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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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0.
2011년 08월 08일 22시 41분  조회:5287  추천:2  작성자: 김송죽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0.

    김호선생이 통감부의 통역관이라니, 그쯤이면 몰라도 그가 자기와 같은 배달민족이 아니고 일본사람이라니 이건 마른날 날벽락떨어지는 것 같아서 서일은 놀라도 이만저만 놀란게 아니다.

   신채호는 기자신분으로 채방을 다니다보니 통감부요인과 접촉이 몇번 있은건데 그럴 때면 면회장소에서 통역을 서는 그를 보군했노라면서 저 사람은 통감부의 통역관 마에마 교오사꾸가 틀림 없습니다 내 말을 믿지를 못하겠으면 어디 한번 친히 가서 보고오시오 했다.

   《가만!...》

   서일은 <<吉田松陰>>책의 갈피에서 미처 보지도 않고 끼워넣은 종이장을 찾아내여 보았다. 거기에 씌여진 것이 분명 아래와 같았다.

 

             統監府 秘書室 通譯官 前間恭作

 

   《과연 옳구만! 마에마 교오사꾸!》

    금강석같던 신임이 와르르 무너지는 파멸의 순간이였다. 상거(相距) 10여년만의 상봉이라 그지없이 반갑던 그 감정은 그만 눈물이 내배는 서운함으로 바뀌고말았다. 남한테 기편당했을 때만이 느끼게 되는 억울함과 분함이 걷잡을수 없이 가슴밑바닥으로부터 올리밀었다. 그리고 잇따라서 소외된 배신감역시 급속히 쇄도했다.

   《하 이거, 아무럼 이럴수가!...김호선생이 일본인이였다니?...세상에 이런 바보도 있었나. 여직 그런줄도 모르고있었으니 내사 눈은 있어도 눈망울이 없는 청맹과니였지 뭐요. 왜인이 우리말을 그토록 잘할줄이야!...일호반점의 의심도 갖지 않았으니 변장이 과연 묘한게 아니요. 헌데 그가 왜서 나하고도 제가 일본사람인걸 그냥 속여왔을가?》

   《여러가지로 원인이 있을수 있지만 요는 자기가 일본사람이라는걸 밝히는 날이면 제자들한테 배척을 받기 첩경이니 그랬을 수도 있고....》

   《아마 그런 것 같구만.》

   서일은 신채호의 해석에 동감하면서 여직 한번도 인상이 나빠본적이 없는 옛스승의 모습을 눈앞에 다시금 떠올렸다.

  《젊고 팔팔했던 그는 금동리 어린 제자들을 지극히 사랑하면서 애국심을 갖도록 교육하고 이끌어주었던거요.》

  《들어보니 불가사이한 일 같습니다.》

  《인생이 연극이라더니 과연 꿈만같소. 오늘날까지 적으로만 인정해온 일본사람중에 그같이 착한 사람도 있었으니. 한데 지금은 반전해서 침략자의 아성이요 전국민이 저주를 하는 통감부에서 통역관으로 벼슬살이를 하고있다니 이게 그래 모순당착이 아니겠소. 그것도 아주 대단히...원, 어찌된 판인지 머리가 복잡한게 통 갈피를 잡을수 없다니까.》

   《그렇구만요. 듣는바에 의하면 마에마 교오사꾸통역관은 정치에는 관여함이 없이 고서만을 연구한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면의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채호의 말이였다.      

   나이 중년에 이른 마에마 교오사꾸는 1868년 생으로서 쓰시마출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조선말을 읽혀 1891년에 유학생으로 조선에 왔다가 졸업하고는 쓰시마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공사의 통역관이 되어 그냥 눌러앉았다. 그러다가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립되니 통감부의 통역관으로 발탁된 것이다. 그는 고서(古書)연구가였다.

   (나보고 뭐라했더냐. 다시보겠거든 자기를 찾아오라 하지 않았는가. 가보자. 가서 만나 속심의 말이나 좀 해보자.)

   서일은 자기가 서울에 와갖고 아무보람도 없어 체증에 걸린것만같았다. 그를 다시보고 가야지 그저 이대로 돌아갔다가는 체증을 풀지 못해 한생을 앓을 것 같았다. 서점에서 나와 신채호와 갈라진 서일은 지체없이 통감부(統監府)쪽을 향해 걸음을 놓았다.

