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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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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4)
2018년 08월 07일 12시 03분  조회:1276  추천:0  작성자: 김장혁



                                    
        

                                        



                                            8. 농촌 개혁의 봄바람

 

     중국의 광활한 농촌 대지에서는 전면적인 개혁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4인무리”가 살판치던 세월에는 진짜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농토를 개인들에게 떼 줘 개체농사책임제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허동원이 제일 좋아했다.

“정말 얼마나 좋소. 이전에는 많이 일하나 적게 일하나 가을이면 평균분배를 했기에 어디 일할 열정이 났소?”

허동원은 이전에 덕돌과 바위돌을 메다가 발판에서 떨어져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번했다. 겨우 되살아나 가지고서도 땅을 떼 준다니 기뻐 야단쳤다.

“난 아무리 허리를 상했지만 내 땅에 많이 심으면 많이 먹는 판인데. 얼마든지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소.”

허동원은 허리 아프면서도 자기에게 차례진 가대기를 훌 둘러 메가면서 입귀가 귀밑에 가 붙을 지경이었다.

상순도 자기에게 차례진 혹달개 고삐를 잡고 가대기를 메고 집으로 돌아왔다. 허나 상순의 얼굴에서는 그리 반기는 표정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내가 어떻게 사원들을 이끌어 건설한 생산대대인데 다 허물어 개인에게 나눠준단 말인가?)

상순이 가대기를 사랑방에 걷어 넣고 문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춘실이 상순의 코에 대고 삿대질하면서 야단쳤다.

“내 나그네 죽이니 씨원해? 난 누굴 믿고 농사를 지으라니?”

상순은 춘실한테 다가가면서 분명히 말했다.

“내 죽인게 아니라 흥수가 스스로 죽음의 길에 들어선 거요.”

“뭐라고?”

춘실은 허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입술을 악물었다.

상순은 내심하게 말했다.

“누가 그보고 충국을 죽이라고 했소? 장미련과는 그게 뭐요? 아무리 지주 아들이라도 그렇지. 죽이면 되오? 살인죄를 졌으니 죽어 싸지. 황차 지금 지주와 부농 모자를 다 벗겨준 판에...”

“뭐라고? 계속 변명하겠느냐? 오늘 내 죽고 네 죽고 해보자!”

춘실은 더는 참을 수 없어 두 손을 가래짝처럼 펼쳐들고 머리를 끄잡아당기려고 덮쳐들었다.

숱한 사람들이 몰려왔다.

상순은 슬쩍슬쩍 피하면서 말했다.

“흥수는 당원 처신을 했소? 마반산집 할머니는 기실 네랑 여동생이랑 다 같은 처지에서 억울했어. 일본 놈들한테 강제로 끌려가서 위안부로 됐지. 그런데 흥수는 그게 뭐요? 마반산집 할머니를 투쟁하고 법원에 넘겨 감옥에 보내지 않았소?”

그 말에 춘실은 무안한지 행악질을 멈추고 뒷집으로 슬금슬금 물러갔다.

     일전에 상순은 감옥에 가서 마반산집  할머니 억울함을 호소했다.

     몇 달 후 마반산집 할머니는 억울한 루명을 벗고 정책을 시달받아 마을로 돌아왔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받은 고통으로 해 시들시들 앓다가 억울한 모자를 벗기는 대회를 연지 몇달 안돼 한을 품은채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상순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후사를 치러주었다.

뜻밖에도 춘실이 찾아와 직접 옷을 갈아입히며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언니, 우리 나그네 죄를 졌소. 용서해주오. 어쩜 내 여동생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소? 흐흐흑흑.”

상순은 큰 자귀를 휘둘러 피나무를 팍팍 깎고 대패로 빡빡 밀어 손수 관작을 만들었다. 그는 두 손으로 마반산집 할머니를 렴습해 관작에 모셨다.

계수동 산골짜기에는 또 일본 놈들의 피해로 한을 품고 세상을 뜬 한 위안부 할머니의 자그마한 무덤이 생겨났다.

까마귀들이 원혼을 부르며 까욱까욱 퍼렇게 멍든 하늘을 나래치고 있었다…

허동원은 생산대 우사와 돼지 굴마저 허물어 나누려고 했다. 이젠 생산대 재산은 허울조차 없이 다 개인집으로 나뉘어 갈 판이었다.

상순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러다간 구사회로 되돌아가는 건 아닌가? 땅을 팔고 사고 하는 날엔 새로운 지주가 생길게 아닌가? 잘 사는 놈은 더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은 밭도 없이 남 집의 머슴을 살아야 할 게 아닌가? 진짜 빈부차별이 심해지면 자본주의를 복벽하는 게 아닌가?)

그는 윗방에 누워 천정만 쳐다보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와 내가 어떻게 사원들을 이끌어 건설한 양봉장과 인삼장, 과수원, 벽돌공장마저 다 허물어 사원들에게 나눠준단 말인가?)

상순은 구들을 짚고 일어나 담배를 말아 피웠다. 온 집안에 담배연기가 새뽀얗게 피어올랐다.

(안 된다. 이렇게 하는게 옳은지 현에 올라가 알아봐야 하겠다.)

그는 벌떡 일어나 마을 동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때 허동원이 한창 사원들을 데리고 벽돌공장의 벽돌을 굽는 가마를 허물어 벽돌장을 나누려고 일손을 다그치고 있었다.

상순은 가까이 다가가 제지시켰다.

“벽돌공장만은 다치지 마오! 아무리 개체농사를 짓는다고 해 집체 재산을 다 나눠 가지라는 건 아니오. 우리 대대 농민들이 잘 살자면 개체농사를 지어야 할뿐만 아니라 집체로 벽돌공장도 계속 꾸려 사원들에게 새 벽돌집을 지어 줘야 하오.”

그러나 허동원은 기를 쓰고 허물려고 들었다.

“위에서 집체 재산을 사원들에게 나눠주라고 지시했는데 김 대장은 무슨 그런 소리를 하오?”

허나 상순은 허동원을 무섭게 쏘아보며 제지했다.

“잠시 가만 놔두오. 벽돌공장을 어떻게 지은 게라고 허문단 말이오? 벽돌을 쓰겠으면 벽돌공장을 놔두고 구워 쓰는게 옳소. 내 위에 올라가 알아본 후에 허물어도 늦지 않소.”

그 말에 사원들도 머리를 끄덕였다.

“김 서기 말이 맞소. 벽돌공장을 허물어야 고작 벽돌을 몇 장씩 나눠 가지겠소?”

“며칠 기다려 허물어 가져도 늦지 않소.”

“벽돌을 구워 나눠 가지기오.”

그리하여 허동원은 벽돌공장을 허물던 손을 툭툭 털더니 마을 안으로 휑하니 가버렸다.

상순은 벽돌공장에 다가가 허물리던 가마를 손으로 매만지면서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몰아쉬었다.

허나 몇몇 사원들은 벽돌공장을 허물어 벽돌이 생기면 돼지 굴을 지으려고 했다. 그들은 상순이 막아나서자 꽤나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뒤에서 두덜거렸다.

상순은 그런 사원들에게 위엄있게 말했다.

“내 현에 가서 알아보고 돌아올 때까지 누구도 벽돌 한장도 다치지 마오. 누가 만약 내가 돌아오기 전에 벽돌 가마의 벽돌을 한장이라도 허물어 간다면 함흥대대 당지부 서기이자 치보 주임인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요.”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며 상순의 눈치를 흘금거렸다.

“김상순, 아직도 큰 소린가?”

모두들 돌아보니 이때 장미련이 달려와 상순에게 삿대질을 해대며 으르렁거렸다. 상순은 억이 막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야, 미쳤니?”

숭길이 말렸다.

허나 미련은 옛날과는 달리 당돌하게도 양손을 허리에 지르고 상순에게 빡빡 대들었다.

“계속 옛날 소릴 하겠는가? 나라에서 지주의 모자를 몽땅 벗겨줬는데 아직도 지주 딸이라고 업신여겨? 흥!”

상순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확실히 위에서는 지주의 모자를 벗겨주고 그들을 일반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대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미련은 상순이 어정쩡해 서 있는 것을 보고 기고만장해 펄펄 날뛰었다.

“이전에 우리 아버지랑 오라비랑 당신들이 가혹하게 투쟁해 죽였소. 마땅히 우리 아버지와 오라비 억울한 모자도 벗겨주고 돈으로 배상해야 하오. 우리 옛날 땅도 몽땅 돌려줘야 하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부터 지주라지만 모두 옛날 애써 번 돈으로 저 소서구를 샀어. 상순, 네 놈은 배은망덕한 나쁜 놈이야. 너희들 조손3대가 조선에서 빈 손으로 소서구에 들어왔을 때 우리 아버지 받아들여 저 소서구 황무지를 개간해 밭을 일구게 해 살게 하지 않았니? 우리 아버지 아니면 너희들이 굶어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었겠구나.”

상순은 미련을 꾸짖었다.

“주둥이를 다물지 못하겠느냐? 지주 모자를 벗겼다고 해도 너희들이 마음대로 옛날 땅을 되찾아 다시 지주로 되게 할 거 같으냐? 백일몽이다! 백일몽!”

허나 미련은 점점 기가 살아나 고함쳤다.

“이제 봐라. 내 옛날 우리 아버지 땅을 몽땅 찾아내지 않는가? 무슨 수를 써서든지 저 소서구를 내 걸로 만들 테다.”

“두고 보자! 그렇겐 되지 않을 걸!”

상순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었다.

