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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2.
지난해(1910) 6월 29일의 조사에 보면 전국적으로 단군교를 신봉하는 사람이 정확하게 서울이 2,748명이고 지방이 18,791명이니 도합 21,539명이였다. 홍암대종사 라철은 이 기초상에서 7월 30일에 교명을 대종교(大倧敎)라 개칭하고 기년(紀年)을 천신강세(天神降世)를 사용하게 결정했다. 한데 이렇게 해놓으니 교명개칭을 놓고 세간에서는 그래서야 되느냐, 그런다면 한배검의 도(道)는 말살되는게 아니냐며 온갖의 시시비비가 많았다. 지어는 이설과 함께 류언비어까지 나돌았다.
사실은 라철도 그럴만한 리유가 충분히 있어서 그같이 한것이다.
일본은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미명아래 식민지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합방으로 한국을 완전히 먹어버리고 총독부를 세워서부터는 더욱더 혹독한 무단정치(武斷政治)로 백성을 다스리는 한편 한국의 문화를 말살하고 배달민족을 일본인화(日本人化) 하기위해 강력한 정책을 세우고있었던 것이다. 다시말해 일본은 이 나라를 일시적인 착취대상으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를 동화(同化)함으로써 완전하고 영구적인 예속지로 만들려는것이였다.
한즉 그자들은 교의(敎義)야 천신대도(天神大道)를 지상에 널리 선포하여 홍제인세(弘濟人世)의 큰 리념을 현실화하려는것이라지만 이 교를 국조단군(國祖檀君)을 숭앙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애국단체로 인정하고 감시할것이였다. 안그럴가? 라철은 그러다가 악화될 경우에는 그자들이 이 교를 아예 페교시킬수 있다는 판단으로부터 우선 교명의 <<檀君>>두자를 표면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大倧>>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大倧>>의 <<大>>자는 그 뜻이 <<한>>이고 <<倧>>은 <<검>>이니 곧 大倧은 檀君名詞以前으로 삭급(朔及)하여 개천립도(開天立道)의 造, 敎, 治化의 삼신명사(三神名詞)를 함께 쓰는 것으로 된다.
한마디로 말해 교명은 바꾸었어도 교리는 추호도 변함이 없다는거다.
이를 리해못한 정훈모(鄭勳模)는 교문(敎門)을 분립했다는 리유로 끝내 리탈하고말았다. 하여 대종교와 단군교로 양립(兩立)하게 되었다.
섭섭한 일이다. 그리고 안탑깜기도 했다. 잃어버린 국권을 어떻게 하면 다시회복할가고 애도 같이 태우고 힘도 같이 써보았다. 정훈모는 그와 심정이 같았던것이다. 하기에 라철이 네 번째만에는 그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간게 아닌가.
《귀공의 금후 사명은 포명서에 관한 일이요.》
라철은 두일백옹(翁)이 경전 세권을 주며 부탁하던 말을 다시상기했다.
그때는 그도 정훈모도 그가 그러는 것이 시끄럽기만해서 거절하느라 숙소를 청광관에서 개평관으로 옮기기까지 했던 것이다.
《국운은 이미 다하였는데 어찌 이 바쁜 시기에 쓸데없는 일로 다니시오. 곧 귀국하여 단군대황조의 교화를 펴시오.》
닫새지나서 밤에 그가 다시찾아와 간곡히 부탁하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때에야 비로서 깨달음이 있게 된 그들이 아니였는가. 라철도 정훈모도 두일백옹의 그 간곡한 부탁을 듣고서야 정치를 단념하고 민족종교를 일으킬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미 나라는 망하였으나 민족에게만은 진실한 의식을 배양시켜 민족복흥과 국가재건의 원동력을 만들기 위해서!
이것이 단군교를 중광하는 목적이다. 한데 이렇게 각기나가다가는?...
분열을 꾀하는자가 없으면 모순은 생기지 않으련만. 라철은 이유형(李裕馨)이 작간질한것을 다시생각하면 괘씸하기만했다.
《돌대가리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지!》
이유형은 정훈모를 암유(暗誘)하여 대교의 명령을 위반하게 하였고 단군교라 별칭하고는 무근거한 말을 만들어 관서(官署)에 무고함으로써 교문전체를 위험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대종교본사는 지난해의 12월 22일에 400여명의 교도가 대회를 열고 그의 죄상(罪狀)을 성토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무튼 기분잡치는 일이였다.
