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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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장편소설 <<관동의 밤>> 제1 부(3) 댓글:  조회:2193  추천:0  2015-02-03
                                       3           악한자는 그 나름대로 악한 심보가 따로있는거다. 적악지가에 필유여앙이라했거늘 남을 해쳤으니 그 죄를 어찌할가.    《배를 찾지 못할 바에야 이젠 배값이라도 받아낼 궁리를 해야지. 않그렇습니까. 그저 손해만보고 앉아있을 수야 없지요.》     민호가 속타산을 내비치자 가싼다는 이마살을 찌프린다.    《이 사람아, 우리가 그걸 누구한테서 받아낸단말인가?》    《가철군의 애비한테서 받아내죠.》     이 말을 듣고 나쟈도 머리를 가로젖는다.    《안돼. 그렇게는 못해. 범인을 잡지두못해갖구서 무슨 수가 있다구 그러오. 안돼, 안되다니까. 우선 증거가 있어야 하는거야.》    《체, 범인을 꼭 잡아야 증거가 되는건가. 이 일은 그러지 않아도 얼마든되는겁니다.》     민호는 여유작작하게 대구했다. 목덜미를 잡지도 못하고 걸고들었다간 동티를 낼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깟것은 무섭지 않았다. 주범은 그놈이 아닌가. 딱 점찍고있으면서 왜?.     유씨네는 배값을 담은 얼마간이라도 받아내기싶은 생각이 불붙듯했다. 하지만 이 일은 법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막연한 일이니  그만 맥을 놓고있는 상황이였다.     하지만 민호는 달랐다. 그저 왜 이렇게 당하기만해야하는가. 법으로 해결이 안될거면 차라리 내 주먹을 믿어야지. 되든 안되든 한번 해보자 맘먹고는 유씨를 향해 가씨네 집에 가서 한번 걸어볼텝니다, 후일은 내가 책임질데니 념려말고 제발 말리지만말아주시오 하고는 지체없이 친구를 데리고 나섰다.     변비의 가을날씨라서 어느새 차가와졌다. 곧추 무원을 향해 달려간 그들은 이 사람 저 사람한데 물어서 생각대로 끝내 가씨댁을 찾아내고야말았다. 그런 다음 그들은 배포유하게 주인을 만나봤다. 때는 저녁켠. 가씨가 퇴근해서 마침 집에 있었고 마누라도 있었다. 한데 녀석이 어디갔는지 낯짝이라도 한번 다시보려는 가철군은 집에 없었다.    《손님들은 대체 뉘시오?》     예감이였던지 머리쌀이 갑작스레 어지러워난 가씨는 느닷없이 나타난 초면의 두 불청객을 경계하면서 조심스레 대했다.    《댁의 철군이가 어디메루갔습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우. 건데 자네 갠 무슨일에 찾는거요?》    《가철군이 우리 집의 배를 빼앗아가서 그럽니다.》    《원 무슨소린지…》    《댁의 망나니가 강탈을 했단말입니다.》     민호는 잡담제하고 명토를 박았다.     이러자 예상과 같이 일은 되어갔다. 근거도 뵈이지 못하면서  줴친 소리건만 병통을 면바로 찔렀는지 가씨는 단통 낯색이 샛하얘지면서 안절부절을 못한다. 제아들의 됨됨이를 너무나 잘아는 부모라 이런 경우 입이 백개라도 할말이 없었던거다.     《그래 나더러 어쩌라는 거요?》     《부모니까 책임져야죠. 배값을 내시오. 그게 어떤 배라구. 방금만들어서 아주 영 새건데. 훽해배입니다!》     《뭐라오? 어이구!》      가씨는 신음을 토해냈다.      그의 마누라는 아예 입도 열지 못하고 떨기만한다. 적잖은 이들이 억울하게 당하고는 절치부심 하면서도 감히 찾아오지 못했다. 결찌많은 아들놈이 보복을 무섭게 할까봐. 한데 이들만은 그렇지 않았다. 무겁한 태도로 해보자고 드는 판이니 가슴이 얼어들기 시작한거다. 내아들만 막짓을 할가, 악이 나면 누구든 행패부리기마련이야. 이들은 아마 칼을 품고 왔을거다 하고 생각하니 가씨내외는 겁이 질려 떨기까지 했다.     《어떻게 할텝이까, 담은 얼마라도 배값을 내겠습니까 아니면 죄진 아들 콩밥 멕이겠습니까? 우린 호의루 찾아왔다는걸 아시오. 정말루 양보를 하면서까지 말입니다. 이래두 싫다면… 댁의 아들이 승천입지를 한대두 우린 찾아낼텝니다! 붙잡아낼텝니다! 복수할텝니다! 두고보시오 안그러는가구!》     민호는 짧은 중국말재간을 다 털어 재고 당기며 윽박질렀다.     대방의 배때벋은 짓에 가씨는 한결 주눅들어 감히 대들지도 내쫓지도 못했다. 그는 불효자식때문에 똥감태기를 쓴다면서 거의 울상이 돼갖고 신음소리를 내더니 하는수없이 집에 있는 저축금을 몽땅 내놓았다.     배값은 안되지만 액수가 적잖았다. 길림대양(吉林大洋) 200원이니. 이 돈이면 철갑상어 천근값과 맞먹는 셈이다.     그야말로 혀바닥으로 면도칼을 갈 듯이 우둔한 짓이였다. 하지만도 유씨네는 잃은 것을 얼마간이라도 찾은 셈이라 기뻐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또 이 일로해서 어느때든 보복이 돌아올것 같아 은근히 가슴을 죄이기도했다. 해도 민호는 그깟거 하고 꿈만해하였다.    《아직두 더 받아내야합니다. 개는 무서워하면 무서워할수록  더 얏잡아보고 물자고 달려들지요.》        한편 날이 가고 달이 가건만도 린화는 한번 병상에 누운 후로 아직 일어나지 못한다. 어느날 가싼다가 동강진에 가서 또 쌀만을 청해왔다. 언젠가 민호의 거짓수작에 넘어가 귀신약을 주었던 그 쌀만이였다. 그가 그때 준 귀신약이 효험을 보았다. 그건 어쩌다가 면바로 상과 맞아서 그렇게 된게지 쌀만이 만들어 낸 귀신약이 령험해서가 아니였다. 더욱히 그것이 만병을 통치하는게 아닌거고. 과연 그같이 령험하다면 왜서 쌀만을 다시청할가?     쌀만은 전번때와 같이 자기를 귀신으로 분장하더니 짜장 미쳐나는 것 처럼 한바탕 열성스레 부산을 떨어댔다. 가싼다는 그가 그러는 것이 감사무지하여 돌아갈 때 별비로 큰아들이 방금 강에서 잡아온 큰 잉어 한 마리까지 더 보태서 줘보내는것이였다.     이래도 정성이 부족한가 지성이 부족한가? 쌀만이 왔다갔어도 린화는 병이 호전되기는 커녕 외려 점점 더 악화되기만 했다. 이젠 머리가 천근같이 무거우면서 빠개지듯 아파났다. 그러다가 그것이 좀 진정 될 때면 베개밑에서 개미 기여가는 소리를 황소가 싸움질하는 것으로 들을지경이다. 그토록 허약해진거다. 하건만 유씨네는 치료한다는게 고작해야 쌀만이나 불러다 굿을 하게 하곤 내쳐두니 이를 어쩐단말인가. 코막고 답답한치들아, 무지의 고배를 기여히 마셔봐야 정신차릴거냐?… 민호는 그들이 하는 짓이 점점 더 민망스럽기만했다. 이런때에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되라지 하고 내쳐둔다면 환자는 영락없이 잘못될것이다. 아무렴 그꼴을 어떻게 보고만있겠는가. 격이 나더라도 사람은 살려고놓봐야하는게 아닌가. 하여 민호는 욕지기가 나오는 것을 소태 넘기듯 겨우 목구멍으로 넘기고나서 유만진앞에서 다시금 제 주장을 피력했다.    《이젠 굿은 그만두구 제발 내 말을 들어주시오. 린화를 살리겠거든 어쨌든 의원의 약을 써야합니다.》     유씨는 이젠 별 도리없겠는지 그럼 네가 한 번 나서보라했다.     이젠 린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의원덕이요, 칠성판을 지면 내탈이라겠지. 우매한 제 탈인건 모르구. 민호는 이런 각오를 하면서 가싼다보고 돈 30원만 달라해서 행장을 갖춘 후 곧추 의란으로 향했다. 의원이 가까운 동강진에도 있지만 큰 약국은 그래도 그곳에 있을것이였다.     의란에 간 근는 먼저 약국에 들려 약부터 샀고 그 다음에는  공부하고 있는 청량이를 찾아가서 집에 변고가 생긴것을 알려줬다.  민호는 그래놓고 온김에 고태의연한 옛 금조(金朝)의 흔적을 감상했다. 한데 그는 여기에서 생각밖에 조선독립혁명진영의 현황을 다소 알수있게되였다. 어느 독립운동자가 이곳까지 와갖고 퍼뜨린 소문인지 아니면 관방에서 알린 소식인지 로씨야령에 넘어갔다가 직전에 되건너온 일부 독립단체마저 이제는 싹 다 해산되여 그 존재마저 보이지 않는다고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닌게아니라 울음이 나갈일이였다.    《우린 어쩜 이렇게 자진하고마는가. 아아!…》     민호가 어래무레 돌아와 친구한테 형세를 알렸더니 친구역시 가슴터지게 한숨을 토하고는 목놓아울었다.     한편 오래동안 간헐적인 두통에 시달리던 린화는 민호가 의란서 지어온 첨약을 먹고 정신이 차츰 돌기 시작했다. 이젠 몸이 춰서도록 보양이 될만한 음식을 많이 먹어야할 것이다. 한데도 번번이 보면 유씨네는 타스헌이니 다라카니 라부다하니 하는 따위의 물고기음식만 그냥 해주었다. 곡기나게 낟알과 산짐승고기는 왜 안먹이는지, 그런걸 먹였으면 좋으련만…         어느덧 추운 겨울절기에 들어섰다. 한데도 올해는 아닌때에 산신령을 노엽힌 범자가 생긴터로 쌀만이 그 벌로 입산제를 보름이나 늦추다보니 아직은 토끼 한 마리도 감히 잡을 수 없게됐다.    《개코야! 입산제는 무슨놈의 입산제야! 그런다구 산에 못들어가? 흥.》     어느날 허저인의 신앙을 개떡같다면서 내내 우숩게만 보아온 최기덕이 이같이 씨벌이며 사냥하러 나서는 것을 민호가 막았다.    《왜 이러니, 제기! 덤비긴... 산에 가면 산놈 따라부르고 바다에 가면 바닷놈 따라불러라했어. 괜히 큰일치지 말고 잠자코있거라.》     유씨네는 연어잡이를 하지 못하다보니 남처럼 돈을 벌지 못했을 뿐 이왕년과 마찬가지로 제먹을 고기는 그래도 두루장만했다. 하여 지금 유씨네도 마을의 여느집과 마찬가지로 겨울철 사냥준비를 다해놓고 입산날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는판이였다.      어래무에서는 올까지 동네사람이 실종되고 변을 당하고 보니 누구든 혼자서 산속을 감히 드나들 용기가 나지 않아 친척이나 가까운사람끼리 짝패를 무어 사냥하기로했다. 이런 집체식의 사냥이 전에도 없은것은 아니다. 어느 패나 나이 듬직하고 사냥경험이 있으며 산에 익숙하고 일처리를 공정하게 하는 사람을 저들의 책임자로 선출한다. 그러고는 그번의 사냥을 일임케 하는데 그 사람을 로더마바라 한다. 로더마바는 사냥시 자기 패거리의 모든 활동을 지배한다. 만약 사냥군지간에 어떤일로 분기가 생길라치면 그것을 조해하며 자기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면 모여서 처리하기도 한다. 로더마바에게 그것 외 다른 어떤 특수한 권력은 없다. 그도 여느 사람과 같이 사냥하고 수렵물도 똑같이 나눠가진다. 따라서 사냥철이 끝나면 그의 직무는 해소되는거다.     두 조선청년은 준비가 하나도 되지 않았기에 사냥을 나가고싶어도 마음뿐이였다. 하여 그들은 땔나무나 넉넉히 해놓고 뜨뜨한 시르맨커에 들어앉아 근산의 잔짐승잡이놀이로 이해의 겨울을 지내려했다.     마을에 이마칸을 하는 사람이 왔다기에 그게 어떤건지 들으러갔다온지 사흘이 되는 날 민호가 친구보고 말했다.    《착고를 빌려와야겠다. 창애도 몇틀있어야 하구. 짐승잡이를 하자면 우선 잡동사니들이 있어얄게 아니냐. 맨손으루야 어떻게.》    《나쟈형이 이제 갖다줄게요. 어제 서르미를 만들던데. 내가 그보구서 하고 물었더니 하더구만. 그래 난 기뻐서 좀 거들어줬소.》    《모르겠다 떡줄놈은 꿈도 안꾸는데 김치국부터 마신게아녀? 더구나 넌 중국말도 잘 모르면서... 제대루 알아듣기나했니?》    《어이구, 정형은 내가 뭐 영 까막바본줄알우. 나도 이젠 웬간한건 알아들을만하오.》    《네가 알아들어? 불지말마.》    《분다니, 내가? 쳇!》    《아니면 정말이냐. 정녕 그렇다면 진보를 축하해야겠구나.》    《놀리지 마오. 나도 이젠 웬간한건 다 알아듣는다니까.》    《뭐라? 웬간한건 다 알아듣는다구? 야 이 로씨야대포쟁이야, 네가 그렇다면 그래 이마칸은 왜 안들었니? 그건 중국말로 한건데. 넌 한마디두 못알아듣겠다면서 린화네 집에 가구서두. 솔직히 말해봐. 거겐 너의 그 반양머리에 반한 계집애있어서 간거아녀?》    《어이구 알긴 개떡같이 아네. 사실대루 말해서 그 소녀 반한건 내가 아니구 정형이야.》    《허튼소리. 그 여자앤 미혼부있다는걸. 너도알아라.》    《알기야 알지만두.... 건데 그게 문젠가 뭐. 걷어장지면단데.》    《그게 될가, 안될거야. 그 민족은 안그래. 한번 정한 혼인은 절대 파하는 법이 없다는구나.》    《뭐라, 한번정한 혼인 파하는 법 없다? 그럴사한 자가당착인걸! 세상만물이 불변아니요 이 민족도 페단은 깨닫고 고쳐가면서 개화하고있는거다고 말한건 대체 누구였소. 그게 정형아니던가.》     기덕이는 어느땐가 허저족을 놓고 변론이 있은것을 새삼스레 끄집어내여서는 그걸 언질잡고 반박하려들었다.     말문이 막혀버린 민호는 뭐라고 대구했으면좋을지 미처 생각이 돌지 않아 어정쩡해있다가 그만 신경질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댔다 됐어, 내가졌다구하자.》     그들이 유씨집에 사냥도구빌러 갔더니 나쟈가 이미 준비해놓은 착고며 창애며 서르미며를 내놓으면서 그것으로 족제비, 황가리, 여우따위의 짐승들을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건너방에 있던 나쟈의 안해가 시누이와 함께 이쪽으로 건너오면서 말했다 .    《두분께서 마침 잘 오셨어요. 그러잖아 시누이를 막 보내려던참이였는데요.》     민호가 의아쩍어했다.    《아주머니, 무슨일입니까?》    《겨울옷을 해입어야죠. 두분 다 품을 재여봐야겠어요.》     츄얼이가 선참 민호앞에 다가와 제 뼘으로 체통을 재이였다.     최기덕이 한쪽눈을 끔쩍이며 능청떨었다. 봐라 내 짐작이 어때 그 계집애가 너한테 반한거 아니냐 하고 놀리고 있었다. 민호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 시각 여지껏 점잖을 빼온 자신의 낮가죽이 가면구로 되여 한까풀 홀랑 벗겨지는것만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이 수치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생육이 불전한 바보아니요 마음속 이성을 그리고 점유하고푼 맘이 너무도 자연스레 꿈틀거려서 사랑은 그야말로 자사자리한것임을 감수하기에 이른 그였으니.    옷이 인츰되였다. 감이 마련되여있은데다 유씨댁의 그 두 녀인은 솜씨재서 사흘내에 다 지어 친히 갖고 시르맨커에 와서 입혀보기까지했다. 유씨네가 지어준 겨울옷이라는 것이 실은 천이라곤 한쪼각도 들지 않은 순노루가죽제품이였다. 이곳 어래무의 허저인들은 겨울철이면 다가 이런 옷을 입는다. 안쪽에 털이 있는 이런 가죽옷은 기실 솜옷보다 한기를 썩 훌륭히 막거니와 모양도 보기좋았다. 그런것을 유씨네는 일전한푼 받지 않고 지어준것이다. 짜장 한집안사람같이 여기여. 하니까 이쪽은 말그대로 밥을 갖다주면 입을 벌리고 옷을 갖다주면 손을 내미는 식이 되고말았다.     이들의 은혜를 뭐로 갚으면 다 갚을가!     츄얼이 독촉했다.    《왜 그래요. 그 옷 얼씨덩 벗고 이걸 입어봐요.》     민호는 사내답지 못하게 쭈물거리다가 처녀가 독촉해서야 받아입었다.     츄얼이는 정성을 다한 제 솜씨의 진가를 알아낼모양으로 한참 이리보고저리보고 했다.     민호는 가죽오리를 감쳐만든 개씹단추가 신기해서 어루만지다가 입을 뻐개면서 한마디했다.    《아가씨지은 옷 내몸에 딱 맞는구만. 감사하오.》    《맘에 드나요?》    《들구말구. 물론이지.》    《그럼됐어요. 그런데 말이얘요. 절 아가씨라말고 이담부텀은 그저 츄얼이라고 불러줘요. 난 그렇게 불러주는게 더 반가와요.》    《더 반갑다, 그럼 그렇게 할가. 하하하하!…》     민호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소리내 웃었다.     츄얼이도 웃었다. 한결 유쾌해진 그녀의 얼굴에는 명랑한 홍조가 어리면서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남실거렸다. 교양있는 집의 고명딸로 자라난 츄얼이는 어딘가 도고한 자태였으나 오만하거나 거만한 티라곤 보이지 않았다. 가끔가다 애교는 부릴줄 알아도 다른 계집애들같이 경망스레 호들갑을 떨거나 가살피울줄을 몰랐다. 그녀는 인물고운 것 만큼 순직하고 맘씨곱고 인사성바르고 눈썰미좋고 손부불이 여물었다. 이런 일등급의 처녀를 그래 어느 총각인들 욕심내지 않으랴. 속담에 닭한테 시집가면 닭을 따르라해서인지 듣자니 츄얼이느 시집가면 남편공대잘하고 시부모잘모시는 정실한 안해감이라 소문이 나 임자가 벌써 있는데도 외지에서 혼사말을 걸어오는  총각이 한타스나 된다고 한다.        츄얼이는 이튿날 강아지 두 마리를 안고 시르맨커를 찾아왔다.   《두고길러요. 제가 우야즈네 보고 달래서 얻은거애요. 여기서는 개가 보배얘요.》    털이 똑같이 감실감실하고 복실복실한 그놈들이 이제 발을 탄지 얼마안되였다.    《요 귀여운것들아! 네놈들이 이젠 우리하구 한식솔됐구나!》     민호도 기덕이도 고것들이 참으로 귀여워죽겠다면서 한 마리씩 품에 안았다.     츄얼이는 웃다말고 눈을 할끗빨았다.    《곱다구만말구 건사잘해요. 개를 기를줄이나 아는지?.. 》    《챠 이거 사람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린가. 아니 그래 세상에 어느 바보가 그래 개기를줄도 모른단말인가.》     민호는 어처구니없어했다.     그러니 츄얼이가 정색해서 묻는다.    《그럼좋아요. 어디 말해봐요. 개를 어떻게 기르는가요?》    《거야 저놈들이 배곱파 울면 제때에 죽을 먹이구....》    《어마나! 그저 그렇게 기른단말인가요, 원! 한심해요. 개를 어디 그렇게 기르는가요. 깜깜이네. 명심해들어요. 개를 제대로 기르자면 첫째 소금이나 향기로운 음식을 먹이지 말아야 해요. 알겠나요. 그따위건 절대 먹이지 말아야한단말이얘요. 왜 그러겠어요. 그따위걸 먹이면 코가 둔해져 냄새를 잘 맡지 못한단말이얘요. 짐슴마다 피우는 냄새가 다른거얘요. 코가 둔해져 그걸 가릴줄도 모르는 개면야 무슨짝에 쓰겠나요. 않그래요. 그러니.... 개가 이제 좀 더 커서 빨랑거리면 데불구다녀요. 그래야 그게 어려서부터 길을 알아두게되는거얘요.》    《그담에는 어떻게 하랍니까, 아가씨?》    《날 그렇게 불러달라던가요.》     츄얼이가 민호를 향해 눈을 곱게 흘겼다.    《오! 하하하…》    《개는 두살먹어서부터 일곱살될때까지 퉈르치를 끌수 있어요. 그럴러면 목대가 세얄게 아닌가요. 개가 좀 크거들랑 목에다 몽둥이를 달아줘요. 그래야 개는 목덜미에 기운이 오르게되는거얘요. 생각해봐요, 안그렇겠나요.》    이쪽은 둘다 머리를 끄덕였다.    츄얼이는 이밖에도 여러가지의 상식들을 알려줬다. 평상시에 개가 짐승잡이하는 재간이 있는가 없는가를 관찰해야한다느니 성질을 장악하고 훈련시켜야한다느니…츄얼의 말과 같이 여기서 살아갈려면 과연 개를 알고 길러야했다. 개는 사냥시 유력한 조수일뿐만아니라 호신위사(護身衛士)였다. 그것이 겨울이면 또한 허저인식의 썰매인 퉈르치를 끌기도해야했다. 하니까 개야말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축력이기도했던것이다. 여기서는 어느 집에서든 다 개를 기르는데 제일적어서 세마리, 어떤집에서는 지어 열몇마리나 기르기도했다. 이 일대를 예로부터 견국(犬國) 혹은 사견부(使犬部)라 부른것도 바로 이 연유에서일것이다. 원나라나 명나라, 청나라때에는 여기에 개정거장까지 설치되여있어서 그것이 지어는 주요한 운수도구로까지 리용되었다고한다.     두 젊은이는 가싼다의 딸님이 명념하여 갖다준 강아지를 명심하여 잘 키워서 훌륭한 사냥개로 만들어보리라했다.        사정모르는 씨베리야의 찬바람이 불어오기시작했다. 가련한 생령들을 한품에 포섭하고 먹여살려온 산천마저 추위에 떨어댔고 강은 어느새 얼어붙기시작했다.     11월중순의 어느날이다. 심산으로 사냥을 가지 못한 둘은 아침을 든든히 먹고나서 또 하루작업에 나섰다. 차츰 근면한 살림꾼으로 되어가고있는 그들이라 애초에 계획한대로 잔짐승잡이에 재미를 붙인거다. 바람한점불지 않는 명랑한 날씨였다. 대지는 간밤에 내린 눈에 동일색의 흰이불을 덮고 조용한데 손거울같이 동그란 겨울해는 눈부시게 밝은 빛을 한껏 뿌려주고 있었다.    《오늘은 족제비잡이하기좋겠구나.》    《황가리잡이하기두 좋지.》    《그렇구나. 황가리건 족제비건 담비건 여우건 눈에 띄는 놈은 다 잡자. 그래서 짐이 되면 갖다 팔고. 족제비가죽 한장에 오원각수라니 좁쌀 한 되를 사구두 이원각수나 남잖아. 》     민호의 속구구였다.     요즘 잔짐승잡이해서 돈푼을 손에 쥐게되자 그들은 우선 쌀부터 사다가 밥을 지어 먹었다. 물과 가까이 있으면 고기의 성미를 알게되고 산과 가까이 있으면 새의 울음을 가릴줄을 알게되는 것이다. 물고기잡이도 짐승잡이도 차츰 미릅이 트기 시작한지라 그들은 이제는 거촌(居村)의 궁상에 낯이 익는 것 처럼 이 고장의 환경에 적응돼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쌀밥생각만은 더해갔다.     시르맨커근처에서 눈우에 찍힌 황가리발짝을 발견하자 그들은 두곳에다 덫을 놓고나서 함께 어래무시내를 건너서 서켠산으로 들어갔다. 산뜻한것이 동화속 그림같았다. 한곳에 이르니 하얀눈우에 한갈래의 오불꼬불한 짐승길이 그려져 있었다.     최기덕이 서르미를 놓으면서 혼자소리로 중얼댔다.    《여우야 여우야 제발 맞아다오. 그래야 우리 정형두 새 털모자나 하나 써보지.》     전날 여우 한 마리를 잡아 깝지를 발쿠어 팔았더니 할대양(哈大洋) 20원이였다. 민호는 그 돈으로 새 털모자 하나를 사서 먼저 친구부터 쓰게 하고 자기는 유씨네가 준 낡은 털모자를 그냥쓰고있었다. 그래서 기덕이는 미안해하는것 같았다.     민호가 그의 중얼거림을 잡아듣고 입을 열었다.    《뭘 그러니. 봐라, 나도 털모자를 쓰고있잖아. 이제 여우잡으면 그건 팔아서 돈을 만들어야한다. 돈! 돈! 안그래. 그래야 총을 사지. 뭐니뭐니 해두 그게 관건이구 중요한거야. 총! 총을 말이다!》     그는 고향떠나 만주당에 와서 느낀바를 새삼스레 회상했다.     3.1시위가 있기 전해인 1918년 11월, 대한의 독립운동가 39명이  여기 만주땅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의 대종교총본사(大倧敎總本司)에 모여 세계에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한바있다.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우리 단군황조께서 상제(上帝)에 좌우하시어 우리의 기운을 명하시며, 세계와 시대가 우리를 돕는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리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를 현양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하라 독립군! 제하라 독립군!...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이것은 선언문의 결속부분이다. 애국심이 좀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열혈을 끓게 하는 그 웨침이야말로 얼마나 장엄가!      민족의 해방운동과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에서 가장 올바른 방법이 곧바로 무력투쟁이였다. 하기에 독립군(獨立軍)이 창립된것이다. 일제의 조선침략이 의병운동을 발기시켰고 3.1만세시위는 민중을 깨우쳐주었다. 승냥이는 오로지 렵총으로 맛섬이 지당함을! 침략자와의 대결에서 인식이 높아진 애국지사들은 그 어떤 형식의 타협보다도 직접적인 무장항쟁이 더 실제적임을 깨달은것이다.     정민호가 몸을 잠그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바로 만주각지에 건립된 여러 독립군들 중에서 무력이 제일강한 부대였거니와 주력이기도했다. 선지선각자(先知先覺者)이자 대종교의 수령인 서일총재(徐一總裁)는 자신이 창건한 중광단(重光團)을 바탕으로 확대 재창건한 이 부대를 무적의 대오로 튼튼히 키우고자 그 얼마나 많은 심혈을 쏟아부었던가!      민호는 숨이 지는 시각까지 그를 잊지 않을것이다.     그것은 멀고도 험한 길이였다. 정민호는 자기가 무기운반대에 들어 친구들과 함께 서일총재를 따라 로씨야의 연해주에 가 수백자루의 장총과 탄약을 사서 등짐으로 지어 나르던 광경을 지금도 가끔 상기하군한다. 캄캄칠야에 억수로 쏟아지는 찬비를 맞으면서 적의 감시선을 넘어야했던 그 위험하고도 간고한 밀반입의 려정ㅡ그 것이 힘겹고 고달프긴했어도 또한 희열속에 희망이 벅차오르는 한때이기도했던것이다. 그때 그같이 육체를 혹사하는 고생이 있었기에 조선의 독립운동사상 금빛기록으로 남길 청산리대첩(靑山裏大捷)을 이룩할 수 있은게 아닌가!     아아, 그러나 오늘은....             간밤에 내린 눈이 발목을 덮고 있었다. 둘은 짐승을 찾느라 아느새 싸다녔다. 개들이 갑자기 짖어댔다.    《가만! 저게뭐요?》     앞에 가던 기덕이가 터져나오는 함성을 가까스로 삼키면서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들이 지금 가고있는 바로 저 앞에 체통이 여우보다 작고 몸체의 털이 갈색나는 몽통한 짐승이 나무뿌리를 뚜지다가 놀래여  달아난다.    《너구리다! 너구리!》     민호가 제손에 쥐고있던 지다창을 뿌렸다.     앙증맞은 그놈은 맞지 않고 달아났다.    《에잇, 이 미런한 등신보지!》     민호는 자신이 미달한 투창거리에서 너무 성급히 서둘렀음을  깨닫고 자신을 꾸짖었다.      산비탈에 동그란 흙구멍이 하나 있었다.    《오, 요게바로 고놈의 굴이구만! 됐소! 됐소! 이젠 고놈을 납짝 붙잡게 됐소! 》     기덕이가 짐승의 굴을 발견하곤 너무좋아 손벽까지 쳐대며 춤을 췄다.    《가만있자, 덤비지 말아야지.》     민호는 우선 다른 어디에 짐승이 달아날 수 있는 구멍이나 있지 않는가 살폈다. 그리고는 그 구멍에다 치더룽이 빌려준 든든한 지다창을 들이밀었다. 한데 감촉이 물렁하리라 여긴 물체는 닿이지를 않고 되려 흙같은것이 창끝에 마쳐왔다.    《어허? 요 앙증한 짐승이 어디루 갔을가? 뛸데없이 여기로 들어갔을텐데.》     둘은 창으로 흙을 뚜지다가 그만 맥을 놓고말았다.     토끼꼬리만큼이나 짧다란 겨울낮은 어느새 저물어갔던거다.     그들은 너구리는 커녕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돌오면서 볼라니 시르맨커와 가까운곳에서 털이 새노란 여우털모자를 쓰고 발에 물고기깝지로 만든 원다를 신은 어래무마을의 로인 하나가 빙천(冰釧)으로 쪼아낸 강판구멍에다 후리채를 넣어 휘젓고 있었다. 방금 잡아낸 손바닥만큼한 붕어가 강판에서 마구뛰면서 분탕질했다. 로인이 초면이 아닌지라 민호는 다가가며 롱조로  말을 걸었다.    《하 이거 로인님두 원! 남먹자는 고길 다 잡으면 우린 그래 굶어살란말입니까?》     로인은 고개를 들더니 두 조선젊은이가 손에 지다창까지 들었건만 아무것도 못잡고 돌아오는 꼴이라 맹랑해서 놀려줬다.       《건데 자네들이 잡은 짐승은 어쨌나? 왜  뵈질을 않아?》    《오늘은 공탕입니다. 아마 손에 재수가 붙잖는모양이죠.》    《토끼새끼두 눈에 띄이던가 그래? 》    《안띄긴요. 우린 그보다 더 좋은 놈을 놓쳤습니다. 너구리를 만났지요. 건데 고놈이 글세…》     로인은 민호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너구리라니? 그놈은 본디 겨울에 밖으로 잘 안나오는 습성인데 나왔더라지. 그놈 아마 죽자구 환장을 했던가봐.》    《글쎄요.》    《그래 그놈도 못잡았다 그건가?》    《글쎄요. 쫓았더니 굴에 들어간 놈이 없어졌습니다. 귀신이 곡할일이지 참.》    《가만있자. 굴에 들어가더란말이지. 그러믄야 그게 오소리굴이지 너구리굴은 절대아닌거야. 너구리란 놈은 원체 게을러서 제굴은 안파구 남의 신세에 살아가는 짐승일세.》    《아 그런가요. 그래서 음험하구 능청스런 사람을 너구리같은 놈이라고 하는 모양이죠.》    《그렇네.》    《건데 왜 들어간 놈이 없어는졌습니까?》    《자네들은 오소리굴이 어떻다는걸 모르는군. 그놈을 굴이 안에 들어가서는 여러갈래일세.》    《아, 그런가요!》    《그렇네. 오소리란 놈은 굴을 깊게 뚫는데 그 안은 가로 세로  통해있는거네. 어디 그뿐인가. 거기다 굴도 여러층일세. 말하자믄 그놈들두 인간모양으루 자는 방이 따로있는거구 창고두 따로있는거구 칙간두 따로있는걸세.》    《아니 뭐랍니까, 하하하!…오소리란 놈이 그래 제 굴속에다 칙간까지 만들어놓고 산단말입니까. 난 그 말씀이 어쩐지…》      《거짓말같은가. 아닐세. 정말이야. 생각해보게나. 그놈들이 겨울한철 내내 굴속에만 들어박혀있는데 똥오줌은 그래 어디다 누겠나. 아마 그래서 그런 궁리를 해낸것 같네.》    《그게 정말입니까. 한데 로인님은 고놈의 짐승들이 궁리가 그렇게 기발하다는걸 어떻게 아십니까. 설마 물어보지야 않았겠죠.》    《물어봤네, 물어봤어. 젊은이두 한 번 물어보게나. 그러면 오소리가 그렇다구 알려줄거네. 그놈의 짐승은 경각성이 대단히 높네.  약기두 하구…어떻게 약은가 하믄.... 이렇네. 그놈의 짐승은 남이 제 굴을 뒤지는 것 같으면 앞구멍을 제꺽 막아버린다네. 그래서 뒤지던 사람은 굴이 거기서 끝난걸루 알구는 그만 맥을 놓고마니 결국은 허탕치구마는걸세.》     로인은 오소리습성을 말하면서 그놈을 쉽게 잡자면 가장좋기는 봄에 나가 동면을 깨고 활동하기 시작 할 때 굴에 내굴을 불어넣는것이라 알려주었다. 허저인들은 오소리를 더러쿵이라 부르는데 고기는 먹고 가죽은 벗겨서 자리를 만들며 기름으로는 화상을 입거나 물에 덴데를 치료했다. 로인은 오소리란 놈은 가을철에 많이 먹어 살을 피둥피둥 지우고는 음력 10월중순께쯤부터 동면에 들어가기 시작한다고 알려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오소리는 천성이 굴파기를 좋아하거니와 궁리가 기발하고 묘한데다 우습게 노는 놈들이다. 오소리무리에는 전문 굴을 파고 운반하고 파놓은 굴을 멋지게 손질하기만하는 기술공이 각각 따로 있는것이다. 말하자면 분공이 돼있는것이다. 굴파는 놈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굴을 팔 때 흙나르는 놈은 등때기는 밑으로 배때기는 우로 올라오게 반듯이 눕는다. 그러면 다른놈들이 파놓은 흙을 그놈의 배우에다 착착 올려놓는다. 그래서 짐이 다 된것 같으면 여러놈이 귀를 물어 당겨서 밖으로 끌어낸다. 그렇게 해서 흙은 파는 족족 밖으로 운반되는건데 굴을 다 파고나면 그 의 등때기는 닳아서 털이 거진 다 빠지고만다. 그래 그모양이 됐다고 심히 불쌍히 여겨 여럿은 둘러싸고 아이고 이걸 어쩌나 몹시아플텐데 하면서 털이 하루속히 빨리나라고 홀홀 불어준다. 여럿이 모여들어 하도 극진히 위안하고 친절스레 구는통에 그 은 그만 터지는 울분도 참으며 묵삭이고마는거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나서 민호도 기덕이도 우수워죽겠다고 박장대소를 하면서 오소리동화가 과연 그럴듯 하다했다.      시르맨커로 가는 강판우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둘은 다가 거기에 대해서는 무심해하면서 시르맨커로 들어갔다. 생각밖에 츄얼이가 와 있었다. 인정스러운 그녀는 가을에 자기가 손수따서 만든 실백잣과 허저인들이 차얼카차라고 하는, 생선을 져며서 말린 포를 갖고와서 기다리다가 오지 않으니 져녁을 지어놓고 막 돌아가려던참이였다.      츄얼이는 짐짓 골난 모양으로 사내들을 핀잔했다.    《온 집안살림 싹 다 털어가도 모르겠네요. 어디루 나가겠거든 문이나 잘 단속해야지 그게 뭔가요 집안 다 얼궈놓으면서.》     민호도 기덕이도 량미간을 모았다.    《아니, 문이 열려있었다니?》     민호의 말 끝에 기덕이 동을 달았다.    《문은 내가 꼭 닫아놓구갔는데. 틀림없어.》    《틀림없다? 건데 문이 열려있더라잖아.》     괴상했다. 민호는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때려 밖으로 다시나왔다. 주위를 눈주어 살피고나서 시내로 내려가 강판우에 찍혀진 발자국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것은 북쪽에서 말타고 온 자가 말에서 내려 마을쪽으로 향하지 않고 여기 막까지 왔다가 되돌아간것임에 분명했다. 웬놈이 왔다갔을가?…머리속에서는 불길한 예감이 고패쳤다. 그는 고기잡이하는 로인한테로 달려갔다. 마침 로인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고기잡이도구들을 거두는참이였다.     민호가 다가가 물으니 로인은 아까 백말을 탄 사람 하나가 큰강쪽에서 왔다가 되돌아가더라면서 얼굴은 보지 않아 자기도 누군지 모르겠노라했다. 그러면서 그 로인역시 이상하다고 했다.    《웬놈이 왔다갔을가, 좋은 싹수가 아니야.》     민호는 낯색이 한결 어두워졌다. 이제 어느날 불청객이 다시나타나 어떤 불길한 짓을 할지 모른다. 하니 방비책을 대야했다.    《총이 없으니 활이라도 당장 하나 만들어야잖소.》     기덕이도 같은 생각이였다.    《그래야지. 준비해야겠다. 준비없는 대적은 실패다.》     이틑날 그들은 굵기가 맞춤한 참나무를 골라 곱게 다듬은 다음 거기에다 피나무깝지를 꼬아 줄을 만들어 메우니 활이 되었다.      그런데 그게 아무리봐야 신통치않았다.         그 다음날이다. 어제 고기잡이하던 로인이 또 왔기에 자기들이 만든 활을 내다뵈였더니 로인은 보고서 이게 놀음감이지 어디 활이냐며 웃었다. 그리고나서 로인은 그 자리로 돌아가더니 제것을 하나 가져와서 그들에게 주면서 두고 쓰라했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변이라구야!       로인이 준 그것은 제작된지 오랜 진짜활이였다. 활은 허저인들이 옛적부터 사용해 온 사냥도구였는바 화승총이나 양포가 나온 그제나 신식의 베르단이나 머스킷총이 나온 지금이나 의연히 버리지 않고 가끔씩 사용하는 무기였다. 그들이 제작하는 활은 단층궁과 쌍층궁 두가지였는데 로인이 가져다 준 활은 그 자신의 출중한 솜씨를 보여주는 정교하게 만든 쌍층궁이였다. 이 활은 길이가 한발이나되였는데 활체는 외층을 송목으로 하고 내층은 검정짜작나무로 했으며 그 사이에 노루힘줄과 사슴의 힘줄을 넣고 잔잔한 비늘이 붙은 고기가죽을 달여서 제조한 점력이 아주 센 풀로 붙이여 만든것이다. 활시위는 가느다란 사슴힘줄이였다. 그래서 활은 단단하고 질기고 탄성이 아주강했다.     그 허저인로인은 두 젊은이가 봐서는 도무지 알아낼수 없는, 허저인들은 아무라커라 부르는 나무를 쪼개여 만든, 철촉을 단단히 박은 살 24대와 시위를 당길 때 쓰는 짐승의 뼈로 만든 가락지까지 주면서 그것을 다루는 방법까지 세세히 알려주었다. 고마왔다.     사람의 심미감도 괴상하다. 원시종교에 대해 그토록 혐오하는 기덕이였건만 현대인이전 류인원의 발명물인 이 최초의 원시무기에 대해서만은 오히려 류다른 흥취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지어는 이것하나면 되리라면서가지 믿기까지한다. 하지만 민호는 그래도 총 한자루는 속히 갖추어야겠다고했다. 그러자면 돈주고 사창을 사야하는거고.... 방정맞게 그놈의 짐승잡이가 여의치 않았다.     민호가 한창 어떻게 했으면좋을지 몰라 우유부단하고있을 때 심산에 들어갔던 치더룽이 집에 왔다가 시르맨커를 찾아왔다.     민호가 의아쩍어했다.     《아니 왜 왔습니까? 산에 잡을 짐승이 없습디까?》    《아니요. 왠지 화약냄새피우며 불질하곱푸잖아 그만뒀소.》     치더룽은 말을 끊었다가 입을 다시열더니 이쪽을 향해 불쑥 물는것이었다.    《자네들은 나하구같이 장작부업이나 하잖겠소?》     생각밖이다. 민호는 자기 앞에 나타난, 수염이 꺼칠한 이 사나이의 강마른 얼굴을 말끄미 쳐다보면서 넌 아마두 꿈자리사나와 사냥을 그만둔모양이구나 하면서 머리를 한참이나 찌붓거리다가 되물어봤다.    《그게 그래 되기나하겠습니까?》    《왜서 안돼 받는데가 있는데. 이제 강이 풀리면 거기서 륜선이 달릴텐데. 기계를 움직이자면 장작을 때야하는거요. 안그렇소 장작을 때야한단말이요. 길이를 똑같이 두자되게 자른 장작을 높이석자 너비석자 길이 여섯자되게 쌓아놓으면 전에는 그 한무지에 륙원각수였는데 올해는 이원이 더 올라 팔원각수라오. 해볼만하지.》    《그렇지만 우린 운반차도 없잖습니까?》    《차없으면 앉은자리에서 도매상들한테 넘겨팔아도 되지.》     민호는 이 일을 친구와 토론해보았다. 여기에 들어앉아 신경이나 도사릴게 있는가. 기덕이 역시 그 일을 해보는것도 괜찮겠다고 나섰다. 그렇다면 좋아. 남들이 하는 일을 우리라고 왜 못하랴. 일이란 배워가면서 하면 되는거야.     두 젊은이는 츄얼이네 보고 강아지를 한동안 맡아서 길러달라부탁 하고는 그 이튿날로 톱과 도끼를 들고나섰다.     그들은 산에 들어가 발매를 넣었다. 총을 살 돈의 아구를 마추기 위해서는 한푼이라도 더 벌어보자는 그들이였다. 한데 아무리애써봐야 하루에 근근히 길림대양(吉林大洋) 2원을 쥘 정도. 그 벌이도 맘과 같이 되여주질 않았다. 축력이 있고 운수도구가 있어서 품꾼을 도고 전문하는 사람이거나 되거리장사군이나 그걸 받아서 직접 륜선주에게 넘겨파는 자가 어리(漁利)를 보고 있었이다.        양력으로 1922년 1월. 어느덧 구정이 가까왔다. 집을 떠나 멀리사냥나갔던 사람들이 한패 두패 돌아왔다. 이즈음에 민호와 기덕이도 돌아오고말았다. 예로부터 라월30일, 즉 음력그믐날밤이 되면 허저인들은 서남쪽을 향해 꾸러미를 태우고 음식을 차려 백성(白城)을 잃었을 때의 망령들에게 제를 지냈다. 1115년에 녀진족 완안부(完顔部)의 수령 아골타(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웠다가 천흥(天興) 3년, 즉 1234년 설날에 몽골군과 송나라군의 련합진공에 배겨내지 못하고 그만 망해버렸다. 당시 금나라의 국민이였었던 허저인들은 자기의 나라가 망해버린 이날의 고통을 세세대대 잊지 않게 하려고 설날이면 죽을 먹는다. 금조(金朝)의 첫서울 상경회녕부(上京會寧府)가 지금의 흑룡강성 아성(阿城)에서 남쪽으로 4리쯤되는 아스하(阿什河)지방의 백성(白城)이다. 그곳이 지금 허저인들이 몰려와 살고있는 여기 이 일대와는 위치상 먼 서남쪽에 있는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도 년년이 그믐이 돌아오면 그쪽을 향해 망국제를 지내고 있었다.     린화가 시르맨커를 찾아와 설을 함께 쇠자해서 가보니 그의 어머니와 아주머니는 한창 종이를 풀로 붙이여 만든 바구니에다 은박종이를 갖고 옛날 화페로 쓰던 배모양의 은전과 동전모양이으로 동그랗게 오린 누런종이들을 각각 담아갖고는 그것을 잿더미에 갖고 가 태우고 있었다. 위패가 모셔져있는 서쪽방 제단에는 술과 조이쌀밥과 물그릇이 간단히 놓여 있었다.     츄얼이가 추리(李子)를 진하게 풀어 지짐떡을 굽고있었다. 민호나 기덕이나 다 그것이 저녁상에 올라 맛볼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고 이 집에서는 그것을 조종삼대라는 베부마바, 여러귀신의 화상이라는 우마즈 즉 부엌신, 불신, 집신한테다 제물로 차려놨다.     민호와 기덕이는 그믐날밤을 그들과 함께 지내고 이틑날 설을 맞았다. 한데 이 설날하루 그들은 뜻밖에도 유씨네 식솔과 함께 좁쌀죽만 먹었다.     민호역시 좁쌀죽을 먹노라니 자연히 가슴속에 망국의 설음이 괴여 올랐다. 조선의 독립운동자는 누구나 다 강제적인 을 승인하지도 않거니와 합방이 공포된 8월 29일을 국치일(國恥日)로 정하고 이날은 찬밥을 먹으면서 나라잃은 통한을 가슴속에 새기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조선사람도 허저인과 꼭같은 신세로 돼버렸을가! 민호는 탄식하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부모님들과 함께 설쇨 멋도 없는 가련한 독립군인의 신세!… 나는 그래도 부모형제있건만 친구는 어떠한가. 험악한 풍진세상에 혈혈단신이다. 눈만 껌벅하면 무주고혼이 되고말 신세였다.     추운 겨울날에 시르맨커를 여러날 비워놓을 수는 없는지라 그들은 설이튿날에 돌아왔다.         정월보름날 아침이다.     개 두 마리가 몹시 짖어댔다.    《저것들이 왜 저래?》     민호는 밖에 나갔다가 그만 날아오는 총알에 어깨를 맞았다. 웬 백말을 타고 온 자가 그를 향해 권총을 갈긴것이다. 총소리에 놀랜 기덕이가 제꺽 활을 갖고 달려나와 돌아서는 말의 궁둥이를 쐈다.  그자는 놀랜 말을 타도 북쪽으로 창황이 내빼고말았다.     끝내 불행한 괴사가 생기고말았다.     ...............................................................................................................................     * 금조(金朝)는 의란에다 胡里改路를 설치하여 송화강중하류와 우쑤리강하류          그리고 흑룡강의 중하류를 관할케 했다.        * 타스헌ㅡ잘게 썰어 지진 물고기.       * 다라카ㅡ날것으로 먹는 물고기.        * 라부다하ㅡ물고기회.       * 이마칸ㅡ허저인의 구전문학. 이마칸이란 이야시라는 뜻인데 문자가 없는 형편에서         암기되여 전해졌음. 내용은 영웅구가와 민족복수, 자기 종족의 흥망과 성쇄,  고향         과 청춘남녀의 애정찬가로 엮어졌다.       * 서르미ㅡ복노(伏弩) 즉 암전(暗箭)이라고도 하는 사냥도구로서 모양은 활과 비슷함.         짐승이 다니는 길에다 고정시켜놓고 살을 메워놓아 줄을 다치면 나가게 되어있다.       * 퉈르치ㅡ개썰매.       * 원다ㅡ물고기깝지로 만든 울라비슷한 신.       * 빙천ㅡ고기잡이때 얼음을 끄는 도구.
87    동철부대 토비숙청기 댓글:  조회:5081  추천:1  2013-08-08
    동철부대 토비숙청기   해방직후의 북만일대에는 사문동, 마희산, 리화탕을 우두머리로 한 토비들이 도처에서 살인, 방화하면서 횡행하였다. 그리하여 피난민들이 쟈므스(佳木斯)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쟈므스(佳木斯)의 김동철, 김명세, 한중선 등은 36명으로 독립대를 조직하였는데 시초에는 총도 몇자루밖에 없었다. 그후 독립대는 600여명으로 급속히 늘어나 공산당이 령도하는 삼강인민자치군 제1퇀제2영으로 편성되였다. 제2영은 조선족영으로서 교도원은 김동철, 부교도원은 김명세, 영장은 연안에서 온 류곤(한족), 부영장은 한중선이였다.   1946년 2월 24일에 삼강인민자치군은 리화탕토비를 숙청할 임무를 맡고 탕원, 의란, 통화, 방정일대로 떠났다. 그런데 부대는 첫출발부터 토비의 교란을 받았다. 부대가 떠난 그날 밤이였다. 강행군하는 대오를 따라 트럭몇대가 군량과 포탄을 싣고 떠났는데 대오가 시가지를 방금 벗어나자 달리던 차 한 대가 번저지는바람에 후송부대의 전사 여럿이 상하였다. 알고보니 그 자동차의 운전수녀석이 아군에 잠복한 토비였던 것이다.   부대는 탕원에 기여든 토비들을 몰아내고 강을 건너 의란(依蘭)으로 진군하여 대구동과 소구동에서 리화탕무리와 처음으로 맞다들었다. 그 전투에서 아군은 일부 토비들을 살상하였지만 아군의 김만준, 김만기형제와 변성학, 최남순, 윤승암 등 5명의 전사들이 놈들손에 포로되여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공산당깃발아래 굳게 맹세해 철갑모 머리우에 눌러쓰고서 빛나는 싸움터를 바라보던 굳세고 억세던 혁명5용사......   이 의 노래는 부대의 지식분자였던 문영식이 지은것인데 전사들속에서 재빨리 불리였다.   소구도에서 전투가 있은 이틑날 통하로 진격하다가 아군의 전사 5명이 적이 매설해놓은 지뢰에 목숨을 잃었다. 전우들이 희생되는것을 본 전사들의 가슴마다에서는 복수의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전투장에서 총이 없는 전사들은 몽둥이를 들고 적의 대갈통을 까고 총을 빼앗았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그같은 용감성에 겁을 집어먹은 토비들은 가 왔다는 소리만들으면 접전할 념도 못하고 달아나기부터했다.   방정에서 아군에게 호되게 얻어맞은 리화당은 뿔뿔히 흩어진 저의 잔병들을 다시긁어모아가지고 사문동과 합세할 타산으로 조령쪽을 바라고 달아났다. “놈들에게 숨돌릴 짬을 주지 말고 승승장구로 추격하자!”  지휘원, 전투원들은 이렇게 웨치면서 토비들을 추격하고 만나면 족치였다. 그들은 토비들을 한바탕싸우고나서 의란현경내에 있는 삼도강에서 다른부대와 회합했다.   그런데 3월에 삼강인민자치군은 목단강쪽으로 진출하게되였다. 사문동과 마희산무리들이 그곳 산간지대에 출몰하고있었던 것이다. 아군은 화림부근의 투도댄즈라는 마을에서 토비들과 맞다들게되였다. 1개퇀의 토비들은 벌써 그곳에 보루를 쌓아놓고는 주위에다 철조망을 겹겹이느리고 전호까지 파놓았다. 이때 돌격대로 나선 2명의 조선전사가 몰사격으로 적의 화력점을 견제하는 한편 부대의 진격로를 열기위해 가시철망에 널판자를 걸쳐놓는데 성공했다. 마침내 길이 열리였다. 또치카는 이쪽에서 던진 적탄통과 수류탄에 날아났고 혼비백산한 적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두손들고 투항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한데 2영에서는 리일병, 허진선 등 용감한 전사 몇을 잃었다.   이 전투가 끝나자 목단강의 순조선동포들로 조직된 제14퇀도 토비를 숙청하려고 이곳에 와서 삼강인민자치군과 합력하였다. 그후 삼강인민자치군 제1퇀 2영은 상급으로부터 사문동토비를 계속추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지체없이 출발하였다. 토비와의 작전에서 뛰여난 재질을 보여준 김동철은 지략으로 적의 력량을 분산시키는 책략을 썻다. 그때 사문동의 수하에 비교적 전투력이 강한 한 개의 기병퇀이 있었는데 퇀장은 초경재(한족)이고 참모장은 김해정이라는 조선족이였다. 김동철과 김해정은 광복전에 한마을에서 살면서 항일투쟁도 같이한 친구였다. 그는 비밀리에 김해정에게 초경재를 설복하여 하루속히 의거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기병퇀은 끝내 아군쪽으로 의거해 넘어왔는데 그후 초경재는 도망치고말았다.   그때로부터 김동철의 이름은 더 널리 알려졌고 항간에서는 제2영을 라 부르게되였던 것이다.   삼강인민자치군은 한달남짓한 사이 다른 형제부대와 함께 5천여리의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무려 30여차의 전투를 치르었다. 이런 전투들에서 아군은 토비주력에 큰 타격을 주어 춘기공세를 해보려던 적의 시도를 꺾어놓았다. 따라서 의 이름이 널리퍼지자 열혈이 끓는 조선남아들이 날마다 부대를 찾아와 자기도 입대하겠노라 탄원했다. 이리하여 의 인원수는 점점 더 늘어났던 것이다.   1946년 5월의 어느날, 사문동이 저의 비도들을 거느리고 칠태하(七台河)에 기여들었다는 정보를 받은 삼강인민자치군은 3개퇀을 파견하여 토비소굴인 청룡산(靑龍山)을 포위공격하였다. 그 포위공격전에서 아군은 토비 200여명을 숙청하고 일본군복입고 일본무기로 무장한 손방유기병대 67명을 생포했다.  그러나 사문동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신발툰으로 도망쳤고 자기의 말로가 다가왔음을 직감한 그는 밀산(密山)쪽으로 넘어가 그곳의 비도 곽청정을 추겨 피비린 을 빚어냈던 것이다.   마귀같은 살인백정들의 손에 숱한 조선족ㅡ 남녀로소를 불문한 죄없는 이들이 무참히 살해되였다. 제 동포가 당한 그같은 참상을 목격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는 새로 탄원해나선 130명의 젊은 대원으로 한 개 련을 새로 편성한 후 그들을 데리고 벌리(勃利)로 돌아왔다.   한편 을 조작한 사문동은 조령에 가서 리화탕, 장흑자 등과 함께 흩어진 잔병들을 다시긁어모았다. 이런 적정을 정찰해낸 는 적소굴인 조령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하루에 180여리씩 강행군을 하면서 토비와 싸웠는데 어떤때는 하루에 4차나 격전을 벌리기도했다. 전과가 좋았다. 소판도에서 있은 격전에서만도 이 부대는 단번에 토비를 한 개련이나 전멸한것이다.   그 전투가 있은 후 는 어느 한 산으로 통하는 길을 감시하다가 노새네마리를 메운 차에다 쏘련홍군의 지페를 4마대나 훔쳐 싣고 산속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적들을 섬멸하고 차를 빼앗았던 것이다. 아군은 투항을 권고하는 삐라를 비행기로 산속에 뿌리였다. 했지만 완고한 적들은 투항하지 않고 완강히 뻣히였다.   는 상급의 새지시에 따라 조령쪽에서 떠나 청산, 호산에 몰려있는 토비들을 섬멸해버리고는 게속해 벌리(勃利)를 거쳐 리련회토비무리추적을 떠났다. 그들은 칠성랍자산에 이르러 그곳에 숨어있던 70여명의 토비를 숙청하였는데 그자들은 거개가 때 살인만행을 감행한 후 밀산에서 쫓겨난 곽청정의 무리였다. 는 그자들을 하나도남기지 않고 전멸하는 것으로서 시원스레 복수를 하고야말았던 것이다.   그곳을 떠난 후 부대는 부금, 집현, 사방대일대에서 2개월가량 토비들을 추적섬멸했는데 그들이 그기간에  격은 고생은 그야말로 형언키어려웠다. 전사들은 무더운 여름철에도 도로기를 신고 하루 백여리씩 걸어야했다. 그러면서 숲속에서 밤을 지새울 때면 모기들의 짓꿎은 성화도 이겨내야했다. 옷과 신발이 해여지고 식량공급이 딸려 어떤때는 옥수수 몇줌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굶주린 배를 달려야했고 그것마저 없어 굶기도했다. 하지만 그 누구하나 불평불만의 소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눈물겨운 견지였다!   의 명성은 날이갈수록 높아갔다. 용맹하고도 기민한 그들은 마치 축지법이라도쓰듯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감쪽같이 적진에 뛰어들어 불벼락을 안기군했다. 그리하였기에 토비들은 가 온다는 소리만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져 아예 맞붙어볼 궁리도하지 않고 걸음아 날살려라 줄행랑을놓군했다.   1946년 8월 3일, 토비 리련희무리를 숙청하는 간고한 임무를 완수한 는 상급의 지시에 따라 쟈므스(佳木斯)로 돌아왔다. 이날 그곳의 동포조직이였던 민주동맹에서는 음식상을 푸짐히 차려놓고 돌아온 그들을 열열히 환영했다. 그때 삼강성은 합강성으로 명칭을 바뀌였는데 는 그곳에서 휴식정비를 하는기간 대오가 더 늘어났거니와 동북민주련군 합강성정부독립퇀으로 발전했다.   그때까지도 토비들이 채 숙청되지 않앗기에 합강성내의 지방정부와 백성들은 식량난에다 토비들의 위협을 의연히 받고있었다. 수백만백성들을 기근에서 벗어나게하자면 쏘련과 경제무역을 해야했다. 하여 는 9월 3일에 상급의 지시에 따라서 쟈므스(佳木斯) 남쪽의 타요자, 흑배, 리수구, 맹가강, 석두하자, 영평강 등 여러곳에 갈라져 토비들이 략탈하지 못하도록 금광을 보위하면서 그곳에서 나는 황금을 받아들이는 특수한 임무를 맏고는 그것을 전투과업으로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 과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척되여갔다. 그러나 운명이란 예측키어려운것이였다. 1946년 11월 16일, 참모장 김해정은 적정을 정찰하느라 두 개의 정찰반을 이끌고 완달산중에 있는 금광마을 영평강에 갔다. 저믄때라 날은 어둡고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전사들은 마을에서 약 2리가량 동떨어진, 지주가 버리고 달아난 빈집에 들었다. 그들은 몹시피로해진데다 경비를 하느라 장밤을 눈도 붙이지 못했다. 그런차 비도괴수 리화당이 그마을의 고지주가 마을에 지금 소부대가 들어와있다는 밀고를 받고는 즉시 기병 100여명을 끌고와 이틑날 새벽에 집을 포위했던 것이다. 싸움이 붙었다. 16명의 전사들은 김해정의 지휘하에 구들장을 뜯어 창문을 막는 한편 벽에 구멍 두 개를 뚫고 기관총을 내갈겼다. 그들은 근 3시간가량이나 치렬한 격전을 벌리면서 지원병이 오기를 기다렸다. 허나 그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기다림이였다.   게다가 적은 워낙 숫자가 많고 이켠에서는 갇힌데다 인원도 퍽 적었다. 그야말로 엄청한 대비였다. 과불적중(寡不敵衆)이라 전사자가 차츰늘어났다. 이켠의 총소리는 차츰 뜸해갔다. 탄알마저 떨어지고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를 눈치챈 리화탕은 기뻐날뛰면서 투항을 하라 그러면 죽이지 않겠노라고 소리쳤다. 죽기를 각오한 전사들이 였거니 어찌 그따위소리에 넘어가랴, 적은 그래봤자 아무런 응대가 없으니 나중에는 새단에다 불을 달아 지붕에 올려뿌렸다. 집이 불타기시작했다. 하지만 전사들은 한명도 투항하지 않았거니와 불붙는 집안에서 그냥 대응앴다. 마지막으로 7명이 남았다. 그들은 끝까지 굴하지 않고있다가 불붙는 집안에서 뛸쳐나가 육박전을 하다가 최후를 마치였던 것이다.   합강성정부는 그들의 장렬한 희생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벌리에다 를 세웠다. (병으로 사망한 녀병1명포함) 그 기념비에 아래와 같은 비문을 써놓았다.   푸로혁명에 피뿌린 17명렬사여 당신들의 피는 천추에 빛나리라! 위대한 정신과 용감한 투쟁은 후세에 유일한 표직이 되리로다.!   그후 얼마안되여 리화탕, 마희산, 장흑자 등 토비두목들이 련속 아군손에 잡혀 처형되였다. 토비두목이며 동북인민의 철천지원쑤였던 사문동역시 민주련군의 손에 잡혀 그해의 12월 3일 벌리에 끌려와 17명렬사묘들에 절을 하고는 처형되였다. 이로써 동북의 토비숙청은 막을 내린것이다. 그후 는 새로운 전투임무를 맡고 남부전으로 나아갔다.   (이 글은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제5권 에 실린 글에 다른 한편문장ㅡ 안옥균, 김송죽, 차수남공저로 된 “영평강 16용사”를 생략해 삽입했음을 밝혀둔다.)         
