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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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    에세이 잘못을 알면 어떻게 해야? 댓글:  조회:2052  추천:0  2015-05-27
                                       잘못을 알면 어떻게 해야?        “사람이 왜 실수 할 때가 없겠는가. 똑똑한 사람은 실수를 알면 그것을 인차 고칠줄 아는 것이다.”    레닌이 한 말이다,    그렇다, 사람이 왜 실수 할 때가 없겠는가. 관건은 자기가 범한 실수를 심각히 느끼고 그것을 제때에 고치는가 고치지 않는가에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좋은 실례가 하나 있다. 제 애비의 왕위를 이어받은 초위왕(楚威王ㅡ기원전 339년~329년 재위)은 사냥질과 여색에 빠지다보니 국가사무는 전혀 무관심했다. 그러자 태보(太保ㅡ궁내정일품벼슬)는 선왕의 지시대로 그에게 매를 안기는 것으로 벌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초위왕(楚威王)은 하는수없이 돗자리에 엎디였고 태보는 갖춘 회초리로 그의 등을 연거푸 두 대 내리쳤다. 이에 초위왕(楚威王)은 되려 “흥, 때린다고 내가 뭐 굽어들줄을 알았던 모양이지, 하기는 지금은 나를 굴복시킨다고 여기겠지만.” 하면서 되려 우스워했다.    이러자 태보는 적이 실망하면서 대단히 유감스러워했던 것이다.     “난 그래도 그대가 신사니까 회초리맛을 보면 수치스러워할줄 알았는데 사나이답지 못하게 이같이 소인배의 말을 하다니 원! 에 참!”    태보의 입에서 나오는 이같은 실랄한 원망을 들은 초위왕(楚威王)은 그제야 비로소 자기를 뉘우치면서 다시금 정신차린 것이다.  그는 다시는 사냥을 나가지 않았고 그때로부터 녀인도 멀리했다. 그러면서 국사에 혼신을 다하기 시작했는바 훗날 그는 39개국과 합병하여 추(楚)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것이다. 하여 그는 위망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이다. 그의 명성과 업적은 한마디로 말해서 바로 개과자신(改過自新)에서 얻은 것이였다.     그러나 서초패왕으로 알려졌던 항우(项羽)는 결국 어떠했는가? 배짱이 세기로 세상에 이름났던 그는 자기의 잘못을 알고도 고집하면서 뉘우칠줄을 몰랐기에 결국은 오강(乌江)에 빠져 자살하는 신세로 되고 만 것이다.     한번실수가 하나의 교훈으로도 되고있다. 사람은 개과자신(改過自新)을 할줄을 알아야 비로서 부단히 성숙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위대한 사상가 루소가 쓴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벌거벗어 노출 된 진정한 몰골을 세상에 드러낸 그 사람이 바로 내다.”    에서도 그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잘못마저 무자비하게 까밝혀  때리였다    그는 소년시절 남의 집에서 종질을 할적에 낡은 리본(丝带)을 훔쳤다가 주인한테 그만 들키우게 되니 그 죄를 마음곱고 정직한 하녀 마리아에게 들씌워 그의 명성을 더럽혀놓았던 일을 훗날 돌이켜 회상하고는 반성했다.  그 시절의 루소는 얄미웠다, 남의 물건을 자기가 도적질하고는 그 죄를 남한테 뒤집어 쒸웠으니까 얼마나 비렬했는가. 하건만 그는 왜서 후세사람들의 존경을 받게되였겠는가? 그것은 그가 자신의 잘못을 숨긴것이 아니라 세상에다 공개하면서까지 과감하게 그 잘못을 승인하면서 고쳤기 때문에다. 사람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성현은 아닐진대 그 누가 허물이 없겠는가? 늦게라도 그같이 고치는 게 마음편하고 훨씬나은것이다.    
470    작가의 명언 댓글:  조회:1908  추천:0  2015-05-15
                작가의 명언     ◎ 문인의 시비는 특별히 분명해야 하고     애증은 특별히 열렬해야 한다.                                       ㅡ로신   ◎ 사회란 하나의 배와도 같으므로 사람     마다 키를 잡을 준비를 해야 한다.                                      ㅡ입센   ◎ 높은 곳의 사물이라해서 다 높은 것이    아니며 낮은 곳의 사물이라 해서 다 낮    은 것은 아니다.                                     ㅡ챨스 디켄즈   ◎ 글을 쓸 때엔 잉크병에 살점을 떨어뜨려    둔다고 생각될 때 써야한다.                                    ㅡ레브 똘쓰또이
469    나는 어떻게 악마로 변했는가(번역문) 댓글:  조회:3803  추천:11  2015-05-07
                                    나는 어떻게 악마로 변했는가                               일본군 제38사단 230연대 12대 34소대 로병 미야모토의 자백.                                                 기록인: 지로 고바야시,  오시마.                                                               김송죽 번역        나는 간암에 걸려 이제는 말기에 이른 사람이다. 여지껏 아들과 손자의 낯이 깎일가봐 감히 말을 못하고 속만 썩혀오다가 그것을 그냥 속에다 넣 고 저세상까지 가자니 량심상 너무나 가책되고 무서운 일이라 이제는 아마도 다 털어놔야겠다. 나는 인간이 아니라 더러운 살인악마였다.     세상사람 다가 이제부터는 나의 후대까지를 죄악의 씨알머리라 욕하겠지만 방법이 없다. 지난날 내가 저지른 죄악을 담은 얼마라도 뉘우친다면 그것이 회개하는 표현으로 될 것 같고 좀이라도 사람이 될 것 같기에 내가 오늘 결심하고 입을 여는것이다.       기실 나는 야스쿠니신사에 여러번이나 가긴했어도 한번도 그 안에는 들어가본적은 없다. 감히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그안에 들어간다면 신사를 너무나 더럽게 만드는 것 같아서였다. 량심상 가책이 컷거니와 다른 하나는 자신이 해온 짓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구역질만 나기때문이였다. 솔직히 말해 그때 내가 죽었다해도 내 이름과 내 얼굴이 거기에 들어가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 이 미야모토는 너무나도 치사스럽고 더럽고 악질적인 인간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에 가있은 기간에 군국주의의 한 병사로서 별의별짓을 다했다. 털어놓고 말해 나쁜짓이란 나쁜짓은 다한 것이다. 하나도 해보지 않은 짓이 없으니까. 그러니 나는 그 죄를 회피할래야 회피할수가 없는 것이다.    그 전쟁은 순전히 침략 행위였다. 그러하기에 나는 물론이고 다른 여늬 동료들도 역시 사람으로서 소유해야 할 인간성은 가질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격이란건 전혀 운운 할 수 조차 없을 지경이였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와같은 일본군인은 다가 죄악적인 짓에 끼여들지 않을래야 끼여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41년도의 일이다. 우리 제38사단 230연대 12대는 18사단, 51사단, 104사단과 같이 한데집중해서 다나카중장의 지휘하에 홍콩을 지키고있는 영국군대를 진공했던 것이다. 그 전투는 내가 겪은 전투가운데서는 가장 어려운 히트였는바 아군의 병사들은 빗발치는 탄우속에서 꺼꾸러져 군데군데 시체가 널렸다. 그런 환경속에서도 우리는 무사도정신으로 자살성적인 공격을 들이대여 18일만에 끝끝내 홍콩을 점령하고야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쓰러진 제 동료가 흘린 피자국을 밟으면서 홍콩에 들어간 것이다. 그때 나는 어린 신입병사였건만 제 손으로 영국군인을 넷이나 죽이였다. 지어는 잡고있던 무기를 놓고 두손들고 투항하는 사람마저 사정없이 총창으로 찔러 죽이였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해도 누구하나 말리지 않았다.    사실이다. 그때는 그 어느 한 군관도 나서서 우리에게 “제네바공약”에 포로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규정이 있다는것을 알려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웃사람들의 명령이란 그저 “죽이라, 죽이라, 모조리 싹 다 죽이라!”였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가 두눈에 달이 올라 혈안이 된 채 미칠지경으로 대방을 마구죽이기만했던 것이다. 꼭 마치 마약에 중독된것 처럼 사람죽이는데 인이 박혀 살육을 지어는 쾌락으로 삼으면서 그것을 일종의 유희로까지 여겼던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자극적인 백정의 행위였다. 그렇게 살인광으로 까지 변해가면서도 내 자신은 되려 자기를 용감하고 위대한 존재로 여겼거니와 그로인해 자호(自豪)를 가지기까지 했으니 더 말할게 있는가.      우리는 그때, 말하자면 1937년12월12일에 이미 남경대도살이 있은것은 몰랐다. 그저 승승장구하는 우리 일본군대가 남경을 점령했다하니 그것을 위대한 걸작으로만 여겼지 그것이 천추에 용납못할 죄악이였다는 것은 몰랐던 것이다. 훗날귀국하여 중국의 군사법정에서 제6사단의 구히라 육군중장을 심판하는 방송을 듣고서야 나는 비로소 세상을 놀래우는 남경대학살이 있었고 그 상황을 대략 알게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 거기다 비하면 우리가 홍콩에서 감행한 행위는 아무것도 아니였다고만 여겼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닌게아니라 참으로 한쪼각의 량심도 없는 부끄러운 짓이였다.    나는 살인악마짓에다 색마의 짓까지 보태였다. 내 감각에 홍콩의 중국녀자들은 그닥지 않아보였다. 그들은 거개가 왜소한 체격이여서 꼭 마치도 근친교배에 의해서 만들어진 페품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느날 죽을지도 모를 전쟁판이라 언제 그런것을 다 따지랴싶었다. 황차 그때는 우리에게 속했던 위안부들은 곤명에 가서 방금 싸움을 치른 거기의 23사의 관병들에게 몸을 바치는 판이였던 것이다.    우리보고 그들이 이제 당장 돌아올것이니 조금만 더 참으라고 거짓말을 한 장교는 영국군의 총에 맞아 죽었고 위안부들은 45일이나 지나도록 돌아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어떤치들은 아마 싸움을 갖치른 다른 또 어느 한패가 중간에서 위안부들을 가로채간 모양이라 단언했다. 그런 소리를 듣고보니 기분이 몹시 상하면서 격분했던 우리는 세인트 스티븐병원을 목표물로 정하고는 그를 향해 돌진했다. 그때 영국군인 상병들을 치료하고있는 세인트 스티븐 병원에 맨먼저 뛰여들어간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12대였던 것이다.    누군가는 나하고 “중국전구범죄편호 435ㅡ54760”에 보면 229련대는 적의 저격수가 먼저습격하니 세인트 스티븐 병원에 돌진해 들어갔다했는데요 하는데 그런게 아니다. 그의 말대로 그렇다면 우리가 진공해 들어간 것은 정당한 행위로 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런게 아니였다. 그때는 229련대가 성밖을 지켰지 근본 성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은 것이다. 조용한 세인트 스티븐 병원으로 쳐들어간것은 바로 우리였다. 우리는 제멋대로 쳐들어가 아무런 반항도 없는 영국군상병들을 모조리 죽여버리자고 작정했던 것이다. 그때 맨 마지막으로 들어간 사람이 바로 나였는데 약 20여분만에 총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제편사람이 쓰러진건 하나도 없었다. 그 총소리는 우리쪽에서 낸 것이였다. 보고서에다 저격을 받아 우리쪽에서 상망자가 나졌다고 했으면 그건 순전한 거짓말이고 허튼소리다.    어떻게 얻어진 정보였는지 90여명에 달하는 영국병사가 거기 세인트 스티븐 병원에 숨어있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정작 가보니 그 정보는 맞지 않았다. 그곳의 녀의사와 호사들이 우리보고 여기는 병원이다, 모두가 상병이고 숨어있는 영국병사는 한명도 없으니까 수색하지 말라면서 막아나섯던 것이다. 그러나 키타로소좌는 그 말을 전혀 들으려하지 않고 우리를 향해 녀인들을 몽땅 한군데다 가두고 영국군인을 찾아내라 명령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78명에 달하는 녀의사와 호사들을 한 커다란 방에 몰아넣고는 키타로소좌의 명령대로 숨어있다는 영국병을 찾기 시작했는데 결국 하나도 찾지 못하게 되자 치료중인 영국군 부상병들을 마구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용하던 병원은 갑자기 아비규환의 도살장으로 변해버렸다. 아츠라운 비명속에서 영국군 상병들은 저항도 못하고 하나 하나 생명을 잃어가고있었다.    한창 이러는 판인데 229련대가 득달한 것이다. 그들은 병원의 한 방에 녀인들이 가득 같혀있는것을 발견하자 몹시 기뻐하면서 서둘러 바지부터 벗었다. 보아하니 좋은짓은 그들이 먼저하는것 같아서 부상병들을 죽이고있었던 우리들도 살육을 중지하고는 그짓을 따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였기에 영국군인 상병 90명중 그나마 64명만 죽고 나머지는 살아날 수 있은 것이다.    229련대 치들이 자기들은 석달이나 위안부맛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들이 그러니 우리도 석달이나 구경못했노라고 맞받아 떠들어댔다. 이렇게 되자 쌍방에서는 장교들이 나서서 해결책을 찾느라고 머리악을 썼다. 그들은 발정한 수캐같은 병사들을 한번다시 휘둘러 보더니 각기 6명씩 12명을 뽑아 내여 그들이 우선 복도와 출입구들을 지키게금 포치했다. 그러고나서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행동자유를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보기가 끔찍하고도 흉측스런 집체강간장면이 벌어지게 되였던 것이다.    녀인들은 아츠러운 비명을 내지르면서 구원을 바랐지만 허사였다. 그녀들을 구해 줄 구세주는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일제이 왁 달려들어  그녀들의 반항을 저지시키느라 때리면서 깔아뭉개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볼려니 중대장 요시다가 제일 곱게생긴 여의사의 머리를 문틈에다 끼우고는 내리누르는 판이였다. 그러니 그 여의사는 반항을 더 하지 못한채 비명을 지르면서 궁둥이만 치켜올린채 욕지걸이를 했다. 그러니 요시다는 그에게 주먹질을 해댔다. 그리고나서는 군도로 여인의 팬티를 찢어놓았다. 봉두란발이 된 그 녀의사는 알아듣지 못할 말로 요시다를 저주했다.    마치 불에 덴 고양이모양으로 기겁초풍한 여인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에 병원은 급기야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내가 다시볼라니 요시다가 신짝으로 여인의 태양혈을 답새기는 것이였다. 여인은 정신을 잃었는지 소리를 더 지르지 못했다. 그러자 병사 둘이 달려들어 그녀를 바로눕히고는 발가벗기는 것이였다.    요시다는 군도를 한켠에다 던지고나서 부르짖었다.    “병사들이여, 다들 듣거라. 오늘은 우리가 이 계집들을 위안해줘야겠다.   어느누가 감히 우리 일본을 무능하다고 깔보고 욕한단말인가? 이 시각 나는 명령한다ㅡ 목표를 향해 준비! 여기에 있는 중국여자들을 깔아뭉개는 포를 쏘라, 돌격!”    그리하여 그곳은 어느덧 순식간에 강간게임의 낙원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의 손에 든 여인은 나이가 18,9세쯤 되였을 녀간호사였은데 길죽한 상판에 주근깨가 가득했다. 게다가 울어서 두눈마서 부어나 볼모양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여자를 고를 여유가 없었거니와 더구나 기회를 놓칠것만 같아 나는 서둘러 그짓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강간이란것은 꼭 마치 온역병과도 같이 전염이 빨랐던 것이다. 나는 총탁으로 반항하는 그녀의 머리를 답새겼다. 녀인은 그만 정신잃고 쓰러졌다. 맞은자리에서 피가 흘렀다. 그런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칼로 그의 웃옷을 찢었거니와 바지와 속옷마저 다 찟어반라체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때 나는 정말 미친짓을 했다. 여인을 그렇게 만들어놓고서 나는 누구던 와서 이년을 깔아뭉개라고 고함쳤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올라타고 껍석거리고있을 때 그 여자는 그만 개복했고 그녀는 일어나면서 내 낯을 손톱으로 빡 긁어놓았던 것이다. 나는 그를 다시금 정신잃게 만들었다. 나의 주먹에 코등이 터진 그녀의 낯은 당장 피칠갑을 했다. 그런 그를 병사 여섯이 또 달려들어 륜간을 했던 것이다.    이러는 사이 어느덧 세인트 스티븐 병원은 운동장마저 온통 반라체의 일본병사와 전라의 산발한 중국여인들로 어지러워졌다. 그날 이같이 집체적인 강간작전에 참가한 것이 옹군 두개의 련대였던 것이다. 제일 고운 여자들을 골라 먼저 시범을 보였던 자들이 높은 단에 앉자서 사정을 보지 말고 중국여자들을 향래 돌격하고 발사하라고 소리쳐 추기면서 다른 사람이 그러는 장면을 흡족스레 감상했다.    그날 세인트 스티븐 병원의 중국여인들은 그같이 백주에에 평균 6명의 일본병사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만 것이다.    한데 그날 지내고 보니 중국여자라 해서 절대 없수히 볼것이 아니였다. 그들 중 어떤 여인들은 그저 모욕을 당하기만한게 아니였다. 어떤 여인은 그런 혼란속에서 남몰래 가위를 갖고있다가 그것으로 껍석거리는 자의 허리를 찔러 동맥을 끊어놓거나 아니면 생식기를 잘라버렸거니와 지어는 배를 찔러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알아보니 가위에 찔려 대동맥이 끊어진 자 8명, 생식기를 잘리워 잃은자가 5명이나 되었는데 이날 그 여인들 손에 죽은것이 18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값없이 죽은이들 속에는 평상시 우리의 존경을 받아왔던 유키오대좌도 들어있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살인자를 추적하느라 륜간당하고나서 아직 옷도 입지 못해 흉물스레 발가벗은 그대로인 여인들을 모두 한군데다 몰아 세워놓고는 살인짓을 한자는 당장 앞으로 나서라했다. 그러나 응대가 없었다. 우리는 그들을 향해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기관총으로 모조리 없새치우리라 위협했다. 그랬건만 그저 무서워 벌벌 떨뿐 나서는 자가 없었다.     내가 세여 보니 중국 여자 열넷이나 혼비백산하여 허벅지를 마구 떨면서 오줌까지 내싸는 것이였다. 여자 둘은 아예 땅바닥에 쓰러지기까지 했다. 아마 기관총에 당장 죽을것 같아 기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였다. 우리는 그녀들을 그 자리에서 당장 죽이지 않은 것이다.  발가벗은 64명을 한줄에다 묶어놓고는 병원에서 찾아 낸 마취제를 돌아가며 놓아서는 트럭에다 올려뿌렸던 것이다. 우리는 그녀들을 그렇게 싣고서는 거기를 떠나 교외에 있는 한 별장으로 갔다. 그리고는 그들 모두를 군대의 매춘부ㅡ종군 기녀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사방이 모두 철망이라서 그녀들은 달아날래야 달아날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처지에 빠지면서도 녀인들은 다가 불복했다. 육체상의 모욕을 더는 받아내지 못해 죽음으로 반항하는 일이 련속재발했던 것이다. 한 녀인은 죽자고 손톱으로 제 목주래를 허벼 끊다가 발각되였다. 소대장은 홧김에 군도로 그녀의 손바닥을 두토막냈다. 하여 그녀는 당장에서 기혼해 넘어졌는데 그런것을 병사 8명이 바지를 벗고 달려들엇던 것이다. 여섯 번째까지 껍석거리고 나서 일곱 번째가 막 달려들었을 때는 그 녀자는 그만 숨을 거두고말았다.     그같은 녀인이 또 있었다. 어느 병사던 그녀와 성교를 제대로 못했다. 그렇게 되자 소대장이 머리를 쓴것이 그녀를 차라리 발가벗겨 알몸둥이로 만들어서는 통나무에다 묶어놓았다. 그러니 과연 더 애를 먹지 않았다. 그러나 그 녀인역시 3일만에 죽고말았다.     그녀보다 더 참혹한 것은 다른 한 젋은 녀의사의 죽음이였다. 병사 셋이 그녀를 땅바닥에다 재껴놓으니 그녀는 몸을 주지 않으려고 결사적으로 반항했다. 그러니 소대장은 그녀의 두손을 뒤로 탈아 결박했다. 그리고는 칼을 빼들더니 땅바닥에 쓰러진 그녀의 두 다리를 잡아 벌리게 해놓고는 칼을 그녀의 음도에다 박아넣었던 것이다. 그러니 녀인은 너무도 고통스러워 일어나 뛰는데 칼은 꽂힌대로 빠지지 않았고 음도에서 흘러내린 선혈은 땅에다 붉은 선을 그리였다. 가련한 그녀는 모진 통증에 고함을 치다가 쓰러지더니 그만 죽고말았다.      녀인 하나는 억지로 간음하려 든 자의 코를 물어놓았다. 코를 뜯기운 그 병사는 죽겠다고 아우성이 치면서 펄펄 뛰였다. 병사들은 그 여자를 붙잡아 발가벗긴 후 전선대에다 묶어놓았다. 그리고는 칼로 두 유방을 베여냈거니와 배를 자궁이 있는데까지 내리 쩍 갈라놓았다. 그래놓고서는 쏟아지는 창자로 녀인의 머리를 감아놓았던 것이다.     그것이 취미가 되어 우리는 필리핀에 가서도 그따위짓을 다시했던 것이다. 어떻게 되어 생긴 습관인지 한 녀석은 전문 여자의 생식기ㅡ 자궁을 즐겨먹었다. 내가 봤는데 한번은 15살난 여호사를 붙잡아 묶어놓고는 그의 자궁을 베여 불에다 구워먹는 것이였다. 죽지 않은 여자애는 땅에 쓰러진 채 아직 숨이 넘어가지 않아 제 자궁이 그 일본병사의 먹히우는 광경을 고통스레 보았던 것이다. 배가 갈리운 그 어린 여호사는 피를 수없이 흘리다가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가 죽자 이번에는 다른 한 자가 그녀의 심장을 뜯어내여 먹어버렸다.      아마 일본군인들은 가는곳마다 그따위 식인종노릇을 한다는 것을 알았던모양인지 가끔 끔찍스런 보복을 당하하기도 했다. 한번은 230련대가 위안부의 접대를 받게 되었는데 23명이나 생식기가 물려 띁기웠다. 그들 중 18명은 미처 구급못해서 죽기까지 한 것이다.    한번은 내가 붙잡혀 반항하는 중국여자 8명을 죽여버리라는 명령을 받고는 군도로 그녀들의 머리를 전부 베버렸거니와 배까지 칼로 갈라 창자를 빼버렸던 것이다. 나는 그날밤 악몽에 시달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려고 눈을 감았다가는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군했다. 거의 미칠것 같았다.    나는 중국여성 34명을 강간했거니와 내 손으로 그렇게 8명이나 죽이고 3명은 불구자로 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일본이 투항한 후 나는 내가 저지를 죄악을 줄곧 말할 담량이 없었다. 그러다가 오늘에 이르러서야 이같이 말하게 되는데 그 원인이라면 다른게 아니다. 나는 사랑하는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5살나는 손자까지 갑자기 다 읺고말았다. 그들은 홋카이도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그만 다 죽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는 이 세상에 친인이란건 없게되였다. 왜서 이모양이 될가? 그것은 보복이였다. 죄를 지은 나에게 하늘이 내리는 앙갚음이고 천벌이였던 것이다.  나는 오로지 그렇게만 생각해야지 달리는 생각 할 수가 없다.    일본에서는 군국주의가 절대 다시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죄악을 만든다. 우리의 자위대가 하필 국외에 나가 련합국의 임무를 지킬 필요도 없다고 본다.    나는 중국의 피해자들을 향해 미안하다는 말을 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임을 잘 알고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면 오직 한마디 내가 죽으면 내 골회를 중국에 가져다 노새시장에 뿌려 짐승들이 밟아버리게 만들어달라는 것 뿐이다. 아니면 홍콩의 스티븐에다 뿌리든지. 나는 지금 그렇게해서라도 속죄하고푼 마음뿐이다.    특히 위안부 문제는 양국간의 우정을 키우냐 못키우냐 하는 큰 문제와 관계되니 일본정부는 과거에 지은 죄악들을 솔직히 다 승인하고 잘 반성해야 할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량해를 구하자면 오직 그길밖에 없다.    
