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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70년(1945년―현재)간의 발전려정에 연변의 무대미술은 전문인재가 전무한 상황에서 가장 원시적인 무대미술설계로부터 출발하여 레이자미술세트(布景), 컴퓨터등광, 현대투영기술, 전자조률대(电子调音台), 화장, 복장, 효과, 도구 등 다양한 분야의 각종 현대화한 과학기술수단을 응용할수 있는 전문인재대오가 형성됨으로써 연변의 공연예술의 발전에 막중한 기여를 하였다.
1945년, 항일전쟁이 결속되여서부터 1950년대초까지는 연변무대미술의 초창기였다. 이 시기 연변각지에서는 문예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일어서고 무대미술도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였다. 당시 연변에서는 연극 “혁명자”, “흥부와 놀부” 등 13부의 연극이 공연되였는데 무대설계는 매우 간단하여 나무가 소요되면 산에 가 나무를 베여 무대에 세우는 방식이였으며 조명등이 없어 홰불로 무대를 밝혔다. 1953년 제1차 동북3성문예공연에서 연변가무단의 무극 “평화를 위해서”(무대설계 박창렬)가 무대미술설계 1등상을 수상하였다.
지난세기 50년대 중기부터 “10년 대동란”이 결속되기까지는 연변무대미술이 기틀을 잡기 시작한 시기였다. 1956년 1월, 연변연극단에서는 무대미술설계사 김영호를 중앙연극학원에 보내여 쏘련전문가의 지도를 받게 하였으며 1963년 1월 상해연극학원 무대미술학부를 졸업한 남승철이 연변연극단에 배치되였다. 이 시기 연극 “아침노을”, “장백의 아들”, “심청전” 등 14부의 창작연극과 본보기극이 공연되였다. 김영호, 김영운, 남승철 등 전문일군들이 사실주의창작방법으로 무대미술을 창작하였는데 1959년에 있은 길림성현대연극콩믈에서 연변연극단의 연극 “아침노을”이 무대미술설계상(김영호)을 수상하였다.
1980년대초로부터 1990년대까지 연변무대미술은 개화기에 진입하였다. 1981년 4월 연변무대미술학회가 성립되면서 연변무대미술발전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 “장백의 아들”, “눈속에 핀 꽃”, “산귀신”, “도시+농민=?” 등 18부의 연극이 공연되였다. 1982년 12월에 개최된 제1차 전국무대미술전람에서 연극 “장백의 아들”(미술설계 남승철, 김영운 등)을 비롯한 4폭의 무대미술설계도가 전시되였다. 이 시기 견학, 무대미술전람 등 활동이 활발하게 가동되였으며 무대미술설계, 등광, 복장 등 분업이 형성되고 전문분야의 인재들이 속출하였다.
지난세기 90년대중기로부터 지금까지 연변무대미술은 전면적인 발전단계에 진입하였다. 이 시기 “장백의 정”(1997년), “들끓는 장백산”(2001년), “천년아리랑”(2006년), “장백산 아리랑”(2009년), “노래하노라 장백산”(2012년) 등 국내외에 명성을 떨친 10여부의 대형문예공연종목들이 무대에 올랐는데 모든 작품들이 국가급 무대미술설계상을 비롯한 여러가지 상을 수상하였다. 무대조명의 역할이 그 어느때보다 뚜렷해졌으며 무대도구의 구사도 더욱 넓어졌다. 활약한 무대미술설계일군들로는 전성환, 한동언, 임동길, 남승철, 방승한 등이 있는데 여기에는 국가1급무대미술설계사도 다수 포함되여있다.
70여년간 연변의 여러 세대의 무대미술설계일군들은 공연무대의 막후에서 연변공연예술의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표현예술의 형식이 풍부해지고 과학기술수준이 날따라 향상함에 따라 무대미술설계도 하루가 다르게 진화, 발전하고있다. 이러한 급속한 발전의 보폭에 맞추려면 젊은 무대설계일군들이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현대기술을 습득함과 아울러 창신의식과 정품의식을 증강한다면 연변의 무대미술창작과 공연예술발전도 한단계 업그레이드 될것이리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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