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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5.
무릇 낡고 진부하고 반동적인 것은 그것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하여 종당에는 뒤짚어지기마련이다. 서일은 이런 변증법에 의하여 중국의 자산계급혁명은 승리할것이라 했다. 그러나 중국의 신해혁명은 실패하고말았다.
무창기의(武昌起義)가 일어나자 전국이 반응을 보였다. 국민이 뭉친것이다. 한데 혁명을 반대하던 자들마저 하루밤새에 혁명자로 낯색을 바꾸어 그 수가 본래의 진짜혁명당인보다 몇 배 몇 십배에 달했다. 혁명을 배반하였던 구관료가 혁명당에 참가함으로써 그자들은 혁명당을 내부로부터 파괴하였거니와 나아가서는 혁명사업을 엉망으로 그릇치고만것이다.
구관료가 권력을 다시잡은 후 수하 각 혁명단체들에 당장 해산할 것을 명령했다. 동삼성도독(東三省都督) 조이손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엄하게 다스리라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포고를 내렸다.
<<정체(政體)가 이미 잡혔으니 혁명이라는 말을 더 할 필요가 없다. 딴 마음을 먹고 파괴하려 들면 치안을 해치는 것이 되니 국민의 공적(公敵)이라 한하늘아래서는 살수 없는 것이다... 또한 토비로 취급하여 엄히 처리하리라.>>
원세개가 총독(總督)을 도독(都督)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뿐 사람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쓰고있는게 아닌가. 하니까 본래의 낡아버린 똥통겉면에다 뼁끼칠을 새로했을 뿐 똥통자체는 바꾸지 않고 그냥 쓰는 격이였다.
망국민의 신세로 만주땅에 몰려와 발을 붙이려고 아득바득하는 신세가긍한 조선민족으로 놓고 보면 아무튼 원세개가 대총통이 되어 권력행사를 하니 리로운점도 좀 있는것 같았다.
유하현 삼원보 추가장으로 이회영형제가 먼저가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이 퍼져서 국치를 당하자 고향을 등지고 월경한 동포교민들이 그곳을 찾아 확 몰려들었다. 그러자 그곳의 토민들은 의혹을 품고 불안해하면서 토지와 가옥매매 일절을 거절하여 정착하여 살기 어렵게 되였다. 그리하여 대표가 북경에 있는 원세개를 찾아가 사정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원세개는 한국과 인연이 있는지라 이들의 고충을 헤아려 비서 호명신(胡明臣)을 동반케 하여 동삼성도독(東三省都督) 조이손(趙爾巽)을 방문하게 하였다.
조이손은 원세개의 명령을 받들어 성내의 각 현장에게 명령하여 만주에 있는 모든 조선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편의를 도모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리하였길래 이후부터는 토민의 배타적인 태도나 언동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누가 원세개를 나쁘다하랴. 장송린지주가 말하듯이 검둥이가 올라앉건 백강아지가 올라앉건 나만 못살게 굴지 않으면 되는것이다.
1912년 봄철 씨붙임이 끝나자 명동학교는 새 교사를 지어 들면서 뜻대로 중학반까지 개설했다. 수백명을 용납할 계획으로 지은 교사니 대단히 컸다. 하지만 서일은 학교가 없는 곳에 새로 더 창설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명동학교는 학생이 많아져서 더욱 활기를 띠였다.
선생들은 교학에 열중하면서 여러종의 漢文으로 된 신문을 받아보았다. 그러면서 중국말을 되도록 빨리배우는것이 매개 선생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이곳의 토민들과 교제를 틔이어 그네들과는 되도록 우의적으로 지내면서 불화를 없애자는 의도에서였다. 억울하게 조선사람은 일본놈의 앞잡이라는 소리를 토민들에게서 듣지 말아야 하고 그러자면 실제적인 어떤 표현이 있어야한다. 서일은 이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9월중순의 어느날 정오, 서일이 점심을 먹고나서 등교를 하니 선생들이 교무실에서 웬 중년의 손님을 둘러싸고 앉아 얘기판을 벌리고 있었다.
《아, 왔습니다. 저분이 우리 학교 교장입니다.》
채오가 서일을 먼저발견하고 이러자 현천묵이 일어나 그 손님을 소개하는것이였다.
《연해주에서 오신 한선생이네. 왕청에 오신 걸음에 모처럼 자네를 만나자구 학교에 들리신거네. 》
《자네 기학이 맞지?》
중년의 사나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쪽을 향해 웃고 있었다.
