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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불멸의 발자취》
광주 답사를 마무리하던 2월 11일, 마지막 코스로 중산대학에 가 보았다. 2,30년대 수많은 조선인 혁명자들이 중산대학에서 리론학습을 하면서 혁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광주답사를 통해 알아본데 의하면 지금의 중산대학과 20년대의 중산대학 위치는 판이하게 달랐다.
원 중산대학은 주강 이북의 시 중심부근에 위치하였다. 문명로에 위치한 로신기념관이 원 중산대학 강당자리였다면 중산대학은 그 부근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중산대학은 시 중심지를 벗어나 주강 이남인 신항서로(新港西路)와 령남로(岭南路) 부근으로 옮겼다. 이곳은 20년대 령남대학(岭南大学)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령남대학도 중산대학에 합병되여 령남학원(岭南学院)으로 남아있을뿐이였다.
광주봉기는 3일만인 12월 13일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아무런 후원도 없는 상황에서 령남대학 부근에서 17일까지 5일간 전투를 견지한 봉기군 부대가 있었다. 이 부대에는 60여명 조선용사들이 있었다.
(권립교수) 다른 한곳은 령남대학 부근의 한 진지였습니다. 200여명의 봉기군이 철퇴명령을 받지 못하고 몇배나 되는 적에 의해 포위되였습니다. 그중에는 박영동지가 거느린 조선족 소분대 60여명이 있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엽검영 교도단 2영 5련의 조선족 전사들이였습니다.
광주봉기 첫날이였던 12월 11일 저녁, 주강 이남으로 도주한 적 두목들을 추격하고 그곳의 리복림(李福林)부대를 제거하기 위해 봉기군은 돌격대를 조직하였다.
리복림 부대는 비록 토지출신의 오합지졸이여서 전투력이 강하지 않았지만 그 수는 수천명에 달했다. 봉기 지휘부에서는 전투경험이 결핍한 로동자 적위대만으로는 이 임무를 완수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정규군 가운데서 전투경험이 풍부한 소분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쓸만한 정규군 부대가 워낙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정예부대를 편성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하여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군사기술이 뛰여난 교도단의 조선인 장병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제2영 5련의 박영이 조선인 전사 60여명을 거느리고 로동자 적위대와 함께 도강 돌격대를 편성하였다.
12일 박영은 돌격대 2백여명을 거느리고 주강 이남으로 공격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령남대학 부근에서 적들과 치렬한 격전을 벌였다. 돌격대는 유리한 진지를 점령하고 우세한 적의 공격을 수차 물리쳤다.
13일이 되자 수많은 적의 정규군이 도착하였다. 전투력이 강한 적 설악(薛岳)의 부대가 도착하여 리복림 부대와 함께 공격해 왔다. 게다가 일본, 프랑스,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함포가 주강을 차단하였다. 뒤에는 사품치는 주강이 가로막히고 적들은 삼면으로 포위 공격해 왔다. 그러나 돌격대원들은 박영의 지휘하에 침착하게 적들과 싸웠다. 강이 가로막혔기 때문에 그들은 지휘부와의 련결이 끊어졌고 철수명령도 받지 못했다.
(권립교수) 그들은 굶주림을 참으며 닷새동안이나 혈전했습니다. 이리하여 2백여명 중에 120여명이 장렬하게 희생되였습니다. 그중에는 교도단의 우수한 장령으로 있던 박영 동지가 있습니다.
두명의 전사가 박영의 명령을 받고 지휘부와 련락하기 위해 포위를 빠져나오고 한 전사가 요행 사경을 벗어난 외 조선용사들은 령남전투에서 전부 희생되였다. 그들은 생사의 시련 앞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17일까지 전투를 견지했던 것이다.
령남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된 박영의 원명은 박근성이다. 일찍부터 혁명에 참가한 그는 동북에서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고 후에는 로씨야에서 활동하였다. 1924년 그는 광동에 있는 친구 리용의 서한을 받고 안해와 두 동생인 박근만, 박근수와 함께 광동에 왔다.
광동에서 이들 형제는 황포군관학교에 적을 두고 조선인 혁명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들은 중국의 북벌전쟁에 참가해 혁혁한 공헌을 세웠다. 국공분렬이 시작된 후 박영은 무한에서 엽검영이 조직한 황포군관학교 교도단에 참가하였다. 남창봉기가 실패한 후 혁명의지가 박약한 자들은 선후로 혁명대오를 떠났지만 이들 형제는 끝까지 투쟁을 견지하였다.
