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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9.
할빈에서 발생한 거사(擧事)가 여러 신문에 보도되자 경원학교는 사생모두가 여러날 지속적인 흥분상태에 빠져있었다. 안그럴리있는가. 횡래지액(橫來之厄)을 당한 이또오 히로부미의 죽음은 온 세계를 놀래우는 특대사건이였으니까. 한데 이 사건에 일본인은 슬퍼하고 한국인은 기뻐했다.
어느날 정오. 학교근처에 있는 술집에서 두 사나이가 나왔다. 둘 중 한 사람은 얼굴에 주름살이 많아서 걷늙어보이는 중년의 사나이였는데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츨거리다 두 팔을 공중으로 뻗어 올리면서 앙천대소를 하는것이였다.
《어아 시원하구나! 시원해! 개똥밭에 구불어두 죽잖구서 숨붙어 살았으니께 그놈 죽는 꼴 보는구마! 내사 그래 맘 이렇게 편하구 통쾌해 볼 때도 있나베? 하하하!...야 임마 덕보, 치삼이, 부엌데기 을용이...너그덜 일찌기 죽지 말구 살지. 죽기는 왜 죽어, 이놈들아. 죽지 않구 내같이 살아더믄야 오날 다 같이 그놈이 죽는 꼴을 봤을건데. 천벌이야, 하늘에서 천벌이 내려 그놈은 죽었어. 하하하!... 네놈도 저 죽을날은 몰랐지 으 하하하!...십년묵은 체증이 뚝 떨어지는 것 같구나! 하하하!...》
점심먹고 학교로 오던 학생들은 모두 그 모양을 구경했다.
《아니 저 사람 무슨 소리를 저렇게 해쌌누?》
《보구두 몰라? 이또오가 죽으니 너무기뻐 그러잖아.》
《그래두 그렇지. 아부재기는 왜 친다우.》
《취했어. 술을 억병으루 마신모양이야 입에서 뱀이 나가는지 구렁이 나가는지 모르는걸 보니께.》
행인 여럿이 발목이 잡혀 그 모양을 보며 하는 소리였다.
《야이거, 이젠 고만 입다물라는데두. 개가 들으면 경칠라구.》
함께 술마신 친구역시 비틀거리지만 정신차리고 그를 충고한다.
취중무천자(醉中舞天子)라 주기가 올라 얼굴이 지지벌개난 저켠은 담통이 얼마나 커졋는지 그쯤한 충고는 개방귀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가 또 한번 광기를 부리듯 고함을 지르고있을 때 서일이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리성을 잃을 지경이 된 그를 향해 걸음을 놓앗다.
《백주에 로상에서 왜 이럽니까? 음주를 너무하셨구만.》
《아 이거, 교장선생아니우! 이또오 그놈말입네다. 살아 원쑤더니만 죽으니께 한번은 사람을 기쁘게 해주네요. 하하하!...》
《여보시오, 정신 좀 차리시오. 웃음이 총구멍을 막습디까? 기쁠수록 자중해야합니다.》
서일은 술기운을 빌어 지금 광기를 부리고있는 그가 누군지를 알고 있었다. 안계훈의 담사리의병대에 있었던 장기덕(張基德)라는 사람이였다.
4월에 <<大韓每日申報>>는 거문도앞바다와 그리고 초도와 렬도에서 수산자원을 략탈하던 일본어선을 습격하여 배에 타고있던 자들을 죽이였다고 보도한적이 있는데 그때 참여한 의병중 장기덕이도 끼인 것이다.
<<서천, 비인, 람포, 보령, 안민도 부근에서는 때때로 해적의 략탈이 있었다... 우리는 폭도들의 부락과 어선들을 불살라버리였다.>>
조선주차군사령부는 《조선폭도토벌지》에다 담사리의병대의 활동을 밝히면서 저희들이 어민들의 생로를 끊어놓느라 야만스러운 파괴를 한 사실도 기록해놓았다.
