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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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장편《반도의 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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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반도의 혈 ㅡ제2부 29. 댓글:  조회:4482  추천:0  2011-08-23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9.    1914년도는 서일이 시교사(施敎師)의 의무를 리행하느라 바삐보내는 한해였고 따라서 그만큼 눈부신 성과를 거두기도해서 즐거움이 부푸는 한해이기도했다.     산간에 진달래꽃이 곱게 피고 뻑꾹새가 봄을 알릴 때 조성환이 선문도 없이 왕청에 나타났다. 가쯔라 다로오를 없애버리지도 못하고 거제도에 류배를 가서 1년간 갇혀 고생하다가 풀려 나온 사람이였다.    서일은 생사를 같이하는 지우의 만남을 무등 기뻐하면서 축간 몰골을 보는 순간 가슴이 아파나기도했다.    《그지간 고생많으셨겠습니다. 저는 썩 늦어서야 선생님이 그같이 되신걸 알았습니다.》    《괜히 옆사람까지 시름겹게 만들어서 미안하오.》    서일의 인사에 조성환이 되려 사과를 했다.    이홍래가 그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조선생, 언제 또 거제도에 가시렵니까?》    악의없는 놀림이 반갑다는 인사였다.    《내가 이제 가면 대마도엘 갈거우. 그래두 올건가?... 사람이 못나게. 그러다가 잡히면 어쩔라구. 난 진짜 거렁뱅인줄 알았지.》     조성환이 위험불구하고 자기를 보러갔던 이홍래를 담통이 불어난 미친사람이라 해서 모두들 웃었다.      《개는 무서워하는 사람을 무는거우다.》    이홍래는 언제나와 같이 배포유한 대꾸질이였다.    신팔균은 이름만 들어왔지 조성환을 처음만난다.       《내가 중광단원이 오백이 넘는다는 소릴 들었소. 군대식 훈련도 한다더구만. 그래 재미는 어떻소?》    《재미를 묻습니까, 닭걀삶은 물같습니다.》    《그리두 싱겁단말이오?》    《실탄련습 한번 못해보는 훈련인걸요.》    신팔균의 맥빠진 대답이였다.    《무장이 얼마나 되오?》    《론할 여지가 없습니다. 보시다싶이 신교련이 차고있는 저 닭다리(권총)까지 해서 모두 여섯자루밖에 안됩니다. 장총이 다섯자루지요. 그나마 말짱 퉈퉁(土銃)입니다. 중국사람들한테서 샀습니다. 삼팔식이니 벼르단이니 하는건 말만 들었지 난 아직 구경도 못했습니다.》    서일은 조성환에게 무기의 불비로 중광단은 지금 교육과 계몽에 중점을 두면서 도수훈련을 결부하는 수 밖에 없음을 말했다. 물론 무기는 구입할 수 있는것만큼 구하기에 노력하리라면서 지금갖고있는 5자루로는 경비를 서고있다고 했다.    조성환은 경비대를 조직할수있게 된것만도 대단한 일이라 치하를 했다.    서일은 중광단은 어쨌든 발전할것이라 신심있게 말해놓고나서 만주에서는 총보다 구하기 쉬운 것이 말인데 자기는 장차 기병대를 만들 계획이라는 것 까지 알려주었다.    《되겠지, 되구말구!》     조성환은 머리를 주억거렸다. 서일이 절대 빈말은 하지 않는 옹골찬 사람이라는걸  그는 잘알고있는 것이다.    《김동삼이 나보고 서선생을 만나거던 안부를 전하라구 하더구만. 이젠  련계도 가지자면서. 거긴 모두들 잘있소.》    조성환은 통화현(通化縣)에 들려 지금 그곳에 있는 김동삼을 만나 며칠간 지내고 곧추 왕청으로 향했노라면서 귀바퀴를 세우고 들어둘 새로운 소식도 한가지 갖고왔다.    지난겨울(1913) 김동삼을 중심으로한 동지들의 발의로 독립투사를 길러내는 기관 하나가 새로 창립되였는 것이다. 그들은 인적이 뜸한 통화현경내의 소북차(小北岔)라는, 맹수가 우글거리는 망망한 밀림의 심산절역(深山絶域)에다 백서농장(白西農場)이라 부르는 기관을 설치하고 지금 수십명의 청년건아들을 모집하여 주경야독(晝耕夜讀)속에 둔전제(屯田制)식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군사훈련을 하고있다는 것이다.    주경야독, 둔전제ㅡ 들어보니 이쪽이나 그쪽이나 량쪽 다 형편은 똑 같았다. 중광단이나 백서농장이나 무장준비는 못되여서 실탄련습같은건 꿈도 못꾸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이것은 직접적으로 독립군의 력량을 배태하고있음을 의미하거니 얼마나 보귀한 존재인가! 인원수를 보면 왕청쪽이 훨씬 더많다. 서일은 무기만 갖출수 있다면 대오를 500명아니라 1000명, 2000명으로 늘이고푼 생각이 무럭무럭 났다. 든든한 후원이 있는것이다. 그건 바로 대종의 교도들이였다!              가마히 우에 계시사 한으로든,            보시며 낳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                조성환은 우리의 광복운동은 만주와 씨베리아를 책원지로 해야한다면서 자기도 둔전제(屯田制)를 할 자리를 잡아야겠노라했다. 그가 안중에 둔 곳은 멀리 안쪽에 있는 오운현(烏雲縣)이였다.     《그곳으로 가시렵니까. 그렇다면 저하고 같이 떠납시다. 해림까지 동무해드릴수 있습니다. 저는 그쪽을 한바퀴 돌면서 시교를 해야겠습니다.》    서일은 해림, 녕안, 신안진, 동경성 등지에는 아직 포교가 되지 않아 대종교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상황임을 알려주면서 동포들의 잠자는 의식을 하루속히 불러일으켜야 하겠다고 했다.    이틀후 두사람은 행장을 차리고 북쪽을 향해 먼길을 떠났다.    해림에 이르러 조성환은 기차에 올라 할빈쪽으로 향하고 서일은 남아서 그곳부터 포교를 하기 시작했다. 해림에는 소학교가 있었다. 서일은 학생들에게 나는 조선에서 건너 온 아무갠데 너의 부모님들이 꼭 들어둘 재미나는 얘기를 하러 왔네라 가서 알려 속히 학교로 모이도록 하거라 시켰다. 한편 선생들도 동원해서 회의를 소집케했다.      흰 베옷을 입고 목에 단주(檀珠)를 건 사람이 이 고장에 나타나긴 처음이라 모두들 신기하게 여겨서도 모일것이라 생각하면서 서일은 혼자소리로 중얼댔다.    《모든 인간이 다 깨닫거늘 오직 이 무리가 아득하고 온 누리가 다 즐기거늘 오직 이 겨레가 괴롭사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세검한님(三神上帝)”이신 우리 “한배(天祖)”시여! 거룩하게 다다르사 큰 복을 거듭주시오며 밝으시게 비취사 큰 도를 다시 베푸옵소서.》       이같이 빌기를 마치고 “三一神誥”를 번지는데 사람들이 정해진 교실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학교선생 하나가 다가와 어느덧 반수이상이 모여 기다리고있으니 강연을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했다.    모인사람들은 자기들과는 다른 서일의 차림새를 보고 벌써 신기한 무엇을 느끼는 것 같았다. 실내는 조용했다. 옷을 정갈하게 입고 행동이 단정해보이는 젊은이 하나가 한발자국 앞으로 나오더니 두손모아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나서 입을 여는것이였다.        《선생님, 저는 전에 서당을 좀 다녔습니다. 그래서 사서, 삼경을 읽어봤고 유문(儒門)에 놀라 점차 백가(百家), 구류(九流)의 글들을 읽어봤습니다만 아직도 깨치지 못한 것이 많고 갈래를 잡기도 힘듭니다. 선생님을 만나고 보니 진종대교를 크게 닦으시는 분같고 그래서 중생, 후학을 넓게 건지시라 믿어 반가운 뜻에서 설교를 들으렵니다.》    서일은 그가 말하는 품이 유식하고 진정스러워 친절스레 대했다.    《고맙소. 건데 별호는 어떻게 부르오?》    《저의 별호는 삼사생이라 부릅니다.》    《三思生이라 세 번을 생각한다?》     모인 사람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일은 젊은이의 공손한 대답을 듣고 목청을 다듬어 얘기를 했다.    《옛적 지나, 로나라에 계문자란 이가 있어서 무슨 일이든지 세 번씩 생각한 뒤에 행하더니 공자께서 들으시고 말하기를 “두번생각함이 옳다” 하셨지요. 이것은 생각을 여러번 하면 유예미결하는 버릇이 생김을 경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용진성을 기르게 하심이어늘 이제 그대가 오래 유문에 있어서 성훈(聖訓)을 받들지 아니하고 이같이 별호를 지으니 참으로 이상하도다.》    젊은이는 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름이 그 실상을 지나거나 실상이 그 신분에 넘치면 그것은 곧 참람(僭濫)이라 저는 본래 어리석은 머리로서 비록 옅고 낮은 이치라도 잘 모르거니와 더욱히 종교철학같은 것은 그 뜻이 너무나 아득하여 한울처럼 높은 지라 섬돌로써 오를 수 없으매 바다같이 깊은지라 말(斗)로써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한데 이 교 저 교가 저가끔 횡설수설이 제가끔 “내가 옳다”하니 이는 까마귀의 암수(雌雄)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믿는이들도 다 저의 교문만을 알고 감히 그 테를 벗지 못하니 이는 이른바 앵무새의 입내라 저는 그 뉘가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며 뜻이 또한 한결같지 않으므로 무슨 리치를 생각하든지 처음에는 의심이 아니나는 것이 없고 다음은 믿음과 서로 다투다가 세 번쯤 생각한 뒤에야 겨우 믿음을 얻으니 이것은 저의 천성이라 다시는 어찌할 수 없으므로 계문자의 일을 본받아서 유문에 죄를 얻었거니와 요사이 미련한 무리들이 아무일에나 조심하지 않고 스스로 용감성이나 많은체하야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득 버리고 문득 취하면서 한마디로 결단함을 사나이의 능한 일로 알다가 만일 좋지 못한 결과를 얻으면 마치 사향노루가 제 배꼽을 물어 떼듯 하는 이도 많으니 저는 이것을 매우 미워합니다.》    서일은 웃었다.   《그대의 뜻인즉 매우 착하거니와 그대의 생각은 너무 고집스러우니 나는 그대의 앞길을 위하여 아까와하노라.》   《어찌 이르심이니꼬?》   《세번 생각하는 것이 어찌 천성이리오. 한얼(天神)께서 사람을 내리실 때에 누구는 두텁께 누구는 엷게 하는것이 아니라 성품과 목숨과 정기 이 세가지는 참되고 가달이 없으며 어짐과 지혜와 용맹 이 세가자가 온전해야 치우침이 없으며 오직 그 받은바 품질이 한결같지 못함으로 세상 물욕에 끄을리면 “뭇사람”이 되고 그렇지 않아야만 “밝은이”가 될지라 그런즉 공자, 로자, 석가, 예수, 마호메트가 다 별사람이 아니요 오직 그 마음을 괴롭게 하야 자기의 본 성품을 닦아서 우선먼저 깨달았을 뿐이니 우리도 마음만 두고 보면 반드시 공자, 로자, 석가, 예수, 마호메트가 될것이로되 우리가 먼저 구하지 않으면 또 뒷세상에 나고 알음이 넓지 못한 까닭에 옛날 성철(聖哲)을 스승할 따름이다. 그러면 나의 아는 바가 공자, 로자, 석가, 예수, 마호메트들만 못한 까닭에 그들의 도덕, 지식을 본받아서 스승으로 섬기려니와 만일 그네들과 비슷하다면 그 도덕, 지식을 비교하야 벗을 함도 옳고 또 그들에게 지낸다면 그 도덕, 지식을 더욱 넓히여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니 이것은 한얼께서 밝게 정하신 진리요 한울나라(天國)에서 길이 쓰이는 공법(公法)이라 이 진리, 공법에는 한얼과 사람이 한가지요 너와 내가 다름없거늘 이제 그대가 이름을 판박아 두고 아교기둥에 비파를 타듯이 생각을 고치지 않다가 세월이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야 하루아침 거울속에 흰 털이 비취는 때이면 공연히 한가지 재주로써 나무털기(株)를 지킨 탄식이 저절로 나갈것이니 어찌 여러번 생각하면서 헤매든 까닭이 아닐가! 이것이 나의 아까워하는 바이로다.》    삼생은 감사하다면서 말했다.   《저는 공부없는 사람이라 소견이 적고 생각이 아득하야 못된 버릇을 일삼다가 오늘에야 선생님의 밝으신 말씀을 들으니 어두운 거리에 초불을 만난 듯이 방향을 대강 짐작할만하거니와 저같은 사람은 본래 배워도 곤난한 뒤에야 겨우아는 무리라 어찌 나서 아는 성철을 바래오리까?》   《나서 아는것도 그 깨닫는 재주가 뭇사람보다 좀 다를뿐이요 사물에 대하야는 반드시 배운 뒤에야 아는것이라 그러므로 공자같은 대성으로도 례락(禮樂)을 남에게 물으셨으며 또 늙어서 주역(周易)을 읽는데 가죽책심이 세 번 끊어졌다하고 로자같은 상진(上眞)으로도 주나라에 주하사(柱下史)가 되야 지식을 넓히셨고 석가같은 대각(大覺)으로도 설산에서 6년동안 또 가야산(伽倻山)에서 3년동안 도를 닦으셨고 예수의 청고하심으로도 사막에서 40일의 금식기도를 하셨고 마호메트의 활달하심으로도 산굴에서 10년동안 잠심(潛心) 수도를 하셨으니 이른바 성철(聖哲)이란 이들도 힘써 닦은 뒤에야 크게 깨달은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항상 말씀하기를 성철도 별사람이 아니라 하노니 그대로 잘 닦으면 곧 성철이요 성철도 아니닦으면 또한 뭇사람일 것이다.》    삼생은 명심해 듣고나서 꿇어 앉아 입을 열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참 어리석은 병을 다스리는 정문침이요 아득한 길에서 인도하는 지남차라 저같은 불초로도 또한 깨닫는 길을 찾게 되오니 천만번 감사하옵거니와 다시 묻잡노니 대교에서는 진리를 풀어 놓은 경전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삼일신고로 진리를 강구하노라.》   《삼일신고의 내용은 어떠합니까?》    이에 서일은 쭉 이야기를 하니 듣는 이들은 모두가 마음이 동하여 혹은 흥분하고 혹은 격동하기도했다.    이날의 시교도 잘되여 소문이 퍼져 여러 마을이 다투어 그를 모시였다.    서일은 삼사생이라는 젊은이와의 대담을 서언으로 작성하여 훗날 유명한 경전을 저술하게 되었다.    서일은 신안진에서 방금 포교를 끝마치자 뜻밖에 로씨아에서 건너와 지금 밀산에 자리잡은 한고향 사람 한기욱을 만났다. 그도 포교를 하러 녕안에 왔다가 서일이 이 지방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온 것이다.   《어른님께서 마침 잘오셨습니다. 저하고 같이 발해국유적지를 보러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때의 5경 15부, 62주를 다 돌수는 없어도 상경룡천부야 지척에 있으니 왔던 걸음에 들려 구경을 하고감이 마땅하지 않을가요.》   《거 참 좋은 생각이군! 그렇게 하지.》    이리하여 두 사람은 곧 녕안의 동경성으로 향했다. 그곳이 바로 발해국의 수도 상경룡천부터인 것이다.    성은 둘레가 수백리나 되는 평탄한 분지가운데 자리잡았다. 성의 남쪽에는 아름다운 경박호가 있으며 거기에서 흘러내리는 목단강은 성의 남쪽과 동쪽 및 북쪽으로 감돌아흐른다.    이곳은 땅이 기름지고 관개에 편리할뿐만 아니라 주위가 산으로 둘러막혀서 자연의 요새를 이루었다. 자연의 경치가 뛰여나게 아름다운 이곳에 수도를 정한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였다. 력사기재에 보면 성은 굉장히 크게 쌓았는데 외성, 궁성, 황성으로 되었다고 한다.    외성은 길이가 40리가 좀 넘는다. 성벽은 속을 돌로 쌓고 거기에 흙을 씌웠는데 지금 남아있는 부분을 보니 그 높이가 3m나 되었다. 외성 성밖에는 성벽에 잇대여 해자를 둘러팠다. 외성에는 동, 서 두 벽에 각각 2개씩 남, 북 두 벽에 각각 3개씩 모두 10개의 성문이 있었다.    성안에는 대칭되는 성문을 련결하는 큰 길과 그것과 평행하는 길들을 내서 성안을 바둑판모양으로 정연하게 갈라놓았다.    발해는 외래침략자들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보위하기 위하여 성을 많이 쌓았다. 돈하에서 녕안에 이르는 목단강류역에 특히 많이 집중되여있거니와 그 밖의 지역에도 많으며 발해의 령역으로서 변방에 속하는 고장에도 있는 것이다. 서일은 함경남도 북청군에 있는 청해토성역시 발해국이 쌓은걸로 알고 있다.    상경룡천부의 옛 유적을 보노라니 두 사람 다 감회가 새로워진다.   《이웃나라들로부터 으로 불리우면서 228년간 존재하였던 선조의 나라,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와 우리 배달민족의 전통을 이어오다가 사라져 버린 발해국의 력사는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군요. 한때 그처럼 강성했던 국가를 쇠퇴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였겠습니까, 중요한 요인은 바로 내부모순이였지요. 그것이 격화되니 나중에 거란에게... 본래는 고구려, 신라, 백제 그 세 나라가 통일되였어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중도반단으로 끝난 것은 전적으로 외세의존에 매여달린 신라통치배들의 사대주의 정책의 죄악적후과가 아닙니까. 제민족내의 분렬과 배신이 아니였다면 고구려는 망하지도 않고 고독한 발해국이 생기지도 않았을겁니다.》   《서선생은 발해력사를 잘 아시네!》   《일본학자가 쓴 글을 읽어본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외려 발해국의 력사에 대해서 더 관심하고 흥취를 갖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서일은 많은 사람이 삼국력사에 대해서는 좀 관심하나 발해의 력사에 대해서는 등한시하거니와 지어는 잊고있음에 유감스러웠다.    력사를 잃으면 민족을 잃고 민족을 잃으면 나라를 잃고마는 것이다.    발해는 지난날 배달민족의 력사에서 가장 강하였던 고구려를 계승한 봉건국가로서 698년에 건국한 이래 228년동안 존재하면서 옛고구려에 대등한 넓은 령토와 강력한 국력을 가진 강대한 나라로서 이라는 이름으로 그 위력을 떨치였던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 나라를 되찾기 위한 료동지방 고구려류민들의 줄기찬 투쟁이 벌어졌다. 이때 고구려인부대를 지휘한 사람은 이전의 고구려국가의 귀족이며 유능한 군사지휘관이였던 대조영과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이였다. 이들은 력사적친선관계에 기초하여 말갈인의 추장 걸사비우가 지휘하는 말갈인부대, 거란인부대와 련합하여 당나라군대와 맛서 싸웠다.    투쟁이 승리적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 돌궐족이 당나라를 도와 쳐옴으로 시국은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거란군의 두목은 당나라군에 투항하여 부대가 붕괴되였고 말갈인부대도 걸사비우가 전사하자 붕괴되고말았다.    이때 고구려군 총지휘자였던 대조영은 아버지 걸걸중상과 함께 패전으로 분산된 말갈군을 다시 수습하고 집결시켜 력략을 정비 보강한 다음 당나라군을 유인하여 천문령에서 거의 섬멸하여버렸다.    698년초에 있은 천문령전투는 고구려사람들의 국가재건ㅡ발해국창건과 직접 관계된 의의깊은 전투였다.    천문령전투에서 결정적승리를 달성한 고구려사람들은 원래의 지향대로 계속 동쪽으로 진군하여 료하를 건느고 다시 송화강상류 휘발하를 건너 부이령산줄기의 동쪽기슭 동모산에서 일단 자리를 잡고 정착하였다.(오늘의 돈화현 오동성자리가 있는 곳. 후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수도를 옮긴거다.)    대조영은 이해에 의 창건을 선포했다. 이란 나라의 위력을 사방에 떨치는 큰 나라라는 뜻인데 713년에 나라이름을 으로 고치였다. 발해란 이전의 고구려때와 같이 멀리 서남쪽 발해연안까지도 그 국력이 미칠 것을 희망하여 붙인 이름이다. 진국ㅡ발해국의 제1대왕으로 된 대조영은 지난날 력사에서 이라 불리여왔다.    고구려사람들이 새로 세운 나라 이름을 처음에는 진국이라했다가 발해라 고쳤지만 국내외적으로 보통 또는 라는 옛이름을 그냥 관습적으로 쓰는 일도 많았다.    발해국이 창건됨으로써 고구려사람들은 다시 옛땅에서 자기 주권을 가지고 생활을 창조해 나갈 수 있게 되었으며 당나라는 더는 이웃 고구려류민들과 신라에 대한 침략을 감행할 수 없게 되었다.            발해국의 종족구성은 주로 고구려사람과 말갈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말갈인이 수자적으로 많기는 하였지만 발해국안에서 고구려사람들의 한갖 동맹자였을 뿐이다. 지위와 역할에서의 차이는 벌써 발해국창건을 위한 투쟁초기부터 조건지어져있었던 것이다.    발해사람들 자신은 언제나 자기들을 고구려사람이라고 하였지 그 이외의것이라고 한 일은 없다. 727년 발해 제2대 무왕 인안 8년에 왕은 바다건너의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발해국의 창건을 알리고 그와 국가관계를 시작하는 첫 국서에 명확히 밝히였다.       “속본일기” 10.         일본왕도 이를 승인하고 아래와 같은 답신을 보냈다.      “속본일기” 10.      다음해인 758년, 발해 제3대 문왕 대흥 21년에 왕은 일본왕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자기를 직접 “고려국왕 대흠무”(흠무는 왕의 이름)라고 하였고 이에 대한 일본왕의 답서도 “고구려국왕”에게 보내는 답서로 되었다. 이는 발해나 고구려나 완전히 뜻이 같은 말로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771년 대흥 34년에 문왕이 일본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발해왕실이 곧 즉 이라 선언했다. 이 사실은 자신을 고구려왕실과 같은 혈통으로 간주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말기의 학자이며 관리였던 최치원은 당나라의 태사시중에게 보내는 편지와 다른 관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발해국에 대해서 말했다.               (“삼국유사” 권1 기이 말갈발해)      발해는 침략전쟁으로 령토를 확장하려 든 거란에 의하여 멸망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배달민족의 국가였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중국력사책들에서도 발해멸망후 20년내(945년)에 발해력사를 처음으로 전반적으로 쓴 발해전의 정확한 력사기록들을 토대로 하고 다시 그것들을 똑똑히 따져서 발해를 옛고구려의 계승자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어리석은 통치자들이 딴심보를 품고 력사를 뜯어고치는 고약스러운 버릇이 생겨나고 있었다.                          서리찬 가을밤에                        은하수 유난히 빛나고                        나그네 고향생각나                        시름 더욱 깊어가네                          생각은 그지없이                        옛고향 달리건만                        다시 듣는 다듬이소리                        매여둘곳 전혀없네                          차라리 잠이 들어                        꿈이나 볼가 하되                        하그리 긴 수심에                        잠인들 차마 오리.               발해국의 시인 양태사의 이 시는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다듬이소리를 듣고 고국이 그리워 지은 것이다.    서일은 언젠가 당나라말기의 시인 온정균이 자기 나라에 왔다간 발해사람의 시작품을 두고 “그대가 남긴 시구들은 오래도록 중국땅에 전하여지리라” 라고 한것과 언젠가 일문잡지에 일본의 스가와라 미찌자네가 배정이 일곱걸음을 걷는 사이에 시를 짓는 시재라 하여 라 높이 평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났다. 발해시기 유명한 시인들이 많았건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전해지는 것은 양태사, 왕호렴. 배정 등 그 몇사람의 시뿐이다.      서일이 녕안과 해림일대에서 포교를 끝마치고 왕청에 돌아오니 그사이 신채호가 왔다갔다고 현천묵이도 계화도 알려주는것이였다. 서일은 그를 보지 못한게 대단히 섭섭했다. 신채호는 윤세복의 초청을 받아 봉천성 환인현으로 와서 그곳 동창학교의 교재로 쓸 국사저술에 착수하리라 한다.
27    반도의 혈 ㅡ제2부 28. 댓글:  조회:4290  추천:0  2011-08-23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8.                                 대종교가 중광단을 창립한 후 소식이 널리퍼져 찾아오는 사람이 늘 끊지 않았다. 찾아온다해서 다 받아주는 건 아니였다. 전에 군인질도 하지 않고 의병대에도 다니지 않은 사람은 집에 가서 안착하고 농사나 지으라고 권고해서 되돌려보냈다. 일을 하기 싫어서 찾아오는 자도 없는건 아니였던 것이다.     어느날 현천묵이와 한고향인 함북도 경성태생이고 서일과도 면목이 오랜 최익항이 문득 왕청에 나타났다. 그도 합병이 되고 왜놈의 통치를 받기 싫어서 만주로 건너온것인데 나이가 27살되는 팔팔한 청년 하나를 데리고 찾아왔다.    초면의 청년이 자기는 지난해 가을에 두만강을 건너왔는데 성명이 김영숙(金永肅)이고 태여나기는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홍성군이지만   원적은 논산군 양촌면 림화리라 했다.     서일은 그가 고향이 어디고 어디서 태여났건간에 그보다는 7살때부터 15년동안이나 漢學을 수업했다니, 서울에서 중앙학교 사범과를 다녔다니, 졸업하고는 국내 소학교에서 1년간, 만주에 건너와갖고도 동창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근무했다니 맘에 더 들었다. 그는 그가 경험도 있으리라 생각돼서 그보고 자기가 전해에 화룡현에다 대종교명의로 靑一學校를 하나 세웠는데 지금 거기에 박기호 부부가 가서 교편을 잡고있을 뿐 다른 사람은 더 없다, 그들 부부만으로는 감당키 어려우니 그쪽으로  가서 함께 근무해줄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김영숙은 시키는대로 하리라고 선선히 대답했다. 하여 서일은 최익항은 명동학교에 남겨 계화를 돕게 하고 김영숙은 화룡으로 보냈다.    서일은 후에도 지식인이 찾아 오면 거의 모두를 남겨두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학교에 보내여 교편을 잡게했다.    현천묵이 심권과 박승익이와 함께 김영숙을 데리고 화룡으로 갔다. 김영숙을 청일학교까지 데려다주고는 셋이서 서만, 남만, 북만일대를 한바퀴 돌고 올 계획이였다.  서일이 전해에 계화와 함께 이미 근처의 여러 학교들과 관계를 맺아 놓아 상호 교류를 하고는있지만 그보다는 동포사회전반을 료해할 필요성을 각별히 느끼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럼으로써 대종교를 알리고 중광단을 널리 선전할 수도 있는 것이였다.    이동호군수가 환갑이 되어 대종교 교도들이 동원하여 쇠여줬다. 그러다보니 마을잔치가 되여서 온 덕원리는 명절기분에 잠기였다. 이동호군수말고도 중광단에는 년세많은 독신이 여럿있지 않은가. 이덕수, 김기석 두 양반과 이달문, 장사학, 장기덕이도. 그들의 환갑도 이제는 모두 교도들이 차례차례 차려주리라했다. 고마운 일이다.    이동호는 군수였지만 안일한 벼슬자리를 과감히 버리고 나라를 구하려고 의병항쟁에 나선것이요 그 정신이 보귀하다하여 뭇사람의 존경과 애대를  받는것이다. 모두들 큰절을 올리여 그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이날 큰 돼지를 잡고 소도 한마리를 잡아 차린 음식이 푸짐했기에 온 마을 주민과 500여명 중광단원이 다가 배껏 먹고 함께 즐기였다.    이달문이 탈을 만들어 쓰고 나와 곱새춤을 추었는데 젊은이들이 겯달아 단군조(檀君調)에다 “어하어하”를 덧붙이여 노래를 만드니 춤판은 한결 흥을 돋구었다.                     백두산 돌아드니    (어하어하!)                   단군유업 이아닌가  (어하어하!)                   잃은 강토 찾아내고 (어하어하!)                   죽은 인민 살리랴면 (어하어하!)                   아마도 단군후예    (어하어하!)                   일체 단단이로세    (어하어하!)     그들은 “해명가”도 불렀다. 그리고는 각가지의 아리랑이며 타령을 불렀다. 어떤이는 풍자와 해학적인 노래를 즉흥으로 지어 부르기도 해서 춤판의 흥을 한층 돋구기도했다.                      까마귀란 놈은 검기를 잘 검으니                  구들장으로 돌리고 흥흥 좋다                        까치란 놈은 맵시를 잘 피우니                  기생년으로 돌리고 흥흥 좋다                    제비란 놈은 날기를 잘하니                  우편배달부로 돌리고 흥흥 좋다                    빈대란 놈은 빨기를 잘하니                  아편쟁이로 돌리고 흥흥 좋다                    벼루기란 놈은 쏘기를 잘 쏘니                  포수군으로 돌리고 흥흥 좋다                    황둥개란 놈은 문역을 잘 지키니                  보초군으로 돌리고 흥흥 좋다.              대종교에서는 개천절(開天節), 어천절(御天節), 중광절(重光節)을 굉장히 쇠였다. (후날 弘範 및 規制가 나와서 명절이 개정, 가첨되기도 했다)    오락이 거진 끝나갈 무렵에 나이가 쉰을 넘어 지숙한 로씨아손님 한분이 덕원리에 나타났다. 방금 연해주에서 건너왔다는데 계화를 찾고 있었다. 성명이 정해식(鄭海植)이였는데 이달문과도 구면이였다. 계화도 이달문도 만나자 무척 반가와하는 걸 보니 면식이 오래거니와 친분도 두터운 사이같았다. 정해식이 옴으로 하여 중광단 “로인회”에는 성원 하나가 더 불어나게 되였다.    《나를 받아주소. 나도 한배검의 자식이외다. 로씨아서 우리 대교에 중광단이 일어섰다는 소식을 듣고 왔지우. 축하를 합니다.》    정해식은 이러면서 멀리서부터 등에 지고 무겁게 갖고 온 재봉침 한틀을 중광단에 기증했다.    《두고 보오만 이제 집체복장을 만들자면 손이 많이 딸릴텐데 이놈을 부리면 일을 많이 해낼겁니다.》    재봉침을 처음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정해식은 녀인들 앞에서 기계를 다루는 법을 가르치기까지 했다.    계화는 이 재봉침 한틀을 기초로 하여 중광단에 복장대(服裝隊)를 세웠고 그 책임을 량현에게 맡기였다.    서일은 계화와 토론하여 돈이 만들어지는 대로 부림소와 말을 대량사들이기로 계획하고는 그 관리는 장기덕과 장사학에게 맡기기로 했다.    모두들 스스로 “로인회”라 지어 부르고들 있는 년세많은 분들의 숙사에 매일 김지 이지 모여서는 초신도 삼고 메투리도 삼으면서 마음속을 터놓고 하고푼 이야기를 했다.      정해식이 여기에 가담하여서 화기를 한층 돋구었다. 그는 漢文은 물론이요 거기에다 일어, 로어까지 능란해서 웬간한 젊은이도 따라못갈 얻기 드문 수재였다. 하여 서일은 그를 존경하면서 아끼였다. 정해식이 어느날 그가있는데서 자기가 소시적부터 친분이 자별했던 사람은 김형구였는데 그는 작고한지 여러해되고 이제는 그의  남은 아들 둘중 큰것이 이름이 김좌진(金佐鎭)이요 그가 불행을 당하는 통에 자기 역시 곁불에 속을 태웠노라했다.    《걔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갖구는 2년 5개월이나 옥생활을 하구 올 9월달에야 풀려나왔수다. 만기가 돼서  석방을 했다길래 내가 가 보구서는 로씨아에 갔다가 이리루 곧추온건데 사람의 일이란건... 이제 또 어떻게 될지....》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졌길래 옥살이는?...》    이달문이 묻는 말에 정해식은 화를 내듯이 어성을 높이였다.    《죄는 무슨놈의 죄여, 돈을 꾸러 갔다가 안주니까 급하기는 하지 완력을 좀 부렸던가봐, 그랬다구해서 그놈들이 강도미수로 판결을 했지 뭐요.》    《오, 그렇구만!》    서일이 두만강을 건너 솔가도주를 하기 전날 “매일신보”에서 이란 보도를 본 기억이 나는지라 김좌진이 혹시 그때 신문에 났던 그 인물이 아닌가고 물었다.    그랬더니 정해식이 무릎을 치며 왜 아니겠소 바로 그이지 하면서 김좌진은 올해 나이가 25살이니 1889년(己丑)생이요 고향이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향산리(원 고도면 상촌리)라 했다.    《원체 믿그루부터가 다른거야. 그러니께 남만 못할거 하나두 없지. 저 병자호란때 태자를 모시고 강화성에 피난을 갔다가말이여 거기루가서 청군의 손에 점령이 되니 담배불로 화약고에 불을 달아 제 손자허구 같이 순국을 한 안동김씨 김상용이란 사람있잖아, 사책에 다 이름이 오른 김상용이 말이여. 좌진의 부친인즉은 그 사람의 10대손이 되는거요. 그리구 개화당사람 김옥균인즉은 좌진의 십일촌숙부가 되는거고. 이젠 다 찌그러진 가문이요만은... 팔간집 찌그러진대두 십년이라 그런 속에서 장사가 났거든. 위인이 비범해서 아무튼 큰일을 할 사람같으오.》    이 말에 서일은 생각이 돌아 혼자말처럼 뇌엿다.    《큰일을 할 사람이면 세상을 달관하겠지.》    정해식은 머리를 숙인채 이윽고 궁리하더니 김좌진의 신원에 대해서 좀 더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거짓말이 아니였다. 김좌진은 홍성에 대한협회지부 기호흥학회를 조직운영하는 한편 김병학의 후원을 얻어 갈산면 상촌리 325번지의 낡은 주택 80여칸을 개조하여 호명학교를 설립하고는 친히 교장이 되어 신문화를 권장했던 것이다.    김좌진은 그러다가 20살에 대한협회에 가입하여 안창호, 이갑과 더불어 서북학회를 발족한거고 산하교육기관으로 설립한 오성학교에 들어가서는 교감직을 맡았거니와 안창호 등과 청년학우회를 결성하기도했던 것이다. 그는 론산의 채기두에게 밀령을 내려 각지 의병규합을 지시했다. 그리고는 “漢城申報”의 리사로 되였고 로백린과 손잡고 한성신문간부인 이춘수가 경영하는 경성고아원의 총무직을 맡아 사업하기도 했던것이다. 국권회복을 위해 실로 발분망식(發憤忘食)을 하고있는 사람이였다.       김좌진은 21살나던 해에 관철동 대관원자리에 야창양행을, 신의주에 염색회사를 설립하여 국내외련락기관으로 삼고 활용하면서 동지규합에 진력했다. 그러다가 22살을 먹던 1910년 8월 29일, 국치를 당해서부터는 로백린, 윤치성, 신대현, 신두현, 박상진 등과 회동하여 광복운동을 위한 동지규합과 무기구입을 위한 자금염줄을 론하고 전국을 누비였던 것이다.    이듬해인 1911년 2월 5일, 중국의 상해에 가 있는 로백린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 10만원을 얻어 보내라는 비밀지령을 받은 김좌진은 부족금 5만원을 마련코저 먼 친척이 되는 부자(富者) 문중 김종근을 찾아가 사정했다. 그러나 그가 돈을 빌려주지 않으니 그만 완력으로 협박을 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여 강도미수죄로 판결이 내려 2년 5개월의 옥살이를 치르고 나온 것이다.      서일은 이제야 신문이 소문을 냈던 그 인물의 신분을 딱히 알게되였고 그런 사람과 손잡으면 광복운동을 잘해나갈 것 같아 기회가 있으면 아무때건 한번 만나보리라고 맘을 먹었다.      어느덧 1914년이 돌아왔다. 하건만  외지로 동포사회조사를 나간 현천묵일행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명동학교의 어떤 과목은 부득불 다른사람이 그냥 임시로 맡아 교수를 해야했다. 서일은 중국말훈련을 하느라 학생거의가 중광단원들로 구성된 중학반의 한어과(漢語課)를 자진맡은 한편 짬짬이 교리(敎理)연구에다 각고의 심혈을 기울이였다.    분공이 잘되였건만 중광단사업에다 학교사업, 계다가 대종교의 일까지 돌봐야 하니 서일을 그야말로 일심양역(一心兩役)으로 돌아쳐야했다.    이런 때에 생각밖에 기분잡치는 한가지 좋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덕원리마을에 사는 한 대종교도가 라자구 태평구에 갔다가 그 마을 공교회(孔敎會)의 사람한테 모욕에 가까운 랭대를 받은것이다.      사유의 경과는 이러했다.    최근무라는 사람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제는 성가할 나이가 되였다. 그래서 내외가 은근히 속을 끓이던 중 태평구에 혼처감이 있는지라 거기에 사는 고향친구의 아낙네를 중매군으로 내세우기로 하고 최근무가 제 아들을 데리고 선보이러 간 것이다. 그런데 생각과 다르게 혼사말이 뒤틀어지고말았다. 상대측은 사위감이 끌끌해 맘에 드나 대종교도이니 섭섭하다면서 공교회와 사돈간을 맺으려니 궁리말라고 괴괴떼였던거다.        필유곡절(必有曲折)이라 신경이 일어설 일이였다.     이쪽은 혼사말을 왔다가 그만 코를 떼워서 멋없이 꼴불견의 랑패상이 되고만건데 언젠가 덕원리에 이사를 왔다가 대종교를 비난한 일로 교도들에게 쫓겨간 성이 박씨란 자가 돌아오는 이켠을 향해 속으로 잘코사니를 부르면서 가시돗힌 말을 내던지는 것이였다.           분명히 앙갚음이였다.    한편 덕원리에서는 이 일을 알자 격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젊은이 몇은 그자를 당장 때려죽이겠다면 몽둥이를 찾아 들고 덤벼쳤다. 사태는 험하게 번질것 같았다.     김기철로인이 엄하게 일깨워주었다.    《왜들 이러는거냐? 당장 걷어, 걷어치우란말이야! 우리가 왜서 고향버리고 이 만주까지 와서 고생하는건가? 동포끼리 물고 뜯고 싸우자고?... 이래서는 안된다! 절대안돼! 이건 심보고약한 그 녀석의 수작질인게 분명하지만 죽여버린다고 문제가 해결이 날건가? 이럴수록 정신차려야 해, 정신을! 알았어? 절대 맹동을 말고!》    조짐이 좋지 않았다. 대종교와 공교회지간에 반목이 생기고있었다. 금이 실리는건 무용하고도 안타가운일이라 이쪽에서 사람을 내놓아 조사해보니 그건 공교회의 문제도 대종교의 문제도 아니였다. 이사를 오려다 쫓겨간 그 박가의 소행이였다. 종교(宗敎)라 하면 그것이 성질이야 어떻던간에 밀잡아 락후한걸로 나쁘게 보고 공산혁명을 해야 진보한다느니 어쩐다는지, 앞길이 나진다느니 어쩐다는지 선전을 하고 다니는 그 얼간망둥이무신론자의 작간과 관련되였던 것이다.    서일은 이 일을 알자  그를 정신병자로 치부해버리고 즉각 대회를 열고 지금의 형편에 주의주장이 맍지 않아 대결한다면 그것은 분렬을 의미함이니 분렬은 민족의 자멸을 자초할 뿐이다. 그러니까 덕원리에 사는 대종교도들은 절대 감정에 들떠 소홀히 행동하지 말고 각성을 높혀 제 진지를 지키라고 호소했다.    그렇다. 근본 목적은 조국의 원쑤 일제를 상대하여 싸우는것인데 그러지는 않고 이제 이 교파와 저 교파, 이 구역과 저 구역, 이 단체와 저 단체, 나아가서는 주의나 주장이 다르다고 반목하고 기시하는 일이 생기지 말아야 한다. 빌어먹을 당파심!  그것은 고약한것이다!    서일은 마을주민과 중광단원들에게 불순한 자들의 리간질과 분렬책동을 발견하면 기탄없이 적발하라, 그러되 개인감정으로는 대하지 말라, 자기부터 단속하여 불쾌한 충돌이 나타나지 않게끔 하라고 강조했다.     현천묵일행이 음력설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근 3개월간이나 밖에서 나돈 것이다. 그사이 고생을 한만큼 사회조사를 잘해왔다.    《우리는 남만과 서만을 피끗돌고는 북만 저기 흑룡강가에 까지 가보았소. 흑하에서 썰매타고 라북을 거쳐서 동강, 무원까지 가보고 부금을 거치고 가목사에 이르러 남으로 곧게 나와 해림, 녕안과 동경성에서 근 보름을 보내다가 온거요. 거기는 우리 동포들이 적잖게 모여서 살더구만.》    현천묵이 하는 말이였다. 그는 형세도 보고했다.    그곳은 1912년도에 이미 된서리가 일찍내려 페농을 한데다 지난해에 또 된서리를 맞아 벼는 낟알을 한알도 건지지 못했다고 한다. 련거퍼 재황이 든데다 경학사마저 해산되여버려 조치를 구해주는 데가 없으니 굶어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무마할 수 없는 비극이였다.    다시돌아가   《흑하에도 여름계절이 있을까, 너무추워 혼빵났소.》    현천묵일행이 흑하에 가서 받은 인상이란 추위가 혹독하다는 것 외에 별로 큰 인상이 없었다. 그곳에 가서는 동포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고  그대신 일본 사람은 적잖게 보았노라했다.    《그놈들은 어느새 기여들었는지 언녕 자리를 잡았습디다.》    심권이 하는 말이였다.    이 말 끝에 박승익이 동을 달았다.    《흑하진에는 왜놈의 약포, 리발소, 복장점도 있고 려관도 있습디다.》    《어디 그뿐인가, 기생집은 또 얼만데.》    《그래, 그래, 박선생은 숫자가 많은걸 빠쳤군. 그놈의 흑하진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기생집만도 저그만치 서른하나라나.》    현천묵이 이렇게 알려주고나서 일본놈은 좃밖에 모르는 종족이야 해서 모두 를 되게 웃기였다.     흑하진(黑河鎭)은  커다란 흑룡강을 사이두고 북쪽에 있는, 중국사람들은 해란포(海蘭泡)라 부르는 로씨아의 블라고베쒠스크와 마주하고 있는데 옛날부터 아편장사와 록용, 산양각같은 약재장사꾼을 비롯한 각종 장사꾼과 금점꾼들이 모여들어 꽤나 번창했다. 동포가 그곳까지 들어가긴했지만 아직 정착해서 사는 이가 없다는 것이 이번 조사의 결과였다.    현천묵일행은 인심좋은 허저족 우씨(尤氏)를 만나 개썰매를 타고 흑룡강을 내려가 라북진(羅北鎭)에 들렸거니와 아래로 썩 더 내려가 동강진(同江鎭)에 까지 들릴수 있었다. 그 두곳은 다 동포가 몇호씩 살고있었다.    《안쪽에서 우리네 동포가 제일 많이 사는 곳은 해림의 신안진이더구만. 녕안에도 갔더랬소. 건데 거긴 2대 3대를 한족들 속에서 살아오다보니 풍속을 잃고 지어 이제는 제 언어마저 잃어가고있는 형편이니 말이 아니요.》    현천묵이 송화강이남으로 오다가 발해국(渤海國)유적지를 볼려고 녕안에 들리니 동포가 있으나 먹고 마시며 세월을 보낼 뿐 독립운동이라니 웬 소리냐며 개념조차 모를 지경 무감각하거니와 감정이 메말라있으니 과연 분통이 터질일이라했다.    그곳은 벌써 몇백년전부터 우리 동포가 살아온 고장이였다.                      에 記載된 것을 보면:    “考淸室受命之初朝鮮人來歸化列入滿洲籍者如朴氏金氏王氏李氏皆著在氏族通譜”.“漢人之編入族籍者有張,李,高,雷160余姓. 高麗人編入族籍者有 金, 韓, 李, 朴等 43姓”        청정부는 1644년도에 조선사람은 벌써 17세기중엽에 녕고탑(寧古塔)일대에 와 살면서 만족에 귀화했다고 밝힌바 있다.                 에 기재된 것을 보면 청나라초기에 만주씨족에 가입한 조선사람이 金, 韓, 李, 朴, 張, 傳, 柏, 洪, 崔, 劉, 黃, 罓, 楊, 陳, 文, 孫, 丁, 任, 尹, 宋, 徐, 車, 万, 江, 邊, 何, 閔, 林, 佟, 亙, 耿, 馬, 鄭, 曹, 郭, 沈, 方, 秦, 孟, 田, 幸氏 등 41성이였는데 그 중에는 벼슬을 한 사람도 있다고 밝히였다.        “韓氏: 韓云, 正紅旗人. 國初, 同弟韓尼來歸, 授二等輕車都尉. ...韓尼第四子那秦, 任黑龍江副都統”                  1682년(강희21년), 에는 또한 이런 기재도 있다.     “寧古塔副都統章京明阿納的父親幼時被朝鮮人虜去,聚妻生渠. 太宗時得父子還鄕, 而母未同歸, 今五十年父母俱已七旬, 原得團聚, 母子情難分, 要求朝鮮的慶興府將明阿納之母愛香交与其子”                     이로부터 알수있는바 조선과 녕고탑지간에 일찍 래왕이 있었던 것이다.    1757년도에 이르러 녕안현의 동경성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에는 조선족거주민이 약 4,000여명가량되였던 것이다.    특히 1860년부터 70년까지의 10년간에 조선의 북부에서 력사에 보기드문 재해가 들어 기아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봉건관료들의 폭정과 가혹한 착취를 더는 받아낼 재간이 없어서 분분히 월강하여 살길을 찾아 북만 깊숙이 들어왔다.    녕고탑부도통(寧古塔副都統)은 자기가 관할내에 있는 각지 카륜(佧倫)으로부터 조선의 남부자녀들은 륙속하여 왕래가 부절한바 인가만 만나면 굳이 들어와서 구걸질이요 쫓아내도 막무가내니 언어불통인 그네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느냐 하는 보고를 받고 걸식하는 조선사람 454명을 붙잡아 조선의 이조정부에 넘기기까지 했다는 기록을 세상에 남기였다.    그러나 그런 조치도 실상은 헛짓이였다.     1626년의 이래 조선인민들은 장애가 있다하더라도 갖은 방법을 다해 료녕, 길림이나 혹은 연해주를 거쳐 북만으로 깊숙히 들어와 자리잡았던 것이다.    거듭드는 자연재해를 이겨낼 수 없어서, 거기다가 봉건통치배들의 폭정과 탐학을 받아낼 수 없어서 부븍불 눈물을 머금고 고향을 등진채 멀리 멀리 이국땅에서 류리표박을 하는 사람, 살길을 찾아 헤매여야만 하는 이들의 슬픔인들 어떠하며 고통인들 또한 어떠했으랴!    현천묵이 조사기록을 내놓았다.    서일이 받아 보니 북만일대 동포이민상황이 일목료연하게 안겨왔다.        1867년, 한패의 조선 농민들은 로씨아의 블라고베쒠스크(해란포)에서 동북의 제일북쪽끝머리인 애훈의 바벨라하(法別拉河)와 대공하(大公河)류역에 까지 피해 가 살았다.    1882년, 함북도 경원군 송하면의 이창호일가가 훈춘을 걸쳐서 동녕 삼차구에 뿌리박았았다.    1886년, 세사람이 약재를 채집하느라 간도를 떠나 길림, 밀산 등지를 걸쳐 북만의 동쪽 우쓰리강연안 의순호(義順號ㅡ대화진)에 이르러 30여호를 데려다 함께 살았다.    1888년, 동녕현 고안촌에서 동포 20여호가 황무지를 일구고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892년, 한패의 동포가 할빈에 자리잡았다.    1898년, 횡도하자와 고령자일대에 조선족이 사방 10리 땅을 차지하고 집거했다.    1898년, 연해주에서 건너온 한패가 우쑤리강연안과 목릉현일대의 땅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봄에 와 가을이 끝나면 돌아가군하다가 마침내 신한촌(新韓村)에 정착했다.           《현유 북만인구는 총 1백 5십만정도. 그중 동포인구는 산재해 있는 상황이라 정확히 통계하기는 어려우나 대략 1만 2천여명에 3천호가량 되는걸로 알고있소. 해림에 1,ㅇ32호 제일많고 그 다음은 녕고탑에 576호 되더구만. 로씨야에서 1900년 중동철도를 부설할 때 국내에서 모집되여 온 인부들이 3년간 일을 하고는 거의 돌아가지 않고 할빈, 일면파, 횡도하자, 목릉, 수분하 등지에 남아 자리잡은거고 농사일을 하거나 다른 직업을 찾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소. 두루 몇사람 만나도봤는데 이럭저럭 먹고는 사는데 동포가 그리워 죽겠다구하더구만.》   《제 동포끼리 즐기지도 못하고 살아가자니 그 얼마나 외롭고 적적할가. 되도록 한데 모여살게 해야겠는데... 포교를 널리하기오. 그래서 그들에게도 한배검님의 후더운 은총이 내리게 하기오.》    서일이 보고를 다 듣고나서 심정이 무거워 하는 말이였다. 
