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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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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9)
2018년 07월 10일 11시 05분  조회:2047  추천:5  작성자: 김장혁





                        8. 심산에서 뛰쳐나온 맹호

      흐리멍텅한 하늘아래 함흥중학교 마당에는 범이 새끼를 칠 지경으로 풀이 듬성듬성 자라나 있고 여기저기에 장바로 매놓은 소들이 풀을 뜯어먹으면서 똥물을 찔찔 쏘아댔다. 학생들이 뛰놀며 공을 차야 할 운동장이 소를 먹이는 방목지로 돼버렸다. 참 한심한 판이 아닌가.
저 멀리 텅텅 빈 교실은 돌멩이에 얻어맞아 펑펑 구멍 뚫린 창문으로 허수아비처럼 멍하니 어지러운 세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얼럭덜럭한 대자보가 펄럭거리는 학교 몸뚱이는 진짜 산신당에 놓인 화환을 들쓴 것 같기도 하고 무덤에 놓인 지전을 들쓰고 신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교정에는 학생들의 명랑한 글소리 대신 “음-메-” 하는 소 영각소리가 여기 저기에서 들렸다. 학생들은 필 대신 호미와 괭이를 주어들고 풀밭에 머리를 파묻고 거꾸로 엎뎌 기음을 매고 땅 파기를 하면서 빈농들의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어떻게 돼 우리 학교가 저 지경으로 됐을까?”
먼발치에서 모교의 참경을 바라보는 덕돌은 서글프기만 했다.
어쩌다가 학교에서는 내일 오후에 진수해에 가서 영화구경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학교에 가지도 않은 덕돌은 근본 영화를 구경할 수 없었다.
순간 그는 자기를 놀리던 애새끼들을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불끈 치밀어 올랐다.
“옳다!”
그는 학교 마당 주변의 백양나무 밑에서 서성거리며 거닐다가 무릎을 탁 쳤다.
“개 새끼들이 영화 구경하러 간 틈에 한족친구들을 시켜서 패주자.”
덕돌은 황급히 집으로 달려갔다.
그는 아버지가 일 밭을 나간 틈에 고방을 활딱 뒤번져 쌀 주머니를 찾아 들고 쌀독 뚜껑을 열어 재꼈다.
그는 바가지로 쌀을 푹푹 퍼서 주머니에 쏟아 넣었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머니가 들어와 놀라 했다.
“쌀을 퍼내 뭘 하니?”
덕돌은 아버지가 들어오는가 덴겁했다가 계속 쌀을 퍼 담았다.
“급히 쓸 일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하는 일을 막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쌀 고생을 하는 때인지라 사정이 달랐다.
“대체 뭘 하려고 그러니?”
“진수해 친구들에게 쌀을 줘야겠습니다. 빨리 가야합니다. 막지 마쇼.”
어머니는 농오래기를 주어다 쌀 주머니를 꿍꿍 매주면서 혀를 끌끌 찼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친구는 많이 친해야 해. 허나 절대 나쁜 친구를 친하지 마라. 도적놈을 친하면 도적놈이 되고 강도를 친하면 강도로 되느니라.”
“양, 근심하지 마십시오.”
덕돌은 쌀 주머니를 메고 마을을 벗어나자 수수밭을 꿰질러 아무도 보지 못하는 뒤 장대에 올라 진수해로 뛰어갔다.
덕돌은 해동다리를 헐레벌떡 달려 건너면서 사품 치며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보자 궁리가 피뜩 떠올랐다.
“그래, 해동다리를 막아 승환이랑 설복이랑 패줘야지.”
그는 류운봉의 집으로 찾아가 쌀 주머니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사형, 오늘 원수 진 애들이 영화 보러 와. 개 새끼들을 패주자.”
“그래. 쌀을 잘 먹겠다.”
운봉은 쌀 주머니를 들어 키가 자그마한 어머니께 보이고 나서 구들에 내려놓았다. 그는 팔소매를 거두더니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바깥으로 씽 달려 나갔다.
“근심하지 말라. 내 오늘 본때를 보여줄게.”
그때 운봉의 어머니는 쌀 주머니를 어루만지면서 반가와 하면서도 근심돼 뒤따라 나오면서 말렸다.
“괜히 죽게 치진 마라!”
운봉은 들었는지 마는지 덕돌을 데리고 또 한 친구를 찾아갔다.
만난 청년은 운봉보다도 키가 훨씬 크고 눈이 우멍해 보기에도 흉측했다.
“내 사형 한위신이야. 술 공장의 한위신이라면 우리 진수해에서는 길바닥에서 짓던 개도 짖지 못해.”
한위신은 다가와 덕돌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손잡고 “누가 감히 내 사제들을 건드려! 가자!” 하고 손을 홱 저었다.
덕돌은 뒤따라가면서도 류운봉과 한위신 둘이서 어떻게 한다하는 주먹치기꾼들인 승환이나 일광, 설복, 광호랑 한무리 깡패들을 쳐 눕히겠는가고 적이 근심했다.
그는 뒤에서 운봉의 팔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더니 나직이 말했다.
“우리 셋이서 그 숱한 놈 새끼들을 당할 만 하니? 친구들을 더 불러오면 어떠냐?”
그러자 운봉은 눈을 슴벅이면서 희죽이 웃었다.
“근심하지 마라. 우리 셋이 아니라 내 혼자라도 통쾌하게 패줄 수 있어. 어떤 새끼들인지 어디 보자. 아직 함흥 촌에 싸움꾼들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먼저 덕돌은 한위신과 운봉의 말대로 혼자 영화관에 가서 승환이랑 영화 보러 왔는가 살펴보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영화관 문 앞에서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승환 등과 눈길이 딱 마주쳤다.
덕돌은 속으로는 시퍼런 칼을 썩썩 갈면서도 걔들을 놀래지 않으려고 고의로 머리를 숙이며 슬슬 피해 골목길로 들어갔다.
“서라! 어디로 달아나니?”
승환과 일광, 광호, 설복 넷이나 덕돌을 뒤쫓았다.
덕돌은 짐짓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주먹을 쥐고 해동다리 쪽으로 달아났다. 뒤에서 쫓는 애들은 꼬임 수에 든 줄도 모르고 기를 쓰고 뒤쫓아 갔다.
허나 날마다 몇 천 미터씩 닫는 덕돌을 따라 잡기란 조련치 않은 일이었다. 허나 헐레벌떡 혼자 내뛰는 덕돌을 잡을 듯 말듯 쫓아가다가 놓칠 수 없어 계속 쫓아갔다. 승환이랑 숨이 차 좀 쉬며 걸으면 덕돌도 걷고 승환이랑 달아 오면 덕돌은 달아났다. 그들은 괘씸해 덕돌을 뒤쫓아 해동다리 중간까지 달려갔다.
그들이 덕돌을 거의 따라 잡을 때었다. 진작 류운봉이 해동다리에서 난간을 쥐고 강물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덕돌을 쫓아 달려오는 애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환이랑 덕돌을 뒤쫓아 거의 따라잡을까 말까 할 때다.
“서라!”
류운봉이 꽥 소리치며 덕돌의 뒤를 막아 썩 나섰다.
불시에 나타난 중등키에 호리호리한 류윤봉을 보고 승환이랑 하나둘 주춤 주춤 멈춰 섰다. 허나 수수한 한족 애 혼자인 것을 보고 꺽다리 승환이 손을 홱 저었다.
“쳐라!”
애들이 왁 달려들었다. 허나 한위신은 그저 우멍눈을 슴벅이며 뒤에서 구경했다.
“이 새끼들아!”
류운봉이 성난 사자처럼 고함치며 씽 승환과 광호의 키 넘어 날아지나가며 양쪽으로 발길질을 날렸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운봉의 발길에 걷어 채워 키꺽다리 승환과 광호가 거의 동시에 나가 너부러졌다. 뒤에서 덤벼들려던 일광과 설복은 그 뜻밖의 광경에 주춤 멈춰 섰다가 인차 앞뒤로 운봉을 공격했다.
그때 덕돌이 일광을 정면으로 파고들며 발길을 날렸다. 허나 일광은 주먹을 쥐고 개처럼 껑충 뛰어 옆으로 피하면서 주먹을 날렸다. 덕돌은 뜻밖의 주먹에 배를 맞고 뒤로 물앉았다.
그때 운봉이 어느 결에 설복의 아래 종아리를 탁 걷어차 넘겼다. 일광이 주먹을 휘두르며 운봉에게 덮쳐들었다. 운봉은 다시 날아오르며 일광의 대가리를 걷어찼다. 허나 일광도 필경은 권투를 배운 애답게 살짝 자세를 낮추며 두 손으로 날아오른 운봉의 다리를 틀어쥐었다. 운봉은 땅에 떨어지는 순간 허망 노출된 일광의 면상을 팔 굽으로 탁 내리쳤다.
“앗!”
일광은 운봉의 다리를 틀어쥔 채 쓰러졌다.
그때 쓰러졌던 설복과 광호, 승환까지 와르르 일어나 덮쳐왔다. 그때 덕돌은 운봉에게 덮쳐드는 광호를 막아 싸웠다. 운봉은 일광에게 다리를 꽉 잡히고서도 무쇠주먹으로 일광의 뒤통수를 꽝꽝 내리쳤다. 무쇠주먹에 얻어맞은 일광은 “앗!” 소리와 함께 반 주검이 돼 푹 꺼꾸러져 버렸다. 설복과 승환이 동시에 운봉에게 덮쳐들었다. 허나 운봉은 자세를 낮추며 설복의 아랫배를 팔 굽으로 탁 쳤다.
“억!”
아랫배를 부둥켜안고 꺼꾸러지는 설복이, 거의 동시에 승환은 운봉의 번개 같은 발길질에 무릎을 탁 걷어 채워 절룩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때까지 한위신은 그저 희죽이 웃으며 구경하고 있었다.
힘을 입은 덕돌은 광호의 사타구니에 오른 팔을 쑥 넣더니 건뜻 들어 올려 한 바퀴 휘 휘 돌렸다. 허망 들려 두 다리를 버등거리던 광호는 비명소리와 함께 다리 아래로 거꾸로 처박혔다.
“잘한다! 잘해!”
그때까지 저쪽 뒤에서 구경하던 한위신은 박수를 탁탁 치며 쾌자를 불렀다.
질겁한 승환과 설복은 다리야 날 살리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허나 운봉이 씽드르 달려 나가 절룩거리며 달리던 승환의 뒷다리를 딴죽을 걸어 쓰러 눕혔다.
“어디로 도망쳐?!”
한위신이 몸을 날려 설복의 꼭뒤로 날아 넘어가며 한발로 뒤발 질 해 쓰러 눕혔다.
저쪽에서 싸움을 도우려고 주먹을 쥐고 뛰어오던 승환의 패거리들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다. 그 속에는 성욱과 상선, 응철도 있었다.
“야, 성욱아, 어디로 닫니? 넌 내 조카기에 때리지 않을테니 여기 오라! 그럼 살려준다.”
덕돌의 고함소리에 성욱이랑 주춤 멈춰 섰다. 그들은 서로 뭐라고 의논하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한위신은 주먹을 탁탁 치며 덕돌에게 물었다.
“얘들은 왜 놔두니?”
“내 조카야. 놔두자.”
한위신은 지나가려는 성욱을 붙잡고 우멍눈을 무섭게 슴벅이면서 위협했다.
“봐라! 누구든 덕돌을 건드렸다간 죽는다! 죽어! 알았어?!”
한위신이 장측으로 내리치자 해동다리 나무난간이 뭉청 끊어져나갔다. 또 발길을 날리자 난간 가름대가 부서져 강물에 날아가 떨어졌다.
성욱은 겁을 집어 먹고 다리야 날 살리라고 도망쳤다.
덕돌은 깨고소해했다.
운봉은 한쪽에 대가리를 붙안고 물앉아 바들바들 떠는 승환과 설복, 일광의 대가리를 뚱뚱 치면서 위협했다.
“네깐 놈들이 감히 이 어른께 덤벼들어! 또 덤벼들어라!” “아니, 다신 아니오!”
“덕돌을 업신여기겠는가?!”
“아니, 다신 아니오!”
한위신은 승환의 머리칼을 틀어쥐고 무릎에 대가리를 딱딱 짓쪼아놓았다. 승환은 단통 코피를 줄줄 흘리며 죽어가는 비명 소리를 쳤다.
설복과 일광은 겁을 집어먹고 무릎을 꿇고 마구 절을 하면서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살려주오! 제발 살려주오!”
