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장소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대강의실 101호
□ 사 회 : 조남호(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교수)
□ 참석자 : 김동환(국학연구소), 이동언(독립운동사연구소),
서굉일(한신대학교),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사회 오늘 날씨도 쾌청하지 않은데 이렇게 먼 자리까지 와주신 여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 국학원에서는 “백포서일 사
상과 독립운동”에 대하여 함께 토론 해보겠습니다. 기존 학술대회
는 발표자들의 논문을 주로 읽고 그리고 논평자들의 시간이 끝나
고 나서 토론을 하는데 토론이 대체로 한 시간 정도 주어지지요.
그렇다보니까 제대로 얘기가 못 나누고 제대로 된 논의가 어렵지
않은가 싶습니다. 백포서일에 관한 학술대회는 그간 몇 번 있었고,
그런 자료들은 여러분들이 많이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학연
구원에서는 이번에 연구를 위해서 좀 더 말로서 얘기할 수 없고
글로써 쓰지 못하는 좀 속 깊은 얘기를 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이렇
게 해서 좌담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새로운 자료
들이 많이 얘기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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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자, 논평자 분들한테 충분하게 기회를 드릴 것이고 그리고 여
러분들도 충분하게 장시간 6시까지 충분하게 얘기할 기회를 드려
서 오늘 제대로 된 “백포사상과 독립운동”에 대해서 논의를 해보
고자 합니다. 참고로 국학연구원은 다사다난했던 2009년 동안에도
6월에 한국선도의 수련법에 대해서 학술대회를 개최했고, 8월에는
단애 윤세복 선생에 대해서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와 같이 토론했
고, 지난 11월에는 제주 국학원과 같이 “한국의 천제문화와 제주
도”에 대해서 학술대회를 하였고 오늘 백포 서일 선생의 학술대회
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대개 일 년에 두 번 정도 개최하는 게 관례인데, 올해는
저희 용량을 초과해서 네 번 정도의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습니
다. 이것은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대학교의 총장님이신 일지 이승헌 박사님, 그리고 국학연구원을
도와주시는 많은 회원님들,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시는 본교 국학
과 학생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제13회 국
학연구원 “백포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에 대한 좌담회를 시작하
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한신대학의 명예교수이신 서굉일 교수님께서 서일의
독립운동자료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겠습니다. 우선 논문도 있겠
지만 오늘 새롭게 얘기 해주는 바가 많을 것으로 기대하고 청해
듣겠습니다.
서굉일반갑습니다. 한신대학에 서굉일입니다. 저는 사실 서일 선생
의 독립운동이나 또 실질적으로 대종교 신앙에 관한 내용은 잘 모
릅니다. 그런데 왜 이 공부를 하게 됐냐? 그것은 원래 제가 북간도
지역의 기독교와 우리나라의 민족운동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런 걸 공부했는데 늘 어머님이 너는 고향사람에 대한 공부는 안하
고 다른 기독교 공부만 하느냐? 말씀을 하셔서 제가 북간도지역의
답사를 다니는 길에 대종교 유적지하고 서일 선생이 활동한 지역
을 따로 가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오늘 제 얘기는, 우리가 어떤 한 인물을 역사적
으로 검토하려면 사건사를 연구하는 것과 인물사를 연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제일 첫째는 인물사를 연구하는 데서 첫째 요건이 되는
것은 그 분의 생애에 대한 연보가 먼저 밝혀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서일 선생의 생애에 대해 연보가 여러 군데 있고
짧은 글도 있고 그분의 전기를 쓰는 여러분까지도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녹취누락)… 경성이 서울에도 있고 함경도에도 있고
보통 함경도 사람들은 함경성이라는 말을 씁니다. 또 4군6진 중에
서도 경성은 지금 청진에 있는, 동해를 끼고 있는 곳에 있기 때문
에 아주 물살이 풍부하고 경제력이 많고 그래서 사실은 함경도지
역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특성 이것을 알고 있지 않고서는 간도지
역의 우리의 민족독립운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사실은 간도 공부를 시작했다가 이제 백포 공부를 준비
하는 과정에서 이제 관북지역인 함경도지역에 대한 공부를 하려는
데, 제가 있는 한신대학이라는 학교가 원래 함경도 사람이 북간도
용정 명동촌에 가서 기독교운동을 하다가 해방이 돼서 거기가 공
산주의 국가가 되니깐 있지를 못하고 서울로 내려옵니다. 그렇게
해서 1940년에 조선신학교를 세우고 그것이 후에 한국신학대학이
되고 오늘 한신대학이 된 것입니다. 근데 이 대학이 가지고 있는
성격 중 하나는 한국의 기독교가 제국주의나 선교사의 기독교가
아니라 조선의 기독교… 말하자면 역사신앙을 기본으로 하는 우리
가 흔히 말하는 진보적인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학교인데, 이 학교
를 세운 송창근 목사님이 바로 함경도 아오지가 고향이시고 김제
중 목사님이 함경도 분이신데, 사실은 일제강점기에 이 지역의 가
장 위대한 독립운동가는 성재 이동휘 선생님이십니다. 근데 이동
휘 선생님 가르침 밑에서 기독교를 공부를 했지만 평생 신앙을 갖
지 않고 일본에 가서 공부하다가 미국사람도 졸업하기 어려운 대
학에 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녹취누
락)… 에 있었던 미국에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그들을 수용하지 못
합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제일 중요한 이유는 왜 함경도지역
에 관북지역에 이 분들은 역사적으로 별로 혜택도 받지 못하고 말
하자면 소외받은 사람들인데,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이렇게
민족이라는 것을 주제삼아서 자기 평생의 삶을 살았는가 라는 얘
기를 하기 위한 하나의 공부를 했던 전제를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사실 서일선생이 경원에서 태어나셔서 경성에 있는 함일
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게 되는데, 그 함일학교라는 게 신포 이운협
이라는 함경도지역에서 굉장히 근대적인 애국계몽운동가였습니다.
그러니깐 우리의 근대사를 설명할 때 의병운동파가 있고 애국계몽
운동파가 있고 동학농민전쟁파가 있듯이 똑같은 성격이 함경도지
역에 전개됩니다. 그래서 함경도지역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했던 사
람들은 대개 북간도로 건너가서 캐나다 선교부의 도움을 받아서
기독교… 말하자면 민족운동을 전개하게 되고 그 세력들이 해방
후 남쪽으로 내려와서 말하자면 한국의 기독교 인권운동, 민권운
동을 하는 큰 세력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이 지역에서 동학농민운
동을 했던 농민세력들은 북간도지역으로 넘어가서 천주교운동에
가담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북간도지역에 교세로 봐서는 천주교가
제일 컸습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200년 동안 이 땅에서 박해를 받
고 순교를 당하고 정치현실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입니다. 물
론 천주교 세력 중에서도 의병을 만들고 독립군단을 만들어서 활
동했던 의민단 같은 단체도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중립적인 세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지역에 있었던 유림
들은 어떤 입장이었나? 그런데 실질적으로 함경도지역에 있어서
우리가 흔히 오룡천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종성, 회령, 병원, 경성,
이런 지역에 굉장히 뛰어난 유학자들이 등장했지만 그 분들은 흔
히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인석 선생 같은 보수적인 유림과는 다릅니
다. 다시 말하면 과거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민중의 역사
를 개혁할 수 있는, 개선할 수 있는 이것이 무엇인가를 주제를 삼
아서 공부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백포 서일 선생이 처음에
김노규라는 선생 밑에서 유학을 공부하셨는데 그 유학은 사서삼경
의 유학이나 과거시험의 유학이 아니라 민중의 현실을 걱정하고
특별히 그 분들이 가장 관심 있게 연구했던 것은 국경문제였습니
다. 또 백두산에 관한 하나의 역사연구를 했던 것입니다. 사실은
서일 선생이 나철 선생을 만나서 대종교도가 되고 백두산이 민족
의 영지가 되고 또 우리가 『삼일신고』같은 대종교에 경전의 자
기신앙의 적어도 그것은 수행하는 단계로 가는 종교인이 되기 이
전에 이미 그의 마음에 속에는 말하자면 변방인이 가지고 있었던,
그 당시에 조선봉건왕조에서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던 함경
도 사람이, 그러나 그 지역에서는 여진족과 우리나라 사이에 국경
의 비가 있고 또 정계비가 있고 그리고 적어도 함경도 사람이 가
지고 있었던 역사적 의식 중에서 두만강이나 압록강을 건너서 중
국에 나간다라 하지 않고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들어간다고 한다
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이 방에 문을 열고 나갈 때는 이곳
은 내 땅이고 나가는 저곳은 중국 땅이겠죠? 그런데 두만강을 건
너서 그리고 또 선생님들께서 그 글을 보면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청계천 정도에 말하자면 한강 정도의 건너편 영등포도 서울 땅이
고 우리 땅이라는 그런 역사인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한 부여와 고구려와 조선이라는 이런 故土가 우리 민족의 역
사가 시작된 곳이고 그것은 단군왕검께서 최초로 나라를 세운 곳
이고 바로 그것은 그 마음 가운데 우리 민족의 땅이라는 그 의식
을 그 분들이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저는 신민회 사람들이 서울에
모여가지고 이제 나라가 망했으니 청도회의에서 압록강이나 두만
강을 건너서 그게 독립군의 밀령을 만들고 분쟁을 하고, 말하자면
준비론이라든지, 기회론이라든지 하는 그 관념 하고는 다른 생각
을 하고 있었다. 이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
도 이제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는 애국계몽운동을 했던 분들은
동학농민전쟁을 참여했던 분들이나 의병전쟁 했던 분들을 이해하
지 못했어요. 그러니깐 우리가 독립신문에 보면 그것을 동비라고
했고 그리고 의병을 폭도, 저런 방법으로는 나라를 찾지 못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그것에 비해서 의병을 했던 세력이
나 동학농민전쟁을 했던 전봉준의 생각은 서울에서 독립신문을 나
라 찾는 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민족이 쳐들어
와서 국가가 망해서 나라가 위기가 되서 국권을 찾아야 되는데 그
방법론에 있어서 서로 방법론을 제시하고 하나가 되지 못했다. 하
나가 되지 못한 나라가 어떻게 집안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런
데 적어도 함경도지역에 있었던 그 분들은 말하자면 의병세력이나
애국계몽운동세력이 지향하는 바는 예를 들어서 왕권을 지향하는
국가의 조선왕조의 말하자면 보안회나 한쪽으로는 공화제적인 생
각을 했다 하더라도 사실은 간도에서 무장운동을 했을 때나 또 그
분들이 어떤 경우에도 서로 연결되어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러한 운동의 가장 중심지에 서 있었던 분 그 분이 백포 서일이
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깐 백포 서일에서 백 자가 이게 뭘까? 생
각을 해봤는데 저는 ‘백범’할 때 백 자와 백포 서일의 백 자가 같
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민족을 상징하는 것이겠죠. 그리고 포라
고 하는 농사꾼이라는 얘기인데, 그것은 이제 적어도 선생님이 다
녔던 함일학교를 세웠던 이운협 선생은 호를 신포라고 쓰셨고 학
포라는 호를 쓰신 분도 계셨고 그러나 선생과 같이 간도에 가서
대종교운동을 하시면서 북로군정서에 부총재를 했던 현천묵 선생
은 이제 백취라는 호를 쓰셨기 때문에 이 분들의 호를 들여다봐도
이 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뭔가? 이제 유추해 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여기서 북간도 명동학교라든지 이동휘 선생이 했던 관성
학교라든지 소영자학교, 정동학교, 청동학교, 이런 학교는 상당히
독립운동사에서 연구도 많이 하고 단행된 논문도 있는데 함일학교
에 대한 연구는 없습니다. 근데 이 함일학교가 저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적어도 우리가 평양에 안창호 선생의
대성학교라든지 오성학교라든지 보창학교 이런 학교보다도 적어
도 더 먼저 이곳에 근대적인 학교가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함경도지역에 있어서 이 근대적인 것들은 어디에서 그 분들이 그
지식을 얻었겠나? 1886년부터 그 지역의 자연의 재해가 오고 굉장
히 어려운 게 왔을 때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건너
가서 연해주지역의 여러 군데다 한인촌을 건설합니다. 한인촌이라
얘기하는데 그러니깐 적어도 시베리아를 통한, 러시아 사람을 통
한 근대화 이런 것들은 또 교과서에 지금까지 논의된 적이 없습니
다. 그러니깐 우리가 적어도 전등이나 기차든지 적어도 근대적인
그런 문화문명 이런 것들을 그들이 다른 지역보다 좀 더 일찍 그
런 감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 이런 것들은 또 적어도 세계적인 어
떤 동진의 문화가 말하자면 서세동점에 미국이나 일본을 통하지도
않고 그 지역에는 하나의 역사인식이 심어질 수 있었던 그런 계기
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그 지역에 진출을 해서 재력을
쌓고 새로운 지식을 얻기도 하고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
고 더 멀리 모스크바, 베를린 이런 곳까지도 진출을 합니다. 그러
니깐 사실 북간도지역에서 1919년 3⋅13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 지
역의 독립운동을 이끌고 간 가장 중요한 세력은 간민회라는 단체
였습니다.
