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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문턱이라는 립추(立秋)가 되였어도 한낮이면 선풍기를 돌려 더위를 식혀야 하니 가을이 아직 실감나지 않았다.
처서가 지나서도 밤에 창문을 열고 이불을 덥지 않고 잤더니 두번이나 몸살을 앓았다. 한낮의 혹서는 어느새 물러가고 가을이 서서히 깊어가고있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가을창문을 마주하고 커피 한잔 마시며 수필을 읽는것도 별멋이겠지만 나는 가을만 되면 공연히 옆구리가 허전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싶은 충동을 느낀다.
40대에 들어서면서 가을을 더 타는듯싶다. 송나라시인 구양수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는 양기가 상승하기때문에 녀자들이 봄을 타고 가을에는 음기가 상승하기때문에 남자들이 외롭고 쓸쓸해지며 무언가를 그리워하게 된다고 한다. 봄은 잔잔한 보슬비를 머금은 서정시의 세계라면 가을은 인생의 묘리를 달관한 수필의 세계일것이다.
마침 휴일이라 혼자 가을산행을 떠나기로 했다. 슈퍼에 들러 등산배낭에 이것저것 챙겨 넣고 밖에 나오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하늘은 장인이 염색해놓은 비단천처럼 티끌 한점없이 파랗고 보석처럼 눈부시다. 바람이라는 화백이 푸른 비단천에 경쾌한 구름의 시를 쓴듯 얄포름한 구름이 천태만상이다. 여물대로 여물어 물기 한점 없이 호듯호듯 내리쬐는 해볕은 옥구슬처럼 부서져 온몸을 포근하게 감싼다.
거리에 나서니 사람들의 옷차림이 각양각색이다. 긴소매를 입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름옷 차림 그대로 반소매에 짧은 바지를 입은 사람도 있다. 긴소매를 입은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는 안온한 성정의 사람들이고 짧은 소매를 입은 사람들은 거추장스러운것과 과정같은것을 생략하는 도담하고 랑만적인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네거리에서 파란신호들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자연 여기저기에 눈길이 간다. 생계를 걱정해 경운기를 몰고 새벽시장에 나갔다가 돌아오는듯한 솜옷차림의 농부는 갈 길이 급한지 몸을 앞으로 내밀고 파란신호등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옆 차도에 나란히 서있는 고급외제차 주인은 분홍와이셔츠 반소매옷차림으로 온몸을 푹신한 의자에 맡기고 음악을 듣는듯 느긋하게 핸들을 잡고 손가락으로 살랑살랑 박자를 친다.
한시간을 걸어 모아산숲에 들어서니 시원한 가을바람이 숲의 주인인듯 살갑게 반긴다. 여름내내 게으른 울음을 울던 매미소리가 맑고 야무지다. 언제나 바쁜이는 아무래도 다람쥐이다. 누가 눈길을 주건말건 여기저기 숲을 샅샅이 뒤지면서 한시도 쉴 틈이 없다. 온여름을 여름꽃과 살고나서 가을꽃을 찾아 날아가는 나비의 모습이 홀가분하다. 다람쥐나 나비는 한생을 살면서 사는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 하지만 서로를 부러워하거나 시비의 눈총을 보내지는 않는다. 하는 일은 서로 완연 다르지만 가을에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있기때문이다.
등을 맞대고 지천에 널려 있던 여름꽃들은 어느새 가뭇없이 사라지고 가을꽃이 적요한 숲에서 저만치 물러서 소리없이 피였다. 거리를 두고 피였으니 얼굴을 붉힐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여름꽃은 지쳐보이고 가을꽃은 유유자적해 보인다.
모아산정상으로 향하는 북쪽입구에서 두 년로한 할머니가 좌판을 벌리고 집에서 수확한 자두며 포도를 팔고있었다. 터밭채소를 뜯어다 시장구석에서 파는 촌부의 속셈만큼이나 큰욕심도 없는 두 할머니는 인심도 넉넉하다.
자두는 색갈, 크기, 맛도 서로 다르지만 농익지 않은것이 없다. 포도 역시 청포도와 검은 포도 두가지 색갈이지만 똑같이 달다. 같은 종류의 과일은 봄에는 똑같은 색갈의 꽃으로 피지만 가을에는 서로 다른 색갈과 사상(思想)의 열매로 거듭난다. 천자만홍의 과일은 나란히 과일난전에 올라 자신들의 사상을 고객에게 전한다. 청포도나 파란 자두처럼 덜익었다는 편견으로 사람들의 외면을 받은적도 없다.
두 할머니는 자기의 과일이 더 맛있다고 자랑하지 않았다.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이 있겠소. 이제 더 사는것도 고생이오. 생긴것만큼 먹고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오.”
싸리나무를 배경으로 인생을 재단하는 두 할머니의 풍경이 낯설지가 않다. 자잘한 분홍색, 자주색 싸리꽃이 눈에 띄였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여태 싸리나무꽃은 한가지 색갈로 여름에만 피는줄로 알았더니 그게 아니였다. 어릴 때 낯익도록 보고 자랐는데 너무 관심을 두지 않은탓이리라. 시골서 싸리나무는 참 많이 쓰였다. 칠칠한것들을 골라 쇠줄로 단단히 묶어 비자루를 만들어 마당을 쓸었고 광주리나 소쿠리를 결어 물건을 담는데 썼고 사시사철 아버지 지게살에도 싸리나무가 쓰였다. 또 싸리나무는 가정집 울바자가 되여 동네 강아지나 닭, 돼지가 드나들지 못하게 터밭을 지켜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울바자 싸리나무는 쉽게 마련할수 있는 아버지의 회초리가 되여 나를 지켜주었다.
인생을 살면서 나무를 보면 거목만 보았고 용도가 많은 나무임에도 싸리나무 같은 잡목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런 오만과 편견이 이런저런 착각을 가져왔고 착각속에서 나보다 다른것에 대해 쉽게 수긍이 가지 않은 삶을 여태껏 살아온것 같다.
잎이 무성했던 여름이 가고 락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누구나 1년을 되돌아보게 된다. 특히 인생에서 자신의 한계와 미래에 현실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40―50대 남성의 경우 상대적인 박탈감이 더 클수밖에 없다.
천(千)의 얼굴 가을모습에서 서로 다른것에 대해 겸양하는 법을 배운다. 가을을 탄다는것은 상실의 아픔과 이루지 못한것에 대한 미련의 자기최면에 불과하다는것을 알것 같다. 이루지 못했다는것은 결국은 워낙 이룰수 없었던것에 대한 욕심이 아니겠는가.
이제 가을을 한해의 마감으로 생각하고 남은 시간을 덤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 명년 가을이면 커피 한잔 마시며 차분한 마음으로 독서의 계절을 맞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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