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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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서일 일대기ㅡ제2부 15.
2011년 08월 19일 15시 09분  조회:5178  추천:1  작성자: 김송죽
  15.

   서일이 돌아가자 경원학교는 곧 개학을 선포했다. 그러나 첫날은 교학을 하지 않고 의병에 나가 목숨잃은 3명 학생의 유상(遺像)을 놓고 추도식을 거행했다. 사생 모두가 숙연히 머리숙여 희생자의 생전을 기리면서 영혼의 안식을 빌었다.

   오사기 겐다로가 학교에서 추도식을 여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했다.  

 

   《왜서 맞지 않습니까? 우리 학교의 학생인데, 제자가 비명에 죽었는데 그래 추도마저 하지 말란말입니까? 우리 한국 사람은 그래 감정마저 메말라 살라는 말입니까?》

   서일이 따지고들었다.

   오사기 겐다로의 입으로는 이를 막아내는 재간이 없었다. 교장이 이러고 나왔거니와 사생모두가 일본인 교감의 말은 개방구만도 못여겼던것이다.

   서일이 연해주에서 돌아오자마자 열게 된 이 추도식에 희생자가정과 친척은 물론 경원읍내 주민들이 많이 참석해서 학교운동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오사기 겐다로는 놀래여 상급에다 다음과 같은 보고를 써올리였다.

 

   <<경원학교에서는 의병에 나간 학생 3명이 죽었다 하여 사생모두가 공공연히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교학마저 전페하였는바 이를 주도한 사람은 물론 본교의 교장인 서일이다. 그는 교감인 내가 비준하지 않았음에도 그같이 한것이다. 주민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보아하니 온 고을이 몽땅 반일의병과 관계되고 우리의 적인것 같다.>>         

    이같이 하면 서일을 다스릴수 있으리라 생각한 그였다. 허나 그것은 오산이였다. 이때에 경원학교에 들어온 두 일본인 오사기교감과 이와데 주다로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하나의 불쾌한 소식이 온 함북도에 쫙 퍼지고 있었던것이다. 라남수비대에서는 의병대와 싸워 패전한 끝에 추도식을 요란하게 했다는것이다.  

    이에 앞서 일본은 중국 당국자들에게 만일 중국이 간도지방에서 조선사람 의병들의 활동을 묵인하여 그들이 조선안에 들어와 활동하게 한다면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수 없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면서 또한 로씨아 원동지방에 거주하는 조선사람들이 의병항쟁을 벌리는 것을 엄격히 탄압금지하여달라고 도꼬주재 짜리로씨아공사와 교섭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외에다 근거를 잡고있는 의병들의 항쟁은 멎지 않고 계속되였다.

    8월에 연해주의 의병들이 수차 두만강연안의 일본수비대를 습격한 뒤를 이어서 9월 3일에는 경성반일의병 200여명이 명천수비대를 습격하고 그곳을 하루동안 장악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라남의 수비대를 비롯하여 수많은 병력이 경성지방에 짐중하게 되었다.

    이에 경성지방의 의병들은 겁을 집어먹고 피하기는 새려 도리여 토벌에 나서는 적을 타격할 결심을 품고 적의 동태를 탐지해냈으며 그로부터 승산이 있게 작전계획을 면밀히 짰다. 한주일이 지난 9월 10일날이다. 의병들은 화룡리 범의덕골 고개의 산턱에 매복해있다가 줄지어 무질서하게 오는 토벌대를 발견하고 일제히 사격하여 그들에게 무리죽음을 주었다. 의병들의 돌연적인 습격을 받은 수비대는 련대장이하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어 녹아나고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추도식을 요란하게 한 것이다.

  《오사기교감, 라남수비대는 왜서 추도식을 그렇게도 요란스레했답니까? 나는 일본에는 죽은 사람을 추도하는 법이 없는줄로 알았지.》

   서일이 빈정대는지라 오사기 겐다로는 열이 올랐다.