86    半島의 血 제1부 30. 댓글:  조회:4905  추천:0  2012-10-04
         30.        숱한 애국지사들이 망국의 치욕을 참지 못해 순국으로써 앞날을 경고했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일본의 침략야욕을 분쇄할 수 있으랴. 증오가 격발된 국민들 중 어떤 사람은 복수를 함에 보다 적극적이면서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냈으니 그 첫 시도가 이른바 5적을 암살해버리는 것이였다.    을사5적인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에 대한 국민의 규탄은 일본침략자에 대한 증오에 못지 않게 격렬했던 것이다.    맨먼저 이자들을 암살하려고 기도한 것은 기산도(奇山度)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협객이였다. 기산도(奇山度)는을사조약이 성립되자 박종섭, 박경하, 송한주, 이종대 등을 포섭하여 결사대를 조직하고 무기를 준비한 후 곧 5적을 주살하려다가 발각되여 체포됨으로써 거사는 미수에 그쳤다.    한편 거의 같은 시각에 서상규(徐相奎), 구우영(具禹濚) 등도 5적중 먼저는 가장 악질적인 이근택부터 죽여버리려고 폭탄을 구입해 북산에 들어가 그 성능을 알아보느라 실험을 하다가 발각되여 체포됨으로 하여 역시 실패하고말았다.    얼마후인 1906년 2월 7일, 기산도(奇山度)가 다시 부하 이근철(李根哲), 구완선(具完善), 이세진(李世鎭)을 데리고 이근택집의 담을 뛰여넘어 들어가 잠들어있는 이근택에게 10여군데 자상(刺傷)을 가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한채 경위원과 순사 10여명이 달려드는 통에 실패하고말았다.     그와 손잡은 라철은 그 소리를 듣고 몹시 맹랑해하였다.    《아쉽게도 두 번 다 실패하고말았구나!》     한편 라철의 친구 오기호는 적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    《지독한 놈들이지. 산 산람 다리를 잘라내다니 원!》     적들은 체포된 기산도(奇山度)를 옥에 가두고 모진 악형을 들이대였거니와  나중에는 그의 왼쪽다리를 잘라버려 불구로 만들어버린것이다.     하지만 그 지경이 되어갖고도 기산도(奇山度)는 목숨이 붙어있는 한 자기는 반일을 끝까지 하리라 다짐했다. 매국노에 대한 응징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있는 그이야말로 실로 투사다왔다!       나라의 꼴이 마치도 고목이 거센 바람에 흔들리여 뿌리가 당장 빠질것만 같은 모양이라 라철은 속이 몹시 안달아났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고?》   《라형, 그래도 애초의 방략대로 다시 한 번 도일을 해서 정계인물들을 력방함이 좋잖을가하오. 내 생각인즉은 한번 다시 그네들의 반성을 촉구해 보는게 좋겠다 그겁니다.》   《한번 다시 그네들의 반성을 촉구해본다?.....》   《그렇지요. 민간적인 차원이기는 하지만은 그것이 더 직접적으로 인민의 의사를 대표하는걸루 되니까. 안렇습니까? 그리구 그 방법이면 접촉이 구애없이 가능하기두한거구요. 아무튼 그들이야 지금도 의연히 동양평화를 주장하고있으니까. 안그렇습니까?》    오기호는 라철에게 다시 한 번 탐방을 역권(力勸)했다.    (일본침략이 일본의 정치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맘먹은대로 그냥 거기 정계의 거물급 인물들을 다시 력방해서....조선의 태도와 주장을 력설하고....침략을 거두게끔 촉구해본다.... 하긴 그게 바람직은 하겠구나. 아무튼 한국내에서 일본인을 상대하기만은 더 낫겠지.)    생각이 다시금 여기까지 미치고 보니 오기호의 말과 같이 과연 그것이 더 가능할것 같아 보여 라철은 그러면 어디 그래볼가고 작심했다.    그가 이 일을 친구인 강기환(姜基煥)이와 말했더니 그는 적극 호응해나서는것이였다. 그리하여 오기호는 상해로 가고, 라철은 이해의 10월 20일에 그를 데리고 함께 재차 도오꾜오를 향해 도일(渡日)하게 되었다.     그들이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은 동양평화론자라 소문난 마쯔무라 유노신이였다. 라철이 한번도 만나본적이 없어 초면인 그는 올해 나이 53세라니 라철보다 10살이 이상이요 외모가 인자해 보여 이쪽에서 받는 인상이 우선 좋았다. 이 동양평화론자는 모처럼 찾아온 라철일행을 열정적이면서도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자기를 찾아 온 뜻이 무엇이라는것을 알아맞힌 마쯔무라 유노신은 일편단심 기우러져 가는 자기 나라를 어떻게든 춰세워보자고 발분(發奮)하는 이들의 헌신성과 의용을 찬양했다. 그러면서 그는 라철의 력설을 귀담아듣더니 일본에는 자기를 내놓고도 거물급의 정객 몇이 더 있으니 그들도 만나보라며 소개했다. 그가 소개한 다른 거물급의 정치가로는 도야마 미쓰루와 오까모도 류노스께였다.    라철과 강기환은 오까모도 류노스께를 만나 그의 앞에서 한국의 독립론과 동양의 평화론을 역설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도의상(道義上)으로도 응당 지난날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리라 여러번이나 곱씹었던 낙언(諾言)을 지켜야 할게 아니냐고 력점을 찍었다. 오까모도 류노스께는 잠자코들어주었거니와 동정을 표시하기까지 했다.     그 둘이 이번에는 도야마 미쓰루를 찾아갔다. 라철은 오까모도 류노스께와 한 말을 그와도 했다. 도야마 미쓰루는 자기를 찾아와 조선의 독립이니 동양평화니를 력설하는 이 다기진 중년의 조선사나이를 감개에 찬 눈매로 보면서 머리를 주억거렸다. 자기도 동감이라는 표현이였다. 그러나 그는 입을 열더니 리유좋게 슬쩍 밀어버는것이였다.    《나역시 동양의 평화를 옹호해온 사람이요. 지금도 의연히 그것을 주장하고있는 것 만큼 라선생과 어디까지나 동감인것이요. 라선생의 말씀에 일리가 있지, 있구말구! 허나 현실적으로 보면 라선생, 권리가 곧바로 힘이 아니겠소. 집권자인 이또오의 대한정책이 이미 수립되여 그것이 추진중에 있는 것 만큼 나로서는 달리 더 어쩔 방법이 없구만. 안그렇겠소?.... 그러니까 라선생, 내 생각에는 라선생이 한번 이또오와 직접 교섭해을 해보는게 더 좋지 않을가하오.》    《저더러 그를 다시 만나보라 그 말씀인가요? 아니요, 그러고싶지는 않습니다.》    라철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갈의 배속에 독이 들어있구 그자의 배속에는 침략야심만 꽉 들어차 있는건데 내가 그자를 다시만나서는 뭘한단말인가? 차라리 담벼락허구 말을 하는 편이 났지.)    입밖으로 이런 말이 튀여나오자는 것을 겨우참았다.    그의 안색에서 내심이 였보이는지 도야마 미쓰루는 눈을 내리깔더니 생각을 굴리느라 머리를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다시들고는 그렇다면 내가 다른 한 사람을 소개해주겠으니 그를 만나서 얘기해 보거라 그러노라면 뭔가를 알게 될거라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것이였다.   《라선생, 우찌다를 꼭 만나보게. 한국문제에 대해서는 내보다 어쨌든 우찌다가 더 알고있는거니까 비교적 만족스런 대답을 들을지도 모르지.》      하오리를 걸치고 맨발에 게다짝을 꿴 70대의 늙은이가 한국에서 온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바깥어디론가 막 나가려던 참인 것 갔다.    (이 령감쟁이가 실력이 대단한 정객이란말인가?)    라철은 기름박같이 반들거리는 그의 자그마한 번들머리를 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      우찌다의 저택은 빈번한 지진의 흔들림에 견딜수 있게끔 만들어진 전통적인 일본식의 목조건물이였는데 지저분한데라곤 한곳도 없이 실내가 깨끗이 거두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널직한 방의 벽에 걸려있는 한폭의 그림이 유난히 라철의 눈길을 끌고있었다. 그것은 일본그림이 아니였다.    《라선생! 저 그림이 어쩐지?....》     강기환이 역시 그 그림에다 눈길을 떨구면서 의문을 던져왔다.    《라, 잘 보라구, 저건 허유선생이 그린 그림일세.》    《글쎄! 그러게 어쩐지 눈익어 보이지.》     허유(許維)는 83세를 일기로 10여년전에 작고한 한국의 유명한 화가인바 벼슬이 지중충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지만 글, 그림, 글씨를 모두 잘해서 삼절(三絶)이라 사람들은 그를 벼슬아치로 보다도 화가로 더 알고 있었다. 한데 창윤고아(蒼潤古雅)한 이 담채산수화(淡彩山水畵)가 어떻게 돼서 이런 왜의 집 벽에까지 걸려있는걸가? 그것이 복제품일수도 있겠지만 현해탄을 넘어 여기로 온 것이 별스러웠다. 라철의 머리에 피끗 떠오르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임진왜란때 조선을 몹시 어지렵혀놓았다는 왜군무장 고바야까와 다까가게였다. 그는 모오리 히데모또와 1만5천명의 병력을 끌고 서울에 까지 들어왔고 금산(錦山)에서 조선의병 700명이나 죽였다. 정유재란때도 군대를 끌고 와 내침하여 철수할 때는 많은 서적을 일본에 반출해 간 략탈자인것이다. 조선의 주자학(朱子學)은 그리하여 일본에 영향을 끼친것인데 라철은 허유의 그림을 보니 지난 력사가 새삼스레 상기되면서 마치 도적을 맞친 제 집의 귀중품을 오늘 여기서 발견한것 같은 기분이였다.    우찌다는 눈치역은 령감이였다. 그는 대방의 얼굴에서 미세하게 나타나는 감정적 색체의 변화마저 포착하고는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두분 다가 이 그림이 아주 숙친한 모양이구려. 그렇지요?》     자기의 얼굴을 빤히 여겨보며 물는지라 라철은 응대를 안할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아주 숙친하지요. 이 그림이 우리 한국의 작고하신 허유선생의 작품아닙니까. 한데요, 우찌다선생님! 이 그림이 어떻게 돼서 선생댁에까지 오게됐습니까?》    《그게 이상해서 나하구 물는건가? 궁금하다면 내 알려주지. 이 그림은 말이네 극진하게 사귀여 둔 한국친구가 준것일세. 보다싶이 물건이란 그를 소유하고 있는 주인에 따라 값이 달라지는거네. 이 그림이 민간인의 손에 나돌면야 그때는 값이 서푼어치도 안갈테지만 지금 내 집 벽에 걸려있으니 만금같이 빛을 내고있는게 아닌가. 한폭의 그림ㅡ 그걸 어찌 그저 그림으로만 볼수 있겠는가. 오늘와서 이 그림은 바로 우리들 량국민간의 친선과 우정의 표징이요 증거물이기도 한  것일세.》    우찌다는 그저 이쯤 말하고는 누가 준 그림이라는건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라철은 꼭 알아내려고 바투다가가 보았다. 그림의 한쪽 귀퉁이쯤으로 해서 존경하는 우찌다선생님께 봉정(奉呈)이라 해놓고는 도장을 박았는데 그 도장에 전자체(篆字體)로 오려진 것이  송병준(宋秉畯)이였다.    《빌어먹을 개놈!》     라철의 입에서 어느덧 욕설이 튀여 나갔다.    《보아하니 라선생은 심정이 그닥 유쾌치를 않는 모양이구려. 송병준이는 머리있는 사람일세. 붕우를 알고 스승을 아는건 모든 지능인이 취할바지. 인생이 몇번인가. 사람으로 세상에 태여났으면 복락을 한번 누려봄도 지당한 일이지. 안그런가? 해도 안될....》    《저 선생님!....》     라철은 무례하달 정도로 그의 말을 중둥잘라버렸다. 얼굴이 벌개나면서 뜸을 드리다가 이어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대체 우리를 뭘로 보고 이러십니까?》     우찌다의 얼굴에 한동안 실망의 빛이 어리더니 차츰 얄팍한 웃음기로 변해갔다. 일본에서는 손을 꼽는 이 늙은 정객은 로련한 여우가 튀개약을 덤벙 물어 씹지는 않고 혀로 겉을 살살 핥아서 거기에 발린 기름을 먹듯이 그들이 찾아온 뜻을 미리 알아맞히고는 되려 듣기 좋은 소리로 슬슬 회유(懷柔)하려 드는지라 그들은 본말을 꺼내지도 않고 그만 나오고말았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것은 옳았다. 우찌다는 통감부고문(統監府顧問)이였는바 실지로는 한국침략의 막후실력자였던것이다. 이 우찌다나 그를 라철에게 소개한 도야마나 그들은 다가 일본 현양사(玄洋社)의 계맥(系脈)을 이은 흑룡회(黑龍會)의 핵심간부로서 일본정계의 주요인물이였다. 기름박머리 우찌다는 도야마의 부하다. 송병준, 윤시병, 이용구같은 자들을 추겨서 일본주구세력인 유신회, 진보회, 일진회 등 어용단체를 만들게 한 것이 바로 그였다. 그런데도 라철이나 강기환이나 다 그 내막을 미처몰랐던것이다.    어느날 아침때다. 그들이 투숙하고 있는 려관의 나젊은 뽀이(boy)가 그날의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을 갖다주길래 받아서 보니 톱기사란에 이또오 히로부미가 일본으로 귀국하여 일본제국의회(日本帝國議會)에 제2차한일협약의 체결을 보고한 내용과 동시에 한국의 내부대신 이지용이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일본 도오꾜오에 왔다는 내용의 보도가 대서특필로 실려있었다.    《이걸 보우, 이걸 보란말이우! 이또오 히로부미는 우리 한국의 외교권과 내정권까지 빼앗아내구는 그걸 대단한 자랑으로 여기는구만! 나 원 더러워서!.... 보란말이오, 온 일본이 그걸 대단한 공적으루 인정하고 이또오 그자를 하늘높이 올리추고 떠받든단말이오!》      라철이 신문을 보면서 흥분된 목청으로 웨치였다. 그것은 누르길없는 격분이였다.     《싹 잡아서 죽여치울 개자식들이다!》    그의 입에서 마침내 욕설이 터져나갔다. 위로는 일본 천황에서 아래로는 말단관리에 이르기 까지, 악질친일파나 일본의 행정기관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하나도 원쑤로 돼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지어는 이 신문을 보고도 무감각할 무지한 서민에 이르기 까지도.    《가기오, 가! 이제 뭘 할려구 여게 그냥 머물르겠나?》    라철은 서둘러 행장을 챙겨갖고 려관을 나와버렸다. 이 이상 일본에 더 체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에는 칼이 많았다. 누군가는 그것이 남의 목숨을 앗아내기를 즐기는 일본사람의 애호에 기인된다고 지적한적이 있다. 과분하고 무례한 억설일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것이 옳은것 같기도했다.    그들이 그지간 여러날 묵고있었던 려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칼만 전문으로 파는 상점이 있었다. 라철은 가던 걸음을 멈츳거리더니만 발길을 돌려 그 상점으로 들어갔다.   《아니 여기는 왜?》    강기환은 따라들어오며 의아쩍어했다.   《아마도 역적놈부터 잡아치우는게 옳을 것 같아.》    라철은 매대에 진렬해 놓은 칼에다 눈길을 꽂으면서 응대했다.    크기 작기 모양이 각가지인 칼들이 많기도 했다.    라철은 날이 한뼘가량되고 자루를 구리로 만든 단도를 한자루 샀다.    강기환도 자기 맘에 드는걸로 한자루 골라서 샀다. 자국의 역적놈들부터 주살(誅殺)하자는 라철의 주장에 찬동이였던 것이다.    (내가 그자들의 승리를 축하했으니 어리석었다. 이웃마을이구 형제란 왼 말이냐, 그놈들은 곁에 가까이있으면서 탐욕만 키워 온 야수였던 것을 몰랐구나.)    라철은 전에 이기, 오기호 등과 함께 메이지천황과 이또오 히로부미에게 좋은 말로 힐소(詰疏)했던 일을 하나하나 다시금상기하고는 자조(自嘲)를 했다. 메이지천황도 이또오 히로부미도 그따위것을 거들떠보기나했을가?....    라철과 강기환이 현해탄을 다시건너 조국에 돌아온 것은 12월.    (내가 어떻게 하면 5적을 다 잡아치울수 있을가?....)    이 문제는 일본을 떠날때부터 내내 머리속에서 맴돌이치건만 신통한 방법이 나서지를 않았다.    라철이 서울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오기호는 물론 이기선생도 나어린 주사(主事) 김인식이도 인차 달려왔다. 물론 돌아온 사람을 위안하고 로고를 풀어주자는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크게 기대한 일이 대체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 갑갑했던것이다.   《속담에 라더니 말이 맞네. 그렇게 애를 썼건만도 대륙침략의 당로자(當路者)들은 만나지도 못해 면담을 못했지. 정객 몇을 만나서 호소를 해봤소. 헌데두 그게 다 마이동풍이니 결국은 허공중에 헛막대질이였지.》    라철이 이번행차에는 일호반점의 성과도 없음을 이같이 고백했다.    모두들 그러면 이제는 어떻게 할거냐고 물어왔다.   《우선 5역적이 되는 대신들부터 자살(刺殺)해놓고 볼판이요. 올라 앉는 놈은 잡아버리고 올라앉는 놈은 잡아버리고.... 우리가 그렇게 몇번만 번복하고 나면 깨닫는 바가 있어서 주저하게 될것이요. 제 목숨이 아까와서도 주는 벼슬을 받을려구 안할거요. 그때가 되면 어떻게 될가? 일본도 하는 수 없이 맥을 버리고말게 아니겠소. 생각들 해보시오, 아니그렇겠는가구?》    라철은 여지껏 수차 일본을 대처해온 외교경험과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판단으로부터 의병투쟁과 같은 무력항쟁보다 현시점에 있어서는 그래도 2천만동포의 혈분(血憤)인 매국노 을사5적을 도살하며 지금의 매국노정부를 타도하는데다 력점을 찍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방략만이 현실적이고 따라서 가능하다고 동지들을 설득했다.       《글쎄 생각이 옳네만은....》    오기호는 앞서 여럿이 거듭거듭 실패만 거듭한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이 일은 그저 생각이나 용감성만 갖고서는 안되는 일인 것 만큼 우선 착실히 연구한 기초상에서 계획을 세우고 그 준비작업부터 잘해나가야 할 것이라했다.    결국 라철이 제시한 방략이 채택된것이다.    이해 겨울날의 추위는 유달리도 혹독했다.      어느날 이홍래가 문득 제 친구를 데리고 라철을 찾아왔다. 라철은 이홍래는 알지만 그의 친구와는 초면이였다.    《저는 경상북도 금산군서 사는 박대하올시다. 선생님을 만나 뵙고 우러러 모시고푼 맘에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박대하는 국궁재배하고나서 자아소개를 했다.    박대하는 최익현을 숭배하여 부유했던 재산을 털어 무장을 구입하고 인원을 모집해 의병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사람이다. 의병장으로 명성도 높았건만 실패는 가슴을 더 아프게만 하여 그는 서울에 올라와서 민영환의 부하였던 이홍래와 김동필, 이용채 등과 서로 왕래하면서 의병재거를 밀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생각에도 어쩐지 신통치를 않아서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선생님, 저와 저의 이 친구는 함께 의병을 다시일으키려 하면서 선생님의 조언을 받고싶어 왔습니다.》     이홍래는 라철의 앞에 박대하와 자기의 궁리를 말했다.    《다들 보다싶히 일본은 스스로 전쟁때 조선의 독립을 시켜주리라던 말을 식언하고 기행동 한가지도 독립부액의 실지에 부응됨이 없이 삼천리강토를 저들의 령지로 만들고있는게 아니겠소. 나는 이를 구제할 길이 궁한 나머지 다시 일본의 지사에게 기정책을 변경시키고자 도해를 하였던 거요. 오까모도와 마쯔무라를 역방했구 도야마도 역방을 했더랬소. 그들을 만나서 내 나라를 생각하는 애정을 호소했더니 그들은 다 시기가 아니라 해서 하등의 소득없이 헛되이 귀국하고말았던거요.》     라철은 그들의 앞에서 우선 자기의 외교적인 수단이 실패하였음을 솔직히 알려주었다.    《선생님. 그러니까 무장을 손에 들고 싸우는 길밖에 없잖습니까.》     박대하가 격정적으로 말했다.    《선생님, 지금 보면 의병을 일으킴에 어려움도 어려움이려니와 일으킨  후에는 실패가 너무나 참혹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마땅히 어떻게 해얄지요?....》     이홍래가 이마를 짚었다.     그가 고개숙이는 것을 넌짓이 보면서 라철은 입을 다시열었다.    《보아하니 아직도 대세를 잘 모르고들있는 것 같구만. 일본은 현재 강유력한 군사를 보유하고있는 것 만큼 그자들과 변변치 못한 무장항쟁으로 맛선다는건 무모한 노릇인거요. 안그렇겠소? 생각들을 해보란말이요.》    《선생님, 그렇다고 항쟁을 거두고 나앉을수야 없잖습니까.》     이홍래가 숙였던 머리를 번쩍 들고 하는 말이였다.    《왜서 나앉아? 우리가 이 기초상 항쟁수단을 바꿔보면 안될가? 국권의 회복은 백계가 다하였으며 돌아보건대 금일의 꼴이 되게 한 소이는 현정부대신들이 한바이니 우리들 스스로가 국민을 대신하여 그자들을 주살하고 현정부를 전복하여 새로 조직한 정부로써 독립을 지켜낼 수는 없겠는가말이오.》     이 말을 듣고 보니 박대하도 이홍래도 눈앞이 밝아지는 것만같았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웨쳤다.    《오적을 주살하자, 그 말씀이지요!》     그들은 오기호도 방문해보았는데 오기호역시 라철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시기가 아니라 하면서 의병투쟁보다는 5적부터 없애버리는 것이 더 낳으리라 력권했다. 하여 둘은 마침내 5적암살에 동참하게되였다.     한정없이 밉고 더럽고 교활한 저자들을 한꺼번에 싹다없애치울 수는 없을가? 라철과 오기호는 실패한 이들보다는 더 큰 집단적인 암살을 모색했다.      매국노 을사5적을 일망타진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준비사업이 잘돼야 한다. 첫째는 치밀한 계획과 조직, 그리고 거사에 필요한 자금장만이였다. 무기를 구입하자해도 거사행사를 하자해도 자금이 없어서야 되는가. 라철과 오기호는 먼저 자금조달을 위하여 자기 부인의 비녀와 가락지 등 귀중품들을 팔았다. 그러면서 성균관박사인 이광수(李光秀)에게서 2만량, 내부대신(內部大臣)을 지낸바가 있는 이용태(李容兌)에게서 1,700원, 군수(郡守) 정인국(鄭寅國)에게서 300원, 농공상부주사(農工商部主事) 윤주찬(尹柱瓚)에게서 1,000원을 각각 모금하였다.    이 돈중 김동필(金東弼)에게 600원주어 인천에서 피스톨 50정을 구입했다. 이같이 자금과 무기가 준비되자 라철일행은 1907년 2월 13일(음력 정월초하루)을 거사일로 정했다. 이날 각 대신이 참내(參內)하는 길에서 저격하여 일거에 결행하자는것이였다. 그러자면 암살자 인선과 이에 따른 결사대원이 확보돼야 할 것이다. 라철이 쓴 동맹서(同盟書)와 이기가 기초한 참간장(斬奸狀) 수백장을 인쇄하였다. 모집자는 그것을 지참하고 경상도와 전라도에 가서 을사5적을 저격할 결사대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 행동은 극비밀적으로 진행되고있었다.    한편 윤주찬, 이광수는 본국정부와 통감부, 일본군사령부 그리고 각국 령사관에 보내는 공개장(公開狀)과 내외국민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작성하였다. 이 글들은 애국혈성(愛國血誠)과 독립의 주지(主旨)와 토적복수(討賊復讐)의 대의(大義)를 밝힌 대문장이였다.    그런데 결사대 모집도 그렇고 교통이 불편한지라 상경시간이 지연되는 등 유감에 조우(遭遇)하여 계획한 일자에 거사를 이를수 없게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중도에 그만둘 일은 아니였다.     라철은 오기호, 김인식 등 동지와 계획을 세우고 1907년 2월 28일 아침 폭발물을 장치한 두 개의 상자를 이지용, 박제순의 집으로 선물로 보냈다. 그랬으나 그건 실패하고말았다.      결사의 장한(壯漢) 70여명이 륙속 상경하여 서울시내 여러 려관에 분산투숙했다. 라철은 동지들과 토론하여 거사일을 3월 21일로 다시정했다. 이날은 황태자 탄신일 즉 천추경절(千秋慶節)이였다. 백관들이 하례(賀禮)로 입궐할것이니 이때를 리용하여 5적을 일망타진(一網打盡) 하는게 좋을것 같았다. 그리하여 이홍래, 박대하 등이 그날 새벽 남산에서 발포하는 총성을 기다리는 한편 정인국은 이 사실을 광무황제에게 주달(奏達)하여 놀래지 말도록 하고 조칙(詔勅)을 내려 국민들의 안정을 기하게 하는 등 준비를 했다.                           諸君 諸君 今日之事 實維持大韓獨立之不二法門也 而我二千萬衆生死之問題也 諸君苟能愛自由乎請勉力決死志誅此五賊 掃除內? 則我輩及我子孫 永得生息於獨立天地也 其成耶在今日 其敗也在今日 其生耶在 諸君 其配耶在諸君 寅永不材 倡此義務今日揮縷縷之淚滴滴之血披心瀝膽匍匐?伏提出此義於有血性有智勇之諸君胸臆之前諸君乎諸君乎各勵純潔之愛國心函誅凶頑之賣國賊 使我國家?然獨立於世界上 寅永雖入十八地獄 受恒河沙衆苦 當歲喜無量也 ?哉勉哉      이것은 라철이 향사(鄕士)들을 격려하여 지은 격려사였는데 이 격려사를 들은 향사(鄕士)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맹세했다.    그날이 돌아왔다. 아침부터 각자 예정한 장소로 가서 길가에 숨었다. 오전 10시경 참정대신 박제순이 광화문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오기호가 인솔한 향사(鄕士)들에게 《해라! 해라!》 하고 턱아래소리로 시켰건만 향사(鄕士)들이 주저하는 사이 박제순이 실내로 들어가 기회를 잃었고, 11시경 서태운이 인솔한 10여명의 향사는 서대문밖에서 법부대신 이재극의 출입을 기다렸으나 경계가 하도 엄하여 한발도 쏘지 못한채 그자를 통과시키고말았으며, 11시 30분경 이홍래는 인솔한 향사와 같이 중서사동(中署寺洞)에서 군부대신 서중현이 4인교에 앉아 통행하는 것을 요격하였으나 명중하지 못해 결국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뿐만아니라 향사중 한 사람인 강상원이 일본순경에게 체포되고말았다. 이로말미암아 사면의 경비는 급속히 강화됐다. 용산별서(龍山別墅)에서 오던 내부대신을 남대문밖에서 기다리던 김동필을 비롯하여 타지방에 배치되였던 향사들은 동시에 저마끔 해산하고말았다.....     라철이 계획한 거사는 이로서 실패하고말았다.                                                     (제1부 끝)                         복제를 절대 엄금합니다.
85    半島의 血 제1부 29. 댓글:  조회:3882  추천:0  2012-10-04
    29.       12월초에 김태근이란 청년이 수원을 지나가는 이또오 히로부미에게 돌을 던지였다. 이것은 일본이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강제로 체결한데 대한 조선인민의 반항심을 표명하는것이였다.    각 학교들에서는 잠시 중단했던 교학을 회복했다.    《서선생님 이 왔습니다. 보신 후 다른분께 넘겨주십시오.》    어느날 한학교에서 같이 사업하는 성이 리씨인 중년의 선생이 백지에 활자로 찍힌 새 전단을 주었다. 서일이 받아 보니 그것은 서울에서 13도유생을 대표하여 26명이 련명으로 낸 통문이였다. 원래 통문은 사람들이 서로 돌려본다는 의미에서 회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나라와 민족앞에 일대 위기가 조성된 조건하에서 보고만있지 말고 반일의병과 같은 무장활동에 적극적으로 용감히 나설 것을 호소한것이였다.    이 통문은 문장이 꽤 길었다. 통문에는 또한 일본의 침략적인 만행이 강화되고있는 조건하에서 무장활동만 벌릴것이 아니라 기타 다른 형식의 투쟁도 할 것을 제기하면서 몇가지 지적했다.       ㅡ탁지부고문 메가다는 전국 재정을 통괄하여 화페교환을 한다고 하며 구화페는 전부 일본으로 실어가고 소위 300만원차관조목에 있는 새 화페는 꼴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국고는 비고 상업은 페지되여 가니 메가다의 해임전에는 결전바치는 것을 거부할 것.     ㅡ일본물산가운데 비록 요긴하게 소용되는 것이 있더라도 절대로 무역하지 말 것.      ㅡ기차와 기선이 비록 편리하다 하더라도 절대 타지 말 것.      ㅡ전신과 우체는 이미 빼앗겼으니 절대로 리용하지 말 것.      《이건 소극적이구나. 하지만 일본놈들의 간계에 속아넘어가지 말고 그를 반대할걸 것을 호소하니 민족적 각성을 높혀주는게로구나.》     서일은 혼자소리로 중얼댔다.  통문은 끝으로 전국인민이 침체가 없게 할 것을 요구하면서 반일투쟁에 나서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조선민족이 아니라고 각자 타일러주자고 했다. 그러면서 외국의 교인 및 상인, 유람인을 절대 침해하지 말라했다.     서일은 이 구절을 읽고나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틀렸어. 틀렸어. 일본을 성근하게 보는건 아니겠지. 하다면 왜 이런건 제기하는가? 그자들이 남의 나라를 먹으려고 꾀하면서 림기응변의 교활한 모략과 계책을 쓰고있는걸 모르는군. 타국에 와서 사는 일본인은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거의가 정치적 두뇌를 갖고있는 자들일세. 행상군이건 유람객이건 심지어 매음녀까지두 렴탐군질을 하고있는거야. 암암리에 국정을 탐지하고 민정을 료해하며 각 방면으로 정보를 수집해서 저희들의 기관에 밀고하니 응당 경계심을 갖고 대하라고 선전을 해야지.》    《옳은 말씀이요. 왜놈에 대해서는 특히 경계를 해야합니다.》 통문을 주던 리선생이 서일의 말에 동감하면서 여러해전에 김창수(김구)라는 젊은이가  길을 떠났다가 치하포의 배주인집에서 하루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거기서 단발을 한 사나이 하나가 조선말을 썩 잘하고있지만 일본 사람인것이 분명해 의심을 품고 자세히 살펴보니 흰두루마기밑으로 칼집이 보이는지라 적개심이 끓어 올라 적수공권으로 달려들어 죽여놓고 보니 아니나다를가 과연 일본군 중위 아무개여서 그자의 피를 먹고 시체는 강에 던져버려 일본 랑인의 손에 비참히 살해된 국모의 원쑤를 값은 일을 상기했다.    그번의 살인안건이 신문에 공개돼 한때 그토록 들썽했건만 사람들은 벌써 가맣게 잊은모양이다.    1906년에 들어서자 1월에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하세가와 요시미찌를 림시 대리통감의 자리에 올려놓고 자신은 소네아라스께와 함께 잠시 조선을 떠나 총망히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가 가자 대리통감의 감독하에 서울, 인천, 마산, 목포, 군산, 진남포, 평양 및 대구 등 20여개소에 일본인 거류민단이 조직되였다.   《거류민단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쉽게 말해서 그것은 저쪽 섬에 있는 나무를 이쪽의 대륙에다 옮겨 심듯이 바로 일본이 우리의 이 삼천리강토에다 저들 야마도민족이 뿌리를 내리게 하는것이다. 그들이 왜서 뿌리를 내릴가? 그건 후대를 번식시키기 위한 작업을 벌리기 위해서다. 그들 야마도민족이 번창하게 될 그때를 한 번 상상해 보라. 그때 가서 우리 조선민족은 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제비가 배암이한테 제 보금자리를 잃듯 결국은 그자들에게 제 땅을 빼앗기우고 황막한 어디론가 쫓겨나고 말 것이다. 그 지경에 이르러서는 나라가 없는 민족이 되고마는것이다. 세상에 그래 이런 일이 없었던가? 유태민족 하나만을 보자. 그들도 본래는 국가가 있는 민족이였다. 기원전 11세기에 지금의 팔레스티나지방에다 저들의 이스라엘왕국을 건립하고 유태교까지 창립했었다. 그랬다가 기원전에 바빌로니아인의 입구(入寇)로 멸망하고, 국민은 바빌론에 잡혀갔다가 바빌론이 멸망한 후에야 팔레스티나에다 다시 새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원 1ㅡ2세기에 이르러서는 로마제국에 정복되여 그들의 왕국은 영원히 멸망하고만 것이다. 유태민족은 거의가 자국땅에서 쫓겨나 구라파 각지에 흩어져서 박해받고 도살되거나 아니면 생존부득 타민족에 동화되고말았다.... 보라, 그것이 그래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개미같은 죄꼬마한 미물도 제 굴을 짓고 살거니 짐승도 제 사는 령지는 갖고있는 것이다. 한데도 인간으로 세상에 태여나갖고 살아 제 몸 하나 용납할 곳 없고 죽어도 묻힐 땅조차 없는 처지가 된다면?.... 그 이상 비극은 없을 것이다. 안그런가?》    서일은 시사강연회의에서 이같이 말했다. 사생전체가 집합하고 사회청중까지 많이 모인데서.   《유태의 비극이 우리 앞에 떨어져서는 아니된다!》   《민족의 운명을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내 나라 내 당을 빼앗기우지 말고 우리는 지켜야 합니가!》    ......    사생과 청중모두가 그의 강연에 감응되여 부르짖었다.       을 써서 일본경찰에 구속되였던 장지연은 이해의 1월 24일에야 비로서 풀려나왔다. 하지만 그는 사장직을 사임했으며 황성신문(皇城新聞)은 2월 11일에 정간이 해제되여 12일부터 속간했다.    3월에 이또오 히로부미가 초대통감으로, 소네 아라스께가 부통감으로 정식부임되여오자마자 주한(駐韓) 각국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그러면서 이 한달사이에 61,9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조선땅에 끌어들였다. 저들의 거류민단을 보호하는 한편 13도 방방곡곡에서 다시금 발랄해지고있는 의병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백번 죽여 마땅할 저 늙은 여우가 권리를 다 틀어쥐였으니 이제... 조선을 지도에서 마저 색갈이 변해버리게 하자고 박차를 가할것이다.)    조선침략의 장본인이요 괴수로 여기는 이또오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해 오니 서일은 더 불안하여 증오했다. 한들 지금은 무슨 수가 있는가? 그는 교학에 열중하는 한편 국세를 연구하느라 매일 여러가지 신문들을 빠짐없이 보았다.     이러던 중 어느날 그는 뜻밖에 서울서 오는 편지 한통을 받게 되였다. 발신인을 보니 신채호였다. 편지내용인즉 자기는 근일에 양기탁(梁基鐸)선생의 요청으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론설기자로 들어갔노라 알려주는것이였다.   《친구여, 축하한다!》    서일은 즉각 전보를 날렸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영국인 배설이 경영하고 있었기에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왜가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판국이니 그 신문인들 얼마나 무사할지 념려되였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정간이 해제된 두달후인 3월 17일에는 제국신문(帝國新聞이 3일간 정간을 당했다. 그렇게 된 원인인즉 검열에 걸린 기사를 완전히 없새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들이 그 내용을 추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신문의 3월 17일자 문제의 단편란 時事寸言은 어린아이라도 남에게 여러번 속으면 나중에는 만단으로 꾀어도 듣지 않는 법인데 어른이요 또 재상이라는 사람들이 자꾸만 속으니 딱하다는 말로 시작되여 정부에서 내 나라 일을 내 자유로 못하고 남만 철옹성같이 믿더니 믿는 나무 곰쳤다고 비유하여 로씨아만 믿다가 로씨아세력이 약해지니 이제는 일본만 믿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리고 스스로 힘을 길러 자주독립을 기하자는 내용이였다.    그 글을 서일은 다시 한 번 읽어보았었다.    한데 정간처분을 받았다가 속간된 날자에 발표된 기사 역시 은유적으로 할말은 해서 볼만했다.                                             ㅡ 帝國新聞  1906년 3월 21일       한편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전기한바 황성신문(皇城新聞)의 항일적 태도를 보도하였을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한국황제께옵서는 한국독립을 重念(중념)하사 正大(정대)한 의리로써 거절하시고 勅語(칙어)로서 不允(불윤)하셨다.》(1905년 11월 18일)고 보도하는 등 일관해서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무효와 반일적인 론조를 거리낌없이 폈던 것이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이와같이 한국민의 통분한 심정을 과감하게 대변하기 때문에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이 신문은 여적 극단의 배일언론을 고창해왔어. 양기탁도 그렇구, 신채호도 그렇구, 황의민도 그렇구.... 신랄한 필봉으루 통감부를 공격하고 정부를 공격하니 통감은 머리를 앓고 대신역적은 간담이 서늘할거다.》     서일이 박기호와 말했다.        《거야 물론이지.》    《한데 이를 받아 보는 독자야 속이 후련하겠만 신문이 그냥 이렇게 나가다가는 장차 어떻게 될런지 그게 은근히 걱정이 되는구나. 보다십히 이 신문은 일제의 침략정책수행에는 가장 큰 방해물이 될테니까.》    《그러면야 절치부심을 하지.》    《온갖의 수단을 다해서 해치려할건데....》    《제발 무사해야하는데.》     두 사람은 혈맹이나답지 않게 극친한 친구로 사귄 신채호의 신변과 그 신문사에 몸을 잠그고 언론투쟁을 벌려나가고 있는 양기탁 등 담량있는 우국지사들의 신변을 은근히 걱정했다.     한편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 신문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였다.     《한국내의 신문이 가진 영향력은 비상한 것이라 이 이또오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一筆)이 한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매우 크다. 그중에서도 지금 한국에서 발간하는 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확정이 있는 일본의 제반악정(諸般惡政)을 반대하는 한국을 선동함이 연속부절하니...》    그는 신경을 세우고 운운했고, 통감부 총무과장은 5월 6일에 이르러 본국의 외무차관에게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영국인 경영자이자 기자인 에네스트 토마스 베델(한국명 배설: Ernest Thomas Bethell)은 배일적인 론조를 펴고있으니 추방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강박체결로 인하여 온 국민의 분노와 원한은 극도에 달하고있었다.    10년전 국모의 복수를 위하여 궐기하였던 제1기의 의병운동이 충주와 제천에서 패한 후에 각지에 숨어서 재기를 노려오던 주모장들은 이번 기회에 다시금일어났다.    전참판(前參判) 민종식(閔宗植)은 삼남각지를 다니면서 동지를 결합하고 무기를 준비한 다음 5월에 정재호(鄭在鎬)와 함께 충남 정산(定山)에서 의병의 깃발을 들고 일본에 선전(宣戰)하였다. 동월 17일에 람포를 점령하고 19일에는 홍주성을 확보하여 군세가 자못 강력하였다. 하지만 항전한지 10여일만에 신식무기로 장비한 적의 련합병을 대적하지 못하여 그만 패하고말았다.    영덕인 신돌석(申乭錫)은 녕해에서, 이은찬(李殷贊)은 원주에서 각각 기의하였다. 그 외에도 각지 의병의 기세가 매우 왕성하였다....    전참판이며 유림의 숭배를 받는 최익현(崔益鉉)은 원래 서울에 올라가 궁궐앞에서 상소투쟁을 하려했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석달전이던 3월에 가묘(家廟)에 하직을 고하고 호남방면으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게 되었다. 그는 먼저 서신을 판서 이용원(判書 李容元)과 김학진(金鶴鎭), 관찰사 이도재(觀察使 李道宰), 참판 이남규(參判 李南珪), 곽종석(郭鐘錫), 전우(田愚) 등에게 보내여 같이 국난을 극복해 나가자고 호소하였으나 모두 이에 불응하였다.    1906년 5월 6일에 최익현은 제자 림병찬(林秉瓚)을 비롯한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의 문생(門生) 80명을 모아놓고 도학(道學)을 강의하면서 국가가 위급존망지추에 있으므로 의병을 잃으키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모두 선생을 따르겠다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우선 고을에 있는 무기를 거두는 한편 23일에는 일본이 저지른 16가지 죄행을 폭로 규탄하는 글을 써서 일본정부에 보냈다. 이때까지 반일의병장들은 인민들을 투쟁에 일떠세우기 위한 격문에서 일본침략의 죄행을 폭로규탄하였지만 정부를 상대로 직접 정치적 공세를 들이댄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이번에 쓴 전사민(全士民)에게 고하는 격고문(檄告文)은 선동력이 매우 강하여 살포되자 린근의 군, 읍이 모두 향응함으로 태인반일의병은 단시일내에 군기와 인원이 급증하여 천여명이 장사진을 이루고 곡성, 순창 등지로 진군하게 되였다.    최익현은 의병지휘성원들을 고루되 귀천을 가르지 않고 재능에 따라 선발하였다.              ( 2월)        또한 군사규률을 정하고 그를 지키지 않을 때에는 엄격히 처벌하도록 하였다.          1. 제마음대로 옛습관만을 믿고 군령을 따르지 않는 자.          2. 비밀리에 간사한 무리들과 통하여 군사기밀을 루설하는 자.          3. 진중에서 적과 상대하여 무서워하고 겁내며 뒤로 물러서는 자.          4. 촌가를 겁탈하거나 남의 부녀자를 음관하는 자.                                                       ( 2월)       태인의병대는 5일에는 정읍, 7일에는 순창을 공격하여 적을 쳐부시고 소총 45정, 화약 110근, 납철 두말을 빼앗아 의병들을 무장시켰다. 이밖에 관리들이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인 세금과 세곡을 빼앗아서는 의병대의 군자금과 군량으로 충당하였다. 일본이 순창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 꾸려놓았던 통치체계는 파괴되였고 장악하였던 넓은 지역은 의병수중에 장악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은 의병대를 무력으로 계속 탄압하는 한편 국왕의 이름을 빌려 회유문을 보내는 따위의 기만술을 썼다.       《많은 무리들아, 빨리 마음을 고치고 뉘우쳐서 즉시로 마음을 돌려 더욱 학업에 힘쓸 것이다. ..또 학교규정을 넓혀서 지방선비들로 하여금 나아갈 곳을 알게 하고 때때로 장려하여 실지 사용에 이바지하게 할것이니 모두들 다 잘 알고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라.》                                    ( 광무10년 6월 11일)      그러나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은 동요함이 없이 투쟁을 계속할 기세로 나왔다.    일본은 남원과 전주, 광주에 있던 토벌대와 진위대까지 동원하여 순창을 삼면으로 포위 공격하였다.    왜가 아닌 같은 동족인 전주진위대, 남원진위대가 공격해 오는 것을 보고 최익현은 군령을 내렸다.    《나는 동족끼리 서로 박대하는것을 원찮으니 너들은 즉시 해산하라!》     그러나 유생들은 그를 남겨두고 차마 작별하지 못하여 100여명이 남아 선생을 지키였다. 이날 오후 6시경에 총소리가 련달아 일어나 천지가 진동하게 되자 최익현은 좌우를 돌아보며 타일렀다.    《여기는 죽는 곳이니 모두 물러가라!》     탄환은 빗발치듯 날아와 기와가 부서지고 벽이 무너졌다.     인명피해가 많았다.     아직 22명이 남아있어서 최익현을 호위하고 떠나지 않았다.     밤 8시경. 문득 탄환이 벽을 뚫고 날아오더니 청년장교 정시해(鄭時海)를 꺾구러뜨려 숨을 거두게 했다.     최익현과 함께 살아 남은 사람은 임병찬, 최제학 등 불과 12명. 마침내 일본헌병대의 손에 전원이 체포되여 동월 26일 서울에 있는 일본 헌병사령부를 거쳐서 최익현과 임병찬은 쓰시마(對馬島)로 압송되고 나머지 지사는 혹은 석방, 혹은 단기형을 언도받았다.     이 쓰시마의 이즈하라(嚴原)에는 이미 홍주의병진의 유준근, 이식 등 9명지사가 구금되고 있어서 신산(辛酸)한 생활을 함께 나누게 되었다.    최익현은 식음을 전페하고 임병찬 등에게 유소(遺疎)를 받아쓰게 했다. 한편 일본 수비대장은 갖은 수단을 다하여 최익현을 협박, 항일의지를 굽혀보려했으나 허사였다. 그의 태연자약한 태도와 위용은 오히려 그자마저 감동케 했다.    12월 31일 최익현은 적의 땅 감금소에서 한많은 생을 마쳤으니 향년 74세. 그의 곧은 절개와 우국단성(憂國丹誠)은 실로 동서고금에 유례가 흔치않은것이다.                                                                     백발을 휘날리며 밭이랑뛰는 것은                 충성심을 바치려 함이로다                 왜적을 치는 것은 사람마다 해야 할 일                 고금이 다를소냐 물어 무엇하리오.             그가 생전에 남긴 시다.  또 하나의 다른 시는 이러했다.                          이 몸을 일으켜                 북두성 빛나는 조국을 바라보니                 백수로 잡힌 몸의 통분함을                 억제할수 없어라                 만번죽어도 적국의 부귀를 탑낼소냐                 오로지 일생에 내 나라 잊지 못하노라       최익현과 그가 지휘해온 태인반일의병의 투쟁행적은 늘 신문에 보도되여 온 국민이 다 알고있는 관심사로 되였기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는 유림의 거두로서 일찍이 대원군을 탄핵하여 정계에서 쫓겨나게 한 인물이다. 대원군을 몰아낼 때 민비일파에게 리용되여 한때 벼슬이 판서에 까지 올랐으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허다한 소장(疎狀)을 올렸다가 간신배의 모략으로 제주도며 흑산도 등에서 귀양살이를 하기도했다. 최익현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계기로 친일역당의 무리를 성토하는 문서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면서 십여년간 본격적인 항일투쟁의 선봉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으로 내외의 적을 론리적으로 공박성토하였다. 그의 사상체계가 비록 고루하고 보수적이긴하지만 민족심과 애국심은 말할수 없이 강하거니와 절개는 대처럼 곧았다. 하길래 서일은 그를 맘속으로 존경하고 숭배하면서 깊이 따랐던 것이다.              이는 최익현이 생전에 의병을 일으키면서 전사민(全士民)에게 고하던 그 긴 격문(檄文)중의 한 단락이다.    《천만 지당한 말씀이지요. 만일 2천만 우리 인민이 필사(必死)할 마음을 가지고 두마음이 없이 싸운다면 어찌 역적을 제거치 못하며 국적을 회복치 못하리오? 기억해두시오, 최후까지 싸우다 망한 민족은 반드시 광복할 그날이 있을것이나 아무 저항없이 망하는 민족은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리라는 것을.》    서일은 사생들에게 이같이 가르치면서 마음들떠서 안착못하는 학생들을 향해서는 자중하거라, 학생은 우선 학업에 힘쓰고 수양을 잘 닦은 연후에 구국의 중임을 질머져야 제대로 되느니라 하고 일깨워주었다.      태인지방 반일의병대가 패한것은 안타깝게도 최익현이 어찌 동족상쟁을 하겠느냐며 우유부단하게 행동한데 주요원인이 있는 것이다.              《매천야록》에 기록된 글이다.      항일의식은 유생들만있는것이 아니였다. 농민출신의 의병장들도 많이 나타났던 것이다. 순창에서의 전투는 실패하였으나 그에 뒤를 이어 전라도의 각 고을들에서 의병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구레, 장성, 광주, 순천.... 반일의병운동이 앙양되던 시기 일부 의병대들은 산간지대에 의거하여 일본군과 그 주구들을 반대해 혈전을 벌리였다. 이 투쟁에 강원도일대의 의병들이 선두에 나섰다. 적측인 조선주차군사령부의 와 동아동민협회의 에는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신돌석은 녕해에서, 김순현은 영양에서, 정용기는 영덕에서...봉기한 적의 부대는 그 어느것이나 막론하고 가장 작은 부대라도 수백명으로 편성되였다....우리의 소수의 경관대가 수시로 적의 부대와 충돌하였으나.....그때마다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은 당연하였다》.        어느날 경원학교의 리선생댁에 몸에 총상을 입은 젊은이가 왔다. 홍주성방어전투에 참가했던 민종식수하 의병장이다. 홍주성안에서 벌어졌던 육박전은 의병투쟁사상 보기드문 격전이였다. 반일의병들은 총가목으로 적들을 얼마나 힘있게 쳐갈겼던지 싸움터에 340여 정의 부러진 총가목이 나딩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의병들은 홍주성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다.   《전투사기만 높으면 되는게 아니다. 작전지휘능력이 중요하지. 력량대비가 안되는 때 성을 그냥 고수한다는 자체가 잘못된 전략이였어.》    일개 교원에 지나지 않는 서일이 홍주성방어전투의 패배를 이같이 분석했다.     
84    半島의 血 제1부 28. 댓글:  조회:4199  추천:0  2012-10-04
      28.      이틑날. 서울역전 동춘루에서 하루밤을 보낸 함경도내기 열혈의 젊은이들은 아침을 먹고나서 인츰 려관을 나와 곧바로 종로에 가 거기 어딘가 약속해 놓은 지점에서 신채호를 다시만났다. 피차 의기상투(意氣相投)해서 환난을 같이하자 맘먹으니 자연히 할 말이 많아 이같이 다시보게 된 그들이였다.    국문체의 자그마한 신문에 실린 문장 두편이 2천만을 크게 울려놓을줄이야 뉘알았으랴!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온 겨례를 깨우쳤으니 후세에 전할만한 공을 세웠다해도 과언이 아릴거야. 한데 위험불구하고 필봉을 휘둘렀다가 일경에 잡혀간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되였는가?》    서일은 신채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직 구속중입니다. 요즘 대한매일신보에 그에 대한 보도가 나갔는데 서선생은 그걸 못본모양이구만.》   《못봤소. 여기로 바삐오다보니....》    이에 신채호가 알려주었다.   《23일날이였습니다. 구속당한 경무청의 일본인 경찰고문이 장지연선생보고 너는 어째서 검열을 받지 않고 신문을 발행하여 치안을 방해케 하느냐고 물었지요. 그래서 장선생이 소위 치안방해는 오소불지(吾所不知)라. 대저국(大抵國)이 유(有)한 연후에 치안여부가 유할것이니 전즉무국의(全卽無國矣)라 치안은 하론(何論)가. 오(吾)가 병필(秉筆) 7, 8년에 세상의 공론을 주장하다가 금일 국가가 없어지게 된 관계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서 국민이 깨닫게한것인데 내가 쓴 구절구절 그 어디가 사실과 맞지 않은 곳이 있는가. 소위 치안방해는 일본치안의 방해가 유(有)하다 함이냐 하고 항변하니 일인 고문도 대답을 못하더랍니다.》     그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이 무기정간되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적극 나서서 한국언론의 입장을 옹호하고있는 반면에 서울에 있는 일인경영의 신문 또는 한인 경영의 친일지(親日紙), 례를 들면 대한일보(大韓日報)같은 것은 오히려 황성신문(皇城新聞)을 공박하고 있다면서 격분하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신채호는 이제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속히 복간되지 않으면 자기는 다른 신문사에 들어가서라도 장지연선생을 본받아 그이처럼 필봉을 휘두르리라 결심을 내리기까지 했다.    서일은 그가 정직 개결하고 패기있는 젊은이여서 무척 맘들었다.     이날은 전날모양으로 깨여진 기와장을 뿌리거나 총을 쏘는 정도의 과격한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도끼메고 상소를 올라오는 사람의 행렬은 끊지 않았다. 종로에는 날마다 시민이 군데군데 많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총검으로 전신을 무장한 경찰과 헌병이 나서서 모인 군중들을 흩어지게 하느라 땀을 뺐다. 폭동이라도 일어날까봐 취하는 방비책이였던 것이다.    그들은 함께 경희궁(慶熙宮)이 있는 서쪽방향으로 가다가 십자로에 이르러 북으로 꺾어 세종로에 들어섰다. 그런데 거기 경복궁쪽은 아예 통행금지라 경계가 삼엄하여 몇발짝 못가서 제지당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남대문쪽을 향해서 걸음을 놓기시작했다.    덕수궁(德壽宮)앞을 지나면서 볼라니 그사이 흰옷을 입은 유생, 양반들과 경찰지간에 밀거니 당기거니 몸싸움을 벌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쪽에서 상소를 올리려는 것을 경찰들이 완력으로 금지시키다나니 그런 장면이 출현된것 같았다.    제땅에서 제나라 황제께 상소도 맘대로 못올리니 이런 놈의 일이 어디있는가?....국가의 치욕과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른걸 생각하면 너무도 통탄하여 복장이 터질것만같았다.    《저 빌어먹을 쪽발이들을 언제면 다 쫓아낼가.》    서일은 격분하고 피곤했다. 광채를 잃은 그의 눈에서는 피발이 일어섯다.    《아, 나라 땅은 오랑캐의 발에 짓밟히고 흑운은 하늘을 덮었도다!》    그는 그쪽을 아느새 바라보다가 한마디 탄식을 뽑았다.     《우리는 어쩌다나니 이 지경에 이르렀나?》    기호역시 비감을 토해냈다.    그러는것을 보고 신채호가 제 생각을 피력했다.   《원인이 다른데있는게 아니야. 여지껏 글만 숭상하고 상무를 홀시한데 있지. 굶주린 승냥이떼 문을 긁으며 울어댔건만 그 소리를 못들은체 무관하고 독경만 했으니 변을 당할 수밖에. 안그렇소?》   《신선생의 그 말씀 과연 옳은 것 같소! 이게 다 문약(文弱)이 가져온 결과가 아니고 뭐요. 국민 모두가 량반이 된들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소. 글을 잘 읽으면 똑똑해진다면서 그것만을 지고지상인줄로 알고 무예를 닦을 념은 전혀 하지도 않았으니 한심한 바보짓을 했지. 그통에 국력은 약할대로 약해진게 아니겠소. 울바자가 든든치 못하면 이웃집의 개가 업수히 여기고 제멋대로 드나들기 마련이야. 그렇다는걸 몰랐던가? 우리는 승양이를 때려 잡을 힘도 없다보니 이 지경에 이르었단말이요. 과연 한심하지. 일본은 어떠했는가. 그자들은 배속에 온통 침략성만 키우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왔단말이요.》    성묵이 하는 말이였다.   《바로 그러했지!》    서일은 동감하면서 그가하려는 말을 이어했다.   《몽매했던 일본은 옛적부터 한 해협을 사이두고있는 조선을 리상국으로 여기고 공경하면서 음식도 의복도 지어는 궁실의 제도며 천문이며 의학이며 유교와 불교에 이르기까지 다 받아들여 배우고 본따지 않았는가. 그러면서도 략탈을 천직으로 삼는 고약한 버릇은 고치지 않고 잔뜩 자래우면서  배짱이 커져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국성(國性)으로 까지 키웠으니 우환이 아니겠소.》   《그 말이 맞아. 일본의 침략성은 그 민족자체는 물론 세상의 우환거리지.》    신채호의 말이였다.     《임진란을 겪고 그것을 깨달았음에도 우리는 여적지 어떻게 해왔던가?....왜는 본성이 잔인해서 살인략탈을 도락으로 삼는다는것을 번연히 알면서....그를 대처해서 정신을 차렸더라면, 국민이 각성하여 문약한 습성을 버렸더라면, 그리고 그 기초에서 상무의 기풍을 수립하였더라면 오늘에 이르러 이같이 참혹한 지경에 까지는 이르지 않았을거요. 안그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보란말이야. 종족이 서로 기시하고 국가와 국가지간에 대립하는 국면이 이루어져 그것이 극에 달하면 그저 전쟁으로 해결책을 찾자고 드는판인데. 안그렇소? 승자는 무조건 주인이 되고 패자는 무조건 노예로 되어버리는 판인데. 안그렇소? 우리 민족은 그저....》   성묵이 하는 말이였다.   《우리 민족은 그저 문약하기만했던가? 그런건 아니였지.》   서일은 그의 말을 시정했다.          後漢書에:       新唐書에:      高麗史에:             이상의 력사기재만 봐도 조선민족은 결코 지금같이 무맥하지는 않았다. 고구려때는 국법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무예를 련습시켜 온 것이다. 지어 고구려때의 군제는 농병(農兵)일치로서 농민이 농사일을 하다가도 손에 무장만 들면 나가 싸울 수 있도록 돼있은것이다. 상무(尙武)의 기백이 농후하지 않았는가!    서일은 이어서 제 속맘을 피력했다.   《한교(韓嶠)의 습련지남(習練指南)을 봐도 알수 있는바 무적능력(無敵能力)의 예비는 국민 전체가 군사를 일과로 또는 천직으로 삼은데 있은것이였소. 이조시대에 들어와서도 한때는 그랬지. 선조때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한교가 육기를 가르쳤던거요. 인조때는 무예청을 설치하고 나라에서 무예전문가를 양성하구.... 오늘 와 보면 그건 다 잘한 일이였지. 안그런가?.... 옛날 고구려는 어찌하여 졸본의 한 부락에서 무장을 일으켜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700여년간이나 동방에 웅거하여 혁혁한 패업을 유지할수 있었는가?... 그게 다 상무의 결과가 아닐가!》   《바로 그러하지!》    신채호가 서일의 견해를 긍정하면서 뒤를 이었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문치를 숭상하고 무예는 너무나 소홀히 하였단말이요. 무반은 사대부축에 들지도 못했다니 웃기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불공평해도 한심하게 불공평했지. 사대부들은 날마타 태평가나 부르면서 임금에게 아첨하고 권세로 백성을 학대할줄이나 알았지 그 이상 더 안게 무엇이였나말입니다. 소위 국민의 사표라는 상층인물들이 주자학에 빠져 무예를 비천한 재주라 비난하면서 사림(士林)의 언론마저 탄압해왔으니 국방이 어떤 꼴로 되었는가?!》    그도 정부의 지난 처사를 생각하고는 한심하여 한숨쉬였다.     돌아다녀봣자 다리맥만 풀릴것이였다. 려관에 가 앉아서 이야기함만 좋을 것 같지 않았다. 서일이 제의하자 친구들은 그러자면서 신채호를 데리고 주숙을 정해놓은 동춘루(東春樓)를 향해 걸음을 놓았다.    역전광장에도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역전광장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볼라니 어디로 떠나가는지 괴나리보짐을 한손에 달랑 든 젊은 아낙네가 여러 객들의 앞에서 어제 자기가 친히 목격한바를 얘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얘기의 내용인즉 대개 이러한것이였다.    군부대신 이근택이 이번조약에 솔선 승낙해놓고는 집에 돌아가서는 제 식솔들 앞에서 자랑삼아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오조약체결이 성공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됐다.》    그 소리를 이근택 며느리의 교전비로 따라 온 소녀종이 듣고서 큰소리로 꾸짖었던 것이다.   《이 만번 죽어도 아깝잖은 역전놈아, 그것도 자랑이라고 말하는거냐? 내가 너같이 더러운 놈의 집에서 종노릇을 해온게 부끄럽다.》    그러자 이근택은 소녀종이 무엄스레 군다고 란폭하게 구타하려들었다.   《이 매국놈이 바른말을 한다고 나를 죽이려해요!》    소녀종은 밖으로 달려나오며 소리질렀다.    그러자 이근택의 아들이 뒤쫓아 나와 그 소녀종을 때려 빈사의 지경에 이르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야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으랴.   《역적놈들을 죽여치워야 한다, 역적놈들을!》    누군가는 치를 떨면서 웨치였다.    누군들 증오하지 않겠는가. 을사5적(乙巳五賊)에게 죽음을 주자는 자가 그 한사람뿐이 아니였다. 한데 누가 나서서 감히 먼저 손을 쓸건가?....      조선에 용사가 없는 것이 아니였다. 선지선각자들은 벌써부터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워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으니 라철(羅喆)역시 그러한 우국지사(憂國志士)중의 한 사람이였다!    라철이란 그의 자(字)요 초명(初名)은 인영(寅永)이며 호는 홍암(弘巖)이다. 그는 1863년 12월 2일생으로서 고향은 전남 낙안군 남성면 금곡촌. 그는 한학자(漢學者) 용집(龍集)의 아들로 태여났다.    라철이 태여나던 해면 바로 이씨조선의 마지막 임금이며 운명의 황제인 대원군의 둘째아들이 겨우 12세로 왕위에 등극하던 해이기도 하였다. 라철이 점차 자라나서 29세의 나이에 문과(文科)에 급제할 때 까지의 기간중에도 병인양요, 임오군변, 갑신정변 등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겹쳐진 소용돌이가 멎지 않았다.             初習江南岸 更飛漢北雲 珠樓千萬戶 未得一樑春       이것은 약관시절 청운에 뜻을 두고 서울에 머물면서 과업(科業)에 힘쓸 즈음 세상인품이 랭박(冷薄)함을 풍자하여 지은 시구인데 운양 김윤식대감의 심금을 울린바 되어 마침내 그와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게되였던 것이다.      라철은 그후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당국의 발탁(拔擢)으로 벼슬길에 올라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징세서장(徵稅署長), 훈련원(訓練院) 권지부정자직(權知副正字職)을 맡아 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이번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勒結)되려 하자 끓어오르는 분을 참을 수 없어 천추(千秋)의 한을 품고 강도적인 일본과 사투(死鬪)하려고 관직마저 버리고 나선 것이다.    쓰찌마해엽에서 발찍함대마저 일군에 격파됨으로 하여 로일전쟁은 승패가 이미 결정되여가고있던 어느날이였다. 라철은 자기보다 두 살아래요 같은 량반출신이며 주사(主事)인 친구 오기호(吳基鎬)와 함께 서울의 중서비파동74통6호 사택을 찾아가 문에다 노크를 했다. 그 사택에 이기(李沂)가 살고있었던 것이다. 주사량지위원(主事量地委員)이였던 이기(李沂)가 지금은 사범학교교관으로 사업하고 있었다. 그는 라철보다 15세 손우로서 서로 면목을 아는 사이였다. 몇 년을 함께 지내는 과정에 라철은 그가 우국충정(憂國衷情)을 지닌 사람임을 보아냈고 지기(知己)로 사귈만하다고 여겨져 이렇게 찾아온거다.      《한가지 중요사를 선생님과 상의하고자합니다.》    라철이 국궁재배하고나서 입을 열어 직방 찾아온 리유를 말했다.    강기있고 정수(精粹)한 중년친구의 살결적은 얼굴빛이 자못 단엄하고 진지해 보이는지라 이기선생은 히슥히슥해진 머리를 기웃거리며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어서 말해보오. 무슨일인데?....》   《선생님께서도 보시다십히 동양의 제국가중에 앞서서 선진문물을 흡수하고 그것을 소화한 일본은 서양문명의 장점을 취한 반면에 현대판인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의 침략적인 근성마저 따라배워 내우외환으로 허덕이고 있는 우리 한국의 약점에 편승하여 잠식지책을 써온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로일전쟁이 다 끝나가고있습니다. 일본은 이제 전승하고 나면 낙언을 버리고 제 야심을 드러낼것입니다. 그러한즉 멍청히 앉아서 방관시 할 일이 아닌가 봅니다. 대책을 세워야 할게 아니겠습니까?》    라철은 이렇게 오기호(吳基浩)와 함께 이 기(李 沂), 정훈모(鄭薰模). 김인식(金寅植) 등 동지를 얻었다. 그러고는 미국에서 일본수상 가쯔라와 미륙군장관 타이프사이에 맺어질 이른바 가쯔라ㅡ타이프밀약과 포츠마쓰강화조약 체결 직전에 그 밀약과 조약에서 한국문제가 불리하게 처리될 것을 예견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조야(朝野)에 한국의 입장과 일본의 야망을 호소하는 민간외교를 전개하고자했다. 한데 외부(外部)에 려권을 신청했더니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께의 방해로 인하여 그만 좌절되고말았다.    국내에서의 대일항쟁보다 미국에 건너가 일제의 한국침략문제를 미국으로 하여금 막아보게 하려던 그의 첫 시도는 이렇게 실패하고말았던것이다.        하지만 그렇다하여 주저앉고 말 라철이 아니였다.    (저놈들이 아라사와 싸우기 위해 뭐라구 선전포고를 했더냐? 고 부르짖지를 않았는가. 일본이 양언(揚言)한바를 변경못하게 해야한다, 변경못하게 해야하구말구! 그 어떠한 구실이든 대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다짐했다.    다섯달전이던 6월의 어느날 이기선생의 자택에 동지들이 다시금 모이였다. 라철, 이기, 오기호, 김인식.... 그들은 모두 폭풍우전야에 밀어닥친 저기압속에서마냥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의 도미계획은 수포로 되고말았습니다. 전차 말했듯이 일제는 미국과 그 어떠한 비밀협정을 맺을것이고 그렇게 되면 필경은 한국문제가 불리하게 처리될건 불보듯 빤한것입니다. 흉한의 마수가 목첩에 이르고 있는 이때를 당하여 마땅히 조속한 대책이 요긴하다고 봅니다.》    라철은 여러 사람앞에서 급히 모이게 된 연유를 말했다.   《옳은 말씀이오. 우리는 비상수단을 취해야하오.》    오기호의 말이였다.   《하다면 어떻게 말이요?.... 》   《미국에 못가는바 방향을 돌려 일본으로 가봄이 어떨가?》    오기호가 다시 입을 열고 말했다.   《아마 그것이 상책인것 같습니다. 세분선생님께서 도일하시여 일본정부의 각 대신과 정부요로를 역방해보시죠. 그들에게 우리의 의사를 알리고 여론을 환기시키도록 하셔요. 저의 의견인즉 민간적인 차원에서 계속 외교를 해보자 그겁니다.》    이제 나이 32세, 모인 사람중 제일 어린 김인식(金寅植)의 발언이였다.   《일리가 있는 소리요. 안그렇소, 라선생! 일본 정계의 거물급 인물들을 우리가 직접만나서 그자들의 한국침략을 막아보도록하기요.》    김인식의 제의에 이기선생은 적극찬동이였다.    사실 라철도 언녕 그럴 맘을 먹고있으면서 달리 더좋은 수는 없겠는가 해서 토론에 붙인건데 의견이 하나로 모여지는지라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지었다. 그들은 이제 일본에 가서 취할 행동에 대해서 진지하게 담론했다. 그러고나서 라철은 오기호, 이기와 함께 이튼날 곧 서울을 떠나 부산에 가 거기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밀항을 했다. 들키면 억류될 수 있으니까.     그들 일행이 일본에 간 다음 방문할 사람은 실제상 대륙침략을 추진한 정계요인인 이또오 히로부미와 오호꾸마 시게노부 그리고 다른 한 사람 모찌스 유다로 였다.       오기호는 일본이 초행이지만 라철이나 이기선생은 일본이 초행길이 아니였거니와 일어도 어느정도 알고있었기에 그리 막막하지 않았다. 여러날만에야 마침내 도꾜오에 이른 그들은 거기 江戶川區 櫻田本鄕町13番地 淸光?에 숙소를 정하고 행장을 풀었다.     이제 로독을 풀고는 일본정부 요로(要路)와 교섭하고 담판을 해야한다.    이틑날 세 사람은 추밀원을 찾아가 거기서 이또오 히로부미를 만났다.    생각밖에 접대가 좋았다. 중등키의 체구가 마른 로인이였다. 백발머리에 염소수염을 자래운 이또오 히로부미는 살결적은 얼굴에 시종 웃음을 바르면서 자기는 애국심을 품고 민간외교에 솔선나선 세 조선정객의 의례적인 방문을 고맙게 여긴다고 태도를 표시했다.    《각하! 일본은 로씨아에 대해 선전포고시 고 양언한바 있습니다. 전쟁은 대일본제국의 휘황한 승리로 끝나가고있습니다. 저희들은 전승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희망컨대 일본은 그때의 약속을 변경하지 말기를 간곡히 바라는바입니다. 각하께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라철은 주장을 강력히 피력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말은 없고 고개만 끄덕이면서 만면에 웃음을 그믈그믈 피여올렸다. 숱많은 흰 눈섶이 가끔 일어서군한다. 대방의 말을 곰곰히 새겨들으면서 받아주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보니 오늘따라 그가 별로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렇다! 로련한 이 정객의 잔인한 속맘을 성실한 그들이 어떻게 보아내랴?.... 사실은 이 시각 이또오 히로부미는 잊지 못할 제 스승 요시다 노리가다의 교시를 감미롭게 상기하고있었던 것이다. 요시다 노리가다(1830ㅡ1859)는 일본 에도시대 말기의 사상가이자 교육가였는데 27세때에 마쯔시다의숙(松下義塾)을 열어 이또오 히로부미 등 여러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 제자들이 후에 메이지유신의 중견인물이 된것이다. 요시다 노리가다는 그때 벌써 남으로 필리핀을 점령하고 북으로는 만주까지 공략하는 목표를 정한바가 있다. 그리하여 일본에는 만한경영(滿韓經營)의 분투목표가 나온것인데 제1보의 필리핀점령은 이미 끝났고 제2보의 조선경영이 지금 실현되고있으며 만주경영도 그리 멀지 않은 장래의 일처럼 내다보였던 것이다.    (존경하는 선생님! 제자 이또오는 거룩한 선생님의 위대한 교시를 받들어 그것을 현실로 되게 노력을 다하고있습니다. 구천에서 웃어주십시오.)    이또오 히로부미는 속으로 렇게 부르짖고있었던 것이다.          하건만도 라철일행은 그의 그러한 속내를 알아보지 못한채 그저 좋은면으로만 생각을 굴리면서 떠날 때 준비해갖고 온 는 요지의 의견서를 일본정부의 각 대신과 오호구마와 방게쯔 류다로를 비롯한 정계요로에게 전달하면서 여론을 환기시키려 했다.    라철일행은 도오꾜오에 그냥 체류하면서 희망이 부풀어 오르는 심정으로 일본정계의 추이와 그들의 반응을 밀탐했다.    이러고있던 중 11월 초순이 지난 어느날, 일본 도오꾜오의 각 신문에    는 것이 보도되였던 것이다.    자기들의 외교활동이 어느정도 효과가 있으리라 믿고 있었던 라철일행은 이외의 보도에 그만 대경실색했다. 라철은 제1차 조처로서 자기와 가깝게 지내온 본국의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먼저 급전을 쳤다.        그리고는 한국에 특파된 이또오 히로부미에게는 항의서한을 발송했다.        이런 전제로 그의 간계를 폭로한 다음, 일제의 무모한 침략성을 예견하여 무익한 행위를 지양하고 진심으로 한,일량국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할 것을 충고하였다.    그들은 황급히 도오꾜오를 출발하여 이듬해 1월 24일 오후 11시에 서울 서대문역에 도착하였다.    라철이 서대문역에서 세종로방향으로 몇걸음 걸어갈 즈음 한 로인이 삭풍에 백발을 휘날리면서 급히 걸어오다가 문득 발길을 멈추고 물어왔다.   《그대가 라인영이 아닌가?》    라철은 이상쩍어 하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의 본명은 백전(伯佺)이요. 호는 두암(頭岩)이며 나이는 90인데 백두산에 계신 백봉신형의 명을 받고 라공에게 이것을 전하러 왔노라.》       하면서 로인은 백지에 싼 것을 주고는 서대문쪽으로 총총히 가버렸다.    로상에서 백두옹으로부터 물건을 받은 라철은 집에 돌아오자 즉시 펴보았다. 와 각 한권이였다. 그러나 당시 서산락일같이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돌이키기 위해 희생을 각오한 라철에게 그것은 관심사가 아닌지라 무심하게 한구석에 방치하고말았다.     한데 어찌 알았으랴, 바람같이 지나간 그 일이 훗날 라철의 로상봉교가 되여 마침내 700여년이나 닫혔던 대교(大敎)의 교문을 다시열고 천신대도(天神大道)를 밝히는 중광(重光)의 동기가 될줄을!    그것은 오로지 한배님밖에 모를일이였다!
