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매정스레 불어치는 찬바람은 울긋불긋 곱게 물들어 나보란듯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춤추던 단풍잎들을 땅바가에다 흩어놓았다. 불안한 세월이라서 자연이 주는 감각이 다른가? 이해의 겨울은 이왕년보다 느닷없이 빨리닥치는것만 같았다.
서일은 유리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자연의 이러한 변화에 누길을 던진채 한가지 일을 다시금 상기했다. 경성(鏡城)에 있는 모교ㅡ 유지의숙(有志義塾)이 사회의 변혁에 따라 모습이 달라졌다는 소식이였다.
전번달인 10월 14일자 은 이렇게 보도했던 것이다.
며칠안되여 서일처럼 그 유지의숙을 졸업한 김학섭(金學燮)이 나타나 우리도 이 경원학교를 차원높은 학교로 꾸려봄이 어떠냐고 제의해왔다. 그는 여기 이 경원(慶源)의 태생이였는데 손잡고 제고향을 남보다 못지 않게 잘 건설해보자는 웅지(雄志)를 품은지라 서일은 그가 찾아온것이 반가왔다. 그러잖아 그도 이제는 보통학교를 중학교로 승급시켜 볼 궁리를 하고있었던 것이다.
우근진소지단(右謹陳訴旨段)이니 유세차감소고우(維歲次敢昭告于)니 복지제기자미유항려(僕之弟幾子未有伉儷)니 복미심차시(伏未審此時)니 하는 따위의 땅문서, 소장, 축문, 혼서, 편지쓰기같은 것만을 중시하던 시대는 언녕지났다. 이제는 어문, 수학, 자연과학을 비롯하여 초등본국력사지지(初等本國歷史地誌), 본국력사지지(本國歷史地誌) 등을 기본과목으로 하는 외에도 동국사략(東國史略), 녀자국문독본(女子國文讀本),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이순신전(李舜臣傳), 국민수지(國民須知), 대한역사(大韓歷史), 대한지지(大韓地誌)같은 서적들을 과외필독물로 정해주어 학생뿐만이 아니라 국민모두가 의무적으로 읽어보도록해야 할 것이다.
세월이 가니 지금은 전만 썩 달라졌다. 전 경원군에서도 계몽운동의 열풍이 일기시작했던 것이다. 도내의 읍이건 시골이건 그 어디에건간에, 지어 아무리 초가집만있는 가난한 고장일지라도 학생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당과 동네에서 공동으로 쓰는 도청은 기와집으로 바뀌였다. 서당대청에 북과 종을 달아 북을 치면 글을 읽기 시작하고 종을 치면 쉬는데도 있고 종만 달아놓고 때리는 수와 간격을 정해놓고 그것을 울려 시간을 알리는데도 있었다. 마을의 도청은 회의도 하고 세상이 돌아가는 형세를 놓고 왈가왈부 론하고 야학도 하고 혹 뉘집에 손님이 왔는데 잠자리가 없으면 류하기도하는 장소로 리용되고 있었다.
서일은 모교생 학섭이를 교원으로 채용하면서 손잡고 학교를 잘 운영해보자고 했다.
이러던 중 11월 22일 문득 이홍래를 다시만나게되였다. 하루의 교수를 다 끝낸 어슬녘이였다. 서일이 수학과(數學課)를 가르치는 박기호와 함께 퇴교를 하느라 교문을 막 나서고있는데 웬 사람이 앞을 막아서는 것이였다.
《와, 이제는 도시사람돼서 사람 못알아보는거 아녀?》
그가 말을 걸어오는지라 다시보니 이홍래(李鴻來)였다.
《아니 어떻게 돼서 여기는요?!》
《하마터면 모르고 지날번했네요!》
기호도 서일도 이 뜻밖의 상봉을 무척 반가와했다.
이홍래(李鴻來)는 만주에서 돌아온 후 아직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있었다. 로일전쟁이 끝났건만 일본군은 거의돌아가지 않고 지금 조선에 널려 경계가 삼엄하니 한둘이 들고일어나봤자 어차피 진압당하기마련이요 숨이 갑갑한게 조짐이 좋지 않으니 당장 무슨 변이라도 생길것같아서 살피고있는 판이라했다.