   통감부는 경계가 자못 삼엄하였다. 수위(戍衛)는 서일을 선 듯 들여보니지 않고 문전에 세워놓은채 철붙이라도 지니지 않았냐 우선 몸부터 수색했다. 그저 그럴뿐이였다. 단엄하고 준수하게 생긴 이 조선젊은이가 손에 쥔 것이 일본서적이요 내보이는 것이 마에마 교오사꾸통역관의 친필이 그려진 종이장인지라 감히 허술히 보지 못하고 경건한 태도로 대했다.

   안쪽과 내통이 되었는지 마에마 교오사꾸가 친히 나와서 서일을 맞아들이였다. 이리하여 서일은 난생처음 정부대신외 평민은 출입이 금지되고있었던  통감부(統監府)에 발을 들여놓게되였던 것이다.  

   《잘왔어. 계 앉아. 내 얼른 나갔다올테니...》

   마에마 교오사꾸는 바삐보냈다. 서일을 쏘파에 낮혀놓고 물 한고뿌를 따라주며 마시라하고는 무슨 문건같은 것을 들고 나가더니 이윽하여 되돌아와서 이제는 할 일을 다했다며 함께 식사하러 가자했다. 이때는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저녁켠이였다.

   복도를 지난 그들은 현관문밖을 나와 몇걸음 걷지 않아서 공교롭게도 두 백두옹(白頭翁)과 마주쳤다. 마에마 교오사꾸는 그들을 각하라 부르면서 허리굽혀 깎듯이 인사했다. 서일은 얼낌떨낌에 따라서 허리굽히려다말고 그만 그 자리에 돌같이 굳어지고말았다.

   두 늙은이는 낯선 조선젊은이를 아래우로 훑어보고는 끊었던 얘기를 이어하면서 늘쩍늘쩍 건물쪽으로 계속 걸음을 놓았다.

   《기학이! 기학이!》

   마에마 교오사꾸는 팔을 툭 다쳐 어정쩡해서 무아경에 빠져있는 서일을 정신차리게 해서는 데리고 대문밖으로 나왔다.

   統監府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본사람이 차린 판점이 있었다.

   바깥과는 미닫이로 격리된 일본식의 다다미방이였는데 깨끗했다. 서일은 주인녀가 놓아주는 방석에 궁덩이를 붙이자말자 입을 열고 물었다.

   《선생님, 방금 본 그 늙은이 가운데 어느분이 통갑입니까?》

   《두분다 통감이지. 상면이 넓은 분이 소네부통감이고 그이보다 키가 좀 작은 분이 이또오통감이시오.》

   《과연 그렇구만요!》

   속으로 친 점이 면바로 들어맞는지라 내가 오늘 백발승냥이들을 코앞에 놓고 봤구나 하는 경탄성(驚歎聲)이 입밖으로 막 튀여나가려했다. 

   《선생님, 방금 그분들이 하시는 얘기를 피끗 듣자니 <아니되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지.>하더군요. 뭐가 아니되구 되군가요?》

   서일은 궁금증이 들쑤셔 넌짓이 캐물었다.

   《요즘 강원도의 어느 의병대가 통감부에 <투서>를 보내와 아마 그 일을 갖고서 두분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오! 그런 일이 다 있었습니까. 그 투서에 대체 뭐라구했길래요?... 선생님은 아마 그걸 보셨겠지요?》

   《봤네, 봤어. 네가지 조항으루 돼있더군. <고종을 다시 왕의 자리에 앉히고 정치를 하게하자, 통감부를 없애치우자, 일본인관리를 전부 파면시키자, 일본이 1905년에 빼앗아 간 외교권을 도루내놔라.> 이러루한... 그게 어디 될번이나할까. 그래서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구 하는거네.》