1911년이 돌아오자 라철은 정월달에 손수 신리대전(神理大全)을 지어 발행했다. 그리고는 7월 21일이 되자 그는 수원 몇을 거느리고 고적(古蹟)과 영적(靈蹟)을 답사하고 봉심(奉審)하려고 서울을 떠나 장도에 올랐다. 로선은 강화(江華), 평양(平壤)을 거쳐 천산북록(天山北麓) 청파호(靑坡湖)에 이르는것이였다.
서울을 떠나고있는 라철의 머리속에는 잊지 못할 사람 둘이 떠올랐다. 한 사람은 검은 턱수염에 팔자콧수염을 멋들어지게 자래운 신규식(申圭植)이다. 올해 32살인 그는 22살 때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고 그 학교를 졸업해서는 군계에 복무하여 보병영에서 직무를 맡기도 했다. 26살나던 해 그는 <<乙巳條約>>이 체결됨에 비분강개한 나머지 음독자살을 하려했다. 그러다가 집안사람들에게 발각되여 긴급치료를 받은 결과 생명은 건졌으나 음독한 약기운이 심해서 시신경(視神經)이 잘못되였다. 그래서 외견상 흘겨보는 눈이 되고만것이다. 그때로부터 신규식은 자호(自號)를 예관(睨觀)이라 하고 일체의 세상사를 옆눈으로 흘겨보게 된 것이다.
신규식은 그후 군대강제해산이 있어서 통분한데다 경술국치(庚戌國恥)까지 당하고 보니 견딜수 없어서 다시 자결을 하려다가 라철의 간곡한 설득과 만류로 구명되였다. 그는 분발하여 망한 나라를 구해보겠다고 학회조직이며 대한자강회며 대한협회 등 정치단체에 가입하고 교육사업에도 전념해보았다. 그는 어느덧 라철의 지우로 되었고 대종교에 입교하여 독실한 신자로 되기까지 했다. 그러한 그가 얼마전에 중국대륙으로 건너간 것이다.
《저는 대륙에 건너가 중국의 혁명투사들과 한국의 지사들간의 동지적 우호와 유대관계를 건립하도록 노력해볼텝니다. 그리고 포교를 널리하여 우리의 대교가 만방에 빛을 뿌리게 하렵니다.》
떠날 때 지기이며 벗이자 자기가 스승으로 모시는 홍암대종사 라철앞에서 한 말이였다. 지금 상해에 가 있노라 소식이 왔다. 라철은 그를 믿는다.
다른 한 사람은 서일이였다. 라철은 류배지인 지도(智島)에서 돌아오자 이시영(李始榮)한테서 합북도 경원에서 선생노릇을 하는 서일이라는 젊은이가 재판을 받게 된 자기를 구원해보겠다고 서울까지 올라왔더랬다고 알려줬던 것이다. 어떻게 생긴 젊은인지 한번 만나보고싶던차 이홍래를 통해서 소상(昭詳)하게 알게 된건데 올3월에 그가 重光團이라는 민중구국항일단체를 창립했다니 반가우면서 만날 생각이 더 간절해지게 된 것이다. 그러한 애국청년과 선각자들에 의해서 이 나라는 혈기가 끊어지지 않을것이며 민족은 복흥(復興) 할 날이 있으리라고 굳게 믿게 되는 라철이였다.
인천에서 강화도로 가는 배가 떠나기에 일행이 그 배에 오를 때였다. 일본 경찰이 그들을 수상하게 여겼던지 그냥 가로보고 흘겨보는것이였다.
봉교과규(奉敎課規)에 봉교인은 비록 교외인이나 역외인을 대하여도 온공겸화(溫恭謙和)로써 상대해야지 결코 깔보거나 기시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경찰이 노는 꼴을 보니 욕지기가 나서 참기 어려웠다.
《저 자식은 먹을걸 못먹어서 흘게눈이 됐나?》
누군가의 입에서는 이런 소리가 불쑥 튀여나가고말았다.
모두들 웃었다.
경찰은 자기를 조롱하는지라 두눈을 지릅떴다.