26    반도의 혈 ㅡ제2부 27. 댓글:  조회:4321  추천:0  2011-08-22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7.    비록 초가집이기는 하지만 도합 22칸으로 신축된 모양과 크기가 비슷한  4채의 숙사겸용의 명동학교는 산골치고는 보기드믈게 너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 앉은 큰 건축물군체였다. 그 중 한채에는 작은 칸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작은 칸을 교무실이자 중광단실로 리용하고 있었다.    중광단원이 아니고 외지에서 와 공부하는 학생들은 숙사를 따로 지을 때 까지 우선 개인하숙을 해야했다. 그들뿐 아니였다. 이미 지은 집을 갖고서는 중광단원들도 다 용납할수 없어서 남의 집을 빌리는 형편이였다.    동만의 겨울추위는 함경도보다 더 독했다. 북위 43°이북이였으니 그럴수밖에.    하지만 중광단실은 벽날로가 열을 내뿜어서 훈훈했다. 도람통과 연통을 구하기 어려운 때라 로씨아인의 뻬치까를 본따서 만든것이였는데 그것이 제법 구실을 했다. 물론 숙사겸용으로 사용하고있는 교실들은 뻬찌까가 아니고 돌구들이였지만 늘 청결이 잘되고 정연했거니와 방한도 잘되였다.    서일은 어린 소학반의 일체 교학과 사무를 심권과 박승익에게 맡기고 자기는 현천묵, 계화, 채오, 량현 등과 정력을 중광단사업에 몰부으면서 짬짬이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했다.    《선생님 이게 무슨 뜻입니까? 배우자니 전혀 깜깜모르겠습니다.》    마을의 농민 하나가 삼일신고(三一神誥)에 있는 진리훈(眞理訓)을 한단락 베껴 들고 어두운 낯색으로 서일을 찾아왔다.               人物同受三眞曰, 性命精人全之物偏之眞性無善惡         上喆通眞命無淸濁中喆知眞精武厚薄下喆保返眞一神.        《인물이 동구삼진하니 왈, 성과 명과 정이라 인은 전지하고 물은 편지니라 진성은 무선악하니 상철이 통하고 진명은 무청탁하니 중철이 지하고 진정은 무후박하니 하철이 보하나니 반전하야 일신이니라.》    농민은 알듯 말듯 한지 눈을 꺼무럭거리더니 결국은 머리를 가로털어버렸다. 의연히 무슨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거다.    그래서 서일은 그것을 한층 더 쉬운말로 풀이했다.    《사람과 만물이 한가지로 셋 참함을 받나니. 가로대 성품과 목람은 온전하고 만물은 치우치니라. 참성품은 착함도 악함도 없으니, 이 통하고. 참 목숨은 맑음도 흐림도 없으니, 이 알고. 참 정기는 두터움도 엷음도 없으니, 이보전하나니. 참함을 도리키면 한얼이 될지니라.》        《아 그런 소리구만유. 이제는 좀 알만합네다.》     농민은 밝은 낯빛이 되어갖고 돌아갔다.     교도들 가운데 그같이 깜깜인 사람이 어찌 하나뿐이랴. 서일은 무릇 모든 경전을 쉬운말로 풀이하고 강해를 해야 신도들에게 그것이 접수될수 있고 따라서 신앙심도 높아질수 있다는것을 절실히 느끼고 지식인 교도들은 누구나 모두가 이 방면의 일을 착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전(經典)은 민족의 력사와더불어 모든 중광단원들이 첫 자리에 놓고 배우는 중점과목이 되였다. 서일은 그들에게 원문을 읽는 것이 중요하지만 교리를 제대로 풀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하여 그는 덕원리의 시교회를 책임진 이들보고 자기처럼 해주라면서 시교방법까지 가르쳐주었다. 서일은 모든 순교원(巡敎員)이 그렇게 하기를 바랐다.    《경전은 구구절절 그 뜻이 심오하니 풀이를 잘해야 깨침이 제대로 될것이다. 해석이 모호하면 아니가르침만 못하다. 따라서 순교원은 첫째로 구국항일사상을 가진 애국자여야한다. 더 론할 여지가 없이 반드시 꼭!》    그는 입교하는 그날부터 주장이 명백하고 견결한 사람이였다.        문밖에서 갑작스레 떠들썩했다.    몇사람이 웬 일인가며 밖으로 나가자고 일어섰다.    서일도 보던 책을 탁상에 내려놓는데 문이 활짝 열리더니 중광단원 여럿이 웬 키큰 사나이를 데리고 우루루 들어왔다. 그 속에 경비를 책임진 허활(許活)도 끼여있었다. 웬 일인지를 몰라 이켠에서 물으려는데 낯모를 그 사나이가 서일을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곧바로 다가오더니 차렷을 하고 손을 올려 경례를 붙이는것이였다.    《서일단장님! 저는 시위연대 정위 동천 신팔균이 옳시다. 저는 단장님을 만나뵙고자 불원철리하고 찾아왔습니다.》    《오 그렇소. 손을 내리고 거게 앉소. 무슨일에 나를?...》     서일은 신팔균과 악수하고나서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초면의 사람을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단장의 부드러움과 신팔균의 군인다운 깍듯한 례모에 모두들 일시 멍해질뿐이였다.     서일은 불원철리하고 자기를 찾아왔다는 초면의 군인장교를 자리에 앉혀놓고나서 다시보았다. 관골이 불거지고 두눈이 형형 불타는데 나이가 기껏해야 자기같이 이제 30대중줄에 올랐을 기강이 씩씩한 젊은이였다.    《동천 신팔균이라지, 만주로는 언제 건너왔소?》    《재작년입니다. 국치를 당하고 보니 있을 멋이 없었습니다. 황실근위 보병대에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유명무실했고, 그래서 나는 군적을 집어던지고 나와 고향으로 가고말았던겁니다.》    《고향이 어딘데?》    《충북 진천입니다. 학교를 세워봤지요. 보명학교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구국청년을 양성해볼까구. 그리구는 대동청년당을 내왔던겁니다. 윤세복이 하고 김동삼이 하고, 박중화, 안희재. 서상일. 박중화...》    《오 그랬소! 국권회복을 위해서 진력했구만!》    《하긴 진력하노라했지만 그게 어디됩니까. 나라는 그예 이꼴로 되고말았지요... 생각하면 분해서 견딜수가 있어야지. 그래 나는 좌고우면할 겨를이 없이 그만 훌쩍 떠나 만주로 들어오고말았지요.》     서일보다 한 살지하인 동천 신팔균(東天 申八均)은 1882년 5월 19일 서우 정동(貞洞)에서 평산신씨(平山申氏) 석희(奭熙) 공의 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부친은 철종(1850ㅡ1863)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포도대장(捕盜大將)을 거쳐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했고, 고조부 홍주(鴻周)는 순조(1801ㅡ1834)때 훈련대장을 역임했다. 조부 헌(櫶) 공은 형, 공, 병조(刑,工,兵曹) 판서와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냈는데 특히 일제와 담판했던 저 유명한 강화조약(江華條約)때 나라를 대표해 명성을 떨친 외교관이였다.     이러한 집안에서 태여난 신팔균이였기에 가문의 전통에 따라서 18살 때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 보병과에 입학했고, 군사교육을 받고나서는 21살 때에 보병참위(步兵參尉)로 입관되여 시위연대(侍衛聯隊) 부위(副尉)로, 황실근위(皇室近衛) 정위(正尉)로까지 승진했다가 그만둔 것이다.        신팔균은 조상의 땅을 등에 지고 남의 땅에 몸을 맞겨야 하는 신세가 됐으니 통분하기 그지없다면서 중광단을 대종교에서 세웠다니 자기도 가입할 맘을 먹었노라했다.    《참 잘왔소. 반가운일이요. 그러잖아 우린 사람이 모자라는 판인데... 바로 당신과 같은 군사인재가말이요.》    《중광단은 지금 인원이 얼마나됩니까? 그리구 어떻게 하고있습니까? 간판을 보니 명동학교라 했구만요.》    《그렇소. 명동학교지. 그리고 지금은 이것이 곧바로 중광단이기도한거요. 인원수는 외지에 분산되여있는 사람까지 다해서 천여명. 왜 분산되였겠소, 그건 아직도 몽땅 집결할만한 조건이 구비되지 못해서요. 래년에 집을 더 지을 타산이오. 지금은 그저 지식을 배우는걸 우선으로 하고. 머리가 비지 않게끔. 운영방침은 자급자족(自給自足), 근공검학(勤工儉學)이요.》    서일은 새해부터는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으리라는걸 알려주었다.    신팔균은 듣고나서 군사훈련은 안하는가고 물른것이였다.    서일은 군사훈련도 해야겠건만 아직은 그를 책임질 사람이 없거니와 군사기술서적마저도 없다고 했다. 신팔균은 이 말을 듣더니 자기가 훈련교원을 맡겠다고 흔연히 자진하면서 꾸러미속에서 군사교본 두권을 내놓는것이였다. 한권은 보병들의 내무, 규률, 전술 등 규범집인 이고 다른 한권은 였다. 시위대에서 사용하던것이였다.    이리하여 중광단은 군사훈련과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신팔균이 이러는 것을 지켜보고있던 허활은 그제야 다가와서 자기가 사람을 알아볼줄을 몰라서 너무 과분했으니 량해하라면서 단장을 만나게 하기는 커녕 의심만 품고 피스톨마저 빼앗은 일을 사과했다.        신팔균은 아니요 사과할 것 없소 경비를 잘 서려면 의례 그래야지, 그대의 높은 경각심과 책임성에 외려 내가 감탄하오, 무기를 내놓으라니 안된다며 대항하고 억지를 부린 내가 잘못이였지 안그렇소 하면서 그가 돌려주는 피스톨을 받아서 건사했다.       이틑날 중광단의 중진들이 학과목설치에 따른 교학과 훈련시간 배비문제를 놓고 한창 토론하고있는데 이동호, 이달문, 이덕수, 김기석, 장기덕, 장사학 등 여섯사람이 소수레에다 훈련용의 목총을 한가득 실어왔다. 중광단은 비록 무기가 없는 정황이지만 군사훈련은 해야 할 것이고 군사훈련을 할 시 빈손으로 하면 멋없고 잘할수도 없는데 그저 보고만있을건가, 그래서야 안되지 하면서 그들은 자진나서서 여러날 품을 들여 소문없이 훈련용목총 1백여자루를 만들어 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년세많은 그네들의 합숙이 어느덧 어지러운 목기공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고마운일이였다.    서일은 자신이 중광단원이면서 이 조직의 어려운 짐은 스스로 자진하여 맡아 해내고있는 그들을 각별히 존중하여 우리 중광단의 보배이자 원로분들이요 하면서 한 분 한 분 소개해주었다.    《군수, 양반, 유생, 담사리, 동학당 의병이 뭉쳐서 이룩된 중광단...오, 우리 한배검께서 지켜주고 보우하사 앞날은 꼭 창창할것입니다!》    신팔균은 가슴이 울렁이도록 감격되여 이같이 부르짖었다. 여지껏 이곳 저곳 떠돌며 귀속을 못찾은 그라 중광단을 집이라고 생각하니 기쁨이 솟아 내가 이제는 부모없고 집없는 고아는 아니구나해서 모두를 크게웃었다.    이때의 중광단은 실로 귀속을 잡지 못해 광활한 동북만주를 헤매이는  광복투사들이 절실이 바라고 찾는 훌륭한 집으로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덧 1913년이 돌아왔다.    이해의 봄은 국치를 당하여 세 번째로 맞이하는 봄이였다.                 봄이 왔네 봄이 왔네  겨울가고 봄이 왔네             천지간에 화기돈다  집집마다 기쁘구나             바위밑에 눌린 풀도  싹이 터서 올라오네             한얼님이 주신 생명  대자연의 힘이크다.               겨울철에 얼어 붙은  샘물들이 다 녹았네             이골저골 졸졸줄줄  사방으로 흐르누나             바위밑에 눌린 풀도  싹이 터서 올라오네             한얼님이 주신 생명  대자연의 힘이 크다.                     꽃이 피네 꽃이 피네  산과 들에 꽃이 피네             벌의 노래 나비춤에  옷갖것이 웃는구나             바위밑에 눌린 풀도  싹이 터서 올라오네             한얼님이 주신 생명  대자연의 힘이로다         “봄노래”가 산간을 들깨워 덕원리는 생기로 넘치였다.     수난자의 감슴속에 응어리로 맺힌 원한을 풀어주려는 듯이 따스한 이 계절은 추위를 몰아내고 드팀없이 찾아왔다.     중광단은 총동원하여 수10헥타르의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었다. 진펄을 갈아번지고 물도랑을 빼고 강물을 끌어들이여 천수답을 만들어 벼씨를 뿌렸고 산기슭 공지를 밭으로 만들어 강냉이, 수수, 조, 감자를 심었다.                                          형제들아 자매들아                       배달겨례 모든 인중(人衆)                       우리 형제자매들아                       함께 지성으로 일심하여                       빛내보세 빛내보세                       대황조의 베푼 신교 빛내보세            농망기가 지나자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휴식을 하는 한편 모두 교리를 참답게 배우는것을 의무이자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들은 홍암대종사 라철이 손수지은 “단군가”를 불렀고 그 노래의 뜻을 따라 대황조의 베푼 신교를 빛내보려고 노력했다. 태양숭배의 원시신앙으로부터 무속신앙(巫俗信仰ㅡ쌀만교. 사마니즘)의 변천과정을 걸친 자기 민족의 유일한 이 새교의 사상이 점차 대중속에 뿌리밖혀져서 새 교문의 문호(門戶)가 천산남북에 널리 열리고 삼신숭배(三神崇拜)의 고유한 정신과 배천사신(拜天事神)의 미속과 미풍이 세상에 널리 퍼져 그 명맥을 후세가 이어가기를 원하면서 그들은 다가 대종교를 굳게 지켜가고 있었다.     봄일이 다 끝나니 농한기여서 모두가  휴식하며 배우고 있을 때 철도 모르고 떠돌이를 하던 성이 박씨인 한 집이 덕원리가 좋다는 소식을 어디서 주어듣고는 살아보려고 식솔을 일곱이나 끌고 찾아왔다. 그들의 가긍한 정상을 보고 덕원리에서는 받아주었거니와 마을 사람들은 그 가정의 어려움을  헤아려 생활일절을 돌봐주려고까지했다.                     가마히 우에 계시사 한으로 든,                보시며 낳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        마음착한 교도들은 그 집을 위하여 두손모아 기도했다.    그런데 새로 이사를 온 박씨네는 대종교에 대해서는 전혀 몰리해를 하는 무신론자였다.    《한배검이 누긴데 이래? 신을 믿는다구 밥이 나오나?》     일가주장인 박씨도 그렇고 그의 마누라도 그렇고 주는 대접이나 받으면서 곱다랗게 지내기나 할 것이지 교도들이 두손모아 념송(念誦)하는것을 보더니만 그게 우습다며 이따위 소리를 실없이 죄친 것이다. 그통에 그들 일가는 이사를 왔다가 그 자리로 그만 쫓겨나고말았다.     자기가 마음없어 믿지 않으면 그만일것이련만 철딱서니 없이 그같이 미현하게 노는 사람도 있었으니 자작지얼(自作之蘖)이란 아마 이런 것을 보고 하는 말이겠다.      대종교를 신봉하지 않으면야 몰리해를 할 수 있으니 가르쳐줘야지만 그 행동거지나 너무도 눈에 나니 가르쳐주려는 사람마저없었던것이다.    한울이란 곧 하늘(天)을 가리킴이요 이는 예로부터 써온 말이다. 한얼은 신(神)을 말함이고 한검은 신인(神人)을 말함이며 한배검은 천조신(天祖神)을 가리키는 것이다.    배달민족은 원래 지역적으로 아세아의 동쪽에서 백두산령의 광명한 정기를 타고난바 원시시대로부터 밝은 태양을 숭배하였고 신도의 교문이 열린 그때부터는 천신숭앙(天神崇仰)의 사상이 깊이 뿌리박혀 온 것이다.    한배검 신앙의 유래를 간추려 보면 이러하다.    한개검은 세상에 살아있은 기간 진종(眞倧)의 대도(大道)로 교화(敎化)를 펴고 홍제(弘濟)의 이념(理念)으로 치화(治化)를 펴 신교(神敎)의 진리로 만백성을 깨침으로써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신도문화(神道文化)를 성역(聖域)에 크게 빛나게 한 것이다.      신앙으로부터 독특한 풍속이 생기였는바 집집마다 어린 아기를 낳으면 3일만에 3신께 공봉(供奉)하고 검줄(祭索)을 대문에 매여 붉은 실이나 헝겁으로 머리 끝에 매여 명복(命福)을 빌고 그 이름을 댕기(檀祈)라 하며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저고리에 흰 헝겁으로 동정을 달아 백두산을 기념하였다. 평안도, 함경도의 10월사상제와 만주의 3월 太白祭(백두산을 태백산이라 이르기도 함)는 모두 보본(報本)의 특전(特典)으로서 고개위의 성황당(城隍堂ㅡ國師堂․仙王堂)과 전간의 고시례(高矢禮ㅡ농부들이 들에서 밥을 먹을 때 첫술밥을 내던지며 “고시례”하는 것은 농관 고시례를 추모하는 례임)는 저 세상으로 먼저가신 이를 기리는 아름다운 풍속인것이다.    부여의 옛풍속에 구서(九誓)라 하여 아홉가지의 맹세가 있었고 신라, 백제, 고구려에서는 계률이 엄하여 계명을 어기면 오륜을 벗어난 자라 하여 그 지방에서 쫓아냈다. 통용된 5계를 볼 것 같으면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써 하며 부모를 섬기되 효도로써 하며 벗을 사귀되 신의로써 하며 싸움에서는 후퇴하지 말며 살생을 함에는 반드시 가림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불계(佛戒)의 부합(不合)한 것보다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소총(疏忽)함이 없이 行하라.》      신라의 원광법사(圓光法師)도 귀산(貴山)과 이같이 말했던 것이다.     고려에서 하늘제를 지낼 때는 팔관회(八關會)라 하여 여덟가지의 죄를  짓지 않게끔하였으니 곧 살생을 하지 말며, 도적질을 하지 말며, 제일(濟泆)을 하지 말며, 망언을 하지 말며, 음주를 하지 말며, 高大床에 앉지 말며, 향화(香華)를 입지 말며, 관청(觀廳)을 자악(自 樂)치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교의 명칭도 력대로 비슷하였다.    부여는 대천교, 신라는 숭천교, 고구려는 경천교, 발해는 진종교, 고려는 왕검교, 만주는 주신교.    기타 여러 나라들에서는 천신교라 불렀던것이다.    홍암대종사 라철이 1909년도에 대종교리념의 실천강령으로 되는 “오대종지”를 발포하였는데 서일은 이를 연구하고 “오대종지강연”을 저술했다.           1. 敬奉天神  (인물의 本源을 아는 것)         2. 誠修靈誠  (인생의 良能을 아는 것)         3. 愛合種族  (인세의 平和를 얻을 것)         4. 靜求和福  (인간의 自由를 누릴 것)         5. 勤務産業  (인류의 文明을 늘일 것)      종지강연은 이같이 인생의 본능, 자유, 행복 등을 현대철학에 비추어 현실면을 강조한 것이다.    이해의 음력 10월에 서일은 령계를 받고 참교로 피선되여 시교사를 잉임(仍任)하였다. 령계는 교인의 자격을 작성하는 의전으로서 교리를 독신하며 의무를 각수(恪守)하는 이에게 수여하는 것이다. 신부(神府)에 입적하였다 하여 명부에 등록하였다. 그 명부를 천록(天籙)이라 한다.    서일은 주야로 수도에 정진했다. 그리하여 차츰 성통(性通), 도통(道通)하게 되었고 견(見), 문(聞), 지(智), 행(行)의 사대신기(四大神機)를 마음대로 구사할 지경에 오르고 있었다. 이는 실로 놀라운 터득이였다!    서일은 가는곳마다 덕행을 베풀면서 진리를 규명하였다. 하여 그가 이르는 곳이면 신도가 운집하였고 입교하려는 자가 수백, 수천, 수만명에 달했다.     《동포여러분, 사랑하는 나의 형제자매들! 여러분은 백두산 이북으로 펼쳐진 저 일망무제한 광야를 보셨습니까? 그것은 우리 한배검님께서 끼치신 만리성역이거니 우리가 어찌 잊을수 있겠습니까!... 광활한 이 대지를 잊지 마시오. 유유히 흐르고 있는 송화강을 가운데 놓고 동서로 펼쳐진 땅, 저기  완달산부터 흥안령기슭까지 그 어디면 신족(神族) 우리 동포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있으며 우리 형제자매들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은 곳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남북이 평연한 이 성역에서 우리 민족이 반만년의 력사를 지녀왔음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 금수강산에서 선조의 생애를 이어나가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의 연설은 가끔 청중들의 열렬한 박수로 중단되였다 이어지군했다.    《동포 여러분! 나의 형제자매들!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리념으로 일관계승해온 석일(昔日)의 국세는 얼마나 훌륭했던가, 우리에게도 한때는 과연 자랑찬 력사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보시오, 누가 이같이 큰 소리를 쳐던가요?... 이 글은 바로 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병졸을 시켜 보낸 최후의 통첩이였습니다.    동포여러분! 여러분은 이 소리를 듣고서 감상이 어떠합니까?... 이로 보아도 당시 우리들의 선조는 한족(漢族)을 얼마나 어리게 보았던가를 가히 알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러했습니다. 우리들의 선조들은 과거에는 이같이 위엄을 떨치면서까지 떳떳이 세상을 살았던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해보시오. 대체 누구의 대에 이르러 그 명맥이 다 끊어졌습니까?  바로 우리들의 대에 이르러 다 끊어지고 만게 아닙니까. 생각들해보시오. 왜 이토록 처참하게 되였는가? 이것이 누구의 탓인가? 우리에게는 그래 책임이 없단말인가?... 죄가 없단말인가?... 하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것인가?... 대답은 간단한겁니다. 분발해야 합니다. 분발하여 통분함을 힘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잃어버린 국권을 우리의 손으로 되찾아와야합니다. 후세에 치욕을 남기지 않으려거든. 그 옛날 우리의 조상들이 발휘했던 그 위엄을 다시갖출 그날을 맞아오기 위해서 우리는 단합해야합니다. 정신차리고 혈전분투할 준비를 해야하는것입니다!》    력사를 잃어가는 사람, 민족의 자부심을 잃어가는 사람, 그리하여 자비감속에서 골기없고 자곡지심(自曲至心)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정신차리라 깨우쳐주느라고 서일은 이같이 말했던 것이다.     그것은 열변이였다.    그것은 피타는 절절한 호소이기도 했다...    어느날 고향에 간다면서 훌쩍떠났던 이홍래가 갑작스레 왕청에 다시나타났다. 그가 돌아와서 반가운데 생각밖의 일을 말해 모두를 놀래웠다.    《내가 어디루 갔다왔는지 아오. 거제도엘 갔다왔단말이요.》    《아니 거기는 왜서요?!》     현천묵이 눈이 둥그래지면서 물었다.    《조성환을 만날려구서. 건데 왜놈들이 경계가 어찌두 심한지... 눈을 발라메고있더란말이요. 그래 내가 어찌했겠소. 헐수 할수 없이 말뚝에 매인  양새끼모양으루 그저 먼 발치에서 보다가 왔네그려.》    《그리구는요?》    《그리구는 꼬리를 뺐지, 잡히면 날이면 볼장은 다 보니까.》    《하하하하...》     이홍래의 저돌적인 행동에 모두들 혀를 내두르면서 웃고말있다.     계화는 그토록 싸다녀도 붙잡히지를 않는 일이 과연 별일이라 했다. 그래서 모두들 또 웃기는데 명실공히 “월경의병장”이 돼서 내내 동분서주하는 이 열혈의 남아는 아닌게아니라  무겁한 사나이였다. 꼭 마치 사선을 제멋대로 넘나드는 불사조(不死鳥)같았다.    암살을 계획했던 조성환은 섬에 같혀있었고 그 대적수(大敵手)는 눈이 펀들펀들 살아서 돌아다녔다. 지난해의 7월, 가쯔라 다로오는 로씨아를 방문하고 제2차의 일로밀약(日露密約)을 맺았는바 장춘이남 즉 남만주와 내몽골(동몽골)을 일본의 소유로 하고 장춘이북 즉 북만주와 기타의 몽골지역을 로씨아의 소유로 정하였다.    한심하게도 남의 땅을 갖고 제멋대로 놀아대는 판이였다.    그러나 그러했음에도 운명이란 본래 타고난것이라 가쯔라 다로오는 이 세상을 오래살지를 못했다. 이또오 히로부미가 죽자 그의 유지를 받들어 조선을 병탄함에 급선봉이 되었던 이 군벌출신의 대륙확장주의자는 자기의 정권이 무너질까봐 국내의 사회주의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던 것이다.  지난해의 12월에 메이지천황이 죽어 세 번다시 수상자리에 올라앉은 가쯔라 다로오가 새 내각을 구성하자 호헌운동이 일어나 전국을 석권했다. 올 2월달에 들어서자 가쯔라 다로오는 강박적으로 제3차의회를 해산시켜버렸다. 그러자 분노한 군중들은 국회대청을 포위 습격하였을뿐만아니라 가쯔라 다로오의 어용신문이였던 “국민신문사”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다.    가쯔라 다로오는 핍박에 못이겨 사직하고는 10월달에 그만 죽어버린 것이다.    배달민족을 노예로 만들어버린 원쑤는 이같이 사라졌건만 야심많은 일본은 아마데라스오오미까미(天照大神)를 지상으로 하는 “황실중심주의”에 의하여 세계의 제패를 꿈꾸면서 군국주의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처하여 만주땅에서는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이 비록 강보에 싸인 유년기이기는 하지만 희망을 품으며 자라나고 있었다.    이 운동의 기운을 대종교가 크게 심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대종교에서 첫 항일구국단체로 발족한 重光團은 장차 만주에서의 무장독립운동을 주도할 군사력으로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25    반도의 혈 ㅡ제2부 26. 댓글:  조회:4259  추천:0  2011-08-22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6.        7월 21일에 대종교총본사가 있는 청파호에 갔다가 거기서 마침 왕청으로 오려고 작정한 홍암대종사를 만나본 서일은 왕청 제집으로 오자 곧 붓을 들어 칠언률시 한수를 제꺽지어 자기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표달했다.    來賓有事主人知   번사로 찾아가니 그대 마음 안다하네     道室從容日影遲   고요한 수도실엔 햇빛도 넘흘러라    我本不迷惟一意   나는 본시 미혹함 없어 한 뜻을 품었다 하며    而初無間莫三思   자네 비로서 거리 허물고 세 뜻을 정했다 짚으니    理無后覺先天息   철리는 깨달음을 타고난 듯 밝은 사람     名不虛存實地宜   명성도 헛됨 없이 소문과 하나 같아    錯綜平生疑心半   평생을 헷갈리며 반신반의했건만     孜孜說到夕陽時   힘써 깨달으니 날은 이미 어스름      이 시에서 서일은 라철스승을 만남으로 하여 인생의 철리를 깨달았음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비가 내리면서 해가 나있을  때는                 악마가 녀편네를 때리고있는 때이다”       이것은 불란서 속담인데 좋고 나쁨이 뒤섞여 원하지도 않은 화가 덥쳐듬을 말하는 것이다.    남만 유하현의 동포들은 올 7월 24일부터 련 3일간 된서리 일찍이 내린통에 일년 농사가 페농이 되어 큰 타격을 받았다. 경학사(耕學社)에서는 이에 대처해 총동원하여서 원근 각처에서 중국인이 여러해동안 쌓아 두고 팔지 못한 수수와 조를 사들여 매호에 분배하여 련명(連命)하고 있다는 소식이  동만의 먼 이곳 왕청까지 전해왔다.    (명년에 또 재해가 들면 어쩌는가? 耕學社는 그 부담을 이겨낼 재간이 있을가?...)    서일은 소식을 듣고 걱정했다.      덕원리의 주민들은 모두가 그곳 동포들의 고충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한편 그런 재해를 나도 당했으면 어쩔번했을가 다른 재난은 막아낼수 있어도 자연재해만은 막아내지 못하는건데하면서 요행스러워했다.   (과연 그럴가? 인간이 자연재해를 왜 이겨내지 못한단말인가?...기후와 풍토에 맞는 종자를 개량해 내면 될건데 겁부터 집어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원.)    서일은 이로부터 한가지 진리를 도출해냈다. 인간이 어느 한 곳에서 명을 살려 가자면 강한 적응력을 키워야한는 그것이였다. 독립운동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높고 높다 저 여                    한울 복판에 우뚝 솟았네                    안개 구름 자욱함이여                    일만 산악의 조종이로다                        한배검 한울에서 내려오시니                    거룩할사 배달의 대궐이시오                    나라를 세우고 교화를 펴사                    온 누리를 싸고 덮었네....      이것은 “임금이 지은 삼일신고 예찬”이란 노래의 첫 두절이다.    이 노래는 덕원마을의 대종교도들이 늘 부르고 있었다.       한데 배달민족의 신성한 교인 대종교가 자기의 명을 어떻게 이어갈까?..           한일합방때부터 일제는 이같이 예측, 간파하고 페교할 것을 획책하였으나 굳이 해산만은 보류하였던 것이다.    단군교가 중광하자 이를 해체할 설이 비등할 때 일본의 “태양”잡지는 아래와 같은 론설을 실었다.            언젠가 서일은 이 글을 읽어본 기억이 난다. 대종교를 대하는  일제의 일단을 보아낼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잔인무도한 왜놈이 우리 한국민을 완전히 동화시키려 들면서  그 민족의 정신을 말살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자들은 국민성을 끊기 위해 한글교과서를 다 걷어들이였다. 이제 풍속습관마저 개변시키려들지 않겠는가? 배달민족의 독립성과 고유성을 뿌리뽑으려 들지 않겠는가? 그자들은  배달민족의 교인 이 대종교를 감시만하려하지 않을 것이다.)    서일은 일본의 야만스러운 잔인성을 간파했기에 이같이 생각했다.    이제는 이 대교를 다시 땅속에 묻히게 말아야 한다, 전 민족이 자기의 교를 믿고 사랑하고 지키게 해야 한다, 그러자면 깨달음이 먼저생긴 우리가 스스로 자각하여 책임지고 널리 포교해야할 것이다...     지금 만주땅 그 어디건 동포사는 마을이면 학교가 일어서고 “권학가”의  노래소리며 “학도가”의 노래소리가 울리였다.                                    동방의 붉은 해빛 명랑한 곳에                  갱생의 큰소리 요란하지만                  눈멀고 귀먹으면 어찌 알리오                  눈뜨고 귀밝히자 청년학도야         서일은 오늘도 딸 죽청이를 데리고 등교하고 있었다.    죽청이는 어언 8살을 먹어 소학 2학년을 다니는데 공부를 잘한다. 하학해서 집에 돌아가서는 숙제를 얼른해놓고 자진 선생이 되여 제 동생 윤제에게 글을 배워주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누나질을 착실히 하는  애였다.    이날 아직 퇴교시간전이라 교원들이 누구도 교무실을 떠나지 않았는데 본지사람이 아닌 초면의 두 젊은이가 학교로 와서 서일을 찾는것이였다.    《당신들은 대체 누군데 그를 찾는거요?》     현천묵이 캐물었다. 낯선 사람이면 우선 신원부터 밝혀진 후에야 교장을 대면할수 있다는 태도였다.    《난 김성이라구 하는데 그분을 면목아오. 우린 사년전에 연해주에서 만난적이 있소.》    《여기는?》    《난 이근호라 하는데 집은 평양에 있고 만주로 건너온지는 몇달밖에 안됩니다. 백일세날 이 친구를 면목알게 돼서 따라왔지요. 난 교장선생하구는 면목이 없습니다. 찾아온건 다름아니라...》    이근호(李根浩)가 해석을 하려는데 서일이 나타났다.    《아니이거 김성이 아닌가!》    서일의 얼굴에 저으기 놀램과 반가움이 너울쳤다. 계화하고도 물어봤다. 이달문하고도 물어봤다. 그들은 다 그가 로씨아에서 건너왔을 때 보고는 여직 한번도 다시만나본적이 없어서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했던 것이다.  서일은 이동호군수하고도 물어봤는데 그도 본적없고 모른다니 대체 어떻게 된거냐 잘못된거나 아닐가 걱정했는데 오늘 이렇게 제발로 찾아온 것이다.    《중머리를 안했구만.》    서일은 그가 연해주에서 혼쌀먹던 일을 상기하고 놀림쪼로 웃었다.    《인제는 일진회놈으로까지는 의심받지 않습니다만...》    김성이 하던 말을 중둥무이하고 현천묵을 힐끗 쳐다봐서 모두웃었다.    김성은 만주일판을 한번 돌고 귀국하여 원산에서 교편을 다시잡고있다가 경술국치를 당하니 계속있을 멋이 없어서 다시금 만주탈출을 계획한 것이다. 그는 동창생을 찾아 순천에 갔다가 동창생은 찾지 못하고 가던 날이 장날이라 마침 올 2월 6일 순천장거리에 들어섰다가 거기서 백일세사건(百日稅事件)을 목격하게 되였고 그 사건에 직접 말려든 이근호의 위급한 사정을 보고 그를 구해내느라 함께 월경하다보니 어느덧 금란지교(金蘭之交)로 된 것이다.    김성이 목격했다는 순천장거리 백일세사건(百日稅事件)이란 대체 어떤것인가? 선생들은 중국신문에 간단히 보도된 것을 보았을 뿐 상세하게는 모른다.    서일은 아예 이날밤 덕원리마을 주민들을 모두 모이게 하여 이근호가 그들앞에서 순천장거리 백일세진상을 낟낟이 말하게 했을뿐만 아니라 이틑날에는 학교에서 집회를 열어 모든 사생이 그의 보고를 청취하게 함으로써 국내의 형편의 일단을 알겠끔했다.    일제는 상인을 착취하기 위하여 조선의 전국 각지에 소위 백일세라는 장날(市日)을 정해서 세금을 강제로 수금하고 있었다.    올 2월 6일(음력 1911년 12월 19일)이였다. 평안남도 순천에서 장날에 백일세를 받기 시작하여 물의가 비등하면서 민심이 말라들던 차에 모두들 하고 주고받았다. 민심이 이같이 들끓고있을 때 최봉환, 전응빈, 이학응 등 여러 사람의 주동으로 아침부터 전 시민이 철시를 단행하는 한편 정오때 장보러 온 수백명을 선동하였다. 흉맹한 군중이 노도와 같이 군청에 쓸어들자 군수는 좋은 말로 타일러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의 앞에서 백일세의 징수를 규탄했다. 이럴 때 일본인 재무주임 야사와가 위협으로 해산시키려고 렵총으로 공포를 쐈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저놈이 사람을 쏜다며 왁 달려들어 렵총을 빼았아 산산히 부수었거니와 그를 뒷뜰로 끌고가 때려 죽이기까지 했다.    사태가 이같이 험하게 번지자 이를 목격한 일본거류민중의 목수와 상인 수십명이 각기 자기 짐에 있는 렵총을 들고 나와 발포했다. 이에 군중들은 더욱더 격노하여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어 일장의 격투를 벌리였는데 일본인이 사상자 16명을 내고 한인측도 15명을 낸 것이다.    《군청직원을 모조리 때려죽이자!》    용기충천한 군중들은 함성을 지르면서 군청에다 불을 질렀다.    군청직원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는데 성이 남궁(南宮)인 직원은 미처 내빼지 못하고 붙들려 그만 매맞아 죽고말았다.    경찰에서는 주동분자들을 붙잡기 시작했다.    이근호는 붙잡힐 것 같아 내빼려던 차 마침 만주로 다시오는 김성을 만나 따라온 것이다.       김성과 이근호는 굴레벗은 말모양으로 속박없이 남만각지를 거진 다 돌다싶이했다. 그들은 윤세복(尹世復), 윤세즙(尹世葺) 형제와 이원식(東厦) 이 봉천성항인현(奉天省桓仁縣)의 현성내에다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였는데 교포들은 생활이 곤궁하여 자제를 공부시킬 형편이 되지 않길래 부득불 학교당국에서 기숙비와 옷까지 해입히거니와 지어는 학생가족의 생계비까지 보조해 주면서 교육을 권장(勸獎)하고있더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서일은 물론 명동학교의 선생모두를 감격하게 했다.    김성이 용정촌에 들려 보니 이명언(李明彦)이라는 분이 방금 건너와서 동명중학(東明中學)을 세웠더라면서 이름을 돌려놓은 명동학교(明東學校)는 왜 중학교라는 간판을 걸지 않느냐 이만하면 교사도 훌륭하겠다 학생수도 많은데 능히 될게 아니냐했다.     이에 여러 선생들은 여기도 중학반이 이미 설치됐고 간판은 모든 것이 구비되는 그때에 가서 달아도 될게 아니냐했다.      원산학교에서 일어를 가르쳤던 김성은 본래 력사를 잘알기에 력사교원으로 덕원리에 남고 이근호는 유하현으로 갔다.     유하현제2구3원보추가가(柳河縣第2區三源堡鄒家街)의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는 지난해에 50여명의 첫기 졸업생을 배출하고는 국제적인 이목을 피하기 위해 인적기 희소한 곳을 찾아 삼원보(三源堡)에서 동쪽으로 약 80여리 지점에 있는 통화현제6구합니하(通化縣第6區哈泥河)로 옮겨가 자리잡고는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로 개칭하였다. 이 학교는 지금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후에 중학반은 지방중학에 인계함)     이근호가 중광단(重光團)이 창립됐다길래 와보니 아무하는것도 없이 그저 명의뿐이니 자기는 차라리 전문군사를 공부할 생각이라며 그리로 간 것이다.    《지금 데라우찌총독은 국내의 학교들을 몽땅 학생군영으로 만들고있습니다. 교복이라 하여 학생들에게 단체복을 입게 하고 선생들께는 금테를 두른 모자에 경찰복같은 검정옷을 입히는데 아예 칼까지 차고 교단에 오르게 되리라는 소문이 나돌고있습니다. 어쩌자구 그 모양인지. 참!》    김성이 하는 말이였다.   《거야 빤하지. 관리도 아닌 교원에게 경찰복을 입힐 때야 위협적으로 학생을 다스리게 하자는 수작이지 뭐. 이런걸보고 군국주의라 하는거야.》   《채칙쥐고 짐승을 부리듯 칼을 차고 위압하면서 학생을 배우게하다니 원. 데라우찌는 지독스러운 개자식이구나!》    명동학교 선생치고 격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데라우찌의 담화였다. 아주 명백한바 그는 조선민족에게 리성(理性)이 발달할 수 있는 교육기회를 주지 않으므로써 창조성을 싹트지 못하게 하려하고 있었다.   《잔인한 그 군벌은 “민심수습”이라는 명의하에 무단정치로써 우리 민족의 배일감정을 탄압하느라고 지금 혈안이 되여 날뛰고있는것이오. 언론, 집회, 결사 일체를 금지했고, 여러 선생님들도 들은바와 같이 이제는 관리가 아닌 교원에게 까지 경찰복을 입히고 칼을 채울때야 순진한 학생에게 파시스교육을 하는게지 뭐겠소. 그자의 교육방침이란건 일본신민화(日本臣民化)로서 우리 민족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어 이른바 반항을 모르는 선량한 노예로 만들어버리자는것이요. 그런즉 우리 민족가운데 고급지식인이 나오게 할까? 두고 보오만 절대 그러지 않을것이요. 우리의 문화를 말살하고 우리 민족을 우민화(愚民化) 하여 저들의 부림을 잘 받는 하급관리나 사무원이나 근로자로 양성하는데 국한시키고말것이요.》    서일은 이같이 말하고나서 이어 데라우찌는 왜서 일본어와 일본력사를 배우게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글과 역사를 잊게 하고 조상을 잊게 하여 저들 일본의 조상을 우리의 조상으로 만들자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나온것이다, 식민지 교육이란 바로 이런것이니 여러 선생님들은 잊지 말고 학생들에게 단군황조를 받들어 모시게끔 교육하야한다고 했다.      학교 교원들 중 방금온 김성을 내놓고는 모두가 대종교도였다.    그런즉 덕원리는 명실공히 대종교마을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날 사생 모두가 총동원하여 겨울철 화목(火木)준비를 했다. 말이 학생이지 반수이상이 끌끌한 청년이였다. 거의가 정처없어 이곳 저곳 유리표박(遊離漂迫)을 하다가 중광단(重光團)에 들겠다고 찾아온 의병이다. 한데 집단가입식이 따로있다니 그것을 기다리느라 어디든 가지 않았다. 자급자족(自給自足)이란 구호가 나붙었다. 여기에 있으려면 일을 해야함을 각오해야한다. 그들은 저마끔 도끼와 바오리를 갖고 삭정이주으러 산으로 갔고 어린 학생들은 반급선생의 지도하에 낫을 가지고 나무라러 갔다. 덕원리는 마을밖에 새와 쑥이 쌔쿠버려 자기만 부지런하면 화목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약육강식 이 세상에                        유식함이 힘이란다                        티끌모아 태산이라                        한자두자 배워가세                               젊은이들이 서일과 같이 산을 오르면서 노래불렀다. 수준정도가 부동했다. 이 학생들 가운데는 반무식자도 적지 않았던것이다.     강대를 한짐씩 걸머지고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우리 배달민족의 력사에서 어느 왕이 국토를 제일 많이 넓혔는가 하는 물음을 내놓아 모두들 제 나름대로 짚어갔다. 그러다가 누군가 광개토왕이라고  면바로 짚어냈다. 하지만 광개토왕이 누군가며 눈을 꺼무럭거리는 이도 적지 않았다.    제 민족의 력사마저도 깜깜이니 답답한 일이였다.    《광개토왕은 본명이 담덕이요. 고구려 제19대왕으로서 승하하신 후에 시호를 그같이 지으신거요. 광개토(廣開土)란 땅을 넓힌다는 의미지. 그이는 재위 23년간에 남북으로 령토를 크게 넓히여 만주전역과 한강이북을 장악하고 신라를 도와 왜군을 궤주(潰走)시키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니 그야말로 동방천하를 패도로써 제패하신 명실상부한 성왕이시오.》    서일이 알려주었다.    《패도로 제패했다?...그렇다면 그게 침략사상과 뭐가 다릅니까?》    학생 하나가 질문했다.    《패도를 쓴다해서 침략사상이라할 수는 없는겁니다. 광개토왕께서는 동맹국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면 대왕자신이 친정을 하여 형제국을 원조하여 주는 정치를 시행하였던것입니다. 례를 들면 대왕께서는 신라의 나물니왕으로부터 연합군이 침략해온다는 말을 듣고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백제와 왜군을 격멸하여 위급한 신라를 구원했지요. 그러면서도 대왕께서는 백제와 왜국을 병합하려는 뜻은 전혀 없었던것입니다. 침략을 목적으로 하는 이른바 중국의 패도사상과는 든본적으로 달랐으니까요. 광개토왕께서는 부국강병의 고구려를 건설하여 열국이 모두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는데 패도의 목표가 있은겁니다.》    《아무튼 패도를 하자면 강병책을 써야겠지요?》    《강병책을 쓰는게 뭐가 나쁜가. 필요하다면 써야지. 속담에도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 말의 어원을 볼 것 같으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찬양하는 음부경(音符經)에 부국강병이라는 낱말이 있는데 그걸 풀이하면 나라가 부유하고 그  병사까지 막강하면 능히 천하를 태평스레 다스릴 수 있다는 뜻인겁니다. 한즉 강병책이야말로 패도정치를 펼치는데 있어서 불가분의 철칙이 되지 않겠는가, 특히 지금의 세상에서.》    서일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이 곧 의논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한국은 우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소졸의 관리에 이르기까지 강병책이 나라를 구원한다는것조차도 전혀 몰랐던가봐.》    《우습지. 더러운것들이 당나귀타고 추풍월색이나 읊을줄을 알았지 뭐야. 언제...》    《무력사용은 불상스러운 짓이라 하여 꺼렸으니 그랬겠지.》    《그러니 무지해두 한심하게 무지했지 뭐야.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위해서라도 무력을 쓸데는 써야 옳을게 아닌가. 약육강삭(弱肉强食)의 세상에 추풍월색(秋風月色)이나 읇조리면 안녕(安寧)할까, 우리 나라는 그래서 남한테 먹히워 망하는거야. 허니까말이여 강병책은 나라를 영위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거야. 안그래?》    《그렇잖구. 왕도의 사상이 뿌리박고 강병책을 썼더라면야 왜놈이 함부로 군사를 끌고 침입했을까. 국모를 죽이는 일도, 임금이 외국공관에 숨어 지내는 일도 없었을거다. 수치가 뭔걸 알았다면 남한테 나라가 다 먹혀 온 백성이 집잃은 개같이 나헤매지는 꼴이 되지는 않았을거다.》    《처참한 꼴이야, 처참한 꼴. 생각하면 분해서 원.》    그들은 이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자면 오직 피흘리는 투쟁이 있을 뿐 다른길은 더 없다는 것으로 의논을 끝맺았다...              며칠안되는 사이에 학교 운동장 한쪽에 산같은 나무가리가 생겨났다.    널직한 운동장에서 솜과 넝마로 둥글둥글 하게 만든 커다란 뽈이 거센 발에 채이여 이쪽 저쪽 굴러다니고 있었다. 일을 그토록 하고서도 외려 기운이 나서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    서일은 느긋한 웃음을 지으며 현척묵이와 말했다.   《이렇게 지내기만하다가는 무료끝에 따분함과 실증을 못이겨 나중에는 뺑소니를 칠 자도 생겨날거다. 》   《나도 그 생각이 들었어. 무기조법마저 다 잊고말거라니까.》   《숙사도 교실도 비슷하게 준비됐겠다, 식량도 화목도 별문제없는거니 확대모집을 시작해볼까, 여기가 려관구실을 하지 않게.》    당전에 중광단원수 크게 확대시키지 못하는 원인이라면 다른것이 아니였다. 인원수가 급속히 많아진 후에 봉착될 숙식(宿食)을 비롯한 일체의 공급준비가 채 되지 않아서였다. 준비도 없이 서둘러 취하는 행동이 왕왕 자신을 곤궁에 처넣고마는 것이다. 허다한 의병대가 그래서 오래견지못하고 백성만 괴롭히다가 자멸된게 아닌가.    그러지를 말아야 했다.     학교 숙사생들이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다하고나서였다. 전에 신돌석의병대에 있었던 한 젊은이가 그의 죽음이 한심하도록 처참했던 것을  말해서 여러사람을 비분에 잠기게 했다.    네해전인 1908년 11월 18일이였다. 적의 포위토벌이 심해감과 아울러 그자들의 온갖 회유책을 물리친 신돌석은 부하장병들의 정상과 시기가 불리함을 숙고한 뒤 다음기회를 기다리기로 하고 자기의 의병을 일시 해산시키고는 자신도 가족을 동반하고 산중에 은거한 다음 영덕의 눌곡(訥谷)으로 옛부하였던 김상열(金相烈)을 찾아갔던것이다. 김상열형제는 신돌석을 반가히 맞아 밤에 소를 잡고 술을 권하여 못다한 옛정을 되새기는체 하면서 언제 한번 편히 쉬지도 못하고 혈전에 시달린 그에게 독주를 먹이였다.    신돌석이 독주에 취하여 깊히 잡들었을 때 김가형제는 도끼로 그를 내리쳤다. 신돌석은 도끼를 맞고도 벽을 차고 밖으로 10여장 상공으로 세 번 뛰여 담장밖 10여보되는 땅에 떨어졌다. 그런것을  김가형제는 달려가 도끼로 다시쳤다. 구국거성(救國巨星)은 이렇게 간악한 배신자의 손에 못다 한 한을 남기고 참담하게 숨을 거둔 것이다.     이 소식이 항간에 퍼지자 량심있는 동포치고 슬픔에 이를 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한즉 격전과 고초를 함께 겪어온 젊은 의병들의 심정이야 더 말할것있는가!    여기 모인이들 중 어떤 사람은 重光團가입식을 언제면 하는가, 왜 오는족족 받아주지는 않는가 하면서 무료함에 회의까지 품었다.    마침 계화가 그러는 것을 발견하고 서일을 찾아 말했다.    《글이나 읽으라며 오래기다리게하는건 득책이 아닌가 보오.》    서일은 그러잖아 만나려했다면서 현천묵이와 의논이 있은걸 말했다.    이때 이홍래는 고향으로 되돌아가 손잡고 일을 할 수 없었다.    이틑날 현천묵이 채오, 량현과 함께 왕청현밖의 다른 지방을 맡고 서일과 계화는 현내를 맡아 일제히 모집사업에 착수했다.    그들은 이전에 구군대에 있었던 망명군인들을 찾았다. 임무를 자진해 맡은 최오와 량현은 과연 적극적이였다. 제 사람을 다 찾을 궁리였다. 그들이 입버릇같이 말하는 제 사람이란 바로 자기들 처럼 총잡고 싸운 경력이 있는 자를 가리키는건데 그들은 마치 로련한 감정군이 알갱이로 부서진 유리쪼각속에서 다이아몬드를 골라내듯이 용케도 알아냈다.           이때의 동포사회는 과연 복잡했다. 맨먼저 월경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에 자리잡고 거주하는 극빈한 농가와 국법에 걸린 망명객들, 을사조약(乙巳條約), 칠협약(7協約), 합병(合倂)이후에 국권회복운동을 해보려고 온 애국투사들, 그외에 협잡배, 모리간상배, 건달과 왜놈의 첩자들... 이런 기회에 불순분자가 얼마든 대오내에 잠입할수 있었다. 그러기에 한 사람 한 사람 면담해보고 의심스러우면 까근히 캐보고 받아야했다. 그리고 모집자측에서 내놓은 한가지 특별한 전제조건을 받아들이여야했으니 그것인즉은 무릇 어떤한 사람이건간에 중광단에 들겠거든 우선 대종교도가 돼야한다는 것이였다.    모집기간은 불과 20여일밖에 안되였다. 그럼에도 그사이 응하는 자가 많아 이미 가입한 인원까지 합치면 무려 1,000여명에 달했다. 그야말로 기적적인 발족이였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이 한 생명과 청춘을 바치리라, 가슴속에 열혈이 끓는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적극적으로 탄원해 나선것이다.    추석이 지나 한달만인 10월 25일, 이날은 공기도 맑고 해살도 밝은 유난히 좋은 날씨였다. 덕원리마을은 명절기분에 푹 잠기였다. 명동학교의 널다란 운동장은 아침부터 모여드는 사람들로 붐비였다. 덕원리와 부근의 마을은 물론 멀리서까지 대종교도들이 모여든 것이다.     한데 섭섭하게도 조성환을 볼수 없었다. 그는 지난해의 7월, 일본총리대신 가쯔라 다로오가 만주시찰을 오는 기회에 암살하려 계획했다가 그만  미연에 발각돼 북경에서 체포되여 거제도로 1년간 류배를 간 것이다.     명동학교 널다란 운동장거의를 1,000여명의 단원들이 렬을 지어 차지했다. 그외의 자리는 립추의 여지가 없이 군중들이 빼곡히 메웠다.    일동이 숙연히 지켜보는 속에서 서일, 현천묵, 계화, 채오. 량현 등 다섯사람은 단군대황조의 신위를 모시고 백두산쪽을 향해 먼저 제를 지냈다.    그리고 나서 서일은 우렁찬 목소리로 重光團이 창립되여 1년 7개월만에 원래의 10명대오가 백배로 되어 거족적인 첫걸음을 떼였음을 선포했다.    와! 기뿜의 함성이 사방에 메아리쳤다...     團長에 서일, 그와더불어 묵, 계화, 최오, 량현이 중견인물이였다.
24    반도의 혈 ㅡ제2부 25. 댓글:  조회:3534  추천:0  2011-08-22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5.    무릇 낡고 진부하고 반동적인 것은 그것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하여 종당에는 뒤짚어지기마련이다. 서일은 이런 변증법에 의하여 중국의 자산계급혁명은 승리할것이라 했다. 그러나 중국의 신해혁명은 실패하고말았다.      무창기의(武昌起義)가 일어나자 전국이 반응을 보였다. 국민이 뭉친것이다. 한데 혁명을 반대하던 자들마저 하루밤새에 혁명자로 낯색을 바꾸어 그 수가 본래의 진짜혁명당인보다 몇 배 몇 십배에 달했다. 혁명을 배반하였던 구관료가 혁명당에 참가함으로써 그자들은 혁명당을 내부로부터 파괴하였거니와 나아가서는 혁명사업을 엉망으로 그릇치고만것이다.    구관료가 권력을 다시잡은 후 수하 각 혁명단체들에 당장 해산할 것을 명령했다. 동삼성도독(東三省都督) 조이손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엄하게 다스리라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포고를 내렸다.                   원세개가 총독(總督)을 도독(都督)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뿐 사람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쓰고있는게 아닌가. 하니까 본래의 낡아버린 똥통겉면에다 뼁끼칠을 새로했을 뿐 똥통자체는 바꾸지 않고 그냥 쓰는 격이였다.    망국민의 신세로 만주땅에 몰려와 발을 붙이려고 아득바득하는 신세가긍한 조선민족으로 놓고 보면 아무튼 원세개가 대총통이 되어 권력행사를 하니 리로운점도 좀 있는것 같았다.    유하현 삼원보 추가장으로 이회영형제가 먼저가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이 퍼져서 국치를 당하자 고향을 등지고 월경한 동포교민들이 그곳을 찾아  확 몰려들었다. 그러자 그곳의 토민들은 의혹을 품고 불안해하면서 토지와 가옥매매 일절을 거절하여 정착하여 살기 어렵게 되였다. 그리하여 대표가 북경에 있는 원세개를 찾아가 사정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원세개는 한국과 인연이 있는지라 이들의 고충을 헤아려 비서 호명신(胡明臣)을 동반케 하여 동삼성도독(東三省都督) 조이손(趙爾巽)을 방문하게 하였다.    조이손은 원세개의 명령을 받들어 성내의 각 현장에게 명령하여 만주에 있는 모든 조선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편의를 도모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리하였길래 이후부터는 토민의 배타적인 태도나 언동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누가 원세개를 나쁘다하랴. 장송린지주가 말하듯이 검둥이가 올라앉건 백강아지가 올라앉건 나만 못살게 굴지 않으면 되는것이다.      1912년 봄철 씨붙임이 끝나자 명동학교는 새 교사를 지어 들면서 뜻대로 중학반까지 개설했다. 수백명을 용납할 계획으로 지은 교사니 대단히 컸다. 하지만 서일은 학교가 없는 곳에 새로 더 창설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명동학교는 학생이 많아져서 더욱 활기를 띠였다.    선생들은 교학에 열중하면서 여러종의 漢文으로 된 신문을 받아보았다. 그러면서 중국말을 되도록 빨리배우는것이 매개 선생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이곳의 토민들과 교제를 틔이어 그네들과는 되도록 우의적으로 지내면서 불화를 없애자는 의도에서였다. 억울하게 조선사람은 일본놈의 앞잡이라는 소리를 토민들에게서 듣지 말아야 하고 그러자면 실제적인 어떤 표현이 있어야한다. 서일은 이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9월중순의 어느날 정오, 서일이 점심을 먹고나서 등교를 하니 선생들이 교무실에서 웬 중년의 손님을 둘러싸고 앉아 얘기판을 벌리고 있었다.    《아, 왔습니다. 저분이 우리 학교 교장입니다.》    채오가 서일을 먼저발견하고 이러자 현천묵이 일어나 그 손님을 소개하는것이였다.    《연해주에서 오신 한선생이네. 왕청에 오신 걸음에 모처럼 자네를 만나자구 학교에 들리신거네. 》    《자네 기학이 맞지?》    중년의 사나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쪽을 향해 웃고 있었다.     《누구신지?...》    손님이 애명까지 부르면서 웃는걸 보면 필시 아는 처지일텐데 누군지 머리에 인츰 떠오르지 않아 서일은 떨떠름했다.      《난 농포리서 살다가 연해주에 간 한기욱이요. 내가 낳기를 농포서 났지. 그러니 서교장하구야 내가 동고향사람되는게 아닌가. 왜 생각안나시오? 소년시절 한번은 밤에 참외훔치러 왔다가...》    《아 그렇지!》        서일은 그제야 머리에 떠올라 손벽을 탁 쳤다. 한기욱(韓基昱)을 오늘 이렇게 만날줄이야 어찌알았으랴! 그는 과연 서일이 태여난 금동(金熙洞) 바로 앞마을 농포(農圃)에서 태여났으니 한고향사람이 옳은거다. 서일은 아직 서당생이였던 소시적에 그의 외할아버지가 산자락을 뚜지고 심어놓은 참외를 훔치러 갔다가 참외막지키는 황둥개한테 쫓기고 물려 혼쌀먹던 일만은 잊혀지지 않고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사실은 그때 화를 당해야 할건 나였어. 내가 주모자였으니깐. 저 기학이하고 삼용이를 먼저 든장질해놓구는 기여이 잡아 끌었거든. 안가겠다는걸. 그래서 간건데 개가 불량한 침입자임을 알고서 달려들어... 그통에 결국 당하구만건 바로 이 서교장. 그놈의 개한테 다리각을 물리기까지 했다니까.》    《따져보면 진짜 잘못은 내한테있었소. 그놈의 개를 밤이라구 풀어놨으니까. 내가 그러지만 않았다면 아무런 사고도 안났을데. 아 니그렇소, 론리대로 하면.》    현천묵의 말 끝에 한기욱이 자아반성을 해서 모두 하하 웃었다.    서일이 10살먹었을 때니 한기욱은 그때 24살의 한창 청년시절이였다. 한기욱은 16살에 연해주로 이사가 그때는 집이 거기 연추(煙秋)에 있었다. 그는 외할아버지가 보곱파 떠난지 8년만에 처음으로 고향에 왔던거다.      이젠 20년이 넘는다. 그것마저 아름다운 추억으로 될줄이야!     한기욱이 39살나던 1906년도다. 이상설이 용정촌에다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신설하자 그는 거기서 숙감(塾監)으로 시무(視務)를 했고 그 이듬해는 연추에 돌아가 자체로 신흥의숙(新興義塾)을 세워 로씨아에 있는 동포청년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지금은 독실한 대종교신도가 되어 아예 교의 일만 보고있는것이다. 한기욱은 스스로 북만지역의 시교원(施敎員)을 자임하고 나서서 우쑤리강을 건너 의란도(依蘭道) 밀산(密山)으로 이주까지 했다. 그는 국내에서 건너와 환국(還國)하지 않고 그냥 포교에 전심하고 있는 홍암대종사를 만나보려고 화룡으로 가던 걸음에 왕청에 들린 것이다. 한데 오고 보니 교우들이 권유하는지라 며칠 묵을 생각이였다.    《시교를 다녀도 안쪽으로 너무들어가지 말아주시오. 거기는 삼년전 국내서 호열자가 돌던 그 모양이랍니다.》     서일이 한마디 충고했다.    《그렇게 심한가?》    《그보다도 더 심한 것 같습니다. 재작년하구 작년 련거퍼 두해나 큰물이 져 피해가 막심한데다 로빈(만주리)에서는 쥐병까지 겹쳐 인명피해가 형편없는 바 죽은 자가 수만명에 이른답니다. 그리구 치치할에서는 온역이 돌아 지금도 매일 한명꼴로 죽어가고 어떤데서는 류행성 홍진이 도는데다 독성페염까지 겹쳐 한 마을 30여호가 전부 사망한 일도 발생했답니다.》         서일은 의사아니면 지금은 안쪽 멀리로 들어가지 말아달라고 재삼 당부하면서 그를 조용한 자기의 교장실로 모시였다. 로씨아의 형편과 거기에 있는 여러분의 소식을 몰라 답답하던차 잘만난 것이다.     《한선생은 연추서 살다오셨다니 최재형선생을 잘 아시겠는데 그 어른님 지금 어떻게 지내십니까? 건재하신지?》    《건재하지, 건재하구말구. 최선생은 지금 노우기에프스크 재류 한족회 회장으로 사업하고계시는데 교포치고 그분의 방조를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없지. 공익사업을 하려면 경제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야한다면서 요즘은 유류제조소(油類製造所)를 세웠는데 인부가 백명도 넘고 그저 일만하는게 아니라 일단 유사시에는 무장들고 나가 싸울수 있게끔 군사훈련도 시키고있는 판이지요.》    《잘 하시네! 둔전제와 같은 둔공제를 하는군요!》    《그렇지. 바로 그거지.》    《듣자니 거기에 계시는 이상설선생분은 를 조직하고는 일본천황께 힐책하는 서한까지 보냈다더군요. 정말인지? 그분이 을사조약이 늑결되니 분해서 자결하자구해서 소동을 빚던 일이 생각납니다.》    《서선생도 그 얘기를 들었구만.》    《들은게 아닙니다. 서울에 갔다가 제눈으로 직접본겁니다.》    《오 그렇소! 성피지악 명아지원(聲彼之惡 鳴我之怨)이라, 그 첫두글자를 각각 따서 조직을 내오고는 왜황을 질책했거니와 9천 9인의 련명으로 세계만방에 왜적의 범죄적 행패를 규탄하는 성명서도 전달했던거요. 나도 그때 서명을 했더랬지.》          한기욱은 이러면서 이상설이 이동휘(李東輝)와 같이 본래있던 신한촌(新韓村)을 갑자기 떠나 그로데꼬브로 옮겨갔다고 하면서 지난해의 11월에 로씨아 극동총독(極東總督) 보스타빈(BOSTABIN)과 교섭하여 산업장려와 교육보급을 목적으로한다는 조건밑에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勸業新聞”까지 발행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있노라했다. 그러면서 그는 또 보탰다.    《거기는 한인촌락이 39개나 되고 동포도 8,000여명이라니 군중의 지지만 받으면 뭐나 하기가 좋지. 그분은 지금 이종호와 이범진 두분의 의연금을 갖고 신한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해볼 타산까지 하는걸 보면 보스타빈과 관계가 매우 좋은 모양이더군.》    서일은 아 그런가 하면서 머리를 끄덕이고는 해아밀사건으로 정부가 일본의 사촉에 못배겨 어리석게도 그를 사형에 언도한 일을 상기하고 웃었다.     한기욱이 유인석은 크게 맥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1910년 5월 15일에 이범윤, 이상설, 정재관 등 지사들의 간청으로 13도 의군도총재(義軍都總裁)로 추대된  그였지만 일거에 조국탈환을 도모하였으나 여의치않다는것이였다.    유인석은 문인 백삼규(白三奎), 김기한(金起漢), 장덕중(張德中) 등 세사람을 북경에 파견하여 대총통이 된 원세개와 정부요인에게 서한을 보내 韓中共同抗日을 권고해봤다. 그러나 회답은 서운했다. 내용은 찬성하나 국력이 미약하니 시기상조라는 대답이였다.     《로인이 정세를 파악못하시는군. 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언제...》    서일은 입가에 조소를 머금은채 말했다.    원세개는 내전을 벌리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도 모르고 아직도 사대주의사상을 버리지 못해 외국의 군사력을 빌려는 유인석의 어리석음에 그는 한숨이 나갔던 것이다.       마을밖 늪에서 오리들이 갈갈거리고 흰 갈목은 바람결에 한들한들거렸다. 만주에 와서 두 번째 맞는 가을이다.    (일본은 살아있는 천황을 신처럼 만들어 모시게 함으로써 야마도민족을 정신적으로 결집(結集)시키고있다. 우리는 왜 檀君皇祖를 우상으로 하여 배달민족을 묶어세우지 못하겠는가. 라철이 노린것은 이것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권의 “三一神誥” 그것만으로는 안되는 것이다. 교리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이 있어야할것이고 해석이 있어야 할것이고 또한 다른 교와 같지 않은것이 무엇임을 비교로써 밝혀내야 할 것이다. 교리가 명백히 안겨올 그때면 그것을 따르려는 자의 신앙심은 자연히 굳어지게 되고 여럿을 한 사람 한 마음같이 뭉치게 하는 응집력(凝集力)이 생기게 될 것이다.)    서일의 깨달음은 이러했다. 그는 나도 이제는 대종교를 신봉해야한다, 그리고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한편 동포 전체를 이에 결집(結集)시고 그 기초상에서 대일무력항쟁을 조직전개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리라 도슬려 마음먹었다.     며칠후 서일은 박기호와 함께 홍암대종사를 만나러 화룡으로 가는 한기욱을 따라나섰다. 박기호도 여직 대종교를 신봉하지 않고있었는데 라철이 어떻게 생긴 분인지 만나보고 서일과 같이 입교할 생각이였던 것이다.    셋은 용정을 지나면서 박찬익한테 들리였다.    서일은 자기가 그지간 번역한것을 그한테 주면서 이것은 근근히 “三一神誥”의 “原序”와 “御贊”만 번역한것이요 그나마 초역이다 보통문장과는  달라 경전인것만큼 번역이 제대로 되자면 교리를 깊이 연구한 기초우에서만이 가능하니 그저 참고로나 하고 그대로는 사용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박찬익은 그러리라 대답해놓고 자기도 홍암대종사를 보러 가겠다면서 따라나섰다. 그는 자기가 공업학교의 학생전부를 이끌고 대종교를 신봉한것은 홍암대종사와 백순도형(白純道兄)의 지도하에 된것이라 알려주었다....    한편 백두산에 天祭를 지내고나서 和龍縣 三道構 靑湖에 교당을 신설하고 곧 이어서 산북지사(山北支司)를 두어 그곳 교인들을 거느리게 한 라철(羅喆)은 백순(白純), 강우(姜虞)와 함께 주위의 여러곳을 돌며 포교를 하고나서 다시 청파호에 돌아왔다.    때는 음력 8월 15일 곧 추석날이였다.    백순은 초휘(初諱)가 락현(樂賢)인데 1864년 4월 26일 忠淸南道 公州邑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크면 비상한 인물이 되리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31세에 동학란을 당하여 대세를 달관(達觀)하고 일본유신력사와 서양력사, 지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을 구입하여 전수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공주읍에다 농공은행과 보명학교를 설립했고 강경읍에 농공은행지점(支店)과 보화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니 호서일대(湖西一帶)의 교육과 경제발전에 바친 그의 기여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그는 46세 나던 해인 1909년 4월 21일에 대종교를 신봉하여 2년후에 참교(參敎)로 피선(被選)됐다.    다른 한사람 강우(姜虞)는 초휘(初諱)가 석화(錫華) 또는 석기(錫箕)인바 1862년 6월 27일 忠淸南道 夫餘郡 場岩面 長亭里에서 태여났다. 그는 7세때부터 본적지의 의숙(義塾)에서 한학(漢學)을 수업하였고 34세때부터 성진, 길주, 경원의 감리(監理)를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909년 정월 15일에 대종교를 신봉하여 2년만인 신해년(辛亥年) 정월 15일에 지교(知敎)로 된 것이다.          라철, 강우, 배순 이 세 거물급 인물은 삼도구 안산에 오르고 있었다.    《강서리가 내려 유하현이 재해라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백순이 문득 남만 유하현의 교도와 동포들을 생각하면서 근심했다.    《회영이도 있구 시영이도 있구 동삼이도 있잖은가. 경학사가 어련히 해결해나가잖을라구.》    강우가 그들을 믿어 하는 말이였다.    《동만 여기까지 재해면 어쩔번했을까. 이 류랑민족이 다가 곤경을 치르지 않게 된게 참 다행인가봅니다. 가마히 우에 계시나 한으로 든 보시며 낳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    라철은 檀君皇祖가 계시는 하늘을 우러러 조용히 주송(呪誦)하고나서 강호와 물었다.    《왕청으로는 언제쯤 가면 좋을가? 요즘 그쪽의 시교정황을 몰라서 답답...》    《한승묵이랑있으니 제대로 되겠지. 한데 듣자니 그곳서 중광단을 세워 민심을 끌고있는 서일이가 아직 입교도 안한 사람이라누만. 그 사람이 우리 대교를 몰리해하고 그러는거아닌가?》    《인자 뭐랬소. 입교를 안했다니, 서일이가?》    《아마 그러는거같애. 대사는 그를 아시오?》    《보진 못했어두 안지야 몇해되지. 그럴 사연이 있어서.》    라철은 얼굴에 웃음을 그믈그믈 지으면서 이쯤 말해놓고 그가 왜 아직 입교도 안했을가 궁리하다가 래일 당장 왕청으로 떠나자했다.    그와 친밀한 교우인 강우와 백순은 대사가 왜서 서일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갖고있는지 그 원인을 미처몰랐다. 라철이 알려주지 않았던거다.    산상에 오르니 불어 오는 건들바람이 뺨을 스쳐 기분이 상쾌했다.    만주로 건너와 그 사이 포교를 열심히 하였더니 따르는 자 수만에 달하는지라 신심이 생겨 기쁘면서 심정이 한결 거뿐해진 세 사람은 각자 산자운(山字韻)으로 한시(漢詩)짓기를 비기면서 이날을 즐기였다....     한편 한기욱이 대동한 일행 4명이 삼도구에 도착하니 추석이 지난지 한주일만인 양력 10월초. 그들을 마침 만나게 되었다. 네 사람은 우러러 경모하고싶은 분들을 대하자 몸가짐을 바로하고 국궁재배(鞠躬再拜)했다.    그들을 면목아는 사람은 오직 박찬익뿐이였다. 하여 그가 동행한 세사람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자네가 서일이였구려!》    라철이 어깨를 다독이면서 반겨맞아주니 서일은 감개무량했다.    《소인은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왔습니다.》    서일의 말에 라철은 고개만 끄덕이였다. 그 끄덕임 그 표정이 그러면그렇겠지 하고 말하고 있었다.    박찬익이 서일몰래 “三一神誥”의 부분적인 번역고를 갖고와서 홍암대종사에게 바치는것이였다.    (저치가 저건 왜 갖고와서 바쳐? 원, 사람이...)    서일은 민망스러워 그를 힐끗 가로봤다.          《서선생이 번역한거란말이요?... 본래 시교를 해야 할 사람이로군!》          라철이 번역문을 보고 칭찬하니 서일은 송구스럽고 거북했다.    《건데 왜 여직 입교를 안하오?》    《방금 말씀을 올리지 않습디까, 가르침받자구요. 받아만주시면야...》    《어련히 그러잖으리. 하하하...》    라철은 다시한번 어깨를 다독이면서 기뻐했다. 그리고는 서일이 “重光團”을 세운건 과연 잘한 일이라면서 대오를 크게 발전시킬 것을 희망했다.    서일과 박기호는 宗師와 大兄 세분의 비준과 많은 교인들의 환영속에서 마침내 입교했다.    미신적인 색채를 담습한 종교여서인지 입교절차며 순서가 번쇄하고 까다로우면서 또한 신기하기도했다. 그러나 그래도 입교자는 찍소리말고 쫓아야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본래 이모양으로 되어진 것이였다!    입교자는 입교의절(入敎儀節)이며 봉교과규(奉敎課規)를 비롯한 모든 것을 알고 그대로해야했다. 그래도 즐겨 신봉하려는 사람이 날따라 많아가고 있는것은 무엇때문일가?... 지식인들은, 애국지사들은 700여년만에 다시금 중광한 대종교가 무엇을 의미하며 그의 바람이 무엇이라는 것을 차츰 깨닫고 찾아오고 있었다.     아홉글자가 씌여진 지패(紙牌)가 북쪽벽에 봉안(奉安)되였다.    서일과 박기호는 숭엄한 분위기속에서 서사(誓辭)를 했다.           維       開極立道 4369년 壬子 8月 24日 不肖子孫 徐 一, 朴基浩 謹誓告于.       大皇祖聖神 伏惟       聖靈在上 善惡禍福 儆示天解 終身服膺 望敢改易       有渝此心 甘受罪罰.      뜻인즉은 대황조성신앞에 엎드려 삼가 알리옵니다, 성스러운 신령님이 하늘에서 살피시거니 선악과 화복을 경계해야 함을 이 몸이 다하도록 받으리라면서 이를 감히 어기고 마음을 달리먹는다면 그 어떠한 형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것이였다.    서일이나 박기호나 다가 대종교의 미신적인 색채가 없이 꾸며진 봉교과규(奉敎課規)가 맘에 들었다. 그것은 입교한 후 매개 교인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있었다.    그것을 조목별로 라렬한 것을 보면 이러했다.      1) 奉敎人은 서로 화목하며 우애하되 患難相救하고 哀慶相問하며 한집안의 형제자매같이 지낼것임.    2) 奉敎人이凡有婚喪에 必告神廟하고 만일 廟遠하면 自家에서 神位를 設行하여 附近敎友들이 會集協辦할것임.(酒食供饋로써 主家에 貽弊말며 贈品賻儀로 래빈에게 忮望치말고 煩禮를 取消하며 簡便을 爲主함)    3) 奉敎人이 生男生女하면 반드시 告廟命名할것임.    4) 奉敎人은 서로 鬨鬪爭訟치말며 만일 疑結不平之事있으면 敎兄에게 請하여 公平한 判決을 請하고 반드시 服從할것임.(만일 重要한 事案일  때는 多數敎兄의 處決에 服從할것임.)    5) 奉敎人은 無論男女하고 文字를 解得치 못하는 者는 마땅히 國文을 先習하되 만일 貧窮無暇者에게는 不得强行할것임.    6) 奉敎人은 서로 侵奪과 欺滿과 侮辱과 誣陷과 誹謗치 말것임.    7) 奉敎人은 荒飮, 賭博치말며 貪財, 好色치 말며 剽竊,竊盜치말것임.    8) 奉敎人은 流言飛語를 믿지 말며 恐怯怨尤를 품지 말며 남의 過惡을 드러내지 말며 瑕疵를 의논치 말고 遙邪左道와 符讖巫卜들의 方術을 가까이 말것임.    9) 奉敎人은 반드시 本分을 지키고 삼가 宮靈을 좇으며 賦稅와 徭役에 各蓋其務할것임.    10) 奉敎人은 家傳의 舊物과 國傳의 古蹟을 반드시 重視 하고 現行의 法制와 通俗의時宜에 또한拘滯치말것임   11) 奉敎人은 居內出外에 반드시 愼口寡言하며 高聲喧囔치말고 靜肅端嚴으로써 爲主할것임.   12) 奉敎人은 敎門]을 빙자하여 事端을 일으키지 말고 敎衆을 빙자하여 世論에 다투지 말것임.   13) 奉敎人은 비록 敎外人이나 域外인을 對하여도 溫恭謙和로써 相對하고 결코 輕侮와 岐視가 없을것임.   14) 奉敎人은 本國古來의 忠烈, 英豪의 神明을 모두 崇敬할 것이요 비록 他國의 賢聖 및 敎門들도 또한 敬待할 것임.   15) 만일 本敎를 독신하는 사람이 廣見益智를 爲하여 他敎에 入敎하여도 不禁할지오 또 他敎에 卽入한 자가 本敎에 願入하면 곧 許可할지니 대개 한배검의 寬弘하신 大道를 仰禮하여 異端을 不攻함. 비록 域外人라도 本敎에 願入하면 도한 許可하여 다 敎友로써 同視無間으로되 入敎한지 15年未滿이면 敎理를 宣傳하거나 敎務에 參與하는 權利가 없고 비록 만 15年뒤라도 國籍을 不移하면 本敎 職員의 選任은 不能함.(但 高句麗 및 渤海의 舊疆內人은 此規를 不準함.)   16) 만일 敎門을 凌辱하거나 한배검께 漫語를 用하는 者가 有하면 誓死必爭하고 或 因此로 廢命傷身하면 崇其節義하며 恤其妻子할것임.    17) 奉敎人은 敎規를 嚴守할것인바 如或犯戒면 當有罰則하니 一曰 勸告, 二曰 警誚, 三曰 停敎, 四曰 黙敎 (罰有細則).            18) 봉교인은 修道持戒를 爲重模範者는 當有賞法하니 一曰 敬待, 二曰 襃章, 三曰 特選, 四曰 古經閣參務.(賞有細則)   19) 追後의 諸般儀式 및 規程을 自古經閣으로 隨時增刪하고 卽宜 통지하여 一體 遵行케할것임.        《이건 학생수칙보다 더 세심하고 엄하게 째여졌는걸! 미처 생각지를 못했어. 술잘마시고 고성을 잘 지르던 천묵이 왜 그 버릇을 뚝 떼여버렸는가했더니!...》    박기호가 서일이와 입교감상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도 그 느낌이긴 하네만 이곳까지 와서 입교하노라니 새로이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어서 속으로 다짐하고 한배검님앞에 아뢰였지.》    《뭐라, 그게 뭣인데?》    《우리의 입교를 기념해 여기다 학교를 하나 창설하자고. 어떤가? 명동에 쓰려던 경비중 200원을 이리로 옮겨다 쓰면 우선 해결은 될거야. 이곳은 장차 총본사가 일어설 성지가 아닌가. 이미 북지사가 창설되여 이곳 교도들을 관리하니 학교를 세우면 장차 그들이 발벗고 도와나설거야.》    서일의 주장에 박기호는 두손들어 동의했다. 그러면서 학교를 자기가 맡겠다고 자진해나섰다. 서일이 속심바라던바였다. 박기호는 진취심있고 분발하며 책임성이 강한 사람이다. 서일은 자기를 믿듯이 그를 믿는다.    이리하여 청호에 새 학교가 창설되였으니 교명을 “靑一學校”라 지었다.           