  《아니 서교장! 선생은 황국신민을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요?》

  《어떻게 보겠습니까. 남을 괴롭혀 그렇지, 진선미(眞善美)의 일본인이지요.》

  《진선미라!》    

  《안그렇습니까? <나라에 공헌하는것이 바로 세계에 공헌하는것이거늘 민족의 특색을 발양함은 인류의 진화를 기르는 것으로 되니 애국과 박애는 갈라놓을수 없는 것이다> 그 문장을 쓴 작자의 주장이 이러했지요. 그는 말했습니다. <아세아 여러 나라들이 련이어 망하고있지만 유독 대해가 둘러있는 일본만은 끄떡없으니 이것이 그래 천의가 아니겠는가.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특장을 발휘해 백인들께 뒤지는 점을 미봉하면서 나한테 있는 그대로의 착하고 아름다움을 갖고 사람마다 행복한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공헌해야 한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착하고 아름다움을 갖고>라는 것이. 한데 일본은 지금 그렇게 하지 않고있어서 천만유감이지요. 안그렇습니까, 오사기교감?》

   《엉? 저.....》   

   오사기 겐다로는 말문이 막혀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그는 량미간을 끌어 모은채 서일을 아느새 멍하니 쳐다보기만했다.

  “진선미(眞善美)의 일본인”이라는 어구와 그 글의 내용은 그가 소시적에 책가방을 메고 학교문을 들어서면서 첫머리에 배운것이여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오늘 한국인의 입에서 그것이 튀여나오니 별일같았던 것이다.

   《오사기교감! 한마디만 더 할까요. 내가 <일본인>이란 잡지를 뒤져보니 거기에 이런 문장이 한편 실렸더군요. 그게 아마 20년전에 정교사에서 발간한것일겝니다. 정교사라 하면 물론 오사기교감도 기억날겁니다. 그 단체의 중진들은 <평민주의>니 <전반서양화>니를 고취하여 당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있던 <국민의 벗>과 맛서 숭양미외하는 사회의 풍조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국수보존을 대대적으로 제창하였지요. 그렇지요? 맞지요?》

   《그런데?...》

   오사기교감은 어느덧 대방의 구술에 빨려들고 있었다.

   《내가 그 잡지 어느 권엔가 실린 사론을 읽어봤는데...물론 <일본인>이지요. 그 잡지야 반월간이 아닙니까. 거기에 이런 문장이 하나 있더군요. 메이지 22년 어느월엔가, 아마 2월일겁니다. 일본정부는 천황의 명의로 <대일본제국헌법>을 반포했는데 거기에 명문으로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 천황이 통치한다>고 규정해놓고 <법률에 의해 신민은 병역에 복무할 의무가 있다>고 했지요. 이에 대해 정교사는 <군주전제국가의 인민이면 신민이라 불러 무방하겠으나 일본은 이미 립헌국가로 되었으니 인민을 의례 국민이라 불러야 옳을게 아닌가>고 이의를 제기했더군요. 오사기교감은 그래 어느쪽입니까?》       

    서일이 갑작스레 이런 질문을 들이대여 오사기 겐다로는 그만 멍해지고말았다. 정교사의 주장을 규납해보면 정치상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고 정신문화방면에서는 전통문화의 가치를 재다시 인식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재건하자는것이였다. 오사기 겐다로는 그 주장에 동감해온 사람이다.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자는 것은 지금 일본국내 민주주의자들의 구호이기도했다. 그런데 가쯔라정부가 구성된 후로는 국내의 민주주의자에 대해서 탄압하는 정책을 실시하고있는 것이다. 이에 오사기 겐다로는 내심으로 반발하나 탄압이 두려워 감히 표달하지 못하고있었던 것이다. 그가 방금《황국신민》이라 한 것도 사실은 제 맘속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였다. 한데 오늘 일개 한국의 지식인이 이를 빙자하여 페부를 따끔하게 찔러놓는 것이다. 그는 서일의 해박한 견식에 다시한번 탄복하면서 그를 해쳐보려던 궁리를 말끔히 집어치우고말았다.