(이게 세상이 어떻게 변한 거야?! 엉?)

그는 도리머리를 흔들며 할아버지 산소를 찾아 천지꽃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중턱에 있는 산소에 이르자 상순은 산소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태산이 무너지듯 절을 꾸벅꾸벅 아홉 번이나 올렸다.

“할아버지, 이게 세상이 별나게 변해갑니다. 할아버지와 제가 어떻게 건설한 우리 대대입니까? 그런데 요즘 집체 과수원이고 벽돌공장이고 몽땅 헐어 개인들에게 나눠준답니다. 지주들이 옛날 토지개혁 때 청산당한 밭을 되찾겠다고 미쳐 날뜁니다. 밭을 개인에게 몽땅 나눠준다면 또 옛날처럼 새로운 지주와 부농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허나 산소 위의 마른 풀잎이 봄바람에 한들거릴 뿐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상순은 산소 앞에 주저앉아 산 아래 무너져가는 함흥대대를 둘러보았다. 한참 후에야 일어난 그는 소서구의 밭을 돌아보았다.

(야, 저 밭을 우리 집과 큰집에서 어떻게 일군 건데.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내놓았던 땅을 이제 누구한테 나눠줘? 토지개혁 때 청산한 밭을 지주의 딸 미련에게 되돌려 줘? 안 된다, 안돼, 절대 안 돼!)

상순은 하늘땅에 대고 고함치더니 그 길로 현인민정부로 찾아갔다.

허영주 부현장을 찾아가니 현지지도하러 두만강변 마을로 내려가고 없었다.

상순은 서기 사무실에 가서 이계삼 부서기를 찾았다.

이계삼 부서기는 상순을 반갑게 맞았다.

상순은 자리에 앉자 이계삼이 부어주는 따뜻한 차를 마실 새도 없이 탁상에 내려놓고 단도직입으로 의문 나는 것부터 물었다.

“생산대 집체 재산을 사원들에게 몽땅 나눠주는 건 정말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 대대 벽돌공장이랑 과수원이랑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어떻게 건설한 것인데 다 허물어 나눠준단 말입니까? 이젠 인민공사를 흔적도 없이 허물어 다 개체호에 나눠준단 말입니까? 참 리해되지 않습니다.”

이계삼 부서기는 상순의 말을 들으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소홀히 해답하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주들의 모자를 벗겨 놓으니 지주 딸 장미련이랑 내 꼭뒤에 똥을 쌀 지경입니다. 그년은 옛날 우리가 토지개혁 때 지주들을 청산해 재산과 땅을 빈고농민들에게 나눠 준 것에 불만을 품고 우리 생산대 밭을 몽땅 되찾아 가겠답니다. 소서구는 옛날부터 자기 조상들의 땅이라면서 무슨 수를 써서든지 자기 땅으로 만들겠다고 미쳐 날뜁니다. 이렇게 되면 구사회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일은 없소.”

그제야 이계삼은 인내성 있게 새로운 개혁정책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지주들의 모자를 벗긴다고 해서 구사회로 돌아가거나 지주들이 옳았다는 것이 아니요. 옛날 봉건사회에서는 땅을 마음대로 팔고 살 수 있는 봉건토지정책을 썼기에 지주가 생겼고 머슴이 생겼소. 허나 지금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토지정책은 봉건사회와 다르오. 토지를 마음대로 팔거나 살 수 없소.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줘 농사를 짓지만 농민들은 사용권만 있을뿐 소유권은 없소. 말하자면 땅은 의연히 국가 소유이고 농민들은 나눠 가진 밭에서 농사를 지을 권리는 있지만 팔 권리는 없단 말이오.”

상순은 조금 눈앞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약 노동력을 상실해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때에는 그 밭을 팔지 못하면 묵이겠습니까?”

상순의 물음에 이계삼 부서기는 내심하게 설명했다.

“농사를 짓지 못하는 늙은이나 환자는 가히 다른 사람에게 토지를 양도하고 양도비를 받을 수 있소. 그러나 토지를 절대 팔고 사지는 못하오.”

“오~ 그렇습니까?”

이계삼은 상냥한 눈길로 상순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우린 이젠 늙었소. 신생사물을 접수하자면 늙어서도 새로운 형세에서의 당의 새로운 개혁개방 노선과 방침, 정책에 대한 학습을 늦춰선 안 되오. 자칫하면 새로운 형세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오. 우린 언제나 정치상에서 발걸음을 일치하게 해야 하오.”

그래도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지주들의 모자를 벗기는 것은 이전에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하던 데로부터 우리 당의 중심공작을 경제건설에 두기 위함이오.”

이계삼은 사무 상에서 일어나 상순의 옆에 다가와 장의자에 나란히 앉아 조용히 말했다.

“ 동무네 집도 보오. 아버지가 굶어 세상을 뜨지 않았소? 가난하고서야 무슨 사회주의 우월성이 있소? 백성들이 죽물도 온전히 먹지 못하고서야 인민들이 겉으로는 ‘만세!’를 높이 불러도 속으로야 좋다 하겠소? 우린 개체농사를 짓게 책임제를 실시해야 하오. 그래야 사원들의 생산적극성을 충분히 발휘시킬 수 있고 농업생산을 춰 세울 수 있소. 이전에 보오. 집체로 농사를 지을 때 아무리 모택동저작을 학습시키면서 사상동원을 해도 어디 모두 일축을 냈소? 허나 개체호로 농사를 지어 보오. 모두 자기 밭에 소출을 많이 내면 많이 먹을 수 있기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농사일을 깐지게 할 게 아니요?”

그 말은 상순의 마음에 들었다.

이계삼은 계속 얘기했다.

“이전에 평균분배를 했기에 일을 하나 하지 않으나 다 같이 나눠 먹으니 생산적극성이 어디 있었소? 허나 지금은 다르오.”

그래도 상순은 터득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허나 난 집체 벽돌공장이랑 양봉장이랑 허물어 다 개인에게 나눠주는 건 집체 경제를 파괴하는 거라고 봅니다. 벽돌공장에서 집체로 벽돌을 구워냈기에 우리 함흥대대 숱한 사원들이 새 벽돌집에 들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계삼은 사무실 안을 뚜벅뚜벅 거닐면서 한참 궁리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과도계단이기에 가히 함흥대대에서 벽돌공장을 집체로 계속 경영해 사원들에게 벽돌집을 지어줄 수 있소. 허나 양봉장이나 인삼장, 과수원은 관리하기 힘든데 사원들에게 나눠주는게 옳소. 벽돌공장도 허물지는 말고 차차 집체에서 경영하던 데로부터 경영능력이 있는 어느 개인에게 도급 맡기는 게 옳소. 공장도 개인이 맡으면 자기 개인 벽돌공장이기에 벽돌 한장이라도 더 잘 굽고 깨지지 않게 다룰 게요.”

상순은 그제야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계삼 서기는 상순의 어깨를 툭툭 다독여주면서 말했다.

“우린 평생 학습해야 하오. 옛날 사회주의 옛틀에 박힌 이론에서 벗어나 등소평동지가 개척한 중국 특색이 있는 사회주의 길을 학습하고 나가야 하오. 그래야 우린 인민들을 영도해 부강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백성들을 잘 살게 할 수 있소. 이게 우리가 개혁, 개방 하는 도리요. 등소평 동지께서는 ‘검은 고양이나 흰 고양이나 쥐를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고 하셨소. 백성들을 잘 살게 할 수 있다면 어떤 형식으로 농사를 짓든지 그것이 제일 좋은 사회주의인 거요.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시금석이요. 개체농사를 지어 보면 집체로 할 때보다 좋은가 나쁜가는 자연히 가려질 것이오. 우리 당도 어떻게 하면 인민들을 배불리 먹고 잘 살게 하겠는가고 모색하고 또 모색하고 있소.”

그제야 상순은 눈앞이 훤히 밝아지면서 가슴이 후련해 나는 감을 느꼈다.

“아무 때도 이 서기 말을 들으면 갑갑하던 가슴이 활 열리는 감이 듭니다. 돌아가 개체농사를 지어 보겠습니다.”

그때 허영주 부현장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비서가 상순 서기가 왔다고 하더구먼. 내 농촌에 가서 밭을 나누는 걸 지도하다가 급히 돌아왔소.”

상순은 허영주 부현장과 굳게 악수를 나눴다.

이계삼 부서기와 허영주 부현장은 오랜만에 만난 상순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새로운 개체농사책임제에 대해 담론했다.

상순이 장미련이 우쭐거리던 얘기를 하자 허영주 부현장은 맺고 끊듯이 말했다.

“지주 모자를 벗겨주고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하지 않고 경제건설을 중심에 놓고 사업한다고 해서 지주들의 역청산을 수수방관해선 안 되오. 경제건설을 잘 하려면 의연히 사회 치안질서를 잘 유지해야 하오. 옛날 지주들이거나 그 자식들의 반발과 파괴 행위, 그리고 새로 나타나는 사회주의 건설을 파괴하는 범죄자들을 계속 호되게 타격해야 하오. 대대 당지부 서기이자 치보 주임인 상순 동무는 새로운 형세에서 농촌 공작을 잘 하자면 어깨가 무거울 거요. 잘해 보오.”

상순은 금후 사업방향이 명확해지자 거뜬한 마음으로 마을로 돌아왔다.

미련은 상순이 외출했다가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자 곧추 찾아가 행악질을 했다.

