치는 눈보라속의 용정을 되돌아보았다. 검 칙칙한 사가지 여기저기에서 밥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병완 삼부자는 눈보라를 무릎 쓰고 부지런히 북으로 걸어 해가 어슬어슬 질 때에야 진수해에 이르렀다.
진수해는 용정보다 퍽 작은 시내였다. 이 시내에도 흰 옷을 입은 조선 사람들 속에 화복을 입은 일본 녀인들과 만또를 걸친 만족인들과 한족인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병완은 기준을 돌아보고 나직이 “혹시 한길수의 아들 철주가 여기에 있는지 빨리 빠져나가자.” 하고 귀속 말을 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걸음을 다그쳤다.
“모시모시(여보세요), 하이레데 아손데 이끼마쇼(들어와서 놀고 가세요.)”
병완이가 머리를 들어보니 높은 토성 옆에 난 대문 옆에서 불여우처럼 화장을 한 화복바람의 일본 여인이 뭐라고 알아듣지 못할 일본말로 지껄였다.
“기생집이구나. 일본 놈들이 여기까지 위안부들을 달고 왔구나.”
병완은 중얼거리면서 그 일본 여인들을 보다가 그 속에서 면목이 있는 여인이 피뜩 눈에 띄었다.
“아니, 총도감 어른이 아닌가요?”
이번에는 조선말을 하는 여인이 지껄여댔다. 병완은 간도에 와서 자기를 알아보는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자기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순간 잔등에 식은땀이 나며 섬찍해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걸음을 재우쳤다.
“난 뽕녀예요.”
“난 명천 기생집의 만금이구요.”
(뽕녀라니?)
병완은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잊었는가요? 몇 해 전에 끼무라 국장님과 함께 우리 기생집에 놀러왔다가 달아나지 않았던가요?”
뽕녀가 몸을 배배 탈면서 하는 말에 만금이가 입귀를 쫑긋 하면서 동을 달았다.
“그래, 그때 사내대장부 같잖게 도망쳤지요. 호호호.”
병완은 “사람을 잘못 봤소.” 하고 한마디 하고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토성안의 기생집 앞을 떠나 한 일리 간 후에야 병완은 숨을 돌리면 토성 쪽을 되돌아보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여기 간도에 명천 위안부들이 오다니. 혹시 한철주랑 저안에 있으면 어쩌니? 눈에 난 발자국을 따라 쫓아오면 어쩌니? 빨리 피신해야 해.”
       그들은 눈보라치는 강변 아름드리버드나무 숲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들은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비술나무 숲속을 헤치며 허둥지둥 빠져나가 부르하통하를 건너 뒷산에 올랐다.
산등성이에서 벌거숭이 나무 가지들이 추워 눈보라 속에서 맞절을 하는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뒤를 쫓아오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들은 한시름 놓고 산을 타고 서쪽으로 걸었다.
둬 식경을 너머 헤매서야 계수동에까지 이르렀다.
"여긴 어디메냐?"
기준은 동쪽골안막바지를 가리키었다.
“계수동 골안입니다. 인심이 어찌나 박한지 들리지 맙시다.”
그리하여 병완은 기준을 따라 산등성이 길을 걸어 움막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계수동 골안을 들리지 않고 지나갔다.
기준은 산등성이에 서서 골짜기 너머 서쪽 골안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서쪽 골안이 바로 소서구입구마.”
“어느 골안이라느냐?”
병완은 기준이가 손으로 가리키는 서쪽 골짜기를 바라보았다.
“저기 서쪽으로 쭉 뻗어나간 짧은 골짜기입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눈 덮인 가느다란 골짜기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찾아온 새 삶의 터전이 바로 저 황야에 묻힌 눈 덮인 골짜기였다.
“빨리 가자. 어린 손자가 애타게 기다리겠다.”
“예.”
창준은 둘째아들 상길이 생각에 발걸음이 바빠졌다.
기준은 제일 앞에 서서 산비탈을 내려가면서 말했다.
“내 주현경과 장학산 주인에게 잘 부탁했으니 별 일은 없을게요.”
병완은 창준의 부축임을 받으며 산비탈을 내려오자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비술나무들을 둘러보았다.
“기준아, 이 아름드리나무로 집을 지으면 팔간대청도 멋있게 짓겠다.”
아버지 말에 기준은 도리머리 질 했다.
“이곳 지주들이 다치게 하겠습니까?”
“글쎄 말이다. 제 고향의 나무도 마음대로 다치게 못했는데 이국의 나무도 마음대로 채벌해 쓰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사니? 목수는 나무만 보면 가슴이 부풀어 오르지. 집도 짓고 싶고 절구통도 파구 싶고 함지도 만들고 싶다. 사람이 욕심은 끝이 없지비.”
아버지가 끝없이 중얼거리자 아들들은 마음이 안쓰럽기만 했다.
그들은 해질녘에야 무릎까지 풍풍 빠지는 눈을 헤집고 나무숲속을 꿰뚫고 나가 끝내 소서구 어귀 장학산 지주네 집 앞에 이르렀다.
인기척을 들은 황둥개가 뛰쳐나오면서 요란하게 짖어댔다.
그러자 안에서 뚱뚱한 장학산이 나왔다. 그는 기준을 보자 반갑게 두 팔을 벌리며 환성을 질렀다.
“라이라(왔구만). 왜 이제야 왔는가? 딱 보름만이구만. 어서 들어오게나.”
기준은 뒤돌아보면서 “장주인입구마.” 하고 인사시켰다.
말이 통하지 않아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손을 굳게 잡는 것으로 대체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이때 집안에서 상길이가 뛰쳐나왔다.
“오, 그래, 상길아!”
창준은 어린 상길을 덥석 안아 쳐들어 꼭 껴안았다.
병완도 다가와 셋째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사하니 됐다. 에이유, 이젠 다 컸구나. 어시를 떨어져도 울지 않고.”
상길은 아버지 품에서 내려 기준에게 두 팔을 벌리었다. 기준과 병완은 번갈아가면서 상길을 안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저녁에 강냉이떡을 배불리 든 후 병완은 기준에게 “간도의 인심이 참 후하구나.” 하고 말했다.
기준은 장학산에게 엄지를 내보이었다.
       “장 어른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소작료도 절반만 받았습니다. 우리 조선에서야 8할씩 받는데 말입니다.”
       장학산은 기준이 쳐든 엄지손가락을 보고 대개 뭐라는지 짐작하고 헤벌쭉 웃으면서 기준의 앞에 엄지를 흔들어보였다.
      그날 밤 병완 삼부자는 상길을 데리고 서쪽 방에서 자게 됐다. 병완은 간도에 들어와 처음 따뜻한 구들에서 자게 돼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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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편아동소설 왕따 김장혁 2009-02-20 10 2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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