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소나무숲 속의 참사
가을 황혼의 락조가 철조망을 두른 높다란 담장을 빨갛고 누렇게 물들였다.
승호는 위엄있게 총을 메고 망루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승호는 최성균 교수와 아버지 덕에 졸업 전에 저지른 패륜을 잠시나마 덮어감추고 공안국 대문으로 스리슬쩍 들어갔다. 졸업하기 전에 그는 황급히 세집에 놓았던 침대를 밤도와 들어내다 버렸다. 그 침대 우에서 어찌나 처녀들을 껴안고 삐꺼덕거렸으면 침대다리가 다 너덜거렸다.
승호는 철조망을 두른 감옥 망루에서 보초를 서다가 락조 속에 아물거리는 공원 너머 우뚝 솟은 대학교 청사를 쳐다보았다. 문뜩 은영의 걀죽한 우유빛 얼굴이 눈 앞에 보름달처럼 떠올랐다.
그는 퇴근하기 바쁘게 경찰복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자마자 부랴부랴 대학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숱한 대학생들이 한창 식당으로 분주히 드나들었다. 성호는 멀찍이 서서 녀대생들을 참빗질을 하면서 은영을 찾았다.
“승호!”
등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돌아서 보니 애타게 찾던 은영이 아니고 뜻밖에도 불청객 홍희가 아니겠는가.
홍희는 둥근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승호는 별수 없이 학교 뒤산으로 따라 올라가면서 제 좋은 속궁리를 굴렸다.
(슬슬 얼려보내야지.)
뒤산의 푸른 소나무숲이 서늘한 가을바람에 휴- 휴- 소리내 울면서 설레고 있었다. 소나무숲 속에는 행인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나무숲 둔덕 밑에서 멈춰섰다. 둔덕 아래에는 소나무를 심으려고 파놓았던 움푹한 구뎅이가 무성한 잔나무숲 속에 쓸쓸히 누워 있었다. 그 구뎅이는 승호가 밤만 되면 홍희 아니면 은영을 갈아가며 데리고 와서 야수처럼 야욕을 채우던 은페된 장소였다. 세집에 차려놓은 지하독서실은 필경 숙사와 가까와 불편해 장소를 옮긴 것이다.
홍희는 돌아서서 손으로 눈시울을 훔쳤다.
“여기 뭘 하던 곳인지 기억하지?”
찰싹!
홍희는 승호의 더러운 낯짝을 한대 갈겼다.
“짐승 같은 놈!”
승호는 얼얼한 낯을 어루만지면서 초두부처럼 야들야들하던 홍희가 이렇게 날카롭게 나올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마디만 묻겠다.”
“처음부터 날 사랑하기나 했니?”
“무슨 말이냐? 널 사랑했어…”
“딴 소리 말라. 은영은 사랑했니?”
“은영을 사랑하든말든 무슨 상관이냐?”
“도대체 넌 몇을 사랑하니? 은영이냐? 경옥이냐? 이제 또 누구야?”
홍희는 격분해 따지고 들었다.
“야, 이러지 말라.”
승호는 무섭게 살기 번쩍이는 홍희의 깜장눈을 피하면서 능청을 부렸다.
“얘, 이러지 말라.”
“이때까지 참고 또 참았다. 혹시 네가 마음을 돌리겠나 기다렸어. 이젠 끝장을 봐야겠어.”
승호는 능청스레 연극을 놀았다.
“얘, 우린 아직 젊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나도 내가 미워. 어쩜 이렇게 번져먹었는지 모르겠어. 세상 고운 녀성들을 보면 다 살아보고 싶었어. 난 짐승이야, 야수야. 아니, 개새끼야. 이런 개새끼를 잊어라. 어떻게 믿고 살겠니?”
홍희는 격분돼 내쏘았다.
“이 수개야! 색마야! 숱한 처녀들의 정조를 짓밟고 엉덩이를 쓱 씃고 꼬리를 뺄 예산이냐? 하늘이 굽어본다! 네 놈이 잠시는 애비 덕에 학교 기률과 법망을 벗어났지만, 이제 천벌받을 거야. 너 같은 놈이 다 경찰 됐어? 눈깔도 멀었구나. 흥!”