“난 당신들 공산당 때문에 이젠 아버지도 없고 남편도 없고 오빠도 없고 자식도 없다. 누굴 믿고 농사를 짓겠는가? 지주 모자를 벗겼으니 우리 가정의 억울한 사건도 해명하고 모자를 벗겨 달라. 우리 오빠는 당신과 함께 항일투쟁을 하지 않았는가?”

그러자 상순은 세 귀 눈으로 미련을 무섭게 쏘아보면서 똑똑히 말해주었다.

“미련아, 네 아버지와 오빠가 이전에 항일유격대를 위해 쌀을 대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후에 국민당 반동파들의 편에 서서 악독하게 우리 공산당을 공격했다. 너희 오빠 장충국은 삼도만 토비무리에 들어 우리 마을을 여러 차례 습격해 불을 지르고 살인했고 나중에 국민당 반동파들을 따라 영구 쪽으로 도망치다가 돌아왔다. 그는 항미원조 전쟁 때에도 국민당잔여세력과 결탁해 우리 새 중국을 전복하려고 미쳐 날뛰었다. 국민당 특무였지만 항일전쟁 때 공헌을 봐서 살려두고 개조시킨 건 다행이야.”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시기 노간부들의 억울한 모자를 다 벗겨주었는데 우리 아버지와 오빠의 억울한 모자도 벗겨주면 안 되오? 옛날 조선에서 왔을 때 우리 집에서 황무지를 개간하게 준 은정을 봐서 도와주면 안 되오?”

허나 상순은 미련이 울면서 통사정을 들이대는 것을 단칼로 베 버렸다.

“네 아버지와 오빠가 어찌 노간부들과 같단 말이냐? 절대 안 된다. 너의 오빠는 제대로 사상개조를 하지 않고 항상 뒤에서 공산당을 비방하고 모욕했다.”

“정말 완고하구먼. 아직도 그래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꽉 틀어쥐고 놓지 않을 예산이오?”

“아니다. 절대 흥수처럼 계급투쟁만 하지 않을 거다. 허나 역사는 어쨌든 역사이다. 네 아버지와 오빠가 우리 인민과 당에 지은 죄는 의연히 역사에서 지울 수 없다. 우린 원수와 은인을 분명히 하고 절대 잊지 않는다.”

허나 미련은 상순의 말에 콧방귀를 픽 뀌며 주름이 가기 시작하는 퉁퉁한 낯에 어두운 그림자가 비꼈다.

“봐라! 우린 너를 유린하고 너의 오빠를 죽인 흥수를 법에 의해 처단했다. 사회주의 법이 얼마나 공평하니? 더 떠들지 말고 이제부터 차례진 밭을 잘 다루면서 조용히 살아라.”

미련은 왕왕 대성통곡 치면서 돌아갔다.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함흥촌 토성 안의 촌 사무실로 찾아가 돌덩이를 들어 종을 댕, 댕, 댕 두드렸다.

이윽고 숱한 사원들이 토성 안 마당에 모였다.

상순은 사원들에게 이계삼 부서기에게서 들은 당의 농촌개혁 정신을 죽 전달하고 나서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조개덕의 대대 벽돌공장은 절대 허물지 못합니다. 이계삼 서기는 개체농사를 지을 뿐만 아니라 옛날의 집체경제도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개체경제와 집체경제, 국가 경제 등 여러가지 형식의 경제를 동시에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개혁의 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계속 대대 벽돌공장을 허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크게 확대 건설해 더 많은 벽돌을 구워 내서 아직도 새 벽돌집에 들지 못한 사원들의 새 벽돌집을 다그쳐 건설해야 합니다. 그래서 몇 해 후에는 우리 마을이 몽땅 벽돌집에서 사는 번영 부강한 사회주의 새 농촌마을로 건설해야 합니다.”

그는 사원들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어떻습니까? 벽돌공장을 허물어 돼지 굴을 짓겠습니까? 아니면 벽돌공장을 그대로 두고 벽돌을 구워내 새 벽돌집을 짓겠습니까?!”

사원들은 한참 이해득실을 따져보았다.

“벽돌을 계속 구워 내 새 벽돌집을 짓는 게 낫소.”

“장원하게 타산하면 벽돌공장을 계속 꾸리는 게 옳소!”

그리하여 함흥 촌에서는 집체로 벽돌공장을 계속 꾸려 새해에도 벽돌공장을 구워내 새 벽돌집에 들지 못한 함흥 촌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벽돌공장의 수입은 촌의 집체 수입으로 올리고 나중에 연말에 각 촌민소조에 나눠주기로 했다. 촌민소조에서는 그 돈을 공금으로 쓰거나 사원들에게 나눠줬다.

상순은 위의 지시대로 마음이 아픈 대로 양봉장과 인삼장, 과수원은 도맡아 경영하려는 농민들에게 팔아 촌 수입으로 올렸고 다시 각 촌민소조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뭐나 건설하기는 어려워도 허물어 나눠 가지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허동원이 사원들을 데리고 우사간 지붕 위의 이영을 벗기고 지붕틀에 바 줄을 걸어 당기자 지붕틀이 번져졌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우사 지붕이 무너졌다.

새뽀얀 먼지 속에서 사원들은 지붕 위에 얹었던 가시오며 대들보며 기둥을 몽땅 뽑아내 한 대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나눠 집으로 챙겨갔다.

생산대 우사와 돼지굴은 기초돌마저 다 뽑아가 소똥 물과 돼지똥 물이 고인 휑뎅그렁한 빈 터만 남았다. 수십년 건설한 집체 우사와 돼지굴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인삼장과 양봉장은 누가 맡아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부득불 인삼장도 허물어 나눠주고 인삼은 뿌리를 단위로 세여 사원들에게 평균으로 나눠주었다. 그것이 상순이 마지막으로 평균분배를 한 일이었다.

양봉장과 인삼장이 허물어져 각이 날아나자 칼산과 패용천산 사이 산등성이는 벌거숭이로 돼버렸다.

상순이 할아버지와 함께 함흥대대를 건설할 웅위로운 설계도를 그리며 건설한 양봉장과 인삼장, 과수원이 며칠 사이에 빈 털털이로 돼버렸다.

상순은 그 살벌한 정경을 보고 가슴이 아프다 못해 자기 각을 뜯어가는 것 같이 느껴졌다.

(과수원 다락밭을 어떻게 만든 거냐?)

상순은 자기를 “유일생산력론”의 영향이 깊어 계급투쟁을 틀어쥐지 않고 농토건설만 한다고 물어먹는 흥수와 싸우면서 사원들을 동원해 패용천산 돌을 캐내 다락 밭을 쌓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원들에게 과수원을 나눠주니 그 다락 밭의 돌을 허물어 자기 집이 아니면 돼지 굴 기초를 쌓지 않겠는가? 지어 패용천산 절벽 위에 “모주석 만세!”라는 커다란 글씨를 새겨놓고 회칠을 한 돌까지 허물어 자기 집 토성을 쌓는 판이었다.

사원들은 천지개벽과도 같은 개혁의 봄바람에 따라 숱한 나무와 농구 등을 나눠 자기 집에 끌어다 쌓아놓으니 입귀가 귀밑까지 째질 지경이었다. 집집마다 웃음이 차 넘쳤다. 상순이 벽돌공장 하나를 남겨놓고 몽땅 나눠주자 사원들의 한결 같은 대환영을 받았다.

“집체 재산을 나누든 허물든 사원들한테 줘서 기뻐하면 잘한 건가?”

상순이 중얼거릴 때었다.

미련이 또 찾아와 야단쳤다.

“김 서기, 소서구 밭을 나한테 나눠 주오. 저 병진이랑 허동원이랑 노동력도 없다면서 나한테 밭을 주지 않으려고 하오. 좀 옛날 은정을 생각해서라도 나를 불쌍히 여겨주오.”

미련은 전에 비해 마구 행악질 하지 않고 이번에는 분을 참으며 통사정을 들이댔다.

상순은 한참 궁리하다가 미련을 보고 “너에게 밭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건 우리 나라 토지정책에 맞지 않는다. 어디에 호적이 있으면 어디에서 밭을 줘야 한다. 근심하지 말고 가라.”라고 했다.

“감사하오. 이제야 오빠 같다. 인심을 내는바 하곤 나에게 소서구 밭을 주오. 옛날 우리 집에서 대대대손 물려받은 골짜기 아니고 뭐요?”

미련은 언덕이 없어 더 비비지 못했다.

상순은 미련을 쏘아보면서 “안 돼. 소서구 밭은 절대 너에게 줄 수 없어.”라고 했다.

“왜?”

미련이 앙칼진 목소리로 따지고 들자 상순은 도끼눈을 부라리며 을러멨다.

“건 우리 빈농의 자존심이야!”

미련은 상순을 흘겨보다가 저쪽에서 지춘실이 오는 것을 보고 입을 삐쭉하며 자리를 떠났다.

춘실은 허연 머리를 흩날리면서 패용천산 인삼장 자리까지 달려와 야단쳤다.

“난 누구를 믿고 농사를 짓소? 나그네는 총살당했고 큰딸은 시집갔고 해월은 미쳐버렸으니. 사내 없이 늙은 노친이 어떻게 농사를 짓는단 말이오?”

상순은 허연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춘실이 불쌍해났다.

그는 모든 사원들 앞에서 뭐라고 말할 수 없어 한숨을 후 내쉬면서 마을로 터벅터벅 걸어 내려가면서 고민에 빠졌다.

춘실은 뒤따라 내려오면서 계속 상순을 욕지거리했다.

“너 이놈, 내 남편을 총살 했으니 이젠 속이 시원하겠구나.”

