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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0.
함북도의 경원은 서울과 거리가 멀다보니 아무튼 소식이 늦기마련이다. 합병조약을 맺고 량위조서(讓位詔書)까지 내린지 3일만에야 이곳 사람들은 비로서 무슨일이 생겼는지를 알게되였던 것이다.
그날은 9월 1일 월요일이였지만 경원학교는 수업을 그만뒀다. 할 수가 없었다.
《서교장! 왜 신간을 안보오?》
오사기 교감이 서일을 찾아 책문(責問)하는것이였다.
《시간을 어떻게 봅니까, 사생모두가 기분이 죽어버렸는데.》
《기분이 죽다니, 경축할 일인데도?》
《아니 이 사람이, 제정신갖고 하는 말인가? 나라가 망했는데 경축이란 웬 말인가? 하긴 일본인이야 경축할 일이 많아 하루건너 명절이라지만, 오사기선생, 그래 부모가 사망해도 경축합니까?》
《뭐라, 나하구 무슨말을 그렇게?...》
《그렇게 몰상식하고 무례하니 오랑캐라는 소리를 못면하지.》
《......》
오사기 겐다로는 화로불을 뒤집어 쓴 것 같이 낯이 확끈했다. 이런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보긴 처음이였다. 해도 치를 떨 뿐 어쩌지 못했다. 서일의 눈에서 노날같은 분노가 번뜩이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랬다, 서일은 자기 눈앞에 보이는 이 일본인 교감을 당장 엎놓고 발로 콱 밟아놓고싶었다. 그렇게라도 하면 속이 좀 후련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설음도 울분도 다 참아야했다.
어느날 지난해의 12월에 종현에서 이완용을 칼로 찌르고 경찰에 체포되였던 이재명이 9월 13일에 교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났다.
경원학교의 선생들은 자기의 목숨으로 이또오 히로부미의 목숨을 바꿔 겨레의 가슴속에 맺혔던 원한의 응어리를 어느정도 풀어주고 사형장에 올랐던 안중근을 생각하면서 《외적의 괴수를 안중근이 없애치웠으니 내적의 괴수는 내가 없애치우겠다》며 나서서 비수를 휘둘러 이완용을 혼비백산케 한 이재명(李在明)이 법정투쟁을 해오다가 사형대에 오른 최후의 장면을 눈앞에 그리였다.
의사(義士)의 죽음은 망국민(亡國民)으로 되어버려 가뜩이나 비분에 잠겨있는 경원학교 선생들에게 슬픔을 더해주었다.
나이가 20세인 이재명은 평양사람이다. 지난해 12월였다. 왜적이 한국을 합병한다는 말이 신문에 보도되여 국민이 분개하고 있을 때 그는 한고향 친구인 김정익(金貞益)과 말했다.
《왜적이 용이하게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는 것은 매국노들이 꼭두각시노릇을 하는 까닭이니 우리가 적당을 없애버리면 왜적의 조약체결을 저지할수 있을 듯 하다. 적당의 괴수인 이완용, 이용구를 먼저 처죽이면 여당은 두려워서 조약체결에 협동치 못할것이니 국가의 위급을 구하는 가장 요긴한 일이다.》
이에 김정익은 흔쾌히 동감을 표시했다.
그들은 국사에 헌신하기로 맹세하고 이동수, 김명록 외 여러 동지를 더 얻어 함께 거사를 모의(謀議)하고는 각각 비수를 준비했다.
두 역적의 동정을 살피고있노라니 마침 이완용이 12월 22일 종현의 천주교당에서 거행하는 벨기에황제 레오폴드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비수를 몸에 지닌 이재명은 군밤장사로 가장하고 천주교당문앞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미사를 마친 이완용이 수행원들과 같이 나왔다. 이재명은 그가 인력거앞에 도착하여 거기에 오르려는 순간 단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어 그의 등을 힘껏 내리찔렀다. 그리고는 이어서 그를 막으려고 달려드는 인력거꾼 박원문(朴元文)을 한칼에 쓰러뜨린 후 다시 인력거 아래로 떨어진 이완용을 깔고 앉아 복부를 두 번 힘껏 찔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였다. 경찰들이 깜짝 놀라 달려들었다. 이재명은 경관과 격투했다. 이때 다른 한 경관이 빼든 패검이 그의 어깨를 찔렀다. 이재명은 피투성이 된채 체포되였다.
