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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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
2010년 05월 21일 11시 29분  조회:875  추천:16  작성자: 조글로
수필 

전주한옥마을



 

 제10회 해외동포문학상 시상식의 일정으로 전주한옥마을 체험이 배정되었다. 당초 한옥마을체험에 대해서 나는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 한옥이라면 연변에서 흔히 말하는 조선집이 아닌가. 태어나서부터 16세에 집을 떠나기까지 줄곧 한옥에서 살았고 또 연변에서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게 한옥이 아닌가.

    우리를 태운 승합차는 오후 5시쯤에 우리가 하루 묵을 전주한옥마을 은행나무 길의 아세헌(雅世軒)에 도착하였다.

    아세헌은 고풍스런 목조건물로 전주 한옥마을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은행로 내의 도심 실개천가에 자리 잡았다. 도심 실개천은 태조로를 중심으로 자연스러운 곡선 형태로 조성되었다. 실개천의 수원은 지하 150미터의 암반수를 끌어올려 사용하고 있는데 거울처럼 맑아 조약돌이 알른알른 거렸다.

    실개천에서 맘껏 물장난을 즐기는 애들의 모습이 보인다. 고풍스런 한옥과 실개천을 마주하니 어릴 적 추억이 실개천을 따라 흐른다.

    아세헌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집 혹은 우아한 세상의 집이라는 뜻의 테마 한옥민박이다.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안채와 행랑채 한가운데 있는 안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안마당에는 크고 작은 화훼들이 줄느런히 놓여있다. 흰 꽃이 무리를 지어 피는 안개꽃 같은 이름 모를 꽃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솟을 대문을 활짝 열어젖힌 대청마루에 앉으니 초가을 바람이 거침이 없이 불어와 여로에 지친 나그네의 고달픔을 말끔히 씻어준다. 댓돌 위 툇마루 한편에 앉으니 먼 길을 에돌아 고향집 문턱에 앉은 듯 마음이 홀가분하다.

    저쪽 툇마루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손님이 내게로 다가와 어디에서 왔는가 물었다. 내가 중국 연변에서 왔다고 하자 그 손님은 자기는 서울에서 왔는데 중국 연변에 다녀왔다면서 반가와 하였다. 성이 이 씨인 손님은 중국을 포함한 세계 100여 개국에 다녀왔고 지금은 발 가는 대로 동으로 서로 국내여행을 다닌다고 하였다. 그가 부러웠다. 나그네 같은 여행가, 그게 나의 꿈이었는데 언제 실현될지 묘연하기만 하다.

    행랑채는 모두 두 칸으로 된 민박시설이고 안채는 ㄱ자형으로 되었는데 바깥쪽은 주인내외가 기거하고 있었고 안쪽은 역시 민박시설이지만 별도로 손님들이 한복을 입고 소리와 민요, 가야금을 배울 수 있는 전통 한국음악체험교육관으로 활용된다고 했다.

    아세헌은 한국국악경연대회 가야금병창 부문에서 2차례 최우수상을 받은 국악인 박윤희(32) 씨가 전주시로부터 임대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행장을 풀고 샤워를 끝내고나니 저녁시간이 된지라 우리는 곧바로 전주한옥마을의 명물인 전일슈퍼로 향했다.

    전일슈퍼는 한옥마을의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어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이른 저녁부터 맥주꾼들로 빈틈이 없었고 얼굴들마다 불긋불긋해있었다. 하지만 떠들썩한 연변 맥주집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모두들 취기가 도도했지만 조곤조곤 담소하고 있었다. 반시간 넘게 기다려 안쪽에 있는 작은 테이블이 차례졌다.

    전일슈퍼는 낮에는 슈퍼지만 저녁에는 맥주집으로 변신한다고 한다. 가게맥주라고 부르는 전일슈퍼는 뒤에 공간을 터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다 놓고 술을 마시는 곳이다. 전일슈퍼의 단골메뉴는 갑오징어와 황태이다. 황태란 우리가 말하는 명태를 말린 것인데 연변의 황태와는 맛이 사뭇 달랐다. 연변의 황태는 약간 딴딴하고 질겨 씹기 힘들지만 전일슈퍼의 황태는 폭신폭신하여 씹기 쉽다. 또 연변의 황태는 인공조미료로 짭짜름한 맛을 내는 게 특점이지만 천일슈퍼의 황태는 매실 등 천연조미료를 가미해 달큼하고 씹을수록 고소한 것이 특점이었다. 청양고추와 들깨 등 16가지 재료가 들어간 비법 양념장에 바삭하게 잘 말려진 황태포와 갑오징어를 찍어 먹으니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연변에 이런 맥주집이 나타난다면 대박을 터뜨릴 것이라 생각했다.

