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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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탈출
2010년 05월 21일 11시 25분  조회:843  추천:11  작성자: 조글로
수필

 화려한 탈출


 

    사촌동생이 출국하면서 한 달간 기르던 애완견 금돌이를 무작정 우리 집에 맡기고 갔다. 복슬복슬한 하얀색 털을 가진 마르티즈견종이었다.

    강아지를 기르자니 귀찮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똥오줌을 여기저기에 배설하여 좀만 주의하지 않으면 “지뢰”를 밟기가 일쑤다.

    강아지에게 똥오줌을 가리게 하려고 아침저녁으로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에 나섰다. 그날도 나는 저녁식사를 끝내고 강아지를 데리고 부르하통하 강변에 나갔다.

    앞에서 달려가던 금돌이가 백설같이 흰 강아지를 만나 옆에서 킁킁 냄새를 맡더니 위세를 부리느라 뒤발로 풀밭을 긁어댔다. 이어서 나무주위를 뱅뱅 돌다가 자기의 영역을 표시하느라 뒷다리를 쳐들고 오줌을 갈기는 알량한 짓거리를 한다. 다른 강아지를 만날 때마다 똑같이 반복하는 염습이다.

    강아지의 주인은 30대중반의 아련한 여성이었다.

    “비싼 강아지인 것 같습니다.”

    “네, 미국에서 천 달러를 주고 산 강아지입니다.”

    자신의 분신인 듯 애정 어린 눈길로 강아지를 바라보던 그 여성이 나를 찬찬히 뜯어본다.

    “김 선생이 아니세요?”

    “영실이가 아니오?”

    “네, 옳습니다. 모스크바 부다이스끼 여관에 있던 영실입니다.”

    반갑게 인사하는 영실이의 두 눈에 이슬이 맺혔다.

    먼 이역만리에서 도탑게 지내던 영실이를 10년 후에 이렇게 우연하게 해후할 줄이야!

    모스크바 체르끼시장에서 장사하는 조선족들은 부다이스끼여관에 모여 살면서 무랍 없이 지냈다. 영실이는 중국에서 철호와 약혼식을 올리고 우리 먼저 모스크바에 와있었다. 우리 두 집 식구 네 사람은 모두 고향이 화룡이라 인차 가까워졌다. 우리는 택시를 정해놓고 아침 다섯 시면 함께 시장에 다녔고 저녁에 돌아와서는 식사도 같이 하였다.

    영실이는 월광을 받은 듯한 뽀얀 살색에 얼굴이 갸름하고 선이 고운 미인이었다. 노래 솜씨가 일품이고 성격 또한 활달해서 남정네들은 철호가 여자 복을 타고났다고 부러워했다.

    그런데 그들이 가죽옷장사를 시작할 요량으로 5만 달러에 원래 매장을 팔면서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철호가 영실이 몰래 매장을 판 돈으로 카지노(도박장)에 다니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재미로 작은 도박에 손을 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게 아니었다. 봉창할 일념에 달이 오른 철호는 점점 큰 도박에 손을 댔다. 한번은 5천 달러를 호주머니에 넣고 카지노에 가다가 경찰에게 잡혀 몽땅 털리고 말았다. 새로 시작한다던 가죽옷장사는 물 건너가게 되었다. 그즈음에 모스크바에서 중국청년 3명이 카지노에서 6만 달러를 따고 귀가한 뒤 집에서 한꺼번에 참혹하게 피살된 사건이 생겼다. 모스크바에서는 도박장에서 딴 돈은 자기 돈이 아니었다.

    영실이가 철호에게 카지노에서 손을 떼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눈물로 호소하였지만 심장이 이미 돌이 돼버린 철호를 돌려세우지 못했다. 철호는 집에 두었던 5만 달러를 깡그리 도박장에 밀어 넣고도 모자라 고리대금업자에게서 5푼리자로 돈 만 달러를 꾸었다. 이젠 카지노에 미립이 터 얼마 안 되면 본금까지 찾게 될 것이라 큰소리를 탕탕 쳤지만 그 돈마저 공손히 도박장에 받치고 말았다. 어느 날, 철호는 빚이 무서워 영실이만 모스크바에 남겨놓고 비겁하게 혼자 잠적해버렸다. 고리대금업자는 철호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영실이의 자색에 반해 영실이를 납치하려 하였다. 영실이가 11층 창문에서 뛰어내리겠다는 자살소동을 벌이고 경찰이 출동하자 고리대금업자는 혀를 홰홰 내두르며 물러서고 말았다. 이튿날 영실이도 우리 여관에서 가뭇없이 사라져버렸고 나는 여태껏 영실이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부다이스끼여관에서 나온 뒤 전 모스크바에 있는 한식집에서 3년간 일했습니다. 3년 뒤 한식집주인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잘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6년 동안 몸을 혹사하며 미국에서 악착하게 돈을 벌었습니다.”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참혹한 현실에서 용케 탈출하고 재기에 성공한 영실이가 돋보였고 내일처럼 기뻤다. 