《저꼴 좀 봐, 강판에 뻐드러진 황소눈깔이 저래.》
또 누군가 한마디해서 이번에는 더 크게들 웃었다.
경찰은 독이 나서 풀풀 거리고 발을 구르면서 어째보려했다.
이때 집이 제물포에 있다는 한 대종교신도가 개를 데리고 해변으로 나왔다가 마침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먼저 허리를 크게 굽혀 라철에게 인사를 올린 후 그자를 나무렸다.
《이분은 홍암대종사이신데 왜 인사를 안해? 우리 집 이 진돗개는 버릇없는 사람은 물어.》
이 소리를 정말로 듣고 경찰은 황겁히 굽석 인사했다.
그 모양이 우수워 일행은 또 한바탕 웃고말았다.
고려, 조선왕조때의 피난지로 알려진 강화도에는 명승고적이 많았다. 강화읍만도 갑곳돈대, 고려궁터, 용흥문이 있었다. 도내에는 전등사, 보문사같은 절도 여럿있다. 마니산(摩尼山) 산정에는 단군성지(檀君聖地)가 있는 것이다.
祭天檀 (塹城檀, 塹星檀)
제천단은 한배검이 366사(事)로 치화(治化)의 공(功)을 세움과 아울러 큰 례의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여 보본(報本)의 정신을 드높인 제정일치(祭政一致)의 거룩한 영적(靈蹟)으로써 마니산꼭대기에 있는 것이다.
동사(東史)에 기술된 것을 보면
<<제천단은 강화 마니산에 있으니 단군님께서 혈구(穴口)의 바다와 마니의 언덕에 성을 둘러 쌓고 단을 만들어서 제천단으로 이름하다. 제단높이는 17척인데 돌로써 더하여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그니 우의 네모는 각각 6척 6촌이오 아래의 둘레는 60척이라 혹자는 이르되 마니는 강과 바다의 모퉁이라 땅이 따로 떨어지고 깨끗하며 고요하여 신명의 집이 된다. 그러므로 제터를 닦아서 한얼님께 제사하는 것이다.
또 이르되 하늘은 그늘(陰)을 좋아하고 땅은 별을 귀하므로 제단을 반드시 수중에 하는 것이요 위가 네모나고 아래가 둥글음 천지의 뜻을 세우는것이다.>>
승람(勝覽)에 기록된 글을 보면 이러했다.
<<강화부의 남쪽 35리에 마니산이 있고 산이마에 참성단(塹城檀)이 있으니 돌을 더해 쌓아서 우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근지라 이것이 단군(檀君)님이 천제(天祭)하던 곳이니 이조에서 고려의 옛제도로 인하여 여기서 별을 제사하고 조선 태종(太宗)이 임금이 되기 전에 친히 제계하셨다.>>
비고에 고려 고종 46년에 교서랑 경유(校書郞 景瑜)가 말하되 “대궐을 마니산에 세우면 가히 나라 복상(福祥)을 늘게 하리라” 함에 명령하여 리궁(離宮)을 그 산 남쪽에 세우니라. 조선 인조(仁祖) 17년에 고쳐짓다. 또 조선 숙종(肅宗) 26년 5월에 고쳐짓고 석패를 세워 기록하니 가로대
<<동토(東土) 수십리에 둘러서 강도(江都)가 보장하는 중한 땅이 되고 강도 수백리에 둘러서 마니(摩尼)가 멀리 제사(望秩)하는 이름난 산이 된다. 산서쪽 가장 높은 곳에 돌을 덧놓아 대(臺)를 만드니 곧 이른바 참성단(塹星檀)이라 세상에서 전하되 단군님이 쌓아 제단(祭壇)을 하고 한얼께 제사하는 곳이 된다하니 도라보매 연대가 멀어서 바람이 갈고 비가 먹으니 서북 두쪽이 절반이나 무너지고 동변층계가 또한 기우러져서 고을 사람들이 매양 탄식한지 오랜지라......슬프다 무너짐을 일으키고 이즈러짐을 기움은 벼슬로 지키는 이의 마땅히 힘쓸 바이오 하물며 단군께서 당,요(唐,堯)의 세상에 같이 났으니 실로 우리 동방에 사는 백성의 시조(始祖)이시고 제단의 베품이 또한 한얼께 제사하는 땅이라 수천년을 지난 지금까지 끼친 백성들의 첨앙하는 바인즉 중수(重修)하는 일을 어찌 말것인가. 신묵(愼黙)이 이 사실을 적어서 뒷사람에게 보임을 청할새 이것을 써서 기록하노라.>>
라철은 수행인원들과 함께 마니산제천단(摩尼山祭天壇)에서 제를 지내고 볼것도 다 돌아보고나서 강화를 떠나려니 서글퍼지는 마음을 달래기 어려웠다. 형편없이 된 단군성지(檀君聖地)를 보노라니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게 되고 이 나라에 뿌리박고 살아온 배달민족 전체가 자기는 단군의 후손이라는것만저 잊을 지경에 이르도록 무감각속에 살아오다보니 의기(義氣)는 다 죽어버려 민족전체가 이제는 자기보다 썩 락후했던 저 섬나라 쪽발이 오랑캐 왜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야 하니 통탄하기가 그지없었다.