《누구신지?...》
손님이 애명까지 부르면서 웃는걸 보면 필시 아는 처지일텐데 누군지 머리에 인츰 떠오르지 않아 서일은 떨떠름했다.
《난 농포리서 살다가 연해주에 간 한기욱이요. 내가 낳기를 농포서 났지. 그러니 서교장하구야 내가 동고향사람되는게 아닌가. 왜 생각안나시오? 소년시절 한번은 밤에 참외훔치러 왔다가...》
《아 그렇지!》
서일은 그제야 머리에 떠올라 손벽을 탁 쳤다. 한기욱(韓基昱)을 오늘 이렇게 만날줄이야 어찌알았으랴! 그는 과연 서일이 태여난 금동(金熙洞) 바로 앞마을 농포(農圃)에서 태여났으니 한고향사람이 옳은거다. 서일은 아직 서당생이였던 소시적에 그의 외할아버지가 산자락을 뚜지고 심어놓은 참외를 훔치러 갔다가 참외막지키는 황둥개한테 쫓기고 물려 혼쌀먹던 일만은 잊혀지지 않고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사실은 그때 화를 당해야 할건 나였어. 내가 주모자였으니깐. 저 기학이하고 삼용이를 먼저 든장질해놓구는 기여이 잡아 끌었거든. 안가겠다는걸. 그래서 간건데 개가 불량한 침입자임을 알고서 달려들어... 그통에 결국 당하구만건 바로 이 서교장. 그놈의 개한테 다리각을 물리기까지 했다니까.》
《따져보면 진짜 잘못은 내한테있었소. 그놈의 개를 밤이라구 풀어놨으니까. 내가 그러지만 않았다면 아무런 사고도 안났을데. 아 니그렇소, 론리대로 하면.》
현천묵의 말 끝에 한기욱이 자아반성을 해서 모두 하하 웃었다.
서일이 10살먹었을 때니 한기욱은 그때 24살의 한창 청년시절이였다. 한기욱은 16살에 연해주로 이사가 그때는 집이 거기 연추(煙秋)에 있었다. 그는 외할아버지가 보곱파 떠난지 8년만에 처음으로 고향에 왔던거다.
이젠 20년이 넘는다. 그것마저 아름다운 추억으로 될줄이야!
한기욱이 39살나던 1906년도다. 이상설이 용정촌에다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신설하자 그는 거기서 숙감(塾監)으로 시무(視務)를 했고 그 이듬해는 연추에 돌아가 자체로 신흥의숙(新興義塾)을 세워 로씨아에 있는 동포청년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지금은 독실한 대종교신도가 되어 아예 교의 일만 보고있는것이다. 한기욱은 스스로 북만지역의 시교원(施敎員)을 자임하고 나서서 우쑤리강을 건너 의란도(依蘭道) 밀산(密山)으로 이주까지 했다. 그는 국내에서 건너와 환국(還國)하지 않고 그냥 포교에 전심하고 있는 홍암대종사를 만나보려고 화룡으로 가던 걸음에 왕청에 들린 것이다. 한데 오고 보니 교우들이 권유하는지라 며칠 묵을 생각이였다.
《시교를 다녀도 안쪽으로 너무들어가지 말아주시오. 거기는 삼년전 국내서 호열자가 돌던 그 모양이랍니다.》
서일이 한마디 충고했다.
《그렇게 심한가?》
《그보다도 더 심한 것 같습니다. 재작년하구 작년 련거퍼 두해나 큰물이 져 피해가 막심한데다 로빈(만주리)에서는 쥐병까지 겹쳐 인명피해가 형편없는 바 죽은 자가 수만명에 이른답니다. 그리구 치치할에서는 온역이 돌아 지금도 매일 한명꼴로 죽어가고 어떤데서는 류행성 홍진이 도는데다 독성페염까지 겹쳐 한 마을 30여호가 전부 사망한 일도 발생했답니다.》
서일은 의사아니면 지금은 안쪽 멀리로 들어가지 말아달라고 재삼 당부하면서 그를 조용한 자기의 교장실로 모시였다. 로씨아의 형편과 거기에 있는 여러분의 소식을 몰라 답답하던차 잘만난 것이다.
