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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21.
의사들이 검사해본 결과 용정병원(龍井病院)에서는 서일의 상(傷)을 치료할수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볼따구지의 살점은 그런대로 붙어서 잃지 않겠지만 눈은 살려낼 가망이 없었다. 칼날에 베인 왼쪽 안구(眼球)가 곪기시작한 것이다. 의사가 외려 환자보다 더 속을 끓이고 미안해 하면서 용정병원은 아직 의술도 낮으려니와 설비조차 안되여있으니 어서 길림이나 아니면 장춘, 할빈쪽으로 큰병원을 찾아 가보라고 권고했다.
마땅히 그래야 옳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현천묵과 박기호는 제 남편을 간호하러 온 채희연이와 더불어 환자를 데리고 병원을 곧 나가자고 서둘렀다. 한데 이때 누런 여우털모자를 쓴 사나이가 급히 들어왔고 그 뒤를 개털모자를 쓴 사나이 다섯이 묻어 들어왔다.
그들을 보자 이쪽은 그만 다 제 자리에 굳어지고말았다. 한 것은 개털모자를 쓴 그들이 바로 전날 길을 막고 행패부리던 자들이였기 때문이다.
서일의 얼굴에 험한 상을 입힌 장본인인 키가 꺼두룩한 녀석의 손에는 전날 빼앗아 간 책꾸러미까지 들려있었다.
다가 푸주간에 끌려들어 오는 짐승의 상인데
《천묵이!...나요, 나! 안무란 말이요! 안무!》
앞서들어 온 사나이가 여우털모자를 벗으며 웨치였다.
《아니 안무가 어떻게 돼서 여기는!?...》
현천묵도 웨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둘은 서로 부등켜 안기까지 하면서 일희일경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러다가 현천묵이 먼저 진정하고 아니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되어 왔느냐,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재우쳐 물었다.
《나말니요, 지금은... 》
안무는 말을 하려다말고 몸을 돌려 방금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서일의 쪽으로 성큼 다가가 허리를 크게 굽혔다.
《서선생님! 이 안무동생은 형님께 사죄하러 왔습니다.》
우선 허두를 이렇게 떼여놓고는 몸을 돌려 개털모자를 쓴 자들에세 불호령을 했다.
《이 우직한 놈들아, 멍청히 서있기는? 냉큼 빌지 못할가?》
넷은 우루루 쓸어와서 서일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사람을 잘못보고 그만 미런하게 맹용을 부려 일을 쳤다면서 어떠한 처벌이든 내려달라 찍소리 없이 받겠으니했다. 키가 꺼두룩한 자는 눈물을 짜내며 죽여달라고까지 했다.
《안무라, 자넨 대체 누군데?》
서일은 비두발괄하는 자들의 꼴을 내려다보다말고 고개를 들어 한쪽 성한 눈으로 안무를 다시금 찬찬히 여겨봤다. 전혀 면목이 없는 초면의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며 부산을 떠니 의아쩍어 떨떠름해났다.
안무(安武)는 1883년 6월 29일 함북도 경성(境城)에서 태여났는데 본명은 병호(秉鎬)다. 그는 16살에 벌써 진위대교련관이 되어 활약하다가 1907년에 군대가 해산되니 고향에 돌아와 함일사범학교에서 체조교사가 되였다. 한학교에서 사업하다보니 이미 여러해 교편을 잡아 온 현천묵이와는 가깝게 된거고 그한테 들어서 서일의 이름을 벌써 알고있었던것이다.
세해전인 1908년도 3월달에 대한협회가 경성에 지회를 내오자 안무는 그 지회의 핵심인물이 되였다. 그는 연해주에서부터 노랑포수반일의병대의 성원들을 따라 경성에 와서 함일사범에 뿌리밖은 지식인 이남기와 손잡고 학교의 학생들을 모집하여 체육을 가르친다는 명의로 그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킨 후 아예 그냥 데리고 의병에 나왔던 것이다. 바로 현천묵이 서일과 박기호을 찾아와서 우리는 어떻게 할건가고 청문(聽聞)할 그때였다. 안무도 서일이나 현천묵이 처럼 아무때건 구국항쟁에 나서리라 결심을 품어 온 포부가 큰 사람이였다.
