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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시 그리고 소통의 길
중국조선족시단의 경우
김동진
주지하다싶이 중국조선족시단에 “시의 위기설”이 제기된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새로운 력사시기가 수용한 새로운 사조의 침투와 관념갱신의 시대적인 요구속에서 시인 저마다 나름대로의 진통을 겪어야 했다. 적어도 무엇을 어떻게 새롭게 쓸것인가를 다시한번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통은 우리의 시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는데는 별로 큰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였는바 고루한 과거형에서 탈피하는 몸부림이 질적으로 일정한 제고를 가져왔다고는 하지만 시의 길은 여전히 락관적이 되지 못하는것이 오늘의 시단상황이다.
객관적으로 시장경제의 충격, 금전숭배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 사이버문학의 흥기, 그리고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성장과 민족공동체의 해체로 인한 독자군의 축소 등이 원인이 될것이다. 그러나 좀더 자각적인 자성으로 문제를 분석할 때 이런 위기의 근본적인 책임이 다른 사람이 아닌 시인들 자신에게 있다는 주관원인을 배제할수 없다.
시인이 밤을 패며 써서 요행 발표한 시를 독자들이 보기 싫어할 때 어찌 그 무거운 책임을 독자들에게 밀수 있단 말인가? 탈바꿈이라는 명목아래 난해하고 난삽한 시, 말장난글장난의 시를 내놓고 독자들더러 곱게 보아달라고 한다면 이런 억지는 어느때건 통할리가 만무하다. 그러니 “시가 시시하다, 무슨 헛소리를 쳤는지 모르겠다”는 독자의 혹평앞에서 시인들은 억울함보다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것이다. 그런데도 부끄러워할줄 모르니 우리의 시인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낯이 두꺼워졌는지 모를 일이다.
시인이라면 현대시의 위기가 중국조선족시단에만 국한된것이 아닌 세계적현상이라는것쯤은 알아야 할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많은 시가 독자를 멀리하면서 자아만족에 빠지고있을 때 우리가 그것이 좋다고 북을 치며 따라가지 않았는가를 검토해보아야 할것이다.
멕시코의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인 루엔 레이바는 현대시의 위기가 형성된 “주된 원인은 시인들에게 있다”, “독자와의 괴리에 대한 책임은 거의다 시인들과 일부 평론가들의 책임”이라고 지적하면서 시인이 자초한 위기인만큼 이 “위기를 극복하고 해결하는 일의 주체도 시인이 되여야 한다”고 피력하였다. 필자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한다.
시의 위상이 일락천장이 된 세상에서 시인의 모습은 대체로 가긍하다. 서점가의 진렬대에서 랭대를 받는 시집과 독자들이 선망의 눈길을 주지 않는 시를 놓고 일부는 불평을 토로하고 일부는 고뇌에 빠지고 일부는 그래도 좋다고 떠드는 모습은 보기가 썩 좋은 풍경이 아니다. 얄팍한 호주머니를 털어 자비(自费)로 출판한 시집을 문우들과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억지로 즐거운 표정을 짓는것이 요즘의 우리네 시인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위기에 처한 우리의 시를 구하는 길에서 시인들이 선행해야 할 일이 무엇일가? 답안이야 많겠지만 필자의 미숙한 생각으로는 생활속에 더 깊이 들어가 독자를 망라한 광범한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집안에 앉아서 누가 이 위기를 해소시켜 주기를 바라지 말고 주동적으로 방법을 대여 대중과 소통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것이다.
이 면에서 연변시인협회는 하나의 좋은 보기가 되고있다. 김응준원로시인님을 회장으로 모신 연변시인협회는 2006년 4월 창립대회에서 공개한 자신의 약속을 굳건히 지켜가고있는바 지난 4년간 시리론강좌와 세미나, 시총서 《시향만리》의 출간외에도 밑바닥생활체험을 통한 현지창작과 형식이 다양한 시랑송을 견지하여 시단에 신선한 활력소를 주입하였다. 그들의 주도적인 시관념은 민족시의 우수한 전통에 현대시의 새로운 기법을 접목하는것으로 비록 정품(精品)이라 할수 없고 량적으로 많지 못하지만 중국조선족의 현실에 립각한 괜찮은 시편들을 창작하였다.