적어도 1914년에서 1918년까지 1차 세계대전 이 기간 동안에 용정
에 일본사람이 진출해서 이주한인들의 독립운동을 가로막고 또 중
국 사람들이 적어도 자기 땅에 와 있는 한인들이 일제의 만주침략
이나 간도침략의 하수인이 되지 않을까 라는 걱정 끝에 그들에 대
해 여러 가지 제안을 합니다. 그러니깐 실질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이제 역사를 우리가 서일 선생에 대한 생애를 다시 복원시키기 위
해서는 첫 번째는 연보가 분명히 나와야 한다. 어떤 생애의 삶에
대한 이런 것을 밝혀야 한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그 분들이 독립
전쟁도 했고 학교도 세웠고 이주한인공동체도 만들었고 여러 가지
사회운동, 계몽운동, 언론운동 이런 것들을 쭉 전개했을 때 그런
뒤에 숨어 있는 말하자면 어떤 철학과 어떤 이념과 어떤 이데올로
기와 어떤 종교를 가졌기에 저들은 무오독립선언과 같은 아주 적
극적인 독립선언을 선포하고 일제에 맞서서 싸울 수 있었나 라는
그 두 번째 문제, 그런데 오늘 이 문제는 종교와 사상을 공부하는
김동환 선생이 잘 설명을 하실 거고, 독립전쟁에 관한 얘기는 이동
언 선생이 독립운동사를 하시기 때문에 잘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
래서 저는 단지 연보를 우리는 잘 밝히는 게 중요할 것입니다 라
고 얘기하고 그리고 세 번째는 사실 그 시대의 역사를 복원하려고
하면 사회적인, 경제적인 조건이 어찌 되었는지, 우리가 1919년 대
한정의단을 만들고 그게 대한북로군정서가 되고 시베리아에 가서
체코병들이 1차 세계대전을 끝나고 귀한하기 전에 그들로부터 대
포고 여러 가지 소총이고 그러니깐 사냥꾼들이 가지고 다니던 총
을 화승총이라고 했다면 그 분들이 했던 것은 군인들이 전쟁을 할
때 쓰던 화약과 무기를 사오는데, 그러면 과연 심인평이라던지 왕
청현의 덕인리라든지 대간지라든지 백초고라든지 이만한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그 무기를 사올 수 있는 재력이 될 수 있나? 서간도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19
지역 같으면 이동녕 선생이나 이회영 선생이나 이상룡 선생이나
이런 분들이 양반이었기 때문에 많은 돈을 가지고 말하자면 그
지역에 가서 신흥무관학교도 만들고 또 백산농장도 만들고 여러
가지 투자를 돈을 가지고 가서 독립운동 하고, 적어도 함경도지역
에서 유망해서 혹은 그 분들이 유배된 조상들의 후예들로서 국경
의식이나 민족의식이나 또 우리 동포의 사랑은 있었을지언정 경제
력은 없을 터인데, 어떻게 해서 저 분들이 그런 경제력을 준비하
고… 사실 북로군정서가 뭡니까
그것은 그 지역의 20만~30만이 되는 대종교의 이주한인촌을 중심
으로 서일 선생, 현천묵 선생, … 거기에 군자금을 만들고 그래서
만들어진 속에서 김좌진이나 이범석이나 또 이청천 장군 같은 이
런 분들이 영입되어 가지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말
하자면 군대가 편제되고 그 군대 힘으로 그러면 적어도 독립운동
사에서 사회적, 윤리적, 물적 자원을 이념적으로 우리가 민족을 위
해서 죽을 수 있는 그런 역사인식과 철학과 이것을 심었던 그 분
들 역사에 대한 평가는 이 땅의 독립운동사에 전혀 나타나지 못하
고, 초청 받아 갔던 양반집의 후손들에 대한 독립운동 얘기가 여전
히 우리 독립운동사를 다 차지하고 있고, 이것이 60년이 지난 지금
에도 변함이 없어요. 홍범도 장군의 복권이나 이런 것들이 이제 와
서도 그것이 제대로 돼 있지 않고 기념사업회나 기념관이 되지 못
한 이런 것들이 적어도 이 지역을 잘 알아야 되는… 그러니깐 무
슨 경제력으로 했는가? 서일 선생은 당신네가 스스로 쓰는 자서전
을 쓰거나 또 다른 사람이 전기를 쓰거나 또 뭔가 이런 기록을 남
겨놔야지 그 분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고 우리가 그림자를 밝혀
낼 수 있을 텐데 선생은 그런 걸 남기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윤세
복 선생이 1911년 서간도 환인에 가서 무송에 가서 영완에 가서
밀산에 가서 하얼빈에 가서 그리고 목단강에 가서 그리고 고난을
320 仙道文化 제 8 권
겪고 46년에 여기에 오셨는데… 지금까지도 대종교는 자기 신앙이
대종교라고 어떤 학생이 적었더니 담임선생님이 오라고 하더니 무
속종교를 믿으면 안된다. 이렇게 얘기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
가 했던 얘기는 백남규 선생의 후손이고 그분이 이화여대 음악과
학장이 된 분이에요. 저는 대종교 했던 집안을 이제 찾아다니면서
우연히 이런저런 얘기를 해봤는데, 그러니깐 제가 하려고 한 얘기
는 함경도지역의 사회적인 경제적인 그런 것들을 알아야 되고 그
지역에서 살았던 하금 선생이나 이윤엽 선생이나 또 그 분들이 썼
던 문집들이 있습니다. 문집들이 있어서 제가 대학원 졸업한 제자
들에게 함경도 유림에 대한 연구를 해봐라 그랬어요. 사실 연구를
하면 후원을 하는 사람이 없어요. 적어도 그것을 하려면 여기서 의
병운동을 열심히 한 유인석 의병장을 연구하면 여러 후원이 있지
만 함경도 유림연구를 하면 연구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깐 결과적
으로 그 땅에 가볼 수 없는 것도 있고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가볼
수 있는 곳은 간도지역이기 때문에 저는 상당한 기간을 간도에 북
간도, 서간도 이 지역에 우리 대종교 시교당이 있었던 이런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실질적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 그때의 교도 수하고
한인촌의 크기 하고 그때의 어떤 역사적 사건이 있어서 말하자면
그 지역의 분들이 경제력을 모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굉장히 많은
여러 독립운동단체의 세력들이 나왔을 때 왜 대종교가 이끌었던
북로군정서는 사내안정과는 쉽게 내통할 수 있었고 또 안정에서
군정서는 하지 말고 군정부를 하지 말고 군정서를 했으면 좋겠다
했을 때 그걸 쉽게 군정서로 바꿀 수 있었고 또 노령지역에서 대
한국민의회가 이루어지고 이동휘 선생이 바로 북간도로 오셔서 소
영자나 하마탄이나 활동을 하실 때 그 분을 제일 잘 도와줬던 구
추순 선생, 이런 분들 또 이런 분들의 전부 내용을 살펴보니깐 전
부 서일 선생과 같이 함경도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했던 동지들이었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21
기 때문에 그들이 이제 간도로 건너가서 어떤 분들은 기독교로 통
해서 무장운동을 하고 또 어떤 분 들은 대종교를 통해서 무장운동
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공교를 통해서 무장운동을 했습니다. 공교
라 하는 것은 용정에 있는 대성학교가 그게 이제 강훈이라 하는
사람이 1923년에 세운 유교이념을 내세운 하나의 학교인데 그 대
종교의 강훈 선생이 바로 백포 서일 선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좌
했던 말하자면 경성 단덕장의 최고의 약종상을 했던 부자였기 때
문에 그가 구도구에다 하마탄에다 백초구에다 용정에다 연길에다
제약 약종상을 해서 그쪽에서 나오는 인삼을 가져다 장사를 하면
서 중국사람과 상거래를 하고 거기서 나오는 돈을 그대로 북로군
정서에 투자를 했기 때문에 북로군정서가 말하자면 연통제를 할
때나 간북남북 총판부를 만들 때나 이런 일을 원활하게 했던 것이
아닌가?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의 서일 선생의 이것을 알려면 적어
도 1911년, 1912년, 1913년, 1914년 쭉 가면서 중국의 오녹정이나
중국에서 학당을 만들어서 신정정치를 했을 때 그 중국사람들과
우리와는 어떤 관계가 있었나? 대개 보면 모든 지역에서 독립운동
혐의자로 붙잡혀간 사람들의 보증을 서용언이라는 사람이 쓰고 있
습니다. 그런데 그 서용언이라는 사람에 대한 것을 찾지 못했어요.