   마에마 교오사꾸는 전해에 맺은, 사실상 합병이나 다름없는 韓日新協約(정미7조약)은 이또오 희로부미의 사실(私室)에서 맺았다는것과 영국인 배설(裵說)의 大韓每日申報가 統監府의 두통거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내부일이 발설될가봐 우려를 했던지 마에마 교오사꾸는 필요이상의 말은 더 하지 않았다. 서일역시 눈치없이 이것저것  캐묻지 않았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태자사(太子師)라 하여 황태자를 류학시킨다며 일본에 데려가면서 소네 아라스께에게 통감대리직을 맡기고는 각 부의 고문을 모조리 해임하였거니와 각 부의 협판(協辦)을 차관이라 개칭했던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한국으로 급히 다시건너왔다. 이제는 한국에 남아있는 수비대를 일본육군사령부가 관할할 문제와 장차 어떻게 하면 한국사람을 효과적으로 다룰수 있겠는가에 대해서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이또오야말로 일심량역으로 한몸을 쪼개써야 할 형편이니 이 세상에서 가장 분망히 보내는 정객일겁니다. 선생님, 제 말이 맞지요?》

    마에마 교오사꾸는 얼굴에 미소만 지을 뿐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화제를 꺼냈다.

   《오코노미야키하고 다코야시를 못먹어봤겠지. 일본요리치고는 손꼽는건데 내가 오늘 기학이한테 그 맛을 보이지, 어때?》

   《감사합니다. 제자는 선생님이 청하시는대로 먹겠습니다.》

    두 사람은 마주보며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그닥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딘가 어색하고 조심스러우면서 구속스러운데가 있었으니 사생지간에 감정이 이전만 버성겨졌음이 뻔했다.     

    두사람 다가 아무튼 버성기는 감정부터 무마해야할것이라고 생각이 돌았다.

    먼저 간단한 주안상부터 들어왔다. 마에마 교오사꾸는 오뎅이 일본식 술안주인데 빠질 리가 있겠느냐며 서일보고 어서 맛보라했다. 그것은 무와 유부(油腐)를 꼬챙이에 꿰어 끓는 장국에 넣어 익힌것이였다.  

    서일은 술잔에 술을 따라 스승께 곱게 올리고나서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금동리에 오시니 해들일것이 없어서 들놀이를 나가 저희들은 참새를 잡아 안주해드리던 일 생각나십니까?》

   《생각나고말고. 내가 그걸 어찌잊겠나. 평생 제일 아름다운 회억으로 남을건데.》

   《헌데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일본인인줄은 몰랐습니다. 정말몰랐습니다. 선생님은 왜 여적 저희들을 그토록 속여왔습니까?》

   《미안하네. 난 조선에 왔으니 조선사람이 돼여 살아보자고 그랬지.》

   《그게 되겠습니까? 그렇게야 될수 없지요. 보시오. 선생님은 일본인이니까 종당에는 통감부의 벼슬아치가 된게 아닙니까.》

  《벼슬아치라는게 뭐여. 그것도 벼슬이라하나. 난 그저 일개 번역관에 불과한거네. 먹고 살아야 하니 그 일을 하게된것 뿐 행정일이나 정치에는 흥취가 없어서 개입을 하지 않아. 내가 하고싶은건 오로지 고서연구일세.》

   마에마 교오사꾸는 이러면서 자기는 조선땅에다 발을 들여놓은 이래 고서(古書)를 꾸준히 수집해왔는데 그 가운데는 송시열의 저작으로 손꼽는 <<朱子大全箚疑>>, <<우암집>>이나 박세채의<<心學至訣>>, <<理學通錄>>이나 이세필의 <<樂院古事>>, <<王朝禮>>같은 책도 있다고 했다. 이들은 다가 조선왕조시대의 학자, 상신, 문신이였다.

   《듣자니 <동인지문>이라는 책이 있다는데 그걸 내가 얻을 방법이 없구만.》

   《그 책은 최해가 편찬한게 아닙니까. 선생님은 고려후반기의 문학도 연구하시렵니까?》

   《우선 보려고 하네. 그 책을 봤는가?》

   《예. 그 책에는 시와 산문들이 무척 많이 수록됐지요.》

    서일의 말에 마에마 교오사꾸는 귀맛이 부쩍 당기는모양이다.