승호는 홍희의 손을 잡으며 빌었다.
“얘, 너무 흥분하지 말라.”
“비켜!”
홍희는 승호의 손을 탁 쳐버렸다.
“네놈은 날 더러운 야욕을 채우는 노리개로 여겼어. 이 개새끼야!”
그녀는 단말마적으로 달려들어 승호의 꼬슬꼬슬한 양머리를 마구 뜯어 놓았다.
승호는 미친듯이 달려들며 광기를 부리는 홍희를 뿌리면서 능청을 떨었다.
“얘, 이걸 놓고 내 말 들어라.”
홍희는 색마의 낯짝을 쏘아보면서 또 덮쳐들었다.
“개 주둥이에서 개 소리 밖에 더 나올 게 있어?”
성호는 뒤로 물러서면서 정색했다.
“널 시내에 배치해줄게.”
“듣기도 싫어! 개 낯짝이 보기 싫어 이 시내에서 살기도 싫어!”
승호는 한술 더 떴다.
“기실 널 사랑했어. 이제라도 시내에서 함께 살자. 아버지하구 말해서 널 시내에 남길 수 있어.”
홍희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더럽다, 더러워!”
그녀는 승호 낯에 침을 퉤 뱉었다.
“실련했다고 불쌍해? 이 놈아, 네놈한테 속히워 산게 분해! 억울하다, 억울해!”
홍희는 또 무섭게 덮쳐들었다. 허나 승호가 팔로 뿌리치자 저쪽에 날려가 나동그라졌다.
그녀는 소나무에 머리를 마구 쪼으면서 소나무 숲이 떠나가게 대성통곡쳤다.
“야, 네놈이 어쩜 그렇게 할 수 있어. 하늘이 굽어본다. 굽어봐, 내 뭐라 했나? 날 버리면 네 놈 죽고 나 죽는다, 죽어. 꼭 천벌 받을 거야. 으~으흐흐 흑, 흑, 흑. 숱한 처녀들 악귀가 네놈 목에 올가미를 걸어 하늘에 끌고 올라갈 거야. 네놈 정수리에 숯불을 올려놓을 거야. 어~ 허허허, 헉, 헉, 헉, 네 놈은 제 명에 죽지 못할 거야!”
홍희는 갑자기 스르르 일어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칠거리면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
아무리 지독한 랭혈동물이라 해도 승호는 처량한 홍희의 뒤모습을 보고 속에 걸렸다. 그는 황급히 홍희를 뒤따라달려가서 거짓말로 달랬다.
“홍희, 난 은영과 언약한 것도 없어. 이제라도 우리 다시 시작해보자. 고향에 돌아가도 힘든 일이 있으면 날 불러. 내 경제적으로 힘껏 도와줄게. 정조 근심되면 미용원에 소개해줄게. 지금 성형기술이 높아서 처녀들 그거 수술해 되돌려준다고 하던데.”
홍희는 색마의 개소리를 귀등으로 흘리면서 쓸쓸히 모교 뒤산을 떠났다.
그 대학교 뒤산의 소나무숲에서 일찍 그녀는 전도를 개척할 일루의 희망을 품고 색마에게 마음과 사랑, 정조 모든 것을 짓밟히지 않았던가? 지난날 희망의 소나무숲은 치욕의 숲으로 남아 울고 있었다. 아니, 그녀를 절망에 빠뜨린 채 쓰라리게 흐느끼고 있다!
며칠 후 승호는 예전대로 감옥으로 출근했다.
그가 당직실에 가자마자 전화벨이 따르릉 따르릉 급촉하게 울렸다.
“예, 당직 리승호입니다. 예, 박대장님, 곧 가겠습니다.”
승호는 송수화기를 놓기 바쁘게 부랴부랴 대대장 사무실로 달려갔다.
“어디에 가서 얼굴 긁혔어?"
"예. 운동하다가 그만."
기실 전날 홍희에게 허빈 흉터였지만 슬쩍 거짓말을 에둘러댔다.
"큰 일 생겼소.”