   한편 경원학교의 선생들은 군수따라 의병에 나갔다가 전쟁판에서 희생된 본학교 학생 3명의 추도식까지 하고나서야 마침내 서일은 근본 원산에는 가지도 않고 그지간에 연해주에 갔다왔다는 것을 알게되였다. 한데도 두 일본인 선생만은 깜깜이였다. 어쩌면 영원히 모르고 지낼지도 모른다. 이 학교에는 친일파가 없어 발설할 자도 없으니까. 오사기교감은 서일을 더 의심할 근거도 없었다.

   
   반일의병항쟁은 이해에 전국적 범위로 확대되고 있었다.

   19세기말에도 의병항쟁은 넓은 지역에서 치렬하게 벌어졌지만 전국적 범위를 포괄하지는 못하였다. 당시 의병항쟁이 치렬하게 전개된 중요지역수는 85개로서 의병항쟁이 일어난 중요지역보다 일어나지 않은 지점이 더많았다.

   그러나 1907년 8월이후 현재까지 의병항쟁은 전국을 포괄하고 있었다. 즉 의병항쟁이 벌어진 중요지역의 수가 의병항쟁이 일어나지 않은 지역수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의병항쟁이 일어난 중요지역의 수가 300여개소. 전국 중요도시수의 약 90%를 차지했다!

   의병항쟁에 대해 지극히 관심하면서 가끔 우려도 하고있는 경원학교 선생들은 이날도 모여 앉아 형세를 담론했다. 서일이 그 장소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함경도에서 의병이 일어난 곳들을 손을 꼽아가면서 세고있었다.

  《함경남도에 덕원, 함흥, 단천, 영흥, 북청, 안변, 정평, 삼수, 갑산, 장진, 리원, 문천, 고원, 흥원. 열네곳이나 되네!》 

  《함경북도에 경원, 경흥, 길주, 회녕, 경성, 경원, 명천, 무산.》

  《어찌된 판이야, 우리 북도는 남도의 절반밖에 안되니?...》

  《안되면 뭐라나. 군수가 직접나가 싸우잖아. 훌륭한 본보기루 됐지!》

  《올년초 신문에 난거 못봤나. 강원도 양구군 군수가 된 임현익은 군수자리를 리용해서 군내 각 면장들에게 돈을 걷고 담배를 걷고 탄알만드는데 쓸 연금을 모아서 의병에게 공급했다잖어. 참 잘했지.》 

  《의병장으루 된 군수허구 면장이 얼마라더라?》

  《여섯이야. 주사서기는 셋이구.》   

  《의병장가운데 유생량반이 아마 제일많을거야. 예쉰도 넘어.》

  《통계가 나왔잖았나, 정확히 예쉰셋이야.》   

  《우리 군수 참 좋은 분이지. 부패함이 없이 선정을 베풀구.》

  《헌데 그이가 데리고 나간 학생이 생명을 잃었으니 그의 책임이...》

   나젊은 선생 하나가 말을 하다말고 서일을 힐끗 보았다.

   서일의 눈앞에 아들이 죽었다니 이게 웬 청천벼락인가 하면서 기혼절도를 하던 어머니, 동생의 부음을 받고는 구곡간장이 끊어진다면서 하루내내 땅을 치며 통곡하던 누나, 아들이 죽었다는 소리에 무감각해지는지 얼빠진 사람같이 멍청해지던 아버지, 슬픔에 모대기치던 가족들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것은 눈물없이는 보지 못할 가슴을 저며내는 장면이였다.

