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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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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의렬단 투쟁과 중국공산당 창건
2007년 06월 10일 07시 15분  조회:4192  추천:64  작성자: 김성룡

   1919년 조선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이 일어나 더욱 많은 사람들이 반제반봉건 투쟁을 선호하였다. 특히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가혹한 침략과 수탈을 받고있는 조선 지사들의 반일 투쟁은 더욱 치렬하였다. 이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진행된 반일유격투쟁과 곳곳에서 작탄을 터쳐 일제의 간담을 써늘하게 한 의렬투쟁이였다.

   1919 11 10일 중국동북 길림성내에서 의렬단이 창단된다.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자”는 취지로 조직명칭이 의렬단으로 되었고 단원들은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3.1운동을 계기로 조선 국내에서 반일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수많은 의사들이 중국내에 집결되였다. 무력항쟁을 위한 군대양성을 목적으로 한 중국 동북의 신흥무관학교(新兴武官学校)의 학생들이 중추가 되여 약산(若山) 김원봉(金元凤)과 함께 의렬단을 창단하게 된다. 김원봉은 남방에서 파견한 중국인 주황(周况)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에 가서 주황에게서 폭탄제조기술을 배우는 한편 리종암(李锺岩), 리성우(李成宇), 서상락(徐相洛) 8명 단원을 확보했다. 여기에 국내 밀양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제의 판결을 받고 중국으로 도주한 윤세주(尹世胄)를 비롯한 몇 명이 가담하여 도합 단원 13명이 확보 되였다.  

의렬단원들은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의로운 피”를 흘리려 한 열혈 남아들이였다. 일제식민통치자들을 상대로 폭탄이나 총기를 사용해 파괴와 암살을 진행하는 것이 이들의 행동방법이였다. 그들은 일제 식민통치 기관과 기구, 폭압기구를 남김없이 파괴하고 일제 요인과 민족반역자를 암살, 응징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 기반을 무너뜨리려 했던 것이다.

   창단후 김원봉은 의렬단 본거지를 북경에 옮기고 단재 신채호의 반 림시정부 성토문을 적극 지지하였다. 김원봉은 신채호가 기초한 리승만 성토문의 54인 서명자 중 한명일뿐만 아니라 이들 서명자 가운데서 김재희(金在喜), 송호(宋虎), 오성륜(吴成伦), 최용덕(崔用德), 정인교(郑寅教) 등을 의렬단에 받아들여 참모진을 구성한다. 그뒤 김원봉은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의렬단 행동강령으로 확정하고 모든 타협주의를 반대하면서 오직 폭력적 대중혁명을 주장하였다.

   20년대 의렬단은 선후하여 밀양(密阳), 진영(进永) 폭탄반입사건, 부산,밀양 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도쿄 니주바시(二重桥) 폭탄의거, 상해 황포탄(黄浦滩) 의거 등 의렬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도처에서 진행된 의렬투쟁은 일본침략자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을뿐만 아니라 동방 피압박 민족의 항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상해의 황포에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배들이 쉼 없이 오고갔다. 황포강을 사이두고 서쪽은 20세기 초엽 상해의 번화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많은 옛 건물들이 고스란히 보존 되여 있다. 대부분 회색의 서양식 돌 건물들이다. 강을 사이두고 포동(浦东)지구의 번창한 모습이 오늘의 상해 황포탄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고 있다. 멀리 하늘을 박차고 선 동방지주(东方之珠) 방송 송신탑이 있고 그 주변에 현대식 빌딩이 숲을 이루고있었다.

   20세기 20년대 의렬단의 황포탄 의거 유적지가 옛날 세관자리였다. 답사팀은 세관청사 옛 건물을 찾아 외탄을 거닐었다.

 

(외탄에서 만난 행인) 이곳에서 연변의 조선족 동포들을 만나니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상해지식청년입니다. 여기가 바로 당년의 회풍은행이고 그 옆이 바로 세관청사입니다. 해방이전과 똑 같습니다. 옆이 푸른 지붕인 건물이 평화판점이고 그 다음은 중국은행 건물입니다.

 

   현지인들의 소개에 의하면 세관부두와 그 주변은 당시와 다름이 없었다. 열혈투사 오성륜, 김익상(金益相), 리종암이 민족을 위해 단연히 일제 군부 거물급 인물인 다나까를 저격했던 의거의 현장이다. 부두와 세관 건물 모두가 변함이 없었다.   강기슭을 여유롭게 거니는 행인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설레이는 마음은 진정할수 없었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죽기를 맹세하고 스스럼 없이 저격에 나선 민족의사들을 생각하니 마음은 설레이기만 하였다.