경찰당국은 혈안이 되어 사건에 가담하였던 연루자들을 체포했다. 제일먼저 김정익이 서울에서 체포되였다. 이어 평양으로 급파된 경찰에 의하여 동지들 대다수가 륙속 체포되여 당초에 계획했던 이용구의 암살은 착수하여 보지도 못하였다.
한편 칼을 맞은 이완용은 대한의원에 입원한 끝에 목숨을 건졌으니 결국은 이들의 본래의 목적은 실패로 끝나고만것이다.
서일은 암살이 실패해서 맹랑해 하는 선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목숨을 꼭 빼앗아야 그게 성공일가? 그렇지야않은거다. 의사의 날카로운 비수가 비록 오중부차(誤重副車)는 면치못하였으나 광복운동에 빛을 뿌려주고있지 않는가. 그는 우리에게 쾌감을 주면서 2천만의 동포에게 한번다시 용기를 주었으니 이 하나만으로도 의의는 자못커서 안중근의 버금으로 가는 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랜 재판 끝에 김정익은 무기에서 징역 15년에 떨어지고 이재명은 이 9월달에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것이다. 그외 재판받은 사람이 수명이라고 신문은 밝히고 있었다.
《보시오. 최후진술에서 의사는 재판장을 꾸짖고 <너희들이 나의 생명을 빼앗기는 하나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것이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얼마나 떳떳하고도 의젓한가! 안중근의 최후와 꼭 같이 영웅답게!》
서일은 학생들이 자기 민족의 영웅을 추모하고 따라배우게끔 이끌어주는 것은 매 선생의 직책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이제 국내외에서 일일이 매거불능(枚擧不能)할 유명무명의 의사가 혹은 개인으로 혹은 삼삼오오 작반하여 적의 군경이며 주구배들을 숙청할 것이라고 말하여 앞으로도 적과의 투쟁은 간고하지만 지속될것임을 알려주었다.
달을 넘겨 11월의 어느날, 총독부는 령 내려 갑작스레 조선글 저작의 교과서를 죄다 몰수했다.
《왜놈은 우리 나라를 삼켜버리고나서 이젠 로골적으로 식민지교육을 급급히 시행하려드는구나. 아아, 내가 내 민족의 글도 배워주지 못하면서 학교에 있어서는 뭘하는가.》
어떤 선생은 눈물을 뿌리면서 교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서일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말릴수도 없었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아서 학교는 그냥 꾸려가야 했다. 너도 가고 나도 가고 다 가서 페교를 하는건 득책이 아니라 생각한 그였다.
《경원학교가 없어진다해서 오사기 겐다로가 교감질을 어떻게 했느냐고 추궁받고 처벌받을가?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배달민족이 교육을 받지 못해 무지몽매해지면 몽매해질수록 일본은 더 좋아할 것이다.》
서일은 선생들에게 동포계몽사업은 계속 밀고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채호는 뭘하고 있을가?...조성환은 왜 다시오지 않을가?...신민회는 나를 잊은건거나 아닌지?...)
경성에 있는 현천묵이도 최익항이도 뭘하고있는지 전혀 소식이 없었다. 지어는 이홍래마저도 발길을 다시돌리지를 않았다. 의병으로 싸우다 죽었는지... 친구 박기호가 몸곁에 있는게 다행인가싶었다. 그러나 신민회조직과 련락이 끊어져 서일은 울쩍한 기분이였고 심정은 돌같이 무거워나기만했다.
이제는 신문지상에서 의병항쟁에 대한 소식마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서일은 혼자서 신문을 뒤지였다.