바다가에 살면서 고기잡이를 해서 살아왔던 장기덕은 바로 그때에 집도 배도 식솔도 다 잃고 이제는 홀몸이 된 것이다. 그는 담사리의병대가 해산돼서 며칠전에 만주로 멀리 피해가자고 함북도의 이 안쪽까지 온 것이다.
서일은 그의 면색과 거동에서 피난꾼임을 알아보고 일부러 접근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중 그의 신세를 알게되엿던 것이다.
신분을 놓고 따질 것 같으면 장기덕은 남의집 머슴살이와 어민으로 살아온 상놈이다. 하지만 지식분자인 서일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그를 평등하고 동지적으로 대하면서 그지간 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리며 싸우느라니 얼마나 고생을 많이했겠느냐며 따뜻한 말로 위로해주었다. 장사덕은 그의 그 의병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도량에 감격하여 믿어주면서 자기가 의병으로 나올때의 일과 안계훈이 지휘하던 담사리의병대가 뒤를 더 꼬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종말을 보게된데 대해서 알려주었던 것이다.
적들은 담사리의병대를 토벌하기 어려우니 내부로부터 와해하는 술책으로 괴멸시키려했다. 담사리의병대의 일부 성원들은 과연 적의 간계를 이겨내지 못하였다. 회유책동에 기만당한 의병들이 대오에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의병대 내부에서는 혼란이 생기여 대오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안계훈은 이를 수습해보려고 시도하다가 자기 고향에서 변절자의 밀고로 적에게 체포되여 지난 9월 25일 광주에서 학살당한 것이다.
《어느 개아들놈의 새끼가 안대장을 고발하구 나자빠졌는지 내 이제 아무때건 그놈을 잡아 각을 찢어 원쑤갚을거우다.》
이러면서 눈물을 짖던 장기덕이다.
먼 일가친척을 찾아 온 그는 잠시 그 집에 몸을 붙이고 있으면서 월경을 시도하고있는 중이였다. 그런 처지임에도 원쑤의 두목이 안중근의 손에 숨이 끊어졌다니 너무너무 통쾌해서 경축을 하느라 음주를 한건데 배속에 들어간 알콜함량이 너무많아 몹시 취했고 그러다보니 담통도 커질대로 커져 자제못할지경 무경각의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또오 히로미는 죽음으로써 국내에 사는 한민족만을 이같이 기쁘게 한게 아니였다. 해외에서 살고있는 동포들까지 모두 다 기쁘게 만들었다. 지난해(1908)에 중국으로 망명한 현년 59세의 지사(志士) 김택영(金澤榮)은 이또오 히로부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 즉시에 필을 날려 <<의병장 안중근이 나라 원쑤를 갚았다는 말을 듣고>>라는 시를 지었다.
평안도 장사 한 사람
두 눈 부릅뜨고 뛰여 나왔다.
마치도 양새끼를 찔러 죽이듯
나라의 원쑤놈 통퇘하게 죽였다.
내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있다가
이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구나.
한창 만발한 국화꽃 곁에서
미친 듯 노래하고 기뻐 춤추노라.
경원은 할빈거사소식이 전해진 후로 주민들이 내내 축제기분에 잠겨있었다. 그래서 축배를 드는 사람이 많아졌다.
경원학교 선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이럴때일수록 정신차려야 했다. 풍문에 듣자니 이또오 히로부미가 죽으니 온 일본이 그만 울음판이 돼버렸다고 한다. 비분에 잠긴 적이 이를 갈면서 눈에 쌍불켜고 보복하려드는데 그들을 촉노(觸怒)케 만들어 스스로 화를 당할 필요야 없지 않은가. 서일은 사생모두에게 무릇 일본인이 있는데서는 언행을 각별히 조심하면서 불필요한 접촉은 삼가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오늘 한국사람이 내쏜 이 몇방의 총알이 일본이 추진하고있는 정책을 제지함에 있어서 어찌 만민의 곡소(哭訴)나 천편의 청원서보다 더 힘이 강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중국의 <<民旴日報>>(민우일보)는 사설(社說)을 거듭발표했는데 그중 한편의 사설에다는 이렇게 쓰고나서 다음과 같이 태도를 밝히였다.