(최룡수) 1922 3 22일 의열단 대원 김익상, 오성륜, 리종암 세 투사는 바로 여기서 일본 륙군대장 다나까를 저격하는 서건이 발생했다. 미국 여사 한명이 오발로 피살되고 다나까를 쏘지 못했다. 실패후 도망치다가 체포되였다. 오성륭은 감옥에서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탈옥하였다. 그후 여기에 관해서는 혁명가 김산이 <괴상한 무기>라는 소설을 써 발표했다.

    1922 3 28일 오후 3 30, 다나까가 탄 륜선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 닿았다. 침략팽창의 추진자로 소문난 일본 륙군대장 다나까 기이찌(田中义一), 동남아시아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가던 중 상해 시찰을 위해 상해에 오게 되었다. 다나까는 잔교를 지나 부두에 내려 영접을 나온 고위 관리들과 악수를 나누고있었다. 이때 제1선에 선 오성륜이 놈의 가슴팍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금발의 외국 녀인이 불쑥 나타나 앞을 막았다. 총 세 방이 뜻하지 않게 그 녀인을 맞추고 말았다. 이때 제2선에 있던 김익상이 혼비백산해 승용차쪽으로 뛰여가는 다나까에게 총 두방을 쏘았다. 총알은 그놈의 모자를 꿰뚫었을 뿐 역시 명중되지 않았다. 련속 던진 폭탄마저 불발이였다.

    다나까가 차안에 굴러들어가 버리자 제3선에 있던 리종암이 폰탁을 던졌다. 급급히 던진 폭탄이 폭발하기 전 미군 해병이 폭탄을 바다에 차 넣었다. 련속되는 습격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다나까는 급급히 현장을 떠났고 호위병들이 습격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사람들틈에 끼여있던 리종암은 쉽게 탈주했으나 구강로(九江路)와 한구로(汉口路)로 달리던 김익상과 오성륜은 끝내 적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해 5월 오성륜은 탈옥하여 계속 항쟁을 하였지만 김익상은 나가사끼 지방재판소로 압송되였다가 1925년 옥사하였다.

   의렬단의 충직한 투사였던 김익상은 1921 9, 홀몸으로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약을 던지기도 하였다. 폭탄의 위력이 약했던 탓으로 효과는 크지 않았지만 총독부 청사내로 여유있게 잠복해 들어가 폭탄 세 발을 던지고 삼엄한 일본 경찰들의 경계와 추적을 피해 북경으로 무사히 귀환한 김익상은 실로 신화적인 인물이였던 것이다. 나라를 빼앗은 원쑤 침략자들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다나까 저격에 나섰던 김익상은 끝내 성사하지 못하고 일제 감옥에서 희생되였다.      

   처절하고 비장했던 의렬투쟁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였다. 다나까 저격의거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제 침략자들을 전율시켰으며 민족의 반일의지를 더욱 고조시켰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외국인을 포함해 무고한 사람들에게 련루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의렬단은 투쟁수단을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되였고 새로운 대중운동의 길을 찾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 내 조선인 반일지사들이 여러모로 민족독립과 해방의 길을 적극 모색하고있을 때 중국에는 새로운 정치력량이 력사무대 등장하였다. 중국 혁명을 주도하고 수억 중국인민의 반제반봉건의 력사적 과업을 짊어진 이 정치력량이 바로 중국공산당이였다.

    황포탄에서 다나까 저격지를 답사한 이튿날인 2003 9 23, 답사팀은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 기념관을 찾아갔다. 기념관은 상해시 흥업로(兴业路) 76번지에 위치해 있었다. 석고문(石库门) 2층건물로 된 기념관 주변은 해 묵은 오동나무들이 둘러있었다. 손바닥만한 오동나무 잎이 설레이는 사이로 보이는 이 평범한 2층 건물에서 중국혁명의 승리를 이끌어낸 위대한 중국공산당이 창건되였던 것이다.

