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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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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8)
2016년 04월 08일 09시 09분  조회:1659  추천:0  작성자: 김장혁




                      5. 달밤의 연정
점심 때 흐리멍텅한 하늘에서 흰 눈송이들이 흩날려 내렸다.
상순은 진수해로 갔다가 제사상 소물을 사 지게에 지고 흰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으면서 함흥촌으로 헐금씨금 돌아왔다.
상순이 정지에 들어가 술이며 과자며 과일이며 지게에서 내리워 구들에 벌려 놓았다.
그때 상우가 상순의 팔소매를 쥐어 당기면서 바깥을 눈짓했다.
“어째?”
상순이 이상해했다.
      상우는 되돌아보면서 상순에게 눈짓까지 하며 바깥으로 나갔다. 상순이 바깥에 나가자 상우는 울바자 밖을 나가 구새 목 쪽으로 에돌아갔다.
      상순이 따라 가자 상우는 동생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얘, 너 춘실을 정말 좋아하니?”
상순은 팔소매로 땀을 닦으면서 형님을 쳐다보았다.
“불시에 건 무슨 말이오? 난 춘실을 좋아한 적도 없소.”
상우는 땀벌창이 된 동생의 길쭉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따지고 들었다.
       “내 다 알아. 너네 저 태평강 버드나무숲에서 뭐 했니?”
“뭐 어쨌다고 이러오?”
“계속 시치미를 딸 예산이냐? 너네 버드나무숲 속에서 안고 도는 거 다 봤는데도?”
그제야 상순은 얼굴이 지지벌개나면서 당황해했다.
“물론 너네끼리 좋아해도 무방해. 허나 부모들의 허락도 없이 그러지 말아라. 아버지 얼마나 성나 하는지 아니?”
상순은 머리를 숙이고 발끝으로 땅바닥을 허비였다.
상우는 뒷말을 이었다.
“내 아버지께 말했어. 너와 춘실의 약혼을 허락해달라고 말이야.”
상순은 대수로워하지도 않았다.
“춘실과 좋아하면 좋아했지 어쨌다고 그러오? 그러잖아도 부모한테 허락받자고 말하려던 참이오.”
“이 밸때기를 어쩌겠니? 쯧쯧.”
상우는 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내 시켜준 대로 해라. 아버지 물으면 잘못했다 해. 아버진 최구장네 맏손녀와 마주 세울 예산이더구나.”
형님의 말에 상순은 눈이 떼꾼해졌다.
“뭐라오? 춘실을 놔두고 왕청 같은 짓을 다 하오. 정말, 큰누나 최구장네 둘째며느리로 시집갔으면 됐지. 또 내까지 걸 버무릴 건 뭐라오?”
상순은 노발대발하면서 어디론가 휭 하니 달아났다.
등 뒤에서 상우의 애탄 목소리가 들렸다.
“얘, 어디로 가? 저 울뚝밸을 어쩌겠니?”
형님이 그러건 말건 상순은 성이 날대로 나 씩씩 황소숨을 몰아쉬면서 토성안집 동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저 놈 새끼 또 춘실네 집으로 가는구나. 고삐를 끊은 뜨개소 같은 게, 저 놈 새끼를 어쩌겠니? 저걸.”
상우는 상순의 잔등에 손가락질하면서 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며칠 후 어느 날 저녁, 초생 달이 함흥촌 동산마루에 두둥실 걸렸다.
상순은 가만히 웃새집에서 금옥을 불러내 바깥으로 나갔다.
“오빠, 어째?”
상순은 금옥의 손을 잡아끌고 울바자 한쪽으로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으면서 가더니 귀속 말을 했다.
“얘, 춘실이 너 형님을 하면 좋지?”
금옥은 손을 빼면서 “좋지 않고. 며칠 전에 우리 집 앞에 애기를 업고 온 명옥이란 사돈 새기를 본 게 마음에 들지 않습데. 춘실 언니 얼마 좋소? 생기기도 씨원하게 생기고. 성질도 씨원씨원하고.”
“나도 그래. 춘실은 키도 훤칠하고 얼마나 곱게 생겼니? 야, 그 쌍가풀 눈만 봐도 정신 잃을 지경으로 곱다. 동그란 낯이랑 얼마나 복성스레 생겼니?”
상순의 열변에 금옥은 배를 끌어안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아이, 오빤 진짜 춘실 언니한테 미쳤구먼요. 호, 호, 호.”
상순은 집 쪽을 흘끔 보더니 손으로 금옥의 입을 막았다.
“부탁 좀 들어줄래?”
“뭘?"
상순은 주위를 살피더니 손을 펴 금옥에게 귀에 가져다대고 귀속 말을 했다.
“춘실을 나오라고 해라.”
“어이고, 아버지한테 들키면 엉덩짝이 성하겠소?”
“근심 말라. 맞을 일이 생기면 다 내게 밀어라.”
금옥은 머리를 숙이고 궁리하더니 “불러 내올게. 헌데 오빠, 내 청도 하나 들어주겠소?” 하고 물었다.
“말해라. 다 들어줄게.”
“내 춘실 언니를 불러내온 대신 감자누룽지를 한줌 주겠소?”