한데 안무는 학생들을 데리고 이기남을 따라 의병이 되였지만 사실대로 말해서 몇번 크게 싸워보지는 못한 것이다. 그는 자기가 두만강을 건너 온 후에는 줄곧 최진동의 수하에서 그의 일을 봐주고있다면서 구역을 지키는 저 머슴들이 책꾸러미를 가져왔길래 헤쳐보니 생각밖에 책가위마다에 서일의 이름이 씌여있는지라 현천묵이 늘 죽마구우라며 자랑하던 그가 동만으로 건너왔음을 알았다고했다. 그는 무지한 저것들이 눈은 있건만 눈망울이 없는지 사람볼줄을 몰라 마구 행패질을 했고 일까지 쳤으니 참괴(慙愧)스럽다면서 이 모든게 다가 자기가 교육이 모자란 탓이라 반성했다.
《나리 이 못난 것이 죽을 죄를 졌수다, 죽을 죄를.》
키가 꺼두룩한 자는 눈물 코물짜가며 빌고 또 빌었다.
안무는 그를 가리키면서 저 녀석은 최진동이한테 뺨까지 얻어 맞았으니 이제 돌아가면 큰 벌이 내릴거라했다.
《벌이 내린다고 버리게 된 내 눈이 나을가. 싹 거두라 하오.》
《징계없이는 규률이 서지를 않겠습니다. 헌데 저...서선생님, 제 좀 물어봐도 될까요? <吉田松陰>이란 책에 마에마 교오사꾸라는 이름이 있는데 누군가요? 책을 그분이 서선생께 드렸더구만. 통감부통역관이지요?》
안무가 짙은 의문을 갖고 캐묻는 말이였다.
《옳소. 통감부통역관 마에마 교오사꾸. 그는 우리의 스승이요.》
《아니 뭐랍니까?... 그 일본사람이 스승이라구요!?》
안무는 놀라 무르춤하는데 모두들 웃기만한다.
《날 놀리지야않겠지?》
그가 반신반의하자 박기호가 정색하여 알려주었다.
《그렇소. 그는 우리가 소시적에 금동에 와서 한동안 글을 배원준적이 있소. 그러니 스승이 아닌가. 그때는 이름이 김호였소.》
《믿기 어렵겠지만 그건 사실이요.》
서일은 이렇게 말해놓고 안무에게 그 내력을 간단히 다시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자기가 여차여차해서 서울에 가서 서점에 들렸고 거기서 신채호를 만나 이야기를 하던 중 책을 사게 되였는데 그것이 기연(奇緣)이 되어 꿈밖에 옛스승을 만나게 된것과 그를 다시만나러 통감부에 갔더니 거기서 또한 이또오 히로부미는 물론 부통감 소네 아라스께까지 우연스레 보게되였노라고 사실그대로 솔직하게 토로했다.
《무어라? 하하하!...》
안무는 이거야말로 귀맛을 돋구는 기화(奇話)라면서 손벽을 탁 쳤다.
서일은 길림(吉林)에 가 눈을 치료하기로 했다.
이동춘은 관동호마(關東胡馬) 3필이 끄는 마차를 삮내여 서일을 빨리 길림까지 실어가도록했다. 한편 안무는 자기가 데려온 머슴 다섯에게는 담가를 주어 따라가도록 하면서 차가 길이 나빠서 들출 때는 꼭 그 담가에다 상자(傷者)를 담아 메고 조심해 가도록하라 시키고는 박기호와 같이 봉오동 하촌으로 돌아갔다. 박기호는 봉오동 하촌에 가서 사촌형을 만나보고는 왕청에 가 지금 온 가족이 그곳에 자리잡았다는 계화를 찾아 이주문제를 상론하기 위함이였다.
길림병원에 이르자마자 서일은 왼쪽 눈 안구(眼球)를 빼버렸다.
유리안구를 해넣어야 했다.