그러다 중국 당안관에서 나온 자료를 읽어봤더니 한족 수령인 서
일이다… 이렇게 된 자료를 보고 선생님이 적어도 이 지역에 가서
그냥 앉아서 수족 노릇을 한 것이 아니고 적어도 이주한인사회의
그 안에 들어가서 선생님이 대종교인으로서의 모든 수행을 스스로
낮아짐으로써 투철하게 우리 민족을 지향하는 정신을 다졌기 때문
에 이것이 가능한 게 아니냐? 그러니깐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
해서는 그는 어떤 사상도 수용하되 그 사상을 민족주의라는 그 입
장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니깐 선생님이 중간에 섰기 때문에 공교
교도들이 말하자면 국민회하고 같이 연결해서 북간도 시위를 같이
322 仙道文化 제 8 권
할 수 있었던 것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서일 선생의 문제
는 앞으로 적어도 선생님에게 큰 사상적인 영향을 줬다 그러면 정
리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이제 김노적 선생이나 이윤엽 선생이나
그리고 적어도 선생님이 일생동안 마지막 생을 결단할 수 있고 죽
을 수 있는 것은, 결국 홍암 나철 선생을 만나 뵈었기 때문 아니
냐? 또 그 분이 김원 선생의 모든 종교의 종중으로써의 전통을 양
보했을 때도 나는 무장투쟁을 해야 하겠기 때문에 일단은 이 일에
전념해야겠다는 스스로의 나눔과 당신네를 비울 수 있고 낮출 수
있는 이런 것들이 가장 민족해방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성
격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상당히 많은 자료 속에서 적어도 함경
도지방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고토의식, 영토의식 또 ������북여요
선������같은 그런 글들이 아주 쉬운 말로 번역되어서 우리가 전부 읽
으므로 이제 통일되어야 하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대종교 교도들
이 가졌던 인간의 이화세계 역사의식이 중요하지 않겠나 하는 생
각을 해봤습니다. 그냥 두서없이 제가 설명을 드렸는데 토론을 할
수 있으면 토론을 하는 데서 하기로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회여러분 오늘 서굉일 교수님의 새로운, 아마 평생 공부하신 에
센스를 보여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책 이름도 나오고
사람 이름도 나오고 그래서 이상하다 생각되시지만 홍익인간 이화
세계라고 하는 큰 뜻이 무엇이라는 것을 백포 서일 선생의 독립운
동 내지는 함경도 지식인의 의식을 통해서 뭔가 느껴지시죠? 이게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몰랐던 함경도 지식인들의 네트워
크를 통해서 서일 선생이 간도지역에서 어떻게 활동하시고 그것이
우리 독립운동에 어떻게 밑거름이 되었는지 소상하게 얘기해 주셨
습니다. 이에 대해서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들어 보기로 하고 다음
은 국학연구소를 이끌고 계시고 대종교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23
가지고 계시는 김동환 선생님께서 서일의 생애와 대종교에 대해
나름대로 발표해 주시겠습니다.
김동환서일의 초명(初名)은 기학(夔學2)으로 백포(白圃)는 호이며, 당
호(堂號)는 삼혜당(三兮堂)입니다. 그는 1881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김노규(金魯
奎) 문하에 수학하여 주역(周易)을 전공하고 후에 경성군 함일학교
사범과 졸업한 후 십년간 소학교의 교편을 잡으면서 고향의 아동
교육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1)
어린 시절 서일의 스승이었던 김노규는 북쪽 강역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북여요선(北輿要選)������2)과 「염성표(念聖表B)」⋅「염토표(念土
1) 「 獨立軍總裁 徐一氏 自戕」, ������독립신문������(1921. 12. 6).
2) ��� ���북여요선������은 1책 43장으로 엮어진 필사본으로, 1903년(光武7) 함경도 경원
(慶源) 사람인 김노규가 저술한 책이다. 이건하(李乾夏)⋅김수진(金壽鎭)⋅
유완무(柳完茂)⋅오재영(吳在英)의 서문과 이병순(李秉純)의 발문이 담겨 있
다. 간도(間島)의 영유권 주장의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간도 지방과 연
관된 우리민족의 여러 활동 사실들을 이 지방의 지리와 함께 약술하고 있
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보면, 러시아가 간도를 점령(1900년)하자 이범윤을
시찰사로, 이병순⋅이승호를 위원으로 이 지방에 파견하여 한인거주민들을
안심시켰다. 또한 이들을 판적(版籍)에 넣었는데(1903년 기준) 호(戶)가
27,400여 호에 남녀 인구가 십여만에 달했다 한다. 그리고 이범윤을 북변간
도관리(北邊間島管理)로 임명하고 조세를 받아들이며 포병(砲兵)을 양성하
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김노규는, 일찍부터 간도지방이 우리 민족의 활
동무대였음을 알고 그에 관한 고적들을 채집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던 것이
다. 북간도 일대의 지도(地圖)가 함께 실려 있는 이 책은 상⋅하편으로 구
성되었는데, 「백두산고적고(白頭山古蹟攷)」라는 부분에선 백두산에 대한 여
러 사람의 서경시를 들어 그 지세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부록으로 실려
있는 백두산하발상고적(白頭山下發詳古蹟) 부분에서는, 이성계의 선조들이
간도와 두만강 일대를 무대로 활약했던 사실들을 ������북관지(北關誌)������⋅������용비
어천가(龍飛御天歌)������⋅������여지승람(輿地勝覽)������등을 전거로 하여 서술하였다.
특히 백두구강고(白頭舊疆攷)에선 고려시대 윤관 장군의 구성을 간도지역
에 비정하여, 이 지방이 우리민족의 옛터임을 강조하는 대륙적 강역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백두고본방(白頭圖本�放)」부분에서는 이미
그 당시도 토문강(土門江)을 국경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주장했고, 「백두
324 仙道文化 제 8 권
表�)」⋅「용당표(龍堂表;)」등의 내용들처럼 우리의 토속사상들을 담
은 ������학음유고(鶴陰遺稿)������등을 남긴 인물로 민족의식이 누구보다
도 강했던 선비였습니다. 서일이 한학(漢學�)을 통하여 수리학적(數
理學�的) 기본을 철저히 다진 것이나, 해박한 유교적 지식을 통한
학문적 소양 구축도, 그의 어린 시절 스승이었던 김노규의 영향이
중요한 토대로 작용했을 것이며, 이 당시 한학수학이 바탕이 된 것
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서일이 본격적인 다양한 학문에 접하게 된 시기는 함일사범
학교(咸一師範學�校) 재학시절과 1902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0년
간 지역사회에서 계몽운동과 교육사업에 헌신하던 때입니다. 그가
어떤 분야를 어떻게 공부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후일 그가
남긴 저술에 언급되는 유(儒)⋅불(佛)⋅선(仙)에 대한 달견(達見)과
서양종교 그리고 서양철학에 대한 심오한 비교언급을 볼 때, 이 시
기에 동⋅서양 학문에 대한 체계적인 경험을 한 것이 확실한 듯합
니다.
서일이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선 것은 1911년 이후라 할 수 있습
니다. 그는 만주로 건너온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1911년 본격적
인 항일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31세의 나이로 단장에
비기고(白頭碑記攷)」에서는 정계비의 내용을 검토하여 토문강이 결코 두만
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한편 하편 「탐계공문고(探界公文攷)」
에선 조선과 청나라 양국간의 분쟁과 간도 및 두만강 연변의 한인(韓人)들
의 반응을 약술했으며, 「감계공문고(勘界公文考)」에선 1883년 당시 안변부
사 이중하(李重夏)를 감계사(勘界使)로 삼아 토문 지역의 경계를 조사케 한
이후의 일련의 움직임을 적었을 뿐만 아니라, 「찰계공문고(察界公文攷)」와
「사계공문고(査界公文攷)」부분에서는, 각기 1897년 함북관찰사 조존우(趙
存禹)가 조사하여 작성한 도본의 부설(附說)을 소개함과 함께, 1898년 다시
정계비 장소를 조사한 내력을 기록했다. 이와 같이 김노규의 ������북여요선������은
간도의 영유권문제에 대한 유력한 자료일 뿐 아니라, 당시 한말 격동기의
한국민이 인식하고 있는 간도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다는 점과, 고구려⋅
발해⋅고려에 대한 당대 변방에 거주하던 지식인의 가치가 투영되어 있다
는 측면에서 주목해야 할 자료이다.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25
추대됩니다. 중광단이 출발한 지역은 당시 대종교의 주요 거점이
었던 왕청현(汪淸縣)으로, 대종교에서는 1910년 시교사(施敎師) 박
창익(朴昌益: 박찬익의 異名)을 파견하여 포교의 거점을 잡은 곳입
니다.
이 시기에 이미 만주로 이주해 살던 한인(韓人)들의 수가 20만 명
이 넘었고 이 중 많은 인구가 이미 대종교를 직․간접적으로 신봉
하게 됩니다. 대종교의 중광 교조인 홍암 나철이 1911년부터 직접
만주 포교에 나서 1915년 경성(京城)으로 돌아오기까지 근 6년간을
포교에 노력한 것도 대종교 신앙을 통한 독립의식의 고취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당시 중광단에 가담한 인물들은 대부분 대
종교도들로서, 특히 서일을 비롯한 백순⋅현천묵⋅박찬익⋅계화⋅
김병덕(金星)⋅채오 등 중광단의 지도층은 대종교의 중심을 이루
던 인물들입니다.
중광단이라는 명칭 또한 과거 우리 고유의 단군신앙에 대한 부활
을 의미하는 대종교의 ‘중광(重光 교문이 다시 열림)’에서 따온 철
학적 명칭입니다. 이렇게 볼 때 중광단이라는 단체는 독립운동단
체 이전에 사상적으로 무장된 철저한 정신집단으로서, 후일 대한
정의단(大韓正義團)이나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一名 북로군정서)
로 발전해 가면서도 그 정신은 그대로 계승되었는데, 서일의 사상
추구와도 뗄 수 없는 집단이었습니다.
이렇듯 서일은 대종교를 접하고 그 정신으로 중광단을 만드는데,
그러한 변화의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은 나철이라는 인물과의 만
남입니다. 즉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리대전(神理大全)������이라는
책을 경험하면서 입니다. ������삼일신고������는 나철이 대종교를 중광하기
이전인 1905년 11월 30일, 우연히 두암(頭岩) 백전(伯全)이라는 노
인을 만나 단군교(檀君敎)에 입교하고 받은 비전(秘典)으로서, 후일
대종교의 주요 경전이 되는 책입니다. 또한 ������신리대전������은 나철이
326 仙道文化 제 8 권
������삼일신고������에 나타나는 신리(神理)를 신위(神位)⋅신도(神道)⋅신
인(神人)⋅신교(神敎)로 나누어 구명한 책입니다.
먼저 서일이 나철을 만난 때가 언제였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추측컨대 1911년 7월, 즉 서일이 중광단을 조직하여 계화⋅백순⋅
박찬익 등과 함께 화룡현 청파호 등지에서 대종교 포교활동에 전
념하던 시기1)와 나철이 같은 해 7월 21일 화룡현 청파호에 도착했
다2)는 기록과 일치하는 그 시기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일은 대종교교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삼일(三一)의 원리야말
로 백봉신사(白峯神師)께서 이를 나철에게 전하여준 것으로 밝히
고, 나같이 갖지 못한 사람으로서도 또한 다행하게 나철 스승으로
부터 친히 가르치심을 받아 더불어 들음이 있었음에 감격합니다.3)
이것을 보더라도 서일이 나철을 만나 대종교의 심오한 진리에 대
해 눈을 떴음을 암시 받을 수 있습니다.
까닭에 그는 ������삼일신고������와 함께 나철이 직접 저술한 ������신리대전������에
대해 지극한 존경의 예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사실 서일의 저술인
������회삼경(會三經)������⋅������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구변도설(九
變圖說)������⋅������진리도설(眞理圖說)������⋅������삼문일답(三問一答)������⋅������오대종
지강연(五大宗旨講演)������등은 앞의 두 책에 대한 체계적인 해석과
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는 대종교의 ������삼일
신고������야말로 천지만물의 온갖 이치를 밝힘은 물론 인간의 성품을
트고 공적(功績)을 마치는 묘법(妙法)이 담겨 있는 이치의 뿌리로
규정하면서4) 또한 ������신리대전������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는 것입니다.5)
따라서 서일이 본격적인 독립운동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는 정신
3) ��� ���독립신문������1920년 1월 1일자 참조.
4) ��� ���대종교중광육십년사������, 대종교총본사, 1971, p.165.
5) 같은 책, p.112 참조.
6) 서일, 「삼문일답」������대종교중광육십년사������, 같은 책, pp.138~139 참조.