상순은 산 아래를 내려 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춘실은 태평강 가로 거의 올 때까지 계속 줄 욕을 퍼부었다.

“나쁜 놈 새끼, 아직도 다 늙어빠진 나를 탐내느냐?”

“흥수를 죽이면 내가 너한테 속할 거 같아?”

상순은 버드나무와 비술나무가 우거진 태평강 가에 사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자 돌아서서 입귀에 게거품을 물고 욕설을 퍼붓는 춘실을 쏘아보았다.

“전번에도 말했지만. 흥수는 살인죄를 져서 총살당해 마땅하오. 건 흥수가 자기 스스로 지은 죄 값을 치른 거요. 흥수가 아무리 나와 수십 년 동안 정치적수였지만 죽이려는 마음은 절대 없었소. 필경 흥수는 나를 따라 삼도만 토비숙청으로부터 해방전쟁과 항미원조 전쟁을 했고 또 사회주의 새 농촌 건설에 함께 분투해온 당원이 아니었소? 흥수가 어째 당원인데 부화 타락해 여색을 탐내고 그런 살인까지 했는지 이해되지 않소.”

춘실은 콧방귀를 뀌며 침마저 상순의 발 머리에 “퉤!” 뱉었다.

“더러워서, 원, 독사 입에서도 그런 말이 나와?”

상순은 눈물을 줄줄 흘리는 춘실이 불쌍해났다.

“그만하오. 흥수가 미련을 탐낸 데는 아내 책임도 있소. 아내가 남편을 잘 모셨더라면 왜 외간여자와 오입하려고 미쳐 날뛰었겠소? 미련에게서 들어서 다 아오. 흥수는 미련을 협박해 겁간해 애까지 설었다는 걸. 애를 초롱에 내다 얼어 죽게 했다는 걸 다 아오. 흥수는 두 번이나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소.”

춘실은 정신이 아뜩해 버들 방축에 물앉아 엉덩방아를 찧었다.

상순은 말을 꺼낸 바 하고는 계속 했다.

“해월을 충국에게 붙여놓은 것도 흥수에게 책임이 있겠지만 당신도 잘못이 있소. 아무리 암에 걸려 죽어도 어찌 지주 아들에게, 그것도 애비 같은 지주 아들놈에게 딸을 맡기오?”

“주둥이를 닥치지 못해? 이 버들방천에서 옛날 나와 사랑을 속삭이던 일을 잊지 않았겠지? 어떻게 우리 집에 그렇게 할 수 있니? 넌 사람이 아니다. 악마야!”

상순은 그런 춘실과 맞대구를 할 생각도 없었다.

그 자리를 떠나가면서 그는 이런 말을 한마디 했다.

“밭갈이랑 낟알싣기랑 힘들 때 내 도와 줄게. ”

“고양이 쥐 생각을 작작 해라구. 내 입에 거미줄을 쳐도 네 신세에 농사를 지을 거 같니? 퉤!”

상순은 진심으로 알려 줬다.

“정 이 마을에서 살기 싫으면 연길의 을준을 찾아가 사오. 을준은 당신의 아들이 아니고 뭐요? 백과부가 죽었다니 생모인데 왜 백준을 찾아가지 못하오? 아차, 손자가 이젠 덕돌만큼 크다면서? 손자 신세도 좀 보면 안되오?”

“퉤!”

춘실은 상순의 뒤잔등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너도 손자 생각을 다 하니? 문빈이 이제 대학을 졸업하면 법원에 들어갈 거야. 걔가 법관이 되는 날엔 네놈부터 총살하게 할테야.”

“해해해. 연애해?”

이때 가슴을 다 드러내 놓은 해월이가 애를 안고 강변에 나오다가 버들방축에서 상순과 딱 마주쳤다.

그녀는 저쪽에 물앉아 우는 엄마를 보자 히히히 웃으며 지껄이었다.

“어마니, 우리 엄마하고 여기서 또 연애했어? 히히, 헤헤, 이제 금방 들을나니 둘이 이전에 여기 버들방축에서 이렇게 했다면서.”

해월은 왼손가락을 동그랗게 하고 오른손 식지를 쑤셔 넣었다 뺐다 하는 시늉을 하면서 씨물씨물 웃었다.

“헤헤헤. 젊어서 재미 좋았겠구나. 히히히. 나도 해보니 좋더라. 아들도 낳고.”

상순은 어이없어 자리를 뜨려고 했다.

“이 놈아! 어디로 가?!”

뒤에서 바람이 휙 일었다. 상순이 돌아서려 할 때었다. 해월은 상순의 목을 끌어안고 마구 물어댔다.

상순은 반사적으로 손으로 해월을 떠밀었다. 그런데 풀어헤친 벌거숭이 젖가슴을 떠밀었다.

“오, 만져?! 내 젖가슴을? 이 늙다리 색마야? 충국이 죽었으니 이젠 네놈이 우리 모녀간의 신랑이 돼라! 너네 김씨네 너무너무 좋아해.”

상순은 미친 해월을 보고 어이없어 저쪽에 물앉아 그때까지 꺼이꺼이 울고 있는 춘실을 보고 말했다.

“빨리 얘를 말리오. 괜히 동네 망신 당하겠소. 내 정규상과 말해서 해월의 병을 치료해줄게.”

말을 마치자 상순은 바람결처럼 떠나가버렸다.

뒤에서는 미친 해월이 따라 가면서 추잡한 욕설을 마구 퍼붓고 춘실은 땅을 치며 섧게 울고 있었다.

저쪽에서 인삼뿌리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벌통을 멘 사원들이 웃음꽃을 피우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9. 사랑환상곡

구리바라 같은 보름달이 동산에서 두둥실 떠오르기 바쁘게 구름 속으로 살짝 들어가 버렸다가도 예쁜 얼굴을 내밀었다.

은빛 달빛을 밟으며 봉선은 덕돌과 함께 부르하통하 강변으로 나갔다. 수양버들이 휘늘어진 버드나무가지 잎사귀들 사이로 은빛 달빛이 부서져 내린다.

저쪽 강바닥에서 출렁이는 물속에서 은빛 달빛이 은파로 부서진다. 수천만개 금잔디 은잔디가 은빛 달빛이 부서지는 물속에서 뛰논다. 부르하통하 강물은 은 쟁반 같은 달과 구름을 싣고 동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봉선은 두 손을 가슴에 안고 있다가 걸음을 멈추며 돌아섰다.

“이후에는 나를 찾지 마오.”

“왜?”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하는 봉선의 말에 덕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학시험에 낙방했소. 대학생의 대상도 안 되는데 찾아와 뭘 하오?”

“뭐라오? 낙방이라니?”

“사실이오. 낙제했소.”

덕돌은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이는 봉선을 어떻게 위안했으면 좋을지 몰라 했다. 그는 봉선의 팔을 잡아 돌려 세웠다.

“괜찮소. 올해 입학하지 못하면 새해에 다시 시험을 치면 되지.”

허나 봉선은 머리를 숙이면서 한숨을 호- 내쉬었다.

“이젠 신심이 없소. 시험을 세번씩이나 쳐도 낙제요. 여자 나이 스물넷이라. 생각이 복잡해 그런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소. 난 저를 보면 속이 괴롭기만 하오.”

그 말에 덕돌은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럼 나 때문에 낙제했단 말이오? 그렇다면 미안하오.”

“아니오. 절대 아니오. 전 나를 진심으로 작문도 가르쳤고 복습제강도 빌려주면서 도왔소. 허나 어쩐지 나에게 속하지 못할 저를 보면 괜히 속이 비길 데 없단 말이오.”

말끝을 흐리면서 봉선은 돌아서며 어깨를 들먹였다.

덕돌은 어쩐지 봉선이 가엾었다.

(오늘 나를 보자고 해놓고 이런 말을 하려고?)

“봉선이, 어떻게 해야 저를 위로할 수 있겠소?”

그는 봉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봉선은 몸을 빼지 않고 오히려 돌아서며 몸을 기댔다. 순간 덕돌은 가슴이 뭉클해나며 전기에라도 맞은듯 아랫배가 찡해났다.

“꼭 안아주오. 난 고통스럽소.”

덕돌이 봉선의 풍만한 온몸을 꼭 포옹해주었다. 달빛아래 봉선의 고운 쌍까풀눈에 고인 눈물이 반짝였다.

그녀는 천천히 보름달 같은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야들야들하고 물기어린 입술을 덕돌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덕돌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의 촉촉하고 따갑고 말랑말랑한 입술과 혀가 덕돌의 입술을 감쌌다. 덕돌도 반사적으로 봉선이 내민 혀를 살짝 포개며 감빨았다. 꿀맛처럼 달콤한 첫키스였다.

(안 돼, 이래선 절대 안 돼. 대학교 학생기율을 어겨선 안 돼.)

순간 덕돌은 인차 봉선을 떠밀어내면서 몸을 돌렸다.

“왜? 고중생과 싫지?”

“아, 아니, 두렵소.”

“졸장부.”

“우리 동창생들이 마구 연애했다가 별 처벌을 다 받았소. 졸업장을 타지 못할까 봐 두렵소.”

“별, 이리 오오.”

봉선은 덕돌을 얽어매려고 덕돌의 손을 마구 잡아 자기 가슴에 살짝 걷어 넣었다.

“이래도 모르겠소. 내 마음을?”

뭉클 하는 젖가슴에 손이 닿는 순간 덕돌은 전기에라도 붙은듯이 덴겁해 손을 뺐다. 봉선의 대담한 행동에 겁났다.