허나 한위신은 “덕돌아, 뭐 해? 패라!”라고 했다.
덕돌은 무방비상태인 일광과 설복을 돌아가며 발길질을 하면서 고함쳤다.
“이 새끼들이, 다시 날 연애한다고 놀리겐?!”
“다신 아니다.”
“또 놀려라!”
“아니, 죽어도 아니다.”
운봉은 일광의 대가리를 땅바닥에 마구 쪼아 놓으면서 을러멨다.
“이 개새끼야, 할아버지라고 불러!” 일광과 설복은 마주 보다가 한위신에게 한 대씩 더 얻어맞고 이구동성으로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부르며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덕돌은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설복의 배때기를 탁 걷어차면서 을러멨다. 
“이제 다시 덤벼 봐라. 죽는다. 죽어. 다시 놀리겐?”
“아이다.”
“가라!”
덕돌은 일광의 낯을 탁 걷어찼다.
일광은 상판을 붙잡고 일어나 가면서도 속으로는 이를 쁙쁙 갈았다.
설복의 올빼미 눈깔도 곱지 않게 선뜩했다.
광호는 어느 결에 강물에서 기어 나왔는지 다리 끝, 저쪽 강둑에서 이쪽을 기웃거렸다.
승환이랑 피범벅이 된 상통으로 다리를 절룩거리며 집 쪽으로 갈 때다. 뜻밖에 승연이가 자기 형 황종연 소장을 데리고 달려왔다.
분명 먼저 다리목에서 쫓겨 시내로 달려간 애들이 고발한 것이었다.
“서라!”
덕돌은 황종연 소장보다 황승연 담임교원이 더 무서워 주먹을 쥐고 달아났다. 허나 닫다가 뒤를 돌아보니 한위신과 류운봉은 태연자약하게 황 소장과 뭐라고 웃고 떠들고 있지 않겠는가?
덕돌이 후에 안 일이었다. 황종연과 황승연은 한위신의 형 한위광이 무예가 출중한데다 그 무리가 “굴뱀”처럼 지독하고 많기에 감히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들은 진수해 큰길바닥에서 우쭐거리며 싸우다가도 한위광을 보기만 하면 꼬리 빳빳해 줄행랑을 놓곤 했던 것이다.
한번은 한위광이 한창 조양식당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다. 황종연은 술상에서 말다툼을 하다가 그 나그네 멱살을 틀어쥐고 헤딩을 떵 했다. 순간 그 나그네는 면상이 쥐마당이 돼 쓰러졌다.
“언감 누구 앞에서 주먹질인가!”
한위광이 건너 상에서 씽 날아가더니 원앙새다리로 종연과 승연 형제를 한발에 하나씩 걷어차 넘겼다. 황종연과 황시연은 한위광을 두려워 선불 맞은 노루처럼 다리야 날 살려라고 도망쳤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황승연 형제는 여기서 또 한위광의 동생 한위신을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이 덕돌이 진수해의 “주먹 왕” 한위신 형제와 친분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한위신은 황종연과 황승연마저 위협했다.
“이후에 누구든 내 사제 덕돌을 업신여기면서 못 살게 굴기만 하면 좌시하지 않을 거야.”
권총을 찬 황종연 소장도 굴 뱀과 같은 한위신 무리를 어찌는 수가 없어 물러갔다.
덕돌은 집에 돌아온 후 그날 해동다리실전에서 주먹과 발이 쾌속반응하지 못한 교훈을 더듬어냈다.
승환이나 일광은 그날 덕돌이 덤벼들자 두 손을 낯에 대고 자세를 낮추며 옆구리 밑으로 빠지면서 주먹으로 배를 강타했다.
(이제까지 배운 무술은 보기 좋을뿐 실전에서 많이 써먹지 못할 물건이야. 자기를 알고 남을 알아야 백전백승한다. 나도 권투를 배워 무술과 권투의 장점과 약점을 다 장악해야지. 그래야 무술과 권투의 약점을 미봉하고 장점을 발양해 그 새끼들을 쳐 눕힐 수 있지.)
그는 동불사 6촌 형 김봉룡을 찾아갔다가 그의 친구 룡남이가 권투를 잘 한다는 말을 듣고 술과 담배를 사가져다 주고 권투를 배우기 시작했다.
룡남은 덕돌보다 두 살 이상이지만 호리호리한 몸매로 권투를 어찌나 날래게 하는지 눈이 시릴 정도였다. 이전에 무술로는 1미터 반 이내에 들어온 적수를 상대해 주먹질과 발길질, 무릎과 머리로 공격했다. 허나 권투는 적수를 4~5미터 거리에 두고서도 재빠른 몸놀림과 발놀림으로 덮쳐나가면서 연타를 안길 수 있는 실용적인 권법이었다. 용남에게서 몇 달 동안 상대방에게 공격해 들어가는 보법 그리고 상대방이 공격해 들어올 때 피하는 보법과 동작을 몇 개 배운 후 덕돌은 권투에 점차 눈을 뜨기 시작했다. 몸놀림도 매우 날렵해지고 진공속도도 빨라져 눈 깜짝할 새에 덮쳐들어가 상대를 쳐 눕힐 수 있게 됐다.
허나 덕돌은 권투가 맨 주먹을 쓰고 발길을 적게 쓰는 약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거야. 맨 주먹으로 발이 하는 노릇까지 할 수 있는가? 발을 잘 쓰지 못하는 권투쟁이들을 발길질로 차 눕혀야 해.)
덕돌이 한창 권투를 익히고 권투의 허점을 돌파할 실전무술을 연마할 때었다.
덕돌의 양형님 수봉이 찾아왔다.
“덕돌아, 누가 너를 때리면 나한테 말해라.”
“감사하오. 허나 애들의 싸움에 형님을 시켜 때리면 이긴 게 아니오. 그래 내 힘으로 개 새끼들을 하나하나 쳐 눕히겠소.”
“글쎄, 당당한 주먹 왕이 되자면 그리 쉽니? 나와 경만 매형께 알려라. 어느 새끼 감히 너를 건드리면 혼 내줄게.”
수봉 양형이 고마웠다. 허나 덕돌은 수봉 형님이 돌아간 후에도 계속 무술과 권투를 익혀나갔다.
그는 패용천산 꼭대기 절벽 위에 올라가 썩 살이 배긴 무쇠주먹을 반공중에 대고 힘차게 휘두르면서 산악이 쩌렁쩌렁 울리게 고함쳤다.
“개새끼들아! 이 주먹으로 날 놀린 놈들을 몽땅 쳐 눕히겠다! 이 놈의 더러운 세상을 평정할 거야!”
어느 날 저녁, 덕돌이 저녁술을 놓으려는데 경산 선생이 찾아와 조용히 타일렀다.
“얘야, 주먹으로 세상을 개조하려고 하지 마라. 이젠 싸움꾼들과 놀지 말고 학교로 오너라.”
(어쩜 우리 아버지 말과 똑 같을까?)
“주먹세계에 들어서면 끝이 없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내 주는 책이나 봐라. 지금 ‘독서무용론’이 살판치지만 이후에는 지식이 꼭 필요하다.”
까부는 덕돌이었지만 자기를 친형님처럼 아끼고 이끌어주는 김경산 선생의 말만은 귀담아 들었다.
(그래, 문무가 겸비된 남자,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떳떳한 사내대장부로 돼야지.)
허나 덕돌은 근심되는 일이 한 두 가지 아니었다.
“학교에 가면 애들이 또 놀리지 않겠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라는 게 어디 공부를 시킵니까? 일이나 시켜 먹었지.”
경산 선생은 덕돌의 손까지 잡고 차근차근 타일렀다.
“세월이 더럽긴 하지만 너 그래도 고중졸업장이야 타야지. 이렇게 고삐를 끊은 들소처럼 싸움질이나 하면서 떠돌아 다녀서야 되니? 고중도 졸업하지 않고 이후에 어떻게 대학에 가니?”
덕돌은 머리를 숙이며 “김 선생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내일 당장 학교로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경산 선생은 너무 기뻐 연신 “그래야지. 이제야 내가 희망하는 덕돌 답구나.”라고 했다.
그는 누런 책을 몇권 가방에서 꺼내 놓았다.
“궤에 감춰놨던 책이야. 잘 읽어라. 넌 글도 잘 쓰지 않고 뭐야? 이제부터 나한테서 소식이나 통신 같은 짧은 문장부터 배워가지고 후에 기자나 작가로 됐으면 얼마나 좋겠니?”
그 말에 덕돌은 눈이 동그래졌다.
“기자?”
김 선생은 확신에 찬 머리를 끄덕였다.
“응, 그래.”
“내가 어떻게 기자나 작가까지 되겠습니까?”
덕돌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넌 될 수 있어. 이제부터 노력해라.”
덕돌은 가슴이 부풀어 올라 심장박동마저 세차게 높뛰었다.
정지에서 다 들은 아버지도 경산이 떠나간 후 타일렀다.
“선생님의 말이 옳다. 네가 학교에 가지 않으면 누가 좋아하니? 학교서 일하더라도 가라. 집에서 가만히 책을 읽지 말고 학교에 가서 선생님들의 가르침도 받는 게 옳아.”
이튿날 아침, 흐리터분한 날씨에 덕돌은 공부도 하지 않는 학교에 슬슬 다가갔다.
그가 학교 마당에 일년만에 나타나자 애들은 신기한 괴물을 보듯 눈치를 흘금거리며 슬슬 피했다.
승환과 일광은 덕돌이 교실에 나타나자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순희랑 은숙이랑 신기한 눈길로 덕돌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폭 숙였다.
덕돌은 뒤로 두 번째 줄, 옛날에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왁작 떠들던 교실이 덕돌이 나타나는 바람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짱!
덕돌은 불시에 귀뿌리가 윙 해났다.
덕돌이 우쭐 일어나 얼굴을 돌려 보았다. 뒤 줄에 일광이 하얀 낯이 퍼렇게 일그러졌다.
“감히 나를 치니?”
옆에 앉았던 장영웅도 일어나 일광을 말렸다.
“너 영상하게 교실에서 이러지 마라.”
덕돌은 “나오라.”라고 하며 일광에게 도전했다.
일광은 따라 나오면서 고함쳤다.
“한족 애들을 믿고 작작 우쭐거려라!”
애들은 싸움을 구경하려고 우르르 쓸어 나왔다.
덕돌은 일광부터 처 넘겨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또 업신여김과 놀림을 당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빤한 노릇이었다.
선생님들과 애들이 보지 못하는 학교 뒷마당에 에돌아가자 일광은 해동다리에서 반 주검이 되게 얻어맞은 승치를 하려고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오늘 죽어봐라.”
덕돌이 웃옷을 벗어 땅바닥에 놓는 순간 일광이 쌩 덮쳐들어오면서 발길로 덕돌의 턱을 탁 걷어찼다. 덕돌은 날아드는 발을 번개같이 잡아 홱 뿌리쳤다. 그 바람에 일광은 달려들던 속도와 힘에 저쪽 광호 발밑에 뿌려 나가 거꾸로 처박혔다. 일광이 피와 흙 범벅이 된 낯을 쓱 닦으며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덕돌이 씽 달려 들어가면서 땅을 짚은 팔을 툭 걷어찼다.
“아이고!”
비명소리와 함께 일광은 접질린 팔을 붙안고 쓰러졌다. 덕돌은 호랑이를 때리는 무송처럼 덮쳐들어 일광의 덜미를 누르고 무쇠주먹을 휘둘러 뒤통수를 즉살 나게 꽝꽝 내리쳤다. 벽돌 두 장도 까부시는 덕돌의 주먹에 얻어맞아 일광은 죽는 소리도 못치고 너부러졌다.
일광이 맥도 쓰지 못하고 얻어맞아 쓰러진 것을 보고 광호와 승환이, 설복까지 동시에 덮쳐들었다. 허나 덕돌은 무서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접전했다.
그러자 동림과 성택, 영웅이 나서서 승환이랑 말렸다.
“1대 1로 싸워라. 셋이나 달려들면 되니?!”
“놔둬라! 다 때려눕히겠다.”
덕돌은 고함치며 몸을 날려 원앙새발길질로 덮쳐드는 광호와 설복을 동시에 대가리를 걷어찼다.
“어우야!”
“무술을 배운다더니 한각 쓰는구나!”
여자애 같던 덕돌이 일 년 동안 보이지 않더니 맹호가 산에서 덮쳐 내려온 듯한 강한 모습을 보고 애들은 모두 경악했다.