승호는 황급히 박철운 대대장의 어두운 철색얼굴을 쳐다보았다.
“홍희라는 처녀를 아오?”
“예.”
승호는 목구멍으로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박대대장의 자못 엄숙한 철색얼굴에서 대답을 찾으려는듯 살폈다.
“이걸 보오.”
박철운 대대장은 서랍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 내밀었다.
(날 고발했는가?)
승호는 뇌리에서 만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황급히 박대대장의 손에서 사진을 받아 보았다.
“아니, 얘가?!”
그는 깜짝 놀라 하마트면 물앉을 번했다. 소나무가지에 목을 맨 녀성 시체 사진이 아니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만 해도 나와 만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박철운 대대장은 또 다른 사진 한장을 내밀었다.
“이걸 보오.”
승호는 사진을 받자마자 마구 찢어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찢어버리면 끝인가?”
박대대장은 똑같은 사진을 꺼내들었다.
“이런 도리쯤은 알아야지.”
승호는 창피해 머리를 들지 못했다.
“이 사진은 승호란 야수가 이른바 지하독서실 침대에서 홍희를 짓밟은 철 같은 죄증이란 말이요. 처분 기다리요.”
박대대장의 말에 승호는 낯이 새까맣게 질렸다.
승호는 용기를 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무슨 죄 있다고 이럽니까? 난 홍희를 자살하라고 시킨 적도 없습니다.”
박대대장은 철색얼굴에 쓴 오이를 씹은듯이 입귀로 쓴웃음을 흘렸다. 그는 서랍을 쭉 열더니 편지봉투를 꺼내 흔들었다.
“속을 거 같아? 형사수사대대에서 사건현지를 수사할 때 목을 맨 홍희의 시체 호주머니에서 이러루한 사진들과 자네의 죄악을 공소해 쓴 유서까지 나왔어. 용서할 수 없어.”
승호는 박대대장 앞에 풀썩 무릎을 꿇고 물앉았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여기서 개처럼 쫓겨나면 어떻게 세상에서 머리를 들고 살겠습니까?”
박대대장은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단칼로 머리카락을 자르듯 말했다.
“집법일군일수록 법을 더욱 잘 지켜야 해. 물론 자넨 홍희의 죽음에 책임이 있네. 또 숱한 녀성들과 련애를 한다는 미명하에 패륜행위를 한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네. 나와 네 아버진 20여년 동안이나 함께 공안국에서 일한 친구지만 어쩌는 수 없어. 총을 내려놓고 나가 보게.”
승호는 총을 박대대장한테 넘겨주고 김빠진 공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나가려다가 되돌아섰다.
“미안합니다. 그 편지를 볼 수 없습니까?”
박대대장은 복사본이 있는지라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승호는 편지봉투를 받아 호주머니에 넣고 어깨에 멨던몸을 돌려 나왔다.
승호는 호주머니에 넣은 편지봉투를 만지작거리면서 대학교 뒤산 소나무숲 속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그날 홍희와 갈라진 곳이였다. 또 홍희가 목을 맨 비극의 지점이기도 했다.
승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편지봉투를 꺼냈다. 편지지는 눈물로 부풀어오른 자국이 얼룩졌다.
세상 사람들은 아마 승호는 아주 능력이 있는 학생간부이고 정직한 인간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오늘 나는 죽음으로 만천하에 색마 승호의 죄악을 폭로한다.
야수 승호는 련애한다는 미명하에 허경옥, 최은영, 나까지 정조를 유린하고 짓밟았다. 이런 짐승 같은 놈이 감옥의 경찰로 되다니? 어떤 짓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 이 놈이 이제도 얼마나 많은 처녀들의 정조를 유린하고 짓밟을지 누가 아는가? 또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야수의 함정에 빠져 고통 속에서 시달리다가 억울하게 죽어갈지 누가 알겠는가?
세상에는 도덕법정이 없는가! 이런 패덕한 놈을 법에 의해 처단하라. 정의적인 사람들이여, 나처럼 릉욕당하고 유린당하고 죽음의 심연에 빠진 억울한 처녀들의 혼을 달래주라. 만약 하느님이 있다면 꼭 이런 놈의 정수리에 숯불을 올려놓을 것이다!