    영실이는 개혁개방이후 조선족 여성들의 삶을 대변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혁개방초기 조선족 여성들은 시대의 급류에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친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의 여성들에 비해 또 조선족남성들보다 한발 앞서 시장조류에 몸을 담그고 좌초를 겪으면서 희망의 대안을 향해 사투를 벌였다. 조선족 여성들은 더는 남성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주적인 삶을 영위하게 되었고 남성들의 가부장적인 질서는 물을 먹은 모래 담처럼 맥없이 허물어졌다.

    조선족 여성들은 불과 30년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기구한 삶을 살았다. 비록 새 중국이 건립되었다 할지라도 전통적인 농업사회에서 조선족 여성들의 지위는 독립된 인격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남녀칠세부동석, 칠거지악 등 유교특유의 문화가치는 크게 위축되었다 할지라도 아버지를 따르고 남편을 따르고 자식을 따르는 삼종지도는 먼 조선시대의 이야기만 아니었다.

    나의 어머니만 봐도 그렇다. 어머니는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섬기고 자식을 섬기며 삼종지도의 역할은 물론 남성들도 힘들어하는 바깥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가정에 종속된 반절의 인간으로 인정되었고 동네에서도 이름으로 기억되지 않고 버들골 댁으로만 통했다.

    어머니는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마을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쌀을 씻어 밥을 짓는 것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식사준비가 다되면 좋은 음식은 집식구들에게 먼저 먹인 후 남은 것이나 부엌에서 바가지에 담은 것을 가마 목에 돌아앉아 간소한 식사를 하시였다. 식사를 끝내고는 닭, 개, 돼지 등 가축을 돌보고 밭으로 나갔다. 밭에서 돌아올 때면 돼지풀을 뜯느라 귀가시간이 늦어졌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 쉼도 쉴 틈이 없었다. 밥 짓기, 돼지죽 끓이기, 설거지, 빨래, 바느질, 뜨개질 등 태산 같은 일감은 모두 어머니 몫이었다.

    어머니가 밤낮으로 팽이처럼 돌아쳤지만 할머니는 뭐가 불만인지 어머니를 종처럼 부려먹었다. 아니 종과 상전은 한솥밥이나 먹지 종보다 못하였다.

    어머니는 동지섣달에 누나를 낳으셨다. 누나를 낳은 이튿날, 할머니는 어머니더러 동네에 나가 맷돌을 빌려 오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허약한 몸인데다 홑옷차림에 혹독한 추위를 무릅쓰고 맷돌을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눈물이 고드름으로 맺혔다.

    다섯 자식을 낳으면서도 왠지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박대도 만만치가 않았다. 촌간부로 일한 아버지는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오는 날이 많았고 그런 날이면 갖은 행패를 부렸다. 가장집물이 왱강댕강 여기저기 날아가는 것은 약과요, 온 집 식구가 추운겨울에도 맨발바람에 집에서 쫓겨나기가 일쑤였다. 어머니가 허리가 휘고 뼈 빠지도록 일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가난의 깊은 수렁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1990년대 초, 우리 이웃집에 타지에서 시집온 옥자아주머니가 살았다. 옥자의 남편 철남이는 동네에서도 소문난 술고래였다. 그때 농촌에서 도급제를 실시한지 이미 칠팔년이 되어 사람마다 잘 살려고 뼈를 아끼지 않고 일할 때였지만 옥자의 남편만은 자기 집 일은 뒷전이고 온 동네의 경조사엔 빠짐없이 들려가 일감을 거들어주고는 품값으로 술을 마셨다. 상농은 밭을 가꾸고 중농은 곡식을 가꾸고 하농은 풀을 가꾼다 했지만 철남이는 풀마저 가꾸지 않았다. 다른 집의 논밭에서는 풀 한포기도 찾아보기 힘들고 곡식이 혀를 빼물고 자랐지만 철남이네 논밭에는 범이 새끼를 칠 정도로 잡풀이 성해 아예 곡식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철남이는 벌써 젊은 나이에 간이 술에 절어 간경화복수라는 몹쓸 병에 걸리게 되었다. 더는 남편과 살수 없다고 생각하던 차 친정집에 놀러갔던 옥자는 친정마을 아낙네의 소개로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천진시 보계현으로 무작정 떠나게 되었다.

    옥자가 병이 깊은 남편과 3살 난 딸을 두고 가출했다는 소식이 마을에 퍼지자 마을사람들은 옥자를 나쁜 년, 독한 년이라고 타매하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나도 이렇게 좋은 개혁개방시대를 만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 여태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하지만 옥자아주머니의 가출은 승냥이를 피한다는 것이 오히려 호랑이굴에 뛰어든 격이 되었다. 옥자아주머니가 “좋은 일자리”를 찾아 도착한곳은 천진시 보계현의 나이 먹은 한 홀아비네 집이었다.

    그때 상황을 1991년 3월 30일자 《연변일보》는 “중시를 돌려야 할 엄중한 사회문제”라는 제목과 “조선족녀인들이 내지로 팔려가는 현상 놀라울 정도”(기자 허룡석)라는 부제아래 다음과 같이 기사화하였다.