<<가련하다. 아세아에서 망한 나라는 많지만 원한을 품고 모진 고생을 다하며 일격으로 분풀이할 결심을 내린 자는 얼마나 보기 드믄가. 바로 이 때문에 정치적 암살이란 동아(東亞)에서는 오직 한국사람만이 독차지 할수 있는 미명(美名)으로 되었다. 아, 조선사람은 단군, 기자의 후예요 우리의 혈친(血親)이며 수 천년이래 두 나라 사람은 서로 믿으며 화목하게 지냈었다. 그런데 일본은 간계와 무력으로 우리의 육군을 격파하고 우리의 해군을 섬멸하였다. 생각해보라, 우리 국민이 10년전에 삼한의 한 뙈기의 땅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백골을 료심(遼沈)의 숲속에 남겼고 얼마나 많은 시체가 황해 고기의 반찬으로 되었던가를.
고려의 원쑤는 곧 우리의 원쑤이다. 일본인들은 고려를 만주진출의 발판으로 삼고 료심(遼沈)일대를 일본의 것으로 만들려하였다. 일본이 이 일에 착수하자 삼한의 지사가 나서서 장구직입(長驅直入)하려는 그들의 말발굽을 끊었다. 비록 한국사람의 원쑤를 갚기 위한것이였지만 우리에게는 얼마나 다행한일인가. 이번 일이 한국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만약 불행하게도 우리 국민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온 료동삼성은 이미 이또오의 묘지에 잠 기고말았을 것이다. 외국인을 적대시하는 심리와 외교정치 량자를 놓고 말한다면 사소한 과실로 엄청나게 큰 화액을 빚어낼수도 있으니 조심하여 량자를 분별하여야 할 것이다.>>
총리대신 이완용이 윤덕명, 조민회 등 대표단을 거느리고 대련(大連)에 가 이또오 히로부미의 시체에 제사를 지내는 한편 또 농상공부대신 조중웅을 파견하여 정부의 명의로 은사금 10만원을 보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앞잡이는 앞잡이의 충성이 있고》
《괴뢰는 괴뢰의 꼭두각시놀음이 있네.》
경원학교의 선생들은 재담을 엮듯이 불만을 토로했다.
순종(純宗)은 이승에 간 이또오 히로부미에게 문충공(文忠公)의 시호(諡號)까지 준다고 하니 웃음거리였다.
오사기 교감이 잠시 학교를 떠나 어디엔가 갔다오더니만 서일을 조용히 불러놓고 명령투로 다음과 같이 집요하게 말했다.
《상급에서 지시가 있소. 무릇 기관이나 학교는 추도식을 거행하고 이또오 통감이 생전에 쌓은 업적을 기리여야한다고 하였소.》
《그러지요. <분발하여 나라를 사랑하고 서로 제휴하며 한국의 국력발전을 도모하자>고 한 분인데 추도를 해야지요.》
서일은 군말없이 선선히 응대했다.
오사기 겐다로는 교장이 태도가 시원한지라 만면에 웃음을 발랐다.
이날은 수업을 하지 않았다. 이또오 히로부미가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의 통감을 지낸것이 해수로 5년간이나 되지만 한국민들은 그가 몰골이 어떻게 생겼는지 여직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 본신이 암살이 두려워서 자기의 모습을 신문지상에 공개하지 않고 박쥐모양으로 지내온것과 관계된다. 사람들은 오늘에야 비로서 신문에 나타난 것을 보고 그의 몰골을 알게 되었다.
《서교장은 안중근이 이또오 공작을 살해한 것을 옳다고 보는가 그르다고 보는가?》
오사기 겐다로가 문득 이렇게 물어왔다.
서일은 그가 지시를 받고 와서 자기를 떠본다는걸 알아채고 되물었다.