서일이 병원에 입원해서부터 병문안을 오는 사람이 련줄이었다.
제일먼저 달려온 사람은 담사리의병 장기덕이였다. 그는 어디로 가던 걸음에 용정에 들렸다가 거기서 이동춘으로부터 소식을 듣고는 곧장온건데 제 친구까지 하나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나이가 중년줄을 넘긴 비슷한 그 또래였다. 그는 자신을 <동학당의병>이라면서 성명은 장사학이라 소개했다. 성격이 걸걸한 사람이였다.
《난 지난해 오월달에 그만 꼬리를 빼고 말았수다. 건데 이치는 통감죽어 닫새만에 건너왔다잖수. 비겁스레두. 그러니께 나보다두 반년이나 먼저 꽁무니를 뺀거지우. 그러구보면 내사 반년이나 무던히 더 배긴거지. 안그래, 담사리 상놈의병?...난 와갖구는 들개모양으루 이리 저리 싸댕겼지우. 그리하다 어쩌다나니 이치를 만난거지유. 다리부러진 노루 한굴에 뫼인다구 뫼니께 이렇게 만나게 된게지우. 안그래, 담사리 상놈의병?...》
《야 이거 말끝마다 상놈, 상놈이다. 상놈이 웠쨌다구서. 그놈의 빌어먹다 오그라질 상놈의 소리 어느 때 가면 끊겠는지 이제는 악비가 난다. 이봐, 동학당 찌그렁 쪽박! 점잖은 분 앞에서는 말 좀 점잖게 하라구. 그럴 때는 류류상종이라는 말루서 허믄 듣기두 좋구 어른스러워. 알아들었는가, 동학당 찌그렁 쪽박!》
장기덕이 주름투성이 만면에 웃음을 가득 피우며 충고하는척 넌지시 되놀려 앙갚음을 했다.
무두들 하하 웃었다.
서일도 장기덕을 마주보며 웃었다. 그가 이또오 히로부미가 죽으니 술집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나와 십년묵은 체증이 뚝 떨어지는 것 같다면서 광기를 부리듯 웃어대던 것이 어제일같았다.
《어른분께서 만주로 건너오기 전에는 어떤 싸움들을 했습니까?》
현천묵이 반년이나 무던히 배겨냈다는 <동학당의병>을 향해 물었다.
《싸움이 다 뭐요. 철길에서 작난질이나 한거지우.》
장기덕이 질러 말하니 장사학은 머리를 내흔들며 남의 공을 쥐뿔같이 여겨서는 안된다며 그때의 일을 자랑했다.
지난해(1910)의 3월 3일이였다. 이진용, 한정만이 지휘한 90여명의 의병들은 계정역과 잠성역(현재 금천)사이의 철길우에 돌을 쌓고 그 철길을 파괴하여 서울에서 신의주로 가던 기차를 탈선시켜 기관차를 전복시켰던 것이다. 그 일을 “大韓每日申報”가 3월 5일자 신문에 알린적이 있어서 서일은 지금도 기억난다. 그때 교감 오사기 겐다로가 그 사건을 야만스러운 파괴행위라 해서 서일은 그렇다면 의병을 붙잡아서 각을 찢어 죽이는건 야마도(大和)민족의 문명인가고 당장에서 그를 까주었던 것이다. 의병이 일어나는것도 파괴가 생기는것도 자기들의 침략으로 인한것임을 일관적으로 부인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솔직하다는 일본인의 본성으로 고착되여갔다.
서일은 근년에 일본학자 하가야이찌가 쓴 <<국민성10론>>을 읽어본 기억이 난다. 그의 문장에는 이러한 대목이 있다.
