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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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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항일전쟁시기 조선지사들
2012년 09월 18일 18시 51분  조회:6242  추천:2  작성자: 김성룡

완평성 담밑의 경종석에는 중국을 침략한 일군의 만행이 적혀있다
 
 
1937년 “7.7”사변을 통해 일본은 중국대륙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발동하였고 중국인민의 전면항전도 개시되였다. “7.7”사변때 로구교를 수비하면서 가장 먼저 일본침략군과 싸운 중국군에는 일찍 중국의 여러 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장병들이 많았는데 이들도 중국군민과 함께 처음부터 정면전장에서 일본침략군에 맞써 용감히 싸웠다.

북평에서 반일활동에 종사하던 김자렬(1897~1961)은 1924년에 리대소의 소개로 풍옥상 장군의 국민군 간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졸업한후 북벌과 중원대전에 참가하였다. 그는 장자충장군의 수하에서 180사단 참모장을 맡았었다. 항일전쟁이 시작된후 그는 부대를 따라 로구교항전에 참가했을뿐만 아니라 대아장전역, 서주전역에 참가했고 또 조양, 남과점 전투에도 참가했다. 장자충장군이 순국한후 그는 부대를 떠났다. 풍옥상의 서북군에는 김자렬외에 또 강석훈(1896~?)이라는 조선인 군관이 있었다. 그는 29군 113려단 소좌부관으로 있었다. 1937년에 그는 랑방에서 228퇀 기관총련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많은 적을 소멸하였다. 그후 그는 림기, 사자령 등 전투에 참가하여 대아장 전역의 승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중국의 전면항전이 개시된에 |따라 국공량당이 항일통일전선을 결성하였다. 이는 중국내 조선의 여러 당파들의 단합을 촉성하였다. 1937년 11월, 조선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를 동조하는 좌익당파들이 남경에서 조선민족전선련맹을 결성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무한보위전의 포성이 울부짖는 가운데 중국 관내 조선민족의 첫 무장대오인 조선의용대가 정식 창립되였다. 조선의용대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소속되여 조선의용군 지도위원회의 령도를 받았다. 지도위원회는 4명의 중국관원과 조선민족혁명당을 대표하는 김원봉,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대표하는 김규광, 조선청년전위동맹을 대표하는 김학무, 무정부주의자 류자명으로 구성되였다. 의용군 창립시 대원수는 120명이였다. 김원봉이 총대장을 맡고 산하에 두개 구대를 설치하였는데 1구대 구대장은 박효삼이고 정치지도원은 왕통이였으며 제2구대 구대장은 리익성이고 정치지도원은 김학무였다. 이듬해 대오는 한배 더 늘었기에 제3구대를 설립하였는데 구대장은 한지성이 맡았다. 조선의용대는 창립후 곧 무한보위전에 참가하여 선전, 구조, 정보수집을 비롯한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 부분은 중국의 유명한 문인 곽말약의 <홍파곡>에서 일부 언급된다.

무한이 함락된후 조선의용대 대원 대부분은 여러 전구에 나뉘여 적정을 수집하고 일본군 정보를 해독하였으며 포로를 심문하고 항전을 선전하는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국민당이 중경으로 천도하자 조선의용대 본부와 한국 림시정부가 령도하는 여러 조선인 당파들은 모두 광서 계림을 거쳐 중경으로 갔다.
 

무한에서 창립된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상해 로신공원(홍구공원)의 윤봉길 의사 의거지 기념석


남경근교의 천녕사(조선혁명군정학교가 있었던 곳)


한국 림시정부 주석 김구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


중경시 기강현 실험소학교(7당 통합대회가 있었던곳)
 
 
항일전쟁시기 김구가 령도한 한국 림시정부는 국민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1932년 4월 29일, 김구가 이끄는 애국단 성원 윤봉길이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파견대 사령 시라가와 대장, 상해 일본 거류민 단장 카와바다를 폭사하였다.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있은후 국민당과 장개석은 김구와 한국 림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하였으며 한국 림시정부가 추천하는 조선청년들을 여러 군관학교에 받아들여 학습하고 훈련하게 하였다.