468    진짜 인물의 조건 댓글:  조회:3304  추천:6  2015-05-06
                천고각성(天鼓覺醒)                                            진짜 인물의 조건                                           이규행ㅡ 국학연구소 이사장      어느 역사를 살펴보면 세상이 시끄럽고 어려울수록 이른바 인물대망론(人物待望論)이 비등하게 된다. 역사의 전개는 그런 백성들의 원망이 바탕이 되어 새 인물이 등장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천하가 대란의 지경에 빠지면 소치(小治)로는 대란을 수습할 수 없는 법이다. 소치란 다름아닌 작은 정치를 뜻하는 것인데, 작은 정치란 미상불 소인배들에 의해 펼쳐지는 정치에 다름 아니다.    소인배들의 정치란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명리를 탐하는 술수정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정치는 천하대세를 바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흙탕물만 튀기다가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천하대란의 시대에는 대치(大治)로 임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다. 대치란 소치의 반대개념으로 큰 정치를 이름하는 것인데, 큰 정치란 소인배의 그것과는 다른 큰 인물의 정치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큰 정치와 큰 인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을 수 있고, 있어왔던 것이 과거의 사례이다. 큰 정치는 큰 인물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와 큰 정치와 큰 인물은 시대의 산물이라는 이야기 등은 그런 사례의 한 가닥이다.    그러나 민심을 이끌고 큰 정치로 천하대란을 평정할 수 있는 인물의 조건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흔히 그런 인물은 경륜이 매우높아야 한다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경륜이란 단순히 많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또 그것은 훌륭한 정치식견이나 정책아이디어를 뜻하는 것은 더욱아니다. 경륜이란 근본적으로 그 인물의 사람됨이 밑바탕에 내재되어 있는데서 우러나온 소산인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경륜이란 이름 아래 위장된 거짓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옛글에 보면 난세를 다스려 나가는 진정한 인물의 조건으로 “삼유칠무(三有七無)”를 손꼽고 있다.    삼유의 첫째는 어질고 자비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지도자라는 사람이 그 바탕에 그런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곧 엄청난 살기(殺氣)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삼유의 둘째는 검소와 절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개의 지도자들은 입으로는 절약과 검소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정반대의 이중적 패턴을 보여 온 것이 지난날의 사례였다. 이런 지도자는 이름만 지도자였을 뿐 소인배나 진배없는 것이며 이런 소인배로 말미암아 세상은 더욱 어지러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것도 이런 맥락 위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삼유의 셋째는 부질없는 경쟁을 일삼지 않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정책경쟁을 일삼고 공명심을 다투는 것처럼 큰 비극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칠무중의 1무는 약속한 일은 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난세극복의 최대의 덕목이여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2무는 돈이나 재물로 사람의 원망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지도자라는 사람 또는 지도층에 있는 사람이 돈이나 재물을 탐하고 사람들의 원망을 산다면 그것은 이미 지도자 실격이라고 할밖에 없다.    3무는 오로지 명리(名利)만 취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명리만 취하는 지도자는 금세 지도력의 한계에 부닥치게 마련이다.    4무는 억지 소성(小成)을 만들어 구차스런 축하의 기쁨을 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공을 세우기 위해 이벤트 만들기에 급급하면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5무는 선행을 자만하고 과시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6무는 사람을 쓰다가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하고  7무는 유감스런 일이 있어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삼유칠무의 인물조건은 우리나라의 현실상황에선 어쩌면 충족시키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어수선해 질수록 백성들의 큰 인물에 대한 기대치가 점점 커져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을 듯싶다.                              자료래원 “올소리 007” 국학연구소
467    스탈린그라드 전투 댓글:  조회:2145  추천:0  2015-05-03
                         스탈린그라드 전투                                                   온라인 뉴스 번역      스탈린그라드전투는 제2차세계대전기간 나치스 독일이 쏘련의 남쪽에 있는 스탈린그라드를 빼앗기 위해 발동한 전투로서 1942년6월28일에 시작되여 이듬해인 1943년2월2일에 끝났는바 쏘련이나 독일이나 결국은 다가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것이다.    내내 승리했다는 첩보를 듣는데만 습관되였던 독일사람들을 놓고 보면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지 못하고 패함으로 하여서 여직까지의 그 습관은 타격을 받았거니와 그럼으로 하여 심리상 전변을 가져오게 되였던 것이다.    “....전패 소식이 들려오자 독일사람은 모두다가 몹시 놀랬다.”    1943년2월4일 히틀러의 선전부장이였던 괴벨스는 이같이 승인했다.    이미 작고한 영국의 좌파역사학가 에릭 홉스봄은 생전에 쓴 평론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상황을 요약해 추려봐도 빤한일이였다. 독일이 전패하리라는건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승리자였던 쏘련은 대체 어떠했는가? 전투에 대한 감상은 어떻고 운명에 대한 생각은 또 어떠했는가? 그에 대해서는 당시 이사크 이즈레위치 밍터스와 그가 책임지고 조직되였던 “애국전쟁역사위원회”가 해놓은 문자기록들을 보면 알수있는 것이다.    그들은 1941년부터 관방의 허락을 받고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면서 싸운 쏘련군인들을 채방했던 것이다. 그들의 채방에 응한 사람을 보면 병사로부터 군관에 이르기까지 전면이였는데 그 가운데는 비행사, 탕크병, 포병을 비롯하여 각 병종의 군인들이 다 있었다. 그들은 다가 자신이 전쟁에 대한 생각과 견해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는데 특히는 개인적인 경험과 느낌에 대해서 말한것이 더 많았다. .    스탈린그라드전투가 끝난지 오라지 않아서 “애국전쟁위원회”특파원들은  비밀을 엄격히 지켜줄것을 담보하고 스탈린그라드보위전에 참가했던 군인과 장병 215명을 채방했다. 한데 생각과는 다르게 채방에 응한 그들거의가 전쟁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거니와 지어는 상급의 결책을 비판하고 증오까지 하는 태도였던 것이다. 일부의 사람들은 너무나 기탄없이 솔직히 말했다. 하여 그것이 외려 모쓰크바에서 요구하는 선전기조에 맞지 않았기에 쏘공중앙은 반복적인 연구끝에 그중의 일부만을 공개하고는 그 자료들을 깔아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 1945년후부터는 되도록 영웅적인 사적들을 많이 발굴하고 쓰딸린의 영광스러운 업적을 구가하게끔 방향을 돌려잡았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 놓은 자료가 무려 5000여 건이 되였는데 그들은 그 자료들을 당안관에 처넣은채  무심해졌다. 그후 오래도록 누구도 그것을 보자고 찾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2001년에 이르어서야 미국의 뉴저지 럿거스대학에 있는 헐 베이커가 흥취를 가지고 10여년간이나 모스크바를 드나들면서 그당시 쏘련군인들의 진실한 목소리를 얼마간 골라서 두루 공개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내린 결론인즉은 “강압적인 정치고동이 그 무엇보다도 무섭거니와 따라서 효과도 컷다”는 것이였다.      헐 베이커의 노력에 의해서 “스탈린그라드협약”이라는 책이 만들어졌다. 거기에 보면 전쟁에 참가했던 전사들의 사진은 물론 그들을 방문했던 기간에 상관되는 배경과 기록들도 두루 나오는데 한마디로 종합하면 스탈린그라드전역은 “명령과 죽음”이였다는 것이다.    독일군과 쏘련군은 다가 대방을 죽이였는데 혈안이 되어 날치였는데 쏘련군에서는 지어 제 동료를 처결한건만도 적지 않았다. 당시 쏘련주둔군부대의 최고지휘관이였던 바실리추이코프 중장은 “애국전쟁역사위원회”에 향해 자기는 겁쟁이 몇을 직접 없애버렸다고 승인하면서 “나는 9월14일 그 하루만도 한 부대의 지휘관과 인민위원을 총살했고 그 다음날에는 두 개 려의 지휘관과 인민위원을 총살해서 모두 내앞에서 벌벌떨게 만들었다”고 자백했다.    지금의 자료에 보면 쏘련홍군내에서 그같이 “전쟁겁쟁이”이라 몰려서 상관의 총끝에 목숨잃은 장교만도 300명이나 된다.       “스탈린 그라드협약”에 제시된 것을 보면 쏘련군병사들은 희생을 감수했는데 “독일보다 더 끔찍했다.”고 했다. 전투를 독려하는 조치같은건 부차적이였고 부대의 사기를 높이는데는 정치선전이 제일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다고 밝히였다. 모든 중대의 정치위원들은 불철주야 공산당원은 남먼저 희생해야한다고 선전을 해서 전체를 동원시켰던 것이다. 그렇게 했길래 부상과 사망이 제일많았던 1942년8월부터 10월사이 쏘련군을 보면 당원이 원래는 2.85만명이던것이 5.35만명으로 급증한 것이다. 무엇을 표명하는가? 그것은 그들 다가 화선입당을 하고는 그 자리로 용감히 죽음을 맞으러 빗발치는 탄우속으로 뛰여들어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정위들은 틈만있으면 “당일영웅사적” 전단을 맏들어 큰 사진과 함께 알리였는데 부대내부에다 발표한건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장려받은 사람의 고향과 친구에게까지 알려주느라고 부쳐보냈던 것이다.     헬 베이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세상사람은 누구나 다 알아야하거니와 따라서 인정해야 한다, 당시 쏘련군은 최고도로 정치화 된 강대한 대오였던 것이다.”      쏘련홍군 제64집단군 보병38사 정치위원 제르· 야버그가 토로한 것을 보면 자기는 “선동가방”을 늘 몸에 지니고 참호사이를 들락날락했는데 그 가방에는 선전용 소책자와 서적외에 체커(跳棋)나 도미노골패같은 오락기구도 들어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그렇게 한 목적은 “전쟁판에 나선 병사들이 되도록 두려움을 잊게하고 정치선전으로 인하여 받게되는 괴로움을 좀이라도 덜게하자는 것이였노라했다.    규납하면 그같은 정치고동이야말로 쏘련군전사들을 내심으로부터 사상적으로 의지를 굳힐 수 있었고 싸움판에서 독일병사들보다 더 용감해지게 만든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적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이 나를 야만인으로 만들었다”    한 쏘련홍군전사가 토로한 말이다.     정치 선전의 역할이 사람을 그지경에 이르게했으니 그러한 선전을 어찌 홀시하고 등한시 할 수 있겠는가!? 정치선전을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 헐 베이커가 연구해서 도출해 낸 결론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단른 한편, 베이커가 연구하여 찾아낸 결론이라면,보통병사일수록 “애국주의”요 “숭고한 리상”이요를 적게 웨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전쟁터에서 살아 남기 위한 원시적인 욕망은 그 누구나 다 갖고있길래 적을 극도로 증오하면서 사악해졌다는 것이다.    쏘련땅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살인하고 략탈하는 것을 보고 그 누군들 분노하지 않겠는가.    “공원에 있는 나무들에다 젊은녀자와 아이들을 목을 달아매여 죽인것을 보니 나는 치가 벌벌 떨렸다.”    대령 피터샤란스키의 말이였다.    독일군은 너무도 잔인했다.    눈을 찔러 고통스레 만들어 죽이고 손톱을 뽑아 떨게 만들어 죽이고 태양혈에 못을 박아 죽이고.... 별라별 악한짓들을 다했다.    쏘독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해도 쏘련사람들은 그래도 독일사람은 문명한줄로 알았는데 그런게 라니였다. 그같이 야만스레 악하리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이 그러한즉 그들의 잔폭성에 세상이 왜 놀라지 않으랴?    포로를 심문했던 한 쏘련군관은 “그자들은 도둑질과 략탈을 일상적인 생활로 여겼다”고 기록하고는 이어서 “그러면서도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죄책감도 느끼는것 같지 않았다” 라고 적어놓았다.  침략자로서 그같은 악행만을 저지르니 쏘련군인들은 치를 떨면서 독일군을 하나라도 더 죽여버리자고 결심을 내리게 만든 것이다. 그러한즉 반성을 모르는 침략자의 그같은 역행이 결국 쏘련사람들의 격분만 더 자아내서 포로된 독일군은 고스란히 그 보복을 받게되였던 것이다.     “쏘련병사들은 다가 독일군을 하나라도 더 죽여버리자고 맹세했다”    쏘련군의 선전공작대가 제공한 자료였다.    저격수 아나톨리 체홉이 “애국전쟁력사위원회”에다 제공한 자료에서 객관인 우리는 그의 적개심으로 인한 그 한 사람의 심리변화가 어떠했는가를 알수있다.        “처음 나는 내가 하는 짓은 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다가 독일군이 우리 동포들을 학살한 것을 상기하고는 증오가 끓어올라서 한놈이라도 더 잡아치워야지 하고 가차없이 총을 쐇던 것이다. 저런 놈들은 싹 없애치워야 한다. 이 세상에 한놈도 살아남지 못하게해야 한다.”    이리하여 쏘련군저격수 체홉이 적의 대갈통을 텃쳐놓은것만도 40여명에 이르었다.    광신적인 복수는 그같이 무서운것이였다.    러시아영화《에너미 앳 더 게이트》(兵临城下)에 나오는 주인공의 원형은 독일군을 242명이나 그렇게 쏴눕힌 “쏘련영웅” 바실리인데 전투 끝에 한 그의 말을 들어봐도 전쟁으로 인한 불안과 동요는 크다는 것을 알수있다.    “지금 내 신경은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뒤흔들린다. 넌 기억해두거라, 회억은 평생 강한충격을 갖고있음을.”    그의 이 말에 전우가 한마디 보탰다.    “그때 스탈린그라드에서 보낸 다섯달은 다른곳의 오년맞잡이였다.”      70년전의 그 엄동설한에 본래는 진공위치에 놓였던 독일군이 되려 쏘련군의 포위에 들어 량식을 단지 공중으로 간신히 공급받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수량도 적었으니 포위된 독일군은 추위와 굶주림에 벌벌 떠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6군단 사령관 파울루스가 부하들을 희망이 있다고 계속 꾸준히 격려했지만 그의 그러한 격려와 선전이 엄습하는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 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포위를 뚫고 나오려했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번마다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독일군인들은 과연 운이 없었다. 죽음앞에서 독일군인들은 하나 둘 죽어갔고 죽기싫은 자들은 손을 들었다. 그래서 포로로 취급되어 시베리아의 강제 노동수용소에 끌려가는 신세로 되고 만 것이다.         1943년1월의 마지막날, 폴 러스와 그의 동료들마저 쏘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들먼저 포로된 것은 레오니드 비노쿠어였는데 그는 백화점 지하에서 발견 되었다. 공공 화장실이 그 독일 최고사령관의 은신처였던 것이다.    “내가 갔을 때 그는 누워있었는데 수염은 두 주일이나 깍지 않았는지 더부룩했고 용기란 전혀찾아 볼 수 없었다.”    “오물, 노폐물, 또 한 무더기의 무슨 물건인지 허리까지 올라오게 쌓아놓았는데 상상하기조차 어려울지경으로 더러웠다.”고 다른 한 쏘련 장교 아나톨리가 말한것이 “애국전쟁협의회”의 수집노트에 기록되여있었다.   히틀러는 저의 장교들을 잘못믿었다.    쏘련병사들은 다가 경멸하는 눈길로 독일포로들 대했던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종지부를 찍은 쏘련홍군소장 이반부울 마코프의 눈에도 쏘련홍군에 비하면 “그자들은 용기란건 전혀 없고 그저 죽을까봐 벌벌 떠는 겁쟁이”로만  돼보였던 것이다.
