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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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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장춘쟁탈전 상편
2016년 09월 06일 20시 14분  조회:4662  추천:0  작성자: 김성룡
1946년 2월에 쏘련군의 철수 문제가 첨예하게 제기되였다. 이때는 장개석도 대량의 정예군을 동북에 진입시켰기때문에 쏘련군의 철수를 더 지연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과 영국정부의 촉구도 심해졌다. 미영정부는 쏘련은 주둔기한을 연장한 기회를 빌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북의 공업 원자재와 각종 공업설비 그리고 괴뢰만주국정부시기 은행비축금을 자국으로 수송해가고있다고 지적하면서 조속히 쏘련군을 동북에서 철수시킬것을 촉구했다.

이 무렵 “얄따회의”개최 1주년을 기념하면서 회의기간의 비밀협의내용이 세상에 공개되였다. 중국의 리익에 손상을 준 이 협의내용이 공개됨으로하여 쏘련을 반대하는 전국적인 항의활동이 진행되였다. 더는 틀고앉아 있을수 없게 되자 쏘련정부는 1946년 3월부터 철군하기 시작했다. 불만이 가득한 쏘련군은 국민당과 아무런 소통도 하지 않고 행장을 수습해 훌쩍 떠났다. 3월 12일 심양을 내놓고 13일에는 사평을 내놓았다. 

수십만 정예군이 동북에 발을 들여놓자 장개석은 미국정부의 조절관원인 마셀에게도 좋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동북은 이미 국민당의 천하라고 생각한 그는 공산당과의 평화담판을 극구 거부해 나섰다. 줄곧 중국의 평화담판을 조률해오던 마셀도 할수없이 3월 11일 어두운 표정으로 귀국해 버리고말았다. 장개석의 평화담판의 가면은 드디어 백일하에 드러났다.

동북에 진입한 국민당 정예군은 심양을 점령해 본거지로 만든 다음 주변의 도시들을 점령하고 계속 북진해 사평으로 공격하려 시도하였다. 하지만 남만의 동북민주련군 3종대와 4종대는 본계를 중심으로 적의 공격을 유력하게 견제하고있었고 쏘련군의 철수와 함께 황극성이 부대를 거느리고 신속히 전략적 요새인 사평을 점령하였다.

공산당 동북국의 림시거처인 무순에 있던 림표는 신속히 새로운 작전방안을 구상해냈다. 그는 서만군구(西满军区) 주력을 사평에 모이게 하고 길료군구의 라화생(罗华生), 하경적(贺庆积), 등극명, 조리회(曹里怀)의 4개 려단을 장춘주변에 집결해 장춘을 해방할 준비를 하게 했으며 북만의 주력부대를 사평으로 남하하게 하고 359려단은 할빈주변에 포진하게 했다.

 

 

1차 사평공점 전술도표

 

1946년 4월부터 국공량당의 주력부대는 사평주변에서 치렬한 쟁탈전을 시작하였다. 동북 한복판에 놓인 사평은 교통요도이고 전략적 요새로서 동북을 차지하려는 국공량당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였다. 쏘련군이 사평에서 철군하자 민주련군 황극성 부대가 사평에 진입해 국민당 접수관원을 축출하였다. 그후 민주련군 사령부는 동원할수있는 각 야전군 주력을 사평부근에 집결시켰다. 한편 국민당은 정예군을 몰아 사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평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남만에서는 3종대와 4종대가 본계를 중심으로 국민당 주력부대를 견제하고있었고 동만과 북만의 부대는 정력을 집중해 장춘과 할빈, 치치할을 공격함으로써 사평의 아군을 유력하게 지원하였다.

 

90만 인구를 가진 장춘시는 일제통치시기의 괴뢰만주국 정치, 경제, 군사 중심지로서 신경(新京)이라고 불렀다. 일제가 패망한후 장춘을 접수한 국민당은 괴뢰만주국 군인으로 제2총대와 제4총대를 편성하였고 각지의 15개 경비대대, 한개 기병대대, 5개 경찰중대 그리고 일본군 잔여세력을 긁어 모아 그 병력이 2만여명에 달했다. 특히 한간 강붕비(姜鹏飞)가 지휘하는 제2총대의 한개 사단인 “철석(铁石)”부대가 전투력이 강했다. 이 부대의 전신은 일본관동군 (铁石)소장이 조직한 경비부대로서 많은 중국군민을 살해한 죄악의 부대였다.

동북민주련군 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길료군구의 전부 주력이 동원되여 장춘을 포위하고 1946년 4월 14일부터 장춘공격전을 개시했다. 북만에서 남하한 양국부(杨国夫)의 3개 려단으로 편성된 서남종대(西南纵队)는 서남방향으로부터 장춘을 공격하고 조리회(曹里怀)가 거느린 길림, 장춘부근의 부대로 편성된 동북종대(东北纵队)는 동북방향으로부터 장춘을 공격했으며 하경적(贺庆积)이 거느린 경비 1려 1퇀, 2려 5퇀, 24려 71퇀으로 편성된 동남종대(东南纵队)는 동남방향으로부터 장춘을 공격했다. 특히 동남종대의 경비 1려 1퇀은 조선의용군과 연길보안퇀을 바탕으로한 조선족퇀으로서 박락권이 퇀장을 담임하였고 당시 부대번호는75퇀이였다.