7) 같은 책, p.140 참조.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27
적 배경이 대종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대
종교를 접하면서 그의 삶의 가치가 새롭게 전환됩니다. 그것은 그
가 평생을 대종교의 정신 속에서 수도하는 종교인의 자세로 살았
고 그가 남긴 저술들이 모두 대종교의 교리를 궁구하는 내용이라
는 점도 이를 증명합니다.
백포 서일은 무장독립운동을 이끈 독립혁명가이기 이전에 사상가
였습니다. 특히 대종교라는 종교적 경험을 통해 이룩한 그의 철학
적 위상은 우리 사회에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가치를 던졌습니다.
철학의 부재라는 우리 현대사에서 삼일철학이라는 사상체계를 독
보적으로 체계화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그의 종
교적 스승인 나철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는데, 서일이 지은 다음의
도각시(道覺詩)6)를 보면 헤아릴 수 있습니다.
來賓有事主人知 세사로 찾아가니 그대 마음 안다 하네
道室從容日影遲 고요한 수도실엔 햇빛도 넘흘러라
我本不迷惟一意 나는 본시 미혹함 없어 한 뜻을 품었다 하며
爾初無間莫三思 자네 비로소 거리 허물고 세 뜻을 정했다 짚으니
理無後覺先天息 철리(哲理)는 깨달음을 타고난 듯 밝은 사람
名不虛存實地宜 명성도 헛됨 없이 소문과 하나 같다
錯綜平生疑信半 평생을 헷갈리며 반신반의했건만
孜孜說道夕陽時 힘써 깨달으니 날은 이미 어스름
즉 나철을 찾아가 삼일철학의 가치를 깨달았다는 고백을 형상화한
시입니다. 그러므로 서일은 사상 구현에 있어서도 나철이 주장한
“교문을 세우니 이름하여 대종이요, 현묘한 도의 근원은 삼일이라
(乃設敎門曰大倧玄妙之原道三一)”는 주장7)을 철저하게 관철해 갔
8) 서일, 「三問一答(上編)」������大倧敎報������第三十二卷四之三⋅四, 大倧敎總本d司, 1941,
p.17.
9) 나철, 「慶賀辭」������대종교중광육십년사������, 앞의 책, p.172.
328 仙道文化 제 8 권
습니다.
서일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 기록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회삼경������⋅������삼일신고강의������⋅������구변도설������⋅������진리도설������⋅������오대
종지강연������⋅������삼문일답������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회삼경������은 서일 철학의 백미로서, ������삼일신고������를 대종교의 삼
일원리에 맞춰 과학적으로 증명한 글입니다. ������회삼경������이라는 책명
은 ������삼일신고������‘진리훈’의 예찬(禮讚) 속에 나오는 “하나로부터 셋
이 됨이여, 참과 가달이 나누이도다. 셋이 모여 하나가 되니(會三之
一) 헤맴과 깨침 길이 갈리네”라는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회삼경������
은 서일의 삼일사상이 가장 종합적으로 체계화된 글인데, 유⋅불⋅
선 삼교의 원리인 불교의 묘법, 유교의 역학, 그리고 도교의 현리
(玄理)를 종합한 것입니다.
물론 회삼귀일의 논리가 불교나 중국에서도 나타납니다. 원효의
삼국통일 이념으로 널리 알려진 ������법화경������의 회삼귀일사상이 그것
입니다. 원효는 부처가 방편으로 설한 성문승(聲聞乘)⋅연각승(緣
覺乘)⋅보살승(菩薩乘)인 삼승(三乘)이 궁극적으로 일승(一乘)에 귀
착된다는 가르침에 주목했습니다. 승(乘)이란 깨달음에 이르는 수
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삼승이란 부처의 깨달음에 이르는 하나의
길을 중생들의 성품과 능력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눕니다. 즉 ������법화
경������에서 “부처님이 세 사람에게 각각 다르게 말씀하셨지만, 그것
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임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
셋은 모두 커다란 한 그릇에 담겨지는 것”이라는 비유로 나타나고
나철의 삼일철학적 가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그의 저술 ������신리대전(神
理大全)������이다. 이 책은 나철이 내세우는 가치의 근본인 신(神)에 대한 분석
이, 철학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신리대전������은 ������삼
일신고������의 을 ‘신위(神位 - 한얼 자리)’ ‘ 신도(神道 - 한얼 도
리)’ ‘ 신인(神人 - 한얼 사람)’ 그리고 ‘신교(神敎 - 한얼 교화)’라는 네 방면
에서 풀어 해석한 것이다. 나철은 이 책에서, 삼일철학의 철학적 이치를 구
명함과 동시에, 신학적(神學�的)인 해석을 하고 있다.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29
있습니다. 원효는 이러한 논리를 방편 삼아 사상통일을 꾀하려 했
던 것입니다.
또한 중국 후한(後漢)의 사상가 모융(牟融: ?〜?79년)이 ������이혹론(理惑
論)������에서 유⋅불⋅도 삼교의 조화를 내세운 이래로, 진(晉)·송(宋) 시
대로 이어지면서 많은 학자가 삼교합일론을 펼쳤습니다. 남제(南齊)
의 장융(張融: 444~497년)은 그의 저서 ������통원(通源)������에서 삼교가 근
본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수(隋)의 왕통(王通: 584〜5
617년)은 저서 ������문중자(文中子)������에서 유⋅불⋅도는 모두 정교(正敎)
이므로 사람과 때와 장소에 따라 적당히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습니
다. 그 후 당(唐)의 이고(李翺: 772〜7841년)가 쓴 ������복성서(復性書)������,
백낙천(白樂天: 772〜7846년)의 ������삼교론형(三敎論衡)������, 원(元)나라의
유밀(劉謐)이 쓴 ������삼교평심론(三敎平心論)������, 명(明)나라 임조은(林兆
恩: 1517〜11598)의 ������삼교회편(三敎會編)������등은 모두 삼교합일론의 입
장으로 넓은 의미의 회삼론(會三論)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나 중국에 나타나는 회삼귀일론이 원칙적 방법론 혹은
유불도 삼교합일의 가치에만 경도되어 있을 뿐, ������삼일신고������에 드
러나는 종교적 체계만큼 조직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즉, 신관(神
觀: 三神一體思想)⋅내세관(來世觀: 三天宮思想)⋅수행관(修行觀:
三法修行) 등이 회삼귀일체제로 정돈된 것이 ������삼일신고������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삼경������의 내용 역시, 삼신(三神)⋅삼
철(三哲)⋅삼망(三妄)⋅삼도(三途)⋅삼아(三我)⋅삼륜(三倫)⋅삼계
(三界)⋅삼회(三會)⋅귀일(歸一)의 9편으로 나누어, 삼신일체 하느
님[一神]으로 나와 다시 하느님으로 돌아가는 논리를 3⋅3체계로
펼친 것입니다. 또한 각 편마다 도형(圖形)으로 정리함으로써 이해
를 편하게 하였으며, 인간의 공덕이 완전함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트임에 돌아간다는 논리로, “참함을 돌이키며 하느님이 된다[返眞
一神]”고 하는 삼진귀일사상(三眞歸一思想)을 섬세하게 드러내고
330 仙道文化 제 8 권
있습니다.
������구변도설������은 대종교의 상징인 원(圓)⋅방(方)⋅각(角)의 삼묘(三
妙)를 대종교 교리의 삼덕(三德)으로 통하는 성(性)⋅명(命)⋅정(精)
의 이치와 연관시켜 그림을 통하여 해설한 것입니다. 또한 ������진리
도설������은 천지인 삼극의 원리를 생(生)⋅화(化)⋅성(成)의 변칙에 의
하여 가달[妄]을 돌이켜 참[眞]으로 돌아가 성통공완(性通功完)에
이르는 삼일지리(三一之理)의 이치를 밝힌 글입니다.
한편 ������오대종지강연������은 1909년 대종교의 중광 직후, 나철이 발포
한 오대종지(五大宗旨), 즉 공경으로 하느님을 받들 것(敬奉天神)⋅
정성으로 성품을 닦을 것(誠修靈性)⋅사랑으로 인류를 합할 것(愛
合種族)⋅고요함으로 행복을 구할 것(靜求利福)⋅부지런함으로 살
림에 힘쓸 것(勤務産業) 등의 다섯 가치를 종교철학적 측면에서 강
해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삼문일답������은 삼사생(三思生-서일 자신)과 일의자(一意子-
스승인 나철)의 문답형식으로 이루어진 글입니다. 이 글에서 서일
은, 대종교의 삼일철학을 토대로 상권에서는 서언과 함께 ‘하늘에
대한 헤아림[天論]’⋅‘하느님에 대한 헤아림[神論]’⋅‘하늘집에 대한
헤아림[天宮�論]’⋅‘누리에 대한 헤아림[世界論]’에 대해 구명하고 하
권에서는 ‘참이치에 대한 헤아림[眞理論)]’네 부분에 대한 이치 설
명과 결론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삼문일답������은 다른 종교의 교리
와 대종교의 삼일사상을 비교강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안타
깝게도 머리말만 남고 대종교의 임오교변(壬午敎變 1942.11) 당시
모두 분실하였습니다.
더불어 서일은 대종교의 교리⋅교사의 정리와 보급에도 남다른 정
성을 가졌습니다. 그가 대종교동도본사를 이끌던 시절인 1918년 1
월에, 대종교 교리⋅교사의 핵심이 되는 ������신사기������⋅������신리대전������과
서일 스스로의 연구물인 ������회삼경������그리고 ������도해삼일신고강의(圖解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31
三一神誥講義)������등을 하나로 엮은 ������사책합부(四冊合附)������를 출간(블
라디보스톡)도 했습니다.8) 특히 이 책의 출간에는 서일뿐만이 아
니라, 당시 대종교동도본사의 주요 인물들이며 북로군정서의 핵심
멤버이기도 했던 계화⋅정삼⋅고평 등의 인물들도 모두 참여했습
니다. 계화는 ������신사기������의 주해(註解)를, 정삼은 ������회삼경������의 발문(跋
文)을 썼으며, 고평은 ������사책합부������의 편수(編修)를 담당하였습니다.
사회서일선생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수전병행의 문교일치를 중심
으로 한 삼일철학이었다. 그분은 항상 대종교의 뜻을 받들어 ������삼
일신고������의 지감 조식 금촉을 수행하셨다. 제가 수업교재로 ������역해
종경사부합편������이라는 책을 쓴 적이 있는데, 그 속에 ������삼일신고������,
������신사기������, ������회삼경������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접하면
서 이 서일이라는 분이 궁금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분이시길래
이렇게 학문을 잘하시는지 우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았던 분 중에 어떻게 말하면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분들이
많은데 이 분은 제대로 학문을 했습니다. 보통 공부를 해서는 이
렇게 주석을 달수 없는데 상당한 수준에 올랐기 때문에 그때부터
제가 주목을 했고 그게 우리 오늘 발표를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우리 옆에 계시는, 천안 흑성산 옆의 한국독
립운동사연구소에 계시는 이동언연구관께서 대종교활동과 항일투
쟁에 대해 발표해 주시겠습니다.
이동언네! 안녕하십니까? 방금 소개받은 이동언입니다. 저는 요 고
개만 넘으면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
구소에서 책임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오늘 국학연구원
에서 의미 있는 학술대회를 기획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학
10) 고평 編修, ������四冊合附������, 대종교동도본사, 1918.