466    불후의 귀감 댓글:  조회:2754  추천:2  2015-05-02
  (독서수기)                                                불후의 귀감                                     ㅡ 장편력사소설 “스파르타쿠스”를 읽고서      죠완니올리의 장편력사소설 “스파르타쿠스”는 2천여년전 노예봉기의 걸출한 수령인 스파르타쿠스의 위대한 형상과 그 형상을 통한 심각한 사상으로 오늘도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스파르타쿠스는 비단 자기의 쎄라스민족을 해방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서였다는 그 투쟁목표에서 위대하였을 뿐만아니라 군사통수로서 군사지휘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구비했음에 위대하였다. 그러나 이 소설을 통하여 내가 더욱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스파르타쿠스의 위대한 영웅우로서의 참된 인격과 품성 그것인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력사상 많은 농민봉기와 기타 혁명의 지도자들이 그러했듯이 혁명승리후에는 안일한 생활에 빠져 혁명사업을 잊거나 방종한 술놀이에 팔려 정사를 잊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의 투쟁목표를 잊지 않고 엄격하게 자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는 개인의 명예를 초개같이 여겼고 더욱히는 사사로운 감정충돌을 념두에 두지 않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잘 단결하여 봉기군의 분렬을 방지함으로써 후세에 불후의 귀감을 남겨주었다.    다년간 그와 손잡고 싸워온 다른 한 수령 에노마이는 봉기군의 전략에 대한 스파르타쿠스의 참을성있는 해석도 마다하고 자기의 주견대로 로마군대와 고군분전하다가 끝내 부대를 몽땅 잃고 자기마저도 생명을  잃고만다.      스파르타쿠스는 자기의 의사에 쫓지 않은 에노마이를 미워할 대신 그와 그의 부대를 구해주려고 무진애를 썼고 에노마이가 죽은 후에도 그는 깨고소해한게 아니고 비통에 터지는 가슴을 안고 에노마이의 장례를 장중히 지내주었을 뿐만아니라 그의 유골을 자기의 천막에 보존하였다. 다른 사람의 부동한 의견을 용납하지 못하여 그와 등진다던가 지어는 그러한 사람을 원쑤로 보고 음모궤계를 써서 살해까지 하는 사람과 비하면 스파르타쿠스의 흉금은 얼마나 넓으며 그 인격, 그 품성은 또한 얼마나 고상한가!    한 영웅의 위대함은 그 어떤 권위를 수립하거나 어떤 공로의 “산”을 쌓는데 있는것보다도 우선 참된 인간으로서의 고귀한 품성과 인격을 후세에 모범이 되게 남겨주는데 있으리라. 스파르타쿠스는 위대하다. 그 위대함은 바로 그의 고귀한 품성과 인격이 오늘에도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어 고무격려해주고 채찍질해주는데 있는 것이다.             (1984. 7. 19)       
465    느낌글 2편 댓글:  조회:1782  추천:0  2015-05-02
     느낌글 2편       (1) “점심”과 “저녁”도      나는 시를 쓰다가 장편소설에 달라붙어 수년간 헤여나온 사람이다. 좌절과 실패속에서 새해의 벽두를 맞이하기를 그 몇 번. 돌이켜보면 그때마다 어려운것이였지만 또한 힘찬 전진의 발걸음이기도했다.    나의 “번개치는 아침”(장편소설, 이미 출판에 교부)이 바로 반복되는 고통속에서 씌여졌다.    “아침”이 생겼으니 “점심”과 “저녁”도 있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위해 새해에 필을 더욱 굳게 잡으련다.                                                                                              (2) 노력과 성공         레닌이 생전에 “마닐노브주의자”라는 말로써 실속없는 환상가를 비평한바 있다. 마닐로브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로씨야작가 고골리의 소설 “죽은 넋”에 나오는 한 인물로서 의지와 실행력이 없는 사람의 전형이다.    기력이 왕성한 젊은이로서 웅대한 포부는 갖고있지만 의지와 실행력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마닐노브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노력없이 성공되는 일이란 없다. 무엇이든 한가지 일을 성공하자면 몸에서 기름을 짜내고 머리에서 뇌즙을 짜내는 핍진 노력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빙산을 톺아오르는 등산대원처럼 근엄하고 완강해야한다는 거다. 실로 굳은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굳은 결심이 생기고 굳은 결심이 있는 사람에게 굳은 신심도 생기는 걷이니 모든 성공은 노력과 투쟁에서 옴을 알라!                                 1983년 1월 1일                                    
464    일기로 알게된 장개석 댓글:  조회:4432  추천:3  2015-04-21
                   일기로 알게된 장개석        대륙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후퇴한 장개석은 늘 반공대륙을 꿈꾸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기간 미국이 세 번이나 원자탄을 쓰자는 제의만은 동의하지 않았거니와 견결히 반대한 것이다.    중국인민지원군이 조선에 나가자 트루먼이 원자탄을 쓰자고 했다. 이에대해서 장개석은 1950년12월1일자 일기에다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1950년, 조선에 나간 중국인민지원군은 서부전선으로부터 공격을 발동하여 유엔군에 심중한 타격을 안기였던 것이다. 이에 미국군의 통수였던 맥아더는 “중국군대가 이미 북조선에 많이 들어왔는데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우리는 새 전쟁에 직면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해의 11월30일에 미국총통 트루먼은 기자초대회에서 “유엔군은 한국에서의 임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군사상황에 근거하여 그 어떤 필요한 절차든지 취할것이다” 라고 덧붙이였다.    이에 기자가 “그 어떤 필요한 절차란 원자탄을 포함한다”는 뜻이 아닌고 물으니 트루먼은 고개를 끄덕이고나서 “우리는 줄곧 그것을 쓸 생각을 하고있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장개석은 12월1일자 일기에다 다음과 같이 명확히 적어놓았다.        이로보아서 장개석은 미국이 원자탄을 쓰자는것을 동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막았음을 알수있는 것이다.    그 당시 장개석은 조선반도남측의 한국정부를 완전히 옹호하고 지지하는 태도였다. 하기에 그는 조선전쟁이 일어난 그 이틑날 즉 6월26일에 인차 회의를 열고는 한국에 출병 할 문제를 상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3개의 사(師)에 이르는 병력을 보내기로 하고는 3일만인 29일에는 웰링턴을 미국정부에 보내여 협상케 했던 것이다. 그는 그 후에도 여러차나 한국을 견결히 지지한다고 태도를 표시했다.      그해의 12월1일, 그는 인편에 맥아더에게 원자탄을 쓰는 문제를 다시금 고려하기를 바란다면서 만약 미국이 그것을 쓴다면 쏘련이 가만있지 않을것이니 처지가 더 불리하게 되리라는 자기의 판단을 알려준 것이다.       1954년, 북베트남이 싸움에서 이길것 같으니 미국군은 원자탄을 쓰자했다.    이에 대해서도 장개석은 4월17일자 일기에 이라 해놓고는 그 세 번째 항목에다 “미국이 수소탄과 원자탄을 베트남과 중국대륙에다 절대로 쓰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밝혀놓았다. 그것을 보면 우리는 그당시 긴박한 상황에서도 그가 미국이 원자탄을 쓰자는 것만은 동의하지 않고 반대하면서 막아나섯다는 것을 알수있는 것이다.    장개석은 그 이틑날 일기에다 “미국 태평양총부 하워드참모장을 만나기로 약속 함”이라 써놓고는 이어서 “미국은 원자탄을 사용하지 마십시오."라고 적어놓았다. 장개석이 그를 만나자는 목적이 무엇이였음을 밝힌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결속직후에 호지명(胡志明)이 령도했던 월맹(越盟)은 하노이에서 월남민주공화국(간칭“북월”)을 세웠다. 이에 프랑스는 베트남의 전체 영토를 공제하려는 야심으로 1945년9월에 전쟁을 발동했던 것이다. 한편 중국은 1950년도에 월남공산당의 요구에 응하여 서남군구의 부사령원 진경작(陈庚作)을 중공중앙대표신분으로 베트남에 보냈거니와 라귀파(罗贵波)를 단장으로 한 정치고문단과 위국청(韦国清)을 단장으로 한 군사고문단이 베트남에 주둔하면서 사업하게끔 했던 것이다.    한편 그해의 12월에 저쪽에서는 을 맺고는 미국이 대량의 프랑스군을 무장시키겼던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인민군은 1954년3월에 중국의 군사원조에 의하여 그들보다 더 우세한 병력으로 디엔비엔푸를 진공하여 프랑스 군을 1.6만이나 섬멸했거니와 프랑스 보병사령관 소장 드 틀 렘센을 포로하기까지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군은 베트남부에서 물러가려했다. 그런데 이때 미국이 개입한 것이다.    이런상황에서 내내 본토를 탈환 할 궁리를 하고있었던 장개석은 이듬해의 2월에 부참모장 펭멩지(彭孟缉)에게 "레이저우반도계획(雷州半岛方案)"을 세우게끔했다. 그 목적인즉은 국민당군대는 광동의 레이저우반도에 등륙하여 그곳을 "첫번째 교두보"로 만들자는 타산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북으로 광동, 광서를 진공하고 남녕을 위협하며 남쪽으로는 해남도를 진공함으로써 중국이 공산주의 베트남을 원조하는 채널을 차단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한데 그것이 미국의 허락과 지지를 받을지는 미지수였다.    장개석은 그같이 반공대륙꿈을 하루도 끊지 않고 그냥 꾸면서도 미국이 원자탄사용하자는 것만은 한사코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1954년10월20일자 일기에 보면 “원자탄을 거부함”이라고 써놓았다.      왕숙명(王叔铭1905-1998)은 산동 제성(诸城) 사람인데 중국공군의 창시자로서 1950년4월에 대만방공사령부사령이 되었다. 그는 미국공군과 관계가 좋았다. 하여 미국에서는 어떤일들은 그를 통하여 장개석에게 알리군했다.    대만에 쫓겨간 장개석은 그곳에다 발을 튼튼히 붙이기 전에는 반공대륙조건이 안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다. 하기에 그는 1951년 에다 다음과 같이 강조한 것이다. “준비가 되기전에는 반공을 절대안함; 자신이 충분하기전에는 반공을 절대안함; 시기가 성숙되기 전에 역시 반공을 절대안함”       장개석은 자기가 반공대륙(反攻大陆)을 하자면 우선 대만을 중립시키려고 시도하는 미국의 속박에서 벗어나야한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조선전쟁이 폭발 한 직후에 트루먼은 제7함대에 명령을 내려 대만해협을 지키게 했다. 그 목적은 중국대륙의 해군과 공군의 활동을 공제함으로써 대만해협을 “중립화(中立化)”하자는 것이였다. 미국의 그같은 결정은 대륙의 해방군이 대만을 치지 못하게 만들거니와 국민당도 반공대륙을 못하게끔하자는 것이였다.    그런데 1953년2월2일에 신임미국총통 아이젠 하워가 문득 제7함대는 대륙을 습격하는 장개석군대를 간섶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하여 마치 초롱에 같힌 신세였던 장개석은 이제는 내뜻대로 되는가봐 하면서 기뻐했다.        장개석이 반공대륙을 하자면 꼭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아야 했다. 하여 그는 1954년에 “K계획”이라는 것을 세웠는데 그것인즉은 미국으로부터 구축함6척, F86식 제트기 2대대, F84식 전투기 2대대, 여러가지 새로운 레이더 등을 얻어 자신을 튼튼히 무장하는 것이였다.    미국에 요구한 것을 보면      1, 쏘련이 중국에다 도와준 무기수량만큼;    2. 현금 5억 달러;    3. 연간 운영자금 3억 달러;    4. 경제지원 1억2만 달러;           한데 미국사람들이 기실은 장개석의 반공대륙에 그닥 흥취를 가지지 않았다. 외냐하면 그가 대륙을 되찾는다는건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대로 원조해줄리가 만무였다. 장개석의 일기를 보면 그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장개석은 1951년10월20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미국이 주기로 한 1951년도 군비 7만달러가 아직도 오지 않고있다.”    12월31일자 일기에다는    “미국이 준 무기는 이제겨우 32%밖에 안된다.”    한편 미국은 미국대로 생각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인즉 장개석이 요구한 신식 제트전투기를 줫다가는 번거롭고도 시끄러움을 가져올것 같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장개석이 과연 대륙을 쳐 전쟁을 발동한다면 미국은 기필코 전쟁에 개입 해야 할터인데 미국은 그럴 형편이 못되였던 것이다. 하기에 미국의 태도는 좀 더 두고보자는 것이였다.    1953년7월12일자 일기를 보면 장개석이 불만이 많아서 이를 악물고 썻다는 것을 알수있다.    “미국의 정책과 약속은 절대 믿을바가 못된다. 내가 이제는 더 이상 미국의 원조를 바라고 반공复国하려는 환상을 말아야겠다. 너무나 유치한 충동이였다. 이는 교훈이다. 자기의 실력이 없이 남의 협력에 의지한다면 오로지 희생만을 가져 올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954년에 이르러 장개석의 반공대륙계획에 냉담했던 미국에서 점차 전환의 기미가 나타났다. 그해의 2월에 미국은 장개석과 “대만공동방위작전회의”를 열었던 것이다.    4월에 장개석군과 미국군은 대만남쪽에서 “연합대연습”을 했다. 그런 돌연적인 행동이 있게 된 것은 14일날에 장개석이 차린 연회석에서 미국군의 고급장령 풀 육군 소장이 자기들은 장개석이 원하는 대로 “함께 어깨를 겯고 반공 대륙할 것이다”고 말했기 때문이였다.    9월3일, 해협양안에서 포병전이 발생했다. 하문의 해방군은 금문을 향해 6천발의 포를 쏘아 그곳을 불바다로 만들었거니와 미국군 고문 2명을 죽이였다.    이렇게 되자 7일에 대만의 장개석군은 보복을 하느라 해군과 공군을 출동하여 해방군포병진지를 훼멸했다.    그래놓고서는 10월 11일 장개석은 아이젠하워에게 편지를 썻다.    “만약 쏘련이 수소폭탄을 먼저쓴다면 그에 대처해 선제공격을 할 것인데  그러는 날이면 세상인심은 놀랄것이고 보복으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져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장개석은 자기의 행위로 원자탄전쟁이 일어날가봐 골머리를 않게되였다. 자기가 군대를 몰고 대륙에 오르는 날이면 쏘련에서 원자탄을 쓰자 할 것이고 그러게 되면 미국도 필경 쓸것이다. 장개석은 원자탄의 위력을 잘알고있었다. 원자탄을 쓰면서까지 대륙을 되찾아서는 뭘하는가? 자칫잘못하면 자기는 중화민족의 죄인으로 되고 말 것이다. 그야말로 만고에 씻지 못할 죄인으로 되고 말게 아닌가.     장개석은 인심을 잃고싶지 않았다. 반공대륙은 어리석은 몽상이였음을 깨달은 그는 후생을 회억속에 묻혀 자아반성으로 지내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1887年10月31日-1975年4月5日),  