《오사기 교감은 이또오 공작이 살해당한걸 어떻게 봅니까?》
오사기 겐다로는 말문이 막혀 대답을 못하고있다가 다른 말을 꺼냈다.
《여러 신문들이 꼭 같이 보도를 했소. 안흉수의 행위는 개인의 원한에서 나온것이라구말이요.》
《그는 한국의병의 참모장입니다. 군인이 적을 죽였다면 그걸 어떻게 봐야합니까?》
오사기 겐다로는 또 말문이 막히고말았다.
다른 선생들은 두 사람이 주고 받는 것을 보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마치도 법정에서 정채로운 변론을 듣는 것 같이 재미있다고 말해서 사람들을 웃겨놓기까지 했다.
엄숙해야 할 추도식의 분위기가 엉뚱하게 돌아지는지라 오사기 겐다로는 난처하게 되었다. 허나 그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것이니 누구에게 책임을 덮어씨울수도 원망할수도 없었다.
《이또오 통감의 죽음은 그 자신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서일은 드디여 이렇게 내뱉았다.
경원학교 선생들은 한결같이 이또오 히로부미는 마땅한 죽음을 당한것인데 변명은 무슨놈의 변명이냐 하면서 손바닥으로 세상의 이목을 가릴수 있을가, 일본신문과 친일지가 안중근의 거사를 개인의 원한에서 나온것이라 보도한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 했고 영웅을 그같이 비방하는데는 딴 꿍꿍이가 있다고들 했다. 그들은 물론 두 일본인 교원이 듣지 못하게 수근거렸다. 그들은 이 시각에도 적의 온갖 회유와 공갈과 기만에 맞서서 견정불굴하게 옥정투쟁(獄庭鬪爭)을 하고있을 안중근을 생각했고, 곁불에 몽둥이라 그 사건으로 인해 그의 가족과 여러 지사들이 화를 입고있는데 대해서 은근히 걱정하기도했다...
사람들은 이 한해를 분노와 두러움과 놀램과 흥분으로 보냈다.
분노란 7월에 사법권을 일본에 빼앗긴것이고 두러움이란 9월에 호열자가 전국에 만연되여 주검을 쓸어낸것이고 놀램과 흥분이란 10월에 안중근이 할빈역에서 이또오 히로부미를 죽여버린 그것이였다.
일본은 정미년 광무황제의 양위로 한국의 주권자들을 저희들의 생각과 같이 만들어 세웠겠다, 군대를 해산하여 한국의 무력까지 거세(去勢)하였겠다, 이제는 한국을 삼킬 방법을 어떠한 형식으로 끝마치느냐가 문제여서 궁리하던 차 이번의 사건이 생기니 차라리 그것을 구실로 야심을 정당화하려고 들었다.
일본은 지어 안중근사건이 발생하자 한국황제가 련루된 것으로 꾸미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안중근의 강력한 반발로 헛짓이 되고말았던 것이다.
이러던차에 마침 12월에 일진회장(一進會長) 이용구가 한일합방을 정부에 건의했고, 대한협회와 국민대회 등 조직은 일진회의 반역을 성토하였다. 이런 때에 또 이재명(李在明)이 이완용을 죽여버리려고 종현(鐘峴)에서 칼로 배를 찌르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일본은 이것을 기화(奇貨)로 삼아 치안을 확보하고 보복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정돈하는 길은 오로지 한국문제를 근본적으로 처단하는것이라면서 그 주장을 드높이 부르짖기 시작했다.
이러구러 1910년을 잡아들었다.
1월에 김윤식, 송병준 등이 한일합방을 공공연히 주장한 이용구를 처형할 것을 건의했으나 그대로 되지 않았거니와 한일합방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게 떠돌았다. 한국내의 신문들 보다도 외려 중국의 오랜 신문인 <<申報>>가 소식을 더 빨리 보도했다.
1910년 1월 14일자 <<미국이 한일합병을 론함>>
2월 1일자 <<한국인도 합병을 제창>> 등등.