    김재현(1261~1330)이 1320년에 당시까지 창작되여 전하는 시와 산문들을 모아서 <<동국문감>>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여러 시대, 여러 작가, 시인들의 시와 산문을 묶은 가장 오랜것의 하나였다. 이 작품선집에 근거하여 1338년에는 최해가 또 하나의 큰 규모의 종합작품선집인 <<동인지문>>을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은 고려시기까지의 문학연구에서 귀중한 자료적가치를 가지고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에마 교오사꾸는 이 책을 구하자고 애를 무척쓰는모양이다.

    서일한테 <<동인지문>>이 한권 있었다. 그는 그것을 그저 쉽사리 내놓고싶지는 않았다. 조건적인 어떤 교환이 있어야할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마에마 교오사꾸는 과연 고서(古書)만을 연구했을가? 자기는 행정일과 정치에 대해서는 흥취가 없길래 그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표명하는데 통감부에 그리 오래있으면서 정말 개입하지 않았단말인가? 어쩐지 믿고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일은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선생님, 선생님은 <을사조약>때도 통역관으로 계셨지요? 그런데도 그 일에 선생님이 그래 전혀 관여하지 않으셨단말입니까? 어쩐지...》

   을사조약(乙巳條約)말이 나오니 마에마 교오사꾸는 낯색이 대뜸 흐려났다. 그는 제자가 부어 놓는 술 한잔을 들어 단모금에 굽내고나서 고개를 아래로 툭 꺾더니 침통한 기색으로 반성하는것이였다.

   《내가 2천만 한국인앞에 죄를 졌네, 평생의 오욕이 될 짓을 했네. 이건 참....》

    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침묵했다. 마치 일본의 조선침략에 자책감을 느끼는 것 같아보였다.

   《그 죄야 이또오통감이 진것이죠.》

   서일은 일본을 대표하고있는 이또오 히로부미가 지은 죄를 마음착한 자기 스승에게까지 덮어씨우고싶지는 않아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죄를 아무렴 일개 통역관이 지랴싶었던거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을 모르는 무지에서 생겨난 신임이고 존경이였다. 본의는 아니였다지만 마에마 교오사꾸 그도 역시 조선인민앞에 머리숙여 사죄하지 않으면 아니될 죄를 지은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여러 대신들을 핍박하여 을사조약안(乙巳條約案)을 강제적으로 가결짓는 한편 그때도 일본공사관 통역이였던 마에마 교오사꾸와 외무보좌원 소우노에게 병졸을 거느리고 외부(外部)에 가서 외부인장(外部印章)을 빼앗던지 도둑질해오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그들은 명령대로하였다. 바로 그가 도둑질해 온 도장을 조약에 날인(捺印)해버렷던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이 일로해서 무거운 자책감을 느끼고있는 마에마 교오사꾸는 감히 그일까지는 발설할 수는 없었던것이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지라 서일은 얼굴에 웃음을 피워 화제를 돌렸다.

   《선생님, 듣자니 일본에도 화엄종이 있다는데 사실입니까?》

   《있지. 있고말고. 나라시에 있는 도오다이사가 바로 화엄종의 대본사일세. 그건 왜 물는가?》

   《화엄종은 신라때 의상대사가 화엄경을 소의로하여 세운 종지로 알고있는데 그것이 누구에 의하여 어느때 그리로 넘어갔는가요?》

   《건 나도 잘 모르겠구만. 일본에는 진언종이 따로있소. 일명 밀교라고도 하는데 9세기초엽에 구우까이라는 고승이 당나라에 건너가 불법을 배워 개조가 되었지. 글씨와 시문에 능하다고 전하고있소.》

   《그것이 어떤 불교입니까?》

   《내가 알기는 그것이 세가지 경에 의하여 태장과 금강의 두부를 세워 다라니의 힘으로 즉신성불시킴을 본지로 하는 것이오.》

   《알았습니다. 듣자니 일본에 조선주자학의 영향도 끼쳤다는데 어쩌하여 그리된건가요?》

   《기학이는 고바야까와 다까가게라는 이름을 들어본적이 있는가?》

   《고바야까와 다까가게라?...임진왜란때 이 서울로 침범해왔던 일본 무장아닙니까, 금산의총을 세웠다는.》

   《옳아 맞아. 바로 그지. 그가 책을 갖고 돌아가 펼쳐놓았지.》

   서일은 그일까지는 상세히 모르지만 임진왜란의 주역들인 도요도미 히도요시나 고니시 유끼나까를 비롯한 침략자명단에 그도 그리 짝지지 않게 한자리 있다는 것은 기억하고있었다.