《요즘 왜 이래? 하세가와 그놈이 주둔군사령으루 와서 하는 짓이 아무리봐야 그저일같잖아. 저들이 한국독립을 위해서 싸운다고했었지. 그래 싸워 이겼으면 제 굴로 돌아들갈거지 왜 가지 않고 뻣히는가말이여?》
이홍래는 이러면서 라철(羅喆)을 찾아갔더니 라철은 그지간 훈련원(訓練院) 권지부정자직(權知副正字職)을 버리고 민간외교를 한다면서 일본에 건너간것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만나지 못했고 지난날 자기가 궁궐에서 수위노릇을 할 적에 상관이였던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도 여차여차해서 만나지 못했다, 하여 그들을 내놓고는 맘을 시원히 털어놓고 함께 시국을 론해 볼 사람은 서일밖에 없는지라 곧 찾아왔노라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지간 다니느라 로고많았겠습니다. 헌데 이또오가 왜 또 왔답니까?....뭐, 들으니 초문이라구요?.....원, 어쩜!》
서일은 일본군이 조선땅에서 철거안하는 것도 문제려니와 이또오 히로부미가 갑작스레 천황의 특파대사로 파견된게 수상해서 숨막히듯 갑갑하다고 했다.
그들 셋이 서일의 집을 향해서 걸음을 놓고있는데 저기 가계방옆쪽 판자로 지은 신문파는 집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시끌벅적거렸다.
웬 일인지 모르겠지만 서일은 마음이 심란해났다.
누군가는 신문쥔 손을 머리우로 치켜 올려 허우적거린다. 그러더니 곡성이 터진다.
《어이구! 망했다, 망했어! 우린 망했어!....》
불길한 예감이 뇌파리를 때리는지라 이쪽의 세사람은 걸음을 뚝 멈추었다.
들려오는 곡성이 그들의 가슴에다 구멍을 펑 뚫어놓고 있었다.
셋은 그쪽으로 달려갔다.
모두가 허탈한 비감에 빠진 모습들이였다.
《웬 일입니까? 무슨 보도가 났길래?》
서일은 아무하고나 물어보았다.
면목모를 어른이 억장이 무너져 내리게 한숨을 길게 토해놓고는 물어보느라 말고 제눈으로 보라면서 신문을 주었다
서일이 받아 보니 큰활자로 박혀진 표제만 보일뿐 어둠이 급속히 덮치고있어서 다른 글자는 보아낼 재간이 없었다. 이것이 11월 20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이라니 래일아침에 배달될건데 왜 일찍이 왔을가? 게다가 온 신문마저 다 팔려버렸다. 공교로왔다. 서일은 가타부타 말 한마디도 없이 신문 한부값을 그 어른의 손에 제꺽쥐여주고는 얼른 자리를 떴다.
세은 침묵으로 당장 폭발할것 같은 가슴을 달래면서 잰걸음을 놓았다. 그들은 서일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전등을 켜놓고는 신문에 실린 론설부터 읽어봤다. 그것은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이《을사5조약》의 강압체결과 관련하여 쓴 글이였는데 일본이 강요한 이번조약의 침략성을 폭로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구절구절이 페부를 찔러놓았다.
《아아! 개자식들이 나라를 팔아먹어서 이젠 망하게됐구나!》
기호가 격분하여 주먹을 부르쥐였다.
《예감이 좋지 않더니 끝내 이꼴이 되는구나, 각을 찢어죽여도 시원찮은 역적놈들!》
서일은 억이 막혀 말이 더 나가지 않았다.
《역적놈들을 없애치워야 해, 역적놈들을! 씨알머리도 안남게 모조리 없애치워야 해!》
이홍래가 구곡간장이 끊어지는 것만 같다면서 이를 갈앗다. 주먹을 부르쥐는데 노기찬 그의 눈에서도 어느덧 이슬같이 맑은것이 반짝거렸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은 이 론설과 함께 또한 오건조약청제전말(五件條約請締顚末)이라는 제목으로 이 조약이 강제체결되기까지의 경위를 폭로했다.
《“일본정부는 도오꾜오에 있는 외무부를 통하여 금후 조선에 대한 외교관계 및 사무를 처리한다.”... 이건 외교권을 빼앗는 판이로군!》
서일이 조약의 제1조의 내용을 뇌이면서 말했다.