3월 26일 안중근이 사형되였다.
그가 사형당하기 10여일전 려순감옥을 찾아온 동포변호사 안병찬을 통하여 국내 동포들에게 한 결고(決告)의 내용이 알려져 사람들의 심금을 다시한번 울려주었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간 해외에서 풍찬로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죽노니, 나의 2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분발하야 학문을 장려하고 실업을 진흥하면, 나의 유지를 계승하여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사자무감(死者無憾)이라.>>
그를 구원하려고 동포변호사 안병찬이 자진하여 나섰다. 외국의 변호사들도 동원되였다. 해외에서는 동포들이 구원금모집도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책동으로 인하여 다가 허사로 되고말았다. 한국민들은 모두 비통속에 잠기였다.
《천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인심은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안중근을 만나봐서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있다. 그의 이름은 천추에 기리남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 상복을 입을수 없어도 안중근을 스승으로 모시고 깊이 추모하자.》
서일은 선생들과 이렇게 말했고 그들은 과연 상복을 입지 않은채 안중근을 맘속깊이 추모했다.
한편 일본은 전부터 계획하고 추진해 온 한일합방을 바싹 다구쳤다.
《나는 꼭 이또오의 뜻을 계승하겠다.》
일본수상 가쯔라 다로오가 이같이 결심했다.
5월 30일 소네 아라스께대신에 일본 죠슈군벌출신인 육군대신 데라우찌가 통감으로 임명되여 한국에 왔다. 그는 한국강점임무를 맡은 것이다.
데라우찌는 통감으로 되면서 경찰의 부족수를 보충한다는 구실을 대고 1,000명의 헌병을 한국에 더 끌어들이였고 6월 16일에는 경찰권까지 완전히 장악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수비대는 전력을 다하여 예방경비를 하라.>>
<<한국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적 변동의 전제와 같은 감촉을 주지 않게 행동하라.>>
데라우찌가 통감으로 부임되자마자 장교들에게 내린 비밀지령이였다. 그러면서 일본군은 항상 출동할수 있는 비상동원준비를 갖추었다. 그들은 완전무장한 상태에서 각 성문, 왕궁, 통감부, 사령관과 대신들의 집에 대한 경비를 강화했던것이다.
8월 15일이후 서울시내는 일본군에 완전히 포위되면서 계엄상태에 들어갔다. 서울시내는 거리마다 30m의 간격으로 일본헌병대와 수비대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자들은 길가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잠간동안 이야기만해도 붙잡아 엄중히 심문했다.
8월 16일날 오전 9시. 데라우찌는 이완용을 자기 집에 블러다놓고 합병조약문과 함께 국왕, 대신들과 관리들에 대한 사후처리문제를 알려주었다. 즉 일본이 조선을 완전강점한 후 국왕에 대한 대우와 보상문제, 친일대신들에 대한 명예와 생활보상문제, 구한국관리에 대한 처리문제 등이였다.
하루지나 그 다음날인 8월 18일 이완용은 내각회의를 열고 합병에 대한 문제를 상정시켜 토의하였다.
데라우찌는 일이 마음과 같이 되어감을 보자 이완용과 이미 계획한대로 8월 22일 오후 5시에 창덕궁에서 조선강점을 위한 <<한일합병조약>>을 극비밀리에 체결하였다.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어전회의에 참가한 자들로는 내각총리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조중웅, 내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고영희, 황족대표 이재곤, 원로대표 중추원위원 김윤식, 시종무관 이병무 등이였다.
그리고 이 조약을 반대하는 학부대신 이용식에게는 알리지도 않았으며 22일오전을 자기 집에서 보내도록 하기 위해서 일본통역관 가와가미를 그의 집에 보내여 잡담을 늘여놓게 하였다.
한편 경무총감 아까사끼는 신문기자들이 조약체결내용을 모르게 하기위하여 자기 집에 술좌석을 차려놓고 모여 앉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게 했다.
