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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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무지하면 야만이 된다(4)
2013년 07월 15일 12시 19분  조회:4753  추천:2  작성자: 김송죽
 

에세이 무지하면 야만이 된다(4)

 

1981년에 열리였던 중국공산당 11계6중전회는 <<건국이래 당의 약간한 력사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전민족을 동란에 빠뜨렸던 “문혁”에 대해서 다음과같은 결론을 내리였다.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사이에 있은 ‘문화대혁명’은 건국이래 당, 국가와 인민에게 가장엄중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주었다”

“사실이 증명하다싶이 ‘문화대혁명’은 혁명 혹은 사회진보에는 그 어떠한 의의도 없거니와 있을수도 없었다. ‘천하가 크게 혼란해야 천하를 크게 다스린다’고 했지만 자신을 큰 혼란에 빠뜨렸을 뿐이다.” 

“사회주의조건하에서 진행되였다는 이른바 ‘한 계급이 다른 한 계급을 뒤짚는’ 정치대혁명이라는 것이 경제기초가 없고 정치기초도 없었기에 그 어떠한 건설성적인 강령도 내놓지 못한 것이고 그래서 엄중한 혼란과 파괴와 후퇴만을 가져왔던 것이다. 력사는 이미 ‘문화혁명’이란것은 령도자가 잘못발동함으로 하여 그것이 반혁명집단에 리용된것이고 당, 국가와 각족인민에게 엄중한 재난만 가져다 준 내란이였다고 알려주었다.”
당과 국가는 "문화대혁명"을 철저히 부정한 것이다.

 

그런데 변을 보고 뒤를 제대로 닦지 않은것 처럼 청결이 제대로되지 않아 후환이 생길것 같으니 심히 우려된다.  요즘 어떤 한문판사이트에 보면 지난때 “혁명자”노라 머리를 내저으면서 악행을 서슴치않고 감행했던 어떤 맹장잔얼은 잘못을 깨닫기는 커녕 되려 공공연히 뛸쳐나와 “어디 두고봐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의의를 부정하는 자는 좋은끝장이 없을것이다”고 댓글로 으름장을 놓으니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깽깽이 풀 황련의 쓴맛은 그것을 씹어본 사람이 잘안다. 내본신이 지긋지긋한 문화혁명의 맛을 톡톡히 본것이다. 하기에  정치인도 관원도 아닌 일개글쟁이요만은 우리 조선족가운데는 혹시 그같이 못난 얼간이가 머리를 쳐들지나않았나 하는 우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요즘은 무지하면 야만이 되는 주제를 갖고 련속 글몇편을 써 올리고있는 것이다.

 

새밭에다 불을 지르는 자는 그 새밭을 다 태워버리자는것이 목적이지 다른게아니다. “문혁”이 터지자 수도홍위병퇀(首都紅衛兵團)이 상해에 남하(南下)하여 감행한 각가지의 폭행은 일구난설(一口難說)이니다.

 

1966년 9월 13일, 수도의 “남하병퇀(南下兵團)”은 상해에 이르자마자 상해의 로동모범, 학련대표(學聯代表)와 좌담회를 열면서 말로는 자기들은 상해에 배우러왔노라했다. 하지만 남하(南下)한 그들ㅡ 북경언어학원과 외국어학원의 홍위병들의 속심은 전혀그런것이 아니였다. 그들은 갖고간 전단(傳單) 인쇄물들을 거리에 뿌렸거니와 공공연히 <<가장가장 긴급한 혁명창의>>라는 <<창의서(倡義書)>>를 내놓았던 것이다.

“지금 상해에는 용인할 수 없는 일이 한가지가 있다. 어떤것인가? 그것인즉 어떤 허이방분자(黑幇分子)는 지금까지도 여진히 법밖에 나돌면서 호강살이를 하고있다는 그것이다. 하여 우리는 상해시 전체 홍위병과 광범한 공농병군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는 바이다ㅡ 무릇 요물잡귀신의 월급은  일률로 낮출것이며 은행저툭통장, 텔레비죤, 사진기, 쏘파 등을 일률로 몰수하며 보모는 일률로 해고해야한다. 그들을 고급사택과 별장에서 쫓아내야하며 낮에는 일률로 로동개조를 시키고 밤에는 일률로 사상을 교대하게해야한다. 그자들에게 일률로 ”요물잡귀“라는 패쪽을 목에 걸게해야 하고 자전거도 타지 못하게해야 한다. 요물잡귀는 영원히 번신못하게 만들어야한다.”