23    반도의 혈 ㅡ제2부 24. 댓글:  조회:3762  추천:0  2011-08-21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4.     김동삼이 듣자니 아직 입교도 하지 않은 서일이 대종교의 명의 로 “重光團”이라는 것을 창립했다는데 그것이 대체 발전이 어떤가고 캐듯이 물었다. 서일은 배포유하게 준비가 되면 대오를 크게 장대시킬 타산인데 발전이란 장차봐야 알리라했다. 김동삼은 아 그런가 할뿐 그가  시급히 대종교의 명의를 도용했다고 나무리지 않고 되려 잘한일로 여기면서 내가 “重光團”이 이름을 날릴 그날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러고나서 그는 만주땅에 발을 붙이자면 우선 토착민들과 말이 통해여야한다고 일깨워주었다.     토민과 말이 통해야한다는것이 화제에 오르다보니 자연히 박찬익(朴瓚翊)의 말이 나오게 되였다. 이동춘선생이 용정촌에서는 중국말을 제일 잘 구사할줄을 아는 사람은 아마 박찬익(朴瓚翊)일거라 했던것이다.    《과연 날파람있는 사람이지! 대교가 중광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선동을 어떻게 했는지 글쎄 공업학교 학생 모두를 입교하게 만들어놨다잖어!》     이동춘은 이러면서 대종교에 대한 그의 지극한 정성까지 찬양했다.     서일은 이선생이 이토록 칭찬하는걸 보니 과연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만나보려했다.     박찬익은 나이를 따지면 서일보나 3살이 지하다. 그는 1884년 정월 2일에 경기도 장단군에서 태여난 것이다. 1908년, 25살나던해에 서울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는 기간 동지를 규합해서 학교를 쥐락펴락하려 드는 왜교관과 자주 맛서서 해냈다. 그러다가 그는 대교가 중광하니 동교생전부를 이끌고 대종교에 입교하는 기적을 창출했거니와 작년에 그들과 함께 북간도로 건너와 동만개발개척군의 선줄꾼이 된 것이다.    함께 만주로 건너온 동교생들은 다가 만주 각지에 널리 흩어져 교편을 잡았고 용정촌에다 집을 잡은 박찬익은 지금 중국학교에서 교관으로 사업하고 있다.     근 70여처에다 학교를 세움에 이동춘의 노력이 많았던 것이다. 한즉 그의 공을 어찌 가볍게 보랴!    계화는 동고향친구를 만나봐야겠다며 그의 집을 찾아가고 서일은 박찬익을 만나러 중국학교를 찾아갔다.    박찬익이 마침 학교에 있었다.   《임자가 박찬익이 옳지? 나 서일이요.》    자기보다 나이어리다고 생각돼서 그런지 서일은 그를 보는 순간부터 마치 아우를 만난 듯한 감이라 언행이 스르럼없이 나갔다.     《아 그렇습니까! 대단히 반갑구만! 선성은 많이 들어 알고있습니다. 그러잖아 언제면 서형을 만나볼수 있을까했더니...올초에 왔다더구만. 건데 만주로 건너오자마자 욕까지 보시다니 원!...》   《허, 이거. 거기서도 아는걸 보니 소문이 왁자게 퍼진게로군! 글쎄말이여. 재수없이 그렇게 됐어.》   《상한 안질이 더 말썽부리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듣자니 왕청에 명동학교를 세웠다더군요. 그래 학교는 어떻습니까? 운영이 잘돼갑니까?》    《덕분에 아직은 아무가탈없이 돼가고있어. 말이 사립이지 실상은 대종교 시교회가 맡다싶히 하는 상황이야.》    《오, 그렇다면야 잘된게지요. 이제 한얼님이 은총을 내리실겁니다!》    박찬익은 명동학교가 문제없이 운영되고있다니 마치 제 일같이 기쁘다면서 만주에 있는 동포학교 모두가 단군황조(檀君皇朝)의 품에 안겨들면 얼마나 좋겠냐고 했다.    서일이 만주로 건너오자 왼쪽눈 하나를 잃은 것이 과연 큰 신문거리가 되어 지어는 물의를 일으키기까지 했으니 독립운동에 관심을 두고있는 동지치고 모르는 이가 거진없다싶히 되었다. 이 일로 최진동은 더 난처했다. 그는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여 사과를 했거니와 보상을 하느라 현금 1천원을 내놓기까지 했다. 서일은 그 돈을 이동춘선생께 드리려했지만 이동춘선생은 한푼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일은 그 돈을 일전한푼 떼내여 제 가정살림에 쓰지도 않고 몽땅 학교를 건설하는데 내놓았다. 그래서 왕청사람들은 서일이 제 보배눈으로 명동학교를 세웠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래도 만대부자가 아닌 이상 자기 혼자의 재력으로 학교를 계속 운영해 나가기는 힘든 일이였다. 이를 감안하여 시교회에서 금후는 학교경영의 경비일절을 대종교신도들이 감당하리라니 서일은 얼마나 고맙고 속이 든든한지 모르겠다. 박찬익이 이제 한얼님의 은총이 내릴것이라고 한다. 서일은 이 독실한 신도의 믿음이 놀랍도록 기특하면서 그 축복이 몹시고마왔다.         박찬익은 서일을 귀객이라면서 자기 집으로 끌었다.    서일은 열혈이 끓고있는 그가 맘에 들면서 의기상투함을 느꼈다. 이로부터 두 사람은 초면이지만도 허심탄회(虛心坦懷)할수 있었다. 그들은 각자 지내온 경력으로부터 가정형편과 친구와 사회와 지어는 세계정세에 이르기까지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화제가 돌고 돌아 현재 만주일판에 분포한 동포마을의 실태를 분석하고 론의하기에 이르었다. 그들은 이주동포들의 민생문제에서 토지와 직업문제도 중요는하겠지만 안착이 된 다음에는 새 지식의 보급과 계몽을 우선에 놓아야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어느덧 밤이 가서 이제는 자야했다.    서일은 웃방 앉음뱅이탁상우에 “三一神誥”가 한권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집어들었다.        그것은 넓적글이 판면을 메운 순 한문본(漢文本)이였다.        竊伏門 羣機有象 眞宰無形 藉其無而陶鈞亭毒 曰, 天神 假其有而生歿樂苦 曰, 人物 厥初 神錫之性 元無眞妄 自是人受之品 乃有粹駁 譬如百川所涵 孤月同印 一雨所潤 萬卉殊芳.        서일은 경전을 펼치자 눈에 안겨오는 그 글을 즉각 번역하여 제 조선말로 쭉 내리읽었다.     《신은 그윽이 엎드려 듣사오니. 뭇 고동은 허울이 있고, 참 임자는 얼굴이 없는지라. 그 없음을 빙자하여, 질그릇 만들 듯 조화함을, 가론 한얼이오. 그 있음을 빌어서, 나고 죽으며 즐기고 괴로움을, 가론 사람과 만물이니. 그 처음에 한얼이 주신 성품은 본대 참함과 가달이 없건마는. 이로부터 사람이 받은 품수가, 이에 정함과 얼럭이 있으니. 비유컨대 온갖 내가 젖은바에, 외로운 달이 한가지로 찍히고. 한번 비가 부르는 바에, 온갖풀이 다르게 꽃다움 같으니라.》       《아니, 서선생은 그걸 한글로 숙련했습니까?!》    박찬익은 서일역시 자기같은 대종교도인줄로 알았던모양이다.    《숙련하다니 언제...오늘 이렇게 대하니 처음인걸.》    서일은 자기가 아직은 대종교도가 아님을 알려주었다.    《뭐랍니까! 그렇다면 서선생은 아직 입교도 아니했단말입니까? 하 이거! 원 어쩌면!...》    박찬익의 놀램은 이루 형언키 어려웠다.  세상에 별일이 다있다는거다. 서일이 자기와 같은 신민회 회원이였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직 제 민족종교도 신봉하지 않다니 웬 일인가?... 어쩐지 믿기싶지 않게 리해되지 않았다. 짦은 순간이건만 각가지 생각이 착잡하게 뒤엉키고 있었다. 한편 그러면서도 그는 그가 한문(漢文)지식이 이토록 박식함에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자기는 한문(漢文)을 알아도 그렇지는 못했던것이다. “三一神誥”를 손에 들고 이같이 막힘없이 번역해 내리읽는 사람은 처음보는 그였다.    박찬익은 서일보고 지금 교도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박절히 수요되는지 모르겠다면서 “三一神誥”를 한글로 번역해달라고 청들었다.   《우선 좀 보게해줘. 거기서야 이 책을 하나 더 구할수 있겠지.》          박찬익은 두말없이 흔쾌히 내놓았다.    서일은 집에 돌아가서 번역도 하면서 정력을 넣어서 이제 대종교의 교리를 깊이연구해 볼 생각이였다.       서일과 계화는 보름사이에 용정과 근처의 학교마을을 돌고 연길로 가서  그 근처의 학교마을도 돌아보고는 도문에 까지 들려서 왕청으로 돌아갈 계획이였다. 그러니 한곳에 이틀이상 더 머무를 수는 없는것이다.    김동삼역시 바삐보내는 사람이였다. 그는 용정까지 왔다가 뜻밖에 여기서 서일과 계화를 만나고 보니 구태여 다리품을 더 팔며 왕청까지 갈 필요는 없는지라 남만으로 돌아가고말았다. 그가 왕청에 가자는 목적은 바로 서일을 만나기 위함이였다. 같은 신민회의 사람이였던 그를 만나 회포를 풀면서 장차 펼쳐나갈 독립운동방략에 대해서 함께 연구해보자는데서였다. 한데 서일과 계화를 만나 심중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당장 무장항일을 한다는 것은 시기상조요 당전의 급선무는 우선 군중을 계몽시키는것이라면서 중점을 거기다 두고있기에 다른 얘기는 더 하지 않았다.    서일과 계화는 용정근처의 비암마을을 향해 걸음을 놓았다.    그들은 가면서 류하현에서 동포들의 민생문제를 관계하느라 세웠다는 경학사(耕學社)와 그들이 군사양성에 머리를 쓰고있는데 대해서 얘기했다.    김동삼이 그들에게 준 “耕學社趣旨書”를 보면 이러했다.                                  1) 자유직책(自衛之策).   2) 질서와 풍기(秩序와 風紀).   3) 생활방도(生活方途).   4) 교육방책(敎育方策).   5) 군사훈련(軍事訓鍊).     이상것은 “耕學社”에서 결의한 사항이였다.   《교포부녀들에게 산야채의 독성을 가리게 하고... 강냉이밥을 짓고 수수밥을 짓는 방법을 배워주고... 수토병방지와 예방법을 가르쳐주고...우리도 그리해야잖겠나.》   《물론 그리해야지요. 그리구 중광단이 창설되니 소식이 퍼져 이를 알고 들고싶어하는 이가 적잖으니 계획보다 준비를 빨리해얄 것 같습니다.》   《나도 그 생각을 하고있었소. 사람들이 그같이 지망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조직은 전도가 유망하다는걸 말하는것이지. 안그렇소 서교장?》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인원을 모집해 대오를 확대하고  조직을 널리 공포하게 될 그때가 되면 세상은 그 존재를 알게 될 것입니다.》    重光團ㅡ 얼마나 장한 이름인가! 서일은 장차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저  창설한 조직이니 대종교도들의 관심속에서 잘되여가리라  스스로 확신하고있었다.    돌아가면 해야할 일들이 많고 많았다. 학교와 숙사를 크게 지어야 했다. 그러자면 준비가 많아야 했 다. 학생들을 동원해서 토피 수천장을 쳤는데 그것들은 다 말랐다. 하지만 문감 재목은 채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였다.    계화에게는 그것이 근심꺼리로 되여 늘 머리속에서 맴돌이쳤다.        용정일대와 연길근처의 마을들도 다 돌아보았다. 이제는 돌아가야했다. 도문(圖們)을 걸쳐 곧추 북으로 향한 그들은 여리를 걸어 석현(石峴)에 당도했다. 여기서 왕청(汪淸)까지는  여러리 길이라했다. 계화는 석현마을에 성이 장씨인 한족(漢族)지주가 하나 있는데 면목이 있고 자별한 사이라면서 들려보고 가자했다. 하여 서일은 그를 따라 마을로 들어갔다.    그 마을의 복판쯤해서 돌담장을 높게 쌓고 소슬대문을 꾹 닫은 널직한 울안 한가운데 사랑채딸린, 처마가 건뜩 들린 커다란 청기와집이 한채 있었다. 그것이 장지주집이다.    얼굴이 풍염하게 생긴 50대의 한족(漢族) 사나이가 하인의 전갈을 받고는 마당으로 나오며 손님을 례절스레 맞아주었다. 그가 바로 계화가 친해놓았다는 이 마을의 지주 장송린(張松麟)이였다. 한마을서 오래동안 같이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그를  “대갈망치”라 불렀다.  별명이였다.  온갖 어려움을 겪어 여무지게 드레진 사람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느 깍쟁이 부호같이 린색하고 좀스러운 속한(俗漢)은 아니였다.    서일은 담장가에 두터운 판자를 차곡차곡 가려놓은 더미를 발견했다. 말짱 홍송목인 것 같았다.    (많기두하구나! 중국사람은 집널만은 일등재료로 한다더니... 저거면 새학교의 창문을 다 짜고도 남겠구나!)    부쩍 욕심났다.    널다란 객실에 향기가 서리서리 풍기였다. 윤나는 검은탁상이며 등나무덩굴의자며 병풍그림이며 푸른색의 채화가 그려진 목긴 당화기며... 집안을 장식하는 모든  가구가  고풍스러우면서 일품(一品)이여서 집주인의 부유를 자랑하고 있었다.    계화가 그한테 서일을 소개했다.    주인은 친구의 친구는 바로 제 친구와 같다고  반가와하면서 어려워말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경개여구(傾蓋如舊)라 잠시사귀여도 구면과 같군요.》     서일은 그와의 통화를 필답으로밖에 할수 없었다.    《고락간에 잊지 말아야 하는게 곧 인정이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고신척영(孤身隻影)이라 인정없으면 살아도 몸붙일 곳 없는 외로운 몸이 되고말지요.》   《우리 글을 잘 아는걸 보니 학식이 대단한 분이구려! 난 글을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식솔은 저그만치 48명이나 거느리고 삽네다.》    그는 자기야말로 명실공히 이 소인국의 황제가 아니냐며 자랑절반 여유작작하게 우스개소리를 했다.    《왜 아니겠습니까. 비단룡포를 입으면야 진짜황제노릇을 할수도 있지요. 아무렴 세살에 입궁을 해서 룡상에 올랐다는 아이신줘로 부의보다야 못하겠습니까.》    그사이 중국말을 배워낸 계화는 부전조개 이맞듯이 대방의 비위에 좋게  곧장 우스개로 맞춰주었다.    장지주가 껄걸 웃더니 이쪽은 아직모르는 새 소식을 알려주었다.   《한데 그 부의황제님이 이제는 정말 개꼴이 되겠수다. 무창에서 들구일어났다는 소릴 못들었소?》    10월 10일에 무창(武昌)에서 기의가 일어난 것을 말하고 있었다.    기의주모측은 중국의 자산계급혁명당이라 부르는 동맹회고 수령은 손문(孫文)이였다. 그 소식이 오늘 각 신문들에 굉장히 보도된 것이다.    서일은 장지주가 주는 “盛京時報”를 받아서 보았다. 신문은 무창기의소식을 대서특필했는데 관찰자의 언론요문이라면서 혁명형세의 발전은 한층 새로운단게에 진입한것인데 혁명과 반혁명간의 투쟁은 이제 더욱더 치렬해질것이라 예고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자산계급혁명당의 려정이 순리로운건 아니였다. 1907년도 에 기록된 짤막한 글만 봐도 알수 있다.                   《어느 혁명이면 순조로울가. 대가를 치루지 않고는 대업이 이루어지기는 어렵지요. 우리는 독립혁명에 대가를 대체 어느만큼이나 치뤄야할지...》    서일은 중국의 자산게급혁명이 우여곡절을 겪을것이지만 이제 승리할 그날은 꼭 있을거라 확신했다. 무릇 낡고 진부하고 반동적인 것은 그 종말을 고하고 력사무대에서 물러나기마련이니까.     《동맹회가 민주를 제창해왔으니 혁명이 승리할시 손문은 꼭 공화정부를 세우려 할거요...》   《물론 그러겠죠. 전제가 페단인걸 알고 도전해왔으니. 장차 중국의 대권을 누가 잡겠는지 우리를 알아주고 해치지만 말았으면 전 고맙겠습니다.》    계화와 서일이 주고 받은 말인데 마치 그걸 알아듣기나한 듯이   《정권을 누가 쥐건 매한가지야. 싸워 봐, 기껏 싸워 봐. 큰 고기는 작은 고기를 먹고 작은 고기는 작은  새우를 먹고... 천도(天道)는 본시 센놈이 이기게 돼있는게지요. 그냥 청제국이 되든 새로 공화국이 되든 아니면 민국이 되든 내 이 장송린이 속 썩힐일은 아니고 알배도 아니야. 안 그렇소? 검둥이가 올라앉건 백강아가 올라앉건 나만 못살게 굴잖으면 돼.》    장송린 지주는 제 잡담을 해놓고 하하 웃었다. 과연 셈평좋은 사람이였다.    그 지주한테 아직 시집을 안간 딸이 있었는데 그 처녀가 별스레 서일을 할끗 할끗 훔켜보더니 제 아버지와 말하는것이였다.   《짝짝눈만 아니였더면 미남이였을걸 그랬네요.》   《허, 저걸 보지! 처녀가 늙어 가면 산으로 맷돌짝지고 오른다고 저 계집애가 엉뚱한 궁리를 했네그려.》             《왜, 뭐라구하길래요? 나한테 시집오겠다는 소리야 안했겠죠. 참 아까 들어오면서 볼라니 이 집의 담장가에 두터운 판자더미가 있습디다. 그거나 한번 흥정해보시죠. 창문재료로는 훌륭할것 같습디다.》    서일이 말하니 계화가 자기도 봤노라면서 장송린과 판자를 팔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그래서 흥정이 붙었는데 장지주는 우정을 봐서 헐값으로 판다면서 몽땅 실어가라 대답했다.   《이젠 됐어. 새학교 지을 문감은 다 해결이 됐구만!》    계화는 한시름놓이는지라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서일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는 이미 정오가 다 되었다. 주인이 점심상을 차려주어 밥을 먹자고 마주앉는데 대문을 지키던 종이 급히 다가와서 주인의 귀에대고 뭐라 수근거렸다. 그러자 장송린의 얼굴에 일순간 곤혹스러운 빛이 흘렀다. 그는 제길할거하면서 음질을 쓰기까지 했다.    《왜 저럽니까?... 무슨일이 생겼습니까?...》    서일은 의문이 갈마들어 계화의 얼굴만 쳐다봤다.    《누가 온다는구만. 선문도 없이 문득 찾아오니 좋잖아서 저러오.》    《대체 어떤 사람이 오길래?...》    서일은 의문이 더 짙게 갈마들었다.    주인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한 무리의 괴한들이 대문을 활짝  열어재끼고 우루루 쓸어들었다. 조용하던 마당이 갑작스레 분주해졌다. 30여명가량되였는데 저마다 손에다 단총, 소총, 혹은 칼을 들었다. 서일은 어디의 어중이 떠중이들일까 생각했다가 인차 그 생각을 고치였다.    《그렇지, 만주에는 토비가 많다더니 바로 이놈들이로구나!》     모제르권총 두자루를 앞배에 찌른 목자사나운 녀석이 가랑이를 벌리고 서서 이쪽을 째려보며 씨벌이였다.    《장장꾸이! 오늘은 웬 일입니까? 일본놈 앞잡이를 제 집에 들여놓고  먹이면서두 이 호삼이는 몰라보는거 아닌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일본놈 앞잡이라니. 사람을 잘못봤어. 이분들은 내 친구 좋은 사람이네. 트집은 왜?...이 삼촌이 조카를 몰라볼까, 원.》     장송린이 얼리는 투로 해석하면서 그의 앞으로 바싹 다가가 뭐라 귀속말을 몇마디 하더니 데리고 바른쪽 사랑채로 들어갔다. 하졸들도 따라서 들어갔다. 이윽고 주인이 되돌아와서 사과를 하는것이였다.    《참 미안하게 됐소. 불청객이 뛰여들어 식미를 잃게해서.》       서일은 도리여 주인이 변을 당할까봐 걱정했다.     《저녀석은 이름이 호삼인데 본래 내집의 말먹이군이였었지. 건데 광서 32년에 저 웃마을 강촌의 유덕재아들놈허구 하찮은일로 싸움이 붙었다가 글쎄 저 우둔한 놈이 밸김에 그만 그 애를 돌로 쳐죽였단말이요. 살인죄는 대명이라 잡히면 낙자없이 죽는지라 내가 도망쳐라 시켰지유. 그래 지금은 작당을 해갖고 그짓을 하는건데 그놈의 류자(綹子)들은 의리도 모르는지 무리끼리 싸우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라 이번도 또 어느 무리와 맞다들자구 떠났다가 꿈자리 사나와 그만 제 굴로 되돌아가는 중이라는가.》     장송린이 알려주어서야 서일도 계화도 웬 영문이라는걸 알게되였다.     《건데 주인집에 왔으면 공손해야지 꼴이 왜 저모양입니까?》     계화가 말이 아니라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색물감통에서 흰천을 꺼낼수야 없잖소. 례모를 알면 사람이 됐지.》     장송린은 자기의 지난 처사를 후회하는 빛이였다.                     《악인에게는 그 나름대로 악인의 악마가 있지요. 저런 자가 의(義)를 지킬까. 장어른께서 궁리를 틀리게 한 것 같습니다.》     계화가 그쪽을 향해 던진 말이였다.   밥을 다 먹자 밖에서 돼지멱따는 소리 들려왔다. 집주인이 그자들을 호궤(犒饋)하느라 잡는 모양이다.        둘은 도문서 산 지필묵(紙筆墨)을 한짐씩 다시지고 그곳을 인츰떠났다.    그들은 부지런히 걸어 이틑날 정오무렵에야 덕원리마을에 이르렀다                                                이천만 동포야 일어나거라                   일어나서 총을 메고 칼을 잡아라                   잃었던 내 조국과 너의 자유를                   원쑤의 손에서 피로 찾아라      마을안에서 노래소리 들려왔다. 한 사람이 아니였다. 여럿이 목청을 모아 같이부르는 합창이였다. 어딜까?... 학교쪽이였다. 누가 배워주는걸까?... 유감스럽게도 계화까지 포함해서 7명중 악보를 아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그러니 필경 다른사람이 배워줄 것이다.    계화와 서일이 학교에 이르러 보니 과연 박승익이도 심권이도 박기호도 현천묵이도 아니고 박호의 처 현숙서생도 아니였다. 명동학교와는 관계도 없는 두 외지인이였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약간 면목이 있었다. 보름전에 왕청을 떠나 용정으로 갈 때 길에서 마주쳤던 그 노래를 부르며 가던 두 젊은이였던 것이다.   《서교장선생님, 용서하시오. 저번날 지나치면서도 몰라봤습니다.》   《저희들은 교장선생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있는 중입니다.》    그들이 머리숙여 인사하고나서 하는 말이였다. 두사람 다 30살이 넘었다. 중키에 단단하게 생긴이는 성명이 채오(蔡五)고 그보다 키가 약간 더 큰이는 량현(梁玄)이였다. 채오는 성천반일의병대, 량현은 평산반일의병대에 있다가 8월에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을 한 것이다. 한즉 그들은 늦게까지 조국땅에서 항쟁을 해온 광영스러운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가 전투를 여러번 겪어 경험도 있는 지식분자였다.       그들은 덕원리에 발을 들여놓은 후로는 이홍래의 권고대로 다른 어디든 가지 않고 괴나리 보짐을 풀었다고 한다.      《여기로 오기를 잘했지. 그러잖아 이제 당금 중학반까지 설치하면 선생이 택부족이라서 적임자를 물색하고있던 참이요. 우리 함께 우선 중광단원들에게 글부터 가르치기오. 무식자가 많으니까. 계몽을 홀시할 수 없지.》    서일은 그들을 기꺼이 중광단에 받아주었다.    이때는 중국의 국세도 자못 복잡했다.    1912년을 잡자 1월 1일, 손중산(孫中山ㅡ孫文)이 남경에다 임시정부를 세우고 대통령이 되어 中華民國을 세웠다. 한편 2월 12일에는 淸朝皇帝 부의(溥儀)가 퇴위하고 원세개(袁世凱)가 임시대총통으로 당선되였다.        이상은 3월 15일에 원세개가 내린 명령이였다.    이리하여 조이손(趙爾巽)은 東三省 都督으로,  진소상(陳昭常)은 吉林都督으로 하루밤새에 각각 탈바꿈을 한 것이다.       
22    반도의 혈 ㅡ제2부 23. 댓글:  조회:3679  추천:0  2011-08-21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3.    23.       滿洲! 상고(上古)로 말하면 대황조단군께서 5교와 366사로써 3천여 단부(團部)의 9족을 가르치고 일토산인왕 수긍(一土山人王 受兢)이 기자(箕子)의 망명무리 5천여명 교민에게 5교와 8관법을 가르쳐서 주나라와 무릇 7,8백여년간이나 항쟁을 계속하였고 중고(中古)로는 고려가 수나라 당나라를 상대로 근 백여년동안의 혈전이 있었으며 료나라와 금나라가 송나라를 정복한것과 아이신줴러(愛親覺羅)가 명나라를 멸하고 중국판도를 확장한 것들이 모두 만주에서 발단되여 동양력사의 중요한 부분을 창조한 것이다.     한데 이 만주땅은 너무나도 오랜 시기를 잠자고 있었다. 미개지의 잠자던 땅은 언제나 개척자의 피땀과 생명에 의하여 깨여나고 생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1677년(강희16년)에 청나라정부는 백두산의 량측으로 갈라져 흐르는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1천여리 되는 광활한 지역을 청조의 발상지로 삼아 봉금지구로 정하고 이주하여 가 개간하며 인삼을 캐고 진주를 채집하거나 벌목하고 사냥하는 것을 엄금하였으며 또한 저들의 사냥터로 정하여 놓고는 이족의 이주를 엄금하였다.    1860년대에 조선 북부지방에서 년년이 보기드믄 재해가 드는 통에 기아에 모대기던 조선의 백성들이 솔가도주하여 국경너머의 만주땅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청정부는 이런 이주풍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거니와 이 이주민을 리용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경제수입을 늘이려는 목적으로 1880대에 이르러 비로서 봉금령을 해제하고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그때로부터 압록강, 두만강의 찬 물결에 그 어느 날이면 동포의 그림자가 비끼지 않았으랴!? 특히 국치이후부터는 단신으로 혹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남부녀대로 살길을 찾아서 강을 건너 만주로 이사오는 이가 급증하여 행렬은 끊기지 않았다. 하여 만주에 거류하는 동포가 어느덧 45만에 이르고있었으니 그들에게 만주땅은 희망의 복지나 다름없는 곳이였다.    서일이 입원치료기간에 그의 가족은 현천묵, 박기호가정과 함께 계화의 부름대로 왕청현 춘명향 덕원리에 안착했다. 그곳은 류수하가 가로질러 건너간 작은 벌판이였는데 량옆에 큰 산이 솟아있고 동쪽으로 마반산이 멀리 바라보이였다. 그리고 북쪽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있었다.    이 덕원리가 왕청벌판에서는 제일 서쪽에 위치하였는데 그 동쪽으로는 새 마을들이 하나 둘 일어서고 있었다.    30여호 되는 덕원리에 한학서당이 있어서 박승익이라는 청년과 심권이라는 두 청년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학생수는 린근마을에서 통학을 하는 애들까지 해서 모두 32명이였다. 이사호가 계속 쓸어들고 마을이 하루다르게 커지고 있으니 학생래원도 자연히 많아져 선생 둘이서는 근본 되지도 않을것이요 교학방법도 당장 현대식으로 고쳐야 할 것이였다. 하여 서일은 병원에서돌아오자마자 그 두 선생과 상론하여 우선 서당을 사립명동학교(私立明東學校)로 고치고 현천묵, 박기호와 그의 처까지 해서 선생 여섯이 학년과 학과를 각각 떼맡아 교학하기로 하였다. 교장은 서일이 되였다.    함일사범을 졸업하고 국립학교에서 정규적인 현대식교학을 해오던 유능한 선생들이 지금 학생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서 덕원리는 어느덧 별칭이 학교마을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이름나게 되였다. 그래서 외지의 학생이 점점 더많이 모여들었다.    3월말에 생각밖에 늘 그립던 이홍래가 문득 장기덕과 장사학을 데리고 나타났다. 서일은 현천묵, 이홍래, 계화와 상론하여 그들을 포함한 10명인원갖고 계획대로 “重光團”을 창설했던것이다. 단장은 서일이 되었다. “중광(重光)이란 교문(敎門)이 다시열린다는 것인데 실질은 순수한 무장단이였다.     서일은 이제 교두(敎頭)룰 직접만나서 입교할 생각이였던 것이다.     이홍래는 장사덕과 장사학을 데리고 의병 모집을 나섰다...       9월말의 어느날 봉오동 하촌에서 안무가 최진동의 편지를 한통 갖고 서일을 문득 찾아왔다.    편지의 내용은 서일더러 모든 편리를 돌봐줄테니 자기네 마을에 와서  학교를 크게 꾸려줄수 없겠느냐 하는것이였다. 최진동은 학교도 학교려니와 그보다는 영향혁이 있는 사람을 자기켠으로 끌자는 욕심이였던 것이다.    서일은 믿어주고 생각해줘 고맙다는 답신을 쓰면서 이곳에도 해야할 일들이 많으니 미안하다는 것으로 그의 청을 좋게 사절했다. 이번 학기까지 보내고나서는 곧 중학반까지 설치해 교육을 승급시키자는 것으로 이미 토론도 되었기 때문이다. “重光團”을 확대발전시키자면 실질적인 일들을 많이해야하는 것이다.      이것은 왕청일대 동포들의 절박한 요구며 기대와 희망이기도했다.    안무가 돌아가자 며칠안되여 이번에는 박순호가 제 사촌동생 박기호를 보러 왕청에 왔다. 그는 가정을 봉오동 하촌에 두고 지금도 의연히 홍범도의병대에 들어있는 몸이였는데 하는 말인즉 자기들은 경원의 일본수비대와 한바탕 싸우고 방금 돌아왔다는거다.    이때는 조선에 진주한 제2사단이 조선주차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김정환이 이끄는 평산반일의병대를 없애려고 보병 16개중대, 기병 2개중대, 헌병과 경찰 80여명을 동원하여 곡산, 시변리, 금천, 신막을 동부지구로, 이 지역의 서남쪽인 개성, 봉산, 재령, 신천, 태탄을 서부지구로 구분하여 초토화작전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련계를 취하기 어려워 김정환의병대를 도와 홍범도의병대가 협력하려해도 어려울것이였다.    봉오동 하촌의 최진동은 홍범도의병대를 자기 마을에 주둔케했다고 한다. 그를 자기 세력범위내로 꿀어당긴 것은 그곳을 독립항일기지로 만들자는 것도 있거니와 무력단체를 흡입함으로써 동만에서의 자기 지위를 높이자는 속셈도 있기 때문이라고 서일은 분석했다.     《이제 나는 속이 쑤셔나겠는데 어쩌면 좋을까?》    박순호가 근심하는것이였다.    《아니, 어쨌다구 속은 쑤셔납니까?》    서일이 의아쩍어서 물으니    《이젠 어느때 가야 또 나가 싸워볼지 아득해서 그래. 싸움이 없으면 농사질이나 하고 지방보위를 해야 한다나.》    짐승사냥이나 했지 농사일에는 취미없고 깜깜이니 그러는 것 같았다.    《숨도 돌릴겸 그러는것도 괜찮지요. 농사질하건 보위를 하건 그래도 여유시간이야 많을텐데 짬짬이 글이나 더 배우지요. 거기에 취미를 붙인다면 속이 덜쑤셔날겁니다. 늙기전에 많이 배워두는게 랑패없지요. 아는게 힘입니다.》    서일이 충고했더니 박순호는 그 말이 맞겠다면서 허허 웃더니 초달에 매이여 공부하는 서당 초학동이 공자왈 맹자왈 하듯이 외는것이였다.    《신령재상 천시천청 생아활아 만만세강쇠》      (神靈在上 天視天聽 生我活我 萬萬歲降哀)    들어보니 대종교 교도들이 봉신성원(奉身成願)의 주송(呪頌)인 각사(覺辭)였다. 서일은 이 교도가 자기의 교를 대체 어느정도 알고나있는가를 알고푼 생각이 나서 그게 무슨 말인지 아느냐 물어봤다. 그랬더니 박순호는 대답이 막혀 난색을 지으면서 자기와 같은 의병친구 여럿이 홍범도를 따라 대종교에 입교했는데 모두 이런식으로 우선 암송해놓고 본다는것이였다.     《뜻을 딱히 모르면서 외기만해선 뭘합니까. 자 내가 알려드리지요. 그건 이런 말입니다. 》    서일은 알려주고나서 백지에다 한글로 써까지 주었다.    그것을 감사하게 받은 박순호는 돌아가 모두들 이대로 외우게해야겠다면서 서교장은 어느때 입교했는가고 물어왔다. 그의 물음에 서일은 자기는 아직 교도가 아니라 했다. 박순호는 아니 지식이 많고 애국심있는 분인데 왜 아직 대종교에도 가입하지 않았느냐면서  섭섭해하기까지 했다.   《난 아직 리해가 깊지 못합니다. 생각해보고 맘에 들면 그때가서 입교하지요. 그래도 되겠지요?》    박순호는 되다말다 거야 자유지요 하면서 웃었다.    박승익과 심권은 이미 입교한 대종교도였다. 지우 셋중에 대종교인이 먼저된 사람은 현천묵이였다. 그는 만주로 망명오기전에 고향에서 입교하여 지금 포교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그도 어느날 서일보고 어서 입교하라 왜 입교하지 않느냐 재차 권유하면서 자기는 그사이 참교(參敎)로 승임(陞任)하기까지 했다고 자랑하는것이였다.    서일은 대종교에 대해 그 어떤 이의를 갖거나 거부감이 있어서 선듯이 들지 않은건 아니였다. 동포계몽을 중시하고 학교건설에만 몰두하다보니 아직은 그쪽으로 생각이 돌지 않은 것이 한 원인이고 다른 한 원인은 그 종교의 교리와 일본의 황실중심주의를 대비적으로 연구하여 우선 량자간의 동일성과 차이점을 찾아낸 후에 보자는 생각이 있기도했기 때문이다.    대종교인이 되었다는 홍범도를 생각했다. 그는 홍범도를 아직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왜놈과 목숨걸고 싸우는 이 포수출신의 의병장을 전부터 맘속으로 은근히 존경해온거다. 이번에는 경원의 일본수비대를 들이치기까지 했다니 자못 감사한 일이라 서일은 궁리하던 끝에 안해가 자기를 입으라고  지어준 조끼를 박순호에게 줘 보내면서 당부했다.    《이 마고자를 홍대장께 갔다드리시오. 경원싸움을 축하해서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몸체가 저만큼하다니 그분께도 맞을겁니다.》    살림살이에 예산이 밝고 남의 인정을 중히 여기는 서일의 안해는 용정에 계시는 이동춘선생의 은혜를 많이 졌는데 자그마한 성의라도 표시해야할게 아니냐면서 그에게 보낼 양털조끼도 하나 이름지어 떠놓았다.    이동춘선생이 손수 만주땅에다 일떠세운 학교만도 수십처되거니와 애국적인 지식인들은 거의가 자기처럼 만주의 곳곳에서 동포계몽사업에 투신하고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동포가 사는 마을이면 학교가 생겨나고 어떤 곳에는 지어 중학교까지 일어선 것이다. 서일은 그 학교들과 우의를 맺을 겸 학생용 교재문제같아나 용정에 한번 갔다와야했다. 그때 그는 이동춘선생께 드릴 선물을 갖고가리라했다.          한편 이달문은 여지껏 계화의 집에 거접하고 있다가 로시아와 만주를 넘나들던 이동호군수가 서일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덕원리에 오고 담사리의병 장기덕이와 동학당의병 장사학도 덕원리에 오니 이달문은 계화의 집에서 나와 아예 초가집 한채를 짖고 넷이서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다.     서일이 이동호군수보고 왜 식솔을 데려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이동호군수가 하는 말이 내가 덧에 치일려구 그리로 가겠느냐고 도리질하면서 산 사람이야 제살도리를 하겠지 하는것이였다. 그는 처와 딸 둘을 경원에 버리고 온 것이다. 서일은 그를 념려해 이 일을 계화와 말했더니 계화는 장기덕과 장사학에게 임무를 주어  그들을 데려오도록했다. 그랬더니 그 두사람은 과연 국경을 넘어가 닫새만에 군수의 식솔들을 데려왔던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집 한채를 어렵지 않게 지어줘서 이동호군수는 홀아비집단에서 나와 일가가 살림을 따로하게 하게 되였다. 이러자 며칠안되여 또 이덕수라는 양반과 김기석이라는 양반이 덕원리에 와서 이달문 등과 한집에 동거하게 되었다. 그들도 다가 의병출신인데 나이는 중년을 훨씬 넘긴 50대의 점잖고 학식도 대단한 분들이였다.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대오가 해산되여 흩어져 문전걸식을 하면서 불계지주(不系之舟)의 몸으로 떠돌던 의병들이 하나 둘 왕청 덕원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일은 계화와 같이 그들을 오는 족족 따뜻이 대해주면서 유감없게 안주(安住)시켰다.    왕청은 길림성의 관할내에 들어있다. 길림성은 본래 길림장군(吉林將軍)이던 것을 청나라 광서(光緖) 33년에 지금의 행정기구로 고친것인데 이해 즉 1911년(선통3년)초에 이를 서남, 서북, 동남, 동북 4道로 정해놓고 아래의 10부(府), 1주(州), 5청(廳), 18현(縣)을 관할케 했다. 그러나 이것도 장차 어떻게 변해버릴지 모른다. 한것은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 바야흐로 자산계급혁명이 발발이 일어나고있기 때문이다. 정권을 뒤엎는 이 혁명 이 동란이 어느때 어떻게 끝날지, 누가 이 땅의 주재자가 될지 그것은 두고봐야 할 일이였다.     중국은 조선과 달랐다. 이 곳에서는 호수가 300여호가 넘는 부락은 촌(村)이라 칭하고 호수가 그 정도에 달하지 못하면 일률로 툰 (屯)이라 불렀다. 덕원리는 호수가 아직은 촌급에는 미달이여서 툰(屯)이라 해야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툰자를 붙이지 않고 습관대로 그냥 덕원리라 불렀다. 그래도 아무튼 툰장(屯長)은 있어야 할게 아닌가.    여지껏 계화가 도맡아서 툰장노릇을 해오나다름없었다. 그것은 이 마을을 그가 손수 개척한거나 다름없거니와 그 이상으로 신망이 높은 사람을 고를수 없다는것과도 관계된다. 허나 지금와서는 달라지는 형세였다. 호수가 점점 많이 불어나고 주민역시 많아지고있다. 그러니 자연히 다다소소 생기는 일이 많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 쌓이였다. 계화 혼자서 마을의 일을 처리할라니 대종교의 일도 돌볼라니...일심양력으로 하건만도 다해내지 못해 헤매치고 있었다. 사람의 능력은 한도가 있는게 아닌가. 혼자서 그렇게 눈코뜰새 없이 허우적이다가는 어느때 맥진해서 쓰러질지 모른다.       이 마을 사람들 마음은 선량하건만 한을 너무 부려먹는구나.     서일이 물어봤다.    《마을의 시교회에 대종교 골간이 몇분이나 됩니까?》    《이민혁이가 있소. 그가 말고도 한씨, 소씨, 김씨... 사람이야 여럿되지. 왜 그러오?》    《마을의 사업을 혼자서 너무 그렇게 무리하게 하지 마시오. 그러다가는 정말 쓰러지고말겠습니다. 신외무물이라 제 몸도 돌보셔야지요.》    서일은 이제부터는 마을의 사업을 분공하여 해나갈것을 제기했다. 어떻게 분공한단말인가? 주민들이 입교하는 추세로 보아서 이 덕원리는 조만간에 대종교마을로 되고말게 아닌가. 그러니 차라리 대종교에서 마을의 모든 일을 떠맡고 계화는 거기서 몸을 빼내여 자기 서일과 함께 학교나 잘꾸리자는 것이다. 단신으로 정처없이 떠도는 망명의병들을 계속 받아서 “重光團”에 가입시키고 정도에 따라 그들에게도 글을 가르치면서.   《아니 뭐라오? 사람웃긴다. 서선생, 나더러 글을 가리치라말구 차라리 거부기등에서 털을 긁어오라하구려!》             계화는 하지도 못할 일을 시킨다며 두손들다.   《아닙니다. 글을 가르치라는게 아닙니다. 중광단원이 계속 늘텐데 합숙을 지어 그들을 합숙에 넣고 관리해얄게 아닙니까. 저의 말은 책임을 져달라 그겁니다. 학교의 모든 후근사업을 말입니다.》    《오 그렇지! 중광단원이 늘면 학교는 후근일이 많아지겠군. 그러니 사람이 있어야지. 관리인원이. 내가 하지. 책임지고 잘할수 있어.》    계화는 그제야 흔쾌히 나섰다.    둘은 의합이 맞아 곧 군중대회를 소집했다.    이번 대회에는 온 마을의 남녀로소가 다 참석했다.    서일은 그들에게 마을이 변해가고있는 실태에 대하여 분석하고 미래의 전망을 말하면서 앞으로 마을의 모든일과 관리를 대종교에서 떠맡아야 한다는 것과 그렇게 돼야 하는 리유를 설명해주었다. 그랬더니 모인 군중들은 두손들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툰장에 참교 한승묵이 추천되고 독실한 교도들인 소진묵, 김려환, 엄호, 이민혁 등이 부촌장 혹은 협조적인 책임위원으로 되었다. 그들은 다가 마을분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잘하리라 결심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서일의 연설을 듣고싶어했다.     서일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했다.    《동포 여러분! 회고해 보면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연안은 우리들 배달민족의 피와 땀의 결정으로 꽃도 피고 열매도 맺았던 곳입니다. 이 삼대강은 세계에서 4대문화의 발상지라고 부르는 중국의 황하나 인도의 간지스하나 애급의 나일강이나 메소포다미아의 유푸라테스강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곳인겁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배달민족의 지배하에 있지 못하게 된 것은 삼국통일을 이루지 못하면서 왜적을 끌어들인 신라의 죄과였습니다. 동족상잔의 대결이 결국은 조상이 물려준 땅마저 잃고만게 아닌가요?....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력사를 알아야 할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땅을 도루찾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는 그따위 비극이 이제 다시는 재현되여서는 아니된다 그겁니다. 우리는 그 옛날 선조의 그림자가 비끼였고 발자국이 찍힌 이 력사유구의 땅을 근거로 국권회복의 지(志)를 다시다지고 기(氣)를 키워야합니다... 고향을 사랑하듯 이 땅을 다 같이 사랑합시다!》    서일의 이 호소는 망국한에 잠긴 모든 동포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서일은 왕청에 오자부터 사실상 이 지방 동포들에게는 정신적인 지주인 대종교와 더불어 사상을 이끌어주는 향도자로 부각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소유하고있는 박식과 애국심과 동포애와 상하 비천을 가리지 않는 포섭력과 성근한 열정을 사람들은 보았기 때문이였다.    (동포사회를 잘 꾸려야한다. 구국항쟁은 오로지 그 토대우에서만이 효과적으로 해나갈수 있다.)    서일의 절실한 깨달음이였다.    계절은 드팀없이 찾왔다.    나무마다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산천이 아름답게 단장을 하고있었다. 이것이 망명하여 처음으로 맞이하는 가을이였다. 공기맑아 상쾌한 기분이다. 국치의 한을 이역의 자연이 달래주는가싶었가. 한데 아직 한해도 안되는 사이 이렇게까지 변하다니! 오른켠에 높은 산, 앞쪽으로는 벌판이 바라보이는 덕원리는 서일이 길림병원을 떠나와 첫발을 들여놓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지는 모습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아름다운것도 자연이요 변화무쌍한것도 자연이로구나!)    동포들의 이주가 이토록 심함이 육안으로 느껴지고있는 어느날, 서일은 마을을 나왔다. 용정으로 가는 것이다. 동행인은 계화였다.       기차도 자동차도 없었다. 질러가도 거진 이틀이 걸려야 하는 먼길을 두 사람은 마차가 있으면 타고 없으면 걸어가기로 맘먹고 떠났다.     그들은 마을밖을 나서자부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다리맥이 드는줄을 몰랐다. 길동무가 잘되는 걸음이였다. 그들이 내처 걸음을 놓아 근 백여리길을 줄이였을 때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하는데 저 앞쪽으로부터 난데없이 노래소리들려왔다.                      경술년 추팔월 이십구일은                   조국의 운명이 떠난 날이니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여라                   갈수록 종설음 더욱 아프다                     조상의 피로써 지킨 옛집을                   백주에 남에게 빼앗기고서                   처량히 사방에 표랑하노라                   눈물을 뿌려서 조상하여라                        그것은 듣는 이의 가슴을 애절히 내리훓는 국치추념가(國恥追念歌)였다.    두 사람이 나타났다. 산모퉁이를 돌아서 마주향해 오고있었다. 방금 노래를 부른 이들이다. 한데 가까이 온 것을 보니 둘다가 30대의 장년이였다.    《동포구만! 어디로들가오?》     서일이 말을 걸었더니    《발이 가는대로 가지.》     둘중 하나가 마지못해 대꾸하는데 퉁명스러웠다.    《산저쪽에 마을이 있소?》     이번에는 계화가 그들을 향해 물어봤다.    《있습니다. 저 산굽이를 착 돌면 나지지요. 건데 되놈의 부락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젊은이가 알려주고는 걸음을 다시놓으며 노래불렀다.                   조국을 잃어버린 류랑족으로                   수만리 이역에서 설움받았네                   지는 해 돋는 달을 피눈물로써                   일시도 잊지 못할 조국의 광복        《저 노래가 가슴을 훑는구만요. 의병일가?》    《감정을 내는 솜씨가 맹물같지는 않네. 독립지사같으군.》    서일과 계화는 걸음까지 머추어 선채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이윽토록 지켜 보면서 나름대로 신원을 졈쳤다. 떠돌이를 하지만 어딘가 어중이 떠중이는 아니라는 감이 들었다.    두사람은 다시 걸음을 놓으면서 지금 이 낯설은 만주땅에는 저같이 떠돌이하는 망명 의병과 지사가 얼마나 될가고 점쳐보았다.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잠자리를 주어야 한다. 문전걸식을 하지 말고 안착하여 일하여 자급자족(自給自足)을 하도록 이끌어 주고 도와주어야 한다. 서일은 여보시오 친구 왕청에 가거든 덕원에 들리라구 거기에 가면 장돌뱅이 모양으로 떠돌이를 말라고 잡아둘거야 하고 일러줬을걸 그랬구나 했다.    그들은 다음날 오후에 용정에 닿았다.    이동춘선생이 마침 외출하지 않고 집에 있어서 왕청에서 간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와 계화는 구면이였다. 계화도 처음 동만에 와서는 그의 신세를 많이 졌노라 말한적이 있다. 서일은 문안인사를 하고나서 갖고간 조끼를 내놓았다. 이동춘은 기쁜 기색이 되어 잘 입겠다며 고맙게 받아주었다.    방안에는 이미 다른 손님 한분이 와있었다. 중등키에 콧수염이 감실감실한데다 얼굴색이 희고 준수하게 생긴 30대초반의 장년이였다. 이동춘은 먼저 왕청에서 간 이쪽 둘을 그한테 소개했다. 그랬더니 그는 먼저 상벌이 돼보이는 계화에게 허리굽혀 공손히 인사하고는 몸을 돌려 서일의 손을 맞잡으면서 웃음짖더니 무람없이 자아소개를 하는것이였다.     《난 김동삼이요. 무인(戊寅)생이니 나이는 올해 서른셋이구. 듣자니 서선생은 신사(辛巳)생이라며? 사실 그러하다면야 내보다 소금물을 삼년 덜먹은 셈이지. 안 그렇소? 하하하...》    《그렇지요. 김선생이 소금물을 삼년이나 더 자셨으면야 형님벌이 되지요. 난 싫은대로 형님이라 부를수 밖에. 안그렇소? 하하하...》     서일도 따라서 소탈하게 웃었다. 서로가 초면이건만 그들은 이렇게 어느덧 숙친한 친구마냥 스스럼없었다. 동지라면 응당 이러구지내야지 하는 그들이였다.     김동삼(金東三)은 1878년 6월 23일 안동군 임하면 천전리에서 김계락(金繼洛)의 장남으로 태여났다. 그의 본명은 긍식(肯植)이고 자(字)는 한경(漢卿)인데 만주로 건너와서 절개를 상징하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맘에 들어 호를 일송(一松)이라 지은거다.    일찍부터 나라의 쇠약이 국민의 무지에 있음을 깨닫고 고향의 완고한 풍습을 혁신느라 눈물겨운 노력을 해왔던 그는 1908년도에 마침내 유림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대교육의 선구인 사립 협동학교(私立協東學校)를 세워 교감이 되어 계몽사업에 힘썼던것이다. 신민회의 골간분자였던 그는 올봄에 독립기지건설과 독립투사 양성기관을 설치할 조직의 결의에 쫓아 평안남도에서 이상룡(李相龍), 이계동(李啓東)과 더불어 열혈청년 7명을 대동하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와 이회영 형제들이 자리잡은 류하현 삼원보로 간 것이다. 그는 거기서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등 선생들과 함께 경학사(耕學社)의 일에 전력하고 있었다. 류하현의 경학사가 만주에서 한민족(韓民族)으로서는 자치기관의 간판을 내건 독립운동단체의 효시(嚆矢)가 되는거다.    김동삼은 독립운동에 몸을 내번지고 뛰여 다니는 대단한 열성가였다.   《그러잖아 왕청까지 가려했는데 만났으니 됐소. 올봄에 조성환선생이 북경으로 돌아가시던 걸음에 류하에 들려서 서선생의 얘기를 자상히 하더구만. 왜놈을 피해 만주에 와갖고 제 동포의 손에 그런 변을 당하다니 원. 우린 모두 기가 차서 웃었소...그래 상한 안질은 어떻소?》    《보다싶이 이렇게 불뚝눈이 됐지요. 세상을 잘 보라구.》     서일의 해학적인 어투에 모두들 하하하 웃었다.     《참 이시영선생도 서선생하구는 구면이라구 얘기를 하시더구만. 언제  신채호하고 같이 만난적이 있다며... 그래, 그래, 시영선생도 회영선생도 모두 다 무사히들 지내고 있지. 신채호는 불라지보스톡에 건너갔는데 지금은 거기서 을 발행한다누만.》    김동삼이 알려주는 소리였다.    지난해에 안창호, 이갑, 이종호 등과 같이 중국에 망명한 신채호는 함께 청도(靑島)에서 회의를 열고 독립운동방안을 론의한 바 있다. 그러나 무관학교까지 설립할 설계를 했으나 자금문제로 착수하지 못하고 신채호는 불라디보스톡에 건너가 이종호(李鍾浩)의 자금으로 “海朝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사상고취와 동지규함에 노력하고있었던 것이다.      김동삼은 이동춘과 지난해에 건립된 경학사의 상황을 소개하던 중이라면서 경학사는 경술국치를 당하고나서는 군사양성이 시급함을 느끼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하고 소장(所長)에 이 광(李 光), 교원에 김창환(金昌煥), 남상복(南相復), 이장녕(李章寧), 이 흡(李 洽)을 두어 로소를 불구하고 군사훈련을 받게 하여 올 4월까지 5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노라했다.   《대단하네요!... 과연 잘하는구만요!... 》    서일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21    반도의 혈 ㅡ제2부 22. 댓글:  조회:3973  추천:0  2011-08-21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2.    지난해(1910) 6월 29일의 조사에 보면 전국적으로 단군교를 신봉하는 사람이 정확하게 서울이 2,748명이고 지방이 18,791명이니 도합 21,539명이였다. 홍암대종사 라철은 이 기초상에서 7월 30일에 교명을 대종교(大倧敎)라 개칭하고 기년(紀年)을 천신강세(天神降世)를 사용하게 결정했다. 한데 이렇게 해놓으니 교명개칭을 놓고 세간에서는 그래서야 되느냐, 그런다면 한배검의 도(道)는 말살되는게 아니냐며 온갖의 시시비비가 많았다. 지어는 이설과 함께 류언비어까지 나돌았다.     사실은 라철도 그럴만한 리유가 충분히 있어서 그같이 한것이다.     일본은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미명아래 식민지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합방으로 한국을 완전히 먹어버리고 총독부를 세워서부터는 더욱더 혹독한 무단정치(武斷政治)로 백성을 다스리는 한편 한국의 문화를 말살하고 배달민족을 일본인화(日本人化) 하기위해 강력한 정책을 세우고있었던 것이다. 다시말해 일본은 이 나라를 일시적인 착취대상으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를 동화(同化)함으로써 완전하고 영구적인 예속지로 만들려는것이였다.                한즉 그자들은 교의(敎義)야 천신대도(天神大道)를 지상에 널리 선포하여 홍제인세(弘濟人世)의 큰 리념을 현실화하려는것이라지만 이 교를 국조단군(國祖檀君)을 숭앙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애국단체로 인정하고 감시할것이였다. 안그럴가? 라철은 그러다가 악화될 경우에는 그자들이 이 교를 아예 페교시킬수 있다는 판단으로부터 우선 교명의 두자를 표면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의 자는 그 뜻이 이고 은 이니 곧 大倧은 檀君名詞以前으로 삭급(朔及)하여 개천립도(開天立道)의 造, 敎, 治化의 삼신명사(三神名詞)를 함께 쓰는 것으로 된다.    한마디로 말해 교명은 바꾸었어도 교리는 추호도 변함이 없다는거다.    이를 리해못한 정훈모(鄭勳模)는 교문(敎門)을 분립했다는 리유로 끝내  리탈하고말았다. 하여 대종교와 단군교로 양립(兩立)하게 되었다.    섭섭한 일이다. 그리고 안탑깜기도 했다. 잃어버린 국권을 어떻게 하면 다시회복할가고 애도 같이 태우고 힘도 같이 써보았다. 정훈모는 그와 심정이 같았던것이다. 하기에 라철이 네 번째만에는 그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간게 아닌가.    《귀공의 금후 사명은 포명서에 관한 일이요.》    라철은 두일백옹(翁)이 경전 세권을 주며 부탁하던 말을 다시상기했다.    그때는 그도 정훈모도 그가 그러는 것이 시끄럽기만해서 거절하느라 숙소를 청광관에서 개평관으로 옮기기까지 했던 것이다.    《국운은 이미 다하였는데 어찌 이 바쁜 시기에 쓸데없는 일로 다니시오. 곧 귀국하여 단군대황조의 교화를 펴시오.》    닫새지나서 밤에 그가 다시찾아와 간곡히 부탁하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때에야 비로서 깨달음이 있게 된 그들이 아니였는가. 라철도 정훈모도 두일백옹의 그 간곡한 부탁을 듣고서야 정치를 단념하고 민족종교를 일으킬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미 나라는 망하였으나 민족에게만은 진실한 의식을 배양시켜 민족복흥과 국가재건의 원동력을 만들기 위해서!    이것이 단군교를 중광하는 목적이다. 한데 이렇게 각기나가다가는?...    분열을 꾀하는자가 없으면 모순은 생기지 않으련만. 라철은 이유형(李裕馨)이 작간질한것을 다시생각하면 괘씸하기만했다.    《돌대가리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지!》    이유형은 정훈모를 암유(暗誘)하여 대교의 명령을 위반하게 하였고 단군교라 별칭하고는 무근거한 말을 만들어 관서(官署)에 무고함으로써 교문전체를 위험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대종교본사는 지난해의 12월 22일에 400여명의 교도가 대회를 열고 그의 죄상(罪狀)을 성토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무튼 기분잡치는 일이였다.     1911년이 돌아오자 라철은 정월달에 손수 신리대전(神理大全)을 지어 발행했다. 그리고는 7월 21일이 되자 그는 수원 몇을 거느리고 고적(古蹟)과 영적(靈蹟)을 답사하고 봉심(奉審)하려고 서울을 떠나 장도에 올랐다. 로선은 강화(江華), 평양(平壤)을 거쳐 천산북록(天山北麓) 청파호(靑坡湖)에 이르는것이였다.    서울을 떠나고있는 라철의 머리속에는 잊지 못할 사람 둘이 떠올랐다. 한 사람은 검은 턱수염에 팔자콧수염을 멋들어지게 자래운 신규식(申圭植)이다. 올해 32살인 그는 22살 때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고 그 학교를 졸업해서는 군계에 복무하여 보병영에서 직무를 맡기도 했다. 26살나던 해 그는 이 체결됨에 비분강개한 나머지 음독자살을 하려했다. 그러다가  집안사람들에게 발각되여 긴급치료를 받은 결과 생명은 건졌으나 음독한 약기운이 심해서 시신경(視神經)이 잘못되였다. 그래서 외견상 흘겨보는 눈이 되고만것이다. 그때로부터 신규식은 자호(自號)를 예관(睨觀)이라 하고 일체의 세상사를 옆눈으로 흘겨보게 된 것이다.     신규식은 그후 군대강제해산이 있어서 통분한데다 경술국치(庚戌國恥)까지 당하고 보니 견딜수 없어서 다시 자결을 하려다가 라철의 간곡한 설득과 만류로 구명되였다. 그는 분발하여 망한 나라를 구해보겠다고 학회조직이며 대한자강회며 대한협회 등 정치단체에 가입하고 교육사업에도 전념해보았다. 그는 어느덧 라철의 지우로 되었고 대종교에 입교하여 독실한 신자로 되기까지 했다. 그러한 그가 얼마전에 중국대륙으로 건너간 것이다.    《저는 대륙에 건너가 중국의 혁명투사들과 한국의 지사들간의 동지적 우호와 유대관계를 건립하도록 노력해볼텝니다. 그리고 포교를 널리하여 우리의 대교가 만방에 빛을 뿌리게 하렵니다.》    떠날 때 지기이며 벗이자 자기가 스승으로 모시는 홍암대종사 라철앞에서 한 말이였다. 지금 상해에 가 있노라 소식이 왔다. 라철은 그를 믿는다.    다른 한 사람은 서일이였다. 라철은 류배지인 지도(智島)에서 돌아오자 이시영(李始榮)한테서 합북도 경원에서 선생노릇을 하는 서일이라는 젊은이가 재판을 받게 된 자기를 구원해보겠다고 서울까지 올라왔더랬다고 알려줬던 것이다. 어떻게 생긴 젊은인지 한번 만나보고싶던차 이홍래를 통해서 소상(昭詳)하게 알게 된건데 올3월에 그가 重光團이라는 민중구국항일단체를 창립했다니 반가우면서 만날 생각이 더 간절해지게 된 것이다. 그러한 애국청년과 선각자들에 의해서 이 나라는 혈기가 끊어지지 않을것이며 민족은 복흥(復興) 할 날이 있으리라고 굳게 믿게 되는 라철이였다.     인천에서 강화도로 가는 배가 떠나기에 일행이 그 배에 오를 때였다. 일본 경찰이 그들을 수상하게 여겼던지 그냥 가로보고 흘겨보는것이였다.    봉교과규(奉敎課規)에 봉교인은 비록 교외인이나 역외인을 대하여도 온공겸화(溫恭謙和)로써 상대해야지 결코 깔보거나 기시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경찰이 노는 꼴을 보니 욕지기가 나서 참기 어려웠다.    《저 자식은 먹을걸 못먹어서 흘게눈이 됐나?》    누군가의 입에서는 이런 소리가 불쑥 튀여나가고말았다.    모두들 웃었다.    경찰은 자기를 조롱하는지라 두눈을 지릅떴다.    《저꼴 좀 봐, 강판에 뻐드러진 황소눈깔이 저래.》    또 누군가 한마디해서 이번에는 더 크게들 웃었다.    경찰은 독이 나서 풀풀 거리고 발을 구르면서 어째보려했다.    이때 집이 제물포에 있다는 한 대종교신도가 개를 데리고 해변으로 나왔다가 마침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먼저 허리를 크게 굽혀 라철에게 인사를 올린 후 그자를 나무렸다.    《이분은 홍암대종사이신데 왜 인사를 안해? 