<<일본민족은 무(武)를 숭상하지만 싸우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용감히 왜적을 막아낼 뿐이지 남의 나라를 침략할줄은 모른다. 무사의 칼은 호신자위 (護身自衛)에 쓰이는것이지 절대 남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유사이래 조정에서 중국대륙이나 조선반도에 이주케한것도 너그러움에서 출발한 타당한 안치요 그것은 안거락업을 하게끔 하기 위함이였다. 섬나라에서 살다보니 내란이라는 것이 적은 편이고 력사나 신화에 봐도 도살하거나 략탈을 하거나 남을 제 노예로 만드는것과 같은 잔혹한 일은 아주적다... 무사는 <무사본성>을 강구(講究)하길래 부녀자와 약자들을 존중해주고 지어 는 원쑤라도 죽음에 처하면 구해주고 상까지 치료해준다... 일본사람은 마음이 측은하다는건 제집의 짐승을 잡는 습관이 없는것만봐도 알수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어보고는 누군들 일본 사람은 인정이 철철 넘치는 민족이라 말하지 않으랴!
1867년 후꾸오까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고전(古典)읽기를 좋아했던 하가야이찌(芳賀一矢)는 18살에 도오꾜오대학(東京大學) 예과생으로 되었다가 이어서 본과연구생이 되었고 졸업후에는 고등학교와 고등사범학교의 교수(敎授)를 담임했다. 그러다가 33살때 독일에 건나가 2년간 류학했고 돌아와서는 도꾜대학(東京大學)에서 문과교수를 맡고 맨먼저 고전문헌학(古典文獻學)을 비롯한 고대문학사(古代文學史) 등 학술령역의 연구를 개척한 사람이다. 그러한 지식인이 연구없이는 이런 글을 써 세상에 낼리없다지만 그건 눈가리고 “아옹”하는 격이요 철없는 어린애나 얼릴 기만이였다. 싸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남의 나라를 침략할줄을 모른다면 도요도미히데요시가 임진년에 조선에 쳐 들어와 일으킨 란을 무엇이라 해석할건가? 인간본성이 악성을 갖고 태여난건 아니겠지만 서일은 이세상 제일허심하지 못하 약아빠진것이 일본사람이라 보았다. 그들은 청일전쟁과 로일전쟁을 유발했고 조선을 완전강점하고나서 이제는 만몽, 나아가서는 중국본토까지 삼켜버리려는 야망을 품고있는 것이 실태인 것이다. 일본의 정치는 제 민족을 파시스로 만들어가고있었다.
서일이 일본에 대해 증오감을 품고있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장기덕과 장사덕 두 사람은 서일보고 자기들이 왜놈과 계속 싸울수 있게끔 그 어떠한 무장단체같은것을 조직할 생각은 없는가, 그런것이 생기면 자기들은 얼싸좋다 춤추며 가담하리라며 학교를 세워 글을 배워주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만주로 건너와 흩어진 의병들을 한데모으는 일도 중요하다고 했다. 들어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라 서일은 이모저모로 생각을 굴리였다.
그들이 돌아가자 이틑날 왼쪽눈에 유리안구를 해넣었다.
서일은 머릿속에 로씨아의 연해주에 갓다가 원산학교일어교원 김성이 유인석의 의병들 손에 잡혀 혼쭐갈기는 꼴을 목격하던 일이 새삼스레 상기되여 피식웃었다. 자기도 그꼴이 아니였는가. 왼쪽눈 하나만 상했으니 다행인가싶었다. 그는 오른쪽 성한 눈 하나로 되돌려받은 일어문서적을 펼쳐 다시보았다.
<<황실은 야마도민족의 몸체고 야마도민족은 그의 곁가지다. 일본은 이 가족을 넓혀놓은 것이다. 천황은 일본국민의 원수(元首)일뿐만 아니라 야마도민족의 가장(家長)이기도하다. 지나성인(支那聖 人)의 군(君) 즉 부(父)의 사상이 우리 나라에서는 보편적인 사실로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실중심주의는 연역추리를 해낸 논리(論理)인 것이아니라 사실을 규납해서 이루어진 논리(論理)인 것이다.>>
이것은 1908년에 개정판으로 출판된 <<吉田松陰>>책에서 이 책을 쓴 저자인 도꾸도미가 “황실중심주의”에 대하여 해석한 구절이다. 일본인들의 사상은 무엇이 구심체를 이루고있는가? 그것을 서일은 전에는 그저 아리숭하게 느꼈을 뿐인데 이제야 좀 더 명철히 알게 되였다. 한 민족이 뭉치자면 응집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응집력은 구심체(球心體)에 의하여서만이 생길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데 조선은 대체 어떠했던가? 임금도 있어봤고 황제도 있어봤다. 하지만 그들은 통치자로서 백성의 머리우에 군림했지 진정 제 민족을 하나같이 묶어 세우는 능력을 가진 자격자로는 되어본적이 없었다. 조선민족은 응집력을 갖지 못했다. 전 민족이 그것을 키울수 있는 민족적인 구심체가 없는것에 원인이 있는게 아닌가?