<<일본황제 페하와 한국황제 페하는 량국간의 친밀한 관계를 돌보아서 피차의 행복을 증진하고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시키고자 이 목적을 달하기 위하여는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하니만 같지못한 것을 확신하여 이에 량국간에 합병조약을 체결하기로 한다>>
이것이 망국조약의 서문이다.
내용은 모두 8개의 조목으로 되였다.
1910년 8월 22일에 조약을 체결해놓고는 이를 극비밀에 붙이였다가 한주일이 지난 8월 29일에야 비로서 공포했다. 이날은 하늘이 유달리 맑게 개인 좋은 날씨였다. 하지만 <<합병조서>>가 발표된 뒤의 서울장안은 하나의 커다란 상가집꼴이 되고말았다
. 길거리에는 무장사, 배추장사 하나 나다니지 않았다.
헌병대의 말발굽소리만 요란할뿐이다.
시민들은 문을 닫아 걸고 집안에서 울었다.
울음소리는 점점 높아지면서 밀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다만 통곡소리...통곡소리...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는 동안 그 통곡소리는 온 3천리강산을 덮고말았다.
근조(近朝)가 519년, 27대만에 나라는 이렇게 망하고말았다.
중국의 <<申報>>가 이 소식을 세상에 알리였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이 정식으로 체결되였다. 4천년간 유구한 문명과 력사를 가진 오랜 전통의 나라 조선이 하루아침에 나라를 잃고 일본에 합병된 것이다.>>
합병조약을 선포함과 동시에 태상황을 덕수궁 이태왕 전하라 하고 융희황제를 창덕궁 이왕전하라 하며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라고 고치였다.
이미 인간량심을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체면도 없었다. 역적을 비롯한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주구들은 부끄러우줄도 모르고 일본이 주는 작위를 받겠다고 눈이 벌개서 납뛰였다.
그러나 한쪼각의 량심이라도 있는 사람은 후세에까지 치욕이 된다면서 주는 작위도 받지 않고 거절했다.
나라가 철저히 망해버리자 국민으로서 원통하고 분함을 이기지 못해 순국한 자가 많았으나 신문은 폐쇄(閉鎖)되고 왜경찰들은 순절한 자의 가족을 협박하여 발설치못하게 하였다. 죽은 이가 이같은 압박을 받았거니 산사람이야 더 말할것있으랴?
錦山郡守 홍범식(洪範植), 駐露公使 이범진(李範晋), 承旨 이만도(李晩 燾), 進士 황현(黃玹), 參判 장태수(張泰秀), 判書 김석진(金奭鎭).....등 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자기 거처에서 자결순국했고 광주의 백정(白丁) 황돌쇠(黃乭釗)는 짐승을 잡던 칼로 자살했다.
어디 그들뿐인가, 이름을 알수 없는 수많은 인사(人士)들이 혹은 스스로 목을 찌르고 혹은 배를 가르며 혹은 물에 빠져 죽거나 단식해 죽고 음독자살도 했으니 그것은 왜적의 신복이 되느니 차라리 깨끗이 자결함으로써 죽어 한국의 귀신이 되려한 것이다.
1910년 9월 1일자 <<申報>>는 <<불쌍한 망국의 학생>>이라는 글을 실었으니 그 내용은 이러했다.
<<일본신문에서 한일합병을 선포한 후 일본에 류학한 조선학생들은 비분을 참지 못하여 자살 한자가 5,6명이나 된다. 그 중 칼로 포복자살한 자도 있고, 권총으로 자결한 자도 있으며, 독약을먹고 죽은 자도 있다.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다.>>
<<申報>>는 또한 한일합방이 중국에 대해 끼친 영향도 보도했다.
<<9월 13일 순 베이러(청나라의 종실 및 몽골 외빈에 수여한 직명. 지위는 군왕의 아래)가 북경에 長文의 전보를 보내왔는데 아래와 같다. 즉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진정한 원인과 한국이 오늘의 이 처지로 된 것을 진술한 후 “청나라 조정은 이를 경계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정부 부서를 정돈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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