우리 집 이 진돗개는 버릇없는 사람은 물어.》    이 소리를 정말로 듣고 경찰은 황겁히 굽석 인사했다.    그 모양이 우수워 일행은 또 한바탕 웃고말았다.    고려, 조선왕조때의 피난지로 알려진 강화도에는 명승고적이 많았다. 강화읍만도 갑곳돈대, 고려궁터, 용흥문이 있었다. 도내에는 전등사, 보문사같은 절도 여럿있다. 마니산(摩尼山) 산정에는 단군성지(檀君聖地)가 있는 것이다.          祭天檀 (塹城檀, 塹星檀)    제천단은 한배검이 366사(事)로 치화(治化)의 공(功)을 세움과 아울러 큰 례의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여 보본(報本)의 정신을 드높인 제정일치(祭政一致)의 거룩한 영적(靈蹟)으로써 마니산꼭대기에 있는 것이다.                  동사(東史)에 기술된 것을 보면                          승람(勝覽)에 기록된 글을 보면 이러했다.                         비고에 고려 고종 46년에 교서랑 경유(校書郞 景瑜)가 말하되 “대궐을 마니산에 세우면 가히 나라 복상(福祥)을 늘게 하리라” 함에 명령하여 리궁(離宮)을 그 산 남쪽에 세우니라. 조선 인조(仁祖) 17년에 고쳐짓다. 또 조선 숙종(肅宗) 26년 5월에 고쳐짓고 석패를 세워 기록하니 가로대                         라철은 수행인원들과 함께 마니산제천단(摩尼山祭天壇)에서 제를 지내고 볼것도 다 돌아보고나서 강화를 떠나려니 서글퍼지는 마음을 달래기 어려웠다. 형편없이 된 단군성지(檀君聖地)를 보노라니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게 되고 이 나라에 뿌리박고 살아온 배달민족 전체가 자기는 단군의 후손이라는것만저 잊을 지경에 이르도록 무감각속에 살아오다보니 의기(義氣)는 다 죽어버려 민족전체가 이제는 자기보다 썩 락후했던 저 섬나라 쪽발이 오랑캐 왜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야 하니 통탄하기가 그지없었다.         우리 민족은 왜서 이모양이 되었는가?    하늘을 우러러 피를 토하고싶었다. 허나 그렇게 할수도 없다. 그런다면 단군대황조는 노하여 지탄(指彈)할것이다. 네놈도 무맥한 인간이냐 하고.    기차를 타고 평양(平壤)에 갔다.    평안남도 도청소재지로서 대동군중당부 대동강에 연하여있는 평양은 한국 최고(最古)의 도시로서 관서(關西) 지방의 행정,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였다. 평양에는 평양성이 둘러있으며 을밀대, 모란대, 부벽루, 대동문...등 고적들이 있거니와 기자릉(箕子陵)도 있었다. 하여 먼 옛날에는 여기를 기성(箕城)이라 불렀는데 력사가 변천하면서 서경(西京), 서도(西都), 호원(鎬原), 유경(柳京)이란 별칭도 갖게 됐다.    기자(箕子)란 누구인가? 그는 전설상의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시조로서 중국 은(殷)나라 주(紂)의 친척이다.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의하면 나라가 망하여 조선에 들어와 예의(禮義), 전잠(田蠶), 방직(紡織)과 팔조(八條)의 교(敎)를 가르쳤다고 한다.    라철이 평양에 와서 제일먼저 찾은 곳은 숭령전(崇靈殿)이였다.    숭령전은 단군이 도음하였던 평양성밖 인리방(仁里坊)에 있는데 성제사(聖帝祠), 단군묘(檀君廟)를 거쳐서 조선 영조 원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사액(賜額)되였고 그 위판은 조선 세조 원년 병자(丙子)에 『朝鮮始祖檀君之位』라 고쳐 쓰고 고구려 동명성왕이  배향(配享)하였다.                 高麗史와 西京志에 다음과 같이 밝히였다.                              비고에 밝힌 것을 보면 이러했다.                           문원(文苑)보물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여 있다.               강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라철일행은 숭령전에 제를 지냈다. 그리고나서 계속 북쪽을 향해 떠났다.    봄절기는 남쪽에서 먼저들고 가을 절기는 북쪽에서 먼저들었다.    라철일행은 정부로부터 월경허가를 받았기에 두만강을 배로 무사히 건넜다. 음력 8월중순이 되어오는지라 강건너 만주땅은 가을빛이 완연했다.     지난해의 10월 25일(음력)에 만주의 북간도 삼도구(三道溝)에다 이미 대종교 지사를 설립한바있어서 그곳에서는 시교(施敎)가 잘 되어가고 있었다.       (神靈在上 天視天德 生我活我 萬萬歲降哀)    대종교신도가 있는 마을이면 교도들이 입에서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홍암대종사 라철은 1909년 정월 15일(음력) 중광절에 제천포도(祭天布道)로 교문을 크게 열고 우선 교도(敎徒)들이 준행할 봉심성원(奉審成願)의 주송(呪頌)인 각사(覺辭)부터 지어서 발포했으니 그것이 곳 지금 신도들의 입에서 흘러나고있는 그것이였다.    그가 대교이념(大敎理念)의 실천적인 강령으로 발포한 5대종지(五大宗旨)는 이러했다.                  1. 敬奉天神 (경봉천신)                2. 誠修靈誠 (성수영성)                3. 愛合種族 (애합종족)                4. 靜求和福 (정구화복)                5. 勤務産業 (근무산업)      이것은 심리의 결속과 함께 천국현실화에 이바지할 것을 밝힌것이다.    그는 또 사신(四愼)을 敎中에 포고하여 교우의 신수(愼守)를 촉구했다.                   1. 敎는 時局에 無關하니 安身立命 함.                 2. 新法에 注意하여 犯科가 無케 함.                 3. 財産保管은 所有權과 法律을 信賴 함.                 4. 或 冤枉을 被하면 誠心으로 解決함이다.       라철은 지어 자신이 조석참배에 불결함이 있을가 저어하여 스스로 술을 끊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교도들에게 본을 보여준 것이다.     그 어느 때 자기집에서 식솔들과 편안히 보냈으랴. 라철은 중광이래 교문을 크게 열어보려고 그야말로 발분망식(發憤忘食)을 하는 사람이였다.    그는 1909년 단군교중광초기에 “檀君敎佈明書”를 위시하여 “重光源由”, “走筆記事”, “杜兄面談”, “原本神歌”, “奉敎節次”, “奉敎課規”, “誓辭”를 발표했고 1910년 8월 대종교총본사의 천진(天眞)에 천조영정(天祖影幀ㅡ단군상)을 봉안하고 제례(祭禮)를 지냈던 것이다. 그리고 동월 5일에는 서울 시내에 南部支司를 설치하고 오기호를 司敎로 임명하고 北部支司에는 정훈모를 司敎로 각각 임명하였다. 그후 儀式規例를 제정발포하였는데 “儀式類例發布案”, “施敎式”, “自信式, “敬拜式”, “慶賀式” 등이였다.            라철은 머리속에 백두산을 중심으로 교구를 형성하여 포교를 널리할 구상을 해온지 오라거니와 이번걸음은 그 실천을 보기위한 행동이기도했다.    라철일행은 계획대로 백두산을 찾기로 하고 동만의 화룡현으로 갔다.    백두산북쪽 기슭에 청파호(靑坡湖)가 있었다. 청파호라는 이름이 어떻게 유래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은 물이 고인 늪이나 호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남으로 웅위로운 장백산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오는 이곳은 공기맑고 안온하고 아늑하여 자연 그대로에 한배검이 은총을 내린 복지였다. 한점의 오염도 없이 신선함을 주고있는 이곳이 라철은 맘에 들었다. 이번 답사를 통하여 고적과 령적을 알아두며 제를 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장차 총본사를 어디에다 권설할것인가 그 기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였다.    라철이 민족종교를 창립한 것은 국조단군(國祖檀君)을 구심체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여야만 국권회복을 성취할수 있다는 구국방략에서 나온것이고 종교단체로 발족하면 일제 탄압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인데 일제경찰이 걸핏하면 트집잡으려 드는판에 국내에서는 시교를 널리하기에는 불편과 어려움과 장애가 너무나 많았던것이다.    라철은 지어 대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시켜볼려는 포부까지 갖고있었다. 그럴려면 대종교는 언제나 존재해야 한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총본사는 아무때건 여기 만주땅 백두산기슭으로 반드시 옮겨와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한데 단군교의 명칭문제에서 주교인 라철과 정훈모사이에 쟁송문제로 분열하여 정훈모는 단군교를 그대로 지키고 서창보(徐彰輔), 유탁(兪鐸) 등의 추대를 받아 도교장(都敎長)이 되었던것이다. 아무튼 국내에서 끝까지 견지해나간다면 대단한 절찬을 받을 일이겠다.    라철은 대종교총본사뿐만 아니라 대종교간부들도 만주로 이전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이동준비의 일환으로 그는 국내에 있는 대종교인은 물론 항일독립운동세력과 애국청년과 지사들에게 대종교의 교리와 장차 구국항일운동을 전개할 지역은 만주라고 강조하여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면서 만주로 건너가게끔 적극적으로 권유한 것이다.    대종교에는 종래의 관리, 학자, 양반층 특히는 구국애국지사들이 많이 입교하였다. 그들은 다가 대종교만이 민족종교로서 구국대일항전을 할수 있다는 자부를 가지였던것이다...         일행은 천산제(天山祭)를 지내였다.    라철은 천산제를 지내고나서 홀기(笏記)에다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백두산에 대한 라철의 지성은 이러했다.    太白山(白頭山)에 대해서 彊域考에 아래와 같이 기재되였다.              와유록(臥遊錄)에          장차 청파호에다 총본사를 권설하기로 하고 홍암대종사 라철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4敎區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20    반도의 혈 ㅡ제2부 21. 댓글:  조회:4324  추천:0  2011-08-21
  21.                  의사들이 검사해본 결과 용정병원(龍井病院)에서는 서일의 상(傷)을 치료할수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볼따구지의 살점은 그런대로 붙어서 잃지 않겠지만 눈은 살려낼 가망이 없었다. 칼날에 베인 왼쪽 안구(眼球)가 곪기시작한 것이다. 의사가 외려 환자보다 더 속을 끓이고 미안해 하면서 용정병원은 아직 의술도 낮으려니와 설비조차 안되여있으니 어서 길림이나 아니면 장춘, 할빈쪽으로 큰병원을 찾아 가보라고 권고했다.    마땅히 그래야 옳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현천묵과 박기호는 제 남편을 간호하러 온 채희연이와 더불어 환자를 데리고 병원을 곧 나가자고 서둘렀다. 한데 이때 누런 여우털모자를 쓴 사나이가 급히 들어왔고 그 뒤를 개털모자를 쓴 사나이 다섯이 묻어 들어왔다.    그들을 보자 이쪽은 그만 다 제 자리에 굳어지고말았다. 한 것은 개털모자를 쓴 그들이 바로 전날 길을 막고 행패부리던 자들이였기 때문이다.    서일의 얼굴에 험한 상을 입힌 장본인인 키가 꺼두룩한 녀석의 손에는 전날 빼앗아 간 책꾸러미까지 들려있었다.     다가 푸주간에 끌려들어 오는 짐승의 상인데       《천묵이!...나요, 나! 안무란 말이요! 안무!》    앞서들어 온 사나이가 여우털모자를 벗으며 웨치였다.    《아니 안무가 어떻게 돼서 여기는!?...》    현천묵도 웨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둘은 서로 부등켜 안기까지 하면서 일희일경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러다가 현천묵이 먼저 진정하고 아니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되어 왔느냐,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재우쳐 물었다.    《나말니요, 지금은... 》    안무는 말을 하려다말고 몸을 돌려 방금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서일의 쪽으로 성큼 다가가 허리를 크게 굽혔다.    《서선생님! 이 안무동생은 형님께 사죄하러 왔습니다.》    우선 허두를 이렇게 떼여놓고는 몸을 돌려 개털모자를 쓴 자들에세 불호령을 했다.    《이 우직한 놈들아, 멍청히 서있기는? 냉큼 빌지 못할가?》     넷은 우루루 쓸어와서 서일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사람을 잘못보고 그만 미런하게 맹용을 부려 일을 쳤다면서 어떠한 처벌이든 내려달라 찍소리 없이 받겠으니했다. 키가 꺼두룩한 자는 눈물을 짜내며 죽여달라고까지 했다.       《안무라, 자넨 대체 누군데?》     서일은 비두발괄하는 자들의 꼴을 내려다보다말고 고개를 들어 한쪽 성한 눈으로 안무를 다시금 찬찬히 여겨봤다. 전혀 면목이 없는 초면의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며 부산을 떠니 의아쩍어 떨떠름해났다.     안무(安武)는 1883년 6월 29일 함북도 경성(境城)에서 태여났는데 본명은 병호(秉鎬)다. 그는 16살에 벌써 진위대교련관이 되어 활약하다가 1907년에 군대가 해산되니 고향에 돌아와 함일사범학교에서 체조교사가 되였다. 한학교에서 사업하다보니 이미 여러해 교편을 잡아 온 현천묵이와는 가깝게 된거고 그한테 들어서 서일의 이름을 벌써 알고있었던것이다.     세해전인 1908년도 3월달에 대한협회가 경성에 지회를 내오자 안무는 그 지회의 핵심인물이 되였다. 그는 연해주에서부터 노랑포수반일의병대의 성원들을 따라 경성에 와서 함일사범에 뿌리밖은 지식인 이남기와 손잡고 학교의 학생들을 모집하여 체육을 가르친다는 명의로 그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킨 후 아예 그냥 데리고 의병에 나왔던 것이다. 바로 현천묵이 서일과 박기호을 찾아와서 우리는 어떻게 할건가고 청문(聽聞)할 그때였다. 안무도 서일이나 현천묵이 처럼 아무때건 구국항쟁에 나서리라 결심을 품어 온 포부가 큰 사람이였다.    한데 안무는 학생들을 데리고 이기남을 따라 의병이 되였지만 사실대로 말해서 몇번 크게 싸워보지는 못한 것이다. 그는 자기가 두만강을 건너 온 후에는 줄곧 최진동의 수하에서 그의 일을 봐주고있다면서 구역을 지키는 저 머슴들이 책꾸러미를 가져왔길래 헤쳐보니 생각밖에 책가위마다에 서일의 이름이 씌여있는지라 현천묵이 늘 죽마구우라며 자랑하던 그가 동만으로 건너왔음을 알았다고했다. 그는 무지한 저것들이 눈은 있건만 눈망울이 없는지 사람볼줄을 몰라 마구 행패질을 했고 일까지 쳤으니 참괴(慙愧)스럽다면서 이 모든게 다가 자기가 교육이 모자란 탓이라 반성했다.    《나리 이 못난 것이 죽을 죄를 졌수다, 죽을 죄를.》     키가 꺼두룩한 자는 눈물 코물짜가며 빌고 또 빌었다.     안무는 그를 가리키면서 저 녀석은 최진동이한테 뺨까지 얻어 맞았으니 이제 돌아가면 큰 벌이 내릴거라했다.    《벌이 내린다고 버리게 된 내 눈이 나을가. 싹 거두라 하오.》    《징계없이는 규률이 서지를 않겠습니다. 헌데 저...서선생님, 제 좀 물어봐도 될까요? 이란 책에 마에마 교오사꾸라는 이름이 있는데 누군가요? 책을 그분이 서선생께 드렸더구만. 통감부통역관이지요?》    안무가 짙은 의문을 갖고 캐묻는 말이였다.    《옳소. 통감부통역관 마에마 교오사꾸. 그는 우리의 스승이요.》    《아니 뭐랍니까?... 그 일본사람이 스승이라구요!?》    안무는 놀라 무르춤하는데 모두들 웃기만한다.    《날 놀리지야않겠지?》    그가 반신반의하자 박기호가 정색하여 알려주었다.    《그렇소. 그는 우리가 소시적에 금동에 와서 한동안 글을 배원준적이 있소. 그러니 스승이 아닌가. 그때는 이름이 김호였소.》    《믿기 어렵겠지만 그건 사실이요.》     서일은 이렇게 말해놓고 안무에게 그 내력을 간단히 다시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자기가 여차여차해서 서울에 가서 서점에 들렸고 거기서 신채호를 만나 이야기를 하던 중 책을 사게 되였는데 그것이 기연(奇緣)이 되어 꿈밖에 옛스승을 만나게 된것과 그를 다시만나러 통감부에 갔더니 거기서 또한 이또오 히로부미는 물론 부통감 소네 아라스께까지 우연스레 보게되였노라고 사실그대로 솔직하게 토로했다.    《무어라? 하하하!...》    안무는 이거야말로 귀맛을 돋구는 기화(奇話)라면서 손벽을 탁 쳤다.    서일은 길림(吉林)에 가 눈을 치료하기로 했다.    이동춘은 관동호마(關東胡馬) 3필이 끄는 마차를 삮내여 서일을 빨리 길림까지 실어가도록했다. 한편 안무는 자기가 데려온 머슴 다섯에게는 담가를 주어 따라가도록 하면서 차가 길이 나빠서 들출 때는 꼭 그 담가에다 상자(傷者)를 담아 메고 조심해 가도록하라 시키고는 박기호와 같이 봉오동 하촌으로 돌아갔다. 박기호는 봉오동 하촌에 가서 사촌형을 만나보고는 왕청에 가 지금 온 가족이 그곳에 자리잡았다는 계화를 찾아 이주문제를 상론하기 위함이였다.    길림병원에 이르자마자 서일은 왼쪽 눈 안구(眼球)를 빼버렸다.    유리안구를 해넣어야 했다.    서일이 병원에 입원해서부터 병문안을 오는 사람이 련줄이었다.    제일먼저 달려온 사람은 담사리의병 장기덕이였다. 그는 어디로 가던 걸음에 용정에 들렸다가 거기서 이동춘으로부터 소식을 듣고는 곧장온건데 제 친구까지 하나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나이가 중년줄을 넘긴 비슷한 그 또래였다. 그는 자신을 이라면서 성명은 장사학이라 소개했다. 성격이 걸걸한 사람이였다.    《난 지난해 오월달에 그만 꼬리를 빼고 말았수다. 건데 이치는 통감죽어 닫새만에 건너왔다잖수. 비겁스레두. 그러니께 나보다두 반년이나 먼저 꽁무니를 뺀거지우. 그러구보면 내사 반년이나 무던히 더 배긴거지. 안그래, 담사리 상놈의병?...난 와갖구는 들개모양으루 이리 저리 싸댕겼지우. 그리하다 어쩌다나니 이치를 만난거지유. 다리부러진 노루 한굴에 뫼인다구 뫼니께 이렇게 만나게 된게지우. 안그래, 담사리 상놈의병?...》    《야 이거 말끝마다 상놈, 상놈이다. 상놈이 웠쨌다구서. 그놈의 빌어먹다 오그라질 상놈의 소리 어느 때 가면 끊겠는지 이제는 악비가 난다. 이봐, 동학당 찌그렁 쪽박! 점잖은 분 앞에서는 말 좀 점잖게 하라구. 그럴 때는 류류상종이라는 말루서 허믄 듣기두 좋구 어른스러워. 알아들었는가, 동학당 찌그렁 쪽박!》     장기덕이 주름투성이 만면에 웃음을 가득 피우며 충고하는척 넌지시 되놀려 앙갚음을 했다.     무두들 하하 웃었다.     서일도 장기덕을 마주보며 웃었다. 그가 이또오 히로부미가 죽으니 술집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나와 십년묵은 체증이 뚝 떨어지는 것 같다면서 광기를 부리듯 웃어대던 것이 어제일같았다.    《어른분께서 만주로 건너오기 전에는 어떤 싸움들을 했습니까?》    현천묵이 반년이나 무던히 배겨냈다는 을 향해 물었다.    《싸움이 다 뭐요. 철길에서 작난질이나 한거지우.》    장기덕이 질러 말하니 장사학은 머리를 내흔들며 남의 공을 쥐뿔같이 여겨서는 안된다며 그때의 일을 자랑했다.    지난해(1910)의 3월 3일이였다. 이진용, 한정만이 지휘한 90여명의 의병들은 계정역과 잠성역(현재 금천)사이의 철길우에 돌을 쌓고 그 철길을 파괴하여 서울에서 신의주로 가던 기차를 탈선시켜 기관차를 전복시켰던 것이다. 그 일을 “大韓每日申報”가 3월 5일자 신문에 알린적이 있어서 서일은 지금도 기억난다. 그때 교감 오사기 겐다로가 그 사건을 야만스러운 파괴행위라 해서 서일은 그렇다면 의병을 붙잡아서 각을 찢어 죽이는건 야마도(大和)민족의 문명인가고 당장에서 그를 까주었던 것이다. 의병이 일어나는것도 파괴가 생기는것도 자기들의 침략으로 인한것임을 일관적으로 부인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솔직하다는 일본인의 본성으로 고착되여갔다.     서일은 근년에 일본학자  하가야이찌가 쓴 을 읽어본 기억이 난다. 그의 문장에는 이러한 대목이 있다.                   이 글을 읽어보고는 누군들 일본 사람은 인정이 철철 넘치는 민족이라 말하지 않으랴!             1867년 후꾸오까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고전(古典)읽기를 좋아했던 하가야이찌(芳賀一矢)는 18살에 도오꾜오대학(東京大學) 예과생으로 되었다가 이어서 본과연구생이 되었고 졸업후에는 고등학교와 고등사범학교의 교수(敎授)를 담임했다. 그러다가 33살때 독일에 건나가 2년간 류학했고 돌아와서는 도꾜대학(東京大學)에서 문과교수를 맡고 맨먼저 고전문헌학(古典文獻學)을 비롯한 고대문학사(古代文學史) 등 학술령역의 연구를 개척한 사람이다. 그러한 지식인이 연구없이는 이런 글을 써 세상에 낼리없다지만 그건 눈가리고 “아옹”하는 격이요 철없는 어린애나 얼릴 기만이였다. 싸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남의 나라를 침략할줄을 모른다면 도요도미히데요시가 임진년에 조선에 쳐 들어와 일으킨 란을 무엇이라 해석할건가? 인간본성이 악성을 갖고 태여난건 아니겠지만 서일은 이세상 제일허심하지 못하 약아빠진것이 일본사람이라 보았다. 그들은 청일전쟁과 로일전쟁을 유발했고 조선을 완전강점하고나서 이제는 만몽, 나아가서는 중국본토까지 삼켜버리려는 야망을 품고있는 것이 실태인 것이다. 일본의 정치는 제 민족을 파시스로 만들어가고있었다.    서일이 일본에 대해 증오감을 품고있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장기덕과 장사덕 두 사람은 서일보고 자기들이 왜놈과 계속 싸울수 있게끔 그 어떠한 무장단체같은것을 조직할 생각은 없는가, 그런것이 생기면 자기들은 얼싸좋다 춤추며 가담하리라며 학교를 세워 글을 배워주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만주로 건너와 흩어진 의병들을 한데모으는 일도 중요하다고 했다. 들어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라 서일은 이모저모로 생각을 굴리였다.      그들이 돌아가자 이틑날 왼쪽눈에 유리안구를 해넣었다.    서일은 머릿속에 로씨아의 연해주에 갓다가 원산학교일어교원 김성이 유인석의 의병들 손에 잡혀 혼쭐갈기는 꼴을 목격하던 일이 새삼스레 상기되여 피식웃었다. 자기도 그꼴이 아니였는가. 왼쪽눈 하나만 상했으니 다행인가싶었다. 그는 오른쪽 성한 눈 하나로 되돌려받은 일어문서적을 펼쳐 다시보았다.            이것은 1908년에 개정판으로 출판된 책에서 이 책을 쓴 저자인 도꾸도미가 “황실중심주의”에 대하여 해석한 구절이다. 일본인들의 사상은 무엇이 구심체를 이루고있는가? 그것을 서일은 전에는 그저 아리숭하게 느꼈을 뿐인데 이제야 좀 더 명철히 알게 되였다. 한 민족이 뭉치자면 응집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응집력은 구심체(球心體)에 의하여서만이 생길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데 조선은 대체 어떠했던가? 임금도 있어봤고 황제도 있어봤다. 하지만 그들은 통치자로서 백성의 머리우에 군림했지 진정 제 민족을 하나같이 묶어 세우는 능력을 가진 자격자로는 되어본적이 없었다. 조선민족은 응집력을 갖지 못했다. 전 민족이 그것을 키울수 있는 민족적인 구심체가 없는것에 원인이 있는게 아닌가?        “국민성10론”의 작자도 이에 언급한 바 있다.          이성계(李成桂)가 천손(天孫)이였던가? 그는 이씨조선을 세우고 500여년간이나 멋없이 가계(家系)를 잇게했을뿐이다.      서일은 일본리론가들이 천손(天孫)을 만들어 내는 그 창발성에 대해서는 한번다시 감복했다.    “우리는 왜서 남의 침탈의 대상으로 되는건가? 여지껏 통일된 사상이 없어서 응집력을 잃었으니 치명적이였지!”    그는 그것이 다시금 절실히 느겨져 혼자소리로 부르짖었다.    유리안구를 해넣은지 여드레만에 이동춘이 길림으로 왔다. 그가  혼자온 것이 아니였다. 조성환을 데리고 함께 온 것이다.    서일이 그들을 기쁘게 맞이한건 더 말할 것 없다.   《내가 때마추 용정엘 갔지. 안그랬더면야... 동춘형님 집을 막 나가려던 참이였소. 그래서 내가 어디루 출장하시느냐구 물었지. 길림으루 환자보러 간다구하더란말이요. 그래 내가 또 물었지. 졸지 에 환자는 웬 환자냐구말이요. 이 동춘형님이 바로 그게 바로 경원서 갖건너온 서선생이라 하더란말이요. 그래서 보다싶히 이렇게 오게된건데.... 원 어쩜...눈섶에 붙어 다닌 액인가보지. 어쩌면 이렇게... 귀축같은 왜놈의 총끝을 피해 무사히 건너와 갖고 제 동포한테 당하다니 원, 쯔쯔!》    조성환이 기가 차다면서 하는 말이였다.     《조선생이 당장 최진동을 찾아가겠다는걸 내가 말렸소. 간들 어떡허겠소, 시킨것도 아닐텐데 안그래? 하여간 지금 치안이 말이 아니야. 이 점 내가 아무때건 따끔히 일러줘야겠어.》    이동춘이 이러기에 서일은 그보고 안무가 이미 사과를 다 한것이고 일을 친 머슴들도 빌고는 담가를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갔으니 그 일은 다시 언급하지 말아달라했다. 그리고나서 서일은 그가 자기 하나뿐아닌 여러 식솔까지 극진히 보살펴주고있음에 감개무량해서 복배(伏拜)를 하려했다.    이동춘은 복배는 무슨 복배요, 서선생이 어서 상처가 완쾌되여 조국광복에 헌신하면 그것으로 복배를 받은셈치지 하면서 치료비일절 자기가 댈테니 마음놓고 치료나 잘 받으라했다. 과연 고마운 분이였다.    서일은 조성환에게 자기와 현천묵은 이홍래가 갖다주는 신채호의 비밀편지를 받고 만주로 건너온것이라 알려주었다. 조성환은 알고있다면서 그것은 조직의 결정이였는데 어떤 사람은 지시를 받고도 정신차리지 않고 어물거리다 그만 체포됐다면서 걱정했다. 그도 체포되지 않은 회원들을 급히 피신시키느라 불철주야(不撤晝夜) 심줄이 늘어나도록 뛰여다녔던 것이다.   《조선생께서 요지간 어디가 계셨습니까?》    서일이 물어봤다.   《나 북경갔다오는 길이요.》    조성환은 이러면서 북경(北京)에다 집을 잡아 식솔들이 생활을 하게끔 조처를 하고는 자기는 지금 나돌아다니며 흩어진 동지들을 찾는 중이라 했다. 그는 안창호, 이갑, 이동휘, 이종호 등 신민회의 중견들이 혹은 중국 혹은 로씨아로 건너갔노라면서 자기는 이제 중국의 혁명가들을 찾아  한국과 중국이 공동전선을 이룩해볼 생각이라했다. 조성환은 먼저 진기미(陳其美)를 만날 생각인데 그가 상해에 있지 않고 외출중이라기에 여기로 왔다는것이였다.    1876년도생이니 이해에 35살박에 되지 않는 젊은이 진기미는 생기발랄하며 애국열이 드높은 중국의 혁명가로 알려지고있었다. 그는 일찍이 전당, 방적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었다. 그러다 1906년에 일본에 건너가 경감학교에서 동맹회(同盟會)에 참가했고 두해지나 1908년도에 상해로 돌아와 절강 등 지대를 돌아다니면서 당원들과 련락을 취하고 청방(靑幇)에 들어 두목이 된 것이다. 그는 새정권을 수립하고 새국가를 세울 뜻을 품고있었다.    서일, 이동춘, 조성환 그들 세 사람은 당전의 중국형세를 놓고 론했다. 중국은 지금 전국적규모를 띤 통일적인 첫 중국자산계급형명당인 동맹회(同盟會)가 맹활약을 하고 있었던것이다.               달로란 민족통치자를 가리킴이요 조선의 달로는 일본침략자라고 비유적인 해석을 하고보니 그들의 정치강령은 비단 중국의 혁명가만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지망하여 해외로 망명한 이 세명의 조선애국지사의 피도 다시금 끓어오르게 했다.   그들은 한일합방이 돼서부터 일제의 탄압이 점점 더 심해가는 상황에서 여지껏 국내에서만 활동하고있던 많은 우국지사들이 부득불 국외로 망명하게 된데 대해서와 앞으로 해나가야 할 독립운동의 방략에 대해 각자 자기의 생각을 내놓고 운운했다.    1906년에 벌써 이동녕, 양기탁, 김 구, 전기덕, 이회영, 조성환 등이 신민회를 본부 겸 비밀련락장소로 하여 다각적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여 온 것이다.    그해 여름, 그들은 구국방침을 논의한 바, 만주에다 토대를 두기로 결론을 짓고 이상설이 만주책임을 맡아 곧 북간도(北間島)로 향하여 용정에 정착하고는 서전서숙(瑞典書塾)을 세웠으며 국내의 모든 책임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이 지키였던 것이다.    조성환은 지난해 말, 유하현삼원보 추가가(柳河縣三源堡 鄒家街)에 정착한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은 대공을 세웠다고 찬양했다.    삼한고가(三韓古家) 명문의 후예로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이유승(李裕承)의 아들 이회영은 지난해에 독립기지를 물색코자 이동녕, 장유순, 이관식 등과 같이 백지상(白紙商)으로 변장하고 험악한 만주산야를 고행한 끝에 그곳이 마음에 들어 독립기지로 정해놓은 후 귀국하여서 저의 6형제를 한자리에 모이게 하고는 력설했던 것이다.    《우리는 교목세신(喬木世臣)의 후예로서 국가가 망한 이상 오늘 당연히 구국방책을 세우고 헌신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만주로 가서 독립기지를 설정하고 인재를 양성하면서 동지를 결속시키면 반듯이 광복될 기회가 올것이다.》      이에 형제들은 흔연히 찬성하였다.    그들 40여 권속(眷屬)은 가산을 처분하고나서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이른것이다.      이회영은 가족들을 위로했다.    《이러한 고초로서 망국대부(亡國大夫)의 가족으로 국가와 민족에게 속죄하는 것이며 명일의 자주민이 되는 훈련이다.》                        조성환은 육신과 가산을 독립운동에 다 바치는 이회영의 가문이야말로 구국의 화신이 아니냐 하면서 이 대가족이 와서 정착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내외의 망명지사가 모여들어 추가가(鄒家街)는 갑자기 조선사람의 부락이 되어간다고 했다.    《거 과연 기쁜소식입니다. 그래야지요. 동포가 많이 들어와 자리잡아야지요. 신민회가 애초에 만주를 독립기지로 삼고 여기서 독립운동을 펼쳐나갈 구상을 한 것은 과연 현명한 결책이라 여겨집니다. 정말입니다.》    서일이 소견을 말하니 이동춘은 그렇지 그렇구말구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동포이민이 많이 쓸어드는 것 같으니 토민들이 의혹을 품는다는구만. 큰문제같잖아 김동삼이도 갔으니 리씨형제들과 방도를 댈거야.》    조성환이 하는 말이였다.    서일은 을사5적을 암살하려던 거사가 실패하여 재판받게 될 라철을 구하고자 이회영을 만나러 서울에 올라갔다가 이회영은 만나지 못하고 그의 아우 이시영을 만나봤던 일을 상기했다. 존경할만한 이들 형제야말로 진정우리 동포가 만주에 정착하게끔 길을 열어놓은 개척자요 선구자가 아닌가!    《서선생은 이제 출원하면 무엇을 할 타산인가?》     조성환이 문득 매묻는지라 서일은 자기 안속을 내놓았다.      《우선 학교를 세워 학생을 모집해서 글부터 가르치렵니다. 계화분이 왕청에다 자리잡았는데 우리도 그리로 갈가합니다. 거기도 유하의 삼원보모양으로 이제 동포이주민이 많이 모여들 것 같습니다. 그리구 그 다음의 보취는...》    《서선생이 시간을 헛보내지 않았구만! 다음 보취까지 세웠단말이요?》     이동춘이 웃었다.    《예. 구국교육과 종교만으로는 아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제와의 대결속에서는 오직 독립전쟁만이 그자들을 구축할 수 있는것입니다.》    《거 과연 옳은소리구려! 그래서?...》    《장차 무장대오를 건립할가 합니다. 대교가 중광해서 지금 대중속에 널리 펴지고있는데 저는 이 교의 명의를 빌어 우선 민중구국항일단체를 하나 세워볼까합니다. 이름은 이라 달고. 그래서 될까요?》    《안될게 뭐요. 그러면야 좋지! 이라 거 듣기도 좋은걸!》    조성환이 찬동하자 이동춘도 그렇게 하라면서 지지했다.    《한데 저는 아직 대종교인이 아닙니다.》    《거야 입교를 하면 될게 아닌가. 문제될게 뭐요. 계획대로 해봐.》    조성환의 이 말은 서일에게 용기를 한층 북돋우어주었다.     두사람 다 돌아갔다. 이동춘은 용정으로 가고 조성환은 북경으로 갔다.    《에그! 이를 어째요, 조선생이 책을 두고가셨네!》    채희연이가 얍다란 포케트용 수첩을 손에 들고 안달을 뗏다.    서일이 달라해서 펼쳐 보니 대종교에 관한 글외에 다른건 없었다.    “한배검 신앙의 유래”라 해놓고 써놓은 발췌문 한단락을 읽어봤다.               원래 우리 배달민족은 지역으로 아세아의 동쪽             에서 백두령산의 광명한 정기를 타고 난 문자 그             대로 밝은 나라의 민족이니만큼 원시시대에는 밝             은 태양을 숭배하여 왔고 신도의 교문이 열린 뒤             부터 천신송앙의 사상이 깊이 뿌리박혀왔던것이다.           《조선생도 신을 믿는모양이네. 건 믿어서 뭘하나요?》    희연이는 리해안된다면서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19    반도의 혈 ㅡ제2부 20. 댓글:  조회:3770  추천:0  2011-08-21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0.    함북도의 경원은 서울과 거리가 멀다보니 아무튼 소식이 늦기마련이다. 합병조약을 맺고 량위조서(讓位詔書)까지 내린지 3일만에야 이곳 사람들은 비로서 무슨일이 생겼는지를 알게되였던 것이다.     그날은 9월 1일 월요일이였지만 경원학교는 수업을 그만뒀다. 할 수가 없었다.    《서교장! 왜 신간을 안보오?》     오사기 교감이 서일을 찾아 책문(責問)하는것이였다.    《시간을 어떻게 봅니까, 사생모두가 기분이 죽어버렸는데.》    《기분이 죽다니, 경축할 일인데도?》    《아니 이 사람이, 제정신갖고 하는 말인가? 나라가 망했는데 경축이란 웬 말인가? 하긴 일본인이야 경축할 일이 많아 하루건너 명절이라지만, 오사기선생, 그래 부모가 사망해도 경축합니까?》    《뭐라, 나하구 무슨말을 그렇게?...》    《그렇게 몰상식하고 무례하니 오랑캐라는 소리를 못면하지.》    《......》    오사기 겐다로는 화로불을 뒤집어 쓴 것 같이 낯이 확끈했다. 이런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보긴 처음이였다. 해도 치를 떨 뿐 어쩌지 못했다. 서일의 눈에서 노날같은 분노가 번뜩이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랬다, 서일은 자기 눈앞에 보이는 이 일본인 교감을 당장 엎놓고 발로 콱 밟아놓고싶었다. 그렇게라도 하면 속이 좀 후련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설음도 울분도 다 참아야했다.     어느날 지난해의 12월에 종현에서 이완용을 칼로 찌르고 경찰에 체포되였던 이재명이 9월 13일에 교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났다.     경원학교의 선생들은 자기의 목숨으로 이또오 히로부미의 목숨을 바꿔 겨레의 가슴속에 맺혔던 원한의 응어리를 어느정도 풀어주고 사형장에 올랐던 안중근을 생각하면서 《외적의 괴수를 안중근이 없애치웠으니 내적의 괴수는 내가 없애치우겠다》며 나서서 비수를 휘둘러 이완용을 혼비백산케 한 이재명(李在明)이 법정투쟁을 해오다가 사형대에 오른 최후의 장면을 눈앞에 그리였다.    의사(義士)의 죽음은 망국민(亡國民)으로 되어버려 가뜩이나 비분에 잠겨있는 경원학교 선생들에게 슬픔을 더해주었다.    나이가 20세인 이재명은 평양사람이다. 지난해 12월였다. 왜적이 한국을 합병한다는 말이 신문에 보도되여 국민이 분개하고 있을 때 그는 한고향 친구인 김정익(金貞益)과 말했다.    《왜적이 용이하게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는 것은 매국노들이 꼭두각시노릇을 하는 까닭이니 우리가 적당을 없애버리면 왜적의 조약체결을 저지할수 있을 듯 하다. 적당의 괴수인 이완용, 이용구를 먼저 처죽이면 여당은 두려워서 조약체결에 협동치 못할것이니 국가의 위급을 구하는 가장 요긴한 일이다.》    이에 김정익은 흔쾌히 동감을 표시했다.    그들은 국사에 헌신하기로 맹세하고 이동수, 김명록 외 여러 동지를 더 얻어 함께 거사를 모의(謀議)하고는 각각 비수를 준비했다.    두 역적의 동정을 살피고있노라니 마침 이완용이 12월 22일 종현의 천주교당에서 거행하는 벨기에황제 레오폴드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비수를 몸에 지닌 이재명은 군밤장사로 가장하고 천주교당문앞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미사를 마친 이완용이 수행원들과 같이 나왔다. 이재명은 그가 인력거앞에 도착하여 거기에 오르려는 순간 단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어 그의 등을 힘껏 내리찔렀다. 그리고는 이어서 그를 막으려고 달려드는 인력거꾼 박원문(朴元文)을 한칼에 쓰러뜨린 후 다시 인력거 아래로 떨어진 이완용을 깔고 앉아 복부를 두 번 힘껏 찔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였다. 경찰들이 깜짝 놀라 달려들었다. 이재명은 경관과 격투했다. 이때 다른 한 경관이 빼든 패검이 그의 어깨를 찔렀다. 이재명은 피투성이 된채 체포되였다.    경찰당국은 혈안이 되어 사건에 가담하였던 연루자들을 체포했다. 제일먼저 김정익이 서울에서 체포되였다. 이어 평양으로 급파된 경찰에 의하여 동지들 대다수가 륙속 체포되여 당초에 계획했던 이용구의 암살은 착수하여 보지도 못하였다.    한편 칼을 맞은 이완용은 대한의원에 입원한 끝에 목숨을 건졌으니 결국은 이들의 본래의 목적은 실패로 끝나고만것이다.            서일은 암살이 실패해서 맹랑해 하는 선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목숨을 꼭 빼앗아야 그게 성공일가? 그렇지야않은거다. 의사의 날카로운 비수가 비록 오중부차(誤重副車)는 면치못하였으나 광복운동에 빛을 뿌려주고있지 않는가. 그는 우리에게 쾌감을 주면서 2천만의 동포에게 한번다시 용기를 주었으니 이 하나만으로도 의의는 자못커서 안중근의 버금으로 가는 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랜 재판 끝에 김정익은 무기에서 징역 15년에 떨어지고 이재명은 이 9월달에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것이다. 그외 재판받은 사람이 수명이라고 신문은 밝히고 있었다.    《보시오. 최후진술에서 의사는 재판장을 꾸짖고 고 하지 않았는가. 이 얼마나 떳떳하고도 의젓한가! 안중근의 최후와 꼭 같이 영웅답게!》    서일은 학생들이 자기 민족의 영웅을 추모하고 따라배우게끔 이끌어주는 것은 매 선생의 직책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이제 국내외에서 일일이 매거불능(枚擧不能)할 유명무명의 의사가 혹은 개인으로 혹은 삼삼오오 작반하여 적의 군경이며 주구배들을 숙청할 것이라고 말하여 앞으로도 적과의 투쟁은 간고하지만 지속될것임을 알려주었다.            달을 넘겨 11월의 어느날, 총독부는 령 내려 갑작스레 조선글 저작의 교과서를 죄다 몰수했다.    《왜놈은 우리 나라를 삼켜버리고나서 이젠 로골적으로 식민지교육을 급급히 시행하려드는구나. 아아, 내가 내 민족의 글도 배워주지 못하면서 학교에 있어서는 뭘하는가.》    어떤 선생은 눈물을 뿌리면서 교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서일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말릴수도 없었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아서 학교는 그냥 꾸려가야 했다. 너도 가고 나도 가고 다 가서 페교를 하는건 득책이 아니라 생각한 그였다.    《경원학교가 없어진다해서 오사기 겐다로가 교감질을 어떻게 했느냐고 추궁받고 처벌받을가?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배달민족이 교육을 받지 못해 무지몽매해지면 몽매해질수록 일본은 더 좋아할 것이다.》    서일은 선생들에게 동포계몽사업은 계속 밀고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채호는 뭘하고 있을가?...조성환은 왜 다시오지 않을가?...신민회는 나를 잊은건거나 아닌지?...)    경성에 있는 현천묵이도 최익항이도 뭘하고있는지 전혀 소식이 없었다. 지어는 이홍래마저도 발길을 다시돌리지를 않았다. 의병으로 싸우다 죽었는지... 친구 박기호가 몸곁에 있는게 다행인가싶었다. 그러나 신민회조직과 련락이 끊어져 서일은 울쩍한 기분이였고 심정은 돌같이 무거워나기만했다.    이제는 신문지상에서 의병항쟁에 대한 소식마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서일은 혼자서 신문을 뒤지였다.                          에 실린 보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3월 6일자 신문이니 구문이 된지도 오랜것이다. 올 3월달에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일어났으나 맥을 추지 못하고있다. 한일합방후부터 반일의병항쟁은 쇠퇴의 길을 걷고있었던 것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민중의 애국열이 높았건만도 의병지휘자들의 일부가 일본군에 체포되여 학살당한후 항쟁을 완전히 포기하고말았다. 하여 경기도일대의 의병항쟁은 끝나게되였다.    경상북도 일월산지구의 의병대는 적의 토벌이 심하게 되자 분산되여 각기 싸우다가 의병장 최성천, 한명만 등이 적의 손에 체포되여 학살되고 얼마지나서는 의병장 윤국범, 문성조 등이 체포되니 항쟁을 계속할수 없었다.    서북부일대에서 채응언의 의병대를 비롯한 다를 몇 개의 의병대가 항쟁을 계속하고있으나 그들은 상당히 어려운 상태에서 고군작전할 때가 많았다. 얼마나 오래동안 견지하겠는지?    한편 1908년부터 평산반일의병대의 의병장으로 활동해온 이진룡은 올초에 만주로 건너갔다. 다른 의병대들도 더러는 그같이 본토를 떠나 이역으로 갔다. 서일은 지금의 사정을 보아 그들처럼 동산재기(東山再起)를 꾀하는 것도 바람직하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먼저 자리잡은 홍범도, 차도선이 있지 않는가. 서일은 조맹선이니 전덕원이니 윤세복이니 백삼규이니 하는 여러 의병장들도 만주로 건너가 자리잡은걸로 알고있었다.     한데 이제는 여러가지의 소식을 제때에 바로들을수 없게 되였다.    한일합방이 되면서 강력한 항일민간지였던 “大韓每日申報”는 합방조서가 내리던 날인 8월 29일자 제1,461호를 끝으로 총독부에 강제 매수를 당해 이틑날부터는 “每日申報”로 개제되여 총독부의 기관지로 화했다. 한편 “皇城新聞”도 30일자부터 “漢城新聞”으로 개제되었다가 9월 14일자를 끝으로 페간당했으며 “大韓民報”, “大韓新聞”도 大韓이란 두 글자를 빼고 각각 “民報”, “漢陽新聞”으로 제호를 바꾸었다가 8월 31일자로 페간되여버렸다.    한편 총독부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신문에 대해서는 얼마간의 보상을 지불하고 매수하는 형식으로 페간조취를 취하였다. “朝鮮日日新聞”, “朝鮮日出新聞”, “京城新報”, “東洋日報” 등이였다. 이리하여 총독부가 설치된 이후 서울에서는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일어판인 “京城日報”, 그리고 영어판인 “Seoul Press(서울 프레스)”가 발간될 뿐이였다.    이리하여 국내에서 발간하는 민간신문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만  《언론계를 잔인하게 탄압하다니 원! 그러니까 이 땅은 암흑의 시대로 돌입했구나!》    서일뿐이 아니였다. 경원학교선생들은 모두 세상이 캄캄해지는것 같아서 한숨쉬였다. 매일 이 신문 저 신문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아온 그들로 놓고 보면 그것은 그야말로 견디기 어려운 형벌같이 고통스러운 것이였다.    치욕과 원한으로 점철된 1910년!    이해도 다가고있는 12월에 전국민을 놀래우는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총독 데라우찌가 27일 압록강 철교준공식에 참석하려고 려행을 떠나니 경의선 각 역전에는 강박에 못배겨 동원된 소위 환영하는 동포들이 운집하게 되었다. 이런때에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安明根)이 선천역부근에서 데라우찌를 폭살하려다가 미연에 발각되여 체포되였던 것이다.    며칠안되여 새해 1911년이 돌아왔다. 두만강은 꽁꽁 얼어붙고 눈보라는 울부짖으면서 휘몰아쳤다. 함북도의 겨울은 사나왔다.    2월 7일자 “每日申報”에 이라는 이상한 글이 실렸다.          《세월이 복잡할라니 별 희한한 일 다 생긴다. 아무렴 제 친척의 돈까지 강도질을 하다니 원.》     서일은 그 신문을 보고나서 어처구니없어 웃어버렸다.     그 이틑날 뜻밖에도 이홍래가 나타났다. 그를 만난 서일의 기쁨은 이루말할수 없었다.   《이선생께서는 월경하시렵니까?》   《아니, 난 서선생을 월경시킬려구 온거요. 가정데리고 속히 떠나시오》   《원 무슨 말씀인지 통 모르겠습니다. 내가 왜 월경을 한단말입니까?》    전혀 생각지도 않다가 갑작스레 들이닥친 일이라 서일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벙벙한 나머지 멍청해지기까지 하는데 이홍래가 자기는 신채호 선생의 심부름을 하고있을 뿐 상세한건 모르고있으니 보면 알게될거라면서 편지 한통을 꺼내놓는것이였다.    신채호의 친필서한인데 간단명료하게 몇글자안되였다. 경찰당국이 동원되여 신민회원들을 체포하고있으니 일각도 어물거리지를 말고 속시 식솔을 거느리고 만주로 피신하라는 내용이였으니 그것은 조직의 지시였다.    《래일이면 현천묵이도 식솔을 데리고 금동에 올거요. 오면 거기서 함께 월경을 하도록하는게 좋겠소.》    《그렇다면 천묵이도 우리 조직의 사람이였단말입니까?!》    《서선생이 말하는 조직이란게 뭔지 난 지금도 모르오. 본인은  그저 심부름을 할뿐이요.》    이홍래는 이러면서 신채호가 자기를 믿고 편지를 주어 전달케한 것을  보면 그도 서일과 한조직의 사람일시 분명하다고 덧붙이였다.    한조직의 성원도 아니면서 고생을 마다하고 추위속에서 먼길을 온 이홍래의 그  의로운 행동거지가 과연  고마웠다.    서일은 인제야 어찌된 일인지를  분명히 깨닫게되였다.     왜적은 안명근사건을 기회로 하여 신민회(新民會)의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주의자 모두가 새 총독 데라우찌를 암살하려고 음모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만들어 갖고는 독립운동의 대본영으로 지목해 온 이 조직을 일망타진하려고 대규모적인 무시무시한 수색과 체포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1월달 첫날부터 왜경무총감부(倭警務總監部)는 전국경찰에 명령하여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강원도, 함경도, 서울 등지에서 윤치호(尹致昊), 양기탁(梁基鐸), 이승훈(李昇熏), 김구(金龜), 유동렬(柳東悅), 김동휘(金東輝)...등을 비롯한 수많은 신민회 간부와 회원들을 체포하여 서울에 있는  경무총감부로 끌어가기 시작했다. 일단 그곳에 끌려가기만 하면 상상키 어려운 혹심한 고문을 받야했다. 하여 진고개끝 남산기슭에 있는 경무총감부에서는 밤낮 도수장에서 짐승을 잡듯 아츠러운 비명소리가 끊지를 않았다.        기원전 200여년에 중국에서 진시황이 력사서적과 문학서적은 모조리 거두어 태워버리고 유생 460여명을 생매장하여 사상을 질식시키고 문화를 유린한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있었다면 오늘은 조선에서 일본인 데라우찌가 조선의 애국지사와 지식인들을 육형(肉刑)으로 고통과 참사(慘死)를 주어 세인을 경악케 하는 이 이렇게 막을 올린 것이다...    신채호는 무사한데 조성환은 어떻게 되었는지 근심되여 서일은 이홍래보고 혹시 조성환이라는 분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이홍래가 자기는 그런 사람을 모른다는것이였다. 김규식에 대해서도 면목은 아나 소식은 전혀 모른다면서 혹시 만주나 로시아의 연해주로 가지나 않았을가했다.     국외에 있는지 국내에 있는지 살았으면 아무때나 만날 기회가 있겠지 생각하면서 서일은 그보고 자기가 월경해서는 누구와 련계를 가지는가고 물어보았다.    이홍래는 련계를 가지는 일까지는 자기가 모르겠는데 두만강을 거너 동만의 용정(龍井)에 가서 이동춘(李東春)이라는 사람을 찾아 그한테 자기의 본분을 말하고 이홍래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 그가 맞아줄것이라했다. 그 다음의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할 것이다.    이홍래는 생각같아서는 자기가 직접 용정까지 두집식솔을 모셔가고싶지만 일이 급해서 동행을 못하게 되어 과연 미안하게 됐다고 거듭사과했다. 미안할 것 무엇인가, 임무를 맡고 역말같이 뛰고있는 사람인데.    이홍래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느라 그자리로 몸을 돌려 서울로 향했다.    그가 가버리자 서일은 박기호를 찾아가 자기가 시급히 만주로 솔가도주(率家逃走)를 하게 되였음을 알려줬다. 그랬더니 박기호는 가면 같이가야지 친구를 두고 혼자가는 법이 어디있느냐, 동고동락(同苦同樂)을 한다던 맹세는 작난이였더냐 하면서 자기도 가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서일의 식솔 6명(큰할아버지, 큰할머니, 처와 아들 딸, 그리고 자기)과 현천묵의 식솔 4명(부부에 아들, 딸), 박기호의 식솔 3명(부부에 아들 하나) 도합 13명이 닷새만에 금동에 모여 심야에 두만강을 건너게되었다.    일행 13명은 수비대 순라병에게 발각되지 않았거니와 강판도 아직 얼어붙은대로여서 무사히 월경했는데 불행은 만주땅을 밟아서 발생했다.    일행은 풍찬로숙을 하면서 가고가서 이틀만에 가야하를 만나 고려령쪽을 향해 그 강을 따라서 올라가노라니 어슬녘이 되어 오는데 한 곳에 이르자 문득 괴한 다섯이 도깨비모양으로 불쑥 나타나 길을 가로막는것이였다.     셋이 손에 몽둥이를 들고 둘은 칼을 쥐였다.     (만주에는 토비가 많다더니!...)     다른 사람은 물론 서일도 몸이 오싹해났다.      다섯중 키가 꺼두룩한 자가 험악한 상을 짓고 을러멧다.    《너그 놈들은 뉘기냐?》     튀여 나오는 말소리를 들으니 뜻밖에도 동포인지라 토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현처천묵이 참지를 못하겠던지 성을 벌컥내며 대들었다.     《자식들, 눈깔 펀히 뜨구도 모르냐? 이사꾼이다, 어쨌단말이냐?》    《이사꾼? 흥. 이사꾼속에 왜놈의 개도 많다더라. 보아하니 너그 놈들은 고생살이는 안해본 샌님같은데... 보짐 몽땅 뒤져라!》    두목인 것 같은 그자의 호령이 떨어지자 바쁘게 네 녀석이 달려들어 보짐을 들추는데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그건 내 책이다!》    서일은 딸이 품에다 껴안은 책꾸러미를 부덕부덕 빼앗고 있는 무지하게 생긴 자를 향해 소리쳤다.       《책이면 무슨 책인갈 봐야허지...야, 건데 이건 무슨 글인데 이래?》     그자는 고개를 찌붓거리며 도깨비 기와장번지듯이 히라가나와 한자가 섞여 인쇄된 책장를 훌훌 번지였다. 그것은 서일이 요즘 다시 연구하고있는, 이름난 을 쓴 요시다 마쯔가게전기(傳記)를 한자이름 그대로 달아놓은 이란 책이였다. 이 책의 저자는 도꾸도미다.    《왜 알아못보겠냐?... 그건 일본글이다.》     서일의 말에 책장을 번지던 자는 멍청해지고    《뭐, 뭐 일본글이라! 그런걸 다?...》    키가 꺼두룩한 자는 마치 못들을 소리나 들은 것 처럼 눈알을 히번득이며 서일을 다시보는데 그 눈이 너는 좋은 놈 같지를 않구나 말하고있었다.     《책을 몽땅 걷어갖구 가자. 아마두 최나리헌테 뵈야겠다.》     그자는 책을 돌려주지 않고 갖고 갈 잡도리였다.    《이 무지한 놈, 최나리가 대체 누군데 너들은 백주에 이 지랄이냐?》     현천묵이 밸이 울컥 치밀어 못참겠는지 고성으로 욕을 했다.     그러자 두목은 놀란 개같이 풀쩍 뛰면서 으릉거렸다.     《어허. 자식이 누구를 헐수루 보구 대들어? 맛을 봐야 알겠나.》     칼을 번쩍버쩍 휘두르는 품이 정말 일을 낼것만같았다.         녀인들이 아츠라운 비명을 내질렀다.     서일이 그자의 무모한 짓을 막으려고 나섰다가 무당굿에 신들린 듯  란무를 하는 칼 끝에 그만 왼쪽 눈을 다쳣다.    《아야!...》     서일은 비명을 지르면서 두손으로 낯을 감쌌고 현천묵은 쓰러지는 그를 제꺽 안았다. 이때 박기호도 그자들에게 달려들다말고 서일을 부축했다. 눈깜짝새에 떨어진 화액(禍厄)에 모두들 아연실색했다. 이같이 황황불안한 속에서 그래도 서일의 큰할아버 서장록(徐長錄)이 머리가 피끗돌아 제 적삼을 얼른 벗어 상처입은 운을 제꺽쌌다.     녀석들은 일을 저질러놓고서도 뭘 잘했다고 제쪽에서 씨벌대더니 책을 갖고 그만 가버렸다.      저기 산아래 외딴집이 한채 있어서 일행은 급히 그리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집에 성이 강씨인 늙은 내외가 살고있었는데 말씨를 들어보니 역시 같은 함경도사람이였다. 량주는 불청객이 선문도 없이 한무리 욱 쓸어드는지라 놀래고 불안하기는 했으나 사연을 알고는 “에그, 그러면 강건너서 오시는 앞대나그네구만” 하면서 성의껏 대해주었다.     한쪽눈을 상한 서일을 가마목에 눞혀놓았다. 그리고는 갖고 온 쌀 서너되를 내놓아 주인집 로파보고 밥을 지어달라 부탁하고는 모두들 어빡자빡  쓰러져 피곤한 몸을 쉬였다. 강씨로인은 여기가 조선사람 최진동(崔振東)의 세력범위내에 든 지역인데 거의가 그의 땅을 부치고있으며 최진동은 자기의 머슴들을 내놓아 나쁜자들이 자기 땅 경내에 맘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있다고 알려주었다.      과연 그러하다면 사실은 빤하다. 그 괴한 다섯은 최진동의 머슴들로서 제딴에는 나쁜사람을 족친다는 것이 이같이 미런한 짓을 감행하고있음이 뻔한것이였다.   《제길할, 못 참겠다, 사람을 욕뵈여도 분수있지!》    현천묵이 당장 찾아가서 해내겠다는 것을 모두들 말렸다.   《최진동! 최진동이라! 음ㅡ》    서일은 그 이름을 신음소리로 곱잡아 뇌였다. 상을 입은 눈알은 동통이 심했다. 눈깜짝새에 멋없이 화를 입고 보니 치가 떨리도록 분했다.     밤을 그 집에서 보내면서 토론하여 길을 돌리기로했다. 본래 고려령너머의 봉오동 하촌에 박기호의 사촌이 있다니 자리도 볼겸 들리려했지만 우선 상처부터 치료하고봐야겠기에 어서 여기를 떠나 이동춘을 찾아 가기로했다. 그는 용정촌에 있다고한다.     이틑날 아침에 가야하를 건넜다. 한참가니 30여호되는 동포마을이 나졌다. 거기에 성이 진씨인 부자집이 있다해서 찾아가 사정했더니 소수레를 빌려주었다. 그들은 상자와 안노인과 애들을 태워갖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일행 13명은 이틀을 더 고생하여 마침내 용정에 도착했다.     벽돌담장을 두른 팔간기와집. 40대의 중년의 사나이가 문밖까지 나와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가 바로 이동춘(李同春)이였다. 그는 방을 내주어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하는 한편 의사를 보이게끔 서일을 병원에 보냈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녀석들이게 제 동포의 얼굴에다 칼을 댄단말인가. 그런 놈은 잡아서 주리를 틀어야지!》    이동춘은 서일이 두만강을 건너와서 눈이 상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몹시 분개했다.    현천묵도 박기호도 일행 모두가 그것이 최진동 집 머슴들의 소행이였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서일이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한것이다. 서일은 최진동의 세력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본인은 제 동포라면 무척 관심하는 사람이라는데 말이 나가면 명예를 흐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동춘은 일이 벌어진 장소만 알고도 긍정하는것이였다.     《거기면 최진동이 사는데가 아닌가, 치안을 그 꼴로 하다니 원.》     이같이 말하고있는 이동춘은 1871년생으로서 호(號)가 우화(雨華)며  합북도 경성(鏡城) 사람이다. 그는 한말에 중국사신 원세개가 서울에 주재할 때 통역관으로 광무제의 심임을 받아 주권옹호(主權擁護)에 노력하다가 왜적의 주목을 받게 되니 동만으로 건너와 광복운동에 헌신하고있었던 것이다. 그는 국내에서 넘어오는 애국지사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여 함께 나라일을 근심하고 구국방략을 모색하는 것을 스스로의 의무이자 하나의 락으로 삼고있었다.                 이홍래는 노릇을 할 때부터 그를 알고있었던것이다.