편지를 읽어보고 악마 같은 승호도 몸서리쳤다. 아니, 하늘이 천벌을 내릴 것만 같아 온 몸이 떨렸다.
"끝내 올 것이 왔구나. 어떻게 한단 말인가!"
승호는 유서를 쫙쫙 찢어 하늘에 훌 날려보냈다. 편지쪼박들은 가을바람에 하늘에서 쓸쓸히 날아내려 우수수 지는 락엽과 함께 휩쓸려갔다.
푸르른 소나무숲이 억울하게 죽어간 처녀가 가엾어 원혼이라도 달래주려는듯이 을씨년스런 가을바람에 몸부림치며 설레고 있었다.
23. 흉수의 그림자
을씨년스런 가을하늘에 흐리터분한 먹장구름이 흐트러졌다가도 뭉치면서 룡트림하며 덮쳐왔다. 구질구질 내리는 가을비가 행인들을 괴롭혔다.
성호는 광고회사에 출근한지도 어언간 두달이나 되였다. 광고회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허굉팔 부총경리는 부영장급이느라고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렁거렸다. 참 눈꼴 사나왔다.
특히 훤칠한 허굉팔이란 부총경리 저 생김새부터 기절났다. 길쭉한 철색말상에 흰자위를 희번뜩거리며 데굴데굴 굴리는 우멍눈, 툭 튀여나온 앞이가 보기에도 좋은 사람 같지 않았다.
반면에 김범수 총경리는 너부죽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쌍까풀눈이 첫인상에 마음이 좋아보였다.
범수 총경리는 사람 좋게 웃음지으면서 성호에게 조용히 경험을 전수해주었다.
“훌륭한 광고업무원이 되려면 꿀벌처럼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광고를 많이 얻어와야 하오. 광고수입은 바로 광고업무원의 실력이요.”
“예, 노력하겠습니다.”
김범수는 성호와 나란히 앉아 관심조로 말했다.
“광고를 얻어들이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요.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광고주를 하나, 하나 얻을 수 있소. 이후에 어려운게 있으면 말하오. 내 도와주지.”
“예.”
성호는 한달 동안 가을비를 무릅쓰고 시내를 헤매면서 좀 돈을 버는 거 같은 기업소와 상점을 보기만 하면 무작정 문을 뚝 떼고 들어가 명함을 건네고 광고를 하지 않겠는가고 동원했다. 그러나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장마당에서 물건을 사라고 하면 할수록 사지 않는 것처럼 기업주들은 광고의식이 차해 몇천원씩 내고 거리나 교량 란간에 걸어놓는 광고를 내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시내에서 헤매다가 한 식료품상점 문 앞에 이르렀을 때다. 몇 사람이 차에서 술상자를 부리워 들여가는 것을 보았다.
(저 술을 광고하면 어떨까?)
그는 곧장 상점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술 한상자에 얼마입니까?”
“양?”
상점 보스는 술을 사려는가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한 상자에 50원이요.”
“한 상자에 몇병 있습니까?”
“허, 오늘 문을 열자마자 수 붙었네. 한 상자에 다섯병 있소. 몇상자 사겠소?”
“아니, 사려는 건 아니고. 이 술을 간판광고를 하면 잘 팔리겠는데요. 비용도 비싸지 않습니다. 한 500원만 내면 됩니다…”
“간판광고를 하나 내자구 열상자나 처넣겠소?”
상점 경리는 손을 내저으면서 축객령을 내렸다.
“우린 광고를 내지 않소. 재수없이 아침부터 돈을 빼내가려고 찾아오는가?”
미역국을 마신 성호는 시내 여러 상점을 돌아다녀도 광고 하나도 걸여오지 못했다.
굉팔 부총경리는 다짜고짜 성호를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일주일 되도록 광고 하나 얻어오지 못해? 진짜 밥 먹고 죽벌이도 못하는군.”
성호는 머리 숙어졌다.
굉팔은 광고서류를 책상에 탕 메치며 성호를 쏘아보았다.