“줄게.”
“약속하지?”
“응.”
“그럼 깍지걸이를 하기요.”
“그래, 하자. 넌 열세 살이나 되는 게 아직도 천덕꾸러기 어린애 같구나.”
상순은 진짜 금옥과 빼끼 손가락으로 깍지걸이를 하면서 감자가마치가 생기면 한줌 주기로 약속했다.
“오빠, 어데서 기다리겠어?”
금옥이 떠나가면서 묻자
상순은 “저기 동산기슭 조그만 골 안이 있잖니? 거기서 기다릴게.”라고 했다.
금옥은 되 달려 와서 “오빠, 이 시꺼먼 밤에 그렇게 으쓱한 데로 가자면 가겠소?”
“그것도 그렇긴 하구나."
상순은 잠간 궁리하더니 “그럼 토성안집 토성 밑으로 데리고 나오너라.” 하고 부탁했다.
그제야 금옥은 “토성 밑은 비슷하오. 춘실 언니네 집과 가까우니까 나올 게요. 그런데 춘실 언니네 집식구들한테 들키는 날엔 큰일 날 게요. 조심하오.” 하고 근심했다.
“야, 근심 말라. 네가 토성 밑까지만 데려오면 내가 알아서 조용한델 데리고 가지 않으리라고.”
상순의 말에 금옥은 머리를 끄덕였다.
금옥은 춘실의 집으로 가서 춘실을 불렀다.
“왕 왕 왕!”
이때 인기척을 느낀 황둥개가 요란스럽게 짖어댔다.
그러자 춘실의 어머니가 문을 열고 어두운 바깥을 내다보면서 개를 불러가고 나서 “금옥이구나. 이 밤에 무슨 일이냐?” 하고 물었다.
“춘실 언니와 함께 놀자고 그럽꾸마.”
이때 문으로 춘실의 동그란 얼굴이 쏙 나타났다.
그는 옆에서 짖어대는 개 대가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지개! 짖지 말앗!” 하고 말리더니 이쪽에 대고 물었다.
“금옥이 아니야? 이 밤에 뭘 논다고 그래?”
춘실은 자기보다 세살이나 어린 금옥 내다보면서 심드렁해했다.
금옥은 손으로 오라는 시늉을 하면서 춘실의 어머니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할끔할끔 보면서 토성 밑을 콕콕 손가락질했다.
토성 밑을 흘금 쳐다보던 춘실은 상순이가 피뜩 보이었던지 바삐 짚신을 끌고 금옥을 따라나섰다. 뒤에서는 황둥개가 꼬리를 흔들면서 뒤따라왔다.
춘실은 금옥을 따라 버드나무 밑을 지나 우물가 토성 밑으로 갔다. 거기에는 진짜 상순이 호랑이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요? 이 밤에?”
춘실의 물음에 상순은 “저쪽 강가에 가서 조용히 할 말이 있소.” 하고 말하면서 몸을 돌려 토성 북쪽으로 걸어갔다.
춘실은 발로 눈 덮인 땅바닥을 동동 구르면서 “할 말이 있으면 여기서 말하오.” 하고 애나했다.
상순은 “그러다가 그 집 아버지한테 들키면 큰 일 나겠소.” 하고 말하더니 계속 북쪽으로 걸어갔다.
춘실은 집 쪽을 할끔 곁눈질하더니 상순을 몇 발자국 따라가다가 오똑 멈춰 섰다.
“새까만 밤에 으쓱한 강가로 갈 게 있소? 여기서 말하오.”
그러자 상순은 되돌아오더니 동산 쪽을 가리키면서 “달이 저렇게 환한데 무슨 일이 있소?”라고 하면서 춘실의 손을 잡아끌었다.
춘실은 금옥을 할낏 곁눈질하더니 " 이걸 놓소." 하고 상순의 손에서 손을 쏙 빼갔다.
      “여동생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소? 사람도 없는 눈 덮인 강가가 무섭단 말이오.”
상순은 춘실의 손을 되잡으면서 큰 소리를 땅땅 쳤다.
      “겁내지 마오. 한다하는 싸움꾼 상순이가 있는데 뭐가 무섭소? 이 골 안에서 나 상순을 당할 자가 누가 있소?” 
      그 말에는 도리 좀 있었다. 상순은 장백산과 소 왕청 항일유격대를 찾아가 한다하는 항일투사들에게서 총 쏘기와 검술, 비수, 권투를 배웠다. 그리하여 상순은 진짜 이 골 안에서 당할 자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싸움꾼으로 됐던 것이다.
      금옥은 어깨를 옹송그리면서 상순과 춘실을 할낏할낏 번갈아보면서 종종 걸음쳐 토성 밑에서 빠드득빠드득 눈을 밟으면서 떠나가 버렸다.
춘실은 동산에 걸린 초생 달과 황소숨을 몰아쉬는 상순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뒤따라 나섰다.
“무슨 일이기에 내일 오전에 말해도 되겠는 걸 이러오? 딱 사람들이 없는 강가에 가 말해야 되오?”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면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걷기만 했다. 그들 둘은 착잡한 생각에 잠긴 채 어느덧 마을을 벗어나 서쪽에 있는 태평강 가 아름드리버드나무가 들어선 어둑캄캄한 버드나무숲속에 이르렀다.