   그는 임진왜란때 왜군의 6진으로 모오리 히데모또 등과 1만 5천의 병력으로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서울에 입성했고 전라도지방을 담당하였다가 금산(錦山)에서 조선의병의 저항을 받아 그 의기에 감동하여 금산칠백의총(錦山七百義塚)을 세웠으며 정유재란에도 내침하였다가 철수할 때 많은 서적을 일본에 반출하여 조선주자학의 영향을 끼치게한 것이다.     

   마에마 교오사꾸는 그를 그리 나쁘게 보지 않는 것 같았다.

   (일본의 무장은 침략과 략탈의 력사를 내놓고 자랑거리가 무엇이 더 있느냐말이다. 흥!)

   서일은 속으로 콧방구를 뀌면서 제 민족의 걸인(傑人) 몇을 그한테 자랑했다. 먼저 3천년전 중국 양자강북쪽 강소성근방에 서(徐)나라를 세웠던 서언왕(徐偃王)은 조선사람이였다는 것, 그리고 금나라의 시조(始祖) 함보(函普)는 고려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고려공신인 이천서씨(利川徐氏) 서희(徐熙)를 아느냐, 자기는 바로 그의 36대손이라 슬쩍 자랑을 내비치기도했다. 마에마 교오사꾸는 그것이 과연 정말이냐고 물었다. 서일은 아니면 내가 거짓말을 하겠느냐면서 1천여년전(거란 成宗統和11年) 거란의 도통(都統) 소손녕(蕭遜寧)이 80만대군으로 고려를 진공하면서 고구려의 옛땅을 자기들의 땅이라면서 엉터리없는 강박으로 고려를 멸하여 저들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할 때 고려의 무신이며 외교가였던 서희(徐熙)가 담판석에 나서서 론리정연한 열변으로 력사에 무지한 적장을 물리치고 유리한 조약을 맺음으로써 국토를 잃지 않은 사실을 알려주었다.

    마에마 교오사꾸는 대견해하면서 서일을 다시보았다.         

   《선생님께서 <吉田松陰>을 사지 못했는데 제것을 먼저 보십시오.》 

   서일은 마에마 교오사꾸가 서점에 책이 다 팔리고 더 없어서 빈손에 돌아온 것을 상기하고 자기는 훗날 아무때건 봐도 된다면서 책을 그의 앞에 내놓았다. 그러니 마에마 교오사꾸가 책을 가져다 첫 공백지에 싸인을 하고나서 되돌려주면서 책값까지 덧붙여 놓는것이였다.

   《아니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서일은 웬 열문인지 몰라 눈이 둥그래졌다.

   《돈을 받아 넣게. 그러면 책을 사지 않은걸로 되지 않는가. 그리구 이 책은 차라리 내가 증송하는걸로 합세. 기념으로 줄만한것도 없는데.》

   《저는 선생님께서 먼저보시라고 내놓은겁니다.》

   《내야 얼마든지 살수있어. 그리구 저...》

    가히 흥정해볼 기회라는 생각이 피뜩떠올라 서일은 대방의 속심을 건너짚으면서 제 안속을 먼저 털어놓았다.

   《선생님, 솔직히 말씀드려 제한테 <동인지문> 한권이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서생님께 드리지요. 그러나 그저드릴수는 없습니다.》

   《오! 그 책을 나한테 주되 뭐하고 교환하겠다 그건가?》

   《예. 한가지 일을 힘써주시오. 만주에 있는 고구려 옛도읍지를 견학하렵니다. 려권을 내게끔 조력해주십시오. 그러시면...》

   《려권이라...음!》

   시국이 복잡해 단속이 엄하지만 자기가 힘쓰면 될듯싶어서 마에마 교오사꾸는 정녕 그렇다면 어디 연구해보자면서 제의를 선선히 받아주었다.

   서일은 신채호가 어디로 채방을 나갔는지 알수 없어서 다시만나보지 못해 섭섭하다는 쪽지만 한 장 남겨놓고 이틑날 서울을 떠났다.