  《그 일로 군수를 탓하지 마시오. 탓할 것 없습니다. 책임은 내가 져야하니까. 그들은 내가 청을 들어주어 나간것입니다. 헌데 한가지 명백히 알아두어야 할것은 전쟁판은 죽음이 호곡하는 곳이라는 그것!》

  《그렇구말고요. 그렇다는거야 각오하고 나가야지!》

   누군가 서일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하면 너무나 각박한 소리가 되는것 같아서 서일은 해석을 붙이였다.

  《누군들 각오하지 않고 나가겠는가. 요는 내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서 내 한 몸을 순(殉하)하려는, 남은 갖추지를 못하는 그 마음이 숭고하다는거지. 그런 마음 그런 결심이 없이야 그들이 제 생명을 바치였을가? 생각들해 안그런?  죽음이 휘파람을 부는 곳인데!》  

   선생들은 모두 옳다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의병투쟁은 자상을 초래할 뿐 아무런 보람도 없을 헛짓이라 말하던 선생도 다시 깊이 생각해보았다. 그렇다, 세상에 만전을 기(寄)하고 이루어지는 거사란 있을수 없는 것이다.

   여러 신문이 이강년의병장이 9월 19일 사시(巳時)에 교수대에 올라 50세를 일기로 장렬하게 순국한 소식을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이강년은 지난 7월 2일(음력 6월 4일) 충청북도 청풍군 까치성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부상당하여 적들에게 체포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체포한 그를 일단 제천수비대로 압송하였다가 다시 충주수비대로 옮겼다. 이강년이 지나가는 곳마다 민중들은 그를 바라보면서 너무나 애통하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옥중생활 4개월이였다. 그는 나중에 왜놈이 주는 음식은 거절하고 먹지 않으면서 태연자약한 태도로 적을 꾸짖어 그자들로 하여금 조선땅에 들어와 저들이 저지른 죄악을 알게했다. <사가사 불가욕(士可死 不可辱)>이라 즉 <지사는 차라리 죽을것이지 욕을 뵈여서는 안된다> 생각하고 빨리 죽기를 각오한 그는 팔역동지(八域同志)들과 장자 승재(承宰)와 종제 강수(康壽)에게 고결문(告訣文)을 보내고 사형대에 오른 것이다.

   12만의 의병대군으로 서울공략까지 꿈꾸었던 맹장(猛將)은 이같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만은 그가 이룩한 업적과 더불어 력사에 기리 남아 나라를 지키는 후세의 귀감이 될 것이였다.

   경원학교의 선생들은 모두 비통해 하면서 그가 생전에 이룩한,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혁혁한 공적들을 찾아 정리해보았다.  

   

   1907년 8월 28일ㅡ 청풍황강전투에서 왜적 600명을 목베고 전리품로힉.

          9월 10일ㅡ 문경갈평전투에서 왜적 수백명을 전멸.

         10월 22일ㅡ 제천군 신림누치산유곡에 래습하는 적을 넣어 전멸.

         11월 27일ㅡ 죽령에서 적 60여명을 도륙.

         11월  6일ㅡ 역시 죽령에서 적 600여명을 섬멸.

         11월 10일ㅡ 거듭 죽령애서 적 80명을 도륙.

   1908년 3월 19일~23일사이 용소동에서 1000명적의 습격을 받았으나 뛰여난 지략으로 수백명을 도륙. 경성공락을 미룸.

          4월 13일ㅡ 린제 백담사에서 적 수백명을 도륙.

          4월 22일ㅡ 간성에서 적 수백명을 살상하고 단신으로 적장과 겨루어 단번에 목을 베니 적은 전의를 잃고 도주. 

          .

   이강년 의병대는 이 전투를 하고나서 강원도와 충청도의 접경으로 진주하였는바 피아(彼我)의 교전수는 실로 매거불능(枚擧不能)할만큼 많았다.