“이러지 말기요. 난 중학교 때 한 여동창생한테 쪽지를 썼다가 손 한번 쥐어 보지도 못하고 숱한 애들에게 놀림을 당했단 말이오.”

그제야 봉선은 더는 대담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 알았소. 중학교 때 첫사랑 있구나. 괜히 끼어들어 미안하오.”

이때 저쪽에서 자전거 방울소리 달랑달랑 울리었다. 나뭇가지 사이에 비껴드는 달빛을 빌어 웬 사내가 자전거를 타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게 봉선이 아니냐?”

“오빠구나.”

“집으로 가자! 가시나새끼 밤중에 어디로 싸다녀?!”

그 사내는 달려와 자전거에서 내리자마자 고함쳤다.

뒤이어 봉선을 다짜고짜 자전거에 마구 태워가지고 달아났다.

“오빠, 날 내려놓소. 할 말이 있소.”

“무슨 말? 가자! 어디 집에 가서 혼나봐라!”

덕돌은 처량한 달빛아래 우두커니 서서 버들방축 저쪽으로 자전거에 앉아 강제로 끌려가는 봉선의 그림자를 멍해 바라보았다.

그는 봉선의 오빠가 원망스러웠다.

(누가 자기 여동생한테 붙여놓고 저래? 흥!)

숙사로 돌아오면서 꿈만 같이 봉선과 포옹한 채 첫키스를 하던 정경을 돌이켜 보았다. 아직도 입술에 물기어린 야들야들한 입술과 혀가 와 닿더니 감빨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 별스레 가슴이 뭉클하고 높뛰고 싱숭생숭해났다.

그 후 기말 복습이 바쁜데다가 봉선의 오빠가 두려워 오래 동안 봉선을 만나지 못했다. 처음에는 봉선을 만나고 싶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무슨 부담을 덜어버린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래, 대학생인 내가 한 살 위인 처녀애를 따라 다녀?)

이렇게 마음을 정하자 덕돌은 봉선을 점차 잊어 가고 있었다.

그때 덕돌의 시야에 다시 송영자가 나타났다. 덕돌이 힘써 주선해 준데서 송영자는 예술학원 무용학부에 입학했던 것이다.

방학에 송영자는 덕돌을 불러 조용히 망아산으로 갔다.

울울창창한 소나무가 산기슭을 뒤덮고 있어 장관을 이루었다.

덕돌은 소나무 숲속을 거닐며 청신하고 시원한 산 공기를 한껏 들이켜더니 영자를 돌아보았다.

“축하한다. 영자, 네가 예술학원에 붙은 걸.”

영자는 쌍쌍이 거니는 연인들의 눈을 피하면서 덕돌의 옆에 따라서며 조용히 인사했다. “감사해요. 오빠, 오빠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오늘 내가 있겠어요? 은공을 어떻게 갚으면 좋을까요?”

덕돌은 이전에 비해 퍽 성숙된 영자를 돌아보며 빙긋이 웃었다.

“이젠 정말 처녀티가 나는구나.”

“오빠는 이제껏 나를 여자애로 보지 않았어요?”

“그래. 난 너를 보면 항상 우리 학교 뒤에서 도라지에 양산도를 연습하던 철부지애를 보는 거 같다.”

송영자는 눈을 곱게 흘기면서 “나도 이젠 수무 살인데도. 참.” 하고 앵돌아졌다.

“오, 그래, 그래. 넌 정말 예쁜 대학생 처녀애야.”

그제야 송영자는 해시시 웃으면서 덕돌을 따라 소나무 숲속으로 들어갔다.

“오빠, 할 말이 있어요.”

덕돌은 소나무 숲속을 둘러보더니 심각한 표정을 짓는 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뭘?”

영자는 생글방글 웃으면서 다가와 “눈을 감아요.”라고 했다.

덕돌은 눈을 슬며시 감았다.

부연 눈앞에 영자가 얼굴을 귀밑에 가까이 하더니 “뽁.” 하고 얼굴에 키스를 살짝 안기는 것이었다.

“왜 이래?”

덕돌이 눈을 뜨며 영자의 담대한 행동에 놀랐다.

영자는 혀를 홀랑 내밀더니 모로 돌아서 귀밑까지 빨간 사과 알처럼 붉혔다.

덕돌은 그 빨간 사과같이 상기된 얼굴을 한입 떼먹고 싶은 심정을 억누를 길 없어 몸을 바르르 떨었다.

덕돌은 황소와도 같이 한숨을 후 내쉬며 저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속으로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저 키스는 예술학원에 입학하게 도와준 은공에 보답하는 장려인가? 아니면 나를 사랑한다는 건가?)

오리무중에 빠진 덕돌은 소홀하게 전번에 봉선처럼 맞불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속으로는 봉선에 비해 송영자가 마음에 들었다.

(대학생인데다가 나이도 세살 지하지. 인물체격도 예술미가 다분한 무용수답게 더 예쁘지 않는가.)

덕돌은 아직도 소나무 껍질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서 있는 영자를 참빗질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성숙미를 자랑하듯이 부푼 가슴, 외씨같이 걀쭉한 얼굴, 버들잎 눈썹, 오똑한 코에 자그마한 앵두입…

소나무 숲속에 서 있는 영자는 정말 한포기의 빨간 장미꽃이랄까, 아니, 아니야. 숲속에 핀 나리꽃 같았다. 진짜 사랑스러운 처녀였다.

허나 덕돌은 자기 속마음을 감추며 영자에게 다가가 능청을 떨었다.

“야, 대학생처녀가 뭐야? 담대하게 사내에게 키스를 해?”

그제야 영자는 고개를 돌리며 반문했다.

“문제 되는가요?”

“감사의 인사를 잘 받았다.”

“감사의 인사를? 정말 눈치도 도끼 등이구먼요.”

“그래 장려가 아니고 뭐야?”

영자는 그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발끝으로 애꿎은 땅바닥의 소나무 잎만 살살 긁었다.

(너 혹시 날 사랑해?)

덕돌은 속으로 의문부호가 연이어 떠올랐다.

영자는 얼굴을 붉히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저쪽 소나무 숲속으로 한들한들 달아났다.

덕돌은 그제야 영자를 보고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덕돌은 소나무 숲속으로 달아가 영자를 붙잡았다.

“말해? 맞니?”

“뭘 말인가요?”

“날 사랑해?”

“오빠를 사랑하면 안 돼요? 처녀가 사내대장부를 사랑하는데 무슨 죄가 있어?”

영자는 이렇게 솔직히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처녀로서 멋쩍게 먼저 사랑을 고백할 수 없어 입을 꼭 다물어버렸다.

“그래?”

덕돌은 따지다 말고 영자를 꼭 끌어안았다.

“영자, 널 사랑해. 예쁘고 마음씨 착하고. 너라면 함께 죽으라고 해도 죽을 거 같아.”

영자는 덕돌의 가슴을 주먹으로 통통 치며 속삭였다.

“왜 그렇게 도깨비처럼 말해요? 정치와 문학을 배운다는 대학생총각이. 호호호.”

“미안, 예술적이 못돼 미안~”

덕돌과 영자는 점점 몸을 밀착해갔다. 다른 연인들이 쌍쌍이 지나가면서 보든 말든 관계없이 오래 오래 포옹하고 키스벼락이 쏟아졌다…

(어, 별 수 없어. 학교 학생기율을 위반하지 말아야 하는데. 예쁜 처녀의 유혹과 매력은 어찌 할 수 없어.)

번마다 영자와 열연하고 돌아와 침실에 누워 열연정경을 돌이켜보면서 덕돌은 후회 절반, 행복감 절반이었다.

덕돌은 일요일이 돼 벼모내기를 하러 집으로 돌아갔다. 하긴 막내딸 성숙마저 경박호 부근의 상수촌에 시집간 후 상순과 명옥은 일손이 딸려 쩔쩔 매면서 고양이 발도 빌어다 쓸 지경이었다.

덕돌이 논으로 나갔을 때었다.

(아니, 저게 누구야? 우리 논에 왜 집체호의 조영희가 벼 모를 꽂아?)

먼발치에서 덕돌을 발견한 조영희는 머리 수건을 더 내리 쓰고 부지런히 벼 모만 꽂았다.

덕돌은 아버지 눈치를 보면서 손으로 앞에서 벼 모를 꽂아나가는 조영희 잔등을 가리키며 의문스런 표정을 보냈다.

상순은 희죽이 웃기만 했다.

한쉼 벼모를 꽂고 쉴 때에야 덕돌은 영희에게 인사했다.

“집체호 새애기, 진수해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 와서 우리 집 벼 모를 꽂소?”

빈정거리는 그 인사말에 영희는 진정어린 눈길로 덕돌을 바라보며 정색했다.

“내 집체호에 내려와서 저네 집에 신세를 많이 졌소. 저네 아버지는 나를 맨발의사로 제발시켰고 전 나를 방송과 신문에 내주었소. 그래 농번 계절에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고 그러오.”

“좌우간 감사하오.”

덕돌은 영희와 나란히 앉아 콧노래를 부르며 한 가슴 가득히 긍지감을 느꼈다. 한 것은 이전에 그렇게 도고하던 공주 영희가 자기 옆에 순순한 양처럼 앉아 있지 않는가?

점심에 덕돌은 자기 집에까지 따라 들어와 점심을 먹는 영희를 집안에 두고 가만히 아버지와 물어보았다.

“저 영희 어째 저럽니까? 동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버지는 집 쪽을 살피더니 덕돌의 곁에 다가와 조용히 알려주었다.