《“제2조라, 조선정부는 일본정부의 중계가 없이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도 할수 없으며....” 쳇 저들이 대체뭔데? 이게 조선을 독립시켜주는건가? 개같은 자식들!》
기호가 욕설을 퍼질렀다.
《제3조를 보구려. “일본정부는 그 대표로서 조선에 을 두어...” 뭘 어쩐다?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한다”....?. 허, 이거 원! 외교권을 빼앗아가면 조선은 남는 것이 무엇이며 왜놈이 와서 통치하면 나라가 무슨 꼴이 되는가?.... 이거야말로 에누리없이 식민지로 전락되고마는게 아닌가. 이러면 나라는 다 망한거나마찬가지지 뭐야!》
이홍래의 웨침이였다.
일본은 이번의 이 조약을 통하여 조선정부의 외정을 제마음대로 처리할수 있는 권한을 완전히 빼앗아냄으로써 그의 대외적기능을 말살하자는 것이요 조약에서 말하는 보호통치는 본질상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실시하자는것임을 표명하는것이였다. "통감"이라는건 "고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것이다. "고문"이란 말그대로 "고문"의 자격으로 내정과 외정을 간섭하는것이지만 "통감"은 내외정을 직접 장악하고 지휘하는 실제상의 통치자인 것이다. 그리고 또 조약에 보면 나라의 중요한 지방들에 "리사관"을 둔다고 하였는데 이는 "통감"의 손발이 되어 각 지방을 통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것이다. 말끝마다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보장하고 보위해준다던 일본의 량심이 이러했단말인가?
세 사람은 이또오 히로부미가 표리부동하고 교활하며 그 수완이 이를데없이 악랄하고 지독하다면서 그의 앞잡이가 되어 나라를 팔아먹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5역적까지 싸잡아 증오하고 저주했다.
이틑날은 토요일이였다. 나라에 액운(厄運)이 떨어졌는데 정상적인 교수가 될리만무였다. 하지만 선생이면 학생을 책임져야겠기에 서일도 기호도 학섭이도 다른선생들도 다가 예전대로 제시간에 등교했다. 이홍래가 때마추와서 함께 학교로 나갔다. 직접 의병을 지낸 사람의 말 한마디가 더 실감적이라여겨 그에게 연설을 시킬 궁리였다.
한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거리는 스산했고 나다니는 사람도 전날만 적어졌다. 하지만 무지각자와 부랑자와 꼴불견의 술주정뱅이는 오늘도 눈뿌리를 아프게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렴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법당에다
산재불공 말구
외로운 이내몸을 네가 괄세를 말라.
중년의 사나이였다. 술을 어디서 퍼마셨는지 만취되여 이리비틀 저리비틀 거리를 쓸듯하면서 마주오고 있었다.
《에그, 아주반님두! 장참 타령만 부르구는 어떻게 살우? 쯔쯔....》
지나가던 녀 행인 하나가 그를 면목아는지 혀를 끌끌 찼다.
《와 못들었수? 외로운 이내몸을 네가 괄세를 말라잖아.》
술꾼은 취중에도 정신많은 잃지 않았지 녀인의 말에 이렇게 퉁명스레 퇴박을 놓고는 계속해서 흥얼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는 얼마나높나
정든땅 부모처자 집에다두고
동경대판 돈벌라 련락선탄다.
《자식! 네 입에서 노래가 나와?》
이홍래가 그러는 꼴을 보기싫어 높은 어성으로 한마디 핑잔했다.
《허, 허허허....》
저켠은 몸을 흔들거리며 어이없다는 듯 허구푼 웃움을 흘리더니 대꾸질했다.
《넌 대체 웬 놈인데 어르신님을 훈시냐?》
《나라가 망해도 네 입에서 노래가나와? 자식!》
《지갈길이나 갈게지 싱겁게...나라가 망하건 뭐가 망하건 내 알배가아니야, 내 알배가아니야.》
《이자식아, 뭐라구?》
이홍래가 참아낼 재간이 없어서 따귀를 한 대 찰싹 붙인다.
주정군은 얼결에 눈에서 불이 번쩍 나게 한 대 맞고 보니 정신나는지 어마뚝하여 얼얼해 나는 뺨을 썩 썩 어루만진다.