332 仙道文化 제 8 권
술행사와는 다른 형식으로 편안하고 진지하게 백포 서일선생에 대
해 발표하는 자리라 더욱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서굉일
선생님께서는 은사님뻘 되는 선생님이시고요. 저도 독립기념관 한
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근무한지가 벌써 24년째입니다. 대학에서
한국독립운동사를 공부하면서 제가 대종교에 관심을 가진 건 20년
전입니다. 대종교 분야를 연구하시는 선생님이 몇 분 안됩니다. 저
는 한국독립운동사를 공부하면서 ‘대종교가 독립운동에 구심체였
다’라고 다들 얘기하는데 대종교에 대한 연구가 별로 많지 않습니
다. 저도 대학에서 한국독립운동사에 대해 20년 가까이 강의를 하
였습니다. 중고등학교나 심지어는 대학 수업시간에 민족종교에서
무엇이냐 하고 질문을 하면 학생들이 잘 모른다고 합니다. 심지어
는 유교라고 대답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저도 홍은동에 있는 대
종교 총본사에도 가보고 중국에 가서 대종교 유적지를 둘러보았습
니다만 많이 슬펐습니다. 왜 우리 민족종교가 우리 학계에서도 외
면당해야 하는가? 사실 관심이 없지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
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연구 성향이 남들이 안하는 걸 많이 찾아서
연구합니다. 인물연구에 대해 연구해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
였습니다. 김동삼⋅안희제⋅김광제⋅나철⋅이용태⋅이용준 등입
니다. 사실은 서일 선생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오
늘 학술대회에서 김동환 선생님과 서굉일 선생님께서 제가 몰랐던
내용을 많이 말씀해 주셨는데 서일 선생 관련 자료가 많지 않습니
다. 물론 자료는 노력해서 찾으면 있겠죠. 그런데 서일 선생에 관
해서는 서굉일 선생님께서도 언급을 하셨습니다만 1992년 강용권
선생님께서 예전에 자전거를 타고 중국지역을 답사하시면서 후손
도 찾으시고 관련 자료를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생존
해 있는 후손들도 잘 모르는 실정입니다. 안타깝게도 고인이 되셨
지만 강용권 선생께서 1992년에 발표한 논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33
조금 전에 발표하신 김동환 선생께서 1999년 대종교 중광 90주년
학술대회에서 ‘백포 서일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
표하셨습니다. 사실 김동환 선생 논문을 많이 참고하였습니다. 서
일 선생에 관해서 연구가 안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료가 부족하
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서일 선생에 대해 말씀드리는 부분은
‘서일의 대종교에서의 활동과 항일투쟁’입니다. 활동시기는 10년간
입니다. 서일 선생이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하신 게 1911년 중광단
을 조직하셔서 활동하시다가 1921년 8월 27일 순국하였습니다. 시
간관계로 가능한 먼저 발표하신 선생들과 발표내용과 중복되는 내
용은 피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독립운동이 여러 가지 세력 간에 갈등이 있었다는 부정적인 얘기
가 많은데 서일 선생은 물론 대종교 사상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계
파를 초월하고 개인적인 명예를 추구하지 않은 분입니다. 단적인
예가 1919년 대종교 제2세 교주이신 김교헌께서 교통을 전수하고
자 하셨습니다만 서일 선생은 무장투쟁에 전념하기 위해 5년간 유
보하기로 하였습니다. 쉽지 않은 이야기이지요. 대종교는 교주가
다음 교주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보아도 서일
선생은 개인적인 명예 추구보다 진정한 독립운동을 실천한 것입니
다. 두 번째는 그 당시에 만주에서 전개하는 독립운동이 조직적이
지 못하였습니다. 각 분야에 전문가도 부족한 실정이었지요. 한마
디로 오합지졸이었다고 할까요. 서일 선생은 무장투쟁도 굉장히
전문성을 띤,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단적
인 예가 대한정의단을 하실 때 대한정의단의 주요 인물들이 군사
부문에 비전문가로 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가 어려웠습
니다. 대한정의단 총재로 있던 서일 선생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
해 김좌진․조성환 등 한말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군사전문가들
이 많이 있는 길림군정사와 연합을 추진하십니다. 길림군정사는
334 仙道文化 제 8 권
김좌진이 1919년 3월 중순에 무장투쟁을 위해 조직한 독립군단체
입니다.
세 번째로 서일 선생은 무엇보다도 언행이 일치되신 분입니다. 자
기가 한 행동과 말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분이 많은데 서일 선
생의 최후를 보면 참 책임이 강한 언행이 일치되는 진정한 지도자
였습니다. 자유시참변에서 독립군이 전부 참변 당하고 밀산에 재
집결해서 재기를 위해 계속 훈련하고 있다가 수백 명의 토비들에
게 습격을 받아서 상당한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쓸쓸히
자결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 독립운동사를 보면 을사늑약이 체결
당시 자정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참 어려운 일이지요. 스스로 목숨
을 끊는 분도 있고 은둔하시는 분도 있는데 사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게 굉장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요즘 말하는 자살하고는
다른 경우입니다. 정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치욕 때문에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이 여러분 계십니다. 서일 선
생도 대한 독립군 지휘자로서 그 상황에서 모든 책임을 지고 스스
로 목숨을 끊었다. 참 대단한 거죠. 제가 맡은 분야가 ‘대종교에서
의 활동과 무장투쟁’입니다. 그런데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대부분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종교 교도였습니다. 아쉽게도 대종교 교적
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 대종교에서 활동을 하셨지요. 한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
부가 수립될 당시입니다. 그 당시에 의정원, 요즘으로 말하면 국회
입니다. 의정원 의원 29명 중에서 대종교 원로가 21명이었고, 의장
에 선출된 이동녕과 정부조직에 임명된 13명의 각료 중에서 11명
이 대종교 원로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네 번째는 서일 선생의 대종교에서의 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은 교세확장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단기간에 대종
교 신자들을 확보합니다. 그 이유를 조사 해보니 서일 선생이 함경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35
도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1910년대 초기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한인들의 출신지별 통계가 있습니다. 그 통계자료를 보면 1910년
초는 함경북도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함경북도 출
신인 서일 선생과 고향이 같다는 동향심리가 작용하여 대종교 포
교활동에서 큰 성과를 거두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섯 번째는 1914년 5월 13일 대종교 총본사가 만주 화룡현 청파
호로 이전합니다. 대종교 총본사가 이곳으로 이전이 가능하였던
것도 서일 선생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서일 선생이 조
직한 중광단이 이미 기반을 잡고 있었고 중광단의 활동에 힘입어
대종교 총본사 이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중광단의 명칭과 지
도층을 비롯한 구성원이 대종교 교인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서일
선생의 무장투쟁을 살펴보면 중광단에서 대한정의단으로 대한군
정서(북로군정서)로 확대 발전시키며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
였습니다. 무장투쟁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한 가지만 말씀 드리
고 싶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학계에
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만 1919년 2월 길림에서 선포된 대한독립
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입니다. 무오라는 게 기미년은 1919년
이고 무오년은 1918년입니다. 이미 기미독립선언서가 선포되기 이
전에 무오독립선언서가 선포되었습니다. 무오독립선언서를 보면
발표 일자가 단군기원 ‘252년 2월 ○’으로 되어 있습니다. 날짜가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서기로는 1919년 2월입니다. 다음으
로 발표주체가 누구냐? 바로 만주지역 항일무장단체인 ‘대한의군
부’입니다. 그리고 선언서 내용에 ‘단군대황조’라고 분명히 나와 있
습니다. 발표장소도 대종교 총본사인 것으로 보아 대종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
39명의 명단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 대종교 신도들입니다. 물론 대
종교 신도가 아닌 분들이 있습니다. 허혁, 이세영, 한흥, 최명학 등
336 仙道文化 제 8 권
등 그리고 제일 잘 아는 우남 이승만 그리고 앞에서 서굉일 선생
님께서 말씀하신 김약연, 이대위, 황상규, 안창호 이런 분들은 대종
교 교도들은 아니지만 이런 분들은 제외한 대부분의 인사들이 대
종교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문을 하나 가졌습니다.
무오독립선언서를 서명한 인물들이 전부 대종교 핵심 인물들이었
는데 대종교 삼종사라 하면 1세 교주 나철, 2세 교주 김교헌, 그리
고 서일 선생을 얘기합니다. 서일 장군은 왜 서명을 하지 않았을까
요? 제가 의문을 가져 봤습니다. 서일 선생은 무장투쟁에 전념하기
위해서 중광단을 조직해서 1919년 5월 대한정의단으로 확대 발전
시킵니다. 제 의문은 조금 해소되었습니다.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방법과 노선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진정한 독립운동은 무
장투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일 선생이 무오독립선언서 서명자 명
단에 보이지 않는데 대종교에서 서일 선생의 위치를 감안하면 당
연히 서명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 당시 대종교 교
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중광단 단장으로 무장투쟁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중광단은 1919년 5월 대한정의단으로 발전
하여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준비합니다. 서일 선생은 항상 비밀단
체를 운영합니다. 동원당이라든지 그리고 대한정의단 하실 때도
독립군정회라는 무장조직을 정의단 내에 따로 설치하였습니다. 그
리고 저도 군대를 갔다 왔지만은 기동타격대라든지 선발대가 있고
수색대가 있죠. 그래서 정말 무장투쟁을 오늘날의 군대처럼 전문
적으로 체계적으로 하신 분이다 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광복군에서도 교재도 많이 발간하고 신문도 발행하였습니다만 서
일 선생도 ������일민보������와 ������신국보������라는 한글신문을 발행하여 재만동
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습니다. 아쉽게도 이런 신문자료들
이 오늘날까지 전해오지 않습니다.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37
여섯 번째로 서일 장군이 북로군정서를 하실 때 그냥 이 시기에
서간도에서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부민단과 신흥무관
학교를 중심으로 서로군정서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런데 양진영에
서 따로따로 별개로 활동한 게 아닙니다.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졌
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양군정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의 정규군으로 서로 협의, 원조하였습니다. 주목할 점은 양군정서
의 간부들이 대부분이 대종교 신도들이었고, 양군정서의 활동이
대종교 단군신앙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석주유고������에 나
와 있습니다. 양군정서 대표 서일과 이상룡은 서신과 대표 파견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고 군사적 협조를 도모하였다. 그렇게 나와 있
습니다. 그 뒤에 시가 하나 있는데 이거는 석주 선생께서 1920년
서로군정서 군사요원을 안도현으로 파견할 때 성준용, 이범석, 강
남호를 파견할 때 지은 시가 하나 있습니다. 제 논문을 보시면 주
석에 나와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내용을 봐도 서
로군정서, 북로군정서, 양군정서 간부들은 대종교 단군신앙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일본군과 혈전에 임했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
리고 이제 서일 장군 하면 여러분이 제일 잘 아시는 최대 승전보
를 올렸던 청산리대첩입니다.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대한군정
서는 1920년 2월초 왕쳥현 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였는데
사관연성소 소장 김좌진은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을 받습니다. 교관
파견과 교재를 지원받았으며, 사관연성소 교관으로는 이범석, 김규
식 이런 분들이 훈련을 담당합니다.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는
1920년 9월 9일 졸업생을 배출하였습니다. 또한 이들 졸업생을 중
심으로 300여 명의 교성대를 조직하였습니다. 교성대라는 조직은
최정예부대입니다. 그래서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대한군정
서의 주축이 됩니다.