“영희는 우리 집 며느리 되겠단다.”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안 될 소리.”

덕돌은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로 믿어지지 않았다.

“어떤 시내 처녀가 이런 농촌에 시집오자 하겠습니까? 당치도 않은 말을.”

덕돌이 도리머리를 흔들자 상순은 정색했다.

“며칠 전에 영희가 우리 집에 찾아와 나를 보고 이러더라. ‘내 김 대장 며느리를 하면 안 됩니까?’라고 하더라. 내가 ‘무슨 농담을 하는가? 어떻게 농촌 시부모를 모시고 살겠소?’라고 했더니 뭐랬는지 아니?”

“?”

덕돌은 부쩍 신경을 도사렸다.

말수가 적은 상순이었지만 자랑 삼아 얘기했다.

“이래더라. ‘저를 믿으십시오. 농촌이라도 덕돌만 저와 부부로 연을 맺고 살겠다면 전 꼭 시부모를 효성을 다해 잘 모실 겁니다. 김 대장 네는 여기 돼지 굴을 크게 짓고 굴암돼지 서너 마리 길러 새끼치기를 시키면 시내보다 못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그 효성스런 말이 얼마나 고맙던지 모르겠다. 네 생각은 어떠냐?”

덕돌은 어정쩡해 서서 놀라운 낯색을 감추지 못했다.

“영희와 직접 말해보렴.”

덕돌은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정말 대학에 갈만 하긴 하다. 소몰이군 출신 농포가 정말 시내 선비들의 공주들과 살만큼 차이가 없이 됐는가? 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농민 차별이 얼마나 컸는데. 대학마크를 가슴에 척 달자마자 숱한 처녀들이 광목에 닥사리처럼 매달린단 말이야. 내가 소몰이를 할 때 저 집체 호 일등 가는 공주들이 나를 왼눈으로 보기나 했던가? 나는 농포고 저 처녀들은 시내에서 한다하는 진수해 고중 선생님들의 귀여운 공주들이 아닌가?)

허나 덕돌은 마음 속에 송영자가 있었기에 한 살 위인 영희가 들어설 자리가 좁았다. 그제야 그는 자기가 마음속으로 영자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게 됐다. 영자에 대한 사랑의 뿌리가 가슴속에 마음속에 뇌리에 뼈 속에까지 얼기설기 뿌리가 깊게 내렸다는 것을 폐부로 느끼게 됐다.

(물론 영희는 예쁘고 똑똑하고 수양이 있고 참하지. 저 처녀는 꼭 부모를 효성을 다해 모실 거야. 허나 3년 동안 대학시험을 쳤는데 계속 10여 점씩 모자라 가지 못한 낙제생이야. 아무렴 대학생인 내가 저만한 처녀를 얻지 못할 까봐 소홀히 평생 대상문제를 결정한단 말인가? 절대 안 돼. 천천히 봐야지.)

사람의 마음은 비길 데 없이 고약했다. 아니야. 사랑은 원래 자사자리하기 때문이리라.

(소를 몰면서 앞길이 새까말 때 같으면 저런 영희가 매달리면 얼싸 좋다고 한품에 껴안고 사랑폭풍을 안겼을 것이 아닌가?)

그날 덕돌은 이렇게 착잡한 생각에 잠겨 영희와 함께 자기 집 벼 모를 꽂았다. 영희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걱수걱 벼모만 꽂았다. 허나 그녀의 머리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번개가 번쩍이고 들리지 않는 우레가 울었다. 복잡한 생각이 번개 치듯 흐르고 있었다.

저녁에 영희가 차마 덕돌의 집에서 자기는 불편해 저녁 숟가락이 떨어지자 집체호에 돌아가겠다고 조용히 엉덩이를 들었다.

덕돌은 집체호로 떠나가는 영희의 뒤를 따라갔다.

검푸른 바깥하늘에는 아기별이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하고 동녘하늘에서는 반달이 가냘프게 떠 있었다.

덕돌은 차마 자기를 따라 자기 집에 벼 모까지 꽂아주러 찾아온 영희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못해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그래, 일루의 희망이라도 걸고 찾아온 그녀에게 나이 “어떻소” “어떻소” 해서 돌려보낸다면 타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상순이 벽돌공장을 꾸려 구워낸 벽돌과 기와로 지은 집체호는 이젠 상지민까지 마지막으로 상해로 떠나 가다나니 상해지식청년들이고 진수해 조선족지식청년들이고 다 떠나가고 텅텅 비어 있었다.

영희가 어두운 집체호 문 꼬리를 잡아당기며 덕돌을 돌아보는 순간이다.

덕돌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한테서 들었소. 제가 우리 아버지 며느리가 되면 안되는가고 한 말을.”

“그래요? 집에 들어가 조용히 얘기하면 어떠오? 누가 보겠소.”

영희는 기대에 찬 나머지 달빛아래 문을 열어 재끼더니 덕돌을 돌아보며 가슴을 할랑거리고 있었다.

허나 덕돌은 몸을 돌렸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그러자 영희는 갑자기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덕돌이, 내 꽃 담배쌈지를 줄 때부터 저를 사랑했소. 아니, 동무가 내 사적을 방송과 신문에 내던 그때부터 동무에 대한 사랑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했던 거요. 그래서 동무를 따라 대학에 가려고 이를 악물고 대학시험을 쳤소. 허나 뜻대로 되지 않는구먼. 비록 낙제생이지만 난 효성을 다해 저네 부모를 모시고 덕돌을 낭군으로 잘 받들어 기자로 되려는 뜻을 이루게 하려오.”

덕돌도 감동돼 가슴이 뭉클해났다. 따르는 여자가 많아도 사내대장부도 난감할 때가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처녀들과의 연애 장에서 감정싸움을 하기보다, 아니, 사랑싸움을 하기보다 사내들과 한바탕 싸워 때리고 얻어맞고 터지는 것이 오히려 더 통쾌하고 쉬울 것 같았다. 피를 흘리는 싸움판에서는 영웅호걸이었으나 처녀애들 앞에서는 졸장부라는 말을 들어 싸다. 중학교 시절에 은숙한테 쪽지를 썼다가 경을 친 미열 때문인가? 아니었다. “수호전”이랑 읽으면서 량산박의 호한들은 여색을 멀리했으니까. 그것이 생활의 신조로 가슴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뒤에서 실망에 찬 눈길로 자기를 바래며 흐느껴 우는 듯한 영희를 두고 덕돌도 가슴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어느 날, 향화가 외사촌언니들인 미숙과 미란 지어 화룡에서 온 최송죽까지 데리고 숙사에 찾아왔다.

덕돌은 여동생들을 보자 아주 기뻐 손에서 떼지 않던 소설책을 놓고 그 애들을 데리고 문일 네 집으로 갔다. 문일은 그때 장춘의과대학에 가고 집에는 여동생 영애 밖에 없었다.

덕돌은 다른 여동생들은 시내에서 자주 만났지만 멀리에서 온 송죽은 오랜만에 만난 지라 반갑게 손잡고 인사했다.

“야, 널 아홉 살 때 화룡에 가서 보고는 오랜만에 처음 보는구나. 근형 큰아버지는 편안히 계시니?”

“양? 편안할 새 있소?”

“어째?”

덕돌은 적이 놀라며 물었다.

송죽은 납죽한 얼굴에 생글 웃음꽃을 피웠다.

“아버지는 진수해에서 화룡에 들어간 후 쌀 고생을 얼마나 했다고 그러오? 그래서 토지정책이 바뀐 뒤에 화룡에서도 남쪽으로 한 20리 올라가 있는 남산골에 들어가 감자농사를 지어 만원호로 됐소. 텔레비전방송과 신문에도 굉장하게 났소. 어째 신문에서 보지 못했소?”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럼 시름 놨다. 난 또 앓는가 했다. 그래 만길 형님이랑 천길 형님이랑 다 잘 있니?”

“양, 만길 오빠는 림업국에 들어가 림산작업소 소장을 하고 천길 오빠는 남산 촌 당 지부 서기를 하오.”

“모두 잘 있다니 기쁘다. 어쩌다가 너희들이 몽땅 왔니?”

그제야 맏이 미숙이가 입을 열었다.

“순옥 아재가 너한테 좋은 색시 감을 물색해두었단다.”

“대환영이다. 난 여기 숙사에서 공부하지만 너희들이 있어 외롭지 않아. 난 여동생 부자야, 부자!”

여동생들은 덕돌을 둘러싸고 앉아 “우린 오빠를 제일 좋아해.”라고 하는가 하면 “사내대장부답고.”라고 했다.

지어 “미남자지!”라고 하며 웃고 떠들고 했다.

향화는 덕돌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오빠, 우리 엄마하고 토론하고 오빠한테 좋은 색시 감을 소개해주려오. 생각이 있소?”

덕돌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여자이기에?”

불쑥 한마디 내던지고 덕돌은 속으로 자기를 욕했다.

(엉큼한 놈, 넌 마음속에 영자가 있잖니?)

허나 어떤 여자일가 하는 아득한 호기심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다.

다른 여동생들도 호기심이 나서 물었다.

“어느 대학을 다니니?”

향화는 동문서답했다.

“내 친구야. 키는 1미터 65.”

“와 모델체격이구나.”

애들이 혀를 끌끌 찼다.

“나이는?”

송죽이 묻자 향화는 “19세.”라고 말했다.

“와~ 오빠보다 네 살이나 어리구나.”

미란이 혀를 날름 내둘렀다.