《어쨌다구이러우? 》
《이 맹충이같은 놈아, 정신 좀 차리거라!》
이홍래는 이제다시 대꾸질하면 콱 밟아놓으리라 으름장까지 놓았다.
《취중몽사하지 말구 정신 좀 차리시오, 정신!》
서일도 한마디 충고하고나서 학교쪽을 향해 걸음을 다시놓았다.
울분은 감정을 들뜨게 하는지라 이날 사생모두가 일찍 등교하여 새조약을 놓고 운운했다. 을사년에 체결되였다해서 을사조약(乙巳條約) 혹은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라고 하며 모두 다섯개 조항으로 되어있다해서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이라고도 부르게 되는 이번의 한일협약(韓日協約)은 외교권을 일본에다 다 넘겨주는 조약이니 곧바로 망국조약(亡國條約)이나 다름없었다. 하여 그걸 모르는 이가 거의없게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아직도 정신이 흐려갖고 그것을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주고 있었다.
《....그런다면 그건 자기가 남의 노예로 되는 것을 숙명으로 달게 받아주는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생여러분, 정신차리고 깨여나시오! 이럴때 잠을 자서는 안됩니다! 절대안됩니다!》
이홍래는 전교사생이 모인 앞에서 연설했다.
《일본은 마관조약으로부터 로일전쟁에 이르기까지 대한의 독립자주를 부르짖어왔지만 그것은 모두가 빈말이였고 속임수였습니다. 처음에는 적자(賊子) 이지용을 유혹하여 협정서를 늑체(勒締)하고 나중에는 역신(逆臣) 박제순을 협박하여 신조약을 맺어 우리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장차는 통감을 두어 이천만의 우리 동포를 통치하려고 합니다. 생각들 해보시오. 노예가 됨은 소, 말과 같은 신세가 됨을 의미하는것이어늘 이 민족을 이 지역에서 어디로 몰아갈 것인가?.... 왜놈들은 이 민족을 험한 구렁텅이에 몰아넣지 않으면 황막한 벌판에다 내쫓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는 삼천리 아름다운 이 강산을 저들이 차지하고 말 것입니다. 조국이 없는 민족은 부모없고 집잃은 아이와 같은겁니다. 그렇다는것을 명기하고 잊지 말아야합니다.》
이홍래는 조선은 비록 작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인민들이 전에는 성격이 강직했다는 것, 그러나 문치(文治)의 여파(餘波)로 인하여 민기(民氣)는 줄어든것이요 그러다보니 천하의 대세를 통찰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지금은 제 권리마저 빼앗겨 죽음이 목첩에 이른것도 모르고있다고 했다.
《사람은 필사(必死)할줄을 알면 그 가운데 생(生)의 길을 찾을것이요 필사할줄을 모르고 요행을 바라다가는 결국 죽고말 겁니다. 만민이 일심이 되어 싸운다면 빼앗긴 권리를 되찾고 살길은 나지는겁니다!》
그의 연설은 격정이 끓어번지는 호소로 끝마치였다.
서일이나 이홍래뿐 아니였다.
기호, 학섭이나 다른 사생들뿐이 아니였다.
온 경원사람다가 다음날의 "황성신문(皇城新聞)"에는 또 어떤 보도가 실릴까고 하면서 기다렸다. 한데 꼭 보자고 기다리는 그 신문은 오지 않고 훗날 11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실리였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또한 1면의 론설에서 《황성임무》라는 제목밑에 라고 장지연을 비롯한 신문편집자들이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의 체결내막을 세상에 폭로한 언론활동을 옹호하여 나섰다.
모두들 이제야 "황성신문(皇城新聞)"이 배달되지 않은 원인을 알게되였다.
《일본이 언론계를 탄압하는구나, 비렬하게!》
서일은 격분했다.
누군들 격분하지 않으랴.
일본이 조선의 신문을 탄압한 것이 이번만이 아니였다. 지난해의 10월 9일에 군사경찰훈령의 시행에 관한 내훈(內訓)이 제정, 집회, 신문, 잡지, 광고 등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될 때에는 이를 제한, 정지 또는 금지시킬수 있다고 발표하던 그날로 언론탄압의 철권을 휘두른 것이다. 허지만 일본의 이러한 탄압에도 신문의 논조는 쉽게 수그러지지 않았다. 사전검렬에서 저촉되는 내용은 활자를 뒤집어서 발간하는 이른바 이 나왔던 것이다.