승환이 그새 권투자세를 취하면서 정면으로 덮쳐들었다. 덕돌은 자세를 낮추며 토끼뜀으로 몸을 옆으로 슬쩍 피했다. 승환의 몸이 오른 쪽으로 스쳐 지나갈 때 덕돌의 주먹이 아랫배를 강타했다. 승환이 비칠거리며 덕돌의 뒤에 겨우 멈춰 섰다. 덕돌이 뒤돌아서며 발길로 숙인 승환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승환은 옆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번개같이 연신 날아드는 발길과 무르팍 강타에 비명소리와 함께 이발을 떡떡 맞 쪼아 피를 줄줄 흘렸다. 침을 퉤 뱉자 부러진 이빨이 피와 함께 튕겨났다. 설복과 일광, 광호가 동시에 덕돌에게 덮쳐들었다. 둬 매 얻어맞은 덕돌은 도망치는 척 하다가도 홱 돌아서며 발길을 날려 제일 먼저 따라 오는 광호부터 차 눕혔다. 그러고는 또 달아났다. 그는 온 학교 운동장을 달아 다니면서 승환이랑 일광이랑 치고 박았다. 허나 덕돌은 전혀 겁기가 보이지 않고 싸우면 싸울수록 용감해지고 날렵했다.
휴식시간이 돼 장옥이랑 장화랑 조신지랑 숱한 한족 애들이 교실에서 나와 이 장면을 보고 뛰어왔다. 그 애들이 승환이랑한테 물매를 안길 때 황승연과 흥수도 뛰어왔다.
“덕돌아, 이게 뭐야?”
흥수가 을러멨다.
황승연은 이전에 해동다리에서 한위신에게 위협받은 일이 있어 감히 입도 벌리지 못했다.
그제야 싸움은 끝났다.
덕돌이나 광호네나 모두 여기 저기 얻어 터져 정도부동하게 피를 흘렸다. 허나 결국 덕돌은 이긴 것이다. 셋이 덕돌에게 얻어맞았으니까.
흥수가 그들 넷을 불러 교실에 들어간 후 학생들 앞에 세워놓고 비판했지만 덕돌은 속으로 은근히 너털웃음을 웃었다.
(난 끝내 이겼어. 이젠 네 놈들이 무섭지 않아. 이 교실 안의 주먹 왕은 내다, 내.)
이튿날부터 덕돌은 기세등등해 학교로 다녔다. 다만 뒤에 앉은 일광이가 불시에 돌멩이 같은 것으로 돌연히 습격하는 것이 근심될 뿐이었다. 1분만 버텨내면 옆 교실에 있는 장옥이랑 달려 나오기에 무섭지도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광호랑 승환이랑 덕돌과 자옥이랑 두려워 학교에 오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 놈 새끼들이 보이지 않자 덕돌은 불안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불쾌했다.
사실 덕돌의 짐작이 맞았다.
전번에 덕돌의 실력을 너무 깔보고 덮쳐들었다가 망신당한 광호랑 진수해의 부랑배들을 긁어모아 덕돌에게 보복할 획책을 꾸미고 있었다.
덕돌은 광호랑 궁금해 운봉과 함께 진수해에 내려와 돌다가 영화관 앞에서 또 딱 부딪치게 됐다.
면목도 없는 꺽다리 하나가 덕돌을 잡아끌었다.
“여기 오라! 네가 함흥촌의 덕돌이냐?”
“그렇다. 누구냐?”
“너 광호를 알지?”
“안다. 광호네 짝패냐?”
“그래, 나 림영철이야. 성은 수풀 림, 이름은 쇠다. 한번 맞붙어 보겠니?”
“수풀 속에서 뛰어나온 쇠라. 네 이름 그럴듯하구나. 어디 해보자.”
덕돌이 림영철을 뒤따라가는데 운봉이 저쪽 먼발치에서 눈치 채고 스적스적 따라가 철로소학교 마당으로 들어갔다.
림영철이 덕돌을 업신여기고 허리를 굽히더니 주먹을 둘러메고 씽 덮쳐들었다. 덕돌은 뒤로 풀쩍 뛰어 물러섰다가 앞으로 나가며 자세를 낮춰 옆으로 걷어차 올렸다.
씽 달려 들어오며 헤딩을 하려던 영철이 면바로 불알중태를 채워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싸쥐고 뺑뺑 돌았다.
덕돌이 영철의 더벅머리를 틀어쥐어 무릎에 대고 떵떵 짓 쪼아버렸다. 림영철은 단통 면상이 쥐마당이 돼버렸다. 구경하는 척 하던 다른 애가 그 틈에 덤벼들어 덕돌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덕돌이 뒤에서 휙 하는 바람소리를 듣고 훌쩍 물앉는 바람에 그 애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덕돌은 뒤로 손을 뻗쳐 자기 머리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몸뚱이를 휘감아 쥐여 태를 탁 쳤다.
짱 소리와 함께 언 땅 위에 그 애가 보기 좋게 뻐드러졌다.
“개새끼들아! 어느 놈이 감히 내 형제를 건드려!”
운봉이 도끼눈을 부라리며 덮쳐들었다.
“굴 뱀이 왔다!”
광호네 패거리들은 독수리를 본 참새들처럼 몽땅 도망쳤다.
덕돌은 달아나는 시내 애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철로소학교 마당이 쩌렁쩌렁 울리게 고래고래 고함쳤다.
“야, 개새끼들아, 다 달려 들어봐라! 다 때려죽이겠다!”
그날부터 류운봉과 한위신, 고이림, 류지 등 친구들은 덕돌이 시키는 대로 진수해 온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광호네 친구라고 보이는 애들의 집을 하나하나 쳐들어가 패주었다.
그후부터 시내 애들도 광호를 두둔해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를 놀려대며 개 같이 짖어대던 싸움군들을 다 때려눕히자 덕돌은 개를 치던 몽둥이를 팽개치고 안심하고 다시 학교로 다녔다. 허나 광호랑 일광이랑 덕돌과 한족 애들이 무서워 드문드문 학교로 왔다가 눈치를 흘금흘금 보다가도 돌아갔다.
덕돌은 장영웅과 함께 당당하게 제일 뒤 줄에 앉았다. 벽을 등지고 앉은 후부터 뒤에서 일광이 돌연히 습격해 주먹을 날릴 까봐 근심할 필요 없어 마음이 훌 놓였다.
한번은 광호가 학교 마당에서 불시에 덕돌의 뒤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덮쳐들었다. 덕돌은 훌쩍 자세를 낮추며 팔꿈치로 아랫배를 탁 친 후 숙인 광호의 대가리를 탁 걷어찼다.
“어이쿠!”
광호는 허망 저쪽으로 나가 꼬꾸라졌다.
“비열한 새끼, 돌연습격해?”
덕돌은 광호에게 물매를 안기며 고함쳤다.
인젠 광호도 덕돌에게 마음속으로부터 굴복하지 않으면 안됐다. 정면으로 달려들어도 돌연습격해도 근본 적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덕돌은 기죽은 적수들에게서 시선을 떼게 됐다. 더는 그 애들로 해 근심하지 않고 경산 선생을 모시고 글짓기에 전념해도 됐다.
경산은 덕돌을 자기 집에 가만히 불러 석유등잔불을 밝혀놓고 소식쓰기부터 배워주었다.
“소식쓰기를 배워 함흥 대대나 우리 학교 사적을 신문이나 방소에 내면 얼마나 멋지니?”
“예? 내 쓴 글이 언제 나겠습니까?”
경산은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될 수 있다. 네가 무예를 익힐 때처럼 이걸 배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정신으로 열심히 배워라.”라고 하며 희망과 이상의 푸른 씨앗을 덕돌의 가슴에 심어주었다.
어쩐지 덕돌은 경산 선생의 말씀이 마음에 와 쏙쏙 들어박혔다. 그는 날마다 경산 선생 집에 찾아가 소식의 이론과 취재, 집필에 관한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나갔다. 나중에 함흥 대대에서 혁명을 틀어쥐고 새 농촌건설을 잘 한 경험을 취재해 첫 소식을 썼다.
상순은 덕돌이 밤중까지 밥상을 놓고 원고지에 원고를 쓰다가도 몇 글자를 쓰지 못하고 쭉쭉 찢어 밥상 옆에 던지는 것을 보고 빈정거렸다.
“에이고, 네가 쓴 글이 방송에 나는 날에는 해가 서산에서 뜨겠다.”
덕돌은 밸이 나 속으로 기어이 소식을 써서 방송에 내 아버지께 본때를 보이려고 쓰고 또 썼다.
나중에 그는 원고라고 써가지고 경산 선생한테 가서 검사를 맞혔다.
“처음 썼는데 잘 썼구나. 되겠다.”
경산은 그 원고를 본 후 직접 만년필을 들어 새까맣게 수개해주었다.
“이걸 정성들여 재필기를 해라.”
덕돌은 경산 선생님이 수개한 원고를 깐깐히 보면서 자기 원고의 결점을 봐내고 재학습했다.
두 번이나 경산 선생한테 검사 맞힌 후 수개하고 정리한 후 선생의 부탁대로 현 방송국에 보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집에 걸린 스피카에서 기별도 없었다.
경산 선생은 덕돌을 찾아 집에 데려다 조용히 타일렀다.
“조급해 하지 마라. 뭐나 단술에 어찌 배부르겠느냐? 천천히 학습하노라면 꼭 방송과 신문에 날 그 날이 있을 거야.”
덕돌은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확성기에서 아나운서의 방송소리가 울려왔다.

“아래에 덕돌 동무가 써 보낸 소식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 네 쓴 소식이 나온다.”
경산도 환성을 울리다가 덕돌과 함께 귀를 도사리고 들었다.
“진수해공사 함흥대대 조개덕 생산대에서 혁명을 틀어쥐고 새 농촌건설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조개덕 생산 대에서는 계급투쟁을 억세게 틀어쥔 한편 황무지에 인삼장과 양봉장을 꾸렸을 뿐만 아니라 마을 동구에 벽돌공장을 앉히고 칼산의 구들돌을 캐 부업수입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산대 벽돌공장에서 생산한 벽돌과 기와로 선후해 대대 사무 청사와 조개덕 생산 대 우사와 회의실, 돼지우리를 지었으며 2년 동안 사원들에게 도합 20여 채 새 벽돌기와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새 마을 건설에서 고무된 사원들의 생산적극성이 전에 비해 높아져 생산도 혁명도 일대 앙양을 일으켜 올해 년 수입도 지난해에 비해 곱절로 올라갔습니다.”
경산 선생은 너무 반가워 밥상 너머 덕돌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덕돌도 너무 기뻐 연신 “선생님, 고맙습니다.”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그래, 이젠 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거야. 절대 자만하지 말고 두 번째, 세 번째 원고를 계속 써내야 한다. 이젠 나이도 18세라 어리지 않아. 전도를 위해 꾸준히 글재간을 익혀나가야 한다.”
“예, 알았습니다. 꼼 명심하겠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 상순이 싱글벙글 맞으면서 “우리 기자 돌아왔소? 네 쓴 문장이 방송에 나더구나. 축하한다, 아들아.”라고 했다.
“아버지, 해가 서산에서 뜰 날이 왔구먼요.”
덕돌이 우스개를 하자 상순은 덕돌을 껴안아주면서 “건 다 격장법을 써서 널 글을 마음먹고 써내게 한 거야. 허허허. 딱 곧이들었니? ”라고 하지 않겠는가!
억이 막혀 더 웃지 못 할 노릇이었다. 아버지의 속생각은 여래불의 마음 같이 넓고 깊을 줄은 몰랐다.
덕돌은 학교에서 공부는 하지 않고 일하러 다니는 것이 싫어 학교에 가기 싫어 가네마네 했다.
어느 날, 경산은 집에 찾아와 가방에서 “조선어문법” 책을 주면서 물었다.
“내가 공사방송소에 가서 임시 기자로 일하게 됐다. 너도 가서 견습하는 게 어때?”
“좋습니다. 허나 제 같은 학생이 방송소에 갈수 있겠습니까?”
“내 학교 혁명위원회 대리 주임 성환과 말해 볼게.”
경산은 조개덕 앞 한육모판에 가서 성환을 찾았다.
한참 후 성환과 경산이 뭐라고 하며 벼 모상 판으로부터 마을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성환은 마을 앞 둔덕길에서 덕돌을 보자 손짓해 불렀다.
덕돌이 뛰어가자 성환은 그에게 신신당부했다.