 

이와동시에 상해에 남하한 수도병퇀은 각구와 련계를 달면서 “적정정찰”을 하고는 로만(盧灣), 홍구(虹口), 정안(靜安), 황포(黃浦), 갑북(閘北) 등 구역에 나뉘여 가산을 수색몰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맨첫날에 수색당하고 털리우는 요물잡귀가 50호였다.
첫날은 그래도 몰수한 재산수를 기록했으나 이틑날부터는 아예기록도하지 않고 빼앗기만했다.

“북경에서는 아예 문을 들부시고 들어가는데 이게뭔가, 이러면 너무 례모를 차리는게 아닌가. 혁명은 손님접대를 하는 일이 아니다!”
하면서 그들은 수색과 강탈강도를 높혔던 것이다.

로만구(盧灣區)에 간 130여명의 남하를 한 북경홍위병들은 3패로 나뉘여서 세집을 털었는데 그가운데 하나는 우(虞)아무개라는 집(虞洽卿의 아들)이였는데 홍위병들은 그들 부부의 머리를 깎았다.  그래놓고서는 그들의 딸과 너는 립장이 바로설 수 있느냐고 묻었다. 우의 딸이 바로설 수 있노라하니 좋다 그렇다면 이걸로 너의 아버지를 때리라면서 가죽피대를 주었다. 아무렴 어쩌면 딸이 제부모를 때린단말인가? 그러지 못하겠다고 뒷걸음치니 그들은 그의 머리도 우악스레 잡아 보기사납게 깎아놓았다.

다른한집은 “양노(洋奴)”라는 별명을 가진건데 주인은 나이가 80이 된 반신불수의 로인이였다. 그런것을  그의 아들, 며느리, 딸한테 가죽띠를 주면서 로인을 때리라했다. 그들은 그렇게 못하겠노라 뒷걸음쳤다. 홍위병들은 로인의 아들을 묶어 욕실에 넣고는 실컷때렸다. 그러고나서야 그들은 트럭 3개에다 가장집물들을 걷어싣고 전람을 시킬 목적으로 체육관으로 가버렸다.

30여명으로 구성된 한 홍위병 남하대(南下隊)성원들은 진모(陳謀:  原三靑團分隊長)의 집을 수색할 때 그집의 식솔 다섯의 머리를 다 깎아놓았거니와 혁띠와 자루긴 우산과 불집계와 지팽이로 마구때렸다. 이에 진모((陳謀)가 아품을 참지 못해
“16조에 원더우(文鬪)하고 우더우(武鬪)를 말라했는데 너희들은 왜 이러는가?”항거하니 홍위병들은 “때려죽이지 않으면 그게 바로 원더우(文鬪)인거야.”하면서 사람을 그냥때렸다.

이웃들에서 와보고 너무한다고 하니 홍위병들은 그네들이 보지 못하게 문을 닫아걸고 기껏때렸다.

 

통계를 보면 9월 15일전에 북경에서 남하한 홍위병들이 10개구에서 모두 90호좌우 수색했는데 서회구(徐匯區)에서 58호가 털리웠을뿐만아니라 홍위병들은 털어간 물건들을 갖고 “자본가착취죄증전람관”을 꾸렸을뿐만아니라 물건을 되돌려주기는새려 집까지 빼앗아내여 그들을 몸둘곳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기간에 우도우가 48차였는데 대상자 98명중 머리를 깎이우고 물매를 맞은 사람이 82명이였다. 마음선량한 시민들은 정책대로 원도우(文鬪)를 해야지 그래서야되느냐 사람은 살게해야지 했다. 그러니 홍위병들은 “원도우(文鬪)”는 투쟁하지 않는것과 같다“면서 ”상해는 너무나조용하다. 이래서야야 어디 혁명이 되는가. 때려죽여도 문제없다. 돈 8원을 쓸뿐이다“했다. 8원은 화장비였다.

 

9월 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의 통계를 보면 북경의 남하홍위병(南下紅衛兵)들이 30차의 우도우(武鬪)를 했는데 매를 맞은 사람이 100이상이였다. 우도우(武鬪)는 낮이 아니라 밤에 감행되였는데 문을 닫아걸고 때렸다. 매를 맞은 사람은 옷에 묻은 피를 씻어야 하거니와 아무리 아프고 병신이 되어도 병원에 가서는 안되였다. 그러면서 매맞는 대상자들은 매일 방을 바꾸었다. 때린 죄증을 숨기위함이였다. 