<<평산지방에서 의병장 이진용, 한정만 량씨의 두 의병대가 례성강안 평촌으로 행진하다가 온성분견소의 헌병대가 다가옴을 알고 고지에 올라 일병을 기다리는데 일병이 600메터 가량되는 거리에 이르거늘 급돌격하니 일부는 웅덩이에 엎드려 사면으로 의병의 포위공격을 입어 약 30분간이나 교전을 하며 그 세력이 심히 곤난한지라 의병이 점점 맹격하니 일병은 병기가 진절하야 다시 싸우지 못하고 계정으로 도주하야 일병 응원대를 청하며 이 뜻을 개성 일본헌병분견소에 전보하야 동일 오후 렬차로 일병대가 응원하고 평산, 금천 등 일병도 다 동원중이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보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3월 6일자 신문이니 구문이 된지도 오랜것이다. 올 3월달에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일어났으나 맥을 추지 못하고있다. 한일합방후부터 반일의병항쟁은 쇠퇴의 길을 걷고있었던 것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민중의 애국열이 높았건만도 의병지휘자들의 일부가 일본군에 체포되여 학살당한후 항쟁을 완전히 포기하고말았다. 하여 경기도일대의 의병항쟁은 끝나게되였다.
경상북도 일월산지구의 의병대는 적의 토벌이 심하게 되자 분산되여 각기 싸우다가 의병장 최성천, 한명만 등이 적의 손에 체포되여 학살되고 얼마지나서는 의병장 윤국범, 문성조 등이 체포되니 항쟁을 계속할수 없었다.
서북부일대에서 채응언의 의병대를 비롯한 다를 몇 개의 의병대가 항쟁을 계속하고있으나 그들은 상당히 어려운 상태에서 고군작전할 때가 많았다. 얼마나 오래동안 견지하겠는지?
한편 1908년부터 평산반일의병대의 의병장으로 활동해온 이진룡은 올초에 만주로 건너갔다. 다른 의병대들도 더러는 그같이 본토를 떠나 이역으로 갔다. 서일은 지금의 사정을 보아 그들처럼 동산재기(東山再起)를 꾀하는 것도 바람직하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먼저 자리잡은 홍범도, 차도선이 있지 않는가. 서일은 조맹선이니 전덕원이니 윤세복이니 백삼규이니 하는 여러 의병장들도 만주로 건너가 자리잡은걸로 알고있었다.
한데 이제는 여러가지의 소식을 제때에 바로들을수 없게 되였다.
한일합방이 되면서 강력한 항일민간지였던 “大韓每日申報”는 합방조서가 내리던 날인 8월 29일자 제1,461호를 끝으로 총독부에 강제 매수를 당해 이틑날부터는 “每日申報”로 개제되여 총독부의 기관지로 화했다. 한편 “皇城新聞”도 30일자부터 “漢城新聞”으로 개제되었다가 9월 14일자를 끝으로 페간당했으며 “大韓民報”, “大韓新聞”도 大韓이란 두 글자를 빼고 각각 “民報”, “漢陽新聞”으로 제호를 바꾸었다가 8월 31일자로 페간되여버렸다.
한편 총독부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신문에 대해서는 얼마간의 보상을 지불하고 매수하는 형식으로 페간조취를 취하였다. “朝鮮日日新聞”, “朝鮮日出新聞”, “京城新報”, “東洋日報” 등이였다. 이리하여 총독부가 설치된 이후 서울에서는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일어판인 “京城日報”, 그리고 영어판인 “Seoul Press(서울 프레스)”가 발간될 뿐이였다.
이리하여 국내에서 발간하는 민간신문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만 《언론계를 잔인하게 탄압하다니 원! 그러니까 이 땅은 암흑의 시대로 돌입했구나!》
서일뿐이 아니였다. 경원학교선생들은 모두 세상이 캄캄해지는것 같아서 한숨쉬였다. 매일 이 신문 저 신문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아온 그들로 놓고 보면 그것은 그야말로 견디기 어려운 형벌같이 고통스러운 것이였다.