   허나 그럼에도 하늘이 무정했더냐, 강토와 민족의 수호자인 용맹스러운 의병장은 운이 나빴다. 수천의 적이 무리로 한꺼번에 달려어 가열처절했던  청풍작성전투, 선봉장(先鋒將) 하한서(河漢瑞) 등 지용을 겸비한 7명의 아군장(我軍將)이 전사하고 사졸이 잇따라서 쓰러졌다. 의병장 이강년도 총상을 입고 움직이지 못하였다.     

   

                     丸子太無情 踝傷止不幸

                     若中心服裏 無辱到謠京

     

                     퇀환이여! 너무나 무정하도다!

                     발목상하여 더 나갈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이나 맞았더면

                     욕봄이 없이 요경에 갈 것을!

   

   선생들은 이날 신문에 실린 그의 유작시를 수첩에 베껴넣었다.

   서일은 선생모두를 기립시켜 함께 5분간 묵도를 하게했다.

   이럴 때 오사기 겐다로가 나타났다. 이와데 주다로도 그를 뒷쫓아 선생들이 많이 모여있는 교무실로 들어왔다. 마치도 학교전체가 갑작스레 천길나락에라도 떨어진것같이 무거운 침묵이라 이상함을 느꼈던 모양이다.

   이와데 주다로가 팔을 건다리며 턱짓을 했다. 그러자 오사기 겐다로는  시선을 탁상우에 펼쳐진 여러장의 신문에 던지여 그것들을 깐깐히 훑었다. 신문마다에 붉은 줄이 그려진 것을 발견하고 그는 매우 이상해 하였다. 그는 자기의 시선을 다시 선생들의 얼굴로 옮기였다. 모두 침묵에 잠겨서 낯색은 어둡고 굳어진지라 경아했다.

  《여기서는 대체 무슨일이 발생했는가?》

  《아무일발생한들 오사기교감이 알 일이 아닙니다.》

   서일이 묻는 말에 응대하는데 무뚝뚝하거니와 얼음같이 차가왔다.

  《건데 왜 신문에다는... 왜서 줄은 쳤는가?》

  《오사기교감은 오늘 온 신문을 보지 못했습니까? 이 나라는 천공에서 빛을 발해 천만백성을 기쁘게 해주던 거성 하나를 잃었습니다. 바로 그저께 사시에. 그는 도요또미 히데요시와도 가히 어깨를 겨룰만큼 웅재대략(雄才大略)한 명장이였지요.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아니! 아니!》

   오사기 겐다로는 손사래를 치면서 멋적게 허허 웃더니 그만 물러갔다. 학교는 추도식이 있은직후부터 분위기가 점점 차갑게 번져가고 있었다. 선생들도 학생들도 그를 대함이 전보다 친선적이 못되거니와 지어는 적의를 품고 경원하면서 무엇인가를 노리는 것만 같아 섬찍한 두려움이 가슴을 싸늘하게 만드는 때도 있었다. 오늘역시 그러했다. 그는 언행을 더 조심해야지 하고 자신을 단속했다.      

   의병항쟁이 전국범위로 확대되니 일제의 탄압역시 전례없이 가혹했다.

   일본군은 9월 1일부터 토벌작전에 착수하여 9월 20일 까지 20여일에 걸쳐 제1기 토벌구역에 대한 토벌을 끝냈다. 하지만 의병들은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그자들의 토벌이 끝난 지역에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항쟁을 끊지 않고 계속하였다.

   이에 남부수비관구사령관 와다나베소장은 악이 올랐다. 그는 예정계획을 변경하여 소수의 력량으로 제3기 토벌구역인 연해의 섬들을 지키게 하고는 제1기, 제2기 토벌구역에 대하여 엄밀한 수색검거를 다시하였다.

   그들의 토벌수단은 극히 악랄하였다. 토벌대는 무리를 지어 매개 마을의 주변을 포위하고는 경계를 2중, 3중으로 한 다음 수색을 시작했다. 수색방법은 이러했다. 먼저 동리의 동장을 불러낸다 그리하여 미리 만들게 한 남자명단과 자기들이 가지고 다니는 민적등본을 대조한 다음 남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내여 취조한다. 이런 수색은 하루에 몇번씩 반복되였다. 그때마다 의심스럽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음 모두 체포 구금하였고 학살했다.  그야말로 야수적인 살육이였다.    