    늦은 시간에 아세헌에 돌아왔다. 밤공기가 으슬으슬 하던 차 뜨스한 구들에 등을 붙이고 나니 고향의 등대 목처럼 편안하다. 맥주를 적잖게 마신데다 귀맛 좋은 귀뚜라미소리마저 들려 어느새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꿈인 듯 생시인 듯 은은한 가야금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고 보니 어느덧 날이 희붐히 밝았다. 안개를 헤치는 듯 은근한 가야금소리가 계속 들린다. 툇마루에 놓인 녹음기에서 울리는 가야금반주일 것이라 생각했다. 세면을 마치고 툇마루에 나서니 저쪽 툇마루에서 우아한 한복차림의 박윤희 씨가 가야금을 타고 있는것이 아닌가. 요란한 나팔소리만을 기상(起床)소리로 알고 있던 나에게는 그러한 기상(奇想)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에 식탁에 오른 반찬이 무려 20여 종류가 넘었다. 고등어조림, 콩자반, 어리굴젓, 조개젓, 파김치, 오이선, 배추김치 등 맛깔스런 음식이 한상 가득하다. 나는 이전에 전주라면 콩나물국밥과 콩나물비빔밥이 전주전통음식을 대표하는 음식인줄 알았다. 하지만 아세헌에서 진정한 전주음식의 정통성은 “전주 가정식 백반”인줄을 알게 되었다. “전주 가정식 백반”이란 전주지방의 여인들이 집안에서 세세대대 전승해오는 품격을 갖춘 음식으로서 하나하나 여인들의 정성으로 만들어지는 요리들이다. 백반상은 반찬 가지 수가 많아 무려 100여 가지가 된다고 한다. “전주 가정식 백반”은 특별히 짜거나 맵거나 하는 음식은 없으면서 모두가 싱거운듯하면서 깊은 맛이 우러나오며 입에 짝짝 붙는 게 일품이다.

    아세헌의 “가정식 백반”은 박윤희 씨의 시어머니가 직접 조리한 것이라고 했다. 박윤희 씨는 아세헌의 “가정식 백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아세헌에서는 한번 조리한 음식을 다시 냉장고에 넣는 법이 결코 없다고 한다. 먹을 만치 올리지만 모자라면 언제든지 더 청할 수 있다고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마을 언덕 위 오목대(梧木臺)에 올랐다. 오목대는 고려 우왕 때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돌아가다 친지들을 불러 승전을 자축했던 곳이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 한옥 800여 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입지이다. 1911년 전주성 동쪽 성곽이 헐리면서 한 채 한 채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규모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오목대에서 내려와 한옥마을 중심거리인 태조로(太祖路)를 따라 걸으면 전주의 대표적인 문화재인 풍남문과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로 불리는 전동성당,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경기전, 전통술 제조과정을 관람하고 주례도 배울 수 있는 전통술박물관, 전통한지 제조기법을 체험할 수 있는 전주전통한지원, 전주공예품전시관,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문학관 등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최명희문학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최명희 선생은 소설 《혼불》로 유명한 작가이다. 소설 《혼불》은 “한국 풍속의 보고, 모국어의 보고”란 평가를 받는 대작이다. 최명희 선생은 생전 “아름다운 조각품을 볼 때, 그 아름다운 조각품이 태어나기 위해 떨어져나간 돌이나 쇠의 아름답고 숭고한 희생을 우러르며 가슴 아파했고,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다운 동백꽃만큼 그 둥치에 낀 이끼의 생명력을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키를 넘는 선생의 달필 육필원고는 지운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하다. 마치 선생의 맑은 심성을 원고지에 옮겨 놓은 듯 하다. 최명희문학관 출구에는 시인들이 최명희 선생을 기리여 적은 육필 시원고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에 백남준의 시가 가슴에 와 닿았다.


                      이름 부르는 일

                            백남준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네

초저녁 분꽃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

그 사람 이름을 불러보네

문밖은 이미 적막강산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


    서울에 돌아와 최명희 선생의 소설 《혼불》을 사러 교보문고에 들렀지만 절품이라 구할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전주 한옥마을은 숙식은 물론 다도, 전통공연, 민속놀이, 음식체험 등 각가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적소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뿌리 깊은 문화의 마을, 이는 한민족의 문화적정서이면서도 삶의 뿌리인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넘어지지 않듯이 깊은 문화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세세대대 융성할 것이라 믿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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