“덕돌아, 경산 선생을 따라 방송소에 가라. 견습 기자로 돼 견식도 넓히고 기자 수업을 잘해라. 장차 당과 인민을 위해 글을 쓰는 유명한 기자로 돼라.”
“고맙습니다. 두 분 선생님.”
이튿날에 덕돌은 진수해 방송소에 가서 이광평 소장의 지도아래 소식이나 통신 등 보도기사를 쓰는 것을 배웠고 경산 선생과 함께 전 공사를 돌아다니면서 취재하고 보도기사를 썼다. 방송소에서 어떻게 아나운서의 말을 녹음해 방송하는가, 어떤 전자기계로 전 공사에 유선방송을 내보내는가도 알게 됐다.
덕돌은 약 두 달간의 실습을 거쳐 견습 기자의 실력을 갖춰나갔다. 한편 “조선어문법” 책도 열심히 읽어 집필수준도 눈에 뜨이게 제고시켰다.
한편 그는 맨 소식이나 인물통신만 써서는 장차 기자로 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빈농의 재교육을 잘 받아 입당해 대대 간부나 돼야 대학에 추천 받아 가는 세월에 농업상식도 배워야 해. 아니야, 누구도 몰래 무선전기술을 배워 시내에 가서 반도체라디오 수리공이 되면 어떨까? 그래, 그거야. 소식이나 통신은 아무 직업을 택하던 다 쓸 수 있지 않는가? 난 기자 하나만 바라고 살 수 없어. 여러 가지 재간을 익혀 가지고 이쪽 길로 가서 안 되면 저쪽 길로 나가야 해.)
그날부터 덕돌은 동림이 네 집에 있는 반도체 라디오 조립지식 책을 가져다 반도체 무선 전자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극관과 삼극관, 저항기와 가변저항기, 소형변압기, 확성기, 등 부속품의 원리를 학습했다. 그는 용돈을 까래 밑에 치워두었다가 시내 오금상점에 가서 부속품을 사다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부속품 하나에 몇 원씩 하는 세월에 농민의 아들이 반도체 부속품을 살 돈이 어데서 생기겠는가?
명옥은 항상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꿈을 현실로 되게 뒷받침해주었다. 그녀는 돼지새끼를 판 돈을 남편 몰래 가만히 덕돌의 손에 쥐워 주었다.
덕돌은 기뻐 날듯 했다.
그는 돈을 남아 하나라도 부속품을 더 사려고 버스도 타지 않고 동림과 함께 이른 새벽에 시골마을에서 떠나 40 리나 걸어 네 시간 만에 연길에 도착했다. 오금상점에 들리어 소형변압기와 나발을 사서 품에 간직하고 나오니 점심때가 거의 돼갔다.
하늘을 바라보니 유난히 맑아 햇볕이 쨍쨍 내리쪼였다.
반도체 부속품을 사고 나니 그들의 호주머니 돈을 다 털어 모아보니 단돈 5전 밖에 없었다. 5전으로는 국수 한사발도 사 먹지 못할 판이었다.
“운동 삼아 달려서 집으로 돌아가자.”
덕돌이 말하자 동림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운동을 따로 할 게 있니?”
그들은 단 돈 오전으로 도마도 두 근을 사서 점심 대신 먹으면서 귀로에 올랐다.
그들은 시내를 벗어나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아스팔트길로 슬슬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나 무더운지 숨이 헉헉 막혀 달리기 힘들었다.
그때 불시에 먹장구름이 뒤덮여오더니 앞뒤를 분간하기 힘들게 소낙비가 새뽀얗게 와르르 쏟아졌다.
“어, 시원하다!”
덕돌은 한편 소형 확성기의 종이가 비에 젖을까봐 옷을 벗어 둘둘 감아 꼭 껴안고 가로수 밑에 숨었다. 그러다가 열사의 영패를 모신 큰 길옆의 기와집에 들어가 비를 끊었다. 비가 멎자 그들은 또 닫다가도 숨이 차면 걷고 걷다가도 달으면서 끝내 40 리나 떨어진 집으로 돌아왔다.
덕돌은 연 며칠 동안 반도체조립수책을 보면서 비닐판에 송곳으로 구멍 뚫고 부속품과 전자회로를 하나하나 아연으로 땜질 해 고정시켰다.
조립을 끝마치자 덕돌은 맑게 갠 날을 골라 자체로 조립한 반도체 라디오를 자전거에 싣고 동림과 함께 패용천산 기슭에까지 갔다. 그들은 자전거를 세워놓고 패용천산 꼭대기에 단숨에 톺아 올랐다.
그들은 연 쇠줄로 소나무와 소나무 사이에 안테나를 늘여 반도체라디오에 연결시켜 놓았다.
덕돌은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자작 반도체 라디오에 전지약을 꽂고 보름을 똑 켜 돌리며 높였다.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쌕-” 무선전 전파소리가 났다. 덕돌이 가변저항기를 돌리자 확성기에서 여아나운서와 남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엇갈아 똑똑히 울리지 않겠는가!
“연변인민방송입니다.”
“연변인민방송입니다.”
뒤이어 혁명적 본보기극 “흥등기”를 보내드리는 것이었다.
덕돌은 너무 기뻐 패용천산 꼭대기에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쫙 펴들고 목청을 가다듬어 고함쳤다.
“성공했다! 내가 반도체 라디오를 조립해냈다!”
덕돌은 너무 기뻐 패용천산 꼭대기 벼랑 위에서 곤두박질을 몇 번이고 했다. 세상에 못해낼 일이 있는 것 같지 않은 꿈도 많은 랑만의 시절이었다.
패용천산 꼭대기에서는 덕돌이 조립한 반도체 라디오의 맑은 방송소리가 정답게 울렸다.
저녁에는 라디오 하나도 없는 마을의 이집 저집에서 그의 반도체 라디오 소리가 울렸다. 온 마을에서 돌아가면서 그 반도체 라디오를 들었고 나중에는 조대덕 생산대 회의실에서 전체 사원들이 듣기까지 했다.
여기저기서 덕돌에게 엄지를 내두르며 혀를 끌끌 찼다.
“정말 괴상한 애오!”
“어쩜 반도체를 다 조립하오?”
“이담 농촌에서 살 애가 아니오.”
회의실에서는 반도체 라디오에서 밤중까지 방송소리가 맑게 울렸다.
다만 우리 조선족들에게 맞지 않는 “둥, 등, 등, 창!” 하며 울리는 본보기극 “홍등기”의 노래 소리가 귀맛을 잃어 아쉬웠을 뿐이었다.

          9. 혼돈시대 비극
흐리터분한 하늘은 개일 듯 말듯 하면서 지지리도 개일 줄을 모르고 대지를 침침하게 짓눌렀다. 하늘의 여기저기 구멍이 펑펑 뚫리더니 먹장구름 속에서 가느다란 해 빛이 전지 불처럼 애처롭게 대지를 비추었다.
겨울을 앞둔 패용천산 벼랑 위에는 단풍이 빨갛게 물들었다. 패용천산 기슭 과수원에는 다락 밭을 만드는 일터에는 붉은 기가 펄펄 휘날리었다.
상순은 사원들을 데리고 패용천산 벼랑의 돌을 캐다가 무너진 과수원 다락 밭에 돌 둑을 쌓았다.
허나 종연 대신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된 흥수는 득의양양해 대대 사무실에서 뒤지개를 짓고 왔다갔다 거닐면서 두덜거리었다.
“상순은 대체 무슨 궁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대채 전을 하는데 앞장서? 이전엔 다락 밭의 돌을 허물어 ‘모 주석 만세!’를 새긴다고 야단치더니. 별일이야.”
그는 주춤 멈춰 서더니 손을 휘둘렀다.
“그래, 바로 그거야. 자기가 쌓은 과수원 다락 밭 언제를 제대로 만들어 놓기 위한 거야.”
며칠 후 공사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헬기를 타고 직상승한 종연이 잣대를 든 검사소조 일꾼들을 데리고 찌프를 타고 대대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는 흥수를 보자마자 입당소개인이라는 것도 잊은 듯이 훈계부터 시작했다.
“함흥 대대에서 대채 전을 몇 헥타르 했소? 사원들은 ‘농업에서 대채를 따라 배우라.’는 모 주석의 지시에 호응해 대채전을 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는데. 흥!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이 사무실에서 빈들거리다니? 쳇!”
그러자 흥수는 종연의 퉁퉁한 낯을 쳐다보다가 “미안하오. 내 밭으로 나가봐야 하겠소.”라고 하며 문 밖으로 나서려다가 돌아섰다.
“공사 검사소조에서 왔을 때 반영할 일이 있네. 저 조개덕 생산 대 김 대장이 말이 아닌기여. 정치 수요에 의해 패용천산 과수원 다락 밭에 돌둑을 쌓네 하더니 계수동과 상우지 밭에 대채대대처럼 다락 밭을 만드는 걸 한사코 반대해서 우리 대대 대채전 면적을 완수할 거 같지 않아.”
종연은 검사소조 일꾼들을 둘러보면서 지시했다.
“빨리 조개덕에 가서 김 대장을 혼쭐 내주게. 그 영감은 통 말이 들어가지 않아. 고집불통이야.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혁명을 틀어쥐라면 뭐 벽돌공장이요, 양봉장이요 꾸리더니 이번엔 대채 전을 만드는 걸 방해한단 말이오. 정 안되면 파출소 경찰들을 불러다 위협하오. 이게 목전 농촌 정치란 말이오.”
그 말에 흥수는 어깨가 으쓱해 검사소조를 데리고 조개덕으로 달려갔다.
대대 사무실이 조용해지자 종연은 토성 안을 한 바퀴 삑 돌아보았다. 토성 안에는 위생소의 맨발의사 송선 밖에 없었다.
종연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구렁이처럼 위생소에 슬쩍 기어들어갔다.
순간 주사기를 소독하던 송선은 깜짝 놀라 옴찔했다.
“누구라고? 놀라 간 다 떨어지겠어요.”
송선이 눈을 곱게 흘기는 모습을 보고 종연은 온 몸에 욕정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번졌다. 그 이글거리는 욕정의 용암은 어데라도 닿으면 당장 타 버릴 것만 같았다.
허나 종연은 20대 중반의 나이와는 달리 아주 노련한 늑대처럼 위생소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송선에게 지분거렸다.
“저명한 무용수, 의사질하느라고 수고 많소.”
“다 이 치보, 아니, 황주임 덕분이지요.”
“걸 아오?”
“…”
“이전에도 말했지만 내 한마디면 송선 동무를 훅 날려 보낼 수도 있고 또 위생소 소장으로 만들 수도 있단 말이오."
송선은 못 들은 척 하고 입에 빗장을 지른 채 주사기 소독만 하고 있었다.
소귀에 경 읽기처럼 멋 적은 느낌을 받은 종연은 뒤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송선은 온 몸에 소름이 끼치면서도 주사기를 소독하는 척 했다. 그때 종연이 뒤에서 불시에 송선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왜 이래요? 열 살이나 이상 되는 사람과 버릇없이 이게 뭐요?"
뜻밖에도 송선은 몸부림치며 돌아서더니 표독스럽게 쏘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놓아줄 종연이 아니었다. 그는 다짜고짜 송선을 마구 안고 침대 쪽으로 떠밀고 가서 쓰러 눕혔다.
“이걸 놔라! 소리치겠다! 아유, 이 짐승 같은 놈아! 승냥이야!”
송선은 마구 발버둥질 치며 고함쳤다.
종연은 징글스럽게 웃으며 송선의 얼굴을 마구 뻑뻑 빨고 개처럼 핥아댔다.
“미녀무용수, 그대에게 난 미쳤어. 세상 둘도 없는 미인을 놔둘 거 같아?”
송선은 가슴에 손을 마구 넣어 매만지는 종연의 손을 마구 막으며 단말마적으로 반항했다.
“사람 살리오! 사람…”
당황해난 종연은 황급히 오른손으로 송선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때 문소리가 덜컥 났다.
그제야 종연은 스르르 놓아주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능청스럽게 헛소리를 쳐댔다.
"김 맨발의사, 짧은 시간 내에 위생소 일을 배워서 참 잘 했소. 계속 잘하오."
송선도 남들의 눈이 두려워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종연이 스리슬쩍 주사실에서 나와 보니 정규상이 의사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니, 당신은 왜 위생소에 드나들면서 시끄럽게 구오?"
정규상은 알은체 하며 “이흥수 주임이 빈농들의 병을 봐달라고 해서 다시 들어왔소.”라고 했다.