《한선생은 연추서 살다오셨다니 최재형선생을 잘 아시겠는데 그 어른님 지금 어떻게 지내십니까? 건재하신지?》
《건재하지, 건재하구말구. 최선생은 지금 노우기에프스크 재류 한족회 회장으로 사업하고계시는데 교포치고 그분의 방조를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없지. 공익사업을 하려면 경제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야한다면서 요즘은 유류제조소(油類製造所)를 세웠는데 인부가 백명도 넘고 그저 일만하는게 아니라 일단 유사시에는 무장들고 나가 싸울수 있게끔 군사훈련도 시키고있는 판이지요.》
《잘 하시네! 둔전제와 같은 둔공제를 하는군요!》
《그렇지. 바로 그거지.》
《듣자니 거기에 계시는 이상설선생분은 <성명회>를 조직하고는 일본천황께 힐책하는 서한까지 보냈다더군요. 정말인지? 그분이 을사조약이 늑결되니 분해서 자결하자구해서 소동을 빚던 일이 생각납니다.》
《서선생도 그 얘기를 들었구만.》
《들은게 아닙니다. 서울에 갔다가 제눈으로 직접본겁니다.》
《오 그렇소! 성피지악 명아지원(聲彼之惡 鳴我之怨)이라, 그 첫두글자를 각각 따서 조직을 내오고는 왜황을 질책했거니와 9천 9인의 련명으로 세계만방에 왜적의 범죄적 행패를 규탄하는 성명서도 전달했던거요. 나도 그때 서명을 했더랬지.》
한기욱은 이러면서 이상설이 이동휘(李東輝)와 같이 본래있던 신한촌(新韓村)을 갑자기 떠나 그로데꼬브로 옮겨갔다고 하면서 지난해의 11월에 로씨아 극동총독(極東總督) 보스타빈(BOSTABIN)과 교섭하여 산업장려와 교육보급을 목적으로한다는 조건밑에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勸業新聞”까지 발행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있노라했다. 그러면서 그는 또 보탰다.
《거기는 한인촌락이 39개나 되고 동포도 8,000여명이라니 군중의 지지만 받으면 뭐나 하기가 좋지. 그분은 지금 이종호와 이범진 두분의 의연금을 갖고 신한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해볼 타산까지 하는걸 보면 보스타빈과 관계가 매우 좋은 모양이더군.》
서일은 아 그런가 하면서 머리를 끄덕이고는 해아밀사건으로 정부가 일본의 사촉에 못배겨 어리석게도 그를 사형에 언도한 일을 상기하고 웃었다.
한기욱이 유인석은 크게 맥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1910년 5월 15일에 이범윤, 이상설, 정재관 등 지사들의 간청으로 13도 의군도총재(義軍都總裁)로 추대된 그였지만 일거에 조국탈환을 도모하였으나 여의치않다는것이였다.
유인석은 문인 백삼규(白三奎), 김기한(金起漢), 장덕중(張德中) 등 세사람을 북경에 파견하여 대총통이 된 원세개와 정부요인에게 서한을 보내 韓中共同抗日을 권고해봤다. 그러나 회답은 서운했다. 내용은 찬성하나 국력이 미약하니 시기상조라는 대답이였다.
《로인이 정세를 파악못하시는군. 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언제...》
서일은 입가에 조소를 머금은채 말했다.
원세개는 내전을 벌리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도 모르고 아직도 사대주의사상을 버리지 못해 외국의 군사력을 빌려는 유인석의 어리석음에 그는 한숨이 나갔던 것이다.
마을밖 늪에서 오리들이 갈갈거리고 흰 갈목은 바람결에 한들한들거렸다. 만주에 와서 두 번째 맞는 가을이다.
(일본은 살아있는 천황을 신처럼 만들어 모시게 함으로써 야마도민족을 정신적으로 결집(結集)시키고있다. 우리는 왜 檀君皇祖를 우상으로 하여 배달민족을 묶어세우지 못하겠는가. 라철이 노린것은 이것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권의 “三一神誥” 그것만으로는 안되는 것이다. 교리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이 있어야할것이고 해석이 있어야 할것이고 또한 다른 교와 같지 않은것이 무엇임을 비교로써 밝혀내야 할 것이다. 교리가 명백히 안겨올 그때면 그것을 따르려는 자의 신앙심은 자연히 굳어지게 되고 여럿을 한 사람 한 마음같이 뭉치게 하는 응집력(凝集力)이 생기게 될 것이다.)
서일의 깨달음은 이러했다. 그는 나도 이제는 대종교를 신봉해야한다, 그리고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한편 동포 전체를 이에 결집(結集)시고 그 기초상에서 대일무력항쟁을 조직전개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리라 도슬려 마음먹었다.