오늘날 청산리대첩의 승리가 그냥 있은 게 아니다. 청산리대첩에
338 仙道文化 제 8 권
참전했던 대한군정서 간부명단은 참고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청산
리대첩 후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서일 총재는 대한민국 임시정
부에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 부하 300여 명이 일본군 1,300
여 명을 격살”하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청산리대첩은 한국독립군
이 벌인 전투 중에서 대승을 거둔 대표적인 전투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서일 선생이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서
일 선생은 그 이후에 대종교 발전과 분열된 독립진영이 단합하여
대일항전에 분발할 것을 촉구했고 끝가지 수전병행의 행동철학을
끝까지 실천하셨습니다. 서일선생은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과
함께 대종교 교세확장에 크게 이바지하여 대종교 전성기를 이룬
분이고 김교헌이 서일에게 대종교 교통을 전수하고자 할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돈독한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서일 선생 순국 후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께서도 큰 충격을 받은 후 병을 앓다가
1923년 11월 영안현 남관의 대종교 총본사 수도실에서 병으로 생
을 마감하셨습니다. 이상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사회다음은 국사학계 내지는 사학계의 스타플레이어시죠. 우리
이덕일 선생님께서 여기에 대한 논평을 한 번 들어 보시겠습니다.
이덕일반갑습니다. 저는 사실 서일 선생에 대해 발표할 만큼 이 분
에 대해 공부가 되지 않았는데 저도 공부할 겸 발표하게 되었습니
다.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사를 살펴보면서 몇 가지 생각한 게 있습
니다. 그런 점을 서일 선생과 관련해서 몇 가지 문제제기를 해보려
고 합니다. 그 첫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이 서일 선생이 대종교를 받
아들이게 되는 근본 소양은 뭔가 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
습니다. 그런 말이 있죠 “각시금작일비(覺是今作日非)”라고 오늘
뭔가를 깨달았더니 어제까지는 다 틀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39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어떤 바탕이 있어서 깨
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서일 선생의 자료를 찾다보니 김노
규라는 분이 나오는데 이 김노규라는 분은 당시 함경도에서 유명
한 분이셨습니다. 특히 이분은 예언도 한다고 하고 축지법도 한다
는 등의 소문도 났던 분인데 무엇보다도 ������북여요선(北輿要選:
1903)���0���이라는 책들을 쓴 분입니다. 김노규 선생은 그 책에서 간도
영토를 조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서일 선생이 어린 시절에 김
노규 선생에게 공부를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런 경험이 서일 선생
의 사상 형성에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바
로 이런 것들이 서일 선생이 대종교를 받아들이는 기초가 되지 않
았겠는가라는 생각이지요. 두 번째는 함일사범학교에서 배우는 교
육인데 함일사범학교에서도 나름대로 교육과 민족에 대해서 생각
을 많이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국계몽운동 같은 방법으
로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어렵다는 생각에 도달했고 이것이 만
주로 망명하지 않았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백포 서일이 대종교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기초사상 형성까지는 김노규라는 분에게 받은
교육과 함일사범학교에서 받은 교육 이 두 가지가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또 두 번째 아까 서굉일 선생님이 연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제가 백포 서일에 대한 몇 가
지 연보 사항만 보더라도 모순된 점이 있습니다. 연보에는 1912년
에 만주로 망명해서 그해 10월에 대종교에 입교했다고 되어 있습
니다. 서일 선생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중광단인데 중광단은 이
미 1911년 3월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중광단의
중광이란 의미 자체가 대종교의 색채가 강한 것인데 1911년 3월에
중광단을 만들어서 청주에서 단장이 된 분이 1912년 10월 대종교
에 입교했다고 되어 있으니까 앞뒤가 좀 맞지 않습니다. 그 이전에
대종교를 받아들이고 상당한 역할을 했으니깐 중광단 단장자리에
340 仙道文化 제 8 권
올랐지 않았겠느냐 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죠. 이런 부분도
워낙 백포에 관한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뒷날 새로운 자료가 나
오기를 기다려야겠지만 서일의 대종교 입교 시기에 관한 연보는
제가 볼 때 문제가 있습니다. 서일이 대종교 입교 후 빠른 시일 내
에 종단 내 지위가 올라간 것도 입교 시기로 알려진 1912년 전부
터 많은 활동을 하고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세 번째
는 서일뿐만 아니라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와 관련이 있는데
이 부분이 많이 가려져 있다는 점입니다. 나중에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로 이전하고 사도본사를 설치하는데 사도본사를 맡으신 면면
을 보면 동도본사는 서일, 서도본사는 신규식, 이동녕 남도본사는
강우, 북도본사는 이상설 선생 등입니다. 이런 분들의 면면을 봤을
때 몇 가지를 분류를 할 필요가 있는데 사도본사를 맡으신 분 중
에 강우 선생만 대종교 색채가 뚜렷한 분입니다. 강우 선생은 인생
자체를 대종교 종교인으로 마쳤다고 볼 수 있는 분이지요. 서일 선
생은 대종교인으로써의 정체성과 독립운동가, 항일운동투쟁가의
정체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분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제 나머지 신규식, 이동녕, 이상설 같은 대종교인이 아닌 것은 아
니지만 대종교 종교인 색채보다 독립운동가의 색채가 좀 더 많지
않은 인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3쪽에 두 번째 그래프에 보시면
대종교인물 중에 알려진 인물이 들어가 있는데 박은식, 이시영, 신
채호, 이상룡, 김좌진, 유동열, 이범석, 홍범도, 김승학, 박찬익, 김
두봉, 안희제, 서상일 이런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은 거의 다 대종교
인들이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1910년대 초중반에
대종교와 독립운동은 하나였다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이 종교로서 대종교를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독립운동의
한 이론이자 방편으로써 대종교를 받아들인 것인지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학 같은 경우도 동학을 종교로 신봉한 분들도 있지만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41
전봉준이나 김개남 같은 분들은 동학의 외피를 입었다고 봐도 크
게 틀리지는 않을 정도로 정치혁명 지향성이 강한 분들이었죠. 물
론 이 둘을 정확히 나누기 쉽지 않겠지만 어째든 대종교를 신앙하
는 분들하고 독립운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종교를 받아들인 분
들에 대해서 좀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왜 이런 생각이 들었냐 하면 우리가 독립운동사 연구를 보면
아직도 많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망할 때
흐름을 보면 당시 왕족들 하고 집권 여당이라 볼 수 있는 노론이
란 정당에서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1910년 일본에서 76명에 달하는 한국인
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주는데 그 중 왕족 등을 빼고 당파를 확인
할 수 있는 사람이 64명 정도 되는 데 제가 당파를 분석해봤어요.
북인이 2명이고 6명, 나머지 56명이 노론입니다. 그중 작위를 거부
한 분들도 계십니다만 전체적으로 노론이 압도적이죠. 인조반정에
뿌리를 두는 노론이라는 당파는 사상적으로 명나라를 신봉하는 극
도의 사대주의 정당이죠. 노론은 기자를 중요시합니다. 단군보다도
중국에서 기자가 와서 우리 민족을 사람으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교화시켰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기자를 우리 민족의 시조로 삼으
려고 했던 정당이기도 하지요. 반면 나라가 망할 때 독립운동에 나
섰던 분들이 있는데, 그것도 집단으로 망명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부분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거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데 서울
지역에서는 우당 이회영 6형제 일가가 있고, 충청도 진천과 강화
도에서는 이상설, 이건승, 정원하, 홍승헌 같은 분들, 모두 양명학
자들입니다. 조선시대 노론당파에게 이단으로 몰렸던 양명학자들
이 나라가 망하니까 집단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나섭니다. 또 하
나는 경상도 안동에서 집단 망명했던 이상룡 일가와 김대락 일가,
김동삼 일가 등이 있는데 이상룡 같은 분은 양명학을 표방하지 않
342 仙道文化 제 8 권
았지만 망명일기를 보면 양명학에 우호적인 입장에 있었던 걸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분들의 역사관을 보면 하나같이 만주
강역과 단군에 대해서 거의 공통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
면 사대주의적 유학자들이나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이 평안
도에 있었다라고 주장하는 반면 이 분들은 공통적으로 만주에 있
었다고 주장하는 식이지요. 전국적 범위에서 집단 망명한 분들의
공통된 사상이 단군과 만주강역에 대한 것입니다.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보고 만주를 민족사의 강역으로 보는 것이지요. 아까 서굉
일 선생님께서 함경도지역의 습성을 말씀해 주셨는데 평안도 분들
이 그 못지않게 만주로 집단이주해 독립운동을 전개합니다. 그중
조병준이라는 분이 중심인데, 훗날 독립신문 사장을 역임하고 참
의부 참의장을 역임하신 김승학 선생이 조병준 선생의 제자죠. 그
래서 평안도에서도 유학자들이 집단 망명하는데 이 분들의 역사관
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가지고 있던 단군이라든지
만주강역이라든지 하는 역사관과 대종교의 연관성 같은 것도 우리
가 한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일 단장의 경우
대종교인으로서 정체성과 항일무장투쟁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부분이 보다 자세하게 밝혀져야 대종교가 독립운동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는지 매김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아
까 김동환선생님이 독립운동에 관해 말씀하셔서 제가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한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참의부 참의
장이셨던 김승학 선생이 해방 후 ������한국독립사������를 쓰십니다. 이분
은 상해에서 독립신문을 만들 때 박은식 선생이 독립운동지혈사
집필하는데 사료 수집에 도움을 줍니다. 이때 해방이 되면 해방된
기쁜 기록인 ������한국독립사������를 쓰겠다고 마음먹고 1920년 초반부터
사료를 모은 분입니다. 이 ������한국독립사������에서 북로군정서에 대해
보면 그 후원기관은 대종교 교우들이었다는 기술이 나옵니다. 독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43
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금이 필요한데 이 자금들을 대
분들에 대해서도 연구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함경도 분
들이 무장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그런 자금은 대종교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이런 점들이 앞으로 보다 정확하
게 밝혀져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네! 이덕일 선생님께서는 첫 번째는 서일 선생 사상의 김노규
선생과 함일사범학교의 문제가 제시되어야 한다. 두 번째는 중광
단이 들어온 때와 대종교를 받아들인 때가 다르다. 이걸 바로 잡아
야하지 않겠나? 세 번째는 단군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을
종교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의 차이, 그리고 강화학파 내지는 양명
학자들도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나? 마지막으로 청산리전투
에 대해서 대종교기회에 대한 물질적 토대 연구가 좀 더 되어야
하지 않나? 이에 대한 답변은 현재 시간이 3시 30분이니깐 10분 쉬
고 3시 40분부터 하겠습니다.