83    半島의 血 제1부 27. 댓글:  조회:4126  추천:0  2012-10-04
   27.        매정스레 불어치는 찬바람은 울긋불긋 곱게 물들어 나보란듯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춤추던 단풍잎들을 땅바가에다 흩어놓았다. 불안한 세월이라서 자연이 주는 감각이 다른가? 이해의 겨울은 이왕년보다 느닷없이 빨리닥치는것만 같았다.    서일은 유리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자연의 이러한 변화에 누길을 던진채 한가지 일을 다시금 상기했다. 경성(鏡城)에 있는 모교ㅡ 유지의숙(有志義塾)이 사회의 변혁에 따라 모습이 달라졌다는 소식이였다.    전번달인 10월 14일자 은 이렇게 보도했던 것이다.              며칠안되여 서일처럼 그 유지의숙을 졸업한 김학섭(金學燮)이 나타나 우리도 이 경원학교를 차원높은 학교로 꾸려봄이 어떠냐고 제의해왔다. 그는 여기 이 경원(慶源)의 태생이였는데 손잡고 제고향을 남보다 못지 않게 잘 건설해보자는 웅지(雄志)를 품은지라 서일은 그가 찾아온것이 반가왔다. 그러잖아 그도 이제는 보통학교를 중학교로 승급시켜 볼 궁리를 하고있었던 것이다.          우근진소지단(右謹陳訴旨段)이니 유세차감소고우(維歲次敢昭告于)니 복지제기자미유항려(僕之弟幾子未有伉儷)니 복미심차시(伏未審此時)니 하는 따위의 땅문서, 소장, 축문, 혼서, 편지쓰기같은 것만을 중시하던 시대는 언녕지났다. 이제는 어문, 수학, 자연과학을 비롯하여 초등본국력사지지(初等本國歷史地誌), 본국력사지지(本國歷史地誌) 등을 기본과목으로 하는 외에도 동국사략(東國史略), 녀자국문독본(女子國文讀本),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이순신전(李舜臣傳), 국민수지(國民須知), 대한역사(大韓歷史), 대한지지(大韓地誌)같은 서적들을 과외필독물로 정해주어 학생뿐만이 아니라 국민모두가 의무적으로 읽어보도록해야 할 것이다.    세월이 가니 지금은 전만 썩 달라졌다. 전 경원군에서도 계몽운동의 열풍이 일기시작했던 것이다. 도내의 읍이건 시골이건 그 어디에건간에, 지어 아무리 초가집만있는 가난한 고장일지라도 학생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당과 동네에서 공동으로 쓰는 도청은 기와집으로 바뀌였다. 서당대청에 북과 종을 달아 북을 치면 글을 읽기 시작하고 종을 치면 쉬는데도 있고 종만 달아놓고 때리는 수와 간격을 정해놓고 그것을 울려 시간을 알리는데도 있었다. 마을의 도청은 회의도 하고 세상이 돌아가는 형세를 놓고 왈가왈부 론하고 야학도 하고 혹 뉘집에 손님이 왔는데 잠자리가 없으면 류하기도하는 장소로 리용되고 있었다.    서일은 모교생 학섭이를 교원으로 채용하면서 손잡고 학교를 잘 운영해보자고 했다.        이러던 중 11월 22일 문득 이홍래를 다시만나게되였다. 하루의 교수를 다 끝낸 어슬녘이였다. 서일이 수학과(數學課)를 가르치는 박기호와 함께 퇴교를 하느라 교문을 막 나서고있는데 웬 사람이 앞을 막아서는 것이였다.   《와, 이제는 도시사람돼서 사람 못알아보는거 아녀?》    그가 말을 걸어오는지라 다시보니 이홍래(李鴻來)였다.    《아니 어떻게 돼서 여기는요?!》   《하마터면 모르고 지날번했네요!》    기호도 서일도 이 뜻밖의 상봉을 무척 반가와했다.    이홍래(李鴻來)는 만주에서 돌아온 후 아직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있었다. 로일전쟁이 끝났건만 일본군은 거의돌아가지 않고 지금 조선에 널려 경계가 삼엄하니 한둘이 들고일어나봤자 어차피 진압당하기마련이요 숨이 갑갑한게 조짐이 좋지 않으니 당장 무슨 변이라도 생길것같아서 살피고있는 판이라했다.    《요즘 왜 이래? 하세가와 그놈이 주둔군사령으루 와서 하는 짓이 아무리봐야 그저일같잖아. 저들이 한국독립을 위해서 싸운다고했었지. 그래 싸워 이겼으면 제 굴로 돌아들갈거지 왜 가지 않고 뻣히는가말이여?》    이홍래는 이러면서 라철(羅喆)을 찾아갔더니 라철은 그지간 훈련원(訓練院) 권지부정자직(權知副正字職)을 버리고 민간외교를 한다면서 일본에 건너간것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만나지 못했고 지난날 자기가 궁궐에서 수위노릇을 할 적에 상관이였던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도 여차여차해서 만나지 못했다, 하여 그들을 내놓고는 맘을 시원히 털어놓고 함께 시국을 론해 볼 사람은 서일밖에 없는지라 곧 찾아왔노라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지간 다니느라 로고많았겠습니다. 헌데 이또오가 왜 또   왔답니까?....뭐, 들으니 초문이라구요?.....원, 어쩜!》    서일은 일본군이 조선땅에서 철거안하는 것도 문제려니와 이또오 히로부미가 갑작스레 천황의 특파대사로 파견된게 수상해서 숨막히듯 갑갑하다고 했다.    그들 셋이 서일의 집을 향해서 걸음을 놓고있는데 저기 가계방옆쪽 판자로 지은 신문파는 집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시끌벅적거렸다.    웬 일인지 모르겠지만 서일은 마음이 심란해났다.     누군가는 신문쥔 손을 머리우로 치켜 올려 허우적거린다. 그러더니 곡성이 터진다.    《어이구! 망했다, 망했어! 우린 망했어!....》    불길한 예감이 뇌파리를 때리는지라 이쪽의 세사람은 걸음을 뚝 멈추었다.    들려오는 곡성이 그들의 가슴에다 구멍을 펑 뚫어놓고 있었다.    셋은 그쪽으로 달려갔다.    모두가 허탈한 비감에 빠진 모습들이였다.    《웬 일입니까? 무슨 보도가 났길래?》    서일은 아무하고나 물어보았다.    면목모를 어른이 억장이 무너져 내리게 한숨을 길게 토해놓고는 물어보느라 말고 제눈으로 보라면서 신문을 주었다            서일이 받아 보니  큰활자로 박혀진 표제만 보일뿐 어둠이 급속히 덮치고있어서 다른 글자는 보아낼 재간이 없었다. 이것이 11월 20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이라니 래일아침에 배달될건데 왜 일찍이 왔을가? 게다가 온 신문마저 다 팔려버렸다. 공교로왔다. 서일은 가타부타 말 한마디도 없이 신문 한부값을 그 어른의 손에 제꺽쥐여주고는 얼른 자리를 떴다.    세은 침묵으로 당장 폭발할것 같은 가슴을 달래면서 잰걸음을 놓았다. 그들은 서일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전등을 켜놓고는 신문에 실린 론설부터 읽어봤다. 그것은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이《을사5조약》의 강압체결과 관련하여 쓴 글이였는데 일본이 강요한 이번조약의 침략성을 폭로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구절구절이 페부를 찔러놓았다.   《아아! 개자식들이 나라를 팔아먹어서 이젠 망하게됐구나!》    기호가 격분하여 주먹을 부르쥐였다.         《예감이 좋지 않더니 끝내 이꼴이 되는구나, 각을 찢어죽여도 시원찮은 역적놈들!》    서일은 억이 막혀 말이 더 나가지 않았다.   《역적놈들을 없애치워야 해, 역적놈들을! 씨알머리도 안남게 모조리 없애치워야 해!》    이홍래가 구곡간장이 끊어지는 것만 같다면서 이를 갈앗다. 주먹을 부르쥐는데 노기찬 그의 눈에서도 어느덧 이슬같이 맑은것이 반짝거렸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은 이 론설과 함께 또한 오건조약청제전말(五件條約請締顚末)이라는 제목으로 이 조약이 강제체결되기까지의 경위를 폭로했다.    《“일본정부는 도오꾜오에 있는 외무부를 통하여 금후 조선에 대한 외교관계 및 사무를 처리한다.”... 이건 외교권을 빼앗는 판이로군!》    서일이 조약의 제1조의 내용을 뇌이면서 말했다.   《“제2조라, 조선정부는 일본정부의 중계가 없이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도 할수 없으며....” 쳇 저들이 대체뭔데? 이게 조선을 독립시켜주는건가? 개같은 자식들!》    기호가 욕설을 퍼질렀다.   《제3조를 보구려. “일본정부는 그 대표로서 조선에 을 두어...” 뭘 어쩐다?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한다”....?. 허, 이거 원! 외교권을 빼앗아가면 조선은 남는 것이 무엇이며 왜놈이 와서 통치하면 나라가 무슨 꼴이 되는가?.... 이거야말로 에누리없이 식민지로 전락되고마는게 아닌가. 이러면 나라는 다 망한거나마찬가지지 뭐야!》    이홍래의 웨침이였다.    일본은 이번의 이 조약을 통하여 조선정부의 외정을 제마음대로 처리할수 있는 권한을 완전히 빼앗아냄으로써 그의 대외적기능을 말살하자는 것이요 조약에서 말하는 보호통치는 본질상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실시하자는것임을 표명하는것이였다. "통감"이라는건 "고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것이다. "고문"이란 말그대로 "고문"의 자격으로 내정과 외정을 간섭하는것이지만 "통감"은 내외정을 직접 장악하고 지휘하는 실제상의 통치자인 것이다. 그리고 또 조약에 보면 나라의 중요한 지방들에 "리사관"을 둔다고 하였는데 이는 "통감"의 손발이 되어 각 지방을 통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것이다. 말끝마다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보장하고 보위해준다던 일본의 량심이 이러했단말인가?    세 사람은 이또오 히로부미가 표리부동하고 교활하며 그 수완이 이를데없이 악랄하고 지독하다면서 그의 앞잡이가 되어 나라를 팔아먹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5역적까지 싸잡아 증오하고 저주했다.      이틑날은 토요일이였다. 나라에 액운(厄運)이 떨어졌는데 정상적인 교수가 될리만무였다. 하지만 선생이면 학생을 책임져야겠기에 서일도 기호도 학섭이도 다른선생들도 다가 예전대로 제시간에 등교했다. 이홍래가 때마추와서 함께 학교로 나갔다. 직접 의병을 지낸 사람의 말 한마디가 더 실감적이라여겨 그에게 연설을  시킬 궁리였다.    한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거리는 스산했고 나다니는 사람도 전날만 적어졌다. 하지만 무지각자와 부랑자와 꼴불견의 술주정뱅이는 오늘도 눈뿌리를 아프게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렴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법당에다                      산재불공 말구                      외로운 이내몸을 네가 괄세를 말라.             중년의 사나이였다. 술을 어디서 퍼마셨는지 만취되여 이리비틀 저리비틀 거리를 쓸듯하면서 마주오고 있었다.   《에그, 아주반님두! 장참 타령만 부르구는 어떻게 살우? 쯔쯔....》    지나가던 녀 행인 하나가 그를 면목아는지 혀를 끌끌 찼다.   《와 못들었수? 외로운 이내몸을 네가 괄세를 말라잖아.》    술꾼은 취중에도 정신많은 잃지 않았지 녀인의 말에 이렇게 퉁명스레 퇴박을 놓고는 계속해서 흥얼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는 얼마나높나                      정든땅 부모처자 집에다두고                      동경대판 돈벌라 련락선탄다.     《자식! 네 입에서 노래가 나와?》    이홍래가 그러는 꼴을 보기싫어 높은 어성으로 한마디 핑잔했다.   《허, 허허허....》    저켠은 몸을 흔들거리며 어이없다는 듯 허구푼 웃움을 흘리더니 대꾸질했다.   《넌 대체 웬 놈인데 어르신님을 훈시냐?》   《나라가 망해도 네 입에서 노래가나와? 자식!》   《지갈길이나 갈게지 싱겁게...나라가 망하건 뭐가 망하건 내 알배가아니야, 내 알배가아니야.》   《이자식아, 뭐라구?》    이홍래가 참아낼 재간이 없어서 따귀를 한 대 찰싹 붙인다.        주정군은 얼결에 눈에서 불이 번쩍 나게 한 대 맞고 보니 정신나는지 어마뚝하여 얼얼해 나는 뺨을 썩 썩 어루만진다.    《어쨌다구이러우? 》   《이 맹충이같은 놈아, 정신 좀 차리거라!》    이홍래는 이제다시 대꾸질하면 콱 밟아놓으리라 으름장까지 놓았다.   《취중몽사하지 말구 정신 좀 차리시오, 정신!》    서일도 한마디 충고하고나서 학교쪽을 향해 걸음을 다시놓았다.    울분은 감정을 들뜨게 하는지라 이날 사생모두가 일찍 등교하여 새조약을 놓고 운운했다. 을사년에 체결되였다해서 을사조약(乙巳條約) 혹은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라고 하며 모두 다섯개 조항으로 되어있다해서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이라고도 부르게 되는 이번의 한일협약(韓日協約)은 외교권을 일본에다 다 넘겨주는 조약이니 곧바로 망국조약(亡國條約)이나 다름없었다. 하여 그걸 모르는 이가 거의없게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아직도 정신이 흐려갖고 그것을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주고 있었다.    《....그런다면 그건 자기가 남의 노예로 되는 것을 숙명으로 달게 받아주는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생여러분, 정신차리고 깨여나시오! 이럴때 잠을 자서는 안됩니다! 절대안됩니다!》     이홍래는 전교사생이 모인 앞에서 연설했다.    《일본은 마관조약으로부터 로일전쟁에 이르기까지 대한의 독립자주를 부르짖어왔지만 그것은 모두가 빈말이였고 속임수였습니다. 처음에는 적자(賊子) 이지용을 유혹하여 협정서를 늑체(勒締)하고 나중에는 역신(逆臣) 박제순을 협박하여 신조약을 맺어 우리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장차는 통감을 두어 이천만의 우리 동포를 통치하려고 합니다. 생각들 해보시오. 노예가 됨은 소, 말과 같은 신세가 됨을 의미하는것이어늘 이 민족을 이 지역에서 어디로 몰아갈 것인가?.... 왜놈들은 이 민족을 험한 구렁텅이에 몰아넣지 않으면 황막한 벌판에다  내쫓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는 삼천리 아름다운 이 강산을 저들이 차지하고 말 것입니다. 조국이 없는 민족은 부모없고 집잃은 아이와 같은겁니다. 그렇다는것을 명기하고 잊지 말아야합니다.》    이홍래는 조선은 비록 작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인민들이 전에는 성격이 강직했다는 것, 그러나 문치(文治)의 여파(餘波)로 인하여 민기(民氣)는 줄어든것이요 그러다보니 천하의 대세를 통찰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지금은 제 권리마저 빼앗겨 죽음이 목첩에 이른것도 모르고있다고 했다.    《사람은 필사(必死)할줄을 알면 그 가운데 생(生)의 길을 찾을것이요 필사할줄을 모르고 요행을 바라다가는 결국 죽고말 겁니다. 만민이 일심이 되어 싸운다면 빼앗긴 권리를 되찾고 살길은 나지는겁니다!》    그의 연설은 격정이 끓어번지는 호소로 끝마치였다.    서일이나 이홍래뿐 아니였다.    기호, 학섭이나 다른 사생들뿐이 아니였다.    온 경원사람다가 다음날의 "황성신문(皇城新聞)"에는 또 어떤 보도가 실릴까고 하면서 기다렸다. 한데 꼭 보자고 기다리는 그 신문은 오지 않고 훗날 11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실리였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또한 1면의 론설에서 《황성임무》라는 제목밑에 라고 장지연을 비롯한 신문편집자들이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의 체결내막을 세상에 폭로한 언론활동을 옹호하여 나섰다.    모두들 이제야 "황성신문(皇城新聞)"이 배달되지 않은 원인을 알게되였다.   《일본이 언론계를 탄압하는구나, 비렬하게!》    서일은 격분했다.    누군들 격분하지 않으랴.     일본이 조선의 신문을 탄압한 것이 이번만이 아니였다. 지난해의 10월 9일에 군사경찰훈령의 시행에 관한 내훈(內訓)이 제정, 집회, 신문, 잡지, 광고 등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될 때에는 이를 제한, 정지 또는 금지시킬수 있다고 발표하던 그날로 언론탄압의 철권을 휘두른 것이다. 허지만 일본의 이러한 탄압에도 신문의 논조는 쉽게 수그러지지 않았다. 사전검렬에서 저촉되는 내용은 활자를 뒤집어서 발간하는 이른바 이 나왔던 것이다.    반항이였다.    이번에 장지연은 사설과 기사를 싫은 신문을 일본군의 검열을 받지 않은채 배포하였다. 하여 "황성신문(皇城新聞)"은 무기정간을 당하고 사장 장지연을 비롯하여 공무원을 포함한 10여명의 사원이 체포되는 수난을 겪게 된 것이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 한국신문은 그래 일본의 무자비한 철퇴를 얻어 맞아 한 마디 말도 못한단말인가? 그렇지 않았다. 이때에도 영국인 배설(T. E. Bethell)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일본조차 어찌할 수 없는 신문이였던 것이다. 그 신문에 실린 보도는 조선인민의 반일감을 폭발시켰다.       《매국조약을 페기하라!》   《왜적을 몰아내자!》   《5적을 처단하라!》    경원학교 사생들은 구호를 웨치면서 일본의 침략책동과 을사5적의 매국배족인 행위를 준렬히 규탄하였다. 학교는 교학을 할 수 없었다.   《우리 서울로 올라갑시다. 조약을 철회하라고 상소를 올리던지....》    서일은 잠자코있을 수 없었다.                  그와 박기호, 이홍래 김학섭 넷은 돈이 자라는대로 다 털어갖고 말 4필을 빌어 타고 지체없이 그날로 서울을 바라고 경원을 떠났다.     경성(鏡城)에 이르러 보니 격분한 사람들이 일본 사람의 가계를 습격하여 전부 뚜드려 마수어 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으며 주인은 죽을까봐 겁나 어디론가 내빼고말았다. 한데 유지의숙에 들려보니 이운협교장이 을사조약이 맺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나 통분하여 자살하려다가 학생들에게 미연에 발각되여 성사못한채 병원에서 구급치료를 받고 있었다.     《나도 가야지!》    성묵이도 말 한필을 빌려타고 따라나섰다.    그리하여 다섯이 한패가 되어 달리고 달려서 30일날 오전에 마침내 서울에 들어섰다. 타고 온 말을 어느 한 마사(馬舍)에다 맡기고나서 그들은 동춘루(東春樓)라는 간판을 내건 려관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서울역전 남대문통 5정목 13번지 중국인이 경영하는 려관이였다.    려관을 잡아 한시름을 놓은 그들은 근처의 음식집에서 늦은 아침을 제꺽 치르고 곧 떠나 남대문을 지나고 덕수궁을 지나서 종로로 향했다.    이때의 서울은 초상집처럼 되어 애처롭고 험악한 분위기에 잠겨있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을 닫고 통곡했고 교도들은 교당에서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고 울었으며 상인들은 철시를 하고 외치였고 유생들은 상소를 했으며 원로대신(元老大臣)들은 여러날째 항쟁을 했다.     서일 등 다섯사람이 종로에 이르러 보니 길이 메도록 사람들이 가득모여들길래 대체 무슨 일이 생겼는가고 물어보니 민영환이 자결했다는 것이다. 이홍래가 그 소리를 듣자 악연히 놀라면서 민영환의 집으로 달려갔다.    민영환인즉 갑신정변 때 개화파들의 칼을 맞고 쓰러진 민태호의 양아들로서 민비는 그에게 사촌고모벌이 되는 것이다. 이에 민영환은 고종의 신임을 받고 벼슬이 례조판서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한때는 영국, 독일, 프랑스, 로씨야, 이딸리아, 오지리 등 나라의 특명전권공사를 겸임하기도하였다. 친일파들이 득세하는바람에 친로파였던 그는 시종무관장이라는 한직에 밀려나가있었지만 나라의 운명을 자기 목숨같이 여기는 대바른 사람이였다. 한데 황제가 상소를 받아주지 않으니 내가 이제 나라를 잃고 구차히 사느니보다는 차라리 깨끗이 죽는 편이 나으리라면서 다섯통의 유서를 남겨놓고 이른새벽에 배를 갈라 자결하고 만 것이다.     서일이 모인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맨상투바람에 흰명주옷을 입은 40대의 사나이가 눈물을 휘뿌리며 민영환의 "국민에게 고하는 글"을 읽고 있었다.                         사나이가 유서를 다읽자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들리면서 울음이 터졌다.     저 사람이 누군가고 물어보니 서울사람 하나가 아 그분이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으로 발탁한 이상설(李相卨)이 아닌가 한다. 1870년생인 이상설은 27세에 성균관(成均館) 교수로 임명되고 곧 성균관장(成均館長)으로 승진되였다. 지난해의 8월에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의 회장에 추대되였다. 부회장에 이준(李儁), 총무에 정운복(鄭雲復), 평의장에 이상재(李商在), 서무부장에 이동휘(李東輝), 편집부장에 이승만(李承晩), 지방장에 약기탁(梁起鐸), 재무부장에 허위(許爲) 등 이름이 쟁쟁한 사람들이였다. 이상설은 을사조약의 늑결(勒結)은 곧 망국조약이라 단정하고 임금에게 5역신의 규탄을 상주(上奏)함과 동시에 임금보고 《이 조약은 인준(認准)해도 나라가 망하고 인준을 아니해도 나라는 이미 망하게 되었으니 페하는 차라리 순사직(殉死稷)하라》고 하였다. 이처럼 임금을 죽으라고 강조한 신하는 아마 동서고금에 그 례가 드믈 것이다.    이상설은 민영환과 같이 왜의 침략을 저지할 책략을 강구하여 임금에게는 국가를 위하여 죽으라고 강권한 것이고 일면 참정 한규설에게도 순사(殉死)할 것을 맹약받은바 있는것이다. 군신중에서 한사람이라도 그 장면에 죽음으로 항거하는 자가 있다면 그 조약은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가 전날 원임대신(原任大臣) 조병세(趙秉世)를 소두(疏頭)로 하여 궐하에 엎드려 단식으로 밤을 새우니 수백명의 동지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다가 급기야 일본군이 몰려와 총검으로 협박하는 통에 해산당했던거다.    사람들이 갑자기 벅작했다. 방금 땅을 치며 통곡하던 이상설이 자결하려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손에서 칼을 앗아내고 피투성이 된 그를 인력거에 태워 병원으로 날라갔다.      하루지나 12월 1일에는 원로대신 조병세가 "국민에게 고하는 글"과 "외국공사들에게 보내는 글"을 남겨놓고 자결했으며 뒤이어 전 참판 홍만식, 학부주사 이상철, 평양진위대 병사 김봉학, 전 대사헌 송병선.... 자결자가 속출했다. 이같은 의로운 자살행위는 영향이 커서 지어는 량심적인 중국사람, 일본사람마저도 자살로 자국민에게 경종을 울려주거나 일본의 강도적인 행위에 항거했다.    일본에 류학갔던 중국청년 반숭례(潘崇禮)는 귀국하다가 배가 인천항에 정박중 어떤 선객으로부터 민영환의 유서를 보게되였다.    《한국의 멸망은 중국이 멸망하는 서막인데도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아직 각성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나의 죽음으로 국민을 각성하게 해야겠다.》    그는 이같이 말하고는 시국에 대한 견해 14조를 적어 정부에 전달하여 달라고 벗에게 부탁하고는 바다에 뛰여들어 자살했다. 나이가 42세였다.    《이또오 히로부미가 한국을 강박하여 새조약을 체결하고 자주권을 빼앗은 것은 강도적행실이다. 나는 일본사람이지만 이같은 강도적행실에 죽음으로 항거한다!》     일본의 평화주의자 니시자까는 조선에 와서 떠돌아다니던 중 일본이 조선을 강박하여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루차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할복자살로 항거하였던 것이다.     자결한 상관의 시체라도 봐야겠다며 달려간 이홍래가 돌아오지 않아 서일, 기호, 성묵이와 학섭은 정간된 황성신문(皇城新聞)사옥이라도 가보자며 려관을 나섰다가 공교롭게도 거리에서 신채호를 만났다. 그도 서일을 알아보고 무척 반가와했다. 신채호는 그사이 성균관박사가 되였는데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 론설기자로 들어갔다가 필화(筆禍)를 격게 됐노라면서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늑결(勒結)되였음에 통탄을 금치못했다.    
82    半島의 血 제1부 26. 댓글:  조회:4509  추천:1  2012-10-04
    26.        벅찬 영광이 약속된 휘황한 성공은 오로지 의지와 실행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차례지는 례물이였다. 그 례물을 받으러 가는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번걸음이 순리로와 한생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가장 보람찬 려행으로 되어주기를 속으로 빌고 또 빌있었다.    《이번일이 성사되는 날이면 나는 또 한번 내 몸에가 도금을 하게 될테지! 그러면 천황못지 않게 온 국민의 공경을 한몸에 받으면서 원훈(元勳)의 영광을 누릴테지! 생각만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구나!》     그는 속으로 이같이 부르짓고나서 들떠나는 기분을 차분히 갈아앉히면서 인간답게 한번 자신을 솔직히 반성해보기도 했다.    《까놓고 말해서 내 이 이또오는 처세술이 남보다 월등할 뿐 기만책을 쓰고있으니  용렬한 인간이야. 이 점은 승인해야지.》            재작년그러께, 즉 명치 35년(1902) 10월 25일에 그는 오이소(大?)  창랑각(滄浪閣)에 환갑연회를 크게 차려 축하를 받았다. 연회참가자들은 모두 그가 있음으로하여 일본은 부강해질 수 있다면서 공덕을 구가하고 만수무강을 빌었다. 너무나도 과분한 기대며 떠올림이였지만 그때 그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흡족히 받았던 것이다. 겸손한 멋이란 티끌만치도 없이. 이또오 히로부미 그는 명치17년(1884) 7월 7일에 백작(伯爵) 작위를 받고 이듬해의 12월 23일에 일본에 내각제가 나와서는 맨처음의 총리대신 겸 궁내대신으로 당선되였던 것이다. 그는 독일의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 마냥 장기집정하려는 꿈을 품었다. 하지만 그 꿈은 2년도 못가서 깨지기 시작했다. 색마(色魔)라는 불명예스러운 소문이 낫기때문이다. 그통에 누군가의 건의에 의하여 명치 20년(1887) 9월 17일에 궁내대신의 직무를 잃었고 명치 22년(1889) 10월 3일에는 총리대신의 직무마저 떼우고는 력사상 첫 추밀원의장으로 직위가 바꾸어졌던 것이다. 그러다가 행운이랄가 그해의 11월 1일부터는 대일본제국헌법을 제정함에 공로가 있다는 명목으로 원훈대우를 향수하기시작한 것이다. 이같이 다시금 안면이 서게된건 두말할것 없이 천황이 전적으로 그를 감싸주고있기 때문이였다.     일본의 진짜 원훈(元勳)은 사이고 다까모리, 오구보 도시미찌, 기도 다까요시 등 유신삼걸(維新三傑)이지(그들은 다 세상을 떳다) 그가 아니다. 그 자신이 자격이 모자라다는걸 모르는바 아니건만 천황을 비롯해서 추종자들이 열성스레 떠받드니 결국은 그것을  당연한것 같이 받아들인 그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시모노세끼에서 직접 련락선을 타고 떠나면 퍽 빠르고 편리할수도 있으련만 그렇게 하지 않고 이번에는 마차로 요꼬스까에 왔다. 거기는 해군기지여서 전함(戰艦)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는 그 전함들 중 다른 어느것에도 마음이 없고 청일, 로일 두차례 전투를 겪으면서 이름떨친 지휘함 마쯔시다호에 올라 일본을 떠난 것이다. 어찌보면 이번에 보호조약(保護條約)을 맺으러 조선에 건너가는 행각역시 한차례 치렬한 해전과도 같아 자기는 그것을 이 전함에서 지휘하는 가슴뿌듯함을 느껴보자는데서였다.    산듯한 히노마루는 11월의 해풍에 팔락거렸다. 낡은기계가 발동시에 내는 거세찬 동음이 전함을 한동안 전율케 했다. 어마어마한 긴 포신이 그대로 장치되여있는 군함은 출렁이는 바다물을 가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또오 히로부미 역시 이 군함모양으로 싸움을 해볼만한 기력이 아직은 얼마간남아있어서 그 용기를 과시하고있는것만같았다.                 조선주재 하야시 곤스께공사를 조약체결대표로 임명해서 며칠전에 먼저건너보내고 지금은 대장대신 소네 아라스께와 함께 가고있다. 보호조약이 체결되면 조선에다 즉시 통감부를 세우게 되는데 통감은 특파대사의 신분으로 조선땅을 다시밟는 이또오 히로부미 본신이 하고 부통감에 그를 시키기로 내정이 된 것이다.    요꼬스까에서 출항한 마쯔시마군함은 사가미만을 가르면서 이즈반도와 오오시마도사이를 빠져나와 태평양에 들어서자 방향을 서남쪽으로 잡았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일본역시 망망한 대해에 포위되여있는 것 만큼 본토를 이루는 홋까이도오, 혼슈우, 시고꾸, 규우슈우를 포함해 저그만치  4,500여개나 되는 크고 작은 무수한 섬들을 지켜내자면 영국처럼 강력한 해군력량을 길러야한다는 것을 절감하고는 우선 조선업을 대량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규우슈우에 있는 나가사끼와 사세보를 장차 조선공업기지로 건설하려고 점을 찍은바 있다. 그는 이번 걸음에 아예 그곳을 잠간 시찰할 생각까지 갖고 떠난 것이다.    마쯔시마 군함은 내내 본토를 한옆에 끼고 장시간을 항행하여 마침내 규우슈우의 최남단대륙과 나까노도사이의 오스미해협을 지나고 사다갑을 지나서 동해에 들어섰다. 거기서 군함은 선체를 돌려 방향을 북으로 곧추잡았다. 마쯔시마호는 오도군도를 좌측에 두고 나가사끼와 사세보항에 잠간 머물렀다가 곧 다시 출발하여 저 북쪽의 파도세찬 쓰찌마해협에 이르렀다. 로일전쟁이 어제일같았다. 발찍해로부터 극동에 증원하러 온 방대한 빨찍함대를 이곳을 채 벗어나지 못한채 대패케 한 일을 생각하면 그는 기분이 그지없이 좋았다. 하지만 현해탄을 넘어서부터는 이또오 히로부미의 달아올랐던 그 기분이 차츰 랭각되기 기시작했다. 웬일인 임진년(1592)전쟁이 새삼스례 상기되면서 뇌리를 허비였던것이다.   《이제 조선은 돈짝만한 섬마저도 우리의 지배하에 들것이요. 그러다 결국에는 아예 우리의 렬도에 편입되고말것인데 이번 걸음에 스쳐 지나면서라도 그 아름다움을 한번 보는것이 즐거움으로 될 것이요.》    이또오 히로부미는 일본을 떠나오기전에 이러면서 대장대신 소네 아라스께와 쓰찌마섬을 경유하지 않고 배머리를 썩 서쪽으로 돌려 제주도를 거쳐 조선의 남단을 에돌아서 부산항에 닿으면 이번 행차가 즐거운 유람으로도 될것이라 말한바 있다.    그런데?..... 문어의 발같이 대륙에 붙어서 제멋대로 나온 여러 반도와 거제도며 남해도, 거금도, 진도....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있는 수많은 이름모를 섬들..... 조선의 풍경이 일본에 못지 않게 아름다우련만 어디에든 마음대로 닻을 내리고 감히 내려서 구경할 수는 없었다. 한산도는 어디고 울돌목은 어디냐? 노량은 또 어디고?...도요도미가 발동했던 임진년의 전쟁ㅡ 그때 곳곳의 해전에서 일본수군(水軍)은 수백척의 전함을 잃으면서 수치스럽게 패배만 당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그 바다와 섬의 수풀 그 어디에나 짐승잡이를 나선 사냥꾼의 눈같이 예리하고 집요한 것이 자기의 명줄을 노리는것만 같았다. 하여 이또오는 유람이니 구경이니 하는 따위의 잡생각은 싹 집어치우고 쯔시마를 거쳐 곧추 부산에 닫기로 한 것이다.      소네 아라스께의 둥글넙적한 얼굴에 웃음끼라곤 없었다.    《한국의 황제를 그저 허깨비로만 보아둘게 아니요. 전번 조약때 보니 내뻗히더란 말이요. 그래 어떻게 했겠소. 내가 그보고 고 했지. 그제야 방법없는지 수그러들더란 말이요.》     이또오 히로부미는 제1차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조인할 때의 일이 상기되자 자기모양으로 머리가 허옇게 변해가고있는 그를 보면서 화제를 돌려 예견은 한바지만 이번에도  협약이 쉽게 되지는 않으리라했다.     《말을 곰상히 듣지 않으면 무력을 쓰기로 한게 아닙니까. 그것이야말로 적중한 압력이 되지요!》    《글쎄... 기정방침이 그렇기는하지만은 되도록....》    《승리는 언제나 강한 자의 손에 쥐여있는 거지요! 누가 제 나라를 그꼴로 만들랍니까. 는 아라비아 속담이 생각납니다. 일개 국왕으로서 멍청이같이 나이만 주어먹었지 뭡니까. 국가를 지켜내자면 자국민 모두에게 상무의 기풍을 수립시켜야 한다는 상식쯤도 모르고 있었으니 어리숙해도 한심하게 어리숙했지. 보시오, 그리구도 지금은 황제랍시고 룡포를 입었으니 소가 웃을일이아닙니까.》    《이제는 남한테 멸시받는 원인이 뭐였는가를 똑똑히 깨닫고 원망하게될거요.》    《원망하라지. 그리구 각성하라지. 오, 가련하고 불쌍한 황제여!》     소네 아라스께는 넓은 상판에 웃음을 가득피웠다. 그는 정복자의 오만한 태도로 조선의 고종을 멸시하면서 전에 미우라 고로오가 병사를 시켰건 부랑자를 시켰건 칼을 빼들고 범궐(犯闕)을 해서 민비를 없애치운건 속시원한 일이요 무사도의 풍격에 걸맞는 과감한 행위로 품평해야 옳으리라 했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비스마르크가 라 한것이 어쩌면 우리가 지금 조선문제를 처리함에도 적용된단말이요!》      이또오 히로부미는 힛죽웃고나서 이같이 부르짖었다. 그의 코오른쪽 팥알만한 깜장 김이 일순간 푸뜰거리더니 다시금 진정한다. 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다. 그는 얼굴에 연한 미소를 머금은채 자기의 말을 듣고 흥미가 증폭되여 붉게 상기한 대방의 얼굴을 그저 흥미롭게 볼 뿐이다. 누가 무엇이라 해도 그때의 일을 자기가 묵인했음을 스스로 발로해서는 되지 않는다. 민비를 시해한건 아무튼 비렬할 뿐 떳떳치는 못한 행위였으니까.    《조선은 군대라는게 들개가 달려들어도 막아내지 못할 지경 무맥하고 너절하다지요. 그래갖구서야?....》   《대장대신! 그러면 대방을 너무 경시하는게 아닐가?  싸울때는 부지깽이를 들어도 맨손보다는 낳다잖소. 조선에 아직 얼싸한 군대라도 있다는걸 우린 잊지 말아야 하오.》   《그깟거. 다해봤자 팔천명밖에 안되는데.》   《그래도 그렇지. 그것이 미약하긴 하지만 민족적인 반일력량으로 될 수도 있는거니 우리한테야 불리할 뿐이지, 안그렇소? 하니까.... 장차 기회를 봐가면서 그것마저도 없애치우는게 아마 명지한 처사일게요.》   《아니, 그것조차도?》   《그렇지. 우리는 그네들을 손에 촌철이 없는 민족으로 만들어야 할것이요. 아예 하나도 없게.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효과적인 통치를 하려면.》   (이 령감쟁이가?.... 넌 과연 지독하구나!)   소네 아라스께는 속으로 뇌이면서 이또오 히로부미를 다시보았다. 자기로서는 엄두도 못내는 일을 생각해 내는 그가 두려운 존재로 느껴던것이다.   《대장대신의 생각에는 우리가 조선의 명줄을 쥘수 있는 다른 방법으로 또 무엇이 있을 것 같소?》    이또오 히로부미가 문득 물어왔다.   《친일파를 잘 부추겨주는것이지요.》   《그거야 이미 상식적인 문제로 된게 아니겠소.》   《과연 그렇군요. 저는 의장각하의 고견을 듣고싶습니다.》   《뭐 고견이라구 할 것 까지야.》    이또오 히로부미는 말을 끊고 뜸을 드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장차 한국의 황태자 이은(李垠)을 우리가 볼모로 일본에 데려다가 잡아두자는거요. 그래놓고는....》   《오, 그것 참!》    소네 아라스께는 다시한 번 속으로 이 령감쟁이야 너는 과연 지독하구나 뇌이면서 머리를 주억거렸다. 일본에서는 그래도 한다하는 정치가요 관료파수령으로서 중의원부의장에 사법대신, 농상대신, 대장대신까지 지내면서도 여직 그런 권모술수(權謀術數)는 한번 써보지도 못한 그로서는 이또오 히로부미의 계략에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또오 히로부미ㅡ 그가 자기보다  썩 원견이 있는 사람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였다.     한편 이또오 히로부미는 제 흥에 들떠서 속타산을 한번 더 내비치였다. 장차 기회를 봐서 한국의 황태자를 유학(留學)시킨다는 명목으로 동경에 데려가고 그가 큰다음에는 일본의 황족과 결혼을 시키겠다고. 그러면서 이또오 히로부미는 벌써 그 배우자까지 보아두었으니 그 계집애인즉은 바로 천황의 근친인 나시모또 노미야의 딸 마사꼬라 알려주었다.    그의 속궁리는 그것뿐아니였다. 자기가 통감이 되고 소네 아라스께가 부통감이 되는 그때에 가서는 각 부(部)의 고문을 페하고 각 부의 협판(協辦)을 차관(次官)이라 개칭할 것이며 일본사람만을 등용하며 13도의 사무관도 몽땅 일본사람으로 바꾸고 봉급을 높혀주리라는 거다.   《이완용을 교사하여 군부와 법부를 페지하고 남아있는 시위병까지 우리 군의 사령부에 예속시켜야겠소.》   《그리구는?》   《그리구는 사법도 통감이 장악하고 일본 법관이 한국민을 재판할 뿐만 아니라 한국법률은 전부 페지하고 우리의 법을 쓰도록 할것이요.》   《그러자면?...》   《그러자면 사법권에 관한 조약을 따로 맺어져야지. 안그렇소?》   《물론 그래야지.》    이러다보니 두사람의 대화는 어느덧 흥미가 점점 깊어갔다. 자못 중요한 문제들이였다. 어느 하나도 조선의 운명, 일본의 리익과 관련되지 않은것이라곤 없었으니까.      마쯔시다호 지휘함은 부산항에 이르러 닻을 내렸다.    활기롭던 부산시 전체가 긴장감을 주는 삼엄한 경계속에 들어 있었다. 평화로운 분위기면 좋으련만 그렇게 돼주지를 않았다. 그러나 한편 그러면서도 그에게 안져주는 한가닭의 기쁨이 있었으니 그것인즉 자기의 노력으로 부설된 경부선을 직접 제눈으로 보게 된 그것이였다. 언젠가 이 철도는 조선인민의 피를 빨아내는 빨대의 역할을 하리라고 잔인한 비유를 했지만 오늘 그 자신이 처음으로 이 철도위를 달리는 특별렬차에 몸을 싣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기도했다.....    이또오 히로부미 일행의 이번 조선방문이 비밀적인 것은 아니였다. 일본의 여러 신문들이 이또오 히로부미는 조선의 황실을 위로하기 위하여 특파대사의 신분으로 일본 천황의 조서를 갖고 조선을 방문하게 된다면서 방문기간 조선의 외교권문제에 대한 해결도 있을것이라 슬쩍 내비치였다. 그리고 조선의 각 신문들은 일본신문에 난 그 보도를 옮겨놓았다. 촉각이 예민한 사람은 이또오 히로부미의 방문이 상서롭지 않음과 더불어 이제 조선에 덥치게 될 형언키 어려운 재난을 감촉했으나 적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상태였다.    11월 9일, 이또오 히로는 서울 남대문역(오늘의 서울역)에 도착했다. 때는 오후 7시경.    이에 앞서 하세가와 요시미찌사령은 조선에 주둔하고있는 일본군을 총동원하여 조선 각 지를 경계하도록 단단히 포치했다. 로일전쟁에 참가했던 부대들을 아직 귀향시키지 않고 조선에다 그냥 남겨두고있었던 것이다.    대단히 륭성한 영접이였다. 300여명의 내외인사가 이또오 히로부미의 일행을 맞이하러 역전에 나왔는데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비롯하여 재정고문 메가다, 경찰고문 마루야마, 궁내부고문 가또, 군부고문 노쯔, 학부고문 시네하라 그리고 한국정부의 고위급관리들인 외부대신 박제순,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학부대신 이완용, 궁내부대신 이재극, 법무부대신 이하영,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나와야 할 사람은 다 나와서 일본 천황이 특히 파견한 일행을 영접했다.    이또오 히로부미와 그의 일행은 손다크호텔에다 려장을 풀었다.    하야시 곤스께공사와 하세가와 요시미찌사령이 부름을 받고 달려왔다.   《준비는 잘되였는가?》    이또오 히로부미는 먼저 나젊은 하야시 곤스께공사와 물었다.   《예, 각하! 원로대신 심상훈을 움직여 협조케 하고 학부대신 이완용에 대한 사업도 해놓았습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보고를 받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각하! 서울시내를 허드레잡부 하나 얼씬못하게 엄중경계하고있습니다. 지금은 전국이 이같은 경비상태인 것입니다.》    하세가와 요시미찌사령은 그가 물어보기도 전에 제가 해놓은 일을 알려줘서 이또오 히로부미를 마음놓게 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고개를 까댁이여 만족을 표시했다.    이제 보호조약(保護條約)이라는 듣기 좋은 이름을 내걸고 조선의 외교권을 탈취하려든다는 것을 알게 되면 조선의 애국지사들은 천방백계를 다하여 자기를 작살내자고 달려들건 명백한 일이라 이또오 히로부미는 겁을 집어먹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구석구석 요소마다 경계를 세워놓은 것을 차에서 내리기전부터 목격한지라 그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틑날. 이또오 히로부미는 고종황제를 알현했다. 6년전 경부선부설권을 얻을 때와 지난해 2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 할 때를 내놓고 이번이 세 번째니 어느덧 서로 구면이 된 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지간 몸편히 잘있었는가고 좋게 안부를 묻고나서 마주앉아 이말 저말 끝에 자기가 갖고 온 천황의 조서를 내놓았다.    《황제페하께서는 이걸 받으시오. 천황의 조서입니다.》    《오, 그렇소?!....》     고종이 받아서 펼쳐보니 천황의 조서라는 것이 내용이 이러했다.                                   이게 어디 외교문서란 말인가, 협박장이지!    한심했다. 일본 천황의 조서를 받아 쥔 고종황제의 손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가슴속에서 격분이 치밀었던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자기의 심정을 감히 토해놓지 못했다. 일국의 황제로서 이 지경에 이르다니?.... 한스럽고 원통하기 그지없으나 어디다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밤잠이 잘 오지 않을거다.... 물론이지.... 그지간 생각을 잘해보거라.)    이또오 히로부미는 속으로 이러고나서 하세가와 요시미찌사령에게 명령하여 서울에 있는 보병, 기병, 헌병들을 몽땅 동원하여 왕궁주변일대를 비롯한 서울시내에 늘어놓아 삼엄한 분위기를 조성하게 했다. 그리고나서 나흘이 지나 15일에 두번째로 예궐하여 고종을 배알했다.    고종은 그를 다시보자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누를길없는지라 한마디 올곧게 내뱉았다.   《그런데 이또오대사! 일본은 전부터 한국의 독립을 보증한다해놓고서는 일로전쟁기간 의정서요, 협정이요 해가지고 한국을 그토록 괴롭혔으니 실로 유감스러운 일인가 하오.》   《페하! 페하께서 불만스럽게 여기시는데 대해 그 심중은 가히 헤아릴수 있습니다. 하오나 페하께 다시 묻건대 한국은 어떻게 하여 오늘까지 생존해있을 수 있었는가? 한국의 독립은 누구의 덕분인가? 페하께서는 이것을 몰라 그럻게 불만의 말씀을 하십니까?》    이또오 히로부미는 도리여 천만뜻밖이라는 듯이 얼굴에 노기를 띄우고 한동안 고종을 노려보았다. 도루수를 먹이는 판이다. 그는 갖고온 새조약의 본문을 내놓으면서 엄하고 쌀쌀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건 새조약입니다. 페하께서는 순조롭게 조인될수 있도록 어명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새조약이라?》    고종은 눈섭이 푸들거렸다. 그것을 받아 읽어보니 한마디로 말해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양여하라는 것이였다.    (이건 완전한 망국조약이 아닌가!)    락담실망하고있는 그의 얼굴 표정이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의 미세한 동작까지도 놓지 않고 주의해 살폈다.   《이처럼 중대한 일을 짐이 혼자서 결정할수 없소.》    고종은 마침내 단호한 태도로 나왔다.   《페하, 이것은 일본정부에서 여러면으로 고려한 끝에 결정한 것이므로 조금도 변경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페하께서 받아들이느냐 반대하느냐에 있는겁니다. 페하께서 반대하는 것은 자유겠지만 그럴 경우 일본정부에서는 이미 결정한바 있으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될것인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귀국의 지위는 이 조약을 결정하는 것 이상으로 더 곤난한 경우에 걸려 일층 불리한 결과가 있으리라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될것입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같이 대뜸 위협조로 나왔다.   《그러하나 우리 한국에서는 조종이래로 국가의 중대사건이 생겼을 때  원임대신들에게 묻고 민의를 들어가며 처사하는 관례가 있으므로 짐의 자의로 결정할 수는 없소.》   《하하하, 이거 원!.... 페하! 대신들에게 묻는다는 것은 근사한 말씀입니다만 국민의 의향을 묻는다는것은 기괴천만이올시다.》   《대사는 왜 그런 말을 하는거요?》   《귀국은 헌법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만기를 페하께서 친재하시는 이른바 군주제국가가 아닙니까? 민의를 운운하는 것은 기실 백성들을 선동하여 우리의 제안을 반대하는것으로밖에 리해 할 수 없습니다.》   《무슨 근거로?》   《왜냐하면 귀국의 국민은 유치하여 외교에 어둡고 세계대세를 알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안그렇습니까?》    이또오 히로부미의 이 말은 례의를 벗어난 모욕적인 악담이면서 우격다짐이였다.   《이 조약을 체결한다면 망국이나 다름없는데 짐은 종사에 순(殉)할지언정 인허할수 없소!》    아무리 허술히 보아온 황제일지라도 이처럼 나라의 존망에 관계되는 중대사(重大事)를 호락호락 응낙할리는 만무였다.   《어쨌든 이 조약안은 지연할수 없는것으로서 조속한 타결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페하께서는 속히 칙명을 내리셔야 합니다. 하야시공사로부터 정식제안이 있을 때 외부(外部)에서 페하의 칙명을 받지 못했다는 잘못이 생겨서는 안될것입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같이 으름장을 놓고 퇴궐했다.     이틑날 오후. 이또오 히로부미는 조선의 여러 대신을 손다크호텔에 불러다놓고 자기가 고종에게 한 말을 되풀이하면서 조약체결에 찬동할 것을 권유, 설득했다.   한편 하야시 곤스께도 이날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공사관에 불러다놓고 새조약에 찬동해줄 것을 강요하였다. 그리고는 그 이틑날인 17일에는 각부 대신들을 공사관에 모아놓고 점심을 같이하면서 새조약체결에 찬성, 협조해줄 것을 들먹이였다.  《청일전쟁, 로일전쟁은 모두다 한국의 외교가 문란해서 일어난것입니다. 그러니 동양평화를 위해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맡기는 것이 어느모로 보든지 한국에 유리할것입니다.》   하야시 곤스께가 하는 말이였다.             각부의 대신들이 모두 침묵을 지키자 참정대신 한규설이 입을 열어 과감히 반대의 뜻을 표시했다.      《하야시공사,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보호조약이 없다고 동양평화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말이 어디있소? 귀국은 강화도조약때부터 마관조약에 이르기 까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조선의 자주권을 주장하더니 오늘은 자주권을 빼앗으려 하니 대체 어찌된 일이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은 외교에 서툴기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를 맡아보아야 싸움이 다시일어나지 않고 한국의 자주권도 보장되는것입니다.》    하야시 곤스께의 해석이였다.    (엉터리수작을 하구있네.)    탁지부대신 민영기가 참을수 없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 조약은 극히 중요한 조약이므로 가볍게 처사할수 없소. 중추원에도 물어봐야 하고 민의도 널리 들어봐야 하오.》   《그게 무슨 말씁입니까? 귀국은 군주전제국인데 군주의 대권으로 얼마든지 결정할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입씨름은 오후 3시까지 계속되였으나 아무런 결과도 보지 못했다.    이럴때 이또오 히로부미가 하세가와 요스미찌사령을 데리고 나타났다.    《여러분은 지금 곧 입궐하여 어전회의를 열고 속히 조약을 체결하도록 해야겠소.》    대신들은 그의 살기띈 얼굴을 쳐다볼뿐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했다.   《여러분이 이또오대사의 지시대로 어서 서두르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어전으로 들어가 해결하겠으니 불쾌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시오.》    이번에는 하세가와 요시미찌가 일본도를 짚고 서서 큰소리로 위협했다.    여러 대신들은 눈치를 보면서 엉거주춤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문전에는 수십명의 일본군과 헌병들이 엄중경계를 하고 있었다.    대신들은 인력거를 타고 하야시 요시미찌는 마차에 앉아 일행은 경운궁으로 들어갔다.    대궐에 들어선 대신들은 일본 공사를 별실에서 잠시 기다리게 하고는 수옥헌에 들어가 아침부터 일본공사관에서 교섭한바를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고종은 잠자코 듣고있었다. 얼굴에서 어두운 그늘이 사라질줄을 모른다.   《일이 이 지경 되었은즉 어찌했으면 좋겠소?》   고종황제가 마침내 대원들을 보고 하문하는데 목소리는 구원을 바라듯 가련하고 구슬펐다.   《이 조약을 받아들이게 되면 한마디로 말해서 나라가 망하는것입니다. 페하께서는 단연코 물리쳐야 합니다.》    참정대신 한규설은 이번에도 견결히 반대의 뜻을 표명했다.    한편 이또오 히로부미는 궁내부대신 이재극을 통해 고종황제에게 배알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고종은 그를 더 이상 만나주지 않았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참정대신 한규설을 체포강금한 다음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등을 한사람씩 지명하면서 찬성여부를 묻고나서 대신 8명가운데서 이상 5명이 찬성이니까 조약체결은 가결됐다고 자의로 선포하고는 11월 18일 오전 2시 국왕의 도장을 훔쳐내다 조약문에 찍게 했다.  