조양촌의 개울가에, 태양촌 농가의 온돌방에, 봉천동의 강냉이밭에, 춘화진 초모산정에, 백금향 9호동의 산자락에 찍힌 연변시인협회의 발자국은 결코 무가치 무의미한것이 아니였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곳곳에서 시랑송회를 조직하여 시와 대중의 만남의 장을 마련하였다. 지면에 고정된 활자를 벗어나 살아움직이는 진실한 언어로 펼치는 시랑송이 청중과의 공감대를 형성할 때 시의 내용을 모조리 터득하지는 못해도 정감을 토로하는 시의 본성이 어떤것인가를 조금이라도 새겨주었다면 이런 시랑송은 가히 성공적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연길의 음악살롱에서의 시와 음악의 만남, 태양촌에서 촌민들과 함께한 시와 오락의 밤, 훈춘5중학생들과의 명사시랑송회, 영안촌에서의 촌민들과의 만남, 훈춘동아무용학교에서의 시와 무용의 밤… 이같은 행사를 통하여 우리의 시가 학생들과, 촌민들과, 음악과, 무용과 만날수 있었으니 비록 외국의 대형이벤트와는 비할바가 못되는 미소한 움직임이지만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이러한 적극적인 실천행위는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될줄로 안다.
소식에 따르면 추락하는 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미국에서는 해마다 4월이면 “전미(全美) 시의 달”을 선포하는데 1996년부터 미국 시인아카데미가 정부기관과 언론, 출판사의 후원을 받아 한달내내 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모으는 행사를 펼친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1999년부터 매년 3월이면 문화부와 교육부의 후원을 받는, “시인들의 봄”이라고 명명한 시축제의 막이 열린다고 한다.
일전에 독일의 브레멘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펼친 “제8회국제시축전”도 시의 본성을 되살리고 시민들에게 시사랑을 심어주는 이벤트로서 그기간 학교는 물론 도심을 순환하는 전차속에서까지 시랑송회가 열렸다고 하니 시를 되살리기 위한 몸부림은 어느 한 민족만이 아닌 대중적인, 국제적인 움직임으로 번지였음을 알수 있다.
세계시단의 형세가 이러할진대 우리에게도 연변 내지 중국조선족시문학축제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건만 금전이 대소사를 좌우지하는 세월에 가난한 몇명 시인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시를 되살리기 위한 정부차원의 지지와 여론계의 협력과 작가협회 주관부문의 조치가 필요하다.
이런 여건이 주어지지 못한 상황에서도 개별적으로 우리 시의 운명을 관심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감사한 일이 아닐수 없다. 례하면 연변TV위성방송은 “영상시와의 만남”이라는 프로그램을 고정시켰고 연변인터넷방송에서는 영상문화로 시랑송을 올리고있으며 송미자시인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인터넷조글로사이트에 클래식과 시의 접목을 시도하는 시랑송을 하고있다. 그리고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의 한석윤회장님은 지난해부터 연길공원에서 중한시화전을 펼치여 “시와 시민의 만남”의 장을 마련하고있다. 시인들의 활동을 위해 고생스레 번 돈을 후원금으로 내놓은분들과 더불어 이러한 형식과 내용은 모두 의심할바없이 시의 대중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한것인바 우리는 마땅히 여러 조직과 주어진 다양한 시설 그리고 시청각매체를 리용하여 시를 되살리는 이러한 미거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
한국에 갔다가 시로 하여 크게 감동받은적이 있다. 하나는 공공장소에서 아주 쉽게 시를 만날수 있었는데 특히 서울 도심의 긴 담장에 그림과 사진이 배합된 좋은 시가 정교한 액자로 줄지어 걸려있어 거리의 문화품위를 높인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깊은 산중에 있는 도장공의 작업실 쉼터공간에 한국 유명시인들의 친필시가 빈틈없이 걸려있는것이였다. 소통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고 국민의 시사랑이란 그런것이였다. 마음을 합치고 힘을 합치면 얼마든지 할수 있는 이런 일마저 우리는 너무나 등한시한것이다.