며칠후 서일은 박기호와 함께 홍암대종사를 만나러 화룡으로 가는 한기욱을 따라나섰다. 박기호도 여직 대종교를 신봉하지 않고있었는데 라철이 어떻게 생긴 분인지 만나보고 서일과 같이 입교할 생각이였던 것이다.
셋은 용정을 지나면서 박찬익한테 들리였다.
서일은 자기가 그지간 번역한것을 그한테 주면서 이것은 근근히 “三一神誥”의 “原序”와 “御贊”만 번역한것이요 그나마 초역이다 보통문장과는 달라 경전인것만큼 번역이 제대로 되자면 교리를 깊이 연구한 기초우에서만이 가능하니 그저 참고로나 하고 그대로는 사용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박찬익은 그러리라 대답해놓고 자기도 홍암대종사를 보러 가겠다면서 따라나섰다. 그는 자기가 공업학교의 학생전부를 이끌고 대종교를 신봉한것은 홍암대종사와 백순도형(白純道兄)의 지도하에 된것이라 알려주었다....
한편 백두산에 天祭를 지내고나서 和龍縣 三道構 靑湖에 교당을 신설하고 곧 이어서 산북지사(山北支司)를 두어 그곳 교인들을 거느리게 한 라철(羅喆)은 백순(白純), 강우(姜虞)와 함께 주위의 여러곳을 돌며 포교를 하고나서 다시 청파호에 돌아왔다.
때는 음력 8월 15일 곧 추석날이였다.
백순은 초휘(初諱)가 락현(樂賢)인데 1864년 4월 26일 忠淸南道 公州邑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크면 비상한 인물이 되리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31세에 동학란을 당하여 대세를 달관(達觀)하고 일본유신력사와 서양력사, 지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을 구입하여 전수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공주읍에다 농공은행과 보명학교를 설립했고 강경읍에 농공은행지점(支店)과 보화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니 호서일대(湖西一帶)의 교육과 경제발전에 바친 그의 기여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그는 46세 나던 해인 1909년 4월 21일에 대종교를 신봉하여 2년후에 참교(參敎)로 피선(被選)됐다.
다른 한사람 강우(姜虞)는 초휘(初諱)가 석화(錫華) 또는 석기(錫箕)인바 1862년 6월 27일 忠淸南道 夫餘郡 場岩面 長亭里에서 태여났다. 그는 7세때부터 본적지의 의숙(義塾)에서 한학(漢學)을 수업하였고 34세때부터 성진, 길주, 경원의 감리(監理)를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909년 정월 15일에 대종교를 신봉하여 2년만인 신해년(辛亥年) 정월 15일에 지교(知敎)로 된 것이다.
라철, 강우, 배순 이 세 거물급 인물은 삼도구 안산에 오르고 있었다.
《강서리가 내려 유하현이 재해라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백순이 문득 남만 유하현의 교도와 동포들을 생각하면서 근심했다.
《회영이도 있구 시영이도 있구 동삼이도 있잖은가. 경학사가 어련히 해결해나가잖을라구.》
강우가 그들을 믿어 하는 말이였다.
《동만 여기까지 재해면 어쩔번했을까. 이 류랑민족이 다가 곤경을 치르지 않게 된게 참 다행인가봅니다. 가마히 우에 계시나 한으로 든 보시며 낳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
라철은 檀君皇祖가 계시는 하늘을 우러러 조용히 주송(呪誦)하고나서 강호와 물었다.
《왕청으로는 언제쯤 가면 좋을가? 요즘 그쪽의 시교정황을 몰라서 답답...》
《한승묵이랑있으니 제대로 되겠지. 한데 듣자니 그곳서 중광단을 세워 민심을 끌고있는 서일이가 아직 입교도 안한 사람이라누만. 그 사람이 우리 대교를 몰리해하고 그러는거아닌가?》
《인자 뭐랬소. 입교를 안했다니, 서일이가?》
《아마 그러는거같애. 대사는 그를 아시오?》
《보진 못했어두 안지야 몇해되지. 그럴 사연이 있어서.》
라철은 얼굴에 웃음을 그믈그믈 지으면서 이쯤 말해놓고 그가 왜 아직 입교도 안했을가 궁리하다가 래일 당장 왕청으로 떠나자했다.
그와 친밀한 교우인 강우와 백순은 대사가 왜서 서일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갖고있는지 그 원인을 미처몰랐다. 라철이 알려주지 않았던거다.
산상에 오르니 불어 오는 건들바람이 뺨을 스쳐 기분이 상쾌했다.