교도단을 따라 다시 광동에 온 이들은 핵심전투원으로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박영은 봉기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백운산, 관음산, 령남전투를 비롯해 광주봉기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여러차례 크고작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조선민족의 우수한 아들인 박영은 령남전투에서 도강 돌격대를 거느리고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1927년 12월 13일, 광주봉기의 정세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조선 혁명자들은 중산대학에 모여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김산이 이날 조선쳥년련맹 회의 의장을 맡았고 양달부와 오성륜, 김규광을 비롯해 12명 주요한 조선인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광주봉기에 참가한 경험을 총화하고 봉기가 실패하면 누가 광동에 남고 누가 떠나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였다.
봉기에 많은 조선인이 참가했기 때문에 적들도 조선사람들만 보면 체포하고 학살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 조선인은 부대를 따라 철수하기로 하였다. 봉기군은 72렬사 기념탑이 있는 황화강에 모여 이동하기로 하였다.
양달부, 김산, 오성륜, 박근만, 박근수를 비롯해 대부분 조선인 혁명가들이 교도단 주력부대를 따라 해륙풍으로 철수하였다.
(권립교수) 적들은 광주시내로 쳐들어왔습니다. 적들은 이렇게 웨쳤습니다. ‘단발머리 녀인 다 죽여라, 붉은 옷 입은자 다 죽여라, 조선사람처럼 생긴자 다 죽여라’ 놈들의 이런 백색테로속에서 도합 5천 7백여명이나 되는 혁명자들과 광주시민들이 살해되였습니다. 광주는 피에 젖었습니다. 광주봉기는 실패하였습니다.
광주봉기에 많은 조선인이 참가했다는 것을 간파한 적들은 조선사람이라고 여겨지면 마구 살해하였다. 양복차림을 하고 중국말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면 그냥 조선인으로 판단하고 죽였다.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혁명가 김규광은 부대를 따라 철수하지 않고 련인이였던 두군혜의 집에 몸을 숨길수 있었다. 두군혜는 회억록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있다.
“봉기가 실패한 후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황혼녘에 규광동지가 갑자기 우리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는 얼굴에 먼지투성이였고 많이 초췌했지만 아주 침착하였습니다. 그는 공안국으로부터 철수한후 길을 에돌아 왔던 것이지요. 그의 말에 의하면 포위된 많은 동지들은 적의 기관총 소사에 비참히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분적 동지들은 시구역을 빠져나가 각기 해륙풍과 향항으로 피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중산대학 기숙사에 아직도 일부 동지들이 있으니 그들을 급히 전이시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옷도 먹을 것도 돈도 없다고 했습니다…중산대학에 남은 동지들을 도와주기 위해 나는 어머니와 의논하였습니다. 어머니에게도 좋은 방법이 없었지요. 어머니는 집에서 오빠의 옷을 뒤져내고 또 밤도와 중국 옷 한 벌을 지었습니다. 조선사람들은 평소 양복을 입고 다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중국 옷을 입혀야 무사히 빠져나갈수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또 돈 10원을 만들어 중산대학의 로씨야로 기숙사에 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 집에는 아종(阿钟)이라는 학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솔찍하고 믿을만한 사람이였기 때문에 그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거리에는 희생자들의 시신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아종은 얼마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두려워서 좀처럼 거리의 시신곁을 지날 수 없다고 하였지요. 할수 없이 규광동지가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를 엄호해주기 위해 나도 따라 나섰습니다. 다행히 적들에게는 아직 모든 거리를 경계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나는 규광 동지와 함께 서관의 주민구를 벗어나 서과원쪽으로 달렸습니다. 거리에는 시신들이 더욱더 많아지기 시작하였고 붉은 피가 흐르고있었습니다. 우리가 중산대학 로씨야로에 위치한 기숙사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이였습니다. 우리는 그곳의 동지들을 무사히 철수시켰습니다. 이틀후 나와 규광동지도 함께 향항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국민당 반동파들의 대학살이 시작되자 국제제난회(国际济难会)라는 비밀조직이 있어 혁명자들을 적극 도왔다. 국제적인 조직인 제난회는 제3국제에 소속되여 있었다. 황포군관학교 6기생인 조선인 김창만(金昌满)도 광주 제난회의 성원이였다. 그는 제난회의 기타 성원들과 함께 광주봉기에 참가했던 혁명자들을 숨겨주고 그들을 도와 무사히 광주를 빠져나가게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 살해된 혁명자들의 시신을 처리하게 하였고 유가족들을 부조해주었다.
답사팀이 광주에서 만났던 저명한 사학자 려현형 교수가 광주봉기의 의의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광주시 당사연구실의 황수생 연구원은 광주봉기 력사에서는 려현형 교수가 권위라고 우리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려현형 교수는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혁명자 박영에 대한 전문적인 인물전을 쓰기도 하였다.