18    반도의 혈 ㅡ제2부 19. 댓글:  조회:4385  추천:0  2011-08-20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9.    할빈에서 발생한 거사(擧事)가 여러 신문에 보도되자 경원학교는 사생모두가 여러날 지속적인 흥분상태에 빠져있었다. 안그럴리있는가. 횡래지액(橫來之厄)을 당한 이또오 히로부미의 죽음은 온 세계를 놀래우는 특대사건이였으니까. 한데 이 사건에 일본인은 슬퍼하고 한국인은 기뻐했다.    어느날 정오. 학교근처에 있는 술집에서 두 사나이가 나왔다. 둘 중 한 사람은 얼굴에 주름살이 많아서 걷늙어보이는 중년의 사나이였는데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츨거리다 두 팔을 공중으로 뻗어 올리면서 앙천대소를 하는것이였다.   《어아 시원하구나! 시원해! 개똥밭에 구불어두 죽잖구서 숨붙어 살았으니께 그놈 죽는 꼴 보는구마! 내사 그래 맘 이렇게 편하구 통쾌해 볼 때도 있나베? 하하하!...야 임마 덕보, 치삼이, 부엌데기 을용이...너그덜 일찌기 죽지 말구 살지. 죽기는 왜 죽어, 이놈들아. 죽지 않구 내같이 살아더믄야 오날 다 같이 그놈이 죽는 꼴을 봤을건데. 천벌이야, 하늘에서 천벌이 내려 그놈은 죽었어. 하하하!... 네놈도 저 죽을날은 몰랐지 으 하하하!...십년묵은 체증이 뚝 떨어지는 것 같구나! 하하하!...》    점심먹고 학교로 오던 학생들은 모두 그 모양을 구경했다.   《아니 저 사람 무슨 소리를 저렇게 해쌌누?》   《보구두 몰라? 이또오가 죽으니 너무기뻐 그러잖아.》   《그래두 그렇지. 아부재기는 왜 친다우.》   《취했어. 술을 억병으루 마신모양이야 입에서 뱀이 나가는지 구렁이 나가는지 모르는걸 보니께.》    행인 여럿이 발목이 잡혀 그 모양을 보며 하는 소리였다.   《야이거, 이젠 고만 입다물라는데두. 개가 들으면 경칠라구.》    함께 술마신 친구역시 비틀거리지만 정신차리고 그를 충고한다.    취중무천자(醉中舞天子)라 주기가 올라 얼굴이 지지벌개난 저켠은 담통이 얼마나 커졋는지 그쯤한 충고는 개방귀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가 또 한번 광기를 부리듯 고함을 지르고있을 때 서일이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리성을 잃을 지경이 된 그를 향해 걸음을 놓앗다.    《백주에 로상에서 왜 이럽니까? 음주를 너무하셨구만.》   《아 이거, 교장선생아니우! 이또오 그놈말입네다. 살아 원쑤더니만 죽으니께 한번은 사람을 기쁘게 해주네요. 하하하!...》   《여보시오, 정신 좀 차리시오. 웃음이 총구멍을 막습디까? 기쁠수록 자중해야합니다.》    서일은 술기운을 빌어 지금 광기를 부리고있는 그가 누군지를 알고 있었다. 안계훈의 담사리의병대에 있었던 장기덕(張基德)라는 사람이였다.       4월에 는 거문도앞바다와 그리고 초도와 렬도에서 수산자원을 략탈하던 일본어선을 습격하여 배에 타고있던 자들을 죽이였다고 보도한적이 있는데 그때 참여한 의병중 장기덕이도 끼인 것이다.                조선주차군사령부는 《조선폭도토벌지》에다 담사리의병대의 활동을 밝히면서 저희들이 어민들의 생로를 끊어놓느라 야만스러운 파괴를 한 사실도 기록해놓았다.    바다가에 살면서 고기잡이를 해서 살아왔던 장기덕은 바로 그때에 집도 배도 식솔도 다 잃고 이제는 홀몸이 된 것이다. 그는 담사리의병대가 해산돼서 며칠전에 만주로 멀리 피해가자고 함북도의 이 안쪽까지 온 것이다.    서일은 그의 면색과 거동에서 피난꾼임을 알아보고 일부러 접근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중 그의 신세를 알게되엿던 것이다.    신분을 놓고 따질 것 같으면 장기덕은 남의집 머슴살이와 어민으로 살아온 상놈이다. 하지만 지식분자인 서일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그를 평등하고 동지적으로 대하면서 그지간 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리며 싸우느라니 얼마나 고생을 많이했겠느냐며 따뜻한 말로 위로해주었다. 장사덕은 그의 그 의병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도량에 감격하여 믿어주면서 자기가 의병으로 나올때의 일과 안계훈이 지휘하던 담사리의병대가 뒤를 더 꼬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종말을 보게된데 대해서 알려주었던 것이다.    적들은 담사리의병대를 토벌하기 어려우니 내부로부터 와해하는 술책으로 괴멸시키려했다. 담사리의병대의 일부 성원들은 과연 적의 간계를 이겨내지 못하였다. 회유책동에 기만당한 의병들이 대오에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의병대 내부에서는 혼란이 생기여 대오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안계훈은 이를 수습해보려고 시도하다가 자기 고향에서 변절자의 밀고로 적에게 체포되여 지난 9월 25일 광주에서 학살당한 것이다.    《어느 개아들놈의 새끼가 안대장을 고발하구 나자빠졌는지 내 이제 아무때건 그놈을 잡아 각을 찢어 원쑤갚을거우다.》    이러면서 눈물을 짖던 장기덕이다.    먼 일가친척을 찾아 온 그는 잠시 그 집에 몸을 붙이고 있으면서 월경을 시도하고있는 중이였다. 그런 처지임에도 원쑤의 두목이 안중근의 손에 숨이 끊어졌다니 너무너무 통쾌해서 경축을 하느라 음주를 한건데 배속에 들어간 알콜함량이 너무많아 몹시 취했고 그러다보니 담통도 커질대로 커져 자제못할지경 무경각의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또오 히로미는 죽음으로써 국내에 사는 한민족만을 이같이 기쁘게 한게 아니였다. 해외에서 살고있는 동포들까지 모두 다 기쁘게 만들었다. 지난해(1908)에 중국으로 망명한 현년 59세의 지사(志士) 김택영(金澤榮)은 이또오 히로부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 즉시에 필을 날려 라는 시를 지었다.                    평안도 장사 한 사람                  두 눈 부릅뜨고 뛰여 나왔다.                  마치도 양새끼를 찔러 죽이듯                  나라의 원쑤놈 통퇘하게 죽였다.                  내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있다가                  이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구나.                  한창 만발한 국화꽃 곁에서                  미친 듯 노래하고 기뻐 춤추노라.            경원은 할빈거사소식이 전해진 후로 주민들이 내내 축제기분에 잠겨있었다. 그래서 축배를 드는 사람이 많아졌다.     경원학교 선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이럴때일수록 정신차려야 했다. 풍문에 듣자니 이또오 히로부미가 죽으니 온 일본이 그만 울음판이 돼버렸다고 한다. 비분에 잠긴 적이 이를 갈면서 눈에 쌍불켜고 보복하려드는데 그들을 촉노(觸怒)케 만들어 스스로 화를 당할 필요야 없지 않은가. 서일은 사생모두에게 무릇 일본인이 있는데서는 언행을 각별히 조심하면서 불필요한 접촉은 삼가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중국의 (민우일보)는 사설(社說)을 거듭발표했는데 그중 한편의 사설에다는 이렇게 쓰고나서 다음과 같이 태도를 밝히였다.                          총리대신 이완용이 윤덕명, 조민회 등 대표단을 거느리고 대련(大連)에 가 이또오 히로부미의 시체에 제사를 지내는 한편 또 농상공부대신 조중웅을 파견하여 정부의 명의로 은사금 10만원을 보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앞잡이는 앞잡이의 충성이 있고》   《괴뢰는 괴뢰의 꼭두각시놀음이 있네.》    경원학교의 선생들은 재담을 엮듯이 불만을 토로했다.    순종(純宗)은 이승에 간 이또오 히로부미에게 문충공(文忠公)의 시호(諡號)까지 준다고 하니 웃음거리였다.          오사기 교감이 잠시 학교를 떠나 어디엔가 갔다오더니만 서일을 조용히 불러놓고 명령투로 다음과 같이 집요하게 말했다.    《상급에서 지시가 있소. 무릇 기관이나 학교는 추도식을 거행하고 이또오 통감이 생전에 쌓은 업적을 기리여야한다고 하였소.》    《그러지요. 고 한 분인데 추도를 해야지요.》    서일은 군말없이 선선히 응대했다.    오사기 겐다로는 교장이 태도가 시원한지라 만면에 웃음을 발랐다.    이날은 수업을 하지 않았다. 이또오 히로부미가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의 통감을 지낸것이 해수로 5년간이나 되지만 한국민들은 그가 몰골이 어떻게 생겼는지 여직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 본신이 암살이 두려워서 자기의 모습을 신문지상에 공개하지 않고 박쥐모양으로 지내온것과 관계된다. 사람들은 오늘에야 비로서 신문에 나타난 것을 보고 그의 몰골을 알게 되었다.   《서교장은 안중근이 이또오 공작을 살해한 것을 옳다고 보는가 그르다고 보는가?》    오사기 겐다로가 문득 이렇게 물어왔다.    서일은 그가 지시를 받고 와서 자기를 떠본다는걸 알아채고 되물었다.   《오사기 교감은 이또오 공작이 살해당한걸 어떻게 봅니까?》    오사기 겐다로는 말문이 막혀 대답을 못하고있다가 다른 말을 꺼냈다.   《여러 신문들이 꼭 같이 보도를 했소. 안흉수의 행위는 개인의 원한에서 나온것이라구말이요.》      《그는 한국의병의 참모장입니다. 군인이 적을 죽였다면 그걸 어떻게 봐야합니까?》    오사기 겐다로는 또 말문이 막히고말았다.    다른 선생들은 두 사람이 주고 받는 것을 보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마치도 법정에서 정채로운 변론을 듣는 것 같이 재미있다고 말해서 사람들을 웃겨놓기까지 했다.    엄숙해야 할 추도식의 분위기가 엉뚱하게 돌아지는지라 오사기 겐다로는 난처하게 되었다. 허나 그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것이니 누구에게 책임을  덮어씨울수도 원망할수도 없었다.   《이또오 통감의 죽음은 그 자신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서일은 드디여 이렇게 내뱉았다.    경원학교 선생들은 한결같이 이또오 히로부미는 마땅한 죽음을 당한것인데 변명은 무슨놈의 변명이냐 하면서 손바닥으로 세상의 이목을 가릴수 있을가, 일본신문과 친일지가 안중근의 거사를 개인의 원한에서 나온것이라 보도한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 했고 영웅을 그같이 비방하는데는 딴 꿍꿍이가 있다고들 했다. 그들은 물론 두 일본인 교원이 듣지 못하게 수근거렸다. 그들은 이 시각에도 적의 온갖 회유와 공갈과 기만에 맞서서 견정불굴하게 옥정투쟁(獄庭鬪爭)을 하고있을 안중근을 생각했고, 곁불에 몽둥이라 그 사건으로 인해 그의 가족과 여러 지사들이 화를 입고있는데 대해서 은근히 걱정하기도했다...    사람들은 이 한해를 분노와 두러움과 놀램과 흥분으로 보냈다.    분노란 7월에 사법권을 일본에 빼앗긴것이고 두러움이란 9월에 호열자가 전국에 만연되여 주검을 쓸어낸것이고 놀램과 흥분이란 10월에 안중근이 할빈역에서 이또오 히로부미를 죽여버린 그것이였다.    일본은 정미년 광무황제의 양위로 한국의 주권자들을 저희들의 생각과 같이 만들어 세웠겠다, 군대를 해산하여 한국의 무력까지 거세(去勢)하였겠다, 이제는 한국을 삼킬 방법을 어떠한 형식으로 끝마치느냐가 문제여서 궁리하던 차 이번의 사건이 생기니 차라리 그것을 구실로 야심을 정당화하려고 들었다.    일본은 지어 안중근사건이 발생하자 한국황제가 련루된 것으로 꾸미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안중근의 강력한 반발로 헛짓이 되고말았던 것이다.    이러던차에 마침 12월에 일진회장(一進會長) 이용구가 한일합방을 정부에 건의했고, 대한협회와 국민대회 등 조직은 일진회의 반역을 성토하였다. 이런 때에 또 이재명(李在明)이 이완용을 죽여버리려고 종현(鐘峴)에서 칼로 배를 찌르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일본은 이것을 기화(奇貨)로 삼아 치안을 확보하고 보복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정돈하는 길은 오로지 한국문제를 근본적으로 처단하는것이라면서 그 주장을 드높이 부르짖기 시작했다.    이러구러 1910년을 잡아들었다.    1월에 김윤식, 송병준 등이 한일합방을 공공연히 주장한 이용구를 처형할 것을 건의했으나 그대로 되지 않았거니와 한일합방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게 떠돌았다. 한국내의 신문들 보다도 외려 중국의 오랜 신문인 가 소식을 더 빨리 보도했다.        1910년 1월 14일자           2월  1일자 등등.        3월 26일 안중근이 사형되였다.    그가 사형당하기 10여일전 려순감옥을 찾아온 동포변호사 안병찬을 통하여 국내 동포들에게 한 결고(決告)의 내용이 알려져 사람들의 심금을 다시한번 울려주었다.                      그를 구원하려고 동포변호사 안병찬이 자진하여 나섰다. 외국의 변호사들도 동원되였다. 해외에서는 동포들이 구원금모집도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책동으로 인하여 다가 허사로 되고말았다. 한국민들은 모두 비통속에 잠기였다.    《천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인심은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안중근을 만나봐서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있다. 그의 이름은 천추에 기리남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 상복을 입을수 없어도 안중근을 스승으로 모시고 깊이 추모하자.》    서일은 선생들과 이렇게 말했고 그들은 과연 상복을 입지 않은채 안중근을 맘속깊이 추모했다.    한편 일본은 전부터 계획하고 추진해 온 한일합방을 바싹 다구쳤다.    《나는 꼭 이또오의 뜻을 계승하겠다.》    일본수상 가쯔라 다로오가 이같이 결심했다.      5월 30일 소네 아라스께대신에 일본 죠슈군벌출신인 육군대신 데라우찌가 통감으로 임명되여 한국에 왔다. 그는 한국강점임무를 맡은 것이다.    데라우찌는 통감으로 되면서 경찰의 부족수를 보충한다는 구실을 대고 1,000명의 헌병을 한국에 더 끌어들이였고 6월 16일에는 경찰권까지 완전히 장악하기로 결정했다.                      데라우찌가  통감으로 부임되자마자 장교들에게 내린 비밀지령이였다. 그러면서 일본군은 항상 출동할수 있는 비상동원준비를 갖추었다. 그들은 완전무장한 상태에서 각 성문, 왕궁, 통감부, 사령관과 대신들의 집에 대한 경비를 강화했던것이다.    8월 15일이후 서울시내는 일본군에 완전히 포위되면서 계엄상태에 들어갔다. 서울시내는 거리마다 30m의 간격으로 일본헌병대와 수비대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자들은 길가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잠간동안 이야기만해도 붙잡아 엄중히 심문했다.    8월 16일날 오전 9시. 데라우찌는 이완용을 자기 집에 블러다놓고 합병조약문과 함께 국왕, 대신들과 관리들에 대한 사후처리문제를 알려주었다. 즉 일본이 조선을 완전강점한 후 국왕에 대한 대우와 보상문제, 친일대신들에 대한 명예와 생활보상문제, 구한국관리에 대한 처리문제 등이였다.    하루지나 그 다음날인 8월 18일 이완용은 내각회의를 열고 합병에 대한 문제를 상정시켜 토의하였다.    데라우찌는 일이 마음과 같이 되어감을 보자 이완용과 이미 계획한대로 8월 22일 오후 5시에 창덕궁에서 조선강점을 위한 을 극비밀리에 체결하였다.    을 체결하기 위한 어전회의에 참가한 자들로는 내각총리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조중웅, 내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고영희, 황족대표 이재곤, 원로대표 중추원위원 김윤식, 시종무관 이병무 등이였다.    그리고 이 조약을 반대하는 학부대신 이용식에게는 알리지도 않았으며 22일오전을 자기 집에서 보내도록 하기 위해서 일본통역관 가와가미를 그의 집에 보내여 잡담을 늘여놓게 하였다.    한편 경무총감 아까사끼는 신문기자들이 조약체결내용을 모르게 하기위하여 자기 집에 술좌석을 차려놓고 모여 앉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게 했다.               이것이 망국조약의 서문이다.    내용은 모두 8개의 조목으로 되였다.    1910년 8월 22일에 조약을 체결해놓고는 이를 극비밀에 붙이였다가 한주일이 지난 8월 29일에야 비로서 공포했다. 이날은 하늘이 유달리 맑게 개인 좋은 날씨였다. 하지만 가 발표된 뒤의 서울장안은 하나의 커다란 상가집꼴이 되고말았다 .   길거리에는 무장사, 배추장사 하나 나다니지 않았다.    헌병대의 말발굽소리만 요란할뿐이다.    시민들은 문을 닫아 걸고 집안에서 울었다.    울음소리는 점점 높아지면서 밀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다만 통곡소리...통곡소리...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는 동안 그 통곡소리는 온 3천리강산을 덮고말았다.    근조(近朝)가 519년, 27대만에 나라는 이렇게 망하고말았다.    중국의 가 이 소식을 세상에 알리였다.            합병조약을 선포함과 동시에 태상황을 덕수궁 이태왕 전하라 하고 융희황제를 창덕궁 이왕전하라 하며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라고  고치였다.    이미 인간량심을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체면도 없었다. 역적을 비롯한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주구들은 부끄러우줄도 모르고 일본이 주는 작위를 받겠다고 눈이 벌개서 납뛰였다.    그러나 한쪼각의 량심이라도 있는 사람은 후세에까지 치욕이 된다면서  주는 작위도 받지 않고 거절했다.    나라가 철저히 망해버리자 국민으로서 원통하고 분함을 이기지 못해 순국한 자가 많았으나 신문은 폐쇄(閉鎖)되고 왜경찰들은 순절한 자의 가족을 협박하여 발설치못하게 하였다. 죽은 이가 이같은 압박을 받았거니 산사람이야 더 말할것있으랴?    錦山郡守 홍범식(洪範植),  駐露公使 이범진(李範晋), 承旨 이만도(李晩 燾), 進士 황현(黃玹), 參判 장태수(張泰秀), 判書 김석진(金奭鎭).....등 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자기 거처에서 자결순국했고 광주의 백정(白丁) 황돌쇠(黃乭釗)는 짐승을 잡던 칼로 자살했다.       어디 그들뿐인가, 이름을 알수 없는 수많은 인사(人士)들이  혹은 스스로 목을 찌르고 혹은 배를 가르며 혹은 물에 빠져 죽거나 단식해 죽고 음독자살도 했으니 그것은 왜적의 신복이 되느니 차라리 깨끗이 자결함으로써 죽어 한국의 귀신이 되려한 것이다.    1910년 9월 1일자 는 이라는 글을 실었으니 그 내용은 이러했다.            는 또한 한일합방이 중국에 대해 끼친 영향도 보도했다.     
17    반도의 혈 ㅡ제2부 18. 댓글:  조회:3972  추천:0  2011-08-20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8.      서일의 주도하에 경원학교는 아무런 변고없이 정상적으로 잘 운영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인 교원 둘을 내놓고 선생모두가 대한협회 회원이라는것과 관계되였다.     두해전이던 1907년 11월에 장지연을 비롯한 애국적인 지식인들이 조직한 이 전국적 성격을 띤 정치조직은 합법적인 단체로서 의병들과 같이 일제의 침략을 저지 파탄시키고 국권을 회복하며 친일주구단체인 일진회를 분쇄할 것을 자기활동의 중요한 목적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대한협회는 지난해 7월에 합북도 경성군 지회를 세우면서 그를 비롯하여 30여개의 지회와 1만여명의 회원을 가지였는데 올 2월에는 그 지회수가 전국각지에  60여개나 되었으며 회원수도 이제는 수만명에 이르고 있었다.    경원지회역시 가입자 대부분이 지식인들이였다. 지식인이면 교원전체가 포함되는것이다. 그들은 성원간에 동지적인 관계로 서로 돕고 배우면서 조용한 분위기속에서 맡은바의 임무를 활기롭게 완수해나가고 있었다. 회원들의 공동한 임무가 바로 군중계몽이였는바 교원들은 자기가 맡고있는 학생을 애국적이며 배일사상과 감정을 지닌 인재로 육성해내는것이였다.                        년초의 어느날이였다. 경원학교는 교실마다 학생들이 마주하고있는 정면벽의 흑판윗쪽에 똑같은 표어가 일조에 나붙었다.    《교장선생! 교실마다 웬 구호들이요?... 대체 어떻게 된거요?...》    오사기교감이 외출했다 돌아와 교실마다에 써붙인것을 발견하고는 감각이 좋지 않았던지 안색이 흐려갖고 캐묻는것이였다.    《교감선생! 그걸 구호로 보면 적절하지 않지않습니다. 응당 표어로 봐야지요.》    《표어든 구호든 대체 웬 일인가말이요?》    《오사기교감은 아마 모르는 것 같구만. 그건 거룩하신 통감 이또오공작께서 하신 만고불역의 주옥같은 말씀인데요. 내 말을 믿지 못하겠습니까?...그렇다면 이걸 보시오.》    서일은 이또오통감이 1월에 한황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갓을 때 그곳의 유지인사들앞에서 한 연설내용을 보도한 신문을 내놓았다.    신문을 펼쳐 든 오사기 겐다로는 동공이 점점 커졌다.  아직도 한글이 익숙하지 않은 그가 그 신문을 보지  않았으니 알리가 만무였던 것이다.   《오사기교감! 우린 그분의 교시대로 해보자는건데 뭐가 잘못인가요?》   《아, 아니오. 아니오.》   《그럼 왜서?》   《......》    대답거리가 없게 된 오사기 겐다로는 낯이 확끈해났다. 공연히 신경이 예민해져 의심만 자꾸 품어 온 자신이 과연 멋적었다. 그는 함북도 경찰부장 세끼야 이사무라의 부름을 받고 경성에 갔다가 방금 돌아온것이다.   《지금 보란말이야, 지방민들 거개가 폭도를 동정하거니와 우리들의 움직임마저 일일이 폭도들한테 고해바치는거네. 대한협회는 또 어떠한가, 경찰뿐만 아니라 헌병도 그자들이 폭도를 음으로 양으로 돕고있는데 대해서는 단서를 얻어낼수가 없어서 항상 헛수고를 거듭하고있단말이네. 왜 이모양이 될까? 일진회가 탐지를 재대로 못하는데 원인이 있겠지만 일면으로는 자네같은 사람이 맥을 못쓰는데도 원인이 있는거야. 교원들 속으로 더 깊숙히 잠복하란말이야. 알겠는가? 봉급많이 받는 값을 해야지.》    세끼야 이시무라의 훈계였다.    오사기 겐다로는 멸시를 당하는것 같아 속이 울컥했다.    그는 밸이 머리끝까지 치미는 것을 겨우참으면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그사이 학교에 이같이 이상(異常)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조사해보니 의심할 아무런 근거도 없었다. 정직한 사람을 감독하는 것 이상 비렬한짓은 없을것이다. 그는 눈을 까밝히고 교장의 일거일투족을 감시하라고 지시한 세끼야 경찰부장을 빌어먹을 녀석이라 욕했다.     이또오 히로부미가 왜 그런 주옥같은 말을 했는지 진의를 알수 없지만 여하튼 서일은 그 말만은 틀리지 않으니 현판(懸板)에 올리여 모시듯이 잘 써서 붙여놓고 리용하도록했다. 그래서 선생들은 대한협회회원의 입장에서 학생들에게 정치사상교육을 더 활발히 해나갈수있었던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표현이 무엇일가? 그것은 나라의 운명을 제 목숨같이 여기고 관심하는 것이 아닐가. 그러자면 내 조국을 삼키고 나와 나의 부모와 형제자매와 내 동포를 노예로 만들려 드는 침략자를 증오하라, 이제는 원한이 뼈에 사무치거늘 그자들은 불구대천의 원쑤임을 알라. 진정 분발하여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원쑤격멸의 선봉으로 자라나야 한다!》    그들은 모두가 이같이 가르쳤다.    3월 4일자 “대한매일신보”가 도착한 날에 있은 일이다.    이날 신문에는 전수용이라는 의병장이 지휘하는 고부지방 의병들이 《모오리농장》을 들이쳐 사무실을 파괴하고 거기에 보관되였던 문건들을 소각해버렸다는 소식이 실려있었다.   《남의 땅 빼앗더니 잘코사니야!》    전교 28명교원중에서 나이가 제일어린 선생이 신문을 보고는 충격되여 그만 자기 옆에 일본교원 둘이 살피고있다는것도 잊고 외쳐댔다.   《뭐야, 이건 의병이라 자처하는 폭도들이 우리네 농장에 달려들어 행패질했다는 보도가 아닌가?》    일인교원 이와데 주다로가 눈을 흘기면서 성을 냈다. 그사이 신문을 읽을 정도로 한글을 배워낸 그가 신문에 실린 보도가 놀랍거니와 자기와 동갑인 젊은 교원이 기뻐하는 꼴에 밸이 뒤탈렸던 것이다.   《아니 이와데 왜그래?》   《그 은 나의 외할아버지께서 꾸린거다.》   《오, 그래?! 그렇다면 너의 외할아버지가 우리 외가집의 땅을 빼앗은게로구나. 어쩌면 그럴수가?...의병이 들부셨다는구나. 그래서 내가 잘코사니를 불렀지. 바꿔놓고 생각해봐 너면 안그럴가?》    둘이 더 붙자는 것을 옆에서 피장파장이라며 말려서 다툼질을 그것으로 끝맺나고 말았다.    일인의 략탈은 토지뿐아니였다. 한국의 남해와 서해의 어장마저 모조리 독차지하려들었다. 누군가 조사한데 의하면 3년전인 1906년도에 이르러 한국어장을 침범한 일본어선 수는 2,748척이였고 어민은 1만 2,245명이나 되었으며 그후 계속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리하여 의병들은 남해안 지역과 서해안 충청도지방 및 황해도 연안일대에서 일인의 수산략탈을 막으려고 결사적으로 싸우는데 그 가운데서 주동적역할을 하는것이 담사리의병이였다.      조선주차군사령부.《조선폭도토벌지》기록은 이러했다.              4월 21일과 29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의병 40여명이 와다, 다로가, 쯔시마에서 여러 가지 상품을 배에 싣고 경상도 통영으로 가는 것을 해상 20리지점에서 습격하여 소탕하고 상품을 모조리 압수했다는 것과 의병들이 거문도 앞바다, 그리고 초도와 열도에서 고기를 잡고있던 일본어선을 습격하여 배에 있던 어민들을 전부 죽여버렸다는 소식이 보도되였다.    나젊은 교원이 잘코사니를 불러서 그와 이와데 주다로는 또 입씨름이 붙었다가 떨어졌다. 불가피한 일이였다. 신문이 오면 이러루한 사소한 마찰이 자주생기군 했다. 하지만 서일은 후과가 불리하게 번지는 것을 원치않았기에 제 학교의 교원지간에는 단결을 도모해야한다고 늘 강조했다. 이 점은 오사기 교감이 지극히 바라는것이기도 했다.    6월에 이또오 히로부미가 갑작스레 통감자리를 내놓고 일본으로 가버리니 온 한국민이 웬 영문인지 몰라 의아해하면서 놀랬다.    소네 아라스께는 대신 통감이 되자마자 한국의 사법권을 빼앗아내서 이번에는 한국민들의 증오와 분노와 원한은 그한테로 확 돌아버렸다.    이런 형세에 7월을 잡아들자 뜻밖에 러씨아의 연해주에서 황병길이 서일을 찾아 경원에 왔다. 그 혼자만이 아니였다. 백규삼이라는 친구와 같이왔던것이다.   《아니 이거, 병길이가 졸지에 무슨일루서?!...》    서일은 반가우면서 뜻밖인지자 놀램을 금치 못했다.   《적정을 정탐하러 왔는데 여의치가 않아서...》    황병길의 동글스럼한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빗끼였다.    그들이 만주 훈춘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온것은 그저께였다고 한다.     서일은 그 둘을 자기 집에 모셔다가 우선 밥부터 해먹이여 푹 쉬게 했다.    딸 죽청이를 보내여 박기호도 오게했다.     피로와 식곤증을 못이겨 쓰러졌던 두 손님이 눈을 뜨고 일어났다.   《병길이, 그래 그쪽에서는 다들 무사하시오?》    서일은 인제야 안부를 물을수 있었다.    황병길은 최재형도 이범윤도 유인석도 별고없이 무사히 지낸다면서 연해주에서는 일전에 유인석을 13도의군도독총재로 추대하고, 13도 동포들에게 고한다는 포고문을 낸 일(그 포고문은 서일도 보았다.), 각 도(道)와 읍(邑)과 면(面)에 총재(總裁), 총령(總領), 참모(參謀), 총무(總務), 소모(召募), 규찰(糾察), 도임(道任) 등의 직책을 마련함과 동시에 조직망을 설치하여 거족적으로 궐기할 준비를 하고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아무튼 대단한 구상이구만! 건데 안중근형은 어떠하오?》   《요즘 맘을 좀 평형잡는걸 보구왔습니다. 서형도 그가 회녕싸움에서 대패한 소식을 들었겠지요?》   《들었지, 듣구말구. 코앞에서 벌어진 일인데 내가 왜 못들었을가.》    6월에 안중근은 직접 의병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경흥의 일본수비대를 불의에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안중근의병대는 적 50여명을 소멸했다.    안중근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기세충천한 의병들을 이끌고 이어서 회녕지방에 있는 일본수비군을 소탕하려고 맘먹었다. 한 것은 수많은 국경도시가운데서 회녕은 중요국경도시의 하나였을뿐만아니라 그곳은 일본군의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한편 경흥전투에서 참패한 적측은 의병들의 회녕공격을 막기위해 이곳에다 무력을 대대적으로 집결시켰다. 회녕을 계속 장악하는가 빼앗기는가에 따라서 북부국경일대에 대한 저들의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느냐 못하느냐가 좌우되기 때문이였다. 하여 그들은 중무기까지 동원하여 그곳을 요새화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안중근은 인원보충도 무장장비도 더 갖추지 않은채, 더구나 력량상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을 격파할수 있는 그 어떤 령활한 전법도 없이, 지어는 적의 군사적 배치정형 하나 정확히 장악하지도 못한채 공격을 단행했다. 그것은 경흥전투의 승리에서 고무된 의병들을 이끌고 침략자를 때려부시겠다는 주관적 욕망에 사로잡힌 승산없는 작전이였던 것이다.    말할것 없이 회녕공격전투는 처음부터 간고하고 불리했다. 적들은 현대적인 무기를 가진 우세한 병력으로 응전했다. 그러나 의병들이 손에 잡은 것은 그보다 락후한 중세기무기가 대부분이였다.    결국 의병들은 용감히 싸웠으나 희생이 속출했다.            안중근은 병력을 보충할 재간이 없었다. 자기가 의병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와 일본군과 싸움을 시작하면 국내의 많은 의병대들이 합세하여 나설것이라 기대하였는데 생각과는 딴판이였다.    《이제 우리가 비록 수는 적으나 결사전을 벌리여 싸움에서 적의 기세를 꺾으면 전국의 의병이 하나가 되어 호응하여 나설 것이다.》    국내진출을 놓고 그가 의병들 앞에서 한 말이였다.    허나 그의 타산은 현실성이 없는것이였다. 이때 국내에 있는 반일의병대는 이미 거의가 흩어져 맥을 추지 못했거니와 련계조차 없은 정황에서 호응해나설리 만무였다.    시간이 갈수록 전투는 계속할수 없었다. 안중근의 의병은 회녕전투에서 거의 전멸당하고말았다. 그는 요행살아남은 의병 둘과 함께 탈출하여 연해주로 간신히 돌아갔던 것이다. 그야말로 형언키 어려운 꼴불견의 참패였가.    《말도마시오. 살아는 왔지만 원...》    《모양이 과연 말이 아니였지요. 후ㅡ》        황병길이도 백규삼도 그때의 장면을 회상하곤 한숨을 뽑았다.    《서형 들어보시오. 이런걸 보구서 구사일생(九死一生)이라 하겠지요. 안형이 와갖고 하는말이 적은 증원병이 있는데 아군은 후원병이 없거니와 포위까지 들었답니다. 게다가 날씨마저 짓궂어 비가 내리지... 의병들은 굶주리고 기진맥진한데다가 탄알마저 떨어졌답니다. 그래서 부대는 결국 패하여 뿔뿔이 흩어지고만것이지요. 그를 따라온 전사가 둘뿐이였답니다... 산길은 험하고 안개는 자욱한데 적은 추격해오지... 그래서 인가에 투숙할수도 없었답니다. 낮에는 숲속에 숨어있다가 밤이래야 산길을 걸었답니다.》    《그들 셋은 닷새동안이나 밥 한끼도 못먹었답니다.》     황병길이 목이 메여 말을 끊자 백규삼이 이어서 했다. 그는 두 사람을 산속에 남겨두고 혼자서 밥구하러 마을로 내려가던 안중근이 적에게 발각되자 하도 재빨리 몸을 뺏기에 망정이지 안그랬더면 낙자없이 총에 맞아 황천에 갔을거라했다.    《그들 세 사람은 수십리를 걸어서야 비로서 로숙할수 있었답니다.》     황병길이 입을 다시열었다.    《이틑날 아침에 안형은 그 둘과 말했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리구는 두사람에게 세례를 주고 함께 기도를 드렸답니다.》    《허, 허허!... 과연 비장한 장면이였군! 어쩌면 수난을 예지한 예수가 12명의 제자와 같이 나누었다는  의 장면을 방불케하는걸!》    《그네들이야 만찬이였으니까 아무튼 배야 불럿을게지... 하지만 그들이야 어디...》    서일의 말을 백규삼이 반생반숙(半生半熟)으로 시정해놓고 입을 다문다.    싸움속에서 사선을 넘어 다시 아사의 지경에 이른 사람들의 기도였으니 그 비장함이 어느 정도에 달했겠는가?    황병길이 중단되였던 말을 이어서 마저했다.   《밤이 되자 그래도 살아보자고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났답니다. 맥이 싹 빠져 거의 기다싶이 하면서... 그러다 저 앞에 초가집이 한 채 보이더랍니다. 안형이 혼자 내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답니다. 주인은 도적으로 알고 겁을 집어먹더랍니다. 그런걸 겨우 안심시키구는 밥 한 그릇을 겨우 빌어갖구와서 그걸 셋이 나눠먹었답니다. 열이틀에 겨우 두끼를...》    《원 저런! 그러누라니 사람의 몰골이 뭐였겟나!》    《말도마시오. 사람인지 귀신인지 가리지 못할 지경이 됐습니다. 원 어쩜 그런 고생을...후!》    황병길은 한숨을 짓고나서 안중근이 자기를 부여안고는 동지와 젊은 의병들이 그 많이 생명을 잃은 것이 원통하다면서, 그 모든 비극은 자기가 지휘를 잘못했기때문에 빚어진것이라면서 가슴을 치고 뼈아픈 자책과 죄책감에 모대기치다 엉엉 목놓아 울던 일을 말하면서 눈물까지 지었다.     백규삼은 안중근이 그러한 역경속에서도 좌절되지 않고 원쑤를 기어히 갚고야 말리라며 동산재기(東山再起)를 꾀하고있으니 연해주에 사는 동포치고 그의 굳센 의지에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덛붙이였다.    서일은 이런 소리를 듣고보니 지난해 연해주에 갔다가 거기 연추(煙秋)의 최재형선생네 댁에서 안중근을 만나보던 일이 다시금 상기됐다. 그날 웃방에서 신문을 보고있는데 안중근이 황병길과 같이 서일을 보러왔던 것이다. 자기는 진남포에서 교육사업을 하다가 의병항쟁에 나섯노라면서 국내에서는 안중근이라 하면 누가 믿어주겠느냐 그래서 로씨아에 와서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자고 안응칠이라 애명을 쓰는것이라며 웃엇던 것이다. 그때 서일은 안중근과 함께 애국문화운동도 그렇고 의병항쟁도 그렇고 다가 국권회복을 위한것이였건만 여지껏 화합하지 못하고 서로 반목하고 배척해온데 대해서 몹시 가슴아파했고 점점 암담해지는 장래를 놓고 근심하기도 했던 것이다.   《안중근은 투사다운 사나이요!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희생도 각오할 사람이요!》    서일이 그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들어보니 간단찮은 의병장이요. 그 의지만으로도 구감이 될만하지!》    박기호도 그의 정신에 탄복해마지 않았다.       서일은 연해주에서 온 동지들을 보며 말했다.      《두분은 이리로 건너왔으면 의례 나부터 찾았어야 할걸 그랬구만. 내 말이 틀립니까. 안그랬으니 공연히 헛고생만했지요. 회령전투가 있으면서부터 놈들은 안쪽 두만강연안에다 수비대병력을 전만은 배로 집결시켰습니다. 허니까 형세가 전만은 썩 다르지.》   《과연 그런 것 같구만요.》    적정을 탐지하느라 변경을 여러번 드나든 황병길이 하는 말이다.   《솔직히 말씀드려 우리는 서선생을 먼저 만나보려했습니다. 그랬다가 에라 아마도 발이 가야하는건데 하고 우선 돌아보자구했지요. 그러나 초소가 많은데다 경비가 심하니 낮에는 근본 얼씬못하겠습니다.》   《접근하기 어렵기는 밤도 마찬가지지.》    백규삼의 말을 듣고 서일이 알려줬다.    서일은 특히는 주력을 경성에 주둔시킨 보병 49련대가 함북도에만도 30개지점에다 군사를 배치한 정황에 대해서 세세히 알려주었다. 일본수비대의 지방주둔이 극비의 군사기밀로는 되지 않았기에 서일은 여러 방면으로 정보를 수집해둘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보가 일본군을 대항해 싸우는 의병들에게는 극히 필요할것이라 여겨져 비밀리에 수집해둔건데 과연 그것이 오늘 연해주에 있는 의병들게 필요한 정보로 보내게 된거다.     《적병은 지금 본 소굴을 서울에 잡고 각 지방은 수비대장소로 삼는데 큰도시에 둔취하고는 나와서 헤매고있는거요. 만약 조급히 적의 주둔장소를 공격하다가는 실패하고말것이요. 안중근처럼 그렇게... 그일을 놓고 친일파신문들은 얼싸좋다구 보도를 굉장히 했지.》    《그놈의 발바리 녀석들은 어쨌다구 왜놈앞에서 알찐거린답니까.》    황병길은 친일파기자들이 하는짓에 몹시 격분했다.    《용맹과 사기만을 믿고 함부로 공격할것이 아니라 성공의 가망이 완전무결한 경우에 실행할 것이요. 보다싶히 원체 대비도 안되는 병력을 갖고 적의 본 소굴을 직접 공격한다는건 득책이 아닌거요. 내가 보건대 대부분의 의병대에서는 일정한 전술도 없이 싸움을 벌렸다가 결국은 실패하고 마는 것 같소. 는 상식쯤이야 모든 의병장들이 의례 알아둬야지. 안그렇소? 내 말이 틀리지야 않겠지.》    《옳은 말입니다. 틀릴리있습니까.》    《때릴것과 때리지 않을 것을 가릴줄을 알 때, 많은 병력과 적은 병력을 다루는 부동한 방법을 쓸줄을 알 때, 상하가 한마음이 되었을 때, 그때면 승리는 알리게 될 것이라했소.》    《아니 서선생은 그런 지식을 어디서 배웠습니까?!》     백규삼이 이아쩍어 묻는 말이다.    《훈장이 배우면 어디서 배웠겠소, 서책에서 밖에.》    모두 웃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듣고싶어했다.    서일은 한가지를 더 얘기했다.    《공원 200년전에 관도에서 유명한 싸움이 있었소. 원, 조 두 군이 붙어 해낸 싸움이요. 그 싸움에서 조조는 퍽 약한 병력을 갖고서도 강한 원소를 이겼던것이요. 조조는 전장의 형세발전에 따라서 기회를 틀어쥐고 령활한 전술로써 원소군의 진공을 막는 한편 기병으로 원소의 량식고를 습격하여 거기에 있는 량식과 마초를 전부 태워버렸던거요. 그래 어떻게 됐겠소. 원소군은 군심이 흔들리게 된거고 결국은 내부가 분렬되여 격패되고 말았던거요. 력사상 약병이 강병을 전승한 전례(戰例)는 바로 이렇게 창조된거요. 싸움을 하자면 꾀가 첫째. 이런걸 보고 전략전술이라구 말하는거요.》    박기호가 서일을 보고 여보게 친구 아예 의병장이 되어 학생들을 이끌고 나가 싸우는 편이 더 낳지 않을가 했다. 서일은 누구는 총들고 나가 싸울 생각이 없는줄아느냐 적시(適時)를 기다릴뿐이라고 반죽좋게 대꾸했다.    황병길과 백규삼은 국내에 더 머물러있을 필요가 없다고 여겨져 이틑날 연해주로 돌아갔다. 그쪽에서 대규모적인 입국작전을 계획하는것은 시기상조요 불가능함을 서일이한테서 시사(示唆)받고 깨달음도 있었던 것이다.            이라는 소식이 여러 신문에 보도된지 10여일만에 또 다른 하나의 돌발적인 놀라운 소식이 여러 신문들에 일제히 보도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또오 히로부미가 만주의 할빈(哈爾濱)역에서 애국자 안중근이 쏜 총을 맞고 횡사했다는 것이다.    시간은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    이 소식보도가 발표되자 온 한국민의 기쁨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는 안중근의 거사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안중근은 와 를 보고 이또오 히로부미가 10월 16일에 도꾜를 떠나 만주시찰길에 올랐다는 정보를 얻었던 것이다.    그에 앞서 그는 회녕을 공격하였다가 참패를 하고는 의병항쟁은 그것으로 중단하고 연추(煙秋)부근의 하리(下里)에서 김기룡(金起龍), 백낙금(白樂金), 강두탕(姜斗盪), 류치자(劉致玆), 박봉석(朴鳳錫), 강기순(姜基順) 황병길(黃炳吉)...등 12명의 동지와 조국광복을 위해서 혈투(血鬪)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고(告)하고는 자신들의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흐르는 피로 성명을 태극기에 련서(連署)하고 혈맹(血盟)을 맺았던 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의 만주시찰은 그에게 2천만 배달민족의 철전지원쑤인 그를 암살해버릴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한 그물에 잡히는 송사리보다 한 마리 고래가 났다.》    안중근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쳤다.             社長 이강(李剛)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준비를 끝마치자 그는 유진율의 호신용권총을 휴대하고 비밀리에 조직된 암살단의 세 사람과 함께 만주를 향해 떠났던 것이다. 일행이 장도에 오를 때 세간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이강과 양성춘 두 사람만이 대표로 전송했고 유진율은 보그라니츠나야역까지 동행하여 장거(長擧)의 성공을 축원하고 돌아왔던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로씨아측에서 제공한 귀빈렬차로 장춘(長春)까지 영접하러 온 로씨아 측 고관들과 동승하여 26일 아침 9시에 할빈역에 도착하였다. 그는 영접하러 나온 로씨아의 코코프체프 대장대신(大藏大臣)과 열차안에서 약 30분가량 회담을 하였다. 그가 로씨아 대신의 선도로 프랫트홈에 내려 환영을 나온 외국령사단의 요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수행인원보다 몇걸음 앞서 귀빈마차를 향해 가느라 렬을 지은 로씨아 군부대의 앞을 지날 때였다. 군부대안에서 도리우찌(캡)를 쓴 한 청년이 권총을 련발 발사했다. 안중근이였다. 사격 거리는 약 10여보가량.    이또오 히로부미가 처음 세 발에 명중되여 비틀거리는 것을 본 안중근은 권총을 든 채 로씨아 군대앞으로 뛰여나와 《코리아 우라!(대한만세!)》를 삼창했다. 로씨아 대위 니키호오로프가 달려들어 그의 손목을 잡고 같이 넘어졌다. 안중근은 조금도 저항함이 없이 순순히 포박되였다.    《이또오는 죽었는가?》    안중근은 체포되고나서 다구쳐 물었다.    그들은 그렇다고 알려주었다.    《하나님, 마침내 포학자는 죽었습니다. 갑사합니다!》    안중근은 마침내 목적을 이룬지라 기분좋게 뇌였다.        대장부 세상을 살아감에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때를 만드는가?      큰 뜻을 품고 천하를 바라보매, 어느 날에 뜻을 이룰것인가!      동풍은 점차 차가와지고 장사의 의로움도 사그라졌네.      한 번 노하여 가니 목적한 바를 이루었도다.      어찌 세상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본디부터 그랬을것인가?      쥐같은 도둑 이또오여, 네 명이 이에 이를줄 몰랐으리요.      동포! 동포여! 빨리 대업을 이룹시다.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      만세! 만세! 대한동포만세!       (이는 안중근이 옥중에서 쓴 시다.)  