우리 민족은 왜서 이모양이 되었는가?
하늘을 우러러 피를 토하고싶었다. 허나 그렇게 할수도 없다. 그런다면 단군대황조는 노하여 지탄(指彈)할것이다. 네놈도 무맥한 인간이냐 하고.
기차를 타고 평양(平壤)에 갔다.
평안남도 도청소재지로서 대동군중당부 대동강에 연하여있는 평양은 한국 최고(最古)의 도시로서 관서(關西) 지방의 행정,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였다. 평양에는 평양성이 둘러있으며 을밀대, 모란대, 부벽루, 대동문...등 고적들이 있거니와 기자릉(箕子陵)도 있었다. 하여 먼 옛날에는 여기를 기성(箕城)이라 불렀는데 력사가 변천하면서 서경(西京), 서도(西都), 호원(鎬原), 유경(柳京)이란 별칭도 갖게 됐다.
기자(箕子)란 누구인가? 그는 전설상의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시조로서 중국 은(殷)나라 주(紂)의 친척이다.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의하면 나라가 망하여 조선에 들어와 예의(禮義), 전잠(田蠶), 방직(紡織)과 팔조(八條)의 교(敎)를 가르쳤다고 한다.
라철이 평양에 와서 제일먼저 찾은 곳은 숭령전(崇靈殿)이였다.
숭령전은 단군이 도음하였던 평양성밖 인리방(仁里坊)에 있는데 성제사(聖帝祠), 단군묘(檀君廟)를 거쳐서 조선 영조 원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사액(賜額)되였고 그 위판은 조선 세조 원년 병자(丙子)에 『朝鮮始祖檀君之位』라 고쳐 쓰고 고구려 동명성왕이 배향(配享)하였다.
高麗史와 西京志에 다음과 같이 밝히였다.
<<고려때 서경 인리방에 성제사가 있어 때로써 임금이 제사를 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또한 그 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行하여 고을사람이 일이있으면 문득 비나니라.>>
<<고려 숙종 10년에 성제사에 제사하고 옷과 페백을 드리다.>>
비고에 밝힌 것을 보면 이러했다.
<<단군묘는 평양성밖에 있으니 朝鮮 世宗 11년에 처음 正殿 4간과 동행랑 2간과 서행랑 2간을 세워서 檀君님 및 高句麗 東明王의 位版을 모시고春秋에 香祝을 나려 제사하다. 世祖 元年 丙子에 位版을 고쳐 「朝鮮始祖檀君之世祖」라 쓰고 5년 庚辰에王世子를 거느리고 서로순돌하여 친히 제사하다.
朝鮮 肅宗 5년에 近臣을 보내서 제사를 드리고 23년에 또 제사를 드리며 檀君廟詩를 지어 가로대 東海聖人作하니 曾聞並放勳이라 山椒遺廟在하니 檀木擁祥雲이라 朝鮮 英祖 元年에 崇靈殿 이라고 賜額하니 平安監司 李廷濟의 말을 쫒음이라 5년에 殿參奉 두사람을 두고 25년에 承旨를 보내여 제사를 드리다.>>
문원(文苑)보물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여 있다.