“국민성10론”의 작자도 이에 언급한 바 있다.
<<아마데라스오오미까미(天照大神)는 황실의 선조로서 일본땅과 아마데라오오미까미는 모두가 이장낙존(伊獎諾尊)의 자손인바 국토와 황실은 갈라놓을수 없다... 국토는 천손(天孫)이 다스려야하고 다스리는자는 천손의 혈통이여야 한다.>>
이성계(李成桂)가 천손(天孫)이였던가? 그는 이씨조선을 세우고 500여년간이나 멋없이 가계(家系)를 잇게했을뿐이다.
서일은 일본리론가들이 천손(天孫)을 만들어 내는 그 창발성에 대해서는 한번다시 감복했다.
“우리는 왜서 남의 침탈의 대상으로 되는건가? 여지껏 통일된 사상이 없어서 응집력을 잃었으니 치명적이였지!”
그는 그것이 다시금 절실히 느겨져 혼자소리로 부르짖었다.
유리안구를 해넣은지 여드레만에 이동춘이 길림으로 왔다. 그가 혼자온 것이 아니였다. 조성환을 데리고 함께 온 것이다.
서일이 그들을 기쁘게 맞이한건 더 말할 것 없다.
《내가 때마추 용정엘 갔지. 안그랬더면야... 동춘형님 집을 막 나가려던 참이였소. 그래서 내가 어디루 출장하시느냐구 물었지. 길림으루 환자보러 간다구하더란말이요. 그래 내가 또 물었지. 졸지 에 환자는 웬 환자냐구말이요. 이 동춘형님이 바로 그게 바로 경원서 갖건너온 서선생이라 하더란말이요. 그래서 보다싶히 이렇게 오게된건데.... 원 어쩜...눈섶에 붙어 다닌 액인가보지. 어쩌면 이렇게... 귀축같은 왜놈의 총끝을 피해 무사히 건너와 갖고 제 동포한테 당하다니 원, 쯔쯔!》
조성환이 기가 차다면서 하는 말이였다.
《조선생이 당장 최진동을 찾아가겠다는걸 내가 말렸소. 간들 어떡허겠소, 시킨것도 아닐텐데 안그래? 하여간 지금 치안이 말이 아니야. 이 점 내가 아무때건 따끔히 일러줘야겠어.》
이동춘이 이러기에 서일은 그보고 안무가 이미 사과를 다 한것이고 일을 친 머슴들도 빌고는 담가를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갔으니 그 일은 다시 언급하지 말아달라했다. 그리고나서 서일은 그가 자기 하나뿐아닌 여러 식솔까지 극진히 보살펴주고있음에 감개무량해서 복배(伏拜)를 하려했다.
이동춘은 복배는 무슨 복배요, 서선생이 어서 상처가 완쾌되여 조국광복에 헌신하면 그것으로 복배를 받은셈치지 하면서 치료비일절 자기가 댈테니 마음놓고 치료나 잘 받으라했다. 과연 고마운 분이였다.
서일은 조성환에게 자기와 현천묵은 이홍래가 갖다주는 신채호의 비밀편지를 받고 만주로 건너온것이라 알려주었다. 조성환은 알고있다면서 그것은 조직의 결정이였는데 어떤 사람은 지시를 받고도 정신차리지 않고 어물거리다 그만 체포됐다면서 걱정했다. 그도 체포되지 않은 회원들을 급히 피신시키느라 불철주야(不撤晝夜) 심줄이 늘어나도록 뛰여다녔던 것이다.