463    문혁후 당내고층 간부들의 회억록열조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댓글:  조회:2626  추천:1  2015-04-16
                      문혁후 당내고층 간부들의 회억록열조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래원:북경일보. 작자:리해문(李海文ㅡ 중공중앙당사연구실 연구원)                                                                 번역글       핵심제시:“사인방”을 분쇄한 후,특히 당11계3중전회이후,우리 당은 사상을 해방하면서 실사구시하는 사상로선의 추진으로 인하여 당사연구방면에서, 특히는 문혁시기 극좌로선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궤도에서 연구하게 되었는바 당내의 고층령도중에서 회고록을 쓰는 붐을 이루었던 것이다.     20세기 80년대 대표작:리유한(李维汉)의《회억과 사고》    리유한은 모택동과 동창인바 신민학회성원이였고 근공검학으로 유학을 했다. 건당이래 중국혁명을 몸소 겪었다. 1979년, 86세의 고령에 이르어 그는 당내중요직무를 내놓고 중앙통전부고문이란 이름만 걸어놓고는 당사연구에 전력했던 것이다. 회억록의 준확성을 기하여 그는 라장룡(罗章龙)을 전국전협위원으로 배치하여 북경혁명박물관에서 사업하게끔 하여 그와 함께 력사연구자들과 여러차의 모임을 가졌거니와 중앙당교 등 단위들의 전문인원이 나서서 자기가 구술하는 것들을 상세히 정리하게끔 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온것이《회억과 사고》였다. 이 책은 회억록이면서 또한 연구자들에게 제공하는 저작으로도 되고있다.    그가 이 책을 쓰는데 세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첫째는 집체를 위주로 하면서 개인과 적당히 련계하는 것이고, 둘째는 실사구시적으로 력사의 진짜면모를 써내는 것이며, 셋째는 경험총결을 중시하는 것이였다. 그는 이 회억록에 1918년부터 1964년기간에 겪은 주요한 큰 사건들을 엮었다. 한데 리유한(李维汉)이 1984년에 병으로 불행히 돌아가는 통에 그만 계획대로 책을 다 쓰지 못한것이다. 종교와 민족사업문제에 관한 것들이다. 그가 생전에 완성한 부분만을 묶어 1986년에 라는 이름으로 출판 된 것이다.       이 책은 20세기 80년대 가장 대표성을 띈 당내 고위층 지도자의 회고록이다. 그외에 과 도 나와서 역시 전국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13차 당대회이후 당내고위층 인물들이 그같이 붐을 이룬 회억록출판은 당의 세력을 과시한것과 다름이 없다.        1,박일파(薄一波)의 《약간의 중대한 결책과 사건회고>>.    1987년 당의 13대후, 대량의 젊은이들이 당중앙의 령도직무를 맡게되자 박일파는 어깨가 가벼워졌다. 하여 그는 1988년4월부터 중앙에서 비준한대로 《약간의 중대한 결책과 사건회고>>를 쓰기시작했던 것이다. 이 책은 1949년부터 1966년기간, 1991년, 1993년으로 나눠서 상하 두권으로 나왔다.  박일파(薄一波)는 당의 8대정치국위원으로서 장기간 국무원의 부총리직에 있었다. 하였기에 그의 회고록에서 우리는 당안들을 볼수 있거니와 중요한 사실들을 많이 알수있게 된 것이다.    2、양상곤(杨尚昆)、황극성(黄克诚)、호교목(胡乔木)、리설봉(李雪峰) 등 8대중앙서기처 성원들의 회억록.    당의 8대후에 성립된 서기처에 대해서 모택동은 그것은 당중앙의 판사기구라고 강조하면서 무슨일이나 다 관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중앙의 일은 그들이 하고 중앙의 명의로 문건을 내릴수도있다”고 했다. 서기처의 지위와 작용은 그같이 중요했는바 무릇 당,정,군 각 방면에서 중앙상위에다 올리는 보고와 문건은 우선먼저 서기처에다 올려야 했다. 서기처는 일반문제들을 토론결정하며 즉시 하달하여 아래에서 그를 집행하도록해야했다.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서기처는 우선 의견을 중앙상위에 올려 토론 결정하도록해야 했다. 중앙정치국위원 다가 북경에 있는것도 아니고 지방사업을 주재하길래 중요한 회이가 아니고는 일반적으로 북경에 오지 않는 것이다. 하기에 정치국은 전체회의를 소집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하여 서기처가 많은 사업들을 하게 된 것인데 매주 회의를 3,4차 하다보니 모택동의 음성을 많이 듣으면서 집접적인 령도를 받게되었던 것이다. 지어는 중앙의 결책같은것을 정치국의 어떤 사람보다도 더 빠르게 알때가 있기도했다. 중앙서기처 서기였던 황극성대장(黄克诚大将)의 회억록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다. 황극성대장의 회억록을 보면 반성이 솔직하거니와  기개가 강경하다.      양상곤(杨尚昆)은 1995년에 회억록을 쓰기시작했는데 후에는 중앙문헌연구실 동지들의 방조를 받아 그것을 완성할 수 이었다. 그는 1998년에 서거했다. 중앙문헌출판사에서 그가 쓴 책의 이름을 라 지어 출판했다. 그 책 말고도 후에 가 또 나왔는데 그것은 1949년부터 1965년 12월까지의 일기들을 묶은것이다.  그 두책은 서로 맛물린다. 그런데 아쉽게도 “문혁”때부터 사업을 다시금 시작했던 1978년까지의 부분이 빠졌다. 근년에 소유민(苏维民)이 를 펴냈길래 그나마 유감을 덜수있게됐다. 양상곤은 1948년부터 1965년에 이르는 기간에 중앙판공청주임을 지냈고 1954년에 당중앙부비서장, 8대후에는 중앙서기처 후보서기로 있었기에 그의 회억록에는 허다한 사료들이 계시되고있는 것이다. 그의 일기는 중요한 력사문헌으로서 다가 사학연구자들의 필독서로 되고있는 것이다.         중앙서기처 서기였던 리설봉(李雪峰)의 회억문은 몇편밖에 안되지만 그는 신분이 특수함으로 하여 “문혁”초기에 쓴 두편의 회억문장은 광범위한 사학공작자들의 참고로 되고있다. 그들은 다가 그의 회억록도 출판되기를 바라고있다.     호교목(胡乔木)은 장기간 모택동의 신변에서 사업했던 사람이다. 지난 몇십년간 그는 편집과 출판을 맡아왔기에 그의 회억록은 모택동의 생평과 사상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참고작품들인 것이다.        3. 당내의 수재, 번역가들의 회억록과 자술.   1988년, 리열(李說)의 이 회억의 전례가 되어 학자들로 하여금 시스템을 작성하는 전례가 되었거니와 큰 파티가 이루어지게끔  이끈 것이다. 그의 뒤를 이어서 오랭서(吴冷西), 우광원(于光远)역시 회억록을 썼다. 에는 많은 원시적인 자료와 당안들이 채용됐다. (1), 리열이 손수 쓴 당년의 필기들. (2),호교목의 특별승인을 받고 리열이 중앙당안관에 가서 찾아 본 당안들.        1991년, 사철(师哲)이 구술하고 리해문이 정리해낸 은 당내에서 회고록번역 시스템을 구축함에 시범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리월연(李越然), 기조주(冀朝铸), 염명복(阎明复) 등이 이어서 회억문장을 쓰거나 출판한 것이다.      이미 작고한 당사대가 공육지(龚育之)는 수재, 번역가들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지도자 옆에서 업무를 본 경험있기에 그들은 지도자의 추억을 보충할 수 있었다. 지도자 혼자서는 못써내는 것의 부족점을 그들이 보충한다, 지도자들의 시각과 선비, 번역가들의 시각이 다르다. 그래서 보완이 되는 것이다.”      4. 성급령도간부, 장군이 쓴 회억록들.    성의 부급령도를 책임졌던 이들은 중앙령도와 관계가 밀접했더랬다. 그들의 회억록은 자주 전당의 큰일들과 관계된다. 례를 들면 강소성제1서기를 지냈던 강위청(江渭清)의 회고록 같은것은 1964년 류소기가 남경에 왔던 정황을 그대로 쓴 것이다. 근년에 해방군출판사에서는 수십명의 개국상장들이 회억록을 써냈다. 그들뿐이 나니라 적잖은 개국중장, 소장들도 여러방법으로 회고록들을 출판한 것이다. 지어는 쓰기 팀이 전문나와서 회억록을 만들어낸데도 있다. 그런 회억록들에서도 믿을만한 당안, 일기, 회의기록같은 원시자료들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영도자 인물 사이의 대화를 기록한 것은 적고 기록하지 않은것이 더 많았던 것이다.    역사는 대중에 의해 창조될뿐만 아니라 역사적 인물의 활동에 의해서도 창조되는데 사고 방식과 행동, 규칙과 습관은 위대한 인물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과정이다.    당내고위층인물들의 회억록, 구술력사는 당사와 국사를 연구함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마천의 가 민간수집가들에 의하여 전해진 자료인 것이다.    회억록의 가치를 알고 읽어보노라면 모르던 력사를  알게되여 좋고 배우는 점이  많아 좋다.
462    진실성과 감동 댓글:  조회:2522  추천:2  2015-04-11
             진실성과 감동               쏘련영화 “포위 된 요새의 전투”를 보고서      나는 영화보기를 좋아한다. 거의 하루 한편씩 보는데 거개가 정쟁편들이다. 그많은 정쟁편 영화들 중에서 나에게 인상이 제일깊어진 것은 방금 본 “포위 된 요새의 전투”라는 영화다. 러시아에서 2010년에 찍은것인데 제2차세계대전기간 벨라루스(白俄罗斯)에서 발생한 사건을 다루었다. 이 영화는 인간정신세계를 중심으로 인류의 삶을 위해 투쟁한 애국자들의 모습을 핍진하고도 생동하게 그렸거니와 전쟁판에서 발로된 인간정신세계를 꾸밈이 없이  그대로 적라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영화의 감독은 알렉산더 코트고 안드레 마스도, 예브게니, 세르게이, 이바노프 등이 주역으로 나온다. 방영시간이 두신간이 넘는 138분간.            나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야 비로서 여지껏 쏘련시기의 형식에만 인상이 머물러있다보니 러시아영화에 대한 견해가 너무나 편협했음을 깨닫게 되면서 배우는 점이 적잖은 것이다. 이 영화는 60년대, 80년대 로시아 수준이 아니였다. 시간이 가면서 쏘련영화도 이제는 오스카상을 겨눌만큼 국제수준에 이르었다는 것을 알게되였다.    영화에서 표현되고있는 큰 장면들을 보면 어떤것은 최고의 국제표준에 손색이 없길래 할리우드의 전쟁영화들에 비해 짝지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서양의 오스카상이 여지껏 너무나 편견이 아니였나 하면서 내 나름대로의 평가라면 아마 주요 테마와 촬영스타일에 문제가 있지 않았나 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혹시 인물형상이 정체를 희미하게 만든거나 아닌지 하는 생각이다 .    어떤 사람은 영화를 다 보고나서 머릿속에 자칫 탱크와 비행기, 포탄과 폭탄, 비발치는 탄우속에서 공포에 떨고 절망하는 사람들의 영상만 인상으로 남을 수도 있을것이다. 정녕 그렇게만 된다면 그 관람자는 이 영화의 영양분을 제대로 흡취못한 것이다.      관람자가 깨달아야 할 점은, 공포로 일관된 화면이 지속된 그 혹심한 전쟁년대에 그 당사자들이 겪은 사실은 비극만이 아닌 영웅적인 서사시였다는 그것이다. ㅡ 귀중한 목숨을 조국의 운명과 함께 건지려고 최선을 다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불요불굴의 정신, 그것이 있음으로하여 영웅성이 생기는 것이며 그것은 가장값지거니와 또한 가장 보귀하다는 것, 누구나 그것을  제대로 감득해야만이 가치가 있다고 영화는 가르치고있다.     이 영화는 제재가 전쟁영화로서의 독특한 자기의 모양을 완비하게 갖추고있다. 즉 약세한 힘으로 강한 힘을 돌파하는 전형으로 되고있는 영화인 것이다.      요근년에도 미국에서는 , 두 편을 그런 형식으로 제작해 낸 것이다. 그리고도 한국영화 와 국산패 가 나와 영화산업이 침체상태에 빠진 러시아를 뛰여넘자고 한 것이다. 그러나 쏘련의 전쟁영화는 자기의 특색을 갖고있기에 그에 맞서 비기기는 그리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거대한 자금을 넣어서 만들어 낸 러시아의 그 영화야말로  방대한 전쟁장면과 걸맞게 전쟁의 잔인함을 아주실감나게 그리여서 세상에다 떳떳이 내놓은 것이라고 본다.    그야말로 더 말할 수 없이 참혹한 전쟁장면이였다. 독일비행기의 융단식 폭격과 섬멸적인 타격, 탱크와 박격포의 엄호아래 양군이 벌린 시가전과 육박전, 뿐만 아니라 일부 아주 인상적인 전투 체이스(追逐)를 보면 할리우드 영화만 별반못지 않은 것이다.    이 영화의 특색이라면 영화전면에서 인간중심의 신앙을 발산하고있다는 그것이다. 이 영화는 필름이 다른 여늬 영화와는 완전히 다르다. 관객은 누구나 다가 영화장면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 이 영화는 그 판단을 위해서 이프닝타이틀(字幕交代) 이외에도 배경의 일부를 설명해줘서 관중으로 하여금 즉시 참혹한 전쟁이 벌어진  장소는 물론 긴장한 시간 시간들을  잘 알아두게끔하는 것이다.      나는 전에 본 과 을 새삼스레 상기하게 된다. 그러한 "문자중심"형의 전쟁드라마들은 너무나도 많고 많아 내 경우 골라 보고나서도 남는 인상이라면 그것도 그저그렇구나지만 방금본 만은 그렇지 않다. 우선 그같은 감각이 전혀나지를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사람을 전쟁기계로가 아니라 끝까지 인간이 갖고있는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는 것이 특점이라 하겠다. 나는 그것이 좋다. 영화는 이같이 개성이 독특해야한다.    이 영화를 보면 영화에 나오는 적대측 즉 나치스 독일군인들의 심리를 구체적이면서 완전히 혼탁하게 만들었지만 어색함이 저혀 보이지 않는다. 시내에 돌입한 독일군인 역시 인간이였지만도 인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야만적인 폭도로 변해 학살을 마구감행하는데 그로인하여 시체들이 쌓이고 쌓인다. 그야말로 경악할 지경의 목불인견의 참상이다. 하여 관중은 지어 영화가 아니라 참상을 진짜로 목격하는것만 같은 감각을 같게되는 것이다. 꾸미였거나 어색한것이 전혀보여지지 않는것이다. 하기에 그 어느 영화보다도 실감이 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시작되는 즉시로 부제(字幕)가 결과를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해서 이 영화가 스포일러(剧透)를 배격하는게 아니며 따라서 어색한 점도 없는 것이다. 관객은 이 영화의 이야기 끝이 실패로 끝날것이라는 것을 다 알면서도 계속보게된다. 그것은 “왜서일가?”, “어떻게돼서?”하고 원인을 캐고 알자는데 비결이 있는 것이다. 하기에 거대한 구조를 가진 이 전쟁영화는 관중을 더 흡인하고있다. 아마 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자는 것이 제작자의 목적이였던가 보다.      이 영화를 추천한다.               