<<正租 5년 辛丑에 관원을 보내서 제사를 드릴때 李秉模에게 명령하여 祭文을 지어 가로대 「維嶽會精에 有菀檀木」이라 篤生神人하니 並堯而作이라 如日方昇하야 遂有朝鮮이라 混沌初闢하고 人文漸宣이라 嶺海之西와 遼野以東에 始君始長하니 永被神功이로다...>>
강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라철일행은 숭령전에 제를 지냈다. 그리고나서 계속 북쪽을 향해 떠났다.
봄절기는 남쪽에서 먼저들고 가을 절기는 북쪽에서 먼저들었다.
라철일행은 정부로부터 월경허가를 받았기에 두만강을 배로 무사히 건넜다. 음력 8월중순이 되어오는지라 강건너 만주땅은 가을빛이 완연했다.
지난해의 10월 25일(음력)에 만주의 북간도 삼도구(三道溝)에다 이미 대종교 지사를 설립한바있어서 그곳에서는 시교(施敎)가 잘 되어가고 있었다.
<<가마히 우에 계시나 한으로 든 보시며 낳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 (神靈在上 天視天德 生我活我 萬萬歲降哀)
대종교신도가 있는 마을이면 교도들이 입에서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홍암대종사 라철은 1909년 정월 15일(음력) 중광절에 제천포도(祭天布道)로 교문을 크게 열고 우선 교도(敎徒)들이 준행할 봉심성원(奉審成願)의 주송(呪頌)인 각사(覺辭)부터 지어서 발포했으니 그것이 곳 지금 신도들의 입에서 흘러나고있는 그것이였다.
그가 대교이념(大敎理念)의 실천적인 강령으로 발포한 5대종지(五大宗旨)는 이러했다.
1. 敬奉天神 (경봉천신)
2. 誠修靈誠 (성수영성)
3. 愛合種族 (애합종족)
4. 靜求和福 (정구화복)
5. 勤務産業 (근무산업)
이것은 심리의 결속과 함께 천국현실화에 이바지할 것을 밝힌것이다.
그는 또 사신(四愼)을 敎中에 포고하여 교우의 신수(愼守)를 촉구했다.
1. 敎는 時局에 無關하니 安身立命 함.
2. 新法에 注意하여 犯科가 無케 함.
3. 財産保管은 所有權과 法律을 信賴 함.
4. 或 冤枉을 被하면 誠心으로 解決함이다.
라철은 지어 자신이 조석참배에 불결함이 있을가 저어하여 스스로 술을 끊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교도들에게 본을 보여준 것이다.
그 어느 때 자기집에서 식솔들과 편안히 보냈으랴. 라철은 중광이래 교문을 크게 열어보려고 그야말로 발분망식(發憤忘食)을 하는 사람이였다.
그는 1909년 단군교중광초기에 “檀君敎佈明書”를 위시하여 “重光源由”, “走筆記事”, “杜兄面談”, “原本神歌”, “奉敎節次”, “奉敎課規”, “誓辭”를 발표했고 1910년 8월 대종교총본사의 천진(天眞)에 천조영정(天祖影幀ㅡ단군상)을 봉안하고 제례(祭禮)를 지냈던 것이다. 그리고 동월 5일에는 서울 시내에 南部支司를 설치하고 오기호를 司敎로 임명하고 北部支司에는 정훈모를 司敎로 각각 임명하였다. 그후 儀式規例를 제정발포하였는데 “儀式類例發布案”, “施敎式”, “自信式, “敬拜式”, “慶賀式” 등이였다.
라철은 머리속에 백두산을 중심으로 교구를 형성하여 포교를 널리할 구상을 해온지 오라거니와 이번걸음은 그 실천을 보기위한 행동이기도했다.
라철일행은 계획대로 백두산을 찾기로 하고 동만의 화룡현으로 갔다.
백두산북쪽 기슭에 청파호(靑坡湖)가 있었다. 청파호라는 이름이 어떻게 유래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은 물이 고인 늪이나 호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남으로 웅위로운 장백산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오는 이곳은 공기맑고 안온하고 아늑하여 자연 그대로에 한배검이 은총을 내린 복지였다. 한점의 오염도 없이 신선함을 주고있는 이곳이 라철은 맘에 들었다. 이번 답사를 통하여 고적과 령적을 알아두며 제를 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장차 총본사를 어디에다 권설할것인가 그 기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였다.