   한데 함흥에 들리니 안해도 거기에 없어서 함께 돌아갈수 없었다. 희연이는 전날 벌써 큰할머니와 함께 아들을 포대기에 싸안고 배편으로 함흥을 떠나 경원으로 간것이다. 본래 서울로 올라갈 때 함흥에 들려 함께 환가기일(還家期日)을 정해놓고갔어야 할것인데 그러지 않고 길이 바쁘다는것만 생각하고 곧추 상경하다보니 이같이 된 것이다.

   서일이 여러날만에 집에 와 보니 산모나 갓난애나 다 별 탈이 없이 무사히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그래서 한시름놓이는데 학교로 나가니 오사기 겐다로교감이 아니 해산한 안해데릴러 함흥에 간다며 청가를 한 사람이 함흥에는 가지 않고 그지간 어데가있었길래 집사람이 학교로 찾아오느냐고 캐면서 까다롭게굴었다. 이에 서일은 정작 문을 나서고 보니 소시적에 머리를 틔워준 계몽스승을 먼저만나보고푼 생각이 돌연히 나서 함흥은 올적에 들리기로 작정하고 서울까지 갔다오는 길이라고했다.

   오사기 겐다로교감은 그의 자변이 듣기좋아도 <여드레 삶은 호박에 이 안 들 소리>같아 의심만 잔뜩 생기는지 눈을 내리깔며 왼고개를 탈더니 계몽스승을 보러갔다면 그래 그 사람의 이름은 뭔가고 물는것이였다. 

   《이름이 뭔가구요? 마에마 교오사꾸입니다. 들어본적이 있겠지요?》

   《마에마 교오사꾸라...못들어봤어. 서울서 뭘하는데?》

   서일은 이걸보면 알게될거라며 <<吉田松陰>>을 내놓았다.

   책거울을 번지던 오사기 겐다로는 금시 경직이 온 모양으로 눈이 퉁사발이 되여 꼼짝하지 않았다. <<弟子 徐一 惠存. 統監府通譯官 前間恭作>>이라 쓴 글줄이 눈뿌리를 빡 긁어놓았기 때문이다.

   《믿을수 없으면 조사해보시지, 그러는게 아마 교감의 직책일텐데.》

   《아니! 아니! 헤헤헤... 그분이 서교장의 스승일줄은! 헤헤헤... 》

   오사기 겐다로의 태도는 불식간에 180°로 급전하고말았다. 얄팍한 낯바닥에 웃음을 게바르면서 허리를 깝신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자기로서도 갑작스레 그짓을 하자니 어색했던지 낯이 벌개지면서 난색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극력 대방의 감정을 발라맞추려했다.

   (멀쩡한 사람이 병신스레 노네. 일본사람의 례절은 본래 이런건가?)

   아무튼 마에마 교오사꾸가 싸인을 해준 그 책이 호신부같아서 좋았다. 

   좀 지나서 박기호가 교장실로 와서 서일은 그와 기분좋게 물었다.

   《내 아들의 이름을 지었나?》

   《지었어. 윤제라고. 진실로 윤(允), 가지런할 제(齊). 어때 맘에 드나?》

   《맘에 들어! 맘에 들어!》 

   두 친구는 자식을 낳으면 애의 이름을 서로 지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박기호의 두 아들 경호(京鎬), 경만(京萬)이는 서일이 이름을 지어준거다.

   한학(漢學)을 전공하면서 병법(兵法), 교리(敎理)와 력사(歷史)에 흥취를 갖고 연구해 온 서일이였다. 하길래 그는 경원에 돌아오자마자 력사연구에 크게 도움이 될 고적답사를 하고자 출국준비를 서두르기시작했다. 사군데서 의병항젱이 발발히 일어나고있는 때에 견학을 떠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동으로 되겠지만 남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을 해보리라 한번 맘을 먹고 보니 그것을 돌릴수 없는 그라 함일사범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현천묵에게 전보를 쳐 최익항을 데리고 급히오라했다. 그래서 박기호까지 넷이 한자리에 모이였는데 서일은 그들에게 자기가 상경하였다가 거기서 꿈밖에 옛스승을 만나본 일을 말하고는 급히 모이게 된 리유를 알려주었다.