《조선생께서 요지간 어디가 계셨습니까?》
서일이 물어봤다.
《나 북경갔다오는 길이요.》
조성환은 이러면서 북경(北京)에다 집을 잡아 식솔들이 생활을 하게끔 조처를 하고는 자기는 지금 나돌아다니며 흩어진 동지들을 찾는 중이라 했다. 그는 안창호, 이갑, 이동휘, 이종호 등 신민회의 중견들이 혹은 중국 혹은 로씨아로 건너갔노라면서 자기는 이제 중국의 혁명가들을 찾아 한국과 중국이 공동전선을 이룩해볼 생각이라했다. 조성환은 먼저 진기미(陳其美)를 만날 생각인데 그가 상해에 있지 않고 외출중이라기에 여기로 왔다는것이였다.
1876년도생이니 이해에 35살박에 되지 않는 젊은이 진기미는 생기발랄하며 애국열이 드높은 중국의 혁명가로 알려지고있었다. 그는 일찍이 전당, 방적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었다. 그러다 1906년에 일본에 건너가 경감학교에서 동맹회(同盟會)에 참가했고 두해지나 1908년도에 상해로 돌아와 절강 등 지대를 돌아다니면서 당원들과 련락을 취하고 청방(靑幇)에 들어 두목이 된 것이다. 그는 새정권을 수립하고 새국가를 세울 뜻을 품고있었다.
서일, 이동춘, 조성환 그들 세 사람은 당전의 중국형세를 놓고 론했다. 중국은 지금 전국적규모를 띤 통일적인 첫 중국자산계급형명당인 동맹회(同盟會)가 맹활약을 하고 있었던것이다.
<<달로를 몰아내며 중화를 회복하며 민국을
건립하며 토지소유권을 고르게 하자.>>
달로란 민족통치자를 가리킴이요 조선의 달로는 일본침략자라고 비유적인 해석을 하고보니 그들의 정치강령은 비단 중국의 혁명가만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지망하여 해외로 망명한 이 세명의 조선애국지사의 피도 다시금 끓어오르게 했다.
그들은 한일합방이 돼서부터 일제의 탄압이 점점 더 심해가는 상황에서 여지껏 국내에서만 활동하고있던 많은 우국지사들이 부득불 국외로 망명하게 된데 대해서와 앞으로 해나가야 할 독립운동의 방략에 대해 각자 자기의 생각을 내놓고 운운했다.
1906년에 벌써 이동녕, 양기탁, 김 구, 전기덕, 이회영, 조성환 등이 신민회를 본부 겸 비밀련락장소로 하여 다각적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여 온 것이다.
그해 여름, 그들은 구국방침을 논의한 바, 만주에다 토대를 두기로 결론을 짓고 이상설이 만주책임을 맡아 곧 북간도(北間島)로 향하여 용정에 정착하고는 서전서숙(瑞典書塾)을 세웠으며 국내의 모든 책임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이 지키였던 것이다.
조성환은 지난해 말, 유하현삼원보 추가가(柳河縣三源堡 鄒家街)에 정착한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은 대공을 세웠다고 찬양했다.
삼한고가(三韓古家) 명문의 후예로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이유승(李裕承)의 아들 이회영은 지난해에 독립기지를 물색코자 이동녕, 장유순, 이관식 등과 같이 백지상(白紙商)으로 변장하고 험악한 만주산야를 고행한 끝에 그곳이 마음에 들어 독립기지로 정해놓은 후 귀국하여서 저의 6형제를 한자리에 모이게 하고는 력설했던 것이다.
《우리는 교목세신(喬木世臣)의 후예로서 국가가 망한 이상 오늘 당연히 구국방책을 세우고 헌신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만주로 가서 독립기지를 설정하고 인재를 양성하면서 동지를 결속시키면 반듯이 광복될 기회가 올것이다.》
이에 형제들은 흔연히 찬성하였다.
그들 40여 권속(眷屬)은 가산을 처분하고나서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이른것이다.