 

얼마지나지 않아 남하홍위병(南下紅衛兵)의 우도우(武鬪)가 “4류분자”와 “자본가”의 범위를 벗어나 “문제”있는 “사회청년”과 “떠돌이꾼(流民) 등에로 옮기여 발전했다. 그러면서 그 방법도 수색당하는 장소로부터 형실(形室)을 따로 정해놓는데로 변해버렷던 것이다. 북경 남하홍위병(南下紅衛兵)들의 그같은 본새가 어느덧 상해는 물론 전국에 널려있는 수백개도시에 시범으로 퍼지는통에 홍위병들을 더더욱 의지굳고 배짱센 맹장이 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즈음에 곳곳에서 북경홍위병들과 련계를 짓는 따촨랜(大串聯)이것이 시작됐는데 그 때문에 “계급각성”을 검증하느라 별의별 인간의 도의(道義)를 벗어난 해괴한 일이 다 발생했던 것이다. 한 경력자가 쓴 <<大串聯>>(新星出版社)을 보았는데 그가 다니는 학교에서 제일 큰 “홍태양조판총부(紅太陽造反總部)”에서 홍위병끼리 서로 련계를 다는 <<大串聯>>을 조직한게된건데 사람은 많고 인원수는 제한이라서 참가자를 고르고 제한하느라 내놓은 부대조건이 많았는데 각종 고험을 이겨내야 참가할 자격이 된다는데도 있엇던 것이다. 그 고험이라는 것이 어떤것들이였는가?


사이가 제일가까운 친구의 귀뺨을 때리라면 너는 때려야한다.

네가 좋아하지 않은 선생의 정수리에다 표어를 써 붙이거라.

너의 부모가 끌려나오면 너는 사람들이 제일많이 모여 들끓는 곳에 그를 끌고가야한다. 등등.

 

부정모혈(父精母血)이라 아버지의 정수와 어머니의 피라는 뜻이니  자식은 부모의 뼈와 피를 물려받았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大串聯>>에 나서겠거든 너는 제부모도 서슴없이 욕보이는 후례자식이 되라는 것이였다.   

 

“대해항행은 타수에 의거하고, 만물의 성장은 태양에 의거한다”면서 “위대한분의 말 한마디가 억만마디를 당한다”고했던 세월, 그년대에 인간의 의지를 지배하는 지도서(指導書)는 홍보서(紅寶書)라고
불렀던 “어록”책이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손에 들고 “충성무”를 췃고 날마다 때시걱전이면 위대하다는 사람의 초상을 우러러 “삼경삼축”을 했다. 신통히도 일본이 망하기직전모양이였다. 그때 내 나이 5~6살이였는데 사람들이 소화천황이 있다는 일본쪽을 향해 밥먹기전에 기도를 하듯 그러는 모양을 본 기억이 났다. 그래 웃음이 나왔지만 속으로 웃었을 뿐 감히 표면에 나타내지는 못했다. 웃을 수 없었다. 앞가슴에다 초상마크를 달지 않아도 딴눈으로 보는 세월이였는데 누가 감히 억만인민의 한결같은 충성심을 비웃는단말인가?

그때는 인간성이란 아예 베버리고 사람잡이에 나서서 활개치는 자를 “혁명자”라했다. 비틀어진 인정에 원안이 쌓이고 쌓여 호곡하는 삭막한 저주로운 세월이였다.
해도 그런자들에게 죄책을 묻고 처벌하기는 어려운것이 아직까지의 실정인 것이다.
강청이 심판석에 올라갖고서도 한마디만은 과연 “명창”을 했다.

“나는 주석의 개다. 그가 누구를 물라면 나는 누구를 물었다.”

한데 지금에 이르러까지도 그런 구실을 내놓아서야 되겠는가?

 

“어디 두고봐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의의를 부정하는 자는 좋은끝장이 없을것”이라고?

말을 이같이 하는것이 젊은이라면 그는 영락없이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전혀모르는 무지한일거고 젊은이가 아니라 나이가 50을 넘긴 사람이라면 그는 꼭 ”10년동란"때 남을 때리고 수색하고 빼앗기각질에 맹장이 되었던 망나니일 것이다. 그런 주제에 정녕 지금에 이르러서까지도 자기가 저지른 일ㅡ  죄를 뉘우칠줄도 모른다면 그는 그야말로 진짜무지한 야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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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연변
날자:2013-07-18 00:40:51
김선생님 참잘쓰셨습니다.76년도에 저는 6살이였습니다.유치원 선생님이 모주석서거하셨으니 우리보고 울어라해서 우는흉내를내는데눈물이 안나서 슬며시 침을눈에바르고 우는체 하였습니다.지금도 모택동 말만나오면 그때생각이나서 우스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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