81    半島의 血 제1부 25. 댓글:  조회:4213  추천:0  2012-09-24
  25.         몇달전이였던 이해(1905)의 1월1일에 일본군은 드디여 려순항을 공략한 것이다. 그야말로 오랜 혈전끝에 헤아리기 어려운 고생과 희생으로 바꾼 승리였다.     려순항은 10여년전 갑오년에 한차례 전쟁을 겪었다. 앞쪽에서 이미 기술한바와 같이 그때의 려순항은 이홍장이 광서6년(1880)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여 1885년에는 큰 부두로 되었고 해군제독아문(海軍提督衙門)을 설치하여 산동의 위해위와 더불어 북양군의 중요한 근거지로 된 곳이다. 청일전쟁당시 일본군은 려순항을 치기 어려우니 그곳은 일부러 놔두고 대신 화원항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이 이곳을 점령하고 상륙하자 겁을 집어먹은 청나라군대는 려순항을 견결히 사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본군이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려순항은 거의 손상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한데 청일전쟁후 일본이 3국간섭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차지할수 있었던 료동반도를 도루내놓게 되니 려순항역시 중국의 소유로 다시 된 것이다. 한데 후에 그것이 로씨야의 손에 들어가게될줄이야.     제국주의렬강의 눈에는 중국이 다만 한덩어리의 먹기좋은 고기덩이로밖에 보이지 않아 그들은 치렬한 쟁탈전을 벌렸는데 로씨야 역시 일본에 못지 않게 파렴치하고 탐욕스러웠던 것이다.      1891년 봄에 짜리로씨야는 첼랴빈쓰크에서는 동쪽으로, 울라지보스톡(해삼위)에서는 서쪽으로 서로 마주향해 동시에 길이 7,000㎞에 달하는 씨비리철도부설공사를 벌리였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길다란 혈맥과도 같이 구라파의 로씨야본토로부터 우랄산맥을 지나 원동지구에까지 뻗쳤다. 한편 또 그해에 짜리정부는 하바롭스크(백력)에서 흑룡강과 우쑤리강을 굽어볼수 있는 층암절벽에 전임 씨비리총독 무라비요브의 전신부각상을 세웠다. 중국의 령토를 100여㎢나 탈취한, 죽은지 10년이나 되는 오만한 무바비요브는 한손에는 "중로애훈조약" 본문을 쥐고 다른 한손에는 만원경을 들고 중국의 광활한 내지를 노려보고 있다.      1898년에 벌써 로씨야는 중국주차공사 빱빠브에게 명령하여 이홍장과 9개조로 된 려순,대련조차조약(旅順,大連租借條約)을 체결케한바있다.       1. 중국은 려순과 대련 두 지방 및 그 부근 일대의 지방을 로씨야에게 조차하되 25년을 기한으로 하며, 만기가 되면 계속 협의하여 이를 조차할 수 있다.    2. 려순은 로씨야의 해군항으로 하며, 대련은 통상항구로 개방한다.    3. 로씨야는 려순, 대련에다 포대를 구축할 수 있다.    4. 할빈으로부터 려순, 대련에 이르는 철도와 우장(牛莊)으로부터 압록강에 이르는 철도는 모두 로씨야가 부설한다.     이상이 그 조약의 주요한 내용이였다.    로씨야는 바로 이 조약에 의하여 려순항을 제손에 넣고 난공불락이라며 자랑하는 요새로 만든것이다.     려순군항에 있는 해안포대 13개소와 륙상포대 9개소에 대포 80여문이 그대로 장치되여있었거니와 대련만에 있는 포대 6개소에 장치된 24문 포도 그대로 있었다.    로씨야는 려순항을 장악하자 포대를 더 구축하고 여기다 전기철조망까지 늘이여 침입하는 적을 막아내려했다.    치렬한 공방전은 달에 달을 이어 오래도록 반복되면서 지속되고있었다. 일본군은 저들의 시체로 전기철조망을 덮었고 살아있는 군인들은 그 시체를 밟고 넘어 들어가 마침내 동방제1의 난공불락이라는 요새를 최후로 점령하고야말았던것이다. 얼빠진 려순함대사령이 제부인의 를 연 그 기회였다.     그러니 어찌 경축하지 않으랴! 려순항을 함락했다는 소식이 일본땅에 전해지자 일본국민들은 미칠지경 기뻐날뛰였던 것이다.    《대일본제국 만세! 만세! 만만세!》     그들은 거리에 뛸쳐나와 밤에 낮을 이어가며 춤추고 환호하면서 목이 터져라 웨쳐댔던 것이다. 희생자의 가족들은 비통하여 눈물을 뿌리면서도 죽은 이의 위패가 신사(神社)에 세워지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기에 그정도되였던 것이다.    려순항이 함락되면서 부터 일본군은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무기의 불비로 참중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들이 만주대륙으로 진격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전선으로부터 날아온 하나의 끔찍한 보고가 사람들을 몹시 경악케하였던 것이다. 로씨야군이 발사하는 이름모를 무기에 무수한 생명이 날아나고있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괴물이 나타난것일가?    그것은 막심기관총이였다. 1887년에 막심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새로 발명한 기관총을 가지고 뻬제르부르그에 가 거기에 있는 한 장군을 찾아  만났다. 그는 장군앞에서 당장 사격표연을 했는데 반분이 되나마나하는 사이에 330발의 탄환을 다 쏴버렸다. 로씨야장군은 놀라고 기뻐하면서 이 사실을 즉각 짜리황제에게 알리여 그 기관총을 사들이게 했다. 그러면서 그것을 “막심기관총”이라 이름지었다. 로씨야는 그런 것을 이번 전쟁에 사용한건데 그 기관총에 일본군은 한차례의 고지쟁탈전에서만도 4,000여명이나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일본은 자기들의 무장장비가 뒤떨어진 것을 통탄하면서 절치부심했다. 싸움에서 승전하자면 오로지 생명을 무수히 바치는 길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희생을 많이 내면서 계속싸워 3월에 가서야 드디여 봉천(심양)부근에서 로씨야군을 격파할수 있었다. 한편 로씨야는 만주대륙에서 륙군이 참패한 뒤를 이어 5월하순에 이르러서는 발찍해로부터 극동에 증원하여 온 방대한 빨찍함대마저도 대마해협을 채 벗어나지도 못한채 일본해의 대전에서 패하고말았다.  로씨야는 륙, 해군의 전부가 패배 하였으며 일본역시 전쟁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느끼게 되었다.       동경. 수상관저.    지니간 5월달말의 어느날 수상 가쯔라 다로오와 추밀원 의장 이또오 히로부미, 륙군총참모장 야마가따 아리또모와 내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대신 고무라 주따로 그리고 외무성 정무국장 주라찌 데쯔기찌로가 한자리에 다시모였다. 미국정부로부터 이제는 로일전쟁을 결속짓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제의해왔기 때문이다.    《로씨야는 이제와서야 우리와 화의할 것을 바라고있습니다. 이제 더는 뻣설 힘이 없으니 할수없이 자신의 패배를 승인하지요. 》    외무대신 고무라 주따로가 말했다. 뽀마도를 바른 그의 검은 머리가 오늘따라 윤기가 더 흐르고 있었다.     《저깟것들이 백기를 들어야지. 그렇게 세궁력진해갖구서 어떻게...》    주라찌 데쯔기찌는 숱많은 그의 멋진 팔자수염을 부러운 듯 보면서 감정을 맞추어주었다.    《세궁력진하기야 마찬가지요.》     이번에는 이또오 히로부미가 백발이 된 머리를 가로 젖고나서 말했다.    《일년 삼개월이요! 솔직히 말해 우리도 이젠 너무지쳤소. 병력이 이십여만이나 소모된것이요!》     야마가따 아리또모가 년장자다운 침착하고도 느러진 어조로 말하였다.    《총참모장말이 옳은데 어디 그것뿐일까. 내 한마디 덧붙이지. 우리는 이번전쟁에 이미 17억원이나 넘어 말아먹었소. 당초의 예견이야 5억원이 아니였는가. 이로인해 우리는 또한번 진통을 크게 겪어야한단말이요.》    가쯔라 다로오가 두 눈썹을 실룩거렸다. 늘 정장을 하여 멋스러워보이는 군인타입의 이 사나이는 이번전쟁이 또다시 경제공황을 몰아오게 되었음을 환기시시키느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초의 예견비용은 5억원. 그중 3억 5,000원을 영국과 미국의 외채에 의하여 충당하려한게 아닙니까. 그러나 1년 3개월간의 전쟁행정에 실지로 지출된건 17억 4,600만원이나되였습니다. 70%에 달하는 12억원을 외채에 의존한거죠. 이 빚을 우리가 어떻게 다 상환한단말인가?...》    그는 심각한낯색을 지은채 일장의 구술을 마치였다.    (부담을 자국민에게 더 지워서는 안된다. 그런다면 기필코 폭동을 야기시키게 될 것이다. 방법은 오로지 한가지ㅡ조선을 어서 먹어치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조선의 재정체계를 완전히 장악하여 식민지통치비를 전가하여 부담시켜야 한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입을 열었다.      《사실말해 우리도 이제는 더 이상 뻣힐 맥이 없는거요. 그러니 강화를 기껍게 접수하고 승전국으로서 의례 받아내야 할 대가나 빠뜨리지 않게끔 연구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 같구만.》    유도적인 발언이였다.    일본정부는 미국의 제의를 즉각 접수하여 6월상순에 전투를 정지했다. 그리고는 외무대신 고무라 주따로를 강화위원으로 미국 포츠머스에 파견하여 로씨야와 담판하기로했다.    8월에 로일강화조약의 성립을 보게되였다. 이 조약에 의해 로씨야군이나 일본군이나 다가 만주에서 철거했거니와 전패국인 로씨야는 화태도(樺太島)남부를 일본에 할양해야했다. 그외에도 로씨야는 종전에 중국에서 조차하였던 려순 및 대련과 장춘 려순간의 철도를 일본에게 양도해야했거니와 조선에 뻗혔던 세력도 거두어야했다. 하여 일본은 조선에 대한 특권마저 갖게된 것이다.           이것은 조선문제에 관한 포츠마스강화조약 제2조의 규정이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빨리 손을 써서 조선의 모든 외교권을 장악해야겠다고 맘먹었다. 외교권만 앗아내면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식미지로 만들어버린거나답지 않은 것이다. 7월 29일에 미국과 "가쯔라ㅡ타프티비밀협약"을 맺음으로써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조선강점에 대한 담보를 받아냈다. 그리고 8월에 제2차"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일본은 영국으로부터도 조선강점을 지지한다는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이쯤하면 주요한 열강들은 일본이 조선을 집어 삼키는데 찬동한 셈이였다. 그러니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건 다만 시간문제일뿐이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야마가따 아리또모 룩군총참모장과 개별적으로 다시만났다.    《총참모장께서는 왜 료양을 하시지 않습니까, 로고가 많으셨는데?.... 이젠  예쉰여엷입니다, 년세가 많은데. 신외무물이라 자기 신체도 돌보셔야합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한테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인사차림을 했다.    《관심해줘서 감사하외다. 로고를 따지면야 나보다도 의장께서 휴식을 먼저해야지. 난 아직 뻗힐만하오다. 건데 무슨일루서 나를?....》     야마가따 아리또모는 이렇게 응대하면서 조선문제를 놓고 내내 머리를 썩히는 추밀원 의장이 자기를 찾아 온 본의가 무엇일가고 속으로 점쳤다.    《하세가와 요시미찌에 대해서 좀 알고싶어서 그럽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잡담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요건을 말했다.    《그가 이번 전쟁에 대장으로 승급한거야 의장각하께서도 아시는 일이 아니요. 그런데 뭘 더 알고싶어 그러시오?》    《그 본인이 출국하여 사업해 볼 맘이 없는지?》    《의장께서는 그를 조선에 파견 할 생각이시오?》    《딴은 그런가봅니다. 누구를 보냈으면 좋을지 궁리가 나지 않다가.... 내가 그를 처음으로 알게된건 경부선부설권문제같아나 조선으로 가기직전이 아닙니까. 첫인상부터 좋게 안겨오더군요. 그리구 그 누구보다 실적도 있다구하니.... 그래서 그를 점찍은건데 본인이 이에 대해서 별 이의가 없다면 당장 그를 보낼가 합니다. 그곳의 군사를 시급히 유력하게 장악해야 할 적임자가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면야 어련히 반가와 하지 않으리. 맡겨보시오. 그는 잘해낼겁니다.》     야마가따 아리또모는 장담까지 해가면서 하세가와 요시미찌를 적극 추천했다. 백락일고(伯樂一顧)라 훌륭한 군왕에게 재능을 인정받게 됨으로써 신하가 실력을 발휘할수 있게 되는게 아닌가. 아무리 천리마라도 백락이 그를 몰라봐주면 별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전선에서 돌아오자 가정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해변가 료양지에 가있는 하세가와 요시미찌를 불러 조선주둔군 사령으로 임명해서 곧 파견했다. 그리고나서 이또오 히로부미는 한편 조선문제에 대한 최종결론을 내리기위해 부지런히 서둘렀다.       그러노라니 그는 머리가 더 희여졌다. 턱수염도 하얘졌다. 흡사 늙어가면서도 위풍을 보이느라 여력(餘力)을 과시하는 한 마리의 억대센 승냥이와도 같았다.    (네가 무던히도 참아왔구나. 그 속을 내가 이제 당장 풀어주마.)    수상 가쯔라 다로오는 그가 낯색이 누렇게 뜨고있으니 념려했다.   《의장각하께서 뻗혀내실만합니까?》    이 물음에 이또오 히로부미는 만면에 그믈그믈 웃음을 피여올렸다. 그는 여지껏 한국을 서둘러 병합해야한다고 주장해온 이 고집스러운 군벌출신의 단행론(斷行論)자에 대해 전에 없던 흥미를 가지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뻗혀내는가 못내는가는 나중에 볼 일이구 절대 중도이페지 할수야 없지. 안그렇소, 가쯔라수상! 우리는 더 기다릴 것 없소. 이제는 서둘러 결정을 내림이 지극히 필요하다고 보오.》    가쯔라 다로오는 이또오가 제구미에 맞는 말을 하는지라 기뻐했다.   《아, 예! 저도 바로 그 생각을 해온겁니다! 아무 극이나 막간이 길면 재미가 없지요. 안그렇습니까, 의장각하! 우리는 두차례나 혹독한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그 댓가가 무엇인가를 국민앞에 어서 보여줘야지요.》    그의 이런 말속에는 전쟁으로 인한 자국민의 불만을 갈아앉힐만한 가장 합당한 방도는 오로지 시간을 더 끌 필요없이 하루속히 조선을 일본에 예속시키는 일이라는 뜻이 함뿍 담겨있었다.    《한데 정부가 이제 한국보호권 확립에 관한 결정을 한다면 어떻게?..》     가쯔라 다로오는 방안을 들어보고싶어했다.    《 허두는 이같이 떼놓고 아래에 고 역점을 찍어 밝혀야 할 것이요.》    이또오 히로부미는 고심히 연구한 방안을 제 머리속에서 끄집어냈다.    가쯔라 다로오는 머리를 수긋하고 귀를 기울였다. 계모가 출중하여 자기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초월하는 그의 그 비범한 재능과 사업실적에 대해서 그는 오늘도 속으로 못내 경탄하고 만족스러워 하면서 명심해들었다.    《왜서 오늘을 가장 좋은 시기라 하는가? 그것인즉은 이에 대하여 미영량국이 이미 동의하였을뿐만아니라 이외의 여러 나라들도 역시 한일 두 나라의 특수한 관계와 전쟁의 결과를 고려하거니와 따라서 최근에 발표한 영일동맹, 로일강화조약의 명문에 비추어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되는 것은 피할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묵인하고있기 때문인것이요.》    《지당한 말씀이군요!》     가쯔라 다로오는 숙였던 머리를 치켰다 다시 수굿하는 것으로 솔직히 경의의 뜻을 표시했다.     10월 27일, 일본정부는 내각회으를 열고 기본상 추밀원 의장인 이또오 히로부미와 수상 가쯔라 다로오의 설계에 따라서 미리작성된 《한국보호권 확립실행에 관한 내각회의 결정》을 채택하였다. 이 문건에 수상과 단둘이서 나눈 대화의 요점과 이또오 히로부미의 언론이 그대로 수록되였다. 내각회의 결정에는 뜻과 같이 순조롭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무력적인 위협과 공갈로 한국정부에 조약을 강요하기로 하였으며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일방적으로 한국을 향해서는 보호권을 확립하였다는 취지를 통고하고 여러 나라들에 대하여서는 일본정부가 이러한 조취를 취하게 된 것은 부득이한것이라는 리유를 설명하며... 여러 나라들의 조선에서의 상공업상의 리익은 해치지 않는다는 취지를 선언할것이라는 것을 규정해놓았던 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같이 내각회의에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한다는 결정을 채택하자 곧 조약문을 구체적으로 다시 한번 연구했다. 물론 조약내용을 이제와서 구상하는건 아니다. 초도가 나와서 이날까지 임신부가 복통을 겪듯 무던히 오래동안 재검토하면서 암중에 길러온 것이다.           이른바 보호조약(保護條約)이라 명명한 그 전문은 다음과같았다.      日本政府 및 韓國政府는 兩帝國을 結合하는 利害共通의 主義를 鞏固케하고자 하여 韓國의 富强의 實을 가지게 될때 까지 이 目的으로써 左의 條款을 約定함.                                       제1조. 일본정부는 동경의 일본외무성으로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와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겠으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령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의 신민과 그 리익을 보호할사.     제2조. 일본국정부는 한국과 타국간에 현존한 조약의 실행을 완전케하는 임에 당하고 한국정부는 금후에 일본국정부의 중계에 유치 아니하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또 약속을 아니할 것을 약함.     제3조. 일본국정부는 그 대표로써 한국 황제페하의 관하에 통감일원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친히 한국 황제께 내갈하는 권리를 가짐. 일본국정부는 또 한국의 개항장과 기타 일본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곳에 리사관을 두고 권리를 가지되 리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서 종래 한국에 주재하는 일본령사에게 속하였던 일체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 사무를 집행할사.     제4조. 일본국과 한국간에 현존한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 조관에 저촉하는 자를 제한외에 총히 그 효력을 계속하는 것으로 함.     제5조. 일본정부는 한국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함.         우의 증거로 하여 하명은 본국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조약에 기명 조인함.                    광무9년 11월 17일 외부대신 박제순                  명치38년 11월 17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께                      조약일자와 서명은 후에 조약을 맺을 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추밀원 의장관저.    겨울철이 다가와서 싸늘하건만 관저의 방안은 난방이 잘되여 훈훈하다.    추밀원 의장 이또오 히로부미와 대장대신 소네 아라스께, 외무대신 고무라 주따로, 부름을 받고 서울에서 방금 온 조선주재 공사 하야시 곤스께 이렇게 넷이 따로 조용히 한자리에 모였다. 조선정부와 보호조약을 맺을 임무를 맡은 주역들이다. 년령을 볼것같으면 이또오 히로부미가 제일많아 63세이고 그 다음은 소네 아라스께 56세, 고무라 주따로 50세, 하야시 곤스께는 이제 36세 제일어리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고 사려깊고 허심하며 교오하지 않고 선배들을 존중하고 총명해서 전도유망한 젊은이라 보고있다. 20살나던 해(1889)에 벌써 인천주재 부영사로 부임하여 외교관생애의 첫발자국을 뗀 그는 30살에 조선주재 공사로 다시부임했고 로일전쟁이 일어나자 제1차 한일협약을 맺은 경력을 갖고있다. 이제는 외교가로서의 기틀이 잡혀 뒤에서 잘만 받들어주면 실수없이 자기의 재능을 발휘할 사람이였다.    그들은 이제 조선땅에 건너가서 자기들이 해야 할 행사와 그 절차에 대해서, 그리고 이에 따라 용이하게 부딧치게 될 난관들을 놓고 구체적인 대응책을 연구하고있었다.    《조선민족을 우매하다고만 보아서는 절대 아니될것입니다. 물론 세상일에 암매한 자가 아직도 많기는 하겠지만 자존의식이 높아 일단 깨닫고 각성하기만 하면 분노하여 분발함이 성난 둥글소와 같은겁니다.》    외무대신 고무라 주따로는 10여년전 민비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자기가 뒷수습을 하느라 조선에 건너가 여러해 땀을 뺀 일을 상기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미우라대신에 공사일을 맡아하는 기간 조선정부를 추겨 단발령(斷髮令)을 내리게했다가 생 애를 먹었던 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외교란 대방을 알고 자기를 내세워 교제함으로써 리득을 보자는게 목적인 것인만큼 자연히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게 된다면서 손해를 줄이고 불필요한 희생을 면하기 위해서는 항시 머리를 쓰면서 경각성을 높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때 내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가 나타났다. 개인적으로 조선에 가게되는 친구의 안녕을 빌어주자고 온 것이다.   《조선사람은 현세에 뒤떨어져 살기 때문에 암매하여 어리석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이 렬도의 야마도민족보다 더 외유내강한 민족인거요.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해.》    이노우에 가오루의 말이였다.    300만원을 갖고 로씨야쪽으로 마음이 쏠려버린 민비를 어떻게든 돌려세우려했다가 되려 돈만 잃고 곤궁에 빠져 돌아와야만했던 과거가 새삼스레 상기된 것이다. 그때는 로씨야를 위시한 3국간섭이 성공되여 일본의 위신은 저락되고 대신 로씨야의 위신이 올라가 친로파들이 활기를 띄면서 배일감정이 높아졌던것이다. 오또리공사가 소환되고 대신 그가 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해 조선에 갔으나 별 방도가 없었다. 그가 고심히 꾸려놓은 김홍집내각은 두 번이나 무너지고 왕실의 특사를 받고 다시 정계에 진출한 친일파 박영효도 미움을 받기 시작하고... 지난 과거는 쓰고 달고 맵고 시였다. 그런가하면 외교가의 회억은 이같이 가슴이 쓰라리는 반면에 또한 자랑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우리가 조선이 문을 열게 만든 것이 어느때더라?.... 운양호사건이 있었을 때니 어언 삼십년이 흘러갔구려!》    이노우에 가오루가 추억에 잠기면서 입을 다시열었다. 그가 올해 벌써 나이가  69살이였다.    (내 친구여, 이젠 칠십고개에 올랐구려!.... 우린 다 늙었어!)    이또오 히로부미는 몇오리 남지 않은 친구의 흰 머리를 보노라니 이름모를 련민이 가슴을 허비였다.    《내무대신은 그때 마흔살이였지요. 우리가 조선을 들쑤셔 첫조약을 맺었을 때가말입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도 따라서 과거를 상기했다.    《그렇소. 그때 내 나이 마흔이였지. 의관 나는 부사로서 개척사 구로다 기요다까를 따라가 조선정부와 강화도에서 조약을 맺었더랬지.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감슴이 벅차오르는구만.》    《그럴수맞아. 내무대신께서는 우리의 일본을 위해서 그때 과연 벅찬 일을 해놓았으니까. 개척사라는 명예는 구로다 기요다까 한분만 가질것이 아니라 어련히 내무대신께서도 함께 공유해야 할겁니다. 두분 다 조선의 대문을 맨처음 활짝 열어재꼈으니까.》    《그때가 있었기에 오늘을 맞볼 수 있게 되였지요. 력사는 공신들을 잊지 않고 기록해줄것입니다.》    고무라 주따로가 이또오 히로부미의 말끝에 이같이 발라맞추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그 후 임오군란 때 일본측 피해보상에 관한 한성조약(漢城條約)“도 체결했지만 첫조약때처럼 그렇게 보람찬건 아니였다. 강화도에서 체결되였다하여 일면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라 부르기도 하는 그 번의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의 내용을 보면 일본은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인정할 것, 일본과 조선은 서로 외교사절을 파견할 것, 조선은 인천과 원산을 통상항구로 개방할 것, 일본 군함은 언제든지 조선 해안지대를 측량할수 있다는 등등. 조선에 대한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얻어냈던 것이다.    그것은 일본이 조선을 삼키려고 내디딘 첫 행보였다.   《어언 삼십년이요, 이날을 위해서 우리가 살아온 것이.》   이노우에 가오루는 자기가 이미 한번 내친 말을 곱씹었다.   《기실 우리는 이날을 위해서 분투해왔지요. 안그렇습니까.》    고무라 주따로의 말이였다.   《맞아. 이날을 위해서 살고 노력하고 분투해온것이지요.》    하야시 곤스께가 두 선배의 말을 받아 종합하자 이또오는 부르짖듯 말했다.   《과거가 있음으로 하여 오늘이 있게 된것이니 우리의 삶이 이만하면 충실했지! 이제 이 보람찬 일을 해놓는다면 우린 후세에 부끄러움이 없게 될거야. 이 점을 생각하면 나는 스스로 자신을 위안하게 되거니와 떳떳이 자부하게 되는거요. 하고말이야!》
80    半島의 血 제1부 24. 댓글:  조회:4148  추천:0  2012-09-24
  24.         서울과 평양사이의 전선이 또 끊어졌다. 일본군측에서 말하듯이 사건조작자가 과연 배타고 외국으로 빠져나가자고 동해가로 도망쳐 왔을가? 경찰이 동원되여 폭민(暴民)을 붇잡는다면서 의심나는 행인은 불문곡직 붙잡아 조사를 하며 진종일 소동을 피우고난지 이틀이 지나서였다.      《선생님!》     서일이 등교시간이 되어 학교쪽을 향해 걸음을 놓고있는데 귀익은 부름소리 들려와서 머리돌리고 보니 정민호가 탈탈거리며 달려왔다.    《오ㅡ 너구나!》     서일은 그가 또 격문을 갖고왔으리라 짚었다.    《이걸요.》    《오, 그래!》     서일은 아이가 주는 접은 종이를 얼른 받았다. 격문이 옳았다. 한데 반일의병이 그것을 발포(發布)한다고만 했지 어느 의병대라는건 밝혀놓지 않은 전단(傳單)이였다. 이러한 전단(傳單)이 전에도 종종 발포되군했다.     서일은 종이의 글을 읽어보았다. 간단히 몇글자적은건데 소위 일진회라는 것이 어떤 란적의 무리인지 만일 저것들이 하는대로 내버려둔다면 반드시 나라를 없애고야 말것이라고 하면서 투쟁의 화살을 일진회에 겨눌 것을 호소했다.    8월에 일본에 가서 10여년동안지냈던 송병준이 갑자기 통역관(通譯官)의 신분이 되여 조선에 돌아와서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는데 그것이 얼마안가서 일진회(一進會)로 이름이 바뀌여진 것이다.   《이놈의 주구들을 개를 잡듯이 싹 다 잡아치워야 하는건데....》      서일이 혼자소리로 중얼거렸건만 소년은 그것을 잡아 듣고는 캐물었다.   《선생님! 개는 고기를 먹자고 잡는데 주구라는건 뭔가요?》   《네가 주구란게 뭔지를 아직도 모른단말이냐?》    민호는 그렇다고 고개를 까댁였다.    서일은 잠간 궁리하고나서 시켰다.   《이렇게 하자. 네가 먼저 너의 선생님하고 하고 물어보거라. 알았냐? 가 뭔가구말이다. 그러면 선생님은 너한테 알려줄거다. 그러면 넌 그걸 명심해 기억하거라. 그랬다가 다음날 내 앞에서 그대로 외우거라. 알았냐?....너한테 가르쳐준게 틀리면 그때 내가 주구란게 뭔가를 너한테 똑똑히 알려주마. 알아들었냐?》    《좋아요. 그렇게 하자요.》    민호소년은 약속하고 물러갔다.    이틑날 그들은 그 자리에서 다시만났는데 민호는 과연 서일이 시킨대로 했다.    《우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일진회라는건 일본의 앞잡이를 가리키는거래요. 선생님, 그런가요?》    《옳네라. 선생님이 제대로 알려줬구나.》    《그럼 울아버지도 제대루 알려줬네요. 울아버진 나보고 이건 너만 알고 남앞에서는  번지지 말라했어요. 왜서 그래야합니까?》    《너의 아버지가 그러더란말이지?》   《예. 우리 선생님도 그러구.》    《앞잡이라구 하면 그걸 듣기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러는게지. 바로 일진회 놈들이네라. 앞잡이를 라구 하지. 주구란건 바로 개질을 하는 놈을 가르키는거니라.》    《알았어요. 일진회는 일본놈의 앞잡이, 앞잡이는 개, 개는 주구!》    《그렇다. 바로 그거다. 넌 머리가 아둔한 애는 아니구나!》     서일은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민호의 의마를 살짝 뚱겨주었다.     민호는 힛쭉웃곤 뛰여갔다.     요즘 각지 의병들이 일진회를 성토하고있었다.     특히 평안도의병대의 행동이 특출했다. 송병준, 이용구 등이 공공연히 일본군의 손발이 되어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군사행동을 도와주고있으니 이에 격분한 평안도반일의병대는 일진회를 아예 소탕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유린석의 지휘하에 있던 서상무는 12월 충주에 달려가 의병격문을 전달하고 400~500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서울에 집결시켰다. 그들은 24일 조선의 순검, 군인들과 련계를 달고는 일진회청사를 돌연히 습격했다. 그리하여 의병들은 일진회성원과 그들을 보호하는 일본 헌병대와 육박전을 벌리였는데 일진회사람들이 많이 부상당하였고 일본헌병대 역시 돌벼락을 맞아 많은 부상자를 냈다. 일본헌병대장 다까야마가 말을 타고 달려나와 대한문밖에서 총을 마구 쏘아대니 흡사 전쟁마당과도같았다.... 그런데도 이를 본받아 다른 지방에서도 일진회 사람을 만나면 죽여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전라도지방에서는 1895~1896년 반일의병운동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여지껏 은신해있었던 기우만이 또다시 앞장나섰다. 그는 여러곳에다 유교조직인 종유회를 조직하고는 유교학습을 한다는 구실로 유생과 백성들을 모이게 하였다. 기우만은 모여온 군중들로 12월에 장성을 중심으로 반일의병대를 조직하고 일본과 일진회를 반대하여 싸울것이라 선포한 것이다.     전라도와 련접한 충청도 공주지방에서는 기우만의 호소에 감응되여 유생들이 중심이 되는 유희를 조직한 다음 이 조직이 의병들을 동원시켜 일진회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일진회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의병의 공격에 당황해난 어떤 일진회성원들은 도망치다가 물에 빠져 죽기까지 했다.     평안도, 전라도 지방에서 벌어진 이 일들은 전국에 영향을 크게 미치였다. 이용구, 송병준 등 두목들은 이에 겁을 집어먹고 각 지방에 있는 일진회의 우두머리들을 서울로 불러올리기까지 했다. 일대 소동이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저들의 조직을 해산시키려는 생각은 근본 하지도않았거니와 더더욱 완강히 뻗혀나갈 결심을 가졌다. 과연 충견이 되어도 착실히 되고 매국을 하여도 끝까지 하고 철저히 할 잡도리였다. 반역의 마음이 골수에 깊이 박히였으니 그야말로 제 몸을 담을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인간들이였다....          경원학교(鏡源學校).     겨울이 되여 추웠지만 난로에서는 석탄이 황황 불타고있어서 교무실안은 훈훈했다. 전에는 장작을 피우던 것이 근년에 탄전이 개발되니 학교가 그 득을 보는셈이였다. 값이 비싸기는 해도 그것이 제나라의 자원이니 좋았다.            반공일인 토요일이였건만 선생들은 난로주위를 떠날념을 하지 않았다.     《우리 개추념이나 하는게 어때?》     누군가 썰썰한데 먹자놀이를 하자는 말을 끄집어냈다.    《좋아, 그러는게 좋겠구만.》     총각선생이 맞장구를 쳐놓고 피끗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화제를 휘딱 번져버렸다.    《참 오늘 아침에 듣자니까 송병준이하고 이용구가 요즘 각처로 돌아 다닌다며?》    《그것들이 뭘 하느라구?》     기호가 짐작은 하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나도 딱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모를게 뭐야. 거야 빤하잖아, 왜군위문을 나다니겠지.》    《일진회의 주요간부 하나는 원산에 가서 일본이 어떻게 어떻게 좋다구 선전을 하다가 군중들헌테 매를 맞고 도망쳤다는구만.》    《그런 놈은 도망도 못치게 아예 다리각을 분질러놔야 해.》    《지선생은 아마 격문을 보지 못했을거요. 여게 누가 또 격문을 봤습니까? 나는 봤습니다. 내가 본 그 격문에는 고 욕을 했습디다.》    《그야 욕을 먹어 싸지.》     구완희는 본래 의주군수였는데 지난해 3월에 정부가 그를 일본진북군대응접관(日本進北軍隊應接官)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가 일본군을 환영하고 위문하며 돌봐주는 등 행사를 집행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일본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못들었습니까. 선천, 정주하고 곽산, 박천하고 또 가산, 태천하고 거기서는 라는 것이 생겨나서 일본군을 두둔하고있답니다.》    《그렇다면 그것역시 친일분자조직이구만, 안그래?》    《거야 물론이지. 안그럼 친로분자가 나서서 일본군을 두둔할가.》    《평안도는 일본군이 많이 모여드니까 그따윗게 다 생겨나는구만, 두엄무지에서 똥버섯 돋아나듯이 많이두》    《말끝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한다는데 과연 그자들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아라사군과 싸운단말인가? 날이 갈수록 그 목적이 이 나라를 삼켜버리자는 야심인게 빤히 드러나는데도 그따위 기편을 곧이듣고 위문까지 하면서 역성을 들어주니 모두 제정신이 아니야.》    《모든게 뒷죽박죽 어수선산란하기만 하니 이놈의 판국을 누가 나서서 수습해주리오?》     선생 하나는 비명에 가까운 탄식을 뿜어냈다.     누구나 이제는 제 감정과 인식을 감추려하지 않았다. 너 한마디 나 한마디 하다보니 어느덧 친일파를 론함이 점점 심도가 깊어갔다. 백성들 속에서 반일감정이 점점 고조되고 이러한 감정이 선각자로 나서야 할 선생들의 심중에는 깊이 박히여 자리잡으면서 이제는 내 나라의 정부마저도 완전불신하는 태도들이였다. 하여 그들은 한결같이 의병투쟁의 재흥기는 필연이라 인정하면서 그것을 마음속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세밑이 되어 겨울방학을 곧 하게 될 어느날 이러한 감정바탕에서 경원학교의 선생들은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더불어 이 학교를 찾아온 반갑지 않은 불청객을 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두사람이였다. 40대의 중년과 50대의 사나이였다. 중년의 사람은 검은색나는 가죽쟘바를 입었고 이쪽 나이를 더먹은 사나이는 반짝거리는 노란 구리단추 여러개 달린, 색깔이 부잇한 일본군용외투같은것을 입었다. 두사람 다가 빡빡 깎아서 해골같이 돼버린 민둥머리였다. 그들은 그것이 얼가봐그러는지 털모자를 푹 내리쓰고 있었다. 중년은 시력이 좋잖은지 아니면 부러 멋을 내느라 그러는지 테가 소수레바퀴마냥 동그란 안경까지 코등에 걸었다.          이날은 전교의 사생이 다 모인 월요일이였는데 그들은 학교에 오자 우선 교책인 서일을 찾아 자기들의 신분과 래의(來義)를 말하는 것이였다.    《일진회라지요? 글쎄 그런 조직이 있다는 소리를 나도 어디서 듣기는했소만은 이렇게 직접대하기는 처음이구만!》     서일은 심드렁한 태도로 맞아주었다.     신문에 공포하고 그 취지를 루차 밝히고 설명까지 해왔건만 일진회라는 조직이 있다는 소리를 어디서 듣기는했다니 이게 어디 교장이 할 소린가? 이 기구가 이다지도 아직 인심에 침투되지를 못했단말인가?.... 두사람다 먹기 싫은 식초를 목구멍에 넘기기라도한것 같이  상이 이그러졌다. 그러다가 나이 많은 사나이가 서일의 말에 언질을 잡고 나섰다.    《보아하니 우리가 여게 오기를 참 잘한 것 같구만. 보시오, 교장선생마저도 일진회에 대해서 료해가 깊지 못해 인식이 이토록 모호하니 일반사생이야 더 이를데있을가. 우리 일진회는 처음부터 유신을 하여 이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게 목적이였구.... 》    《여보시오, 어른! 말이야 찰떡같지만 그걸 누가 곧이듣기나할가?》     서일은 그의 말을 여지없이 중둥잘라버렸다.     나이 많은 사나이가 교장선생께 보기좋게 코를 떼우고나서 입을 감히 다시열지 못하는 것을 보자 중년사나이가 코등을 미끌어져 내리는 안경을 추스리면서 용기를 부렸다.     《왜 곧이듣지 않는단말입니까? 곧이들어야합니다. 여지껏 나라가 제대로 개화하지를 못한 원인은 다가 들을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강조할 텝니다. 그러겠으니 교장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사생들을 집합이나시켜주시오. 그런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은 안됩니다. 토요일 반공일이 돼서 모두 퇴교를 했으니까.》    《그렇다면 월요일에.》    《월요일에는 될것같애, 그날 등교를 하니까. 그런데 우리 학교 사생들이 그따위 설교를  받아줄가?...그런다고 날 원망은 마시오. 각자는 제 생각과 제 주견을 갖고 사는거니까. 안그런가요?....나는 여적지 글을 배워줬지 그 어떤 사상이나 주의주장을 강박적으로 주입시키지는 않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는걸 알아달라는겁니다.》    《알았습니다. 그저 한시간만 우리가 발언하게 해주시오. 그런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서울서부터 함경도 끝머리까지 장악하라는 송병준의 지시를 받고 내려온 일진회의 두 선전원은 이렇게 되어 려관에서 하루묵고 월요일날 경원학교의 사생들앞에 나서게 되였다.        나이 많은 사나이는 번열이 나는지 솜외투마저 벗어놓았다. 그러고는 입심을 뽑아가면서 사회의 현황과 국가의 처지, 국민의 자질과 개선문제, 일진회의 취지와 국가의 독립자주대업과의 관계를 말하고는 그를 이루기 위한 자기들의 공능과 노력이 어떠어떠 하다느니 하면서 족히 한시간이나 장황하게 늘여놓았다.    《한가지만 물어봅시다. 일본이 과연 조선독립을 위해서 피를 흘리고있습니까?》     서일이 선참으로 질문을 들이댔다.                 《우리는 마땅히 그렇다고 믿어줘야합니다.》     이 말에 박기호가 벌컥일어나 바투들이댔다.    《믿어줘야한다니? 아마 그래서 일진회는 일본군위안을 다니는모양이지? 그렇지요?....들어보시오. 일본군은 학교를 빼앗아 저들의 마구간으로 사용하고 농지를 빼앗아 병영을 짓고 가옥을 헐어 련병장으로 만들고 그래서 불만품고 반항해 나서면 너는 친로파라면서 잡아다 고문하고 지어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게 혹독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두 번째가라면 서러워할 그런 야만스런자들을 우리가 그래 믿어줘야한단말입니까?》     《일진회는 임진왜란때를 잊고있다!》     어느선생인가 어성을 높히여 부르짖었다.    《저자는 왜놈의 앞잡이다!》    《앞잡이는 주구다!》     학생들이 떠들었다. 분노한 것이다.    《더러운 저 개놈들을 튀해버리자!》     총각선생의 높은 웨침이 한결 기세를 돋구었다.     사생모두가 그러자면서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다. 질타였다. 놀란 일진회의 두 선전원은 걸상이라도 날아올것 같아 두리번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태가 좋지 않게 번져감에 그 둘은 황급해난 것이다     좀만 어물거렸다가는 뼈도 추릴 것 같잖은지라 그들은 그만 걸음아 날살려라 창황히 꼬리를 빼고말았다....         1905년이 돌아왔다.     1월에 서울의 경찰권이 헌병에게 넘어갔다. 불길했다.     천둥번개 잦으면 소낙비내리기 마련이요 액운이 떨어지려니 조짐이 좋지 않더니 조선은 마침내 력사에 오욕을 뒤집어 쓰고 그것을 씻기 어려운  절통한 한해를 맞이한 것이다.     국사(國事)가 그렇다고 민생(民生)마저 맥락(脈絡)을 잃으랴!     8월초의 어느날 이른아침녘. 누군가 밖에서 인기척을 내느라 문에 노크를 했다. 그리고는 집안에서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문을 뚝 떼고 성큼 들어선다.    늘 다니는 기호였다.    《무슨일이냐?》     서일은 식전에 느닷없이 나타난 친구를 의아쩍게 쳐다봤다.     안해 희연이 역시 그가 선문도 없이 나타나니 의아해하였다.    《아직 아침식사안했지? 잘됐다, 가자!》    《무슨일인가말이다?》    《이것 좀 봐요, 내가 깜빡 잊었네! 오늘이 박선생의 생일아녀!?》     희연이가 먼저 알아맞히고는 자기가 등한했음에 미안해하였다.    《아주머니도 갑시다, 어서.》    《좋은걸 많이 해놨나?》     무람없이 지내는 처지라 서일은 신을 신으면서 기분좋게 말했다.    《닭 두마리면 안되겠나. 젊은놈이 요란스레 논다구 소문이 사나울까봐 외인은 하나도 청하지 않는다.》     옛우정도 인정도 매양그대로인 기호였다.      희연이는 생일집에 빈손으로야 어떻게 가느냐 술한병이라도 사갖고 가자면서 죽청이를 둘러업었다. 서일은 큰딸의 손을 잡고 문을 나섯다.     이른아침때라서 북방변비의 자그마한 도시 경원(鏡源)의 거리는 조용했다.    한데 이렇게 공교로울 변이라구야! 서일내외는 좁다란 골목에 있는 한 려인숙앞을 지나다가 마치 온몸에 강직이 온것처럼 발목이 잡혀 걸음을 뚝 멈추고말았다. 그 려인숙을 나오는 면목있는 한 중년사나이와 맛띄웠던 것이다. 바로 월경의병장 이홍래였다! 그러잖아 서일내외는 요즘도 그를 생각하여 뇌인 것이다.   이홍래역시 이들을 잊지 않았다.  《하하하, 묘하게두 만난다!》   저켠에서 서일을 먼저알아보고 반색했다.    《우린 이선생이 종무소식이라 행방불명이라했지요.》     서일은 그의 손을 잡고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이게 몇해인가, 그사이 이마에 주름살이 더 잡히고 살갓이 거칠어졌지만 여전히 건실한 몰골이였다.     기호도 그를 알아보고 무척 반가와했다. 그는 마침잘만났다면서 함께 가자고 끌었다.          이쪽으로 놓고 보면 그와의 상봉이 뜻밖이지만 저쪽은 그렇지 않았다. 이홍래는 서일이 여기 경원(鏡源)에서 교편을 잡고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그는 여러해전에 자기가 모집해서 만주로 데리고 건너갔던 의병 30명을 그대로 다시 규합해갖고 근일 두만강을 건너왔다. 그들은 재집합일자와 장소를 따로 정해놓고는 저마끔 고향에 가 만나볼 사람을 만나보기로 하고 잠시 해산을 선포한 것이다. 이홍래는 두만강을 다시건너오자 먼저 금희동에 들리였다. 월경때 먹여주고 재워준 집과 로심초사를 했던 사람에게 보답을 하고자 한 것이다. 다른사람들은 간단히 먹을 것이나 준비해 갖고 왔지만 이홍래는 그러지 않고 중국비단 한필을 사서는 그것을 절반나누어 반은 최풍헌을 주고 반은 서일을 주자고 여기까지 갖고 온 것이다. 금동에 갔더니 최풍헌이 서일은 경성에서 유지의숙을 다니고는 이동호군수와의 언약을 지키느라 여기 경원(鏡源)에 와서 교편을 잡았노라고 알려줬던 것이다.    이홍래는 국경너머 저켠의 형편에 대해서 구술했다. 동만을 비롯하여 남만, 북만에 이르기까지 지금 동포가 살지 않는 곳이란 거의 없다싶히하다는 것과 의병들은 그지간 주로는 농사일을 비롯하여 각기 생업을 하면서 오늘까지 동산재기(東山再起)할 기회를 노려왔다는 등등....      《듣자니 왜놈들이 철로역부와 로일전쟁짐군을 각처에서 뽑아서는 소, 말같이 채찍질해가면서 부려먹으면서도 좀만 맞깟잖으면 파리죽이듯 포살을 한다는데 그게 정말이요?》    술한잔을 들고나서 이홍래가 물어보는 말이였다. 속담에 서울일을 알겠거든 시골가서 물으라더니 몸은 비록 국경너머 저쪽 이국에 있으면서도 국내일에 대해서는 국내인못잖게 거의나 알고있는 그였다.   《그렇습니다. 왜병이 강행하는 무리한 고역에 시달려 죽을지경이 되였어도 어디다 호소할 곳마저 없게 된 것이 이 나라 만백성의 처집니다. 고관귀족과 반상(班常)이 전후하여 상소하는 것이 모두가 제 나라를 위하는 성스러운 건의였건만 쩍하면 잡아 가둠이 무분별하니 그 릉욕만도 더 말할 여지가 없는것입니다.》    서일이 말했다.   《저희들 사람을 고문이랍시고 각 부에 들여 앉혀놓고는 후한 봉록을 주는데 그자들이 하는 짓이란 뭣이겠습니까, 우리 조선사람을 말라 비트는 것 밖에는. 압박이 이같이 날로 우심해가니 과연 말이아닙니다.》    기호도 한마디했다.   《당당한 우리 대한이 이 꼴로 돼 감이 실로 원통하오. 례의 자주국민으로서 원쑤의 발아래 무릎꿇고 구구히 살기를 빌면야 차라리 죽기만 나을게 뭐겠소!》     이홍래는 의분이 가슴에 올리밀어 부르짖다싶이했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오다!》    서일이도 기호도 그의 말에 동감했다.     《듣자니까 여기 노랑포수의병들이 잘해낸다더구만. 그런 소리를 듣구서야 어디 멀정하게 앉아있을 수 있나. 그래 우리도 건너온건데 아무튼 기회를 봐서 힘을 모아 다시 한번 겨뤄 볼 예산이요. 내 땅에 기여든 왜놈들을 몽땅 바다건너 저쪽 제 나라로 쫓아버리기 전에는 무장을 놓지 않을테야!》    이홍래가 다시건너온 리유를 이같이 말했다.    얼마전에 함경도 부령에서 황병길이란 사나이가 노랑포수의병대를 조직했는데 그 의병대의 활동소식을 서일도 간간이 들어서 안다. 노랑포수란 산짐승사냥에 종사하던 함경도 부령지방 포수들에게 붙인 별명이다. 이 포수들은 산짐승사냥에 유리하게 옷을 떡갈나무로 물들여 입었다. 이리하여 이곳 백성들이 누렇게 보인다는 의미에서 이 포수를 노랑포수라 불렀으며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반일의병대를 노랑포수반일의병대라 부르르게 된 것이다.          일본은 로씨야군대를 밀어제끼기 위하여 1개사단의 무력을 함경도에 집중시켰다.    일본군과 로씨야군의 싸움이 이해의 7월 2일 부령지방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일본군은 이 전투를 하느라 부령지방에서 연 11만 4,500여명에 달하는 조선사람들을 강제동원하여 성진항에 부린 저희들의 군수품을 전투장소에까지 운반케 했다. 이곳의 백성들은 강제로동에 끌려가 고통을 당했을뿐아니라 농산물을 비롯한 많은 재산을 략탈당하기까지 한것이다.    4개월전에 오꾸라대위가 일본군을 이끌고 함흥지방에 오자 제멋대로 략탈을 감행하는통에 격분한 백성들은 참을래야 참을 재간이 없어서 들고일어났다. 그들은 일본군과 맛서면서 적을 두둔하는 외국선교사도 족쳤다.    함경도지방 백성들의 반일투쟁기세가 이같이 앙양되는 환경속에서 부령지방에서는 평민들인 노랑포수반일의병대가 활동을 개시한것이다.    황병길이 지휘하는 100여명가량의 이 반일의병대는 관포(지방관리들이 장악하고 산짐승사냥을 시키는 포수)와 사포(사사로이 산짐승사냥에 종사하는 포수)들이였는데 그들은 함흥에서 반일봉기에 나선 군중들과 합세했다.       7월 23일 노랑포수의병대는 함경북도 부령군 백사봉가까이에 있는 호안동골짜기에서 일본군과 싸워 손실을 입혔다. 그리고 닷새후인 7월 28일에 습격해 오는 일본군을 신틀바위에서 물리쳤고, 8월초에는 회녕군 옥성동에서 또다시 소탕전을 했었다. 호안동과 신틀바위 및 옥성동에서 반일의병대에 의해 타격받은 일본군은 1주일간에 걸쳐 다시 력량을 보충한 다음에야 겨우 군사행동을 개시할 수 있었다.      강원도, 경상도 지방에서도 반일의병이 일어났고 그 투쟁내용도 심화되여갔다.                           속음청사 권11. 광무9년 을사 6월 6일, 7월 3일.          다시벌린 반일의병투쟁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일본군의 군사활동지대를 벗어나 넓은 지역에로 파급되였다.
79    半島의 血 제1부 23. 댓글:  조회:4606  추천:0  2012-09-24
      23.         토요일오후라 교정은 조용했다. 월요일이 돌아와야 다시 들끓는 것이다. 함경도(咸鏡道)에서 맨 북쪽에 위치한 여기 경원(慶源). 교원수만도 30명이 넘는 경원학교(慶源學校)역시 유지의숙(有志義塾)모양으로 이날은 반공일로 정해놓아 오후에는 교학을 하지 않았다. 아직은 완정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서일은 지금 근대적교육을 수용(受容)하여 개혁의 진두에서 달려가고있는 이운협선생을 본받고 있었던 것이다. 공맹(孔孟)의 도(道)와 성리학(性理學)만 숭상하던 때는 이렇게 서서히 막을 내리우고있었다.    어둠이 지나면 새날이 밝아오기마련인 것이다.     이동호군수와의 약속을 지키느라 경성(鏡城)에 가 공부하고 돌아와 고향의 교육건설중임을 량어깨에 떠멘 서일은 자기에게 차례지는 그 하루반의 휴식일을 절대 헛 보내려하지 않았다. 안해를 대동하여 거리에 나가 상점들을 들려보는가 아니면 교외로 놀이를 가는가 아니면 집에서 낮잠을 자는가.... 다 아니였다. 시간만있으면 신문을 뒤지고 사회의 실태를 연구하는 것이 이제는 굳어진 그의 습관으로되여버린 것이다. 구학문(舊學問)에 대한 연구를 그만두고 신학문을 연구하는데로 방향을 돌린 후로 부패한 관계(官界)와 봉건적인 인습타파에 관심을 가져온 그는 자기 삶의 가치는 기우려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일과 직결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것이다. 그러다보니 소시적에 품엇던 그 현실적이 못되는 벼슬꿈따위는 구중천외로 집어던진지 오래다.    신문원고 한편을 쓰자고 보니 글감으로 잡아둔 신문을 교장실 자기의 서랍안에 넣어두고 가져오지 않아 그는 그것을 가지러 학교로 갔다.    신문을 찾아 들고 교문을 나서려던 그는 공교롭게도 늦게 퇴근하는 박기호와 맞띄였다. 유지의숙을 졸업하고는 서일과 함께 고향의 군소재지 경원학교에 와서 교편을 잡으면서 중견이 된 그였다..   《비과를 하다보니 늦었다. 거기는?》    기호가 건늬는 말이였다.    《난 신문가지러 왔다가는 길이다.》    이 말에 기호는 머리를 기웃하더니 다시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신문인데?....》   《3월 23일자 이다. 이 신문에 사장 장지연이 순검청에서 문초를 당하고, 같은날 이 일어지(日語紙) 의 기사를 번역해서 전재한 사건으로 사장 이종일을 비롯한 그 몇사람이 경무청에 구속했다고 보도했네라.》   《그걸 다시보자고? 그 보도는 나도언젠가 본 기억이 나는구나. 그래서?...》   《언론인들이 무리하게 탄압받았으니 이거어디 참아낼 재간있어야지.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일개 애독자로서 정부의 부당함을 힐문하고 통박해놓고푼 생각이 무럭무럭 나는구나. 그래서...》   《존경하는 서교장선생!....》    박기호는 소시적부터 허물없이 지내온 친구간인지라 유모아적인 음조로 불러놓고는 집요하게 보기만 할 뿐 말을 더 하지 않았다.   《박선생, 왜그래?》   《생각은 옳네만 그런 문장을 신문이 선듯이 실어줄가? 고려나해본건가?.... 마땅히 먼저 그것부터생각해야지. 안그래? 그리구 그 보도가 지상에 발표된지가 언젠데? 지금은 고문정치를 하면서 일체 반정부 언론은 허용하지 않는다는걸 알겠지? 그러니 내 생각에는.... 》    들어보니 과연 주춤하게 된다. 그런 글을 어느 신문이 감히 실어주겠는지 서일은 곰곰히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저 순간적인 격정에 들떳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몇년전에 벌써 경부서리 조병식(趙秉式)이 황성신문 전사장이였던 남궁억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고 경부(警部)에 출두케 하여서는 자기 신문에다 일본과 로씨야가 한국을 분할(分割)하련다는 번역기사를 실었다하여 트집잡고는 구류하고 수도간(囚徒間)에 입감시켰다가 나중에는 평리원(平理院)으로 이송하여 재판놀음까지 한 일이 있은 것이다.    언론인을 부당하게 탄압한 필화(筆禍)가 이정도였다.    7월 24일(1904)에 정부는 경찰훈령(警察訓令)까지 발표했다.    (1) 치안을 방해하는 문서를 기초하거나 또는 이를 명령한 자에 대해서는 그 문서를 압수하고 관계자를 처벌한다.  (2)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될 때는 그 정지를 명하고 관계자를 처벌한다.  (3) 총포, 탄약, 병기, 화구, 기타의 위험한 물품을 사유(私有)한 자에 대해서는 이를 검사하여 적절한 방법으로 압수하고 그 소유자를 처벌한다.  (4) 우편, 전보를 검열하고 의심나는 통행인은 검색한다.       신문, 언론계가 이제 어떻게 될가? 독자가 이에 관여한다해서 해결이 날 문제가 아니였다. 훈령을 무시하고 공공연히 나서서 정면으로 대결한다면 그것은 달걀로 백운대를 치는 격이 되고말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달리는 방법이 없을가?         학교정원을 금방 나오니 뒤에서 부르는 소리 났다. 돌아다 보니 정민호어린이였다. 요즘 고향갔던 안해가 갓난 둘째딸 죽청(竹靑)이를 둘쳐업고 돌아오게 되니 제 아버지와 함께 교구 어디에 세집을 맡고 살아가고있었다.   《너로구나! 아버지는?》   《신문팔죠.》    기호는 보동(報童)의 머리를 뚱겨주면서 시문을 팔아도 공부는 잊지 말라고 했다.   《그러겠어요.》    아이는 일면 응대하면서 눈치를 살피더니 접은 종이를 서일의 손에 제꺽 쥐여주고 가버렸다.    얘가 뭘 이러느냐며 주고 간 종이를 펼쳐 보니 그것은 일본의 고문정치를 규탄하는 격문(檄文)이였다.                《나라정부는 부패하고 백성은 자각이 없지, 군대는 보잘 것 없는 약체이니 강폭하고 잔인한 왜놈의 횡포를 감당할 수 없게 됐구나!》    기호는 그 격문(檄文)을 보고나서 얼굴빛이 심각해지면서 탄식했다.    서일은 과연 그렇다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과 일본, 중국과 일본, 로씨야와 일본을 비기노라니 자연히 일본이란 이 나라는 그 본신이 별다른것이 있기에 감수가 새로워지는 것이였다.    일본은 개국(開國)이래 구미(歐美)와 래왕한 것이 이제겨우 20~30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후진국이 선진국의 새문화를 흡취하는건 이를데 없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2000여년의 력사를 가진 이 조선이 걸어온 걸음을 랭정히 되새겨보면 깨닫게되는 것이다. 조선사람들은 자국(自國)을 스스로 로 여겨왔다. 그러면서 제민족의 인품을 자랑했다. 한가지 례만들어도 알수있는 것이다. 임진왜란때의 일이다. 일본에 사야가라는 무사가 있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무사수업과 더불어 글도 열심히 읽어서 문무를 겸비한 무사로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 사야가는 가토 기야마사(加騰淸正)의 좌선봉장이 되어서 조선에 상륙했다. 그런데 진격하는 도중 한가지 신기한 장면을 목격하게되였다. 그것은 어떤 농부의 일가족이 피난을 하는 장면이였다.    수천명의 왜군이 조총을 쏘며 달려드는데도 농부는 늙은 어머니를 업고, 농부의 아내는 보따리를 이고 아이의 손목을 잡은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산길을 올라가고있었다.    그 장면은 사야가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저렇게 어질고 착한 백성을 해치는 것은 성현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야가는 며칠밤을 고민한 끝에 자신을 따르는 군사 500여명을 이끌고 조선에 귀순해 온 것이다. 사야가 한사람뿐이 아니였다. 처음부터 히데요시의 해외파병에 의문을 품고 적극적으로 조선측에 투항한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역사이래 타국민(他國民)을 해치지 않는 것은 조선사람의 성품(性品)이라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자랑으로여길만하다. 풍속습관도 그렇고 문화예술도 그렇고 자비할것은 없는 것이다.  하건만은 왜서 오늘에 이르러 또다시 의 유린을 받는가? 원인은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조선과 중국이 고대로부터 일본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였다. 일본측이 자신을 이란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은 7세기초부터였다.    왜구는 14세기초부터 조선과 중국의 해안지역을 습격하여 식량을 략탈하고 주민을 랍치하는 등 해적행위를 일삼던 집단이였다. 그들은 주로 일본의 북규슈(특히 쓰시마, 이키, 사가현 북부)와 세토나이해의 어민과 호족이 무장한 선단(船團)이였다. 14세기후반기부터 왜구의 활동은 더욱더 격심해졌는바 그로인해서 조선(高麗)과 중국(明)은 받은 피해가 컷던것이다. 하여 피해를 입은 두 나라는 그 진압에 고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차례 아시카가 막부에 단속을 요구하였지만 막부는 효과적인 정책을 펼 수 없었던 것이다.(전기 왜구)    15세기가 되어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가 남북조를 통일시키고 조선, 명나라와 정식 외교관계를 맺는 등 일본의 국내의 사정이 안정됨에 따라 왜구의 활동이 감소되였다. 그러나 16세기에 명나라가 바다로 가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취하여 일본과의 무역관계가 끊어지자 중국해안지역을 습격하는 왜구의 활동이 다시활발해진 것이다.(후기왜구)      대개보면 사회와 사물을 대함이 타인 것을 맹목모방하기보다는 그래도 자신의 장점과 특색을 발휘하는것이 더 나음직하다....모방이 지나치면 결과적으로 삼류의 구미국가로 변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민족은 한무리의 삼류 구미인으로 돼버려 열종(劣種)의 서양인을 더 보태줄 뿐이다.    서일은 조선을 훨씬 앞서서 발전하고있는 일본의 통치체계에 대해서 한번  연구해보았다.    구라파도 그렇고 중국도 그러했다. 국내에서 일단 혁명이 일어나면 황제국왕은 머리가 날아나고 조대가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은것이다. 대화개신(大化改新)도 명치유신(明治維新)도 다가 천황의 권위를 빌어 발생한 일장의 사회변혁으로서 결과적으로 황권을 강화했던 것이다. 한즉 따져보면 일본인은 만셰일계(萬歲一系)의 국체(國體)를 유지해 오면서 시대가 진보함에 따라서 한걸음 발전해 온 것이다. 일본사람 처럼 황실을 대하는 국민은 아마 고금동서(古今東西)에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서일은 이점을 깨달았다.           군사고문 노쯔는 조선의 군사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재정고문 메가다와 짜고 재정을 절약하기 위하여서는 군대를 축소해야 한다고 하면서 조선의 군대를 대폭줄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본래 1만 6,000여명밖에 안되던 조선군대가 그 절반인 8,000명으로 줄었다.    서일과 기호는 격문의 아래를 계속해서 읽어보았다.             거리 사람들이 갑작스레 와야와야 술렁거려서 웬 일인가고 보니 털빛이 누런 싸리개 한 마리가 이쪽으로 마주 달려와 옆을 잽싸게 지나더니 방향을 꺾어 다른 골목으로 냅다달아나고 그 뒤를 한 사나이가 쫓고 있었다.    《그 개를 이리루 몰아줍소!》     과연 누렁개는 마주오던 행인에게 쫓겨 다시금 뒤돌아서는데 자기를 바투 쫓아온 사람을 보자 허연 이발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쫓는 사람은 손에다 자루긴 쇠집게를 들었다. 그것으로 개의 목을 집어 끌수있게 만들어진 물건이였다. 전문 개장사군이 아니면 개백장이였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개는 절망에 빠져 꼬리를 사타구니에 사르면서 구원을 바라듯 낑낑 거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금 눈에 불을 켜고 으르렁대기도하면서 비장한 결사를 벼르기도 한다. 허지만 구경에는 사람이 이기게 마련이라 쇠집게를 쥔 사나이는 그것으로 개의 대갈통을 갈겨 어리치게 해놓고는 목을 제꺽 집는 것이였다.    《에그 불쌍해라, 네놈은 잡혔으니 끝내 죽게됐구나!》     숱한 행인이 끌려가는 개를 보면서 너 한마디 나 한마디 해서 개의 이야기 한 켤레를 엮어냈다.    《짐승가운데 개만큼 인정있는게 어디메있겠소.》    《그렇구말구. 들불을 꺼서 주인을 구해냈다는 얘기를 못들었소.》    《어디 그뿐인가 뭐. 호랑이같은 맹수까지두 물리치구 주인을 구했다누만.》    《은공을 아는 개면야 그렇지. 둔갑을 해서 주인을 해치려는 동물이나 아니면 귀신을 물리쳐 주인을 구한다는 얘기두 있잖어.》    《어디 그뿐이요. 개가 주인의 억울한 죽음을 관청에다 알려서 범인과 시체를 찾아내서 주인의 원쑤를 갚아준 일도 있다오.》    《글이나 옷자락을 물고와 주인의 죽었음을 알리기도하구 주인이 위험에 빠진걸 개가 지키고 사람에게 알려서 살아날 수 있게 한 일도 있다는구만.》    《자기를 길러준 주인이 죽으니까 따라서 죽는 개까지도 있다니 정이 어느만큼들었으면 그 지경이 될가.》    《인정을 아는 개야 세상에 쌔쿠버렸어. 거 못들었는가, 주인없는 사이 어미개가 주인 아이기 제젖을 먹여 살려냈다는 얘기를.》    《영민한 개는 문건이나 편지를 전달해주기도 한다오. 산에서 길을 잃었는데 찾아가게 하기도 하고... 눈먼 주인의 길을 인도하기도 하고...》    《옛말인지 아니믄 지어낸 얘긴지는 모르겠소만 개가 밭을 갈아주고 죽었는데 개무덤에 나무가 자라나 주인이 보화를 얻었다누만.》    《과연 좋은 개를 길렀지. 그게 글쎄 얼마나 큰 득이요. 개가 그런다구서 죽으면 발복할 명당을 찾아준다는구만.》    《건데 지금 왜놈의 충견이 돼서 알찐거리는 놈들은 어째야 할고?》    《워낙 그따위 개를 싹 다 잡아 튀를 해치워야하는건데.》     순사 둘이 웬 사고가 난줄로 알고 달려왔다.     모였던 사람들은 잡담을 거두고 그만 흩어져버린다.     시중심에 이르러 두사람은 갈라졌다. 집이 있는 동북쪽을 향하여 걸음을 놓고있던 서일은 얼마 가지 않아서 정민호의 아버지를 만났다.    《신문 잘 팔립니까?》     서일이 먼저 말을 걸었다.    《밤자고나면 새소식이 나오는 덕분에 잘팔리우다.》    《또 무슨소식있래?...어디봅시다.》     서일은 그가 주는 신문을 받다 펼쳐보았다. 9월 19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이였는데 그 신문에서 나라와 겨레의 위험한 처지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있었다.             과연 지당한 묘사였다. 당전 조선의 형세는 바로 그러했던것이다.        《건데 민호 걔가... 격문은 어디서 난겁니까?》     서일은 그의 아들이 방금전에 격문을 제꺽주고서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일이 생각나서 물어보았다.     《서선생 그걸 다 봤습니까? 봤으면 다른사람도 읽어보게 넘겨주시오. 그 글은 내가 얻은겁니다. 서선생보시게 갖다주라구 시켰지요.》    《그러다가 애가 순경에 잡히기나 하면 어쩔라구 그럽니까?》    《내가 걔보구 다른사람알면 재미없으니 눈치봐가며 조심해 넘기구 오라고 시켰지.》    《그래두 그렇지. 자칫 경칠라구...》    《다른 사람하구는 접촉안합니다. 개는 서선생한테만 갔다줄겁니다.》    《그렇군요! 알았습니다!》     서일은 이제 앞으로도 자기는 격문들을 직접 받아볼수 있고 신문파는 이 사나인즉은 바로 격문송달자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그저 제 속으로만 이같이 짐작했을 뿐 더 캐묻지 않았다. 남의 신원까지 구태여 알려고 할 필요는 없었다.     서일은 그가 준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읽어보느라니 지난날 자기가 여러 신문에 실린 소식보도들을 보고 알았거나 귀동냥을 해서 알고 리해하게 되연던 가지가지 형세들이 새삼스레 상기되였다. 하여 그는 걸음을 다시놓으면서 몇가지  머리속에 떠올렸다.    언젠가 영문자(英文字)신문의 글을 번역해 실은것인데 이러했다.                 이뿐이 아니였다. 로일전쟁 이래로 많은 군대를 조선땅에 주둔시켰을 뿐만아니라 그 병력을 배경으로 조선사람의 자유를 속박하고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한편 가치많은 리권을 점점 잠식하고있었다. 전신(電信), 우체(郵遞)의 통신기관을 차지하고 각지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삼림을 벌채(伐採)하여 포태를 건축하였으며 도수장(屠獸場)을 탈취하고 서북 각 군의 세금을 징수하며 한국관리를 구축(驅逐)하고 사인(私人)을 대체하였으며 헌병으로 조선의 경찰을 대신하였다. 그러면서 집회를 금지하고 철도용지, 군용지를 널리 차지하며 군수용과 역부(役夫)를 강징(强徵)하였다. 한국정부 각부에 일본고문을 배치하여 해관세와 탁지부(度支部)의 재정을 관할하고 조선사람의 군사비를 삭감하며 인민의 토지를 략탈하였던 것이다.    한번은 직접 목격한 사람이 경성에 나타나 사람들앞에서 일본군인의 만행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농민은 토지가 곧 생명이지유. 그것을 빼앗기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유. 그래서 안내놓겠다구 반항을 하면 그자들이 어떤짓을 하는지 아우? 당장 하면서 잡아가둔단말이우. 가두어서는 어떻게 하겠소. 고형을 하구 살육을 하는데 남자를 죽일적에는 십자가를 세우고 그위에 머리를 달고 새끼로 발을 묶어 끌고 다니기도 하고 혹은 사지를 십자가에 얽어 매고 총으로 쏘는데 일부러 한번에 죽이지 않고 고통을 견디지 못하게 하여 죽이고 부녀를 죽일적에는 목을 매여 길옆에 달아놓아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게하는거요. 살인마가 뭐겠수. 그런 일본놈들이 바로 살인마지.》      그 말을 듣고 치를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참으랴?    3천리강산에서 반일의병이 재다시일어나고 있었다.    올 4월과 5월사이에 서울부근에서 먼저였다. 그것은 서울이 일본의 무력이 집중되였고 중요한 군사활동지대라는 것과 관련되였다. 일본군은 주둔지역을 꾸린다면서 서울주변 특히 룡산일대 농민들의 토지를 마구 강탈하였고 농민들의 살림집들을 닥치는대로 허물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만행이 서울과 린접한 일대에 알려지게 되어 려주지방의 백성들도 손에 무장을 들고 일어나게되였다. 뒷이어 경기도 지평지방에서도 반일의병대가 활동을 개시하였다. 일본군은 이 일대에 대한 경계와 경비를 강화하면서 사소한 반일적인 움직임에 대하여서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의병들은 희생을 무릅쓰고 용감히 싸웠다. 4월 25일에 의병대는 충청도 경부철도회사 하리파출소를 습격하였고 27일에는 경의선 오류동부근에서 일본군인 몇을 처단하였으며 5월 10일에는 경인선의 소사에서 맞붙어 싸우기까지 했던것이다.    일본군의 조선진입은 철두철미한 침략이였다.    평안도 반일의병대의 투쟁은 유린석의 지휘밑에서 새로벌어지고있었다. 조국강토와 민족이 왜놈의 발에 다시금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만있을수 없었던 평안도지방 백성들은 일본군의 활동을 파탄시켜야 한다, 나라와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해야 한다면서 반일투쟁을 다시벌리였다. 그들은 갑오농민군과 같이 보국안민(輔國安民), 창생구제(蒼生救濟)를 위하여 투쟁하겠다는 뜻에서 자신들을 자칭 동학도(東學徒) 또는 동도(東道)라고 하면서 도처에서 반침략반봉건투쟁에 나설 것을 맹세하는 회합을 가지였다....       전해에 이 기(李 沂), 김창강(金愴江) 등 선생의 서문(序文)이 실려있는 "학규신론(學規新論)"이 출간되여 서일은 그것을 읽으면서 연구했다. 저서는 교육사상(敎育思想)이라는 측면에서나 유교사상(儒敎思想)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문헌으로 되는것이였다.      무덥지 않은 가을철이여서 학생들이 공부하기 안성맞춤이였다. 어느날 한 총각선생이 제가보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을 들고와 보라고 주는것이였다.    《교장선생님, 이것 좀 보시오. 격문을 실었습니다.》    《어디보기오.》     서일이 받아보니 갖배달된 9월 22일자 신문이였는데 거기에 과연 홍천에서 홍가성을 가진 평민의병장이 발표한 격문이 실려있었다.               《백성이 자각적으로 다시금 궐기하니 매우 반가운 일이구나! 한데 이번에는 제발 실패하지 말고 마감까지 싸워 이겨줬으면 고맙겠구나!》    서일은 한마디 뇌면서 속으로 축복을 빌었다.    한데 평민백성도 자각하고 이같이 다시금 일어나건만 나라의 국록을 타먹고 사는 관리들은 제 량심을 팔며 지탄과 비난받을 노릇만 하고있었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저희들의 리익이 없으면서 피흘리며 싸워줄가? 귀신이 들어도 하품할 일이지.》   《야심이다! 아라사를 몰아내고 저들이 이 땅을 갖자는 욕심밖에 뭣이 더 있는가.》   《우리 땅을 마구짓밟고 유린하는데 위문은 무슨놈의 위문이야. 그게 다 빌어먹다 뒤여질 놀음이지.》      경원학교의 교원모두가 정부의 처사에 분노하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아니그럴수 있는가,황성신문(皇城新聞)이 밝히다싶이 일본군대가 침입하여 이 강토를 유린하고있기에 나라와 겨레의 위험함이 마치 끓는 물속에 있는 고기와 같고 불타는 대들보에 앉아있는 새와 같은 처지건만 정부의 관리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지는 않고 일본에 아부 굴종하면서 투항주의행동을 서슴없이 감행하고 있는데야. 이지용, 심상훈, 리근택 등은 많은 쌀과 담배와 술에 돈까지 내주면서 일본군을 찾아가 만나보았다. 어디 그러고마는건가. 나라정부는 각 지방의 친일관리들을 일본군진북군대응접관(日本軍進北軍隊應接官)으로 임명하고는 그들로 하여금 각 고을에 진입하는 일본군을 맞아들이게하였던것이다.      《제 나라에 공공연히 기여든 승냥이를 공경해 위문하다니 원! 수치도 모르고 매국배족행위를 하고들 있지! 그게 어디 제정신인가?.... 쓸개빠진 인간들이야, 쓸개빠진 인간들!》     서일은 증오심이 끓어올라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리고는 황제의 무능함을 통탄했다.     한데 이때의 고종은 그가 생각한 것 같이 아주 영 무능하기만한건 아니였다.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협약때부터 일본의 행위를 의심하여 온 그는 뒤늦게나마 각성하고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해 황성신문(皇城新聞)사장 장지연이 참장(參將) 현영운(玄映運)을 통해 그 신문의 군색한 재정에 보조금을 내려 달라고 주청(奏請)하자 고종은 내노금(內?金) 4천원을 황성신문사에 하사했고 그후 황성신문의 사옥이 너무 협소하고 불편한 사실을 전해 듣고는 수진갱(壽進坑)의 관리서(管理署) 자리를 하사한 것을 보아 알수있는 것이다. 쓰러져 가는 나라를 붓대로 바로 세워 보려는 언론계에 대해 고종은 마침내 격려하면서  뒷받침하고있었던것이다.    고종이 각성해서 이제는 표리부동한 일본의 탐욕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대략이나마 알고있었다. 나젊은 하야시 곤스께가 일본공사로 와있으면서부터 조선의 리권(利權)을 침탈한 것을 보면 연해각지의 어업권, 포경권, 직산 수원의 금광 채굴권, 개성의 삼포,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월미도의 농장, 온양의 온천, 지도와 고하도의 상묘, 장고도의 파선배상(破船賠償), 경부선철도, 제1은행권의 통용, 군용지사용, 국내하천의 항해권 등등 침략은 일일이 렬거키어려울 지경 다종다양이였으며 또 로일전쟁을 기화(奇貨)로 일본 사람이 각지에 횡행하면서 민산(民産)을 략탈한 것 역시 그 수를 헤아릴수 없었다.      영국의 타임스지는 이렇게 론했다.                     아무리 무지각자라도 이런 보도를 보면 깨달음이 있으리라.    고종은 반일의병운동이 재개됨에 아직 공개적으로 태도표시를 하지 않고있었다. 그의 속심이 과연 어떠한지?....         이번의 반일의병운동을 조직하고 지휘한 층은 두부류였다.    첫째부류는 오래전부터 내외원쑤들에게 억압과 착취를 당하면서 그들을 증오하여 오던 평민출신의 인물들이다.    둘째층의 부류는 1896년에 반일의병운동을 벌리다가 투쟁을 중도에서 그만둔 애국적 유생들이였다. 그 속에는 중국 동북지방으로 갔던 반일의병장도 있었다. 이들은 비록 그곳에서 반일의병력량을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일본의 무력침공이 로골화되니 다시 국내로 돌아와 반일에 선두나선것이다.    이와 같이 두 부류에 속하는 반일의병운동자들에 의하여 각지에서 반일의병대가 조직되게 되었다.    이해의 말까지 조직된 의병대를 보면:                          (1) 강원도 홍천의병대                        (2) 경기도 려주의병대                        (3) 경기도 지평의병대                        (4) 전라도 장성의병대                        (5) 평안도 의병대                                                                    속음청사 11권 광무 8년 갑진 12월 29일.     유인석은 평안도의 30여개군에 "종유계"를 뭇고 인민들에 대한 애국적인 계몽사업을 하였다. 이때의 평안남도는 28개군이였고 평안북도는 21개군이였다. 30여개 군에 종유계를 조직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평안도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군의 인민들이 의병대에 망라된 것으로 인정되는것이다.    어떤 의병대의 조직자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대부분이 평민출신이였던 사정과 관련된다. 의병운동은 이같이 허다한 무명의 애국자들의 희생으로 력사를 기록해가고 있었다.  