461    독일군내의 조선사람들 댓글:  조회:3293  추천:3  2015-04-08
            독일군내의 조선사람들            news.ifeng.com/his... 凤凰网资讯                                          자료번역 모음                  독일군에 조선사람만이 아니라 타타르 등 아시아사람도       작전 코드 이름이   였던 노르망디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기간 연합군이 거의 삼백만에 가깝게  2870,000명이나 출동하여 영국해협을 건너 유럽의 서부전장에서 벌렸던, 인류력사상 가장 야심 찬 대규모적인 전쟁이였던 것이다. 발생시간은 1944년6월6일 아침 6시30분이였고 8월19일 세나-마른강을 건너서야 전쟁은 비로서 끝난 것이다.    해상에서는 수천수백척의 전함이 안개를 헤치면서 대안에 접근했고 공중에서는 미국의 중형폭격기와 전투기가 노르망디의 불란서 기지들을 맹렬히 폭겼했으며 독일의 “대서양벽”을 넘은 많고많은 공수부대가 락하산을 타고 공중에서 그곳에 서서히 내렸다.... 그야말로 인류력사상 기록을 올린 가장 대단한 상륙작전이였던 것이다!    올해는 연합군이 노르망디상륙 70주년이 되는데 미디어 인터뷰에서 2차세계대전기간에 노르망디 등륙전에 참가했던 용사들은 다가 말하기를 최초의 독일군인은 독일사람인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아시아 사람의 몰골이였다고 회억했다.    이는 사실이다. 독일군대가운데는 조선사람도 있고 타타르사람도 있었으며 몽골사람과 인도사람 등 아시아의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일은 력사학가들의 흥취를 자아냈던 것이다. 연구자들은 그 당시의 많은 당안들에서 그 내막을 똑똑히 알아냈다.    원래 나치독일은 노르망디에서 많은 동양사람으로 구성된 “동양군대”를 폭탄과 탄알받이로 앞에다 내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동양 캠프”건 기개가 높다던 “인도군단”이건 다가 련합군의 광란적인 포탄과 폭탄에 어쩌지 못했으니 멸망에 이른 나치의 운명을 건져낼리가 만무였던 것이다.     나치스 독일군은 쏘련을 맨처음 들이쳣을 때 쏘련군관병을 많이 포로했다. 그때까지도 나치스 독일은 “열등인종”을 자기들의 군대에 편입시켜 써먹을 궁리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1941년 겨울 모스크바까지 박두했던 독일군은 감히 들이치지 못하고 비참히 패배함으로 하여 그들의 번개식 “전격전”은 파멸되였거니와 따라서 제3제국의 "동방정책"도 개변되였던 것이다.    1942년 1월, 독일연방군은 쏘련의 소수민족중에서 자원봉사를 원하는 자들로 “동방군단”을 만들었는바 그것이 히틀러의 찬성을 받았다. 그리하여 “동방부대”가 이어서 생겨났는데 그것들을 라렬하면 “아르메니아군단” 11개, “아제르바이잔군대” 14개 대대, “그루지야군단” 14개 대대, 알제리인과 체첸인 등으로 구성된 “카프카스 이슬람 군대” 5개 대대, “투르케스탄 군단” 34 대대와 8개 대대의 “볼가 타타르군단”이였다. 1942년 8월 12일, 독일육군그룹은 그것들로 쏘련의 남쪽 칼 미크 자치공화국의 수도 옐리스타를 점령했다. 독일 장교들은 칼 미크지역에 있는 몽골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쏘련을 반대하는 선전을 하여 3000명에 이르는 칼 미크 몽고사람들을 모집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그들에 대해서 시름을 놓지 못했다. 이 부대들이 작전 할 때 반란을 하거나 역습하여 일격을 가할수도 있기때문이였다. 하여 그들은 캠프(营)를 단위로 하여 여러 독일군에다 분산시키고 만 것이다. 그래놓고 독일에서는 그것들을 통칭 “동방영”이라 불렀다.     1943년에 이르러 독일군에 98개의 “동방영”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80개 영이 동부와 발칸전쟁을 치른 것이다. 후에 12개의 캠프(营)가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전송되여 가능하게 상륙할 수 있는 련합군을 저항하고 반격하게끔 포치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 독일군 제162보병사단은 독일의 "타자(异类)"였는바 그것이 “투르케스탄사단 ”으로 명명되기도 했다. 많은 병사들이 중앙 아시아 출신이였던 것이다.      2차대전기간 독일군에서 발간한 잡지에 난 사진들을 보면 그 대부분이 황종인이였다. 그러나 그들 제162보병사는 선후하여 유고슬라비아와 이탈리아 전장에 나갔을 뿐 프랑스에는 가지 않았던 것이다.                    련합군이 노르망디에 등륙했을 때 맨먼저 교전한 것은 “동방영”    1944년6월6일의 연합군이 노르망디 등륙전, 그때 해안방어임무를 맏은것은 독일국방군 제243해안방어사(师)와 제709해안방어사(师)에 속하는 여러개의 “동방영”이였던 것이다.    그때 여러개의 “동방영”이 제709해안방어사(师)에 속하였다. 제709해안방어사를 보면 그 아래의 제739척탄병 연대에는 “동방캠프(영)”이 4개 있었는데 2개 “동방캠프(영)”는 사단장 빌헬름 폰이 직접지휘했던 것이다.    그당시 독일군의 부서를 보면 노르망디지구의 대부분을 “제2류부대”가 맡았는바 제243해안방어사의 정예부대는 경상적으로 동부 전선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련합군이 등륙한지 오라지 않아서 제7391대대 척탄병 연대역시 동부 전선으로 옮겨갔다. 그러다보니 부대주력으로 겨우남은것이 2개의 “동방영”뿐이였던 것이다. 그들은 전투경험이 부족한게 뚜렷한데다 해안방어공사를 구축할 책임까지 졌길래 몇달간 “동양 캠프”와 동일한 시간에 해안 요새를 구축 할 책임이 있다보니 고강도 노동으로 인해 “동방영”병사들의 체력은 많이 떨어졌던 것이다.    미국의 역사 학자 스티븐 앰브 로즈가 쓴 책 에 기술된 것을 보면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때 두명의 조선국적을 가진 독일군을 포로했다는 것이다. 얼마안되여 그런 포로가 20명이나 되어 심문을 받았는데 그 포로들이 원래는 다가 전에 일본군에 모집되여 일본군인이 되었다가 1939년에 폭발한, 일본과 쏘련간의 “Suno문한(诺门罕)”전투 때에 쏘련군에 포로되였다는것이다. 하여 심문해본 결과 일본국적이 아니니 일본과 쏘련간에 정전이 되자 일본인 포로는 다 일본에 돌려보냈지만 그자들과 함께 가두었던 그들 조선사람 포로만은 포로로 치지 않았고 그러다가 그들 다가 후에는 쏘련홍군에 가입한 것이라고 밝혔다.    1941년, 쏘련위국전쟁이 폭발하자 그들도 부대를 따라 전선에 나갔다. 하여 그들역시 적잖은 쏘련사람과 같이 이번에는 독일군의 포로로 되고 만 것이다. 한데 독일군의 전쟁포로영의 열악한 환경에 견뎌낼 재간이 없게되니 그들은 이번에는 또 독일군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은 1943년에 “동방영”병사로 되어 “동양 캠프(营)”의 노르망디 수비대에 나섯다가 다른사람들과 함께 련합군손에 잡혀 포로병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기구하기가 그지없는 생령들이였다!
460    새로 해석되는 히틀러 사망설 댓글:  조회:3368  추천:0  2015-04-03
        새로 해석되는 히틀러 사망설              铁血军事 > 铁血历史论坛 > 一、二战史 >                                  번역문      2차대전이 끝난지도 이제는 70년이 된다. 그기간 히틀러의 죽음은 줄곧 수수께기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신경을 가장 촉발시키는 문제다.    러시아의 "새로운사회 보도”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의 저명한 정치 평론가 아벨 바스티는 자기가 새로펴낸 라는 책에서 1945년 5월이후 아돌프 히틀러가 정부 에바 와 같이 아르헨티나에 가 여러 해 동안 은닉하다가 죽은것이라 밝혔다고 한다.           그가 라는 그 책에다 쓰기를:     1945년 7,8월간에 한 척의 독일 잠수함이 남미해역에 조용히 드러나 아르헨티나 남부의 그로스강이 바다로 흘러들고있는 한 자그마한 섬에 닿았다. 그 섬의 이름은 칼헤타 제이로스루오다. 제3제국의 두목  히틀러와 그의 정부 에바를 동반한 것이 7명넘지 않았는바 잡수함 두척이 호송임무를 맡고 그들과같이 그곳까지 간 것이다. 착륙 후 히틀러와 그의 측근들이 섬에 오르니 호송은 끝난지라 잠수함 3척은 다가 바다속에 침몰되고 만 것이다. 연구인원들은 의기설비(仪器设备)로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해안선의 30m물밑에서 독일잠수함 3척을 찾아냈는데 그것들은 조용히 모래바닥에서 자고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아르헨티나 국방부는 한번도 언급한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계속해 쓰기를:    히틀러와 에바는 칼 헤타 제이로스 루오라는 섬에 오른 후, 코르도바아래로 부에노스 아이레스, 멘도사와 라리오하 등 아르헨티나의 부분적 지방들을 려행하다가 "라 앙고스투" 라는 이름을 가진 한 장원에 들려 거기서 아주 오랫동안 있었던 것이다. 이 장원이 소문나기는 아르헨티나 기업가 Huoer안토니오에게 속한 것이라 했다. 그리고 Huoer안토니오는 그당시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준희 페론의 측근 중의 하나였는데 아호는 "라이브러리" 였다.       코르도바 지방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 마을 이름이 "Lafalida"다. 파시스트 독일의 남미 유명한 두 금융 대리인 휘트와 에이컨이 일찍부터 거기에다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에이컨의 집에는 녀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 녀종의 이름은 카타리나 멜로였다. 그녀가 바스티와 자기는 1945년에 한 자그마한 려관에서 히틀러를 보살폈노라고 말하면서 그 자그마한 려관은 에이허 리언의 재산이였다고 말했던 것이다. 카타리나 멜로는 회상하기를, 그때 사람들은 다가 히틀러를 ‘라이브러리’라 불렀다고 한다. 히틀러는 그 자그마한 려관에서 며칠을 묵고서는 ‘팬 Azucar’로 옮겨갔는데 히틀러부부는 거기 언덕 위에다 새 집을 한 채 짓고 살았다. 카타리나 멜로는 여지껏 에이컨의 편지와 라이브러리 부부지간에 오고 간 편지와 사진들을 보관하고있었다.    에이컨의 집 정원사 하나가 미국련방조사국의 파트 타임으로 FBI 일을 했는데 그 정원사가 1945년 5월후부터 에이컨 부부는 히틀러부부를 더 극진히 보살피게했노라고 말했다.                            세바스찬이 말했다. "바스티가 말하는데는 강력한 증거가있는 것이다. 히틀러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멀지 않은 마르델 플라타시에서 크로아티아 전 독재자 제이· 파벨리치를 회견하기도 한 것이다." 멜로가 실증한데 의하면 "라이브러리와  아이커 훠러언 부부간의 전화련계는 1964도까지 지속되였다는 것이다."      에바는 히틀러에게 딸 둘을 낳아주었다고 한다.                                                    [ 转自铁血社区 http://www.tiexue.net/ ] 이 글은 참고로 내놓은겁니다. 시간있으면  를 보고나름대로 사색해 보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밝혀내지 못한 수수께기가 하도 많으니,      클라라는 세 자녀를 낳고 일찍 사망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아들을 더 끔찍이 사랑했는데 그 아이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아돌프 히틀러의 부친은 이름이 알 로이스였는데 그는 Braunau국경 마을의 세관직원이였다. 그런데 그 알 로이스는 방황하는 공장 노동자와 45살나는 농촌녀인 사이에 난 사생아였다. 그리고 희틀러의 어머니 클라라는 히틀러아버지의 질녀였다. 이같이 복잡한 가정관계가 히틀러로 하여금 괴벽스런 성격을 같게 만든것이다.          제2차세계대전기간, 그는 독일군대의 최고 사령관이기도했다.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흉수는 바로 그였다는것은 온 세상사람이 공인하는바다. 2차대전 전기에 독일과 기타 추축국에서 유럽, 북부아프리카, 동아시아와 대부분의 태평양섬들을 점령했던 것이다. 그러나 1942년 이후 연합군은 반격하기 시작했고 독일은 점차 열등 순위에 떨어졌던 것이다. 1945년 독일이 패배하면서 그의 행방은 역사의 신비한 수수께끼로 되였던 것이다. 히틀러 자체가 신비한 미스터리 인물이였다. 정치 경험도 없이, 돈과 정치적 배경도 없이, 한 국가의 우두머리가 되어 세계대전을 일으킴으로하여 또한 세계를 변경하는 프로세스를 시작했으니 어쨌든 인물이라할수 밖에!  에바      
459    에세이 일본군의 갬블(2) 댓글:  조회:2035  추천:1  2015-04-02
     에세이 일본군의 갬블(2)      1차 세계 대전 후 세계의 형세를 보면 평화가 점차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추세였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관동군이 방자하게 중국의 동북을 침범함으로 하여 실상은 국내모순이 점점 격화되였던 것이다. 1921년에 아홉 개 나라대표가 미국의 워싱톤에 모여서 회의를 하고는 두가지 조약 즉 과  을 맺은바있는데 일본은 그에 따라서 군비를 대단히 축소했던 것이다.    1921년에 일본은 군비가 7.3 억 엔이였던것이 1930년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과중한 부담을 덜고 국민의 빈한한 생활수평을 골고루 높혀주자는 목적에서 군비를 1억엔 이하로 대폭적으로 줄이였으니 보면 원래의 40%밖에 안되였던 것이다. 일본 육군의 소득자금만 봐도 당초예산의 십분의 2~3밖에 되지 않았다. 례를 들면 대포와 포탄을 만들던 오사카 총공장 하나만 봐도 직공이 1.5만명이던 것을 2,500명으로 콱 줄이였으니 보면 6분의 5가 해고되였거니와 무기 생산은 매우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이같은 대규모의 무장해제는 군사 부문의 이익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은 줄곧 군사 우선의 원칙을 추구하다보니 직업군인을 많이 양성시켰던 것이다. 직업군인으로 놓고 보면 사실 싸움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전쟁을 하지 않을바에야 국가가 그 많은 군인을 그저먹여살릴수도 없잖은가, 그래서 해고를 시킨 것인데 그같은 해고가 그들에게 밥통을 잃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군인들의 상실감과 불안감이 대체 어떠했겠는가는 불보듯이 빤했다. 누구나 가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밥통잃은 군인들은 어떻게 하나 전쟁을 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했다.    관동군은 1919년에 설립되였는데 그 전신은 남맘철로수비대로서 대련에 주둔하다보니 “关东州”라는 그곳의 지명을 따서 “관동군”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9.18사변이 기실은 일본 관동군의 젊은 터키 장교(소장파)였던 이타가키, 이시하라, 도이하라 겐지 등의 무단적인 계획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였지 실상은 일본군부에서 전적으로 계획하고 일으킨 것은 아니였던 것이다.    사변이 났을 때 관동군은 병력이 2만명밖에 되지 않았기에 동북전역을 공점하기는 어려웠다. 하기에 조선에 있던 일본군을 중국의 북동에 이동해야지 그러지 않을 시에는 관동군이 배겨내기 어려울 것이였다. 일본 군부에서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다.    중국부대가 출동하지 않았으니 천만중 다행이였지....      일본수상 와카쓰키 레이지로는 사태가 더 크게 번지는 것을 막기위해 육군대신과 협상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하야시 센 주로 사령에게 병사들을 까딱움직이지 말고 명령을 기다리라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개방구만큼 여기고 듣지 않았다. 