장객석은 중경부근에 도착한 김구와 한국림시정부에게 조속히 통합대회를 소집할것을 요구하면서 통합되여야만 더 확실히 지원할수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여러 당파들은 중경부근의 기강현에 모여 통일대회를 열었다. 좌파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련맹, 조선청년전위동맹,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한국 국민당, 한국 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7당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치렬한 변론을 진행했지만 끝내 합의를 보지 못했다. 장개석의 거듭되는  촉구하에서 좌파 수령 김원봉과 우파 수령 김구는 1939년 5월에 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협력과 단합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국민당정부의 수락을 받고 중경에 한국림시정부 사무기구를 두고 한국 광복군을 창건하기도하였다. 하지만 사실 중국내 조선 여러 당파들은 줄곧 진정한 단합을 이루지 못했다. 유감이 아닐수없다.
 
1941년 1월 1일 조선의용대 부총대장이며 제1지대 지대장인 박효삼과 정치 지도원 윤세주가 1지대와 3지대 대원들을 거느리고 민생호 륜선을 타고 중경을 떠나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갔다. 그들은 주은래와 중경 팔로군 판사처의 도움을 받았기에 순조롭게 한국 림시정부와 중국국민당을 떠나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을 찾아가게 되였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장강삼협을 지나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갔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2차 대회가 있었던 곳(하북성 섭현)


조선의용군 주둔지(하북 섭현)


조선의용군 무명렬사묘지를 지킨 현지 로인


대적구호를 쓰고있는 조선의용군 대원


대적 함화를 하고있는 조선의용군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
 
조선의용대는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도착한후 조선청년련합회를 조직하고 조선청년 혁명학교를 꾸렸다. 1942년 7월 14일, 하북성 섭현 중원촌에서 조선청년련합회 제2차 대회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화북조선독립동맹을 창립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였다. 이때로부터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독립동맹 당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되였다. 김두봉, 무정, 최창익, 박효삼, 김학무, 채국번이 독립동맹 본부 집행위원을 맡고 김두봉이 집행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무정은 조선의용군 사령으로 박효삼은 화북지대 지대장으로 임명되였는데 이때 대오는 2백여명이였다. 태항산에서 조선의용군과 파로군은 어깨겪고 싸우면서 적후 선전활동, 반포위 토벌투쟁을 진행하였다.
 
1942년 12월 11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대는 대장 김세광의 인솔하에 하북성 석가장부근의 원씨현에 가서 선전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호가장에서 군중집회를 열고 항일투쟁을 선전하였다. 대원들은 강연을하고 시사보고를 했으며 또 군중들에게 춤과 노래를 선보이기도하였다. 그리고 담벽에 선전표어를 써놓았다. 하지만 이날 밤 그들은 뜻하지 않게 백여명 일본군과 괴뢰군의 포위습격을 받았다. 김세광 대장은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 김학철을 거느리고 대원들을 엄호하면서 철수하였다.

손일봉은 탄약이 떨어지자 덥쳐드는 적을 기다렸다가 수류탄을 터쳐 7,8명 적을 소멸하고 희생되였다. 총칼로 적과 싸우던 박철동은 마지막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적의 총칼에 찔려 희생되였다. 한청도 역시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수류탄을 터치며 희생되였다. 이와 같이 엄호를 맡은 대원들이 영용하게 잘 싸웠기 때문에 대부분 대원들은 마을을 빠져나와 지원하려 달려온 팔로군과 회합할수있었다. 
팔로군의 백퇀대정은 일본침략군에게 침중한 타격을 주었다. 실패를 달가와하지 않는 일제는 1942년 5월에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대한 미친듯한 포위토벌을 감행하였다. 적 선견대는 현지 백성으로 분장했기 때문에 쉽게 근거지에 접근해 팔로군 전선총부가 있는 료현으로 공격해왔다. 상황은 아주 위급했다. 팔로군 본부 참모장 좌권은 팽덕회 부총사령원과 전투력이 없는 천여명 후근일군을 신속히 대피시킨후 직접 경위부대와 조선의용군을 거느리고 적을 막고싸웠다. 조선의용군 박효삼 대장은 백여명 대원들을 거느리고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면서 수차 적을 물리쳤다. 이들은 싸우는 한편 점차 십자령부근으로 철수하였다. 전투는 점점 더 치렬하였다. 적은 비행기까지 동원해 십자령부근을 무차별 폭격하였다. 그리하여 팔로군 참모장 좌권이 폭격에 희생되고 경위부대와 조선의용군은 분산 철수하였다. 철수도중 조선의용군의 주요 간부 진광화와 윤세주도 장렬히 희생되였다.