“농부 아들은 안돼. 진짜 무능아군. 정 광고를 못하겠으면 광고회사에서 나가라구.”
범수는 굉팔을 말렸다.
“신입직원을 그러지 마오. 그래도 한 반년 하느라면 얻어오겠지.”
성호는 뜻밖의 말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굉팔은 가물의 실돌피처럼 가는 허리를 의자에 기대더니 뱀의 대가리처럼 작은 머리를 쳐들고 표독스레 성호를 쏘아보았다.
“여긴 무능아를 키우는 민정소가 아냐. 시장경제시대에는 눈물이 필요없어. 능력이 없으면 도태야.”
성호는 눈앞이 깜깜해났다.
“이제 술공장에 직접 찾아가서 술광고를 하자고 마수걸이를 해보겠습니다. 좀 기다려주십시오.”
“대학에서 밑구멍으로 법률을 배웠소? 술광고를 하는 건 비법이라는 것도 몰라? 엉?”
굉팔은 버럭 고함쳤다.
“야, 너 같은 애를 믿다간 한지에 방아를 걸겠어.”
성호는 자존심이 상해 맞장구를 쳤다.
“아니, 허경리, 말이면 다 합니까?”
“흥! 자식, 이 광고회사에서 내 말이면 다야. 흥!”
성호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굉팔은 성호가 물어온 술광고를 공상국에 고발해 벌금을 안기게까지 해 골탕 먹였다.
광고회사에 코를 떼운 성호는 어디로 찾아가 하소연할가 서성거리다가 대학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성균 교수나 정희 아버지를 찾아가야지.)
그가 공원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오빠, 어디로 가?”
뒤에서 귀에 익은 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정희가 아니겠는가.
“어째 기분 좋지 않은 거 같은데.”
성호는 머리를 푹 숙인 채 걸으면서 금방 있은 일을 말했다.
“난 광고회사로 가기도 싫어. 굉팔이란 경리는 인간도 아니야. 그저 큰소리치고 협박해.”
정희는 대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디서 그런 경리도 있다오?”
“광고라는게 어디 가을에 지는 락엽처럼 깍쟁이로 마구 끌어 들일 수 있니?”
의논 끝에 그들은 최성균 교수를 찾아갔다.
최성균 교수는 대머리에 돋은 식은 땀을 닦았다.
“그 좋은 광고회사에 배치했는데 그만두다니? 승호도 공안국에서 쫓겨나서 찾아왔댔소. 홍희는 자살했소. 야, 정말 골치 아프오.”
성호와 정희는 깜짝 놀라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아니, 홍희가 어쩜?”
모두 비통에 잠겼다.
납덩이 같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최교수는 머리를 들었다.
“광고회사에 눌러 있소. 시내에서 자란 정희도 천수해중학교에 갔을라니 농민의 아들인 성호는 그만하면 배치를 잘 받은줄 아오.”
그 말에 성호는 발끈했다.
“예~ 알았습니다. 농민의 아들이기에 농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원래 난 시내 사람들이 딱 질색입니다. 교활하고 간사하고 리기적이고. 인정미라곤 하나도 없는 놈들이 득실거려서 딱 질색입니다.”
정희는 성호에게 면박을 주었다.
“야, 말 같은 말 해라. 누가 널 따라 호박을 쓰고 돼지굴로 들어간대?”
“오지 않겠으면 말아!”
성호는 발끈 화를 내더니 문 밖으로 나와 쥉쥉 시내로 내려갔다.
뒤에서 정희가 쫓아오면서 불렀다.
“야, 내 말 좀 들어.”
그녀는 성호의 손까지 잡고 애원했다.
“다 우리 앞날을 위해서야. 이제 농촌으로 떨어지면 시내에 들어오기 더 애난다. 어떻게 하나 광고회사에 있어야 해.”
성호는 정희의 손을 꼭 잡으면서 한숨을 후~ 내쉬였다.
“우리 아빠도 옛날 공안국장을 했어. 아빠 옛날 수하들 속에는 국장도 있고 과장도 있어. 그들을 찾아가 청탁하면 난 공안국에도 들어갈 수 있어.”