78    半島의 血 제1부 22. 댓글:  조회:4232  추천:0  2012-09-24
  22.             땅이 너르고 인구가 만다고 반드시 이기는건 아니다. 력사를 보면 약세(弱勢)해보이는 자가 강해보이는 자를 이긴 실례가 적지 않은 것이다. 일본은 땅이 넓고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중국을 전승함으로써 력사에 그 실례를 유력하게 하나 더 보태였다. 전쟁을 하려하면서 그 무슨 정의는 필승이요 비정의는 필패요 하는 따위의 말은 하지도말아야 한다. 그건 다 말공부쟁이들의 기편적인 선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일본이 정의가 있어서 승리한것이 아니고 청나라가 비정의적이여서 패배한것도 아니지 않은가. 전쟁이란 그를 원하는 자의 힘과 지혜를 겨루는 악마장의 도박일뿐이다.       로씨야의 륙군대신 꾸로바트낀은 자기의 일기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짜리로씨야의 이같은 식민지확장정책은 일본의 질투심을 야기시켰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감미로움과 쓰라림이 뒤섞이는 회억에 잠겼다.  《청일전쟁은 과연 멋들어진 승리였지! 이제 로씨야와 싸워도 그 멋으로 돼야할할텐데... 헌데 로씨야, 불란서, 독일의 항의에 못배겨 나는 히로시마에서 즉각 어전회의를 개최해야했었지....3국의 요구대로 료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해야 했다....제 입에다 넣은 고기덩이를 되게워놓다니 원....지금도 그것을 생각만 하면 가슴이 쓰라리구나. 하긴 그 대신에 은 3,000만량을 배상금으로 더 추가하기는했지만. 이홍장은 멍청이짓을 많이 했지.》    중국으로 놓고 보면 그때는 외교적정세가 유리하게 되였음에도 이홍장은 외교적인 활동을 할 궁리를 하지 않았다. 3국을 비롯한 국제렬강이 대소동을 일으켜 일본을 견책하였고 대만인민들도 궐기하여 자력으로 대항하였던 것이다. 만일 이홍장이 머리가 좋아 외교를 할줄 알았다면 일본이 이렇게 국제적으로 고립된 기회를 빌어 만청정부로 하여금 조약의 비준을 거절하도록 청원하거나 또는 방임해두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도 다소간이나마 리권을 만회 할 수 있었을게 아닌가. 그러나 이홍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도리여 오정방(伍廷芳)을 급히 천진에 파견하여 천진주재 일본령사를 데리고 대고(大沽)에 함께 가서 비밀히 동경에 전보를 쳐서 일본정부로 하여금 만청정부에게 조약을 교환하도록 독촉하게 하였던것이다. 마치 만청정부가 신속히 조약을 비준하지 않으면 자기가 일본에 대하여 미안하기나 한 것 처럼.    그때 이또오 히로부미는 만청정부가 조약을 거둘까봐 얼마나 속을 졸이였던가! 대만문제를 처리하는데도 그렇다. 시모노세끼조약이 조인되기전에 벌써 대만인민들은 대만이 할양되는건 불가피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지사(志士) 구봉갑(邱逢甲)의 발의로 민주국을 창립하고 의원(議院)을 열었으며 람색바탕에 황색범을 그린 국기를 만들고 대만국이란 명의를 내세워 저항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그같이 나오니 이홍장은 되려 황황하여 대만인민들은 이처럼 횡포하다면서 이또오 히로부미에게 《일본은 해륙 량군을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고 치안을 유지하도록 하라.》는 요청을 하였던 것이다.     대만에는 항쟁에 나선 대만인민들로 조직된  흑기군(黑旗軍)이 있었다. 일본의 해, 륙군은 4개월이나 그 의용군을 토벌하여 무자비한 피비린 탄압을 한 끝에야 비로서 대만을 점령할수 있었다.    정부가 부패무능하고 부실하니 별수있는가? 청일전쟁이후 중국은 완전히 반식민지적인 지위로 전락되고말았던 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군사가가 아니지만 적을 알고 자기를 알면 싸워서 이길수 있다는 상식쯤은 잘알고있는 사람이였다. 이제는 로씨야와 겨루기위해서 그는 로씨야와 손을 잡는 이홍장의 일거일동을 주시해왔다. 몇해전, 청일전쟁이 끝나 이듬해인 1896년 3월 8일에 이홍장은 로씨야와 가까와지려고 중국인과 외국인으로 구성된 많은 수원을 대동하고 기선으로 상해를 출발하였다.    출발전에 그는 황준헌(黃遵憲)에게 말했다.   《서양과 련락하여 일본을 견제하는것이 이번행차의 주요한 목적이다.》    로씨야는 이 큰 흥정을 매우 중요시하고 전용기선을 알렉산드리야 항구에까지 보내여 그를 영접케하였다. 4월 27일에 이홍장일행은 오뎃싸에 도착했다. 로씨야정부는 륙군원수를 특파하여 그가 상륙하는 것을 영접하게하였다. 그 의식은 매우 성대하고도 정중했다. 이홍장일행은 30일에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하였는데 짜리로씨야는 포위정책을 써서 마침내 5월중에 중로밀약(中露密約)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던것이다.      1. 중, 로량국이 만일 일본으로부터의 침범을 당하면 침범당한 것이 어느 나라임을 막론하고 중, 로 량국은 군사상에서 또는 군수품보급에 있어서 호상 원조할 것이다.    2. 전쟁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로씨야군함은 중국의 모든 항구에 들어갈수 있다.    3. 중국은 로씨야가 흑룡강, 길림지방으로부터 철도를 련접 부설하여 울라지보스톡에 이르게(중동철도)할 것을 허락하며, 중국은 그 일을 화아도승은행에 맡겨 처리하게 한다.      밀약의 중요한 조항이였다.    일본은 로씨야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예견하고 경제공황을 곱잡아 겪으면서도 군비를 계속적으로 확충하여 그사이 이미 상비병력 15만에다 전시병력 60만으로 하는 륙군건설과 22만톤의 함대건설을 함으로써 전쟁준비를 거의 완료한 것이다. 자신의 불패를 확보하려면 적을 격패시킬만한 그 어떠한 기회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오만한 로씨야여, 이젠 우리가 너희들을 조선땅에서 밀려나게 만들테니 어디 두고보거라!》     이것은 이또오 히로부미의 야심적이면서 신심에 찬 부르짖음이였다.     1903년 10월의 어느날, 망망한 일본해에 군함 60여척이 떳다. 저 북쪽 출렁이는 일본해를 가운데두고 일본렬도와 마주하고있는 로씨야, 원동지구의 그 해군기지 울라디보스톡에 로씨야함대가 정박하고 있었다. 일본은 그를 상대로 해상무력시위를 벌리는 판이다.    해안에 사구가 발달하고 사시절 기후도 알맞춤해서 일본에서는 가장 살기좋은 현으로 지목되고 있는 이시가와현, 평화로운 이 현의 나와자와시의 시민들도 노또반도의 주민들도 이날 숱해 해변가에 나와 실전을 방불케하는 화약내풍기는 해상전투훈련을 구경하느라 시간가는줄을 몰랐다.    일본은 청일전쟁 때 군함이 모두 55척을 소유하였었는데 그것은 약 6만 1,000톤이였다. 그나마 전투에 참가할수 있는것은 겨우 21척뿐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60여척 군함이 다 싸울수 있거니와 22만톤이나 되는 것이다. 그 속에는 이미 한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공을 세운  기요다, 히에이, 아까기, 다까지호, 하시다데 등 여러 군함도 끼여있고 중상을 입고도 침몰되지 않은 후소군함도 있으며 격상을 입고도 전투지휘를 끝까지 한 지휘함 마쯔시마호도 있었다.     일본군함은 그번의 전투를 과연 멋들어지게 했다. 그 군함들은 압록강입구 대동구의 해전에서만도 처음에 중국 군함 제원호를 격침하여 그 군함의 사령 등세창을 비롯한 전체장병 250명을 몰살시켰고 이어서 치원, 경원호를 격침했으며 다음에는 초용, 양위 두 군함을 함포사격으로 명중하여 소각해버렸던 것이다. 두 군함의 사령은 바다에 빠진채 구원되지 못했고 군함에 있던 전체 장령들도 군함과 함께 불에 타 죽었다. 정원은 지휘함이였는데 통령 정녀창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지휘대에서 전투를 지휘하면서 먼저 큰 대포로 적을 공격하였다. 이 대포는 바로 지휘대밑에 있었는바 함포가 발사하는바람에 지휘대가 흔들리면서 정녀창은 지휘대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는 정신을 잃고 기절하면서 얼굴에 상처를 당하고 발도 타박상을 입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하여 부하들이 그를 부축하여 아래 함실로 데리고 가게되였는데 다시날아온 일본의 함포탄에 맞아 부축하고 가던 사람 전부가 몰살되고말았다. 이때 또 포탄 하나가 날아와 돛대를 명중했다. 돛대가 부러지자 그 밑에서 일본군함을 공격하기 위해 감시하던 7명이 다 굴러떨어졌다. 영국인 때로얼은 사격을 지휘하다가 대포소리에 고막이 터져 귀가 멀었고, 독일인 하프멘은 부상당하고 영국인 니꺼로스는 배앞머리에서 붙는 불을 끄다가 탄환을 맞고 죽었다. 그러나 장병 17명이 주검을 낸 이 배가 일본의 지휘함 마쯔시마와 다른 한 전함 후소를 격상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함 5척이 격상당했을 뿐 침몰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이겼어! 이기구말구! 그러나 3국의 간섭으로 료동반도를 돌려준건 더없는 치욕이다. 와신상담하면서 군비를 충실히 하고 국력을 양성하였다가 기회를 타서 또다시 달려들테다!》    그때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같이 부르짖었다.   《우리도 이만하면 강유력한 해군을 갖춘셈이다! 그러니 이제는 로씨야와 겨뤄볼만하다!》    이번의 해상훈련을 보고 거의 모든 호전광들이 한결같이 웨치였다.      1904년 2월 4일. 일본정부는 궁중에서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고 자유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5일에 로씨야와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리고나서  그 다음날인 6일에는 일본함대가 려순에 있는 로씨야함대를 공격하였는바 이로하여 마침내 로일전쟁이 정식폭발하게되였던것이다.    전날 즉 로씨야와 국교를 단절한 그 날에 근위사단을 비롯한 여러 일본부대가 ������조선림시파견대������라는 명목밑에 서울진입행동을 개시했고 6일에는 일본해에서 해전훈련을 해본 60여척의 해군함선으로 무어진 련합함대가 인천에 진입하는 한편 그 일부는 로씨야군대가 주둔하고있는 중국 려순항으로 진격했던것이다.    인천항구에는 로씨야군함 코레쯔호와 와리야크호 두척이 있었는데 일본군함은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돌연습격하여 일거에 그것들을 부숴버렸다. 이는 일본이 조선쟁탈에 경쟁자로 나선 로씨야를 불의에 타격을 함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쥐며 일본군의 조선진입에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전략적인 보취였던것이다.    첫발을 이렇게 뗀 일본군은 아무런 저애도 받지 않고 당날로 두 번에 나뉘여 5만명이 인천에 상륙했으며 2월 9일에는 서울에 진입하였다.    기병용 말도 1만여필이나 되었다.   《서울시내는 우리의 군대가 덮히혔습니다. 우리는 조선정부 군대의 병실을 쓰고 공공건물 중 쓸만하것은 다 쓰고있습니다.》    일본 사령관 하세가와가 고무라공사에게 한 보고였다.   《그러면 해결이 되는가?》   《그것만으로야 어립도없지요. 안됩니다. 택부족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부득불 학교까지 점령하게됩니다. 마구간이 없으니까요.》    하세가와사령관은 보고를 일단락짓고나서 청시를 하듯이 보태였다. 병실을 짖기위해서는 농경지를 점해야 하고 백성의 살림집을 허물어 그 부지를 련병장으로 사용해야겠다는것이였다.    일본군의 이같은 방약무위한 행위가 서울일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 미치기시작했다. 한 것은 일본병력이 서울과 인천일대를 중심으로 해서 전국 각지에 널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본병력은 서북부지방에 까지도 신속히 진입하고있었다. 그것은 서북조선일대에 로씨야 군대가 들어와 있었기에 일본은 경쟁자의 그 군대를 밀어내기 위함이였다.    2월 19일 서울에서 출발한 한갈래의 부대가 3월 1일 원산에 진입했고 그보다 인원수가 많은 다른 한 갈래의 부대는 22일 서울을 떠나 3월 5일 평양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 부대는 그기간 이르는곳마다 백성의 재산을 략탈하고 부녀자들을 릉욕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완전히 야만적인 폭행이였다.    일본 무력은 일단 평양에 진입한 후 일부는 남고 일부는 거기서 다시갈라져 나와 의주, 창성을 비롯한 서북부 국경일대까지 장악했다. 조선의 민족적 자주권은 이렇게 란폭하게 유린당하고있었다.       도오꾜오. 수상 관저.    이또오 히로부미는 수상 가쯔라 다로오와 자기가 구상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의 초안을 내놓고 검토하고있었다.   《의정서의 목적이 첫째는 로씨야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해 벌려놓은 이번의 로일전쟁을 승리적으로 추진시키자는것이고.....》   《그러찮구요. 나도 응당 력점은 거기다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는 복잡한 전쟁시기를 리용해서 조선을 우리들의 지배하에 넣기 위한 확고한 기초를 닦아놓자는데 있는것이요.》   《그렇구말구. 우리 모두의 념원이 그렇게 모여진게 아닙니까. 조약초안이 멋지게 만들어졌습니다!》    가쯔라 다로오는 두말없이 찬동을 표시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조선정복문제의 론의에서 시종 군인출신이며 단행론을 적극 주장하고있는 이 활약적이며 고집스러운 사나이의 마음을 처음부터 사로잡고있었다.    가쯔라 다로오는 야마가따 아리또모가 근 3년간 수상으로 있다가 자리를 내자 1901년부터 수상자리에 올라 바삐보내고 있다. 1847년도 생이니 이해에 나이 57세. 이또오 히로부미보다 6살이 지하다. 가쯔라 다로오역시 전수상 야마가따 아리또모처럼 륙군장교로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인데 그도 메이지유신운동시 적극적인 참가자였다. 가쯔라 다로오는 23살을 먹던 해에 독일에 가 거기서 3년간 군사를 학습했고 귀국한 후에는 독일주재 공사관무관, 륙군성 군무국장 등을 력임하였고 갑오중일전쟁때에는 제3사단장으로 있었다. 전쟁이 끝나서는 대만총독으로 있었다. 그는 1898년도에 륙군상을 지내기도했었는데 군인출신이여서 그런지 굳고 고집스러우며 때로는 조급스러운 결단성이 너무강해 다른사람에게 여지를 주려하지 않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총적으로 보아 수상의 재질을 갖춘 열정가였다.        가쯔라 다로오는 한일의정서초안을 보고나서 별로 첨삭할것도 없는지라 이또오 히로부미와 자기는 만프로동의라면서 함께 곧 천황을 보러 가자고 했다.    천황역시 그것을 보고는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결국 그대로 채택된 한일의정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大韓皇帝陛下의 外部大臣署理 李址鎔과 大日本 帝國天皇陛下의 特命全權大使 林權助는 委任을 받아 左의 條約을 協定함.      제1조  한일량국은 항구불역하는 친교를 보지하며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대한제국은 일본을 확신하고 시정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용납할사.    제2조  대일본정부는 대한국황실의 확실한 친의와 안전한 강녕을 담보할사.    제3조  대일본정부는 대한국황실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확보할사.    제4조 제삼국의 침해 혹은 내란으로 대한국황실의 안녕보존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일본국정부는 급속히 임기하여 필요한 조치를 행할것이요 대한정부는 대일본정부의 행동을 용이케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리를 주며 대일본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택하여 수용함을 득할사.    제5조 대한국정부와 대일본정부의 상호간의 문의 승낙을 경치않고 후래에 본협정취지에 위반하는 조약을 제3국과 정립함을 불득할사.    제6조  본협약에 관련한 미비한 세조는 대일본대표자와 외부대신간에 임기협정할것.           이것은 일본이 조선의 외교, 내정, 기타 모든 것에 간섭하려는 첫걸음이였다. 의정서에도 명시된 바와 같이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확보한다고 여러번이나 내외에 성명하였다. 그러나 내심은 딴판이였으니 그것을 감추면서 목적대로 침략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거짓소리를 해야했다. 이 조약은 실제상 일본이 한국과의 특수리해관계를 표명함으로써 신임을 얻고 제3국의 간섭을 불허(不許)하는 하나의 술책이였다. 일본은 이 조약을 체결해야만 조선의 내정과 외정(외국과의 관계를 맺기 위한 정부의 활동)에 마음대로 개입할 권리를 가질수 있는것이다.    로일전쟁이 개시되자 로, 일 량국은 중국의 인력(人力)을 리용하면서 중국령토안에서 전쟁을 진행하려하였다. 허나 만청정부는 3월 13일에 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원래의 타산을 수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경의선철도가 수요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압력에 못이겨 경의선을 일본에 빌려주었다. 일본은 필요시 이 철도를 전쟁에 리용할 생각이였던 것이다....      도오꾜오.    일본정부는 어느날  중요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최고위수뇌들로는 수상 가쯔라 다로오와 추밀원 의장 이또오 히로부미, 육군총참모장 야마가따 아리또모와 외무대신 고무라 주다로 그리고 외무성 정무국장 주라찌 데쯔기찌로외 몇사람해서 모두 10여명이였다.    야마가따 아리또모가 로일전쟁에 대한 현황보고를 했다. 그는 이번전쟁에 직접참가하여 지휘하는 사람으로서 자기가 장악하고있는 정황을 상세하게 구술하고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력점을 찍어 말했다.    《려순함락 전투는 계속되고 있다. 희생이 막중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난공불락의 요새를 꼭 짓부셔버리고말것이다. 조선림시파견대는 우리가 계획한대로 지금 재빨리 조선전부를 점령하고 있다. 조선땅에서도 이제 곧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그때가서 우리는 로씨야 군대를 몰아내게 될 것이다. 조선을 엿보고 만주에다 를 창설하려던 짜리제의 꿈은 꼭 우리손에 깨여지고 말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두고보라, 만주에 근거를 두고 우리와 조선을 쟁탈해보려는 로씨야의 기세는 우리 군대에 의하여 꺾어지고 말 것이다.》      가쯔라 다로오가 그의 말을 뒷받아 신심있게 보충했다.    《우리는 화태와 극동까지도 점령하는 그날이 올것이다.》     수상이 말했듯이 화태와 극동까지도 점령하는 것은 일본이 그려놓은 원경의 일부분이였다. 그들은 조선을 먹어버리는데 신심을 갖고있었다. 탐욕이 이정도에 이리고있으니 이네들의 위는 한정없이 늘어날것만같았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두사람이 하는 말을 기분좋게 들으면서 2년전에 일본이 영국과 동맹의 성립을 본 것은 외교상 가장 큰 성공이였음에 만족했다. 일본이 력사상 서양열국과는 첫동맹이 되는 이 조약은 외무대신 고무라 주따로가 특명전권대사로 파견되여 서명을 한 것이다. 영일량국간에 맺어진 그 조약은 로일전쟁에 대한 사전의 준비였는바 일본은 그 조약에서 영국이 로씨야를 원조못하게 하였을뿐만아니라 일본이 영국의 해군기지를 리용하여 로씨야해군의 활동을 격파할 수 있도록 규정해놓았던 것이다.    조선의 문제를 대함에도 잘되였다.    조약의 제1조에 다음과 같이 밝혀놓은것이다.            가쯔라 다로오수상과 이또오 히로부미를 비롯한 최고위의 수뇌자들은 이번 회의에서 로씨야와 피비린 대결을 계속하면서 한편으로 조선정부를 손안에 단단히 넣기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로했다.     일은 되어가는 것 같았다.    로일전쟁을 발동한 일본군은 이해 즉 1904년 2월 6일 려순항을 습격하여 대승리를 함으로 하여 온 국민이 미칠것 같이 기쁘게 만들었던 것이다.    려순항에 주둔하고있던 로씨야 려순함대사령은 제 부인의 명명일무도회(命名日舞蹈會)를 열었다. 함대의 관병모두가 해군구락부에서 술을 퍼마시고 취해서 미친듯 춤추며 놀았다. 이 기회에 일본함대가 돌연히 로씨아 철갑함대에 나타났던 것이다.    로씨아는 전함 3척이 눈깜짝새에 침몰됨과 동시에 몇십문의 대포가 몽땅 일본군에 의하여 회멸되고 만 것이다.      한데 일본군은 이러한 승리가 자석같이 조선을 끌어당기리라 여겻는데 그렇지 않았다.    전날의 그 사람들이 다시금 한자리에 모이였다.         《조선의 황제는 우리 일본과 우호적으로 지내고싶은 맘이 없는 것 같습니다. 분석컨대 그 원인이라면 일본과 가까와진다면 자기의 지배권이 위태롭다고 여기고있기때문인 것 같습니다.》    정부의 부름을 받고 조선에서 온 하야시 곤스께공사의 사업보고였다. 그는 일전에 고종을 찾아가 조, 일 두나라간에 우의를 증진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그의 속마음을 떠보았던 것이다.    하야시 곤스께는 고종이 지금은 어리숙하지 않아 일본에 대해 경각성을 높히고있으니 말을 인차 들어줄 것 같지 않을거라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한일의정서는 글자 하나 문구 하나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조인하게 만들어야 한다하고나서 강조했다.   《제2보는 조선정부로하여금 전에 로씨야와 맺은 모든 조약을 무효로 되게끔 성명을 내리게 하는것인데 제1보인 이번 작전이 만약시 그 어떤 저애로 인하여 실패하거나 지연된다면 우리는 목적한바를 이루지 못하고말것이다.》    가쯔라 다로오도 말했다.   《각하의 말씀이 과연 지당합니다. 우리는 수단을 다해서 이번 조약에 조인을 하게끔 만들어야합니다.》    조선정부가 조일의정서를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는가하는 것은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는가 못하는가에 관건이니 자못 중요했다. 한즉 실패로 돌아가게말아야 했다. 조선반도를 세계지도에서 색갈이 빨간 일본과 같게 만들어 일본렬도에 넣어버리고말자고 마음먹은지 오랜 그 꿈이 이제는 현실로 다가온다. 이 거창한 작업을 추진함에 실제상 모사(謀士)로 총지휘자로 되어 온 이또오 히로부미는 아무리해도 자기가 직접출마해야겠다고 맘먹으면서 한가지 일을 알아보았다.    《하야시공사, 한데 조선정부내에다는 우리의 세력을 대체 얼마만큼이나 길렀는지 그걸 한번 말해보오. 내 말은 친일분자를 말이요.》    《예, 각하! 한마디로 말씀드려서 잘되여가는 추셉니다. 학부대신 이완용은 우리가 부려먹을만한 첫인물입니다.》    《그렇단말이지!》         로일전쟁이 일어난 후 가장 철저한 친로파였던 이완용이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이제는 친일로 탈바꿈하자 조선정부내에는 그를 중심으로 하는 친일파가 급속히 생겨난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틑날 당장 조선으로 향했다.    그는 조선에 오자마자 먼저 친일파를 리용하여 국왕의 처와 아들을 꾀이게 하는 한편 자기는 직접 고종을 배알했다.    고종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자기의 지배권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깨달은지라 순응하지 않는 태도로 나왔다.    (허깨비야, 그 주제에 황제라고 틀을 차리고있는거냐.)     이또오 히로부미는 속으로 고종을 우숩게 보고있었다. 그가 죽은 제 애비 대원군보다 성격이 강하지 못하고 취약하며 담도 크지 못하다는 것을 잘알고있는 것이다.          《페하는 일본을 믿고 일본과 주의와 방침을 같이하며 의정서의 취지대로 한일동맹의 열매가 맺아지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는 고종을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는 한편 그가 우유부단하면서 요구를 들어주려하지 않으니 위협하기도 했다.    《감히 동요하고 모호하게 나오면서 방침을 정하지 않는 것은 한국을 위하여 득책이 아닙니다.... 만일 그 방침을 정하지 않을 때에는 귀국에 대하여 적대적행동으로 나오지 않을수 없습니다.》    《?!........ 》     조선정부의 고위급관리들 중에는 "한일의정서"의 강요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근본적 주의에서 우리를 반대하니 심한 방해의 근원이 됩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반대하는 관리들에게는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조선정부는 압력에 못이겨 1904년 2월 23일에 마침내 "한일의정서"에 조인하고말았다. 한일의정서 제1일조에는 대한제국은 일본을 확신하고 시정개선(施政改善)에 관하여 그 충고를 용납해야한다고 했다. 일본은 조약이 조인되자 시정개선을 한다면서 조선정부가 몇가지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 몇가지 요구라는 것이 아래의 여섯가지였다.                    1, 일본고문관을 채용할 것.             2, 재정을 정리할 것.             3, 일본차관을 받아들일 것.             4, 화페제도를 개혁할 것.             5, 군비를 축소할 것.             6, 관리를 갈아치울 것.      조선정부는 마치 코를 꿰운 송아지마냥 끄는대로 고스란히 따라야했다.     1904년 5월 12일, 조선정부는 로씨야정부와 맺은 모든 조약을 무효로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904년 8월 22일에 "한일협정서(韓日協定書)"를 체결. 일본은 이를 통하여 조선정부에 고문(顧問)을 임명하여 박아넣기시작했다.                        재정고문ㅡ 일본대장성 주세국장 메가다.              외교고문ㅡ 일본외무성고문인 미국인 스티븐스.              경찰고문ㅡ 일본경시청경시 마루야마.              궁내부고문ㅡ 조선주재 일본공사 가또.              군부고문ㅡ 륙군중좌 노쯔.               학부고문ㅡ 시네하라.      이리하여 일본은 조선정부의 정치를 좌우지하게 되었는데 이른바 고문정치(顧問政治)란 여기서 나온 말이다.                                            
77    半島의 血 제1부 21. 댓글:  조회:4348  추천:1  2012-09-24
       21.                      의병이란 국가가 위급할 때에 자발적으로 의(義)를 위하여 일어나 정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분연히 몸을 바치여 종군(從軍)하는 의용병인 것이다. 조선민족은 전통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철저하여 멀리 3국시대부터 왜적이 침략할 때는 의병이 궐기하여 공훈을 세운일이 가장 현저하였고 근세조선 선조 임진왜란 때만봐도 왜구(倭寇)의 발굽에 짓밟힌 7년동안에 유림(儒林)으로부터 향리(鄕里)의 지사들과 승려에 이르기까지 모두 초야(草野)에서 뛸쳐나와 충의로써 민중을 격려하며 의리로써 동지를 규합하여 주검산을 넘고 피바다를 건너며 적이 패하여 물러갈 때 까지 전진하였다. 그 열열한 절의(節義)는 일월(日月)과 빛을 다투고 혁혁한 공업(功業)은 강상(綱常)을 붙들어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고 민기(民氣)를 되살려 큰 공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다시말하면 의병은 조선민족의 정화(精華)인 것이다!    그러나 오래동안에 자연히 문약(文弱)에 빠져 일시적인 태평(泰平)에 만족하는 국민의 해태증(懈怠症)이 극에 달한 때에 돌연히 강적의 침략을 받게 되니 저절로 손을 움켜쥐고 묶이우며 목을 뻐쳐 칼과 창을 받는 참혹한 지경에 이르렀던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수천년동안 전통을 받은 민족성은 행운스레 남아 각지에서 의기(義旗)를 들고 뛸쳐일어선 의병이 앞을 다투고 뒤를 이어 혈전고투로 민족의 정의(正意)를 표현하게 되였다.    국모의 복수를 위하여 궐기하였던 의병운동은 충주와 제천에서의 패배로 한단락을 짓고 그 주모장(主謀將)들은 지금 각지에 숨어서 동산재기(東山再起)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지의숙에서 서일은 긴장한 나날을 보내였다. 계몽자로 교육자로 나설 인재를 하루라도 빨리 길러내여 조국의 방방곡곡에 보내여 그 효력을 보자는 것이 이 학교 이운협교장의 목적이거니와 학교의 기본적인 취지였던 것이다. 하여 신형의 교육자를 길러내기에 전력을 다했다.     서일은 밤잠을 제대로 자지 않으면서까지 자기가 배우는 학과목을 포함해서 철학, 역사, 정치, 경제, 문학 등 동서고금의 명론학설에까지 깊이연구하면서 어느덧 일가견을 가질정도로 학문실력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가 제일 관심하는 것은 국세에 관한 것이였다. 그이뿐이 아니였다. 사생거의가 그러했던 것이다. 그들의 구호는 절대 나라운명을 무관하는 범부(凡夫)로는 되지 말자는것 이였다.    9월이다. 일본 전 총리대신이며 현 추밀원 의장인 이또오 히로부미가 조선에 왔다감으로 해서 경부선철도의 부설권이 일본에 특허된 얼마후 서일은 새로 생겨난 민간지 "황성신문(皇城新聞)"을 보게되였다.    이 신문은 남궁억(南宮檍), 나수연(羅壽淵), 장지연(張志淵) 등이 대한황성신문(大韓皇城新聞)의 판권을 인수하여 이름을 바꾸어 동월 5일에 창간한것인데 국한문체(國漢文體) 소형 4면으로 발간되고 있었다.     사범생들은 학교내에서는 현재 발간되여 사회에 류포되는 간물은 어떤것이나 거의 다 볼수있었다. 네가 이것을 청하면 나는 저것을 청하다보니 가지가지 다 있게 되였고 그래서  볼수있었던 것이다. 윤독(輪讀)이였다. 한데 선각자가 발간하는 애국적인 신문들이 륙속창간되면서 선동역할을 유력하게 하자 갖은 방법과 수단을 다해 그것을 탄압하는 자들이 있었다.                         10월 19일자 제국신문에 이런 보도가 실렸다. 서일은 이 보도를 보고나서 어렵잖게 짚었다.     《우리 나라 외부가 왜서 신문지일로 외국공관의 조회를 받아야한단말인가? 외국공관은 우리 나라의 여러 신문이 저희들의 심장을 비수로 찌르듯 하는 글을 내니 이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탄압하자고 드는 수작이 아닌가.》    그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뻔뻔스레 목포와 진남포의 사방 10리안에 있는 섬을 모조리 사겠으니 협조해달라고 하는 로씨야도, 평양에 있는 석탄광 한곳과 다른 두곳의 광산채굴권을 프랑스인이 경영하는 경의철도회사에 허가해주라는 프랑스도, 또한 외부대신 조병직에게 자기들을 협조해달라고 한 공한이 여러 신문에 공개되는바람에 조선 전체가 끓게되였고 그통에 결국 저희들이 목적한바를 이룰수 없게 되니 화가 나서 외교기밀이 신문에 계재된건 외교관계를 무시하는 일이라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한국정부는 책임져야 한다고 협박했다. 그러면서 로씨야와 프랑스는 책임을 못지겠으면 적어도 신문에 대한 조치를 취하라고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기까지 했던것이다.        열강의 이러한 압력에 자신들의 무능과 부패상이 국민들에게 폭로되는 것을 싫어한 정부는 신문을 규제할 신문지법(新聞紙法)을 내왔는데 그것은 언론자유를 압제하는것이여서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에 론설을 발표하여 이 신문지법이 시행되면 인민의 억울한 일과 탐학하는 정사와 정부의 실책은 할말도 못하게 되어있다고 혹평하고 이 규칙이 시행되는 날에는 대한 사람의 신문은 쓸데없는 휴지가 되고 말 것이라 비난하면서 지금형편에서는 신문을 규제할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성책을 세우라고 요구했다.     이로하여 독립협회는 탄압을 받았다. 이해의 11월 4일, 독립협회에 혁파령(革罷令)이 내렸고 간부 17명이 체포되였다. 독립신문사장이자 독립협회회장인 윤치호(尹致昊)와 독립신문 총무 겸 교보원(校補員)인 주시경(周時經) 등은 위기일발의 다급한 순간에 영국공관으로 피신했다. 독립협회 탄압에 선봉으로 나선 조병직은 지어 이틑날 독립신문, 매일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이 모두 독립협회와 관련이 있다면서 이 신문들을 모두 페간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    10월에 독립협회의 주체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는데 11월에 황국협회가 숱한 보부상들을 추겨 그를 습격했다. 그래서 충돌이 다시금 발생하게되였는데 황제는 만민공동회와 황국협회의 대표자를 소집해놓고는 이 두 협회를 다 해산시키고말았던것이다.      지난해인 1899년 6월 신기석 등이 대관(大官) 저택에 폭탄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고 1900년 4월에는 미국 전차회사에 의하여 비로서 서울 종로에 처음으로 전등이 가설되였다. 1901년 11월에는 월미도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러고 보니 조선도 발전이 영 없는것은 아니였다.    한데 조선이란 이 나라의 국민은 여지껏 대체 어떻게 하고 살아왔던가? 선비의 깨끗한 령혼만을 지고지상인줄로 알고 그것을 자랑했지 과학은 거의무관심해왔다. 조선은 삼강오륜따위나 법전으로 삼고 량반이니 상놈이니 인격을 가르고 남을 천시하는 고약한 버릇이나 길렀지 인간복지건설을 위하는 기본으로서의 물질문명의 기초가 되는 발명과 창조같은 것은 전혀 중시하지 않고 권장할줄도 몰랐으니 세상에 락후하기를 그지없고 암매(暗昧)하기 짝이 없는 나라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남이 해놓고 먹으라는 떡도 뛰여가 가질 념을 하지 않아 먹지 못했고 우물을 곁에 두고서도 그 속의 물을 길어올리지 않아서 마시지 못하고 목이 초들초들 말라서 살아온 꼴이요 신세였던 것이다.    미국의 에디슨(Thomas AIva Edison)이 전기를 발명하고 전화, 축음기, 영화축전지를 발명한지 어느때고 그가 만든 전차가 아메리카대륙을 달린지가 몇해가 되는가. 조선 사람은 인제야 드디여 전기불을 보게되였다. 그것도 미국 전차회사의 도움을 받아서. 34년전에 샤만호가 조선의 대문을 열어보자고 락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대밑까지 가서 오만스레 무례한 짓을 하다가 불에 타버리는 화를 입었던 것이다. 그 일로해서 미국은 지금도 의연히 불량스러운 침략자라는 지탄을 받고는 있지만 바로 그러한 그네들이 조선 사람도 자기네 처럼 광명을 보게 하느라 전기를 가설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호의에 대서는 아마 고맙게 여겨야 할것이다.    그런데 말끝마다 우리는 린근이요 그래서 어느때나 우호적이 돼여야 한다면서 친밀을 강조하는 일본은 대체 조선에다 무엇을 주고있는가? 그들이 조선을 도와서 철로를 놓아준다. 그런데 그것이 경제공황으로 하여 영양실조에 걸려서 여위여진 일본이 장차 조선 사람의 기름을 빨아갈 빨대인줄을 조선의 재상들은 그래 모른단말인가? 제 아무리 경계를 한다해도 본시 어리숙하니 남의 꾀임에 호락호락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와 공부한지 만2년. 졸업기일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공일날 서일은 두 동창생친구와 함께 맑디맑은 주을온천을 따라 경성만으로 바다바람쐬러 나갔다.    활짝 펼쳐진 경성만. 출렁이는 물결에 실려와 뺨을 스치면서 머리카락을 날려주는 바다바람은 그야말로 시원한 감을 주었다.    경성만에는 고기배들이 널려있고 큰배만도 여러척이 떠있었다. 어떤 배는 움직이고 어떤 배는 정박했는데 뭍과 가까이에 닻을 내린 배가운데는 서일이 전에 타본 큰 목선도 있었다. 왜서 여기에 정박하고있는지 돛이 여럿인 그 배가 이제는 형편없이 낡아보였건만 배임자는 아직도 그걸 인정많은 주인이 늙은 당귀를 불쌍히 여겨 잡아먹지 않듯이 버리기가 아까운지 그냥부리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눈에 환히 띄는 것은 이양선으로 불리는 일본배였다. 그 배는 새하얀 바탕에 동그란 붉은 해를 그려놓은 산뜻한 깃발이 날려서 오리무리에 병아리가 섞인 것 같이 유다로왔다. 그것은 배의 량켠에 흡사 풍차모양의 커다란 바퀴가 물을 감으면서 돌고 선체에서도 뒤켠쪽으로 해서 있는 연통에서 연기가 피여오르는 증기륜선이였다.   《우리는 저런 륜선 하나도 만들줄을 모르는가?》    기호가 하는 말이였다.   《만들줄을 몰라서 그럴가? 아니다, 만들수는 있어도 그걸 만들어낼만한 재력이 없어서 그럴거다.》    성묵이가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들어 일본기선을 가리켰다.   《봐라, 사실은 구조가 아주 간단해. 목탄을 때서 저 커다란 판자바퀴를 돌려주는 증기타빈만 갖추면 다잖아. 한데도 우린 그까짓거 하나 못만든단말이다. 그러니까 원. 참으로 망신스러운 일이다.》    《얘들아, 저봐라! 저 사람 김호선생아니야?》    그 일본기선에 눈을 박고있던 서일이 갑자기 부르짖었다.   《어디?》   《어디?》    기호도 성묵이도 일본륜선을 샅샅이 눈으로 쓸었다. 그러다 그들은 마침내 모색이 김호와 같이 생긴 사람을 발견했다.   《저 사람아니냐?》   《옳은것 같구나!》    기선의 선실밖으로 나온 사람이 여럿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운두높은 모자를 쓴 사람이 선미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쪽은 그가 모자를 바궈썼지만 용케 알아보았다. 륜선은 그렇게 사람의 몰골을 능히 알아볼만 정도로 가까이에 있었던것이다. 발동기소리와 함께 채바퀴가 물을 휘감아쳤다. 륜선은 서서히 움직이고있었다.    《김호선생!》     이켠에서 셋이 목청을 합쳐 힘껏 불렀다.     그랬더니 머리에 중절모를 쓴 그가 가던 걸음을 멈추면서 방금 자기를 부른 목소리가 어디서 날아왔는지를 알려고 두리번거린다. 김호가 분명했다. 셋은 목청모아 다시한번 힘것 불렀다. 그런데도 그는 웬일인지 이쪽을 인차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일본륜선은 포물선을 길게 그으면서 점점 멀어져갔다.    《김호선생이 왜 저 배에 올랐을가?》    《어디루 가는걸가?》    《오래도록 까딱 소식없으니 우린 잘못된줄로 알았지, 참!...》     셋은 그가 나타난 것이 무척 반갑기도하고 야속하기도하고 의문스럽기도했다.     집이 인천에 있는 한 사범생이 몸이 좋지 않다며 학교를 떠나 집에 가더니 졸업식때가 돼서야 돌아왔다. 그는 2월에도 몸이 좋잖다며 집에갔다온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인천항에 정박한 로씨야의 "아세아함대"를 보고와서 배에 있는 함포가 대단히 크거니와 함대가 과연멋지더라고 소문을 냈다. 어찌나 굉장히냈던지 호기심많은 어떤학생은 마음이 들떠갖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날 둘이 병을 칭탈하고 분별없이 구경을 갔다왔다. 학교측은 그들이 선생을 기만했다고 인정하여 그들에게 정학처분을 주었다.    따져보면 그건 인천학생탓이였다.    한데 그가 이번에는 갔다와서 월미도자랑을 해댔다.   《난 졸업하면 월미도에 갈거다. 거기가 개발이 돼서 이사꾼이 막 쓸어드는데 두고봐, 장래 인간의 복지는 온 한국치고 아마 거기밖에 없을거다. 기호 너 가지 않을래?》   《가겠거든 너나 가거라. 난 고향가겠다. 내 손으로 내 고향을 복지로 만들어볼테다. 나도 서일이도 이동호군수님과 벌써 약속이 된거야. 》    기호는 이런 말로 그의 충고를 밀어놓았다.    사실 그러했다. 서일이나 기호나 유지의숙을 졸업하고는 곧바로 고향에 돌아가기로하지 않았던가. 거기 고향의 경원학교(慶源學校)가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성묵이는 사범을 졸업하면 모교에 남아 사범생을 가르치기로 학교당국과 계약이 되었던 것이다.    졸업식날 성묵이는 어떻게 하면 떠나가는 친구 둘을 섭섭하지 않게 해줄가 궁리했다. 그러던 차 마침 인천에 있는 최삼용이가 장사를 하느라 경성(鏡城)에 왔다가 알고는 고맙게도 이들의 송별연을 차려주었다.   《너들도 다 들었을거다. 이놈의 세월이 어쩌자는거냐. 그놈의 홍수땜에 팔공산 산사태가 져셔 백안동일대가 휩쓸리고 싹 다 뭍혀버리지를 않았나. 원 기가 차서! 하늘마저 이러니 백성이 어떻게 살라는거냐?.... 난 그래두 장사가 괜잖아 제 살 굴은 마련했네라. 이젠 장돌뱅이 신세 아니니까 너희들은 오면 제발 제집같이 여기고 들려들다구, 꼭. 잘 자라는 내 아들놈도 볼겸.... 집안 사람도 무사하지. 그러니까 내 걱정을랑 말거라. 부탁인데 너희들이나 장차 어려움이 있거든 서슴치말고 알려주기바란다. 우리야 여하간 짜개바지때부터 맺어놓은 금석지교(金石之交) 아니냐. 서로 도우며 사는게 인간의 락이네라.》    최삼용이가 하는 말이였다.   《고맙다. 말만 해도 참으로 감사하다.》    서일은 그의 인정스러운 관심을 고맙게 받아놓았다.    임인(壬寅)년의 홍수는 대단했다. 삼용의 말과 같이 이놈의 세월이 과연 어쩌자는걸가?.... 백성들은 탄식뿐이였다. 형세가 바로 이러했건만 조선땅에 홍수가 졌건 사태가졌건 그것은 일본이 알배아니였다. 일본은 저들의 무장성원을 변장시켜 중남부조선일대는 물론 북부조선일대까지 침투시켜 로씨야의 조선침입정황을 정탐케 하는 한편 장차 자기들의 행동편리를 위해 지형조건들을 구체적으로 장악하려들었다. 한편 그러면서 저들의 무력이 주둔하고있는 일대에서는 화약내풍기는 사격련습을 련일 계속하니 그야말로 전쟁마당을 방불케했다.           이때 로씨야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강화를 달가와하지 않으면서 조선정부내의 친로파를 리용하여 자기들이 할 일을 착착 해냈다. 아세아함대를 인천에 친입시킨 로씨야는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조선은 로씨야가 룡암포를 조차(租借)하려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로씨야는 이듬해인 1903년 5월에 룡암포에다 억지로 포대를 구축하고 강점했던 것이다.      지나간 청일전쟁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그때 청나라를 대패시키고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끼조약을 통해 중국과 조선간의 종주(宗主)관계를 끊어놓았을 뿐만아니라 또 중국에서 료동반도를 탈취하고는 의기양양해서 매우 기뻐했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3국간섭으로 말미암아 이미 입안에 집어넣었던 고기덩이를 도로 뱉아놓아야했으니 기가 막힐 일이였다. 3국가운데서도 일이 그렇게 되게끔 적극적으로 책동한 것이 바로 로씨야였다.    로씨야는 일본이 료동반도를 반환하자 만주에 대한 침략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시켰다. 만주에 근거를 두고 조선을 쟁탈해보려는 속심이였던것이다. 로씨야는 1898년에 려순과 대련을 조차(租借)하고나서 1900년에는 만주를 점령했다. 이런 방약무인한 행동은 자연히 일본과 로씨야간의 암투를 크게 벌어지게 만든것이다.....                  1900년겨울이였다. 서일은 나이 20살을 먹자 말한대로 장가를 갔다. 그리고는 경성에서 세집을 맡고 따로 한해가량 살림을 하고있다가 그 이듬해 즉 1902년 여름에 마침내 유지의숙을 졸업하고는 언약(言約)대로 이동호군수의 부름에 따라 고향땅 경원(鏡源)에 가서 거기 학교에서 교장이 되어 학생들을 맡은건데 이때를 맞추기라도 한 것 같이 임신을 해서 배가 남산같이 불렀던 안해 채희연이가 몸을 풀어 첫아기를 낳았던 것이다. 딸이였다. 딱친구 박기호가 딸의 이름을 죽근(竹根)이라 지었다.    한편 함흥에서 장사일을 해서 흉년을 넘긴 큰할아버지 서장련이도 경원(鏡源)으로 왔기에 식솔은 다시금 모이게 되었다.    이런판이였는데 꿈밖에도 이들의 생활에 끼여드는 나어린 생명이 하나가 더생기었는데 그는 아주생면의 방랑애였다.    어느날 퇴교해서 집으로 돌아오던 서일은 자기가 늘 출퇴근하는 거리에 전에 본적없는 생면부지의 죄꼬만 사내애가 손에 신문을 들고 다니며 파는것을 발견했다. 낯을 씻지 않아 꾀죄죄한데다가 옷주제가 말이 아니였다.   《넌 뉘집앤데 이꼴이냐?》   《어떻게 대답하라요?》   《네가 할 대답 네가 생각해서 해야지 그걸 나하구 물으면 어떡하니?》   《선생님이 하라는대로 하면 좋으니까 그러죠.》   《허, 이놈보지! 능청스럽긴? 너가 그런 말재간은 어디서 배웠느냐? 좋아, 그럼 내가 간단하게 물어보마. 넌 이름이 뭐냐?》   《민호얘요.》   《몇살인데?》   《여덟살.》   《뭐라?.... 난 널 열살넘은걸루 봤는데.》   《내가어쩌믄?.... 옳아요, 그럴거야, 내 얼굴 더러우니까요. 세수시키고 옷갈아입혀보지, 나두 밉진 않을거야.》   《허, 그놈 잘은 둘러붙인다!》    서일은 어느덧 대답이 올골찬 이 초면의 방랑애에게 끌리였다. 아이가 재미있어서 어느덧 호감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세워놓고 지지콜콜 캐물은건데 아이는 성이 정(鄭)가고 이름은 민호(敏浩)였다. 나이는 올해 8살. 그 애는 3년전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같이 살아오다가 그만 임인년(壬寅年)인 올해의 수재에 아버지마저 잃고만 것이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실은 애비가 아들을 잃어버려서 지금 사처로 찾고있는 중이였다.) 아이는 의지가지 할 친척하나 없어서 문전걸식을 하면서 정처없이 헤매던 중 어찌다 마음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여 그가 불쌍한 그를 제 집에 데려간건데 그도 그를 제집에 그냥 두고 기를 형편이 못되는지라 푼전을 주어 내놓아 시내에서 이같이 신문팔이를 해 저절로 생명을 이어가게끔 유도를 해놓은 것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팔공산홍수의 리재민같은데 팔공산이라면 경상도 대구북쪽 어디가 되는 것이다! 한데 놀라운것은 그것도 어른이면 몰라도 짜개바지를 겨우면한 어린아이가 그 머나먼 온것이다. 이렇게 먼 북쪽끝으로 어떻게 왔겠는가 하는 것이였다. 호호백발 할미꽃이면 혹시 허공중에 날리고 날려서 올수도 있으련만?...    《이놈의 세상 원 어쩌면?... 너무도 무정해 한심하구나!》    서일은 이렇게 뇌이고나서 그 애를 제집으로 데려왔다.    아이의 말이 맞았다. 이포단장이라 세수시키고 옷을 갈아입혔더니 과연 8살의 나이밖에 안되는 영준한 소년이였다. 정민호는 얼굴에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좋아했다. 서일은 불행을 당한 그를 다시보니 눈에서 눈물이 슴배여나왔다. 무의무탁한 어린것을 하루밤재우고 내몰수는 없었다. 아직은 어른의 보호를 받아야 할 여린생명이였다. 하여 그는 생각 끝에 그 아이를 제집에 두어 함께 먹고 자면서 우선 글부터 배워 눈을 뜨게 만들리라 작심했다. 경원학교(鏡源學校)에서 그리멀지 않은 곳에 신식의 소학교가 하나 더생겨서 서일은 그를 거기에다 넣었다.    《하루라도 학교를 다니거라, 넌 글을 알아야 사람이 된다는걸 알겠지. 그리구 도망칠 궁리는 절대 말거라. 죄꼬만 녀석이 혼자 싸버리구 다니다 개한테 물리기나하면 어쩔라구. 승냥이를 만나는 날이면 넌 아예 먹히우고말게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두 승냥이 있나요?》    《있잖구. 승냥이보다 더 무서운것도 있지.》    《그게 뭔가요?》    《사람이지.》    《거짓말!》    《이 자식아, 대답질을 말고 곰상히 듣기나하거라. 내말을 알아들었냐? 안들었다가는 넌 또 고생이다. 내가 너의 애비를 찾아주마. 어쩌면 그가 너의말같이 죽지 않고 살아서 너를 찾고있을지도 모느겠구나.》    서일은 방랑아이를 공부시키는 한편 방법을 다해 그애의 부모가 자식을 찾아오게 만들리라 작심했다.    전에는 상업성을 띈 "경성신문(京城新聞)"이 있어서 거기에 광고를 내는 것 같던데 지금은 그 신문이 보이지를 않았다. 그래서 서일은 생각 끝에 문체가 자유필담식의 수필같으면서 일종의 광고로도 작용 할 수 있는 글을 지어 신문사에 보내면서 그것을 되도록 실어달라고 사정하는 편지까지 한통했다.      《여덟살 아이 정민호를 만난 소감》    글의 제목은 이러했고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이 글은 효력을 냈다. 황성신문에 이 문장이 실린지 한주일이 안되여 과연 정민호의 아버지가 아들을 찾으러 경성에 나타난 것이다. 40대 중년의 사나이였는데 살아있는 아들을 보자 끌어 안고 울면서 일희일경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러다가 아들을 구원해주어 백골난망(白骨難忘)이라면서 서일의 앞에 꿇어 엎디여 절까지 하는 것이였다.    그들에 대한 서일의 관심은 이로서 끝난것이 아니였다. 그는 생로가 끊어진 그들에게 밑천을 대주어 경원에서 신문을 팔아 그것으로 호구(糊口)라도 하게끔 인도(人道)를 해주었던 것이다.....      한편 제1계단의 의병운동이 중단된 이후에도 일부 지방에서는 농민무장대들이 활동하고있었는데 그들의 투쟁방향은 일본침략자를 조선에서 몰아내는것이였다. 대표적인것으로 "영학당", "맹감역당", "마중군당", "분명당", "동학여당", "활빈당" 등이였다.    3년전이던 1899년 5월에 전라북도 흥덕, 고부, 무장 등지에서 봉건착취를 반대하여 일어난 농민봉기자들로써 흥덕에서 조직된 "영학당"은 자기의 투쟁목적이 "보국안민"에 있다는 것을 밝히고나서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와 같이 힘을 합하여 왜양(外洋)을 소멸할것》이라 하였다.    다른 무장단들의 투쟁대상도 그와 같았다.    농민무장대들의 주요활동지역은 주로 중남부조선일대였다.    영학당ㅡ 흥덕, 고부, 무장, 고창, 정읍, 광주 등 전라남북도지역.    마중군당, 맹감역당ㅡ 파주, 리천, 려주, 광주 등 경기도지역.    동비역당, 활빈당ㅡ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지역.    1898년부터 1903년까지 6년사이에 43회에 달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평안도 5회, 황해도 3회, 함경도 10회, 강원도 4회, 경기도 5회, 경상도 3회, 전라도 10회, 제주도 2회.   농민무장대의 활동이 심해지자 정부는 수많은 .군대를 각 지방에 파견하여 그를 진압하려하였으나 크게 맥을 추지 못했다.           《매천야록 권2》에 기록된 글이다.