이회영은 가족들을 위로했다.
《이러한 고초로서 망국대부(亡國大夫)의 가족으로 국가와 민족에게 속죄하는 것이며 명일의 자주민이 되는 훈련이다.》
조성환은 육신과 가산을 독립운동에 다 바치는 이회영의 가문이야말로 구국의 화신이 아니냐 하면서 이 대가족이 와서 정착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내외의 망명지사가 모여들어 추가가(鄒家街)는 갑자기 조선사람의 부락이 되어간다고 했다.
《거 과연 기쁜소식입니다. 그래야지요. 동포가 많이 들어와 자리잡아야지요. 신민회가 애초에 만주를 독립기지로 삼고 여기서 독립운동을 펼쳐나갈 구상을 한 것은 과연 현명한 결책이라 여겨집니다. 정말입니다.》
서일이 소견을 말하니 이동춘은 그렇지 그렇구말구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동포이민이 많이 쓸어드는 것 같으니 토민들이 의혹을 품는다는구만. 큰문제같잖아 김동삼이도 갔으니 리씨형제들과 방도를 댈거야.》
조성환이 하는 말이였다.
서일은 을사5적을 암살하려던 거사가 실패하여 재판받게 될 라철을 구하고자 이회영을 만나러 서울에 올라갔다가 이회영은 만나지 못하고 그의 아우 이시영을 만나봤던 일을 상기했다. 존경할만한 이들 형제야말로 진정우리 동포가 만주에 정착하게끔 길을 열어놓은 개척자요 선구자가 아닌가!
《서선생은 이제 출원하면 무엇을 할 타산인가?》
조성환이 문득 매묻는지라 서일은 자기 안속을 내놓았다.
《우선 학교를 세워 학생을 모집해서 글부터 가르치렵니다. 계화분이 왕청에다 자리잡았는데 우리도 그리로 갈가합니다. 거기도 유하의 삼원보모양으로 이제 동포이주민이 많이 모여들 것 같습니다. 그리구 그 다음의 보취는...》
《서선생이 시간을 헛보내지 않았구만! 다음 보취까지 세웠단말이요?》
이동춘이 웃었다.
《예. 구국교육과 종교만으로는 아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제와의 대결속에서는 오직 독립전쟁만이 그자들을 구축할 수 있는것입니다.》
《거 과연 옳은소리구려! 그래서?...》
《장차 무장대오를 건립할가 합니다. 대교가 중광해서 지금 대중속에 널리 펴지고있는데 저는 이 교의 명의를 빌어 우선 민중구국항일단체를 하나 세워볼까합니다. 이름은 <중광단>이라 달고. 그래서 될까요?》
《안될게 뭐요. 그러면야 좋지! <중광단>이라 거 듣기도 좋은걸!》
조성환이 찬동하자 이동춘도 그렇게 하라면서 지지했다.
《한데 저는 아직 대종교인이 아닙니다.》
《거야 입교를 하면 될게 아닌가. 문제될게 뭐요. 계획대로 해봐.》
조성환의 이 말은 서일에게 용기를 한층 북돋우어주었다.
두사람 다 돌아갔다. 이동춘은 용정으로 가고 조성환은 북경으로 갔다.
《에그! 이를 어째요, 조선생이 책을 두고가셨네!》
채희연이가 얍다란 포케트용 수첩을 손에 들고 안달을 뗏다.
서일이 달라해서 펼쳐 보니 대종교에 관한 글외에 다른건 없었다.
“한배검 신앙의 유래”라 해놓고 써놓은 발췌문 한단락을 읽어봤다.
원래 우리 배달민족은 지역으로 아세아의 동쪽
에서 백두령산의 광명한 정기를 타고 난 문자 그
대로 밝은 나라의 민족이니만큼 원시시대에는 밝
은 태양을 숭배하여 왔고 신도의 교문이 열린 뒤
부터 천신송앙의 사상이 깊이 뿌리박혀왔던것이다.
《조선생도 신을 믿는모양이네. 건 믿어서 뭘하나요?》
희연이는 리해안된다면서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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