    “지난해 3월 화룡시검찰원에서는 화룡현의 한 여성이 다른 사람의 소개로 천진시 보계현의 한 홀아비한테 팔려가 감금당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현검찰원, 현부련회, 현공안일군들로 련합구원대를 뭇고 갈급하게 천진시 보계현으로 들어갔다. 구원대가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6백 명되는 마을사람들이 구원대를 겹겹이 둘러쌌다. 감금당한 여인의 집에 가보니 펀펀한 여인은 기지사경이 되어 꼼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중략) 경이롭게도 그곳의 멍청이, 불구자, 나먹은 홀아비들과 붙어사는 연변의 조선족 여인들이 과다했다. 보계현 경내에만 해도 화룡, 훈춘, 안도, 연길 등지에서 왔다는 여인들이 100여명이 된다니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략) ‘초롱’속에 갇혀 사는 그녀들은 성에 굶주릴 대로 굶주린 홀아비들의 봇둑 터진 성을 만족시켜주는 도구로 어린애를 ‘생산’하는 도구로 충당되고 있으며 ‘남편’의 사인재산으로 취급되며 육체와 심령을 갈기갈기 찢기고 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다른 한 문장에서 조선족 여인들이 내지의 한족홀아비들한테 팔려가는 현상에 대해 메스를 들이댔다.

    “내지에서 유괴되는 여인들 70% 이상은 ‘천진한’ 처녀들이지만 연변에서 유괴되는 조선족 여인 90% 이상은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는 ‘노련한’ 가정부녀들이다. (중략) 외계와는 거의 담을 쌓고 오랫동안 농촌구석에만 맴돌면서 여태껏 고생을 달갑게 씹어 삼키며 모든 것을 남편과 웃어들게 순종하며 사심 없는 희생 속에서 자기존재를 망각하던 조선족가정부녀들이 개혁개방의 봄바람을 타고 많은 것을 보고 듣게 되었다. (중략) 남편이라는 사모를 쓰고 거드름만 피우며 일하기 싫어하고 하루건너 술에 퍼져 노세노세를 부르며 안해만 부려먹는 일부 조선족남성들의 열근성도 여인들이 집을 뛰쳐나가게 하는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되고 있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통탄을 금할 수 없었다. 현대사회에 어찌 중세기에 발생할법한 이런 기막힌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17세기 병자호란으로 전쟁에서 참담하게 패한 조선은 수많은 조선여성들을 청나라에 내주었다. 청나라 노예시장에 팔려간 여성들은 우여곡절 끝에 귀향하고서도 환향녀(還鄕女, 화냥년)라는 오욕을 얻고 평생 “죄인”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하루하루를 살얼음 위에서 가슴을 달치고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흘러간 역사 속에서 두시대의 여성들이 “성노예”로 전락한 원인을 가리기란 진드기와 아주까리가 맞부딪힌 것처럼 구분하기 힘든 것이 아니다. 17세기에는 전쟁에 패해 어쩔 수 없이 조선여성들이 타향에 팔려갔지만 현대사회에서 조선족남성들은 저절로 자기의 아내를 불구덩이에 밀어 넣은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조선족 여성들의 운명은 “화냥년”들의 운명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홀아비에게 팔려간 현대 조선족 여성들은 아픈 과거로 가슴을 집어 뜯으면서 반절의 인간으로 살지 않았다.

    이웃에 살던 옥자아주머니는 보계현에서 풀려난 뒤 중국 전역을 전전하면서 짠지장사로 창업자금을 마련하였다. 지금은 연길 지하상가에 갖춘 매장 세 개를 딸에게 물려주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장사익은 “화냥년”들의 타국에서의 슬픔을 “찔레꽃”이라는 노래에 담아 불러 많은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였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아! 찔레꽃처럼 춤췄지/ 찔레꽃처럼 사랑했지/ 찔레꽃처럼 살았지/ 찔레꽃처럼 울었지/ 당신은 찔레꽃/ 찔레꽃처럼 울었지”

    우리의 조선족 여성들이 소름 끼칠 정도로 슬픈 이 노래를 부르면서 조선족남성들을 원망하는 그런 비극은 다시는 재연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껏 우리의 조선족 여성들은 삼종지도를 운명으로 목석처럼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들은 억눌려 고갈된 무기력한 건초(乾草)가 아니라 억눌려 고갈되어 고사 직전에 메가톤급의 에너지를 생성하고 있었다.

    우리의 조선족 여성들은 유교사상에 의해 형성된 고식성과 보수성을 뒤집고 왜곡되었거나 자조(自嘲)하던 상(像)을 지우개로 말끔히 지워버리고 화려한 탈출에 성공하였다. 남은 것은 삼종지도의 고삐를 쥐고 연연해있는 남자들의 과감한 의식패턴에로의 탈출뿐이다.

    자, 이제 우리의 농촌총각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껏 일해 부자가 되여 조선족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여 알콩달콩 깨알이 쏟아지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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