1946년 4월 14일 새벽녘에 장춘을 공격할 모든 부대들이 출발지점에 도착하였다. 이날 오전 국민당은 쏘련군으로부터 장춘시정부 행정권을 넘겨받았고 쏘련군 마지막 렬차는 점심에 장춘을 떠났다. 국민당 군정관원들이 장춘을 장악한것을 축하하고있을때 뜻하지 않은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군 3개 종대가 세개 방향으로 장춘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던것이다.

동남종대는 이도하자(二道河子), 남령(南岭)부근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동남종대 70퇀은 경비 2려 5퇀을 개편한 부대로서 적 한개 중대를 물리치고 장춘동역을 점령하였고 71퇀은 남령의 몇개 거점을 공점했다. 이때 75퇀인 조선족퇀은 이통하를 건너 정수공장을 거쳐 곧추 진격하였다.

 

이도하에 새롭게 부설된 장춘대교

 

조선족퇀 2영 6련 지도원이였던 김응삼 로인은 답사팀과 함께 장춘시 여러 전적지를 다니며 당시 전투상황을 소개했다. 

“…저쪽으로부터 진공이 시작되였는데 그때 이런 다리가 없고 다리가 있어도 간단하고 좁고 요런데를 건넜는데 여기에도 포로를 많이 했습니다. 첫 방어선입니다. 우리는 각종 기관총이요 박격포의 엄호밑에 공격하니까 적은 한시간이나 될까 대항하다가 철수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전쟁이 여기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첫 방어선을 한시간도 못되여 돌파하고 저기 빨간 집 저기 앞에까지 나갔지요.”

  

장춘대학, 괴뢰만주국시기 건국대학이다. 이곳은 북으로 시중심에 이르는 인민대가(人民大街)의 첫 시작이기도 하다. 인민대가는 당시 쓰딸린대가로 불리운 장춘시 남북 주요거리로서 거리 량켠에 콩크리트와 각종 암석으로 축조한 견고한 건물이 많았다. 외곽전투를 마치고 공격하던 조선족퇀 1영은 이 부근에서 치렬한 접전을 치렀다.

 

건국대학이 있었던 자리(오늘의 장춘대학)

건국대학 부근의 원 정수공장 자리

 

1영 1련과 2련, 퇀직속 기포련이 일제히 엄호사격을 할때 3련은 신속히 건물에 붙어섰다. 전사들은 십여개 수류탄을 각반으로 한데 묶어서 벽을 폭발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수차 폭발하자 사람이 드나들수있는 크기만큼 구멍이 생겼다. 전사들은 그곳으로 밀고들어가 1층의 적을 소멸하고 신속히 2층 계단으로 공격했다. 적은 모든 화력을 계단에 집중하여 아군은 머리를 들수없었다. 이때 3련 박희선(朴熙善) 련장이 나무나 짚 같은것을 얻어다 불을 달아 련속 계단에 던졌다. 자욱한 연기에 휩싸여 적이 눈을 뜨지 못하는 기회를 리용해 전사들은 벼락같이 돌진해 적 수십명을 생포하고 건국대학을 점령했다.

건국대학과 정수공장을 점령한후 동남종대 조선족퇀은 계속 쓰딸린거리를 따라 북상하면서 싸웠다. 적은 대륙과학원 건물과 석탄주식회사 숙소건물에 방어진을 치고 악을 쓰고 저항했다. 치렬한 건물 쟁탈전과 시가전이 벌어졌다.

 

지금의 중국과학원장춘응용화학연구소는 괴뢰만주국시기 대륙과학원이였다. 연구소 주건물은 외벽을 다시 수선하고 장식했을뿐이지 옛 건물 그대로이다. 당시 이곳은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과학원으로서 지면 2층 지하 1층으로 되여있다. 200명 적이 화강암으로 된 견고한 이 건물 주변에 철조망과 록채(鹿砦)를 설치하고 지붕에는 모래주머니를 쌓아 방어진지를 구축해 놓고있었다. 조선족퇀3영이 이곳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괴뢰만주국시기 대륙과학원이였던 중국과학장춘응용화학연구소

 

조선족퇀 3영 8련 1패 1반 전사였던 김병욱 로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다소 알수있었다.

“4월 13일에 어디도착했는가면 장춘남쪽에 도착했습니다. 우린 동남부대에 편입되였습니다. 동남부대가 되여가지고 수도공장을 지나 진공해 들어가는 판이였습니다. 건국대학 지나서 그래 어디까지 갔는가면 대륙과학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아주 완고한데지요. 견고한 건물이고 철조망하고 전기철망 휘둘렀지.… 이를 쳐야하는데 임무는 다른련에 다 내리고 우리에겐 차레 없었습니다.… 철조망을 뚫기 위해 뒤에서 엄호하는 부대가 포로 길을 헤치는데 적의 화력이 어찌나 센지 몇개 련이 전진하다가 다 후퇴했습니다. 우리 8련이 임무가 떨어져 갔는데 마침 살데를 만났는지 포격에 문이 확 마사져 열려 거기로 적의 시체를 밟으며 들어갔습니다. 1층까지 들어갔습니다. 수류탄을 암만 뿌려야 적이 구석구석 다 숨는 판인데 쉽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우리 반은 적 30명을 생포했습니다. 그리고 련장의 명령에 따라 포로를 후송해갔지요. 대륙과학원은 포를 어찌나 많이 쐈는지 불이 붙었습니다.”