(휴식)
사회아까 논평해 주신 이덕일 선생님의 글에 대해서 그러면 누가
먼저 서일 선생 초기 학문적 형성 과정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있
나요? 먼저 서굉일 선생님께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서굉일우리가 인제 명동촌이라는 곳이 있구요. 해마다 가을이 되면
그쪽에서 오신 분들이 전부 모여서 체육대회를 합니다. 저는 89년
에 그때 시작을 했는데 …(녹취불분명)…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들
어야 하는데 근데 사실 공부를 시작한 중요한 계기가 됐던 것은
문익환 목사님이 70년대 3⋅1 구국사건인지 명동성당사건인지 때
344 仙道文化 제 8 권
문에 감옥에 가서 재판을 받고 그러는데, 대학 때 그 선생님한테
배웠는데, 대학을 다닐 때에는 뭐 운동하면서 그런 데 관심이 있었
는데 사실 나는 학교 교편생활을 하면서 선생님이나 같이 대학 다
닐 때 많은 친구들이 다 감옥에 갔는데 저는 감옥을 못 갔어요. 야
간고등학교 교사를 하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아주 조그만 편지 하
나를 엽서를 줬는데 그게 뭐냐면 나라가 이렇게 문제가 되고 하는
데 대체 교회가 뭐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의 교회는
원래 이랬느냐? 너는 신학도 알고 역사도 알고 했으니까 사례를
찾아 봐라. 그래서 어느 날 강만길 선생님을 만나서 제가 그런 이
야기를 했더니 내가 광덕산 김정현 자료를 일본 가서 복사해 왔는
데 여기 보니까 …(녹취불분명)… 가 있는 교회는 성경을 땅에 묻
고 온 교인이 주일날 오후면 재식훈련을 하고 무장 훈련을 해서
싸우는 그런 사례가 있다. 그래서 선생님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
때는 아직 복사지도 청인쇄 복사할 땐데, 자료를 구하서 읽어 보니
까 우리가 전혀 몰랐던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어요. 그 가운데
예를 들면 청산리라는 게 원래 도동 삼동이라 하는 산골에 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만든 겁니다. 이름을 만든 겁니다. 월랑천이란
것도 함경도에 월랑천이란 데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이주해 갔기
때문에 그 동네가 월랑천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영생동, 영생동이
란 게 중국의 그런 사상이 없지 않나 그것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서 자기네 동네를 구세동이라고 짓자. 영생동이라고 짓자. 그런
데 보니까 성경을 땅에 묻고 온 집단이 가서 제일 먼저 산에다 불
을 질러서 농사지을 수 있는 터를 만들고, 개인적인 집을 짓지 않
고 공동체를 위한 그런 것을 했어요. 근데 왜 그렇게 했나 살펴보
니까 결국은 이주 한인 사회라고 하는 것은 행정적으로나 그 어디
에도 도움을 받지 못하니까 결국 그런 공동체는 자의집단이었습니
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대종교에 교촌이라고 하는 것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45
도 그냥 가서 대종교 시교당 만든 것 그런 거 아닙니다. 그것이 유
지가 되려면 다 무장을 해 가지고 거기 지켜야 합니다. 결국은 그
런 공동체가 경제적 공동체이면서 사회적인 자의수단도 됐고 그러
면서 더욱이 그들이 말하자면 안심입명에 보존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세상에 그저 온 게 아니고 단군
임금의, 말하자면 하늘의 얼을 받고 결국 그런 것들이 있었기 때문
에 그 기독교촌에서도 다 그거 지켰습니다. 어천절, 개천절, 10월
상달제 그런 행사를 다 했어요. 지금 한국 교회는 정말 민족이 위
기에 처했을 때 우리가 수용했던 그런 것 하고는 다른 서양 제국
의 하수인이 된 그런 종교.. 지금 우리 한국에는 개인 구원에다 자
본주의화된 종교가 아닌가? 그러니까 결국은 이제 그런 것들이 모
아졌기 때문에 개인적인 자기 재산을 챙기기 이전에 학전이라는
것을 내서 꿔준 1/10을 내서 그것을 교회 짓는 데 쓰는 게 아니라
말하자면 그 공동체 안에서 독립운동 하러 온 아들이랑 아버지가
노령으로 가면 그 집 농사는 누가 짓습니까? 그러면은 그 사람들
이 제일 먼저 가서 그 집 농사를 짓고 그리고 자기 집 농사를 지었
어요. 그러니까 이런 공동체에 이런 것들이 저는 …(녹취불분명)…
지역에 있었던 대종교도 그 당시에 기독교는 비교적 서양의 종교
지만 민족과 연계해서 종교가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짧은 기
간 동안에 거기에서 전파가 가능했지 사람들이 천당지옥설 이야기
를 해가지고 전파가 가능했겠습니까? 결국은 청산리에 우리가 가
서 어랑천이니 장은평이니 하는 거기에 모든 골짝 골짝마다 성교
촌 예수촌 이런 것들이 있는데 그런 데 보게 되면 가톨릭이 했던
것은 조약촌 용정에 있다가 학설골이나 다른 지역이 됐지만은 대
종교촌이나 예수촌은 같은 거리에 있었고 서로 내왕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례가 백룡일기 같은 데서 보면 적어도 서울 영동
교회에서 전도사 했던 사람이 용정에서 ⋯(녹취불분명)가 돼서 돌
346 仙道文化 제 8 권
아다니며 단군신앙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리고 그게 하등에 문제
가 되지 않았어요. 대종교는 아까 선생님이 종교로서의 어떤 성격
하고 민족운동의 참여하고를 말씀하셨는데 사실은 그게 문제가 안
됐습니다. 국내에도 그런 사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강화도에 마
니산이라고 하는데 마니산에 가면 우리 단군성전에 중요한 산인데
거기에 기독교 수도원이 있습니다. 있는 건 간단하게 이해가 가지
만 그것도 사례를 보면 1913년부터 1937년까지 그 강화도 일대 서
해안 일대 기독교 전도라는 것이 전부 …(녹취불분명)… 라고 있고
부흥회를 하고 한 2,000명 3,000명이 섬 전체를 다니면서 부흥회라
고 마지막 날에 전부 강화읍에 와서 모입니다. 그러면 한밤중에
2,000명 정도 와서 횃불을 들고 돌 하나씩을 어깨에 지고 마니산
정상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 일제가 말하자면 경찰서나 그런 거 만
들어서 우리 민족정신을 훼손하려고 그걸 다 파헤쳤어요. 산에 올
라가서 그걸 다시 쌓고 다시 와서 민족의 해방과 하나님의 은총을
비는 그런 부흥회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들은 오늘 한국
교회처럼 단군을 우상으로 인식하는 그런 비민족적인 종교가 아니
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맥락을 제가 인제 근데 왜 지금 한국교회
는 그렇지 못하냐?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런 사례를 찾아서 읽어
보니까 예를 들면 안창호 선생은 일생동안 교회를 섬기지는 않았
어요. 그렇지만 가는 곳마다 가까운 곳에 있으면 교회를 섬겼고 샌
프란시스코에서 그분이 했던 노동교실은 주일날이면 예배당이 됐
어요. 전부 같이 모여가지고 정말 그 분은 살아있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남강 선생님이 그 분을 만나서 민족이 양반이 되는 이런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있던 게 아니냐. 사실은 보면 북간도에 대
종교하고 기독교가 같이 교류할 수 있었던 거 그런 안에서 ⋯(녹
취불분명)… 선생님은 사실 남대문에 수문장 하셨거든요. 수문장
하셨는데 이 분이 인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고 나서는 당신이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47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모든 걸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
아가서 이동수 선생하고 같이 용정에 가서 그레슨이라는 선교사를
만나서 예수를 믿게 됐는데 구춘선 선생이 역사셨대요. 평양에 소
문에 걸려져 있는 ⋯(녹취불분명)… 닻을 한 손으로 들어올릴 수
있는 그런 괴력을 가진 분인데 그런 분이 민족신앙으로서 예수를
믿게 되고 또 그 분이 끝까지 이동휘와 안창호를 후원했기 때문에
그들이 상해에 가서 독립운동이 가능했고 거기에서 돈을 거두어
가지고 계속 후원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그 구춘선 선생님이 가장 꼼짝 못하고 섬기는 그런 분이 누구냐면
서일 선생님이세요. 사실 온성하고 경원이 지근한 거리지만은 결
국 신앙이라는 그것이 민족의 해방과 독립이라고 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더 넘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공유할 수 있었던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대를 이끌어 가는 이념으로써
그게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예를 들어서 정재면이라는 사람이 신
민회에서 파송해 가지고 그 분이 북간도에 가서 보니까 서전의숙
이 문을 닫은 다음인데 거기에 가서 누구를 붙잡아야지 여기에 와
서 기독교 전파를 하겠느냐 그러고 물어보니까 거기는 김약연이라
는 사람이 한인 대통령이라고 이야기 듣는 사람이다 라고 그래요.
그 사람이 누군가 알아보니까 서일 선생이고 똑같은 오룡천에 학
맥을 이은 사람입니다. 맹자를 낭독했다고 해서 그 분을 맹판이라
고 했어요. 그 분을 찾아가서 당신이 이런 서당을 해가지고는 도저
히 독립을 할 수 없습니다. 근대교육을 하는 선생이 필요로 한데
제가 그런 모든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고 자기를 소개해 가
지고 거기에 가서 약속을 성경 학생들에게 예배보고 가르치는 것
만 허락하면 제가 하겠다. 그래서 그 분이 명동학교에 선생이 된
게 1908년이고 1909년에 명동교회가 섰는데, 한 석 달 해가지고 학
생들에게 인기가 있었어요. 근데 명동학교가 잘 될 수 있었던 게
348 仙道文化 제 8 권
그 명동이 서일 선생님이 하셨던 …(녹취불분명)… 일본이 고문 실
험했던 건데 명동이 무어냐 밝을 명 자에 동녘 동 자니까 동쪽을
밝힌다는 뜻은 독립운동한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그 동네에서
는 아이가 태어나면 전부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전부 모여가지고 이 아이에게 무슨 이름을 지어 주는 게 좋겠냐
송명규라는 사람도 별 규 자에 별을 꿈꾸는 아이라고 그것도 민족
의 해방과 독립을 담고 있는 윤동주도 동쪽을 받치는 기둥이 되라
고 해서 동주라고 지어주고 익환이라고 하는 그게 전부 홍익인간
사실은 그 분들은 전부 백두산에 산엽지역에서 살면서 우리 민족
의 재래적인 이런 것들을 버리지 않고 서양에 기독교를 수용할 때
그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한 게 아니라 하나의 보완적인 우리가 가
진 하나의 민족적인 이 정신 위에 서양의 …(녹취불분명)… 를 수
용하기 위해서는 이게 필요 하지 않겠는가? 이제 그런 걸로 출발
을 했다가 나중에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섭리적인 것을 수
용해서 그걸 했지만은 그들은 끝까지 다시 말해서 민족적인 조선
의 기독교적 서양의 기독교적이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대종교 신
앙이 정말 서로가 나눌 수 있는 이런 내면적인 것을 가졌기 때문
에 독립운동 전선에서 항상 나눌 수 있었던 게 아니냐. 안중근 의
사도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안중근이 그 동네 가서 사실은 프
랑스의 백신부를 찾아가서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려고 준비
중이고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 우리 천주교인은 살인
해서는 안된다고 그래서 거기에 물어 보니까 문병규라는 사람이
제일 넉넉한 집인데 그 사람은 규암이라는 사람의 얘기를 듣는다.
