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과 탄압에 저항하라
ㅡ 알베르 카뮈, 노벨문학상 수상연설문
(1957년10월17일, 스웨덴에서)
노벨상 위원으로부터 이같은 영광스런 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저에게는 무한한 기쁨이며, 감사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같은 상이 제 개인적인 능력의 범위를 초과하여 주어지는 것이라 여겨져서 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 그리고 보다 뛰여난 지성을 소유한 사람들 즉, 모든 예술가들은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 진정한 모습과 저의 이면에 대한 비교없이는, 저는 결코 이같은 결정에 대해 수긍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주 젊은 어떤 사람, 불확실한 부를 소유한 그리고 여전히 그의 일이 진행중이며, 그의 일의 고독함 속에 익숙해져 있고, 모든이들의 호의로부터 떠나있는 그런 한 사람이 있습니다. 홀로 그리고 스스로 조신하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에게, 빛의 영광된 광채로 이끄는 포고, 갑자기 날아든 이같은 소식, 그런 소식을 들은 그는 어떻게 어떠한 종류의 공포스런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더군다나 유럽안의 다른 작가들, 그들 중 가장 위대한 작가들이 침묵하기를 강요당하고, 심지어 동시에 그들의 조국이 끝없는 불행을 겪고있을 때 그는 어떠한 마음으로 이런 영광을 안아야 합니까?
저는 충격과 내부의 혼란을 느낍니다. 제가 가졌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 간단히 말씀드리면, 너무나도 풍족한 행운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제 자신의 성취안에서 단지 안주하며 살 수 있었던 이후로, 제 전생애를 걸쳐 저를 지원해주고 있는 것, 그것은 심지어 가장 불합리한 상황외에는 사실 지금까지 누구도 저를 지원해주진 못했었습니다. 제가 예술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 작가로서의 임무라고 여겨왔던 그 생각, 저는 오늘 그것만을 말씀 드리고자하며, 영광스런 마음과 호의의 감정을 갖고, 할 수 있는한 최대한 간단히 이같은 저의 생각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제 자신의 경우, 저는 예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술을 모든 것의 위에 놓은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만약, 반대로, 그것이 필요한 경우란, 예술이 제 동료로부터 분리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을 통해 저와같은 사람이,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서서 살아갈 수 있음을 예술이 허락하기 때문일 겁니다. 일상의 기쁨과 고통의 특징지워진 심상을 제공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무시틸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그 예술가는 자신을 사회로부터 분리시킬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예술가를 가장 누추하고, 그리고 가장 절실한 진실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번번히 예술가의 운명을 선택한 사람은, 만약 그가 다른사람이 느끼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의 예술도 그리고 그의 차별적인 시선까지도 감수하면서, 곧 그 자신이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술가는 그 자신을 그것없이는 만들 수 없는 미와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그 사회의 중간선상에 자신을 세웁니다. 그와같은 이유로, 진실한 예술가들은 아무것도 꾸짖지 않습니다. 그들은 판결하기보다는 이해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상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니체의 위대한 말처럼, 그와같은 사회안에서, 그들이 노동자이건, 지식인이건 간에 마침내는 심판관이 아닌 창조자가 지배하는 사회를 선택할 것입니다.
게다가 작가의 임무는 어려운 의무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명확하게 그는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헌신안에 자신을 놓을 수사 없습니다. 그는 그런 이유로 인해 고통받고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혼자가 되거나 자신의 예술을 빼앗기게 되고 맙니다. 수백만의 병사로 이루어진 독재자의 군대도, 그를 그의 고립으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할 것이고, 심지어 특별히, 그가 그들에게 동조를 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한명의 이름없는 죄수의 침묵은ㅡ 세상끝의 이면에서 굴종하기를 거부한ㅡ 작가 자신의 오랜 망명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해내기에 충분하며, 적어도 언제든지, 자유란 특권의 이름으로, 그 침묵을 잊지 않으려 하고, 그리고 그의 예술을 통해서 그것을 알리고 또 울려터지게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중 누구도 그런 일을 해내기에 충분치 못합니다. 그러나 삶의 모든 환경속에서 모호하고, 혹은 일시적인 명성안에서 군주의 무력안에 포위되어서, 혹은 그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자유로운 시간을 얻기 위하여, 그 작가는 그를 정당화하게 해줄 사회공동체의 이념을 획득하기에 이르며, 그와 같은 하나의 상황에서, 그의 작업의 위대함을 구성하는 두가지 일에 대한 그의 능력의 한계를 그는 절실히 깨닫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에 대한 헌신과 자유에 대한 봉사를 말합니다. 그의 일이란 수많은 사람들의 엄청난 가능성을 하나로 묶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예술은 거짓된 것과 그리고 어디서든지 그들을 지배하려고, 고독을 만들어내는 노예적 태도와는 절대로 타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나약함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의 지혜의 고귀함이라는 것은, 항상 그대로 지켜내기가 어려운 두가지 책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명확히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거짓에의 거부와 탄압에대한 저항, 바로 그것입니다.