치욕과 원한으로 점철된 1910년!
이해도 다가고있는 12월에 전국민을 놀래우는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총독 데라우찌가 27일 압록강 철교준공식에 참석하려고 려행을 떠나니 경의선 각 역전에는 강박에 못배겨 동원된 소위 환영하는 동포들이 운집하게 되었다. 이런때에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安明根)이 선천역부근에서 데라우찌를 폭살하려다가 미연에 발각되여 체포되였던 것이다.
며칠안되여 새해 1911년이 돌아왔다. 두만강은 꽁꽁 얼어붙고 눈보라는 울부짖으면서 휘몰아쳤다. 함북도의 겨울은 사나왔다.
2월 7일자 “每日申報”에 <<양반강도의 출현>>이라는 이상한 글이 실렸다.
<<지난 5일 저녁 돈의동(敦義洞) x x 번지에 사는 김종근(金鐘根)씨 댁에는 한명의 괴한이 나타나서, 때마침 사랑방에 있는 주인 종근씨에게 현금 5만원을 요구하므로 이를 거절하였더니 괴한은 마침내 완력으로써 협박하는지라 주인이 큰 소리로 고함을 치자 가족들이 알아듣고 즉시 이 급보를 경찰당국에 알렸다 하며 급보를 받은 경찰에서는 현장에 형사대를 출동하여 일장격투 끝에 무사히 그자를 포박하여 방금 엄중한 취조를 받고있다는데 그자는 가회동 x x 번지에 주소를 둔 김좌진(23살)이라 하며 조사한바에 의하면 그는 일찍이 양반의 집 자제로 태여나서 사회적 지위도 상당하였고 피해자 김종근씨와는 먼 친척의 관계까지 있는터로 그가 이번 이 책동을 취하게 된 것은 가산을 탕진한 궁여지책이 아닌가 하고 일반은 관측하고있다더라.>>
《세월이 복잡할라니 별 희한한 일 다 생긴다. 아무렴 제 친척의 돈까지 강도질을 하다니 원.》
서일은 그 신문을 보고나서 어처구니없어 웃어버렸다.
그 이틑날 뜻밖에도 이홍래가 나타났다. 그를 만난 서일의 기쁨은 이루말할수 없었다.
《이선생께서는 월경하시렵니까?》
《아니, 난 서선생을 월경시킬려구 온거요. 가정데리고 속히 떠나시오》
《원 무슨 말씀인지 통 모르겠습니다. 내가 왜 월경을 한단말입니까?》
전혀 생각지도 않다가 갑작스레 들이닥친 일이라 서일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벙벙한 나머지 멍청해지기까지 하는데 이홍래가 자기는 신채호 선생의 심부름을 하고있을 뿐 상세한건 모르고있으니 보면 알게될거라면서 편지 한통을 꺼내놓는것이였다.
신채호의 친필서한인데 간단명료하게 몇글자안되였다. 경찰당국이 동원되여 신민회원들을 체포하고있으니 일각도 어물거리지를 말고 속시 식솔을 거느리고 만주로 피신하라는 내용이였으니 그것은 조직의 지시였다.
《래일이면 현천묵이도 식솔을 데리고 금동에 올거요. 오면 거기서 함께 월경을 하도록하는게 좋겠소.》
《그렇다면 천묵이도 우리 조직의 사람이였단말입니까?!》
《서선생이 말하는 조직이란게 뭔지 난 지금도 모르오. 본인은 그저 심부름을 할뿐이요.》
이홍래는 이러면서 신채호가 자기를 믿고 편지를 주어 전달케한 것을 보면 그도 서일과 한조직의 사람일시 분명하다고 덧붙이였다.
한조직의 성원도 아니면서 고생을 마다하고 추위속에서 먼길을 온 이홍래의 그 의로운 행동거지가 과연 고마웠다.