(려현형교수) 광주봉기는 로동자, 농민, 병사가 함께 일으킨 봉깁니다. 남창봉기는 군대에 의지한 봉기였고 추수봉기는 농민이 위주로 되었습니다. 로농홍군이라는 명칭도 광주봉기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광주봉기는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3개 봉기의 하나입니다. 중화쏘베트 문헌에서도 이를 명확히 제기하고있습니다. 중국의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에서 이처럼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빠리 꼼뮨과도 다릅니다. 당 주요 지도자들은 모두 광주봉기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봉기에는 조선, 쏘련, 윁남의 혁명자들이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윁남과 다릅니다. 윁남 혁명자들은 로동자들과 함께 봉기에 참가하고 봉기 실패 후 20여명이 체포되였지만 국외의 구조를 거쳐 모두 풀려났습니다. 희생자가 없거든요. 그러나 조선혁명가들은 광주봉기에서 많이 희생되였습니다. 조선인은 련대를 무어 사하에서 싸워 백여명이 희생되였습니다. 조선혁명가들은 줄곧 봉기 주력부대인 교도단에서 싸웠고 또 황포군관학교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또 중산대학에도 많았지만 모두 비밀상태이기 때문에 많은 렬사들은 이름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려현형 교수를 작별하고 답사 길에 나서면서 머리 속에 가셔지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국외 일부 학자들이 광주봉기에서 수많은 조선 혁명자들이 희생된 것은 무의미한 희생이라고 평가한 론문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 혁명자들의 희생이 그처럼 무의미했던 것일까?
3.1운동후 조선혁명자들은 중국의 동북과 상해지역, 로씨야 극동을 중심으로 활동을 많이 전개하였다. 20년대 의렬단을 비롯한 수많은 열혈청년들이 로씨야로부터, 동북으로부터, 상해로부터 그리고 조선국내로부터 속속 광동에 모여 온 것은 손중산이 창도한 반제반봉건의 위대한 혁명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조선독립과 해방을 전반 동방피압박민족 인민들의 해방과 련계 시켰고 동방피압박민족의 해방은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가져올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은 두려움 없이 중국인민의 반제투쟁에 참가하였고 봉건군벌을 타격하는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은 장개석과 왕정위 두 집단으로 분렬되였고 권력쟁탈에서 제국주의자들의 막강한 후원을 받기 위해 드디어 로농대중의 리익을 대표한 중국공산당에게 총을 돌렸다. 조선의 진정한 혁명자들은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새로운 군벌세력으로 대두한 국민당을 믿을 수 없었다. 또 외교적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 굴종하는 국민당 반동파들을 절대 믿을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혁명자들은 광범한 로동자, 농민의 힘에 의지해 반제반봉건 투쟁을 끝까지 진행하려는 중국공산당만이 전반 동방 피압박인민의 해방사업을 대변해 주고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서슴없이 이 위대한 항쟁에 나섰고 목숨을 바쳐 싸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혁명자들의 희생은 절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희생은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는 조선인민의 항쟁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모든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전반 동방피압박민족의 거세찬 함성을 대변해 주기 때문이다.
성세호대한 광주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백여명 조선인들을 포함해 수많은 혁명자들이 희생되였다. 국민당 반동파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철저히 검색하고 살해했으며 조선인 혁명가들속에서도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속출하여 체포, 살해하려했다.
적들의 피비린 탄압속에서 많은 혁명자들은 대도시로, 농촌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항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은 도시에서 당조직을 찾고 계속 지하투쟁을 전개했으며 농촌에서 농민들을 발동해 농촌혁명 근거지를 창설하였다.
우리의 조선인 혁명자들도 항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가슴에 패배의 상흔을 안고 계속 투쟁하였다. 일부는 상해로 갔고 일부는 무한으로 갔으며 또 일부는 다시 동북으로 갔다.
또 많은 사람들은 홍군부대를 따라 혁명근거지 창설에 참가하였다.
남창봉기, 추수봉기, 광주봉기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3대 봉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국민당 반동파를 타도하고 반제반봉건의 중국혁명을 끝까지 진행할 항쟁의 의지를 세인들에게 보여주었다. 조선혁명자들은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에 시달리고 봉건주의 억압에 허덕이는 동방피압박민족의 해방은 무력항쟁으로만이 성공할수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 어느 강대국에 의지할것이 아니라 천백만 로농대중의 힘에 의지하여야만이 해방의 그날을 맞이할수있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혁명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중국 전역에서 혁명활동이 계속 진행되고있었다. 대도시에서는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간고한 지하투쟁을 전개하였고 강서, 호남, 호북, 광동, 광서, 섬북 도처에 농촌혁명근거지가 나타났다. 하나 하나 모여진 작은 불꽃이 광야의 불길로 타오를 그날은 멀지 않았다.
사진설명: 중조혈의정 비석의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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