봄은 찾아왔건만 아직도 여기저기 잔설이 누워있고 봄의 밤바람에 버드나무숲이 휴~휴~ 소리 내며 설레고 있었다.
“멀리 가지 말고 여기서 말하오. 대체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
춘실이 멈춰서면서 발을 통통 굴러 짚신에 묻은 눈을 털며 머리를 다소곳이 숙였다.
황둥개는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껌껌한 버드나무숲속을 두리번거리더니 끼깅 하고 집주인과 상순을 번갈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 마치 “주인 새 애기, 하도 많은 대낮을 두고 왜 밤에 이런데 와서 놀아? 저 사낼 믿을만해?” 하고 묻는 상 싶었다.
상순은 몸을 돌려 춘실한테 다가오더니 춘실의 어깨에 오른손을 올려놓았다.
“춘실이, 난 죽어도 춘실을 영원히 사랑할테오. 너도 나를 버리지 않을 거지?”
상순은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이 불쑥 열변을 토했다.
춘실은 심장이 톡탁톡탁 뛰면서 방금 흉 벽을 박차고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 두 팔로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을 꽉 안았다.
“왜 말이 없소? 그래 나를 사랑하지 않소?”
상순의 물음에 춘실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무슨 뜻이오?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오?”
춘실은 상순의 손을 쳐버리면서 앵돌아졌다.
“이제껏 일 년 남짓이 따라다녔건만 딱 말해야만 아오?”
상순은 황급히 두 팔로 춘실을 꽉 껴안았다.
“양, 오늘 확실하게 결단내기요. 춘실이, 말하오. 날 사랑하오? 사랑하지 않소?”
“어유, 이걸 놓소. 이런 양반 믿고 어떻게 한뉘 살겠니?”
춘실은 서러운 듯이 마구 몸부림쳤다.
이제껏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상순을 경계하던 황둥개가 왕왕 짖어댔다.
상순은 개의치 않고 춘실을 더 꽉 껴안았다.
“그래, 날 사랑한단 말이지?”
춘실은 머리를 무겁게 끄덕이며 “그래요. 나도 당신을 무척이나 사랑하오. 됐지?”라고 시원히 대답했다.
상순은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춘실을 건뜻 들어 올리더니 몇 바퀴 빙빙 돌면서 버드나무숲이 쩌렁쩌렁 울리게 고함쳤다.
“야~! 하늘과 땅이 들었지? 나무들도 다 봤지? 춘실이 나를 사랑한다고 했어! 하느님, 들었습둥?”
“야~ 어째 고함치오? 누가 듣겠소. 에이유, 보기도 싫다 야.”
춘실은 주먹으로 상순의 가슴을 마구 패대면서 두 다리를 가둥거렸다.
“들으면 뭐라오? 우리 서로 사랑하는데. 흥!”
상순은 춘실을 내려놓으면서 춘실의 보름달 같은 얼굴에 뽀뽀를 쪽 했다. 초생 달도 부끄러워 생글 웃으면서 얇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 구름솜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이러지 마오.”
춘실은 손으로 뽀뽀를 맞은 얼굴을 가리며 외면하더니 머리를 다소곳이 숙였다. 그녀는 부끄러워 발끝으로 눈 덮인 땅바닥을 긁으면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우리 이젠 열아홉 살인데 무슨 소리요?”
춘실은 한숨을 호 내쉬었다.
“이보세요. 아직 부모들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이나 했소? 부모들이 반대하는 날엔 끝장이란 말이요.”
“쳇, 누가 우리 결혼을 반대한단 말이오? 부모가 반대해도 우리 둘만 서로 사랑하면 다요.”
상순의 호언장잠에 춘실은 “그래도 어찌 부모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소?” 하고 뒤 말을 이었다.
“우리 부모들에게 잘 말해보기요. 우리 엄만 내 말을 영 잘 듣는데 아버지가 성격이 유달라서 근심되오.”
상순도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글쎄 나도 우리 아버지 근심되기는 하오. 마음에 있는 사람끼리 살아야지. 어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산단 말이오?”
상순은 아버지가 한창 새로 이사 온 사돈집 명옥과 혼사 말을 한다는 말을 하려다가 춘실이 알면 재미없을 것 같아 혀끝까지 닿은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춘실도 발끝으로 눈을 살살 긁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거야 그렇지. 후엔 금옥을 보내지 마오.”
“그럼 어쩔까?”
“쪽지를 써서 황둥개 귀에다 끼워 넣어 보내오.”
“저 황둥개는 나를 보면 짖으면서 물자고 드는데?”
상순은 되지도 않는 말을 한다는 식으로 두 손을 툭툭 털었다.
춘실은 몸을 상순에게 기대면서 “그런 재간도 없소? 개한테 누룽지랑 주면서 친하오. 그럼 개는 당신도 주인처럼 따를게 아니요? 그때 살작 쿵…”
상순은 춘실을 와락 끌어안았다.