"뭐라고? 이 서기는 제 마음대로 하는구먼. 내 함흥촌을 떠나간지 며칠이 됐다고 우파를 위생소에 끌어들여? 돼지 똥이나 모으라."
허나 정규상은 못 들은 척 하면서 의사사무실에 들어가 의서를 보는 것이었다.
“정 의사를 놔두세요. 그가 없이 어떻게 환자를 봐요?”
송선이 뒤따라 나오면서 우는 상을 짓자 종연은 콧방귀를 뀌었다.
“맨발의사라는 게 환자도 보지 못하오?”
“감기 같은 거야 주사를 놓거나 정통편 몇 알을 주면 되겠지만요. 이제 겨울철에 들어서면 기관지염이나 폐 염 같은 중병이 돌면 정 의사 없어서야 됩니까?”
허나 종연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중병환자가 생기면 공사병원에 올려 보내면 되지.”
종연은 두덜거리며 나가려다가 정의사와 송선을 번갈아 보면서 속으로 혹시 저것들이 서로 좋아하지 않는가는 의심이 부쩍 들었다.
허나 송선의 말대로 위생소에서 윤희와 박영발이 떠나간 후 정규상이 없으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흥수가 자기 비준도 없이 정 의사를 위생소에 들여앉힌 것만은 속에 내려가지 않았다.
황종연은 괘씸했으나 별 수 없었다.
토성 안 위생소 앞마당에서 찌프가 부르릉 엔진소리를 요란히 냈다.
찌프는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토성 안을 벗어나 곧추 패용천산으로 달려갔다.
황종연이 패용천산 기슭에 이르러 찌프에서 내려 산비탈 밭을 바라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채 전 같은 다락 밭은 근근이 가파른 과수원에 얼기설기 뻗어 있을 뿐 다른 산비탈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함흥 대대는 말이 아니구먼!”
종연은 틀스레 뒤짐을 짚고 숱한 사원들이 일하는 비탈 밭으로 올라갔다.
숱한 사원들이 모두 일하지 않고 상순과 흥수가 뭐라고 다투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이게 뭐요?! 모두 일하지 않고!”
종연이 나타나자 흥수는 우쭐해 상순을 손가락질을 하며 야단쳤다.
“김 대장은 말이 아니야! 우리 대대 대채 전 면적이 적은 건 다 이 김 대장 탓이야!”
상순은 종연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평평한 밭을 다락밭으로 만들어 못쓰게 만들 게 뭐요?"
"모 주석께서 '농업에서 대채를 따라 배우라.'고 한 최고지시를 반대하오?"
“누가 반대하오? 과수원 같이 가파른 밭에는 다락 밭을 만들면 수토유실도 막고 좋단 말이오. 허나 평평한 밭을 파서 우정 다락 밭을 만들어 뭘 하오? 손바닥만한 밭이라도 더 일구지 못해 그러는데 뭐요? 숱한 뚝을 만들어 밭 면적을 하나라도 줄일 게 뭐요? 황차 검은 점토를 파서 둑을 쌓고 누런 생흙이 드러나 어떻게 생흙에 곡식을 심어 먹소? 정말 농사를 지은 사람 같지 않소. 우의 지시를 영활하게 집행해야 하지. 그저 밭도 살펴보지 않고 대채 전 면적만 늘여서 되오?!”
그 말에 사원들은 모두 머리를 끄덕이며 수군거리었다.
그러자 종연과 흥수는 서로 눈치를 마주 보면서도 할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종연이 퉁퉁한 낯에 살기등등해 입을 열었다.
“상급에서 하라면 할 게지. 무슨 잔소리가 이리 많습니까? 가만 보니 함흥대대 대채 전 문제는 지도부의 사상인식문제구먼. 허허. 이거 참. 대채 전 면적을 검사소조에서 검사해보면 어느 대대 인식이 어떤가 알 수 있단 말이오."
그는 아주 역게 상순과 흥수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았다.
"먼저 사상인식을 바로 잡고 통일해야겠구먼. 상급에서 하라면 하시오. 이게 당전 농촌의 최대정치란 말입니다. 이 숱한 사람들이 하루에 한 헥타르도 대채전을 못하고서야 어찌 얼기 전에 대채 전을 다 만들겠소?"
그는 본보기극 "홍등기" 중의 주인공 리옥화처럼 높은 둔덕에 올라서더니 지도자 틀을 차리며 손까지 흔들어대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날마다 한 헥타르씩 대채 전을 꼭 꼭 만드십시오. 상급에서 명령하면 무조건 해야 합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정치책임을 추궁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다가 종연이 손을 홱 젓자 물을 뿌린 듯이 조용해졌다.
황종연은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 고래고래 고함쳤다.
“함흥 대대 이름부터 조선의 이름을 달아서야 되겠습니까? 이제부터 함흥대대는 5.7대대로 이름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우리 대대에서 모주석의 5.7지시를 잘 호응해 대채전을 잘 만든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겠습니다. 대대 이름부터 5.7대대로 고치겠습니다. 함흥중학교 이름도 5.7중학교로 고치겠습니다.”
이계삼이 뒤에서 허영주를 마주 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우에서 5.7간부학교를 꾸리더니 이젠 우리 대대마저 5.7대대로 바꿀 예산이구먼. 흥!”
허영주도 나직이 맞장구를 쳤다.
“쳇, 죄꼬만 반란파 애가 올라가더니 온통 빨갛게 물들이는 판이구먼. 어쩜 삐뚠 정치를 해도 저렇게 하오?”
상순은 어이없어 종연을 쏘아보았다.
“우리 대대 이름을 고치지 못하오. 이 함흥촌은 우리 조상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쪽박을 차고 이 고장에 온 후 개척한 마을이오. 모두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담아 함흥촌이라고 이름을 달았소. 헌데 젊은이들이 과거 전통을 모르고 이러는 건 틀리오.”
종연은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고 을러멨다.
“영감이, 뭘 알아 처처에서 혁명을 반대한단 말인가? 공사당위 서기이신 내가 고친다고 하셨으면 고치는 거지. 오늘부터 5.7대대, 5.7중학교로 부르라. 누가 반대하면 누굴 투쟁하겠소."
허나 여기저기서 계속 웅성거렸다.
이계삼과 허영주의 격분한 눈길까지 부딪치자 종연은 감히 상순을 건드리지 못하고 화제를 돌렸다.
“오래지 않으면 눈이 내리겠는데 모두들 다그쳐 대채전을 만드십시오. 하루에 한 헥타르씩은 해야 임무를 완수합니다. 지금 함흥대대, 아니, 5.7대대는 대채전 만들기 전역에서 제일 꼴찌입니다.”
허나 상순은 종연이가 비판한다고 해도 결코 시비에 지고 말 사람이 아니었다. 할 말은 해야 했다.
“채 걷어 들이지 못한 곡식이 가득한데 언제 평지에까지 다락 밭을 만드오? 이제 곡식을 눈 밑에 파묻으면 나라에 어찌 애국 곡식을 바치겠소? 사원들은 또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라오? 좀 엄동설한에 한지에 방아를 걸 소릴 작작 치오!”
종연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김 대장은 언제부터 정치는 불문하고 생산 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됐습니까? 공안국 국장까지 해본 사람 같지도 않게. 쯧쯧쯧.”
그러자 상순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종연아, 개구리로 됐노라고 올챙이 때를 잊어선 안 된다. 지금 누구 앞에서 버릇없이 빈정거리느냐?”
“뭣이랍니까?!”
종연은 숱한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이 꺾였지만 더 망신당할 것 같아 네모난 낯이 수수떡처럼 지지벌개 자리를 떴다.
“어디 두고 봅시다! 흥!”
(어 참, 오늘은 재수 없어. 송선과 상순에게 연속 당하고!)
종연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뒤지개를 짚고 둔덕에서 내려 공사 검사소조를 데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산 아래로 내려갔다.
이계삼과 허영주는 속이 시원해 희죽이 웃었다.
종연도 상순을 어쩌지 못하자 흥수는 상순과 이계삼의 눈치를 흘금거리다가 종연의 꽁무니를 따라 달려 내려갔다.
“황 주임, 황 주임!”
“어째?”
“회보할 일이 있네.”
종연은 홱 돌아섰다.
“뭘?”
흥수는 머리를 되돌려 상순이네와 멀리 떨어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개턱을 들더니 입을 열었다.
“저 김 대장네 말이 아니네. 아비는 대채 전에 소극적이고 아들은 나서서 자기 아비 한 일을 방송에까지 내면서 야단이란 말이제이.”
“무스 거(뭘)?”
황종연은 금방 잠에서 깨난 사람처럼 어리둥절해 했다.
“어째 아직도 몰라? 덕돌은 조개덕 생산 대에서 벽돌공장을 꾸려 새 농촌건설을 잘 했다고 부쩍 춰올리는 글을 써서 공사 방송에까지 냈제이. 사원들이 다 듣고 덕돌을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하늘 공중에 뜨게 춰 올렸다니까.”
“허, 세상에, 덕돌이 말성꾼이더구먼, 벌써 그렇게 컸는가?”
“허, 정말, 황서기도 희구해 하는 거 같네 그려.”
“이 서기, 나처럼 발랑거리던 애들이 이담 큰 일을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반란 파들이 득세하는 세월이니까. 반란에 도리가 있지.”
종연은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할 때 상순이가 벽돌공장을 꾸려 대대 사무실을 짓고 새 벽돌집을 지어 사원들을 들게 한 성과를 자기 성과로 만들어 공사 파출소 소장으로 올라갔고 이젠 공사당위 서기 겸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됐다. 그 사실을 흥수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황종연은 흥수의 외까풀 눈을 되돌아보며 물었다.
“정규상, 그 우파는 어째 위생소에 들여보냈습니까?”
“누가 병을 보겠어? 송선은 춤이나 잘 추겠지만 병이야 볼 수 있나?”
순간 종연은 금방 위생소에서 당한 일이 떠올라 가만 놔둘 수 없어 한입 꽉 깨물었다.
“송선을 어찌 위생소에 계속 둔단 말입니까? 대채전을 하는 공지에나 보내시오. 위생소에는 정의사만 있어도 됩니다.”
“불시에 왜?”
“병도 볼 줄 모르는 여자를 위생소에 둬서 뭘 하오?”
흥수는 코웃음이 킬 나왔다. 하마터면 종연의 앞에서 콧물까지 튕길 번했다.
(이 자식이 송선에게 코를 떼인 모양이구나. 안 글면 자기가 금방 위생소에 걷어 넣고 또 내치려 하겠나?)
흥수는 늙은 여우어서 인차 종연의 심사를 꿰뚫어보았던 것이다.
(자식, 아직 이 어른도 송선이, 그 미녀를 먹어보지 못했어. 네가 제 어미 벌 되는 송선에게 다 눈독 들여? 더러운 놈 새끼.)
흥수는 종연이 찌프를 타고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떠나 가버리자 인차 토성 안에 들어가 위생소 문을 떼고 들어섰다.
“이 주임, 어떻게 돼 오셨어요?”
송선은 흥수를 보자 인사했다. 그 목소리 어찌나 부드러운지 한쪽 간이 다 녹아떨어질 지경이었다.
흥수는 돌아서서 환자에게 주사를 놓는 송선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른 침을 꼴깍 삼키었다. 하얀 위생복을 입은 탄력 있는 엉덩이를 보는 순간 흥수는 온 몸에 정욕이 끓어 사품 치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어 온 몸을 바르르 떨었다.습관처럼 박죽코가 벌써 지지벌개졌다.
“음, 어험.”
흥수는 환자가 일어나 가기를 기다려 주사실 문을 걸고 송선에게 다가섰다.
“에헴, 송선이, 이제 금방 황주임이 동무 땜에 나하고 노발대발 하고 갔어.”
“예?”
(아무려면 이 영감과 말했을까?)
흥수는 적이 놀라는 눈치인 송선을 흘금 곁눈질하더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황주임은 저를 대채전을 만드는 공지에 내보내라고 하더구먼.”
송선은 주사기를 씻어 소독 가마에 넣으면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흥수는 이때라고 생각하고 창문 카텐을 주르륵 닫아버리고 송선에게 돌아섰다. 새파랗게 질린 송선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박윤희처럼 마구 끌어안고 우유 빛처럼 하얀 얼굴이고 말랑말랑한 가슴이고 마구 빨고 핥아주고 싶었다.
허나 마른 나무 꺾듯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아는 흥수였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면서 억지로 가까스로 눅잦히며 다가섰다.