반항이였다.
이번에 장지연은 사설과 기사를 싫은 신문을 일본군의 검열을 받지 않은채 배포하였다. 하여 "황성신문(皇城新聞)"은 무기정간을 당하고 사장 장지연을 비롯하여 공무원을 포함한 10여명의 사원이 체포되는 수난을 겪게 된 것이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 한국신문은 그래 일본의 무자비한 철퇴를 얻어 맞아 한 마디 말도 못한단말인가? 그렇지 않았다. 이때에도 영국인 배설(T. E. Bethell)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일본조차 어찌할 수 없는 신문이였던 것이다. 그 신문에 실린 보도는 조선인민의 반일감을 폭발시켰다.
《매국조약을 페기하라!》
《왜적을 몰아내자!》
《5적을 처단하라!》
경원학교 사생들은 구호를 웨치면서 일본의 침략책동과 을사5적의 매국배족인 행위를 준렬히 규탄하였다. 학교는 교학을 할 수 없었다.
《우리 서울로 올라갑시다. 조약을 철회하라고 상소를 올리던지....》
서일은 잠자코있을 수 없었다.
그와 박기호, 이홍래 김학섭 넷은 돈이 자라는대로 다 털어갖고 말 4필을 빌어 타고 지체없이 그날로 서울을 바라고 경원을 떠났다.
경성(鏡城)에 이르러 보니 격분한 사람들이 일본 사람의 가계를 습격하여 전부 뚜드려 마수어 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으며 주인은 죽을까봐 겁나 어디론가 내빼고말았다. 한데 유지의숙에 들려보니 이운협교장이 을사조약이 맺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나 통분하여 자살하려다가 학생들에게 미연에 발각되여 성사못한채 병원에서 구급치료를 받고 있었다.
《나도 가야지!》
성묵이도 말 한필을 빌려타고 따라나섰다.
그리하여 다섯이 한패가 되어 달리고 달려서 30일날 오전에 마침내 서울에 들어섰다. 타고 온 말을 어느 한 마사(馬舍)에다 맡기고나서 그들은 동춘루(東春樓)라는 간판을 내건 려관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서울역전 남대문통 5정목 13번지 중국인이 경영하는 려관이였다.
려관을 잡아 한시름을 놓은 그들은 근처의 음식집에서 늦은 아침을 제꺽 치르고 곧 떠나 남대문을 지나고 덕수궁을 지나서 종로로 향했다.
이때의 서울은 초상집처럼 되어 애처롭고 험악한 분위기에 잠겨있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을 닫고 통곡했고 교도들은 교당에서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고 울었으며 상인들은 철시를 하고 외치였고 유생들은 상소를 했으며 원로대신(元老大臣)들은 여러날째 항쟁을 했다.
서일 등 다섯사람이 종로에 이르러 보니 길이 메도록 사람들이 가득모여들길래 대체 무슨 일이 생겼는가고 물어보니 민영환이 자결했다는 것이다. 이홍래가 그 소리를 듣자 악연히 놀라면서 민영환의 집으로 달려갔다.
민영환인즉 갑신정변 때 개화파들의 칼을 맞고 쓰러진 민태호의 양아들로서 민비는 그에게 사촌고모벌이 되는 것이다. 이에 민영환은 고종의 신임을 받고 벼슬이 례조판서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한때는 영국, 독일, 프랑스, 로씨야, 이딸리아, 오지리 등 나라의 특명전권공사를 겸임하기도하였다. 친일파들이 득세하는바람에 친로파였던 그는 시종무관장이라는 한직에 밀려나가있었지만 나라의 운명을 자기 목숨같이 여기는 대바른 사람이였다. 한데 황제가 상소를 받아주지 않으니 내가 이제 나라를 잃고 구차히 사느니보다는 차라리 깨끗이 죽는 편이 나으리라면서 다섯통의 유서를 남겨놓고 이른새벽에 배를 갈라 자결하고 만 것이다.