“에이, 당신을 만나자고 기다리는 게 하루가 삼추 같은데 언제 저 황둥개를 친해 만나겠소?”
“그래도 황둥개를 친해야 하오. 금옥이 자꾸 우리 집을 찾아다니면 우리 집이나 당신 집에서 눈치 채면 어쩌오?”
상순은 춘실을 안고 하늘에 두둥실 뜬 달을 쳐다보면서 “아무 때나 부모들이 알아야 할 걸 가지고. 원, 참.” 하고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그들 둘이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마을 저쪽에서 “춘실아-” 하고 부르는 춘실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었다.
춘실은 어깨를 옹송그리더니 상순의 품안에서 빠져나왔다.
“빨리 가봐야겠소.”
“그럼 개 오른쪽 귀를 잘 뒤져보오.”
“양, 황둥개를 친하기 전에 날 찾지 마오.”
“양. 춘실과 첫사랑을 맺었는데 그까짓 황둥개를 친하지 못하겠소?”
춘실은 짚신바람에 치마자락을 날리면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황둥개가 왕왕 짖어대면서 뒤쫓아 갔다.
상순은 춘실과 백년가약을 맽고 너무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그는 버드나무 밑에서 눈을 움켜쥐어 버드나무에 마구 뿌렸다. 그러나 아까처럼 소리치지는 못했다. 상순은 기뻐 어쩔 줄 모르면서 주먹과 발길로 마구 아름드리버드나무들을 치고 박고 걷어찼다.

                           6. 집안혼사

초생달이 함흥촌 동산마루에서 장 바 줄 서너 개 만큼 가냘프게 떠있었다.
상순은 형님을 불러내 집 울바자 동쪽으로 나갔다.
상우는 황소숨을 몰아쉬는 동생을 마주 보면서 정색해 “무슨 일이냐?”라고 조용히 물었다.
“형님, 전번에도 말했지만 저기 춘실과 살게 아버지와 말해주오. 우리 둘은 서로 사랑하니까.”
당돌한 그 말에 상우는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야, 나와 아주머니도 너희 둘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어. 그런데 매형과 누님이 한 혼사 말이어서 아버진 한사코 사돈집의 명옥이란 새기와 너를 마주 세우려고 해. 이 일을 어쩜 좋아?”
이때 지새금이 구정물을 버리려고 나왔다가 형제간에 주고받는 말을 듣고 물을 마당에 왈 부어버리고 구정물 함지를 들고 다가왔다.
“시동생, 근심하지 마오. 내 어떻게 해서라도 시아버님과 말해서 우리 춘실과 살게 만들겠소. 그 사돈 새기는 원래 시동생 짝이 되지도 않소. 키도 작고 잘 생기지 못했더구먼. 그래도 우리 사촌여동생이 인물도 잘났고 키도 큼직한 게 시동생하구 천생배필이오. 이 다음 애들을 낳아도 우리 공혁처럼 큼직한 거 낳을거요.”
상순은 아주머니한테 엄지를 내휘둘렀다.
“그래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아주머니야!”
이때 위방 문이 덜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쉿!”
지새금은 입에 식지를 대더니 구정물대야를 들고 들어갔다.
위방 쪽에서 마른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기침소리를 들어봐도 아버지 기침소리가 아니고 큰아버지의 기침소리 같았다.
울바자 밖을 나온 사람은 확실히 창준이었다.
“너희들 여기서 밤중에 뭘 그렇게 구구거리냐?”
상순이 먼저 청을 드렸다.
“큰아버지, 나와 춘실이 살게 아버지께 말씀해줍소.”
창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글쎄 말이다.”
창준은 조카들을 번갈아보더니 뒷말을 이었다.
“헌데 맏조카 어금과 맏사위 경인이가 편지로 네 혼사 말을 했더구나. 혼사는 원래 부모가 결정하는 거니까. 아버지 결정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춘실과 좋아해도 너희들이 왈가불가 할 일이 아니다.”
그 기막힌 말에 상우가 끼어들었다.
“큰아버지, 아버지와 어떻게 잘 말해줍소. 얘와 춘실은 서로 좋아하오. 내 보건데 사돈 새기 명옥보다 내 사촌처제 춘실이가 체격이나 인물이나 마음이나 낫습니다. 사돈 새기는 동생과 짝이 기웁니다.”
창준은 버럭 성을 냈다.
“이 자식들이, 흥 소리도 반간이라고. 그래 부명을 어기고 집안 혼사 말을 어찌겠니?”
창준은 조카들에게 너무한 거 같아 좀 눅잦혔다.
“글쎄 내 동생하구 말해보마. 다 좋을 대로 하자고.”
상순은 황소숨을 몰아쉬다가 큰아버지 손을 덥석 잡았다.
“큰아버지, 꼭 잘 말해줍소. 난 춘실을 내놓고 못 살겠습니다.”
창준은 뒷간 쪽으로 가면서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이야?”
상우는 동생을 보고 타일렀다.
“너 그 밸 때기를 죽여라. 혹시 아버지가 뭐라고 하더라도 밸을 써선 안 된다. 그럼 나도 널 돕지 않을 거야.”
상순은 맥없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집안으로 들어갔다.