“송선이, 내 말만 고분고분 들어. 글면 황주임이 아무리 어쩔락꼬 해도 내 말이면 다야. 박윤희랑 어떻게 올라갔는지 알아? 이 복잡한 세월에 무슨 재간에 코신부대 부녀대장이 3년 만에 현행반혁명 모자를 벗고 시내 병원으로 돌아갔겠어?”
슬슬 구슬리며 흥수는 송선의 뒤로 가서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손이 쑥 들어갔다. 탄력 있는 따뜻한 가슴을 움켜쥐는 순간 온몸이 전율했다.
허나 뜻밖에도 송선이 홱 돌아서며 몸부림쳤다.
찰싹!
“개 같은 놈새끼! 나를 어떻게 보고 감히 이 지랄이냐?!”
뜻밖에 귀 쌈까지 한 대 얻어맞은 흥수는 개꼴 망신을 당했다.
“좋다, 좋아!”
흥수는 분통이 터져 주사실 문고리를 쥐고 을러멨다.
“좋다, 좋아! 권하는 술을 마시지 않고 어디 벌주를 마셔봐! 내일부터 당장 조개덕 생산대에 내려가 곡식 실어들여! 네 년, 노동개조하면서 혼 나봐야 순종할 거냐! 이 함흥 대대, 아니, 5.7 대대에서 나를 모르고 네까짓 거 개똥이나 생길 거 같아?! 흥!”
흥수가 주사실 문을 쾅 닫고 나간 후 송선은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었다.
건너 칸에 있는 정규상은 벽 너머 이쪽 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대개 짐작하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는 의사 사무실에서 흐리터분한 하늘에서 무너져 내리는 듯이 푸실푸실 내리는 눈송이들을 내다보며 중얼거리었다.
“언제 이놈의 암흑한 세월이 끝날까?”
이튿날 아침 송선은 위생소에서 쫓기어 나와 조개덕 생산 대로 내려왔다.
상순은 일 포치를 받으러 회의실에 들어서는 송선을 보고 놀라했다.
“어째 위생소에 가지 않고 여기 왔소?”
“이흥수 주임이 노동개조해랐어요. 차라리 잘 됐어요. 위생소에서 굴욕을 당하기보다 대전에 나가 일을 왕왕 했으면 속이 덜 탈 거 같아요. 아무 일이나 시키세요.”
상순은 송선의 여린 몸을 보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어떻게 일하겠소?”
상순은 한참이나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앉아 궁리했다.
이윽고 그는 머리를 들더니 상의조로 물었다.
“대전 일이야 어떻게 그 약한 몸으로 하겠소? 우사에서 돼지죽이나 끓여 먹이면 어떻소?”  
송선이 반색을 하면서 “고맙습니다. 해보지요.”라고 했다.
“안돼!”
이때 별안간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흥수가 조개턱을 쳐들고 뛰어 들어오며 고함쳤다.
그는 낯이 퍼래 뎅뎅해 왁작 고아댔다.
“노동개조를 시킬 년을 슬슬 어루만져서야 되는가? 오늘부터 눈 속에 가서 소 수레로 곡식을 실어들이란 말이야! 이건 공사 황주임과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인 내 결정이야! 누가 감히 뜯어고쳐?!”
상순은 어처구니없어 푸 하고 코웃음을 참지 못해 콧물과 침방울까지 튕겼다.
“바로 대왕페하의 명이겠구먼. 별 것들이 다.”
그는 흥수를 멸시하는 눈길로 쏘아보며 일을 포치했다.
“여긴 조개덕 생산대지. 당신들 5.7대대가 아니오. 김송선 동문 오늘부터 우리 생산대 돼지 사양원이오. 누구도 다치지 못하오.”
“조개덕 생산 대는 그래 우리 5.7대대 생산 대 아니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생산대오?‘
흥수도 숱한 사원들 앞에서 지려고 하지 않았다.
“현행반혁명분자 송선은 오늘부터 소 수레로 곡식을 실어 들여! 내 말을 듣겠는가? 듣지 않겐?!”
상순은 코웃음 쳤다.
“이 주임은 농사를 지어 본 사람 같지 않구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싣걱질을 어떻게 하오?”
“저런 노동개조범에겐 눈 내리는 날에 싣걱질을 시켜 혼내야 돼! 김 대장은 왜 처처에서 나와 맞서? 어제는 대채전을 하지 못하게 하더니 오늘은 또 현행반혁명분자를 노동개조를 시키지 못하게 보황 파로 나서는 거야?!”
상순이 뭐라고 반박하려는데 송선이 썩 나섰다.
“해 보겠습니다. 다 사람이 하는 일이겠지요.”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사람이나 소나 다 죽이겠소? 안 되오."
그는 흥수를 소아보았다.
"어째 이전에 윤희 간호사를 혼내던 것처럼 혼내자고 그러오? 사람이. 원, 이 주임은 황주임처럼 철부지애도 아닌데 왜 그리 철이 없이 노오?”
항일전쟁시기로부터 해방전쟁, 항미원조 전쟁 기간과 해방 후에 오래 동안 부대와 공안국에서 지도사업을 해온 상순의 눈을 속일 수 있겠는가? 상순은 이미 황종연과 흥수의 더러운 소박치를 속속들이 꿰뚫어보고 있었다. 허나 근거를 잡지 못해 잠시 가만 놔두고 있었다.
이때 흥수의 동생 학수도 말리었다.
“흥수, 그만 둬. 이 눈 가슴에 어데 가서 곡식을 실어 들인다고 그래? 사람이 도리 있게 놀아. 괜히 인심을 잃지 말고!”
성수도 못 마땅한 눈길로 흥수를 바라보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숱한 사원들 앞에서 흥수는 더 창피당할 수 없었다.
그는 사원들을 둘러보더니 불시에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함쳤다.
“지금부터 현행반혁명분자 순선의 투쟁대회를 하겠수.”
송선은 흥수를 흘겨보았다. 눈귀에서 “별 더러운 새끼!” 하는 표정이 흘렀다.
“뭐라오?”
상순은 너무 어처구니없어 회의실 문을 쾅 걷어차고 나가버리었다.
흥수는 상순이 가겠으면 가고 놔버리고 송선에게 도끼눈을 날렸다.
“반혁명분자 송선은 앞에 나섯!”
누구의 명이라고 나서지 않고 배기겠는가.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이자 치보 주임인 흥수가 아닌가.
사원들은 흥수의 눈치를 흘금흘금 보며 웅성거리며 송선의 앞에 모여섰다.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현행반혁명분자 송선은 우리 함흥대대, 아니, 5.7대대에 온 후 개조 표현이 나쁘다. 위생소에 떡 들어앉아 해놓은 일이 뭔가? 의료지식이 없어 병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의 말도 제대로, 엉, 험.”
흥수는 말 뒤끝을 얼버무리며 마른기침을 깇었다. 자기 말을 잘 듣지 않은 게 주요 투쟁내용을 만들면 꼬리가 드러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는 인차 투쟁내용을 바꿨다.
“저 년 발을 보슈. 이게 어느 때락꼬(때라고) 코신을 신고 다니오? 조선족들 코신을 보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코신 코가 오똑 일어선 건 조선족들이 독립하려고 만든 게라고 하지 않았소? 독립왕국을 진짜 꾸리려는 건가? 그런데 아직도 코신 신고 다녀. 이제부터 우리 대대 조선족들은 코가 오똑한 코신을 신지 못해. 괜히 독립왕국을 꾸리련다는 혐의를 쓰지 말라고.”
그때 박성근의 아들 숭길이 물었다.
“그래 이제부터 조선족들은 무슨 신을 신어야 하오?”
“우파 애비에 그 아들이구나. 코가 없는 검정고무신을 신으라고!”
사원들 속에서 웅성거렸다.
"어떻게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오?”
"보기 싫게스리."
흥수는 숭길을 외까풀 눈으로 쏘아보았다.
“이 놈들아! 말조심해! 괜히 숭길이 아비 성근처럼 우파 모자를 쓸란다(쓰갰다).”
숭길은 혀를 홀랑 내밀더니 사원들 속으로 뒤로 물러섰다.
흥수는 건가래를 떼더니 계속 송선을 투쟁했다.
“상모춤은 항상 머리를 가로 돌리지 않아? 문공단 상모춤 추는 걸 보고 우리 반란파 두목, 아니, 반란파 책임자 모원신, 아니, 이씨께선 저게 당과 사회주의가 나쁘다고 머리를 가로 젓는 게 아닌가고 비평한 적이 있어. 그런데도 현행반혁명분자 송선은 우리 대대에 온 첫날부터 상모춤을 추었고 우리 대대 문예선전대를 데리고 계속 머리를 가로 젓는 상모춤을 췄네. 왜 혁명적 본보기극을 내놓고 항상 우리 조선족들의 케케 묵어빠진 상모춤만 춰? 이게 모주석의 문예노선을 반대하는 게 아니고 뭔가? 이전에도 송선은 문공단에서 수정주의 물건짝들을 극력 주장하고 자본주의 썩어빠진 생활방식을 선전했지. 예, 글케(그렇게) 돼 현행반혁명 모자를 쓰고 우리 대대에 노동개조를 하러 내려왔는기여. 개조 표현이 아주 나쁘단 말이오.”
그때 이계삼은 옆에서 허영주가 한어로 통역해주는 말을 듣고 손사래를 쳤다.
“아니오. 반대의견이 있소. 우리 한족간부들이라고 다 상모춤을 반대한 건 아니오. 상모 춤은 문화대혁명 전에도 조선족들이 즐겨 춘 춤이오. 지어 항일전쟁 때에도 풍년 든 농촌에서 상모 춤을 추었소. 내 알건대 상모춤은 예로부터 조선족들이 즐겨 춘 전통춤이오. 상모 춤이 본래 긴 댕기를 돌리느라고 머리를 돌린 거지. 당과 사회주의를 부정해 머리를 가로 흔든 게 아니오. 송선 동무를 너무 혹독하게 굴지 마라…”
“뭘 알아 삐쳐?! 늙어 빠진 영감이, 어째 투쟁받기 싶어?”
흥수가 악을 딱딱 썼지만 허영주까지 나섰다.
“상모춤을 췄다고 비판, 투쟁하는 건 잘못이오. 쩍 하면 우파요, 현행반혁명이라고 억울한 모자를 씌우는 건 착오란 말이요.”
  그 바람에 회의실은 송선의 투쟁대회인 것이 아니라 흥수를 공소하는 공소마당처럼 돼버렸다.
흥수는 사원들마저 웅성거리자 회의를 부랴부랴 끝마쳤다.
“모두 일이 바쁘겠는뎁쇼(데요). 오늘 회의 이만. 모두 일하러들 가라고.”
말을 마치자 흥수는 회의실 문을 쾅 걷어차고 나가 버렸다.
그가 맥없이 조개덕을 떠나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한족묘지꺼리를 지나 함흥대대 마을로 올라갔을 때다.
지춘실이 눈 속을 헤치며 헐레벌떡 달려와 죽는 상을 했다.
“여보, 어데 갔소? 해월이 다 죽어 가는데.”
“뭐라고? 해월인 왜 갑자기?”
“걔가 자꾸 골이 아프다고 했잖소? 그런데 골암이라오.”
춘실이 울상을 했다.
“뭐라고? 누가 암이랬어?”
흥수는 믿어지지 않아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흔들었다.
춘실은 죽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정의사 진단했소. 골에 암 덩어리 생겼다고.”
“정 우파 노동개조 하고 싶어 지랄이야. 누굴 위협해? 어림도 없어. 펀펀한 애가 어떻게 골암 걸려?”
춘실은 흥수의 가슴츠레 뜬 외까풀 눈에 삿대질을 해댔다.
“어이구, 어이구, 정의사가 누구요? 시내에서도 이름난 의학교수야, 교수. 정 교수가 틀림없이 암이라는데.”
그제야 흥수는 울상을 지으면서 토성 동쪽을 굽이돌아 황급히 집으로 달려갔다.
그가 집안에 들어가 보니  해월이 머리를 붙안고 뺑뺑 맴돌고 있었다.
“얘, 해월아, 아이고, 내 귀여운 막내딸아, 어디 아프니? 어디 보자.”
흥수는 구들에 올라가자마자 해월을 끌어안고 머리를 매만지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고? 아이고, 내 딸아.”
“작작 남과 악한 짓 하오! 죄를 만나지 말게.”
“뭐, 이 년아? 내가 악해 해월이 암에 걸렸어?”
울던 해월은 아버지를 활 밀어놓으며 야단쳤다.