16    반도의 혈 ㅡ제2부 17. 댓글:  조회:3844  추천:0  2011-08-20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7.    이또오 히로부미의 얼굴에서 이전같은 혈색을 찾아보는 벌써 힘든지 오래다.    1909년, 이 한해를 그는 의연히 긴장속에서 분망히 보내야했다. 조선주차군사령부로부터 지난 한해동안 의병토벌에 관한 상세한 총결보고를 올리였다. 숫자적인 학살통계가 그한테 만족감을 주었다.    (잘했어. 그렇게 해야지. 피비린 탄압이 올해까지 이어지면 토벌은 막을 내릴 것이다. 이제는 무마책을 겸해써서 어리석은 자들을 승복시켜야 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또오 히로부미는 한황(韓皇)을 호종(扈從)하여 돌아다니면서 소회(所懷)를 토로하는 방법으로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있는 사람들을 설득시켜보려고 작심했다. 로정은 경부선과 경의선, 즉 남쪽의 부산으로부터 부쪽의 신의주까지의 먼거리를 잡았다.    1월 12일 대구에 이르렀을 때 그는 그곳 리사관 관사에서 황제를 환영하느라 모인 군수량반과 많은 유생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망하지 않게 그들을 도와주려면 그 나라에 가서 은근한 정책으로 국민의 교육을 장려하고 그 산업을 장려하며 특히 국군(國君)으로 하여금 그 덕을 쌓게 하며 국민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수단을 택하는 도리밖에 없다., 나는 통감으로서 이 나라에 와 성심성의로 이웃나라와의 교의(交誼)를 중하게 여겨 성명(聖明)한 우리 군주의 이웃나라에 대한 우애의 원려(遠慮)를 한국상하에 심어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반복하여 숙고하면 의심할 사적(事迹)은 있을수 없다.》    1월하순에 일행은 평양에 도착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곳의 유지인사(有志人士)들이 모인 장소에서 여러말끝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요컨대 일본이 한국에 와서 보호코자 하는 취지는 한국의 국력을 발전시키고자하는 것이며 현재 국력은 이상에서 진술한대로 미약하므로 여러분들이 분발하여 나라를 사랑하고 서로 제휴하며 한국의 국력발전을 도모하기를 간절히 바라는바이다.》    얼핏들어보면 그는 과연 한국을 보호하느라 동분서주하는 것만같았다.    이또오 히로부미가 순회를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오자 통감부 총무장관 쓰루바라가 한가지 소식을 그한테 알리는것이였다.    《각하! 통감께서는 나가계시는 동안 우리가 주의할만한 새로운 신문 하나가 생겨났는데 그걸 아십니까? 한국인의 교가 부활한것말입니다.》    《뭐라?!...》    이또오 히로부미는 쓰루바라가 건네주는 신문을 받아 보았다.    신문에는 음력 정월보름(양력 2월 5일)에 몽골의 침략에 의하여 700년간이나 문이 닫겨졌던 단군교(檀君敎)가 중광했다는 소식이 실려있었다.    《홍암대사 라철이라!... 그는 어떤 사람인가?》    《각하! 제가 마루야마 경무총장께 조사임무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알아낸건데 보고에 의하면 라철이란 자는 네차나 도일하여 정부와 정계를 역방한 인물로서 두해전에 보호조약에 불만품고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자수했고 정부전복죄로 판결받아 지도에 류배되였다가 특사되여...》    《가만, 본명이 뭐라던가, 라인영이라 하지 않는가?》    《예, 옳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헌데 각하께서는 그가 본명이 그러함을 어떻게 아십니까?》    《어떻게 알겠나, 거야 내가 들어서 알고있지.》     이또오 히로부미는 자기가 전에 벌써 라철을 만나봐서 면목이 있다는것도, 을사보호조약을 성사시킨 일로 그한테 항의서한을 받았은적이 있다는것도 말하지 않았다. 생각하면 얼굴이 뜨거웠던 일인데 지금에 이르러 그 일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려주어 구태여 펄쩍 놀라게 만들고싶진 않았던 것이다.    《라철! 라철! 네가 이제는 종교로써...》    이또오 히로부미는 방안을 뚜벅뚜벅 거닐면서 혼자소리로 중얼댔다. 아무튼 남보다는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였으니 사라졌던 제 민족의 교를 다시 부활시키는 취지가 무엇이겠는가를 모를지경 아둔한 그가 아니였다.    《신문에 보면 그것은 700년전에 있었던 신교였다고 소개를 했습니다. 하다면 그걸 왜 새삼스레 들춰낼까요? 그따위걸 믿어서는 뭘하자구?》    《쓰루바라총무관! 그들이 왜 사멸되였던 교를 부활시키는지 그래 모르겠단말이요? 보오 그들은 이라면서 그를 되살리여 숭봉하리라하지 않았는가. 생각해보오. 이런다면 바로 사멸하려는 민족의식을 환기시키게 될게 아니겠소.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단말이요. 민족혈통을 고수하고...그래서 민족전체가 의식이 죽지 않을거요 그러면 아무때든...》    《그런다면 우리 일본에 대해서 순해지지 않고 계속 반발하리라 그 말씀인가요?...생각해보니 과연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죽여버리는데도 무섭지 않은지 지금도 의연히 반발하는 것을 보면...각하! 우리는 응당 그를 해체하거나 페교시켜야 옳지 않을까요?》    《생각이 단순하군. 생각해보게. 그렇게 한다면 우리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어떻게 막으려는가? 그를 막지 못하면 결국 자신 스스로가 궁지에 몰려들고말걸세. 안그런가? 아무러한 증거도 없이 종교마저 탄압한다는 비난을 듣지 않겠는가말이네. 우선 놔두고 지켜보는게 명책인거야.》      쓰루바라총무장관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자기는 생각이 짧아도 너무짧다는걸 깨닫고는 고개를 푹 숙이였다.    “지켜봐야지, 안그런가?”    이또오 히로부미는 한마디 더 그루밖았다. 그는 류창한 자기 구변의 직능을 믿고있는 사람이였다.    어느날 그는 한국의 귀빈 신사들을 통감부관저에 초대하여 일장의 연설을 했다. 그는 의병문제에 이르러 이렇게 말했다.    《폭도도 나도 한국을 념려하는 적성에는 다 같으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을 구하는 수단이 틀린자들이라고 하여 그 뜻에 감동할뿐 정(情)을 미워할 것은 더더욱 없음을 나는 안다. 그런즉...》    이러고 보면 이또오 히로부미야말로 마치도 우의(友誼)에 통하고 동정이 많은 사람같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그리 편안할리없다. 특히 이또오 히로부미와 같이 량심적으로 결백하다는 위선자일 경우 더 그러할 것이였다. 어찌보면 마치  동정심이 하도 많아서 도탄에 빠진 타민족까지 관심이 가 질곡에서 헤매는 그들을 건져내려고 발분망식(發憤忘食)하는것만 같았다. 량손에 애국자의 피를 즐벅하게 묻혀갖고 자신을 구세주인양 표방하자니 힘인들 얼마나들겠는가.    한국땅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한 장본인은 바로 자기 이또오라고 지적한 허위(許蔿)를 그가 곱게 볼리만무였다. 하길래 그는 그를 살려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까이시 헌병사령관에게는 그래도 한쪼각의 자비심이 살아있었으니 그와 달랐다. 그는 체포되였어도 태연자약한 허위의 인품과 애국심에 감탄한 나머지 경모하기까지 하여 통감을 찾아가 그의 앞에 구명(救命)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 요구를 귓등으로 들었다.    결국 허위는 지난해의 10월 21일에 형장에서 순국하였던것이다.    검사가 형장에 이르러 그보고 유언이 있으면 말하라 했다. 그랬더니 허위는   《나라일을 하다가 잡혀 죽는데 유언이 무슨필요가 있느냐?》    하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형집행전에 일본승(日本僧)이 명복을 빌려했다.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하늘에 오를것이며 비록 지옥에 떨어진다한들 어찌 원쑤의 중(僧)에게 도움을 받겠는가.》    허위는 이것마저 거절하고나서 조용히 생을 마치였던 것이다.    그가 죽음앞에서도 그같이 태연자약하거니와 사나이답게 름름하더라는 소식을 듣고 내심 감격되지 않은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이 나라를 침략한 이또오 히로부미는 의지가 굳세고 애국심이 있으며 총명하고 능력이 있고 재능이 있는 한국인을 살려줄 생각이라고는 꼬물도 없었다. 그들을 살려준다면 자기의 뜻대로 움직일수 없음이 너무나도 명백했으니까.                    일본의 단행론(斷行論)자들인 가쯔라, 야마가따, 데라우찌의 군벌들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극성스레 한국을 병합해야 한다고 들볶았다. 이또오 히로부미역시 이제는 시기가 비슷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여 일본은 지금 이 일을 바싹 추진중에 있었다.    이해의 년초부터 일본은 한국을 강점할 야망을 로골적으로 드러내기시작했다. 이완용을 두목으로 하는 한국정권이 비록 아무런 실권도 갖지 않은 괴뢰에 불과했지만 그 존재자체가 대외적으로 한국을 명색상 독립국으로 부르지 않을수 없게 하는 것이였다. 하여 일본은 이 정권의 존재마저 없애버리려 궁리했다.    일본은 3월에 외무성 정무국장 구라찌 데쯔기찌로 하여금 을 만들 임무를 주었다.    일본 외교의 가장 중요한 외무성 정무국장, 그 자리에 앉은 구라찌 데쯔기찌로는 한국의 운명이 일본에 예속되는 중추적역할을 한 실무적인 최고책임자였다. 전에는 그가 해아만국회의의 일본측 수원이였다.     구라찌 데쯔기찌로가 정무국장에 재임한 기간에 내각의 외상이 1903년의 하야시 스미레로부터 1908년의 우찌다 야스요꼬시까지 네사람이나 교체되였다. 그러니 1,2년에 한번씩 교체된 셈이다. 구라찌 데쯔기찌로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후 병합에 이르는 기간인 이 시기에 실제상에서 일한합병에 대한 작업을 하면서 최고실무자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더구나 정무국장재임중에 그는 한국에 통감부가 설치되자 통감부 참사관직을 겸한것이다. 통감부 참사관이라면 그것은 통감의 비서관에 해당하는 직책이였다.    그는 도꾜에 앉아서 한국의 서울에 있는 통감부의 외교사무에 대한 모든 보고서를 받고 지시하였다. 그는 지어 한국의 대외관계는 물론 일본에 거주하는 유학생과 명성황후시해사건에 걸려들어 망명한 한국인들에 대한 생활비지급문제까지 취급했던 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짧은기간 한황을 호종(扈從)하여 남쪽에에서 북에 이르는 기간 한국구경을 잘했고 할말도 많이 했다. 한데 이것이 마지막려행이 될줄을 꿈이나꾸고있을까??    《지금 어느정도로 되어갈가?...》     침착하고 참을성이 좋은 사람으로 알려진 그였건만 소네 아라스께 부통감앞에서 은연중 마음이 조급해남을 내비치였다.    《이제쯤 거의돼가겠지요.》          소네 아라스께가 외려 그의 조급증을 달래는가싶다.     다른것이 아니다. 조선에 와있는 두 통감은 구라찌 데쯔기찌에게 맡긴 이 지금 어느정도 되어가는지 그 진척정황을 념두에 두고있었던 것이다.             4월초에야 마침내 도꾜에서 구라찌 정무국장이 친 전보가 이또오 통감앞으로 날아왔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부랴부랴 일본으로 건너갔다.    4월 10일, 도꾜에서 가쯔라, 고무라, 이또오 등 세우두머리는 유명한 를 열었다. 그것은 력사에 악명으로 기리남을 것이였다. 이 회의에서 그들은 구라찌 데쯔기찌가 작성한 을 놓고 최종적으로 검토하였던 것이다.    이 비밀회의가 착 끊나자 마치 때를 맞추기라도한것같이 한국관광단이 도꾜에 왔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 기회를 놓지지 않고 공신으로 분장하고 나섰다. 동양협의회 석상이였다. 일한량국의 관계를 놓고 그는 이렇게 말했던것이다.   《삼가 말씀드리지만 본관은 오늘까지 3년반 대명(大命)을 받아 일한 량국을 위하여 성심성의로 힘이 미치는 한 진력하였다. 진력하지 못하고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한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과연 바삐돌아쳤다. 그는 3두비밀회의가 끝나자 일본에서 해야할 일들을 다구쳐 해놓고는 어물거리지 않고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는 기회만있으면 자기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려고 연설을 했다. 조선내에 그의 연설을 듣기좋아하고 믿어주는 사람이 없는것도 아니였다.      6월 19일에 그는 요직에 있는 많은 인사들을 통감부관저에 모여놓고는 그들로하여금 자기의 시정에 동심협력을 시키려고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한국의 유도부액(誘導扶腋)을 목적으로 구태여 한국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며 가령 폭도와도 같은 그들의 진의 진정은 본래부터 내가 많이 동정을 표현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나라의 멸망을 구하는 길을 모르며 만약 그들이 오늘의 폭도로써 그 뜻을 이루게 한다면 그 결과는 오히려 한국의 멸망을 초래하는데 불과하지 않겠는가. 즉 한국을 생각하고 한국을 위하여 진력해야 할 점을 말한다면 나의 뜻도 그들의 뜻과 조금도 다를바 없으며 다만 그 수단이 다를뿐...》    ........    《지사인인은 몸을 죽여 인을 이루는데 나는 한국을 위하여 지사인인으로 자처하는바다. 옛날 자산(子産)이 정(鄭)나라를 다스릴 때 당초 이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정인(鄭人)이 다 말하기를 우리에게 옷을 주고 먹을 것을 준 자는 자산(子産)이라고 말한바와 같이 나도 자산의 마음으로 한국에 림함이니라. 지금 나의 정책에 대하여 오늘 이것 저것 비난하는 자 있을지라도 훗날에는 번연히 그 잘못을 깨달을 때 있을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가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자기가 맡고있는 통감직을 부통감인 소네 아라스께에게 넘겨놓고 자신은 일본으로 슬쩍 피해가버리는것이다. 돌아가서 추밀원의장직이나 다시맡고 이제는 뒤에서 한일합방이 현실로 되게끔 떠밀어주면 되는것이였다.    사실 일본정부도 타산이 있었다. 기회만있으면 조선의 부강을 도모하며 조선의 독립을 보전하기 위하여 통감정치를 실시한다고 말버릇처럼 떠벌린 이또오 히로부미를 통감자리에 그냥 앉혀놓고서는 계획대로 조선국을 먹어버리기가 불리했던 것이다. 하여 그를 조동시키기로한것이다.    6월의 어느날 이또오 히로부미는 통감직무를 정식 부통감인 소네 아라스께에게 넘겨주고 조선을 떠났다.    그가 떠나기 전날밤에 통감부에서는 비밀송별연을 베풀었는데 참가자들로는 통감이 된 소네 아라스께를 비롯하여 마루야마 경무총감, 고미야 궁내차관, 쓰루바라 총무장관 등 그 몇사람뿐이였다.    이 송별연회에서 이또오 히로부미는 다음과 같은 말을했다.   《우리는 반도에서 머물것이 아니라 북쪽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고 그래서 의연(毅然)해야 한다!》    뉘라서 그는 할일을 다해서 이제는 제 조국으로 돌아간다하랴? 그의 눈길은 이제 더 먼곳으로 향하고있었던 것이다.    7월 6일에 일본내각은 회의를 열어 을 채택하여 그것을 대한정책으로 확정했다.       한국(조선)병합을 단행할 것, 한국을 병합하여 제국판도의 일부로 하는 것은 반도에서 우리의 실력을 확립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통감이 된 소네 아라스께앞에는 조선을 하루속히 완전히 강점하는 작업을 추진시킬 임무가 놓이였다. 그는 일본정부와 호흡을 잘 맟춰야했다.    한편 일본정부는 이라는 것을 작성했다. 이 문건에는 조선을 적당한 시기에 병합하며 조선에서 일본의 실력확립을 위하여 많은 군대와 헌병, 경찰 등을 침입시킬것이라하였다. 앞으로 조선에서의 통치는 실력 즉 폭력에 의거하여 실시할것이며 다른나라가 조선을 먹겠다고 덤벼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일본화해야 한다고 했다.    소네 아라스께는 통감의 자리에 올라앉자 과연 큰일을 한가지 해냈다. 이완용을 교사(敎唆)하여 군부와 법부를 페지하고 겨우남아있던 시위보병1대까지 조선주차일본사령부에 례속(隷屬)케 하였고 사법도 통감이 장악하고 왜법관이 조선민을 재판할뿐만아니라 조선의 법률은 아예 페기하고 일본의 법률을 응용하게 만든 것이다.     7월에 사법권을 빼앗은 조약은 이러했다.       第1條: 韓國의 司法과 및 監獄事務가 完備될 때 까지 韓國政府는 司法과 및 監獄事務를 日本政府에 委任할 事.     第2條: 日本政府는 日本人 및 韓國의 一定한 資格이 있는 者로  서 韓國에 在한 日本裁判 及 監獄官吏에 任用할 事.      第3條: 韓國에 在한 日本裁判所의 協約과 法令과 特別한 規定  은 外國에 있는 韓國臣民에 對하여서도 適用할 事.      第4條: 韓國地方官廳과 및 公吏는 各其職務에 應하여 司法과   및 監獄事務에 對하여서는 韓國에 在한 日本 當該官廳의 指揮와 命令을 받으며 또는 補助할 事.      第5條: 日本政府는 韓國의 司法과 및 監獄에 關한 一切經費를 負擔할 事.           도꾜 내각관저.    며칠째 찬비가 멎지 않고 구질구질 내린다. 그야말로 짖꿎은 가을장마비였다. 바깥이 내내 흐릿하니 실내는 부득히 전등을 밝혀놓아야했다.    고풍의 널찍한 방안에 세 사나이가 있다. 가쯔라 다로오, 고무라 주따로오, 이또오 히로부미였다. 5개월전, 레이난자까비밀회의의 주역들인 그 3거두가 오늘 또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나이별로 보면 이또오가 68세 제일많고, 가쯔라가 62세 두 번째며, 고무라가 54세니 제일 어렸다. 이또오와 가쯔라 이들 두 늙은이는 오늘따라 정장(正裝)을 멋지게 차리고 출두했다. 두사람 다 앞가슴에서 누런 금질의 훈장들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허옇게 변해버린 턱수염과 몇오리 남지 않고 다 빠져버린 머리와 누래지고 주글주글해진 얼굴의 살같과 더불어 세태가 몰아온 풍상을 겪느라 로고가 많았던 그네들의 애국열과 적성과 만민이 흠앙할 공적을 말해주는것이기도했다.    고무라 주따오는 정장을 하지 않았다. 없어서가 아니였다. 이 두 선배들 앞에서는 어느정도 자격지심이 드는 때도 있는지라 차라리 그같은 차림으로 나서는것이 더 편할 것 같아서였다. 그는 새하얀 와이샤쯔에 색상이 검은 세루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목에다는 깜장 나비넥타이를 간단히 맸다. 숱많은 머리털과 팔자콧수염, 짙은 눈섶에 이르기까지 까맣고 윤기돌았다. 그의 몸에서는 아직 늙음의 징조가 그리보이지 않았다. 이 하나만이라도 스스로 공이 많다고 여기는 두 늙이를 족히 부럽게 할수 있으리라 스스로 여겼다.    한국을 병탄하는 것이 이제는 시간문제일 뿐이였다. 하여 이네들에게는  다음의 보취는 무엇이냐가 관심사로 떠올랐던것이다.   《우리의 다음 목적은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를 철페하고 한국통감의 권력을 만주에까지 확장하는것이라고 나는 보오.》    이또오 히로부미가 하는 말이였다.   《그러고는요?》    고무라 주따로오가 물음을 제기했다. 늙은이의 속생각을 그가 모르는건 아니였다지만 그의 욕심이 어느정도로 팽창했는지를 알고싶었던것이다.    《만주의 일을 다 처리하고나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다음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한마디로 중국대륙에다도 통감을 두는 일이지. 우리는 중국의 내정도 감독해야 하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중국의 재정사무를 관리해야 할 것이며 그러자면 또 통감을 두어야할게 아닌가?》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가쯔라 다로오가 아래로 숙였던 머리를 치키며 끄덕이였다.    (허허, 이 령감쟁이가 이제는 아예 중국까지 마저삼켜버리려 드는구나. 야심이 커도 이만저만이 아니야! 한국가 통감노릇을 해보더니만 맛을 단단히 들인걸!)    고무라 주따로오는 이또오 히로부미를 눈여겨 보다가 고개를 돌려 가쯔라 다로오를 다시봣다.     (늙은것들이 과연 배짝맞게 노는걸!... 내가 한발 뒤진걸가? 아니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일본의 장래야 내가 더 걱정할것이다.)    고무라 주따로오의 속다짐이였다. 그는 자신의 능력에 신심을 갖고있는 강한 성격의 사나이였다. 중국까지 먹어버리는건 그의 소원이기도했다.    세사람은 커다란 지도앞에 다다가 마주섰다.    그것은 구라파와 아세아 제 국가들을 색상이 다르게 그린 커다란 지도였다.    이또오 히로부미의 눈길이 먼저 닿인 곳은 몰골이였다.   《칭기스칸은 명실공히 불패를 자랑할만한 영웅이였지. 금(金)을 진공하여 중도(북경)를 점령했고, 제1차로 서정을 발동하여 서료와 화라즈머국을 멸망시켰겠다, 그러고도 칼카하에서 로씨야련합군을 격파했겠다... 그를 내놓고 동양에서 누가 제국의 판도를 중앙아세아에까지, 그도 모자라 동구라파까지 확장하여봤는가말이요. 안그렇소, 가쯔라수상!》    《그렇지요. 의장각하가 하시는 얘기를 듣노라니 지축을 울렸을 몽골군의 그 힘찬 말발굽소리가 방금 나의 귄전를 때리는것만같았습니다.》    《저역시 그 소리를 방불히 귀로 듣는 듯 합니다. 그런데 칭기스칸은 맹랑하게도 서하를 공격하다 실패하고는 다시일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말발굽소리가 멎은거지요. 그건 두고두고 심사숙고해야 할 일이라봅니다.》    《그때는 말발굽이였지만 지금은 레루장이요. 환경이 아주 달라진 세상이란말이요. 안그그런가? 우리는 말발굽소리에 미치지 말고 이제는 레루장울리는 소리에 익숙해져야 할 때인거요.》    이또오 히로부미는 자신의 주장을 타인이 꺾는건 불허하는 성미였다.    고무라 주따로오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였다. 그의 야심이 너무 팽장하고 있음에 당혹감을 느낄뿐 반대할 의향은 없었다. 그도 일본의 세력을 장차 대외로 더 널리 확장하는 것에 동감이였던 것이다.      《유학자 주자(朱子)는 말했소. 고 말이요. 우리는 응당 그 말을 명기해야 할것이요.》      이또오 히로부미의 말이였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래야지요. 의장각하의 뜻도 알만합니다.》    가쯔라 다로오는 동감을 표시했다.    고무라 주다로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다소곳이 꺾음으로 그의 충고를 옳다고 받아들이였다.    일본정계의 온건파로서 여지껐 서서히 잠식하는 정책을 주장해온 이또오 히로부미는 조선침략은 완성된거나 다름없으니 제2보는 만몽침략이고 그 다음으로 남은 것은 중국대륙이라고 명백히 그루박아 말하면서 조급증은 삼가해야할것이라 덧붙이였다.    가쯔라 다로오도 고무라 주따로오도 고개를 끄덕여가면서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했다.    그들은 세계정세와 전망에 대해 운운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일본의 생존방식은 오로지 세력확장인바 동양에서 패권을 쥔 후에는 한걸음 나아가 세계의 패권까지 쥐는 것이 목적이라고 세 사람은 주장을 모았다...    한일합방설이 나돌면서 이와 함께 이또오 히로부미가 만주시찰을 떠나게 되리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과연 10월 16일에 그는 일본을 문뜩 떠나 장거리려행길에 올랐다. 뼈밖에 남지 않은 백발늙은이가 왜서 피로를 무릅쓰면서 로구를 끌고 바다와 륙지를 번갈아다닐가?    《이번 려행은 아무런 정치적 사명도 띠지 않을 것이다.》     그가 발표한 성명이다. 한데 그 행동이 어쩌면 꼭 마치 은을 파묻고 그 자리에다 여기에 은 백량이 없다고 패말을 써서 박아놓는 것과 같기도 하고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는 격인 것 같기도했다. 그리하여 그의 이번 려행은 도리여 사람들의 주의를 더 환기시키게 되었던것이다.    하다면 이또오 히로부미의 려행목적이 진정 무엇이였는가? 첫째는 일본이 만주 경영(經營)을 실시할 단서를 열기 위한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의 병합에 관해 로씨아측과 협의하자는것이였다. 즉 총리대신 가쯔라의 부탁으로 로씨아 장상(藏相) 코코프체프(Kokovtsev)와 만나 한국병합에 관해 로씨아의 량해를 얻으려고하는 것이다.      그는 할빈에 가 거기서 로씨아대신과 만나 협상할 예정이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18일에 대련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서 갑진년(1904)의 전사자들을 추도하였다.    바다물이 출렁이는 대련항의 밤.     이또오 히로부미는 군함에 올라 바다경치를 구경하면서 혼자소리로 탄식했다.   《내가 기왕 이룬 업적은 당초에 바라지도 못했던 것이다. 크나큰 공명을 성취하였으니 죽어도 유감이 없지만은 우리의 국민은 성질이 편협하고 교만하여 각국 사람들의 환심을 얻을수 없을 것 같구나.》
15    반도의 혈 ㅡ제2부 16. 댓글:  조회:4571  추천:0  2011-08-20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6.             한편 라철은 이루지 못한 거사(擧事)가 무거운 돌이 되어 늘 가슴을 무겁게 짖누르고 있었다.     을사매국역적을 일거에 없새치우려던 암살계획은 맹랑하게도 실패로 돌아가고말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한제국 평리원은 부당하게도 그것을 내란죄로 몰아부치고는 다수의 관련자들을 체포, 판결하였던 것이다.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지도(智島)로 류배되였던 라철은 지난해, 즉 1907년 12월 7일에 황제의 특사로 석방되였다. 그렇다고 가슴이 개운할 그가 아니였다. 실패로 인한 자책감과 후회는 그의 신체를 허물고있었다.     어느날 거리에 나갔던 라철은 한쪽다리가 절단된 불구의 몸을 지팽이에 의지하여 힘겹게 뚜벅뚜벅 마주오고있는 사나이를 발견했다.    《아니 저 사람 기산도가 아닌가?... 기산도!》     그는 당장 메일것 같은 목구멍을 텃쳐 그를 불렀다.       저쪽은 고개를 치켜들더니 어마지두에 악연하여 이쪽을 보는데 반응이 빠르지 못했다.    《나요, 나.》    《어이구, 이게 라형아닙니까?!》     기산도(奇山度)는 꿈밖에 숙친한 사람을 만나고 보니 무척 반가운지이라 달려올 것 처럼 지팽이마저 버리여 하마터면 그 자리에 꼭그라질번했다.     라철은 그의 팔을 잡아 부축하면서 다시다시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 초라한 몰골이다. 왕년의 팔팔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눈물이 막 쏟아지려는 순간이였다.     을사5적을 사살하려고 박종섭 등과 짜고서 각자 분담한 다음 군부대신 권중현을 전동로상(典洞路上)에서 총격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여 악형에 의해 왼쪽 다리를 절단하고 출옥한 기산도였다.     그는 라철먼저 간신배들을 숙청해보려고 동지몇을 포섭해  결사대를 조직했던 협객이다. 출옥하니 거사를 도모하다 함께 체포됐던 김석항(金錫恒)은 옥사했고 동지들은 다 흩어져버렸다. 하여 내내 모진 고통과 절망에 빠진채 정처없이 이 고장 저 고장 전전하면서 거지노릇을 하다가 오늘 서울로 돌아온건데 자기처럼 거사를 하려다 실패한 라철을 만나니 눌렸던 격정이 폴발하고 있었다.    《우린 어쩜 다 실패만하는지 원! 생각하면... 라형은 그래 무사하십니까? 난 보는바와 같이 그런대로 한쪽다리는 붙어있어서 절망을 안합니다. 악귀같은 그녀석들을... 》    기산도가 저주를 토하는데 두 눈은 어느덧 살기로 번쩍거렸다.    마음이 아직도 죽지 않았으나 그것은 눈물겨운것이였다.     《거기서도 보오만 의병투쟁이 아직 끊지를 않고있소. 이게 다 왜적의 횡포무도한 그 잠식정책에 반항이 생기여 그러는게 아니겠소. 그리구 또한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일신일가의 영예와 부귀만을 탐내여 국가와 민족의 전체존망은 념두에도 두지 아니하고 왜적의 주구노릇에 눈이 어두운 자들, 온 조정의 저 육식배들을 족히 신뢰할 수가 없어서 지금도 애국용사들은 일어나 혈전분투를 하고있는게 아니겠소.》   《거야 과연 잘하는게지요. 안그렇습니까, 라형?》   《내가 하고푼 말인즉은 그렇게만 할것이 아니라는거요.》    라철은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나서 자기의 견해를 피력했다.   《피는 피대로 흘리면서 목적은 이루지 못할 것 같소. 우리는 원래 무기가 충분치 못하고 사졸의 훈련도 부족하며 또한 수에서도 강적을 상대키 어려운 형편이요. 뻔하지. 대비가 안되거든. 그럼에도 각 의병진은 단합은 물론 련락도 부족하여 소통이 원만치 않은 형편에서 싸워왔고 지금도 그멋으로 싸우고있단말이요. 그러니 패배야 정해진게 아니겠소, 안그런가?... 그리구 과도한 군자금은 백성을 괴롭히고... 일진회분자를 닥치는대로 살해해서 되려 적의 앞잡이만 증가케하고있으니 명지한 노릇이 아닌가하오.》    라철은 무슨 계책이 나와야 한다. 성패여하(成敗如何)를 불구하면서까지 몸에서 피가 뛰는 동안은 호미와 도끼를 들고라도 사워야한다면서, 하나의 적이라도 죽여야 한다면서 적혈로써 맛서 겨루지만 결과는 참혹지 않으냐면서 최근에 경기도를 비롯하여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무고한 백성이 학살된 정황을 쭉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싸워보지도 않고 망하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망하고말게 아닙니까, 라형? 안그런가요?》    《싸워야지, 물론 싸워야하구말구. 하지만 그 싸움이 지금의 형태로만 유지돼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키 어렵겠다 그거요.》    라철은 이러면서 성공도 못하는 5적암살을 시도하였다가 동지가 희생되고 잔페로 되었음에 몹시 가슴아파 끝내 눈물을 내비치였다.    두사람은 싸움에서 좌절은 당할수 있지만 싸우지도 않고 물러앉는 민족은 영원히 망해버리고말것이니 원쑤왜놈과는 목숨이 다할때까지 대결해야한다면서 갈라졌다.    이틑날 정훈모(鄭薰模)가 라철을 보러왔다. 늘 만나서는 함께 국사를 논하면서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놓고 속을 태워온 동지였다.     《일제의 탄압은 발광적이고 겨레의 피고기는 즐벅히 땅을 적시고있거니 이제는 어찌해야 합니까? 아마도 의병항쟁으로만은 이 나라를 구하기가 힘들 것 같구만요.》     정훈모가 하는말이다.    《내가 어제 기산도를 만낫더랬소. 우연히 길에서.... 육체가 불구된 것을 보니 눈물이 나오더구만. 역신놈들을 사살치 못하고...이젠 의병항쟁도 피만 흘렸지 보람없이 그 모양으로 끊나고말것이 번연하니 나도 장래가 우려되면서 안타까움만 갈마드오. 그렇다고 맥을 버리고 주저앉을수야 없지 않소?... 잠이 오지를 않누만. 기산도는 그런 몸을 갖고서도 목숨이 붙어있는한 원쑤와는 대결을 하리라는 결심이였소. 옳지, 옳구말구! 우리는 그래야지!》    《대결이라...하다면 라선생은 어떻게, 무슨 방법으루서?...》     정훈모는 역시 답답함을 못이겨 함께 방도를 찾자는 것이였다.     이에 라철은 입을 다시열었다.    《우리 한번 다시 외교를 해봄이 어떨가하오.》    《무슨 소린지요?!》    정훈모는 대방을 다시본다. 뜻밖이라는 기색이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망국의 일민으로 좌시(坐視)할 수야 없지. 한번다시 우리의 요구를 청구하고 달래여보자는거요.》    미친개를 달랜다고 온순해질리는 없건만 라철은 전에 그가 만나본 일본정객들 거개가 그의 력설에 귀를 귀울이며 동정을 표시하던 일을 상기하고는 한번다시 이 길을 택하여 성공을 보려했다. 그것은 희망이 묘연하면서도 포기하기는 아쉬운 유혹이 담겨진 꿈이였다.    이시각 정순모역시 생각을 다시굴려보았다. 일본정계의 요인들을 재다시 력방하여 그들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현재 한국전역으로 퍼지고 있는 무참한 대학살을 우선 제지하고 국면을 돌려세워보자는 라철의 말에 일리가 있는것 같아서 그는 동감을 표시했다.    이리하여 그들 두사람은 행차준비를 했고 그것이 끝나자 이해 즉 1908년 11월 말에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을 향해 출발했던것이다.    라철로놓고 보면 이것이 네 번째되는 도일(渡日)이였다.         파도세찬 현해탄을 넘어가는데 이번에는 보람이 있겠는지?...    현재 일본에 살고있는 동포수는 다해봐야 459명. 주로는 갑신정변으로 인한 친일정치망명객과 류학생, 외교관, 상인, 로동자와 그의 가족이였는데 그나마 그들은 모여살지 않았다. 도꾜, 오사까, 교또, 히로시마, 후꾸오까, 야마구찌, 나까사끼 등지에 널려있었으니 그야말로 쌀에 뉘라고나할가. 그러니 동포들의 따뜻한 마중이나 집단적인 모임같은건 꿈에서나 바랄일이였다.    두사람의 이번행차역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외로운것이였다.       도꾜. 고맙게도 왜국의 이 수도는 구태의연해 정감이 좀 났다.    청광관(淸光館ㅡ 江戶川區 櫻田 本鄕町 13番地)역시 어제날의 그대로였다.    년령이 50대중반인 이마가 쫄딱벗어진 대머리 여관주인도 그대로 정정하게 살아있었다. 그는 구면인 라철과 그의 동행자 정훈모를 친절스레 밪아주었다. 일반적인 보통객으로가 아니라 국사로 오래간만에 다시오는 한국의 민간외교사절로 여겨주면서 례의를 차려서 반가우면서 정중하게 맞아주었다.        이것이 맨처음 왔을적에 일본정부의 각 대신과 정계요로(政界要路)를 역방하면서 호소하고 전달한 의견서의 요지였다.    이또오 히로부미, 오호꾸마 시게루와 모찌스 유다로ㅡ이들은 실제상 대륙침략을 추진한 일본정계요인들이였다. 라철 등이 역방한 사람은 바로 그들이였다. 그때 라철일행은 여론을 환기시키고 일본정계의 추이(推移)와 반응을 밀탐하느라 도꾜에 그냥 체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은 바라던것과는 아주 영 딴판으로 번지였다. 그 기간에 저주로운 을사조약은 체결되고말았던것이다. 라철은 그 조약을 맺느라 한국에 특파된 이또오 히로부미에게 항의서한을 발송했다. 그리고는 내용이 그것과 같은 항의서한을 또 한통 써서 메이지천황에게도 보냈던것이다. 그러나 그들로부터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으니 결국은 한강에 돌던진 격이였다...    마쯔무라, 우찌다, 오까모도, 도야마ㅡ 이른바 동양평화론자라는 통감부고문이니 흑룡회의 핵심간부니 하는 그 정객들을 라철은 다시 역방했다. 어떻게 하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한국에서 일본군이 피비린내나는 탄압을 거두고 일본이 늘 말해온, 한국을 독립시켜준다고 한 낙언(諾言)을 지켜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이번에도 담벼락과 말한다는것을 몰랐고 소귀에 경을 읽는다는것을 몰랐다. 왜서일가? 그건 바로 자기가 다시찾은 정객들은 다가 양대가리쓰고 개고기파는 승냥이였기 때문이다!    대방의 정체에 대해 이같이 깜깜했으니 행여나 하고 믿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라철과 정훈모는 그 일본정객들을 역방하면서 그래도 순진하게 다소의 희망을 걸고있었다.      그달 12월 5일(음력 11월12일) 아침이다. 뜻밖에도 그들이 숙박하고있는 청광관 옆방에서 한 노인이 이쪽으로 건너와서 단군포명서(檀君佈明書)와 고본신가집(古本新歌集), 입교절차(入敎節次) 등 서적을 전하면서 라철과 말하는것이였다.    《나의 성명은 두일백(杜一白)이요. 나이는 69세인데 백전도사(伯栓道士) 등 32명과 함께 백봉신사(白峯神師)에게 사사(師事)하고 갑진(甲辰) 10월 초3일에 백두산에서 회합하여 일심계(一心戒)를 같이받고 이 포명서(佈明書)를 발행한 것이니 귀공의 금후 사명은 포명서에 대한 일이요.》    《?......》    로인은 이러고는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버렸다.    정순모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그만 멍해지고말았다.    그렇지만 라철은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이러한 일이 이번만이 아니였으니까. 그를 놓고 보면 이번이 두 번째였던것이다. 1906년 1월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일본으로부터 귀국한 그가 서울에 도착하여 서대문에서 세종로방향으로 걸음을 놓고 있을 때 한 로인이 삭풍에 백발을 휘날리며 급히 뒷쫓아와서 그한테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대가 라인영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라철은 무심중이라 이상히 생각하며 로인을 바라보았다.    《나의 본명은 백전(伯佺)이요. 호(號)는 두암(頭巖)이며 나이는 90인데  백두산에 계신 백봉신형(白峯神兄)의 명(命)을 받고 라공에게 이것을 전하러 왔노라.》    로인은 말하고나서 백지에 싼것을 주고는 총망히 가버렸던 것이다.    오늘 보니 그들 두 노인이 사사(師事)한 신사(神師)도 같았으나 전한 책은 각각 달랐다. 로상(路上)에서 백두옹으로부터 받은 것을 집에 도착해 펼쳐 보니 그것은 (삼일신고)와 (신사기) 각 한권이였다. 허나 그때나 지금이나 서산락일같이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건지려고 혼신의 힘과 노력을 다하는 판이라 그것에 관심이 갈 리가 없다. 그는 전에 받은것도 한구석에 방치해둔채 아직 한번 펼쳐 보지도 않은 것이다.    《내가 언제...》    두 노인이 전달한 것은 종교에 관한 사명인지라 라철은 이 시각에도 역시 그런데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보다싶히 당면한 과제가 대일민간외교에 관한 문제인데 언제 그런 것을 다 생각하랴.    
14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서일 일대기ㅡ제2부 15. 댓글:  조회:5130  추천:1  2011-08-19
  15.    서일이 돌아가자 경원학교는 곧 개학을 선포했다. 그러나 첫날은 교학을 하지 않고 의병에 나가 목숨잃은 3명 학생의 유상(遺像)을 놓고 추도식을 거행했다. 사생 모두가 숙연히 머리숙여 희생자의 생전을 기리면서 영혼의 안식을 빌었다.    오사기 겐다로가 학교에서 추도식을 여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했다.        《왜서 맞지 않습니까? 우리 학교의 학생인데, 제자가 비명에 죽었는데 그래 추도마저 하지 말란말입니까? 우리 한국 사람은 그래 감정마저 메말라 살라는 말입니까?》    서일이 따지고들었다.    오사기 겐다로의 입으로는 이를 막아내는 재간이 없었다. 교장이 이러고 나왔거니와 사생모두가 일본인 교감의 말은 개방구만도 못여겼던것이다.    서일이 연해주에서 돌아오자마자 열게 된 이 추도식에 희생자가정과 친척은 물론 경원읍내 주민들이 많이 참석해서 학교운동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오사기 겐다로는 놀래여 상급에다 다음과 같은 보고를 써올리였다.                    이같이 하면 서일을 다스릴수 있으리라 생각한 그였다. 허나 그것은 오산이였다. 이때에 경원학교에 들어온 두 일본인 오사기교감과 이와데 주다로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하나의 불쾌한 소식이 온 함북도에 쫙 퍼지고 있었던것이다. 라남수비대에서는 의병대와 싸워 패전한 끝에 추도식을 요란하게 했다는것이다.       이에 앞서 일본은 중국 당국자들에게 만일 중국이 간도지방에서 조선사람 의병들의 활동을 묵인하여 그들이 조선안에 들어와 활동하게 한다면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수 없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면서 또한 로씨아 원동지방에 거주하는 조선사람들이 의병항쟁을 벌리는 것을 엄격히 탄압금지하여달라고 도꼬주재 짜리로씨아공사와 교섭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외에다 근거를 잡고있는 의병들의 항쟁은 멎지 않고 계속되였다.     8월에 연해주의 의병들이 수차 두만강연안의 일본수비대를 습격한 뒤를 이어서 9월 3일에는 경성반일의병 200여명이 명천수비대를 습격하고 그곳을 하루동안 장악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라남의 수비대를 비롯하여 수많은 병력이 경성지방에 짐중하게 되었다.     이에 경성지방의 의병들은 겁을 집어먹고 피하기는 새려 도리여 토벌에 나서는 적을 타격할 결심을 품고 적의 동태를 탐지해냈으며 그로부터 승산이 있게 작전계획을 면밀히 짰다. 한주일이 지난 9월 10일날이다. 의병들은 화룡리 범의덕골 고개의 산턱에 매복해있다가 줄지어 무질서하게 오는 토벌대를 발견하고 일제히 사격하여 그들에게 무리죽음을 주었다. 의병들의 돌연적인 습격을 받은 수비대는 련대장이하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어 녹아나고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추도식을 요란하게 한 것이다.   《오사기교감, 라남수비대는 왜서 추도식을 그렇게도 요란스레했답니까? 나는 일본에는 죽은 사람을 추도하는 법이 없는줄로 알았지.》    서일이 빈정대는지라 오사기 겐다로는 열이 올랐다.   《아니 서교장! 선생은 황국신민을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요?》   《어떻게 보겠습니까. 남을 괴롭혀 그렇지, 진선미(眞善美)의 일본인이지요.》   《진선미라!》       《안그렇습니까? 그 문장을 쓴 작자의 주장이 이러했지요. 그는 말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라는 것이. 한데 일본은 지금 그렇게 하지 않고있어서 천만유감이지요. 안그렇습니까, 오사기교감?》    《엉? 저.....》       오사기 겐다로는 말문이 막혀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그는 량미간을 끌어 모은채 서일을 아느새 멍하니 쳐다보기만했다.   “진선미(眞善美)의 일본인”이라는 어구와 그 글의 내용은 그가 소시적에 책가방을 메고 학교문을 들어서면서 첫머리에 배운것이여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오늘 한국인의 입에서 그것이 튀여나오니 별일같았던 것이다.    《오사기교감! 한마디만 더 할까요. 내가 이란 잡지를 뒤져보니 거기에 이런 문장이 한편 실렸더군요. 그게 아마 20년전에 정교사에서 발간한것일겝니다. 정교사라 하면 물론 오사기교감도 기억날겁니다. 그 단체의 중진들은 니 니를 고취하여 당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있던 과 맛서 숭양미외하는 사회의 풍조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국수보존을 대대적으로 제창하였지요. 그렇지요? 맞지요?》    《그런데?...》    오사기교감은 어느덧 대방의 구술에 빨려들고 있었다.    《내가 그 잡지 어느 권엔가 실린 사론을 읽어봤는데...물론 이지요. 그 잡지야 반월간이 아닙니까. 거기에 이런 문장이 하나 있더군요. 메이지 22년 어느월엔가, 아마 2월일겁니다. 일본정부는 천황의 명의로 을 반포했는데 거기에 명문으로 고 규정해놓고 고 했지요. 이에 대해 정교사는 고 이의를 제기했더군요. 오사기교감은 그래 어느쪽입니까?》            서일이 갑작스레 이런 질문을 들이대여 오사기 겐다로는 그만 멍해지고말았다. 정교사의 주장을 규납해보면 정치상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고 정신문화방면에서는 전통문화의 가치를 재다시 인식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재건하자는것이였다. 오사기 겐다로는 그 주장에 동감해온 사람이다.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자는 것은 지금 일본국내 민주주의자들의 구호이기도했다. 그런데 가쯔라정부가 구성된 후로는 국내의 민주주의자에 대해서 탄압하는 정책을 실시하고있는 것이다. 이에 오사기 겐다로는 내심으로 반발하나 탄압이 두려워 감히 표달하지 못하고있었던 것이다. 그가 방금《황국신민》이라 한 것도 사실은 제 맘속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였다. 한데 오늘 일개 한국의 지식인이 이를 빙자하여 페부를 따끔하게 찔러놓는 것이다. 그는 서일의 해박한 견식에 다시한번 탄복하면서 그를 해쳐보려던 궁리를 말끔히 집어치우고말았다.    한편 경원학교의 선생들은 군수따라 의병에 나갔다가 전쟁판에서 희생된 본학교 학생 3명의 추도식까지 하고나서야 마침내 서일은 근본 원산에는 가지도 않고 그지간에 연해주에 갔다왔다는 것을 알게되였다. 한데도 두 일본인 선생만은 깜깜이였다. 어쩌면 영원히 모르고 지낼지도 모른다. 이 학교에는 친일파가 없어 발설할 자도 없으니까. 오사기교감은 서일을 더 의심할 근거도 없었다.        반일의병항쟁은 이해에 전국적 범위로 확대되고 있었다.    19세기말에도 의병항쟁은 넓은 지역에서 치렬하게 벌어졌지만 전국적 범위를 포괄하지는 못하였다. 당시 의병항쟁이 치렬하게 전개된 중요지역수는 85개로서 의병항쟁이 일어난 중요지역보다 일어나지 않은 지점이 더많았다.    그러나 1907년 8월이후 현재까지 의병항쟁은 전국을 포괄하고 있었다. 즉 의병항쟁이 벌어진 중요지역의 수가 의병항쟁이 일어나지 않은 지역수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의병항쟁이 일어난 중요지역의 수가 300여개소. 전국 중요도시수의 약 90%를 차지했다!    의병항쟁에 대해 지극히 관심하면서 가끔 우려도 하고있는 경원학교 선생들은 이날도 모여 앉아 형세를 담론했다. 서일이 그 장소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함경도에서 의병이 일어난 곳들을 손을 꼽아가면서 세고있었다.   《함경남도에 덕원, 함흥, 단천, 영흥, 북청, 안변, 정평, 삼수, 갑산, 장진, 리원, 문천, 고원, 흥원. 열네곳이나 되네!》    《함경북도에 경원, 경흥, 길주, 회녕, 경성, 경원, 명천, 무산.》   《어찌된 판이야, 우리 북도는 남도의 절반밖에 안되니?...》   《안되면 뭐라나. 군수가 직접나가 싸우잖아. 훌륭한 본보기루 됐지!》   《올년초 신문에 난거 못봤나. 강원도 양구군 군수가 된 임현익은 군수자리를 리용해서 군내 각 면장들에게 돈을 걷고 담배를 걷고 탄알만드는데 쓸 연금을 모아서 의병에게 공급했다잖어. 참 잘했지.》    《의병장으루 된 군수허구 면장이 얼마라더라?》   《여섯이야. 주사서기는 셋이구.》      《의병장가운데 유생량반이 아마 제일많을거야. 예쉰도 넘어.》   《통계가 나왔잖았나, 정확히 예쉰셋이야.》      《우리 군수 참 좋은 분이지. 부패함이 없이 선정을 베풀구.》   《헌데 그이가 데리고 나간 학생이 생명을 잃었으니 그의 책임이...》    나젊은 선생 하나가 말을 하다말고 서일을 힐끗 보았다.    서일의 눈앞에 아들이 죽었다니 이게 웬 청천벼락인가 하면서 기혼절도를 하던 어머니, 동생의 부음을 받고는 구곡간장이 끊어진다면서 하루내내 땅을 치며 통곡하던 누나, 아들이 죽었다는 소리에 무감각해지는지 얼빠진 사람같이 멍청해지던 아버지, 슬픔에 모대기치던 가족들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것은 눈물없이는 보지 못할 가슴을 저며내는 장면이였다.   《그 일로 군수를 탓하지 마시오. 탓할 것 없습니다. 책임은 내가 져야하니까. 그들은 내가 청을 들어주어 나간것입니다. 헌데 한가지 명백히 알아두어야 할것은 전쟁판은 죽음이 호곡하는 곳이라는 그것!》   《그렇구말고요. 그렇다는거야 각오하고 나가야지!》    누군가 서일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하면 너무나 각박한 소리가 되는것 같아서 서일은 해석을 붙이였다.   《누군들 각오하지 않고 나가겠는가. 요는 내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서 내 한 몸을 순(殉하)하려는, 남은 갖추지를 못하는 그 마음이 숭고하다는거지. 그런 마음 그런 결심이 없이야 그들이 제 생명을 바치였을가? 생각들해 봐 안그런가?  죽음이 휘파람을 부는 곳인데!》      선생들은 모두 옳다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의병투쟁은 자상을 초래할 뿐 아무런 보람도 없을 헛짓이라 말하던 선생도 다시 깊이 생각해보았다. 그렇다, 세상에 만전을 기(寄)하고 이루어지는 거사란 있을수 없는 것이다.    여러 신문이 이강년의병장이 9월 19일 사시(巳時)에 교수대에 올라 50세를 일기로 장렬하게 순국한 소식을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이강년은 지난 7월 2일(음력 6월 4일) 충청북도 청풍군 까치성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부상당하여 적들에게 체포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체포한 그를 일단 제천수비대로 압송하였다가 다시 충주수비대로 옮겼다. 이강년이 지나가는 곳마다 민중들은 그를 바라보면서 너무나 애통하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옥중생활 4개월이였다. 그는 나중에 왜놈이 주는 음식은 거절하고 먹지 않으면서 태연자약한 태도로 적을 꾸짖어 그자들로 하여금 조선땅에 들어와 저들이 저지른 죄악을 알게했다. 이라 즉 생각하고 빨리 죽기를 각오한 그는 팔역동지(八域同志)들과 장자 승재(承宰)와 종제 강수(康壽)에게 고결문(告訣文)을 보내고 사형대에 오른 것이다.    12만의 의병대군으로 서울공략까지 꿈꾸었던 맹장(猛將)은 이같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만은 그가 이룩한 업적과 더불어 력사에 기리 남아 나라를 지키는 후세의 귀감이 될 것이였다.    경원학교의 선생들은 모두 비통해 하면서 그가 생전에 이룩한,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혁혁한 공적들을 찾아 정리해보았다.          1907년 8월 28일ㅡ 청풍황강전투에서 왜적 600명을 목베고 전리품로힉.           9월 10일ㅡ 문경갈평전투에서 왜적 수백명을 전멸.          10월 22일ㅡ 제천군 신림누치산유곡에 래습하는 적을 넣어 전멸.          11월 27일ㅡ 죽령에서 적 60여명을 도륙.          11월  6일ㅡ 역시 죽령에서 적 600여명을 섬멸.          11월 10일ㅡ 거듭 죽령애서 적 80명을 도륙.    1908년 3월 19일~23일사이 용소동에서 1000명적의 습격을 받았으나 뛰여난 지략으로 수백명을 도륙. 경성공락을 미룸.           4월 13일ㅡ 린제 백담사에서 적 수백명을 도륙.           4월 22일ㅡ 간성에서 적 수백명을 살상하고 단신으로 적장과 겨루어 단번에 목을 베니 적은 전의를 잃고 도주.            .    이강년 의병대는 이 전투를 하고나서 강원도와 충청도의 접경으로 진주하였는바 피아(彼我)의 교전수는 실로 매거불능(枚擧不能)할만큼 많았다.    허나 그럼에도 하늘이 무정했더냐, 강토와 민족의 수호자인 용맹스러운 의병장은 운이 나빴다. 수천의 적이 무리로 한꺼번에 달려어 가열처절했던  청풍작성전투, 선봉장(先鋒將) 하한서(河漢瑞) 등 지용을 겸비한 7명의 아군장(我軍將)이 전사하고 사졸이 잇따라서 쓰러졌다. 의병장 이강년도 총상을 입고 움직이지 못하였다.                               丸子太無情 踝傷止不幸                      若中心服裏 無辱到謠京                            퇀환이여! 너무나 무정하도다!                      발목상하여 더 나갈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이나 맞았더면                      욕봄이 없이 요경에 갈 것을!        선생들은 이날 신문에 실린 그의 유작시를 수첩에 베껴넣었다.    서일은 선생모두를 기립시켜 함께 5분간 묵도를 하게했다.    이럴 때 오사기 겐다로가 나타났다. 이와데 주다로도 그를 뒷쫓아 선생들이 많이 모여있는 교무실로 들어왔다. 마치도 학교전체가 갑작스레 천길나락에라도 떨어진것같이 무거운 침묵이라 이상함을 느꼈던 모양이다.    이와데 주다로가 팔을 건다리며 턱짓을 했다. 그러자 오사기 겐다로는  시선을 탁상우에 펼쳐진 여러장의 신문에 던지여 그것들을 깐깐히 훑었다. 신문마다에 붉은 줄이 그려진 것을 발견하고 그는 매우 이상해 하였다. 그는 자기의 시선을 다시 선생들의 얼굴로 옮기였다. 모두 침묵에 잠겨서 낯색은 어둡고 굳어진지라 경아했다.   《여기서는 대체 무슨일이 발생했는가?》   《아무일발생한들 오사기교감이 알 일이 아닙니다.》    서일이 묻는 말에 응대하는데 무뚝뚝하거니와 얼음같이 차가왔다.   《건데 왜 신문에다는... 왜서 줄은 쳤는가?》   《오사기교감은 오늘 온 신문을 보지 못했습니까? 이 나라는 천공에서 빛을 발해 천만백성을 기쁘게 해주던 거성 하나를 잃었습니다. 바로 그저께 사시에. 그는 도요또미 히데요시와도 가히 어깨를 겨룰만큼 웅재대략(雄才大略)한 명장이였지요.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아니! 아니!》    오사기 겐다로는 손사래를 치면서 멋적게 허허 웃더니 그만 물러갔다. 학교는 추도식이 있은직후부터 분위기가 점점 차갑게 번져가고 있었다. 선생들도 학생들도 그를 대함이 전보다 친선적이 못되거니와 지어는 적의를 품고 경원하면서 무엇인가를 노리는 것만 같아 섬찍한 두려움이 가슴을 싸늘하게 만드는 때도 있었다. 오늘역시 그러했다. 그는 언행을 더 조심해야지 하고 자신을 단속했다.          의병항쟁이 전국범위로 확대되니 일제의 탄압역시 전례없이 가혹했다.    일본군은 9월 1일부터 토벌작전에 착수하여 9월 20일 까지 20여일에 걸쳐 제1기 토벌구역에 대한 토벌을 끝냈다. 하지만 의병들은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그자들의 토벌이 끝난 지역에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항쟁을 끊지 않고 계속하였다.    이에 남부수비관구사령관 와다나베소장은 악이 올랐다. 그는 예정계획을 변경하여 소수의 력량으로 제3기 토벌구역인 연해의 섬들을 지키게 하고는 제1기, 제2기 토벌구역에 대하여 엄밀한 수색검거를 다시하였다.    그들의 토벌수단은 극히 악랄하였다. 토벌대는 무리를 지어 매개 마을의 주변을 포위하고는 경계를 2중, 3중으로 한 다음 수색을 시작했다. 수색방법은 이러했다. 먼저 동리의 동장을 불러낸다 그리하여 미리 만들게 한 남자명단과 자기들이 가지고 다니는 민적등본을 대조한 다음 남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내여 취조한다. 이런 수색은 하루에 몇번씩 반복되였다. 그때마다 의심스럽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음 모두 체포 구금하였고 학살했다.  그야말로 야수적인 살육이였다.        이런 토벌이 한곳이 아니라 도처에서 감행되였다. 일본군은 한 지역을 토벌구역으로 정하고는 한달, 두달계속했다. 황해도 평산지방같은데서는 지어 다섯달이나 계속했다. 그야말로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그들은 의병을 , 이라 했고 의병장들을 라니 라느니 하는 따위의 부당한 딱지를 붙이여 학살했다.    일제의 이같은 간악한 책동에 의하여 중남부일대에서 활동하던 의병장의 대부분이 1908년ㅡ1909년사이에 체포되여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무참히 학살되고말았다.    식솔 다섯을 거느리고 전라도 지방을 요행 탈출한 나이 50대의 방씨농민은 자기와 식솔들은 지옥속에서 왔다면서 친히 겪고 목격한바를 일호반점의  가첨없이 그대로 구술했다.    《그게 어디 사람의 사는 세상인가유 야차와 마귀가 뛰노는 저승이지. 일본놈 독하다 독하다 하니 그게 웬 소리냐했더니 말두마시오. 인피를 썼으니 사람인가 하지 그게 어디 사람인가요. 즘생이라도 그런 즘생응 세상에 없을 거고 야수도 그보다 더 악한 야수는 세상에 없을거외다. 그놈들이 사람을 어떻게 죽이는지 아시우.》    《무서워말고 말씀하시오. 여기는 일러바칠 개가 없습니다.》    《그렇수다. 모두 제사람들이니 마음놔도 됩니다.》     그가 두려움을 갖고 말을 더 하지 않으려 하자 여럿이 그를 안심시키였다. 여기는 대한협회 경원지회의 사람들만 모인장소였다.     탈출자는 과연 마음을 놓고 끝었던 말을 계속했다.    《이병에 나간 일 있는 사람은 낙자없이 죽었수다. 하나 빼놓지를 않구서. 어디 그렇기만 한는가유. 너는 의병에 참가할수 있겠다구 인정이 돼두 죽였구 의병을 도와준 일이 있는 사람도 죽였수다. 어디 그러기만 하는가유. 그의 가족과 부락사람을 남녀로소할 것 없이 마구 끌어내다가는 죽였수다. 총살하구, 목달아 죽이구, 때려 죽이구, 생매장을 하구...흑!》    그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때리였다. 목이 메여 말을 못했다. 터지려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나서 드디여 다시시작하는데  그가 토해내는 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가 일어서고 치를 벌벌 떨게 만들었다.    《사람을 또 어떻게 죽이겠소. 사지를 찢어내구 가슴을 도려내구 눈알도 빼여냈수다.》    그의 공소는 손톱만치도 거짓이 없었다.    야수와도 같은 살인자들은 니 니 한다면서 시체를 부락가운데나 아니면 거리에 매달아놓았던 것이다... 그자들의 손에 의하여 온 강토가 점점 무시무시한 사형장으로, 소름끼치는 시체전시장으로, 피바다로 변해가고 있었다!    살인마의 손에 의하여 학살된 수자를 보면:    1907년 7월이후 12월사이에 3,627명.    1908년에 1만 1,562명.    합계 1만 5,189명.    듣는 사람을 전율케 하는 참혹한 학살은 다음해에도 계속될것이였다.    방씨농민의 말과 같이 야수, 아수라와 같은 침략자들은 그같이 무고한 사람을 학살한것만은 아니였다. 수비대, 헌병대, 경찰대를 동원하여 는 당치도 않는 구실을 대고는 닥치는대로 주민들의 가옥을 불질러 잿더미로 만들고 부락을 페허로 만들기도했다.    1907년 8월부터 12월까지 5개월사이만도:    충청북도에서 1,000여호,    경기도에서 800여호,    풍덕군에서 450여호,    강원도 홍천군에서 350여호,    합계 2,600여호.    영국기자 맥켄지는 한국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도시와 마을을 소각하고 파괴한 정형을 친히 목격하고는 다음과 같이 세상에 공포했다.                      침략자의 손에 한국의 많은 도시와 마을은 잿더미로 변하여 형체마저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피해가 특히 심한 곳은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였다.    목숨은 잃지 않았지만 하루아침사이에 집을 잃은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함북도 경원쪽으로 단신 혹은 식솔을 거느리고 오는 난민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다가 두망강을 건너 만주나 아니면 로씨아로 가려는것이였다.    그들을 월경시키는 임무를 대한협회 경원지회의 사람들이 맡아나섰다.    한편 신채호의 소개로 신민회에 가담한 서일은 신채호 한사람을 내놓고는 아무와도 련계가 없었다. 배일적인 이 비밀결사의 창시자가 안창호라는 것만 알았지 서일은 그를 보지 못했거니와 면목도 모른다. 그러니 유사시에는 신채호를 내놓고 또 누구를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 한데 신채호와도 련계가 끊어진 상태서 답답했다. 그로부터 조직을 발전시키라는 지시도 받지 않았다. 하여 경원읍내의 몇몇 막역지우는 물론 지어 죽마구우이자 지기인  성묵이나 박기호도 그의 신분을 모르고지냈다. 그들은 대한협회 회원이였다. 서일역시 자기 학교의 수하 여러 선생들과 함께 그 조직에 가입했거니와 경원지회의 책임자이기도했다. 자강회의 후신인 대한협회는 합법적이면서 공개된 조직이니 문제시될건 없었다. 하지만 통감부는 이 조직의 활동을 은근히 감시했고 일진회의 세력은 내부로 뚫고 들어오려했다.    어느날 코등에 안경을 건 40대미만의 사나이가 서일을 찾아 경원으로 왔다. 초면인 그는 서일을 조용히 만나 자기는 성명이 조성환(曺成煥)인데 서울에 있는 태극관(太極館)에서 일을 본다면서 신채호가 오지 못할 사정이니 자기가 왔노라했다. 그리곤 요즘 혼자서 어떻게 지내는가고 물어왔다.     《그러니 조선생은 신채호와 관계가 있는분이란말입니까?》    《아니면 내가 찾아왔을가. 제사람이니 믿어도 되네.》     이리하여 서일은 조직과 련계없어 답답하던 심정이 풀리게되였다.    《경원학교에다도 청년학우회를 설립할 필요가 있겠소. 청년수양을 목적으루해서말이요. 이 조직은 우리 신민협회의 산하 비밀조직으로서 청년학생들을 배일적이며 애국적인 인간으로,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갖추도록 교양하고 이끄는것이오. 그 책임을 아마도 서선생이 맡아야겠소.》     조성환은 1874년생으로서 일명(一名) 욱(煜)이라며 한성(漢城) 사람으로서 26세에 무관학교학생으로 있을 때 부패한 군부를 숙청하려다가 발각되여 사형에서 감형으로 무기역에 처하였다가 3년만에 특사되여 참위(參尉)에 임명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직을 사(辭)하고 안창호(安昌浩), 이동녕(李東寧), 이상설(李相卨), 김구(金九)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한것이다.     서일은 그한테서 새임무를 맡음과 동시에 정황을 상세히 교대했다.                    