 

적아쌍방은 치렬한 화력제압 싸움을 진행했다. 그러나 적이 우에서 아래로 사격하기때문에 아군은 적의 화력을 제압할수없었고 폭파수나 돌진하려던 전사들은 머리를 들수없었다. 수차 공격했지만 안되자 동남종대 부사령원 오항부(吴恒夫)가 사령원 하경적(贺庆积)에게 전화를 걸어 포병지원을 요구했다.

동남종대의 포병은 삽시간에 건물 지붕우의 진지와 건물앞 철조망을 다 날려버렸다. 대문도 포격에 박살났다. 대기하고있던 전사들은 신속히 건물에 접근해 수류탄과 폭파물로 적의 화점을 까부셨다. 건물 웃부분이 불타고있었기에 적은 아래로 내려오다가 시퍼런 날창을 꼬나들고 돌격해 들어온 우리 전사들을 보자 겁을 먹고 무뤂을 꿇었다.

조선족퇀 3영 전사들은 전투가 끝나자 포로를 후송하는 한편 건물의 불을 끄고 건물실험실의 소중한 의기와 표본을 꺼내면서 싸움터를 정리했다.

한편 3영과 병행하여 쓰딸린거리 북쪽으로 공격하던 조선족퇀 1영과 2영도 치렬한 시가전을 치르고있었다. 김응삼 로인의 소개다.

“15일 아침 5시부터 공격했는데 적은 고층건물을 리용하고 십자거리에는 보루를 만들어 대항했습니다. 그때는 건물이 많지 않고 여기 4월이니 지금은 나무잎이 큰데 그때는 갓 나무잎이 싹이 트기 시작했단지요. 앞을 보니 환하지뭐. 그러니 진공부대가 진공하다니 자꾸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사망자가 번번한 곳으로 진공하다가는 많이 쓰러졌습니다. 전투에서 우리 박락권 퇀장이 이분이 싸움에서 아주 용감합니다. 항일련군 출신인데 쏘련홍군이 나올때 같이 나온분입니다. 어떤 말을 좋아하는가하면 ‘요또 마이치’ 로씨야어로 쌍놈이라는 뜻인데… 망원경으로 우리부대 돌진하는걸 보다가 박격포, 중기관총 화력엄호를 지휘하다가 적탄에 맞아 희생되였습니다.”

전투는 시작부터 백열화 되였다. 구석구석 또치까가 설치되였고 건물마다에서 총알이 비오듯 했다. 돌격하던 전사들이 련거퍼 쓰러지는것을 보던 박락권 퇀장은 화력엄호를 맡은 6련진지에 와서 직접 중기관총 화력을 지휘하였다. 그가 허리를 펴고 망원경으로 적의 화력을 관찰할때 뜻하지 않게 적의 총알에 명중되였다.

 

조선족퇀 1영 1패 1반의 전사였던 장덕만 로인은 박락권 퇀장이 총에 맞던 과정을 이야기했다.

“들이밀어 시내 옆에 들어붙었습니다. 9시가 될때 내밀기 시작했는데 시내의 건물들은 다 일본 관사입니다. 박퇀장이 싸움해서 그날로 총에 맞았습니다. 내 앞에 사택에 있구 박퇀장은 2영 교도원과 말하느라구 같이 있구 그랬는데 총알이 련속 날아와 집 모서리 벽돌이 탁 튀였고 동시에 박퇀장도 총에 맞았습니다.”

 

 

로전사 장덕만, 당시 조선족으로 구성된 75퇀 1영 1련 1패 반장으로서 동만토비숙청과 장춘쟁탈전에 참가

 

장춘쟁탈전에서 희생된 박락권 퇀장

 

박락권 퇀장이 쓰러지자 경위원들이 다급히 그를 구호하였고 얼마후 전지(战地)구호대 녀성들이 달려왔다. 구호대의 조영희(赵英熙), 최하진, 윤순자, 림정옥, 원정선, 유창덕 등 수많은 조선족 녀성들이 포화를 무릅쓰고 전선에서 뛰고있었다. 통신원이 달려와 박락권 퇀장이 부상했다고 하자 조영희와 최하진은 만사 제체놓고 뛰여갔다. 그들이 비발치는 탄우속을 헤집고 일본인 주민구에 도착했을때 박퇀장은 이미 의식을 잃고있었다. 그들은 먼저 지혈시키고 상처를 싸맨 다음 포를 끄는 마차에 싣고 급급히 후방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상처가 너무 위중한데다 피를 많이 흘렸기때문에 박퇀장은 더 견지하지 못했다. 그는 품에 간직한 군공메달과 증서를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전해달라는 부탁을 남기고는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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