덕돌은 호기심이 부쩍 당겨 향화의 손을 잡으면서 “무슨 대학을 다녀?” 하고 물었다.

“오빠도~ 시내에 남아 우리랑 함께 살겠으면 학벌을 따지지 말아야지.”

덕돌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80년대 대학생이 대학문도 나오지 않은 여자와 약혼해?”

그러자 여동생들은 “와-” 하고 서로 마주쳐다보다가 모여들어 덕돌을 주먹으로 윽박질렀다.

“그럼 대학 문에 들어가지 못한 우리 모두 사람값에 가지도 못해?”

“말해봐!”

“아니다. 아니!”

덕돌은 애들의 구박을 피하며 구들에서 굴러 구석에 숨어버렸다.

“됐다. 너희들을 말하는 게 아니야. 대상 표준을 말하는 거지.”

그쯤 되자 향화는 앵돌아지면서 눈을 곱게 흘겼다.

“싫으면 만나지 마오. 괜히 남의 친구를 괴롭히지 말고.”

향화가 그렇게 나오니 오히려 덕돌은 이모네 호의를 저버릴 수 없어 만나기로 했다.

그날 저녁에 덕돌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향화네 집으로 갔다.

견물생심이라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희미한 텔레비전 빛을 빌어 방안에서 옆에 앉은 훤칠한 10대 청순한 미모의 처녀애를 훔쳐보는 순간 덕돌은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튿날 덕돌은 향화의 소개로 정식으로 영옥이라고 부르는 그 처녀애를 만났다.

한참 후에 그 처녀애를 데리고 향화네 집에서 나와 공원 수림 속으로 갔다. 한 식경이나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나니 영옥을 찬찬히 뜯어 볼 수 있었다.

전날 저녁 희미한 텔레비전 빛을 빌어 볼 때보다 어쩐지 못해 보였다. 훤칠한 체격은 꽤나 특출해 보였다. 그러나 어쩐지 향화보다는 퍽 못해 보였다. 붓긴 듯한 눈덕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차라리 얇은 외까풀눈이면 퍽 매력이 있을 처녀애였다.

허나 덕돌은 원래 훤칠한 여자애들을 좋아하는지라 영옥을 쉽게 놔버리고 싶지 않았다. 숱한 오빠들 속에서 귀한 막내외동딸로 자란 영옥은 꽤나 서적을 쓰면서 애교를 꽤나 잘 부리었다. 꺽다리 같은 처녀애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꽤나 우습고도 재미났다. 지어 귀엽다 못해 웃음이 터져나왔다.

“덕돌아, 어때? 영옥이 마음에 들지?”

순옥 이모가 물었다.

“좀 더 지내봐야겠소.”

후에 그는 영옥을 여러 번 만나보면서도 마음에 확 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 포기하기도 아까운 모순된 심리상태로 해 꽤나 속을 태웠다.

(에라, 모르겠다. 부모들이 자꾸 빨리 한살 위인 영희와 약혼하라고 하는데 한번 집에 데리고 가서 부모와 누나들이 보고 마음에 드는가 보라고 할 판이다. 아무렴, 대학생인 내가 어디 처녀애가 없어 한살 위인 영희와 살아?)

그가 영옥을 만나 “우리 집에 놀러 가보지 않겠니?” 하고 물었다.

그러자 나어린 영옥은 천진할 만치 제꺽 대답했다.

대소한간이라 어쩜 그렇게 날씨도 추웠을까? 그들은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진수해에서 내린 후 쌩쌩 불어치는 칼바람을 맞받아 함흥 촌으로 걸었다.

19년 동안 시내에서 곱게 자란 영옥은 처음 농촌 길을, 그것도 여우도 추워 눈물을 흘릴 맵짠 추위를 무릎 쓰고 시골길을 15리나 걷는다는 것은 난생 처음 걷는 고난의 행군 길이었다.

덕돌은 자기를 따라 온 천진한 영옥이 가엾어 그녀의 손을 꼭 쥐어 자기 외투 호주머니에 넣고 둬 시간 걸어서야 집에 이르렀다.

기별도 없이 불쑥 훤칠한 시내 처녀애를 데리고 들어서자 당연히 부모와 누나 네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떤가 보라고 데리고 갔더니 부모와 둘째누나는 좋다 궂다 평판은 둘째고 첫걸음이라고 돈부터 쥐어 주었다.

“엄마, 누나, 그러지 마오. 난 선을 보라고 데려왔소. 아직  아니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덕돌은 차마 영옥의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 일을 어찌나?)

엄마는 아들이 약혼이나 다 한 것처럼 동네에 나가 며느리 감 자랑을 하고 친척들도 알려 사람을 웃겼다.

덕돌은 찾아오는 친척들을 인사 시키다가 영옥이 아주 어리 궂은 것을 느꼈다. 숱한 사람들 앞에서 다리를 쭉 뻗고 앉거나 벽에 기대 앉아 어른들이 와도 인사할 줄도 잘 몰랐다. 아마 처음 추운 날에 먼 시골길을 걷고나니 다리도 아프고 피곤했겠지만 덕돌의 눈앞에는 안타까웠다.

금방 더워나던 덕돌의 마음이 갑자기 냉각되는 감이 들었다.

(키나 컸지? 셈도 들지 못한 애야. 대학문도 나오지 못했지. 어떻게 저런 녀자와 살아야 해? 송영자보다 차가 많아. 영자는 대학생인데다가 얼마나 예쁘고 여물었다고.)

마음을 정하자 덕돌은 점심을 먹기 바쁘게 영옥을 데리고 귀로에 올랐다. 돌아가는 길에는 그래도 내려가는 버스가 있어 다행이었다. 빨리 보내주고 싶은 덕돌의 마음이라도 아는듯이 버스는 빨리도 달려 두 시간이나 힘겹게 걸어서 온 시골길을 반시간도 안 돼 진수해에 도착해 그들을 부리어 놓았다.

덕돌은 영옥을 버스에 태워 보내주고 한숨을 후 내쉬었다. 시름을 놓았던 것이다.

집에 돌아와 부모와 누나에게 자기 속내를 말했다.

부모와 누나는 맥이 풀려 꾸짖었다.

“마음에 들지도 않은 여자애를 왜 집에까지 데리고 왔니?‘

부모의 말에 뒤이어 둘째누나 은숙도 나무랐다.
“원 저런! 괜히 아까운 돈을 줬다. 올케가 됐나 해서 줬더니. 쯧쯧쯧. 이후엔 마음을 정하기 전엔 절대 여자애들을 데리고 오지 말라.”

그러나 덕돌은 마음에 딱 들지 않는 처녀애와 오래 뒤를 달고도 싶지 않았다. 시내 처녀애를 사다리로 삼아 시내에 기여들기 위해 마음에 들지도 않는 영옥과 가짜로 약혼하고 결혼까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를 봐라. 할아버지가 ‘집안 혼사를 망치겠는가?!’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부명을 어길 수 없어 마음에 들지도 않는 내 어머니와 결혼해 자기와 어머니를 해쳤지 뭐야? 난 결코 그렇게 마음에 없는 약혼, 사랑이 없는 결혼비극을 재연할 수 없다.)

이튿날 집을 떠나 시내에 돌아와 이모와 향화를 찾아가 영옥이가 마음에 들지 않기에 그만 두겠다고 했다. 물론 이모와 향화에게 영옥을 집에까지 데리고 갔다고 욕까지 실컷 먹었다.

덕돌은 숙사에 돌아와 누워서도 한 달 푼히 자기가 무슨 그런 허황한 짓을 했나 생각되자 허구픈 웃음만 나왔다. 이젠 향화네 일가를 볼 면목이 없어 놀러 가지도 못했다.

그럴수록 그는 영자가 그리웠고 영자를 보기 미안해 찾아가지도 못했다.

덕돌은 대상문제로 해 연 며칠, 아니 몇 달이고 고민에 잠겼다. 자기에게 대상에 대한 기준을 정해야 했다.

(그래, 아무렴, 난 대학생이니까 같은 값에 분홍치마라고 우선 어데 내놔도 눈에 환할 정도로 예뻐야 해. 숱한 사람들 앞에 나서도 그래도 내 색시가 눈에 뜨이게 예쁘고 키도 1미터 60은 넘게 훤칠해야지. 물 찬 제비 같은 처녀, 그런 처녀여야 해. 그런 처녀로는 누가 제일 적합한가? 영옥? 아니야. 그 애는 키는 크고 살색도 하얀데 별스레 눈덕이 붓긴 것처럼 미워. 그럼 누가 예뻐? 영자야. 그 앤 정말 자연미에 예술미가 다분한 애야. 물론 영희도 영자보도 못하지 않지. 예쁘고 수양이 있고 효성도 있어 내 부모가 농촌 분이라고 나무라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나이가 한 살 위란 말이야. 봉선도 영희와 마찬가지야. 영희보다 더 나은 점이라면 시내에 살아.)

덕돌은 침실에서 이불을 들쓰고 벽 쪽으로 돌아누워 제 좋은 생각을 계속 했다.