하야시 센 주로가  수상을 존중하고 그의 말을 곰상히 듣고 지시를 준수했더라면 9.18사변은 요절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야시 센 주로 역시 광신적인 군국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는 더 말할 것 없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던 3만명넘는 군대를 몰아 관동군을 도와줬으니 일본군은 실력이 오르기 마련이였다.    한편 그 사건이 벌어진 후 장개석정부는 군사적인 저항보다도 외교적인 방법으로 동북3성의 문제를 해결하려했다. 하여 중국은 그해 9월 21일에 “국제련맹”에다 기소(起訴)한 것이다. 그당시 일본은 “국제련맹”의 상임리사국(영구회원)으로서 다카쓰키 내각에서도 관동군이 동북삼성의 사태를 크게 만드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해의 9월25일에 일본대표는 “국제련맹”에서 일본정부의 태도를 아래와 같이 표명했다.    1) 일본은 중국령토에 대한 야심이 없다.    2) 일본의 군사행동은 당지의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였다.    3) 일본군은 즉각 철거 할 것이다.        그당시 일본육군대신과 총참모장은 즉시 군대를 철거하라 했다. 그러나 관동군사령부는 그 지시를 전혀 듣지 않고 1931년 10월 18일에 금주(锦州)에 있는 장학량군대를 맹렬히 들이치는 괴변으로 공공연히 맛섰던 것이다. 그때 심양에 와 있던 일본령사는 관동군의 두목들을 찾아 정부는 이 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련다고 알려줬다. 그러나 관동군 군관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거니와 심지어 군도를 빼들고  “당신은 우리들의 일을 간섭할 참인가? ” 고 하면서 그를 위협했던 것이다. 그러니 동북삼성의 위기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1931년 12월 11일, 다카쓰키 내각은 몰락하고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이 새로 성립되였다. 이누카이 쓰요시는 손중산의 친한친구였다. 그는 손중산이 일본에 망명갓을 적에 여러면으로 돌봐준 일로 하여 국민정부의 적잖은 상층인물들을 알게되였던 것이다. 하기에 그는 사인관계를 통하여 평화적인 수단으로 동북삼성의 위기를 해결하려했던 것이다.    그해의 12월 20일에 이누카이 쓰요시는 남경에다 특사를 보내여 국민정부의 고위급인물들과 회담케 했다. 그러나 총리의 그 비밀 평화회담내용이 그만 유출되는 통에(전보로 인해) 군대내에 잠복했던 격진파들의 분노를 자아내고말았다.      한가지 더있었다.    1932년3월1일, 도이하라 겐지의 계획에 따라 “만주국”이 세워져 아이신줘로 푸이가 등극했다. 하지만 이누카이 쓰요시가 권력을 잡은 일본내각은 그것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누카이 쓰요시내각은 일본 우익분자들의 분노를 더 격발시킨 것이다. 1932년 5월 15일밤, 10여명의 해군청년장교와 육군사관 견습생들이 총리관저에 침입하여 이누카이 쓰요시를 총살했다. 이 일이 력사에는 "5·15 사건"으로 기록되여 알려지고있다.    이누카이 쓰요시가 죽은 후 일본은 일반인의 내각이던것이 군사 정권의 두려움에 위축되여 제구실을 못하는 내각으로 변하고 말았다. 총 끝에 쓰러진 일본수상이 이누카이 쓰요시 하나뿐이 아니다. 일본의 재정능력으로는 군벌의 공격적인 확장야망을 충족시킬 수 없게되니 군벌과 정부사이의 모순은 격화되여 그따위 반란과 암살사건이 련이어 일어났던 것이다.    1930년 10월 14일,일본수상 하마구치 유키오가 "런던조약"에 서명하여 해군 군비를 축소하고 일본해군의 규모를 제한할것을 동의했다가 일본우익분자들이 쏜 총에 맞아 부상당했는데 상처가 세균에 감염되여 치료못하고 일년후에 끝내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1936년 일본 황도파(皇道派) 군인들이 발동했던 “2·26병변”에서 재정부장 다카하시는 군사지출을 최소로 적게하자고 했다가 “반역자”로 몰려 살해되였다. 1930부터 1937년에 이르는 사이에 일본에서는 수상 둘과 재정부장 둘이 우익의 군국주위분자들의 총에 맞아 생명을 잃은 것이다.    일본의 우익분자들은 군국주의자들로서 전쟁만이 일본이 살아나갈 길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고있다. 일본의 전쟁야심은 그같은 자들에 의하여 생기는바 그 뿌리는 깊고도 깊은것이다. 화근이다. 그런 전쟁광신자들이 살아있는 한 이 세상은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458    에세이 일본군의 갬블(1) 댓글:  조회:2374  추천:1  2015-04-01
       에세이 일본군의 갬블(1)      갬블(豪赌)이란 도박을 가리킨다.    1931년 9월 18일 22시 20분, 봉천(심양)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관동군 철로수비대는 남만철로 류조호(柳条湖) 구간의 철길을 제손으로 폭파해서 장작림이 탄 렬차를 전복하고는 엉뚱하게도 그것은 중국군대가 자기들과 전쟁을 하자고 꾸민 수작이라 걸고들면서 폭사된 이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의 군부가 있는 북대영(北大营)을 진공했다.    이때 장기간 약담배를 피운데다 상한에 걸려 북평(북경)에 가서 협화병원에 입원하여 치료중이던 장학량은 제 처와 함께 전문(前门)밖에 있는 극장에서 매란방(梅兰芳)이 공연하는 경극 우주봉(宇宙锋)을 구경하고있었던 것이다.    그날은 토요일이였다     당시 북대영을 지킨 최고지휘관은 동북군 제7려 참모장 조진반 대령(赵镇藩上校)이였는데 그는 일본군이 쏘는 총소리를 듣자 긴급히 동북군참모장 영진(荣臻)을 찾아 보고하는 한편 그와 대책을 연구했다. 영진(荣臻)은 료녕성주석 장식의(臧式毅)와 같이 긴급히 장학량에게 상황을 알리였던것이다.      한편 급전을 받은 장학량은 “일본정부가 관동군을 공제하겠지”, “사태가 더 커지지 말아야겠는데” 하면서 장개석이 엿새전인 9월 12일에 석가장(石家庄)에서 “오로지 국제련합에 제출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 일율로 저항하지 말라”고 한 지시에 따라서 영진(荣臻)에게 전보로 “ 련합국의 평화목적을 존중하기 위해서 충돌을 피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북대영을 지키고있었던 6,800명 군대가 일본군 500명에게 패주를 하는 꼴이 되고말았다. 량군의 충돌에서 일본군은 22명이 죽었으나 동북군인은 10배도 넘는 320명의 죽음을 내면서 쫓기웠던 것이다.      1931년 9월 19일 새벽 6시30분에 북대영이 함락되고 따라서 봉천이 함락되고말았다. 려순에 있었던 일본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 중장은 소속 부대에다 진격하여 점령하라 명령을 내렸거니와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 중장에게 제발 증원 부대를 속히 보내여 원조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지 않은 일본 관동군은 불과 12시간밖에 안되는짭은 사이에 선후로 심양, 단동, 영구, 무순, 해성, 료양, 본계, 사평 등 남만철로와 안봉철로연선의 18개 성진(城镇)을 먹어버린것이다.    그 다음날 장춘이 함락되였는바 동북주둔군 길림성 부사령장관공서 참모장인 희흡(熙洽)은 21일에 지어 부대를 거느리고 적에게 투항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틑날에는 료녕, 길림 두 성이 적들의 손에 함락되고말았다. 일본군으로 놓고 보면 그것은 그야말로 력사에 있어본적이 없는 희한한 대승리로 사시(史詩)를 엮어가는 승승장구였다.     10월초에 관동군은 흑룡강성을 진공하기 시작했는데 이쪽에서는 수비대의 일부가 또 적에게 투항하고말았다. 그래도 성정부의 대리주석 겸 군사총지휘였던 마점산(马占山)은 1만명에 이르는 자기 부대를 지휘하여 맛서 싸웠다. 그러다가 힘이 안되겠으니 11월 18일에 그만 치치하얼을 내놓고 만 것이다.      일본군은 흑룡강성의 주요한 도시들을 공점하고나서 료서지구(辽西地区)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932년1월3일에 금주를 함락했고, 그 뒤를 이어서 2월5일에는 할빈마저 함락했다. 일본군은 이같이 4개월 18일밖에 안되는 짧디짭은 기간에 동북3성 100만 평방km를 벼락같이 점령했으니 그 면적은 일본본토의3배나 되는 것이였다.    그야말로 세인을 놀래우는 대승(大勝)이였다. 그것은 그들 일본의 침략사에서 창조한 대단히 휘황한 기록이 되였거니와 후대들에게 보여준 그야말로 멋스런 자랑이면서 따라서 본보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관동군이 벌린 한차례의 시합갬블(一场豪赌) 즉 굉장한 도박이였던 것이다. 일본은 그 도박에서 이겼길래 사기가 구중천에 올랐지만 중국은 무능을 드러내면서 치욕을 당하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얌전하다고 세상사람이 우러러보았던가?!      사변이 일어나던 그때 동북3성에 널려있은 일본군을 보면 다해봤자 두 개의 사퇀(師團)에다 6개 려단 모두해서 1.04만명의 병력에다 재향군인 즉 퇴오군인이 1만명, 경찰 3000명까지 합해봤자 모두해서 2.34만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당시의 형편을 보면 그들이 지원받을 수있는 것이란 조선에 있는 2개의 사퇀(師團)이였으니 그 인원까지 합쳐도 3만명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비해 중국은 어떠했는가?           그당시 동북에는 20만이넘는 중국군대가 있었는데 17개의 보병려에다 기병려 3개와 1개사에 이르는 보병이 4개성 1개 구에 나뉘여서 수비를 했던 것이다. 그밖에도 평진(平津)일대에는 또 동북군 11만이 있었으니 증원하면서 그 즉시로 대적했더라면 적수(敵手)를 얼마든지 물리치고 쫓아버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변이 일어나던 그날 밤부터 적수(敵手)에게 당하기만 했던 북대영의 동북군 독립제7려는 동북에 있는 군대치고는 전투력이 제일강한 려였다. 그렇건만 어떻게 됐는가? 저항을 포기했으니 무슨 꼴이 되었는가!?.....    중국은 심양에 있는 무기창고의 무기를 몽땅잃었거니와 항공기 260대, 중포와 야포 250문, 야포알 10만개, 포탄 40만발, 박격포 600문, 박격포알 40만발을 잃었다. 그리고도 보총 15만자루, 탄알 300만발이나 적의 손에 빼앗긴 것이다. 후에 일본군은 프랑스제 를 사용했는데 그 땅크는 심양에서 마점산부대의 것을 빼앗은 것이였다. 이듬해인 1932년 상해 128 Songhu 캠페인(淞沪抗战)때 일본군이 사용한 비행기도 역시 동북군손에서 빼앗은 것이였다.    일본은 무기가 많게되니 그것을 갖고 자기들의 본토에서 징병을 했던 것이다. 중국이 바로 일본을 무장시켜줫다고 봐야겠다. 중국은 만약 그 무기들을 잃지 않고 그것으로 1~2개월내에 일본군과 맛서 싸웠더라면 어떠했을가?  중국은 일본군을 얼마든지 제 섬나라로 쫓아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를 않았으니 양호우환(養虎憂患)이 되고 만 것이다.      9.18사변직전에 동북군장령 황현성(黄显声)은 총 20만자루를 비밀리에 각 현에다 나눠준적이 있는데 항일의용군과 항일련군은 바로 그 총을 손에 잡고 싸움에 나섯던 것이다.    그런데 웃머리들은 무슨 형국(形局)이였던가? 9.18사변이 나던 그 날, 동북육군 감독장 장학량은 베이징에서 제부인을 데리고 연극구경을 했고 중국의 최고사령관이라는 장개석은 30만 대규모의 병사를 휘동하여 제3차 홍군근거지를 포위토벌을 하느라고 영수호(永绥号) 군함을 타고 난징에서 쟝시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집안부터 평정하고나서 왜적을 물리친다”는 제 신조에 따른 행동이였던 것이다. 동북군의 웃머리들 중 마점산(马占山)같이 그의 그 신조의 부당성(不當性)을 인식한 사람이 몇 명 만 더 있었어도 천리강산을 일본에다 공손히 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5만에 이르는 동북군이 적군에  항복했고 15만의 병력은 산해관쪽으로가버리다보니 5만의 일본군은 마치도 무인지경에 들어선것 같이 동북전장을 휩쓴게 아닌가!.       국민당정부의 그같은 부저항정책이 결국은 전국인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애국적인 학생들은 난징정부의 외교부를 들부시였다. 외교부 장관 왕정정(王正廷)은 학생들의 손에 얻어밪기까지 했다. 한편 상해의 80만 노동자들은 대표를 남경에 파견하여 청원했다. 그리고 각 성의 대도시들에서는 로동자, 학생들이 련달아 항일시위를 활발히 벌렸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그 기세를 한사코 내리눌렀던 것이다. 1931년 10월 5일 광저우 군경은 지어 청원을 온 학생과 민중을 향해서 총을 쏴 10명이 그 당장에서 죽었다. 그리고 12월 1일에는 남경에서 항일민중 30여명이 맞아서 몸이 상했거니와 180여명이나 경찰에 붙잡히는 일이 발생했던것이다.    외세(外勢)에는 어쩌지 못하면서 국민탄압에는 그같이 용기를 부렸으니 민중이 어찌 분노하지 않으랴?    그야말로 내우외환(內憂外患 )에 떨고있는 비참한 중국이였다!
457    동녕요새(东宁要塞) 댓글:  조회:2496  추천:0  2015-03-31
  동녕요새(东宁要塞)        내가 북경에 와서 아침단련을 하면서 친하게 사귀게 된, 나이가 나와 동갑이거니와  나처럼 내내 중학교 어문교원을 지내다가 정년퇴직을 한 한족친구 로조(老趙)는 동녕사람이다. 나는 5년전 9월달에 그가 거기에 사는 제 형의 손녀가 산동으로 시집을 가는데 나보고 바람도 씌울겸 꼭 같이가보자는 것이였다. 이걸 어쩌면 좋다? 나는 망설이다가 그가 어쩌다 믿고 하는 청인데 밀막아버릴 수도 없어서 그러면 동무하자고 나섯던 것이다.    나는 그 걸음에 로조와 함께 하루 품을 들여 동녕요새에 가보고 돌아왔다. 이 글은 거기서 얻은 자료에 근거하여 쓴다.           목단강시와 가까운 동녕현성 경내에 있는 동녕요새(东宁要塞)는 일본침략자가 주로 쏘련의 진공을 막기위해 구축한 군사요새인 것이다. 북쪽의 수양진(绥阳镇)에서부터 시작해서 염왕전(阎王殿) 까지, 남쪽으로는 100킬로미터의 감하자(甘河子)에까지 이르고있는데 그 넓은 면적에 분포된 17개의 요새들은 다가 종합적인 규모를 갖춘 최대의 군사요새인 것이다. 일본관동군은 그 요새들을 “1급의 국경진지”라 하기도 하고 “영구성적인 북만요새”라 하기도 했으며 “동방마지노방선”이라 자랑하기도 했다.      1933년 1월, 일본관동군은 동녕에 침입하자마자 그같이 동녕을 저희들의 계획대로 쏘련을 방어하기도 하고 진공하기도 하는 군사기지로 만들었는데 거기에 있는 군사시설로는 대두천(大肚川)병기공장 1개, 각종의 창고 400개, 육군병원4개, 발전창 1개, 군용비행장10개, 지하요새 10개나있었다. 그리고 400km에 달하는  철길에 1957km에 달하는 군용도로가 있었다.      승홍산요새(胜洪山要塞)、훈산요새(勛山要塞)、삼각산요새(三角山要塞)、마달산요새(麻达山要塞)、조일산요새(朝日山要塞)、출환산요새(出丸山要塞)、북천산요새(北天山要塞), 409고지(高地) 등의 지하요새들에는 엘리베이터(升降井)가 있고 다양한 병사 룸(各种兵室)이 있었으며 안티 바이러스 문(防毒门)이 있고 총방(炮室), 지휘소(指挥所), 벤트(通气孔), 부엌칸(灶事间), 창고(仓库), 꾸러미 밴드(包带所)등 시설들이 갖추어졌다. 그리고 여러 객실과 복도는 다가 시멘트로 꾸미였다. 쏘련을 상대하여 만들어진 이러한 시설중에서 어떤것은 매우컷다. 전체요새들이 상중하 세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제일 긴 것은 거리가 80m나 되었다. 지상의 트래픽 채널(交通通道)이 산과 산을 통하였고 굴과 굴을 구비구비 이어놓았는데 어떤것은 지면부대가 모이는 캠프장(营地)과 련결되기도 했다.    훈산요새는(勋山要塞)는 동녕경내에 있는 요새들 가운데서 제일 완정하게 보존되고있는 곳으로서 그것역시 산세에 따라서 만들어졌는바 총면적이 236,000m2인데 길이가 163m나 되는 한 룸(房间)은 면적이 446m2된다. 그 요새에는 지휘소만도 21칸이고 병실, 탄약고, 연못, 펌핑방(泵房) 등이 다 갖추어져 있다. 상, 중, 하 세층으로 되었는데 사통팔달이다. 큰방은 면적이 300m2에 달한다.      일제는 이런 사통팔달한 군사요새들을 리용하여 동북에 대한 통치를 가강히 하는 한편 쏘련을 방어하고 진공 할 작정이였던 것이다. 동북에 있는 전 군사요새와 요새사이는 다가 전용철도와 전용자동차길로 서로연결이 되였는바 일본침략자가 만들어놓은 그것이 세계대전력사에서 손을 꼽을만한 놀라운 군사방어시설로 되고있는 것이다.     동녕요새는 2차세계대전때의 제일마지막 격전을 치룬 전쟁터이거니와 일본침략군이 중국인민을 야만적으로 잔해한 철증으로도 되고있는 것이다.    동녕요새가 지금은 국가 AAAA 수준의 관광지로 되었거니와 그 지방의 청소년들을 국방교육, 애국교육을 하는 훌륭한 장소로도 되고있는 것이다.  