20년이상 계속된 이 광기의 역사안에서, 희망없는 모든 사람처럼 이 격동의 시대의 나의 세대는 무수히 많은것을 잃어버렸고, 저는 오직 한가지에 의지하여 살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노늘의 시대를 쓴다는 것이 하나의 명예가 되었던 숨겨진 감정일 겁니다. 왜냐하면 그같은 행동이 저 자신에 대한 하나의 약속에 다름아니었기 때문입니다. ㅡ 그리고 그 약속은 오직 쓴다는 행위, 그것만이 아닙니다. 특히, 저의 능력과 저의 상황을 고려하여, 그것은 같은 역사를 헤쳐온 모든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나누었던 불행과 희망을 생각하며, 동시대의 현실을 참아내기 위한 약속이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태어나서, 히틀러가 힘을 얻을 때 20살에 이르고, 첫 혁명의 시도가 시작되는 것을 목격하며, 스페인내전과 함께 그들의 교육이 완결될즈음, 세계 모든 곳이 전쟁터에 다름아니었던 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고, 고통받는 유럽과 그리고 죄수들ㅡ 그들은 오늘날 핵무기의 파괴력이 위협하는 세상에서 그들의 자식을 양육하며, 그들의 작품을 창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누구도 저는 그들에게 낙천주의자가 될것을 강요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극도의 절망으로 인한 치욕에 대한 복수심과 그 시대에 허무주의로 빠져드는 사람들의 오류까지도ㅡ 어떠한 논쟁없이 ㅡ 우리들이 이해해야 할 거라고 심지어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리고 나의 조국과 유럽의 모든 나라 사람들은 허무주의를 거부하여 왔고, 정의에 대한 욕구가 아직도 우리곁에 남아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역사안의 그 일들이 죽음의 본능에 대항하여, 솔직히 싸웠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격동의 시대를 경험한 예술을 그들 자신을 위해서 창조해야만 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각 세대는 의심할바없이 그들의 세계를 개혁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낍니다. 제가 아는바 세계는 개혁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같은 생각자체가 아마도 저는 더 위대한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를 스스로의 파괴로부터 막아내는 힘에 다름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역사를 상속한다는 것, ㅡ 실패한 혁명의 혼란과, 과학기술을 맹신, 신의 죽음, 낡은이념, 중도적인 힘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확신해야 될지 알지 못하는 곳, 지성이 그것자체로 변질되어, 증오와 외압의 종이 되어 버릴 곳ㅡ 이 세대는 그같은 것 자체의 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삶과 죽음의 존엄성을 이루는 그 조그마한 것 그것안에서 아니면 그것없이라도, 우리는 이 시대를 재건해야 하는 것입니다. 파멸에 의해 위협받고있는 이 세계에서, 우리의 엄중한 재판관들은 영원한 죽음의 왕국을 건립하는데, 위험을 감수하며ㅡ 그래야 된다는 것을 알고서ㅡ 시간을 다투는 이 정신나간 경주안에서, 노예적이지 않는 국가간의 평화를 부활시키고, 다시 노동과 문화를 조화시키며, 그리고 모든 인간들과 함게 인류의 언약의 궤를 다시 짜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이같이 거대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나 벌써, 세계 모든 곳에서 진실과 자유를 향한 두가지의 도전이 일어나고있으며, 만약 필요하다면, 거리낌없이 그것을 위해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와같은 일들이 어디에서 일어나건 우리는 그런 움직임들에 환영할만한 가치를 느끼며, 특별히 그것 자체가 희생되고있는 곳을 우리는 눈여겨 보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하튼, 노벨상 위원회가 저에게 주신 어떤 종류의 상을 저는 이 세대에 대한 경의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작가의 작업에 대한 고귀함이 인정된 이후에는,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적당한 곳에 그를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함게 싸웠던 동료들과 그의 기쁨을 나누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바램도 없습니다. 비난받을지언정 완강하게, 부조리하지만 정의에 대한 열정으로, 모든 이들의 시선 안에서 수치심이나 자만심없이 그의 일에 열중하며, 슬픔과 아름다움을 분리시키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그리고 마침내는 그 두가지 실존을부터 창조물을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으로, 그는 완강히 이 파괴적인 역사의, 알길없으며 항상 정복당하기 쉽상입니다. 자유는 위태로우며, 우리의 힘든 삶과 함께 할 수 없음을만큼, 흐름안에서, 그것들을 바로세우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이 모든일이 있은 후, 누가 절대의 이념과 지고한 도덕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가? 진실은 신비에 쌓이고 그것은 의기양양합니다. 우리는 이 지난한 길위에서 우리의 실패에 앞서, 고통스럽지만, 단호하게 두가지 목표를 향해 진군해야 합니다. 어떤작가가 지금부터 명석한 의식으로 감히 미덕의 전도자로서 그 자신을 세울 수 있을까요? 제 자신은, 한번 더 말씀드리자면 그러한 종류의 사람이 아닐겁니다. 저는 결코 정의와 인간의 희망, 제가 키워왔던 자유에 대한 의지를 포기한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같은 동경이 나의 잘못과 나의 결점을 설명해주고는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나의 작업을 보다 잘 이해시키는 방향으로 저를 도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세계속에서 자유로운 행복과 그것의 짧은 복원에 대한 기억만으로 그 자신의 삶을 이어오고 있는 절대다수의 침묵하는 사람들은 의심할바없이 여전히 저 자신을 지금도 돕고있는 것입니다.
그런까닭에 진정한 제 자신을 뒤돌아보고, 저의 한계를 바로 알고, 그리고 제가 가지고있는 채무뿐만 아니라 제 자신의 지켜나가기 어려운 신조 속에서 저는 더욱더 자유로움을 느끼며, 그것안에서, 그 이상 지니고 있는 무게와 저에게 내려진 큰 영광에 대한 보답으로, 같이 투쟁하는 사람들과 이 영광을 공유할 것임을 말씀드리며, 그리고 어떠한 특권으로서 이 상을 받지 않고, 오히려 불행과 박해의 편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예를 위해 이 상을 받을 것임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모든 진실한 예술가들은 매일매일의 침묵속에서 그 자신을 채찍질 하여 왔으며, 이 성실하며 유구한 약속에 대해 이 상을 수상하기에 앞서, 그들에게 오늘 저는 제 개인적인 감사의 마음을 무한히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알베르 카뮈(1913,11,7~196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