   답사팀이 도착했을 때 기념관은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있었다. 기념관은 1952년에 수건되여 지금까지 천만을 넘는 관광자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공화국이 창건된후 1950, 중앙에서는 전국적으로 혁명문화재와 혁명 유적지를 발굴하고 보호할데 관한 통지를 발부했다. 당시 상해에서는 많은 조사와 검증사업을 거쳐 지금의 흥업로 76번지가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 지점이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당시 상해대표로 참가하였던 리한준(李汉俊) 형제가 살았던 집이였다. 다소 수건과 복구작업을 거쳐 건물은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숙엄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기념관 전체를 감돌고있었다. 450평방메터에 달하는 전시청에는 혁명문화재와 력사문헌 그리고 일부 소중한 력사 사진들이 전시되여있었다. 전시물들은 중국공산당 창립의 력사적 배경과 각지 공산주의 소조의 활동을 상세하게 설명해주고있었다. 1차 대회는 1층의 18평방메터 되는 회의청에서 진행되였다. 회의청은 원래 모습으로 복구되였고 가구와 물품들도 모두 원래대로 모방되여 있었다. 탁상우에 놓여진 16개의 찻잔을 보면서 우리의 사색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감동과 격정의 옛날로 달려갔다.

   1840년 아편전쟁이후, 제국주의 세력이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과 수탈을 감행하여 중국은 반식민지반봉건사회로 전락되였다. 그때로부터 5.4운동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민의 반제반봉건투쟁은 끝없이 진행되였다. 그러나 태평천국 농민봉기나 자산계급이 령도한 신해혁명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은 새로운 정치력량을 요구하였고 새로운 당을 요구하였다.

   1917년 로씨야 10월혁명은 맑스레닌주의 리론을 중국에 전해왔고 1919 5.4신문화운동은 맑스주의와 중국 로동계급의 결합을 촉성시켜주었다.

(권립) 1920년 모스크바 동방대학 출신인 공산주의자 안병진은 특수한 사명을 가지고 공산국제의 대표이자 로씨야 공산당 대표인 위신스키를 안내하여 상해로 왔다. 그는 북경과 상해에서 중공의 창시자로 될 리대소 선생과 진독수를 만나 위신스키와 회담하게 함으로써 중공의 건립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1920년초 리대소와 진독수는 중국공산당 창건을 위해 적극 준비하고있었다. 이때 조선 혁명가 안병진이 로씨야 공산당 대표인 위신스키(维经斯基)를 안내해 중국에 오게 된다. 그는 북경에서 리대소를 만나고 상해에서 진독수를 만나 중국공산당 창건 문제를 토의하였다. 그후 북경, 호남, 호북, 산동 등지에 공산주의 소조가 나타나 맑스주의를 적극 선전하였다.

   1921 7 23일부터 31일까지 상해에서 각지 공산주의소조 대표들이 모여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가 바로 중국공산당 창건대회로서 림시강령을 채택하고 당의 사업기구와 사업계획을 확정하였다. 모택동, 하숙형, 동필무, 진담추, 왕진미, 등은명, 리달, 리한준, 장국도, 류인정, 진공박, 주불해와 포혜승 등 13명이 전국 53명 공산주의자들을 대표해 대회에 출석하였다. 국제공산당에서는 마린(马林)과 니꼴스키(尼科尔斯基)를 대표로 대회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회의는 프랑스 조계지 경찰청의 저애를 받게 될 위험이 있었다. 그리하여 상해 대표 리달의 부인 왕회오(王会悟)의 건의에 따라 가흥(嘉兴)의 남호에서 회의를 계속 하기로 하였다.

   24일 답사팀이 가흥의 남호에 도착했을때는 늦여름의 태양이 뉘엿뉘엿 지고있을때였다. 수려한 남호의 동남안에는 복구해 만든 유람선 한척이 조용히 떠있었다. 길이가 16메터이고 너비가 3메터인 유람선의 중앙에는 탁상과 다기들이 놓여있었다. 이 유람선이 바로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에 참가했던 대표들이 마지막 회의를 하였던 곳이다.

   1964년 봄, 동필무 동지가 남호에 와서 이 유람선을 보고 당시의 유람선과 너무나도 흡사하다고 련신 감탄하였다 한다. 이 자그마한 유람선에서 중국공산당의 규약과 첫 결의안이 채택되고 중국공산당 중앙국이 조직되였다.

   회의를 페막하면서 전체 대표들이 작지만 견정한 목소리로 구호를 웨쳤다. “중국공산당 만세!”‚“제3국제만세!”‚공산주의 만세!

   그때로부터 고난에 시달리던 중국 무산대중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항쟁의 길에 나서게 되었고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의 불길은 더욱 세차게 타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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