“엉? 진작 찾아갈게지.”
정희는 새파랗게 질렸던 얼굴에 화색을 띠더니 성호의 손을 꼭 잡았다.
성호는 정희를 보내고 나서 그 길로 이모부네 집으로 찾아갔다.
성호의 이모부 강운룡은 원래 교통경찰대대 민경이였다. 당시 공안국장인 리상진은 강운룡이 특수정찰부대 출신인데다 날랜 걸 보고 형사경찰과에 전근시켰고 처제 수옥까지 중매를 서서 결혼시켰던 것이다. 어려서 성호는 녀자애처럼 몸이 허약해 애들한테 놀림을 당했다. 어떤 때에는 애들한테 얻어맞아 항상 얼굴에 흉터가 났다. 강운룡이 처형 초가집으로 놀러 왔다가 그런 정황을 안 후 성호에게 특수정찰부대 권투를 배워주었다. 그후부터 성호는 애들 속에서 허리를 펴고 살 수 있게 됐다.
성호는 마음 속으로 이모부를 존경하고 따랐다.
성호가 찾아갔을 때 운룡은 창문에 비닐박막을 대다가 넉가래 같은 손을 내밀어 악수까지 했다.
“이젠 졸업했겠구나. 어데 배치받았니?”
이모 수옥은 대견하게 조카를 바라보았다.
성호는 머리를 푹 숙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성호에게서 사연을 들은 운룡은 소발쪽 같은 주먹으로 벽을 쿵 치면서 도리머리를 홰홰 흔들었다.
“허굉팔? 그자가 뭐 대단해서 그렇게 훈계한다니?”
성호는 이모부한테 단도직입으로 지청구를 들이댔다.
“제가 이모부네 공안국에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응?”
운룡은 한참 궁리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넌 성격은 공안일군을 하면 될 거 같애. 그런데 수사실무를 잘 모르고선 한쪽으로 밀려. 시내에 중대한 형사사건이 생기면 수사대원은 가장 짧은 시간 내에 범죄자를 수사해내야 한다. 수사사업은 사회 책임감과 사명감이 아주 높은 특수사업이야. 제때에 사건을 해명하지 못하면 아주 큰 사회압력을 받게 되고 한쪽으로 밀려.”
“배워서 하면 안 되겠습니까?”
“글쎄, 쉽지 않아. 첫 3, 4년 내에 사건을 척척 해명하지 못하면 한쪽으로 밀리는 거야.”
운룡은 성호의 손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요즘 권투를 연습했니?”
“못했습니다.”
운룡은 “계속 연습해라. 수사일꾼으로 되겠는지 아니? 무예는 수사대원의 밑천이야.” 하고 말하더니 한가지 상식을 배워주었다.
“목을 조일 때면 한 손으로 조이는 게 아니야.”
운룡은 구들바닥에 대고 두엄지손가락을 한데 겹쳐 내리누르는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 두손으로 눌러야 파악이 있는 거야.”
성호도 운룡이 시범한대로 엄지손가락을 겹쳐 눌러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운룡은 서재에 들어가 가죽가방을 들고 나왔다.
“요즘 대학생들 말이 아니야. 이걸 봐라. 녀대생이 소나무숲 속에서 륜간당했어.”
그는 성호 앞에 서류를 내보였다.
“이번에 사건해명을 견습해보겠니?”
“예, 좋습니다.”
“이게 신고인과 피해자 녀대생 진술이다.”
성호는 서류를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재삼 보아도 피해 녀대생은 은영이 아니겠는가!
“아니, 얘가 어쩜 이런 일을 당해?!”
운룡은 주먹으로 메부리코를 쓱 닦으면서 물었다.
“아는 애냐?”
“예. 아래학년 앤데. 스케트랑 달리기랑 잘해 소문난 앤데요.”
“그래?”
“우리 주관 부시장 최웅봉네 무남독녀야. 지금 우린 사회 압력을 얼마나 받는지 몰라. 인차 해명해야겠는데.”
성호는 신고자의 진술보다 먼저 은영의 진술을 펼쳐보았다.