서일은 인제야 어찌된 일인지를 분명히 깨닫게되였다.
왜적은 안명근사건을 기회로 하여 신민회(新民會)의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주의자 모두가 새 총독 데라우찌를 암살하려고 음모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만들어 갖고는 독립운동의 대본영으로 지목해 온 이 조직을 일망타진하려고 대규모적인 무시무시한 수색과 체포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1월달 첫날부터 왜경무총감부(倭警務總監部)는 전국경찰에 명령하여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강원도, 함경도, 서울 등지에서 윤치호(尹致昊), 양기탁(梁基鐸), 이승훈(李昇熏), 김구(金龜), 유동렬(柳東悅), 김동휘(金東輝)...등을 비롯한 수많은 신민회 간부와 회원들을 체포하여 서울에 있는 경무총감부로 끌어가기 시작했다. 일단 그곳에 끌려가기만 하면 상상키 어려운 혹심한 고문을 받야했다. 하여 진고개끝 남산기슭에 있는 경무총감부에서는 밤낮 도수장에서 짐승을 잡듯 아츠러운 비명소리가 끊지를 않았다.
기원전 200여년에 중국에서 진시황이 력사서적과 문학서적은 모조리 거두어 태워버리고 유생 460여명을 생매장하여 사상을 질식시키고 문화를 유린한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있었다면 오늘은 조선에서 일본인 데라우찌가 조선의 애국지사와 지식인들을 육형(肉刑)으로 고통과 참사(慘死)를 주어 세인을 경악케 하는 <<5백인원옥(五百人寃獄)>>이 이렇게 막을 올린 것이다...
신채호는 무사한데 조성환은 어떻게 되었는지 근심되여 서일은 이홍래보고 혹시 조성환이라는 분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이홍래가 자기는 그런 사람을 모른다는것이였다. 김규식에 대해서도 면목은 아나 소식은 전혀 모른다면서 혹시 만주나 로시아의 연해주로 가지나 않았을가했다.
국외에 있는지 국내에 있는지 살았으면 아무때나 만날 기회가 있겠지 생각하면서 서일은 그보고 자기가 월경해서는 누구와 련계를 가지는가고 물어보았다.
이홍래는 련계를 가지는 일까지는 자기가 모르겠는데 두만강을 거너 동만의 용정(龍井)에 가서 이동춘(李東春)이라는 사람을 찾아 그한테 자기의 본분을 말하고 이홍래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 그가 맞아줄것이라했다. 그 다음의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할 것이다.
이홍래는 생각같아서는 자기가 직접 용정까지 두집식솔을 모셔가고싶지만 일이 급해서 동행을 못하게 되어 과연 미안하게 됐다고 거듭사과했다. 미안할 것 무엇인가, 임무를 맡고 역말같이 뛰고있는 사람인데.
이홍래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느라 그자리로 몸을 돌려 서울로 향했다.
그가 가버리자 서일은 박기호를 찾아가 자기가 시급히 만주로 솔가도주(率家逃走)를 하게 되였음을 알려줬다. 그랬더니 박기호는 가면 같이가야지 친구를 두고 혼자가는 법이 어디있느냐, 동고동락(同苦同樂)을 한다던 맹세는 작난이였더냐 하면서 자기도 가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서일의 식솔 6명(큰할아버지, 큰할머니, 처와 아들 딸, 그리고 자기)과 현천묵의 식솔 4명(부부에 아들, 딸), 박기호의 식솔 3명(부부에 아들 하나) 도합 13명이 닷새만에 금동에 모여 심야에 두만강을 건너게되었다.
일행 13명은 수비대 순라병에게 발각되지 않았거니와 강판도 아직 얼어붙은대로여서 무사히 월경했는데 불행은 만주땅을 밟아서 발생했다.
일행은 풍찬로숙을 하면서 가고가서 이틀만에 가야하를 만나 고려령쪽을 향해 그 강을 따라서 올라가노라니 어슬녘이 되어 오는데 한 곳에 이르자 문득 괴한 다섯이 도깨비모양으로 불쑥 나타나 길을 가로막는것이였다.