   이런 토벌이 한곳이 아니라 도처에서 감행되였다. 일본군은 한 지역을 토벌구역으로 정하고는 한달, 두달계속했다. 황해도 평산지방같은데서는 지어 다섯달이나 계속했다. 그야말로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그들은 의병을 <<폭도>>, <<무뢰한>>이라 했고 의병장들을 <<폭도의 괴수>>라니 <<폭도의 수괴>>라느니 하는 따위의 부당한 딱지를 붙이여 학살했다.

   일제의 이같은 간악한 책동에 의하여 중남부일대에서 활동하던 의병장의 대부분이 1908년ㅡ1909년사이에 체포되여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무참히 학살되고말았다.

   식솔 다섯을 거느리고 전라도 지방을 요행 탈출한 나이 50대의 방씨농민은 자기와 식솔들은 지옥속에서 왔다면서 친히 겪고 목격한바를 일호반점의  가첨없이 그대로 구술했다.

   《그게 어디 사람의 사는 세상인가유 야차와 마귀가 뛰노는 저승이지. 일본놈 독하다 독하다 하니 그게 웬 소리냐했더니 말두마시오. 인피를 썼으니 사람인가 하지 그게 어디 사람인가요. 즘생이라도 그런 즘생응 세상에 없을 거고 야수도 그보다 더 악한 야수는 세상에 없을거외다. 그놈들이 사람을 어떻게 죽이는지 아시우.》

   《무서워말고 말씀하시오. 여기는 일러바칠 개가 없습니다.》

   《그렇수다. 모두 제사람들이니 마음놔도 됩니다.》

    그가 두려움을 갖고 말을 더 하지 않으려 하자 여럿이 그를 안심시키였다. 여기는 대한협회 경원지회의 사람들만 모인장소였다.

    탈출자는 과연 마음을 놓고 끝었던 말을 계속했다.

   《이병에 나간 일 있는 사람은 낙자없이 죽었수다. 하나 빼놓지를 않구서. 어디 그렇기만 한는가유. 너는 의병에 참가할수 있겠다구 인정이 돼두 죽였구 의병을 도와준 일이 있는 사람도 죽였수다. 어디 그러기만 하는가유. 그의 가족과 부락사람을 남녀로소할 것 없이 마구 끌어내다가는 죽였수다. 총살하구, 목달아 죽이구, 때려 죽이구, 생매장을 하구...흑!》

   그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때리였다. 목이 메여 말을 못했다. 터지려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나서 드디여 다시시작하는데  그가 토해내는 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가 일어서고 치를 벌벌 떨게 만들었다.

   《사람을 또 어떻게 죽이겠소. 사지를 찢어내구 가슴을 도려내구 눈알도 빼여냈수다.》

   그의 공소는 손톱만치도 거짓이 없었다.

   야수와도 같은 살인자들은 <<징계>>니 <<경고>>니 한다면서 시체를 부락가운데나 아니면 거리에 매달아놓았던 것이다... 그자들의 손에 의하여 온 강토가 점점 무시무시한 사형장으로, 소름끼치는 시체전시장으로, 피바다로 변해가고 있었다!

   살인마의 손에 의하여 학살된 수자를 보면:

   1907년 7월이후 12월사이에 3,627명.

   1908년에 1만 1,562명.

   합계 1만 5,189명.

   듣는 사람을 전율케 하는 참혹한 학살은 다음해에도 계속될것이였다.

   방씨농민의 말과 같이 야수, 아수라와 같은 침략자들은 그같이 무고한 사람을 학살한것만은 아니였다. 수비대, 헌병대, 경찰대를 동원하여 <<폭도의 거점을 없앤다>>는 당치도 않는 구실을 대고는 닥치는대로 주민들의 가옥을 불질러 잿더미로 만들고 부락을 페허로 만들기도했다.