76    半島의 血 제1부 20. 댓글:  조회:4405  추천:0  2012-09-16
  20.      8월의 일본. 추밀원.     장장 네시간 지속된 담화가 마침내 끝나고 천황은 돌아갔다.    산들 바람이 불어와 화초잎들을 가볍게 춤추게 할 뿐 추밀원 뜨락은 매미울음소리 하나 없이 한적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피로해진 머리를 쉬우느라 뒷짐을 짓고 홀로 뜨락을 거닐었다. 무아경에 빠져 자연을 즐길 수 있는 휴식이 그는 그리웠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리상적인 휴식은 잠시간일 뿐 뒤미쳐 다른 생각이 가볍게 머리를 쳐들어 발동이 꺼져버린 머리를 재다시 가동시키고 있었다.   《내가 어느때까지 뒤를 받들어 줘야 하는가.》    그는 인선수완이 그리 밝지 못한 천황을 머리속에 다시떠올리면서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올해 46세인 천황은 본명이 무쯔히또였지 메이지가 아니다. 1868년에 밝은정치를 한다면서 년호를 메이지(明治)라 봉하였고 유신(維新)이 일어나 메이지정부가 서게 되니 그도 메이지천황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천황의 최고고문회의인 추밀원의 의장이 되고보니 지위가 놀라운 것 만큼 할 일도 적잖고 중요해서 결코 총리대신으로 있기만 편한것은 아니였다.    오늘 그와 주요한 문제 세가지를 놓고 구체적인 연구가 있었는데 하나는 이또오 히로부미가 출마하여 조선정부와 경부선부설 특허를 받아내는것이고 하나는 목전의 경제공황을 여하히 이겨내는가 하는 문제고 다른 또 다른하나는 야마가따 아리또모를 다시 수상자리에 올려놓는 문제였다. 야마가따 아리또모는 이미 한차례(1889ㅡ1891) 수상을 담임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한데 일본 실업계는 메이지 15년(1882)에도 메이지 23년(1890)에도 또 재작년그러께인 메이지 30년(1897)에도 경제공황이 생겨서 심한 곤난을 겪고있는데 따져보면 여기에는 그의 책임도 적지 않은 것이다.    대일본황군(大日本皇軍) 창시자의 한 사람이며 일본의 군사와 외교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일본특유의 군사외교" 창시자인 그는 1890년 12월, 제1기 제국회의 때 수상으로 취임한 이래 처음으로 "시정방침연설"을 했었는데 그는 그 연설에서 국가의 독립자위를 덮어줄수 있는 길은 두가지인바 하나는 주권수위선(主權守衛線)이고 다른 하나는 리익보호선(利益保護線)이였다, 주권수위선이 곧 국가를 강성하게 하는것이고 리익보호선이 곧 주권선의 안위(安危)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구역을 장악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의 독립을 보호함에 근근히 주권을 보호하는데만 그쳐셔야 되겠는가 리익선도 보호해야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갑오중일전쟁당시 대본영감군 겸 륙군대신이였던 그는 "리익선확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나온 사람이다. 하여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된건데 일본은 군비를 너무 확장하다보니 경제적 위기를 조성시켜 지금 이꼴로 헤여나기 어려운 궁지에 몰려든 것이다.    네가 책임지고 일쿼세워보라, 오늘 이또오 히로부미와 천황은 이렇게 의사가 모여져 년말쯤에 가서 천황이 조서를 내려 그를 수상자리에 올려놓기로 둘사이에 내정(內定)이 된 것이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추밀원에 왔다. 공무가 아닐때도 가끔 오군하는 사람이다.   《들어갑시다, 반가운 친구!》    이또오 히로부미는 차라리 그와 한담이나 나누는 것이 더 좋은 휴식이라 이럴 때 찾아온 것이 무척 반가왔다.   《방금 오다가 볼라니 젊은 각시 하나가 돌다리건너 저편으로 가는 것이 어쩌면....》    이노우에 가오루는 뒷말을 채 잇지 못하고 사려버린다.   《친구, 아직두 미찌꼬를 잊지 못해서 그럽니까, 이젠 딴세상 사람이 된걸 갖구서.》       이또오 히로부미는 친구의 목청이 명랑치 못한 것을 발견하고 안색을 살피였다.        《하긴 잊어야겠는데 고운 녀자만 보면 그 애의 몰골이 자꾸 눈에 삼삼히 밟혀오니 원!...》    이노우에 가오루는 오늘도 이러면서 양딸 미찌꼬를 환국(還國) 할 때 데리고왔더라면 이국타향에서 쓸쓸하게 민비시해사건에 말려들지도 자결하지도 않았을텐데 하면서 뒤늦은 후회를 몹시했다. 그는 고이자래운 양딸을 잃은건 자기탓이라 자책한지 오랜데 아직도 그 자책이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의장님이 잡지를 보고있었구려. 어떤가, 이 잡지에 실리는 글들이?》    이노우에 가오루가 상우에서 "太陽"잡지를 손에 들고 장을 번지면서 묻는 말이였다.   《다는 보지 않았는데 가 맘에 드는구만. 친구도 한번 보시지, 색정소설책만 들지 말고. 정치가는 정치에 유관한 글을 더 관심해야지요. 안그렇습니까?》    가벼운 충고였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그것도 국가정부의 거물급인물이 황색소설에 취미를 붙이거나 정부(情婦)를 두고있다면 다른 나라같으면 그것이 패덕적인 행위로 여겨져 십중팔구는 웃음이나 비난을 사겠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일본 고대의 녀류작가 세이쇼 나공이 쓴 라는 책을 보면 거기 제61절에는 한쌍의 남녀가 여름과 겨울철에 만나 서로 어울리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었다.    여름에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은 특별한 재미가 있었다. 쥐꼬리만한 밤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서 눈을 붙여 볼 새도 없었다. 그리고 추운 겨울밤 사랑하는 이의 품속에 파고 들어 똑딱거리는 시계소리를 듣노라면 그것이 아래서 나는 소리와 절주를 맞춰주는 것만같아서 과연 재미있다." 그야말로 적라라하게 묘사한 성교장면이다. 일본은 무사도(武士道)시대부터 중국 유가의 강상론리리념(綱常論理理念)을 받아들였지만 개방된 성문화의 전통만은 여전히 보전하고 있는 것이다. 막부시대의 학자들은 일본의 리론도덕에서의 근본이 성(誠)이지 경(敬)이 아니라면서 내심발로를 억제하지 않는 것이 바로 성(誠)인바 이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행동을 진실하게 취하는것이라 했다. 이것은 중국의 "천리(天理)는 존재하고 인욕(人欲)은 멸한다."는 리론과는 아주 상반되는 것이다. 일본 정토진종(?土眞宗)의 창시자는 공개적으로  승려가 각시를 얻어 장가 갈 수 있다면서 그 자신이 시범을 보였는바 일생에 선후 두차례 결혼하고 아들 넷에 딸 셋을 보았고 다른 한 승려는 장가를 다섯 번이나 가서 자식을 27을 본 것이다. 한즉 《불식인간연화(不食人間煙火)》라는 불교마저도 일본에 들어와서는 개량되여 세속적이고도 인정미가 있는 종교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이또오도 여자를 희롱하기 좋아하는 색마라고 소문이 난건 자연스러운 일이요 그의 그따위 충고가 실은 가치가 없는 것이였다.   《이또오의장께서는 몰리해를 하는구먼. 소설은 정치가 없나? 자네가 류학갈 때 배우에서 을 단숨에 다 읽구서는 나보구 뭐라했던가. 소설이 염세적이긴 해두 정치는 있다구하지를 않았는가. 그러던 분이...난 요즘 을 읽었네. 젊은 작가가 쓴 장편인데 정부의 하급관리노릇을 하는 주인공이 부지런히 일하면서 량심적으로 살려구 애썼건만 남한테 사랑하는 녀잘 빼앗기구 관직마저 떼우는 생활비극을 그렸소. 사실주의지. 읽고나니 우리가 이 사회를 더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이 들데. 》    《난 이젠 환갑을 넘긴 외무대신 어른이 애정소설만 뒤지다가는 그에 머리가 어지럽혀져 국사를 못해낼까봐 그러는거우다.》    《일깨워줘서 감사하외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친구의 무람없는 충고를 웃음으로 받아주면서 눈길을 잡지에다 다시박았다.    《다까야마 씀 라.... 제목이 직감적이군!》    일본에서는 갑오전쟁직후부터 정교사성원들의 주장이 갈라지고 있었다. 국수주의(國粹主義)사조가 점점 력사무대에서 퇴출하면서 다까야마를 대표로 하는 일본주의가 대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까야마는 지난해에 잡지에가 이 글을 발표함과 동시에 대일본협회(大日本協會)라는 정치단체를 조직하여 자체의 기관지로"일본주의"라는 간물까지 발행하고 있었다. 다까야마 등은 정교사가 숭양미외(崇洋媚外)를 반성하는 태도면에서는 공헌이 있다고 볼수 있지만 국수(國粹), 국민성(國民性) 등 개념상에서는 의연히 이른바 개국신화(開國神話)니 건국정신(建國精神)이니 국가지상(國家至上)이니 군민일가(君民一家)이니 하는 낡은 곡조에 매달려있으면서 자기들의 일본주의는 국수를 우경으로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다까야마외에도 이노우에 데찌지로오, 기무라 오오다로 등이 적극적인 활약분자였다.    《침주측반천범과(?舟側畔千帆過), 병수전두만목춘(病樹前頭萬木春)》     이노우에 가오루가 중국성구 하나를 뇌이였다.     그를 번역하면     《가라앉은 배 옆으로 천척의 배가 지나고 병든 나무앞머리에서 만그루의 나무가 봄을 알리누나》라는 뜻이다.    《우리가 아직은 가라앉은 배가 아니지요, 병들어 쓰러진 고목도 아니구. 국가는 우리를 수요하고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예나 다름없이 패기있는 소리를 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신구(新舊)의 교체는 필연이라면서 그것이 되도록 화평적인 교체로 되여준다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고 거의가 폭력에 의하니 력사에 기록되는 장면들이 참혹하다면서 혁명대상이 되는 자의 인생은 다가 끝은 비극이 아닌가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메이지유신을 보라했다.     메이지유신 역시 일본에서는 한차례 폭력에 의한 불철저한 자산계급혁명이였다.       메이지유신 이전의 봉건적인 일본 통치계급은 장군, 다이묘, 사무라이 및 천황, 황족공경들로 구성됐었는데 천황은 명색뿐 아무런 권리도 없고 실권은 모두 장군 도꾸가와 게이끼에게 장악되여 있었다. 행정기구는 에도(오늘의 도오꾜오)에 설치되였으며 바꾸후라 불렀다. 통치계급들은 농민은 참깨와 같아《짤수록 기름이 더 나온다》고 공공연히 언명하였다. 바꾸후는 또 마을마다《5인조》를 편성하고는 그중 한사람이라도 공물을 바치지 못하거나 죄를 범하면 그 조직의 사람들이 모두 련루되게 하는 수단으로 농민들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려 시도했다. 가혹간 봉건착취며 통치였다!    착취와 압박이 심하니 반항이 있기마련이라 1865~1869년 이 5년기간에만도 400여차의 폭동과 기의가 발생하였다. 1866년에 쌀가격이 폭등함에 따라 도시시민들은 파괴적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효고로부터 시작하여 니시노마야를 지나 오사까에 까지 확대되였고 얼마후에는 깅끼와 도까이 각지를 휩쓸었으며 지어 바꾸후의 소재지인 에도에 까지 파급되였다.    투쟁의 물결은 점점 더 세차게 파도쳤다. 1867년 10월 락엽이 지는 때였다. 나고야로부터 《이세대신궁의 상공에서 신부(神符)가 날아내려 세계에는 곧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라는 신비한 전설이 전해졌다. 그리하여 남녀로소가 모두 거리에 몰려 나가 거문고를 타고 북과 꽹가리를 울리며 이러한 민가를 불렀다.                      신세대가 변했노라!                    불경기가 호경기로 되었노라!                      .......... 좋구나!  좋구나!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옷들을 차려입고 주야불문 떼지어 거리로 나갔다. 화산같이 폭발한 분노를 누르기 힘들었다. 그들은 평소에 민중을 억압하던 부자집을 만나기만 하면 몰려들어가 모조리 박살냈다.    반바꾸후 비밀조직이 생겨났고 이 조직은 천황으로부터 바꾸후를 토벌하라는 비밀조서를 받았다.    1868년 1월 3일에 무력적바꾸후타도파가 궁전정변을 일으키고 무쯔히또가 출면하여 왕정복고를 선포하였으며 새 메이지정권은 바꾸후의 모든 권리를 박탈함과 동시에 도꾸가와 게이끼에게 령지와 재산을 내놓으라고 명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바꾸후측에서는 최후발악을 하였다. 6일 밤중에 도꾸가와 게이끼는 교또에서 남몰래 빠져나와 오사까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병력을 집결한 다음 역습할 준비를 하였다. 이리하여 공개적인 내전이 폭발하였던 것이고 1년좌우의 피흘리는 치렬한 대결끝에 마침내 바꾸후파들을 섬멸하고 메이지정권은 공고하게 된 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폭력은 정권을 잡기 위해서도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필요하겠지만 정권을 이미 잡은 후에는 그래도 폭력보다 무마책을 우선으로 놓는 것이 통치자의 명지한 수완이 아니겠는가했다.    《하긴 그래야지만 친구도 알다싶이 어디 그렇게 돼줘야... 안그렇소?》     이노우에 가오루의 말이다.    《내가 조선정부를 구슬려 경부선부설권을 얻고자 이제 곧 현해탄을 건너가게 되는데 친구생각에는 이번 걸음에 과연 뜻을 이룬다면 우리의 그 이 또 무엇이라 주장을 들고나올 것 같습니까?》     이또오 히로부미가 물는 말이였다.    《거야 불보듯 빤하지. 고 웨치겠지. 다른 무슨 소리를 할가, 안그렇소?》    《맞습니다. 바로 그럴겁니다. 이제 그네들의 광용(狂勇)을 맟추노라면 기진맥진해 쓰러질겁니다. 물론 나역시 바라는것이긴 하지만.》     이또오 히로부미가 지적한 용감한 삼걸(三杰)이란 단행론(斷行論)의 주창자들인 가쯔라 다로오, 야마가따 아리또모, 데라우찌 마사다께 이 세 군벌을 말한다. 이 셋은 지금도 계속 서둘러 한국을 병합해야 한다고 견결히 주장하고 있거니와 무력으로 동양패권을 빨리잡아보려고 조급증을 발로하고 있었다. 물론 이또오 히로부미도 그걸 꿈꾸지만 그것은 숨가뿐 일이였다.    《의장은 무마책으로 달래볼가구 궁리하는거요?.... 조선민족을 그저 다 순진하게만 보면야 그건 료해부족한 자의 안목일거구 무력적폭력을 조급히 쓰자고 든다면 그건 또 분별없는 자의 미친 짓일거요. 안그렇소? 지금 조선에서 서방세력이 강해지고있는 사실을 념두에 둘 때 머리를 잘 써야지. 나는 일본에서 이제 또 제 조급증을 진정못하고 솟구치는 밸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두번째 사이고오가 출현하는걸 원치않소.》     사이고오 다까모리는 일본의 정치가이며 군인이고 메이지유신때의 공신이다. 그는 1873년 대원군의 강경한 배일, 쇄국정책에 감정이 좋지 않아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였다. 그랬다가 내치우선파(內治優先派)에 좌절되여 밀리게 되니 관직을 버리고 고향 가고시마에 돌아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것이 패하니 자결하고말았던 것이다. 사이고는 죽었지만 그의 주장은 지어 일본국민들 속에서까지 널리 퍼져 점점 더 성행하고있는 판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가오루는 지금 침착하게 시기를 찾고있다. 마치 구렁이같이길다란 제 몸뚱이에 감긴 먹이가 숨지기를 기다리듯이.      이틑날. 도오꾜오 외무부 관저.    이또오 히로부미는 널찍한 외무대신의 방에다 발을 들여놓았다.    방안에는 벌써 그먼저 다른사람 둘이 와있었다. 그들은 벽에 걸려있는 지도를 마주하고 열심히 들여다보고있다보니 사람이 온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 관저의 주인이며 외무대신인 이노우에 가오루는 기다리는 중이라면서 어제 너무늦도록 잡담을 해서 피곤하지 않는가고 했다.    《피곤하다는게 뭡니까. 그걸 푸는 제일 좋은 방법이 그래도 친구와 같이 한담으로 지내는것인걸요.》    《오, 그렇소! 기실 나도 휴식을 하누라 거기루 간거였네.》    둘은 말해놓고 웃었다.    지도에 정신팔렸던 두 사람은 그제야 몸을 돌린다. 한 사람은 야마가따 아리또모고 다른 한 사람은 면목이 그리 익숙치 않은 50대의 소장군장이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가 누군지 아리숭했지만 그는 그를 인츰알아보고 공경과 숭배심이 가득한 태도로 경례하면서 자기를 소개했다.     《의장각하! 저는 하세가와 요시미찌 소장입니다. 지난해 대일본황군절기념일 때 영광스럽게 각하의 접견을 받은바있습니다.》    《오, 그렇지!》    《스므살 때 오사까병료를 취학했네. 실력있는 장군일세.》      야마가따 아리또모가 덛붙여 그를 소개했다. 큰산을 업었다. 잘 아는걸 보니 그의 등을 타고 발탁하는 모양이다.     그에게 던져주는 첫인상이 좋았다. 건장하고 단단하고 박식해보이는 그가 맘에 들었다. 하여 이또오 히로부미는 몇마디 좋은 말로 소장의 장래를 축복해주었다.       그들 넷은 벽에 걸어놓은 커다란 지도앞으로 갔다. 그것은 방금 새로 그린 조선의 교통지도였는데 공력을 들여 세밀하게 만드노라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 지도를 보니 외무대신이 된 이래 사업실적을 현저하게 올리고있는 옛친구를 당장 이 자리에서 표양하고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한데 그는 자기가 이제 조선땅에 오르기 위해서는 건너야만 할 파도사나운 현해탄을 다시보니 가슴이 섬찍해나면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현해탄은 과연 징조가 좋지 못한 바다였다.     일본렬도를 놓고 보면 천연적인 자연경물이 사람을 기쁘게 하면서 복잡한 지세가 또한 감추지 못할 우    려를 던져주고있는 것이다. 지리학상 세계적인 존재로 인정하고있는 네가지 종류의 형식을 다 구비하고있는 것이 일본이였다. 무엇보다 태평양을 두르는 단렬대(斷裂帶) 즉 지대구조선(地帶構造線)이 일본을 가르면서 이 국토로 하여금 지리적인 류동성을 갖게 하고있는 것이다.  이 지대구조선(地帶構造線)은 매우 온정되지 않아 열흔(裂痕)은 지금도 약간씩 움직이는 상태였다. 총적으로 말해 일본땅은 한측이 일본해에 가라앉으면서 태평양쪽으로 천천히 옮겨지고 있었다. 일본은 아무때건 완전 침몰되고야 말 것인바 형상적으로 묘사할 것 같으면 천천히 가라앉고있는 하나의 거대한 함선과 같은 것이다. 과연 무서운 일이 아닐수 없다!    자고로 일본사람은 이같이 복잡한 환경속에서 살아왔고 살아가야하는 민족이였다. 그들은 천부적인 자연의 혜택(경치)을 입으면서 한면으로는 또 화산, 지진, 화재, 산사태와 폭풍의 습격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사람들은 두가지의 복잡한 즉 자연을 숭배하고 자연을 두려워하는 모순되는 감정을 소유하고있는 것이다. 자연재해를 막자고 보니 렬도에 살고있는 모든 대화민족(大和民族)은 정신적 단합이 필요하고 이로부터 자연히 살아도 죽어도 함께라는 생명일체감(生命一體感)을 갖게되는 것이다.    《자 보게나, 이게 우리 쓰찌마이고 그 바로 마즌켠이 곧바로 부산이 아닌가. 그 북쪽것이 대구, 거기서 서북쪽으로 가면서 금천, 대전.... 서울까지 철로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놓이게 되느냐는 다음의 일이지만 먼저는 내가 이쯤으로 초도를 잡아놓은건데 의장께서 잘 보고서.... 》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쯤 설명을 마치였다.   《우리가 경부선을 놓은 다음에는.... 존경하는 의장각하! 제가 한마디 말씀드려도 될가요. 저는 각하께서 출마하시기만 하면 성공못할 일이 없는줄로 압니다. 저의 생각은 경부선이 다 부설된 다음에 우리는 제 2보로 저기 압록강이나 두만강까지 뻗는 철로도를....》    하세가와 요시미찌가 이또오 히로부미를 향해 조심스레 말을 꺼내놓고 잊지 못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를 다시금 누박아 볼 뿐 말이 없었다. 무엄스레 덥벼친다고 힐난하는 빛이 아니였다. 웃음기 그믈그믈 피여오르는걸 보면   《당연하지 그 철도마저 우리의 장악하에 들어오도록 해야하구말구 서울부터 저 북쪽 압록강까지의 철로를 말이야. 그건 경의선이지. 이제 그 경이선끝머리의 압록강에다 철교를 가로 놓아서 만주의 철로를 이어놓는다면 명맥이 쭉 상통하게 된단말이야.》하고 있었다.    드디여 일본의 국책으로 정식 상정한 이것은 오래전부터 침략야심과 함께 그의 배속에 잉태하였던 것였다.    《우리의 계획이 실현될 날은 올것이다! 만리파도를 헤가르고 나라의 위력을 사방에 떨치게 하자!》    야마가따 아리또모는 기분이 도도하여 명치정부가 건립될 때 절규했던 구호를 이 자리에서 한번다시 불렀다. 환갑이 된 그의 희슥희슥한 머리를 어찌나 알심들여 다듬었는지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전체 일본땅이 정말 바다밑에 가라앉는 날이면 너의 후손도 나의 후손도 아니 전 야마도민족이 나라없는 슬픈 민족으로 되고말것이다. 그야말로  참혹한 비운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이 후대를 위하는 장원한 타산에서 일본의 둘째고향을 마련해야 하고 보호지를 구해두어야 할 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 누구든 일본은 가라앉는 함선과 같다는 말을 입밖에 내는걸 허용치 않으면서 자신있게 한마디 부르짖었다.    《우리는 부산으로부터 시작해서 멀지 않은 장래에 만주까지 뻗어 들어갈 것이다. 그때면 철도가 바로 대일본제국을 살찌우는 공급선이 되어서 복무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조선과 만주를 짜면 짤수록 기름이 나오는 참깨로 만들고야말것이다.》     그는 전에 자기가 그처럼 증오해온 바꾸후가 자국민을 착취할 때 처럼 조선과 만주의 백성들을 착취할 설계를 착실하게 해놓고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말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심을 대단히 돋구게 했다.     야마가따 아리또모와 하세가와 요시미찌가 돌아가자 방안에는 두친구만 남았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들의 래방의도가 무엇이였는가를 알고싶었지만 그것을 이노우에 가오루와 묻지 않았다. 아무리 친구간이라도 직권을 벗어난 간섭은 삼가해야하는 것이다.    《미쯔바시 곤지로, 이께다 겐지로, 야마다 도모기찌, 시무라 도끼찌라... 이건 웬 명단입니까?》     이또오 히로부미는 외무대신의 탁상우에 버린 듯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종이장을 쥐여 거기에 적혀진 이름들을 일별하고나서 물었다.    《재작년 조선서 의병폭동사건때 똑같은 하루 시각에 실종된 원산전신공부의 명단일세.》     이노우에 가오루는 알려주면서 얼굴에 자못 불쾌한 기색을 지었다.    《이런걸 왜서 외무부까지 올려보낸답니까?》    《그러게말이지. 행방불명이 된지 이태가 된다네. 그런걸 가족들에서 찾아내라는 신소를 올리니 원, 귀찮아서.》           《밥통들! 거기 경찰기구는 뭘하고 령사는 뭘하게?》    《찾느라구했지. 안찾을리있소. 구워먹어버렸는지 찾아도 없으니까 맥을 놓은 꼴인데 기어히 찾아달라니 내 이 외무대신인들.... 》    《난화지맹(難化之氓)이야, 아무렴 그렇다구 이런 것 까지 올리바치다니 원! 우리가 민주를 너무줬군! 어느 존전이라구 감히.... 상소를 하라 부추겨준 자가 있을건데 당장 잡아서 처리하는게 좋겠습니다.》    《이 일은 경무청에 넘겨야지. 그리구 자네의 안전을 위한 보위조치는 잘되여있다니 마음을 놔도 될것같네.》     이또오 히로부미는 국내외의 여러 신문에 공포한 일자지만 로선을 바꾸어 요꼬하마에서 배편으로 떠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갔다. 조선에서 아직도 로씨야의 세력이 득세하고 미국이나 프랑스, 영국같은 나라들도 한몫보자고드니 한쪽으로 그들의 저애에 응부하면서 조선정부를 설득해낼만한 사람을 찾다보니 여기로 오는 일이 결국 또다시 이또오 히로부미의 몫이 된 것이다. 조선에 대해서 누구보다 제일 밝은 사람은 그였으니까.    조선은 지금 로씨야와 프랑스의 부당한 요구로 인하여 백성들이 온통 끓고있었다. 로씨야는 외부대신 조병직을 설득하여 목포(木浦)와 진남포(鎭南浦)의 사방 10리안에 있는 섬을 모조리 사려했고 프랑스는 평양에 있는 한 곳과 또 다른 두곳(지명미상)의 채굴권을 프랑스인 경영의 경의철도회사에 허가해 주라했다. 이 내막을 여러 조선 신문들에서 알고는 폭로 규탄하면서 여론을 크게 일으킨 것이다.    철로부설이 우선 표면상 그것처럼 로골적인 략탈이 아니거니와 조선사람들께 교통편리를 도모하는것이기에 민중의 반대를 크게 불러일으키지 않으리라 여겨졌다. 문제는 로씨야가 간섭해나설때의 대책이였다.    서울 천연정 청수관.    고종 8년(1871)이였다. 하나부사 요시따가 공사관서기생으로 조선에 와 해군의장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임금을 배견하고는 신임장을 봉정한 그때로부터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으로 정해져 일본국기가 조선상공에 휘날리기 시작한 청수관은 도오꾜오에서 획책된, 조선을 통제하고 장악하기 위한 일련의 책략과 지령을 집행하는 작전지휘부요 주요거점이며 보루였던 것이다.    고무라 주따로오공사가 우선 조선의 현황에 대해서 상세하게 회보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미 장악하고있는 조선의 친로파요인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정황을 물었다. 고무라 주따로오는 이범진이 제일 완고하고 리완용은 끌어당길수 있다고 보고했다.    지금으로부터 박차를 가해서 친일파를 적극 길러야 한다. 첫작업을 미우라가 완성했으니 둘째작업은 고무라 네가 완성해야한다고 단단히 일러놓고나서 이또오 히로부미는 조선정부를 구슬려 경부선부설권을 얻어내고야말았다.     
75    半島의 血 제1부 19. 댓글:  조회:4326  추천:0  2012-09-16
  19.      1900년은 서일이 내내 협착한 우리에 같혀서 자라난 표범이 그 단단한 체력을 과시하느라 살창을 끊고 밖으로 뛸쳐나오듯한 한해였다. 욕망대로 나서 자란 경원군(鏡源君) 안농면(安農面)의 금희동(金熙洞)마을을 훌쩍 떠나 배움의 새 요람인 경성(鏡城)의 유지의숙(有志義塾)을 다니게되였던 것이다.     그지간 서일은 제마을의 김노규(金魯奎) 문하에서 주역(周易)을 배웠다. 그것은 삼역(三易)의 하나로서 역사상 중국의 주대(周代)에 성행하였다하여 주역(周易)이라 하는데 팔괘(八卦)로써 자연현상, 가족관계, 방위(方位), 덕목(德目) 등에 맞추어서 철학, 윤리, 정치상의 설명과 해석을 가하는 것이다. 그런것을 전공하였다하여 고향에서는 사람들이 서일을 주역선생(周易先生)이라니 점쟁이라니했다. 하지만 그는 새문화를 배우려는 욕망이 가슴에서 끓었기에 그런 소리는 귓등으로 넘겨버리고 경성(鏡城)에 온 것이다.    유지의숙(有志義塾)은 바로 이해의 3월에 이운협(李雲協)이 설립한 것인데 그는 함경도지역의 대표적인 계몽운동가였던 것이다.   《시대에 발을 맞춰야지. 내가 이제는 새 문화를 탐구해보자!》    서일은 이같이 마음먹고 약속대로 박기호와 함께 공부하러 온것이다. 집이 본지에 있는 성묵이역시 이 학교에 입학했다. 그래서 최삼용이를 내놓고 세친구가  다시모여 지내게 되었으니 참으로 즐거운 생(生)이 새로 시작되는것만 같았다.       동쪽에 무변의 망망한 동해바다가 활짝 펼쳐져 있다. 라남(羅南)의 남쪽 경성만(鏡城灣)에 림하여 있는 경성(鏡城)은 력사가 오랜 구도청소재지로서 내지 그 어디에 비해서나 수륙교통이 발달했다. 그래서 교육도 발전하여 선줄을 끄는가싶었다. 바다를 끼고 있으면 거개가 그러하듯이 이곳의 거리역시 어물전들이 있어서 각종의 해산물을 구경할수 있었다. 그리고 과일상과 채소상들도 많았다. 경성(鏡城)은 려인숙, 여러음식점에다 점포와 전매점, 유락장에다 서점도 갖추어져서 짜장 아담진 도시맛을 풍기니 살기좋은 고장이였다.    어느 곳에 가든 우선 그 지방의 지리부터 알아두는것이 습관으로 되여있는 서일은 개학 이틀전에 경성으로 와갖고 기호와 함께 사숙을 잡아놓고는 시내구경을 나섯다. 경성(鏡城)에는 명승고적으로 관해사(觀海寺)와 원수대(元帥臺)가 있었다. 그들은 우선 거기부터 가보았다. 그리고 이틑날에는 먼곳을 가지 않고 성묵이까지 해서 셋이 주을천(朱乙川)냇가를 거닐면서 학업과 생활을 론했고 주위의 경치도 흠상했다. 주을천(朱乙川)은 경성(鏡城)의 서북쪽에서 흘러내려와 동해로 들어가는 한갈래의 내였다. 이 냇물을 따라서 42㎞가량 우로 거슬러 올라가면 발원지가 되는 주을에 이르는데 그 주을읍(朱乙邑)에서 서북으로 10㎞쯤 더 들어가면 철질이 알칼리 단순천으로서 다량의 라듐을 함량한데다 온도가 68℃나 되는 유명한 온천이 있는것이다. 그것말고도 경성(鏡城)근처에 성정온천(城町溫泉)과 온보온천(溫堡溫泉)이 있고 군내에 숭암산(崇巖山)같은 명승지도 있었다.    《너희들 좀 봐라. 일본에 비해 대체 뭐가 못한가말이다. 삼천리강산 그 어디엔들 좋은 경치없고 명승이 없느냐말이다. 하건만 우리는 왜? 왜서?.... 생각하면 원...임진왜란 때 그 더러운 쪽발이 왜놈한테 이 강산이 심히 유린당한걸 생각하면 지금도 그저 분통만 터진다.》    주을천을 거닐면서 서일이 내뿜은 말이였다.    그들은 장차 시간이 허락되면 숭암산도 가보리라 했다.    성묵이가 서일과 기호한테 너희들이 여기에 온것을 삼용이가 아니까 이제 곧 보러 올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정말이였다. 개학이 되어 3일만에 과연 최삼용이가 친구들을 만나보러 경성에 왔던것이다. 사팔뜨기눈을 더 사팔거릴 뿐 성격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재미있는 친구였다. 군자삼락을 열창(熱唱)하더니 아마 락관을 길러서 그런모양이다. 마침 이날이 주일이여서 서로 상봉의 즐거움을 풀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 삼용이는 돈을 만지는 생색을 내느라 까놓고 말해 서생티 물씬물씬 나는 너들같은 글벌레야 언제가야 하면서 정심한끼까지 푸짐히 내는 것이였다.    아무튼 고마운 일이였다.    서일이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그래 넌 지금 대체 무슨장사를 하느냐 물어보았다. 그러니 삼용이는 해물되거리를 하고있는데 올 한해만 착실히 벌면 집살돈은 장만이 되리라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그는 밥술을 뜨다말고 되려 친구들의 장래를 걱정했다.    《난 정말 리해안되는구나. 벼슬길이 빠른 학교가 쌔쿠버렸는데 너희들은 왜서 하필이면 그깟데를 택하느냐말이다, 한학을 죽도록 공부해갖고는 고작 하는게 훈장질이겠지, 그래? 그도 글쎄 락을 크게 보면 몰라도. 훈장의 똥은 개도 안먹는다구했네라.》   《나라가 없으면 일신일가가 있을수 없고, 민족이 망국노로 돼버리면 일신의 영광이 있을 수 없는거다. 그래서 벼슬생각같은건 아예 싹 집어장지고 이 길을 그냥 택한거다. 민중을 계몽시키는 일 그것말이다. 사범을 나와 삼천리 방방곡곡에 새로운 교육을 일으켜 우리 이천만의 겨례 모두가 인덕과 지식과 기술을 가진 건전한 인격자로 되게 만들면 그게 얼마나 좋겠니. 그래서 지망을 이렇게 정한건데.... 너를 내놓고 우리 셋은 소원이 같네라.》    《정녕그렇다면 너희들은 애국자행렬에 드는거겠지!? 하하하.... 난 정말 리해안된다. 임금님도 어쩌지 못하는 나라일을 너희들이 관여를 한다구 그게 되어갈가? 의병들을 보거라. 들구일어나서는 해놓은게 뭐냐. 제 목숨만 아깝게 잃는 것 밖에는?... 그러니 내말은 아예 제살도리나 하는게 상책이라는거다.》    서일의 귀에는 그것이 엉성한 설복으로 들릴뿐이였다.     그는 낯선 사람을 대하듯 삼용이를 아스라니 다시쳐다봤다. 솔직함과 담백함이 좋으나 이 애가 그사이 어쩌면 이같이 자사자하게 번졌을가, 나라운명이 자기와는 전혀 관계없는 소리를 하고있으니 뭐라면 좋을가, 맞받아 통박하자해도 그러면 공연한 입씨름이나 벌어질 것 같아서 그만뒀다. 한데 그가 눈길을 자기쪽에 꽂은채 거두지 않고 대답을 집요하게 바라는지라 서일은 한마디 응대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웃는 낯으로 그저 속담 한토막을 외웠다.    《“소소식 방세뇨 (小小食, 放細尿), 사사지식 가방섬시(些些之食, 可放纖矢)”라 했거늘  “작게 먹고 가늘게 싸거라.  작작 먹고 가는 똥 누지.”》     너무 그렇게 분수에 넘치게 살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충고였다.       그 유지의숙은 이운협선생은 과연 결심한대로 수백년을 내려온 구식교학의 틀을 버리고 현대적인 새 교수방법을 전수하기에 전국각지에서 학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있었다.    신입생을 받아들이고 새학기를 맞이한 학교는 생기가 넘쳐 흐르면서 들끓었다.    습윤한 동해바람이 8월의 무더위를 몰아가면서 열기에 달아오른 운동장을 식혀주고있는 어느 일요일의 한낮때, 거리에 나갔다가 책방에 들려보고 돌아오던 서일은 저기 교정의 아름드리나무 그늘아래에 자빠뜨려놓은지 오래되여서 이제는 아예 돌걸상으로나 사용하는 척화비에 중년에 이르는 사나이 하나가 걸터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근엄하게 생긴 그가 바로 이운협(李雲協)이였다. 개학날 한번 학생들의 면전에 피끗 나타나고서는 어디로 출장을 나갓더랬는지 여러날 보이지를 않다가 오늘에야 다시나타난 것이다.     교장선생은 물론 신입생을 다 면목알 리가 없지만 학생으로서 교장선생님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인사없이 지난다면 그건 너무나도 몰상식한 행위라 서일은 다가가서 허리굽혀 인사했다.    《누구더라?》     이운협(李雲協)은 인사를 받았지만 기억에 없는 학생인지라 보던 책을 덮으면서 고개돌려 이쪽을 깐깐히 눈빗질했다.    《저는 방금온 신입생입니다.》    《오, 그렇길래 면목없지. 여게 와 앉게, 서있지 말구.》     교장선생은 자리를 내느라 한켠으로 드티여 앉으면서까지 궜했어도 서일은 선듯이 앉게 되지 않았다. 웃어른이, 그도 명성높은 교장선생이 학생을 이같이 무람없이 대해주고있음에 되려 송구스러웠던 것이다.    《하하하....학생은 왜 이래? 신식을 따르고푸지 않은가? 거리에 뛸쳐 나가서 이 사회를 개혁하자고 부르짓지를 않았던모양이로군!》    교장선생은 새로 온 이 어린 제자의 지나친 조심스러운 거동이 우수운양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하면서 뜻밖에도 이런소리를 하는것이였다. 하여 서일은 적이 놀랜눈으로 그를 다시보았다.    《선생님, 왜 신식을 따르고싶지 않겠습니까. 그리구 사회개혁은 저도 지극히 바라는바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저....》    《례모없이 마돼먹은 놈이랄까봐 그러나. 그리생각말고 와서 앉아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같이 서있지 말구.》    서일은 그제야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무릎을 꿇지 않고 스승곁에 이렇게 앉아보기는 난생처음이였다. 서일은 자기는 올해 나이 20살이고  고향이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이라는것과 거기서 학문높은 유생 배창식과 김노규선생한테서 한학(漢學)과 주역(周易)을 배웠다는 것을 말했다.    《가만있자, 그러니까 노규가 추천한 학생둘중에서?...》    《예, 서일이 바로 접니다.》    《오, 그래?!》     이운협교장은 뜻밖에 몹시 반가와하면서 자기는 금희동마을의 소학교선생  김노규와는 죽마구우(竹馬舊友)라 했다. 과연 그들은 지금 서일이 또다시 한학교에서 공부하게 된 성묵이, 기호와의 관계처럼 친분이 두터웠다. 소시적에 한서당에서 한학을 수련할적부터 사이가 극친했다는 것이다.    《그래 학생은 왜서 다른학교는 안가고 굳이 여기를 택했는가?》     진속을 떠보는 말이였다.    《저는 지금 나라가 망해가는 원인의 하나가 강린(强隣) 왜적의 침략성에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먼저는 국민의 무지가 나라를 이꼴로 되게 만든거라 생각돼서 그들을 깨우쳐주고싶었습니다. 유지의숙이 장차는 사범으로 발전이 되리라는 얘기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오게된겁니다.》   《오, 그래!? 옳네, 옳아! 과연 맞는 말을 했네!》    이운협은 초면의 신입생이 하는 답변이 자기 마음에 무척드는지 웃음실린 밝은 얼굴로 대견스레 보면서 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국민의 무지를 절규하고 계몽운동에 착수해야하네.》    새로만난 사상(師生)은 이렇게 서로 면목을 익히면서 의기상투(義氣相相投)하게 된 것이다.      어느날 아침에 서일과 한반의 사범생들이 교실에서 갈등이 극에 이르러 류혈적인 란투까지 벌어지니 임금이 친히 출면해서 독립, 황국 량협회의 대표를 불러 면약하고 군중을 해산시킨 일을 놓고 왈가왈부 하고 있었다. 임금이 현명하다느니 홍종우가 탁월하다느니 지어 그를 숭배하는 학생까지 있었다. 서일은 그저 듣고 넘겨버릴수는 없는지라 한마디 삐치였다.    《홍종우가 누구냐? 그게 김옥균을 꾀여다 살해한 흉범아닌가? 그런 살인자가 지금 신용을 얻어 해먹으니 글러먹었지. 김홍육은 또 어떤자냐? 고종황제의 아라사통역관이랍시고 욱일승천의 세력을 뽑내니 어쩌자는건가. 사대당의 잔여가 아직도 남아서 살판치니 세상은 그냥 어두워니는게 아니고뭐야. 서재필 그가 선지선각자일진대 대체 얼마나 뻗쳐낼가고 근심했더니 과연 얼마뻗쳐내지 못하고 가는구나. 다시금 미국으로 망명아닌 망명을 가야하는 신세니 원... 애국자에게는 왜서 액운만 따르는지 우린 다가 한번다시 심사숙고해봐할게 아닌가?.》    누군가 서일역시 독립협회 사람이 돼서 저러는게 아닌가고 했다.    이에 서일은 목소리높혀서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독립협회는 독립협회고 나는 나다! 남의 눈치를 보며 산다면 그런 인간은 내가 아니고 남이되는 것이다. 자아를 발로해야한다. 그러는 사람만이 곧 자기인 것이다!》    억측으로 그를 의심했던 학생은 멋쩍게 웃으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런일이 있은후부터 다시는 공공연히 그를 맛서서 까박하는 학생이 나지지 않았다.      1896년 7월에 협약이 맺어졌으니 어언 4년째 된다. 여기 경성도 경원과 마찬가지로 로씨야가 광산채굴권을 얻어 지금 한창 일을 벌렸다고 한다. 남의 나라의 광산을 허물고 뜯어가다니 렬강의 모양이 대체 어떠한지 서일은 제 눈으로 확인하고싶었다. 그러다가 그는 격분되고 속만 상할 일이라 그 생각을 그만 지워버렸다. 관리들은 부패무능하여 나라를 다스릴 힘이 없고 백성은 무지하다보니 리득에 혈안이 되어 뻗쳐온 렬강의 그 탐욕스러운 손이 이 나라를 마음대로 주물러도 어쩌지를 못한다. 이 렬강 저 렬강이 밀고 닥치는데 따라 오늘은 이무리 래인은 저무리의 꼭두각시대신들이 빈번히 바뀌는 조선이였다. 이제와서야 독립국의 체면을 세워보려 하지만 이미 늦은 것이다. 기운을 다잃었으니 그저 황제국이란 명색일 뿐 제 살점을 더 험하게 뜯기우면서 파멸에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진종일 교과서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조선이 대한(大韓)이라는 굵직한 이름을 달기는했어도 여직 볼만한 간행물이란 거의 없어서 공백이나답지 않다가 이제야 과 이 더 나져서 쌀에 뉘만큼이나마 구독물을 찾을수 있었다. 은 이해의 1월 16일에 창간되였는데 그것이 순한글 일간지였다. 그것은 가 고종의 내명(內命)에 의하여 페간되자 양홍묵(梁弘?), 유영석(柳永錫), 이승만(李承晩) 등이 주동이 되어 민족기관지로 발족시킨 것이였다. 다른하나 은 이해의 8월 8월에 창간되였다. 이 신문 역시 한글로 된 일간신문인데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색채가 짙었다. 이종일(李鍾一), 심상익(沈相翊) 등이 중심이 되어 꾸리였다. 서일은 매일 과 함께 새로 창간된 이 신문들을 예전의 모양으로 글자하나 빼놓지 않고 보았다. 그래도 눈을 더 둘곳이 없으면 짬을 타 서점에 달려가군했다.      어느날 중년의 서점주인은 서일이 구독물결핍증에 걸린 사범생인 것을 알고 구문(舊聞)이라도 보겠거든 보라면서 구석에 처박았던 낡은 신문 한묶음을 내놓는 것이였다. 서일은 고마워하면선 그것을 뒤지다가 뜻밖에 그속에서 창간호를 발견했다.    그 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된것인데 신문은 4면중 3면은 국내인을 위한 순 한글판이였으나 나머지 한면은 영문판으로 발간되였던 것이다. 그것은 조선의 립장을 외국 사람들에게 대변했다고 할수있다.             신문은 첫호 론설에서 신문의 사명과 발간의 취지를 밝히고는 이렇게 말했는데 그것은 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이 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은 혁명가다왔다. 그는 선각자의 안목으로 쓰러져가는 나라의 정치, 경제 및 사회의 모든 여건을 개혁하자는 생각을 한것이고 그러하니 혁명의 한 수단으로 이 신문을 창간한것임을 능히보아 낼 수 있었다. 특히 "독립신문(獨立新聞)"이란 제호(題號)부터가 그러했다. 조선이 독립국가로서의 위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있으니 이 한 신문만이라도 독립을 위한 전위(前衛)가 되겠다는 표시가 아닐가.    이 창간호론설에서 선언한바와 같이 정부의 잘못을 가차없이 폭로, 비판하고 탐관오리와 약한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의 행적을 신문으로 백일하에 드러내보이니 신문은 그대로 민권수호자가 된 것이다.    서일은 이 신문이 정부는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며 국민은 어떻게 충군, 애국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을 보았고 외국열강의 조선침략기도를 가차없이 폭로하는것도 보았다. 독립신문이 때로는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조선사람에 대한 행패를 규탄하는것도 보았고 우리도 실력을 길러 다른 나라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말자고 웨치는것도 보았다.....    전에 금희동에 와야 할 신문을 어디서 중간챘는지 서일은 이 신문이 생겨서 거의 한달이 돼서부터 구독할수 있었거니와 중간에 이가 빠지는 경우도 가끔있었다. 신문이 오면 그 한 장을 마을사람들이 돌려가며 보다나니 마지막에는 거의 누더기가 되어 원주인의 손에 돌아오는때도 있었다. 그래도 서일은 나만이 알것이 아니라는데서 신문을 되도록 많은 사람이 보게끔 선전까지 했던 것이다.    이같이 영향력이 있는 신문을 부패한 관리들이 고와할 리가 없었다.    낡은 신문꾸러미에는 지난해의 12월 18일자 신문이 특별히 눈길을 끌었다.                   이것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근 2년간 열성을 기울여 나라를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탄압을 받고있음을 시사한것인바 이런 정황에서 신문은 더 이상 발간하지 못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었다.     《 이건 누구를 가리키는것일가?...그렇지! 로씨야공사 웨베르겠구나!》    서일은 지난해의 10월 독립신문에 몇차례 실린 기사들을 새삼스례 상기했다. 독립신문은 조선에서 제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로씨야군관 10여명을 초빙해오는 것을 반대했을뿐만아니라 웨베르의 위협적인 책동으로 정부가 영국인 재정고문이던 브라운을 해임하고 그대신 로씨야인 알렉세예브를 임명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사실진상은 이러했다.    영국인 브라운은 1896년에 탁지부(度支部) 고문으로 취임한 이래 불과 1년만에 엉망이던 재정을 깨끗하게 정리하여 국채 300만원을 일거에 상환하는 수완을 보인 사람이다. 브라운은 심지여 왕의 사치까지 억제하여 왕실의 불필요한 경비는 공공시설에 투자하도록했다. 그러나 이러한 브라운도 썩은 관리들에게는 오히려 귀찮은 존재로되였다. 웨베르는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리고 역리용하였는바 그는 부패한 관리들을 추겨 그를 해임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하게 하는 한편 로씨야인 알렉세예브를 그 자리에 올려앉히도록 책동했던 것이다. 독립신문은 이러한 내막을 가차없이 폭로한 것이다.    웨베르의 책동은 영국정부가 강경한 항의와 무력시위까지 벌리는바람에 깨여졌고 브라운은 다시 임명되였다. 그러자 웨베르는 그 보복으로 서재필을 없애려고 맘먹은 것이다. 한데 그러자고 보니 그가 신분이 있는 사람이여서 문제였다. 서재필은 미국 국적에 오른 사람일뿐만 아니라 미국녀자와 결혼까지 한 몸이요 공직으로 놓고 보면 중추원의 외국인 고문이였던 것이다. 반대세력이 야합하여 그를 해치는 방법은 그를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임시키는것이였다. 그리하여 웨베르는 외부대신 조병직(趙秉稷)을 추기였고 조병직은 그의 추김대로 대한주재 미국공사 알렌에게 서재필의 중추원 고문직해임을 요구하는 외교문서를 보낸것이다. 에 대한 교묘한 탄압이였다.             이것은 알렌의 답신이였다.    10년계약을 맺고 온 서재필은 조국에서 겨우 2년을 보내고 1898년 5월 14일, 서울 마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가고만것이다....      서일은 낡은 신문 무더기속에서 창간호와 서재필의 마지막으로 쓴 글이 실린 신문 그리고 3개월전인 5월 16일자 한 장을 달라해서 가지였다.    그가 신문을 겨드랑에 끼면서 주인과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데 출입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훌쩍 들어왔다. 서일처럼 중등키에 단발을 하고 몸이 단단하게 생겼는데 두눈에 정기도는 영준한 젊은이였다.   《아저씨, 그간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도 서점주인은 누군지 인차 알아보지 못한다.   《제가 지난해도 이맘때 이교장선생님을 뵈러 왔다가 여게 들려서 고서 몇권을 사간적있는데요. 기억안나세요?》   《오ㅡ조부님이 추천하는 학생을 데리구왔던 그 학생이지!?... 그래 이번에도 조부님의 추천생을 데리구왔는가?》    그제야 생각나는지 서점주인은 반색한다.   《아직두 추천받아 오는 학생이 있는가, 거 어데서 오는데?》    서일은 은연중 입을 열며 끼여들었다.   《누굴 물어보는 말인지? 나를 그러는지? 내 친구를 그러는지?》    그 젊은이는 서일을 아래우로 훑어보고나서 되집어 물어왔다.   《하다면 둘이 한데서 온게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잖구. 난 서울서 오구. 내 친구는 청원서 왔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지금 서울에 있다는 이 젊은이는 청원에서 서당훈장노릇하는 조부님이 사범에 추천하는 제자를 데리고 와서 이운협교장께 맡기고 돌아가는 길이였다.    조선땅이 졻아서인가 아니면 세상이 작아서인가!? 알고보니 그의 조부님 성우와 이운협교장과 금희동의 김노규는 다가 소시적에 한서당 한스승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한 죽마구우(竹馬舊友)였던 것이다.    서일이 시원스레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우리 서로 알고지내기오. 난 유지의숙다니는 서일이야.》    대방역시 벌씬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 서일의 손을 잡는다.   《난 성균관 입학생 신채호요.》    서일과 신채호는 이렇게 서로 면목알게 되었다.    신채호(申采浩)는 본관이 고령(高靈)이며 호는 단재(丹齋) 또는 무애생(無涯生)이라 하는데 1880년 11월 7일 충남 대덕군 산대면 도림리에서 가난한 선비 신광식(申光植)선생과 밀양박씨의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그는 나이 7세나던 해에 부친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서거함에 조부 성우(星雨)공과 백형(伯兄) 재호(在浩)와 모친으로 가정을 이루었다. 그 뒤 곧 청원군 낭성면 귀개리(歸來里ㅡ고두미)로 이사하여 조부가 가르치는 사숙(私塾)에서 공부했다. 총명이 과인하여 9살에 통감(通鑑)을 해독하고 10살에 행시를 지었으며 13살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하여 모두 신동(神童)이라고 불렀다.    1897년 형 재호가 요절(夭折)하고 신채호는 조부밑에서 계속 교육을 받았으며 이때로부터 목천에 있는 대학자 신기선(申箕鮮)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 풍부한 서고(書庫)에서 많은 서적을 독파하게 되었다.    그는 올여름 서일이 여기 유지의숙(有志義塾)으로 오는 거의 같은 날에 성균관생(成均館生)이 된 것이다.    《신문은 뭘할려구 그렇게?....》     신채호는 서일이 겨드랑이에 낡은신문을 끼고있는걸 보고 물었다.    《볼것이 너무두 없어서 츄려가는거요.》     신채호가 어디 보자며 한 장 쑥 잡아 뺀 것이 이였다.        신채호가 보면서 소리내여 읽은 구절이다. 이것은 이 서재필이 추방당한 이틀후인 5월 16일에 로씨야와 프랑스가 조선의 땅과 광산채굴권을 부당하게 요구하고있다는 사실을 알고 폭로한 글이였다.    서일은 신채호와 의 정신과 같은 이런 신문이 페간되지 말고 계속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니 신채호는 자기 역시 동감이라면서 서울에 가자마자 "매일신문사(每日新聞社)"를 어떤 분들이 꾸리는가 보려고 일부러 찾아갔다가 거기서 마침 이승만을 만나보았노라면서 그에 대한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편집은 내보다 다섯 살 더많은 스믈세살나이였는데. 팔팔하고 지식이 대단한 것 같은데 사람을 대함이 좀...  마음가짐이 후더웠으면 좋겠더구만. 나도 공부 다하고서는 신문사에 들어가 사업을 해볼테요. 기자질을 해도 좋고 편집노릇을 해도 좋고. 거기서 일하는게 아무튼 뻐근할것같아.》  
74    半島의 血 제1부 18. 댓글:  조회:4548  추천:0  2012-09-16
  18.                                       의병들을 안전하게 월경시키고나서 마을로 돌아오면서 박기호가 이제 우에서 기찰이 내려와 누가 추격받는 의병의 월경을 도와주었느냐고 추궁할텐데 이 일을 어쩌면 좋을가고 근심했다. 불보듯이 빤한 일이였다. 조사를 받으면 그들만 받지 않을 것이다. 의병들을 먹여주고 재워주었으니 온 마을이 걸려들어 당연히 조사받고 닥달을 받을 수 있는 일이였다. 그러니 사전에 무슨 대책이든 세워야 할 것이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서일은 기호와 함께 마을로 돌아오자 곧장 최풍헌을 찾아갔다.    최풍헌은 그러잖아 이홍래가 가면서 이제 우에서 기찰이 내려와 조사할텐데 그러거든 내보이라면서 주고갓다면서 인쇄한 전단(傳單) 한장을 내놓았다. 받아 보니 그것은 다른게 아니라 작금 의병들의 손에 처단된 친일관리들의 명단을 일목료연하게 쭉 라렬해놓은것이였다.                 《그거참 묘한 계교로구나!》    서일은 낯빛이 확 밝아졌다. 그 누구나 다 제 목숨은 잃으려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서야 누군들 주저하지 않으랴!    최풍헌이도 기호도 웃으며 감탄했다.    의병을 도와준 사람이면 관청의 조사를 받기마련인지라 이홍래는 어떻게 하면 후환을 없애줄가 궁리하다가 자기가 믿고 존경하는 라인영(羅寅永)을 찾아갔던 것이다.    라인영은 휘(諱)가 철(喆)이요 초휘(初諱)는 인영인데 어려서부터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탐독해 과거에 급제했고 훈련원(訓練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직에 있으면서 학문이 높다고 소문난 사람이다. 이홍래가 그를 만나서 외국으로 망명하는 의병을 도와주자니 가끔 당하는 고충이 있다고 말하고는 무슨 수라도 대줄수 없느냐고 조언을 바랐다. 그랬더니 라철은 수라는거야  사람이 머리를 쓰기에 달린게 아니냐면서 그에게 조승상(曹丞相)이 지혜로 조지부(曹知府)를 대처한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이러했다.    명나라초기에 지부(知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성이 조씨(曹氏)여서 늘 자기는 삼국시기 조조(字ㅡ孟德)의 후대라고 자랑했다. 하루는 조지부가 극을 보러 극장에 갔더니 마침 《착방조(捉放曹)》(조조를 잡았다가 놓아주다)라는 극을 놀고 있었다. 극이 고조에 이르렀을 때였다. 조조 역을 맡은 배우가 이름이 조생(趙生)인데 연기술이 높은 그가 조조의 음험하고도 교활한 행동을 하도 생동하게 표연해서 진짜같은지아 관중들은 갈채를 보내였다. 앞자리에 앉아 극을 보고있던 조지부(曹知府)는 극장안을 들썽하게 울리는 박수소리에 놀라 이건 바로 선조를 모욕하고 자기를 놀려주는것이라 여기고는 노하여 펄펄 뛰면서 극을 못놀게했을뿐만아니라 연기자인 조생을 당장 관부에 잡아들이라고 공차(公差)에게 명령했다. 공차는 무대에 올라가 조생을 체포하였다. 조생은 웬 영문인지를 몰라 공차와 대체 왜 이러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공차는 그에게 사실을 말했다. 조생은 듣고나서 웃으면서 통쾌하게 공차를 따라 관부로 갔다.    한편 기다리던 조지부(曹知府)는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들어서는 조생을 보자 대노하여 을러멧다.   《발칙한 놈! 어르신님앞에서도 꿇어 엎드리지 않아?》    그러자 조생은 두눈을 지릅뜨면서 되잡아 호통쳤다.   《담통 큰 놈, 조승상이 왕림하셨는데도 네놈은 냉큼 내려와 맞을 념을 안한단말이냐, 그래?》    성이 머리끝까지 오른 조지부는 상판이 퍼러딩딩해서 웨쳐댔다.   《네, 네가 어쩜 조승상이 된단말이냐, 이놈!》    이에 조생은 랭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대감, 나는 방금 연극을 놀았는데 그걸 진짜로 보고 노여워하실건 뭡니까?》    조지부(曹知府)는 그만 할 말이 없어서 그를 놓아주었다.          머리만 잘쓰면 그 어떤 역경에서든 벗어날 수 있다는거다.      과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의병의 행적을 찾는다며 오는 자가 있었다. 키가 꺼두룩하고 감때사납게 생긴 중년의 사나이였는데 이 마을에다 발을 들여놓기 전에 벌써 린근마을의 누군가를 붙잡아놓고 얼리고 닥치고 옴니암니 캐물어 의병들이 여기 이 금희동(金熙洞)까지 왔다는 것을 알아냈고, 그렇다면 틀림없이 먹고 자고는 월경을 했을것이라 긍정하고 뒤를 밟아 온 것이다.    그는 곧장 마을의 학교부터 찾아왔다. 이때는 학생들이 한창 시간을 보고있어서 랑랑 글읽는 소리가 서당밖까지 퍼지고 있었다. 교실이 두 개여였는데 저쪽의 교실에서는 박기호가 초급생들에게 산술을 배워주고 있었다.    육감이란 과연 있는모양이다. 서일은 고개를 들어 열려진 창가로 돌렸다가 웬 더부룩한 머리가 숨어버리는 것을 피끗 발견했다.    《두억시니같은 녀석이 어디서 냄새를 맡구 왔구나!》    서일은 혼자소리로 내뱉고는 짐을 교실안을 몇걸음 뚜벅뚜벅 걸으면서 불청객을 대처할 궁리를 했다.    애들의 긁읽는 소리가 문득 끊어졌다. 바깥에 있는 자가 서당안을 다시금 들여다봤던 것이다. 할말이 있으면 불러내다가 할것이지 례모없이 비겁스레 노는 꼴이 보기실어 서일은 랭소했다.   《선생님! 저기 에비주지왔슴다.》    어린생도 하나가 바깥쪽을 손가락질하며 일러바쳤다.   《뭐나냐? 미친개가 왔느냐?》   《아님다, 사람같애요.》   《그게 사람이면 례모를 아네라.》    서일의 이 한마디가 벌써 불순한 마음갖고 온 그자의 정수리를 때렸다.    바깥에서 가래를 내뱉는 소리났다. 자기를 힐난하는지라 화를 내는 꼴이다.   《애들아, 과목을 읽거라. 다 외워야 집에 보낸다.》    선생의 이 한마디에 애들은 목청을 빼가면서 책을 다시읽기시작하는데 귀가 따가와 날 지경이다.    서일은 그 자를 마주대하고푼 생각이 없는지라 배짱을 부렸다.    바깥에 있는 그 불청객은 갑갑함을 못견데겠는지 견뎌내지 또다시 안쪽을 살폈다. 아이들을 오줌도 뉘우고 운동도 시켜야 했다. 서일은 하학을 선포했다.    아이들은 마치 초롱에 갗힌 새모양으로 얼싸좋다고 와ㅡ소리를 치면서 밖으로 달려나갔다. 달려나가서는 그 낯선 사나이를 둘러쌌다.    저쪽교실에서도 하학을 해서 애들이 밖으로 쓸어나왔다.    서일이 밖으로 나오면서 볼라니 그 불청객의 사나이는 한뼘되나마나하는 까만 태머리가 뒤통수에 대롱대롱한 계집애를 세워놓고는 허리를 꾸부정하게 구부린채 입술을 너불거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캐묻는건데 계집애는《난몰라!》하면서 달아나는 것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사내애와 또 물었다. 그 사내애역시 자기는 모른다며 돌아섯다. 그러자 그를 둘러쌋던 애들 모두가 마치 문둥이환자를 피하듯이 와ㅡ 흩어졌다. 형세가 이러니 그 사나이는 낯색이 흐려지면서 독을 쓰는 것이였다.   《망할자식들!》    이때 상급반의 키큰 남자애가 뒤늦게 교실에서 나와 변소로 가느라 그의 곁을 지나는데 사나이는 그를 불러 세워놓고 물어보는 것이였다.   《얘야, 어제 총가진 사람들이 이 마을에 들렸지? 바른대로말해.》    서일은 그 소리를 잡아듣고는 혼자소리로 욕했다.   《야 이 사박스런 놈아! 어른은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애들이나 얼려서 말을 받으려해?》    학생이 함구무언이니 저쪽은 그만 울화가 나는지 가려고 몸을 홱 돌렸다. 그래서 다시보니 그 중년의 사나이가 면목이 있었다.   《저치를 내가 어디서 봤더라?...》    서일은 성큼 다가가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손님은 뉘신데 학생하구 그럽니까?》    저쪽은 서일을 곱지 않게 흡떠보더니 되묻는것이였다.   《임자가 여기훈장인가? 좀 봐, 무슨눔의 학생들이 이래, 불손스레 례모짝 하나 없이?》   《피장파장이죠.》    서일은 한마디 까주고나서 다시 입을 열어 물어봤다.   《대체 무슨일을 갖고 그럽니까? 시끄럽게 자꾸캐물으면야 당연히 불손스레놀지요.》   《내 묻겠어. 어제 이 마을에 의병이 안들렸는가?》    말솜씨가 버드러지는게 위엄을 빼서 어째보자는 수작이였다.    흩어졌던 애들이 다시금 욱 모여들었다.    어느결에 기호도 곁에 다가왔다.    서일은 너는 입을 다물라 눈짓하고나서 알려주었다.   《들렸습니다. 헌데 그건알아서 뭘하는겁니까?》   《얼마던가?》   《그건조사해 뭘하는가구 내가 물었습니다.》   《밤을 자고갔다지, 안그래?》   《자고갔습니다. 내가 교실을 내놔서...건데 뭐가 잘못됐습니까?》   《선생이 학교에다재웠다? 잘ㅡ한ㅡ다!》    사나이는 이젠 꼬리를 단단히 잡았노라 기고만장해지기 시작했다.   《누가 재우라구했나, 누가? 그들은 십악대죄를 진 자들이야, 십악대죄를!》   《이 무슨 망탕소린가! 십악대죄라니? 아무험 그들이 죄를 지었을가? 그도 그저죄면 몰라도 십악대죄라니, 원!》    서일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그걸 몰라서 이러는건가?》    그자는 도끼눈을 해가면서 기염을 뺏다.    《네가 여기 학교의 교장이겠지?  어디 너부터 그걸 외워봐!》    서일은 여직 학생하고도 이같이 무리하게 독촉해본적이 없었다. 비루먹은 늙은 개 강아지하고나 위엄부리듯 대방을 깔보고 꺼들거리는 꼴이라 보기가 과연눈꼴시였다. 하지만 밸이 난다고 대들고 해낼 일도 아닌지라 서일은 우선 그것을 외웠다.   《외웁지요. 첫째는 모반, 둘째는 대역, 셋째는 모반, 네 번째는 악역, 다섯 번째는 부도, 여섯 번째는 대불경, 일곱 번째는 불효, 여덟 번째는 불목, 아홉번째는 불의, 열번째는 내란.》   《봐, 내란이 그래 십악대죄가 아녀?》   《의병은 반일을 하느라 들구일어났지 내란을 일으킨건 아니잖아. 그런데도 그걸 내란죄로 취급하다니원, 어디말이 되는가?》   《이런! 미친소리를 한다.》   《아니 내가 미친 소리하는가 네가 미친소리하는가?》    서일일은맛받서 반말질했다.   《재우지않아서야 되는가, 그들은 저마다 총을 쥐였는데. 게다가 사납기가 어떻다구. 밉게보고 반대하면 이거야.》    서일은 손으로 제 목을 썩뚝 따버리는 시늉을 하고나서 동을 달았다.   《난 아직 어려서 더살고싶은걸.》   《더살고싶다면서 그런짓을 해? 이건 범인은닉죄야, 알았어? 범인은닉죄! 사형감으로도 되는거다!》    박기호가 옆에서 그자가 놀아대는 모양을 보고있다가 전단을 내놓으면서 되잡아 으름장을 놓았다.   《너 이놈아, 무슨 개소리 괴소리 그리도 많으냐? 대체 누가 사형감인지 청맹과니 아니거든 이걸 똑똑히 보거라, 더 지껄이지 말구!》    그 중년사나이는 어마뚝하여 전단을 받더니 내리보고 올리보고 내리보더니  예기가 단통 꺾어지면서 두 눈이 퉁사발이 되더니만 그만 부들부들 떨기시작했다.  그 꼴이 과연 보기희한한지라 애들이 왁작 소리내여 웃었다.    이번에는 되려 서일쪽에서 기선을 제하고 그자의 꼭두를 눌러놨다.    《참 인제보니 경원서 사는 최기완이구만! 맞지? 한때 싸전차려 잘살다가 감투놀음에 쫄딱망했다는 그 꼴뚜기장수 최기완이!》      《잘 봤겠지. 의병을 도와준 사람 죄인취급하면서 함부로 잡아 심문했다가는 어떻게 되리라는걸?...그 목숨 아까운줄을 알면 고스란히 돌아감만 못할거야. 그리구 주의해. 다시 이꼴루 놀다가는 정말없어. 내 말을 알아듣겟지?》    마을 사람들이 웬 일이냐고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여기 금희동에서도 어느 해인가 작황이 좋지 않아 경원까지 가서 싸전의 쌀을 고가(高價)로 사먹은 적이 있는지라 이 사나이의 낯을 기억하고있는 이가 적잖않았다.    서일은 겁에 질려서 부들부들 떨기시작하는 그자에게 한번다시 눈총을 놓고나서 마을사람들을 향해 이 사람이 경원에서 사는 바로 그 최기완이라면서 싸전차려 돈벌고 감투놀음에 쫄딱망하더니 이제는 경병의 끄나블이 되어 누가 의병을 도와주었는가를 조사를 다닌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경병은 건양기간 친일파가 지휘하는 국가의 군대였다.(조선 왕조 고종(高宗)의 년호인 건양(建陽) 즉 개국 505년 즉위 33년인 1896~1897년 7월까지)     마을 사람들은 어찌된 영문인걸 알아채고는 격분해서 너 한마디 나 한마디 그자를 꾸짓기시작했다. 그 꾸짖음이 어느덧 분노한 사람의 호된 질타와 과격스러운 욕지걸이로 변져지는지라 최기완은 어물거리다가는 이들의 손에 매를 맞아 죽을 것 같아 그만 걸음아 날살려라 줄행랑을 놓고말았다.   《감사하다! 마을의 호위를 너들이 했구나!》    최풍헌은 서일과 기호가 경병끄나블을 시원스레 쫓아버렸으니 적시에 처사를 잘했다면서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이홍래가 풍헌어른께 드리고 간 전단이 은을 냈지요 뭐.》    서일은 이번일을 자기나 기호의 공으로 여기지 않았다.    세상인연이 이렇게 맺아지는 모양이다. 그들은 이홍래와 그가 데리고 왔던 의병들을 다시금 그리면서 생각했다. 지금 어디서 어떻게들 보내는지? 이홍래는 집이 여기 함경도에 있다니 되건너왔더라도 편히 보내지를 않고 흩어진 의병을 월경시키려고 동분서주를 할 것이다.              이때의 의병형편에 대해서 은 이같이 기록해놓았다.                                사실 그러했다. 의지와 투지가 선유에 팔리지도 굽히지도 않는 뼈굳은 의병대는 동산재기(東山再起)를 꾀하거나 권토중래(捲土重來)하기 위해서 고향을 등지고 이국땅에 건너가 풍찬로숙을 할지언정 리유없이 해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삼강오상(三綱五常)은 왕도의 삼강은 하늘에서 찾을수 있으며 하늘은 변하지 않으며 도도 변하지 않으니 군신(君臣)간의 례의를 지켜야한다고 가르치고있지만 국왕이 바보짓을 하는데야 그래 눈을 펀히 뜨고 보면서  굴종한단말인가? 그럴수는 없는 일이였다.      7월에 송진영, 홍현철 등이 정부를 전복하려고 하가다 음모가 탈로나 성사못하고 사형된 소식이 퍼져서 사람들을 또 한 번 놀래웠다.    한편 8월에 압록강을 건너갔던 유인석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국하였으나 초산에서 상소만 보내고 알현은 하지 않았다. 그의 의병진은 전해의 7월에 초산(楚山) 아성(阿城)에 도착하여 백관에게 격문을 보냈고, 동월 20일 압록강을 건너갔던거다. 한데 거기서 의병진은 국제법상의 관계로 청나라 장군 왕모염(王模閻)에게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왕모염은 조선에서 건너온 의병진을 무장해제시키면서도 대의(大義)를 흠모하는데서 본토의 유지 손홍영(孫鴻榮)을 시켜 대우만은 륭숭하게 하게했던 것이다.    유인석은 대접을 받고나서 파저강변(波猪江邊)에서 의병을 해산했는데 219명의 의병은 종일토록 통곡했다.....    조국에 돌아온 유인석이 임금을 알현(謁見)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시야비야했다. 말장단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또 하나의 소일거리가 생긴 것이다.    《아무튼 임금님이 별고없으면 나라 형편이 좋아지겠지.》    최풍헌이 입밖으로 내던진 말이였다. 백성의 념원은 이같이 소박하고 단순했던 것이다.    한데 아직도 이 나라의 순박한 백성들로부터 만수무강과 축복을 받고있는 왕님은 성근한 천자가 아니여서 나라꼴을 이지경으로 만들어놓고서도 명예욕은 잔뜩 자라나 지금은 황제꿈을 꾸고있다는것을 백성들이 어찌알기나했으랴!  그것도 제 궁궐에서면 또 몰라도 로씨야공사관에서 더부살이를 할 때부터 그따위꿈을 키운것이다. 병신이 다른겐가. 고종은 주제넘게도 그따위 황제몽이나 꾸었으니 그야말로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요 비루먹은 개가 다 비웃을일이였다.    그는 전에 벌서 웨베르공사에게 자기는 조선을 황제국으로 만들기싶다고 말한적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됩니다. 황제는 마음대로 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웨베르가 한 말이다. 그가 어리숙한 조선왕을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겠는가.    고종은 다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참고있다가 환궁하자 황제꿈을 다시꾸기시작했다. 그는 로씨야공사관에서 제정해준 건양(建陽)이라는 년호가 맘에 들지 않아 버리기로 맘먹고는 원로대신 심순택을 불러다 새로운 년호를 짖게끔 했고 심순택이 어명을 받고 광무(光武)와 경덕(慶德)이라는 두가지를 지어 바치자 고종은 그중 광무를 택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는 리유인즉은 중국에서 한나라때 광무라는 년호를 써서 한실의 중흥을 이룩했으니 자기도 그 본때로 하면 리조왕실의 중흥이 자기 대에 이뤄지리라 여겨져서였다.    고종은 이같이 년호부터 계획해놓고서는 홍종우(洪種宇)를 불러다가 서양형편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홍종우(洪種宇)는 프랑스 등 여러나라를 돌아다닌 부랑배라 부패한 정권이 고균 김옥균선생을 죽이면 변조판서(兵曹判書)를 시켜주겠다니 그런 죄악적은 살인을 했던 것이다.    고종은 조정의 신임을 받은 그에게 서양에는 황제도 있고 대통령도 있다하니 어찌된 일인가고 물었다. 이에 홍종우는 프랑스같은 나라에는 대통령이 있고 에스빠냐같은 나라에는 녀왕이 있고 로씨야나 독일같은 나라에는 황제가 있다면서 그것은 그 나라에서 할따름이라고 알려줬다.     이에 고종은 낯빛이 활짝 밝아졌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도 백성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황제국으로 만들수있다는 말인가!》     눈치약은 홍종우는 그의 내심을 알아맞히고는 비위를 맟추느라 그렇구말구요 그것은 자유입니다 했던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고종은 그에게 외사과장의 벼슬을 주었다.    홍종우는 왕명을 받고 은밀히 각국 공사들의 공작을 했다. 낯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비밀이 있을가. 얼마안가서 고종이 황제가 될 꿈을 꾼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아첨은 간교한자의 권모술수였다.    먼저 농상공부대신 권재형 등이 지체없이 고종에게 황제를 칭할 것을 진언했다.             이 얼마나 그럴듯한 상소인가!    고종은 체면상 양보하는 것 처럼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의정 심순택과 특진관 조병세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상주하는 판이다.                모두들 제 낯 간지러운것도 모르는지 꿀발린 좋은 소리는 빠짐없이 늘여놓았다.            이번에도 고종은 체면상 과인이 덕이 없이 어찌 황제로 칭하느냐고 그건 불가하다고 거절하는척 했다.    조정의 로회한 대신들만 고종을 황제로 칭할 것을 진언한게 아니다. 서재필을 위수로 한독립협회에서도 칭제(稱帝)할 것을 극성스레 진언했던 것이다.    고종은 그제야 못이기는척 칭제를 승낙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남별궁터에다 국구단(國丘壇)을 쌓고 그 주변과 경운궁안팍을 모두 황색으로 장식해놓았다. 그리고나서는 1897년 10월 12일(음력 9월 17일)에 고종은 황색곤룡포를 입고 황색연에 앉아 국구단으로 향했다. 그 뒤에는 황태자가 따르고 다음에는 원로들과 만조백관과 궁인들이 장사진을 치고 따랐다. 그야말로 굉장히 요란스러운 행렬이였다!    고종은 국구단에 올라 상제(上帝)께 제사(祭祀)를 지내고나서 즉석에서 이미 갖추어 놓은 멋진 룡상에 앉았다.    《황제페하만세!》    만조백관이 웨치면서 엎디여 절을 올리니 황제로 받들리게 되였다.    조선은 삼한의 땅에서 나온것이니 이를 합쳐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칭하고 년호는 광무(光武)라 한다고 선포했다. 력사상 구한국(舊韓國)이니 한말(韓末)이니 하는 것은 여기에서 온 것이다.    《기둥이 썩고 대들보가 썩어버린 집에다 금칠을 해선 뭘하는가.》    서일은 소식을 듣고 랭소했다.    조선이 이같이 황제국이 됨과 동시에 배일사상을 갖고 독립자유를 부르짖는 독립협회가 활약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를 질시(嫉視)하기로 가장 유명한 군부대신 민영기(閔泳綺)가 이를 박멸하려는 술책으로 홍종우, 길영수, 이기동 등 도배를 사주(使嗾)하여 보부상(褓負商) 패거리를 놓아서 소위 황국협회(皇國協會)라는것을 조직하여 독립협회와 대치케했다. 그러면서 민영기는 이기동, 조병식과 함께 독립협회의 중진 17명을 임금에게 모함(謀陷)하여 투옥하고 살해하려했다. 허나 검사들의 법에 의한 항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니 곤봉을 휘두르며 궐문밖에서 독립협회와 충돌하여 류혈의 란극을 연출하였다. 이로 하여 많은 살상자를 내게되였다. 이에 격분한 민중들은 이기동 등의 주택을 습격하고 소동을 일으켜 임금을 놀라게 만들었다. 임금은 인화문밖에서 독립, 황국 량대표자들을 소집하여 내각갱질(內閣更迭)과 시정유신(施政維新)을 면약(面約)하고 군중들을 해산케하였다.    내무대신 민영환(閔泳煥)은 민권을 존중하며 독립협회를 싸고돌다가 민영기의 공격을 받아 체임되고 기타 구당세력(舊黨勢力)에 반항하거나 혹은 다소라도 자기들 당에 불리하다고 보는 자는 모두 쫓아냈는데 그 배후에는 일본인의 모략도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데는 자유민권의 발전이 일본의 장래정책에 큰 장애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민중의 지지를 받던 독립협회도 동인들이 한사람 두사람씩 해외로 가버리였고 정부당국자들의 방해로 많이 발전을 보지 못하고 여론은 침체되였다. 이로부터 관료배의 전횡만 치성(熾盛)하여 국운(國運)은 날로 더 험악하게되였던것이다.            