456    호두요새(虎头要塞) 댓글:  조회:2440  추천:0  2015-03-29
       호두요새(虎头要塞)      1986년도 여름의 일이니 이제는 지난지가 어언 20년이 된다. 그해의 여름에 목단강군구의 김강사령의 제의에 의하여 우리 흑룡강성과 연변의 작가 몇은 변강고찰단 팀을 무어갖고 흥개호반의 당벽진 변방초소를 비롯하여  중쏘변경인 우쑤강연안의 호두(虎头)를 돌아본적이 있다. 나는 그때의 감정으로 변방초소를 지키는 병사들의 고충을 념려하는 단편소설 한편을 써냈을 뿐이다.    그것으로는 보답이 모자라기에 나는 미안스러운 감이 언제나 늘 자리틀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더구나 그 걸음에 호두에 들리기는 했어도 만보고  는 보지 않고 무심히 지났는데 후에야 호두(虎头)의 그곳은 그저 스쳐 지나버릴 곳이 아니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후회되거니와 그 어떤 빛을 진것만 같아 두 어깨가 무거워졌던 것이다.     나는 돌아와서 호두(虎头)를 늘 잊지 않았다. 그러다 이제와서야 나는 드디여 믿음성 확연한 자료를 찾아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호두요새(虎头要塞)는 일제가 동북의 중쏘련변경에다 만들어놓은 군사방어기지로서 벌리미사(勃利密塞)와 마찬가지로 일본군국자들이 남겨놓은 뚜렸한 침략죄증의 하나로 되는 것이다. 그것은 흑룡강성 호림현 호두진(今虎林市虎头)에 있는데 주변은 완달산 언덕인바 서쪽은 화석산(火石山)이고 동쪽은 우수리강으로서 쏘련의 도시 이만(伊曼)과 마주하고있다. 남쪽은 련자산(连子山)이 이어붙고 북쪽은 호북산(虎北山)이 이어붙었다. 중심구역의 면적을 보면 넓이 12키로미터에 길이가 6키로미터가량이다. 수십 킬로미터 반경의 범위내에 십여개의 크고 작은 요새들이 있는데 그 중 맹호산이 주요 진지인 것이다. 그 주위는 늪이여서 지나기 어려운 자연장벽과도 같은 것이다. 여러개의 같잖은 이름을 가진 진지들 중에서 호랑이진지라 부르는 진지가 하나 있은데 북방국경 수비대 본부가 바로 그곳에다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진지는 우수리강과 거리가 약 2,000m밖에 안된다. 그 맹호산을 중심으로 해서 만들어진 지하요새들을 보면 지휘소, 통신 룸, 병사 휴게실, 주방, 욕조, 식량창고, 탄약고, 발전소 등이 다 갖추져 있다. 그리고 거기는 통풍구로 쓰이는 수직통로를 통해 전망대에 오르고 반격구로 통할수도 있게끔 만들어 진 것이였다.      일본관동군이 호두요새를 만든 목적이 쏘련의 진공을 영원히 막아보자는데서였다. 이곳은 쏘련극동의 우쑤리철도목이여서 그들이 동북으로 쳐들어올시 꼭 경과해야 할 곳이기도하다. 그리하여 일본은 이곳을 매우중요시하고 강력한 화력을 갖춘 북방요새로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1939년3월에 관동군은 제4국경수비대를 내왔던바 그 수비대는 3개의 대대를 관할했다. 5섯개의 포병중대, 1개의 공병중대를 갖고 있었다. 그런후에도 병력이 증가되면서 편제를 수차나 바꾼 것이다. 초기의 사령관은 이름이 가카이베이라는 소장이였는데 그가 통솔한 것은 1개 여단의 병력 8000명이였다. 그렇던것이 후에는 각 요새마다 1개 퇀의 병력이 12,000명에 이르면서 변화가 생겼던 것이다. 각 요새마다 30cm곡사포 2문, 24cm곡사포 2문씩 갖추었고 구경이 15cm인 대포6문씩 배치되였던 것이다. 서쪽에 있는 호소산 남쪽과 동쪽 호랑이산에다는 구경이 10cm인 곡사포 8문을 배치했다. 그 외에도 호두요새에다 고사포 18문과 고사기관총 10정으로 요새의 공중방어를 준비했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였다. 그들은 무거운 대포의 힘을 강화하느라 도쿄만 요새에 있었던 해안 방어 거포인 구경이 40센티미터나 되는 유탄포를 운송하여다 호두요새의 산기슭에다 따로 든든히 앉히여 대포진을 구축했던 것이다. 그 대포는 포신의 길이만도 20미터나 뒤였는데 사정거리는 20킬로미터에 달했다. 포탄의 길이가 4미터에 직경이 40CM, 포알만도 길이가 1.2M나 되였는데 최대의 충전 용량은 1,000kg에 달했던 것이다. 그런 포알을 포 하나에 포탄 200발을 배비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굉장히 큰 대포였다. 그런 대포를 철근콩크리트를 다지여 만든 반지하의 포탑에다 앉히였는데 포구가 시종 남동쪽 쏘련의 이만(伊曼)을 겨냥했다.  철교와  물탑을 향해 시시탐탐 노리였던 것이다.    일본관동군은 분포범위가 넓거니와 규모가 대단히 큰 이 요새 즉, 저들의 말로  동방마지노라는 방선을 구축하느라 수억원의 자금을 처넣었거니와 10만에 이르는 중국사람 쿠리와 포로들을 6년간(1934年开工 1939年完工)이나 혹사한 것이다.  한데 그들은 공정이 끝남과 함께 한사람도 살아남지 않고 전부살해되고 말았다. 죽은자의 백골더미가 산을 이루었다니 그 참상이 가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더 말해 무엇하랴.    요전날 나는 북경의 낡은 서적들을 파는 "공부자서점"에 들렸다가 일본군인 테츠오 오카자키가 쓴《일쏘호두결전비록(日苏虎头决战秘录)》이라는 책이 있길래 그것을 사갖고와서 봤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는 것이다.    “소화18년(1943년)의 어느 하루 요새시설이 대개완료되였길래 노무자들을 맹호산기슭 우묵진 곳에 집중시켜놓고 완공주연을 차렸는데 음식을 먹던중 갑자기 중기관총이 불을 토하기 시작했다. 찰나, 연회장은 살벌한 도살장으로 변해 사방에 코를 찌르는 피 냄새가 났고 시체가 산적했다.”    10만에 이르는 사람을 학살했던 장면이였다.      1945년8월9일, 쏘련원동 제1방면군이 호두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일본군 수비대는 견고한 보루를 믿고 완강하게 덤벼들었다. 그러하였기에 쏘련군은 격전 26일만에야 마침내 호두요새를 요행 점령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 1400여명과 요새주변에 있었던 수백명의 일본개척단 인원과 군속 53명이 목숨이 겨우붙어 도망쳐 살고는 그 나머지는 다가 전쟁부장품으로되고 만 것이다.       여기가 지금은 애국교양기지 로되고있다.  
455    벌리메사(勃利密塞) 댓글:  조회:2353  추천:1  2015-03-28
  벌리메사(勃利密塞)       지금 벌리(勃利)에 있는 메사(密塞)는 동녕요새, 호두요새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동북에다 만들어놓은 중요한 군사시설이다. 그것은 벌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6리가량 들어가 삼림속에 있는데 그 면적은 47.4여 평방km, 1940년좌우에 건설 된 것이다.      벌리메사(密塞)는 중국의 동북에 남아있는 일본침략자의 중요한 공군 창고로서 동북과 화북전쟁터에다 폭탄을 비롯한 각종의 항공기재와 탄약을 공급했던 것이다. 벌리(勃利) 동쪽에 있는 비행장을 비롯하여 그 주위의 호조(互助), 영광(荣光), 길흥(吉兴), 쌍하(双河) 다섯 개의 군용비행장을 일제는 “동방마지노방선”의 제2선이라 했는데 그것은 제1선과 마찬가지로 일제가 동북을 영원히 점령하고 군사물자를 공급하려고 작정했던 중요한 군사물자기지였던 것이다.     그 메사(密塞)에는 산굴창고가 14개 있는데 굴마다가 너비 8메터에 길이가 80여메터에 달한다. 전선줄이 있고 배수구(排水沟), 통풍시설들이 잘되여있다. 이러한 동굴창고를 주위를 돌아가면서 "야생 라이브러리(野库)"라 부르는 시멘트 방갈로(平房)가 있는데 그것들은 다가 수림속에 은페되여 있다. 게다가 가로세로 여러갈래로 뻣어 혼란스런 미후루(迷糊路)가 있어서 자칫하면 방향을 잃기가 십상이다. 그리고 그 메사(密塞) 주위는 돌아가면서 그리드(电网)를 쳐놓았거니와 망루와 탐조등들이 있다. 산과 초목들이 지금도 원시상태여서 메사(密塞)들을 잘 감춰주고있다.       나는 벌리(勃利)의 그 메사(密塞)를 친히 가본것이 두 번이다. 첫 번은  1946년 여름이니 “8.15광복”이듬해고 두 번째는 15년전인 2000년도 여름인 것이다.    광복이듬해에 나는 나이가 일곱 살이였는데 그때 한창 토비숙청을 하고 있었던 합강성정부의 조선사람 600여명으로 구성된 동북민주련군ㅡ 동철부대가 벌리(勃利)에 주둔했던 것이다.    그해의 여름 어느날이였다. 김동철(내 이모부 김의철의 형. 항일간부)의 아들이자 나이가 내보다 열살이나 우인, 지금 조선에 있는 김용준이가 나보고 정거장 저기 서북쪽산에 가면 일본놈들이 버리고 간 창고가 있다는데 자기와 함께 가보지 않겠는가고 든장질을 하는 것이였다. 그래서 그를 형님이라 불렀던 내또래의 철부지 셋이 좋아라고 그를 따라나섯던 것이다. 그리니 동행자는 모두해서 넷이였다.    그날 신도 신지 않고 맨발이였던 나는 정거장을 건너 먼지많은 길을 가면서 작난을 치다가 그만 돌부리를 차놓은 통에 오른쪽 엄지발톱이 빠지고 말았다. 고통스럽기가 그지없었다. 그것이 추억과 더불어 지금까지도 내 몸에다 남긴 기념인 것이다.    그날 정거장을 벗어나 얼마가량 더 들어가니 그 철길은 서뿍쪽으로 뻗어있었다. 우리 넷은 그 철길을 따라 그냥갓다. 그랬더니 산속에 이르러 그 철길은 남쪽으로 꺽끼였는데 플래트홈에 온통 탄알깎지 천지였다. 보태는 소리 아니다. 그야말로 한 벌 깔렷던 것이다. 그리고 콩크리트로 되어진 둔덕의  몇군데에다는 폭탄을 쌓아놓은 무지들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저마끔 욕심나는 것을 골랐다.    나는 박격포 알을 하나 안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돌아오자 김해정 참모장이 내 꼴을 보더니 이건 어디서 주어왔느냐 하면서 너 이놈아색끼가 정신나가지 않았냐,  왜 써거지고 싶어서 이러냐 하면서 그 자리에서 빼앗아 똥물창에다 던졌던 것이다. (김동철과 극친한 항일간부였고 나의 이름을 지은 분. 나는 그이를 큰아버지라 불렀다.)       그해의 봄에 벌리 시내안에서 한 미런한 중국사람이 폭탄속에 밀납이 한층 발려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것을 끄집어내여 쓰려 생각하고 그곳에 가 폭탄을 안아다 집안에서 해부했는데 그놈의 것이 터지는 통에 집이 날아나고 다섯식솔이 그 자리에서 폭사를 한 참사가 있었던 것이다.    김용준은 분명 그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동해 철부지인 우리들을 데리고 그날 그리로 갔던것이다.    나의 두번째 장편소설 제2부 37절에 소설의 주인공이 일본경찰에 잡혀 끌려가 그 미사를 만들던 환경이 그려져 있다. 내가 그때 친히 본 것을 회상하면서 쓴 것이다.       벌리 메사(密塞)는 바로 그대로 력사의 견증으로 되고있다. 침략자는 그 어떠한 궤변으로서도 사실을 감추지 못한다. 이런 철증앞에서도 그래 현존 아베총리는 그냥 “침략의 정의가 정해진 것은 아니다”는 따위의 말을 입으로 그냥 번질건가? 총리이기 전에 우선 체면을 잃지 않는 허심한 사람이 되어야 옳을 건만 왜서?....   