희끄무레한 등잔불이 나불거리는 위방으로 곧추 올라간 상우와 상순은 아버지와 큰아버지 앞에 마주앉았다.
상우가 두분의 눈치를 흘끔 보면서 무거운 입술을 떼였다.
“아버지, 큰아버지, 전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상순과 춘실이는 천생배필감입구마. 얘들을 함께 살게 허락해줍소.”
등잔불 밑에서도 기준의 성난 그림자가 선뜩하게 드러났다.
“뭐라고? 되지도 않는 소릴. 흥!”
기준은 움찔하더니 바로 앉으면서 마음을 굳힌 듯이 말했다.
“상순은 큰사위 경인의 조카 명옥이란 사돈 새기와 결혼해야 한다. 어금과 맏사위 경인이 혼사 말 편지까지 보내왔다.”
기준은 담배통 안에서 창호지 같은 누런 종이에 붓으로 쓴 편지를 꺼내 상순의 앞에 밀어놓았다.
그 말에 상순은 편지를 보지도 않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수그리며 간청했다.
“아버지, 매형과 누나도 나를 잘 살아라고 사돈 새기와 혼사 말을 했다는 걸 압구마. 헌데 난 춘실과 정이 들 대로 들어서 서로 떨어질 수 없습구마."
“이 놈 새끼, 부모 허락도 없이 마구 계집애들을 친하다니?”
상순은 무릎을 꾼 채 까딱하지도 않았다.
옆에서 보던 창준은 “집안 법도가 무너져서야 되니? 조용히 말해라.” 하고 기준을 말렸다.
상순은 큰아버지 역성에 용기를 얻었든지 당돌하게  속심의 말을 했다.
“아버지, 제발 사돈 새기와 혼사 말을 그만 두시오. 난 춘실과 살겠습니다.”
기준은 꽥 소리쳤다.
“이 놈 새끼, 집안 혼사를 망칠 셈이냐? 뭐래도 안 된다. 넌 사돈 새기 최명옥과 결혼해 살아야 한다.”
상순은 넙적 엎드려 어깨를 들먹였다.
“아버지, 그 부명만은 거둬줍소. 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돈새기와 살기 싫습니다. 춘실과 살겠습구마.”
창준은 옆에서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동생, 어째 같은 사돈 새긴데 지춘실하군 안 된다고 딱 잡아떼니?”
기준은 무뚝뚝하게 툭 내쏘았다.
“맏며느리를 지 씨네 집에서 삼았으면 됐지. 둘째며느리를 맏며느리네 사촌여동생을 데려오겠소?”
상우는 그 말에 속이 걸리었다.
(아버진 평소에도 새금을 못 됐다고 나무리더니 이러는구나.)
상우는 그제야 아버지가 극구 춘실을 반대하는 원인을 대개 짐작이 갔다.
정지 가마 목에서 그 말을 들은 새금은 입을 비쭉거리면서 조왕 쪽으로 몸을 틀었다.
“에이, 지씨네가 어떻다고. 너무나 사리 밝고 체격이 큼직한 게 좀 좋아서?”
앵돌아진 며느리를 보고 사련이가 책망했다.
“이 사람아, 그럼 못 써. 시아버님 말에 그게 뭔가?”
새금은 진짜 화를 냈다.
“시어머님도 생각해 봅소. 시동생 혼사말에 지씨네를 씹을 건 뭣입니까?”
최사련은 어처구니없어 입을 함박만큼 벌리고 고개만 홰홰 내저었다.
새금은 공혁을 안고 바깥으로 훌 나가면서 입귀를 비쭉거렸다.
“잘못했습니다. 하기사 새시할머니로부터 시어머니까지 몽땅 개성최씨 아닙니까? 이제 3대로 개성 최 씨 들어앉으면 희한하겠습니다. 무슨 집안혼사 말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때 위방에서 기준이가 고래고래 고함쳤다.
“거 어째 어른들이 말하는데 정지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구는 거야?!”
새금은 머리를 숙이기는커녕 위방을 흘끔 쏘아보면서 손바닥으로 괜히 공혁의 엉덩이를 짝짝 치더니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저 개 버릇을 어쩌겠니?”
상우도 위방에서 사이문으로 내다보다 못해 바깥으로 쫓아나갔다.
“여보, 어째 이러오?”
허나 새금은 울바자 바깥으로 나가면서 왕왕 울어댔다.
“내 분해서 이 집에서 못 살겠다. 그래도 내 시부모를 모시고 이제껏 살아 왔는데. 흐 흐 흑, 흑 흑…”
위방에서 기준은 의연히 자기 주견을 고집했다.
그러자 상순은 얼 주머니 크게 한마디 또 했다.
“아버지, 이전에 둘째누나 혼사 때에도 매형과 둘째누나가 마음에 있어 하는데도 반대하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결국엔 끝내 둘이 결혼하지 않았습까? 아버지 벽쪽으로 돌아앉아 절을 받지 않았다고 매형은 두고 두고 승 풀이를 하면서 가시집에 발을 들이밀지도 않지 않고 뭣입니까? 어째 이번에도 내 살자는 춘실과 살지 못하게 막습니까? 아버진 꼭 후회할겁니다.”