셋이 손에 몽둥이를 들고 둘은 칼을 쥐였다.
(만주에는 토비가 많다더니!...)
다른 사람은 물론 서일도 몸이 오싹해났다.
다섯중 키가 꺼두룩한 자가 험악한 상을 짓고 을러멧다.
《너그 놈들은 뉘기냐?》
튀여 나오는 말소리를 들으니 뜻밖에도 동포인지라 토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현처천묵이 참지를 못하겠던지 성을 벌컥내며 대들었다.
《자식들, 눈깔 펀히 뜨구도 모르냐? 이사꾼이다, 어쨌단말이냐?》
《이사꾼? 흥. 이사꾼속에 왜놈의 개도 많다더라. 보아하니 너그 놈들은 고생살이는 안해본 샌님같은데... 보짐 몽땅 뒤져라!》
두목인 것 같은 그자의 호령이 떨어지자 바쁘게 네 녀석이 달려들어 보짐을 들추는데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그건 내 책이다!》
서일은 딸이 품에다 껴안은 책꾸러미를 부덕부덕 빼앗고 있는 무지하게 생긴 자를 향해 소리쳤다.
《책이면 무슨 책인갈 봐야허지...야, 건데 이건 무슨 글인데 이래?》
그자는 고개를 찌붓거리며 도깨비 기와장번지듯이 히라가나와 한자가 섞여 인쇄된 책장를 훌훌 번지였다. 그것은 서일이 요즘 다시 연구하고있는, 이름난 <<幽囚彔>>을 쓴 요시다 마쯔가게전기(傳記)를 한자이름 그대로 달아놓은 <<吉田松陰>>이란 책이였다. 이 책의 저자는 도꾸도미다.
《왜 알아못보겠냐?... 그건 일본글이다.》
서일의 말에 책장을 번지던 자는 멍청해지고
《뭐, 뭐 일본글이라! 그런걸 다?...》
키가 꺼두룩한 자는 마치 못들을 소리나 들은 것 처럼 눈알을 히번득이며 서일을 다시보는데 그 눈이 너는 좋은 놈 같지를 않구나 말하고있었다.
《책을 몽땅 걷어갖구 가자. 아마두 최나리헌테 뵈야겠다.》
그자는 책을 돌려주지 않고 갖고 갈 잡도리였다.
《이 무지한 놈, 최나리가 대체 누군데 너들은 백주에 이 지랄이냐?》
현천묵이 밸이 울컥 치밀어 못참겠는지 고성으로 욕을 했다.
그러자 두목은 놀란 개같이 풀쩍 뛰면서 으릉거렸다.
《어허. 자식이 누구를 헐수루 보구 대들어? 맛을 봐야 알겠나.》
칼을 번쩍버쩍 휘두르는 품이 정말 일을 낼것만같았다.
녀인들이 아츠라운 비명을 내질렀다.
서일이 그자의 무모한 짓을 막으려고 나섰다가 무당굿에 신들린 듯 란무를 하는 칼 끝에 그만 왼쪽 눈을 다쳣다.
《아야!...》
서일은 비명을 지르면서 두손으로 낯을 감쌌고 현천묵은 쓰러지는 그를 제꺽 안았다. 이때 박기호도 그자들에게 달려들다말고 서일을 부축했다. 눈깜짝새에 떨어진 화액(禍厄)에 모두들 아연실색했다. 이같이 황황불안한 속에서 그래도 서일의 큰할아버 서장록(徐長錄)이 머리가 피끗돌아 제 적삼을 얼른 벗어 상처입은 운을 제꺽쌌다.
녀석들은 일을 저질러놓고서도 뭘 잘했다고 제쪽에서 씨벌대더니 책을 갖고 그만 가버렸다.