454    피해자를 위한 기념의 날(3) 댓글:  조회:2130  추천:0  2015-03-27
        남경대도살 피해자 국가공공기념행사에서 한 강화              시진핑총서기 중요연설(全文)                     시진핑      동포들, 동지들, 벗들!    오늘 우리는 여기서 남경대도살 피해자 국가공공기념행사를 성대하게 함으로서 지난날 남경대도살에서 생명을 잃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생각하고 잔인한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살해된 모든 동포들을 생각하며,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승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친 혁명선렬과 민족영웅들을 생각하고 평화와  발전의 길로 변함없이 나아가는 중국인민의 숭고한 원망을 표달하며, 중국인민은 역사를 기억하고 있음을 선언하고, 지난날을 잊지 않으며, 평화를 소중히여기면서 미래를 열어가는 견정한 립장을 보여주자고 합니다.      1937년 7월 7일, 일본침략자들이 방자하게 침략전쟁을 발동함으로 하여 중국인민들은 전례없는 재난을 겪었는바 중국의 도시와 농촌들은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하여 어디에나 연기였습니다. 중국인민의 생령은 유린당해 고통이 심했던바 피로 물든 중국땅 그 어디에나 굶주림으로 인한 시체가 널렷던 것입니다.      1937년12월13일,침화일본군은 야만스레 남경에 침입하여 매우 비극적인 남경대도살참안을 빚어냈던 것입니다. 30만의 우리 동포들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그자들은 수많은 여성들을 유린했거니와 셀수도 없는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건물은 1/3이나 파괴되었고 다수의 재산이 약탈되였던 것입니다. 일본침략자가 저지른 그 비인간적인 학살참안은 제2차세계대전력사에서는 “3대참안”의 하나로 기록되고있습니다. 그것은 소름끼치는 끔찍한 범죄였던바 인류의 역사에서 그야말로 형용키 어렵게 매우 어두운 장면이였던 것입니다.      정말 감동되는 것은 그런때에, 남경 대학살 그 참혹한 나날에 우리 겨레는 서로 감시해 주고 비상시에는 상호 협조하면서 대처한 그것입니다. 많은 외국 친구들도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가지 방식으로 난징민중을 보호했거니와 일본 침략자의 만행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런이들 중에서도 독일의 욘 라베, 덴마크의 베인 핼 스나이더 버그, 미국의 존 매기 등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인도적인 정신과 두려움을 모르는 의거에 대해서 중국인민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 침략자가 저지른 남경대학살 참사는 세계의 모든 양심있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승리 후, 원동군사법정과 중국군사법정에서는 한무리의 전쟁범들을 심판했습니다. 남경대도살참안에 대해서 조사했던바 그로부터 내린 결론은 그들은 다가 중국사람의 피로 두손을 적셨다는 그것이였습니다. 하기에 그자들은 법률에 따라 정의의 심판을 받은것입니다. 그자들은 치욕의 역사를 영원히 못으로 박아놓은 것입니다    력사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개변되는 것이 아니거니와 사실역시 교묘하게 발뺌한다고 사라지는게 아닌것입니다. 남경대학살 참사는 증거가 확실해서 움직일 수도 왜곡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남경대학살 참사를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역사가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30만의 무고한 수난자들의 령혼이 동의하지 않고, 13억중국인민이 동의하지 않고,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동포들, 동지들, 벗들!    중화인민과 중화민족은 예로부터 폭압에 굴하지 않았거니와 용감하게 모든 적을 압도함으로서 영웅적인 기개를 보였던 것입니다. 위대한 애국주의 정신을 가진 중국 인민은 극히 야만적이고도 지극히 잔학한 일본침략자들과 굴하지 않고 맛서서 싸웠습니다. 항일구국에서 필승의 신념을 굳히였던 것입니다.    중국 공산당의 호소와 이끔에 따라서 전민족의 각종 적극적인 력량들은 일치한 행동으로 한데 뭉치였던바 적개심을 품은 중화의 아들딸들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뒤를 이어가면서 외적의 침입을 막아 영용히 싸웠던 것입니다. .    8년간의 어렵고도 힘든 혈전에서 중국은 3500만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였으니 그야말로 침중한 대가를 치른것입니다. 생명을 다바쳐, 붉은 피를 흘리면서 일본침략자들을 물리쳤으므로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은 승리했으니 그것은 또한 세계의 반파시스전쟁승리에 중대한 공헌으로도 되는 것이였습니다.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승리, 외래 침략을 물리친 중화민족의 그 불요굴의 저항은 장려한 서사시로 되었는바 그것은 근대이후 외국의 침략을 반복적으로 받은 치욕을 씻었거니와 국가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대단히 향상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중국인민이 중국공산당의 지도아래 새로운 민족 부흥을 실현시키는 올바른 길을 창조함에도 중요한 조건을 마련한 것으로도 되였던 것입니다.      동포들, 동지들, 벗들!    자고로 평화라는 것은 인류가 지속적으로 바라는 열망인 것입니다. 평화는 마치도 습기를 머금은 보슬비같고 만물을 자래우는 따스한 해빛과도 같은 것입니다.     평화안정하면 인류는 자신의 꿈을 이룰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평화를 이룩하고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있습니다. 오직 사람마다 평화를 아끼고 평화를 지키며 사람마다 다가 전쟁의 침통한 교훈을 명심한다면 평화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남경대학살 희생자를 위해 공공기념행사를 거행하는 것은 선량한 사람들에게 평화적인 이념을 불러일으키자는 것이지 원한을 지속시키자는것은 아닌것입니다. 중일 양국의 국민은 반드시 대대로 우호적으로지내야 합니다. 역사에서 학습하고 미래를 향해 공동히 평화에 기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력사를 잊으면 배반이라했습니다. 죄책을 부인하는 것은 죄행을 다시범하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우리는 어느 한 민족가운데서 소수의 군국주의자가 전쟁을 일으킨 것을 갖고 그 민족 전부를 적대시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전쟁의 죄책은 전쟁을 일으킨 소수의 군국주의분자에게 있지 인민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어느때나 침략자가 범한 죄행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침략전쟁력사를 무시하는 태도, 일체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언론, 얼마를 말했던 간에, 소리를 아무리 높이 질렀던간에, 침략 태도와 력사를 무시하는 모든 것, 침략 전쟁성질을 미화하는 모든 언론은 아무리 여러번했던간에 그것은 다가 인류의 평화와 정의에 해로운 것입니다. 그같은 착오적인 언행에 대해서는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가 경계하고 견결히 반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포들, 동지들, 벗들!    “의심스러운 자면 지난때를 조사하고, 면목모를 자면 지난날을 알아보고, 어디서 오는지 모를 자면 떠난 곳을 알아보라” 했거늘 근대이후 100년넘는 기간에 중국인민은 전쟁의 시련을 수없이 겪었기에 평화가 귀중함을 더 알게 된 것입니다. 약육강식이 인류가 공존하는 길이 아니고 군국주의 평화는 인간 미터(计)가 아닌것입니다. 평화이지 전쟁이 아니고 협력이지 대항이 아닌 이것이 바로 인류사회가 진보하는 영원한 주제인 것입니다.    유리는 남경대도살 희생자를 위한 국가추모를 장엄히 하고있습니다。우리가 이 동상 삼각대를 세우는 것은 이 일을 세계가 명백하게 알게끔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평화를 위한 소원을 기원합시다. 앞이 환하거니 후세가 두려울것이 무엇이랴!   용인법사 벡터 에베소서는 평화를 위한 소원을 기원합니다    지금 이순간, 우리는 난징 대학살에 목숨을 잃은 모든 불행한 동료의 령혼을 위로하고 있있습니다. 일본 侵华전쟁 중에 불행을 당한 모든 동포를 안위하기위함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근대 이래 외래 침략을 반격하는 가운데서 용감하게 희생한 동포들의 령혼을 안위하고 있습니다. 민족독립을 쟁취하기위해서 희생한 령혼에, 인민의 해방과 국가의 부강을 위해 희생한 령혼에, 국민의 행복을 위한 투쟁속에서 용감히 헌신한 동포들의 령혼에, 국민의 행복을 위한 위대한 투쟁 속에서 용감히 헌신한 동포 여러분의 령혼에 묵도를 드립시다.      근대이래 외래침략자들을 항격하여 영용히 싸우다 희생된 동포들이여!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다 희생된, 인민의 해방과 국가의 부강을 위해 싸우다 희생된, 인민의 행복을 위한 위대한 투쟁에 영용히 헌신한 동포들이여!     오늘 중국은 이미 위대한 국가의 위대한 국민의 평화로운 삶을 방어하는 강한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화 민족은 그 어떠한 사람도 다시는 유린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중국은, 이미 국민의 평화로운 삶을 보호하고 방어 할 수있는 강력한 능력을 갖춘 강대한 국가로 되었기에 말입니다.    왕따에서 고통스럽던 시대는 이미 다 사라져 오늘의 중국은 다시는 그같은 유린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중국사람은 과연 정력적입니다. 중국의 특성과 사회주의길을 따라,“이백년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기 위해서, 중국 꿈을 위해서 분투하고있습니다.    중화 민족 의 발전 전망이 매우 밝습니다.      바로 이런 형세하에 중국은 오늘 국제사회에 장엄히 선언한다:    오늘의 중국은 세계 평화를 단호하게 창도하는 유력한 챔피언(捍卫者)으로 되었다, 중국 국민들은 인류의 평화와 발전, 숭고한 사업을 항상 유지할 것이다. 각국 국민은 진심으로 단결하자!    건설을 위해 함께,    항구한 평화와 번영하는 세상을 위해 함께,     손을 잡고 열심히!               (2014녀12월13일,오전)                                                                    원문번역    
453    피해자를 위한 기념의 날(2) 댓글:  조회:1867  추천:0  2015-03-25
               피해자를 위한 기념의 날(2)                폴란드의 “카틴사건 피해자 기념일”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은 번개같이 폴란드의 서부를 레이드(突袭)하였다. 반달후 을 맺자 쏘련군대는 동쪽에서 폴란드를 쳐들어가 동부지구를 용이하게 점령하고는 23만명에 이르는 군경, 관원과 장교와  여러 신분의 사람들을 체포했던 것이다.      1941년 6월 독일이 쏘련에 진입한 후 1943년 봄에 이르러 독일은 스몰렌스크부근의 철로를 수리하다가 숱한 군관과 사병과 기타의 사람들이 매장된 무덤과 굴을 발견했던 것이다. 독일군이 발견한 그 관병은 폴란드사람들이였다. 그런데 법의의 검정을 거친결과 매장된 장교와 군인들의 머리에는 다가 총구멍이 나있었던 것이다. 21,857人,      독일은 즉시 “국제위원회”에서 조직을 구성하여 조사해줄것을 촉구했다. 하여 “국제위원회”에서는 조사해보았는데 그들이 내린 결론인즉은 수천만의 폴란드 사람들이 쏘련사람손에 잡혀 집체학살을 당했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쏘련측에서는 그 즉시로 그런일이 절대없다 이건 순전히 피고인 독일이 우리를 해치느라 피우는 수작이다고 별명했다. 쏘련은 독일이 1941년에 그 지방을 점령했을 때 한 짓이였다고 하면서 독일은 이따위의 선전으로 쏘련과 서방의 관계를 와해시킬 궁리를 한다고 반격했던 것이다.    영국과 미국은 2차대전기간에 쏘련의 그 성명에 다른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런던으로 간 폴란드 망명정부가 그 즉시에 이 문제를 들고나오면서 국제당국에서 철저히 조사해줄것을 강경히 요구했던 것이다.    쏘련은 폴란드 망명정부가 이같이 자기의 태도를 표명한 10일후에 그 정부와 공식적으로 관계를 끊어버리고말았다. 그런데 1990년4월, 그당시 폴란드의 대통령이였던 쟈루제얼스키(Jaruzelski)가 쏘련을 방문했는데 쏘련측 관방통신인 TASS(塔斯社)사가 처음으로 그 일을 정식으로 승인하면서 폴란드에다 당안(档案)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하여 카틴사건은 “쓰딸린주의의 엄중한 죄행”이였다는 것이 만천하에 다 드러나고 만 것이다.      그 경로를 보면 이러하다. 사건에 관한 대부분의 비밀 아카이브는 그당시 공개하지 않고있다가 1992년 10월,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특사를 보내여 국립 문서보관소 소장이였던 큐레이터 루돌프 • 파이 Huoya를 방문하여 폴란드수도 바르샤바에 가서 폴란드 레흐바웬사 대통령께 모든 비밀파일의 사본을 넘겨주게했다. 그제야 비로서 카틴사건의 진면모가 세상에 다 드러나게되였던 것이다.    당안자료에 확인된바 그당시 쏘련군인의 손에 살해된것이 폴란드군인뿐만이 아니였다. 그 속에는 정치가도 있고 과학가도 있거니와 허다한 공정사, 작가, 예술가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다가 폴란드의 엘리트였다.    폴란드에서는 2007년에 해마다 4월 13일을 “카틴피해자의 날”로 정하고 기념하고있다.       영화를 추천한다                 일본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原爆”纪念日“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해마다 8월 6일과 9일이면 원자탄에 수난당한 영혼에 기도하는 것으로써 세계평화를 갈망하는 의식을 거행한다.    히로시마의 평화기념의식이 생기기는 1947년이였는데 당시 일본은 련합군이 점령하고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50년에 조선전쟁이 일어났고 련합군총사령(GHQ)는 일본은 원자탄수난자의 제를 못지낸다고 암력을 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해마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히로시마 원폭사망자 평화기념식”을 거행하고있다. 1971년부터 시작하여 일본내각총리대신 역시  그 기념식 행사에 나서고있다. 시장은 해마다 핵무기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다. 그러면서 세계의 영구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서 “히로시마의 마음”이라는 강화를 선언문으로 삼아 세상에 널어놓고있다.       나가사키의 평화기념행사는 1948년에 련합군총사령(GHQ)의 허락을 받고 시작한 것이다. 그곳의 시장도 히로시마 시장처럼 그때가 되면 수난자에게 묵도하고나서 평화선언 강화를 하군한다.    2013년, 나가사키 원폭기념일 강화를 례로 들면 그해에 그의 평화선언은 제목이 “현장으로 돌아가서”였는데 그는 “핵탄폭발은 세계의 기대에 위반된다”면서 “이제는 핵무기 사용상태를 알고 싶다”고 했다. 나가사키 증인이자  반핵운동을 견지해온 야마구치는도 행사에서 연설을 했던 것이다.    의식에는 5800여명이 참가했는데 그속에 인도 등 44개 국가의 대표도 들어있었다. 그번의 의식에서 그 전해에 사망한 증인 3404명을 포함해서 원자탄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자가 이제는 16만 2083명이 된다고 밝혔다.    때문에 그 사망된 피해자 동포들을 기리는 “国家公祭日”을 국가 공공기념일로 설정해 앞으로는 세계적인 범위내에서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기념일로 하자는 것이다.            뉴스 링크
452    피해자를 위한 기념의 날(1) 댓글:  조회:2244  추천:0  2015-03-25
          피해자를 위한 기념의 날(1)        제2차세계대전기간, 나치 독일은 반체제 인사의 구현을 억제하기위해서 인종차별정책을 실시했는바 국내와 자기들이 점령한 나라에다 1000여개에 이르는 집중영을 설치하고서는 수백만에 이르는 무고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잔인하게 살해했던 것이다. 하여 인류력사상 가장 암흑한 기록을 남긴 것이다.    아우슈비츠집중영은 나치 독일이 2차세계대전기간에 구축한 가장 큰 집중영으로서 폴란드 남부에 위치한 아우슈비츠도시 근처에 있었다.     나치 독일은 거기에다 수백만을 수감했는데 그중에서 110만명을 학살했던 것이다. 그 대부분이 유태인이였다. 하여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공장"이라는 대명사로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1945년 1월 27일, 쏘련홍군이 아우슈비츠집중영을 해방했다.    아우슈비츠의 고통스러운 교훈을 명심하기 위해서, 인류의 역사상 가장 어두운 기록을 잊지 않기 위해서, 독일, 영국, 이탈리아를 비롯한 많은 국가들에서 대학살 피해자 기념일을 먼저 제정한 것이다.      2005년 11월1일, 제60세션(届) 유엔총회본회의는 104개국이 매년 1월 27일을 "국제 홀로코스트 현충일(国际大屠杀纪念日)"로 하자고 제출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것이다. 결의가 통과 된 후 련합국사무총장은 세계는 이 특별한 날을 잊지 않음으로써 악의로 충만된 홀로코스트(大屠杀)를 상기하고 사람마다 력사를 잊지 않고 명심하게끔 함으로서 그같은 비극이 다시는 세상에 발생하지 않도록하기 위해서라 했다.    2007년1월,제61세션(届) 유엔총회본회의 때에 아난(安南)총장은 세계의 모든 국가들에서 후대가 종족학살죄행이 어떤것이였는가를 알도록 교육하기 위해서는 나치수용소내의 대학살 사이트(大屠杀遗址)를 보존해야 한다면서 그 어떠한 수작으로나 나치의 대학살력사를 부정하는 것은 량심없는 짓이라 비난했던 것이다.    련합국에서는 1월27일을 “국제대도살기념일”로 정했다.    따라서 세계 여러나라들에서 각기 대학살기념관을 세우거나 기념일을 정한것이다.    중국은 12기전국인대상무위원회 제7차 회의때 “전국인대상위위원회의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기념일결정초안” 뿐만아니라 “전국인대상무위위원회의 남경대도살수난자 국가공제일의 결정초안”을 심의통과하였다. 그리하여 해마다 남경대도살이 감행되였던 12월 13일은 국제공제일로 된 것이다. 이 문제는 국제관행에 부합된다.    국제련합에서 정해놓은 “국제대도살기념일”의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에서의 “이스라엘 대학살기념일”      1939년부터 1945년사이 600만에 이르는 유태인이 나치에 의해 살해되였는데 지금의 이스라엘국가 전체 인구와 거의 동일한 셈이다. 2차대전이 끝나서 약 25만 홀로코스트(大屠杀) 생존자가 이스라엘에 와서 자리잡았던 것이다.    홀로코스트(大屠杀) 피해자를 기념하기 위해 이스라엘에서는 유태력으로 닛산 27일(양력4월말 혹은 5월초)을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현충일”로 정했다. 하여 해마다 이날이 되면 이스라엘의 600만에 이르는 국민은 다가 독일나치스 손에 무참히 살해된 동포의 령혼에 묵도를 드리면서 나치의 전쟁을 성토하는 것이다.    그 기념일은 1959년도에 법으로 정식 규정한 것인데 현충일 전날부터 이틑날 밤까지 전국의 모든 오락장소는 물론 레스토랑, 커피숍들도 다가 문을 닫고 영업을 중지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다양한 기념 활동을 개최하는데 홀로코스트 기념관(大屠杀纪念馆)에 가서 할 때가 많은것이다. 기념 그날 이스라엘은 반기를 두리우고 10시가 되면 일제히 1분간 사이렌소리를 울린다. 그리고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프로그램은 다가 기념상황을 보도하는 것이다.    이제는 세월이 지난지도 오라다. 하기에 이스라엘의 유대인중에서 지금은 학살을 목격한이가 몇이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력사는 그들에게 영원히 고통을 안겨 줄 것이다. 미래 세대의 교육을 위하여, 그들에게 자기의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시키기 위하여 이스라엘은 2005년 3월에 대학살기념물인 박물관을 새로세운것이다. 엔지니어(工程师)들은 삼각형으로 설계된 건물을 지하에다 앉히였는데 3분의 1은 산을 통하고 공중에 매달리다보니 지상에있는 좁다란 첨탑 강화유리를 표면에 드러낼 뿐이다. 자연의 빛은 여기로 밖에 들어오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에 내리는 햇빛이 "음침한" 박물관에 매핑(映射)하니 어둠과 얼음 죽음의 수용소 분위기를 만들어주고있다. 설계가 독특한 것이다.    한 기념기증자인 캐나다의 유대인 노인 글래스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학살을 영원히 잊지 않을것이다. 후대의 앞날을 위해서 우리는 응당 회억할줄을 알아야 한다!”                           얼뜨기 나치스의 용감성   국제 홀로코스트 현충일(国际大屠杀纪念日)에 새 나치분자 한녀석이 나치 경례를 하면서 멋을 부렸다가 체포됐다.    1월 27일은 연합국에서 결정한 “국제 홀로코스트 현충일(国际大屠杀纪念日)”이다. 독일, 폴란드, 벨기에 등 유럽 국가들에서 그날 분분히 나치에 살해된 수난자들에게 애도를 드렸다. 그러면서 비극이 다시발생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새로 나타나는 나치에 대해서는 강경한 조치를 취하고있었던 것이다.      특히 독일을 놓고보면 더더욱 특별한 날이여서 이날을 빼놓지 않고 명심해서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독일은 새나치의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날 약 200명에 이르는 우익분자들이 시위를 별렸고 그중 한 자는 그렇게 팔을 올려 희틀러식의 나치경례를 했다가 당장에서 체포된 것이다.               폴란드는 구출해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1월 27일, 역시 쏘련홍군이 아우슈비츠 세트 집중영을 해방한 그 기념날이였다. 그날 아우슈비츠 세트집중영밖의 일부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지역 주민들이 폴란드 대통령 레흐카친스키의 편지를 듣고왔다. 대통령 보좌관이 2차 세계 대전기간 나치 수용소의 포로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걸었던 수용소 부근마을주민 40명에게 메달을 수여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유럽 의회 Pote 린 역시 “국제 홀로코스트 현충일”을 맞이하여 대학살이 절대반복되지 않게해야한다고 호소했다. 세계는 홀로코스트(대학살)를 부인하는것을 맹렬히 비난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지어 홀로코스트 부인발언은 범죄라고 발표했다. 독일 정부는 또한 새로운 EU 규정의 채택을 추진하고 있다                                            奥斯维辛集中营正门                                                                          国际大屠杀纪念日活动国际大屠杀纪念日活动                                          뉴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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