기준은 성이 나 씩씩거리면서도 창준이가 옆에 있어 매질을 하지 못했다.
“너 이놈 새끼, 뭘 안다고 주둥아리 질이야?”
기준은 담배통에서 담배부스러기를 꺼내 말아 부시를 쳐 불을 붙였다.
그는 담배를 길게 빨아 연기를 꾸역꾸역 내보내면서 맞은 켠의 상순을 보면서 맺고 끊듯이 말했다.
“집안혼사를 망치지 말라! 부명을 어길테냐? 자초에 춘실과 단념하고 명옥과 결혼할 준비나 해라.”
기준은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는 상순을 내려다보면서 내심하게 말했다.
“이 답답한 놈아, 애비 말을 들어 낭패 없다. 저 개성최씨는 양반가문이다. 옛날 신라말기에 최응이란 총명하고 지식이 많은 문필가가 있었다. 최응이란 양반은 개성에서 고려 궁예 밑에서 책사로 있었는데 후에 자손들은 모두 대대로 개성에서 양반노릇을 했다. 너네 엄마도 개성 최씨다. 봐라, 네 엄마가 우리 집에 들어온 후 너희 형제들이 잘못된 게 있느냐? 그래서 네 큰누나도 개성 최씨네 집에 줬다. 네 몸에도 개성 최 씨네 피가 흐른다. 그래서 집안혼사라고 하는 거다. 집안 혼사를 하면 친한데다 더 친해진다. 알만 해?”
상순은 어이없다는 듯이 머리를 들어 원망스런 눈길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집안혼사가 뭣이 좋다고 그럽니까?”
“집안혼사야말로 제일 믿을만 하다. 서로 잘 아는 집안끼리 믿음에 믿음을 더하는 게 아니겠니? 내 알아보니 명옥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눈치 밥을 먹으면서 자라면서 별의별 고생을 다 했더구나. 어려서부터 고생하면서 자란 여자가 시집에 들어오면 복이 차례지는 법이다. 그래서 어려서 고생은 금을 주구도 사지 못한다고 한다. 알겠니? 명옥인 또 인정이 두터운 처녀다. 조선 고향에서 후어머니 젖이 없다고 어린 동생을 업고 동네 애어미들한테 찾아가서 동냥젖을 얻어먹이어 키웠단다. 이렇게 인정미가 있고 어려서부터 고생한 새기는 살림살이를 잘할 제일 좋은 며느리 감이다.”
웃방에서는 상순이 일어나더니 아버지께 넙적 엎드리며 큰절까지 올렸다.
“아버지, 빕니다.춘실과 함께 행복하게 살게 허락해줍소.”
그러나 기준은 가물거리는 등잔불을 바라보며 상순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사래를 쳤다.
“이젠 밤도 깊었으니 나가라. 등잔불이 아깝다. 일찍 자구 내일 새 집을 짓는데 나가야지. 음.”
상순은 머리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간절하게 물었다.
“허락했습니까?”
“안 된다. 집안혼사를 망칠 셈이냐? 절대 안 된다.”
상순은 맥없이 풀썩 주저앉으면서 원망스런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기준은 막내아들의 그 꼴이 보기 싫은 듯이 벽 쪽으로 반쯤 돌아앉으면서 외면했다.
가물거리던 희미한 등잔불마저 꺼져버렸다.
어둠속에 컴컴한 위방 안에서 기준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집안혼사를 망칠 생각은 하지도 말라. 부명을 어기지 말고 최명옥과 결혼할 준비나 해라.”
그 말소리에 어두운 위방에서 상순의 씩씩거리는 황소숨소리가 톱질 했다.
7. 사위
어두운 정지에 차츰 희미한 달빛이 희읍스름하게 비껴들었다.
춘실의 엄마 박해금은 춘실의 쪽에 베개를 끌어다놓고 바싹 다가와 이불속에 들어왔다.
춘실은 죄나 진 듯 이불 밑에서 곰실거리면서 돌아 누워버렸다.
춘실의 엄마는 춘실의 손을 살며시 잡으면서 귀속 말로 물었다.
“너 어데 갔댔니?”
춘실은 손을 빼 이불을 머리까지 푹 덮어썼다.
이불속에서는 엄마의 말소리가 또 들렸다.
“대개 짐작이 가. 너, 김진을 만나러 갔지?”
“아니.”
“내 다 알아. 금옥이 데리러 왔을 때 벌써 이상했어. 혹여나 놀러 가나 했더니. 새까만 밤에 강변엔 뭘 하러 갔어?”
“아무 일도 아니요.”
“엄마한텐 제대로 말해라.”
“아버지 들으면 어쩌겠소?”
“무슨 일인지? 아버지한텐 말하지 않을게.”
“김진 나를 좋아한다오.”
“그래?”
춘실의 엄마는 딸을 꼭 끌어안으면서 언성을 좀 높였다.
“그래, 어쨌니?”
“어쩌긴 나도 사랑한다고 했지.”
춘실은 부끄러워 이불을 더 꽉 쓰면서 얼굴을 가리었다.