라철이 민족종교를 창립한 것은 국조단군(國祖檀君)을 구심체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여야만 국권회복을 성취할수 있다는 구국방략에서 나온것이고 종교단체로 발족하면 일제 탄압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인데 일제경찰이 걸핏하면 트집잡으려 드는판에 국내에서는 시교를 널리하기에는 불편과 어려움과 장애가 너무나 많았던것이다.
라철은 지어 대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시켜볼려는 포부까지 갖고있었다. 그럴려면 대종교는 언제나 존재해야 한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총본사는 아무때건 여기 만주땅 백두산기슭으로 반드시 옮겨와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한데 단군교의 명칭문제에서 주교인 라철과 정훈모사이에 쟁송문제로 분열하여 정훈모는 단군교를 그대로 지키고 서창보(徐彰輔), 유탁(兪鐸) 등의 추대를 받아 도교장(都敎長)이 되었던것이다. 아무튼 국내에서 끝까지 견지해나간다면 대단한 절찬을 받을 일이겠다.
라철은 대종교총본사뿐만 아니라 대종교간부들도 만주로 이전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이동준비의 일환으로 그는 국내에 있는 대종교인은 물론 항일독립운동세력과 애국청년과 지사들에게 대종교의 교리와 장차 구국항일운동을 전개할 지역은 만주라고 강조하여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면서 만주로 건너가게끔 적극적으로 권유한 것이다.
대종교에는 종래의 관리, 학자, 양반층 특히는 구국애국지사들이 많이 입교하였다. 그들은 다가 대종교만이 민족종교로서 구국대일항전을 할수 있다는 자부를 가지였던것이다...
일행은 천산제(天山祭)를 지내였다.
라철은 천산제를 지내고나서 홀기(笏記)에다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천하에 독립한 제일 큰 산은 오직 한 백두산이시니 이 산은 곧 우리 천조산이시며 천산이시며 산상이시며 제석산(帝釋山)이시며 삼신산이시오. 이 산신령은 곧 한울을 열으신 큰신령 임검이시라 우리 천신시조도 이 산에 내려오시고 우리 천신자손도 이 산에서 발생하고 우리 천신종교도 이 산에서 발원하고 우리 천국도 이 산에 있으니 우리들이 어찌 감히 이 산을 잊으리오. 이 산을 잊으면 곧 한배검을 잊음이라 오늘날 다 한 정성 한 마음으로 제산합시다.>>
백두산에 대한 라철의 지성은 이러했다.
太白山(白頭山)에 대해서 彊域考에 아래와 같이 기재되였다.
<<백두산은 동북 모든 산중의 조종이라 여덟가지 이름으로 안팍 서적에 흩어져 보이니 가론 不咸(山海經), 蓋馬(後漢書), 徒太(魏書), 白山(括地志), 長白(一統志), 大白(古記), 白頭(山徑), 家甭民商堅(盛京志)이다. 이것은 古今 方言의 번역이 다름이니라.>>
와유록(臥遊錄)에
<<백두산은 회녕군 서쪽에 있어 산은 세층으로 되었고 높이가 200리요(2,766m) 뻗침이 1천리라 그 이마에 天池(闥門潭)가 있으니 둘레가 80리라 남으로 흘러서 압록강이 되고 북으로 흘러 송화강이 되고 동으로 흘러서 소하(蘇下), 속평(速平) 두 내가 되고 동으로 흘러서 두만강이 되니 대개 우리 나라 동북에 모든 산의 조종(祖宗)이라 바라보며 웅장하게 넓고 커서 천리언덕이 한빛으로 푸른데 홀로 그 이마가 마치 높은 도마에 흰 독을 엎은 것 같아서 곧 백두로 이름한 것이다.
고개밑에는 한줌 흙과 한치 돌도 없고 가다가 소나무, 삼나무가 있으되 굳센 바람이 아슬아슬한바 되어서 모두 낮고 꼬부라졌으며 아랫고개의 북쪽으로 한시내를 건너서 평한 땅 두어리수를 얻으니 나무가 있으되 또한 울퉁불퉁하여 높이가 두어자에 지나지 않는지라 풍속(風俗)에 박달(배달나무)이라 부르니 세상에서 단군(檀君)님께서 처음내린 땅이라 이른다.>>
장차 청파호에다 총본사를 권설하기로 하고 홍암대종사 라철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4敎區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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