시인이란 아무튼 영원토록 듣기좋은 이름이다. 우주만물과 교감할줄 알고 인간세상의 진선미(真善美)와 가악추(假恶丑)를 형상적으로 표현할줄 아는 사람이니 말이다. 오죽하면 세네갈의 시인대통령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는 “나는 시인대통령으로 기억되기보다 대통령을 지낸 시인으로 기억되고싶다”라고 했으랴.
중화위인들의 생애를 보아도 거의모두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였다. 모택동이 그러했고 주은래가 그러했으며 진의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현시대에 와서 세계가 공인하는 온가보총리의 시사랑은 너무나 유명하다.
2006년 영국방문시 “주로 무슨 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가?”라는 외국기자의 엉뚱한 물음에 온가보총리는 시인 굴원과 정판교의 시구로 대답하였다.
“긴 한숨 쉬며 남몰래 우는건/ 고생하는 민생이 애처로운 탓이요”
“관저에 누워 대나무소리 듣자니/ 백성들 아파하는 소리로 들리는것 같아”
보다싶이 온가보총리의 가슴속에는 온통 고생하는 민생과 아파하는 백성뿐이다. 그것을 고전명시 4행으로 완벽하게 표달했으니 나는 이런 시야말로 진짜시이고 고급시라고 단언한다.
자고로 이름을 남긴 시인치고 민족과 민생의 희노애락을 외면한 시인이 있었던가? 순수문학을 한다하여 시의 사회적책임과 대중과의 소통을 우습게 아는것은 바람직한 처사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의 시인들이 “포스트모더니즘시대의 시는 물우에 뜬 기름과 같다”라고 한 사울 아바르고옌(우르과이의 시인이고 소설가이며 교수)의 말의 함의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면 한다.
“쌍백방침(双百方针)”과 “쌍다원리(双多原理, 다원공생,다각공존)”에 의한 여러가지 류파의 존재는 정상적이며 합리한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류파든지 민심을 우습게 보거나 거역한다면 아무리 큰소리로 떠든다해도 스스로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될것이다. 민심이 곧 천심인데 시인의 시심(诗心)이 민심을 얻지 못하면 어찌 시의 번영과 부흥을 바랄수 있겠는가?
독자, 대중과의 거리를 단축하고 소통을 이루는 길은 민초의 생활에 접근하고 우리가 살고있는 삶의 현장과 흙을 가까이 하는 길뿐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그 길을 가야만이 우리 나라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듯이 우리의 시단도 중화의 땅에 살고있는 중국조선족의 시세계를 구축하게 될것이다. 그러한 시로써 인민대중과의 끈끈한 뉴대를 형성하는 시스템—시와 시민, 시와 촌민, 시와 학생, 시와 음악, 시와 무용, 시와 드라마, 시와 미술, 시와 촬영, 시와 TV, 시와 인터넷, 시와 소품, 시와 영화의 어울림을 형성한다면 우리의 시는 긍정코 되살아날것이며 지금처럼 우리 시의 전망에 대해 비관하는 일은 없을것이다.
나는 인류가 존재하는한 문학이 존재하고 문학이 존재하는한 시가 존재하리라고 믿으면서 동시에 우리의 시인들이 신들메를 조이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시인의 바른길을 걸어가리라고 굳게 믿는다.
연변문학 20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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