“뭐라고? 내가 암에 걸렸어?  아직 시집도 가보지 못했는데 암에 걸려 죽어? 아이고, 엄마, 난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이날 이때까지 살았는데 어쩌오? 암에 걸려 그한테 시집가지도 못하고 죽게 생기지 않았소?”
춘실은 흥수에게 주먹을 내둘렀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애를 겁 먹이오?”
그녀는 눈물을 훔치면서 해월을 끌어안고 다독였다.
“해월아, 넌 죽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총각한테 꼭 시집 보내줄게.”
“옳소.”
엄마의 그 말에 해월을 울음을 딱 그치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떴다.
“엄마, 나도 아오. 오래 살지 못한다는 거, 골이 뜨끔뜨끔 빠개지는 거 같소. 난 덕돌을 사랑하오. 덕돌은 첫사랑이오. 덕돌한테 시집보내주오. 양? 내 죽기 전에 소원을 꺼주오.”
“뭐라니?”
“뭐? 누굴 사랑한다고?”
흥수와 춘실은 서로 마주 보며 덴겁해났다.
허나 해월의 철색얼굴에 헤 벌린 입에서 울리는 분명한 소리.
“덕돌을 우리 집에 데려오오. 빨리, 난 그 애를 죽도록 사랑한단 말이오.”
춘실은 기막혀 입을 딱 벌렸다.
“왜 하필이면 딱 덕돌이냐? 세상에 둘도 없는 발개돌이를.”
흥수는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음~ 음, 세상 몹쓸 놈을 좋아해? 안된다, 안돼.”
해월은 또 머리를 붙안고 구들에 들누워 땔땔 굴며 떼를 썼다.
“아버진 나빠, 무슨 원수 졌다고 항상 덕돌 아버지와 싸워? 난 덕돌 아버지 대공무사하고 사원들 잘 살게 하는 훌륭한 시아버지 감으로 보는데. 다시 덕돌 아버지를 노엽혀 봐라. 내 저 토성아래 우물에 빠져 저 앞집 덕성 할아버지처럼 죽어버리겠어. 당장 내 신랑 덕돌을 데려오오. 엉, 엉, 엉.”
춘실은 구들에 훌 물러앉아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난감해 했다.
“이 일을 어쩌오? 하필이면 덕돌이야?”
토성 아랫집에서는 해월의 통곡소리와 어시들의 울음 섞인 난감한 목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흥수는 토성 안에 달려가 정규상을 보자마자 두 손을 잡고 “제발 우리 해월을 살려주오.”라고 빌고 또 빌었다.
정규상은 항상 자기를 흘겨보던 흥수의 외까풀 눈을 눈귀로 쓸어보았다.
“남과 작작 악한 짓 하오. 이계삼 서기랑 허영주 부현장이랑 내랑 작작 투쟁하고 비판하란 말이오.”
그러자 흥수는 머리를 숙이고 속으로 “바로 그거구나.” 하고 이를 갈았지만 겉으로는 인차 헤헤 웃었다.
“아, 알았네. 해월이만 살려주게. 정 우파, 아, 아니, 정 교수님.”
     규상은 못이기는 척 하면서 흥수네 집에 가서 진맥도 해보고 해월의 머리에 침도 놓아주었다.
이윽고 해월은 골을 붙잡고 울지 않고 누워 잠에 곯아떨어지는 것이었다.
후에도 정의사가 침을 놓고 약을 달여 먹이었더니 해월은 그때만은 골이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편 상순은 펀펀하던 해월이 불시에 암에 걸렸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토성 안 위생소에 들어가 정 의사에게 물었다.
“해월이 암에 걸렸다는 말이 정말이오?”
그러자 정의사는 희죽이 웃으면서 입귀로 이런 말을 얼버무려 나직이 흘렸다.
“차차 알게 될게요.”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어쩜 귀여운 애가 암에 걸린단 말이오?”
그러자 정규상은 “암이란 것도 집안에 악한 사람이 있으면 걸리는 법이오.”라고 했다.
상순은 아무리 흥수가 악한 짓을 해도 해월이 암에 걸린 건 불쌍하고 동정심이 갔다.
상순은 성질이 팩하고 과격했지만 원래 동정심도 많고 심성이 착했다.
위생소에서 나온 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호와 상지민을 공안국 류치소에 가둬 두고 노동개조를 시키는 것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됐다. 황련지는 굴내를 먹은 후 상순이네 집에 있으면서 정규상의 치료를 받고 많이 나았다. 하지만 쌀이 귀한 세월이라 옥수수쌀에 푸성귀나 겨우 먹으면서 영양보충을 제대로 하지 못해 몸을 인차 춰 세우지 못했다. 게다가 남편마저 감옥에 가 있기에 충격을 받아 심란해 건강이 의연히 좋지 못했다.
궁리 끝에 상순은 흥수와 토론하지도 않고 현 공안국 류치소에 찾아갔다.
그는 책임자를 만나 사정얘기를 죽 하고나서 “제가 잘 교육하지 못해 이렇게 됐습니다. 이제 우리 생산 대에서 책임지고 잘 교육하겠습니다. 황차 상지민과 수호는 모두 재교육대상이 아니고 뭡니까?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해야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한참 궁리하던 류치소의 책임자는 무거운 입을 뗐다.
“현행반혁명을 어떻게 놔 보낸다고 그럽니까? 또 이 일은 저 혼자 결정할 수 없습니다. 황종연 상급 혁명위원회 주임과 물어봐야 합니다.”
상순은 어이없어 했다.
“아니, 공안국과 법원에서 하는 일을 왜 혁명위원회에 물어봐야 하오.”
“지금은 혁명위원회가 일체를 영도하지 않습니까? 법원과 공안국도 혁명위원회 주임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이때 뜻밖에 사무실에 웬 중년 경찰간부가 들어왔다.
류치소 책임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김 국장 왔습니까?”
그런데 그 김국장이란 경찰간부가 상순을 찬찬히 보더니 놀라했다.
“아니, 김국장이 아닙니까?”
그 경찰간부는 상순을 보고 아주 반가와 했다.
“아니, 누구던가? 면목은 좀 있는데.”
상순이 걸상에서 일어나며 어리벙벙해 하자 그 경찰간부는 상순의 두 손을 잡았다.
“김 국장, 저는 영월구 공안국에 있을 때 치안과장을 하던 김창남입니다.”
“어, 창남인가? 그래. 참 오랜만이구먼. 여기서 무슨 사업을 하오?”
그러자 류치소의 책임자가 “새로 전근해온 우리 공안국 부국장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김창남 국장은 “그때 영월구 공안국에서 김국장이 과장으로 제발시키지 않았더라면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이왕지사를 이야기하며 감구지회에 잠겼다.
한참 후 상순은 창남 국장을 보고 부탁했다.
“마침 잘 됐소. 우리 대 상지민과 수호 문제로 찾아왔는데 우리 생산 대에서 교육하게 놔주오.”
김창남 국장은 궁리하더니 결단성 있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아직 상지민과 수호네는 나이 어려서 일시 잘못했기에 적아모순까지는 아닙니다. 아무튼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리 무산계급 전정의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빈농이 없으면 혁명도 없습니다. 우린 김 국장을 믿고 그 애들을 내보내겠습니다. 1년 동안만 지방 관제를 합시다. 그래도 개조하지 못하면 다시 류치소에 데려오든지 그때에 가서 봅시다.”
“감사하오. 꼭 책임지고 잘 교육하겠소.”
그러나 류치소 책임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창남 국장을 바라보면서 근심했다.
“김 국장, 황주임한테 회보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류치소 노동개조 대상은 뭐 법원에서 판결한 범죄자도 아니고 정치사상개조 대상이기에 우리 공안국에서 결정할 수 있소. 어떻게 사사건건 다 황주임에게 회보하겠소? 이 김 대장은 영월구 공안국 국장을 한 분이오. 근심 말고 내보내오. 사상 개조가 목적이지 류치소에 가두는 것이 목적이 아니오. 내보내는 게 그들의 개조에 유리하오. 류치소에 가둬두면 그들은 개조는커녕 사회에 악감을 가질 수도 있소.”
“예, 알았습니다.”
그 책임자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날로 상순은 류치소에서 상지민과 수호를 데리고 나왔다.
그들은 숱한 행인들이 오가는 큰 길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부모 자식처럼 서로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상순은 아주 거뿐한 마음으로 그들 둘을 소수레에 싣고 마을로 돌아왔다.
수호는 상순이네 집에 와서 아내 황련지를 보는 순간 와락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뒤이어 황련지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그간 자기 아내를 친딸처럼 보살펴준 상순에 일가에게 절을 하며 감사를 드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꼭 노동을 잘해 김대장이 시름 놓는 훌륭한 지식청년으로 되겠습니다.”
상지민도 상순의 인정미에 눈물을 흘렸다.
“김 대장은 우리 상해지식청년들의 친부모와 같은 분입니다. 우린 김 대장의 얼굴을 봐서라도 다신 말썽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상순은 상지민과 수호네 부부를 친자식처럼 자기 집에서 계속 묵게 하면서 이제 봄이 돌아오면 집체 호와 수호네 집을 벽돌집으로 지어주겠다고 사원대회에서 결정했다. 그리하여 수호와 상지민, 황련지는 마을에 마음을 붙일 수 있게 됐다. 다른 상해지식청년들도 감동돼 상순의 말이라면 아주 잘 들었다.
상지민은 덕돌을 보고 “만약 누가 너를 업신여기기만 하면 말해라. 내 싹쓸이를 해 줄테다.”라고 했다.
덕돌은 상지민의 외국인 같은 쌍까풀 눈을 쳐다보았다.
“감사하오, 상해 형님.” 
덕돌은 상지민 형님이 싸움꾼 친구가 몇 십 명이 나 되는 우두머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상지민 형님, 한 가지 도와주겠소?”
“뭘? 말해라. 도와줄게.”
덕돌은 자기 집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이건 우리 아버지 알면 안 되오.”
“그렇게 심각해?”
“양.”
“대체 뭔데?”
덕돌은 상지민을 한쪽으로 팔소매를 끌고 가서 말했다.
“형님에게서 상해 권투나 무술을 배우고 싶소. 형님네 상해로 간 다음에 내 맞아대면 누구한테 말하겠소?”
“음, 그것도 맞아. 내 오늘부터 상해 권투와 검술을 배워 줄게.”
말을 마치자 상지민은 덕돌을 데리고 상해집체호로 갔다.
그는 침실에 들어가 침대 밑에서 시퍼런 대도를 꺼내 찌르고 찍고 쒹쒹 휘둘러보였다.
“어때? 배울래?”
“양, 그리고 형님, 형님은 외국어랑 잘 한다던데. 내께 일어를 좀 배워주겠소?”
“응? 걸 배워 뭘 해? 괜히 소문나면 나처럼 비판 받자고? 뭐, 서양의 달이 더 밝다 했다고.”
“겁나지 않소. 누구도 모르는 일어를 배워두면 이담 남들이 못할 일을 할 게 아니오?‘
그러자 상지민은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기특해 중얼거렸다.
“어쩜 이 시골에 이런 애가 다 있냐? 넌 다른 시골 애들과 다른 뭔가 있고나. 그래, 내 너헌테 일어도 배워주지.”
덕돌은 그날부터 이른 아침이면 동녘이 희붐히 밝으면 상지민을 따라 장개골 안에 들어가 권투와 검술을 배웠다. 그리고 눈이 와서 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상해 집체호에 가서 가만히 일어를 배웠다.
상지민과 수호 네는 음력설에 집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면 상해 라면이나 갈치, 물고기를 가득 사다가 상순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비준도 없이 상지민과 수호를 감옥에서 내왔다고 떠들어댄 흥수네 집에는 국수 오리 한 오리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해월이가 앓아도 상순을 내놓고 암이 옮는다고 누구도 병문안을 가지도 않았다.
어느 날, 상순은 덕돌을 보고 타일렀다.
“얘야, 해월이 암에 걸려 죽는다 만다하는데 찾아가 문안해라.”
“에이고, 해월이 아버지 도처에서 아버지 허물을 하는데 뭐 떼문에 문안해야 합니까?”
“그래도 사람이 어찌 인정을 저버리겠니? 혹시 네가 찾아가보면 해월이 병이 낫겠는지 가봐라.”
덕돌은 아버지가 어찌나 해월을 찾아가서 병문안을 하라고 하는지 가기 싫은 대로 억지로 찾아갔다.
“해월아, 덕돌이 왔어.”
춘실이 말하자마자 해월은 위방에서 울던 울음을 뚝 그쳤다.
