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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0일, 연변가무단의 연극 “둥지”를 관람한 뒤 연변연극가협회 전득주주석, 평론가 장정일선생과 함께 커피숍에서 연극에 대해 담론하게 되였다. 전득주주석은 휘황했던 연변의 연극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연변에서 연극의 뿌리는 깊기에 저조한 연극을 다시 일으켜세울 밑천이 든든하며 또한 연극이 도시에서 다시 부흥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내다봤다.
사실 연변에는 연극이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1956년 1월, 연변연극단이 세워져“10년동란”이 일어나기까지 연극단에서는 고전장막연극 “춘향전”,“심청전”, 장막연극 “장백의 아들” 등 60여부의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장백의 아들”은 동북3성에서 도합 384차 공연하고 관객 32만명을 모셨다.
“10년동란”이 결속된후 1982년부터 1999년까지는 희극전승시대였다. 희극 “도시+농민=?”(1984년)을 필두로 풍자극 “털 없는 개”(1991년)의 공연과 더불어 연변연극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털없는 개”는 2년 사이 456차 공연에 공연수입 100만원을 올렸으며 중국문화부의 문화신극목상을 수상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연변연극단이 가는 곳마다 사방 몇십리에서 관객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극장은 초만원을 이루었고 궁핍한 시기였지만 농민들은 찰떡을 치고 닭을 잡고 두부를 앗는 등 지극정성을 다해 배우들을 대접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지난 세기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연극계에는 이상기후가 감돌기 시작했다. 관중이 날따라 줄어들면서 극장가는 점점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꼬박 10년을 웃었으니 웃음에 질린건 아닐가 연극인들은 고민을 거듭하였다. 이 즈음에 리광수 창작, 방미선 연출로 된 장막정극 “사랑의 품”이 무대에 올랐는데 첫 공연부터 대박이였다. 극장은 울음바다로 변했고 막이 내렸는데도 관중들은 떠날 생각을 안했다.
그러던중 1999년부터 극장은 텅텅 비기 시작했다. 표를 무료로 줘도 극장은 파리를 날렸고 연극은 완전히 침체상태에 빠져버렸다. 연극단에서는 선후로 리광수 작 “하얀꽃”(2000년), “사랑의 샘”92003년) 등 연극을 무대에 올려 일정한 경제수입을 올렸지만 역부족이였다. 그외 아동극뮤지컬, 한어말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등 연극인들의 몸부림은 지속되였으나 연변의 연극형세는 갈수록 암담해졌다.
맛있는 밥을 지으려면 좋은 쌀, 좋은 가마, 좋은 장작이 있어야 한다. 연극에 있어서 쌀은 극본이고 가마는 연극대오이고 장작은 관중이다. 연극을 흥기시키려면 우선 우리의 작가들이 새로운 시대의 관객을 연구하고 관객의 심미적요구를 만족시킬수 있는 량질 “쌀”을 만들어야 하고 우리의 연극대오는 “시장의 렬화”에도 끄떡 없는 든든한 무쇠가마로 거듭나야 한다. 다음 나무를 심고 오래동안 가꿔야 장작을 얻을수 있듯이 관객양성도 거시적 안목을 두고 틀어쥐여야 할것이다.
현재 북경, 상해, 심수 등 대도시들에서는 연극을 추동력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산업발전모식을 통해 기꺼운 성과를 거두고있다. 특히 북경시 동성구에서는 력사문화자원과 연극자원우세를 리용하여 연극창작, 공연, 교류 3대 플랫폼을 구축하고 “연극브랜드프로젝트”를 실시하고있는데 2010년부터 지금까지 5천만원에 달하는 연극산업발전자금을 투입하면서 연극붐을 일으키고있다.
당분간 우리의 연극도 정부의 지지를 떠날수 없다. 정부가 연극을 중시하고 연극발전공익보조자금을 투입한다면 연변연극도 다시 부활하게 될것이다. 여기에 연극인들의 희생정신, 유관결책자들의 과감한 개척정신, 극작가들에 대한 풍성한 대우가 병행된다면 연극이 행복이던 그 시절은 조만간에 다시 돌아올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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