73    半島의 血 제1부 17. 댓글:  조회:4013  추천:0  2012-09-16
       17.      계절은 드팀없이 찾아와 새해ㅡ 1897년도의 단오가 되었다. 산야에 록음이 우거지고 새들이 우짖었다. 하늘이 유달리 맑고 좋은날씨였다. 여기 북방의 함경도는 봄파종을 다 끝내고 맞이하는 천중가절(天中佳節)이라 다들 시름놓고 이 명절을 즐겁게 쇠려했다.     처녀들과 젊은 각시들은 식전부터 창포탕(菖蒲湯)을 만든다 창포꽂이(菖蒲簪)를 만든다 분주스레 돌았다. 창포를 캐다가 그 잎을 물에 넣어 끓여서 머리를 감으면 머리숱이 많아진다나, 창포뿌리를 깎아서 비녀를 만들어 머리에 꽂으면 머리가 창포같이 잘 자란다나, 그렇다고 창포같은 머리태라는 이야기까지 생겼다나.    채희연이는 기학(夔學)이가 깎아 만든 창포비녀 량 끝에 연지칠을 했다. 그러면서 기학이보고 왜 글자는 아니새겼는가고 했다.   《오, 그렇지! 이것봐라, 내가 그만 깜빡!...》    기학이는 벌씬 웃고나서 다시받아 거기에다 수복(壽福)이라 두 글자까지 곱게 새겼다. 그러고나서 그것을 정히 희연의 머리에다 꽂아주었다.    채희연의 풍염한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여났다. 무르익은 홍시감이랄가, 그 세월에 녀자나이 16살을 넘기면 과년이라 남의 말밥에 오르기 첩경이였다. 하건만 그따위 비난같은 소리는 귓등으로 넘기면서 지금은 오로지 장차 남편될 사내의 불타는 학구욕부터 원만히 풀어주자는 희연인지라, 제 욕구는 내내 가슴심처에 묻어 놓고 감내하는 약혼녀인지라 그 모습이 오늘따라 별스레 아름답고 참신해보였다.    실로 간단치 않았다! 희연이는 20살돼여야 결혼하리라는 기학의 결심을 믿어주면서 지금 다소곳이 따르고있는 것이다.    기학의 큰할머니는 이해에도 명절뵘으로 맛이 향긋한 쑥떡을 해서는 장차 손부(孫婦)될 희연이가 오면 먹게 따로챙겨놓으면서 넌지시 말을 걸어오는것이였다.    《넌 식전에 어디가서 그리두 오래있었냐?》    《창포캐러 앞개울에 갔다왔어요. 》     기학이는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알려주었다.    《얘야, 이 할미가 어느때까지 기다려야하니? 가깝하구나.》    《손부맞이 늦어서요?...할머니, 고마운 할머니! 네해만 더 기다려요, 그러면야 세상 제일 착하고 고마운 할머니가 되시죠.!》    《그만해라, 그눔의 고맙다는 말대접에 상다리부러질라!》     큰할머니는 눈을 흘기고나서 웃었다.     기학이도 따라 씽긋웃었다.     매양그러듯 이날아침도 세 식솔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아침을 치렀다.     올단오절도 이왕년과 마찬가지였다.     마을동쪽 벙퍼짐한 모래둔덕의 아름드리 느티나무에 그네를 매놓았고 그 가까이에 씨름터를 잡았다. 올해도 북쪽강과 남쪽강사이의 안농, 농포, 안원 세 마을은 중간에 위치한 금희동에 모여 함께 명절을 쇠기로 했다.    상추이슬로 분바르고 창포궁궁이를 머리에 꽂고 저마다 명절차림을 곱게 한 꽃같은 처녀들과 젊은 아낙네들이 그네터를 찾아간다. 시골명절이 더 즐겁더라고 소문이 나서 저 먼 경원(鏡源)서까지 모여드는데 부중의 밥술이나 먹는 집 자제들, 한량들, 왈짜들, 건달들이 술병을 차고 왔다.    여러마을에서 모여드니 이해따라 그 수가 천이 넘는지라 조용하던 동네가 갑자기 흥성흥성 환락에 잠기였다. 처녀와 젊은각시들이 그네시합을 하고 젊은 남성들은 씨름재간을 비기였다. 점심먹고는 예나다름없이 농악이 울리자 오락판이 벌어졌다. 노래에다 탈춤도 추고 막춤도 쳤다. 저저마다 맘껏 장끼를 부렸다. 심정이 같았다. 모두들 이 하루를 기껏 즐겨보자고 했다.    한데 경원서 온 젊은녀석 셋이 술이 거나해갖고 히히락락 흥청거리면서 꼴사납게 놀아 남의 기분을 잡쳐놓았다. 그만해도 자기들은 군소재지에서 산다는 턱을 대고 마치 서울에서 내려온 량반인양 거드름을 피우는것이였다. 아무튼 보고 들을데라곤 더 없을테니 너희들 시골뜨기가 시세를 알면 얼마알고 따르면 얼마나 따를가 하고 얕잡아보는 것 같았다.    《이거 한 대 피겠나?》     기학의 또래나됐을가, 셋중에 제일 어려보이는데다 가르마가 금을 쪽 그으것 같이 하이칼라를 한 애가 새하얀 와이샤쯔의 웃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더니 궐련 한 대를 쏙 뽑아 뿌리는데 그것이 이쪽의 가슴에 맞아 곤두박질했다.    《.......》    《헤헤... 넌 담배필줄도 모르는 선비로구나. 술은 먹을줄을아냐?》    《........》    《보니께 담배도 술도 깜깜이니 진짜 시골뜨기구나, 그렇지?》     서기학은 밸이 꼬여났다. 너같은 시골뜨기가 궐연맛이나 봤겠냐며 없수히 보고 너덜대는게 눈꼴시여 상판을 한 대 우려주고싶은것을 겨우참았다.    《야야, 너 당달봉사 아니냐? 대체 누구관데 총명하게 놀잖구 그렇게 해망쩍어, 엉?》     기호가 보다못해 성을 발칵냈다. 그는 이 자리에 성묵이가 있으면 언녕 주먹이 나갔을거라면서 그보고 다시는 짓거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저쪽 셋중의 젊은이 하나가 누구와 물어 알아본 모양이다.    《기학이, 기동이라?!....아무렴 개천에서 용날가?.... 사람웃긴다, 가자!》     저쪽으로부터 빈정거림이 날려와서 그것을 잡아들은 기학은 낯이 화끈해났다. 마치 고추물에 익는것만같았다. 내 이름이 뭐 저같이 못난 녀석들이 씹으라는건가 생각하니 심한 모멸감이 일어 당장 애명을 버리기로 작심하고 제일쓰기 쉬운 일(一)을 골랐다. 그러고는 이제부터는 자기를 서일(徐一)이라 부르라했다. 그의 이름은 이렇게 고쳐진 것이다.       5월 한달은 빨리도 갔다. 단오절의 기분이 아직 여운을 끌고있는데 6월을 잡아서는 뜻밖에도 강타가 내려졌다. 전국 각처에 사상 보기드믄 큰 우박이 쏟아부은 것이다. 그로 인하여 농작물은 물론 가축마저도 큰 해를 입게되였다. 하늘이 어쩌면 이리도 무정하고 혹독할가! 그야말로 헐수할수 없이 꼼짝못하고 당하는 천재(天災)였다. 그러한즉 단오절에 부른 경양가를 이제는 꿈에서나 불러볼런지.    《곡식이 결딴났구나!》     기학의 큰할아버지 서장록은 다 돼먹은 작황을 념려하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야 있겠지요. 손놓고 절망마시고 방도를 찾아봅시다. 생로는 찾는 사람에게 나지는거랍니다!》     기학은 위안의 말로 싸늘해진 그의 가슴을 차분히 덥혀주고싶었다.    《네 말이 옳은 것 같구나. 이렇다구 맥을 버려서야 되겠냐.》     할아버니는 과연 절망을 버리고 생로를 찾으러 함흥으로 갔다. 그는 얼마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장사를 하는 동생의 알선으로 한 어물전에 들어가 월급을 받고 일을 하게되였다. 그의 동생인즉 성함(姓銜)이 서장은(徐長恩)인데 서일의 둘째할아버지였다.    《한해만 나가 고생해주슈, 가정일은 념려말고요.》     큰할머니가 벌이를 떠나는 제 남편과 한 말이였다.     이런차 건강이 좋지 않은 김노규(金魯奎)선생이 또 드러누웠다. 병이 고황에 든건 아니지만 오랜 피로로 하여 허약해진 몸니 다시춰서자면 시일이 걸릴것 같기에 최풍헌이 서일을 찾아왔던 것이다.     《어쩌면 좋겠냐, 학교가 문을 닫고 무작정 휴학할수야 없잖으냐. 듣자니 넌 주역을 남먼저 다 뗏다더구나. 허니까 너야 그만하면 소학은 마친 셈이 되잖겠니. 학교를 한해만 네가 또 맡아다구. 너야 그러구서 더 높이 상급학교를 가도 될게 아니냐.》     그가 하는 말이였다.     서일은 동장어른이 찾아와 이같이 사정하니 밀어버릴수도 거절할 수도 없어서 김노규선생몸이 춰설때 까지 마을의 학교를 맡게되였다.     서일은 우선 친구 박기호(朴基浩)를 초빙하여 교사로 쓰면서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에 앞어 경원(鏡源)에 있는 이동호군수(李東鎬郡守)가 언제부터 서일이 맘들어 마을의 소학에서 한학을 다 배우고는 어디던 상급학교를 더 다니고는 곧 돌아와 제 고향 경원(鏡源)의 중학(中學)을 맡아 인재를 배양해내달라고 하니 그러마고 쾌히 대답한바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일은 노규선생(魯奎先生)을  대신해 우선 제가 나서 자란 마을의 학생들을 얼마간 맡아 가르치리라 맘을 먹은 것이다. 그와 기호는 일후 상급학교를 가도 같이가고 졸업해서는 경원(경원)으로 가도 같이 가기로 어느날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았던 거다. 공부를 해도 같이하고 글을 가르쳐도 같이가르치고 이사를 해도 같이하자고 깍지걸이를 한 그들이였다.      한편 집이 워낙 경성(鏡城)에 있는 성묵이는 한해먼저 그곳에 세워진 어느 중등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했고 다른 한사람, 개구쟁이 소시적부터 친구였던, 남보다 장가를 일찍가 자식까지 본 최삼용(崔三龍)이는 공부고 난장이고 싹 다 집어치우고는 돈을 벌어 잘살보리라면서 장사길에 나선것던 이다.      아직 의병들이 부분적으로 남아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말끔히  물러나기 전에는 손에 잡은 총을 놓지 않겠노라 맹세했다. 그런다고 관군은 토벌대를 무어 그들을 기여코 소탕해버리겠다면서 눈에 쌍불을 켜고 뒤쫓는 판이였다.    《대체 무슨 리유로 의병을 그냥 란적으로 몰고 토벌을 한단말인가?》    기호가 상기된 얼굴로 내뱉었다.    서일은 그도 자기처럼 격분하는것을 보면서 이것은 직접 국왕을 찾아 배알하고 론계(論啓)해야 할 문제라 했다. 하지만 그건 천부당만부당 한 일, 그렇게는 할 수는 없었다. 서울에 올라간다해도 일개 비천한 상놈의 자식이요 무명인인 그들을 누가 입궐이나시켜주랴!    남의 공사관에서 겯방살이를 하던 국왕 고종은 올 2월 20일에야 비로서 370여일에 걸치는 피난생활을 결속짖고 경운궁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느날 독립신문(獨立新聞)은 첫면에다 고종이 환궁했다는 소식을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많은 사람이 왕이 궁전으로 되돌아온 것을 기뻐하면서 지어는 일대의 희사로 여기기까지했지만 서일은 생각이 그렇지를 않았다. 그는 신문을 보니 외려 마음이 격해지는지라 한마디 내뱉었던 것이다.    《돌아올건 뭔가, 아예 그냥 거기 숨어 지내다가 운명하시지. 제 한 목숨을 잃을까봐 수치도 모르고 남의 공관에 숨어다니며 사는 저런주제에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면 얼마나 생각하고 걱정하면 얼마나 걱정할가, 허깨같은 물건짝!》    아닌게아니라 능력없는 국왕은 차라리 없기만도 못했다. 서일은 내심적으로 의병을 동정하면서 국왕에 대해서는 실망하고 혐오한지 오냈다. 날이갈수록 그에 대한 회의와 불만은 더 쌓이고 쌓여서 그것이 어느덧 증오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러던차 하루는 그의 손을 비는 일이 스스로 닥치였다.    한낮 내내 구질구질 내리던 늦여름장마비가 멎으면서 서쪽하늘이 건득 들리기 시작하는 저녁켠이였다. 30여명의 괴한이 홀연 금동리에 나타났다. 나이는 다들 젊으련만 모양새가 거칠어져서 대중키 어려웠다. 차림새를 보니 거개가 동저고리바람에 미투리를 신었는데 손에다는 화승대를 하나씩 들었다. 분명 일반백성은 아니였다. 내내 정부군에 추격을 받다가 두만강을 건너가자고 이곳까지 밀려 온 의병이였다. 그들은 마을에 들어와서도 아무집에나 허투로 들지 않고 먼저 학교를 찾았다. 마침 학생들이 집으로 다 가서 없고 서일과 박기호만 남아 래일의 교학을 위해 비과를 하고있는 중이였다.    《말 좀 물어보자. 너네 여기 훈장분 어디메 계시냐?》     서일보다 나이가 열 몇살을 더 먹었을 낯이 강파르게 생긴 사나이가 이쪽의 둘을 소학생으로 보았던지 무엄스레 물어왔다.    《선생은 납니다. 무슨일인데 그럽니까?》     서일은 고개를 번쩍들어 그를 여겨보았다.    《네가 선생이라?!...》    《그렇습니다. 이 학교의 교책입니다.》     기호가 대방이 어둑거둑 반신반의하는 것을 보자 알려주었다.    《오, 그래!?....》     초면의 사나이는 낯에 놀래는 빛을 띄면서 서일을 다시여겨본다. 자기를 대해주고 있는 그가 나이는 퍽 어려서 아직 스므살미만일 것 같지만 손님을 대함이 정중하고 어른스러운지라 미안해하면서 어투를 바꾸었다.    《이거 그만 실례했구만. 용서하시오. 내 이름은 이홍래립니다! 》      《대체 무슨일로 찾는지?...》    《보다싶이 모두가 녹초루됐는데 하루밤만 여기서 쉬어 가게 허락해줄수 없겠는지해서 내가....》    분명 먼길에 굶고 지친 몸들이라 주인이 거절하는 기색이 아니니 모두들 속털린 자루마냥 스스로 주저앉고 쓰러진다. 목석이 아니고 사람이면야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으랴! 서일은 그 모양을 보니 걷잡기 어려운 연민의 정이 가슴밑바닥으로부터 올리밀었다.    이시각 그는 자기가 언젠가 손수 베껴둔 고종의 애통서가 상기됐던것이다.             결국 보면 지금의 의병역시 임금의 그 애통서를 받들어 제성거의(齊聲擧義)한게 아닐가. 그런데도 임금은 왜서 의병을 그여의 잡자는가?...    《지쳤어, 대단히 지쳤어! 저 사람들을 우선 저녁부터 먹여야겠구나!》     서일은는 박기호와 귀속말로 속삭였다.    《글쎄 어쩌면 좋겠냐?》     기호역시 걱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자. 내 곧 최로인을 찾아가마. 사실을 반영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안그렇니? 살던 죽던 우리 금희동이 당하고 받아야 할 일이니 동장이 의례 알아야 할것이다. 꼭 알아야지. 알아야 하구말구. 그래서 그가 나서야 한다. 안나서면 나서도록 만들어야 한다.... 저 모양들을 좀 보거라. 우리 사람인데 굶겨 보낼순 없잖아, 절대루!》    서일은 이날 처음 공개적으로 의병을《우리 사람》이라 불렀다.    정부가 의병을 비호하는건《죄》라고 통고를 내렸고 그 통고를 무시하고 거역하면 란신(亂臣)으로 다스리라지만 서일은 이젠 현정부(現政府)의 그따위 위협공갈은 무섭지도않았다. 그는 그따위건 꿈에 네뚜리로 알고 쓰거워했다. 이민위천(以民爲天)이라ㅡ 백성으로 하늘을 삼는다 하여 자고로 덕성이 있는 임금들은 모두 백성을 친자식처럼 아낀 것이다. 한데 아끼기는 새려 역적(逆賊)도 아닌 의로운 제 자식들을 잡자고 드는데야 그 천자(天子)의 왕도(王道)를 운운해서는 뭘하랴. 혼암(昏暗)의 세계로 변해버린 조선은 멸망에로 내닫고 있었다!      서일은 말한대로 최풍헌을 찾아갔다. 최풍헌도 마을에 의병이 들어온 것을 벌써 알고있으면서 어떻게 해얄지 몰라 한창 속을 끓이고있는 중이였다.   《한가지 상론할 일 있어서 왔습니다.》    최풍헌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면서 구름장이 덮인 제 얼굴을 두사람에게 보이였다.   《너희들도 알다싶히 우리 금동리는 엽때껏 조용무사했네라다, 헌데 이제는 안그렇겠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을고? 》    얼굴에 구름장이 덮인 최풍헌은 턱수염을 당장 뽑아버리기라도 할 것 처럼 쥐여 탈면서 난색을 가득지였다.    그의 말과 같이 사실 여기는 여태껏 조용한 축이였다. 언젠가 한번 가짜의병이 와갖고 곱지 않은 짓을 피우고 간적이 있어도 경원군수의 말과 같이 민란이 한번도 일어나지를 않았거니와 도적떼고 달려든적이 없었으니 거의 무풍지대나다름없었던 것이다. 한데 오늘은 정부군의 추격을 받는 의병들이 들어 온 것이다.   《너 봐라. 내쫓을수도 받아줄수도, 재워줄수도 아니재워줄소도 없으니 량손에 떡쥔게로구나, 어쨌으면 좋겠냐? 가자니 태산이요 돌아서자니 숭산이라구 이런걸보고 하는 말이 아니겠냐. 호미난방이로구나. 어쨌으면 좋을고?》   《거야 아주 간단하지요. 말하랍니까?》   《말해라.》   《우린 그들이 잠을 자게해야합니다. 우선먼저 주린 배부터 채우게 하고. 그들은 란신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 사람입니다. 왜병도 아니고 원쑤도 아닌 우리편, 우리 사람이란말입니다. 그런걸 우리가 왜서 미워하고 내쫓는단말입니까?》    서일은 흥분했다. 그러나 그는 차분한 음성으로 의병은 나라운명을 걱정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치고 일본군을 몰아내자고 싸워 온 사람들이요 정부가 선전하는것 처럼 역적의 무리는 절대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 정녕 나라일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백성이라면 이럴 때 올바르게 처신을 해야한다, 그들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포옹해야한다고 했다.    《네 말이 옳기는옳은 것 같은데.... 갑을간 오라구해라. 내 좀 그네들허구 물어볼 말이 있네라.》    최풍헌의 태도였다.    이쯤이면 서일의 주장에 절반은 응하는 셈인것 같은데 물어보겠다니 뭘 물어본단말인가?.... 아무튼 그가 시키는대로 해야했다. 하여 서일은 자기를 이홍래라 자아소개를 했던 그 청년을 데릴러 학교로 달려갔다.    이홍래는 의병들이 여기까지 오면서 겪은 가지가지의 일들을 박기호앞에서 한창 구술하고있는 중이였다.    서일은 이홍래를 데리고 최풍헌의 집으로 다시갔다.   《임자가 두령인가?》    최풍헌은 이홍래를 대하자 그의 신원부터 알려했다.   《아니우다. 난 그 의병대의 의병장 아니우다.》    대방의 대답이 뜻밖인지라 최풍헌도, 박기호도, 서일도 적이 놀랬다.   《뭐라! 그러믄 그래 뭔가?》   《그네들을 안전하게 월경시켜주자구 나선사람이지요.》   《그렇다?.... 건 왜서?》   《그래줘야합니다. 그래서 나선겁니다.》   《싱거운짓두 하네.》   《아니, 싱거운짓이라니요? 웬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니지요. 이건 싱거운짓이 아니지요. 잘 생각해보시요. 이게 과연 싱거운짓으루 될가요?》   《건 그렇구. 그 사람들 싸우다말구 도망은 왜 치는거유? 비겁하게서리 남의 나라 땅으루는 왜 도망을 하는가멀이요?》   《아니 이런! 도망이라니요? 원. 누가 도망칩니까? 그들이요?.... 아니지요. 절대 그런게 아니지요. 그들은 지금 전략적이전을 하고있는겁니다. 보셨지만 그래서 총들을 갖구서 떠나는게 아닙니까. 만주에 건너가 거기서 기회를 봐 재기를 하자는겁니다. 두고보시오만 그들은 꼭 권토중래할겁니다!》    변명이 아니였다. 사정부득하여 조국땅을 떠나야만 하는 의병들이였다. 이홍래의 말은 그들의 울분을 대변해서 뿜어내는 대답이였다. 들어보니 이홍래역시 함경도치였는데 의병도 의병장도 아니면서 그들의 월경을 도와나서서 위험을 불구하는 그 행위가 기특하고 거룩했다. 그것은 보통사람은 할수없는 장거라 생각되였다. 최풍헌은 이제야 깨달게 되였노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위험을 용감히 받아 안고 적극나섰다.    그는 우선 마을의 장년과 부녀들을 긴급집합시켜놓고 의병을 절대 함부로 역적이니 란적이니 욕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왜놈을 몰아내기위해 목숨걸고 싸워온 그들은 의로운 우리 사람이라면서 지금 당하고있는 처지를 말했다. 서일도 기호도 회의석에 나서서 말했다. 임금이 결국 혀가 두가닥이여서 이랬다 저랬다 인민의 의사를 위배하고있지만 우리는 각성하여 제 사람을 가려볼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선전이 과연 옳다고 여겨 마을에 들어온 의병들을 적대시하지 않았거니와 심히 동정하면서 동장 최풍헌이 하라는대로 한 사람씩 제 집에 데려다가 제 집식구처럼 배부르게 먹여주고 잠도 재웠다.     서일은 이홍래와 다른 의병 둘을 자기네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날밤을 기호도 함께보냈다. 저녁을 먹고나서 그들 다섯은 의병투쟁이 저락된데 대해서 각자 자기의 견해를 말했다. 우선 무기부터 글러먹었다. 저따위 총을 갖구서야 신식무장을 한 적과 싸워 목숨이나 잃었지 무엇을 하겠느냐 그거였다.    사실 그러했다.    반일의병대의 무장장비에서 기본무기는 화승총이였다. 화승총은 16세기 20년대에 발명된 중세기적인 총으로서 화승대 또는 화승총으로 불리워왔다. 이 총은 총구멍으로부터 류황  혹은 목탄가루들을 섞어서 만든 흑색화약과 둥근 탄알을 재우고 총신의 뒤쪽의 화약실옆벽에 뚫어진 불구멍으로부터 불심지에 불을 달아 사격하게 되어있다. 불심지는 참대, 젓나무, 칡껍질 등의 섬유를 보드랍게 분쇄한 흙색화약과 섞어서 꼰 끈이다.    화승총으로 무장한 성원은 흑색화약통과 탄약통을 휴대해야 하며 불심지를 허리에 감거나 어깨에 메고 불을 일으키는 부시와 부시깃을 가지고 다니다가 화승총을 쏠 때 사용하여야 한다. 이 총의 큰 약점은 사거리가 멀지 못할뿐만아니라 습기가 차거나 비가 오면 흑색화약, 특히는 화승이 젖고 부시를 칠수 없어 사격할 수 없는것이다. 때문에 비가 올 때에는 의병들이 아무리 많은 화승총을 가지고있더라도 총을 쏠수 없으니 무용지물이였다.     많은 의병들이 이런 중세기의 락후한 무기마저도 없어서 창과 칼, 활, 곤봉과 같은 원시적인 무기를 들고 싸워야했다.    의병의 이같은 장비는 일본군과 근본 비길수도 없었다. 일본군의 기본은 보병이였는데 그를 엄호한 것은 기병과 포병, 공병이였으며 이들이 휴대한 무기는 모두 뢰관식 신식무기였던 것이다.    게다가 의병장들 중 많은이들이 군사를 모르거나 지휘능력이 부족하여 능히 이길수 있는 싸움도 패배로 끝을 보는 현상이 많았다. 그리고 집체의 응집력을 깨버리는 지휘성원들의 파벌싸움.... 특히는 지난해의 3월 1일 고종이 의병들을 해산하라고 내린 명령문이 충군충의(忠君忠義)에 물젖어있는 유생들의 사상과 의지를 동요시켜 허물어지게 만든통에 많은 의병단체들이 해산되고만 것이다.     이홍래가 군사지식이 충분치 못한 의병장이 어찌 싸움을 잘 할수 있겠느냐며 혀를 찼다. 이에 묵묵히 듣고만있던 서일이 한마디 내비치였다.    《맞습니다. 엿다릴줄도 모르면서 엿을 다린다고 덤벼들면야 감만 못쓰게 버리고말지요. 의병장이면 총보다 먼저 병법부터 알아둬야 할게 아니겠습니까. 개전(開戰)전 싸워서 얼마든지 이길수 있는 것 같으면 그건 계획이 주밀하고 승리할 조건이 충분함을 말함이요, 개전전에 싸워도 이길 것 같지 않으면 그건 계획이 주밀치 못하고 승리할 조건이 모자람을 말하는 겁니다. 계획이 주밀하고 조건이 구비됐다면 싸워서 이길것이요, 계획이 주밀치 못하고 조건도 안되면 싸워도 이기지 못할건데 더구나 계획도 조건도 없으면야 어떻게 될가요?.... 이런걸 잘 알아둬야 승부결과도 뚜렸해질겁니다. 안그렇습니까?》    이홍래는 금시 넋을 빼운 사람모양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일개 소학선생이 병법을 얼음판에 표주박밀 듯 말하니 불가사이한 일 같았다.    기호가 서일은 병법에 각별한 흥취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 방면에 지식을 쌓고있노라 알려주었다. 아, 그런가 하면서 다른의병 둘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은 화제를 돌려 의병장 유린석이 지난해 5월 25일에 제천전투에서 실패하자 력량을 재편성한다면서 투쟁을 중단한 일과 8월 28일 초산 아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땅으로 가버린 일을 놓고 운운하면서 그 행동이 다른 의병단체에 준 영향이 적지 않다고 했다.    《김백선이 참 잘 싸웠지.》    《내 보겐 그가 주장한게 맞는 것 같다.》    《그래두 칼부림이야 말아야지.》    《아무튼 아까운 사람을 죽였어.》     서일과 박기호는 제천의병이 어떻소, 강릉의병이 어떻소, 어디의병이 어떻소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김백선이란 사람이 평민의병장으로서 싸움에 용감하고 공도 많이 세웠다는 얘기를 들은적도 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직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좀 얘기해줄수 없는가 하니 이홍래가 유인석이 그를 사형에 처한 리유를 간단히 알려주었다.    그것은 응당 발생하지 말았어야 할 하나의 영향이 큰 비극이였다.    평민출신의 김백선은 제천반일의병대의 선봉장으로서 전투마다 특출한 공훈을 세워 의병들속에서 일정한 위신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의병지휘층은 김백선이 평민이라는 봉건적 관념에서 그의 활동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김백선은 충주전투후 가흥에서 일본수비대를 추격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본군에 요청한 원군이 오지 않아 끝내 일본군을 전멸시키지 못했다. 전투후 김백선은 원군을 보내주지 않은 유생출신 중군장인 안승우를 과격하게 칼부림을 하면서 그에게 책임추궁을 하였다. 유린석은 바로 이 사건을 군사규률위반으로 취급하여 김백선을 사형에 처하였다. 평민이 량반에게 버릇없이 구는것은 그 무엇보다도 참을수 없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김백선이 유린석에게 처형된후부터 정세가 참혹하여졌으며 부대의 위용이 다시 춰서지 못하였는바 그 뒤 안승우가 장기렴참령과 제천읍에서 싸워 패해서 죽은후 의병투쟁은 결국 다시 일어날 여지가 없게되였던 것이다.    서일은 그같이 열화세차던 반일의병운동이 갑작스레 중단된 요인이 무엇이냐를 이제야 똑똑히 알게되였다.    이틑날 날샐녘에 금동리에서 하루밤을 지낸 30여명 의병은 두만강을 무사히 건너 만주로 갔다. 서일이 박기학이와 같이 물길을 서준것이다.    갈라질 때 리홍래가 놓았던 손을 다시잡으면서 수다스레 말했다.    《이 멍청이를 보지, 내가 여적지 교장의 성함이 뭔지를 딱히 기억안하구 가자네.》    이에 서일은 다시알려주었다.    《난 서일이라구합니다. 애명은 기학이였구요.》    《그런가. 서일이라! 거 기억하기도 쉽군! 일후 어쩌면 다시만날수도 있겠는데 잘 기억해둬야지.》            《그럽시다. 다시만납시다. 출생지가 내처럼 함경도 사람. 전에 시종무관질을 했구 지금은 월경의병장노릇을 하고있는 이홍래라했지요?》    《맞아! 역시 총명한 사람이 다르긴 다르군!》    《잘들가시오, 그리고 다시건너와 싸워주시오!》     서일은 작별하면서 부탁했다.    《서일이라! 애명은 기학이라!》     리홍래는 속으로 곱씹으면서 두만강을 건넜다.
72    半島의 血 제1부 16. 댓글:  조회:4103  추천:0  2012-09-16
  16.          잠을 깨려해도 되지 않는다. 온 몸이 녹작지근하면서 맥골을 쓸수 없다. 반수반성 상태에서 고무라는 멍청스러운 할망구가 해여진 자루속의 쌀을 길바닥에 흘리듯이 잠에 젖은 소리를 입밖으로 중얼댔다.    《내가....왜....이모양이 되나?....너, 너무....지쳤어!....》     오랜 정신적인 긴장이 이제는 육체마저 물젖은 솜같이 돼게 만들고 있었다.     요즘은 각 곳에서 올라오는 보고마다 골치거리였다. 온 조선땅에서 반일감정이 태풍같이 몰아치면서 고조되고 있었다. 말그대로 끓는 가마속같은데 이제 어느때 뼈도 못추리게 삶아질지 모를일이였다. 기꾸지 구마다로, 와까기 류히찌, 니사까와 견지, 오하다 쥰마.... 려주에서 지난 2월 9일 하루 의병의 손에 매맞아 죽은것만도 13명. 조선사람들은 지금 일본사람은 보이기만 하면 죽이려고 든다. 형편이 이렇다고 돌아갈수도 없었다. 패배자요 도주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도장이 등에 찍히는 날이면 그 자신은 물론 후대까지도 헤여나지 못할 오욕의 질탕속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정부가 직무를 철소시키기 전까지는 죽던 살던 여기서 뻗쳐내야 했다.     탁상우에 어제밤 그가 읽어보고 내친 격문 한장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강릉반일의병대에서 낸 삼가 북도 여러 고을에 호소한다라는 격문이였다.  고무라는 눈길이 거기에 닿이는 순간 온 몸이 오싹해남을 느꼈다.     이 격문은 호소력이 강하여 상당한 효력을 내고 있었다.     올해의 1월 의주지방에서는 조상학이 나라일을 근심하는 백성들로 의병대를 무어 의주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강계, 벽동, 위원, 초산지방에서도 김리언의 지휘밑에 사냥을 업으로 하던 포수들이 중심이 되여 반일의병대를 조직하였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주변일대는 물론 지어 압록강건너편에 살고있는 동포들에게 까지 알려져 일본사람이 미워서 고향을 등지고 만주땅으로 건너간 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하여 그들중 총을 가진 포수들은 강계지방 의병들을 따라 나서서 그 력량은 급속히 늘어났다.     강계의병대는 강계를 습격한 다음 평양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허나 고산진을 공격한 다음 강계로 진격하다가 실패했고 의병장 김리언이 불행히도 정부군에 붙잡혀 학살을 당하게 되는통에 더 확대하지 못하고있다.            《포수들 까지 임금의 령을 개방귀만큼이나 여기니 원. 김리언을 붙잡아 죽이기를 잘했지. 안그랬으면 이눔의 나라는 정말 왕도가 없는 나라로 되고말 것이다. 》     고종은 자기의 통치지위가 의병들에 의하여 뒤집어질까봐 겁나 의병이 흥기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고종이 회유문을 수차나 내린 리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있는 고무라는 혼자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일본공사관의 비밀서류보관고에는 조선에서 지금 일어나고있는 의병정황과 그를 탄압하기위해 조선정부와 일본이 조치를 취한 상황자료들이 점점  많이 쌓여지고 있었다. 안동지방의 반일의병활동과 그에 대처한 상황기록만 봐도.              1월 23일 부산령사 가또가 고무라에게 보낸 보고내용이다.                         1월 24일 인천 다까이병참에서 고무라에게 보낸 두통의 보고내용이다.         안동지방의 의병을 진압하자고 보니 그를 토벌할 실제적인 병력이 없었다. 그래서 아직 아관파천 전이였던 고종은 왕궁수위를 담당하였던  진위대 1개중대를 안동지방으로 보냈던 것이다.     1월 30일 토벌대가 온다는 정보에 접한 의병들은 일단 례안지방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안동지방에 온 토벌대는 의병들에게 위압되여 감히 접전을 못했다. 2월 20일에 하는수 없이 토벌대를 철수시켰다. 그것은 2월 17일 충주가 제천의병들에게 점령되여 거기에 토벌력량을 증가시켜야했기때문이기도했다.     이 틈을 타서 의병들은 다시 안동에 모여들었다. 겁을 집어먹은 안동관찰사 김석중은 문경지방으로 도망쳤으나 그곳 의병들에게 체포되여 처단되고말았다.     이 일대에는 7,000~8,000여명의 의병들이 모여있었는데 그들은 적측이 서로 련계를 맺지 못하게 하느라 일련의 파괴활동을 했다.    충청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월 10일 부산 제1대대장 이즈노소좌가 고무라에게 보낸 보고였다.      3월 29일 태봉지방에서 의병은 정부군과 9시간가량 치렬한 접전을 치루고나서 룡궁지방으로 옮겨갔다.    4월 2일 안동시안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날 의병들은 적이 안동시내에 진입한다는 것을 알고 시주변의 산지대에 진지를 정하였다.                 후비보병 제10련대 제1대대장 야스노가 고무라에게 보낸 보고였다.      이날 의성지방에서도 의병들이 군수를 비롯한 친일관리들을 처단했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는 의병들도 많았고 그들의 투쟁기세도 높았으나 의병지휘자들의 우유부단성으로 하여 투쟁을 보다 넓은 지역에로 넓혀가지 못하였거니와 부산을 공격하기로 설정된 초기의 작전계획을 실현하지 못한채 5월초에 이르러 투쟁은 기본상 끝나고말았다.     충청도지방의 일부 반일의병대도 안동지방의 의병대와 같이 설정된 공격대상지를 향해 진격하지 못하였다.    의병투쟁초기 각지 의병대는 공격대상이 설정되였는데 인천은 충청지방의병들이 공격하기로 되어있었다. 이는 본질상 서울공격을 의미하는 것이였다. 한즉 충청도지방의 의병들은 초기설정에 따라 서울 또는 인천을 공격하여야만 했었다. 그러나 충청도지방 일부 반일의병대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한편 황해도에서도 의병이 일어낫는데 그 의병대의 선두에는 일본과 친일주구를 반대하는 농민폭동자들과 포수가 서고 있었다. 그들의 투쟁중심지는 해주지방이였다. 3월 24일 의병들이 해주를 공격하자 이곳에 있던 군대가 경무관을 처단하고 의병들과 합류하였다. 이 소식이 개성에 알려지자 개성에 있던 군대도 의병에 호응하여 나섰으며 해주를 향하여 떠났다. 그 영향은 삽시에 퍼져가 문화지방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황해도지방의 의병대는 농민폭동자, 포수대를 비롯하여 농민들과 지방군대들로 이루어져 그 전투력이 비교적 강한편이였으나 똑똑한 지휘성원이 없어서 그 전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전라도지방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늦어서 반일의병대가 조직되여 활동하였다. 1860년대에 활동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자인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이 전라도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면서 의병운동을 호소하였는데 호남, 장성 등 13읍이 이에 호응하여 그를 우두머리로 다시금일어났던 것이다.    기우만의 지휘밑에 의병들은 각 지방으로 쳐들어갔다. 라주에서는 참서관 안종수를 비롯한 친일관리들을 붙잡아 처단하였다. 그러나 전라도지방의 의병무장활동은 다른 지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약하였고 얼마가지 않아 투쟁은 식어버리고말았다.    기록들이 보여주다싶이 5월에 들어와서도 반일의병들은 상당한 력량으로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반일의병운동의 전반적 추세는 저조되여가고있었다.            일찍이 2월 8일에 원산령사 우에노 센이찌가 반일의병대의 작전계획을 탐지하여 고무라 공사에게 알린바가 있다. 그의 보고서에 보면 서울은 춘천에서, 인천은 충청도에서, 부산은 경상도와 강원도의 남쪽에서, 원산은 강원도의 반부(강원도북쪽지방의 절반)와 문천북쪽에서 남침을 취하기로 되어있었다. 뚜렷한바 의병대들은 인천, 부산, 원산 등 세 개의 개항장과 서울을 공격목표로 정하고 진격하자는것이였다.    어떤 반일의병장은 서울공격을 중요시하면서 의병이 서울을 공격할 시 각지의 백성들이 일제히 호흥하게 발동해야 한다면서 구체적인 방안으로 첫째는 서울의 동, 서, 남, 북 네 개의 성문에다 일본과 악질관리들의 죄행을 폭로하는 글을 써붙이여 민분과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게 해놓고 공격이 개시되면 놀라지 말고 호응하게 할 것, 둘째는 먼저 남한산성을 장악하며 또한 남도지방에서 서울로 통하는 요지인 수원을 장악하여 서울에 식량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자고 하였다. 1개월만 이같이 하면 내부에서 소란이 일어날것이며 이 기회에 의병이 들이치면 시민들은 들고일어나 합세하여 원한많은 자들을 처단할거라는 것이다. 셋째는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서북3도의 의병들로 하여금 제천의병의 서울공격에 호응해 나서게 하는것이였다. 그것은 서북3도에 의병이 많이 일어나고있을뿐만아니라 그들은 굳세고 용감하기때문이라는거다.            고무라는 목하 반일의병중 제일 강하다는 제천의병대를 충주성에서 몰아버린 일을 다시금 회상했다. 그때 고무라는 대병력을 출동해서 충주성을 공점한 의병과 15일간 치렬한 격전을 해서야 성을 겨우겨우 도루탈환할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3월 3일날이였다.    의병은 일본군과 맛서서 장기전을 할 수 있는 옳은 전술이 없거니와 무장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후퇴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원인이 그것이였다. 의병들에게는 충주성을 방어할수 있는 기묘한 전술이 없었거니와 적측의 포화를 당해낼만한 무장이 갖춰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원인은 의병들과 충주성내 백성들을 먹일만한 축적된 량식이 없었던 그것이였다.    《우리가 식량 운수선을 철통같이 봉쇠하기를 잘했지!》    고무라는 충주성탈환을 자기의 공적으로 여기면서 지금도 다소나마 즐거움과 안위를 느끼곤한다.     그러나 공개적인 대병력출동의 탄압은 할수 없지만 음으로 양으로 정부군과 협력하는 간고하고 피어린 작전은 앞으로도 계속될것이고 대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였다. 이것이 그래 외교관인 내가 할짓이란 말인가? 고무라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제기하고 자신이 대답을 찾는수 밖에 없었다.                 2월 10일 충청북도 가홍주둔 일본 수비대 대장 이스노소좌가 고무라공사에게 보낸 보고였다.      고무라는 경기도지방의 의병들이 서울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남한산성을 먼저 공점할줄을 미처 생각못했다.    의병들이 남한산성을 점령하려고한 것은 첫째로 남한산성을 점령함으로써 서울점령목적을 쉽게 달성해보려는데 있었다. 남한산성은 서울의 동남쪽관문으로서 력대로 중요시해온 성새였다. 남한산성은 서울의 동남쪽 약 60리인 경기도 광주군에 있는 산성이다. 서울에서 광주, 충주를 지나 전라도로 통하는 도로와 수원에서 공주 혹은 청주를 지나 전라도로 통하는 도로를 끼고있는 요새지였다. 때문에 남한산성을 장악하는 것은 서울공격에 매우 유리한 것이다. 둘째로 의병들의 남한산성점령이 군사물자의 해결을 용이하게 해줄수있었다. 왜냐하면 남한산성에는 정부의 주요 군사요충지대였던만큼 이곳에는 군량과 대포, 소총 등 무기와 탄약들이 많이 보관되여있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을 점령하기 위한 전투에는 그와 가까운 지역에서 활동하고있는 려주ㅡ리천반일의병대가 앞장섰다. 의병들은 일본군의 병영을 습격 파괴하였을뿐만아니라 서울, 인천사이를 오고가는 우편물을 빼앗아냈으며 2월중순부터는 야간 운편송달까지 못하게 했다.            한성부의 기록이다.      의병대는 광주지방의 포수 100여명이 가담함으로써 력량이 강화되자 2월 28일에 광주군수를 처단하고 그길로 남한산성을 점령하였다.   《안된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남한산성을 탈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울은 먹히우고말 것이다. 서울이 먹히우면 일본은 조선을 잃고만다.》    고무라는 밤잠도 자지 않고 수하 인원들과 함께 대책을 연구했다.      3월 2일부터 량측간에 치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저녁에도 남한산성에 불길이 솟구쳐오르고 대포소리는 끊지 않았다. 과연 치렬한 전투였다.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의병들의 남한산성방어는 힘겨워졌다. 안성지방에 있던 포수들과 농민폭동군 그리고 부근의 농민 수백명이 남한산성이 위태로움을 보자 60~70명의 희생자를 내면서도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합세하였다.    산성의 의병은 더욱 완강해지고 관군은 수자적으로 약하므로 그들의 식량공급로를 끊을수 없었다.    3월 17일 오후에는 1,200여명 강원도 춘천지방의 반일의병들이 양근을 지나 광주에 이르러 남한산성을 포위하고있는 관군을 공격했다.            이틑날 송파진 혼다대위가 다가이대좌에게 보낸 청시보고였다.      정부군이 일본군에 정식으로 원조를 구한 것이다.    일본군과 관군은 강화도에 있는 관군까지 동원합세, 대부대로 남한산성을 기어히 탈환하려고 총공격을 하였다. 하지만 의병들이 성문을 굳건히 지키고있기에 들어갈수 없어서 그들은 남한산성의 동쪽성벽에 사다리를 걸쳐 놓고 기여들었다. 성안의 의병들은 목숨을 바쳐가면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을 끝내 내놓고말았다.    의병지휘성원의 자리를 차지하고있던 박준영과 김귀성이 의병투쟁을 그만두면 수원류수와 광주류수를 시키겠다는 회유책동에 넘어가 성안으로 기여들려는 일본군과 관군에 문을 열어주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젠 한쉼 쉬게됐구나!》     고무라는 남한산성을 의병들의 손에서 탈환했다는 소식을 듣자 어깨뼈마디에 소리 날 지경 두 팔을 머리우로 높이 뻣치면거 입이 째지도록 긴 하품을 내뿜었다.    허나 시름을 놓을수 있는건 그 한 순간뿐이였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우에노가 환국(還國)하고 원산령사로 새로 부임한 니꾸찌가 서울에 와서 고무라공사를 직접만나 형세보고를 올린것이다.       《요즘 그곳에서는 강릉의병의 활동이 창궐해지고있는 상황입니다. 그자들의 주요공격목표는 원산인바 아직 집접적인 진공은 없습니다만 그 준비사업은 끊지 않은 모양입니다. 학포선평장계선을 차지한 자들은 의병 매인에게 매일 쌀 두되와 엽전 50문씩 준다고 합니다.》   《아니 뭐라! 그들이 배급제를 실시하고있단말인가?!....》    이건 그야말로 거부기등에서 털이 자란다는 소문보다 더 희구한지라 고무라는 보고를 받으면서 일면 놀램을 감추지 못했다.   《바로 그런가봅니다. 그자들이 그같이 공급하는 쌀과 돈은 군량도감 혹은 전도감이 당지 친일량반들의 재물을 몰수한 것이라고 합니다.》   《허, 배포좋은 놈들이다!》    고무라는 어이없어 턱을 치켜 천장을 보기도 하고 속털린 사람모양으로 허구푼 웃음을 웃기도했다.    《그자들이 18일에 고성에 들어와서는 하면서 홍종현 군수를 살해하구는 장전지방으로 몰려들어 우리 어민들을...》   《어민들을 어쨌다는건가?》   《여럿이나 목숨잃었습니다. 한데 아직 그 시체를 못찾아와서...》    니꾸찌령사는 거기에 그냥 벗치고있다가는 전멸될 위험성이 있는지라 죽은 자의 시체를 림시 묻어놓고 모두 장전에서 피난을 했다는 것, 림시 묻어놓은 시체를 날라가자고 원산에 정박해 있던 경비함 를 여러차례 장전지방에 보냈으나 의병의 활동으로 실어갈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대로 보고했다.    장전지방은 강릉이북, 원산이남 동해안 지방의 포구가운데서 어업중심지의 하나로서 정어리, 명태, 청어, 방어 등의 명산지로 널리 알려져있다. 그래서 이곳에는 일본어민과 일본인 어물상들이 적잖게 몰려든것인데 그들이 지금 변을 당하고있다는것이다.   《음ㅡ》    고무라도 어찌했으면 좋을지 방도가 나지 않아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토해냈다.    원산은 1879년에 개항이 된 항구도시다. 일본은 부산, 인천과 마찬가지로 이 항구의 문을 여느라 맥을 적잖게 뺐던것이다. 지금 시내에는 일본인 거주자가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본정부는 제 나라의 교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대고 령사관까지 설치해놓은 것이다. 말이 개항(開港)이지 실제상 원산은 일본이 조선동해안연선과 북조선일대의 어업자원을 략탈하는 중심역할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원산공격을 준비하던 강릉반일의병대에서는 원산거리의 내막을 잘 아는 통천사람 3명을 뽑아 그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 원산에 들어가 일본사람의 집과 그들이 집중해 살고 있는 거리에 불을 지르도록 획책했다. 그런데 준비부족으로 그 회책은 그만 파탄되고말았다.    의병이 원산으로 들어온다는 정보를 받은 일본은 서울이나 부산에서 처럼 피동에 빠지지 않으려고 강릉의병대에 대해 선제공격을 취했다.    3월 31일, 안변군 선평장에서 량측은 격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의 불의의 선제공격에 맞다든 의병대는 주동권을 잃고 수동에 빠지고말았다. 게다가 날씨마저 결정적으로 불리했다. 눈개비가 마구 내리므로 의병들은 부시를 쳐서 화승에 불을 달수 없어 총을 쏘지 못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일본군은 뢰관식무기인 5련발총을 가지고 계속 사격하면서 달려들었다.    형편이 결정적으로 불리함에도 의병들은 창과 도끼, 칼로 치열한 육박전을 하다가 결국은 퇴각하고말았다. 량측은 모두 사상자를 많이냈다.....        이에 앞서 부산 1등령사 가또가 고무라공사에게 보고서를 보낸것이 있는데 그도 다급한 소리를 했던것이다.               약 둬주일 전인 3월 17일에 보낸것이다.        《폭도들은 혹은 상인처럼 가장하고 혹은 로동자처럼 차리고 각지를 돌아다니고있으며 김해, 구포, 부산 등지는 물론이고 일부분은 일본 거류지에 까지 침입하고 있다.》     이것은 4월 17일에 보낸 보고다.      부산은 1876년 강화조약이후 제일먼저 개항된 항구도시인데 일본인들의 주요출입구 중 하나였다.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은 지금 4,000명에 달했다.    이 지방에서 활동하고있는 주요의병대는 진주와 안동의 의병대로서 그들은 부산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진주의병대는 2월19일에 조직되여 이틑날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그 의병대는 진주관찰사 조병필을 친일관리라며 잡아서 두발을 잘라버렸고 참사관을 잡아 죽이였다. 그 의병대는 관청을 점령하고 무기고에 보관되여있던 무기를 빼앗아 의병들을 무장시키고 진주관청에서 장악하고있던 별포군을 설복하여 저들의 의병대에 망라시켰다. 인원수는 약 1,000명가량.    진주위병대는 4월 10일경부터 부산을 들이치기 위한 준비를 다그쳤다. 그들은 먼저 부산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김해로 진격하였다.    김해를 들이친 의병들은 백성들에게 조세를 과중하게 부담시켜 수탈하는 군수와 세무주사를 친일관료라며 체포하여 처단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이 도주해버린통에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관청을 들이치고 리방, 책방, 례방, 호방 등을 비롯한 아홉을 붙잡아 죽이였다. 군수의 지령에 따라 백성들의 앞에 나타나 행패를 하는 아전이여서 그런다는거다.    4월 11일경에 김해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지만 의병들을 함부로 건드릴수는 없었다.    김해를 장악하고있던 진주의병들은 일본군과 관군이 다가가자 성문을 굳게 닫고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한편 성벽에 올라가 맹렬한 사격을 해서 접근하지도 못하게 했다. 4월 12일 일본군은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김해를 공격했다. 의병대는 지휘부내에 의견불일치가 생겨 패했다. 진주의병은 부산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들이대지도 못하고 실패하고말았다.    일본군과 관군이 합쳐 남한산성을 탈환하기는 했으나 려주ㅡ리천의병성원은 소멸되지 않아 그 대부분이 경기도와 충청도 접경지대로 옮겨 그곳을 활동지대로 만들었다. 그들의 활동은 날이갈수록 더 극성을 띠였다. 일본군이 출동하여 관군을 도와 5월 17일 려주(장호원)에서 의병과 접전이 있었는데 의병은 죽산쪽으로 가서 대오를 보완하고는 20여리구간의 통신선을 끊어버렸다. 뿐만아니라 5월 19일 의병들은 가홍을 습격하여 거기서 이미 끊어놓은 전선을 다시잇는 작업을 하던 일본군인들을 죽이였고 하담부근에서 전주대를 20여개나 뽑아버렸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충주와 가홍사이는 물론 충주와 서울과의 전신력락도 할수없게 되었다.    후비대 제1련대 제1대대장은 5월 20일 고무라공사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리였다.     《하담부근에서 20여리간의 전주대를 뽑아버리고 전선을 끊어버리였으며 하담과 북창의 배를 빼앗아감으로써 배를 다른데서 가져다 쓰지 않으면 아니되였고 림시 교통로를 열었다.》          《제길할! 이놈의 시달림을 내가 어느때까지 받아야 하나?....》    고무라는 하기싫은 공사직에 매여있는 자기가 몸의 기름이 싹 빠지면서 지금 죽음의 지옥에서 헤매고있는것만같았다.    
71    半島의 血 제1부 15. 댓글:  조회:3694  추천:0  2012-09-16
  15.                몸을 떨리게 만든 1895ㅡ을미년! 지겹게 보낸 지난 한해는 그야말로 지옥속의 악몽과도 같은 한해였다. 3월 29일에 동학당란을 일으킨 전봉준을 사형하고나서 7월에 경희루에서 개국기원절 축하연을 열었다. 그때 고종은 아마도 모든 근심을 덜고 만천하를 얻은것만 같은 기분이였으리라.. 그러던것이 8월에는 꿈밖에 일본 랑인들이 궁궐을 침입하여 민비를 시해하는 끔찍한 참변을 당하게되였던것이다. 일본의 조종하에 제3차 김홍집내각이 조직되였고 10월에는 민비의 위호를 회복하고 장사를 지냈다. 임감수, 이도철 등이 국왕을 탈취하려다 잡혀서 사형되였다. 11월도 황황한 나날들이 겹치였다. 전군부협판(前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 등을 왕비살해사건의 하수인이라 하여 사형했다. 그것은 낯가죽이 땅뚜께같은 미우라 고로오가 책임을 회피하느라 얕은 꾀를 쓴것이였다. 정부가 단발령을 강행했다. 17일에는 그날을 개국 505년 1월 1일로 하고 양력을 쓰게했다. 그리고나서 처음으로 기병대를 창설했던것이다.        1896년도 역시 지나간 해와 같이 벽두부터 소란스웠다.     정월에 강원도를 비롯하여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2월에는 일개 국가의 군주라는 왕이 목숨이 무서워서 버젓한 제 궁궐을 놔두고 남의 나라 공관에 와서 곁방살이를 하게되였다. 신세가 이같이 마른 무우오가리같이 오그라들기만 하니 팔자가 사납기가 상가집의 개와 다를바없었다.   《과연 복잡다난한 세월이구나! 이 해는 또 어떻게 보낼고!》    고종의 입에서 나오는건 오로지 한숨과 탄식뿐이였다.    어디면 안전할가?...자기는 개가 무서워 이리를 찾아 온 철없는 아이같음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친일내각은 하루아침에 눈사태처럼무너졌다. 고종은 파천당일로 김병시를 총리대신으로 신내각을 구성하여 그날 호외로 공포하였던 것이다. 전부터 로씨야 공관과 미국 공관에 피신해있던 리완용, 리윤용형제와 안경수 등 친로, 친미파들을 모조리 기용하여 요직을 담당케 했다. 한데 왕이 이모양으로 남의 곁방살이를 하고있으니 내각도 이리로 옮겨와서 로씨야공관은 다름아닌 조선정부로 돼버린상싶었다.    《지금 자칭 이라고 하는 란당들이 도처에 흥행하면서 극성을 부리고있는데 이제 며칠내에 곧 서울로 쳐들어오리라는 소문까지 펴놓아서 민심이 자못 황황합니다. 형세는 이같이 위태롭기만 하니 어서빨리 대책을 세워야할게 아니겠습니까.》    어제밤 고종은 리완용의 이 말을 듣고서 곧 조칙(操飭)을 내리였던 것이다.                   병신 2월 27일                                                                   유생출신의 반일의병장들은 국왕을 신봉하고 봉건왕권(封建王權)을 자기의 정권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국왕은 그들의 존왕, 충군사상은 뿌리가 깊은 것이니 이 조칙을 보고는 마음이 움직여 손에 든 무장을 놓으리라 생각했다....     품속에서 꼼지락거리던 녀인이 다시 잠이 든 것 같자 왕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는 녀인을 다시금 내려다봤다. 안온한 모습이다. 달걀형의 말쑥한 얼굴, 그린 듯 짙으면서 반달같은 눈섭, 얄팍한 입술.... 바탕이 미모인 그녀 엄씨는 어려서 궁중에 들어와 여지껏 상궁으로 지내면서 이성과는 속살 한 번 섞어못보고 속절없이 늙어오다가 이제야 그 재미를 느껴보는 가련한 존재였다. 민비가 죽자 그래도 엄상궁 그녀가 쓸쓸하고 고독한 이 외로운 왕의 심정을 리해하고 위안하면서 달래였다. 이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고마왔다.    《상감! 요즘 왜인들의 눈치가 과연 수상합니다. 들리는 소리도 무시무시하구요.》     어느날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엄상궁이 하는 말이였다.    《거 무슨 소리냐!?》     그때 왕은 저으기 놀래여 가슴놀이 뛰였다.     엄상궁은 이범진이 왜놈들이 국태공과 밀모하여 페립음모(廢立陰謀)를 꾸미고있는 것 같으니 상감께 급히 아뢰라해서 하는 말이라 했다.    《지독한 놈들이구나! 중전을 시해하더니 이젠 나까지 넘본단말인가.》     왕은 이러면서 급히 여기 이 로씨야 공관으로 옮겨오게되였던 것이다.    밤이 되면 엄상궁이 찾아와 잠자리를 함께 해주고 낮에는 그 혼자만이 2층의 이 널다란 방을 서성대고있는 것이다. 세자를 비롯한 왕족들 역시 오던 날 경운궁에 갈라든채 그대로 거기에 그냥 눌러있는 판이였다.      벽가에 놓여있는 탁상우에 금박을 올린 철상자가 하나 놓여있다. 그것은 경복궁을 떠나기 전 민비가 일본랑의 손에 시해를 당하는 그 몸서리치는 끔찍스런 변이 생기니 웨베르공사가 그의 안전이 념려된다면서 선사한 안전궤였다. 그러잖아 일본인들이 어느 때 자기마저 독살해서 없애버릴것만같아서 전전긍긍하던차라 그에게는 식품과 함께 자그마한 밥상까지 들어있는 그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생각하면 웨베르공사의 그 처사가 그지없이 고맙기만 한 이희(李熙)였다. 그는 짜리로씨야정부의 처사에 감지덕지했다.    그런데 ������페후소칙������을 공포하자 웨베르공사가 미국 알렌공사와 함께 와서 배알하던 날 미국공사 알렌이 귀국의 정세가 이같이 험악한데 대궐을 보위해주겠노라면서 미국과 로씨야로부터 약간의 군대를 오게하는게 어떠냐고 제기하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의문만 갈마들면서 마음이 그리 개운치를 않았다.    《왜서 그런 말을 했을가? 그것은 기회를 타서 저희들의 군대를 끌어다 이 땅에다 발을 붙이게 만들자는 궁리가 아니였을가. 이왕 변란이 지나갔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내가 막기를 잘했지.》    고종은 한번다시 혼자소리로 뇌이였다.    상궁이 재잠을 달게 자고 깨여났다. 그녀는 잠옷을 입은 그대로 위생실로 갔다. 이때 문에 노크를 하더니 스페르공사가 방안에 들어섰다. 매일 아침 이맘때면 꼭꼭 와서 문안을 드리군 하는 그였다.    《페하께서 밤편히 주무셨습니까, 외신은 페하의 만수무강을 삼가비나이다!》    여기로 부임되여 온지 오라잖건만 어디서 배웠는지 인사말 한가지만은 제법 잘 번지였다.    《감사하오. 스페르공사께서두 밤편히 주무셨소?》    《예 그렇습니다, 페하!》     스페르는 별로 할 말이 없는지 물러갔다.    《례절이 밝아서 좋구나. 저 스페르도 웨베르처럼 해줬으면 얼마좋으랴.》     엄상궁이 위생실에서 나오자 고종이 그를 향해 하는 말이였다.     한데 스페르는 돌아가자 그를 놓고 씨벌이였다.    《저런 허깨비가 다 왕질을 하니 이놈의 나라가 어떻게 될가. 개를 막을 든든한 울바자도 하나 없으니 원.》    웨베르가 맞장구쳐가면서 같이 조소했다.    조소받을만도했다. 어쩌면 그 비유가 딱 들어맞는 것이다. 이때의 조선은 외국군대의 친입을 근본 막아낼수 없는 무능한 존재였던 것이다.    스페르가 나가자 고종은 전날의 일들을 다시금 머리에 떠올렸다.      고종이 로씨야와 가까워지자 바빠맞은건 일본이였다. 고무라공사는 고종이 파천당한일로 여기 이 로씨야공사관을 찾아와서 스페르공사에게 사건진상의 해명을 요구하는 한편 고종에게는 독립국가의 체면을 보아서 속히 환궁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그날 웨베르는 미국 공사에 볼일이 있어서 가고 없었다. 로씨야 공사는 스페르와 비서관이 지키고있었는데 그들은 손탁부인한테서 언젠가 이완용이 그녀앞에서 조선에 친아라스정권을 세워야한다고 한 말을 내놓고 기분좋아서 스스로 접근하는 그런 젊은 놈을 괴뢰로 부려먹지 않고 누구를 부려먹겠는가고 한창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손님이 왔다고 전갈이 와서 보니 일본 공사 고무라가 들어서고있었다.    스페르는 속으로 그렇지 조롱박같이 매끄러운 이 팔자수염쟁이가 등이 달아서 오늘 제발로 찾아오는구나 하면서 넌짓이 보다가 일어나 친절한양 례모를 차렸다.   《고무라공사께서 무슨일에 모처럼....래방을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고무라는 그따위 걷발린 소리는 집어치우라는 듯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스페르공사,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고종이 왜서 여기에 와 계시는지 사건진상을 좀 해명해줄수 없습니까?》   《고무라공사, 우리가 해명해야 알일입니까. 본인하고 직접 물어보시지요. 페하께서는 웃층에 계실겁니다.》    승리자의 오만한 태도였다.    밸이 꼬인 고무라는 그를 따라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고종은 고무라를 보자 눈살이 곤두섰다.    고무라는 그의 차고도 랭정하고 분노하는 태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외교관다운 례모를 갖추면서 애써 화애로운 투로 말을 꺼냈다.     《페하, 이 어찌된 일입니까?.... 독립국의 체면을 봐서도 남의 나라 공관에 이같이 오래머물러계심은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 하오니 어서 환궁하심이 옳은줄로 압니다.》    이놈아, 난 네놈들같아나 이리저리 몰리는 몸이 됐다, 나를 이지경 만들어놓고서도 무슨 낯짝에 찾아와서 이러는거냐,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느라구 이러는거냐? 고종은 속으로 이렇게 욕하고는 일본측의 촉구를 단마디로 일축해버렸다.    《현하의 국세가 이러한즉 잠시는 불가하오.》    그날 로씨야측 웨베르공사는 공한을 보내여 고종의 아관파천은 자유의사라고 밝히였다.                  고종의 아관파천 소식이 세상에 퍼지자 누구보다 놀랜 것은 이또오 히로부미였다.    《눈을 멀쩡히 뜨고 조선의 국왕을 아라사께 빼앗기다니!》     전보를 받고나서 부레가 끓어 오르면서 화가 난 그는 무력을 써서 고종을 빼앗아오자고 제기한 고무라공사를 외교관으로서 머리를 쓴다는게 고작 그 정도란말인가, 물소보다 더 미련한 사람이라고 원망했다.            도오꾜오에서 그가 보낸 답전이였다.          어느날 오전 손탁부인이 고종께 아뢰였다.      《페하! 서재필이 페하를 뵙겠답니다.》    《서재필이 무슨일에 또?....》     손탁부인의 전갈을 받은 고종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여올랐다.     서재필(徐載弼)은 부패한 정권을 물리치고 도탄에서 허덕이는 혈족(血族)들을 구하려고 일으켰던 갑신정변이 청나라군대의 부당한 간섭으로 좌절되자 겨우 생명만 보존한 채 미국으로 망명한 다음 형설(螢雪)의 공을 이루어 그곳에서 의학박사(醫學搏士)라는 최고학위를 받고 몸은 비록 이역에 가 있었으나 정신만은 조국을 떠날 날이 없이 지내다가 망명생활 12년만에 조국의 부름을 받게 되어 온 것이다. 아직 부패의 잔재가 있기는 하나 갑신정변을 일으킨 지사(志士)들의 태도가 애국적이였다는 것을 입증하게 되어, 남의 도움을 받아 개혁된  갱장정부(更張政府)에서는 인재를 물색한 결과 서재필박사를 초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재필은 부인과 함께 올 1월 1일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고 민중의 사상을 고취하려는 의도로 이전날 청나라 사신을 맞던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고 모화관(慕華館)터에다는 독립관(獨立館)을 세웠다. 그리고는 국문대자(國文大字)로 편액을 썼으며 또 국문으로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자유의 정신을 진작하고 신진투사들을 규합하여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혹은 연단에서 혹은 가두에서 고식적(姑息的)이며 자리적(自利的)이며 파쟁적(派爭的)인 정부당국자들을 공격하며 외국의존사상을 철저하게 타파하고 자유주의를 확고히 할 것을 줄기차게 제창하였다.    고종은 서재필이 위인됨을 알기는 해도 그와 조용히 마주앉아 말을 오래나눠보지는 않았다. 전번에 환궁할 것을 촉구한바 있는데 이번에 찾아온 리유역시 그리하리라 속으로 짚으면서 그는 그를 들여보내라했다.    서재필은 뚜걱뚜걱 절주맞는 구두신발소리를 내면서 로씨야공관 2층 왕실에 들어섰다. 올해 32살 나이의 서재필의 몸에서는 한창 젊음의 기백이 넘치고 있었다. 고종은 검정색나는 세루양복을 단정히 입고 은색 넥타이를 맨 그의 준수한 얼굴을 보자 만면에 희색을 지으면서 반갑게 맞았다. 당전의 복잡한 난국을 어떻게 넘겨버렸으면 좋을지 머리가 잡히지 않고 갑갑하던 차라 말동무라도 해주게 그가 찾아온 것이 반가왔던 것이다.     서재필이 국궁재배하고 나자 고종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는 지냄이 어떠한가?》    《페하! 아직까지는 별로 큰 문제없습니다만 걸림돌이 원체 뿌리깊이 박혀나서....》    고종은 서재필의 은유적인 이 말에 량미간을 끌어 모으더니 재촉하듯이 입을 다시연다.    《계속말해보게.》    《당로한 윤, 남, 로.... 제씨들이 너무도 고태의연하니 새 빛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가 지적한 것은 윤용선, 남정철, 조병식 등 수구육신(守舊六臣)이였다. 그들은 의연히 옛탈을 벗지 못하면서 고종의 신임을 받아 갑오갱장(甲午更張)의 제도를 번복하면서 군권전제(君權專制)를 회복하고 임금의 뜻을 승순(承順)하여 뢰물(賂物)먹기를 일삼고있었던 것이다.      《너무 시급히 서두루는건 안닌가. 종래의 관습을 바꾸는게 일조일석에 되여지는 일은 아닐세.》    고종은 한마디 타이르고나서 자기딴에는 젊고 유망한 나라의 동량을 아끼는 마음에서 격정을 잠시 누르고 피로를 풀라고 했다.    나더러 피로를 풀라고? 어떻게 푼단말인가?...서재필의 얼굴에 일순간 곤혹스러운 기색이 덮히였다. 가시밭길처럼 험난한 것이 숙명이요 그것을 예고나하듯이 서재필이 이세상에 태여난 것은 바로 창생을 구제하기 위해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水雲 崔濟愚) 선생이 교수대의 이슬로 순교하던 1864년 그해였다. 일가되는 서광하의 양자로 들어가 14살 때 벌써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암송했다하여 전강(殿講)에 참가하였다가 장원급제를 하여 온 조선에 이름을 내였던 그다. 서재필은 특히 고균 김옥균(古筠 金玉均) 선생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한번은 김옥균을 따라 봉원사(奉元寺)에 계시는 이동원(李東元)스님을 만났는데 그들이 세계정세를 논하는 자리에서 유럽과 일본의 개화소식을 듣고 서재필은 개화사상에 공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의식전환에는 이같이 계기가 있는 것이다.     당시 개화사상에 불타고있었던 김옥균은 포경사(捕鯨使)가 되어 부산에 와 있는 일본인들에게 포경선(捕鯨船)을 전집(典執)하고 현금 2만 5천원을 차용해서는 서재필 등 61명을 선발하여 일본에 유학을 보냈던 것이다. 서재필은 육군소학교였던 도야마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는 김옥균의 친구인 게이오의숙 창립자 후꾸자와에 부탁해서 된 것이다. 한데 이 무렵에 갑신정변이 일어나 3일천하라는 비웃음을 남기고 김옥균의 혁신계획은 실패로 막을 내린것이고 서재필은 자리를 바꿔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던 것이다.    서재필본인은 거기서 미국국적에 들었다. 그러면서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이름까지 달고와서 외부고문(外部顧問)으로 되었다. 하기에 고종은 그를 일반신하와는 다르게 조심스레 대하는 것이다.              《듣자니 외국가서 학업을 이룸에 신고많았다더니...》   《페하! 사실 그러하옵니다. 저는 먼저 샌프란시스코에서 영어공부를 했던겁니다. 그때 로버트라고 하는 사업가를 만나 그의 집에 자주오던 홀벤백과 친하게되였습니다. 홀벤백작은 펜실베네아대학의 이사(理事)였습니다. 저는 그분의 도움으로 그가 경영하는 중학교에서 공부하는 일면 교장집의 정원일을 하면서 고학을 하다가 3년후에 라페예트대학을 다니게되였던것입니다.》   《무슨 대학이라지?》   《라파예트대학. 그것은 라파예트의 이름으로 명명된 대학입니다, 페하! 라파예트를 소개할까요. 라파예트를 볼것같으면 프랑스의 군인이고 정치가이며 후작이였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자로서 미국의 독립전쟁에 몸소 참가하였지요. 그리고 그는 프랑스혁명당시 을 기초하고 국민군사령관으로 활약하였으나, 인권정치를 위한 활동으로 하여 그후 투옥과 망명을 거듭하기도했습니다. 프랑스 삼색기는 그가 창안한것이지요, 페하!》   《오, 그런가!》    고종이 라파예트의 자유주의적인 사상에 감복해서 감탄사를 올리는지 아니면 삼색기를 창안했음에 감탄해 그러는지 대방은 분간하기 어려웠다.    고종은 입을 열고 물어왔다.   《듣자니 서박사께서는 미국 녀인을 부인으로 맞아드렸다느 것 같던데 그게 사실이요?》   《그렇습니다, 페하! 소신은 지난해 미국서 암스트롱대령의 딸님과 결혼을 했습니다.》       《암스트롱대령이라! 암스트롱대령이라! 어디서 듣던 이름같은데....》   《동성동명일수 있겠지요. 페하께서는 지금 그 유명한 대포를 상기하시지나않는지요?》   《대포?》   《예, 페하! 암스트롱대포말입니다.》   《세상에 그런것두 있는가?》   《있습니다, 페하! 그건 암스트롱회사에서 만들어내는 속사포인데 강철로 되어진겁니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에 영국의 암스트롱이 발명했지요. 포신을 강철로 만들고 내부에는 라선조를 부착했습니다. 탄환은 후미에 장전하는데 발사하면 회전하면서 나갑니다.》    《오!》    고종은 머리를 주억거렸다. 알았다는 뜻인지 아니면 남은 벌써 오래전부터 그같이 대형의 무기를 연구제작하는데 조선은 겨우 낡아빠진 화성대나 만지고있음에 자책을 느끼는지 그 내심을 보아내기 어려웠다.    이런 무맥한 인간을 임금이라구 섬기는 내가 소같이 미런하지. 서재필은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는지라 속으로 이렇게 자조를 하고나서 자기가 그따위 대포에 대한 소개나 하자고 오늘 찾아 온 것이 아님을 생각하고는 빗나가려는 화제를 본곬으로 몰아넣었다.    《페하! 대궐로 돌아가시오. 이 나라의 땅은 페하의 땅이며 이 나라의 백성은 페하의 백성입니다. 이 땅과 이 백성을 버려서는 아니되옵니다. 백성과 땅을 떠나서는 나라가 있을수 없습니다. 이 땅과 이 나라를 버릴수는 없습니다. 일국의 임금님으로 자기의 대궐에 계시지 않고 남의 나라 공사관에 와 겯방살이하며 계신다면 우리는 체면이 깎일뿐만아니라 남의 나라 사람들이 웃을겁니다. 그러하오니 속히 환궁하옵소서.》    《그대말이 옳기는 하오만 지금 경운궁이 수리중이니 잠시 황궁하기 어렵소.》    경운궁이 아니면 임금이 잠잘 자리가 없을가? 경운궁이 수리중이면 건청궁으로 환궁할수도 있지 않는가. 경운궁이 로씨야공사관과 가까우니 장차 환궁해도 그리로 가겠다는건가? 이건 고종이 돌아가지 않으려는 구실이였다. 자라보고 놀란 놈 솥뚜껑보고도 놀란다더니 이제 점점 그런 꼴로 되어가는구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가?... 서재필은 속을 끓이다가 오늘은 다시말해봤자 헛짓일 것 같아 그만 물러나오고말았다.      어느날 웨베르공사가 한가지 소식을 알리러 고종을 찾아왔다.   《웨베르공사구만! 언제쯤 환국하려오?》   《페하! 외신은 그일 때문에 왔습니다.》   《그일때문이라니, 무슨소리요?》   《저는 로씨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그냥 남기로했습니다.》   《오ㅡ그렇소. 그럼 스페르공사는?》   《스페르는 일본주재 로씨야공사로 가게됐습니다. 본국에서 황제의 칙명이 그렇게 내린것입니다.》   《그렇소. 구당이 명당이라구 오랜 친구가 아무렴 났지. 잘된 일이요.》    고종은 얼굴에 화색을 띄면서 웨베르가 로씨야공사로 조선에 그냥 남는 것을 환영했다.    사실은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로씨야와 일본지간의 암투가 전에없이 악화되자 짜리로씨야정부는 이러한 사태에 대비해 스페르를 다시 주일본공사관(駐日本公使官)으로 전근시키고 조선사정에 누구보다 밝은 웨베르를 조선에 그냥 남겨두기로 한 것이다.   《페하! 우리 로씨야에 , 는 속담이 있지요. 그게 누구를 놓고 비유한것같습니까. 일본은 이번일로해서 땀을 빼고있습니다. 각국 공사들에서 가만있지 않으니까요.》   《고맙소, 웨베르. 이게 다 웨베르공사의 공인줄로 아오.》    고종은 민비시해사건조작과 자기의 아관파천으로 인하여 그 장본인으로 점찍혀진 일본이 각국의 비난과 추궁과 압력에 눌리워서 기가 죽어든다니 속이 좀 후련해지는 것 같아서 웨베르공사를 치하했다. 그러다보니 서재필이 와서 빌다싶이 환궁하라고 올린 진언은 새까맣게 잊고말았다.      한편 일본은 조선국왕이 지금은 환궁할 뜻이 전혀 없거니와 로씨야가 조선국왕을 제 손아귀에 틀어쥐고 숱한 리권을 획득하고있는 것 같아 대책을 새로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금방 청일전쟁을 치루고 난 일본은 군사실력으로 로씨야와 맛설수 없으니 외교적교섭으로 퇴세를 만구하는 방도밖에 없었다. 하여 그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다소 양보를 하면서라도 로씨야와 담판을 하게되였던 것이다.    5월과 6월에 ������웨베르ㅡ고무라각서������와 ������로바노브ㅡ가다야마협정������이라는 것이 련거퍼 생겨났다.    이 각서와 협정은 두말할 것 없이 로씨야측으로 놓고 보면 일본에 대한 커다란 외교적성공이였다. 이를 통하여 로씨야는 마침내 일본과 함께 조선을 공동보호할 권리, 일본과 동등한 수량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킬 권리 등을 획득했다. 이리하여 조선에는 또 하나의 위험한 침략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종은 그런줄을 알기나하는지?...    고종은 그보다도 반일의병이 각처에서 궐기하니 오히려 그것에 골치를 더 앓았다. 그는������선유사������를 내려보내여 의병들을 설복해서 무기를 놓고 흩어지게 만들자고 했다. 그랬더니 반응이 좋지 않았다. 상우에 어제밤 보고 내친, 국왕의 행위를 힐난하는 의병의 글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민구이첨(民俱爾瞻)이라 백성은 모두가 고종을 지켜보면서 환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저 기다림만이 아니였다. 임금이 신망이 없어지면 백성은 그런 임금을 배반할 생각을 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이러다가는 과연 더 무시무시한 폭란이 일어날지도 모를일이였다. 시세가 이같이  점점 더 험하게 되자 조정의 상하에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결 더 높아지게 되였다.    서재필은 고종을 다시찾아갔다.   《어서 환궁하십시오. 종묘사직이 위태롭습니다. 이러다간 이 나라가 어찌될지 모릅니다.》    나라운명을 제일 걱정한는 것은 그래도 독립협회였다.    한편 일본도 고종을 하루속히 환궁시키려고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저들의 목적이 따로있으니까.    