“어디, 어디 왔어? 내 사랑 덕돌이.”
덕돌은 흉측하게 눈이 쑥 꺼져 들어가고 마른 해월의 몰골을 보는 순간 온 몸이 오싹해났다.
“해월아, 어떻니?”
“응, 괜찮아. 너를 보니 병이 다 나은 거 같애. 이젠 부끄러운 게 없다. 난 너한테 시집가려고 했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
해월은 덕돌을 보자 발딱 일어나 팔소매를 꼭 잡아 이불 쪽으로 끌어당겼다.
“여기 앉아라. 내 고중에 가지 못했지만 너도 봐라. 고중에 가 배운 게 뭐야? 너도 마을에 돌아와 소 궁둥이를 치게 되지 않는가 봐라.”
춘실은 미닫이를 닫고 나가고 덕돌은 멀찍이 앉았다.
그러자 해월은 빨갛게 질린 얼굴에 서운함이 물결쳐 지나갔다.
“왜 암이 전염될까봐 그러니? 일없다. 정의사 그러는데 암은 전염되지 않는대.”
“그래 어떻게 하나 병을 치료해라. 넌 꼭 건강을 찾을 수 있다.”
“그래, 너만 내 옆에 있어주면 난 살아날 거 같다.”
해월은 불시에 덕돌을 와락 끌어안더니 나누웠다.
“왜 이래?”
덕돌은 깜짝 놀라 해월을 슬쩍 밀어놓았다.
허나 해월은 단말마적으로 덕돌을 놓으려고 하지 않고 얼굴을 비비며 애원했다.
“덕돌아, 나도 알아. 제발 날 한번만이라도 여자로 만들어주면 안되니? 내 첫사랑은 너야. 이제껏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어. 딱 한번만, 응? 한번만.”
덕돌은 해월을 밀어놓으면서 일어났다.
“해월아, 병이나 잘 치료해라.”
말을 마치자 덕돌은 정지에 나와 신을 찾아 신고 부랴부랴 바깥으로 달아나갔다.
“얘, 덕돌아! 어데 가?!”
덕돌이 되돌아보니 해월은 맨발 바람으로 눈 덮인 바깥으로 뒤쫓아 오다가 풀렁 물앉아 발버둥질을 쳤다. 뒤에서 흥수와 춘실이 쫓아나와 해월을 겨우 끌고 돌아갔다.
덕돌은 속으로 해월이 불쌍하면서도 동네방네에 소문이 잘 못 날까봐 발걸음만 재우쳤다.
덕돌이 떠나간 후 해월은 울고 또 울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밤이 깊어가도 울음소리가 끊을 줄 몰랐다.
해월은 아버지 흥수의 목을 끌어안고 생 떼를 쓰며 대성통곡 쳤다.
“내 팔자가 기구하지. 어쩜 시집도 가지 못하고 죽어? 엉, 어 헝, 헝, 남자 그게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고 죽어? 엉, 엉, 엉.”
흥수도 막내딸이 불쌍했다.
나이 열여덟 살이 되도록 남자 맛도 보지 못하고 죽게 놔두고 뻔히 쳐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월아, 아버진들 어찌 할 도리가 없는지라. 불쌍한 내 딸아, 우쩔락꼬 이래?”
흥수는 위방에서 해월을 끌어안아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해월은 잠시 울음을 그쳤다가 또 가늘게 어깨를 들먹이면서 흐느껴 울었다. 흥수는 딸을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갑자기 해월은 울음을 그치더니 머리를 되돌려 아버지를 뒤돌아보았다.
“아버지, 아버지 무슨 내 신랑이냐? 어서 마을에 나가서 아무 총각이라도 남자면 돼. 빨리 데려오라. 나도 여자 한번 해보고 죽겠다.”
“내 누굴 데려오겠니? 누가 오자 하니?”
“덕돌이 오지 않을까?”
“그 새낀 역어서 오겠니?”
“그럼 장충국은 온다.”
“뭐라고? 장충국?”
흥수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응, 그래. 지주 아들이면 어때? 한족이면 어때? 쉰이 넘으면 뭐라니? 남자면 돼. 아무리 봐도 노총각 장충국이 아니면 올 사람이 없소.”
해월은 아버지 무릎에 올라앉은 채 돌아앉아 아버지 목을 끌어안고 콧물,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아버지 낯에 비볐다.
“아빠, 빨리 가 노총각 장충국을 데려와.”
흥수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쉰도 넘은 장충국한테 열여덟살 밖에 안되는 딸애를 내줄 생각을 떠올리자 일종 모욕감이 무섭게 파도치며 덮쳐왔다.
그때 춘실이 들어와 흥수를 정지에 데려 내갔다.
“노총각 장충국을 데려오는 거지?”
뒤에서 해월의 절절한 목소리가 늙은 부부의 마음을 재가루로 불태워 날려 보냈다.
춘실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부탁했다.
“빨리 충국을 데려오오. 딸의 마지막 소원을 꺼주오.”
“당신도 정신 나갔어? 난 차마 못해. 어떻게 금이야 옥이야 하고 키운 말짱 숫처녀 딸인데 그 더러운 한족 지주 아들에게 깔리게 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짐승보다 못한 짓을 못해.”
흥수는 문을 쾅 차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는 흐리터분한 하늘을 쳐다보며 푸실푸실 낯에 내리는 눈을 마구 손으로 털어버렸다.
집안에서는 해월의 울음소리가 가슴을 칼로 어이는 듯이 울려 왔다.
“에이, 세상에 어쩜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생겨?”
(학수네 집에 가서 술이나 마셔야 속이 풀리겠다.)
흥수는 눈을 빠드득 빠드득 밟으면서 학수 네 집으로 가버렸다.
밤 늦도록 술을 마시고 집으로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헌데 이상하게 해월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니, 얘가 혹시 죽지는 않았어?)
흥수는 부랴부랴 위방 문을 벌칵 열고 들어갔다. 허나 어두운 방안에는 해월의 자취가 없었다.
“해월아, 해월아!”
흥수는 가슴에서 돌이 툭 떨어지는 상 싶었다.
“떠들지 마오. 좀.”
정지에서 아내 춘실이 들어와 손을 끌어당겨 물 앉혀 놓았다.
“해월은 어디 있소?”
“고방에서 잠이 들었소.”
“어쩌다 울지 않아? 고방은 춥겠는데.”
“근심 마오. 오늘 불을 뜨끈뜨끈하게 땠으니까.”
흥수는 시름을 놓고 이불 위에 힌들 드러누워 한숨을 후 내쉬었다.
“내 어디 자니?”
“아니, 저게 해월이 깨나지 않았나?”
흥수는 아직도 전라도 남대 치 말을 조금 썼다.
“그래요. 아빠,”
해월은 암으로 앓는 애 같지 않게 고방에서 뛰어나와 아버지 목을 끌어안았다.
“아빠, 난 오늘 시집갔거든.”
“엉?! 무슨 말이냐?”
흥수는 벌떡 일어나 전등불 스위치를 찰칵 쥐어 당겼다.
전등불 아래 해월은 암환자 같지 않게 기쁜 나머지 어깨춤을 덩실덩실 췄다.
“노총각 장충국한테 시집 갔거든. 헤헤헤.  첨으로 남자 그걸 맛 봤어!”
“엉?! 아이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춘실은 손으로 해월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흥수는 아내를 손가락질 하며 욕했다.
“이년, 네년이 내 없을 때 개짓을 했구나. 아이고, 이 일을 어떠렇게 해(어떻게 해)?”
춘실은 흥수의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를 낮춰 중얼거렸다.
“작작 떠드오. 이보,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어쩌오?”
흥수는 외까풀눈을 부릅뜨더니 챨싹 아내의 귀 쌈을 갈겼다.
“어우, 어우, 이 미친 년들아.”
춘실은 볼을 매만지더니 황급히 해월을 끌고 정지로 뛰어나갔다.
“어쩜 우리 집안 이 지경 됐어? 암이 그래 우리 이씨보다 더 세단 말인가? 거 더러운 장충국이 언감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어떻게 보고 내 딸을 언감 깔아뭉개? 치보주임 딸을 감히?! 어우, 어우, 망했다, 망해! 우리 집안 망했어!”
흥수는 너무 분통이 터져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쾅쾅 쳤다.
사실 춘실은 흥수가 나간 후 가만히 조개덕에 가서 집도 없어 헐망한 벽돌공장 당직실에서 자는 충국을 얼리고 닥치고 해서 데려다 해월과 합방하게 했던 것이다.
장충국은 여자 맛을 보지 못한 노총각인지라 흥수네 고방에 기어들어 이게 웬 떡이냐고 해월한테 덮쳐들어  반주검이 되게 깔아뭉갰던 것이다.
“흥, 이치보, 넨들 어쩌겠니? 귀한 10대 처녀 딸도 내게 깔리었어. 네 번이나. 허허허.”
그 후부터 장충국은 춘실에게서 흥수가 집을 나갔다는 기별을 받기만 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흥수네 집 뒤울안 바자를 슬쩍 벌리고 들어가 고방 문을 열고 기어들었다.
      50대 중반이지만 충국은 처음 여자 맛을 보는지라 욕정이 뚝을 터진 홍수처럼 사납게 쏟아졌다. 번마다 해월을 넋을 잃게 해재끼었다. 해월이 흥분되다 못해 턱을 쳐들고 숨이 넘어가는듯이 신음소리를 내면서 오열하는지. 짐승 같은 늙다리 노총각 충국은  야수처럼 해월을 릉간했다. 가녀린 호박꽃에 우박이 치는듯 하기도 하고 진창에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가 너무 빳빳해 겨우 겨우 뿍뿍  빼는듯하기도 했다...
충국은 한편 자기 일가를 투쟁하고 비판하던 흥수의 부릅뜬 외까풀 눈을 떠올리며 욕지거리를 해대면서 더욱 기승스레 몸부림쳤다.
어떤 때에는 춘실이 고방에 달려 들어와 제 딸을 좀 살살 다루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춘실만 나가면 짐승남의 본능을 자제하기는커녕 정욕이 이씨 일가에 대한 보복심과 반죽돼 용암처럼 이글거리며 불타올랐다.  더욱 저돌적인 짓이 더 강렬하고 맹렬했다.
처음에는 흥수는 깜짝 놀라 세길네길 펄쩍 뛰었다. 그러나 나중엔 이상해했다.
      (웬 일인가?)
     충국이 나든 후부터 당장 죽을 것 같던 해월이가 점점 생기를 찾더니 앓음 소리도 내지 않았다. 대신 고방에서 해월의  노래까지 간혹 흥얼흥얼 새어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흥수는 충국이 드나드는 것을 알고 냉가슴을 앓았다.
처음에 황둥개는 낯선 충국이 나타나기만 하면 왕왕 사납게 짖어댔다.
흥수는 황둥개가 짓기만 하면 충국이 오는 걸 알고 냉가슴을 앓았다.
(어 참, 멧돼지 잡으러 갔다가 집돼지 잃은 격이 돼버렸네. 이게 송선을 욕심낸 보응이라도 아닌가? 아니면 정 우파 말처럼 너무 악한 짓을 많이 해서 보응 받는 건가?)
허나 흥수는 인차 자포자기했다.
(에라, 쑤어놓은 죽을 어찌랴?)
그 후부터 흥수마저 한 눈을 뜨고 한 눈을 감아버렸다.
      그때로부터 충국은 흥수만 없으면 뒤울안 바자를 헤치고 비집고 들어가 고방에 기어 들군 했다. 온 한해 겨울 충국은 눈이 오나 눈보라 치나 날마다 시도 때도 없이 그렇게 흥수네 집에 드나들었다. 
       이젠 흥수네 집지킴이 황둥개도 장충국이  와도 짖지 않고 꼬리를 쳐들고 휘휘 저으며 반긴다. 오히려 충국을 보면 펄쩍 뛰어 품에 안기기도 하고 주둥이를 때 덕지덕지한 바지가랭이에 대고 끼깅거리기도 하며 애교를 부린다.    
     그 바람에 흥수네 집 뒤울안 수수대바자가 완전히 쩍 벌어졌고 고방문과  뒤울안으로부터 소서구 충국이네 집까지 허연 눈 위에 더러운 발작국이 더덕더덕 찍히었다. 나중에는 한가닥의 오솔길이 나고 말았다.
     흥수네 집에서는 해월의 울음소리 대신 매일이다시피 봄 밤에 발정 나서 짝을 찾아 헤매며 우는 암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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