“1983년 10월 16일 오후 3시, 제가 학교 뒤 소나무숲 속에서 책을 보는데 갑자기 괴한 셋이 뛰여와 나를 륜간했다. 당시 나는 정신을 잃고 까무러쳤다. 그후 정황은 하나도 모른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 구급병실에 누워 있었다...”
“얘가 어느 병원에 입원했습니까?”
“YB병원에 있다. 네가 면목을 잘 알면 피해과정을 좀 알아주면 좋겠는데. 피해녀대생은 입을 꼭 다물고 말하지 않고 울기만 한다. 정신타격이 심해. 몇번이고 자살하려고 해서 가정과 병원 측에서 밤낮 지키는 판이야.”
성호는 못된 은영이 자기 앞에서는 더욱 말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서류에서 사건 신고자의 진술을 상세히 보았다.
“그날 나는 해가 진 후 약(오후 8시 반 좌우) 아무도 보지 않는 학교 뒤산 소나무숲 속에 권술을 연습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마른 풀속 구뎅이에서 웬 신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웬 녀인이 피못 속에 알몸뚱이로 누워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급히 학교 무장부에 가서 알려 학교 차로 병원에 호송했습니다. 나는 인차 접수실의 전화로 110에 사건을 제보했습니다.”
서류에는 은영의 하신에서 부동한 네개 DNA가 든 정액이 검출됐다고 똑똑히 적혀 있었다.
“이모부, 의문이 있습니다.”
운룡은 성호한테 예리한 눈길을 돌렸다.
“은영의 진술을 보면 분명 세 강도가 나타났다고 했는데 질에서 검출된 DNA는 네 사람의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강도 셋을 내놓고 또 한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있잖겠습니까?”
“그게 수상해. 은영은 평소에 소나무숲 속에 홀로 가서 공부하니?”
“은영은 보통 열람실에 가서 공부합니다. 이 추운 늦가울에 혼자 소나무수림에 책을 보러 갈 순 없습니다. 혹시 소나무숲 속에서 누군가와 련애하다가 당하지 않았을가요?”
“음-”
운룡은 한참 궁리하더니 성호의 예리한 분석과 추측에 놀랐다.
“어떤 남자와 소나무숲 속에서 련애하다가 세 강도에게 당했다? 그거 비슷한 추측이야.”
성호와 운룡은 정탐추리소설의 한 대목을 공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성호의 눈 앞에는 피뜩 승호가 은영을 데리고 소나무 밭에 가서 련애하는 장면, 아니, 그가 그 소나무숲 구뎅이에서 은영과 련애하다가 세 강도에게 당한 그런 가상이 떠올랐다.
“가능합니다!”
성호는 자기 직감을 죽 이야기했다.
운룡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우리 사건현장으로 가서 자세히 재검사해보자.” 라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날 수사대원들이 초보적으로 현지수사를 했지만 어두운 밤 수사여서 재수사가 필요했다. 게다가 성호를 견습시키려고 운룡은 현장을 재수사하기로 했다. 그들은 형사경찰대대의 찌프에 앉아 대학교 뒤산 소나무숲 속으로 달려갔다. 사건 현장에서 아직도 피가 질벅한 구뎅이를 둘러보는 순간 성호는 마음이 아팠다. 은영이 강도들에게 륜간당한 구뎅이에는 저항하느라고 발로 버둑거리면서 긁힌 흔적이 이리저리 오려져 있었다. 또 피 묻은 종이쪼박과 은영의 운동화 같아 보이는 녀성의 신 한짝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분명 세 강도들은 이 구뎅이에서 나약한 은영을 짓밟았을 것이다.
운룡이 시키는대로 성호는 종이쪼박과 운동화를 가방에 주어넣었다. 운룡은 가방에서 자를 꺼내 구뎅이에 박힌 흉수들의 커다란 발자욱의 크기를 일일이 재였다. 그는 구뎅이에서 나와 발과 키의 비례를 재는 원형자를 돌리면서 흉수의 키를 추산했다.