만주로 건너와 그 사이 포교를 열심히 하였더니 따르는 자 수만에 달하는지라 신심이 생겨 기쁘면서 심정이 한결 거뿐해진 세 사람은 각자 산자운(山字韻)으로 한시(漢詩)짓기를 비기면서 이날을 즐기였다....
한편 한기욱이 대동한 일행 4명이 삼도구에 도착하니 추석이 지난지 한주일만인 양력 10월초. 그들을 마침 만나게 되었다. 네 사람은 우러러 경모하고싶은 분들을 대하자 몸가짐을 바로하고 국궁재배(鞠躬再拜)했다.
그들을 면목아는 사람은 오직 박찬익뿐이였다. 하여 그가 동행한 세사람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자네가 서일이였구려!》
라철이 어깨를 다독이면서 반겨맞아주니 서일은 감개무량했다.
《소인은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왔습니다.》
서일의 말에 라철은 고개만 끄덕이였다. 그 끄덕임 그 표정이 그러면그렇겠지 하고 말하고 있었다.
박찬익이 서일몰래 “三一神誥”의 부분적인 번역고를 갖고와서 홍암대종사에게 바치는것이였다.
(저치가 저건 왜 갖고와서 바쳐? 원, 사람이...)
서일은 민망스러워 그를 힐끗 가로봤다.
《서선생이 번역한거란말이요?... 본래 시교를 해야 할 사람이로군!》
라철이 번역문을 보고 칭찬하니 서일은 송구스럽고 거북했다.
《건데 왜 여직 입교를 안하오?》
《방금 말씀을 올리지 않습디까, 가르침받자구요. 받아만주시면야...》
《어련히 그러잖으리. 하하하...》
라철은 다시한번 어깨를 다독이면서 기뻐했다. 그리고는 서일이 “重光團”을 세운건 과연 잘한 일이라면서 대오를 크게 발전시킬 것을 희망했다.
서일과 박기호는 宗師와 大兄 세분의 비준과 많은 교인들의 환영속에서 마침내 입교했다.
미신적인 색채를 담습한 종교여서인지 입교절차며 순서가 번쇄하고 까다로우면서 또한 신기하기도했다. 그러나 그래도 입교자는 찍소리말고 쫓아야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본래 이모양으로 되어진 것이였다!
입교자는 입교의절(入敎儀節)이며 봉교과규(奉敎課規)를 비롯한 모든 것을 알고 그대로해야했다. 그래도 즐겨 신봉하려는 사람이 날따라 많아가고 있는것은 무엇때문일가?... 지식인들은, 애국지사들은 700여년만에 다시금 중광한 대종교가 무엇을 의미하며 그의 바람이 무엇이라는 것을 차츰 깨닫고 찾아오고 있었다.
<<大皇祖檀君聖神之位>> 아홉글자가 씌여진 지패(紙牌)가 북쪽벽에 봉안(奉安)되였다.
서일과 박기호는 숭엄한 분위기속에서 서사(誓辭)를 했다.
維
開極立道 4369년 壬子 8月 24日 不肖子孫 徐 一, 朴基浩 謹誓告于.
大皇祖聖神 伏惟
聖靈在上 善惡禍福 儆示天解 終身服膺 望敢改易
有渝此心 甘受罪罰.
뜻인즉은 대황조성신앞에 엎드려 삼가 알리옵니다, 성스러운 신령님이 하늘에서 살피시거니 선악과 화복을 경계해야 함을 이 몸이 다하도록 받으리라면서 이를 감히 어기고 마음을 달리먹는다면 그 어떠한 형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것이였다.
서일이나 박기호나 다가 대종교의 미신적인 색채가 없이 꾸며진 봉교과규(奉敎課規)가 맘에 들었다. 그것은 입교한 후 매개 교인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있었다.
그것을 조목별로 라렬한 것을 보면 이러했다.
1) 奉敎人은 서로 화목하며 우애하되 患難相救하고 哀慶相問하며 한집안의 형제자매같이 지낼것임.
2) 奉敎人이凡有婚喪에 必告神廟하고 만일 廟遠하면 自家에서 神位를 設行하여 附近敎友들이 會集協辦할것임.(酒食供饋로써 主家에 貽弊말며 贈品賻儀로 래빈에게 忮望치말고 煩禮를 取消하며 簡便을 爲主함)
3) 奉敎人이 生男生女하면 반드시 告廟命名할것임.
4) 奉敎人은 서로 鬨鬪爭訟치말며 만일 疑結不平之事있으면 敎兄에게 請하여 公平한 判決을 請하고 반드시 服從할것임.(만일 重要한 事案일 때는 多數敎兄의 處決에 服從할것임.)