저기 산아래 외딴집이 한채 있어서 일행은 급히 그리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집에 성이 강씨인 늙은 내외가 살고있었는데 말씨를 들어보니 역시 같은 함경도사람이였다. 량주는 불청객이 선문도 없이 한무리 욱 쓸어드는지라 놀래고 불안하기는 했으나 사연을 알고는 “에그, 그러면 강건너서 오시는 앞대나그네구만” 하면서 성의껏 대해주었다.
한쪽눈을 상한 서일을 가마목에 눞혀놓았다. 그리고는 갖고 온 쌀 서너되를 내놓아 주인집 로파보고 밥을 지어달라 부탁하고는 모두들 어빡자빡 쓰러져 피곤한 몸을 쉬였다. 강씨로인은 여기가 조선사람 최진동(崔振東)의 세력범위내에 든 지역인데 거의가 그의 땅을 부치고있으며 최진동은 자기의 머슴들을 내놓아 나쁜자들이 자기 땅 경내에 맘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있다고 알려주었다.
과연 그러하다면 사실은 빤하다. 그 괴한 다섯은 최진동의 머슴들로서 제딴에는 나쁜사람을 족친다는 것이 이같이 미런한 짓을 감행하고있음이 뻔한것이였다.
《제길할, 못 참겠다, 사람을 욕뵈여도 분수있지!》
현천묵이 당장 찾아가서 해내겠다는 것을 모두들 말렸다.
《최진동! 최진동이라! 음ㅡ》
서일은 그 이름을 신음소리로 곱잡아 뇌였다. 상을 입은 눈알은 동통이 심했다. 눈깜짝새에 멋없이 화를 입고 보니 치가 떨리도록 분했다.
밤을 그 집에서 보내면서 토론하여 길을 돌리기로했다. 본래 고려령너머의 봉오동 하촌에 박기호의 사촌이 있다니 자리도 볼겸 들리려했지만 우선 상처부터 치료하고봐야겠기에 어서 여기를 떠나 이동춘을 찾아 가기로했다. 그는 용정촌에 있다고한다.
이틑날 아침에 가야하를 건넜다. 한참가니 30여호되는 동포마을이 나졌다. 거기에 성이 진씨인 부자집이 있다해서 찾아가 사정했더니 소수레를 빌려주었다. 그들은 상자와 안노인과 애들을 태워갖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일행 13명은 이틀을 더 고생하여 마침내 용정에 도착했다.
벽돌담장을 두른 팔간기와집. 40대의 중년의 사나이가 문밖까지 나와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가 바로 이동춘(李同春)이였다. 그는 방을 내주어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하는 한편 의사를 보이게끔 서일을 병원에 보냈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녀석들이게 제 동포의 얼굴에다 칼을 댄단말인가. 그런 놈은 잡아서 주리를 틀어야지!》
이동춘은 서일이 두만강을 건너와서 눈이 상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몹시 분개했다.
현천묵도 박기호도 일행 모두가 그것이 최진동 집 머슴들의 소행이였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서일이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한것이다. 서일은 최진동의 세력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본인은 제 동포라면 무척 관심하는 사람이라는데 말이 나가면 명예를 흐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동춘은 일이 벌어진 장소만 알고도 긍정하는것이였다.
《거기면 최진동이 사는데가 아닌가, 치안을 그 꼴로 하다니 원.》
이같이 말하고있는 이동춘은 1871년생으로서 호(號)가 우화(雨華)며 합북도 경성(鏡城) 사람이다. 그는 한말에 중국사신 원세개가 서울에 주재할 때 통역관으로 광무제의 심임을 받아 주권옹호(主權擁護)에 노력하다가 왜적의 주목을 받게 되니 동만으로 건너와 광복운동에 헌신하고있었던 것이다. 그는 국내에서 넘어오는 애국지사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여 함께 나라일을 근심하고 구국방략을 모색하는 것을 스스로의 의무이자 하나의 락으로 삼고있었다.
이홍래는 <<월경의병장>>노릇을 할 때부터 그를 알고있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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