전투가 끝난후 성대한 장례식이 있었고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는 섭현의 좌권장군 묘소와 얼마떨어지지 않는 해빛밝은 언덕에 안장되였다.


호가장 전투가 있었던 원씨현 혹장마을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의 묘소(태항산, 하북 섭현)


조선의용군 기념관의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 사적소개(하북 섭현)


조선의용군이 남긴 대적구호, 아직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하북 섭현)
 
 
항일전쟁시기 혁명성지 연안은 줄곧 전국 혁명지사와 뜻있는 청년들이 지향하는 곳이였다. 조선청년들도 다투어 연안에 갔는데 거기에는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창작한 인민의 음악가 정률성(1918~1976)도 있었다.

정률성의 맏형 정효룡과 둘째형 정충룡은 일찍부터 일경의 눈을 피해 중국에 건너와 중국혁명에 참가하였으며 공산당에 참가하였다. 맏형은 투쟁중 불행히 일경에게 체포되여 옥사하였고 둘째형은 국민혁명군에 참가하여 북벌전쟁에서 희생된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정률성의 셋째형 정의은도 조선의렬단의 성원으로 있었다.

형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정률성은 1933년에 중국남경에 와서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졸업후 그는 진보적인 “5월문예사”에 참가해 자기의 예술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상해와 남경에서 정률성은 오랜 조선혁명가 김규광, 김산, 박건웅을 알게 되였다. 그의 누나 정봉은은 박건웅과 결혼하기도하였다. 항일전이 본격 발발한후 정률성은 1937년에 김규광, 박건웅 등의 도움으로 얀안에 가게 되였다. 연안에서 그는 로신예술학원을 다니면서 “연안송”, “팔로군 대합창”을 창작하였다. 이 가운데 팔로군 대합창의 “팔로군 행진곡”은 해방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지정되였다.
 

항일전쟁시기 연안을 찾아오는 열혈청년들


음악가 정률성


연안 라가평의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 기념비
 
1944년말, 연안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본부는 중국내 조선인을 단합시켜 일제와의 최후의 결전을 치르고 항일전쟁 승리후 아름다운 조선을 건설하기 위한 정치과 군사인재를 양성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연안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세우기로하였다. 태항산항일근거지의 2백여명 조선의용군 대원들은 박효삼을 따라 연안에 도착해 연안의 조선청년들과 회합하였다. 이어 전국 여러 항일근거지에서도 조선청년들이 속속 연안에 모여왔고 쏘련에서 륙학하고 돌아온 주덕해, 주춘길, 방호산등과 함께 조선혁명군정학교 건교를 준비하였다.

1945년 2월 5일, 조선혁명군정학교 창립대회가 연안 라가평에서 성대히 거행되였다. 주덕과 서특립이 경축대회에 참가하였다. 조선혁명가 김두봉이 교장을 맡고 박일우가 부교장을 맡았는데 학교 학원수는 280여명이였다.

이시기 각지 조선혁명력량은 모두 독립동맹 분맹과 군정학교 분교의 이름으로 발전되고있었다. 팔로군 제1임 포병퇀장 무정이 령도한 태항산 조선혁명군정학교 학원수는 293명에 달했고 독립동맹 산동분맹의 리명이 령도한 조선혁명군정학교 산동분교 학원수도 200명에 달했다. 그리고 진찰기분맹 리대성이 령도한 조선의용군은 백여명이나 되였고 신사군쪽에도 화북항일군정대학 제5분교 왕신호(김웅)가 령도한 백여명 조선의용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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