(요즘, 졸업배치를 앞두고 우리 동창생들이 시내에 남으려고 시내 처녀애들과 부랴부랴 약혼하고 결혼하지 않아? 봉선과 약혼하면 부모도 잘 모시고 시내에 남아 기자로 되려는 내 꿈을 실현하기 쉬울 건데. 허나 아무리 이상과 전도가 중하기로서니 연상 여자를 색시로 맞아? 색시는 그래도 나이도 어리고 예쁘고 야드르르한 멋이 있어야지. 나이나 들면 아내가 얼마나 왜버린 풀과 같이 미워? 지금 같아선 봉선과 영희는 나이를 먹어도 예쁠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안 돼. 연상 여자와 약혼 할 수 없어. 순희는 어쩐다? 내 대학에 오게 되자 집에 찾아와서 만년필을 주면서 사랑의 신호를 보내지 않았는가. 그러나 대학시험을 연속 네번이나 쳤는데 다 락방했어. 한족곳 구태현에서 한어로 시험친 게 락방한 주요 원인었지. 순희는 녀동창생일뿐, 농촌 처녀와 결혼할 일은 없어. 여자의 치마폭에 매달려 전도를 개척하려는 건 너무나도 졸장부 처세술이야. 사내대장부로서 기자로 되려는 이상은 글재간으로 실현해야지 뭐야?)

그 쯤 랭혹하게 분석하고 마음이 정해지자 덕돌은 색시 감에 대한 표준이 훨씬 높아졌다. 그만큼 스스로 자기가 어엿하고 당당해지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대학생처녀여야지. 대학생처녀에게 장가들어야지. 너무 예쁘고 수양 있는 처녀라면 중등전문학교 처녀라도 고려할 수는 있지. 부모를 모셔야 하기에 표준을 좀 낮출 수는 있어. 그래도 어찌 대학생이 고등중학생과 함께 살아? 우리 부모 집에 들어설 하나 밖에 없는 며느리는 꼭 효성이 지극하고 수양이 있어야 해. 승냥이 같은 여자를 들여오는 날엔 고생 속에서 한뉘 살아온 우리 부모 어떻게 며느리 눈치를 보면서 살겠어?)

표준을 정하고 보니 상대적으로 영자가 제일 합당해 보였다.

(영자는 대학생이기에 문화도 있고 예술세포도 있는데다가 수양도 있어. 인물체격이 물 찬 제비같이 예쁘고 대나무처럼 훤칠한데다가 나이도 세 살이나 어리지 않는가?)

순간 덕돌은 영자를 보고 싶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나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간 너무나도 맺고 끊지 못하고 숱한 처녀애들과 돌아다닌 것이 마음에 걸리었다.

어느 날, 뜻밖에도 영자가 불쑥 찾아와 극장표 두 장을 내놓았다.

“뭐냐?”

“공연 표요. 내일 극장에서 내 처음 무대에 오르게 돼요. 꼭 와서 보세요.”

영자는 얼굴에 함박꽃 같이 환한 웃음꽃을 피우며 애교 섞인 눈길을 보냈다.

“그래, 가지.”

덕돌은 영자를 숙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배웅해주었다.

갈라질 때 덕돌은 피뜩 “표 두 장이나 해 뭘 해? 누구를 데리고 가겠니?”라고 했다.

“친척을 데리고 가든지 하세요.”

“그런다?”

덕돌은 영자를 붙잡고 뭔가 밤새도록 말하고 싶었다. 허나 내일 공연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에 그만두었다.

“누구를 데리고 간다?”

이튿날 궁리 끝에 덕돌은 해옥 아재를 데리고 극장으로 갔다. 해옥은 덕돌의 고모사촌누나였다. 허나 덕돌은 해옥을 아재라고 불렀다. 엄마의 친사촌여동생이기에 아재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편했던 것이다. 황차 해옥 아재의 맏아들 문일은 덕돌과 근근이 두 살 지하였으니 말이다. 그날따라 해옥은 병원에 가지 않고 쉬고 있어 공연이 있다고 하니 덕돌과 함께 구경하러 갔다.

예술학원의 학생들이 공연을 하는데 꽤나 볼만했다.

은은한 도라지 음악에 맞춰 학생무용수들은 여러 가지 조명색등이 명멸하는 무대에 올라 한복을 날리며 학처럼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문화대혁명시기 본보기극 “홍등기”를 보기보다 음악과 무용이 우리 민족의 특성에 맞아 얼마나 가슴이 뭉클하게 즐거운지 몰랐다. 아재는 걸상에 앉아 곡에 맞춰 몸을 흐느적거리었다. 그러는 아재를 보고 덕돌도 속으로 아재를 기쁘게 해드린 것 같아 즐거웠다.

더구나 연분홍 진달래꽃을 품에 안은 영자가 군복치마저고리 바람으로 무대에 올라 항일유격대 역을 하며 “장백의 진달래” 노래를 부를 때 덕돌은 그 우아한 노래 소리에 도취돼 눈을 스르르 감고 감상했다. 그러다가도 눈을 뜨고 예쁜 영자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장차 예술무대에 올라 나래치는 저명한 가수이자 무용수의 모습을 방불히 보는 상 싶었다.

영자가 백조의 차림으로 서양악곡에 맞춰 발레를 추는 예쁜 모습을 보며 흥분된 덕돌은 저도 몰래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냈다.

옆에서 구경하던 해옥은 덕돌을 마구 끌어당겨 앉혔고 관중들은 무슨 일인가 해 덕돌을 쳐다보며 눈을 흘겼다…

그 뒤 웬 일인지 몇 달 동안 영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덕돌은 예술학원으로 찾아갈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만 두었다. 괜히 영자에게 연애한다는 악영향을 줄까봐 서였다.

어느 날, 반장 운호가 또 편지 한 장을 건넸다.

“웬 처녀한테서 온 편지 같아.”

덕돌은 편지를 받아보고 영자의 편지라는 것을 대뜸 알아보았다. 그는 황급히 세면실로 가서 혼자 편지를 뜯어보았다.

“오빠, 모든 것이 끝났어요…”

 

“아니, 끝이라니?”

덕돌은 세면실에 동창생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 편지를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교수 청사 뒤 산 소나무 숲속에 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영자의 눈물로 얼룩진 편지를 꺼내들었다.

 

“너무 놀라지 말고 끝까지 읽어주세요.”

 

공연무대에 오른 뒤 어느 날, 밤늦어 영자가 무용실에서 무용연습을 할 때다. 진작부터 눈독을 들인 무용교원이 군침을 흘리면서 그녀의 어여쁜 모습을 게걸스레 훔쳐보았다. 어깨 너머로 늘어뜨린 함치르르한 머리카락, 외씨같이 걀쭉한 얼굴, 흑진주같이 까만 포도 눈, 가늘고 하얀 목, 착 들어붙은 무용적삼 밑에서 달랑거리는 봉긋한 젖가슴, 야드르르하고 백설 같은 허벅다리…

(오- 실로 보기 드문 선녀야! 사람을 막 미치게 만드는데.)

무용교원은 하마터면 미의 여신 같은 은희의 육체미에 그만 소리치며 감탄할 번해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으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면서 점잖게 무용연습장에 들어섰다.

“영자, 영자는 참 나리꽃처럼 예쁘오. 전도가 있어.”

“선생님, 많이 가르쳐주세요.”

무용선생은 무용을 가르치는 척 하면서 영자의 허리를 안고 허벅다리를 매만지기도 하고 엉덩이를 툭툭 치기도 하며 성희롱을 했다. 정욕에 불타는 무용선생의 음충스러운 눈길은 영자의 몸에서 떨어질 줄 몰랐고 거친 숨소리가 점점 높아갔다.

“영자, 진정한 예술은 성해방이요. 여자애들이 스승과 책임자에게 자기 성을 해방해야 예술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소. 알만하오? 전 번에 누구 덕에 무대에 올랐는지 아오?”

무용선생은 은희를 품에 숨 막힐 듯이 꽉 껴안고 잔등을 매만지면서 감언리설로 꾀였다.
      “영자는 전도가 창창하오. 모든 건 자기에게 달렸소. 예술의 무대에 올라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면서 이름을 날리자면 자기를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하오. 은공을 갚을 줄 알아야 하오.”

그 놈은 영자가 뿌리치는 것도 무릅쓰고 문을 절컥 닫아걸고 전등까지 꺼버렸다. 그는 무용선생의 본능으로 아주 날래게 승냥이가 양을 덮치듯이 영자를 붙잡아 깔아뭉갰다. 영자가 아무리 그 놈을 떠밀며 소리를 치려고 했지만 입마저 죄악의 마수에 틀어 막혔다.

“소리쳐봐라! 소문나면 넌 전도가 끝장나.”

어둠 속에서 그녀의 귀전을 때리는 무서운 악마의 징글스런 소리.
영자는 몸부림치고 발버둥 치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무용연습실에는 그 놈의 거친 숨소리와 영자의 가는 울음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거칠게 톱질했다…

 

“오빠, 저를 잊으세요. 전 처녀의 모든 것을 악마에게 빼앗겼어요. 저는 오빠의 맑은 눈길을 대할 면목이 없어요. 어쩌면, 세상이 이런가요? 저를 다시 찾지 말아요. 저는 한 많은 망아산 기슭에서 영영 사라지겠어요.”

 

“야- 칼 탕을 쳐도 원수를 하지 못할 놈아, 누구냐? 대체 누구야?!”

덕돌은 주먹으로 소나무를 꽝꽝 치며 갈 범처럼 날뛰며 고함쳤다. 드디어 분노에 언 얼굴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영자, 어디로 갔소? 남방으로 갔소? 한국으로 갔소? 어, 허, 헉, 헉, 헉.”

한참 후 정신을 차린 덕돌은 눈물로 희미한 눈앞에 방불히 보는 듯 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영자가 소나무숲 속의 눈보라 속에서 생글방글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자기에게로 훨훨 날아오는 것을.

어디에선가 쓸쓸한 사랑환상곡이 은은히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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