춘실의 엄마는 손을 뻗쳐 이불을 헤치면서 춘실의 얼굴을 매만지었다.
“너도 시집갈 때는 됐구나. 허나 부모 허락 없이는 동네 사내애들과 놀지 말라. 상순은 일을 칠 애야. 밸이 어찌나 센지 누가 시집가서 삐치겠니?”
“나하곤 괜찮소.”
“이 놈 가시나, 너 환장했니? 정말 걔한테 혼을 빼앗겼구나. 그 집안 내력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한 내력이냐?”
“사내란 독이 있어야 하오. 나긋나긋한 여자들처럼 마음만 고와 뭘 하오? 일본 놈의 난세에는 김진 같이 힘도 세고 싸움도 잘 하는 사내한테 시집가야 살아 남을 수 있소."

춘실은  김진의 자랑을 늘어놓기까지 하지 않겠는가.
"말을 들어보니 그 집안은 조선 신라라는 왕국의 38대로 왕을 지낸 경주 김씨네 후손이라오. 난 지금 막 왕후로 들어가기 직전 기분이오. 김진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다 얼마나 사내대장부답게 생겼소?”
“닥치지 못하겠니?!”
“어째 밤중에 고함질이오?”
위방에서 지군선이 깨나 정지로 나왔다.
해금은 이불을 활 걷어치우면서 버럭 고함쳤다.
“이 가시나, 글쎄 저 성남집 경칠네 막내아들을 좋아한다오. 그 놈 새끼 밸 때기 얼마나 더럽다고? 누가 우리 딸을 그런 심술이 바르지 않은 놈 새끼한테 준답데.”
춘실은 집안에 비껴든 달 빛 속에서 아버지가 정지 벽 밑에 내려와 앉아 등불을 다는 것을 보고 겁이 나 사시나무 떨듯이 바들바들 떨었다. 옆에서 자던 춘실의 여동생 은실은 경을 쳤구나고 질겁해 이불을 덮고 바들바들 떨었다.
등잔 불이 밝혀지더니 집안이 희읍스름해졌다.
군선은 이불을 머리꼭뒤까지 푹 쓴 춘실을 보고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춘실아, 일어나라. 너도 열여섯 살이니 시집갈 나이 됐다. 이 애비하구 제대로 말해라. 어떻게 된 일이냐?”
아버지가 때리려니 했는데 조용히 말하자 용기를 얻은 춘실은 이불을 활 내리우더니 천천히 일어났다.
“아버지, 김진한테 시집가겠습구마. 난 김진이 마음에 딱 드오.”
군선은 머리를 끄덕였다. 뜻밖의 거동이었다.
“혼사란 서로 좋아해서 되는 게 아니야. 양가 부모가 허락해야 돼.”
춘실은 어린애처럼 아버지한테 기여가 손을 잡고 몸까지 흔들면서 간청을 드렸다.
“아버지, 김진이 얼마나 남자 같소? 그 애가 말하는 게 이담 나와 살면 아버지와 엄마를 자기 친부모처럼 효성을 다해 모시겠다고 했소.”
등잔 불 밑으로 그 말에 반가운 표정을 짓는 군선의 얼굴이 환히 드러났다.
“여보, 이 일을 어쩌오? 사돈집과 변소는 멀어야 한다는데 저 성남집 경칠네 우리 앞에 집터를 봐두고 내일부터 새 집을 짓는다오.”
“그러오?”
뚱뚱한 해금은 영감을 쳐다보다가 말귀가 이상하게 들려 물었다.
“영감, 그래 저 성남집 김진을 사위로 삼겠단 말이오?”
그 물음에 군선은 “내 언제 허락했소?” 하고 반문했다.
"김진이 너무 좋아서? 배부른 흥정을 하면서."
그런데 자는 척 하던 은실이 끼어들었다.
해금은 은실한테 눈을 흘겼다.
“자라, 죄꼬만게 언니 일에 삐치겐? 금방 사돈집이라고 해놓고?”
군선은 말끝을 흐렸다.
“이담 혹시 사돈을 맺으면 너무 가까워 불편하겠단 말이오. 어떻게 앞뒤 집에서 살겠소?”
“야, 영감도, 그 밸때기 사나운 상순한텐 딸을 주지 못하오. 무슨 개고생을 시키자고?”
그런데 군선의 말은 달랐다.
“무슨 소리요? 그 집안은 예로부터 양반가문이오.”
춘실도 끼어들어 상순이네 집안을 하늘높이 춰 올렸다.
“옳습꾸마. 상순이 하는 말이, 옛날 조선을 천년이나 통치해온 신라에서 대대로 왕 질을 한 가문이라오. 뭐 38왕이 걔네 경주 김 씨라오. 그 애네 족보에 딱딱 적혀 있다오.”
“옳다. 그 집안이 대단한 왕의 후손 가문이니라.”
그런데 해금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전에 우리 본가 집 아버지 말하는 게 천년 신라는 원래 우리 박 씨네 세웠다더라. 저 성남집은 경주 김 씨 아니고 영월 김 씨인데도 알기나 하고 그러오?”
지군선은 그래도 고집을 부렸다.