   《만주로 건너가 고구려옛도음지를 보고오겠거든 나와 함께 같이가자. 마에마선생이 조력하리라 대답했으니 려권은 해결될 듯 싶다.》

   《그렇다면야 좀좋아서 안가랴!》

   현천묵이 이러자 박기호와 최익항역시 기뻐하며 나섰다.

   마에마 교오사꾸에게 편지로 려권을 청구했더니 꿈같이 쉽게 수속이 되어 내려왔다. 출국리유에 <<고적견학>>이라 밝혀져 있었다. 한데 학생은 어쩌고 떠날가 하던차 마침 7월 6일 도문강을 건너온 의병 200여명이 10일에 신아산 분견대를 습격했다. 함북도는 민심이 황황해졌고 두 일본교원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서일은 기회가 좋다고 앞당겨 방학을 선포했다. 

   1907년 12월현재 일제침략군 수비대주둔지역수가 전국적으로 179개소였다면 1908년 7월이달에 이르러서는 333개소로서 2배로 늘어났다. 그만큼 반일의병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거니와 수비도 훨씬 강화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의병의 국내진입과 이네들의 출국을 막지는 못했다.

   고구려옛도읍지는 만주 길림성 집안(輯安)이다. 당시는 이곳을 국내성(國內城)이라 불렀다. 바로 만포진건너편인데 압록강연안에 있는 평지들가운데서 가장 넓은곳이였다. 북쪽으로는 장백산줄기의 한갈래인 로야령산줄기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뻗었다. 높은 산이 많이 솟아있고 골짜기들이 가로세로 패여졌으며 지형이 매우 험준해서 마치 저쪽 너머에서 쳐들어 오는 적을 막아주는 긴 성과도 같았다. 이 높은 산줄기가 북풍을 막아주어 집안은 아늑하고 양지바르며 땅이 비옥했다.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요 경제적으로도 매우 유리한 곳이였다.

   高句麗에 대하여 중국의 “辭海”는 아래와 같이 밝히였다.

 

   (1) 古國名. 卽高句麗. <<周書 王會解>>作高夷, <<漢書>>作高句驪, 或省作句麗; <<魏略>>作槀離. 在今遼寧新賓東境, 建國年代無考, 后爲衛氏朝鮮所幷. (2)古縣名. 漢武帝滅衛氏朝鮮后以古高句驪國故地置, 治所在今遼寧新賓東北. 昭帝后爲玄菟郡治所. 平帝時地入高句驪國. 東漢又置縣于今沈陽市東, 仍爲玄菟郡治. 十六國后燕時又爲高句驪國所取

  

   사서에 고구려족은 예맥(濊貊)의 한갈래로서 기원전 37년에 시조 주무왕이 혼강류역의 졸본(卒本)에 가서 첫도읍을 세우고 고구려나라를 세웠다고 기재되여있다. 고구려국은 요람기에 한, 부여, 선비 등 주위에 있는 적대국의 군사적위협을 늘 받았다. 하여 기원3년에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건데 안전한 곳에서 국력을 키워 장차 강성한 고구려를 만들기위함이였다.

   일행 4명은 국내성을 보고나서 위나암성을 가보았다. 집안에서 서북쪽으로 약 4㎞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산의 릉선우에 쌓아 만든 성벽은 군데 군데 허물어졌는데 높이가 대략 7~8m, 둘레의 총 길이는 20리나 된다고 한다. 성내에는 여러 건물터와 큰 못, 장대와 망대를 비롯한 시설흔적이 있었다. 그들은 성벽안에서 제일높은 망원대돌각담에 올랐다. 멀리 앞을 내다보니 옛성터ㅡ집안이 한눈에 안겨들었다. 가슴속에서 감회가 사무쳤다.

 

                    신통한 전략은 천문을 꿰뚫었고

                     기묘한 전술은 지리를 통달했네

                     싸움에서 이겨 공로가 이미 높거니

                     만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하리         

  

    을지문덕장군이 수나라침략자에 대한 총공격을 앞두고 적장 우중문에 지어보낸 시다. 얼마나 자신만만한 도전이였던가! 그들은 높이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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