13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4. 댓글:  조회:5008  추천:1  2011-08-19
     로씨아지역에서의 반일항쟁에는 두 개파가 있었다. 하나는 최봉준(崔鳳俊)을 중심으로 하는 계몽파(啓蒙派)로서 그들은 海潮新聞을 꾸리고 있었고 다른 한 파는 이범윤, 최재형, 안중근 등 의병파(義兵派)로서 무장투쟁을 감행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조선의 반일의병항쟁과 애국문화운동은 서로 대립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유생출신의 반일의병장들이 애국문화운동을 부정하고 적대시하는 태도를 취하였는가 하면 애국문화운동 지도층은 반일의병항쟁에 대하여 부정하면서 살육적인 행동을 즐기는것이라 욕설을 퍼부었던 것이다.     《시대를 잘 모르고 동족을 스스로 멸망케 하는 행동이다. 일시적인 흥분에서 나온것이지 결코 진실로 나라를 위하여 하는 일이 아니다.》    서일은 언젠가 이런 글을 본 기억이 난다. 그것은 소위 애국문화운동을 지휘한다는 이들이 유생출신의 반일의병장들을 비롯한 반일의병항쟁에 대하여 비난하고 공격하는 소리였다.    (의병항쟁을 지지하지는 못할망정 왜 그따위 식으로 나오는걸가?)    도무지 리해되지 않았다.    서일은 어려서부터 제또래의 친구들과 같이 유생들의 의병항쟁은 불가피하며 옳은것이라고 여겼고 애국문화운동 역시 국민을 계몽시키는것인것만큼 중요하고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하기에 그는 량자간에 모순이 생겨 서로 부정하고 적대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은근히 안타까와했던 것이다.    이제와서는 그 안타까움이 점차 풀리기시작한다. 1907년 8월이후터는 이들사이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애국문화운동가들이 이제는 반일의병항쟁을 지지하는 립장에 서고있었던 것이다.    유진율이 서일을 향해 이젠 돌아가겠는데 하고싶은 말이 없는가고했다.    《있습니다. 아직도 인식못하고 문화운동지도자와 의병항쟁지도자간에 서로 반목질시하면 반일투쟁력량을 분산시키는건 물론 민족적 융합에 장애를 조성할 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도 당장 거둬치우고 마음을 합쳐야 합니다. 나라가 망하게 되는것도, 민족이 왜놈의 식민지노예로 전락될 지경에 이른것도 불화가 제일 큰 원인이 아닌가봅니다. 이제는 단합해서 불화를 없애야 합니다. 꼭!》     이것은 워낙 의 책임자 최봉준과 하고싶은 말이였다. 그러나 그를 만나지 못해 이렇게라도 한마디하니 서일은 속이 좀 후련해지는것 같았다.    유진율은 자기는 동감이라면서 울라디보스톡으로 돌아갔다.    그가 가자 서일은 이동호군수를 다시만났다. 군수는 그한테 지난일을 말했다.    《그때 나는 경원서 모집된 30명을 데리고 떠나 장진으로 갔더랬지, 홍범도를 찾아서. 그때는 홍범도가 천지평골짜기에서 왜놈의 토벌대를 요정낸 후였어. 우리는 여러날 고생 끝에 갑산에 가서야 그를 겨우찾아 만날수가 있었지. 헌데 가고 보니 부대라는게 말이 아니더구만.》    《아니, 왜서요?》     《대오안에서 적에게 투항하는 자가 나타나서. 천지평전투에서 또한번 녹아난 일본 토벌대놈들이 그 후로는 감히 산골짜기로 기어들지를 못했다나. 허지만두 그러구말 놈들이 아니였지. 아니구말구. 이번에는 전술을 바꾼거네. 생각해보게 무슨 전술이였겠는가구...회유기만책! 느니 느니 선전을 요란스럽게 했다네. 그래서 아닌게 아니라 총을 놓고 대오를 떠나버리는 자가 속출하게 된거여. 차도선이마저도 얼림에 넘어가 그만 귀순해버린게 아닌가. (물론 후에 다시반일항쟁을 나섰지만두)그래서 기염은 쑥 저락되고 만게지. 바로 이럴 때에 우리가 찾아갔던거야. 하면서 홍장군은 기뻐서 이루말을 못하데. 우리가 간 것이 대단한 힘이 된다나, 원 어쩌면 그지경에까지 들었느지!》    《그래서요?》    《홍장군은 대오를 다시 수습하고 전투준비를 갖추었지. 전투가 전만 더 치렬해지리란걸 예견하구는 자체로 화승총과 탄알을 만들기까지 했네. 그런판이였는데 날자까지 기억나, 5월 4일이였어. 북청수비대장 하세가와가 홍장군을 귀순시켜볼려구서 순사대를 도하리에 보낸거네. 그런걸 홍장군은 잡아서 싹 죽여버리고말았지. 홍대장이 한 말이였네. 사람이 생긴 것 같이 억척보두야!》    이동호군수는 처음부터 홍범도에 대한 인상은 좋았노라면서 평을 이렇게 했다. 그가 그의 의병진을 찾아간 것은 옳았던 것이다.    홍범도를 귀순시키지 못하게 되자 일본군은 무력으로 항복시켜보자고 그가 활동하던 신풍리지방에 토벌력량을 집중하였다. 그리고는 전술도 바꾸어 종래와는 달리 여러 측면으로 공격했던것이다.    《홍장군이야 적이 그럴줄을 알았지. 그래서... 우리는 재빨리 산릉선을 타고 장진방면으루 이동을 한거네. 그래놓으니 놈들은 그만 혼란에 빠지고말았지. 우리는 패를 갈라서 싸우기로 했던거네. 그래서 양혁진은 장진으로 가고 한영준은 평북(평안북도)의 후창으루 가버렸네. 그러기를 참으로 잘했지. 한영준이 의병 한패를 이끌고 후창에 나타나자 그곳의 농민과 포수들이 너도나도 달여와 참가해서 의병수가 잠간새에 400명이나 되였던거네.》    이동호군수의 말이 맞다. 서일은 언젠가 신문에서 그런 소식보도를 본 기억이 났다. 한영준에 의한 반일의병대의 조직은 반일의병항쟁이 조선의 북쪽지방까지 확대발전되게 하였음에 자못 의의가 큰 것으로 알려졌다.   《북청 덕사귀, 어두벅령, 언방골, 산고개전투...》    이동호군수는 손가락을 꼽아가면서 자기가 홍범도를 따라다니며 치룬 전투들을 댔다. 어느덧 싸움재간을 배운 그는 이라면서 홍장군은 지략이 출중해 앞으로도 잘 싸워갈것이라고 장담했다.    《허면 군수께서는 왜 그이를 따라 간도로 가시지 않고 연해주로는 건너오셨는가요?》    《난 여기루 신예무기를 구할려구 온거네. 아직도 화승대를 들구 싸우는 대원이 있으니. 헌데 그놈의걸 맘과같이 제꺽 구할 수가 있어야지.》    서일이 묻자 자기가 연해주로 오게 된 연유를 이같이 말하면서 그는 전만 썩 다르게 변해가고있는 로씨아의 형세를 촉기빠르게 감촉하고 있었다.    한국인이 무기를 소지하고 이 지역에서 대일항전을 하게되니 로씨아정부는 이를 막으려고 조취를 취하고 있었다. 즉 외교를 통해 걸고드는 일본의 사촉에 못이겨 민간에서 무기의 거래를 금지시킴과 동시에 한국인에 대하여 려권을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로씨아정부에 한국의병의 무장해제와 체포송환을 의뢰하기까지 한 상황이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연해주를 비롯한 로씨아에서의 의병항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만 군자금과 의군(義軍)의 모집은 그리 여의치 않거니와 순조롭지도 않았다.           《서선생은 그래 어쩔참이오?》    《돌아가서 교학을 그냥해야지요. 장차는 어떻게 될는지 모르지만 저도 군수님의 처지가 된다면 전 그때는 여기룬 안올겁니다. 가면 간도쪽으로 갈겁니다. 제생각에는 의병을 모집해도 훈련을 해도 자리를 잡자면 그쪽이 더 낳을 것 같습니다.》    서일은 자신의 타산을 시원스레 내비치였다.    군수는 생각을 잘했다면서 그때되면 자기는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리라 했다.    김성을 다시만났다. 그는 요삼일간의 정황을 알아보느라 혼자서 돌아다니다가 연추(煙秋)로 돌아온것다. 한번 혼빵나고서야 정신이 번쩍나는지 이제는 민둥머리를 감추느라 운두높은 중절모를 하나 얻어 쓰고 다녔다.   《서선생님, 나는 어쩌면 좋을까요. 로씨아는 내가 생각던것과는 다릅니다. 왜선지 여기 사람들은 번연히 제 동포인줄을 알면서도 우호적으로 대할줄을 모릅니다. 차고 랭랭하기가...》   《그럴수 맞아. 듣자니 여기서 이범윤이 의병을 새로 조직해갖고 두만강연안을 자주습격하니 일본수비대가 올까봐 은근히 두려워들한다오. 왜놈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겨기의 활동정황을 탐지하느라 밀정을 많이 들이미는 모양이야. 판이 이런판이니가 아마... 》    서일이 생각나는대로 해석했다.                     이는 조선주차군사령부가 《조선폭도토벌지》에 기록해놓은 글이다.     그뿐이 아니였다. 지난해부터 올 8월사이 로씨아주차 일본영사와 함북도재임중인 일본관헌이 저들의 상부에 보고한 문헌중에도 이범윤의 동정행장(動靜行狀)을 기록한 것이 너무도다양한 것이다. 그와 그의 의병진은 이같이 적의 중점시각에 들어 감시를 받고있으니 밀정을 파견하는것도 그 어디보다도 많았던것이다.     이것이 연해주의 상황이다. 하기에 유인석의 의병대는 오자마자 경각성을 각별히 높히였다. 그들이 김성을 체포한것도 실은 그가 원산항으로부터 미행하는 첩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차 분장도 의심스레했겠다, 누구를 원망할것도 없었다.    김성은 로씨아에는 더 있고십지 않았다.    그렇다면 만주로 보내는 수밖에. 서일은 이동호군수보고 그를 데리고 갈수 없겠는가고 청을 들었다.   《데리고 가지. 헌데 서생티를 벗자면 말못할 고생을 겪어야 하는데...》   《저는 싸우려고 나선 몸이니 각오가 돼있습니다. 믿으십시오.》    김성은 장담했다.               이동호군수일행 몇사람은 그런대로 장총과 권총을 얼마가량 구해갖고 만주로 건너갔다. 물론 김성도 그 대오를 따라가버렸다.    서일은 연해주에 온지 8일만에 안중근과 황병길을 만나게되였다. 그지간 아즈리, 시즈미, 사무와투리와 소왕령 등지를 나돌다가 의병본부가 있는 하선마구(哈什媽溝)로 되돌아온 그들은 거기서 이범윤으로부터 총명이 과인해 손만 잡아주면 전도가 유망할것 같은 젊은이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한번 만나보고푼 생각이 든건데 며칠전에 만주에서 무기를 구입하러 온 경원군의 원군수 이동호어른이 그들앞에서 또 서일의 사람됨을 자랑하는지라 일부러 보려고 연추(煙秋)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최재형선생댁의 웃방이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산들바람이 들어왔다. 방안에 홀로앉아 을 열심스레 들여다보고있던 서일은 인기척에 고개를 번쩍 치켜 자기 앞에 문득 나타난 두 젊은이를 봤다. 둘다 중등키였는데 얼굴이 동글스럼한 청년은 자기를 황병길이라 소개했고 머리에 캪을 쓰고 팔자코수염을 기른 젊은이는 자기는 안응칠이라 자아소개를 했다.     《나역시 한때는 훈장질을 했소. 지금은 안응칠이 됐지만 전에는 안중근이라 불렀소. 서선생이 경원서 교편잡고있다는 소리를 이군수님께서 들어 알게되였소. 나이는 올해  28이라는것도. 그러니까 서선생은 1881년생이 겠지. 난 1879년도생이요. 생일은 구력으로 7월 10일이구.》     안중근이 하는 말이였다.    《내보다 두 살손우니 형님벌이 되는구만요. 4월초순에 경흥의 노서면에 있는 일본수비대를 야습한게 안형의 부대아니였소? 전번달 10일날 새벽에 신아산분경대를 습격한것도...듣자니 그때 두만강을 건너와 참전한 의병이 200명이나 되리라더구만.》    그와 통성명을 하고나서 처음주고 받은 말이다.    안중근은 자기가 한일을 생생히 기억하고있는 서일을 대견스레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음지었다.     황병길이 제 나이는 26살이라면서 자기도 한동안 교원노릇을 한 경력이 있노라했다. 서로가 처음보지만 하나도 서먹해하지 않았다. 아마 이런걸보고 인면이 여구(一面如舊)하다는 모양이다. 이건 아마도  의기상투(意氣相投)해서일 것이다.    《안선생, 건데 이름은 왜서 고쳤습니까?》    《안중근이라구 하면 어떤 사람은 듣기싫어하거든. 그 이름 그대로 갖구서야 누가 나를 믿고 따라주겠소. 그래 생각던 끝에 연해주에 와서는 안응칠이라구한거요. 그건 나의 애명이요. 솔직히 말해 여기 사람들한테만은 인상을 좋게 심어주자고 맘먹었던거요. 》    안중근은 말하고 웃었다.        서일은 혼자소리로 뇌이면서 웃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어려서 경원의 건달녀석한테 멋없이 놀림당하고나서 밸을 못이여 제 이름을 고쳐버렸던 일을 되새겼다.    한데 그가 애명을 버리고 이름을 서일이라 지은것과 안중근이 되돌아가 애명을 쓰게 된 사정은 아주달랐다.    안중근이란 이름은 그가 국내에서 애국문화운동을 할 때 부르던것으로서 일경에 많이 알려졌으며 또한 반일의병장들은 더 기억하고있었다. 로씨아로 건너올 때만도 의병장들은 애국문화운동에 대하여 좋지 않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그 이름을 가지고는 의병장들과 접촉하기가 매우불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애명을 다시쓰게 된 그였다.    안중근은 백이숙제(伯夷叔齊)의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로 유명한 황해도 해주 수양산밑 광석천변에 있는 옛집에서 진사(進士) 안태훈(安泰勳)의 장남으로 태여났다. 등에 박힌 북두칠성과 비슷한 흑점 때문에 아명을 응칠(應七)이라 명명하였다.    안씨가문은 지방의 무반호족(武班豪族)으로 해주에 세거(世居)하여 명망과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안중근의 조부는 일찍이 진해현감으로 있으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덕망이 높았다. 동학란(東學亂)때 18세나는 김창수(김구)라는 총각 접장이 포군부대를 거느리고 황해도에 출몰하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관군(官軍)을 괴롭혔고, 산포군(山砲軍)의 소년장군 안중군은 신동의 대장이라는 용명을 떨쳤다. 후에 소년 안중근은 아버지의 배려로 김창수를 포용(包容)하였는바 두 소년은 장차 조국의 운명을 걸머지려는 혈맹(血盟)을 맺기에 이르었다는 말이 나돌았다.        나이 청년시기에 이르러 안중근은 천주교신부가 교육과 계몽으로 실력배양에 힘쓰라는 권고에 의하여 진남포교회의 프랑스선교사가 경영하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자력으로 인수하여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러다 얼마지나지 않아 평양에서 열린 국채상환(國債償還) 대강연대회에 갔다가 자기를 비웃는 일본사람을 빈사상태에 이르도록 뚜드려 팬 일로 해서 경찰이 체포하려기에 몸을 피했던것이다. 그는 로싸아로 탈출을 목적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동만에 있는 남양평(南陽坪) 동포부락에서 얼마동안 교육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그는 용정국자가(龍井局子街)를 경유하여 마침내 목적지인 울라디보스톡에 도착하여 신한촌(新韓村) 이치권(李致權)댁에 여장을 풀고 각계의 명사방문으로 일과를 삼았던것이다.           그때 회천(回天)의 경륜을 가진 이범윤을 만나보니 생각과는 다르게 너무나 소극적이였다. 하여 안중근은 일대 용단을 내려 이범윤을 설득하였다. 성패리둔(成敗利鈍)을 헤아리지 말고 당장 의로운 청년을 모집하여 국내로 진격하여 겨례의 사기를 북돋아주자는 안중근의 열정에 넘치는 뜻이 감동을 주어 이범윤은 다시금 의병항쟁을 서둘렀다.     일은 되어갔다. 안중근, 엄인섭, 김기룡 등의 꾸주한 노력에 의하여 마침내 1908년초에 300명가량의 의병대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기간 황병길은 무기를 구입하느라 고생을 많이했다.      《왜놈이 침략하지 않았더면 그런 고생은 없었을 것을.》     서일이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는 문약으로 약소민족이 돼가면서도 달덕을 구하려다 결국은 이지경에 이른게 아니겠습니까.》     황병길이 회심(悔心)에 잠겨 하는 소리였다.    《고륜지해(苦輪之海)라고 고뇌가 끊임없이 운전하는 이 사악한 세상에 달덕(達德)이 어디있어 그걸찾는단말이오. 현실적이 못되는 그따위 환상은 언녕버렸어야 해. 열강이 득세를 부리는 세계를 똑바로 보고 연구했다면 제 민족이 살아나갈 길을 언녕 모색해냈을거야. 상무(尙武)의 기풍을 어느만큼이라도 수립했어도 쇠약이 이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을! 남의 침탈의 대상으로는 되지 않았을 것을! 병길이, 안그래?》    《그렇지요. 서형의 말씀이 들어맞습니다.》     《론어에도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림에 충족한 병력이 있어야한다고 했거늘 우선 외침을 막기위해서도 국병은 잘키우고 국방은 잘 건설해야 할게 아니요. 하지만 우리는 여직 어떻게 했는가 좀 보란말이요. 원...》     안중근은 문약으로 국방마저 강화할 것을 잊었던 과거를 원망했다.    《도포입고 유건쓰고 당나귀타고 추풍월색이나 읊조리면 그게 지고지상인줄로 알고 만세를 선비나라로 유지하려했으니 한심했지요.》    서일은 자국민의 부족점을 이만큼 비난해놓고 말머리를 돌렸다.    《지금 세상이 돌아가고있는 꼴을 좀 보시오. 렬강들은 앞장을 다투어 약소종족을 정복하고 소멸하는 것을 마치도 강대국사람들이 다해야 할 의무로 간주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독재가 생겨나고 인권유린이 생겨나며 따라서 그것은 점점 극성을 부리는 정도에 이르는겁니다. 일본이 우리 나라에 와서 강행하고있는 통감정치를 보시오. 그것이 바로 표본이지요.》    《그렇소. 과연 면바로 보아냈소! 일본은 정책을 변화사킨다고하나 그것은 공언에 지나지 않는거요. 누가 그자들을 믿을가, 5역신7역신놈들을 내놓고서는. 세월이 갈수록 원한만 쌓여 뼈속에 사무치게 되니 이 원쑤는 만세에 가서도 꼭 갚아야 할것이요.》    안중근은 부르짖고나서 통감 이또오 히호부미에 대해서 말했다.   《일본에서 가장 유력한 인사, 가장 대단한 권력가는 아마 이또오공작일거요. 그런자가 통감이 되여 한국에 와서 우리 민족을 위해서 해놓은 것이 뭔가를 보란말이요. 병력을 사용하여 5개조와 7개조의 협약을 강제로 성립시키고 한국의 상하 국민을 기만한 것 밖에는. 오늘도 반일의 기치를 든 의병들은 계속 싸울것이며 적탄에 피를 흘리면서 쓰러질것이요. 야수와도 같이 잔인무도한 그자들의 손에 학살된 무고한 백성은 또한 얼마일가?...》    《이또오 그자야말로 침략의 괴수로서 보살의 탈을 쓴 살인마이지요. 힘으로 남을 억누르면 자신이 위태하다는 걸 알련만...》    《머리가 뜨겁도록 자랑할 궁리만 하다보니 자신의 목숨을 돌볼 새나 있겠소. 한국인은 상하구별이 없이 행복해 하며 만족해 한다고 세상에 공포한것만 보오. 얼마나 뻔뻔스럽고 한심한 거짓말쟁인가구.》     안중근의 말이였다.     그들은 어느덧 화제를 스티븐즈의 죽음에로 돌리였다. 그자는 온 2천만 국민이 개 돼지만도 못하게 여기면서 죽도록 미워하고 저주하고 지어는 죽이려고까지 하는 역적 이완용을 충신이라면서 이또오와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은 큰 행복이라니 동양의 대행이라니 나발불었으니 워낙 죽자고 환장을 한것이라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스티븐즈를 사살하려고 총을 쏜 장인환과 전명운의 의거를 찬양했고 지금 미국, 하와이, 멕시코, 만주, 중국, 국내 각지에서 두사람을 구출하기 위한 기부금모집행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지고있는데 대해서도 찬양하고 지지하는 태도로 운운했다.     《스티븐즈를 쏘아죽인 것은 그 사람을 죽이고자 한 것이 아니라 나라의 원쑤를 갚으려 하였을 뿐입니다. 그러한즉  장인환 점영운 이 두 사람의 재판은 개인문제가 아니오, 우리 한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건 재판인겁니다.》     서일의 말이였다.         《나라의 원쑤를 갚았다, 한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건 재판이다... 과연 옳은 말 옳은 평이요!》    안중근은 흔쾌히 동감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또오 히로부미를 보아라 유능한 그 정치가는 늙었어도 꾀가 많아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느라 발분망식(發憤忘食)을 하고있지 않느냐, 대체 어떻게 생긴 령감인지 그 몰골을 한번 보기라도했으면 좋겠다.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하고도 그래 제 수명까지 마음편하게 살수있을까 했다.    이 순간 안중근의 눈에서는 경멸과 증오의 불길이 황황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원쑤에게 죽음을 주려고 맹세하는 사람에게서만이 잇을수 있는 것이였다.    서일은 이 시각 그와 황병길의 앞에서 나는 이또오통감을 보았다, 그는 몰골이 어떻게 생긴 백두옹이더라는 말이 입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뜻밖에 본것이라 경악(驚愕)하기만했던 일순간이였다. 말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입을 봉하고말았다.    (말해봤자 쓸모도 없는 것을. 이젠 면암선생이나 다시배알하고 돌아가자. 첫날에 그저 간단히 문안만 올렸으니까.)    유린석은 지난해에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의 각 창의소(倡義所)에 거족적인 항전의 전개와 지구전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종래의 체험에 비추어 외국의 지원없이는 일제와의  항쟁에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국외의 망명기지로는 만주보다 로씨아가 기지구축도 그렇고 국내의병에게 무기지원도 그렇고 본토수복잔전을 전개함에도 최상의 길이라 판단하고 7월에 막료인 임정빈(任正彬), 이진용(李鎭龍)등과 함께 부하 60여명을 대동하고 원산항에서 연해주로 출발하였던 것이다.    유린석은 연추(煙秋)에 본거를 두고 우선 부하들의 취업, 생계를 마련했고 최재형, 이위종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동의회(同議會) 회장에 추대되면서 이를 창의회(彰議會)로 재조직하여 의병을 규합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것이다.   《젊은이, 연해주 구경이 어떤가?》    서일을 다시보자 그가 물어보는 말이였다.   《마을 몇 개를 돌아봤을 뿐이니 구경이야 시원치 않습니다만 유진율기자와 최선생어른으로부터 이곳의 상황을 상세히 소개받았습니다. 그리구 어제는 안응칠과 황병길을 만나 하루를 보냈습니다. 고향의 이동호군수님도 여기서 만나보구요. 연해주에 계시는 분이 나닙니다. 동만의 홍범도부대에 계시지요. 무기를 구입하러 오셨길래 마침 만날 수 있은겁니다.》    《그분은 군수자리에 있으면서 의거를 했다는 말이겠지.》    《예, 그렇습니다. 올봄에 고향서 30명을 모집해갖고 나가셨습니다. 저의 학생 9명도 그분이 데리고요.》    서일은 제자 9명중 3명은 전사했고 가족에도 알리지 않았으니 이제 돌아가면 아마도 자기가 뒷처리를 해야겠다고 했다. 유린석의 병색이 도는 얼굴에 그늘이 짙어지고 있었다. 풍상많은 세월속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제자의병들을 생각하는모양이다. 서일은 머리에 얹은 상투를 지켜주느라 검은 유건을 단정히 쓰고있는 이 66세로인의 살결적은 근엄한 몰골을 바라보면서 전에 개화파(開化派)면 몰잡아 적으로 보고 비난해 온 완고한 유생종장(儒生宗匠)이 지금은 심기가 어떻게 돌아가고있을가 속으로 점쳐보았다.    유명한 것은 10여년전 그가 자기의 의병진을 인솔하고 만주 료동(楚山阿夷城)에 이동하면서 내린 격문 이다.      ...販君賣國之徒 接跡起於斯 稱爲萬國開化 而締結世讎之狡夷 輾轉搆禍 弑殺一國之母后 辰我至尊之君 上驅我先王赤子而禽獸焉 汚我先正制作而糞壤焉...          이 글에서 유린석은 개화파를 임금을 팔고 나라를 팔아먹는 무리라고 규정해놓고는 그들이 만국개화를 사칭하여 천하에 홀로 남아있는 례의지국인 한국을 패륜(悖倫)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비난하고, 그들이 지은 죄악 세가지를 들었다. 즉 오랜 제도를 더럽힌 죄, 례의를 짓밟은 죄, 국모를 죽게 한 죄. 그리고는 지금 조국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감은 기필코 원쑤를 갚고 동방의 례의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끝까지 이역에서 우리의 옷을 입고 우리의 옛제도를 지키다 죽어서 귀국할 것이라했다.    그는 강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소신을 밝히면서 특히 일제보다 구라파의 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하려는 개화파를 매국노로 단정하여 강력히 성토함과 동시에 생명이 다할 때 까지 투쟁할 것을 천명하였던것이다.       (그대로만 나가서는 안된다. 변화하는 형세에 보조를 맞춰야한다. 그럴줄을 모르고 대립을 고집하면 되려 역행자란 지탄속에서 자멸하고말것이다.)        애국문화운동을 개화사상이 이끌고 있었다. 서일은 유린석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조심스레 충고의 말 한마디를 꺼냈다.    《일개 무명인이 이러면 외람된 소행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만 엽줍고싶은 것이 하나 있어서 다시뵙습니다. 보시다싶히 형세는 부단히 변하고있습니다. 지금은 전만 달라 대세가 단합의 길을 바라고있습니다. 의례 그래얍지요. 의병항쟁과 애국문화운동이 본래 동일한 목적인즉 계속대결하면 자상뿐이니 종식하고 이제는 통합의 길로 나아감이 지당한줄로 압니다.》    유린석은 곰곰히 듣더니 자기의 태도를 표명했다.   《젊은의 충언이 사심없고 일리가 있는건데 외람될거 뭐겠는가. 그러잖아 나도 머리가 그리로 돌아 생각을 많이 해본걸세... 어제 바로 우리는 회의를 개최하고 토론을 했었네. 각자 립장과 태도를 모을때가 돼서. 내가 말했네. 고 말이네.》      그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니 서일은 안개가 걷히듯 흐릿하던 속이 개운해지기시작했다.    이틑날 그는 연해주를 떠나 고향에 돌아왔다. 뜻깊은 쾌속려행이였다.
12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3. 댓글:  조회:5640  추천:0  2011-08-09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3.     김성(金星)은 강기있고 총명한 청년이였다. 천만다행으로 살아난 그는 두 은인에게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을가 이루다말할수 없이 감지덕지해 하였다. 하리(下里)마을을 떠나  연추(煙秋)쪽으로 걸음을 놓기 시작하자 김성은 자기가 연해주로 오게 된 리유를 알려주었다.    《나는 학교에서 교편을 더 잡고있을 형편이 못되여 차라리 의병으로나 되여 싸우리라 맘먹고 집을 나온 사람입니다. 본래는 조용히 글이나 가르치며 세월을 보낼수도 있었습니다만 내라는 사람이 명줄을 어떻게 타고났는지 그렇게 돼주지를 않는단말입니다. 올봄에 있은 일입니다. 한 의병대가 대전과 송약사이의 철길을 파괴했지요.》    《가만있자! 올봄이라했지? 대전과 송약사이라 했지?...그게 그럼 이강년의 의병대가 한 일이 아닌가.》     서일은 무망간에 그의 말을 중둥잘라놓았다. 신문지상에서 그 사건을 보도한적이 있는데 면바로 생각난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강년이 령솔하는 의병대가 한 일이였습니다. 신문에도 났지요. 그 일로 인해 우리 학교에서는 선생들지간에 한바탕 변론이 붙었던겁니다. 철길을 파괴하는게 옳으니 그르냐 하는 문제를 놓고서. 그때 저는 말했던겁니다. 의병이 철길을 끊은것이 뭐가 잘못됐느냐, 일본은 경부선을 비롯해서 우리 나라의 철도를 모두 독점관리하고 있다, 대체 무슨 심보냐, 무슨 리유로 남의 나라에 들어와 제 맘대로 독재를 부리는거냐. 제 나라의 철길을 그래 그자들이 그냥 독점하게 내쳐야 하는가고말입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말하면 못쓴다고 반박하며 나서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일진회에 가입한 교원들이였지요. 그후부터 저는 암암리에 경찰당국의 요시찰인으로 되고만것이지요.》    《오, 알았어! 그래서 꼬리를 빼는 판이군!》    유진율이 롱담조로 말하고는 웃었다.    《그렇습니다. 어느때 곤욕을 치를지 모르는 일이라 에라 하고 떠난겁니다.》    김성은 학교내에서 제 사상을 버리면서 까지 그따위 일진회의 녀석들과 그냥 어우렁더우렁 지내고싶지는 않아서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의병항쟁의 길을 택했노라했다.    《건데 머리는 왜 그 모양으로 만들었나?》    서일은 나이가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거니와 아직 장가도 가지 않았다는 그의 선택에 찬동은 하나 리해가 안되여 물었다.    《저는 국내서는 의병을 찾을길 없어서 이리로 오자고 맘을 먹은겁니다. 한데 오자고 보니 아시다싶이 지금은 통행증없이는 나다니기가 어렵단말입니다. 다행히 내한테는 감영에서 발급한 교원증이 있었지요. 려권은 없어도. 듣자니 일진회의 사람은 통행이 좀 자유롭다더군요. 그래 생각해봤습니다. 그자들의 확연한 신분증이 뭐겠습니까. 남달리 뺀뺀골을 하는게지요. 나는 머리를 이모양을 깎아버렸지요. 그리구나서는 서점에 가 일문서적까지 한권 사서 분장을 한거지요...했더니 확실히 감시가 적은 것 같습디다.》    김성은 원산해관의 감시를 피해 밀항한 것을 자랑삼아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모양으로 로씨아땅을 밟으면 위험하다는 것 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그래 여게 와서는 어느 의병대를 찾아갈거요?》    서일이 물어봤다.    《난 유인석의 의병진을 찾아가렵니다. 그 의병진이야말로 력사가 오래거니와 명성이 높으이니까요, 안그렇습니까.》   《유인석의 의병진이라, 거 접대가 대단히 좋았군! 하하하!...》    유진율이 그 소리를 듣더니만 앙천대소했다.   《기자선생! 왜 그럽니까?》    김성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났다.   《이 멍청이야! 너를 죽이자구한게 바로 그 의병야.》   《아니 뭐라!?...》   유진율의 말에 김성은 물론 서일마저 깜짝 놀랬다.   유진율은 머리꼭대기에다 아직도 멋없는 상투를 얹고있는 것을 보고서 자기는 그들이 유인석의 의병이라는걸 제꺽 알아맞혔노라했다.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요즘 유인석이 60여명의 수하 의병들을 거느리고 로씨야로 건너온 것이다.   연추에 도착했다. 바이깔호  너머의 저 머나먼 첼랴빈쓰크까지 한꺼번에 시공을 벌려 완공했다는, 구라파의 로씨아 본토로부터 우랄산맥을 지나 아득히 멀고 먼 이곳 원동까지, 마치도 하나의 혈맥마냥 뻗은 길이 7,000㎞의 대철로는 그 장관을 자랑이나 하듯이 해빛아래 번들거렸다. 그 철로의 끝이 닿고있는 원동의 항구도시 울라디보스톡에 올라서부터 내내 짙게 느껴지던 로씨아식의 독특한 이국적풍채가 북으로 들어오면서 점점 더 다분히 느껴지고있었다.    무비광대한 로씨야의 대지로 놓고 보면 하나의 작디 작은 표점에 불과할  연추ㅡ이것이 그래 동포가 살고있는 마을이란말인가?!...우선 가옥부터 외모가 완전히 달라서 잘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여기서는 함경도처럼 산간에 숨듯이 들어앉은 마을에서 처럼 토벽이니 토담이니따위는 전혀 볼수 없었다. 만주땅에 사는 한족(漢族)들의 주거(住居)처럼 진흙물을 묻힌 억새타래로 만든 두터운 타래벽흙집도 볼래야 볼수 없었다. 여기는 소문에 듣던바와 같이 모든 건축들이 목제였다. 살림집은 다가 아름드리의 굵은 송목을 잘라 지은 귀틀집인데 그것도 계단을 밟아 오르게끔 모양좋게 지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정원도 널찍널찍 잡아서 마을이 대단히 커보였다.    교회당이 있고 학교도 있었다.    마을한복판 제일큰 살림집이 바로 최재형의것이라 했다. 당연히 그럴만도하다. 빈궁에 시달리다가 9살나이에 부모따라서  여기에 온 그역시 개척자의 일원인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는 로씨야국적을 얻었고 학교를 다니면서는 이름도 베트루쯔오라 고치였다. 이 베트루쯔오가 청년에 이르러서부터는 기지민활한 활동가로 자라났다. 로씨아군대와 교섭하여 우육류(牛肉類)를 납품하는 군대의 용달상(用達商)을 경영하여 거만(巨萬)의 재산을 모았다. 그는 삶을 자체로 영위할줄을 아는 억센 사나이였다. 낯선 이역에서 온갖 역풍을 무릅쓰고 이같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그는 성실한 인품과 자애로운 덕성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는 동족에게뿐만 아니라 일반 로씨아인에게 까지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태도로 대하는 사람이였다.    《그분은 제 동포들 속에서는 물론 로씨아인들에게도 인망이 높아 도헌(都憲)으로 되었지요. 그리고 직무를 충실히 집행한 공으로 수도 뻬제르부르그에 까지 가서 황제를 알현했던겁니다. 훈장을 5개나 받은 분이지요.》    유진율이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알려주었다   《최재형선생은 이곳 연해주에 와있는 동포들을 위해서 민생안정과 민족교육에 전념하시지요. 저기 저 커다란 학교를 보시오, 저것 역시  선생께서 사재를 희사하여 지은겁니다. 어디 그것뿐인가요, 도헌직으로 받는 년봉은 몽땅 동포학생을 류학시키는 학자금으로 내놓은겁니다. 그이는 이곳 한인회장입니다. 그이한테 방조를 받지 않은 교포가 어디있다구요, 신세지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우리 신문사 역시.》       전에 이달문이나 계화한테서 듣은바와 갔았다.    이범윤, 안중근, 유인석, 홍범도... 의병의 거두며 망명지사로서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던 것이다.    중등키에 단단하게 생긴 50대의 사나이가 구면인 유진율기자를 따라 자기네 집에 온 초면의  두젊은이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르신님의 선성은 제가 고향서부터 들어 알고있습니다만 인제야 찾아뵙게 되여 미안합니다. 그지간 옥체무강하셨습니까?》    서일이 무릎꿇고 큰절을 올리니 최재형은 되려 송그스러워 하면서 물어보는것이였다.    《뭐라했더라, 고향서부터 나를 알고 온거라?... 고향이 어디게?》    《함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입니다.》      《어이구, 이거! 그렇다면 한고향친구로구나! 하하하...》     이렇게 반가와할 변이라구야! 최재형은 파안대소를 하면서 어서일어나라며 서일을 두손잡아 일으켰다.    《성명을 어떻게 쓰느냐?》    《서일이라 합니다. 애명은 기학이구요. 저의 조부님도 그러시구 부친님도 그러시구...로씨아에 가거들랑 선생님을 배방하고 안부 꼭 전하랍디다. 저의 부친은 명함이 서재원입니다.》    《이런! 하하하... 서재원이면 내 소시적의 딱친굴세! 잊을리있으리오! 난 뒷마을 이동이구 재원이는 앞마을 금동이구. 한동네는 아니지만 사이가 코앞이라 늘 같이 놀며 자랐지. 반갑구나! 정말루 반가와!》    최재형은 전에는 가끔 들어서 소식을 알았노라면서 근년들어 조부와 부친의 건강은 어떠한가고 물었다. 서일은 변고없이 다 무사히들 보낸다고 아뢰고나서 느낀바를 말했다.    《오늘 와보니 어르신님은 과연 자애심많은 분이거니와 의를 위해 싸우시는 혁명가답습니다.》   《허허! 칭찬이 과분한걸... 내야 응당해야 할 일을 하고있을 뿐이네.》    최재형은 겸손한 분이였다.    서일은 그의 앞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자기가 불시에 집을 떠나 여기로 오게 된 연유를 알려주었다. 최재형은 아 그런가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한번 와서 연해주가 어떤 곳인가를 제 눈으로 직접보고 가는것도 나쁘지야않지 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이 땅에서 혁명이 일어남으로 하여 급변하고있는 로씨아의 형세와 그로 인한 사회의 질서 안정상황에 대해서 말했고 이런 속에서 동포들의 의식변화와 상호협력과 난관에 대해서, 망명애국지사와 산발적으로 쓸어드는 의병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을 안둔시킬 문제가 긴박하다는것과 의병대지간에는 지반과 지위쟁탈로 불화와 모순이 생겨 그것이 골치거리로 된다는걸 숨기지 않고 말했다.    《어디로 가나 그놈의 오그라질 당파심!》    서일은 기분이 상해서 내뱉았다.    그들은 어느덧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없이 속심을 나누기에 이르렀다.     한데 서일은 여기서 이달문도 계화도 만나볼수 없어서 섭섭했다. 그들은 지금 연해주에 있지 않았다. 얼마전에 만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동호군수는 만날 수 있을것 같았다. 그는 홍범도의병진에 합치였고 홍범도는 이곳에 있다고 한다.    최재형은 서일보고 떠날 때 까지 맘놓고 자기네 집에서 류숙하라면서 그와 유진율과 밤을 패가면서 과거지사를 얘기했다.    로씨아가 생각한 것 같이 그렇게 자유롭고 누구든지 오기만 하면 부유해질수 있는 곳은 아니였다. 이만큼이라도 살아나갈수 있게 자리매김을 한 그 력사야말로 눈물겨운 것이였다.    1864년 봄에 함경도는 민간의 식량이 절핍(絶乏)되여 먹을것이 없었다. 무산사람 최운실(崔雲實)과 경흥사람 양응범(梁應範)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다못해 결사적으로 두만강을 건너 만주의 훈춘에 도착하였다가 다시 우쑤리강을 건너 여기 이  연추(煙秋)에 왔다. 언어불통인데다 로씨아인과는 생활풍속도 달라 모두가 생소했다. 그러나 그들은 애로를 극복하고 피땀흘려 개척한 보람으로 첫해에 수확을 거두어 토대를 잡았다. 이 소문이 국내에 퍼지자 삼수 갑산의 세궁민(細窮民)들이 결사적으로 도망쳐 왔다. 최운실은 자기의 량식을 모두 내놓아 추위에 떨고 굼주린 그들을 먹이고 살리였을뿐만아니라 빈민 35호를 데리고 추풍(秋風)에 가서 개간하기시작했다. 그해의 6월에 또 60여호가 부녀자를 거느리고 와서 로씨아군관이 밀을 주어 아사를 겨우 면하게 하였다. 게다가 1867년부터 7년간 이곳도 흉작이 련속들어 굶어죽는 동포가 속출했다. 로씨아군이 자기들의 군량에서 얼마간씩 갈라주었으나 그래도 살기 어려웠다. 나무뿌리와 풀뿌리를 캐여먹다못하여 하는수 없이 부자가 갈라지고 부부가 헤여져 사방으로 방황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한족(漢族)들은 좋은 기회라 여기고  여기에 와서 량식으로 교포의 처자들을 사갔다. 어떤자는 지어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함께 사갔으니 그 처참한 광경은 눈을 뜨고는 보지 못할지경이였다...그러했음에도 고향서는 살수 없어 떠나오는 이들, 굴함을 모르고 억척한 동포들에 의하여 쌍청(雙城)이 개발되고 우운현(烏雲縣)이 개발되였다. 해삼위(海參威)에 생겨난 개척리(開拓里)는 최초 5호가 자리잡고 개척한 마을이였는데 1년이 못되여 신한촌(新韓村)이라 호칭하고 양옥이 즐비하고 교회당과 학교도 서게 되었다. 안씨와 김씨에 의하여 개척된 흑정자(黑頂子)는 라선촌(羅鮮村)이라 불렀는데 몇해를 지나지 않아서 큰 부락으로 변하였다. 거주민이 계속증가하고 가축은 번성했으며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여나면서 생활은 점점 활기를 띠여갔다...    《이토록 터를 닥자니 오죽했는가. 어느핸가는 빈민 96인이 배를 타고 추풍으로 가려다가 해삼위에 이르는 해상에서 22이나 빠져죽고 그 나머지는 겨우 구출되여 만난을 겪으면서 쌍청을 개척한걸세.》     최재형의 말이였다.       그 말을 서일이 이어받았다.    《살길을 찾아 헤매다가 그 모양으로 죽음을 당한 자 어찌 한둘이겠습니까.  저 만주쪽 압록강, 두만강물은 그대로 귀신의 호곡성으로 되어 들립니다. 후ㅡ 이러나 저러나 수난을 겪어야 하니 어찌보면 이 민족은 수난의 명을 타고난 것만같아서 민망스러울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제 손으로 제 명을 건지지 못하는 신세의 민족으로 태여났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쓰라리도록 저려나는 서일이였다.     유진율기자는 지금 로씨아에 거류하는 한국인은 3가지 형태로 분류된다고 알려주었다. 1883년 이전에 이주해 온 이들로서 로씨아에 귀화하여 토지를 자유로이 매매(賣買)하고 로씨아인과 다름없이 영주(永住)하고있는 사람, 로씨아에 귀화와는 관계없이 사유의 토지를 차입하여 몰래 토지를 소유해온 사람, 사유토지를 전혀 가지지 못해 소작생활을 하는 사람.    《아편장사를 해서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습다. 로씨아에 거류하고있지만도 정당한 노력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법을 위반하면서 그 짓을 하고있지요. 이런 현상이 생기니 로씨아정부는 로씨아에 거류하는 한국인이 연해주에 대하여 경제적인 침투를 한다, 목재를 람벌하여 홍수를 일으키게 한다, 산야가 황페되여 생명과 재산마저 탕진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느니 뭐니 비난하기 시작하지요.》   《감탄고토(甘呑苦吐)라 이제는 뱉어내자구 트집잡는거야. 말을 다 해야 알겠는가. 연해주개발이 어느정도 완성됐겠다 이제와서는 우리 사람이 더이상 쓸모가 없겠다구 여겨져서 배척을 하는 판이지.》    최재형이 격한 음성으로  분석하는 말이였다.    그의  분석을 듣고보니 서일은 언젠가 자기가 학생들 앞에서 일본이 조선을 완전강점하게 되면 조선민족은 그자들의 노예로 전락되거나 아니면 씨비리나 화태쪽으로 쫓겨가리라 말한 것을 새삼스레 상기했다. 과연 그렇게 되여가는것만같았다. 최재형어른은 벌써 그런 경우를 감촉하고있지 않는가!    유진율은 울라디보스톡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의병진을 함께 돌아보고 동포사회를 같이 료해하자는것이였다. 서일은 그러자고 했다.    두사람은 먼저 이범윤부터 방문하기로 하고 이틑날 하선마구(哈什媽溝)로 갔다. 거기에 의병본부가 있었다. 그것은 이범윤이 최재형, 김익선, 박춘근과 함께 대일항전을 하고자 설치한 것이였다. 또 한편으로는 지난해, 즉 1907년에 한국군이 강제해산을 당하자 그들중 일부는 여러 의병대에 가담하여 혹은 북간도로 가거나 혹은 연해주로 이동한 것인데 그런 의병대중에 홍범도의병대와 차도선의병대가 이곳 연추(煙秋)로 왔기에 경제적인 기반이 있는 최재형은 그들을 도와 의병진을 새로 정비하고있었던것이다.    그리고 며칠전에 이위종(李偉鍾)이 뻬제르부르그로부터 군자금 1만루불을 지참하고 와서 이범윤은 600명의 의병진을 바탕으로 최재형과 함께 사포대(私砲隊)가 사용하던 무기를 가지고 대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몸이 메마른 쉰살넘은 사나이가 자기를 찾아 온 두 젊은이를 창너머로 내다보고 있었다.   《이관리사어른 안녕하십니까?》    유진율이 허리꿉석 인사를 하는데 저쪽은 또 무슨 소식감을 벌려구 분주를 떠느냐고 롱담절반 진담절반했다.   《오늘은 제가 이관리사어른께 멋진 친구를 사귀라고 복무를 하지요.》    이범윤 하면 동포들은, 특히 함경도사람이면 누구나 다 거룩한 위인으로 우러러 보고있는데 간도관리사노릇을 할 때의 옛직함을 서슴치 않고 불러가면서 수작질하는 것을 보면 아주 숙친한 사이라 허물없이 지내는 것 같았다. 이는 또한 아량있는 이범윤의 포섭력을 말해주기도하겠다.   《함북도에서 온 서일이 선생님께 문안드립니다.》    서일은 그의 앞에 다가가서 국궁재배했다.   《오, 그렇소! 함북 어디요?》   《경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네 총소리를 들었겠군.》    이범윤은 다시금 서일을 아래우로 훑어보았다. 그 눈매가 윤기자가 나보고 사귀라며 데려온 사람이 바로 너냐묻고는 약국의 약제사가 약처방을 다루듯이 대방이 갖추고있는 인격과 그 분량을 가늠하는것이였다.    《저는 어른께서 흩어진 군사를 다시모아 건곤일척의 대결을 계획하신다는 소식을 듣고왔습니다. 기쁩니다. 아무튼 수고많이 하시여 전과를 올려주시기를 희망합니다.》    《난 소문만 냈지 그닥 유능한 사람은 아닐세. 패전이 수두룩하니.》    《아니옵니다. 병가일패(兵家一敗)는 인지상사(人之常事)라 99번 패하다가도 최후의 승리가 병가(兵家)의 궁극적 목표이지요. 패전이 수두룩하다고 의기저락할 필요는 없는가봅니다.》    《오, 그런가!... 헌데 여보게, 젊은이는 대체 뭘하는 사람이오?》    《소인은 경원학교서 교편을 잡고있습니다.》    《뭐라! 훈장질을 한다는 말인가?...》    이범윤은 일개 교원의 입에서 군사리론이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여 그는 놀래는 한편 대견해 하는 기색까지 짖더니 근중을 떠보느라 당면의 의병투쟁을 어떻게 보는가고 넌짓이 물어왔다.    서일은 그가 그러것이 좋았다. 바다너머 머나먼 여기로 온 목적의 하나가 의병을 통솔하고있는 이런분들게 한마디 충고를 하자는것이였다. 자진해서 물어보고있으니 어려워말고 제 견해를 기탄없이 피력해야한다.    《소인은 글방선생이다보니 실전경험이란 있을수도 없습니다만 그지간 보고 듣고 분석한바가 있어서 장군앞에서 감히 말씀올리려하오니 소행이 외람될런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워말고 말하게. 내가 듣자고 귀를 세우지를 않는가. 어서 말해보게. 어서!》    《그럼 하지요. 첫째는 지금 각지에 흩어져 있는 의병들을 하나의 힘으로 단합시켜야한다 그겁니다. 의병장들이 제각기 분산적인 활동에 치중한 나머지 한 구역안에서도 그렇고 린접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다른 의병대와도 그렇고 협동작을 잘 조직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략을 모르는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적은 이 약점을 리용하여 강력한 토벌력량으로 각개격파하는 전술을 쓰고있는겁니다. 이제는 두달이 되였구만요. 7월 2일에 이강년장군이 왜놈손에 체포된걸 아시겠지요. 린접부대들과 얼마든 련합과 협동작전을 실현할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러지를 않았지요. 저는 신문지상에 보도된걸 못봤습니다. 협동작전을 한다는 소리를 말입니다. 이인영의 의병대도 그렇고 신돌석의 의병대도 그렇고 이강년의 의병대도 그렇고...통합과 련합작전을 한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러지를 않아서...》    《말이 맞았어! 과연 옳은 충고일세!》    이범윤은 서일을 향해 자기는 귀담아들을테니 말을 더 해보라했다.    《각지 의병들은 새로운, 이를테면 다른 의병대에서 정찰, 위장 등 효과적인 전술을 썼다면 그를 응당 참고해서 적용해야할것입니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라했습니다. 상병(上兵)이란 병사를 쓰는 법(法)이요, 벌모(伐謀)란 모략으로써 적을 공격해 승리한다는게 아닙니까. 모두어 말하면 병사를 씀에 제일첫째가 모략으로 적을 전승하는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보시오. 통일적인 단합도 없이, 전체를 맡아 지휘하는 통수도 없이, 의병장 개개가 모래알같이 흩어져 제멋대로 싸우고있습니다. 일정한 전술도 없이 싸움을 벌리다보니 결국 실패하고말지요. 목숨만 잃고.》    이범윤은 곰곰히 듣더니 머리를 주억거렸다. 조금도 틀리지 않는 말이였다. 그한테 그 누가 이같이 투철히 말해주었던가? 없다. 오늘 함북도 경원에서 온 28살의 서생티가 물씬나는 교원 서일이가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아무리 군자라도 아이의 말도 옳으면 귀담아들으라했다. 이범윤은 자기가 오늘 뜻밖에 명지한 사람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생각되여 고마와했다.       이범윤은 여직까지의 의병항쟁을 한번 돌이켜보았다.    의병항쟁의 첫시기부터 이병장들은 그 누구를 물론하고 결사(決死)를 맹세하고 싸움에 나섰으나 적들과의 치렬한 대결이 벌어지고 투쟁이 오래지속됨에 따라 동요하면서 우유부단한 행동을 하고 있다. 특히 유생들은 백성들의 투쟁기세에 고무되여 의병을 조직하기도 따라나서기도 했으며 사회적 영향력을 리용하여 의병장의 자리를 차지하기도하였다. 그러나 어떤가, 적과의 치렬한 싸움판에서는 외려 용감하지 못하거니와 뒷꼬리를 따라다니다가 대오에서 떨어져 나오거나 아예 항쟁을 포기하기도하는것이다.    (그래서 되느냐? 그러지를 말아야지. 수치를 아는 사람이면.)    이범윤 혼자서 해보는 자문자답이였다.    그는 서일과 같이있고싶었다. 자기의 참모가 되어줬으면 오죽좋으랴싶었다. 그러나 그럴수는 없었다. 서일은 아직 의병에 나설 맘은 없는 사람이였다. 돌아가서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려는 사람이였다.    서일과 유진율은 얜추로 돌아왔다.    의병과 주민들이 동원되여 마을 한귀퉁에다 병영을 짖고있었다. 전날 온 유인석의 의병대가 쓸 병영이라고 한다. 60여명은 여기로 오자 처음 얼마간은 례배당에 들어있었다. 그러다가 교인들이 교회활동을 제대로 할수 없다고 불평이 많아 분산되여 개인가옥에 들게되였다. 그러니 외려 불편한 점이 더 많았다. 젊은 의병이 속옷만 입은 주인집녀인의 몸에 눈길을 돌린 것이 말썽거리가 되여 하마터면 당치도 않은 류혈적인 마찰까지 유발할번했다. 하여 최재형은 유인석, 이진석, 박정빈 등과 상론한 끝에 아마도 병영은 지어야 할것이니 일찍 손쓰는 편이 나으리라 시공을 벌린 것이다.    《우리는 먼저 저기루 가봅시다. 건축이 어느정도 되어가는지...》    유진율이 방향을 끄니 서일은 그를 따라 걸음을 놓는 수밖에 없었다.    건축면적이 적잖았다. 다 지으면 큰집이 될 것이다. 그런데 굵은 통나무가 없는지 많이는 가는 나무와 판자와 톱밥을 주재료로 쓰고있었다.    사람들이 한창 지붕을 만들고 있었다. 나무깨비나 수수깡 따위의 산자를 서까래에 얹을줄을 알았는데 그들은 그러지를 않고 연목에다 판자를 붙이고 있었다. 뚝딱, 뚝딱...여럿이 못질을 하고있었는데 보아하니 놀랍게도 거의가 녀인들이였다.       《호호호...》       《호호호...》     어느 녀인인지 서일은 전혀 알아듣지도 못할 로씨아말을 입밖으로 굴려 내던지자 다른녀인들이 못질을 하다말고 모두 고개를 돌려 이켠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들썽하게 웃어댔다.                         《저 빌어먹을 말괄량이를 보지. 바람이 끼였어!》    유진율은 녀인이 내친 소리를 잡아들은 모양이다.    《뭐라구 했길래 저래?》    《새서방온다오.》    《저런! 롱담도 유만부동이지...날 맘들어 그런다면 알려주시오. 내가 새끼  셋이나딸린 애애비가 돼서 미안해 한다구.》     그랬더니 유진율이 그 말을 정말 번역해주었다. 그래서 녀인들은 더 죽겠다고 웃었다. 서일도 따라웃었다. 유들유들 악의없이. 유진율은 지붕에 올라가 판자에 못질을 하고있는 녀인은 거개가 처녀들인데 로씨아 아가씨들의 성격을 닮아가는지 남녀성별을 무관하고 작난을 몹시쓴다고 알려주면서 의병거의가 팔팔한 젊은이라 녀성측에서 먼저 수작질하고 꾀여 관계를 발생하는 일이 자주 생겨 부득불 군법이 더 엄해지게 되였다고했다.    서일은 뜻밖에 여기서 이동호군수를 보았다. 청년 몇사람과 어디론가 가고있었다. 군수는 축간 얼굴이였다. 서일은 놀램으로 반기면서 그의 건강을 걱정했다. 한데 이동호군수에게 맏겨 보낸 제자 9명중 3명이나 왜놈과 총격전을 벌렸다가 희생되였다니 억장이 무너지는것만같았다.    《아, 어쩌면 그렇게!...아무때건 가족과 친족이 알아야 할 일인데 왜서 여직 그걸 감추시는가요? 죽은 목숨이 되살아날 때를 기다리는가요?》   이동호군수는 길이 바빠 길게 말할사이없으니 래일다시만자면서 총망히 가버렸다. 최재형은 그를 면목을 모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동호군수는 여기에 있지 않는단말인가? 어디서 뭘하는데 늙은 몸에 저러고 다닐가?...  
11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2. 댓글:  조회:4724  추천:1  2011-08-09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2.     1908년ㅡ이해는 한국의 력사상 그야말로 범상치 않은 한해였다. 한 것은 전해의 뒤를 이어서 한층 발랄해지고있는 의병항쟁이 점차 절정으로 치달아오르면서 이 한해를 장식하고있기때문이다. 수를 헤아릴수 없는 열혈의 젊은이들, 우국우민의 애국지사들이 당장 멸망하고말것 같은 나라의 비참한 처지를 놓고 개탄하고 울며 속을 태웠고 그중 많은 이들은 류혈과 희생이 약속된 최후의 결전장으로 달려나가 자기의 청춘과 귀중한 생명을 선듯이 바쳤던것이다..    이럴 때 일개 평범한 교원으로서 몸은 비록 학생들 속에 묻혀있지만 의병항쟁을 자기가 하고있는 계몽사업보다 더 집접적인 구국행동로 간주하고 남달리 괌심해온 서일은 그것을 계속 꾸준히 연구하면서 변화많은 국세를 면밀히 주시하고있었다.    1908년 5월부터 일본은 의병들을 전멸하려고 각 지방에 배치하였던 수비대를 다시배치하면서 주둔지역을 늘이였다.    전라도지방 하나만으로도 그 정도가 어떠한가를 알수있는 것이다.    8월하순 남부수비관구사령관 와다나베소장은 전라남북도에 림시토벌대를 무어 보내는 한편 여기에 제6사단 공병소대, 헌병, 경찰관들을 더 증가시키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을 경비부대와 행동대로 나누어 경비부대는 포위선을 형성하고 중요거점을 지키게 하였고 행동부대는 포위선안에 있는 백성들에 대하여 수사와 검거 및 학살을 하게 하였다. 또한 전라남북도의 연해에는 해군을 배치하고 의병들이 해안지역으로 나가지 못하게했다.    하다면 함경도쪽은 어떠한가? 북부수비관구의 책임자는 오까사끼소장이였다. 그의 휘하 동부수비구 마루이소장이 지휘하는 2개련대의 일본군이 함흥에 본부를 두고 각 지방에 분산배비되였는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았다.    보병 제49련대의 주력은 경성에 주둔하고 회녕에 보병 1대대와 공병대대를. 길주, 청진, 무산에는 각각 보병중대를. 웅기, 경흥, 신아산... 등 24곳에다는 각각 보병 1개소대 혹은 1개분대를.    서일이 있는 경원에 진주한 수비대는 1개분대였다.    보병 제50련대는 주력을 북청에 두고 원산, 함흥에 각각 보병 2개중대를. 장전점, 장진, 성진, 갑산, 혜산진에 각각 보병 1개중대를. 고성, 양덕, 호도... 등 29곳에다는 각각 보병 1개소대 혹은 1개분대를 배치하였다.        그리고도 영흥, 초원... 등 8곳에는 각각 기병대가 배치되였으니 모두합치면 함경남북도에 침략군이 주둔한 곳이 무려 77개소나되였던 것이다.    하지만 수비대분견대에는 극상해야 10여명내외였다.    (지금 적병은 서울을 본 소굴로 삼고 각 지방을 수비대장소로 삼으며 그중 큰도시에 둔취하여 련읍을 나와 헤매고 있다. 저렇게 흩어져 헤매는 자들을 잡아버리는건 쉬울 것이다. 나오는 족족 처단할것이며 놈들이 주둔한 곳은 공허한 틈을 타서 취할 것이다. 조급히 놈들의 주둔장소를 공격하려말아야 한다. 그러면 실패할수 있으니까. 공격하려면 성공의 가망이 완전무결한 경우 할것이지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강력한 무장도 없이, 주도면밀한 작전도 없이 적의 본 소굴을 직접 공격한다는건 득책이 아니다.)      서일은 일본군 6명이 짝지어 경원거리를 나도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어디엔가 도망가서 숨어있었던 오사기교감과 이와데교원은 함경도에 저들의 군대가 이같이 많아지니 그제야 어느정도 안심이 되는지 학교로 다시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왔어도 학교에서 학생들이 글읽는 소리를 들을수 없었다. 학생들이 말도 없이 동맹휴학을 한것이다.        얼마전에 학교벽에 이런 위협적인 표어가 나붙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붙어있었다. 그 표어는 일문(日文)으로 쓴것이였다.    《교장선생! 이젠 개학을 해야지. 학생들이 등교하도록 조치하시오.》    오사기교감은 학교로 오자마자 서일을 향해 독촉했다.    《오사기교감! 의병이 붙인 표어를 보지 않은모양이군요?》    서일은 그를 데리고 나가 서쪽으로 갔다.    오사기 겐다로는 거기 벽에 붙어있는 표어를 보더니 찔끔 놀랬다.    《오사기교감은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이 납니까? 난 목숨을 잃고싶지 않습니다. 교감선생님도 아마 그렇겠지요. 사람은 목숨이 하나뿐이니까.》    서일은 그의 얼굴표정을 넌짓이 살피면서 완곡한 투로 거절했다.    오사기 겐다로는 의병들이 이제는 학교 선생들의 목숨까지 노린다면서 두덜거렸다. 서일은 속으로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학교벽에 그런 표어가 나붙은건 그의 작간이였다. 고구려옛도읍지를 돌아보고와서부터 서일은 마음을 안정할수 없었다. 유사이래 함북도가 이같이 복잡하고 긴장해보기는 처음인지라 학생들도 마찬가지여서 공부같은건 뒷전으로 치게되였다. 서일은 이런 때 차라리 연해주(로씨아)까지 한번 피끗돌아보고 올 궁리를 했다. 하여 그는 박기호와 짜고서 이런 표어를 써붙임으로써 학교에서 무기한으로 방학을 하게되는 리유를 만들었던것이다.    학생이야 오건 안오건 아랑곳하지 않고 선생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 같이 학교에 나왔다. 학교에 나와야 얻어들을 소식이 있고 할말도 있었던것이다.     8월 29일자 皇城新聞이 도착했다. 그 신문에 소식한편이 실려서 선생들은 그걸보고 또 한번 옥신각신하게되였다. 내용인즉 전인홍, 김중환, 홍유철, 이순하가 선유사(宣諭使)로 되어 경기도, 경상북도, 강원도, 충청남북도 등 각 도에 파견되여 자기가 맡은 지방들을 돌아다니면서 그곳의 의병들을 보고 이제는 손에 든 무기를 놓고 집으로 돌아가라 선전했다는 것이였다.   《친일매국노들!》    누군가의 증오에 뒷이어서 너도 나도 입을 열었다.    《애국력량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려구 들었네.》    《이것 보라구. 일본이 나라의 독립을 빼앗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고 모두 흩어져 고향에 돌아가라구했다네.》    《더러운것들, 입에 침이나 바르지.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다녀! 저런 량심짝없는것들부터 잡아치워야하는건데. 의병들이 뭘하는가?》    《기만에 넘어가 자수하는 자도 있을거야.》    《있겠지. 헌데 자수한다고 놈들이 시름을 놓을가. 듣자니 사상동향과 그의 일거일동을 감시한다누만. 그러다가 수상하다고 여겨지면 어쩌는지 아오. 즉시 잡아다 취조를 한다오. 악형이지. 그래서는...》    이때 오사기 겐다로가 이와데 주다로는 교장실에서 일본인 아무개가 한국에 농사지으러 왔다가 봉변당한 일을 놓고 얘기하고 있었다.      일본은 전해(1907)의 말부터 각 지방에 농장을 설치하고는 사실상 토지를 비롯한 재산략탈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전라도에 이라는 것이 생겨나자 그곳의 의병들은 기삼연의 지휘밑에 이 농장을 습격하고 그 재산을 빼앗아냈다. 당시 皇城新聞은 이 일을 반영하면서 전라도 김제군 공동면 길가에 나붙은 격문도 보도식으로 알린바있다. 내용은 이러했다.             그 격문에 주목되는 것은 일본인들을 농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쫓아버려야한다는것인데 신문은 사건을 보도하면서 격문의 내용을 슬그머니 널리 선전했다. 애국적인 신문들은 이같이 의병들의 활동을 자주알려줬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은 올 1월 26일자 신문에도 경상도에서는 일본인들이 산간지대에 나가 콩을 걷어들이다가 의병들 손에 무리죽음을 당했노라 보도했다.         이역시 皇城新聞의 보도였다.    충청북도 청주군 조치원에 나타난 의병들은 누구를 물론하고 쌀을 정거장으로 날라가면 총살한다는 을 붙이였다. 그러나 조치원에서 쌀을 정거장으로 실어가는 자들이 나타났다. 이를 알게 된 의병들은 쌀장사군 7명을 붙들어 그 가운데서 6명을 총살하고 1명에게는 동리에 가서 쌀을 한되박이라도 일제침략자들에게 팔거나 정거장으로 실어나르면 죽인다는 것을 알리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 역시 그 신문이 보도한바가 있어서 서일은 지금 장사길에 나서서 돌아치는 죽마구우 최삼용이를 생각하고 걱정했다.    (제발 돈벌이에만 눈이 어두워 막짓을 하지 말아다구.)    전라도의 을 습격하였던 기삼연의병장은 올 1월경에 일본군에 체포되여 학살당했다. 하여 그가 지휘하였던 의병대의 활동은 저조하였다. 그러나 다른 의병대에 의하여 이 일대의 투쟁은 계속되고있었다. 한데 선유사들은 그같이 목숨을 내걸고 향토를 지켜 싸우는 의병들을 유인해서 투쟁의지를 마비시키고 의병진을 와해하려 든다. 대체 누구의 지시와 얼림에 든거냐?...과연 괘씸한 자들이니 용서없이 잡아죽여야할것들이다.    어느날 경성에서 성묵이가 문득 찾아왔다.   《여기서는 어쩔텐가? 의병대를 조직안할텐가?...속에서 불이 붙는구나. 이대로 그냥 눌러있진 못하겠다. 왜병이 아무리 기승부려도 해봐야잖아.》    이러면서  성묵은 그곳의 형편을 알려주었다.    그지간 경성에는 여러 지방에서 애국청년들이 모집사업에 적극 호응해 나섰길래 많이 집결되였다. 로씨아에서 담사리의병들과 같이 온 지식인 이남기는 이들을 주남면과 주북면일대의 민가에 분숙시키였다.    의병들은 학생으로 가장된 그들에게 체육을 가르친다면서 대렬짓기로부터 포복전진에 이르기까지의 훈련을 하면서 사격술을 배워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학교설비, 경영비를 거둔다고 하면서 수많은 군자금을 모았다. 담사리의병 장석회는 그렇게 장만된 1만 7,000원을 갖고 연해주에 건너가서 무기와 군수품을 비밀리에 사왔고 한편으로는 또한 경성각지에 널려있는 화승총을 걷어들이기도했다...    《정 참지 못하겠거든 이기남을 따라가라구, 말리지 않을테니까. 나는 아직도 우리의 임무는 계몽이라 생각하길래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그들을 동원해서 의병을 일으킬 생각은 없다. 지금은 무엇을 하는가구?... 요즘은 교학을 할 수 없는 정황이니만큼 나는 이 기회에 연해주에 한번 피끗 가보고 돌아올생각이다. 래일로 당장. 거기는 가서 뭘하냐구?... 연구를 안했나, 형세가 퍽 달라진거야. 적은 지금 수비대니 토벌대니 뭐니해서 각 처에 바둑같이 자리잡고 들어앉아서 진압을 꾀하는판인데 우리가 의병대를 조직해갖고는 그래 어디다 발을 붙이고 싸운단말인가? 발도 못붙이고 이리저리 쫓긴다면 결국은 멸망을 자초할뿐이야. 그래서 나는...》    《연해주에 가보면 해결이 되나?》    《당장 해결이 돼서가 아니지. 거기로 건너간 전기의병들은 어쩌고있는지? 타산이 무엇인지?... 만약시를 대비해서 미리 고찰하고오자는거다.》    말을 듣고 보니 서일은 의연히 감정에 들뜨지 않고 침착하거니와 원견성있게 타산하고있는지라 성묵은  다시 한번 감정을 눅잣히였다.    며칠후 이기남은 성묵이 자기와 같이 움직일 뜻이 아니니 짧은기간 훈련받은 젊은이들을 운동회를 한다면서 학교운동장에 모이게 한 다음 그들로 의병대를 편성하였다. 의병장은 이남기 자기가 되고 참모장은 지창회, 제1중대장은 장석회, 제2중대장은 최덕준이 되어 항쟁에 나섰다. 적의 감시를 깜쪽같이 넘겨버렸던 것이다.          함북도 경찰부장 세끼야 이사무라는 이 일을 썩 늦게야 알고서는 경무국장 마쯔이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리였다.                        서일은 오사기교감과 자기는 친부모보러 원산에 갔다오리라 하고는 이틑날  성묵이와 함께 경원을 떠났다. 청진까지 가서 성묵은 경성으로 가고 서일은 부두에 나가 울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로씨아국적을 가진 최봉준소유의 륜선에 올랐다.         전에 그는 로씨아로 자주드나드는 이달문과 계화로부터 거기 얜추(煙秋ㅡ노우기에프스크)에 한고향사람인 최재형(崔在亨)이란 분이 살고있다는 것을 여러번 들어 머리속에 기억하고 있다. 요근년에는 이달문도 계화도 소식이 끊겨 잘 알수는 없지만 그분은 의연히 동포사회를 위해 활약하고있을 것이라 생각되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범윤도 있는 것이다. 얼마전에 의병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경원군내에 있는 신아산(新阿山서)에 주둔한 일본수비대를 전멸시키고 돌아간건 참으로 뭇사람을 격동시킨 기쁜일이여서 잊을수 없다. 그 의병대를 조직하고 지휘한 사람이 이범윤과 최재형이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그에 앞서 5월초순에 2개소대쯤 되는 의병이 두만강을 건너와 경흥군 노서면에 있는 일본수비대를 야습했는데 때마침 경성주둔 헌병대장이 일본인 경시(警視)이하 수십명을 인솔하여 국경지대 순시중이라 의병의 돌연적인 공격을 받아 2명이 사살되고 수명이 중상을 입어서 소문이 들썽했다. 듣자니 그 의병대는 안중근이 인솔한것이라 한다. 서일은 그들을 하나하나 다 만나 보고싶었다.    청진항을 출발한 는 망망한 대해를 가르면서 전진했다.     이 배에 오른 선객 중 대부분이 보부상모양들이였다. 물론 탈주를 하느라 그같이 변장한 사람도 있겠지만 모두들 일인경찰의 수사를 묘하게 벗어났다. 한데 웬 일인지 진짜보부상들마저 입을 꾹 다물고 열지 않았다. 서로 곁눈질 하면서 경계하는 빛이였고 지어 어떤자는 다른 사람과 마주앉는 것 조차 꺼리는지 궁둥이를 앵돌려서 선실의 분위기가 랭랭하고 스산했다.    정부는 근일에 이라는것을 공포하여 국민들을 자국내에서마저도 없이는 제마음대로 나다니지 못하게 공제했다. 물론 이것은 일제가 반일의병을 봉쇠할 목적에서 저들의 괴뢰정부를 사촉하여 행해지는 검속이였다. 환경이 이러한즉 선객 서로가 꺼리고 경계하는건 자연스러운일이라 리해가 되는것이였다.    중절모를 쓴 지식인타입의 한 중년사나이가 아까부터 은근히 눈길을 자주 이쪽으로 보내군했다.     (저 사람은 누굴가? 왜서 나를 훔쳐보는걸가?...이 배에는 왜놈의 끄나블과 일진회의 개들도 있을것이다.)    벙어리도 아니면서 내처 입을 꾹 다물고있자니 속이 답답하던차라 서일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자기가 먼저 그의 신원을 밝혀볼 생각이 나기도했다. 그래서 배란간에 두팔을 올려놓은채 먼 바다를 응시하고 있던 그는 그가 가까이로 다가오는 기척이 나자 혼자소리로 한마디 탄식을 뽑았다.      《배는 가고 물은 출렁이고 속은 불글부글 끓는데 어쩌면 좋을고? 입이 있어도 벙어리 냉가슴앓아야 하니 이놈의 세상이 과연 야속하구나!》    《그럴거있소. 할말이 있거던 나하구하구려. 내가 들어주지.》    뜻밖에 저쪽에서 남이 하는 혼자소리를 잡아듣고는 말을 먼저걸어왔다. 그 행동이 시원스러웠다. 그는 대방이 안심하고 자기를 믿어도 된다는 뜻으로 크기가 손바닥만큼한 얍다란 증명을 꺼내보이기까지 했다. 서일이 받아서 펼쳐보니 기자증인데 사진과 함께 大同共報 編輯 兪鎭律이라 밝혔다.    《오, 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기자분!》    서일은 안심하면서 자기는  유지의숙을 졸업하고 지금 경원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는데 시국이 복잡한 때라 학생도 선생도 마음을 안착할수 없어서 차라리 이 기회에 려행길에 올랐노라했다.      유진율은 사람을 면바로봤다면서 껄걸 웃었다. 반일의병운동이 앙양기에 들어서고있는 지금 한국 지식인들의 동향을 알고자하는 그였다.    大同共報社는 울라디보스톡에 있다. 그 신문은 로씨아인 미하일꼬브 사장에다 한국인 차석보(車錫甫)사장을 두고, 유진율(兪鎭律)을 편집인, 윤필봉(尹弼鳳)을 주필로 하여 창간된것이다.    《그러니 로씨아에 동포신문 하나 더 불었군요. 하고 하고...듣자니 에서는 장지연선생을 주필로 모셔갔다더군요. 참 잘했습니다. 장지연ㅡ그분은 잠자는 민중을 깨우친 나팔수입니다.》    서일은 이국땅에서 동포신문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의 장거라고 할수 있다고 축하해주면서 국내에서 황성신문(皇城新聞)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독자대중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말했다.    《국내서는 그 두 신문이 동포계몽을 위해서 막대한 공훈을 세웠지요. 많은이들이 그 신문을 보고 각성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충청북도의 이아무개는 자기가 의병을 모집하게 된 것은 당시 정세의 위급성과 함께 신문에 실린 보도기사를 보고 결심한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농민들도 과 를 들여다보다가 민족의 의분을 참지 못해 의병에 나섰다고합니다. 와 이란 글 두편 다 에 실리였던겁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경상북도 청도군의 60세에 나는 최한용이란 분은 자기는 바로 그 글들을 읽고서 의병에 나섯노라했습니다. 어디 그이 한사람뿐입니까. 우리 경원군 이동호군수님도 그 신문들을 보고 각성하여 의병에 나가신겁니다.》    애국문화운동가들이 각지 의병들의 활동정형을 소개선전한 신문보도기사를 비롯한 글들은 그들의 의도여하를 불문하고 의병들을 모집하기 위하여 의병장이 힘써 발표하던 의 역할을 담당수행한 것으로 되는바 결과적으로 그들이 적극적으로 의병모집사업을 지지성원하고 거들어준 것으로 된다고 서일은 자기의 평까지 겯들어 말했다. 그랬더니 유진율은 초면의 젊은이가 신문을 알고있을뿐만아니라 남다른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갖고있는지라 서일이라 너는 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더 접근했다.    《그 다 옳은 말씀이구만! 신문의 작용을 놓고 이같이 통쾌하게 평을 해주는 소리를 내가 오늘 처음듣습니다. 속이 개운해지는군요.》    유진율은 이러면서 大同共報는 일본의 어떠한 방해가 있더라도 제 기능껏 재로동포들의 계몽과 민족의식과 항일열의를 고취해나아가리라했다.        두사람은 한국에서 선동력이 강한 大韓每日申報가 통감부의 작간으로 하여 지금 처해있는 위기에 대해서도 운운했다.    지난 5월 27일에 통감부는 또다시 영국인 사장 배설을 고소한 것이다. 통감부는 그 신문이 4월과 5월중순에 발표한 “須知分 砲殺의 詳報”와 “百梅特捏의 不足以壓ㅡ伊太利라” 그리고 “學界의 花”라는 등 세편의 기사와 논설이 일본의 한국보호제도를 전복하며 일본인배척을 선동했다고 트집잡으면서 교사선동(敎唆煽動)의 죄를 범했다는것이였다.    그리하여 배설은 또다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지나간 6월중순에 주한 영국 총령관에서 열린 재판결과는 배설에게 3주간 금고형(禁錮刑)과 당국의 소환에 응한다는 보증금으로 배설자신과 보증인이 각각 1천불씩 도합 2천불을 납부하라는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니 이또오 히로부미의 계획은 영국측의 협조를 받아 일단 성공한 셈이였다.     이 판결에 따라 배설은 상해로 호송되여 3주간의 금고생활을 한 후 7월 12일에 만기석방되여 서울로 돌아왔으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이전처럼 강경한 논조를 펼수 없게 되었다.    《통감은 악착하기를 그지없는 놈이지. 요즘 또 양기탁선생마저 해치려구 당치도 않는 를 꾸며갖구 무함하려들고있다오.》    유진율은 자기가 며칠전인, 바로 8월 31일에 서울재판소에서 열렸리였던 제1공판을 보고오는 길이라 했다.    《이또오통감은 과연 언론인탄압에 혈안이 되어 날뛰는군요. 일본의 원훈이니 세계의 위인이니 하느님같이 높이높이 떠받들기는 해도 제깟게 다 뭡니까. 거짓말만 하는 령감쟁이지요. 악행으로 빚은 죄 무엇으로 다 갚을가. 이또오 그자는 아무때든 천벌이 내려 좋은 끝장이 없을겁니다.》    서일은 마에마 교오사꾸가 영국인 배설이 꾸리는 大韓每日申報가 통감부의 두통거리라고 알려주던 일이 새삼스레 상기되여 이렇게 말했다.    울라디보스톡에서 하선(下船)한 서일은 윤진율기자가 이끄는대로 대공보사옥을 가보고 거기서 하루밤을 지낸 후 이튼날 그와 함께  연추(煙秋)로 향했다.    서일을 동무하고 길잡이를 해주느라 일부러 함께 떠난 유진율기자는 가면서 연해주를 비롯한 로씨아지역에서 살고있는 동포들의 상황을 소개했다.   《현유 재로동포가 대략 14만가량됩니다. 1884년 한로간에 한성조약이 체결되여 연해주진출이 합법화되면서부터 이주민이 쓸어들기 시작해서 로씨아정부는 한국인을 귀화인으로 취급했고 로씨아국적에도 편입하여 가족당 15데샤티의 토지를 분배하여 주었고 산업에도 종사하게 했던겁니다. 법적 지위상에서 로씨아인과 동등한 대우를 보장해준것이지요. 그러던 것이 지난해부터는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토지차입금지조치를 취하면서 이민정책에는 일대 변혁이 생긴겁니다.》    《변혁이라니? 축출합니까?》    《아니지. 축출이야 안하지만 한국인을 미개간지로 몰아 개간해놓으면 저들 로씨아인이 그걸 차지하는 정책을 쓰고 있다 그겁니다. 그래서 로씨아인의 이주민은 해마다 부쩍늘고있는 추세입니다.》    《제 땅에서는 살수가 없어서 이국으로 쫓겨 오고... 뼈빠지게 일해 개척해서는 빼앗기고... 왜 우리 민족은 이러고 살아야만 하는가?... 군주귀족이 권세로 평민의 권리를 유린하는 것이 처참하고 고통스럽다지만 강국이 무력으로 약소국가를 유린해 제 고향마저 잃게 하는 것 보다 더 고통스럽고 처참한 것이 어디있으랴! 아아...》    서일은 탄식을 뽑았다.                 유진율은 맞는 소리라면서 그것을 신문에 그대로 실어 정세에 암매하고 무지하고 무감각한 사람들을 교육하리라했다.   《무명소졸도 안되는 나같은 사람의 말 한마디를 가슴에 새겨넣고 음미할 자가 몇이나 될가요. 관두시오.》    말하면서 오다나니 그들은 어느덧 얜추가까이에 있는 마을에 이르렀다.   《보이지요. 세여보시오. 모두 다섯호. 하리(下里)라는 동포마을입니다.》    유진율기자는 알려주면서 들리여 다리쉼도 할 겸 마른목을 추겨가자고 했다. 그래서 걸음맥을 다시올려 걸음을 재우치고있는데 이때 그 다섯호마을쪽으로부터 갑작스레 신경을 긁어 내리는 처량한 괴성이 들려왔다.   《나는 아니오! 아니오! 사람살리오!...》    절망적인 그 웨침은 긴박한 위기속에 구원을 바라는것이였다.    《이거, 무슨 변고가 나는구만! 빨리가봅시다!》    서일은 앞장서 걸음을 날렸다.                     그들앞에 과연 위태로운 사건이 벌어지고있었다. 총가진 자 둘이 민둥머리의 청년을 가지만 무성했지 삭풍에 제멋대로 못나게 자라 모양다리없는 아름드리 백양나무아래에 끌어다놓고 막 총살하려고 서두는 판이였다.    《잠간만! 잠간만!》    《대, 대체 무슨짓이오?...》     서일도 유진율도 손을 홰홰 저어 우선 제지시켜놓으면서 다가갔다.      총을 휴대한 자들은 무르춤하고 눈길을 이쪽으로 돌렸다.      《이 자식은 일진회놈이야. 머리깎은 꼴만 보지.》    나이 지긋한 상투머리의 사나이가 들었던 총을 내려 말해놓고 보니 생면의 행인들이 간섭해나서는지라 언잖으니 아니꼽게 찔 갈겨보는것이였다.    《그리구 이걸 좀 보란말이요. 저자식의 몸에서 이런게 나왔어.》     나이가 젊어보이는 의병이 보따리를 헤치였다. 그가 거기서 꺼내는걸 보니 그건 서일이한테도 한권있는 도꾸도미의 저작 이였다.     버드나무가에 끌려간 청년은 넋이 나간지라 낯이 흙빛이 되어 내처 떨기만했다. 서일은 눈길을 돌려 총가진 자들을 번갈아 매섭게 쏘아보았다.     《헌데 당신들은 누군데 이럽니까? 저 사람을 어쩌자는겁니까?》     유진율이 낯색을 굳힌채 질문했다.    《우린 의병이야. 한데 임자는 대체 뭔데 남의 일에 갈개질인가?》     상투머리의 사나이가 다시 한번 눈을 사납게 흘기였다.    《저는 대동공보사 기자 유진율입니다. 당신들은 여기서 대체 무슨짓을 하고있느냐구 내가 물었습니다.》    《보다싶이 일진회놈을 처단하고있지요. 이자는 왜놈의 주구니까.》    모양없는 상투를 아직도 고집스레 꼭대기에 얹은 그자는 청년이 일진회원이 아니니 제발 죽이지 말라고 비두발괄을 했건만 당치않은 괴변이다, 일진회놈아니면 네가 머리를 쪽박으로 만들었냐하면서 기어히 죽이려했다.    알고보니 한심했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민머리를 했다해서, 일본글서적을 가지고 다닌다해서 왜놈의 압잡이로 판정하고 남의 생명을 함부로 앗아내다니?...    《여보시오, 이 책은 내한테도 한권있습니다. 도꾸도미가 쓴게 아닙니까. 나도 중머리를 했더면 죽음을 당하겠구먼? 남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다니 원! 누가 당신들께 그런 권리를 줬습니까? 무지한 악한이 되렵니까?...》    서일은 청년을 죽음에서 구원했다. 그는 원산학교 일어선생 김성(金星)이였다.