“성남집은 원래 경주 김 씨인데 4백 년 전에 김려생이란 충신이 핍박에 의해 영월에 와서 숨어 살면서 영월 김 씨로 고쳤다고 하더라.”
해금이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 집안 고향은 명천인데 무슨 왕청 같은 영월 소리요?”
“영월에 있다가 명천에 들어왔단 말이지.”
“어떻게 그 집안을 그리 잘 아오?”
해금은 영감을 흘낏 쏘아보면서 “혹시 딸을 그 집안에 주자고 미리 알아봐 둔 게나 아니오?” 하고 다잡아물었다.
순간 해금과 춘실의 눈길은 등잔불을 빌어 일제히 군선에게로 쏠렸다.
“어떻소? 그 집과 사돈을 맺으면 든든한 게 좀 좋아서. 보오, 우리 조카네 다 얼마나 잘됐소. 아래사랑집에 들어간 큰조카나 성남집 상우한테 시집간 새금이나 얼마나 잘 됐소? 우리 딸을 김진한테 시집보내면 역시 호박이 넝쿨채루 떨어진 셈이지 않겠소? 황소 같은 사위를 삼아놓으면 누가 감히 우리가 아들이 없다고 업신여기겠소? 신라왕의 후손한테 시집가면 우리 외동딸이 진짜 왕후가 된 셈이지.”
해금은 억이 막혀 입을 함박만큼 딱 벌렸다. 첫딸을 병으로 잃은 뒤 춘실을 금이야 옥이야 하는 그들 부부였다.
“아이고, 몇 천 년 전의 왕의 후손을 아직도 왕의 후손 소리를 하고 있소? 다 잘못돼서 고향에서도 못 살고 일본 놈들한테 쫓기어 이 간도로 들어온 주젠데. 땅 한 짐 있소? 뭘 보고 딸을 준다고 그러오? 이 일을 어찌 하겠소?”
춘실은 좋아서 일어나 아버지 목을 끌어안고 흐느적거렸다.
“아버진, 정말 좋은 아버님입꾸마. 이담 김진을 데릴사위로 삼으면 우리 둘이 아버지와 엄마를 남부럽잖게 모실 게요.”
“그랬으면 오죽 좋겠니? 내 저 석철 조카사위와 말해서 어떻게 하나 너네 혼사 말이 되게 하겠다.”
해금은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아이고, 누가 우리 딸을 데려가잔다. 내 듣자니 그 집에서 석은 사돈네 처조카하구 혼사 말을 한다던데. 아는 거 같잖소.”
“뭐라고?”
군선은 적이 놀라했다.
그는 담배를 말아 붙이더니 담배연기를 후- 길게 내뿜었다.
“뭐나 하늘이 정하는 법이오. 인연이 있으면 혼사가 되는 법이고 궁합이 맞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지.”
춘실은 아버지를 마구 흔들었다.
“아버지, 나와 김진인 인연이 있습니다. 남들은 천생배필이라고 합꾸마.”
군선은 올방자를 틀고 바로 앉더니 한다하는 말은 이러했다.
“흥, 남자 쪽에서 혼사 말을 걸어야 되지. 우리 무슨 좋은 딸을 시집보내지 못할까봐 혼사 말을 먼저 하겠니? 건 안 된다. 기다려보자.”
“저 새금 언니 전번에 말하던데 자기 시아버지한테 내 혼사 말을 했답꾸마.”
“그래?”
군선은 뒤 잔등에 매달린 딸의 손을 쥐여 앞으로 끌어다 앉히면서 말했다.
“그런데 어째 기준이 까딱 말하지 않니? 새금의 말이 그 집안에서 설 거 같니?”
“언닌 맏며느린데도 시아버지 듣지 않겠소? 맏며느리를 홀대했다가 무슨 승풀이를 당하자고 감히. 흥!”
“너 못하는 말이 없구나. 입 다물지 못하겠어?”
춘실은 혀를 홀랑 내밀더니 구들에 활 들어 누워 이불을 꼭뒤까지 들쓰고 누워버렸다. 이불이 파도치고 흐느낌소리가 적막한 침묵이 흐르는 집안에 간간히 들리었다.
군선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근심 말아. 내 석철 조카와 혼사 말을 하라고 해볼게. 석철 조카사위는 경칠의 7촌 숙이 되니 말을 들을 거야.”
군선은 일어나 위방으로 들어갔다.
“일찍 자고 내일부터 농사차비를 해야겠다. 내일 엄마하구 저 석현지에 심을 콩 씨를 골라라.”
춘실은 이불을 쓴 채 홱 돌아누웠다. 은실은 혀를 홀랑 내밀더니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해금은 등잔불을 끄고 춘실의 옆에 누워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 딸의 얼굴을 매만지었다.
춘실은 엄마 손을 탁 쳐버렸다.
“아가야, 엄마라고 어째 딸을 아끼잖겠니? 널 더 좋은 신랑한테 시집보내자고 그러지.”
“난 김진이 아니면 시집 안 가.”
초생달빛이 비껴드는 집안에는 밤이 깊도록 모녀간이 주고받는 소리와 흐느낌소리, 한숨소리가 끝이 없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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