   1907년 8월부터 12월까지 5개월사이만도:

   충청북도에서 1,000여호,

   경기도에서 800여호,

   풍덕군에서 450여호,

   강원도 홍천군에서 350여호,

   합계 2,600여호.

   영국기자 맥켄지는 한국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도시와 마을을 소각하고 파괴한 정형을 친히 목격하고는 다음과 같이 세상에 공포했다.

 

    <<나는 이때까지 이렇게 무참하게 파괴된 것은 본 일이 없다...충청북도의 제천은 지도우에서 사라졌다.>>         

 

   침략자의 손에 한국의 많은 도시와 마을은 잿더미로 변하여 형체마저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피해가 특히 심한 곳은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였다.

   목숨은 잃지 않았지만 하루아침사이에 집을 잃은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함북도 경원쪽으로 단신 혹은 식솔을 거느리고 오는 난민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다가 두망강을 건너 만주나 아니면 로씨아로 가려는것이였다.

   그들을 월경시키는 임무를 대한협회 경원지회의 사람들이 맡아나섰다.

   한편 신채호의 소개로 신민회에 가담한 서일은 신채호 한사람을 내놓고는 아무와도 련계가 없었다. 배일적인 이 비밀결사의 창시자가 안창호라는 것만 알았지 서일은 그를 보지 못했거니와 면목도 모른다. 그러니 유사시에는 신채호를 내놓고 또 누구를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 한데 신채호와도 련계가 끊어진 상태서 답답했다. 그로부터 조직을 발전시키라는 지시도 받지 않았다. 하여 경원읍내의 몇몇 막역지우는 물론 지어 죽마구우이자 지기인  묵이나 박기호도 그의 신분을 모르고지냈다. 그들은 대한협회 회원이였다. 서일역시 자기 학교의 수하 여러 선생들과 함께 그 조직에 가입했거니와 경원지회의 책임자이기도했다. 자강회의 후신인 대한협회는 합법적이면서 공개된 조직이니 문제시될건 없었다. 하지만 통감부는 이 조직의 활동을 은근히 감시했고 일진회의 세력은 내부로 뚫고 들어오려했다.

   어느날 코등에 안경을 건 40대미만의 사나이가 서일을 찾아 경원으로 왔다. 초면인 그는 서일을 조용히 만나 자기는 성명이 조성환(曺成煥)인데 서울에 있는 태극관(太極館)에서 일을 본다면서 신채호가 오지 못할 사정이니 자기가 왔노라했다. 그리곤 요즘 혼자서 어떻게 지내는가고 물어왔다. 

   《그러니 조선생은 신채호와 관계가 있는분이란말입니까?》

   《아니면 내가 찾아왔을가. 제사람이니 믿어도 되네.》

    이리하여 서일은 조직과 련계없어 답답하던 심정이 풀리게되였다.

   《경원학교에다도 청년학우회를 설립할 필요가 있겠소. 청년수양을 목적으루해서말이요. 이 조직은 우리 신민협회의 산하 비밀조직으로서 청년학생들을 배일적이며 애국적인 인간으로,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갖추도록 교양하고 이끄는것이오. 그 책임을 아마도 서선생이 맡아야겠소.》

    조성환은 1874년생으로서 일명(一名) 욱(煜)이라며 한성(漢城) 사람으로서 26세에 무관학교학생으로 있을 때 부패한 군부를 숙청하려다가 발각되여 사형에서 감형으로 무기역에 처하였다가 3년만에 특사되여 참위(參尉)에 임명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직을 사(辭)하고 안창호(安昌浩), 이동녕(李東寧), 이상설(李相卨), 김구(金九)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한것이다.

    서일은 그한테서 새임무를 맡음과 동시에 정황을 상세히 교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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