서일이 모인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맨상투바람에 흰명주옷을 입은 40대의 사나이가 눈물을 휘뿌리며 민영환의 "국민에게 고하는 글"을 읽고 있었다.
사나이가 유서를 다읽자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들리면서 울음이 터졌다.
저 사람이 누군가고 물어보니 서울사람 하나가 아 그분이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으로 발탁한 이상설(李相卨)이 아닌가 한다. 1870년생인 이상설은 27세에 성균관(成均館) 교수로 임명되고 곧 성균관장(成均館長)으로 승진되였다. 지난해의 8월에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의 회장에 추대되였다. 부회장에 이준(李儁), 총무에 정운복(鄭雲復), 평의장에 이상재(李商在), 서무부장에 이동휘(李東輝), 편집부장에 이승만(李承晩), 지방장에 약기탁(梁起鐸), 재무부장에 허위(許爲) 등 이름이 쟁쟁한 사람들이였다. 이상설은 을사조약의 늑결(勒結)은 곧 망국조약이라 단정하고 임금에게 5역신의 규탄을 상주(上奏)함과 동시에 임금보고 《이 조약은 인준(認准)해도 나라가 망하고 인준을 아니해도 나라는 이미 망하게 되었으니 페하는 차라리 순사직(殉死稷)하라》고 하였다. 이처럼 임금을 죽으라고 강조한 신하는 아마 동서고금에 그 례가 드믈 것이다.
이상설은 민영환과 같이 왜의 침략을 저지할 책략을 강구하여 임금에게는 국가를 위하여 죽으라고 강권한 것이고 일면 참정 한규설에게도 순사(殉死)할 것을 맹약받은바 있는것이다. 군신중에서 한사람이라도 그 장면에 죽음으로 항거하는 자가 있다면 그 조약은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가 전날 원임대신(原任大臣) 조병세(趙秉世)를 소두(疏頭)로 하여 궐하에 엎드려 단식으로 밤을 새우니 수백명의 동지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다가 급기야 일본군이 몰려와 총검으로 협박하는 통에 해산당했던거다.
사람들이 갑자기 벅작했다. 방금 땅을 치며 통곡하던 이상설이 자결하려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손에서 칼을 앗아내고 피투성이 된 그를 인력거에 태워 병원으로 날라갔다.
하루지나 12월 1일에는 원로대신 조병세가 "국민에게 고하는 글"과 "외국공사들에게 보내는 글"을 남겨놓고 자결했으며 뒤이어 전 참판 홍만식, 학부주사 이상철, 평양진위대 병사 김봉학, 전 대사헌 송병선.... 자결자가 속출했다. 이같은 의로운 자살행위는 영향이 커서 지어는 량심적인 중국사람, 일본사람마저도 자살로 자국민에게 경종을 울려주거나 일본의 강도적인 행위에 항거했다.
일본에 류학갔던 중국청년 반숭례(潘崇禮)는 귀국하다가 배가 인천항에 정박중 어떤 선객으로부터 민영환의 유서를 보게되였다.
《한국의 멸망은 중국이 멸망하는 서막인데도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아직 각성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나의 죽음으로 국민을 각성하게 해야겠다.》
그는 이같이 말하고는 시국에 대한 견해 14조를 적어 정부에 전달하여 달라고 벗에게 부탁하고는 바다에 뛰여들어 자살했다. 나이가 42세였다.
《이또오 히로부미가 한국을 강박하여 새조약을 체결하고 자주권을 빼앗은 것은 강도적행실이다. 나는 일본사람이지만 이같은 강도적행실에 죽음으로 항거한다!》
일본의 평화주의자 니시자까는 조선에 와서 떠돌아다니던 중 일본이 조선을 강박하여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루차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할복자살로 항거하였던 것이다.
자결한 상관의 시체라도 봐야겠다며 달려간 이홍래가 돌아오지 않아 서일, 기호, 성묵이와 학섭은 정간된 황성신문(皇城新聞)사옥이라도 가보자며 려관을 나섰다가 공교롭게도 거리에서 신채호를 만났다. 그도 서일을 알아보고 무척 반가와했다. 신채호는 그사이 성균관박사가 되였는데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 론설기자로 들어갔다가 필화(筆禍)를 격게 됐노라면서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늑결(勒結)되였음에 통탄을 금치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