규암 김약연 목사가 안 선생님은 정말 훌륭한 생각을 하고 오셨다
고 했어요. 안중근이 거기에서 두 달 동안 있으면서 가서 매일 사
격 연습하고 모든 걸 갖춘 다음에 노령으로 가서 철도를 타고 하
얼빈에 갔다고. 그런 것도 김신묵 할머니에게 증언으로 들었거든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49
요. 그러니까 제가 사실은 대종교가 …(녹취불분명)… 종교라는 카
테고리에서만 이해할 것이냐? 정말 이 민족이 세계적인 민족이 되
기 위해서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오늘 제가 여기 와서 느낀 것도
저는 조소앙 선생의 육성교를 연구했거든요. 육성교가 여기 다 이
루어져 있더라구요. 단군임금이 맨 위에 계시고 좌청룡 우백호로
공자님, 석가 그 아래에다가 마호메트… 다 배열하고 시대마다 우
리 민족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정신적 세계를 만든 것이 소앙 선
생인데 소앙 선생이 그런 걸 한 것이 1913년 상해에 가서 했거든
요. 그 분도 일본에서 대학 다닐 때는 서울까지 와서 상동교회에
가서 전덕기 목사님한테 세례도 받고 그랬지만은 그 시대가 크게
올라오는 세계의 자본주의 물질주의와 문명을 극복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느냐 그렇게 했을 때 그 분들은 모두가 말하자면 원효도
찾아 봤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주기론도 찾아 봤고 그렇게 했지만
은 결국은 중요한 게 대종교에서 얘기하는 단군의 이런 사상이었
다. 이것을 가지고 시대를 볼 수 있는 사실은 소앙 선생의 사상이
우리 대종교 사상인데 그걸 설명하는 논문도 또 세상 사람들이 모
르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저는 이제 종교적인 측
면뿐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세계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통로로서 대종교는 이 시대에서 아직도 우리 민족의 정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예, 아주 어디서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계신데, 안타깝
습니다.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몇 분만 듣고 있다는 게 안타까운
데, 만주 한인사회라는 게 무장, 경제적 사회적 공동체였다는 말씀
하나하고, 대종교하고 기독교 사이가 멀지가 않고 같은 공유하는
기반이 있었다. 세 번째는 대종교가 단순하게 우리민족을 넘어서
전 세계 평화에 이바지 위하여 무장독립을 하지 않았나 이렇게 말
350 仙道文化 제 8 권
씀하신 것 같습니다. 다음은 서일의 대종교 입교시기 문제에 대해
서 김동환 선생님께서 답변해 주시겠습니까
김동환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현재 ������대종교중광
육십년사������라는 책에는 서일 선생의 대종교 입교시기를 1912년 10월
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이 기록은
착오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좀 더 살피면, 서일이 본격적인 항
일투쟁에 나선 것은 1911년 이후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만주로 건
너온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1911년 본격적인 항일단체인 중광단
(重光團)을 조직하여 31세의 나이로 단장에 추대된다는 것이죠. 중
광단이 출발한 지역은 당시 대종교의 주요 거점이었던 왕청현(汪淸
縣)으로, 중광단의 명칭 역시 대종교의 중광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이미 북만주 지역은 대종교에서 1910년 施�敎師 朴昌益(박찬익의 異
名)을 파견하여 포교의 거점을 잡은 곳이기도 하죠. 한편 서일이 그
의 스승이 되는 홍암 나철을 만난 때가 언제였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추측컨대 1911년 7월, 즉 서일이 중광단을 조직하여 계화⋅
백순⋅박찬익 등과 함께 화룡현 청파호 등지에서 대종교 포교활동
에 전념하던 시기와 나철이 같은 해 7월 21일 화룡현 청파호에 도
착했다는 기록과 일치하는 그 시기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서일은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 인물들과 중
광단을 만들기 전에 이미 대종교에 입교하여 대종교 정신으로 중광
단을 출범시키고, 후일 당시 교주였던 나철을 만나 믿음에 대한 확
신을 얻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잠시만 사회자로서 이런 질문을 드려볼 만한데, 이덕일 선생
님의 문제에 대해서는 저도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수진삼법
회통������과 ������삼일신고������를 보다 보면 낮은 차원이 있고 높은 차원이 있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51
는데, 신인합일의 경지에까지 이르는 것은 아마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오랜 수련을 하신 분들한테만 가르쳐 준 것이 있고, 아
주 기본적인 수련의 단계에만 얘기해주는 두 단계 차원이 있지 않
았나? 대종교 안에서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면 종교적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 있고 그렇다고 낮은 차원에 있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대
종교냐 아니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낮은
차원에서 공유와 높은 차원에서의 공유가 서로 다르지 않은가 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냥 단순하게 민족운동 차원이 아니
라 대종교 내부에서 구분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나중에 저도 그
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정인보 선생을 예를 들어보면 아까
도 말한 것처럼 강화도학파, 저는 하곡학파라고 이야기 하는데, 하
곡학파의 마지막 주자가 정인보 선생인데, 정인보 선생의 아들이
얘기하는데 꼭 대종교 행사에 참여를 하셨고, 정인보 선생은 또 수
련을 많이 하셨다고 해요. 정인보 선생이 쓴 글을 보니까 단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거든요. 이게 단순한 게 아니라 높은 경지
에까지 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기록은 없어요.
주위사람들에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분이 도를 닦았다는 것은 확실
한 것 같습니다. 그런 걸 볼 때 저는 두 가지 차원이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김동환 선생님께서 원⋅방⋅각의 문제는 언
제부터 생겼는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김동환본디 圓方角은, 홍암 나철 선생이 1905년에 백봉교단으로부
터 받은 神敎經典을 보면 고구려 시기에 이미 나타납니다. 당시 받
은 ������삼일신고������의 내용 중에, 고구려 國相인 任雅相이 붙인 「眞理
訓」주석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아상은 그 주석에서 원
방각을 三眞인 性命精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한편 조선조 李陌
이 쓴 ������태백일사������는 우리의 문화사상사적 입장에서 상당히 중요한
352 仙道文化 제 8 권
책이라 생각합니다. 그 ������태백일사������에도 삼한의 옛 풍속을 말함에
있어, 하늘에 제사 지낼 때 둥근 단을 쌓고, 땅에 제사 지냄을 方
丘라 하고, 아버지를 제사 지냄을 角木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습니
다. 이것은 하늘이 圓(○)과 관련되고 땅이 方(□)과 관련되며 사람
이 角(△)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天圓⋅地方⋅人角 사상이 우리에게 있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을 하
게 됩니다.
저도 예전부터 원방각에 대한 논문을 꼭 써야겠다는 마음만 먹어
오면서도 쓰지 못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정리를
해줘야 할 부분입니다. 이미 古人이 되셨지만 저희 연구소 이사장
님으로 계셨던 이규행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몇 번
말씀하신 게 있습니다. 뭐냐 하면 일본에서 이미 원방각에 관한 책
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책을 사오셨답니다. 그런데 그 책
이 어디 있는지 찾지를 못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계속해
서 찾고 있는데 아직 확인을 하지 못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원
방각이라는 게,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도형의 토대이자 수리
의 기본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중국에서도 天圓地方思想이 무수히
많습니다. 四庫全書 속에서 천원지방을 치면 수도 없이 발견이 됩
니다. 그런데 우리만큼 천원지방인각에 대한 체계를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학생질문 나철 선생님처럼 서일 대종사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라고 나오는데 그런 행동은 정치적인 결단차원에서 죽음을 택했는
지 실제로 나철 선생처럼 수행으로서 했는지 궁금합니다. 이것이
정치적인 결단으로 보는지 대종교의 결의와 철학차원으로서의 죽
음으로 보시는지요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53
김3동환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서일 선생에 대해 공부한
결론으로 얻은 바는, 그분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쉽게 결단할 분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 역시 조국 광복과 대
종교의 재도약을 위해 선택한 최후의 결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
각입니다. 그가 敎統傳受를 스스로 유보하면서까지 벌인 무장투쟁
의 정신을 봐도 그렇고, 陣中에서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
의 종교적 신념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 배경을 보더라도 그 당시
가 굉장히 어려운 시기였죠. 먼저 자유시참변으로 해서 독립운동
에 큰 타격을 입었던 때였고, 대종교 역시 청산리독립전쟁 이후 모
든 것이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당연히 어떠한 돌파구를 통한 비
장한 결단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서일 선생은 무장투쟁을
주도한 인물로, 자기의 결단으로 독립군이 큰 타격을 입었다 라는
책임의식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죽음을 통해, 흩
어진 독립진영 그리고 독립운동의 의기를 재결집시켜 보겠다는 의
미와 더불어, 풍전등화에 처한 대종교단의 재도약을 도모하려는
생각을 깊게 품은 듯합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이, 식민지의 처참한
시대인식이 담긴 홍암 나철의 유언을 그대로 반복했다는 점을 보
면 더욱 분명해지죠.
학생질문 사실 저는 독립운동사를 20년 동안 해왔습니다. 그런데
도 백포 서일 선생을 저는 솔직히 국학과에 입학하기 전에는 하나
도 몰랐어요. 솔직히 20년 동안 독립운동사를 연구했지만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어요. 수업에서 삼일신고를 강의를 하시는데 윤세복
선생하고 서일 선생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처음 들었어요.
근데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어제 저녁에 김동환 연구원님의 논
문을 읽어봤는데, 몇 가지 의문점을 질문하겠습니다. 첫째, 대종교
의 독립운동은 일제로부터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는다는 것을 어떻
354 仙道文化 제 8 권
게 했는지, 두 번째로 대종교가 한국선도의 자격이 되나? 사실 제
가 보기에는 백포서일사상은 3가지로 보는데 수전, 병행, 삼교일치
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이 무장투쟁하고 전쟁하려고 하는 게 잘 이
해가 안돼요. 그리고 41세에 자결을 하시는데 그 내용도 좀 이해가
안되고요.
김동환그 문제는 따로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
다. 당시 대종교 지도자분들 중에 유근이란 분이 계십니다. 동아일
보 사장으로 있던 그는, 김교헌 선생이나 백암 박은식 선생하고 너
무도 친했습니다. 또 백암 박은식의 여러 저술들, 대표적으로 ������한
국통사������를 완성하는 데 유근 선생의 공이 절대적이었다고 합니다.
그 유근 선생은 만주를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조선인의 정신적
인 고향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만주는 단순히 도피해 가는 곳, 독
립운동 하러 가는 곳을 넘어서, 유근이란 분은 이렇게 생각한 겁니
다. 이것은 역사를 거슬러 얘기하면 고구려시대에 나타난 多勿精
神의 현대적 思考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래 단군교단에 전래되는 五大宗旨에는 ‘安固基土’라는 말이 있습
니다. 잃어버린 땅을 온전히 찾아서 삶의 질서를 바로 잡아두자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것은 대종교 전래의 三天宮�思想과도 밀접하다
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고구려 國相 임아상이라는 인물에 대해 말
씀드렸는데 임아상이라는 분은 삼일신고해설을 남긴 분입니다. 그
는 天宮m訓을 논하면서, 하늘에도 천궁이 있고, 땅에도 천궁이 있으
며, 인간에도 천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땅의 천궁은 백두
산이고 인간의 천궁은 腦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종교도들에게
있어서의 백두산 남북마루는 한울집[天宮]과 동일한 것으로, 그것
을 지키려는 행위는 성스러운 종교적 행위와 일치된다고 할 것입
니다. 일제하 대종교의 독립운동이 조국광복을 넘어, 백두산 남북
학술좌담 |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355
마루를 중심으로 한 배달국 이상향 건설까지 연결되는 이유도 여
기에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동언 선생님이 말씀하신 김승학 선생님이 소장한 자료
중에 ‘배달국이상향건설방략'이라는 자료가 있는데, 안타깝게도 확
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자료 역시 일제하 대종교의 선열
들이 꿈꾸었던 배달국이상향건설과 그대로 연결되는 내용일 것이
라 생각합니다. 1942년 임오교변(대종교 지도자 일제 구속사건) 당
시 대종교 지도자들이 다 잡히지 않습니까? 당시 일제의 訊問調書
에도 이들이 조선독립과 함께 배달국 이상향 건설을 목적으로 하
고 있다고 적어놓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일제하 대종
교인들은 조국광복이라는 현실적인 목표와 더불어, 仙道의 고향이
라 할 백두산 남북마루를 중심으로, 배달국 이상향을 건설하려는
종교적인 목표가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오늘 좌담회를 어떻게 느끼셨는지요? 준비한 측에서는 궁금
했던 백포 서일의 백두산에 대한 사고에서부터 배달국 이상향까지
상세한 내용이 다 소개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우리 국학연구원
은 내년에 더욱 더 좋은 모습으로 여러분과 만나 뵐 것을 약속드
립니다. 이것으로 국학연구원 학술좌담회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