70    半島의 血 제1부 14. 댓글:  조회:4200  추천:1  2012-09-16
  14.      김호는 장사가 잘되여 돈푼이 생겼으니 오늘은 자기가 한턱내리라했다. 몇해전 애들한테 대접받은 보답이였다. 넷은 그 덕에 점심을 잘먹고나서 그와 작별을 고한 후 북쪽을 향해 다시금 먼 걸음을 놓았다.    다른애들이 김호선생이 장사를 한다니 믿어도 기학이는 그 말을 전혀믿지 않았다. 아무리봐야 그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를 않았던 것이다. 원인이 뭔지는 딱히 몰라도 어쩐지 그가 받고있는 직감이 그러했다.    입춘이 지났건만도 3월의 날씨는 의연히 차가왔다. 그래도 여름같이 궂은 날이 없어서 다행인가싶었다. 비나 질적질적 내리면 먼길을 어떻게 가는가. 그들은 마을을 만나면 뉘집에건 찾아 들어갓다. 사정을 대고 하루밤 좀 신세집시다 하면 각박하게 쫓아버리는 일이 없어서 참 다행인가싶었다. 동란의 세월이지만 아직은 다행히도 인간의 선심(善心)은 살아있었던 것이다.    아호비령산맥(阿虎飛嶺山脈)을 넘으니 북쪽한기라서 더 싸늘했다.    넷은 평양(平壤)에 들리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양덕(陽德)쪽으로 향했다. 평양쪽은 다른때 고찰을 떠나자고 의견을 모은 것이다. 그들은 양덕에서 가까운 함경도땅에 들어 곧추 함흥에 가 거기 시내에서 사는 기학의 생가에 들려 구경할 것을 구경하고는 다시떠나 저 맨 북쪽의 끝머리에 있는 고향에 닿을 생각이였다.    최삼용이가 의합을 맞추었다가 그러지 말고 원산에 가 배를 타고 가자고 불쑥 삐여져 나왔다가 그만 동무들한테 놀림을 받았다.   《어서빨리가자구? 집떠난지 이제 며칠인에 넌 각시생각 그리두하는거냐? 그주제에 그래도 국정을 알아본다구? 이제보니 자식이 원 불출이구나!》   《죄꼬만녀석 열세살에 장갈가더니만 애가 영 비뚤어졌어.》   《각시끼고 자 벗릇해저런다.》    이쪽셋이 겨끔내기로 놀려주는데   《체, 남소린 잘한다만 너들두 내처럼 돼봐라. 지랄이 날거야.》    대답이 유들유들해서 모두 하하 웃고말았다.    하긴 처지가 다르지만 그렇다 해서 개별행동을 허용하는 집체가 아니였던 것이다.    그들 넷은 고원(高原)을 지나서 금야(金野)쪽으로 가고 있었다. 피곤했다. 게다가 시장기마저 들기시작했다. 이런차 마침 저 앞에 마을이 하나 나타났다. 때는 저녁켠이였다. 그들은 호수가 기껏해야 금희동만큼이나 됨즉한 그 마을에 들려서 밤을 지내고 래일다시 떠나볼 작정을 했다.    한데 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이외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백여명 실히 됨직한 청장년들이 마을 안에서 한창 훈련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구령에 맞추어서 대렬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그들은 의병이였다. 지금 전국에서 의병이 수풀같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런데 그네들의 차림새와 모양을 보고 네친구는 우수워서 입을 싸쥐였다. 필시 다른마을에서 모집되여 온 자들인 것 같은데 모두 심의(량반, 선비들이 입는 긴 옷)를 입고 큰 관을 썼으며 례의범절만 따지면서 차례에 따라 전진하군하였다. 갖춘 무장이라는건 활과 창, 칼 그리고 기껏해서 몇 대안되는 화성총밖이니 그것이 다였다.    기학은 그런 장비를 보는 순간 마음이 서글커졌다.    《정규적이 못되는 저런 의병대가 현대무기로 장비한 일본군을 어떻게 당해낸단말인가? 강적과 맛서자면 우선 의병들은 통일된 사상으로 정신부터 무장한 기초에서 튼튼히 무장을 해야지. 물론 군사전술도 좋아야할거고.》   《허! 넌 제법 지휘관같은 소릴하는구나.》    성묵이가 놀림절반 그의 말을 중둥잘랐다.    기학이는 코소리를 킁 내고나서 한려던 말을 계속하려했다.   《아무렴 그래 그만한 상식도 모르고산단말이냐. 가만있자, 내가 방금 어디까지 말했던라?....그렇지. 군사적 우월성을 최대한발양해야하는거야 그리구 적의 약점을 찾아내여 공격력량을 거기에 집중시키는 그런 전법을 써야하는거다.》   《아니 이런! 네가 그런건 어디서 주어 배웠냐?》    처음에는 귀등으로 흘러버리던 성묵이가 다시보면서 의아쩍어한다.    기호와 삼용이도 마찬가지였다.       기학이는 벌신웃었다. 그가 맘먹고 군사학을 연구하는건 아니였다. 금희동을 떠날 때 집에서 "孫子兵法"을 읽어봐서 그저 생각나는대로 지껄이였을뿐이다.     마을안 두집사이의 꽤나 널다란 터밭을 그들은 훈련장으로 사용하고있는데 이켠의 네친구는 초가이영이 낮은 농가 툇마루가의 땅바닥에 엎어놓은 커다란 장독과 그 옆 키넘는 삭정이가리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활로 관혁맞추기를 련습하는데 량반인지 선비인지 머리에 관을 쓴 자 둘이 서로 먼저하라며 사양하는 모양이 하도 우수워서 성묵이가 하하 웃으면서 배를 끌어안았다. 그통에 네친구는 들켜 그만 그들 손에 잡히고말았다.    《첩자아니면 백주에 숨어서 훔쳐볼건 뭐냐?》     이 무리의 의병중에 두령인 듯한 자가 심히 정색하여 캐는 말이였다.    《첩자라니요, 참. 우리가 뉘의 첩자란 말임둥. 그따위 험한 소리는 하지두맙소. 그렇게 의심하면 좋지 않습니다.》    《뭐라? 날보고 험한소리를 하지 말라? 그렇게 의심하면 좋지 않다? 그럼 어디 말해 봐. 너희들이 남이하는 훈련은 왜 훔쳐봤냐? 이실직고를 하란말니다. 안그랬다가는....》    《공연히 의심하시네요. 우린 서울구경갔다가 막 돌아가는 중입니다. 정말이꾸마.》     성묵이도 기호도 변명을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두령은 너희들이 하는 말투를 봐서는 함경도치가 옳은 것 같기도한데 그래도 이제 사람을 파견해 조사를 해보고 놓아주리라면서 아예 포로취급을 하려 했다. 성묵이는 억울해하였다. 두령은 잔말말고 장독을 저쪽으로 멀찌감치 옮겨놓고 삭정이가리도 깨끗하게 옮겨놓거라 시키면서 말을 안들었다가는 경을 치리라 엄포를 놓았다.   《예, 예, 그렇게 합죠! 그렇게 합죠!》    뜻밖에 기학이가 한마디 항의도 없이 순종하며 나서는지라 친구들은 모두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찔 갈려보았다.    기학이는 일을 하면서 되려 세친구를 생각이 단순했다며 놀려줫다.   《이 멍텅구리들아, 일 좀해서 뼈가 빠지느냐. 먹여주고 재워줄텐데 좀좋아서.》    이틑날 아침까지 배부르게 먹고나서 네친구는 그 마을을 도망쳐 무사히 벗어났다.    금야강도 금진강도 다 풀리여 동해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함흥에서 사흘간 묵는기간 그들은 정화릉(定和陵)과 양주사(陽州寺)를 가보았고 이태조가 왕이 되기전에 독서를 했다는 귀주사(歸州寺)도 가보았다. 그리고나서는 백운산(白雲山)에 가 그곳에 있는 백운산성(白雲山城)과 용흥사(龍興寺)까지 구경하고 금희동으로 돌아왔다. 애석한 것은 설봉산에 가지 않다보니 그곳에 있는, 조선왕조 태조(太祖)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지었다는 석왕사(釋王寺)구경을 못한 것이다. 그들은 이제 아무때건 구경할 날이 있겠지 했다.       이만하면 꽤나 만족스러운 려행이였다. 이번걸음에 뭐니뭐니 해도 나라정부의 두 고위급관리의 주검을 본것과 아관파천(俄館播遷)의 내막을 알게 된 것이 제일 큰 수확이 아닌가싶었다. 그리고 잊지 못할 일을 하나 더 보탠다면 도중에 의병훈련을 훔쳐보다 들켜 첩자로 몰릴번한 그 일이였다.         《얘들아, 우리도 의병돼볼까?》     성묵이가 또 저돌적인 생각을 끄집어냈다.    《어떻게?》     기호가 물었다.    《조직하지 뭐. 우선 우리네 서당생도들 가운데서 키큰애들을 뽑구 다음에는 사회에서 널리 모집하면 될것같구나.》    《야, 성묵아! 네가 그래 의병장노릇하고싶다는거냐?》     삼용이가 각박하게 따지고 들었다.    《쳇, 넌 내가 의병장질을 하굽퍼서 그러는줄 아니. 아니다. 의병장은 기학이가 하고. 재는 어물쩍하게 병법을 아니까 될것 같다.》    《그러면 너는? 》    《난 뒷바라지나 하련다.》    《넌 또 바람찬 소리구나. 한 번 더 일깨워달라니? 견수야 계사신.구불학 갈위인?(犬守夜 鷄司晨 苟不學 曷爲人ㅡ개는 밤을 지키고 닭은 새볃을 알리거늘, 사람이 배우지 않고서야 어찌 사람노릇을 하리요?)》     기학이가 일깨워주는데 박기호가 예전같이 또 이렇게 풍을 쳐서 성묵이는 야 이자식이 하면서 너부죽한 손바닥으로 그의 잔등을 한 대 철썩 갈겼다. 그래서 웃음통이 터졋고 성묵이는 세친구한테 또다시 너는 폭군장령질이나 해먹을 감이라는 놀림받았다.      개학이 되어 학교에서는 전처럼 시간을 봤는데 어느날 면에서 군의 관차대리(官差代理)로 사람 하나가 또 내려왔다. 그는 금희동에 오자마자 학교부터 들리여 학생들을 모이라해놓고는 그 수를 확인하느라 점검까지 했다.    학생들은 선생도 아닌 사람이 그러는 것을 제일 꺼려했다.   《또 무슨일 생겼는가요?》   《어쩌자는건가요?》   《공부못하게 하자구요?》    학생들은 겨끔내기로 질문했다.   《내가 국왕님의 명령문을 갖고왔네라.》    내려온 사람은 학생들이 곰상히 들어줄줄을 알고 자기가 갖고온 정히 포갠 종이장을 꺼내여 펼치더니 엄숙한 표정을 갖추어서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듣건대 원주 등 지방 백성들이 무뢰배들의 그릇된 성원으로 조용하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 들고 일어나 군읍을 소란케 한다 하니 나로서는 몹시 딱한 노릇이다. 그리하여 내무협판 유세남에게 명령하여 그로 하여금 해당지방에 가서 조정과 국가의 뜻으로 타이르게 하는 바이니 그대들 백성들은 잘 깨닫고 고향에 돌아들가서 안착하여 일을 하고 준동하지 말라.》      이것은 국왕이 지나간 3월 1일에 내린 "명령문"이였다. 그런데 이제와서야 새삼스레 알리고 있다. 대체 뭣때문일가?...    학생들은 자기와는 무관한 일이라 여겨서 무심히 듣는 것 같더니 생각과 다르게 반격적인 질문을 들이대는것이였다.     《여기는 금희동이얘요.》   《원주지방 아니얘요.》   《그걸 우리한테 알려줘 무슨 소용이 있나요.》   《원주지방 아니래두 국왕의 명령문이니 통용이 되네라.》    우에서 내려온 사람이 해석했다.    그러자 중구난방의 질문이 쏟아졌다.   《거기 어디 통용이 돼서 발포하라는 지시가 있는가요?》   《그걸 우리가 알아서 무슨 소용이 있나요?》   《대체 어쩌자는건가요?》   《쓸데없이 들볶는다.》   《내가 읽으면 듣기나할 것이지 웬 말이 그리도 많노.》   《듣기싫은 소리를 하니까 그러죠.》   《국왕의 명령문인데두 너희들은 듣기싫단말이냐, 그래?》   《얘들아, 국왕의 방귀소리도 듣기좋다구해야 하네라.》    면에서 온 대리관차의 말이 떨어지게 바쁘게 성묵이가 뒷받아서 이따위 부식은 소리를 한마디 던진통에 아이들은 집안이 터질 듯 일제히 폭소를 텃치였다. 그 바람에 우에서 내려온 사람은 질서를 잡기 어렵게 되었다. 와야와야 벌집이 터진 것 같았다. 여러번이나 조용하라했건만 학생들은 그 소리를 마이동풍으로 여겼다. 그는 낯이 지지벌개져서 소래기를 질러댔다.    《이놈들 조용하지 못할가?》    그제야 실내는 차츰조용해졌다.   《인자 언녀석이 그따위 소릴 내깔렸느냐, 엉? 이리루 나와, 냉큼!》    아이들은 요지부동이요 응하는 자라곤 없었다.    성묵이는 씁쓸하니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 사람은 이 아이 저 아이 짚어가며 누가 그랬느냐고 물었다. 그럴 때 마다 아이들은 모른다고 괘괘떼거나 아니면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제서야 조사를 해서 알아내자는 자기가 어리석고 미런하다는 것을 깨달았던지 그 사람은 묻기를 단념하고는 아래와 같이 그루밖아 말했다.   《이제 어느 때건 이 마을루두 의병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우리헌테 보고를 해야 한다. 알아들었는가? 누구든 다 말이다.》   《왜 알리라는 겁니까?》    기학이가 듣지 역겨운지라 오만상을 찌프리고있다가 캐고들었다.   《왜서 알리라는건가구? 넌 그래 그것두 몰라서 나하구 물는거냐?》   《물을때야 몰라서 묻겠지요 알면 물을가요.》    박기호가 불쑥 껴들어 대신 까박을 해서 학생들은 또 와 하하 웃었다.    우에서 내려온 대리관차는 약이 올라 이번에도 조용하라고 노한 고성을 내질렀다. 학생들은 하는수 없이 입들을 다물었다.   《임금님은 나라가 안정되기를 희망하시여 이 명령문을 내리신거다. 너희들은 그래 나라님이 무사하시기를 원하지 않느냐?》    이 말에 기학이가 대꾸해나섰다.   《나라님이 무사하실거야 나도 원하지요. 우리 모두 원하고 나라백성 모두가 원하지요. 그렇지만두 고발할 각질은 안할겁니다. 의병이 오겠거든 오고 가겠거든 가라지요. 그걸 우리가 일러바쳐야 할 리유가 뭔가요? 일러바쳐서는 뭘 해요? 어쩌자구요?》   《너가 그게 무슨 소리냐?》   《개질은 안한다 그겁니다.》   《너 이놈, 관청돕는 일인데도 그게 개질이란말이냐?》    면에서 온 사람은 팔을 길게 내뻗쳐 서기학의 어깨를 잡았다.    이러자 친구들이 왁 달려들어 그 사람의 팔을 냅다쳤다.    성묵은 그자를 밀어닥치면서 호되게 통박(痛駁)하기까지 했다.   《어른이면 좀 례모있게 놀아요. 이게 무슨행실인가요? 학생하구 손찌검하다니? 어디 해봐요, 그 머리통 아깜잖거든.》   《너, 너, 너희들이...》    그 사람은 떠듬거릴뿐 할 말을 찾지 못했거니와 형세가 불리한지라 그만 비실비실 가버리고말았다. 자칫잘못했다가는 되려 맞아죽을 것 같았던 것이다.      이런일이 있은지 며칠안되여 3월 21일, 국왕 고종이 “애통서"라는것을 발표했다. 그것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최삼용이네 집 서쪽벽에 나붙었다. 국왕은 조서에서 왕의 잘못으로 나라가 쇠약해지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웃나라가 침략해 오고 역신들이 국권을 롱락한다고 하면서 이를 수습하기 위한 대책을 세운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 대책으로서 머리를 깎지 못하게 하는 등 옛제도를 그대로 회복하고 민생을 안착시키는데 힘쓰는 조건을 내걸었다.    불쌍한 국왕의 그 "애통서"를 본 금희동 사람들의 표정은 제가끔이였다.   《이건 또 웠쨌다구 내붙였노?》   《나라님이 속을 태우시는군.》   《쌍통이야. 언걸을 입어서 그런걸.》   《그런소린 마시우, 언걸이라니 그게 다 제 탓이지.》   《그렇잖구, 이 나라를 어디 백성이 망쳐먹는건가 쳇!.》   《상의 가엽은 심정 우리가 알아줘야 해.》   《알아주면 어떻게 알아줘. 불문곡직하고 섬겨왔으면 됐지. 순진한 백성이 이제 더 어찌란말이요?》   《국왕이 애통서를 내야허니 참으로 가엽기 그지없구려!》   《저따위 바보를 국왕으로 모시구있는 이 나라 백성이 불쌍허지.》       《이 애통서는 회유문이다.》    대개 이러한 말들이 오갔는데 기학의 가슴에 맺혀서 제일 내려가지 않는 것은 고종왕이 의병운동을 반대하면서 탄압하는 그것이였다. 그는 의병운동을 지금도 지난날 동학당란을 대하듯이 대하고 있었다. 왕이 만약 그때 그를 탄압하지 않고 그 기세에 맞춰서 왜적을 몰아내고 정치를 개혁했더라면 지금쯤 나라는 어떤 모양이 되었을가? 아마도 독립국이 되어 남처럼 발전하고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고부군 조병갑의 탐학에 분개하여 모든 악질관리와 악질량반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웨치면서 란을 일으킨것이다. 하지만 농민군지휘자들은 인차 그번의 농민전쟁에서 《척왜》의 구호를 맨 앞에 내세운 것이다.    전봉준이 분명하게 말했던 것이다.   《각국 사람들은 통상만을 하였는데 일본 사람은 군대를 끌고 서울에 머물러있으니 이것은 우리 나라의 국토를 침략하자는 것이다.》    동학당농민군이 론산에서 발표한 호소문을 보자.   《척왜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왜국이 되지 않게 하자.》    그런데도 무엇이 잘못되였단말인가? 이것은 당시 나라안에 조성된 민족적모순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선차적이며 중요한가를 옳게 판단하고 제기한 반일구호인 것이다. 반봉건투쟁을 위주로 벌려오던 그 동학당농민군은 외래침략자를 반대하는 투쟁에로 이행한 것이다.   《....개화를 운운하면서.... 군대를 끌어들이고 서울에 들어와 야밤중에 왕궁을 습격하고 국왕을 위협하였다. 그러므로 일반인민들이 충군애국심에서 분개함을 금치 못함으로 의병을 모아 싸웠다.》    이것이 정봉준의 대답이 아니였던가. 그래도 그를 란신적자(亂臣賊子)라며 사형을 했으니 세상에 이런 놈의 처사가 어디있는가! 거꾸로 된 것이다.    어떤 자는 그를 죽인 리유를 이렇게 붙이였다. 억울하고 원통하거든 우선 관가로 등장을 갈 일이요, 그래서 안되거든 감영으로 올라갈 일이요, 감영에서도 옳은 귀결을 보지 못하거든 사헌부로 소장(訴狀)을 올릴일이요, 계서도 일이 되지 않으면 임금께 상소를 하면 될게 아닌가고. 하지만 그게 어디 되기나하는 일인가. 월급(越級)을 하기전에 아예 탄압받고마는데. 왕님은 그래 층층이 부패하고 층층이 탐관오리고 층층이 악패관리라는걸 모른단말인가? 임금은 백성을 부릴줄만 알았지 나라에 둥지를 튼 부패와 탐관오리와 악패를 사출하여 척결할것은 엄두조차 내지를 않았던 것이다.    동학당농민군이 집강소의 행동강령으로 내세웠다는 12개조의 페정계획안을 한번 보기로 하자.       1. 종래 동학도들과 정부사이에 맺혀있던 반감을 씻어버리고 정치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의 죄상을 낱낱이 조사하여 엄중히 처벌할 것.    3. 횡포한 부호들을 엄격히 징벌할 것.    4. 불량한 유생들과 양반들을 징벌할 것.    5. 노비문서를 태워버릴 것.    6. 온갖 천인들의 대우를 개선하며 백성들의 머리에 씌우는 평양갓을 벗겨줄 것.     7. 젊은 과부의 재혼을 허락할 것.    8. 규정외의 가렴잡세를 페지할 것.    9. 관리의 채용은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본위로 할 것.    10.일본인과 내통하는 자는 엄중히 처벌할 것.    11.국가에 대한 빗이나 개인에 대한 빗이나 이전에 진 빗은 다 무효로 할 것.     12.토지를 평균으로 나누어 부칠 것.      농민들의 박절한 이 욕망을 정부는 어느 하나 들어주었는가? 이 나라 순박한 백성의 순박한 념원이였다. 왕은 이런 념원에서 느껴지는 것이 그래 없었단말인가? 동학당농민군은 그래도 충군사상만은 변함이 없어서 왕을 견책하거나 왕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왕님의 안녕과 만수무강을 빌고 있었다. 그러한 적자(赤子)들을 왕님은 잡아 죽이게 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의병들은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서 목숨걸고 싸울뿐이지 왕은 건드리지 않는다. 오백년의 종사를 잘 이어내려가라고 빌뿐이였다. 그런데 왕님은 벌을 주고 토벌하여 소멸하자고 드니 왕도(王道)가 대체 어떻게 되는건가? 이거야말로 쓸개빠진 미친자의 짓이 아니겠는가. 중국에 는 속담이 있는데 이 나라의 왕님은 어느때 가야 제정신이 될가?...기학이가 생각한 것이였다.   《말구 다른 병서는 없나?》    성묵이가 빌려다 본 책을 돌려주면서 기학이와 물어보는 말이다.   《너도 병법에 흥미를 보자는거냐?》   《아마도 리론부터 알아야할 것 같구나.》   《일어공부는 그예 집어치웠나?》   《집어치웠다. 아무 때건 나도 의병에 나갈거니 병서를 배워 랑패없을것 같구나.》    성묵이가 이렇게 결심을 내리니 기학이는 동무가 생기고 경쟁자가 나지는지라 기뻤다. 이리하여 네 딱친구들 중 군자삼락(君子三樂)의 주창자 최삼룡이는 돈벌고 가정행복을 추구하는 열성자로 되어가고 기호는 외국어 하나라도 더 알면 자기도 남을 계몽하는데도 써먹을 날이 있으리라며 일어공부를 계속했고 성묵이는 군사방면으로 나가고 기학이는 다방면의 지식과 군사지식탐구를 병행하는 길로 나가게 되였다.    금희동에 화승대 5자루있었다. 그것은 마을을 침범하는 도적을 막고 지키려고 갖춘것이다. 다른 지방은 어떤지 몰라도 함경도는 마을마다 거의 다 이렇게 담은 몇자루라도 자체의 무장을 갖고있었던 것이다. 기학이와 성묵이는 "손무자".  "삼략“, "륙도"를 구해다 함께 읽고 연구하면서 늘 마을의 그 화승대를 갖고 놀았다.   《제길할거 이렇게 락후한 무기를 갖고 어떻게 싸운다니.》    성묵이는 몇번이나 총을 팽가쳤다가는 하는 수 없이 다시쥐군했다. 아무튼 그걸 내놓고는 다른 더 좋은 것은 만질수 없었었던 것이다.    한데 이런 무기마저 걷어가겠다고 어느날 우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총을 걷어가면 마을은 뭘루서 지키랍니까? 못주겠습니다.》    성묵이가 이러면서 총을 내놓지 않았다.   《이건 정부의지시다. 네가 감히 거역할테냐?》   《정부가 도적을 막아준답니까, 그런다면 내놓겠습니다.》    기호도 총을 거두는데 불만했다.   《내놓으라면 내놓을게지 무슨 잔말이 그리두 많노?》    우에서 총을 회수하러 둘이 내려왔는데 성묵이와 기호가 말을 순순히 들어주지 않자 그들은 낯색이 굳어지면서 위협적으로 나왔다.   《물어봐도 됩니까? 왜서 총은 불시에 걷습니까?》    기학이가 알려고 했다.   《몰라서 묻는거냐? 건데... 오, 그렇지, 왕님이 명령문을 내렸을 때도 까다롭게 굴어 애를 먹였다더니...그때 고약한 짓을 한게 너들이였지?》   《말씀 좀 삼가하십시오, 고약한 짓이라는게 뭡니까, 누가 그랬단말입니까?》    기학은 가만있지 않고 대들었다. 총을 걷어가는 리유를 밝히지 않는 한 절대로 줄수 없다면서 내놓지 않았다. 총을 회수하러 왔던 자들은 화승대 5자루가운데서 세자루만 갖고 가고 두자루는 끝내 가져가지 못했다.    일이 이것으로 끝날리만무였다. 이틀이 지나자 군에서 내려온 사람이 전날 왔다간 그 둘을 앞세워갖고 금동리에 나타나더니 성묵이와 기학이를 포승지워 가져갔다. 이렇게 되자 온 금희동마을이 불시에 부글거렸다. 기학이도 성묵이도 다가 총명하고 똑똑해서 장차 범인은 아니되고 나라의 동량지재가 되리라 여겨들왔는데 관가에 잡혀가서 조련받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 금희동사람을 알기를 어떻게 아는가? 허술이 봐두 분수있지, 아직 공부를 하는 애들을 함부로 잡아가다니 원! 모두 나서시오!》   우선 마을의 책임자인 최풍헌이와 선생인 김노규부터 가만있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온 마을이 들고일어났던 것이다.   경원군수(鏡源郡守) 이동호(李東浩)는 나이 50인데 금희동(金熙洞동)의 남녀로소 수십명이 군청을 찾아오니 란을 일으킨줄로 알고 놀래여 조심스레 나와 맞았다. 그러다가 그는 노규선선생으로부터 사건의 경위를 듣고나서야 뭐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관련자의 책임을 추궁하는 한편 기학이와 성묵이를 당장 석방하라 지시했다.   《우리가 가보니 둘이 마침 총갖고 노는 중입디다. 아마 다루기를 숙련 하는 모양이죠. 도적을 막겠다는 리유를 대고 총을 그여 내놓지를 않습디다. 많은이들이 마을의 무장갖고서 의병에 가담하고있잖습니까. 문제는 그래서....》   금동리로 총을 회수하러 왔던 사람 둘중에 나이많은 자가 기학이와 성묵이를 련행하게 된 연유를 구술하는데 과연 신통스러웠다.   《제가 물어봤습니다. 총은 왜서 갑자기 걷는가구요. 한데두 알려주질 않습디다. 군수님! 그래 우리는 어찌된 원인도 딱히 모르면서 제 총을 내놔야합니까? 솔직히 말씀드려 군수님, 세상에 그런 바보짓을 할 놈은 없을겝니다. 안그렇습니까?》   군수는 잠자코 듣더니 저쪽 사나이와 네가 과연 물어보는 말에 대답을 주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것이 사실인지라 무기거두려왔던 사나이는 다문입을 열지 못했다. 이동호군수는 이마살을 찌푸리더니 기학이와 성묵이만 곁에 남겨놓고 이렇게 당부했다.   《듣자니 너들은 저번때도 한 번 말성을 일으켰다더구나. 나는 우리 경원군에서 란이 일어나는걸 원치 않네라, 기학이 넌 총명한 앤데....난 널 믿고 희망을 거네라, 장차 우민(愚民)의 계몽을 네가 나서서 맡아달라고. 그리고 넌 이름이 성묵이라했지? 듣자니 너의 집은  경성에 있다는것 같은데 그만하면 소학은 다 녔겠다 이젠 그만 제 고향으로 돌아감이 어떠냐?....》    둘이 그냥 붙어있다가는 그 어떤 거조를 낼것같아서 이럴 때 갈라놓자는 생각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한학을 공부하느라 여러해 고모네 집에 와 있으면서 뼈를 굳혀온 성묵이는  정든 친구들과 작별하고 경성(鏡城)으로 돌아가게되였던 것이다.    활기롭던 친구를 보내고나니 허전한 감이 밀려들었던 기학이는 홀제 9월 26일자 《독립신문》에 이런 보도가 실린것을 보게되였다.      《9월 22일 비도괴수 최문환, 민룡호가 무리 180여명을 거느리고 정평군에 들어와서 전곡을 빼앗는데 함흥군에 갇혀있는 죄인 김자욱, 성지풍이가 역속들과 내응이 되어 비도들을 불러들여 함흥 관찰사 서리 김택수를 쫓아내고 그 고을에 웅거하였다.》      《성묵아, 성묵아! 넌 아직은 제발 말려들지를 말거라.》   기학이는 이같이 혼자소리로 뇌였다.    
69    半島의 血 제1부 13. 댓글:  조회:3970  추천:2  2012-09-16
  13.       피끓는 유생들은 위정척사(衛正斥邪)와 부도복국(扶道復國) 즉 간사한 것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지키며 나라가 제것으로 돌아오는 길을 돕는다는 기치를 들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제천에서 유인석(柳麟錫), 춘천에서 이소응(李昭應), 안동에서 권세연(權世淵), 선산에서 허위(許蔿), 문경에서 이강년(李康秊), 진주에서 노응규(盧應奎), 관동에서 민용호(閔龍鎬), 호남에서 기우만(奇宇萬), 고광순(高光珣), 여주에서 심상희(沈想熙), 경주 이천에서 김하락(金河洛) 등이 의병을 일으켜 형세를 크게 떨쳤다.    그중에서도 유인석은 지평에서 거의(擧義)한 이춘영(李春永), 안승우(安承禹), 이필희(李弼熙) 등 의병장의 추대로 올 2월 7일에 제천반일의병대의 총수(總帥)가 되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명실상부한 전국의병의 상징적 존재였다. 유인석은 1842년 1월 27일(음력) 춘천부 가정리에서 태여났는데 1855년 14세에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선생의 문인이 되었으며 1876년 35세 때에 이항로의 위정척사 정신을 이어받아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다.    그는 지난해인 1895년 10월 8일 민비(명성황후)가 일본 랑인에게 시해되자 의거할 마음을 더욱 굳히였다. 그는 민비가 죽기 4개월전이던 6월 7일에 벌써 제자 500명을 모아놓고 의병투쟁을 벌릴 것을 호소한바 있다.    《나라에 조성된 환난을 모르는체 하고 아무일도 하지 않으면 인심이 위축되여 수습하지 못할것이다.》     최후까지 싸우다가 망한 민족은 반드시 광복(光復)할 그날이 있지만 아무 저항도 없이 망한 민족은 력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고마는 것이다.       이 점을 깨달은 유인석은 투쟁결의를 다지고 는 격문을 발표한것이다. 제천반일의병대의 그 격문은 수천수만의 사람들을 의병투쟁에 궐기시켰다.                   병들고 늙은 몸이 어찌 의병장의 책임을 감당하랴만              부끄럽고 분한 마음 스스로 금할수 없도다              빌리지 못할손 재주라더니 이 무슨 도움되리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서 그대들과 맹세했네              기상은 해빛아래 산악과 같고              마음은 바다처럼 맑고 푸르도다              나라의 독립을 바라는 단을 높이 쌓고 절하고 비나니              태평세월 이제 와서 이 나라에 길이 드소.       유인석은 제천반일의병대의 조직과정에서 나타난 부정적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조취를 취하였다.     먼저 위병대안에 잠입한 파괴분자 이민옥, 최진사, 박주사, 신처사 등 4명을 처단했다. 그리고 유생들에게 서로 시기하면서 대오의 단합을 방해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엄격히 타이르고 의병운동을 서당에서 책읽는 것 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였다. 무질서는 점차 가셔지고 대오가 어느정도 정리되였다. 올 1월17일에 조직되여 보름간의 짧은 기간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제천반일의병대는 큰 반일의병대로 자라났다....    금희동의 기학, 성묵, 기호, 삼용 이 네동갑의 딱친구를 이제는 소년으로만 보고 아이취급을 할 수 없었다. 16살의 그들은 이미 끌끌한 청년멋을 내고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두해전이던 갑오년 때 전봉준이 령도하는 동학당농민군이 관군과 싸우는 소식을 들을 때 처럼 지금은 유린석이 지휘하는 제천의병이 일본군, 관군과 맞붙어 싸우는 소식에 정신팔렸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워 마음은 들떳다. 그러니 공부가 자연히 잘 돼줄리 없었다.      《곧바로 서울로 가서 왜적들과 역당들을 섬멸하리라!》     제천을 공점한 의병들의 이러한 포고문이 멀리 북쪽 함경도의 구석진 여기까지 날려왔다. 그들은 각지에서 모여드는 백성들을 의병대에 망라시킨다는지 친일주구로서 범죄행위를 감행하던 역적들을 잡아 처단한다는지 하는 소문이 파다히 나돌았다.    《우리 가볼가?》     성묵이가 움찔했다.    《애두야. 그런다면 감정에 너무들뜨는게 아닐까.》     기학이는 이러면서 그를 눌러놓았다.       제천의병대는 서울공격을 목적하고 먼저 서울로 가는 중간지점에 있는 충주를 점령하려하였다. 경부선이 아직 채 부설되지 않아 일본군이 도로를 유일한 교통도로로 리용하고있는 형편에서 이곳은 하나의 중요한 전략적 지점으로 되였던것이다. 한편 또 의병들이 충주공격을 기도한 것은 부산에서 서울로 통하는 도로를 장악하고 서울공격에 유리한 국면을 열어놓기 위함이였다.    그들은 우선 통신망과 도로를 차단했다.    충주에는 일본군 200여명과 친일관료가 장악하는 경군이 400여명, 지방대가 400여명 도합 1,000여명이 수비하고 있었다.    충주부 관찰사 김규식은 의병들의 공격을 막고 나아가서는 토벌하려고 일본군과 공수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상당한 병력을 가진 제천반일의병대는 두려움없이 2월 16일 충주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벌리였던 것이다.    《충주가 의병들의 손에 들어갔단다!》    《김백선이 선봉장이 되어 밤에 의병들과 함께 동쪽문 담벽을 넘어 성안에 들어가 반항자들을 죽이고 대문을 열었단다!》    《김백선은 평민출신이란다!》        《일본군은 달아나고 충주부 관찰사는 잡혔단다!》     기학이와 그의 친구들은 모여서 저마끔 들은 소식에다 감탄부호를 찍었다.     제천반일의병대가 큰 도시의 하나인 충주성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은 재빨리 전국에 퍼지면서 회오리바람을 일쿠었다. 영향이 컸다. 각지에서 의병에 호응해나서는 사람이 적잖았다.    《인본군은 막아보지도 못하고 뺑소니를 쳤다는구나. 우리두 나가 해볼까.》    《넌 뺑소니치는 놈하구 해보겠다는거니? 일본군이 뺑소니치지 않고 총구멍이 머리통에 구멍을 냈다는 소릴 들었다면 네가 그때는?...》    《닥쳐라, 넌 내가 그리두 겁쟁이 같아뵈냐. 난 내 머리통에 구멍난대두 나가 싸우고 싶다. 왜놈하구는 한하늘을 이고 살수 없잖아.》    《너의 각오, 너의 결심이 장하기는 하다만 우리는 더 배우자, 아직은 들떠서 돌아갈 때가 아니잖니.》    이번에도 기학은 이렇게 제법 어른처럼 성묵의 들뜨는 심정을 눌러놓았다.      《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니 어찌 감히 살기를 바라겠소. 나도 또한 인간이니 당초에는 왜놈을 죽일 마음을 가졌으나 어느덧 환장이 되었고 이제는 골수까지 왜놈으로 되었다. 우리 가문은 본래 대대로 왜놈과 화친하는 것을 반대하는 가문이였는데 나는 이를 어기였으니 이것은 나라와 조상을 배반하고 하늘도 무심치 않을 죄를 범하였다. 내가 만일 죽지 않으면 세상에 도리가 없는 것으로 된다.》                 충주부 관찰사 김규식이 의병들의 손에 잡혀 목이 날아나기 전에 늦게나마 자신을 뉘우친 이 말은 에 적혀진 것이다.    금희동마을 소학교의 머리 큰 학생들이 마음이 들떠 안착하지 않던 차 김노규선생이 과로(過勞)하여 드러누웠거니와 겨울철 방학이 되었다.     이런때에 새격문들이 날리였다.    살아남은 동학당농민군은 거의가 다시일떠나 여러 의병대의 주력이 되었는데  그들이 이같이 의병투쟁에 나선 것은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선조들 처럼 반침략에 참가하는 것이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자들의 후손으로서 도리를 지키는 마땅한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였다.    이럴때 반일의병투쟁에 참가한 유생들은 무장활동보다도 격문작성 등 문필활동을 많이하였다.                북도 여러 고을에 호소한 격문이였다.           이것은 전국의 모든 관리들에게 다시한번 호소한다는 격문이였다.       민족의 원쑤 오랑캐에게 굴복하여 사느니보다는 나라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다 전사(戰死)하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라면서 많은 격문들이 일제침략자를 물리치는 투쟁에 예봉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서울가볼가?》     가끔 저돌적인 행동을 좋아하는 성묵이가 다시꺼낸 말이였다.    《그래 가보자! 우린 여적지 서울구경 한번 못해 본 촌뜨야.》     기학이가 이번에는 맞장구쳤다.     그러자 기호도 삼용이도 얼싸좋다고 호응했다. 하여 그들 네 동갑은 어느날 서울을 향해 먼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겨울날씨는 매서웠다. 서울시내는 한산했건만 시민들은 의연히 볼일을 보느라 거리를 분주히 나다녔다. 이런 거리로 해군복을 입은 1백여명의 키크고 코날이 일어선 노랑머리의 로씨야 군인들이 저들의 공관이 자리잡고있는 정동쪽으로 행진하였다. 처음보는 군대라 시민들은 모두 경아한 눈길로 대했다. 한편 또 불안한 마음에 일본이 판을치고있는데 로씨야 해군은 왜 또 저렇게 버젓이 입성하는걸가, 이제 또 무슨 변이라도 생기자고 저러는게 아닐가 하는 의문이 갈마들기도했다.    서울시민들의 우려가 무근거한 것은 아니였다.    배일적인 민중폭동이 도처에서 일어나니 정부는 황황하여 이를 막아보자고 진위대를 각 지방에 내려보냈다. 그리하여 서울은 보위가 허술하게되였는데 이 틈을 타서 로씨야공사 웨베르는 친로파인 이범진과 이윤용, 이완용 두 형제를 조정하여 정국(政局)을 뒤집을 계획을 하고 환관(宦官) 강석호를 통하여 왕에게 자기들의 계책을 알리고는 인천으로부터 저들의 해군을 그같이 끌어들이여 공사관에 머무르게 하는 판이였다. 두꺼비가 궁둥이를 땅에다 붙일때는 뛰자는 궁리일것이다. 전에 민비를 제물로 조선을 손안에 넣어볼려고 했던 웨베르공사는 반일의병이 흥기하고있는 이 때가 절호의 기회라 여겼던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이 있다. 머나먼 저 북쪽 함경도 끝머리의 두만강가 금희동마을에서 온 네친구가 서울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바로 로씨야 해군이 서울에 입성한 날이였던 것이다.    시골서 간 네 아니는 여느 길보다는 폭이 썩  넓은 한 거리에 잡아들었다.   《말 좀 물읍시다. 여기사 대체 어딘가요?》    성묵이가 지나가는 행인 하나를 세워놓고 말을 걸었다.   《어디긴 어디, 서울이지.》    행인은 퉁명스레 대구해놓고는 너희들은 자다가 꿈을 꾸지 않느냐고 눈빗질을 했다.   《누군 서울인걸 몰라서 원? 예가 무슨 거린가 말이얘요.》    성묵이는 머리에다 흰 두건을 쓴 그를 힐끗 다시보면서 입속말로 그 주제에 서울놈이라고 텃세부리는가 젠장 하고 구시렁거렸다.   《종로거리다.》    서울 사람은 저쯤가서 돌아보지도 않고 한마디 던져버렸다.    이것이 종로구나! 넷은 귀에 익은 네거리에 이르었다. 동남쪽에 유명한 종각이 서있고 그와 골목 하나를 사이둔 모퉁이집은 지물전이였다.   《지물전이라! 우리 여기 들어가 구경 좀 하자꾸나.》    삼룡이가 앞장서고 다른 셋은 그의 뒤를 따랐다.    뒷꽁무니에서 지물전으로 들어가고있던 기학이는 벽가에 놓여있는 장방형모양의 넙적한 돌에 눈길이 갔다. 그건 보통의 돌이 아니였다. 석수쟁이 손에 잘 다듬어진 하나의 비석이였다.  눈주어 자세히 보니 비면에는 이런 글발이 새겨져 있었다.                          《洋夷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               쳐들어오는 오랑캐를 막아 싸우지 않으면 화친이고                       화친은 곧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무심결에 발견한 그것은였다.    대원군이 섭정을 하고 있었던 지난때의 10년간 그가 구미열강들과는 강경히 맛서서 추호도 타협하지 않았던 그 완고불변의 태도를 표시한 것이다. 대원군의 섭정이 막을 내리자 1872년 2월 민비일파는 종로네게리에 세웠던 이 척화비를 뽑아버리고 대원군에 의하여 철페되였던 만동묘까지 다시 설치할 것을 명령하였을뿐만아니라 서원들을 전면적으로 복구시켰다. 대원군의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반역이였던 것이다.    네 친구는 버려진 를 보면서 제각기 한동안 면상에 잠기였다. 그러면서 누구도 자기의 감정은 내비치를 않았다. 어쩐지 복잡하고 구슬픈 감정만이 가슴을 파고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왜들 말이 없나? 이 비석을 보고 무감각해진거야 아니겠지? 기호, 네가 어디 먼저 말해보거라.》    기학이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기호를 입열게 만들었다.   《쳐들어 오는 오랑캐는 응당 싸워 막아야지. 이건 내 맘에 드는 구절이다. 그런데....》   《아래구절은 맘에 안든다 그거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이고 화친은 곧 나라를 팔아먹는거라. 하다면....》   《하다면 어쨌다는거니?》   《문제는.... 생각해봐라, 국가와 국가지간 외교를 건립해 서로간 관계가 좋아진다면, 그래서 국가발전에 유리하다면 화친을 해야겠니 하지 말아야겠니? 내가 보기에는 이 비문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믐 것 같구나, 가장 치명적인!》   《이 척화비에 대원군의 완고한 쇄국사상이 집중돼있구나!》    삼용이가 우쭐 나서며 하는 말이다.   《삼용아, 네가 보겐 쇄국정책이 어떠냐?》    성묵이가 물었다.   《난 이 척화비를 다시금 조선 8도 방방곡곡에 일떠세웠으면 좋겠다. 당장.》   《건 왜서?》   《왜놈이건 양놈이건 안들어오게말이다. 봐라, 그놈들 들어와서 나라가 망태기되고있잖아. 그래서 난....》   《그래서 넌 쇄국주의를 다시쓰자 그 말이냐? 에잇, 바보녀석!》    성묵이는 손가락으로 삼용의 머리를 뚱겨주었다.   《삼용의 주장 영 틀리는건 아니야. 문을 열지 않았더면 오늘같이 이 꼴루는 되지 않았을거다. 개혁을 한답시고 문을 열어 승냥이만 끌어들였지 뭐야. 차라리 척화를 그냥 하기만 못한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기호가 삼용의 역을 들어서 하는 말이였다.   《나라일 글러지는걸 넌 그래 문을 열구 안열구에 달렸다는 그거냐?》    기학이가 캐고 들었다.   《그렇잖구, 조선은 차라리 개혁을 하노라 떠들지두 말았어야 좋았을걸 그랬어. 괜히 죽도 밥도 안되고.... 그통에 외세가 침범해 나라꼴이나 망태기루돼가구.... 안그렇냐?》   《너 그거 잘 생각해보고 하는 말이냐? 좋다, 그럼 어디 대답해봐. 일본은 쇄국이냐? 개방이냐?.... 우리 보다 형편없이 락후했던 일본, 그 일본은 왜서 발전하게 되었니? 너도 알다싶히 국문을 열고 유신을 해서 발전한게 아니냐. 그런데 봐라 우리는 어떤가구. 국수를 기르나? 개혁을 권장하나?....》    기학이는 변론을 하려고 들면 끝이 날 것 같잖아 여기서 끝냈다.    한강을 건너보고 남대문으로 들어가 덕수궁을 지나니 경희궁이 가까이있었다. 동쪽켠에 동에서 서쪽으로 뻗어오다가 서남쪽으로 방향을 돌리고있는 어름에서 종로와 세종로가 합치고 있었다. 북으로 곧게 뻗은 세종로는 경복궁에 이르러 끝나고 있었다. 그 북쪽은 북악산이다. 북악산 뒤 북한산성과 서북쪽의 인왕산에서 계속 이어져서 북으로 들어간 북한산성은 금희동의 네친구가 한번 꼭 돌아보자고 맘먹은 력사유적지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3일간 묵고 돌아갈 계획을 하고 떠나온 것이다.    어디건 가서 아침식사를 때리고봐야 했다. 그래서 음식점을 찾아가려는데 이때 누군가 경무청 어디 종로에 사람의 시체가 나졌다고 해서 그것을 보러 간다고 했다.    《우리두 가보자! 가자! 가자!》    삼용이가 먼저달려가며 팔을 홰 홰 내저었다.    이쪽의 셋은 얼낌덜낌에 뒤를 따라서 뛰여갔다.    과연 종로가에 웬 사나이 시체가 하나 아니고 둘이나 버려져 있었다. 하나는 복부에 칼을 맞고 하나는 뒷잔등을 뚫고 들어간 탄알이 앞가슴을 헤쳐놓았는지 머리를 땅에 박고 엎딘채였는데 시체에서 나온 붉은 피가 바닥에 즐벅했다.    벌써 수많은 구경군이 모여 있었다. 그 두 시체를 맨먼저 발견한 사람은 인력거꾼이라고 한다.   《여기 사람죽었소! 사람죽었소!》    하고 그가 덴겁한 소리를 련속 질러대서 행인들은 모여들었던 것이다.    사자(死者)의 입은 옷이 보통사람과는 달라서 모두들 이는 틀림없이 지체높은 고관일거라 했다. 기학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누가 알렸는지 순검 둘이 달려왔다. 인력거꾼은 그때까지도 현장을 피하지 않고있다가 마치도 심문을 받듯이 자기가 이 두 시체를 발견하게 된 경위를 공술했다.    《아니 이게 누구여? 김홍집이 아닌가! 총리대신이 어떻게 이모양으루 됐나?!.... 저건 정병하구!》    행객들 중 죽은 자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이렇게 웨치는바람에 모인 사람들은 더 크게 놀랬다.    《궁궐에 변이 났다!》   《사변이 났다!》   《이놈의 세상이 어쩔라구 이래?》   《밤자고나면 새 변이니 기가 차서 원!....》   《아무렴 총리대신이 이모양이 되다니!....》    급기야 벌집터진 모양으로 사람들은 중구남방으로 마구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또 무슨 변일가? 아닌게 아니라 밤자고나면 변이 새록새록 생겨나니 실로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세월이였다!    부녀, 아이, 로인.... 여럿이 허둥지둥 달려오고 있었다. 피해자 가족의 식솔들이였다. 소식을 듣자 넋담이 떨어진 그들은 제집사람의 주검을 보더니만 거의 반실신이 되어 엎어지고 매달리며 통곡했다.     《어이구 기차라, 이게 웬 일인고?.... 이게 웬 일인고?....》   《어느 놈이 이런짓을 했나, 어느 놈이?....》   《하늘도 무심하지, 어쩌면 백주에 이런 짓을 한단말이요!....》    살인자를 저주하고 세월을 원망하면서 어찌나 구슬피 우는지 듣는이들은 구곡간장이 끊어질것만 같았다.    《친일을 했으니 죽어 싸지.》    모여든 사람속에 누군가 이렇게 토라진 음성으로 빈정댔다. 그에게 눈총을 놓는 사람이 적잖았다. 안무렴 이런 장면을 당하여 그따위로 빈정거리다니. 그같이 빈정거림은 인성을 잃은자나 죄칠 망언으로 여겨졌던것이다. 어쨌건간에 남의 불행을 자기의 행복으로 삼는 그 자체가 악행이였다.   《김홍집내각이 모두가 과연 친일주구였을가 아니면 일본의 원조를 받아서 혁신을 하려했을가, 그 량자를 똑똑히 갈라놓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으니까말이다.》    기학이는 자기의 생각을 이같이 토로하고나서 계속이었다.   《이 참안은 친로파들이 저지른 죄악일수도 있다. 정치란 야심적이여서 그 어떤 비렬한 수단이든 가리지를 않는거다. 친일파든 친로파든 무릇 외세에 아부하고 굴종하는 자들은 모두 역적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치부될 때이다.》    그는 남의 선전에 쉽사리 미혹되지 말고 자기 견해를 세우고 시세를 랭철히 관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학의 이러한 주장은 과연 틀리지 않았다.    지난 1월 9일에 웨베르가 교체되여 그의 후임으로 스페르가 조선주재 로씨야공사로 부임되여 왔다. 그러나 웨베르는 로씨야로 인츰 돌아가지 않고 친로파의 첫인물인 리범진 등과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고 한가지 문제를 밀의하였으니 그것인즉 다른것이 아니라 민비가 생전에 여러해나 신변에 두고있었던 엄상궁을 고종 리희의 품에 넣어 그로 하여금 을미참변을 조작한 일본에 대해 원한을 품게하는 것이였다. 엄상궁은 웨베르가 시키는대로  겁을 집어먹는 고종을 위안했다. 그러면서 한편 일본은 왕까지 해치려든다면서 고종 리희더러 어서 피신을 해야한다고 구슬려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종 리희는 로씨야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로 돼버린 것이다.    2월 11일, 그들은 로씨야병사 50명을 신무문(神武門)에 밀파하여 궁녀의 가마로 상(上ㅡ고종 리희)을 태워서 정동(貞洞)에 있는 로씨야공관으로 빼돌리였다. 이것이른바 조선력사에서 수치로 기록이 된 사건인 것이다.    고종은 로씨야공관에 도착하자마자 즉각 새 내각을 조직하였다. 그리고는 이전의 내각성원들을 모두 역적으로 선포하고 나라의 정치가 잘못된 책임을 그들에게 전부 넘겨씌웠다. 위베르공사에 의하여 조작된 연극이였다. 그러면서 고종은 한편 경무사 안환을 불러다 혁신관료 김홍집과 그의 내각의 핵심성원들인 정병하, 유길준, 조희연, 장박 등 다섯대신을 역적이라 하여 잡아죽이라고 칙령을 내렸던 것이다.    친로파의 이범진과 이운용, 이완용 형제는 궁중에서 사변이 일어났다는 소식(고종왕이 짜리로씨야 공관으로 옮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궁궐안으로 들어오는 김홍집, 정병하 등을 체포하여 이를 경무청에 보내여 악한들로 하여금 참살하게 하고 그 시체를 종로에 끌어내다가 던져버린 것이다.    어윤중은 귀향도중에 피살되였다. 이로써 친일파로 여겨온 그 세력은 일소되고 정권은 완전히 친로파가 독점하고말았다. 한데 새로 수립된 정부는 의병들을 도와나설 대신 의병투쟁을 탄압하는데로 나아갔다. 그들은 각 지방에 파견된 정부군으로 하여금 의병들을 계속 탄압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이때 일본은 1894ㅡ1895년 중일전쟁에 동원시키였던 정예부대인 위해위점령군의 일부를 조선에 끌어다 50만발의 탄약을 휴대시켜 의병을 토벌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당면 조선의 형세였다.....       한편 금동리의 네친구는 서울시내에 있는 여러궁전들을 수박겉핧듯이 바깥에서 모양이나 대충보는 정도였고 북한성만은 제대로 보고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의정부(議政府)이서 생각밖에 김호선생을 다시만나게되였다. 그도 서울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었다. 김호선생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이전부터 조선을 제 손안에 넣어보려는 로씨야의 야심적인 움직임이며 수완이였다고 찍어말하면서 그 내막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이제는 똑똑히 알았습니다. 이 일본침략자의 야수성을 적라라하게 폭로했다면 은 짜리로씨야의 교활성을 적라라하게 폭로한 것입니다. 안그렇습니까?》     기학이는 곰곰히 듣고나서 이같이 결론을 내렸다.     김호는 말은 안하고 그저 머리를 끄덕이였다. 속으로 그렇지 너의 판단이 명철하구나 하는것 같았다.     다른애들이 그와 몇몇 인물에 대해서 캐물었는데 김호는 먼저 이범진(李範晋)에 대해서 자기가 아는것만큼 간추려 알려주었다.     이범진은 올해 나이가 43살인데 친로파의 거두로서 그는 문신(文臣)이였다. 훈련대장 이경하의 아들인데 고종 16년에 병과로 급제했고 이번의 을 성사시켜 공이 많은 것이다. 그랬다고 요즘 법무대신으로 발탁이 된 것이다. 그와 반대파였던 어윤중은 귀향하다가 도중 용인(龍仁)에서 붙잡혀 피살되였다. 어유준 그 사람은  자가 성집(聖執)이고 호는 일재(一齋)인데 고향이 함흥이다. 탁지부대신을 지낸바 있다. 그는 병자수호조약후에 일본을 시찰하고 개화파사상을 고취한 것이다. 그리했다고 친일파로 몰린것이다.    금희동의 애들이 종로에서 시체를 본 정병하역시 그러했다. 그역시 개화파사람이고 문신이였던 것이다. 그는 유대치(劉大致)의 문하에서 어윤준과 교유하였으며 전운서(轉運署)에 있을 때 한, 청 량국의 외교에 활약했던 것이다. 김홍집의 삼차내각에 농상공부대신으로 되어 개화정책에 힘썼다. 그러다가 잘못된 것이다.   《김홍집에 대해서는 너희들도 잘 알것이니 이만 략하고.... 친로파 내각이 벌써 공포되지 않았냐. 문제의 인물은 올해 28살밖에 안되는 이완용이네라. 미대리공사로 있더니 리부참판에 올랐다가 외무협판으로 더 높이 뛰여올라 이제 더 안하무인격으로 권세를 부리는판인데 사람이 오만하고 답즐질이 있어서 제 일신의 리익을 위해서는 이제 어느때 어떤 철면피한짓을 할지도 모를 인간이네라. 그런자가 왕족이라고 이 나라를 운전하려드니 장차 나라꼴이 어떻게 될지 참으로 근심이 되는구나.》    김호는 이러면서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개인의 관찰로부터 도출해낸 견해인것만큼 그저 참고로 알아두라면서 아무때건 외국에 망명을 갔던 개화당 사람들이 국정을 바로잡아보려고 다시돌아올 날이 있으리라했다.    기학은 자기앞에 나타난 김호를 다시금 여겨봤다. 속으로 네가 대체 뭘하는 사람인데 국가내정에 대해서 아는것이 그리도 많으냐?... 그의 정체를 몰랐기에 의혹이 더 짙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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