5) 奉敎人은 無論男女하고 文字를 解得치 못하는 者는 마땅히 國文을 先習하되 만일 貧窮無暇者에게는 不得强行할것임.
6) 奉敎人은 서로 侵奪과 欺滿과 侮辱과 誣陷과 誹謗치 말것임.
7) 奉敎人은 荒飮, 賭博치말며 貪財, 好色치 말며 剽竊,竊盜치말것임.
8) 奉敎人은 流言飛語를 믿지 말며 恐怯怨尤를 품지 말며 남의 過惡을 드러내지 말며 瑕疵를 의논치 말고 遙邪左道와 符讖巫卜들의 方術을 가까이 말것임.
9) 奉敎人은 반드시 本分을 지키고 삼가 宮靈을 좇으며 賦稅와 徭役에 各蓋其務할것임.
10) 奉敎人은 家傳의 舊物과 國傳의 古蹟을 반드시 重視 하고 現行의 法制와 通俗의時宜에 또한拘滯치말것임
11) 奉敎人은 居內出外에 반드시 愼口寡言하며 高聲喧囔치말고 靜肅端嚴으로써 爲主할것임.
12) 奉敎人은 敎門]을 빙자하여 事端을 일으키지 말고 敎衆을 빙자하여 世論에 다투지 말것임.
13) 奉敎人은 비록 敎外人이나 域外인을 對하여도 溫恭謙和로써 相對하고 결코 輕侮와 岐視가 없을것임.
14) 奉敎人은 本國古來의 忠烈, 英豪의 神明을 모두 崇敬할 것이요 비록 他國의 賢聖 및 敎門들도 또한 敬待할 것임.
15) 만일 本敎를 독신하는 사람이 廣見益智를 爲하여 他敎에 入敎하여도 不禁할지오 또 他敎에 卽入한 자가 本敎에 願入하면 곧 許可할지니 대개 한배검의 寬弘하신 大道를 仰禮하여 異端을 不攻함. 비록 域外人라도 本敎에 願入하면 도한 許可하여 다 敎友로써 同視無間으로되 入敎한지 15年未滿이면 敎理를 宣傳하거나 敎務에 參與하는 權利가 없고 비록 만 15年뒤라도 國籍을 不移하면 本敎 職員의 選任은 不能함.(但 高句麗 및 渤海의 舊疆內人은 此規를 不準함.)
16) 만일 敎門을 凌辱하거나 한배검께 漫語를 用하는 者가 有하면 誓死必爭하고 或 因此로 廢命傷身하면 崇其節義하며 恤其妻子할것임.
17) 奉敎人은 敎規를 嚴守할것인바 如或犯戒면 當有罰則하니 一曰 勸告, 二曰 警誚, 三曰 停敎, 四曰 黙敎 (罰有細則).
18) 봉교인은 修道持戒를 爲重模範者는 當有賞法하니 一曰 敬待, 二曰 襃章, 三曰 特選, 四曰 古經閣參務.(賞有細則)
19) 追後의 諸般儀式 및 規程을 自古經閣으로 隨時增刪하고 卽宜 통지하여 一體 遵行케할것임.
《이건 학생수칙보다 더 세심하고 엄하게 째여졌는걸! 미처 생각지를 못했어. 술잘마시고 고성을 잘 지르던 천묵이 왜 그 버릇을 뚝 떼여버렸는가했더니!...》
박기호가 서일이와 입교감상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도 그 느낌이긴 하네만 이곳까지 와서 입교하노라니 새로이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어서 속으로 다짐하고 한배검님앞에 아뢰였지.》
《뭐라, 그게 뭣인데?》
《우리의 입교를 기념해 여기다 학교를 하나 창설하자고. 어떤가? 명동에 쓰려던 경비중 200원을 이리로 옮겨다 쓰면 우선 해결은 될거야. 이곳은 장차 총본사가 일어설 성지가 아닌가. 이미 북지사가 창설되여 이곳 교도들을 관리하니 학교를 세우면 장차 그들이 발벗고 도와나설거야.》
서일의 주장에 박기호는 두손들어 동의했다. 그러면서 학교를 자기가 맡겠다고 자진해나섰다. 서일이 속심바라던바였다. 박기호는 진취심있고 분발하며 책임성이 강한 사람이다. 서일은 자기를 믿듯이 그를 믿는다.
이리하여 청호에 새 학교가 창설되였으니 교명을 “靑一學校”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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