“다 키꺽다리놈들이구나. 대개 1.73, 1.75, 1.78, 아니, 한 놈은 키가 1.80메터나 되는구나. 분명 네 놈의 발자국이야.”
사건현장에는 어지러운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소나무 밑에 미끌고 뻗치고 한 발자국을 보아 별로 싸운 흔적 같았다. 소나무 밑에는 피 묻은 헝겊바줄이 널려 있었다. 바줄을 주어들던 운룡은 바줄 밑에서 수술 칼 하나를 주었다.
(이 수술 칼로 바줄을 끊었을까? 피해녀를 여기 묶어놓고 강간했을까?)
성호는 카메라를 꺼내 소나무에 묻은 피 흔적을 사진 찍은 후 착잡한 생각에 빠졌다.
(이건 뭔가? 네 놈에게 당한 은영의 피해는 상상해봐도 불 보듯 뻔해.)
성호는 마음을 칼로 에이는듯 아팠다.
(내 미치게 사랑한 은영을 어떤 놈들이 해쳤을가? 꼭 해명해 은영의 원쑤를 갚아야 해.)
“이걸 봐라!”
운룡은 구뎅이에서 피 묻은 수술칼을 주어들고 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피해녀 몸에는 근본 수술칼에 찔린 상처가 없었는데. 이 수술 칼은 뭐지? 1차 사건현장수사에서 이봐라. 빼놓은게 얼마나 많니? 리과장이 한 수사는 이렇다. 항상 사건현장엔 제일 먼저 달려가지. 수사는 이렇게 대충 하고. 사건해명을 하기만 하면 소식 공개회의에는 항상 먼저 나서지.”
그들 둘은 사건현장을 샅샅이 살폈다. 운룡은 풀숲에서 검퍼렇게 변질한 귀두를 발견했다. 장갑을 낀 손으로 그걸 들고 찬찬히 보니 비스듬히 썩둑 잘린 귀두는 썩기 시작해 진물이 줄줄 흐를 지경이였다.
“흉수건가? DNA검사를 하면 흉수는 밝혀낼 거 같아.”
운룡은 그걸 비닐봉지에 싸서 서류가죽가방에 넣었다.
“가자, DNA검사를 해봐야겠어.”
그들은 황급히 공안국 형사수사대대 사무실로 돌아갔다.
성호는 운룡한테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은영한테 직접 알아보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날 승호와 함께뒤산에 련애하러 갔는가? 승호한테도 알아보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승호라는 앤 우리 리과장네 아들이 아니냐?”
“걔네 아버지가 공안국에서 과장을 한답디다.”
“리과장 아들과 관계되면 큰 일인데.”
운룡은 한참 생각하더니 이런 수사방안을 내놓았다.
“넌 사인정탐 신분으로 승호의 그날 행적을 알아봐라.”
“예, 알겠습니다.”
똑, 똑, 똑!
노크소리와 함께 리철갑 과장이 들어왔다. 그는 성호한테 눈길이 갔다.
“안녕하십니까?”
“아니, 승호네 동창생 아닌가? 지금 어디 배치받았소?”
“예, 광고회사에 배치 받았습니다.”
“아, 그래? 지금 세월에 시내에서 직업을 찾기 그리 쉽겠소? 저는 농민의 아들이 아니고 뭐요?”
성호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리과장이 눈에 거슬렸다.
허나 허무한 웃음을 지으면서 “승호는 계속 감옥에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양? 뭐 어느 회사에나 가겠는지?”
리철갑은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
“요즘 뭘합니까?”
“입원했소. 누구하구 싸웠는지 얼굴과 가슴마저 비수에 찔렸습데.”
“예?”
성호는 이모부와 의미심장하게 눈길을 마주쳤다.
“어느 병원에 입원했습니까?”
“YB병원 급진외과 109호.”
성호는 자기 추측이 맞는 것 같아 기뻤다.
(만약 승호가 그날 은영과 련애했다면 꼭 흉수를 밝혀낼 수 있을 거야.)
성호는 흉수의 그림자가 눈 앞에 보일듯 말듯 했다. 그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안개가 자오록이 잠긴 병원으로 총총히 반달음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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