10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1. 댓글:  조회:4380  추천:0  2011-08-09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1.     이또오 히로부미의 탁상우에 1907년판 이 펼쳐있다. 그 책의 7~8페지에다는 1906년 1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한 이래 통감의 감독하에 서울, 인천, 마산, 목포, 군산, 진남포, 평양, 대구... 등에 건립한 20개소 거류민단조직의 상황을 상세히 밝혀놓았다. 1906년 3월에 한국에 들어온 일본인수가 6만 1,900여명이였는데 반년이 지난 9월에는 8만 700여명으로 늘어났다고 기록되였다.   《하세가와사령, 거류민단의 수자를 보오. 벌써 팔만이 넘는구만. 이네들이 안거락업을 하게끔 하자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까, 방법을 다해 보호하지 않구야 될까.》    이또오 히로부미가 하세가와 요시미찌를 향해 하는 말이였다.   《천만지당한 말씀입니다, 각하! 우리가 이 땅에 와서 왜 포고없는 전쟁에 피를 흘리겠습니까. 우리 사람이 이 땅에다 뿌리를 박자는거요, 일단 박은 뿌리는 흔들리지 않게 보호해야지요!》    하세가와사령은 명석한 두뇌로 통감의 뜻을 리해하고 있었다. 올해 나이 벌써 58세, 로일전쟁을 방금 치르고나서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조선주차군사령(朝鮮駐箚軍司令)으로 임명된 그는 이또오 히로부미를 따라서 그와 함께 이 땅에다 발을 들여놓은이래 여지껏 손을 잘 맞추느라 돌아치고 있었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십히 지난해의 8월이후 각지에 크고 작은 무리들이 작당하여서는 자칭 의병이라고들 하고있습니다, 이왕년에 비할바없이 대단히 많이. 그러다보니 장자를 달고있는 괴수만도 그 수가 많아졌는데... 올 상반년까지의 조사해본 정황을 보면 이러합니다.》    하세가와사령은 갖고온 제29호를 통감앞에 내놓았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것을 받아 펼쳤다.    의병장수가 일목료연하게 기록되여있었다.                           경기도 71명, 충청도 79명, 전라도 59명, 경상도 104명, 강원도 34명, 황해도  39명, 평안도 8명, 함경도 48명. 합계 442명.   (연해주, 간도지방에서 활동하는 자 6명 포함.)       하세가와사령은 도 갖고왔는데 거기에는 의병장의 “직업별구성통계”까지 있었다.    그가 말했다.   《통감각하께서도 의 보도를 보신 기억이 날겁니다. 광무10년(1906) 5월초의 일 말입니다. 그때 폭도 250여명이 경상북도의 진보군을 습격하잖았습니까, 그당시 신문이 폭도들의 무장장비상태에 대해 밝혀놓은것을 보면 80~90%가 칼이고 10~20%는 화승총이라했습니다. 헌데 지금와서는 아주 영 달라진 상황입니다.》    《아주 달라진 상황이라니? 어떻게 달라졌다는건가?》    《군대해산시 서울서 1,000여정, 원주서 1,600여정, 강화에서 600여정을 그자들이 가지고 간겁니다. 물론 그것만갖구서야 어림없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각 지방에 흩어져있는 총을 거둔겁니다. 조사해본바 군량도감과 소모관이 마을민들에게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선전하고 설복하여 널려있는 무기를 수집하는 한편 각 고을관청들에 있던 무기도 얼마있으면 얼마를 탈취해갓답니다. 그자들이 자체를 무장하는 다른 한 경로는 바로 우리의 군대를 돌연습격해서 인명을 해치고 휴대한 무기를 빼앗아갖고 달아나는 그겁니다. 물론 자체로 무기를 사서 보충하기도합니다만은 구입이란 참으로 어려운걸로 알고있습니다. 총 한자루값이 황소 한 마리값에 해당하니 그 비싼 무기를 살 돈이 어데있겠습니까. 허니까 이제는 우리 일본인과 친일자의 재산을 몰수해 그걸로써 벌충을 하는 판이랍니요.》    《이런 괘씸한! 무기단속을 했더니, 판매운반을 엄히 금했더니, 이제는 그 모양으로 해낸다는말이지!》    《불어치는 바람을 피하려고 방풍막이를 하는거야 인간의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총을 관속에 넣어 상여로 가장해 운반하지 않는가 총을 미역단속에 박아 넣어 운반하지 않는가...》    《뭐라! 허허허... 》     이또오 히로부미도 미처생각못한바라 맥빠진 웃음을 흘렸다.    《각하! 여기에 기록이 있습니다, . 》    하세가와사령은 기록본을 펼쳐뵈이면서 의병들은 무기를 자체로 수리하고 개조할뿐만아니라 지어는 만들기까지 한다고 덧붙이였다.    과연그랬다. 홍범도반일의병대는 화승총과 탄알을 자체로 만들어냈던것이다. 제작장소는 갑산군 능귀면 룡문리. 그들은 보습을 주조하듯이 총과 포의 형틀을 만들고 갑산에서 실어온 동과 철을 녹여 화승총과 탄알, 화승포를 주조하였다. 화승포에는 포신이 있고 포신후면에 화승을 달아 불을 달게끔 되여있었다.    포탄은 포안에 장입한 다음 발사할수 있게되였다. 그러나 그들 자체로 제작한 포는 부족점이 있었다. 구경이 너무 벌어진 탓에 포탄이 먼거리에 날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근거리의 적은 얼마든 쏘아눕힐 수 있어서 좋았다. 포에 사용하는 탄환은 보통의 화승총에 사용하는 탄환이였는데 그것을 많이 넣어 쏜다. 새총의 탄알같이 확산되기에 살상수가 많은 것이다. 실은 탄알제조가 그렇게 바쁜건아니였다. 쇠물을 높은데서 내려부을 때 물모래로 높은데서 흘리면서 치면 쇠물은 각개 덩어리로 응결되면서 동글동글한 탄알이 되였던것이다.    의병들에게는 무기다음 중요한 것이 식량과 군수전(군자금)이였다. 그들은 그것을 백성들에게서 걷기도 하고 적이 갖고있는것을 빼앗기도했으며  지주가 농민들에게서 소작료로 걷어가는것을 몰수하기도했다. 림진강류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허위는 여러차례 통고문을 내여서는 납세와 미곡반출의 정지를 명령하여 군대의 량식을 준비했던것이다.       어떤곳의 의병들은 의병대의 통고와 지시를 무시하고 리기에 눈이 어두워 량식을 갖고 모리간상행위를 하는 자들을 체포하여 총살하기까지 했다.    하세가와사령은 주차군사령부에서 입수한, 의병손에 의하여 씌여진 방문(榜文) 한 장을 내놓았다. 그것은 간상배들에게 쌀을 팔지 말라고 요구하는 내용이였던것이다.   《통감각하! 보아하니 올해역시 알곡징수는 매우 어려울것 같습니다. 폭도들은 식량과 군자금과 같은 것 까지도 직접 세민들에게 요구함이 없이 각 면의 동장들에게 통고하여 징수한답니다. 세민들은 물론 그자들을  성의껏 지원해주고있습니다. 례를 들것 같으면 강원도민들은 도내에 머물러있던 자들에게 식량을 공급하지 못해 감자종자까지 아끼지 않고 먹여서 올봄에 밭에 심을 감자종자가 거덜이 난 형편이랍니다. 어디 그 정도라구요, 원!... 그자들은 또한 군수전을 마련하자고 관청을 습격해 돈을 빼앗는 짓도 하고있습니다. 그러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어쩌는갈 보시오. 아예 와 류사한 를 발행하여 쓰고있답니다. 담도 크지!》             대전분서장 경부 와다가 이해의 6월 8일 경무국장 마쯔이에게 보낸 보고에는 한 반일의병대가 가지고있던 물품을 아래와 같이 라렬했다.            의병들은 물론 신식무기를 휴대하고 근대적인 물품으로 장비한 일본군과 무장과 군수물자를 대등하게 마련할 수는 없는것이였다. 무장장비로부터 기타 휴대품에 이르기까지 불비한 점이 어찌 한두가지였으랴. 그럼에도불구하고 의병들은 온갖어려움속에서도 기지용감히 싸우고있었다. 산간지대의 의병들은 산의 자연조건을 리용하여 유격전을 전개했다. 평지에서 싸우고있는 어떤 의병들은 낮에는 상복을 입고 상제로 혹은 엿장사로 가장하여 일본군의 동정을 탐지하다가 밤이면 공격을 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보통의 농민이나 도시주민으로 가장하고 적의 기관에 접근했다가 기회를 보아 불의에 습격하여 적을 처단하거나 기관을 파괴 혹은 소각했다. 이런일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 일을 올 2월 27일자 皇城新聞이 세상에 알린 바 있다.                조선주차사령부 의 기록은 이러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무슨 궁리를 하는지 량미간을 한참이나 끌어모으더니 를 끄당겨다 친히 한 장 한 장 뒤지였다. 그러다가 그의 눈길은 다른 하나의 기록에 이르러 멈추었다.                               《신돌석이라! 내가 전에도 듣던 이름같은데...》     이또오 히로부미는 의병장의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서 생각이 인츰 떠오르지를 않는모양이다.    《각하! 그자에 대해 별도로 기록해놓은게 있습니다. 제가 보여드릴까요... 오, 그렇지! 여게있군요. 》    《화적출신이라?》    《예, 그렇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조사의 확실성은 담보키 어려운지라 하세가와사령은 뒷끝을 흐리였다.     국권회복운동자를 정치범 또는 사상범으로 치부하기를 일부러 회피하면서 사무라이적 작태로 조선민족의 의행(義行)을 폄칭(貶稱)하는 것이 이제는 근성으로 자리잡아 의병에 대해서도 폭도니 강도니 하고 서슴없이 몰상식한 단어를 쓰고있는판이였다. 그러니 신돌석이 과연 화적출신인지 그 진실여부에 대해서는 사령관인 그도 딱히 알수가 없는것이였다.         신돌석은 미천한 가정에서 태여나기는했으나 화적출신이 아니다. 그는 경북 녕해군 남면 복평리(현, 영덕군 추산면 부곡동)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문은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의 후예로서 이조시대에 들어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배척을 받아 마침내 신돌석(申乭石)의 7대조에 녕해방면으로 락향한 뒤 신분적으로 천민으로까지 전락한 것이다. 그는 1879년 11월 3일에 태여났는데 본명은 태호(泰浩)지만 돌석으로 널리 알려졌다.     신돌석의 고향 녕해지방은 개항전 짙어가는 봉건사회의 위기감이 감돌던 1871년 농민 수백명이 일어나 맹렬한 저항으로 부사를 죽이고 관아(官衙)에 불을 지른, 이른바 이필제(李弼濟)의 난이 일어난 곳이였는바 봉건체재에 대한 농민들의 반항정신과 기질은 그 어느곳보다 강하였던것이다. 하길래 신돌석역시 그 지방 특유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것이다. 그는 15살을 먹어서부터 장사다운 름름한 체구와 활달한 기강으로 하여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는 말을 듣더니 19살에 이르러 과연 녕해(寧海)의병진의 중군장(中軍將)이 되었다. 그러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의 기화(奇禍)로 일어났던 전기의병이 점차 종식되여가자 신돌석역시 형세에 따라 의병진을 해산했던것이다.     청일전쟁이 끝나서 청도지방에는 전기가설을 하던 일인 5명을 죽이고 전주를 뽑아버린 사건이 발생했고 부산항에 잠입한 왜선(倭船) 1척을 뒤집어 엎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일본측은 사건조작자를 체포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종시 잡히지를 않은 그가 바로 신돌석이였다.     1906년 3월 13일 신돌석은 보국(報國)의 결심을 품고 그동안 규합한 장정 300여명으로 녕릉의병대를 조직하고 부친이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전 재산을 털어 군기와 군량을 장만하여 재기하였다. 그는 1907년부터 이강년, 이은찬, 이인영 등 의병장과 련계하면서 적과 싸워 련전련승하였다. 소문을 크게 내니 각지에서 모여온자가 무려 3000여명에 달했다. 그가 의병대를 이끌고 군세를 크게 떨치니 만인으로부터 추앙(推仰)과 기대는 매우 컸다.     하세가와사령이 말하는 화적출신이란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    《그자가 정녕 화적출신이라면 물욕과 탐명(貪名)이 극해서 야생말같이 자신을 견제못하구 만용(蠻勇)을 부릴수도 있을거니 우리 이렇게 해봄이 어떨가?...》     이또오 히로부미가 이마살을 구겨박으면서 고작 생각해낸 것이 한번 자기 통감의 명의로써 신돌석을 회유해보자는 것이였다.    《그 계책도 써봄이 좋을것 같습니다만, 각하! 일진회원이 의병장으로 된것만도 셋이라 조사됐는데요. 경기도 하나, 전라북도 하나, 전라남도 하나. 그런자들까지 총뿌리를 우리한테 돌려대는 판이니... 어찌 생각이나했겠습니까.》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마살을 찌프리며 머리를 설레설레 젓더니 입을 다시열어 집요한 투로 물었다.       《하세가와사령, 함북도쪽은 요즘 어떠한가?》     하세가와사령은 기록본에 적혀진대로 내리읽었다.    《7월 10일 오전 5시 폭도 약 200명이 함북도 두만강역의 신아산분견대를 습격, 그자들은 대단히 민활하고 사나운 동작으로 분견대를 포위하였다. 분견대 하사이하 9명은 분전 2시간만에 탄약이 떨어져 드디여 포위망의 한 모퉁이를 돌파하고 경흥수비대주재소로 패주하였다.》    《그리구는?...그저그리구는 끝난건가?》    《아까시 상등병이하 2명은 포위를 탈출하여 오후 1시 경흥에 돌아왔으나 가네지마 오장이하 전원은 현재 행방불명.》    《?!......》    이또오통감은 낯색을 굳히면서 하세가와사령을 아느새 눈박아보았다.    행방불명이란 패주하다가 의병손에 몰살당했다는 것을 의미할뿐이라 생각하는 판이다.    두만강을 건너온 의병들은 7월 10일이후 일본수비군과 수일간 치렬한 전투를 하면서 친일주구도 잡아 죽이고 경원군일대의 통신망도 파괴하였으며 회녕과 종성지방으로 통하는 도로도 차단했던 것이다.    《각하! 아군은 두만강연안에서 갑작스런 타격을 받고 갈팡질팡했습니다만 지금은 기본상 수습이 된 형편입니다. 그곳을 책임진 마루이소장은 사령부에 고 보고해왔습니다. 내가 폭도들을 진압못하고 수치를 보인 수비대의 패전장들은 싹 다 해임하고 유능자를 새로 임명했습니다.》    하세가와 요시미찌는 이 이상 더 말할 기분이 못되였다.    의병들은 진압되지 않았다. 의병들은 민활한 활동으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나와 또다시 공격을 들이댔던 것이다. 1908년 8월 4일, 그들은 경흥군 우암리를 습격하여 일본인이 만들어놓은 어장시설들을 모조리 파괴하였거니와 14명을 사살하고 두만강을 건너간 것이다.     하세가와 요시미찌는 통감의 부름을 받고 조선주차군의 의병진압상황보고를 하는것만큼 루락된 것이 있어서는 안되는지라 기분상하지만 전라도쪽 안계훈 담사리의병대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보고하려고 기록을 뒤지였다.    이때 헌병사령관 아까이시가 통감을 만나러왔다.    그를 맞아들인 사람은 통역관 마에마 교오사꾸였다.    의병항쟁이 발발해짐에 따라서 그에 대한 탄압도 점점 더 혹심해갔다. 그러다보니 체포되는 자가 자연히 이왕만 많아져서 헌병사령관 아까이시도 주차군사령만 몾지 않게 바삐돌아치는 몸이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들 두사람을 수시로 관저에 불러다놓고 보고를 받군했다.    오늘도 그가 아까이시를 통감부에 오라고한 것이다. 지금 헌병대감옥에 수감중인 반일의병의 거목 왕산(旺山) 허위(許蔿)를 교사(敎唆)하여 귀순시킬 일을 상론코자함이였다.     허위가 1907년 9월 경기도 연천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하 연기우, 김규식 등과 포천, 적성, 삭녕 등지를 종횡하면서 적을 크게 무찔러 한창 군세를 떨치고있는 때 이완용은 사람을 그한테 보내여 높은 관직을 줄테니  의병을 해산하고 돌아오라했다. 통감의 독촉에 못견디여 꾸민 유인술이였다. 허위는 그것이 전국의 의병진을 와해시키려는 적의 간계임을 제꺽 간파하고는 단호한 태도로 거절해버렸다. 그러자 이완용은 허위를 비적의 괴수라고 무함하면서 황제에게 체포령을 내려달라고 상주(上奏)를 했던것이다.    전해의 12월에 총대장 이인영이 공교롭게 부친상을 당하여 귀향하였기에 전국의 의병을 맡아 총지휘하게 되었던 허위장군은 짖꿎게 달려드는 불행을 모면키 어려웠다. 서울공격을 계획했으나 결국은 수비군사령부 오까사끼중장이 연대병력으로 응전함으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말았다. 허위는 감심(甘心)먹고 칠전팔기(七顚八起)의 기백으로 재기를 도모하던 중 불행하게도 올해(1908)의 5월 24일 연천군 반석동에서 철원에 주둔하고있는 일본 헌병대에게 체포되여 서울헌병대에 압송되였던 것이다.   《의병을 일으킨 자는 누구며 의병대장은 누구냐?》   《의병을 일으킨 자는 이또오 히로부미고 의병대장은 내다.》    수감첫날 아까이시 헌병사령관이 허위를 심문할 때 오간 말이다.   《아까이시 사령관, 수감된 자의 태도가 지금은 어떠하오? 좀 변화가 보이는가?》    이또오통감은 아까이시 헌병사령관이 나타나자 물었다.    아까이시는 그가 허위에 대해서 묻고있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왕산 허위말이지요, 그자는 기개가 대쪽같아 설득이 전혀 먹혀들지 않습니다. 저나 각하께서 짐작한것 이상으로 굳기가 반석같습니다. 그러면서 성품은 또한 호방하고 유모아적인걸 보면...》    첫심문때 허위가 내던진 말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왔다.   《건 무슨소리요, 호방하고 유모아적이라는게?...》    이또오 히로부미는 아까이시가 말을 하려다말고 자기를 별스레 보면서 뒷꼬리를 사르는지라 이상쩍어하면서 귀바퀴를 세웠다.     아까이시는 허위가 한 말을 공중이 알면 당연히 물의를 빚을것 같아 죽을때까지 자기 혼자만 알고 발설을 하지 않으려했건만 이또오 히로부미가 흥미를 가지면서 캐물으니 아마도 이제는 토로하는 수밖에 없겠다여겨 그는 목청을 가꾸어 말했다.    《첫심문때였습니다. 제가 의병을 일으킨 자는 누구며 의병대장은 누구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가...》    《그랬더니 뭐라구하던가?》    《그자가하는 말인즉 이러했습니다. 》    《뭐라? 허, 허허허!...그 녀석이 나를? 허허허!...》    이또오 히로부미는 듣고보니 어처구니없는지라 허연 턱수염을 들까불며 련신 너털웃움을 웃어댔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세가와사령과 마에마 교오사꾸도 웃었다. 어처구니없어서 웃는 것이 아니였다. 허위라는 의병장이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몰골은 보지 못했어도 그 대답이 허파를 경악케 할 지경 호기스러운 명언이였기 때문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자기를 도마우에 올려놓고 놀리면서 칼질하는 의병장이 괘씸하기는했지만 그 기품이 호매로와 악행으로 졸렬하게 욕보일수 없거니와 의병진에서 위망이 대단히 높은 그만 귀순시킨다면 지금 세상사람들로부터 침략자라고 지탄받고있는 일본이 감내해야 하는 난면을 어느정도 풀어나갈수 있을것 같아서 계속 무마책으로 유인해보리라 맘먹었다.    《잠자리와 식사일절을 우대하여 황은의 후더움과 관대함을 보여준다면 심기일전할 날이 있을거네. 그 누구나 목숨만은 아까와하는 근성이 있는거니까.》    《각하! 우리 국민은 성질이 편협한데다 자중할줄을 몰라 사소한 일에도 감정을 내고 목숨을 내걸지만 한국인은 다릅니다. 동물의 본성대로 제목숨을 대단히 아끼지요. 하지만 빼앗긴 국권을 찾자고 드니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맹수모양으로 사나와지는게 바로 그들인가봅니다.》    《죽음으로도 굴복은 시키지 못한다는 말이겠지.》    이또오 히로부미는 고개를 기웃하고 아까이시가 하는 말을 듣더니 이번에는 마에마 교오사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에마 통역관, 제자가 함북도에 있다구했지. 내 말은 전번날에 본 젊은이 말일세. 요즘 형세에 그도 의병에 휩쓸리지 않았겠나?》    《통감각하! 그는 경원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습니다.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칠려구 하지 총잡고 나가 위험스레 고생을 하자구는 안할겝니다.》    《마에마 통역관! 장담이 이른게 아닌가? 선생이 제자를 거느리고 의병에 가담한 실례가 한둘이 아닐세. 그 제자가 이름이 뭐라구했더라?》    《애명이 기학이고 지금은 서일이라구합니다, 각하!》    《출신은?》                《부모가 천민이오만 그의 조상은 고려공신인가봅니다. 담판으로 거란의 침공을 막아낸 서희장군의 36대손이랍니다. 통감각하, 헌데 그건 왜서요?...》    《소문을 내는 의병장의 밑그루를 뒤져보면 거개가 본전이 파뭍혀있어서 그러는거네. 명맥을 이어주는 뭐가 있다는 걸세.》    《통감각하! 저의 제자들은 며칠전에 려권을 해갖고 만주로 고적견학을 떠났습니다. 저는 그들이 의병활동에 휘말려들고십지를 않아서 일부러 회피한걸로 봅니다.》    마에마 교오사꾸는 만일의 경우에 생길수 있는 책임을 미연에 회피하려고 이같이 듣기좋게 별명했다. 서일은 일본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있기때문에 자습해서 남먼저 일본글을 알고있는것이다, 자기는 도꾸도미가 쓴 “황실중심주의”를 읽어보라고 근일 개정판으로 세상에 나온 까지 한권사서 그한테 주었노라했다.          그러나 이또오 히로부미는 서일이 과연 일본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있길래 일본글을 배운걸가하면서 서일 등이 려권을 해갖고 국경너머의 만주까지 고적견학을 떠났다는 그 사실이 신경을 더 긁는다고 하였다. 자기가 청년시절에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영국으로 류학을 떠나면서 애국심을 지니고자 둘이서 고적을 답사했던 일이 머리속에 다시금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세가와 사령과 아까이시 헌병사령관이 돌아가자 이또오 히로부미는 얼굴에 짙은 그늘을 지으면서 마에마 교오사꾸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스티븐스의 죽음에서 한국젊은이들의 용기를 알았다. 문약한 나라에서 태여났지만 그들은 참으로 무서운 존재인 것이다.》    마에마 교오사꾸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일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또오 히로부미의 말이 맞는것이다. 비록 문약한 나라에서 태여나기는했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은 용기가 있고 일본에 대해서는 사실 무서운 존재로 되고있었던것이다.    통감이 말하는 스티븐스는 무서운 한국청년의 손에 목숨을 잃은것이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후 2천만 한국민의 맹렬한 반항에 부딪친 통감 이또오 히로부미는 외국여론의 악화를 크게 걱정하여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스티븐스(D.W.Stevens)를 사가귀국(賜暇歸國)이란 명목으로 본국에 돌아가 미국여론에 일본정책의 공적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국제여론의 악화를 방지하려하였다.           스티븐스는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기자들과 회견을 가지고 일본의 한국통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던것이다.              22일자 샌프란시스코 각 신문에 이같은 담화가 보도되자 격분한 교포들은 대표 4명을 선발해 스티븐스가 든 페아몬트호텔로 보내여 항의케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뻔뻔스럽게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한국에 이완용같은 충신이 있고 이또오와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의 큰 행복이요 동양에 대행(大幸)이라. 내가 한국형편을 보니 대황제께서 실덕이 태심하고 완고당들이 백성의 재산을 강도질하고 백성이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은즉, 일본서 빼앗지 아니하면 벌써 아라사(로씨아)에 빼앗겼을터이다. 신문에 낸 것은 사실이니 다시 정오할 것 없다.》    이같은 폭언에 격분한 4명의 대표는 일시에 달려들어 앉았던 의자를 들어 스티븐스를 마구내리쳤다. 사건이 돌발하자 생명의 위험을 느낀 스티븐스는 일본외무대신과 이또오통감앞으로 유서를 써서 고이께총령사에게 맡기기까지했다. 허나 그에 대한 재미교포의 울분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23일 아침 스티븐스가 총령사와 같이 워싱턴행렬차를 타기 위해 오글랜드 페리에 도착했을 때 한국청년 전명운(田明雲)이 권총으로 저격했다. 그러나 불발로 저격에 실패하여 두사람이 격투를 벌릴 때 장인환(張仁煥)이 쏜 다른 한발이 날아와 스티븐스를 명중했던 것이다...     스티븐스의 죽음을 보고 크게 놀란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후 날아오는 탄알에 쫓기우는 악몽을 자주꾸어 시달림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신경이 잔뜩 예민해져서 그 누구를 해칠 마음은 없이 그저 옛스승을 찾아보려는 단순한 생각으로 통감부에 발을 들여놓았던 서일까지도 의심하게 된것이다.                     
9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0. 댓글:  조회:5286  추천:2  2011-08-08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0.     김호선생이 통감부의 통역관이라니, 그쯤이면 몰라도 그가 자기와 같은 배달민족이 아니고 일본사람이라니 이건 마른날 날벽락떨어지는 것 같아서 서일은 놀라도 이만저만 놀란게 아니다.    신채호는 기자신분으로 채방을 다니다보니 통감부요인과 접촉이 몇번 있은건데 그럴 때면 면회장소에서 통역을 서는 그를 보군했노라면서 저 사람은 통감부의 통역관 마에마 교오사꾸가 틀림 없습니다 내 말을 믿지를 못하겠으면 어디 한번 친히 가서 보고오시오 했다.    《가만!...》    서일은 책의 갈피에서 미처 보지도 않고 끼워넣은 종이장을 찾아내여 보았다. 거기에 씌여진 것이 분명 아래와 같았다.                統監府 秘書室 通譯官 前間恭作      《과연 옳구만! 마에마 교오사꾸!》     금강석같던 신임이 와르르 무너지는 파멸의 순간이였다. 상거(相距) 10여년만의 상봉이라 그지없이 반갑던 그 감정은 그만 눈물이 내배는 서운함으로 바뀌고말았다. 남한테 기편당했을 때만이 느끼게 되는 억울함과 분함이 걷잡을수 없이 가슴밑바닥으로부터 올리밀었다. 그리고 잇따라서 소외된 배신감역시 급속히 쇄도했다.    《하 이거, 아무럼 이럴수가!...김호선생이 일본인이였다니?...세상에 이런 바보도 있었나. 여직 그런줄도 모르고있었으니 내사 눈은 있어도 눈망울이 없는 청맹과니였지 뭐요. 왜인이 우리말을 그토록 잘할줄이야!...일호반점의 의심도 갖지 않았으니 변장이 과연 묘한게 아니요. 헌데 그가 왜서 나하고도 제가 일본사람인걸 그냥 속여왔을가?》    《여러가지로 원인이 있을수 있지만 요는 자기가 일본사람이라는걸 밝히는 날이면 제자들한테 배척을 받기 첩경이니 그랬을 수도 있고....》    《아마 그런 것 같구만.》    서일은 신채호의 해석에 동감하면서 여직 한번도 인상이 나빠본적이 없는 옛스승의 모습을 눈앞에 다시금 떠올렸다.   《젊고 팔팔했던 그는 금동리 어린 제자들을 지극히 사랑하면서 애국심을 갖도록 교육하고 이끌어주었던거요.》   《들어보니 불가사이한 일 같습니다.》   《인생이 연극이라더니 과연 꿈만같소. 오늘날까지 적으로만 인정해온 일본사람중에 그같이 착한 사람도 있었으니. 한데 지금은 반전해서 침략자의 아성이요 전국민이 저주를 하는 통감부에서 통역관으로 벼슬살이를 하고있다니 이게 그래 모순당착이 아니겠소. 그것도 아주 대단히...원, 어찌된 판인지 머리가 복잡한게 통 갈피를 잡을수 없다니까.》    《그렇구만요. 듣는바에 의하면 마에마 교오사꾸통역관은 정치에는 관여함이 없이 고서만을 연구한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면의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채호의 말이였다.          나이 중년에 이른 마에마 교오사꾸는 1868년 생으로서 쓰시마출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조선말을 읽혀 1891년에 유학생으로 조선에 왔다가 졸업하고는 쓰시마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공사의 통역관이 되어 그냥 눌러앉았다. 그러다가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립되니 통감부의 통역관으로 발탁된 것이다. 그는 고서(古書)연구가였다.    (나보고 뭐라했더냐. 다시보겠거든 자기를 찾아오라 하지 않았는가. 가보자. 가서 만나 속심의 말이나 좀 해보자.)    서일은 자기가 서울에 와갖고 아무보람도 없어 체증에 걸린것만같았다. 그를 다시보고 가야지 그저 이대로 돌아갔다가는 체증을 풀지 못해 한생을 앓을 것 같았다. 서점에서 나와 신채호와 갈라진 서일은 지체없이 통감부(統監府)쪽을 향해 걸음을 놓았다.    통감부는 경계가 자못 삼엄하였다. 수위(戍衛)는 서일을 선 듯 들여보니지 않고 문전에 세워놓은채 철붙이라도 지니지 않았냐 우선 몸부터 수색했다. 그저 그럴뿐이였다. 단엄하고 준수하게 생긴 이 조선젊은이가 손에 쥔 것이 일본서적이요 내보이는 것이 마에마 교오사꾸통역관의 친필이 그려진 종이장인지라 감히 허술히 보지 못하고 경건한 태도로 대했다.    안쪽과 내통이 되었는지 마에마 교오사꾸가 친히 나와서 서일을 맞아들이였다. 이리하여 서일은 난생처음 정부대신외 평민은 출입이 금지되고있었던  통감부(統監府)에 발을 들여놓게되였던 것이다.      《잘왔어. 계 앉아. 내 얼른 나갔다올테니...》    마에마 교오사꾸는 바삐보냈다. 서일을 쏘파에 낮혀놓고 물 한고뿌를 따라주며 마시라하고는 무슨 문건같은 것을 들고 나가더니 이윽하여 되돌아와서 이제는 할 일을 다했다며 함께 식사하러 가자했다. 이때는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저녁켠이였다.    복도를 지난 그들은 현관문밖을 나와 몇걸음 걷지 않아서 공교롭게도 두 백두옹(白頭翁)과 마주쳤다. 마에마 교오사꾸는 그들을 각하라 부르면서 허리굽혀 깎듯이 인사했다. 서일은 얼낌떨낌에 따라서 허리굽히려다말고 그만 그 자리에 돌같이 굳어지고말았다.    두 늙은이는 낯선 조선젊은이를 아래우로 훑어보고는 끊었던 얘기를 이어하면서 늘쩍늘쩍 건물쪽으로 계속 걸음을 놓았다.    《기학이! 기학이!》    마에마 교오사꾸는 팔을 툭 다쳐 어정쩡해서 무아경에 빠져있는 서일을 정신차리게 해서는 데리고 대문밖으로 나왔다.    統監府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본사람이 차린 판점이 있었다.    바깥과는 미닫이로 격리된 일본식의 다다미방이였는데 깨끗했다. 서일은 주인녀가 놓아주는 방석에 궁덩이를 붙이자말자 입을 열고 물었다.    《선생님, 방금 본 그 늙은이 가운데 어느분이 통갑입니까?》    《두분다 통감이지. 상면이 넓은 분이 소네부통감이고 그이보다 키가 좀 작은 분이 이또오통감이시오.》    《과연 그렇구만요!》    속으로 친 점이 면바로 들어맞는지라 내가 오늘 백발승냥이들을 코앞에 놓고 봤구나 하는 경탄성(驚歎聲)이 입밖으로 막 튀여나가려했다.     《선생님, 방금 그분들이 하시는 얘기를 피끗 듣자니 하더군요. 뭐가 아니되구 되군가요?》    서일은 궁금증이 들쑤셔 넌짓이 캐물었다.    《요즘 강원도의 어느 의병대가 통감부에 를 보내와 아마 그 일을 갖고서 두분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오! 그런 일이 다 있었습니까. 그 투서에 대체 뭐라구했길래요?... 선생님은 아마 그걸 보셨겠지요?》    《봤네, 봤어. 네가지 조항으루 돼있더군. 이러루한... 그게 어디 될번이나할까. 그래서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구 하는거네.》    마에마 교오사꾸는 전해에 맺은, 사실상 합병이나 다름없는 韓日新協約(정미7조약)은 이또오 희로부미의 사실(私室)에서 맺았다는것과 영국인 배설(裵說)의 大韓每日申報가 統監府의 두통거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내부일이 발설될가봐 우려를 했던지 마에마 교오사꾸는 필요이상의 말은 더 하지 않았다. 서일역시 눈치없이 이것저것  캐묻지 않았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태자사(太子師)라 하여 황태자를 류학시킨다며 일본에 데려가면서 소네 아라스께에게 통감대리직을 맡기고는 각 부의 고문을 모조리 해임하였거니와 각 부의 협판(協辦)을 차관이라 개칭했던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한국으로 급히 다시건너왔다. 이제는 한국에 남아있는 수비대를 일본육군사령부가 관할할 문제와 장차 어떻게 하면 한국사람을 효과적으로 다룰수 있겠는가에 대해서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이또오야말로 일심량역으로 한몸을 쪼개써야 할 형편이니 이 세상에서 가장 분망히 보내는 정객일겁니다. 선생님, 제 말이 맞지요?》     마에마 교오사꾸는 얼굴에 미소만 지을 뿐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화제를 꺼냈다.    《오코노미야키하고 다코야시를 못먹어봤겠지. 일본요리치고는 손꼽는건데 내가 오늘 기학이한테 그 맛을 보이지, 어때?》    《감사합니다. 제자는 선생님이 청하시는대로 먹겠습니다.》     두 사람은 마주보며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그닥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딘가 어색하고 조심스러우면서 구속스러운데가 있었으니 사생지간에 감정이 이전만 버성겨졌음이 뻔했다.          두사람 다가 아무튼 버성기는 감정부터 무마해야할것이라고 생각이 돌았다.     먼저 간단한 주안상부터 들어왔다. 마에마 교오사꾸는 오뎅이 일본식 술안주인데 빠질 리가 있겠느냐며 서일보고 어서 맛보라했다. 그것은 무와 유부(油腐)를 꼬챙이에 꿰어 끓는 장국에 넣어 익힌것이였다.       서일은 술잔에 술을 따라 스승께 곱게 올리고나서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금동리에 오시니 해들일것이 없어서 들놀이를 나가 저희들은 참새를 잡아 안주해드리던 일 생각나십니까?》    《생각나고말고. 내가 그걸 어찌잊겠나. 평생 제일 아름다운 회억으로 남을건데.》    《헌데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일본인인줄은 몰랐습니다. 정말몰랐습니다. 선생님은 왜 여적 저희들을 그토록 속여왔습니까?》    《미안하네. 난 조선에 왔으니 조선사람이 돼여 살아보자고 그랬지.》    《그게 되겠습니까? 그렇게야 될수 없지요. 보시오. 선생님은 일본인이니까 종당에는 통감부의 벼슬아치가 된게 아닙니까.》   《벼슬아치라는게 뭐여. 그것도 벼슬이라하나. 난 그저 일개 번역관에 불과한거네. 먹고 살아야 하니 그 일을 하게된것 뿐 행정일이나 정치에는 흥취가 없어서 개입을 하지 않아. 내가 하고싶은건 오로지 고서연구일세.》    마에마 교오사꾸는 이러면서 자기는 조선땅에다 발을 들여놓은 이래 고서(古書)를 꾸준히 수집해왔는데 그 가운데는 송시열의 저작으로 손꼽는 , 이나 박세채의, 이나 이세필의 , 같은 책도 있다고 했다. 이들은 다가 조선왕조시대의 학자, 상신, 문신이였다.    《듣자니 이라는 책이 있다는데 그걸 내가 얻을 방법이 없구만.》    《그 책은 최해가 편찬한게 아닙니까. 선생님은 고려후반기의 문학도 연구하시렵니까?》    《우선 보려고 하네. 그 책을 봤는가?》    《예. 그 책에는 시와 산문들이 무척 많이 수록됐지요.》     서일의 말에 마에마 교오사꾸는 귀맛이 부쩍 당기는모양이다.     김재현(1261~1330)이 1320년에 당시까지 창작되여 전하는 시와 산문들을 모아서 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여러 시대, 여러 작가, 시인들의 시와 산문을 묶은 가장 오랜것의 하나였다. 이 작품선집에 근거하여 1338년에는 최해가 또 하나의 큰 규모의 종합작품선집인 을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은 고려시기까지의 문학연구에서 귀중한 자료적가치를 가지고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에마 교오사꾸는 이 책을 구하자고 애를 무척쓰는모양이다.     서일한테 이 한권 있었다. 그는 그것을 그저 쉽사리 내놓고싶지는 않았다. 조건적인 어떤 교환이 있어야할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마에마 교오사꾸는 과연 고서(古書)만을 연구했을가? 자기는 행정일과 정치에 대해서는 흥취가 없길래 그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표명하는데 통감부에 그리 오래있으면서 정말 개입하지 않았단말인가? 어쩐지 믿고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일은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선생님, 선생님은 때도 통역관으로 계셨지요? 그런데도 그 일에 선생님이 그래 전혀 관여하지 않으셨단말입니까? 어쩐지...》    을사조약(乙巳條約)말이 나오니 마에마 교오사꾸는 낯색이 대뜸 흐려났다. 그는 제자가 부어 놓는 술 한잔을 들어 단모금에 굽내고나서 고개를 아래로 툭 꺾더니 침통한 기색으로 반성하는것이였다.    《내가 2천만 한국인앞에 죄를 졌네, 평생의 오욕이 될 짓을 했네. 이건 참....》     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침묵했다. 마치 일본의 조선침략에 자책감을 느끼는 것 같아보였다.    《그 죄야 이또오통감이 진것이죠.》    서일은 일본을 대표하고있는 이또오 히로부미가 지은 죄를 마음착한 자기 스승에게까지 덮어씨우고싶지는 않아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죄를 아무렴 일개 통역관이 지랴싶었던거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을 모르는 무지에서 생겨난 신임이고 존경이였다. 본의는 아니였다지만 마에마 교오사꾸 그도 역시 조선인민앞에 머리숙여 사죄하지 않으면 아니될 죄를 지은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여러 대신들을 핍박하여 을사조약안(乙巳條約案)을 강제적으로 가결짓는 한편 그때도 일본공사관 통역이였던 마에마 교오사꾸와 외무보좌원 소우노에게 병졸을 거느리고 외부(外部)에 가서 외부인장(外部印章)을 빼앗던지 도둑질해오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그들은 명령대로하였다. 바로 그가 도둑질해 온 도장을 조약에 날인(捺印)해버렷던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이 일로해서 무거운 자책감을 느끼고있는 마에마 교오사꾸는 감히 그일까지는 발설할 수는 없었던것이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지라 서일은 얼굴에 웃음을 피워 화제를 돌렸다.    《선생님, 듣자니 일본에도 화엄종이 있다는데 사실입니까?》    《있지. 있고말고. 나라시에 있는 도오다이사가 바로 화엄종의 대본사일세. 그건 왜 물는가?》    《화엄종은 신라때 의상대사가 화엄경을 소의로하여 세운 종지로 알고있는데 그것이 누구에 의하여 어느때 그리로 넘어갔는가요?》    《건 나도 잘 모르겠구만. 일본에는 진언종이 따로있소. 일명 밀교라고도 하는데 9세기초엽에 구우까이라는 고승이 당나라에 건너가 불법을 배워 개조가 되었지. 글씨와 시문에 능하다고 전하고있소.》    《그것이 어떤 불교입니까?》    《내가 알기는 그것이 세가지 경에 의하여 태장과 금강의 두부를 세워 다라니의 힘으로 즉신성불시킴을 본지로 하는 것이오.》    《알았습니다. 듣자니 일본에 조선주자학의 영향도 끼쳤다는데 어쩌하여 그리된건가요?》    《기학이는 고바야까와 다까가게라는 이름을 들어본적이 있는가?》    《고바야까와 다까가게라?...임진왜란때 이 서울로 침범해왔던 일본 무장아닙니까, 금산의총을 세웠다는.》    《옳아 맞아. 바로 그지. 그가 책을 갖고 돌아가 펼쳐놓았지.》    서일은 그일까지는 상세히 모르지만 임진왜란의 주역들인 도요도미 히도요시나 고니시 유끼나까를 비롯한 침략자명단에 그도 그리 짝지지 않게 한자리 있다는 것은 기억하고있었다.    그는 임진왜란때 왜군의 6진으로 모오리 히데모또 등과 1만 5천의 병력으로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서울에 입성했고 전라도지방을 담당하였다가 금산(錦山)에서 조선의병의 저항을 받아 그 의기에 감동하여 금산칠백의총(錦山七百義塚)을 세웠으며 정유재란에도 내침하였다가 철수할 때 많은 서적을 일본에 반출하여 조선주자학의 영향을 끼치게한 것이다.         마에마 교오사꾸는 그를 그리 나쁘게 보지 않는 것 같았다.    (일본의 무장은 침략과 략탈의 력사를 내놓고 자랑거리가 무엇이 더 있느냐말이다. 흥!)    서일은 속으로 콧방구를 뀌면서 제 민족의 걸인(傑人) 몇을 그한테 자랑했다. 먼저 3천년전 중국 양자강북쪽 강소성근방에 서(徐)나라를 세웠던 서언왕(徐偃王)은 조선사람이였다는 것, 그리고 금나라의 시조(始祖) 함보(函普)는 고려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고려공신인 이천서씨(利川徐氏) 서희(徐熙)를 아느냐, 자기는 바로 그의 36대손이라 슬쩍 자랑을 내비치기도했다. 마에마 교오사꾸는 그것이 과연 정말이냐고 물었다. 서일은 아니면 내가 거짓말을 하겠느냐면서 1천여년전(거란 成宗統和11年) 거란의 도통(都統) 소손녕(蕭遜寧)이 80만대군으로 고려를 진공하면서 고구려의 옛땅을 자기들의 땅이라면서 엉터리없는 강박으로 고려를 멸하여 저들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할 때 고려의 무신이며 외교가였던 서희(徐熙)가 담판석에 나서서 론리정연한 열변으로 력사에 무지한 적장을 물리치고 유리한 조약을 맺음으로써 국토를 잃지 않은 사실을 알려주었다.     마에마 교오사꾸는 대견해하면서 서일을 다시보았다.             《선생님께서 을 사지 못했는데 제것을 먼저 보십시오.》     서일은 마에마 교오사꾸가 서점에 책이 다 팔리고 더 없어서 빈손에 돌아온 것을 상기하고 자기는 훗날 아무때건 봐도 된다면서 책을 그의 앞에 내놓았다. 그러니 마에마 교오사꾸가 책을 가져다 첫 공백지에 싸인을 하고나서 되돌려주면서 책값까지 덧붙여 놓는것이였다.    《아니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서일은 웬 열문인지 몰라 눈이 둥그래졌다.    《돈을 받아 넣게. 그러면 책을 사지 않은걸로 되지 않는가. 그리구 이 책은 차라리 내가 증송하는걸로 합세. 기념으로 줄만한것도 없는데.》    《저는 선생님께서 먼저보시라고 내놓은겁니다.》    《내야 얼마든지 살수있어. 그리구 저...》     가히 흥정해볼 기회라는 생각이 피뜩떠올라 서일은 대방의 속심을 건너짚으면서 제 안속을 먼저 털어놓았다.    《선생님, 솔직히 말씀드려 제한테 한권이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서생님께 드리지요. 그러나 그저드릴수는 없습니다.》    《오! 그 책을 나한테 주되 뭐하고 교환하겠다 그건가?》    《예. 한가지 일을 힘써주시오. 만주에 있는 고구려 옛도읍지를 견학하렵니다. 려권을 내게끔 조력해주십시오. 그러시면...》    《려권이라...음!》    시국이 복잡해 단속이 엄하지만 자기가 힘쓰면 될듯싶어서 마에마 교오사꾸는 정녕 그렇다면 어디 연구해보자면서 제의를 선선히 받아주었다.    서일은 신채호가 어디로 채방을 나갔는지 알수 없어서 다시만나보지 못해 섭섭하다는 쪽지만 한 장 남겨놓고 이틑날 서울을 떠났다.    한데 함흥에 들리니 안해도 거기에 없어서 함께 돌아갈수 없었다. 희연이는 전날 벌써 큰할머니와 함께 아들을 포대기에 싸안고 배편으로 함흥을 떠나 경원으로 간것이다. 본래 서울로 올라갈 때 함흥에 들려 함께 환가기일(還家期日)을 정해놓고갔어야 할것인데 그러지 않고 길이 바쁘다는것만 생각하고 곧추 상경하다보니 이같이 된 것이다.    서일이 여러날만에 집에 와 보니 산모나 갓난애나 다 별 탈이 없이 무사히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그래서 한시름놓이는데 학교로 나가니 오사기 겐다로교감이 아니 해산한 안해데릴러 함흥에 간다며 청가를 한 사람이 함흥에는 가지 않고 그지간 어데가있었길래 집사람이 학교로 찾아오느냐고 캐면서 까다롭게굴었다. 이에 서일은 정작 문을 나서고 보니 소시적에 머리를 틔워준 계몽스승을 먼저만나보고푼 생각이 돌연히 나서 함흥은 올적에 들리기로 작정하고 서울까지 갔다오는 길이라고했다.    오사기 겐다로교감은 그의 자변이 듣기좋아도 같아 의심만 잔뜩 생기는지 눈을 내리깔며 왼고개를 탈더니 계몽스승을 보러갔다면 그래 그 사람의 이름은 뭔가고 물는것이였다.     《이름이 뭔가구요? 마에마 교오사꾸입니다. 들어본적이 있겠지요?》    《마에마 교오사꾸라...못들어봤어. 서울서 뭘하는데?》    서일은 이걸보면 알게될거라며 을 내놓았다.    책거울을 번지던 오사기 겐다로는 금시 경직이 온 모양으로 눈이 퉁사발이 되여 꼼짝하지 않았다. 이라 쓴 글줄이 눈뿌리를 빡 긁어놓았기 때문이다.    《믿을수 없으면 조사해보시지, 그러는게 아마 교감의 직책일텐데.》    《아니! 아니! 헤헤헤... 그분이 서교장의 스승일줄은! 헤헤헤... 》    오사기 겐다로의 태도는 불식간에 180°로 급전하고말았다. 얄팍한 낯바닥에 웃음을 게바르면서 허리를 깝신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자기로서도 갑작스레 그짓을 하자니 어색했던지 낯이 벌개지면서 난색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극력 대방의 감정을 발라맞추려했다.    (멀쩡한 사람이 병신스레 노네. 일본사람의 례절은 본래 이런건가?)    아무튼 마에마 교오사꾸가 싸인을 해준 그 책이 호신부같아서 좋았다.     좀 지나서 박기호가 교장실로 와서 서일은 그와 기분좋게 물었다.    《내 아들의 이름을 지었나?》    《지었어. 윤제라고. 진실로 윤(允), 가지런할 제(齊). 어때 맘에 드나?》    《맘에 들어! 맘에 들어!》     두 친구는 자식을 낳으면 애의 이름을 서로 지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박기호의 두 아들 경호(京鎬), 경만(京萬)이는 서일이 이름을 지어준거다.    한학(漢學)을 전공하면서 병법(兵法), 교리(敎理)와 력사(歷史)에 흥취를 갖고 연구해 온 서일이였다. 하길래 그는 경원에 돌아오자마자 력사연구에 크게 도움이 될 고적답사를 하고자 출국준비를 서두르기시작했다. 사군데서 의병항젱이 발발히 일어나고있는 때에 견학을 떠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동으로 되겠지만 남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을 해보리라 한번 맘을 먹고 보니 그것을 돌릴수 없는 그라 함일사범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현천묵에게 전보를 쳐 최익항을 데리고 급히오라했다. 그래서 박기호까지 넷이 한자리에 모이였는데 서일은 그들에게 자기가 상경하였다가 거기서 꿈밖에 옛스승을 만나본 일을 말하고는 급히 모이게 된 리유를 알려주었다.    《만주로 건너가 고구려옛도음지를 보고오겠거든 나와 함께 같이가자. 마에마선생이 조력하리라 대답했으니 려권은 해결될 듯 싶다.》    《그렇다면야 좀좋아서 안가랴!》    현천묵이 이러자 박기호와 최익항역시 기뻐하며 나섰다.    마에마 교오사꾸에게 편지로 려권을 청구했더니 꿈같이 쉽게 수속이 되어 내려왔다. 출국리유에 이라 밝혀져 있었다. 한데 학생은 어쩌고 떠날가 하던차 마침 7월 6일 도문강을 건너온 의병 200여명이 10일에 신아산 분견대를 습격했다. 함북도는 민심이 황황해졌고 두 일본교원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서일은 기회가 좋다고 앞당겨 방학을 선포했다.     1907년 12월현재 일제침략군 수비대주둔지역수가 전국적으로 179개소였다면 1908년 7월이달에 이르러서는 333개소로서 2배로 늘어났다. 그만큼 반일의병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거니와 수비도 훨씬 강화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의병의 국내진입과 이네들의 출국을 막지는 못했다.    고구려옛도읍지는 만주 길림성 집안(輯安)이다. 당시는 이곳을 국내성(國內城)이라 불렀다. 바로 만포진건너편인데 압록강연안에 있는 평지들가운데서 가장 넓은곳이였다. 북쪽으로는 장백산줄기의 한갈래인 로야령산줄기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뻗었다. 높은 산이 많이 솟아있고 골짜기들이 가로세로 패여졌으며 지형이 매우 험준해서 마치 저쪽 너머에서 쳐들어 오는 적을 막아주는 긴 성과도 같았다. 이 높은 산줄기가 북풍을 막아주어 집안은 아늑하고 양지바르며 땅이 비옥했다.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요 경제적으로도 매우 유리한 곳이였다.    高句麗에 대하여 중국의 “辭海”는 아래와 같이 밝히였다.      (1) 古國名. 卽高句麗. 作高夷, 作高句驪, 或省作句麗; 作槀離. 在今遼寧新賓東境, 建國年代無考, 后爲衛氏朝鮮所幷. (2)古縣名. 漢武帝滅衛氏朝鮮后以古高句驪國故地置, 治所在今遼寧新賓東北. 昭帝后爲玄菟郡治所. 平帝時地入高句驪國. 東漢又置縣于今沈陽市東, 仍爲玄菟郡治. 十六國后燕時又爲高句驪國所取       사서에 고구려족은 예맥(濊貊)의 한갈래로서 기원전 37년에 시조 주무왕이 혼강류역의 졸본(卒本)에 가서 첫도읍을 세우고 고구려나라를 세웠다고 기재되여있다. 고구려국은 요람기에 한, 부여, 선비 등 주위에 있는 적대국의 군사적위협을 늘 받았다. 하여 기원3년에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건데 안전한 곳에서 국력을 키워 장차 강성한 고구려를 만들기위함이였다.    일행 4명은 국내성을 보고나서 위나암성을 가보았다. 집안에서 서북쪽으로 약 4㎞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산의 릉선우에 쌓아 만든 성벽은 군데 군데 허물어졌는데 높이가 대략 7~8m, 둘레의 총 길이는 20리나 된다고 한다. 성내에는 여러 건물터와 큰 못, 장대와 망대를 비롯한 시설흔적이 있었다. 그들은 성벽안에서 제일높은 망원대돌각담에 올랐다. 멀리 앞을 내다보니 옛성터ㅡ집안이 한눈에 안겨들었다. 가슴속에서 감회가 사무쳤다.                       신통한 전략은 천문을 꿰뚫었고                      기묘한 전술은 지리를 통달했네                      싸움에서 이겨 공로가 이미 높거니                      만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하리                 을지문덕장군이 수나라침략자에 대한 총공격을 앞두고 적장 우중문에 지어보낸 시다. 얼마나 자신만만한 도전이였던가! 그들은 높이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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